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1 - 종말의 시작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1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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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의 부제는 ’종말의 시작’이다. 

11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로 등극한 서기 161년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죽은 서기 211년까지를 다룬다.
11권의 부제가 ’종말의 시작’이기는 하지만, 실제 로마가 ’종말’로 치닫기 시작한 시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후손인 콤모두스가 황제로 올라서면서부터, 즉 180년부터가 된다.
로마는 왕국에서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으로, 서기 직전에 제정으로 체제를 변경하면서 지중해의 패권자로 자리를 굳혔고 ’오현제’ 시대에 들어서면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재위 시점이 로마 제국의 가장 최고의 전성기라면 이제 그 이후 제국의 역사는 줄곧 내리막길이 될 수 밖에 없다.
산이 높은 만큼 골이 깊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골은 로마를 강대하게 만들었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아 제정 시스템이 더 깊게 만들게 된다.
하지만 어찌하랴. 자연도 인간도 그렇게 활짝 피고 지는 것임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마르쿠스 황제는 동시대인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거의 2천년 동안 줄곧 높은 평가를 누린 황제다
그는 ’오현제’의 마지막 인물이고 ’철인(哲人)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마도 그가 ’철인’으로 불리는 이유는 <명상록>이라는 저서를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명상록>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와 같은 통치,정책 서적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적으로 자신의 생각, 성찰과 사색을을 기록한 책을 남겼기에 ’철인(哲人)’으로 남았을 것이다.
업적과 능력으로 보면 마르쿠스보다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누스가 더 위대한 통치자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기마상을 남겼고 그 기마상은 로마 황제의 기마상 22점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있는 동상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일곱 언덕 중의 하나인 카일리우스 언덕에서 서기 121년에 태어났다.
그는 베루스 집안 출신이었기에 엄청나게 부자였다. 물론, 그 가문도 히스파냐 속주 출신이다.
마르쿠스가 태어나기 100년 전에 로마로 이주했을 뿐이다.
할아버지는 여러번 집정관에 선출되어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고 아버지는 그가 세살 때 여의었다.
10대때부터 그리스 철학과 학문에 빠지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어린 마르쿠스 안토니누스의 됨됨이와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누스 베루스를 고려하여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거쳐 마르쿠스를 후계자로 삼으려한 것이다.
마르쿠스는 17세의 어린 나이에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후계자를 위한 양자로 삼았을 때, 황제와 협상할 정도로 자질이 있었다.
(물론,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아내와 마르쿠스의 아버지는 친남매 사이였기 때문에 아들이 없었던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마르쿠스를 양자로 삼기에 부담이 없었던 것도 마르쿠스나 로마에게는 운이 따른 것이었다.)
마르쿠스는 18세에 회계감사관에 선출되었고 ’카이사르’라는 호칭을 받았다. 차기 황제로 지명된 것이다.
다음 해 집정관 선거에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19살의 마르쿠스를 집정관 2명 중에 한 명으로 추천하여 선출되도록 하였다.
마르쿠스는 24세에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하였고 ’호민관 특권’도 부여받았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자신이 재위기간 23년 동안 로마 이외의 지역을 방문하지 않았을 뿐더라 마르쿠스에게도 속주 경험이나 군단 경험을 시키지 않았다.
그것이 나중에 황제가 된 마르쿠스에게 적지 않은 어려움을 주게 된다.
 
마르쿠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뒤를 이어 40세에 황제에 취임한다.
그리고 로마 제정 사상 처음으로 ’공동 황제’ 체제를 출범시킨다. 함께 양자이자 후계자로 키워졌던 31세의 루키우스와 함께 황제에 취임한 것이다.
마르쿠스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로, 루키우스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로...
그의 치적은,
161년 악천후로 홍수와 기근 처리
          파르티아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파견한 카파도키아 1개 군단이 궤멸됨.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프리스쿠스를 카파도키아 총독으로 임명하여 시리아로 진격
163년 프리스쿠스 군대가 아르메니아 전투에서 승리. 친로마 왕을 앉힘.
165년 프리스쿠스 군대와 시리아의 카시우스 군대가 파르티아군 격파
168년 마르쿠스와 루키우스가 도나우강 전선 시찰
169년 루키우스 도나우강 전선에서 돌아오다가 병사
170년 다키아 속주 총독 클라우디우스 프론토가 게르만족과 전투에서 패배. 2만명이 포로로 붙잡힘.
          마르코마니족과 코스토보치족이 도나우강을 건너 그리스 중부까지 쳐들어옴. 270년 만에 방위선이 뚫림.
171년 북아프리카 마우리타니아인이 이베리아 반도 베티카 속주에 침입. 빅토리누스 군대가 소탕
172년 1차 게르마니아 전쟁. 고전 끝에 마르코마니족과 전투에서 승리함.
          이집트에서 폭동이 일어나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진압.
          아르메니아에서 쿠데타 발생. 카파도키아 총독 베루스가 외교로 해결
173년 로마군 총공세로 마르코마니족, 콰디족, 야지게스족과 전투에서 승리. 강화를 맺음.
175년 마르쿠스가 죽었다는 소문을 믿고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황제를 자칭
          원로원이 카시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
          콤모두스가 성년식을 치르고 ’카이사르’ 호칭 받음.
          마르쿠스 도나우 전선에서 계속 전투를 치르고 게르마니아 족들과 강화를 맺음
          카시우스 부하 백인대장에게 살해됨.
177년 콤모두스 집정관에 취임. 마르쿠스가 공동 황제로 지명
179년 2차 게르마니아 전쟁 시작.
          로마군 총공세로 마르코마니족, 콰디족, 야지게스족 격파. 도나우강 북쪽 120km까지 진격
180년 마르쿠스 겨울철 숙영지인 빈에서 사망(58세)
 
마르쿠스 황제에 대한 나의 평가 : 그는 비록 황제로서는 무난한 인물이었지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서 시작하여 뒤를 이은 여러 황제들과 원로원, 로마시민, 속주민들이 정착시킨 로마의 시스템과 정책, 로마군에 힘입어 경험이 턱없이 부족함에도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속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달리 그럼에도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정비하지 못한 인프라와 방위선은 뚫리게 된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게르마니아의 여러 부족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재임 시절 다른 속주민들처럼 살고 싶다고 요구했지만 안토니누스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거절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종합적인 준비와 계획도 수립하지 못했고 그것은 마르쿠스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 콤모두스 >
19세에 황제로 취임한 콤모두스...
콤도두스는 황제로서 부적격자였다. 마르쿠스는 왜 실력이 부족한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선정했을까?
작가는 마르쿠스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실력이 있는 다른 사람을 후계자로 선정하면 자식인 콤모두스 주변 사람들로 인해 내란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과연 그랬을까...??
나는 네로 황제 사후에 벌어진 로마의 30년 간의 대혼란 역시 콤모두스 시대와 비슷하게 전개된 것으로 생각한다.
마르쿠스가 네로 사후의 위기를 제대로 분석,평가했다면 더 적절한 선택과 판단, 준비를 하지 않았을지...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대한 나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콤모두스 치세의 과정을 보면,
180년 콤모두스 황제로 취임
          게르마니아 전쟁을 끝내고 부족들과 강화를 맺음.
181년 콤모두스의 누나 루킬라가 황제 암살을 기도하다가 미수에 그치고 유배된 후 살해됨.
          근위대장 파테르노 황제 암살기도 혐의로 살해됨.
182년  원로원 의원 8명 비슷한 혐의로 숙청됨
           근위대장 페렌니스 통치의 실권 장악
184년  브리타니아 1개 군단이 칼레도니아에서 침입한 야만족에게 패하고 군단장 전사.
          페렌니스 라인강 방위선에서 마르켈루스를 급파하여 패배를 설욕
185년  브리타니아 속주 군단이 콤모두스에 대한 충성 선서 거부하고 군단장을 황제로 추대
          페렌니스가 파견한 페르티낙스가 군단병을 설득
          콤모두스의 하인 클레안드로스의 음모로 페렌니스 살해. 클레안드로스가 근위대장이 되어 실권을 장악
186년 황제암살 기도 혐의로 매형 마메르티누스와 매제 부루스를 처형
189년  배급용 밀이 부족하여 일어난 폭동으로 클레안드로스가 민중에게 살해됨
          그 후 콤모두스의 애첩 마르키아, 남편 에클렉투스,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가 권세를 휘두름
192년  페르티낙스 콤모두스와 집정관에 취임.
          콤모두스 애첩 마르키아와 하인 에클렉투스, 나르키소스 등에게 암살됨(31세)
 
콤모두스가 살해된 이후 로마는 또 다시 내란에 휩싸인다.
 
