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엮음, 황석영 기록 / 풀빛 / 198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공부모임 100회 특집 ’내 인생의 책’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읽은 두 번째 책이다. 이 책 역시 처음 출판 즉시 ’판매금지’되었고 나는 대학교 1학년 시절인 1985년 책이 발간된 해에 읽었다. 당시 기억을 떠올려보면 책 형식이 아니라 자료집으로 읽었던 것 같다. 교정에서는 518 민중항쟁에 대한 사진전이 학생회관을 비롯한 교내 곳곳에서 진행되었고 수 많은 대자보가 학생회관 벽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이미 각 대학가에서는 광주 학살의 실체와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성격과 의미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대자보에는 1학년 학생들과 다른 학생들을 위해 광주학살의 책임자를 ’5적’, 즉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준병, 이희성(혹은 주한미군,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워컴을 지칭했음)으로 규정했다. 미국은 유엔사령관이자 주한미군사령과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하고 20사단을 광주에 투입하는 것을 용인, 허가한 것 때문에 이미 선배들로부터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의 원흉이자 배후조종으로 규탄되고 있었다.
 
광주항쟁에 대한 자료는 학교 내에서 선배로부터 전달받았음에도 우리는 강의실이나 아크로폴리스 광장이 아닌 비공개 지역에서 읽어야 했다. 당시 교정에는 사복경찰과 안기부(지금의 국가정보원), 프락치가 상당수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자료집을 도서관 1층 열람실에 숨어 읽었다. 광주학살에 대한 전후 배경과 공수부대 및 20사단의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은 내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20년 동안 살아오면서 내 머리 속에 굳어진 국가, 군대, 정부, 정의, 양심, 자유, 평등, 헌법, 법치주의 등 모든 개념이 무너졌다. 이미 3월부터 교정의 각종 대자보와 유인물로 인하여 어느정보 고정관념이 깨었고 역사, 철학, 사회, 근현대사, 민중 등에 대해 어렴풋하게 의식하기 시작한 나에게 ’광주학살’은 명확하고 분명하게 진실을 깨닫게 하였다. 
 
우리 부모 세대들이 죽을 때까지 일제와 625 전쟁에 대한 잔상과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광주항쟁’은 나에게, 우리 세대에게 씻을 수 없는 분명한 생각과 의식을 각인시켰다. 광주시민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살인마들이 이 땅에 버젓이 살아있고 권력을 누리는 한 나와 우리 세대들에게 대학도, 평온한 삶도, 공부도, 꿈도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가슴 속에 티끌만치라도 양심과 인간성이 살아있다면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현실과 체제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렇게 이 책은 내게 다가왔고 ’광주’는 내 마음 속에 자리잡았고 그 이후의 모든 세계관과 생각과 행동의 준거틀로 자리잡게 되었다.
 
--------------------- * 황석영(黃晳暎)은 누구인가? --------------------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고교 재학 중 단편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한일회담반대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 일용직 노동자를 따라 전국의 공사판을 떠돈다. 공사판과 오징어잡이배, 빵공장 등에서 일하며 떠돌다가 승려가 되기 위해 입산, 행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해병대에 입대,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이때의 체험을 담은 단편소설 [탑]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다시 문학으로 돌아온다. 이후 그는 [객지]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등을 차례로 발표하면서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특히 1974년부터 1984년까지 한국일보에 연재한 [장길산]은 지금까지도 한국 민중의 정신사를 탁월한 역사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9년 방북 후 독일 미국 등지에서 체류했으며 1993년 귀국하여 방북사건으로 5년여를 복역하고 1998년 석방되었다. 이후 장편 [오래된 정원] [손님][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를 발표하며 불꽃 같은 창작열을 보여주고 있다.
[무기의 그늘]로 만해문학상을, [오래된 정원]으로 단재상과 이산문학상을, [손님]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중국, 일본, 대만,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장길산] [오래된 정원] [객지][무기의 그늘][한씨연대기][삼포 가는 길] 등이 번역 출간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객지][가객][삼포 가는 길][한씨연대기][무기의 그늘][장길산][오래된 정원][손님][모랫말 아이들][심청, 연꽃의 길][바리데기]등이 있다. ---------------------------

1부. [밀려드는 역사의 파도]
1. [역량의 성숙]과 2. [민중항쟁의 발단]에는 1979년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를 사살한 이후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정치군인들이 군사쿠테타를 일으키는 사건에서부터 518 광주항쟁의 직접적인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1980년 들어 민주화와 민간정부 수립에 대한 국민적인 요구가 드높은 가운데 최규하 과도정부가 정치일정을 제시하지 못하고 이에 따라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집회와 시위의 현상을 기록했다. 그리고 전남 민주화운동권과 광주 학생운동 세력의 성격을 정리한다. 민주화 운동이 정점에 다다르던 5월 14일부터 15~17일 동안 서울 지역의 시위현황과 광주시만의 독특한 시위 모습을 정의한다.


2부. [피와 눈물의 5일간]
3. [산발적이고 수동적인 저항]에는 5월 17일, 18일 양일간 전두환 쿠테타 세력이 권력의 주도권을 쥔 이후 전국에 확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화려한 휴가’로 명명된 공수부대를 광주시 전역에 투입하여 광주지역 대학생들의 집회와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학살하는 모습을 기록했다.
4. [적극적 공세로의 전환]에는 5월 19일부터 공수부대는 총기를 난사하기 시작했고 광주시의 항쟁의 중심이 학생운동에서 민중봉기로 진화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어용언론과 제도언론은 광주시의 참상과 진실을 함구하고 왜곡했다. 광주의 시위는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방어망을 구축하고 시민군이 사방에서 공격하는 형태를 보인다.
5. [전면적인 민중항쟁]에는 5월 20일부터 광주시 전체 민중의 전면적인 항쟁을 다룬다. 택시 부대가 등장하고 광주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자동소총에 짱돌과 몽둥이로 대적했다.
6. [무장투쟁과 승리의 쟁취]에는 5월 21일 차량 시위가 이어지고 시위대의 지도부와 계엄군간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총기를 든 시민군의 등장이 나타난다. 시민군은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와 차량을 징발하여 계엄군과의 전투에 동원했다. 오후부터는 광주시를 빠져나간 시위대가 전남의 소도시 지역으로 시위를 확대하면서 영광, 무안, 화순, 강진, 장흥 등지에서 소총을 들고 시내에 진입했다. 급기야 계엄군은 전남 도청에서 전술적으로 퇴각한다.



















3부. [광주여! 광주여! 광주여!]
7. [해방기간 1]에는 5월 22일 해방 첫 날의 모습을 기록했다. 대학생들과 지역 유력자들 중심으로 수습위원회가 구성되고 도청 앞 광장에서는 민중들 중심으로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도청 지휘체계는 처음부터 총기 수거와 협상 여부에 따라 혼란과 분열을 거듭한다.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발동하여 전두환이 광주시를 무력진압하는 것을 동의한다.
8. [해방기간 2]에는 5월 23일의 광주를 기록했다. 광주시 외곽을 차단한 계엄군과 시민군을 전투를 계속한다. 광주시를 빠져나가려는 시위대와 광주시 외곽으로 나갔다고 광주시로 들어오는 시위대는 계엄군에게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한다. 수습위원회는 협상과 투항의 갈림길에서 분열되고 숨은 지도부에 의해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된다.
9. [해방기간 3]에는 5월 24일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의 모습과 학생 수습대책위원회의 분열을 기록했다. 항쟁기간 동안 광주시는 범죄율과 사건사고가 대폭 줄어들었다.
10. [해방기간 4]에는 5월 25일 벌어진 계엄군 스파이에 의한 독침 사건을 고발한다. 재야 민주인사들의 모임과 청년지도부가 도청 상황실을 장악한다.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하여 본격적인 항쟁지도부가 탄생한다.
11. [해방기간 5]에는 5월 26일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의 모습과 항쟁지도부의 활동, 계엄군의 전략과 공작을 기록했다.
12. [항쟁이 확산]에는 5월 18일 이후 목포, 함평, 무안, 나주, 영산포, 영암, 강진, 장흥, 해남, 화순지역으로 어떻게 시위가 확산되었으며, 각 지역에서 어떻게 시위와 항쟁이 진행되었는지 기록한다.










 
4부. [마지막, 그리고 새로운 시작]
13. [항쟁의 완성]에는 5월 27일 마지막 투쟁을 준비하는 도청 상황실의 모습을 기록했다.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항쟁지도부와 시민군의 결연한 의지와 이야기를 담았다. 그리고 27일 새벽 최후의 항전을 기록했다.
14. [끝나지 않은 투쟁]에는 5월 27일 항전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과 새로운 연대, 그 후의 사건들을 기록했다.
부록에는 부상자 명단과 구속자 명단을 담았다.



처음 이 책을 도서관에 숨어서 읽어을 때에는 장면 하나하나, 목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보이고 들리는 듯 했다. 방망이로 머리가 깨지는 장면, 대검으로 쑤시는 장면, 발가벗겨서 트럭에 집어던지는 장면, 안타까워 하는 얼굴과 분노하는 표정, 전옥주씨의 목소리... 5월 17일 장면부터 시작하여 5월 19~20일에 살해되는 대학생과 직장인, 여학생, 시민들의 모습은 결국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를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한참 눈물을 흘린 뒤 이를 악물고 마지막까지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 언젠가 외국 기자가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학생회관에서 상영하여 본 적이 있었고 1989년에는 광주항쟁을 다룬 장산곶매의 [오! 꿈의 나라]를 학생들이 함께 보기 위해 대학마다 대대적으로 경찰들과 싸웠다. 2007년 영화화된 [화려한 휴가](감독 김지훈, 주연 김상경, 안성기, 이요원, 이준기)를 볼 때에도 아련한 기억이 여전했다.
 
이제는 내 나이 사십대 후반에 접어든 탓인지 26년 만에 읽으니 대학교 1학년 시절과 같은 감정이 복받치거나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광주항쟁에 대한 광주시민의 상징이던 고 김대중 전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절차적인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2011년 현재 민주주의는 다시 위기를 맞이했는데...
 
이 땅에서 다시는 광주와 같은 비극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광주를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다시는 일제와 같은 군사적 제국주의에 이 땅이 짓밟히지 않기 위해 31운동과 반일투쟁, 독립투사를 기억하고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광주에서 벌어진 일,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대가 정치군인이나 잘못된 정치인을 만나면 국민을 살해할 수 있다는 교훈,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미국에게 주어진 서글픈 현실, 광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총을 들고 일어선 광주민중들의 고귀한 의지와 넋... 이 모든 것들은 대대손손 기억하고 되새기고 다짐해야만이 미래가 불안하거나 비극적이지 않고 희망에 가득할 것이다.
 
* 책의 집필 등에 대한 논란의 진상 : 주간지 [신동아]의 2010년 12월호 기사로 인해 올해 초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대한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인터넷 언론사인 [광주인
http://gwangjuin.com]의 1월 3일 기사를 옮겨 놓았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집필과 경위

2011년 01월 03일 (월) 17:02:26 전용호 문화활동가 475story@naver.com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집필과 출판 경위 
월간 <신동아> 2010년 12월호의 의도(?)는 무엇?

1980년 5·18항쟁의 실상을 다룬 최초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출간과 관련하여 집필자인 황석영 작가에 관한 월간 <신동아> 2010년 12월호의 기사 등의 내용을 반박하며 실제 당시의 출판 경위를 밝힌다.

필자 전용호는 1980년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으로 5·18항쟁에 ‘투사회보’ 제작자로 참여하여 투옥되었으며 현재는 5·18항쟁 국가유공자로 광주에서 살고 있다. 전용호는 1980년대 초반, 광주·전남기독청년회, ‘일과 놀이 문화운동기획실’, ‘민중문화연구회’등의 조직에서 상임 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자료수집 등 활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책의 집필과 제작경위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다.



   
▲ 책 표지.
아래 글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황석영 작가의 집필 경위와 관련하여 2010년 월간<신동아> 12월호가 인용한 2009년 5월 19일자 <오마이뉴스> 기사다.

“황석영은 그동안 1980년 5월 광주항쟁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풀빛)라는 책을 쓴 작가로 널리 알려졌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이 책을 쓴 작가가 황석영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이 글은 광주시민 전체가 저자인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당시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기자이자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소속인 이재의 기자가 쓰고 상황지도는 조양훈이 그렸다는 구체적 반박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다.

1980년 5월 현장에서 수없이 밤을 보낸 김아무개 시인은 ‘그 책이 황석영 기록이라고 되어 있지만 1980년 5월 그날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갈 때 황석영은 광주에 없었다’라며 ‘그가 광주의 아들이라고? 1980년 5월 그날 광주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황석영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뒤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황석영은 이에 대한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왜 ‘황석영 기록’이란 이름을 넣어야 했는지, 그 책의 인세를 왜 자신이 가져갔는지, 왜 이 책의 지은이라고 약력에 버젓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는지. 광주와 전남지역에 있는 문화예술인과 1980년 오월 그 자리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쉬쉬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황석영 스스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위 기사의 내용은 대부분 잘못되어 있다. 가장 잘못된 대목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을 왜 황석영이 마지막 작업을 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또한 인세를 황석영이 가져갔다고 허위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대목도 그렇다. 그리고 정리 작업을 맡았던 이재의도 당시에는 대학 제적생 신분이었으며 훨씬 나중인 1990년대 이후에 광주일보 기자를 역임했다.

위 기사는 내용도 조잡하지만 기사 작성의 의도도 매우 불순한 것으로 보인다. 정론지라고 불리는 오마이뉴스에서 왜 이런 기사를 내보냈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1980년 5월 현장에서 수없이 밤을 보낸 김아무개 시인은, --(중략)--- 1980년 5월 그날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갈 때 황석영은 광주에 없었다’라며 ‘그가 광주의 아들이라고?, --(중략)--- 1980년 5월 그날 광주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황석영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광주와 전남지역에 있는 문화예술인과 1980년 오월 그 자리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쉬쉬하고 있었지만”

위와 같이 비난과 비방투의 기사는 매우 비겁하고 유치하면서도 졸렬하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집필과 출판 경위를 밝힌다.

5·18항쟁이 발발한 후 참혹하고 처절했던 항쟁의 진상을 낱낱이 기록하여 온 국민에게 밝혀야 한다는 생각을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항쟁의 현장인 광주에서 모든 참상을 몸으로 겪고 낱낱이 지켜보았던 광주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소위 ‘5·18항쟁백서’를 기록하고자 했다.

그 중 항쟁 관련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을 실행하고자 했던 당시 광주지역 그룹은 크게 세 갈래였다. 그 그룹의 대표적인 운동가를 꼽아보자면 첫째는 1979년 광주에 설립된 현대문화연구소 정용화 소장(당시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장)이다. 둘째는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1980년 8월 이후 출옥한 조봉훈 이다. 셋째는 전남대학 출신 민주화 운동가인 이재의, 조양훈 이었다.

현대문화연구소는 ‘민청학련’ 사건 출신 운동가 윤한봉이 지역 재야인사와 민주화운동가들의 총의를 모아 1979년 설립한 연구소로 광주·전남권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센터 역할을 했다. 연구소는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후원자들을 조직하여 감옥에 갇힌 민주인사들의 옥바라지와 시국 강연회 등 계몽문화운동을 펼쳤다.