< 내란의 시대 >
193년 페르티낙스,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황제로 취임.
         원로원 콤모두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함.
         페르티낙스, 레토 휘하의 근위병들에게 피살됨.
         전 아프리카 속주 총독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황제에 취임.
         가까운 판노니아 속주 총독 세베루스가 군단병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알비누스가 군단병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
         시리아 속주 총독 니게르도 군단병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
         원로원 세베루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
         율리아누스가 근위병에게 피살됨.
         원로원, 세베루스에 대한 ’국가의 적’ 규정을 취소하고 황제 취임을 요청
         원로원 세베루스와 알비누스의 공동 황제 취임을 승인
         세베루스 비잔티움 서쪽 페린투스에서 니게르와 전투에 패함
194년 소아시아 니카이아에서 세베루스가 니게르에게 승리. 니게르 전투 중 사망.
195년 세베루스가 니게르를 지지한 파르티아에 쳐들어감. 동방 방위체제를 재구축
197년 세베루스가 리옹 근교에서 알비누스와 전투에서 승리. 알비누스 자결함.
         세베루스가 원로원 26명을 알비누스파라는 이유로 숙청
198년 파르티아를 원정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속주화
201년 오스티아에서 테라치나까지의 세베레니아나 가도 공사 착수
202년 세베루스 아들 카라칼라 집정관에 취임
205년 카라칼라와 게타가 집정관에 취임.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가 카라칼라에게 살해됨
209년 브리타니아 원정. 하드리아누스 성벽 넘어 북쪽으로 진격
211년 세베루스 브리타니아 요크에서 사망
          카라칼라와 게타가 공동 황제로 즉위
          칼레도니아인과 강화를 맺고 로마로 귀환
212년 카라칼라가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에서 게타를 살해
 
이 내란의 원인은 직접적으로는 콤모두스 황제의 무능력과 정책 실패에 기인한 것이지만, 구조적인 문제점은 국가의 모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 너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황제가 사망하면 권력의 공백이 생기게 되고 이를 견제하고 제어할 세력이 없게 되는 것....
제정 시대에도 원로원이 제기능을 했다면 얼마든지 황제 공백 상태든, 내란 상태든, 군단이나 속주의 반란을 통제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원로원은 카이사르 집권 시기 때부터 이런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전문군인 출신의 속주 총독겸 사령관을 황제가 임명하는 것도 부작용이 되었다.
지도층에 대한 장병들의 존경과 신뢰가 사라졌기 때문에 권력의 공백상태가 되기만 하면 장병들이 황제를 추대하는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이런 경향을 정비하지 못한 데다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추가적으로 로마군대를 약하게 만든다.
 
세베루스는 재임기간 중 로마군에 대한 처우개선책을 몇 가지 시행했다.
1. 기존에 데나리우스 은화 300개를 지급하던 장병들의 기본 봉급을 375개로 인상했다. 115년 만에 인상이었다.
2. 모든 군단병이 금반지를 낄 권리를 주었다.
3. 일개 졸병이라도 능력이나 실적에 따라 백인대장이나 기병대장으로 승진할 수 있도록 한다.
4. 정식 결혼을 허가한다. 동거는 불가.
 
그런데 이 처우개선책이 선의로 시작되었지만 장기적으로 로마군을 약하게 만든다.
군대 생활이 너무 편해진 것이다.
봉급은 인상되고 출셋길도 열리고 20년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근무 중 결혼도 가능해졌다.
이제 예전처럼 만기 제대할 날을 애타게 기다리지 않아도 된 것이다.
작가는 이것들이 제국의 ’군사정권화’의 시초라고 보았다.
카이사르는 강력한 군대를 원하되 제대한 후 민간 신분으로 돌아가서 정착할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 의원 출마 자격도 군단병에게 유리하게 변경하고
퇴직 후 정착할 수 있도록 퇴직금 제도를 만들었는데 장병들이 군대에 안주하면 헛일이 되버린 것이다.
그래서 후세의 역사가들은 세베루스를 ’비로마적인 전제군주’로 평가한다.

 
 

[ 2010년 10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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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 - 구술로 풀어 쓴 한국전쟁과 전후 사회
이임하 지음 / 책과함께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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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전쟁에 대한 단상 두 가지...
한국전쟁에 참여한 백선엽이라는 사람을 이데올로기로 미화시키고 있는 관제 언론의 작태와 아직도 남아있는 거리의 사진전...
 
일제시대 일본군으로 복무하면서 독립군을 탄압,살해하고 조선민족을 억압하는데 앞장선 일찍 ’청산’해야 할 백선엽이 21세기에 들어서도 한국군의 ’위대한’ 장교로 ’미화’되는 것을 보면 한국현대사가 얼마나 왜곡되고 정의롭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 ’친일부일 반역자에 대한 국민적 규명’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런 인간들이 이 땅에서 떵떵거리는 것을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얼마나 한국현대사를 비틀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한다.
 
지난 주 광화문 근처를 지나는 길에 동아일보사 앞에 00단체 이름으로 625 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끌려갔다는 내용과 함께 각종 사진을 전시해 놓은 것을 보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두 세대 가까이 지났음에도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전쟁의 상흔과 이데올로기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1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한국전쟁에 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여러 종류의 영화와 방송 프로그램, 소설과 연구서적도 출판되었다. 하지만 기존에 상영되거나 출간된 콘텐츠들은 한국전쟁의 기원, 발발, 전개과정, 휴전 등 전쟁의 과정과 성격을 정치사적으로 다룬 것이 대부분이었다. 전쟁 종사자나 군경, 유엔 참전군인, 피난민, 피학살자의 이야기를 다룬 책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그 연구 대상은 개인적 경험이 대부분이었거나 국가 또는 남성이었다. 그동안의 연구는 ‘그들만의 한국전쟁’만을 다룬 셈이며, 한국전쟁의 전체상을 그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특히, 정부기관이나 연구소, 주류학자나 방송영상 관계자들이 다룬 대상은 고위 장교나 간부급 경찰, 반공반북 단체 간부나 어용 지식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그동안의 연구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실제 전쟁터에서 참혹한 전투를 치른 사병, 하사관들, 경찰들이고 절차도 동의도 없이 국가폭력과 우익폭력에 끌려간 국민방위군, 학도병, 민간인,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에 의한 피학살자, 행방불명자, 납북자들이다. 한국전쟁 후 60년 넘게 국가와 사회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만 할 뿐, 밑바닥에서 전쟁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낸 그들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도 않았고 위로하지도 보듬지도 배려하지도 않아왔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그들의 아내가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더군다나 한국전쟁 전후의 한국사회는 아직도 여성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제도와 관행, 문화가 엄존했기 때문에 그녀들은 이중, 삼중으로 고통받았을 것이다.

*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위원회, 2009년 자료 인용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전쟁미망인’은 연구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탄생한 전쟁미망인은 ‘국가적 차원의 전쟁’이 ‘개인의 일상’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전쟁 후 국가가 어떻게 개인에게 전쟁의 책임을 전가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전쟁미망인 연구는 기존 한국전쟁사의 비어 있는 반쪽을 채워줌으로써 한국전쟁의 전체상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전쟁미망인의 전쟁 경험이나 전후의 삶을 남긴 기록은 거의 없다. 정부와 언론의 자료, 전쟁 주체들의 회고록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전쟁 발발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기본적인 실태조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인터뷰를 통해 전쟁미망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 구술 내용을 토대로 그들의 삶을 복원하고 분석했다. 그 대상은 전쟁미망인(군경미망인·피학살자미망인·상이군인미망인)과 그 자녀 45명이다(인권 보호 차원에서 책에 실린 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
이들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또는 자신의 어머니)이 전쟁과 전후(戰後)를 어떻게 살았는지를 있는 그대로 증언한다. 전쟁 당시 남편을 잃게 된 경위, 피난 과정, 전후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 가장이 되어 사회로 진출한 정황, 국가의 전쟁미망인 서열화 정책 등이 그들의 입을 통해 서술된다. 저자가 사용한 ‘구술사’ 방법론은 주류가 아닌 소수자의 시선을 중시하고 행위자를 중심으로 역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최근 역사학 연구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전쟁미망인이라는 주제가 ‘구술사 방법론’과 결합됨으로써, 그동안 문헌 사료에 갇혀 있었던 한국현대사의 폭과 깊이를 더욱 넓고 깊게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 동아일보 및 서울신문 각 1950년 10월 7일, 11월 28일 

이 책은 오늘(28일) 공부모임의 교재다. 저자인 이임하씨가 직접 세미나에 참가하여 참석자들과 이야기하는 기회도 마련되어 있다. 저자가 구술자들과 나누었지만, 책 속에 담아내지 못한 많은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약속 때문에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해 못내 아쉽다.