   
▲ 소설가 황석영씨가 지난 2008년 10월 8일 전남대 세계한상문화연구단 초청으로 교육공학관에서 ’나의 근작에 대하여’를 주제로 강연하는 모습. ⓒ광주인
정보과 형사들은 현대문화연구소 전화를 도청하고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을 파악하는 등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1979년 11월 윤한봉과 김희택의 뒤를 이어 정용화가 소장이 되었다. 5·18항쟁이 발발하자 정용화는 피신하였으나 체포되어 구속되었다가 비교적 일찍(1980년 11월) 형집행정지(형면제?)로 출감했다. 5·18항쟁 이후 정용화는 광주권 재야인사와 민주화운동가들의 유일한 소통 역할을 하고 있었다.

둘째는 조봉훈의 활동이다. 조봉훈은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약칭,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980년 8월 이후 출옥하였다. 조봉훈은 10여명의 청년들이 모여 시나 소설을 읽고 공부하던 문학서클 ‘아들’의 회원들과 함께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고 5·18항쟁의 진상규명을 주장하는 유인물을 여러 차례 만들어 광주시내에 배포하였다. 그러나 1981년 6월 30일경 그 중의 한명이 잡히면서 모두 검거되고 말았다. 그 때 서울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수배되어 광주에서 도피하고 있던 소준섭(외국어대 78학번)도 조봉훈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당시 조봉훈 도 5·18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셋째는 이재의 등의 활동이다. 이재의는 5·18항쟁 이후인 1980년 9월 경 전남대학에서 유인물 배포와 관련하여 구속되어 형기를 마쳤다. 이재의는 ‘5·18항쟁백서’ 작업이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주장하며 개별적으로 자료를 모으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5·18백서 간행작업이 세 갈래로 진행되다가 1983년께부터 작업이 통합되었다. 광주 운동권에서 여러 팀이 5·18관련 자료를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그 작업이 통합될 필요가 제기되었다. 조봉훈의 구속도 통합을 부추기는 요소가 되었다. 자료를 한 군데로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을 전담할 사람이 필요했다.

또한 전담할 사람에게 제공할 최소한의 활동비도 준비되어야했다. 1984년 11월 18일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창립준비위원장; 정용화)가 창립(의장; 정상용, 수석부의장; 정용화)되면서 5·18백서 간행작업이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 때 광주일고 출신으로 서울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 근무하던 임상택(당시 서울상대 중퇴)이 자신의 저서(알기쉬운 경제이야기?)를 출판하고 받은 인세 전액을 5·18백서작업 비용으로 정용화 부의장에게 넘겨줬다. 정용화는 자료취합과 정리 작업 실무를 이재의에게 맡기고 매월 일정액의 비용을 지급하였다.

그렇게 5·18백서 간행작업이 시작되었다. 1985년 5·18기념일에 5·18백서 간행을 목표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초안이라고 할 수 있는 5·18자료 수집과 정리 및 집필 작업이 시작되었다. 1985년 초 5·18백서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출판 문제가 거론되었다. 누가 집필의 책임을 지고 어느 출판사에서 제작할 것인가였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치하로 집필자는 물론이고 출판사 대표도 모두 구속될 것이 분명했다. 그 문제를 두고 서울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가들이 여러 차례 회의를 하였다. 서울에서 회의 참석자는 정상용, 문국주, 나병식 등이고 광주에서는 정용화, 이재의, 전용호 등이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광주출신 민주화운동가인 나병식이 운영하는 풀빛출판사에서 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출판 책임은 당시 광주권 민주화운동 연대기구인 ‘전남사회운동협의회’가 책임을 지고 대표 집필은 소설가 황석영 씨에게 의뢰하기로 하였다.

황석영 소설가가 집필 책임을 졌을 때 획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효과가 있었다. 첫째, 출판했을 때 대중적 파급 효과가 커지면 5·18항쟁의 진상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황석영 소설가가 유명 작가이기 때문에 수사당국에서 쉽게 연행하거나 구속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셋째는 거친 문장의 초고를 명쾌하게 다듬고 유려한 문장으로 서술하여 보다 사실적이고 박진감 있는 기록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황석영 씨가 그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출판사 대표인 나병식 씨의 의견이기도 했다. 출판 결정이 되기 전인 1985년 초에 서울에서 최종 회의가 있었고 이 자리에는 김근태(당시 민청련 의장, 전 국회의원), 신동수(민문연, 풀무원 창립위원), 정상용(도청항쟁지도부 외무부위원장, 전 국회의원), 채광석(민통련, 문학평론가, 작고) 나병식(풀빛 출판사 대표) 황석영(소설가) 등이 참가했다. 황석영은 이 자리에서 대표집필의 책임을 질 것을 기꺼이 수락했다.

여기서 논의된 내용은 책임 및 각계 배포 문제였는데 나병식과 황석영이 출판과 집필의 책임을 전적으로 감당한다는 결정이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조직 사건이 될 수도 있으니 출판사와 집필자 두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연루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었다.

그렇게 하여 일차적 접촉의 책임을 맡고 있던 정용화에 의해 이재의 팀이 정리한 초고가 같은 해(1985년) 3월 초 전용호를 통해서 황석영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초고는 문장이 채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내용도 여기저기 중복되어 있어 나중에 완성된 원고 분량의 서 너 배 쯤 되었다.

황석영 작가는 약 두 달도 안 되는 기간에 그 원고를 다시 정리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서술하여 5·18항쟁을 체계적으로 담은 최초의 기록으로 완성해냈다. 원고는 풀빛출판사로 넘겨졌고, 제작과정에서 사찰당국에 의해 1만권이 통째로 압수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 사건 때문에 나병식 사장은 수배가 되었고 수배 중에 몰래몰래 제작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초판은 디자인도 없는 하얀 백지의 표지로 시중에 배포되었다. 그 사건으로 나병식은 구속되고 재판까지 받았으며, 황석영은 도피 중에 연행되어 수사를 받았다. 당시의 공안 당국은 김지하 시인의 전례를 보아 대중적으로 알려진 황석영을 구속하여 재판을 받게 되면 광주의 진상이 더욱 세상에 널리 알려질 것을 우려하여 출국을 권고했다.

황석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3세계 작가대회’에 참가했다가 유럽, 미국, 일본 등지를 순방하며 해외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광주항쟁 보고대회 등을 개최하면서 결과적으로는 해외 운동권이 광주항쟁을 주제로 결집되게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황석영은 애초부터 인세를 원하지도 않았고 풀빛출판사에서 저자에게 주는 인세는 정용화에게 전달되었으며 정용화는 그 돈으로 광주권 민주화운동 활동자금으로 사용하였다.

황석영은 어떠한 작업 팀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고 또한 당시의 상황 아래에서는 불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기록 과정에 대하여 우선 책머리에서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대담이나 인터뷰 등을 통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서 여러 사람들이 동참했던 작업임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방북과 십여 년에 걸친 망명 투옥 등의 기간 동안 이러한 사실들은 잊혀졌던 것이다.

이제 삼십년이 지나서 이러한 비방과 헛소문이 나돌게 된 것은 전적으로 제대로 정리해내지 못한 광주의 불찰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작업은 당시 상황에서 개인의 공명심이나 명예를 위한 일이 아니었고 ‘진상’을 알리는 위험한 책임을 감당하는 일이었다.

황석영과 광주운동권

황석영 작가와 광주운동권은 어떤 관계이기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대표 집필을 맡게 된 것일까. 어떻게 작가가 자신이 정리한 자료도 아닌데 대표집필이라는 역할로 자신의 이름을 걸 수가 있는 것일까. 보통은 그런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 그것은 황석영을 유명한 소설가로 보는 일반적 통념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당시 1980년대, 더 정확히 말하면 1978년부터 1984년 경까지 황석영과 광주 민주화운동권과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그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 살던 황석영 소설가는 한국일보 <장길산> 연재 중에 전라도 해남으로 이사와 김남주 시인과 더불어 농민학교 운동에 참여했다가 광주로 옮긴 것이 1978년이었다. 광주에 온 황석영은 그 때부터 광주의 민주화운동권, 그 중에서도 특히 문화예술분야에서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기획하고 참여하였다.

1978년 겨울에 광주 문화운동권을 창립하기 위해 진행했던 청년 학생들을 위한 ‘탈춤학습’으로 서울과 다른 지방 연희패와의 연결을 해냈으며, 1979년 진보적 연희운동을 표방한 마당극단 ‘광대’의 창립과 1979년 돼지파동을 극화한 마당극 ‘돼지풀이’공연에 그는 후원자이자 고문 역할을 맡으면서 깊숙이 참여했다.

1980년 5월 18일 항쟁이 일어났을 때 황석영이 광주에 없었던 것도 극단 광대가 공연할 소극장의 계약금과 무대세트 등 건설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로 돈을 구하러 갔다가 5·18항쟁으로 길이 막혀 광주에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양림동 그의 집에는 계엄사 합조대가 예비검속을 하러 들이닥치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서울의 그에게 연락해준 바 있다. 새로 임대한 소극장에서 연습 중이던 극단 광대 단원들은 5·18을 맞아 궐기대회 등을 주도하면서 항쟁에 깊이 참여하였고 항쟁이 끝난 후에 김태종, 박효선, 김선출, 김윤기 등 여러 명이 투옥되고 수배되었다.

1982년 황석영 작가 운암동 자택에서 가정용 녹음기로 녹음하여 제작한 노래극 ‘넋풀이’는 그 중에 실린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지금도 민중애국가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그 노래극은 황석영이 백기완 선생의 시집 등에서 몇 구절의 시를 골라 노래 가사용으로 고치고 당시 전남대 학생으로 대학가요제 수상자인 김종률이 작곡하고 광주 민주화운동가이면서 노래를 잘했던 김은경, 오정묵, 임영희, 임희숙 등이 노래를 불러 만들어진 것이다.

그 테이프는 당시 기독청년협의회에 넘겨져 2천여개가 제작되어 전국 대학가에 배포되면서 국민들에게 공개된 것이다. 우리는 그 테이프를 시작으로 십여 종류의 노래와 방송 테이프를 지하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 작업들 모두 우리들과 함께 황석영이 주도하였고 비용도 모두 자신이 제공했던 것이다. 그 이후 ‘님을 위한 행진곡’과 관련하여 저작권을 주장하거나 저작료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조차 없다.

1985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사실상 그 후에 진행된 작업이다. 황석영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원고 마감에 쫓겨 원고 보따리를 서울까지 가지고 가서, 출판사 부근에서 여관생활을 하면서 원고를 마무리하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어떻든 1978년부터 1986년 광주를 떠나기 전까지 황석영은 작가이기 전에 광주의 민중문화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였다. 광주에서 문화운동을 지도하고 직접 실천하고 온갖 경비를 모두 제공하였던 실질적인 광주 운동권, 특히 문화운동권의 ‘맏형’이었다. 1980년대 광주 시절 황석영의 활동은 같이 늙어가는 우리와 시민들이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 2011년 6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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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수 - 마틴 리스가 들려주는 현대 우주론의 세계 사이언스 마스터스 11
마틴 리즈 지음, 김혜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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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는 그림1 ’오우라보루스’로 상징되는 미시세계와 거시세계 사이의 긴밀한 관계다.
소립자 세계의 힘에 의해 우리의 일상 세계가 존재하게 된 것 또한 우리 우주의 잘 조율된 팽창 속도와 은하 형성 과정과 고대의 별에서 만들어진 탄소와 산소 덕택이다.
몇 가지 기본 물립칙이 ’규칙’을 결정한다.
간단한 대폭발로부터 우리가 출현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6개의 ’우주의 수’에 민감하다.
이 수들이 정확하게 조율되지 않았다면 복잡성의 한 층 한 층을 차례로 벗겨 나가는 일은 이미 끝나 버렸을 것이다.
’나쁘게 조율된’,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한 다른 우주들이 무한히 많을까?
우리의 전체 우주가 다우주 속의 하나의 ’오아시스’일까?
혹은 우리의 6개의 수가 행운의 값을 갖게 된 다른 이유들을 찾아야 할까?
우리 앞에는 아직 무수한 문제가 남아있다." 


 
이 책은 < 섹스의 진화 >, <원소의 왕국>, < 마지막 3분 >, <인류의 기원>, <세포의 반란>, <휴먼 브레인>, <에덴의 강>, <자연의 패턴>, <마음의 진화>, <실험실 지구>에 이어 ’사이언스 마스터스 시리즈’의 열 한번째 책으로, ’우주의 기원과 진화’를 소재로 삼았다.
 
’여섯 가지 수’란 무엇인가...
이 수들은 인류가 기원 전부터 ’수학’과 ’과학’이라는 분야를 탐구한 이래 모든 결과물의 핵심적인 총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이 수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 ’모든 것의 이론’에 파고들고 있다.
 
1. N : 원자들을 결합시키는 전자기력의 세기를 원자들 사이의 중력으로 나눈 값으로 그 값은 무려 10의 36제곱이나 된다.
         하지만, ’N’의 수에서 ’0’이 한 개만 줄었다면 우주는 커다랗게 성장하지 못하고 단명했을 것이다.
         그러한 소형우주에서는 어떤 생물도 벌레보다 크게 자랄 수 없고 생물학적 진화를 거칠만 한 시간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2. ε : 수소 원자 2개가 헬륨으로 핵융합을 일으킬 때 에너지로 전환하는 양으로 0.007이다.
         ’ε’는 원자핵들이 얼마나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지구의 모든 원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결정한다.
         이 수는 별 내부에서 일어나는 핵융합 과정을 통해 수소가 주기율표의 모든 원자들로 변환되는 과정을 통제한다.
         이 수가 작으면 원소 생성이 줄어들고 0.006이면 헬륨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수가 크면 원소 생성이 늘어나고 0.008이면 수소가 남아있지 않아 물(H2O)도 부족하고 별이 일찍 사라질 것이다.
 
3. Ω : 우주의 임계밀도에 대한 실제 밀도의 비로 그 값은 0.04다.
         이 값은 은하, 흩어져 있는 기체 그리고 암흑물질 같은 우주 안에 있는 물질의 양을 측정한 것이다.
         ’Ω’는 우주 안에서 중력과 팽창 에너지의 상대적 차이가 가진 중요성을 말해준다.
         이 수가 특별한 임계값보다 높앗다면 우주는 오래 전에 붕괴했을 것이고 낮았다면 은하나 별이 생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4. λ  :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진공의 에너지 밀도를 나타내는 기본상수, 즉 ’우주상수’를 의미하며 그 값은 6.2201×10^-40 N·m-2·kg-2·s-1다.
          1998년에 측정된 값이며 이 수는 반중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고 우주의 팽창을 통제한다.
          ’λ’가 조금만 컸어도 은하와 별이 형성되지 못했을 테고 우주의 진화는 시작하기도 전에 억제되었을 것이다.
 
5. Q : 은하의 구조를 와해시키는 에너지와 전체 정지 질량에너지의 비를 말하며 그 값은 0.000001이다.
     만약 Q가 훨씬 더 작다면 우주는 불활성이 되어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더 컸다면 우주는 격렬한 장소가 되어 그곳에서는 어떤 별이나 행성계도 살아남지 못하고 거대한 블랙홀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을 것이다.
 
6. D : 수 백년 전부터 알려진 수로 우리 세계의 공간 차원을 나타낸다. 즉, 3이다.
         ’D’가 만약 2나 4라면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수는 ’초끈이론’을 통해 6이나 10으로 확장될 수도 있고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것이다.


 
저자는 스티븐 호킹과 더불어 이 시대의 가장 창조적이고 뛰어난 우주론 학자로서 우주론의 수많은 핵심 개념들을 창안해내었고 환상적으로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준성의 핵이 거대한 블랙홀로부터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내놓기도 했다.
저자는 이 책속에서 현대 물리학과 천문학, 우주과학이 이루어낸 성과를 자신있게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과학적 승리주의’에 빠지지 말고 끝까지 겸손하고 성실하게 연구와 탐구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기도 한다.
 