저자 이임하는 ‘한국현대사와 여성’이라는 주제에 10년 넘게 천착해온 역사학자이다.
박사논문 [1950년대 여성의 삶과 사회적 담론](2002)을 통해 1950년대 한국전쟁과 여성, 여성의 경제활동과 지위 변화, 성 담론 등 그동안 한국현대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문제를 제기했다. 저자는 2006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연구과제로 한성대학교 [전쟁과평화연구소]에서 ‘한국에서의 전쟁경험과 생활세계 연구’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면서 ‘전쟁미망인’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전쟁미망인(과 그 가족) 45명의 구술과 5년여에 걸친 각고의 연구 끝에 이 책을 완성했다.
저자는 전쟁미망인 연구를 통해,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해 들려준다. ‘가족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국가) 폭력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작동되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전쟁의 고통에서 살아왔는지,’ ‘그 고통을 말하지 못하고 왜 침묵해야 했는지,’ ‘전쟁이 여성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등등, 이들의 이야기는 국가의 공식 기억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쟁 동안 그리고 전쟁 뒤에도 지속된 한국전쟁의 숨겨진 역사를 들려줄 것이다.  
 
------------------- * 저자 이임하는 누구인가? ----------------------------
965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덕성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 여성의 삶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한국전쟁 연구의 변두리에 머물렀던 ‘전쟁미망인’의 존재에 주목했고, 5년여의 연구와 전쟁미망인 45명의 구술 자료를 토대로 이 책을 집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계집은 어떻게 여성이 되었나][여성, 전쟁을 넘어 일어서다][한국 여성사 편지]가 있으며 [동아시아와 근대, 여성의 발견][일상사로 보는 한국근현대사][1970년대 민중운동 연구][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죽엄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등의 집필에 참여했다. 그 밖에 [한국전쟁 전후 동원행정의 반민중성] [1950년대 여성교육에서의 성차별과 현모양처 이데올로기] [해방 뒤 국가건설과 여성노동] [‘전쟁미망인’의 전쟁경험과 생계활동], [상이군인들의 한국전쟁 기억] [한국전쟁기 유엔민간원조사령부의 인구조사와 통제] 등의 논문이 있다. ------------------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전쟁미망인’을 주제로 설정한 배경을 설명하고 구술사 방법으로 이 연구를 진행했음을 강조한다. 1950년대에 정부의 통계와 언론의 보도를 통해 50만명에 달하던 ’전쟁미망인’의 수는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군사정권의 조작과 정책을 통해 1963년 27,000명으로 축소되었다. 마찬가지로 상이군인 수도 축소하였다.  "이는 여성이 입은 피해와 국가의 책임을 최소화하면서 국가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려는 의도 아래 이루어졌다. 이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성들의 힘을 분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역사적 주체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았다."

* 보건사회부 1954/1957/1959년, 육군본부 1955년, 대한군경원호회 1960년 자료

’구술사 방법’은 그동안 정부와 학계가 방치하여 자료와 정보가 전무한 경우에 적절한 연구방법이 되며 소수자와 약자층에 대한 연구로 중요한 방법이다. "구술은 주류가 아닌 소수자의 시선을 중시하기, 행위자 중심의 역사 구성, 남성 중심의 역사에 대항하기, 기억 저편에 있는 민중의 기억 읽기, 경험에 내재된 권력 읽기" 등을 제기한다고 구술자 연구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1부. [전쟁과 집 밖 세상]에서 저자는 전쟁미망인의 전쟁 경험을 군경미망인, 피학살자미망인, 상이군인미망인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고(또는 보도연맹 등에 의해 남편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고), 남편의 전사 소식(학살 소식)을 접하면서 ‘전쟁미망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글 속에서 국민방위군에 참여했던 미망인들은 모두 남편이 스스로 자원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군대, 경찰의 폭력과 강제로 끌려간 것임을 말한다. 이를 통해 상당수의 남자들이 타의로(국민방위군 자격으로) 전쟁에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처음부터 국민방위군은 동원 대상자를 적으로부터 격리시킨다는,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동원 대상자를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한 상태에서 조직되었다."면서 이승만의 연설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국민방위군은 당시 무리한 징집과 지휘부의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상당수가 행방불명 또는 굶어 죽거나 얼어죽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해체되었다. 

* 여기서 저자는 전쟁의 원인을 다루지 않았듯이 정부, 군대, 경찰, 우익폭력자들의 ’국민보도연맹’이나 민간인 학살의 원인에 대해 다루지 않고 있다. 추정컨대, 당시 정부관료와 군인, 경찰력의 80% 이상을 점유하던 일제 앞잡이들(우익폭력단의 경우 99%)은 북한에서 일제 앞잡이에 대해 철저하게 처단한 것을 알고서 법절차와 제도를 무시하고 사적으로 좌익성향, 가능성이 있는 사람, 개인적인 원한을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것으로 보인다.

2부. [낯선 세상에서 생존하는 길]에서 구술자들은 남편들이 전쟁터에 나간 후, 혼자 집안을 책임져야 했던 전쟁미망인에게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말한다 . 그들은 농업 노동과 가사 노동을 병행해야 했고, 행상과 좌판은 물론이고 공장노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미망인은 남성의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남성은 바깥일 하고 여성은 살림과 육아를 맡는’ 기존 시스템을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깨뜨린 장본인이기도 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구술에 참여한 전쟁미망인들은 대개 한국전쟁 당시 임신한 몸이였거나 아이를 낳은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도 많았다. 그들이 전쟁에서 겪어야 했던 이중, 삼중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3부. [가부장과 ‘아직 죽지 아니한 아내’] 남편이 부재한 집에서 젊은 전쟁미망인은 시부모와 어린 아이들을 보호하고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시부모는 전쟁미망인의 일상을 통제하고 감시했고, 전쟁미망인은 가족관계 안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다. 전쟁미망인에게 남편의 집은 억압의 장소였다. 일상의 감시와 통제는 ‘며느리 만들기’의 하나이다. ‘며느리 만들기’는 가족단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전쟁 피해를 ‘전쟁미망인’에게 책임지우는 방책의 하나였다.

4부. [여성 가장과 새로운 공간의 창출] 전쟁미망인들은 어떻게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었고 전략들을 세웠는가? 군경미망인에게 분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피학살자미망인에게 분가는 세상 밖으로 내몰리는 경험이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처지에서 여성 가장으로 어떻게 자신들의 공간과 전략을 만들었을까?
전쟁미망인들은 법과 제도, 문화에 의하여 가족과 남편의 재산에 대한 상속권이나 관리권을 친척들에게 빼앗겼다. 그리고 그나마 쥐꼬리만큼 나오는 정부의 원호자금 역시 상당기간 동안 시부모나 시댁 식구들에게 갈취당하였다.

5부. [봉쇄된 균열]
한국전쟁으로 기존의 가치는 모두 중심을 잃어버렸다.
한국전쟁 종전 직후부터 대부분의 정권, 특히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권에게 현충일은 전쟁 피해자에게 살길을 마련해주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이 아니라 ’군사주의’와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런 점에서는 한국전쟁의 사후처리를 담당하는 국가보훈처와 그 담당 공무원들, 관변단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가는 ‘질서’를 유지해야 했고 해결책은 희생양을 찾는 일이었으며, 그 희생양은 주로 여성이었다. "국가는 전쟁미망인의 목소리를 침묵으로 가두었고, 자신의 전쟁 책임을 일상에서 감추어버렸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의 문제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에필로그 : 전쟁과 트라우마] 전쟁미망인들은 한결 같이 "전쟁은 없어야 돼"라고 말한다. 저자는 전쟁미망인 연구를 통해, 한국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들의 상처가 치유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국 여성들의 성 차별은 21세기인 지금도 사회 곳곳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남아있다. 가족법과 상속법 등 제도적인 평등조치는 일부 이루어져 있지만, 저자가 말하는 ’아내 만들기’와 ’며느리 만들기’는 많은 가족에서 잔존해 있다. 여성의 가치와 여성의 가사노동은 아직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가사노동과 보육 역시 국가,사회적으로 올바르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국가와 사회가 더 바꾸고 노력해야 하는 문제가 산적해 있는 것이다.
이는 여성 스스로도 깨닫고 요구해야 하는 것이고 여성 뿐 아니라 남성, 시민단체, 정치세력 역시 생활 하나하나에서부터 변해야 하고 노력해야만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치른 생존자들은 대부분 지금 70대 이상의 노인들이다. 그들은 어떤 이유와 경험을 통해서든 한국전쟁의 상처를 온몸으로 겪었고 그 피해가 몸과 마음에 남아 있다. 그들은 90% 이상이 피해자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60년 동안 생활과 의식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왔고 그들에게 ’전쟁이라는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다. 그들의 트라우마는 그들의 가족에게, 아들딸에게 여러가지 방식으로 전달되었고 따라서 우리 역시 그 영향을 그동안 받아왔고 지금도 받고 있을 것이다.
국가와 사회는 그들의 상처를 위로해야 하고 보듬어야 한다. 아무리 늦었더라도 그들에게 보상해 주어야 하고 한국전쟁 동안, 그리고 그 이후 국가와 사회가 그들을 보살피지 않은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남은 여생 동안이라도 한국이라는 국가,사회 공동체에 몸 담았던 인생을 보람있게 기억할 것이고 피해의식과 죄의식에서 벗어날 것이고 후손들에게 공동체의 중요함을 이야기할 것이고 자기 세대들끼리, 후배 세대들과 화해하고 어울릴 것이다.
’늦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장 적당한 때일 수 있다’라는 말을 이제라도 떠올리면서...
 