제목만큼 최신 우주론에 대해 핵심을 짚어주었고 생각보다 유익하고 재미있는 책이었다.

 

 

[ 2010년 10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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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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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부터 시작된 공부모임이 지난 5월 말에 100회를 맞이했다. 참으로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공부모임의 역사를 이어나간 것이다. 나는 작년 11월부터 참석하여 초창기 참석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뜻 깊은 100회를 축하해주었다.
 
100회 기념으로 참석자들이 의견을 나누어 [내 인생의 책]을 발표하기로 했다. 나는 이 책 <아리랑>과 황석영씨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그리고 <민중과 지식인>을 선택했다. 세 권 모두 대학 1학년 시절에 읽은 것이다. 이 세 권 이외에도 내 인생에 커다란 깨달음과 소중한 지혜를 안겨다 준 책은 많았다. 굳이 꼽아 보자면, 소설 책으로는 조정래씨의 <태백산맥>과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에세이로는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 인문사회과학으로는 이반 일리히의 <성장을 멈춰라>, 자연과학으로는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 경제학으로는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 등이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게 뇌리에 박힌 책은 위 세 권을 필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세 권의 책은 세상에 대해 아무런 앎이나 지혜를 배우지 못하고 대학에 갓 입학한 나를 이끌어 주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헤매고 있는 나에게 문자로서 방향을 보여주었다. 내가 그 세 권을 읽고 책 속의 지혜와 철학에 따라 그 이후의 인생을 제대로 살았다고 자부하지는 못한다. 돌이켜 보면 나는 어느 누구와도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저 가끔씩 가슴으로 느끼고자 노력하고 세상을 알려고 노력하고 아는 만큼 실천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한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국가나 사회에, 주변에 크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온 과정에는 알게 모르게 세 권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청년의 고뇌와 투쟁을 통해 조선인 혁명가로 거듭난 김산(본명 장지락)의 삶을 벽안의 젊은 여성작가 님 웨일즈가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그 시대를 철저하게 호흡해 간 지식인의 생생한 전기이자 숨 가쁜 동아시아 역사의 기록이고 증언이며 역사가 명하는 바에 따라 불화살같이 살아간 한 조선인 독립혁명가의 피어린 발자취이다.
 
내가 읽었던 1985년 당시에 이 책은 ’금서’였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대학생 및 일반인들을 진실과 진리로 안내할 수 있는 대부분의 책을 ’금서’로 지정하였다. 당시에는 ’금서’ 뿐 아니라 ’금지곡’도 있었고 ’상영금지 영화’도 있었다. 그만큼 사상과 학문의 자유, 진리와 학습의 자유가 박탈되어 있었고 더불어 집회, 시위, 결사, 언론의 자유 등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이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수 많은 ’금지사항’들이 군화발로 버젓이 강요되었다. 한국에 처음 이 책을 소개한 사람이 고 리영희 교수였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리영희 교수님의 발자취가 한국의 현대사에 깊숙이 남아있음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 김산은 누구인가? ---------------------------
본명은 장지락(張志樂). 평북 용천 출생. 일본, 만주, 상하이, 베이징, 광둥, 옌안 등을 누비며 중국 공산혁명을 통한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신흥무관학교를 최연소로 졸업한 뒤 상하이로 가 이동휘, 안창호 등의 영향을 받았다. 1924년 고려공산당 베이징지부를 설립하고 1925년 중국대혁명에 참가하였다. 1930년과 1933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37년 중국의 옌안에서 님 웨일즈와 만나게 되었고 님 웨일즈는 이 만남의 성과를 담아 1941년 미국 뉴욕에서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를 출간했다. 1938년 중국공산당 사회부장 캉성(강생康生)에 의해 ‘일제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됐으나 1983년 중국 공산당은 김산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하고 명예와 당원 자격을 회복시키는 복권을 결의하였다. ---------------------------------------
 

-------------- 님 웨일즈는 누구인가?----------------------------
본명은 헬렌 포스터 스노우. 신문기자이자 시인이며 계보학자로 활동했다. <중국의 붉은 별>을 써낸 에드가 스노우와 결혼하기도 했다. 님 웨일즈라는 필명으로 여러 권의 저서를 내었으며, 오랜 기간을 격변하는 아시아에서 보내면서 중국과 한국에 관한 많은 집필을 하였다. 마오쩌둥에 대한 저술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한 에드가 스노우를 만나 결혼한 후 남편과 함께 1930∼40년대 중국을 누비며 모택동의 대장정에 참가하였다. 그는 이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번 오르기도 했다. 저서로는 ’Inside Red China’, ’The Chinese Labor Movement’, ’Red Dust’, ’Sketches and Autobiographies of the Old Guard’ 등이 있다. ------------------------------


 
책은 소설의 형식과 자서전의 형식으로 저술되어 있다.
[서장]에는 님 웨일즈가 처음 김산을 만나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장면을 회상하는 것이다
1. [회상]에는 김산이 자신의 인생을 전체적으로 돌아보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조선인으로서 자신이 다른 동포들과 함께 아리랑 고개를 몇 고개나 넘었고 앞으로도 넘을 것임을 다짐한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부상자의 신음소리와 싸움하는 소리 뿐이다. 투쟁하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다. 그 밖의 것은 모두 내 세계에서는 하나도 의미가 없다. 바로 그 투쟁의 대립물 속에 나와 인간생활의 일치가, 나와 인간 역사의 통일이 존재하는 것이다."(p.49)
2. [조국에서의 어린 시절]에는 김산이 평안북도 용천에서 9남매 중에서 셋 째로 태어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 큰 형과 작은 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3. [독립선언]에는 어린 김산의 눈으로 본 3.1운동의 구체적인 모습과 개인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
4. [동경유학 시절]에는 3.1 운동 이후 일본 동경으로 넘어가 고학하면서 대학에 다니는 과정을 이야기 한다. 룸펜인텔리겐차의 생활과 학생운동, 1923년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에서 겪은 이야기이다.
5. [압록강을 건너서]에는 만주에서 조선 민족주의자의 군관학교에 가기위해 걸었던 700리의 도보여행, 만주 합니하의 조선 독립군 군관학교 생활을 이야기한다.
6. [상해, 망명자의 어머니]에는 1920년 상해에 도착한 이후 공부하면서 이동휘 장군, 안창호, 이광수를 만나 함께 활동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산은 여기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세 명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가장 큰 영향은 금강산 승려 출신의 공산주의자인 김충창, 두 번째는 안창호 선생, 세 번째는 해륙풍 소비에트 지도자 팽배이다.
7.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김산은 무정부주의자 그룹에 가입하여 활약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8. [걸출한 테러리스트 : 김약산과 오성륜]에서 김산은 조선인 테러리스트인 김약산(김원봉)과 오성륜과 사귀고 함께 지낸 과정을 이야기한다.
9. [결코 결혼하지 않으리라]에서 김산은 여성과 혁명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논리를 이야기한다. 김산은 이에 대하여 안창호와 톨스토이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을 말한다.
10. [톨스토이에서 마르크스로]에서 김산은 1921년 이후 자신이 북경에 도착한 후 마르크스주의 문헌을 읽기 시작했고 1923년 경에는 공산주의 운동만이 조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희망이라고 단정한다. 김산을 공산주의자로 만든 사람은 김충창이었고 톨스토이의 글과 사상은 김산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11. [중국 대혁명에 참가하여]에는 1924년 손문의 지도 아래 중국혁명이 일어나 좌익으로 급선회한 해였다. 중국대혁명은 1925년 광동에서 일어났고 1927년까지 김산을 비롯한 조선인 테러리스트 800명이 참가하였다.
12. [광동꼬뮨]에는 1927년 12월 10일 김산을 비롯한 20명의 조선인과 엽정 등 중국공산주의자들이 광동을 공격, 점령하여 소비에트 정부를 구성한다. 하지만, 광동꼬뮨은 준비부족과 전략전술의 실패로 인하여 3일 천하로 막을 내린다. 김산은 꼬뮨의 시작부터 백색테러까지의 과정을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13. [해륙풍에서의 삶과 죽음]에는 김산이 광동꼬뮨 실패 이후 혁명 잔존세력과 해륙풍을 거쳐 홍콩으로 탈출하면서 중국 국민당 및 군벌과 싸우는 과정이 묘사된다. 이 과정에서 김산은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었고 건강히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14. [상해에서의 재회]에는 김산이 홍콩에서 상해로 건넌간 뒤 김충창, 오성륜과 재회하고 1929년 북경으로 떠나기까지의 이야기다.
15. [위험한 생각]에는 북경으로 돌아온 김산이 북경 공산당 비서가 된 이후 중국인 아가씨(유령)의 애정 공세에 쩔쩔매는 과정을 담고 있다.
16. [다시 만주로]에는 김산이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을 연결시키기 위하여 중국공산당에 의해 만주로 파견되어 활동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17. [위대한 첫사랑]에는 1930년 김산이 만주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후 유령의 애정을 받아들여 공식적으로 사귀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의 차이점을 해소하지 못하고 포기한다.
18. [아리랑 고개를 넘다]에는 1930년 11월 북경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취조받고 석방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섯 차례의 물고문에도 변절하지 않은 김산은 마침내 석방된 후 고향으로 돌아간다.
19. [당내투쟁과 개인적 투쟁]에는 김산이 북경으로 돌아간 1931년 6월 이후 중국 공산당에 의해 의심받고 스파이로 재판을 받고 혐의가 풀리는 과정을 담고 있다. 김산은 그 이후 인민전선을 내용으로 하는 노선투쟁을 전개한다.
20. [살인... 자살.... 절망]에는 중국 국민당과 군벌에 의해 북경 공산당이 와해되는 가운데 김산이 결핵에 걸리고 좌절한 가운데 과거에 자신을 스파이로 고발한 한씨를 죽이려다고 포기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자살을 시도하고 실패한 후 천천히 의지와 기력을 회복한다. 이 때 김산은 괴테, 테니슨, 키츠, 잭 런던, 업톤 싱클레어, 발자크 등의 책을 섭렵한다.
21. [다시 대중운동으로]에는 1932년 이후 보정부의 제2사범학교에서의 강의와 조직화 등 대중운동으로 복귀한 이후 활동을 담고 있다. 1933년 이후 국민당과 군벌의 토벌에 의해 중국 공산당은 와해의 위기에 빠진다. 
22. [다시 일본에 잡히다] 김산은 1933년 4월 두 번째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조선으로 송환되어 가혹한 수사를 받았지만 김산은 다시 재판에서 무혐의로 풀려난다.
23. [두 여인] 석방 이후 김산은 함께 체포되었던 중국인 여인이 김산에게 애정공세를 퍼부은 끝에 둘은 결혼한다. 그 후에 김산은 다른 활동가 여인과 잠시 동안 3각 관계에 빠지기도 한다.
24. [항일전선] 1935년 상해에서 조선의 제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조선혁명의 지도자들이 모인다.  1935년 중국공산당 주도로 홍군과 중화소비에트가 국민당과 항일연합전선을 제창하자 조선 혁명가들 역시 중국민중과 협력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민족전선-저선민족해방동행과 조선민족연합전선-을 결성한다.
25. [해배하더라도 좌절하지 않는 자만이...] 김산은 1936년 8월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공산당에 의하여 서북에 있는 중화소비에트 지구에 파견될 대표로 선출되어 연안에 도착한다. 김산은 다시 결핵이 발병한 상태였다. 

 

김산은 책의 말미에 작가의 글을 빌려 자신의 세계관을 말한다. "역사의 의지를 알 사람은 누구인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폭력을 뒤엎지 않으면 안되는 피억압자 뿐이다. 패배 속에서도 좌저하지 않는 사람, 일체의 새로운 세계를 최후의 전투에서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 뿐이다. ...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뿐이다. 민중과의 계급관계를 유지하는 것. 왜냐하면 민중의 의지는 역사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 진정한 지도력은 날카로운 귀와 신중한 입을 필요로 한다. .... 소수는 보호되어야 한다. 소수는 변혁의 최소 도구요, 다수의 자식이며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숨통을 막는 것은 단지 괴물을 키우는 것일 뿐이다. ... 주어진 다수의 투표는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 다수가 올바른가 올바르지 않은가는 그와는 별개의 문제다. ...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즉 변증법적인 것이지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 다년간의 마음의 고통과 눈물을 통하여 ’오류’가 필수적이며 따라서 선이라는 것을 배웠다. 오류는 인간 발전의 통합적인 일부분이며, 사회변화 과정의 통합적인 일부부인 것이다. ...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자기들이 믿고 있는 것을 위하여 싸우다 의식적으로 죽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영광이요 장렬함인 것이다. ... 스스로 믿고 있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싸우다 죽는 것은 행복한 죽음인 것이다.... 내 청년시절의 친구나 동지들은 거의 모두가 죽어버렸다. 민족주의자, 기독교신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등 수백 명에 이른다... 그들은 눈앞의 승리를 보는데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p.296)

작가는 한국 내 어느 역사가도, 후손도 밝히지 못한 조선 혁명가 중 한 사람을 발굴하여 전세계에 소개했다. 그럼에도 한국정부는 독립군이자 혁명가였던 김산을 예우하지 못하고 있따. 이런 외국인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젖어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일제 강점기에 조선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 많은 독립군과 혁명가들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껏해야 김구와 김규식 등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공개적이고 공격적인 노선으로 삼지 않은 일부 임시정부 요인들만 다루고 있을 뿐이다. 5,000년 간 이어온 조선의 역사가 단절된 것이다. 민족과 역사 앞에 그깟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란 말인가? 서구와 미국,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이념을 초월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들을 발굴하여 후손들에게 역사교육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을 따라 배우지는 못하더라도...
 
작가는 김산을 ’참된 도덕’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김산은 거짓과 허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고 거짓말 같은 것은 아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작가가 접한 김산은 진리를 추구하는 순례자였고 시대가ㅏ 낳은 하나의 순교자였다. 다행이 김산은 1980년대에 중국공산당으로부터 1960년에 받은 ’수정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스파이의 누명을 벗었다. 김산이 문화대혁명 시기에 강생에 의해 비밀처형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작가에게 있어 끔찍한 잔악행위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작가에게 있어 당시 33세였던 김산은 일본의 억압 아래 있던 동시대 한국인들에게는 영명한 지도자요 사상가였으며, 뜨거운 영혼과 가슴을 소유한 순수한 인도주의자요 더 없이 존귀하고 고귀한 인물이었다. 김산의 삶과 역정은 작가를 통해 전 세계에 조선인(한국인)의 위대함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김산이라는 역사적 존재는 처음 나에게 ’영웅’으로 다가왔다. 그는 바다 건너 핏줄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현실적이지 못한 외국의 영웅도 아니고 수 백년, 수 천년 전의 신화에 쌓인 ’을지문덕’도 아니었다. 고작 50년 전에 한반도에서 태어나 일제의 강점에서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봉건과 압제의 사슬에서 민중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다 바친 선배였던 것이다. 20세기 후반은 일제시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한국에는 여전히 외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고 외국군을 한국정부가 제어하지 못하고 외국의 경제에 국내경제가 종속되어 있는 현실, 군사정권이 헌법상의 국민의 권리를, 타고난 사람의 권리와 행복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현실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이 책과 김산의 생애를 받아들였다. 우리가 김산처럼 혁명활동을 펼쳐나가지 못할지라도 그 분의 의지와 노력, 그 분의 철학과 열정을 최대한 본받자고 다짐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그래도 하루하루 학생운동이 힘들었던 1980년대 중반에 열혈청년학생들이 추위와 배고픔, 억압과 울분, 최루탄과 경찰폭력에 대항하여 굳은 의지를 불태울 수 있도록 하는 산 교과서에 다름 없었다. 물론 교과서만큼 당시 학생들이 실천하고 성과를 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당시 김산의 말과 행동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따르려는 노력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된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뒤늦게나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고 싶다. 우리만이라도 그 분을 기억하면서....
 