전쟁피해자 뿐 아니라 한국현대사는 어떤 측면에서 돌아보아도 왜곡과 부정의 연속이다. 일제의 잔재는 청산되지 않았고 독립투사들은 배제, 탄압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학문, 사법, 행정,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친일 매국노들이 수 십년 간 한국의 모든 기득권과 원력을 행사하였다. 역사는 그들을 단죄하지 못했고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지도 못했다. 봉건제도는 기형적으로 미군정과 식민지식 한국사회에 잔존했다. 한국 현대사는 ’부정과 부패’의 역사가 되었고 지금도 정치, 경제, 사회, 사법, 언론, 학계 등에 뿌리깊게 박혀있다. 기득권 세력은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은 그러한 왜곡된 제도와 질서를 더욱 나쁜 방향으로 몰고 갔고 민중들은 한동안 이에 대항하지 못했다. 그들은 군사적인 폭력을 기반으로 기득권을 유지하였고 국가의 권력과 부를 일부가 나누어 강탈해왔다.
다행히 1987년에 민중들이 주축이 되어 기득권에 항거했고 그 과정을 통해 최소한의 정치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어냈다. 정치적, 사회적 민주화를 이루어내기 시작하면서 경제 민주화도 조금씩 확대되어 갔다.
하지만, IMF는 경제 민주화의 진전을 가로막았고 민주개혁을 표방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국내외의 자본세력과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침탈을 방어해내지 못해다. 그 결과 어렵게 확보한 정치적,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지금 위협받고 있고 경제 민주화는 후퇴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지켜야 하고 정치경제적 민주화를 진전시켜야 한다. 그와 동시에 왜곡된 한국현대사 역시 하나씩 바로 잡아야 한다. 물론 그것은 ’보복’과 ’처단’이 목표가 아니라 ’진실’과 ’정의’와 ’사과’와 ’화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지난 현대사를 바로 잡지 않으면 여기 저기 숨어있던 ’부정과 부패’가 지금보다 더 기승을 부릴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기억하고 되새기고 노력하고 바로잡지 못할 경우, 역사는 후퇴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준다.
 
 
* 책 속의 문장 :
- 한국전쟁 기념사는 대개 ‘북의 침략’은 자유를 위협하는 행위이므로 세계가 ‘침략자를 분쇄’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당면한 과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한국전쟁 기념사는 매년 이러한 형식을 취했는데 ‘국군 장병’과 ‘유엔군’을 추모하는 것 이외에 어디에도 전쟁을 겪은 ‘국가’로서의 전쟁 피해자와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 전쟁 피해자와 희생자들의 이야기는 전쟁의 원인뿐 아니라 전쟁의 과정과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해 들려준다. ‘가족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국가) 폭력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작동되었는지,’ ‘전쟁 뒤에도 폭력은 어떻게 재생산되었는지,’ …… ‘전쟁이 여성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 이들의 이야기는 국가의 공식 기억인 ‘원인과 그에 대한 책임’이라는 구도와 다르게, 전쟁 동안 그리고 전쟁 뒤에도 끝나지 않았던 한국전쟁의 잊힌 역사를 들려줄 것이다. (p.19~20)

- “쏙 빠져나가면 될 텐데 …… 그 바보 같은 놈이 따라갔다” 곽희숙의 남편은 “군인 끌려 나갈 적에”도 “소 끌고 가서 일하고 온 사람을” 갑자기 영장이 나왔다며 “저녁에” 데리고 나갔다. 곽희숙은 다섯 살, 세 살, 백일 지난 아이들이 있었고 매일 벌어 생계를 유지해야 했음에도 그런 개인(가족)의 생계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 국가는 동원으로 인한 생활고로 가족이 해체될 위기에 있는데도 그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우리 친정아버지가 만날 …… ‘그 바보 같은 놈이지. 여― 여이― 문전(처갓집 앞)을 지내야 하는 놈이, 우리 처갓집에 잠깐 들어다보고 올 꼬마 이카고 쏙 빠져나가면 될 텐데 …… 그 바보 같은 놈이 따라갔다’고 …… 시골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배운 것도 없고 골짜기에서 살아놔 노니 그리 그리 …···” 되었다고 이경순은 말한다. (p. 47~48)

- 임신 3개월이었던 구영선은 남편이 소집되어 나간 뒤 집이 통영이었기 때문에 트럭을 타고 마산으로 갔다. 임신 초기라 먹지도 못하고 토해냈다. 굶주리면서 임신 내내 전쟁터를 돌아다녀야 했다. 자신을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표현할 정도로 의식이 없는 몸 상태로 지냈다. 만삭인 채 통영 시댁으로 갔을 때, 본인을 향해 겨눈 총도 ‘아― 튀어나오는 건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감각이 둔해지고 의식이 없었다. 이 과정을 박수영은 “아이고― 배는 불러가지고 30리를 걸어가는데 요기만 조만치만 가도 오줌이 마렵고, 어휴― ‘여기서 차라리 내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랬어요. ‘죽으면 너[희]들도 편하고 나도 편하겠다’”라며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숙자도 만삭이어서 출산일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피난을 갔는데도 피난 가지 않았다. (p.62~63)

- “음흉하기가 짝이 없다” 이들의 결혼은 대개 남편의 상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정상호는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가 친구 사이라 “서로들 약주를 좋아하다 보니께 ‘네 딸 나 다구?’ ‘사위 삼자’”면서 결혼에 이르렀다. 그이는 시집에 와서 아랫목에 누워 있는 남편을 보고 나서 ‘속아서’ 결혼했음을 알았다. 정끝남도 형제들 가운데 막내로 올케 친정어머니의 소개로 결혼했는데 남편의 상이를 모른 채 결혼하고 나서는 1년 동안은 무서워서 말도 못 건넸다고 한다. 이성원은 자신의 경우에는 일제 강점기 때 정신대에 동원시키지 않기 위해 결혼했던 것처럼 피난 때문에 결혼을 서둘렀다고 했다. 서둘러서 간 곳은 ‘경상’이라고 듣던 것과는 달리 방에 누워 있는 신세였다. 이를 두고 이성원은 “음흉하기가 짝이 없다”고 표현했고, 시댁 쪽은 상이 등급이 결혼에 지장을 줄 거라고 염려해 상이 등급도 내려놓았다고 했다. (p.121)

- 먼저, 전쟁미망인은 노동을 통해 근대의 기획, 곧 공사 영역의 분리와 사적 영역에서의 현모양처라는 틀을 깨뜨렸다. 공사 영역의 분리는 근대의 기획 가운데 성별 그리고 노동시장을 조직하는 중심 논리이다. 남성은 노동시장에 나가 노동자이자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 부양을 책임지는 존재임에 반해 여성은 가정에 남아 어머니나 주부로서 남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존재로 여겼다. …… 그런데 이 논리는 전쟁미망인에게 적용될 수 없었다. …… 전쟁미망인들은 쟁기질만 못했을 뿐 모든 농업 노동을 혼자서 해왔다. …… 이처럼 농업 노동에서 차지하는 남녀의 역할은 한국전쟁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것을 가속화시킨 장본인은 전쟁미망인이었다.(p.172)