[ 2011년 6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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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토드 부크홀츠 지음, 이승환 옮김 / 김영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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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제(10월 26일) 저녁에 독서토론 모임에 나갔다.
집에서, 커피숍에서, 강가에서 나 혼자 앉아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아는 지인들에게 보내주기 시작한 지 벌써 만 3년이 되어간다.
홀로 책을 읽는 데는 장점이 많다.
책 선택을 내 맘대로 할 수 있고 읽는 속도도 조절할 수 있고 느낌과 기억을 몸 속에 조용히 간직하는 등...
하지만, 당연히 그 반대급부도 있다.
가끔 책 선택에 실패하기도 하고 좋은 책을 소개받기가 생각보다 힘들고 혼자만 읽고난 후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점점 희미해진다. 책에서 궁금하거나 '다른 사람 생각은 어떨까?'라는 궁금증도...
그래서 이제는 나 혼자만의 책 읽기와 더불어 여럿이 함께 읽는 것에 대한 장점도 취해보고자 했다.
내가 처음 참여한 독서토론의 대상은 < 행동 경제학 >(도모노 노리오, 2007년 1월, 지형)...
** <행동경제학>은 인터파크 도서에 등록되지 않아 서평을 써도 등록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ㅠ.ㅠ;;
그 책을 1/3 정도 읽다보니 고전경제학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비교하고 검토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2년 전에 구입했다가 읽다가 말았던 이 책 <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가 기억나서 다시 집어들었다.
 
이 책의 영문 초판은 1989년에 출간되었다. 한국에서도 초판이 1999년에 출간되었고 나는 개정판을 읽은 셈이다.
저자는 하버드대학교에서 '최우수강의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듯이 쉽고 일목요연하게 근대 이후의 경제사상사를 설명하고 비교하고 평가한다.
근대 경제사상사에서 족적을 남겼던 15명 전후의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이론을 다루면서도 영리하게도 자신이 칭찬, 칭송하거나 비판, 비난하고 싶은 상대에게는 그 경제학자들의 발언과 글을 이용하기도 한다. 
마치 자신이 아니라 '죽은 경제학자'들의 의견인 것처럼...
'죽은 경제학자'들의 권위를 내세워 자신의 의견을 강조함과 동시에 독자들의 감정과 비난을 피해갈 수 있도록...^^
 
개정판 서문에서 처음 읽은 글이 내 기분을 상하게 했다.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일반이론」중에 "경제학자 및 정치철학자의 아이디어와 힘은 옳고 그름을 떠나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다. 세계는 그 아이디어들이 움직여 나간다……선용되는 악용되든 궁극적으로 위험한 것은 아이디어지 사리(私利)가 아니다." 란 내용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위험한 것'이 '사리'가 아니라 '아이디어'라고? '사리사욕'이 개발과 만악의 근원이 아니라??
저자가 잘 못 쓴 문구인지, 번역자가 잘못 해석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 문구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정판 서문에서 밝힌 또 다른 저자의 의견 - 1997년 아시아의 붕괴에 대한 - 역시 탐탁치 않다.
저자는 당시 아시아 붕괴의 원인으로 1) 정부의 과도한 개입 2) 정실자본주의 3) 달러화에 대한 미국의 태도 급변을 들고 있는데,
1)은 전혀 이유가 되지 않는 것 같고 2)는 장기적인 구조적 문제점일 수는 있으나 1997년 아시아 위기의 원인은 아니다.
3)이야말로 진정한 핵심 이유인데, 이에 더하여 아시아 지역 정부가 '세계화'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이 책에는 소위 고전경제학의 대부들(?)이 총 망라되어 있다.
그들의 이름은 고전경제학의 창시자 애덤 스미스(국부론, 자유방임주의, 분업)부터
인구폭발과 지구멸망의 예언자 맬서스(인구론),
자유무역론의 창시자 데이비드 리카아도(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공리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정치경제원론),
한계적 시야를 일깨운 알프레드 마셜(경제원론),
제도학파를 이끈 베블런과 갤브레이스(유한계급론, 경제학과 공공목적)
정부개입과 재정정책의 선구자이자 풍류도락가 케인스(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통화주의자이자 자유시장주의자인 밀턴 프리드먼(자본주의와 자유, 선택의 자유),
공공선택학파 제임스 뷰캐넌(동의의 계산법),
합리적 기대이론가이자 자유시장주의자 로버트 루카스(합리적 기대와 계량경제학의 실제) 등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근현대사에서 고전경제학을 뿌리째부터 가장 위협했고 고전경제학의 방향을 바꾸어놓은 칼 마르크스(자본론)에게도 경제사상사의 한 자리를 내주었다.
다만, 칼 마르크스는 저자에 의해 인신공격자, 무능력자, 근시안을 가진 자, 학대와 잔학의 뿌리로 '부관참시'되었지만...
 
저자는 영국 태생이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경제학을 연구하였고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하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앵글로색슨식 인간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주류'경제학자 중의 하나다.
그런 저자의 배경과 시각을 가지고 근현대 경제사상사를 평가하였으니 이 책이 출간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영국과 미국인, 귀화미국인들이 경제사상사의 주역이 될 수 밖에 없고...
'서구 중심주의'와 '서구 우월주의'에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그래도 이 책을 통해 고전경제학의 탄생과 변화과정, 그들이 근현대 정치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들을 신처럼 받드는 21세기 자유시장주의자들의 이론의 뿌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고전경제학의 주된 주제인 욕망, 합리주의자, 공리, 통화, 정부개입, 자유시장, 자유무역 등에 대한 이론적 근거도 살펴볼 수 있다.
저자는 경제학이 '선택의 학문'으로서 경제학은 무엇을 선택하라고 지시하지는 않고 다만 선택의 결과를 예측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뿐이라고 말한다.
내 생각에 저자의 경제학의 정의는 잘못되었다.
20세기부터 경제학은 '선택의 학문'이 아니었다.
경제학은 인간의 본성, 인간의 선택, 인간의 판단과 행동, 생산물과 관련분야, 정치와 문화, 제도 등이 총 망라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문제가 경제학 뿐 아니라 경제학자, 그리고 이들을 '이용'하는 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학의 문제는 인간의 본성과 행동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데 있고
경제학자의 문제는 인간에 대한 잘못된 규정을 근거로 애정도 없이, 책임지지 않고 자신들의 이론을 만들어내고 그에 더하여 공명심과 경제적인 이유로 자신들의 이론을 현실 정치경제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데 있으며,
어찌보면 그런 '순진한' 경제학자들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들에게 있다.
 
20세기에 들어선 이후 인류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1929년 대공황,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1970년 석유위기, 1997년 아시아발 금융위기, 2007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겪었다.
그 위기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본 자들은 '가진 자'들이었고 가장 큰 경제적,생물학적 피해를 본 것은 '가지지 못한 자'들과 애꿎은 자연과 생물들이었다.
이 상황에 대한 돌파구는 무엇일까??

[ 2010년 10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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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도시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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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꾸다 히데오는 일본 작가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작품을 읽어본 작가이다. 그동안 <남쪽으로 튀어>, <걸>, <공중그네>를 읽었다. 히데오의 작품은 현대 일본사회의 모습과 일본인들의 문화, 그들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히데오의 작품에는 유머와 풍자가 들어있으며, 동시에 잔잔한 인간으로서의 감동과 울림이 있다. 최근에 나온 작품이라 하여 읽게 되었다.
 