- 상이군인의 몸은 결혼한 여성들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은 생계 활동을 하면서 남편의 몸을 돌보아야 했다. 육체적 고통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정신적 타격은 오랫동안 남아 있게 마련이다. 전쟁미망인은 분가를 통해 시가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누워 있을지라도 ‘가부장’인 남편이 존재했고, 남편의 의심과 언어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언어폭력은 상대방에 대한 무시와 멸시를 동반했고, 그 폭력에 노출되었던 당사자는 자존감을 상실했다. (p.208)

- 성장하면서 학살당한 아버지를 기다린 시간은, 성인이 된 뒤에는 짐이 되어 앞길을 막는 작용을 했다. “우선 내가 받은 건 그런 스트레스. 그래 크게 요약을 하면 첫 번째 내 연좌제 했던 이런 것에서 오는 경제적인 어려움, 두 번째 그 산소 없을 때 자식들에 대한 저기, 또 그 아버지 없이 자란 저기 평판. 이런 거를 그냥 말로는 쉽게 표현하는데 이것을 살아오면서 피부로 느낀 사람은 엄청난 그 저기가 오는 거여. 그래 제가 우리 자식들한테는 후회 없이 할려고 노력을 했어요.”(이성모) 그는 연좌제로 인해 사회생활에서 좌절을 겪었다. (p.269~270)

- 유럽 여러 나라들이 전쟁 피해자로 군경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은 것에 비해, 우리나라의 원호법은 군경, 군속과 민간인을 구별했고 전쟁 피해자인 민간인은 이 범주에서 제외시켰다. 또한 연금을 비롯한 보상을 받는 대상자 면에서도 군경미망인뿐 아니라 군경과 군속의 인원수가 급격히 감소했다. 소수의 군경미망인만 전쟁미망인으로 인정하고 그 외 다수의 전쟁미망인은 전쟁 피해자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전쟁 피해자를 수적으로 줄이는 방식은 전쟁미망인뿐 아니라 상이군인에도 적용되었다. (p.368)
 
[ 2011년 6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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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0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0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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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의 부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10권은 도로, 수도 등 로마의 인프라, 즉 사회간접시설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작가는 가도, 다리, 수도 등 하드 인프라와 의료, 교육 등 소프트 인프라에 대해 한꺼번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그런데, 인프라를 정리한 것 치고는 내용이 조금 부실해 보인다.
하드 인프라만 하더라도 항만, 성벽, 군단기지, 목욕탕, 신전 등을 추가할 수 있고 소프트 인프라만 하더라도 의료, 교육 이외에 법률, 세금, 재정, 국방, 지자체, 식량 등 훨씬 많은 것을 다룰 수 있는데 다 빠져있다.
작가 말로는 ’각 권에 틈틈히 충실하게 다루었다’고 하는데 그것만이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작가에게는 조금 실례일지는 모르지만, 혹시 15권을 맞추려고 중간에 인프라를 끼워넣은 것은 아닌지...ㅋ
 
작가가 정리한 하드 인프라는 가도, 다리, 수도다.  

우선 로마 가도는 작가 말대로 굉장하다. 그리고 가도는 수도와 더불어 인류역사에 상당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보는 로마 가도의 특징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가도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인들이 가도를 단순하게 ’통행로’나 ’군사로’가 아니라 종합적인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건설했다는 점과
  목적지를 연결하는 가도라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가도와 가도를 연결하여 로마식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로마 가도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가도는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즉 종합적으로 이용되었다.
  또 중요한 점은 로마 가도는 국가와 지도급 인사들에게 있어 ’당연히’ 건설해야 하고 확장해야 하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국가 재정 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는 기본이고 원로원 의원이나 유력자들이 모두 앞다투어 가도를 건설하여 기증하게 된다.
  로마는 기원전 120년에 이미 최초의 ’샘프로니우스 도로법’을 제정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로마의 기본적인 인프라에 대해 동일한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둘째, 건설 주체
  가도를 실제 건설한 주체의 경우 간선도로는 대부분 로마군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가도 건설의 최초 목적이 대부분 군사용이었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단체나 사도의 경우 민간 사업자에게 용역을 의뢰하여 건설한다.
셋째, 가도의 구조...
  로마 가도의 수평구조는 4m의 차도, 차도 양 옆에 3m 전후의 인도, 그리고 배수로 등 평균 약10m로 이루어져 있다.
  수직구조는 4개층으로 구성되어 최하층은 자갈층, 2층은 돌+자갈+점토, 3층은 잘게 부순 돌, 최상층은 접합면이 딱 들어맞도록 70x70cm의 마름돌
  차도는 양 옆으로 기울기를 두어 빗물이 흘러가도록 하고 양측에 배수로를 만들어 빗물을 차도의 바깥으로 빼내도록 한다.
  차도 옆에 숲이 있을 경우 적당한 폭으로 나무나 풀을 제거하여 나무 뿌리로 인하여 가도가 망가지는 것을 방지한다.
  이 로마 가도는 로마인들이 유지보수를 포기하기 시작한 서기 3세기 중반부터 150년이 지난 후에도 가도를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0권을 읽다보면 연말이 될 때마다 시내의 도로와 인도를 들어내고 다시 아스팔트와 보도석을 까는 국내 상황이 우울해진다...)
넷째, 가도의 체계...
  최초 로마 가도는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남북을 X로 교차하도록 건설했다.
  모든 로마 가도에는 1로마마일(약1.5km)마다 이정표 역할을 하는 돌기둥을 세워 가도 사용자들이 거리를 가늠할 수 있도록 설치했다.
  로마인들은 조선시대의 파발처럼 국영 우편제도를 활용했고 적정한 거리마다 말을 갈아타고 마차를 정비하는 ’스타티오네스’를 설치하고 그곳에 숙박업소와 음식점 등을 만들어 놓았다.
다섯째, 가도의 길이...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500년 동안 로마인이 건설한 도로의 총길이는 간선도로만 80,000km이고 지선까지 합하면 무려 15만km나 된다.
  이 길이는 이탈리아 반도 뿐 아니라 갈리아 속주, 브리타니아 속주, 히스파냐 속주, 발칸반도, 소아시아 속주, 이집트, 북아프리카 모두 포함한다.
여섯째, 가도의 활용과 시스템...
  가도에 대한 로마인의 인식은 ’건설’ 뿐 아니라 ’유지보수’ 역시 정책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로마 집정관이나 통치자, 황제, 속주총독과 지방자치단체장은 로마 가도와 인프라의 유지보수에 적절한 예산을 배정,집행하고
  집행부서(내각)과 공식적인 직책에 인프라 유지보수 담당자를 임명하여 관리하도록 했다.
 
작가는 10권에서 로마의 가도를 정리하면서 중국 진나라 시대의 만리장성과 비교한다.
진나라의 만리장성은 기원전 3세기에 진시황이 건설했고 총 길이는 5,000km이다.
작가는 국가규모의 대규모 토목사업이 로마는 가도로, 진나라는 방벽을 건설했는지를 비교하려고 시도한다.
물론 결론은 양측 국가와 민족의 사고방식 차이를 보여주려는데 있다.
방벽은 사람의 왕래를 차단하지만, 가도는 사람의 왕래는 촉진한다는 것...
로마의 역사는 1,200년이고 진나라의 역사는 200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방벽과 가도를 단순하게 비교하면서 두 나라 민족의 사고방식과 문화, 정책을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작가가 방벽과 가도를 통해 두 나라를 비교하려면, 중국의 진나라와 그 전후 시대에 대해 로마사만큼 연구한 후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방벽으로만 보면 로마 역시 로마 제국의 국경을 결정한 후 그 경계에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건설했다.
나머지 지역의 경계에 방벽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그 경계가 천연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북쪽은 바다(북해), 서쪽도 바다(대서양), 남쪽은 사막, 동쪽도 바다(흑해와 에게해)와 사막(아라비아 사막)...






아무튼 두 번째 하드 인프라인 로마의 다리도 상당히 역사적 의미가 있어 보인다.
특히 배수 설비와 교각 공법, 수도교가 그렇다.
로마인들은 21세기에도 사용되는 교각 설치공법을 기원 전에도 사용했다.

 
 
로마의 수도는 혀를 내두르게 될 정도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수도교’였다.
로마의 수도라인 설치는 기원전 312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진나라는 기원전 224년에 건국되었다. 일본에는 국가다운 국가도 없었지만...)
가장 많았을 때 로마 시내에는 수도 라인이 최초 라인인 ’아피아 수도’ 등 총 11개에 이른다.
총 길이는 무려  449.5km에 달하고 하루에 로마로 들어오는 수돗물은 1백만 세제곱미터에 이른다.
인구가 100만명이라면 1인당 1세제곱미터의 수도를 공급하는 규모다.(누수 고려하면 0.5~0.6세제곱미터)
20세기 말에 서울, 도쿄, 로마, 파리, 런던시내의 수돗물 공급량은 약 0.5세제곱미터 정도였다.
수도는 로마의 문화인 목욕장과 특히 관련이 크다.

  
로마인들의 하드 인프라는 동시대 지구상의 어떤 민족이나 국가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그러한 뿌리가 있었기에 뿌리를 되살린 르네상스 이후에 서구가 다른 대륙을 뛰어넘어 또 다시 전세계를 지배,재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로마의 이런 뛰어난 역사를 한 입에 말아먹어 인류 역사의 발전(통상적인 의미에서)을 가로막은 것은 기독교도였다.
(내가 지적한 것은 당시의 기독교도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소프트 인프라 역시 로마가 다른 제국과 다를 수 밖에 없는 창조성과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솔직이 작가가 10권에 직접 다루는 의료와 교육은 로마의 인프라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그것은 로마의 시스템이자 문화 중에서 가장 특이한 부분이다.
의료와 교육은 정부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민간이 주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의료 부분은 로마인의 ’인생관’ 또는 ’죽음관’과 관련이 있다.
로마인은 ’달이 차면 기울게’ 되듯이 사람이란 늙으면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죽음에 대한 태도였다.
그래서 로마인, 특히 상류층이나 귀족으로 올라갈수록 크게 아프거나 죽을 때가 되면 식음을 전폐하여 죽음을 앞당기려고 했다.
어린이나 청장년층의 경우 신전에 들어가서 기원을 들이거나 도시 외곽에 집단 휴양소를 지어서 병과 싸우도록 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로마는 유아 사망율도 높았다.
로마에는 공식적인 의료기관이나 병원이 없었다.
그리스 도시국가 출신 중 의료를 연구한 학자들이 로마에 와서 사설로 의료기관을 운영하기는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에 나가서 전투 중에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대규모 병원시설을 건립하고 의사와 간호사를 대기시켜 놓기는 했다.
로마군대의 군단 규모는 약6,000명인데 그 중에는 의사와 간호사가 기본적인 지원병력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로마에서는 교육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민간이 주도하였다.
로마는 그리스의 종교를 받아들여 로마화하였는데 교육의 경우에는 그리스의 교육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로마의 상류층이나 기사계급의 자제들의 경우 그리스 도시국가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교육을 받았다.
로마가 망할 때까지 유지한 정책과 시스템 중에는 ’잘하는 사람(지역)이 잘하는 분야에 집중하기’가 있다.
그리스의 경우 일찍부터 예술과 교육, 학문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굳이 로마 내에 예술이나 학문을 위한 기관을 설립하지 않았다.
로마는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면서도 예술과 교육의 경우 그리스의 전통과 강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로마의 일반적인 교육방식은 10세 이전까지는 노예나 어머니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10세가 넘어서면 그리스 학자를 초빙하여 가르치거나 그리스 학자들이 로마 시내에 소규모로 개설한 학원에서 배우도록 한다.
10세 이전에 배우는 초등교육() 교과목은 라틴어로 읽기, 쓰기, 셈하기...
10대에는 중등교육(그람마티키 스콜라)은 17세까지이고 그리스어, 문학, 역사를 배운다.
10대 후반이나 20대에 들어가서 법률을 공부하거나 더 높은 학문을 배우려면 그리스 도시국가로 가게 된다.
(지원병으로 바꾸기 전까지 로마인들은 17세에 군대에 입대했다.)
17세에서 20세까지는 고등학교(레토리스 스콜라)에서 변론이 주요 과목이었다.(변호사나 정치가를 키우는 것이 목적...)
17세 이상부터 추가적인 전문 교육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나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 유학을 간다.
 
법률 등 다른 소프트 인프라는 생략... 

 [ 2010년 10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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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1-06-2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과 사진들을 쭈욱 살펴보니 금방이라도 로마에 다시 가보고 싶어지는군요.
 
비노바 바베 역사 인물 찾기 12
칼린디 지음, 김문호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법정스님의 저서 [내가 사랑한 책들]에 소개되어 있는 50여권을 올해 중에 다 읽는 것이 년초 목표였는데 여의치가 않다. 이 책은 소개된 책 50여권 중 13번째 책으로, 칼린디가 쓴 현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비노바 바베의 인물전(평전)이다. 비노바는 자신의 생애에 관하여 이야기를 꺼리고 또 자서전을 집필하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친밀한 협력자이자 제자였던 칼린디는 비노바의 이야기를 모아 그의 생애와 회고와 기억들을 엮어냈다.  
 
비노바는 세계적인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이자 사회개혁자이며, 동시에 20세기에 마하마트 간디, 사티쉬 쿠마르와 함께 인도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 천년 동안 전세계인들에게 정신적, 종교적 영감과 철학을 제시했던 부처, 예수, 마호메트와 마찬가지로 태어나고 성장한 장소와 관계없이 이 시대 사람들에게 정신적, 종교적 영감과 철학을 제공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비노바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어쩔 수 없이 현대사회의 가족, 교육, 사회, 문화, 그리고 개인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가족 내에서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말과 행동, 영성과 신념, 삶과 지향이 얼마나 아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게 된다. 근현대 교육제도와 학교의 모습에 대해서도 계속 고민하게 만든다. 비노바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인도의 기존 학교와 대학이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하인들’을 훈련시키는 커다란 공장에 불과하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21세기 전세계 학교와 대학은 당시 인도의 그것과 크게 다를까?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을 키우는 교육제도가 한국을 비롯한 OECD 국가들 중 얼마나 될까? 비노바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인간으로서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평생에 걸쳐 고민하고 실천했다.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최소한의 의식주를 누려야한다는 데 뜻을 세우고 신의 뜻에 살기로 마음먹은 후로 비노나는 스스로 ’무소유’의 삶을 살면서 동시에 바깥에 있는 약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실천하기 시작한다. 비노바는 ’토지헌납운동(부단)’을 시작으로 ’모든 사람이 베풀 것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베풀어야 한다’고 설득하면서 인도 전역에서 20년 넘게 사람들과 만났던 것이다. 비노바는 힘들고 나약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부당하고 불공정한 사회를 개혁하는데 참여하지 않는 어떤 종교도 ’신의 참 뜻’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수 많은 종교를 접하고 경전들을 연구하였으나 결국 모든 종교의 핵심 가르침은 ’돕고 함께 나누고 정신적인 충만’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스스로 실천해 나간 것이다.

 
내가 처음 비노바에 대한 글을 읽은 것은 사티쉬 쿠마르의 자서전 <끝없는 여정>에서였다. 1960년대에 인도에서 영국, 미국, 일본까지 직접 걸어서 핵무기 없는 세상과 평화를 전파했던 쿠마르는 1955년부터 1962년까지 비노바의 ’토지헌납운동’에 참여한 바 있었다. 
비노바는 법정스님만큼 내가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사상가이자 실천가이자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스승이라 할 수 있다.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 평생에 걸쳐 지켜온 무소유의 삶, 늘 책을 읽고 공부하는 자세, 어려운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불의와 부정의에 대한 단호한 배격, 정치와 권력과 조직에 대한 태생적인 거부... 이 모든 비노바의 생애는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무엇을 잘못하고 살아온 것인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깨닫게 해주고 있다. 부끄러운 삶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비노바의 말 한 마디, 그 정신과 실천을 내가 잊지 않는 한 나를 끝없이 깨우치고 채찍질할 것이다. 

인류의 정신과 미래를 제시하는 위인들의 삶과 정신에는 늘 공통점이 있다. 비노바는 ’무소유’와 ’자신에 대한 끝없는 탐구와 정진’이라는 측면에서 법정스님의 생애(법정의 [무소유]와 [아름다운 마무리])와 비슷하다. 간디와 함께한 ’비폭력저항(샤티야그라하)’의 정신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박홍규 교수 역 [시민의 불복종]), 마틴 루터 킹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 학교제도에 대한 비노바의 태도는 이반 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와 동일하며 태양과 달, 공기와 물, 숲과 땅이 오로지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으며 인류와 생명체 전체가 함께 누려야할 소중한 존재라는 비노바의 정신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정신(류시화의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과 통하는 것이다. 
비노바는 스스로 가장 크게 도움을 받은 사람은 ’샹카라’와 ’즈나나데바’와 ’간디’라고 하였지만... ’샹카라’는 철학자로서 그가 건설한 수도원들의 후대의 우두머리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상카라차리야 1세라고 한다. ’즈나나데바’는 위대한 시인이자 성자였던 ’마라티’를 말한다. 
 