세 개의 작은 군 단위 행정구역이 합병되어 탄생한 인구 12만의 지방 도시 ’유메노’를 배경으로 나이, 직업, 주변 환경, 가치관 등이 전혀 다른 다섯 주인공의 톱니바퀴처럼 얽혀 있는 다섯 가지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다섯 명의 주인공들은 평범하게 우울한 일상을 보내는 인물들이다. 시청 생활보호과에서 생활보조비 수급 대상자를 상대로 일하는 공무원 아이하라 도모노리,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어떻게든 유메노시를 떠나고 싶은 여고 2학년생 구보 후미에, 폭주족 출신으로 노인들만 사는 집을 골라 누전차단기를 교체해주고 엄청난 돈을 받아 사기를 치는 회사의 세일즈맨 가토 유야, 소매치기를 잡아내는 보안 요원이자 신흥 종교에 빠져 있는 중년의 이혼녀 호리베 다에코, 그리고 어떻게든 큰 무대에 진출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는 유메노 시의원 야마모토 준이치가 바로 그들이다. 

1. 아이하라 도모노리,  본청으로 자리를 옮길 날만을 기다리며 무사안일한 공무원 생활을 계속하던 그는 실적에 목말라하는 상관의 지시를 따르다가 정신지체 증상이 있는 청년의 어머니가 추운 겨울에 추위와 배고픔에 죽도록 만들어 청년의 분노를 자아낸다. 그는 직업과 업무에 대한 자부심도 없고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채 도박장 주차장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유부녀들의 ’성매매’를 훔쳐보다가 자신도 ’성매매’를 하게 된다. ’성매매’에 깊숙하게 빠져들다가 이혼한 전부인을 ’성매매’ 여성들 사이에서 발견하게 된다.

2. 구보 후미에, 유메노시를 떠나기 위해 기필코 도쿄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야 하는 그녀는 어느 날 밤 학원에서 집으로 가던 중 사회 부적응자이자 게임세계에 빠져있는 청년(가토 유야의 고등학교 동창)에게 납치, 감금된다. 

3. 가토 유야, 고등학생 시절 오토바이 폭주족이었기에 별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가토 유야는 전직 폭주족 두목이 운영하는 사기 세일즈 회사에 근무하게 된다. 폭주족 선배가 회사에서 실적을 올리고 그에 따라 거액의 보너스를 받아가는 것을 보면서 가토 유야는 처음으로 자신의 미래를 그려 본다. 이혼한 아내가 생활보조비를 계속 수령하기 위해 자신에게 떠맡긴 아이를 부모에게 부탁하면서 부모에게도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하게 되면서 가토는 조금씩 일반 직장인이자 사회인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회사의 불합리한 처사에 반발한 폭주족 선배가 사고를 치게 되고 이에 휘말리면서 가토 유야는 흔들린다.

4. 호리베 다에코, 신흥 종교에 가입하여 삶의 활력을 되찾은 다에코는 오히려 신흥 종교 간 갈등에 희생되어 보안회사에서 해고된다. 해고 이후 더욱 신흥 종교 생활에 빠져들려고 노력하지만 여의치만은 않다.

5. 야마모토 준이치, 아버지의 지역구를 이어 시의원에 당선된 준이치. 아내와는 애정 없는 부부생활을 이어가면서 회사의 비서와 ’딴 살림’을 차리고 있고 학교 성적이 좋은 아들을 둔 준이치는 유메노시의 폐기물 처리장 이권에 개입하여 지역 조직 폭력배들과 거래 중이다. 하지만, 전직 의회 의원이 자신의 지역구와 폐기물 처리장 이권에 뛰어들면서 상황이 복잡해진다. 급기야 지역 조폭이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자신마저 사건에 빠져들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만다.

5명의 주인공들은 서로 다른 사연으로 최악의 상황에 몰리고 있지만, 그들을 구석으로 모는 것은 겉으로는 다르지만 그 이면에 동질성 같은 것이 존재한다.

오쿠다 히데오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불균형적인 경제 발전으로 인해 쇠락해가는 지방 도시는 물론, 가정 폭력, 은둔형 외톨이, 사이비 신흥 종교, 정치권의 세습, 사기 세일즈 등 현대의 부조리한 사회상과 그것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을 적나라하게 꼬집는다. 오쿠다 히데오스러운 유머도 곳곳에 배치되어 웃음과 진지함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히데오는 다섯 군상들의 ’우울함’을 때론 진지하게, 때론 유머러스하게 전개한다.  
 
-------- 오꾸다 히데오는 누구인가? ------------------------
1959년 일본 기후현 기후시에서 태어나 기후현립기잔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잡지 편집자, 기획자, 구성작가, 카피라이터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97년 40살이라는 늦은 나이에『우람바나의 숲』(한국어판 서명 : 팝스타 존의 수상한 휴가)으로 등단하였다.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일본 사회의 모순과 그 틈바구니 속에서 각자의 사정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 내용들이 그의 소설의 중심을 이룬다.
시니컬한 유머감각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그는 일본 내에서도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는 ’기인작가’이다. 또한 그의 작품이 인기가 높은 한국에서도 수 없이 인터뷰와 한국 방문을 요청했지만 한 번도 응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동네 도서관에 가서 작품 쓰는 것을 매우 즐기는 소박한 품성을 지녔다.
2002년 『인 더 풀』로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으며, 같은 해 『방해』로 제4회 오야부 하루히코상을, 2004년 『공중그네』로 제131회 나오키상을, 2009년 『올림픽의 몸값』으로 제43회 요시타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공중그네』『인 더 풀』『남쪽으로 튀어!』『걸 Girl』『면장 선거』『스무 살, 도쿄』『방해자』『오 해피데이』『연장전에 들어갔습니다』 『꿈의 도시』 『올림픽의 몸값』등이 있다. -------------------------------------------------
 
히데오는 이 작품 속에서 <공중그네>와는 다른 현대 일본사회의 칙칙함과 우울함을 이야기 한다. 유메노시는 21세기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와 일본 자본주의에 희생당한 전형적인 소도시다. 대규모 쇼핑시설의 건립으로 지역의 전통 재래시장은 망했고 많은 사람들이 실업자로 고통받는다. 기성세대와 유력자들은 개인적인 이해관계와 이권에 집착하고 젊은이들은 도시에서 희망을 상실하였다. 관청과 공무원들은 무사안일과 매너리즘에 빠져 지역주민들에게 아무런 비전과 희망도 제시하지 못하고 지역 주민 대부분들도 희망을 잃은 채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하루하루 살아간다. 도시는 칙칙하고 도박장과 은밀한 ’성매매’가 성행하고 희망 없는 사람들은 블랙홀처럼 빨려든다. 도시에는 새로운 활력과 움직임을 상실했고 은퇴한 노인들이 주된 거주자들이다. 옆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작품의 결말은 충격적이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암시한다. 히데오는 작품 속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의 마지막 희망은 시대적이거나 사회적이지 않다. 최악의 상황에서 잠시 벗어날 뿐 여전히 원상태로의 복귀 정도가 아닐까 싶다. 2011년 일본 동북부 쓰나미와 후쿠시마 원전은 이러한 일본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소설 속의 지역 모습이 일본의 소도시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서울의 아파트와 오피스텔에 사는 사람은 옆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한국은 언제쯤 일본의 노인인구율을 따라잡을까? 최근 한국 언론에 자주 거론되는 SSM이 지역 상권에 끼칠 피해의 미래 모습은 어떤가?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이권개입은 과연 근절되었는가? 도박과 성매매는 줄어들고 있는가? 한국의 지방 소도시들 역시 ’유메노시’와 다를 바 없다. 한국이 일본의 무기력함을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국가적, 사회적, 공동체적 희망을 함께 만들어 나갈지 여부는 앞으로의 몇 년 안에 드러날 것이다.
 
[ 2011년 6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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