--------------- * 칼린디는 누구인가? -----------------------------
칼린디는 비노바 바베의 제자였다. 칼린디는 1960년에 비노바를 만났다. 바로다 대학교에서 사회복지 석사학위를 받은 직후의 일이었다. 비노바와 절친한 사이가 된 칼린디는 그의 강연과 대화를 꼼꼼히 기록하였으며, 언론 출판 관계에서 그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1964년 비노바가 힌두어 월간지 <마이트리>를 시작하자 그녀는 편집장을 맡아 오랫동안 그 일을 이어갔다. 그녀는 비노바가 파우나르에 창설한 ’아쉬람 브라마비디야 만디르’의 회원이기도 하다. 이 책의 영문판 원본은 원래 1985년에 <마이트리>의 특집편집본으로 출판되었다. -----------------------
 
이 책은 서문과 맺음말, 그리고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비노바 자신이 쓴 자서전이 아닌 칼린디가 쓴 평전이지만, 책의 내용은 ’1인칭’으로 다루고 있다.
[시작하면서]에는 비노바의 인생에 대한 태도와 사상을 정리한다. 문장 하나 하나는 평생 진리를 추구하고 사랑과 진리 속에서 실천한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랑과 사상만큼 강한 힘을 가진 것은 없다’, ’나는 매순간 변하는 사람이다’, ’나는 브라만으로 태어났으나, 자발적으로 그 카스트와 결별하였다.’, ’나는 이념들을 가지고 있으나 고정되어 굳어버린 견해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 ’모두가 나의 친족이요 나도 그들의 친족이다.’, ’나는 어떤 문제를 보면 그 문제 깊숙이 뚫고 들어가 그 근원까지 파악하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 문제가 아무리 큰 것일지라도 결국 그것은 인간의 문제이며,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지성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한 사히의 삶과 개인의 삶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문제들을 찾아내고, 그 문제들을 비록력으로 극복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나 자신에 대해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만났던 행운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나는 외적인 형편들이 너무나 순탄하였다는 것을 회상하게 된다.’, ’우리가 누리는 가장 큰 행운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가 느끼고 있듯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이다.’ (p.30~37)
 
제1부. [야생마와 같던 청년시절 (1895~1916)]에는 비노바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까지의 삶이 서술되어 있다. 그는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의 콩간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 비노바는 카스트 계급 중 가장 높은 ’브라만’ 계급이었고 그의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돌아다니기와 책읽기가 취미였다. 그렇지만 그의 삶과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할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통해서였다. 
지주였던 그의 할아버지는 힌두교의 독실한 신자였으며 규칙적으로 서약을 하고 단식을 하였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예배를 드릴 때마다 비노바를 참석토록 하였다. 비노바는 자신이 정신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면 할아버지로부터 연유한 것이라고 말한다.
비노바는 어머니에 대해 말할 때, "나의 정신을 형성함에 있어서 어머니가 했던 역할에 버금갈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한다. 그의 어머니는 위대한 신앙인으로서 매일의 일상 속에서 진심으로 기도하고 감사함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비노바가 매일 식사하기 전에 툴시 나무에 물을 주게하고 음식을 따로 떼어 동물들에게 베풀 수 있도록 하는 등 그가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고 비노바는 그것을 가장 큰 선물로 기억한다. "우리는 먼저 베풀고 나중에 먹어야 하는 법이란다."(p.63) "우리가 무엇인데 누가 받을 만한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판단한단 말이냐?"(p.66) "한 사람이 평생 동안 먹을 음식의 양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단다. 그러니까 오래 살려거든 적게 먹도록 해라"(p.86)
과학자이자 요가 수행자였던 비노바의 아버지는 비노바에게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고 나이가 많은 사람을 공경하며 이웃을 돕는 것을 가르쳤고 비노바가 잘못한 것들을 깨닫게 해주었다. "아들이 열여섯이 되면 그를 친구로 대해야 한다."(p.84 이 말은 전설적인 현인 마누가 지은 책 [마누스므리티]에 들어있다. )
비노바는 열 살 때 브라마차리야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고 스물 한 살에 집을 떠났다. 그는 길을 떠나기 가지고 있던 모든 자격증들을 불살랐고 어머니에게 자신은 ’월급 받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은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제2부. [멍에를 받아들이다 (1917~1950)] 비노바는 출가했을 때 벵갈과 히말라야에 끌렸으나 출가한 이후 간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간디의 ’사티야그라하 아쉬람’에 찾아갔다. 그는 간디에게서 히말라야의 ’평화’와 벵갈의 ’혁명적인 정신’을 모두 발견했던 것이다. 비노바는 아쉬람에서 정치적 자유와 정신적인 발전을 하나의 동일하고 동시적인 목표로 삼는 간디를 발견하고 기뻐했다. 비노바는 ’카르마-요가’ 즉 영적인 행동의 길의 의미에 대해 배웠다. 그것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었고 비노바는 그것에 매혹되어 평생 간디를 스승으로 삼았다.
간디의 비폭력은 내적인 비폭력이었으며 정신의 폭력은 공개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나쁜 것이었다. 그 내적인 비폭력은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간디의 아쉬람의 목적은 "세계 전체의 복지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우리 나라를 섬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서약을 받아들인다." 서약은 열 한개로 진실, 비폭력, 절도 금지, 극기, 육체적 노동 등이었으며 비노바는 그 서약을 평생토록 지켜나갔다.
간디는 비노바를 인도의 지도자로 인정했고 1940년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제안하면서 그를 대표자로 선정했다. 
 

비노바는 간디를 정신적, 실천적인 스승으로 삼은 후 30년 동안 교육과 건설활동에 투신했고 그 활동의 근거가 되어야 할 원칙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는 가르치고 공부하고 성찰하는 일 등을 하였지만, ’사티야그라하’ 이외의 정치적인 활동에는 거의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사티야그라하’ 운동을 통해 평생 3회에 걸쳐 7년간 감옥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그는 "내가 진정한 아쉬람 생활을 경험한 것은 감옥 안에서였다."라고 말할 정도로 감옥 안에서도 성찰과 정진, 봉사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비노바는 아쉬람에서 처음 옷감 짜는 일을 배운 후 인도 사람들이 옷감짜는 일로 삶에서 독립을 이룰 수 있도록 연구하고 물레를 개발하고 실험하고 보급하였다. 도한 마을 봉사활동을 거듭하면서 카스트 제도의 가장 낮은 계급인 ’하리잔’들과 하나가 되고 그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인도 사회에서 가장 낮게 인정받는 일, 즉 똥 치우는 일, 가죽일, 천을 짜는 일을 했다. 그는 그러한 일을 사람들과 함께 해나가는 것이 ’사람들의 정신상태를 바꾸어 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3부. [멍에를 지다 (1951~1969)]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1948년 간디가 암살당한 후, 비노바는 "우리는 이미 정치적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이제 보다 더 철저하고 훨씬 더 어려운 과제에 착수할 때가 되었다. 그 과제는 바로 사회적 경제적 혁명이다. 옛 방식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p.227)라고 생각했다. 
1948년 인도의 중앙 행정부와 지역 행정부는 토지를 하리잔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정책을 펼치다가 포기했다. 1951년 3월 도보로 여행을 시작한 비노바는 사르보다야 대회를 끝내고 4월 우타르 프라데시 주를 여행하면서 포참찰리 마을에 도착한다. 그가 토지를 필요로 하는 하리잔들과 토지 소유자들과 면담하면서 설득하는 중에 지주인 ’쉬리 라마찬드라 레디’가 하리잔들이 필요한 토지를 헌납했다. 이로써 비노바의 ’토지헌납(부단)운동’이 시작된다. 비노바는 다음과 같은 말로 지주들을 설득했다. "모든 인간은 공기와 물과 햇빛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듯이 땅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한 개인이 필요한 것 이상으로 땅을 차지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가 땅을 내놓을 때는 그 스스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으로 내놓아야 한다."(p.249) 그는 지주들에게 ’헌납 토지 = 1/ (아들의 수 + 1)’의 토지를 헌납하기를 요구했다. 
1951년부터 1969년까지 20년간 비노바는 지지자들과 함께 인도 전역을 걸어 다니면서 지주들에게 토지를 헌납하도록 설득하였고 하리잔들이 헌납받은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공동체 마을이 자립적으로 운영되도록 이끌었다. 그는 20년 동안 무려 인도 국토면적의 1.33%인 400만 에이커(16.7만km2 = 50억 평)의 스코틀랜드 국토와 맞먹는 땅을 헌납받을 수 있었다.(남한 국토면적 10만km2) 그는 그 과정에서도 공부하기, 가르치기, 공동체 만들기, 하리잔 돕기,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비노바는 마을들이 스스로 자치를 해나갈 수 있도록 1957년부터 ’토지헌납운동’과 더불어 ’평화군(산티 세나)’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는 인구 오천 명당 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계산했다. 1958년부터는 ’삼팟티-단(재산의 육분의 일)’을 헌납하는 운동을 병행했고 1961년부터는 ’비가-카타(20분의 1)’ 운동도 시작한다. 비노바는 그 과정에서 아쉬람 여섯 개를 창설하고 수 많은 마을에 마을 자치가 이루어지도록 사람들을 교육하고 조직하였다. 그는 인도의 "가장 큰 과제를 인간 사회 전체를 비폭력의 사회로 만들어내는 일, 바꾸어 말하자면 비폭력적이고 강하고 자립적이며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두려움과 증오로부터 벗어난 그런 사회를 만들어내는 일이다."(p.353)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영적인 삶을 위해 기도, 침묵, 명상, 정신을 뛰어넘는 일, 선한 것을 공경함, 애정을 기르는 것, 식사 제어하기, 두려움의 정복, 빵을 위한 노동,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를 강조했다. 
 
제4부 [멍에를 벗고서 (1970~1982)] 비노바는 1969년 토지헌납운동과 아쉬람 건설, 교육과 조직화를 마지막으로 몇 년간의 준비 끝에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자신의 남은 삶을 성찰하고 정진하기 위해 외적 행위로부터의 자유, 책으로부터의 자유, 가르치는 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했다. 그는 여행도 포기하고 기도와 명상을 하며 내적인 삶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맺는 말] 1982년 건강이 악화된 비노바는 의사와 병원의 치료를 거부하고 80일 간의 단식 끝에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쇠약하고 지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이 온전하며 그의 얼굴은 영적인 광채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p.456) 
 

비노바는 평생 동안 인도의 정신적 전승에 대한 연구는 물론, 세계의 큰 종교들의 거록한 전승에 대한 연구에 정진하였다. 그의 사회적 활동은 그러한 연구에 기초한 것이었다. 비노바가 태어난 지 백 년 만에 빛을 보게 된 이 회고록은 흔들림 없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비폭력을 실천하고 영성을 추구하며 사랑의 힘을 간직해온 한 위대한 인물의 내적인 삶과 위적인 삶을 두루 밝혀준다. 그의 사상과 생애는 인도 전역에서 수 많은 제자들과 민중들에 의하여 전파되었고 칼린디와 같은 외부 협력자들을 통해 전세계에 전파되었다. 알게 모르게 간디와 비노바의 사상이 현대의 지성인들과 학자들,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쳐 현대사회가 비폭력과 저항을 통해 ’파괴와 붕괴’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간디는 1947년 비폭력 저항운동을 통해 인도의 독립을 이끌어내면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이자 성자로 거듭났다. 독립 당시 종교적인 갈등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는 것은 간디도 막지 못했다. 1947년 동파키스탄으로 존재하던 방글라데시는 인도군의 무력개입으로 1972년 독립하였다. 간디와 비노바의 사상과 실천은 독립 이후 인도에서 자주, 자립, 협동, 비폭력 등으로 이어졌다. 비노바는 인도 정부에 의존하기 이전에 민중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마을자치와 공동체운동, 토지헌납운동을 전개했고 정치권과 모든 인도 국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비노바의 사상과 실천이 국가적인 정책으로, 국민 전체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물론, 아직 인도에 많은 자치와 자립마을이 남아있고 비노바와 같은 사상가들의 정신과 실천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비노바의 사상이 인도 내부에 뿌리깊게 퍼지지는 못했다. 기존 종교의 모습은 ’카스트 제도’의 모습으로 남아 있고 어느 순간 ’대량생산, 대량소비’와 ’황금만능주의’가 새로운 종교로 인도를 잠식하고 있는 것 같다.
인도는 1980년대까지 간디와 그의 제자인 네루의 철학과 정책을 유지했으나 민중들의 삶을 개선시키는데 실패했다. 1990년대 들어 인도 정부는 자본주의 경제방식을 전면적으로 도입하면서 인도의 전체 GDP는 늘려가고 있으나 하층 민중들의 삶이 개선되고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으면서 가난한 방글라데시의 현실이 독립이나 무력분쟁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비노바의 사상과 생애가 그 이후 인도와 세계의 지성과 민중들에게 어떤 지침을 주었고 삶을 안내했는지 알고 싶다...
 
* 책 속의 책 : [바가바드기타], [우파니샤드], [마누스므리티], [요가-사트라], [즈나네스와리], [베다], [신약성서], [코란], [법구경], [담마파다], [자푸지], [나마고샤]
 
[ 2011년 6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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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현제賢帝의 세기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9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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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의 부제 : 현제의 시기

9권은 네르바가 병사한 뒤 트라야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황제로 승인받은 서기 98년부터 안토니우스 피우스가 역시 병사한 서기 161년까지를 다룬다. 
후세 역사가들은 이 기간과 더불어 베르나 통치 시점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통치한 시점까지를 ’오현제(五賢帝)’ 시대라 부른다.
작가도 9권의 부제를 ’현제의 세기’라 붙였고 후세 뿐 아니라 동시대 로마인들도 이 시기를 ’황금시대(Saeculum Aureum)’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세대도 동시대인들도 ’현제’고 ’황금시대’라 이름을 붙였으니 당연히 이 시대의 로마는 국가의 3개 과제인 안보와 식량(경제)와 내정(사회간접자본등)에서 로마 역사상 최고의 점수를 줄만 했다.
 
그렇다면, 왜 동시대인들도 후세대들도 그 시대를 ’오현제의 시대’ 또는 ’황금시대’라 불렀을까?
우선, 9권에서 다루는 3명의 통치자들이 이룩한 업적을 살펴보면,
 
< 트라야누스 황제 > 재위기간 : 서기 98년 ~ 117년
- 즉위 전 :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 :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서기 53년 에스파냐 남부 베티가 속주의 이탈리카에서 출생.
아버지는 로마 군대의 군단장 출신 원로원 계급
서기 75년 로마 군대의 대대장 진급. 라인강 군단 근무 -> 28세에 회계감사관 당선 -> 대대장 복귀 -> 원로원 진입 -> 34세 법무관 당선 ->
에스파냐 7군단 군단장 임명 -> 91년 집정관 선출 ->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겸 속주 총독 임명
서기 97년 네르바가 공동 황제로 지명하여 원로원에서 승인. 98년 네르바 사망 후 원로원 승인으로 황제 취임.
- 즉위 후 :
저지 게르마니아 및 고지 게르마니아 방위체제 완비
트라야뉴스 투자법 제정 : 농업 투자금액 중 이탈리아 반도 내에 1/3 이사 투자하는 법안
육영자금 설립 : 황제 세입에서 출자. 법률 시행은 지방자치단체에 위임.
제1,2차 다키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다키아 지역을 속주로 편입
공공사업 추진 : 목욕탕, 수도, 포룸 건설, 오스티아항 개조, 아피아 가도 복선화
파르티아 전쟁 승리 및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속주로 편입
유대 반란 진압
로마로 귀환 중 병사







< 하드리아누스 황제 > 재위기간 : 서기 117년 ~ 138년
- 즉위 전 :
두 번째 속주 출신 황제 :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서기 76년 이베리아 반도 히스파니아의 이탈리카 출생(트라야누스와 같은 고향)
조상은 카이사르 시대에 원로원에 진출. 아버지는 10세때 사망.
아버지가 트라야누스와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를 후견인으로 지명
열 살 때부터 로마에서 퀸틸리아누스의 학교에 다님 -> 그리스 문화에 너무 심취하여 고향으로 보내짐 -> 사냥에만 열중하여 로마로 돌아옴
-> 안찰관 근무 -> 판노니아 속주 제2군단 대대장 취임 -> 도나우강 하류의 먼 모에시아 속주 제5군단 대대장 -> 서기 101년 회계감사관 당선
-> 원로원 의사록 편집 -> 사비나와 결혼(사비나는 트라야누스의 누나 마르키아나의 딸인 마티디아의 딸) -> 제1차 다키아 전쟁 참전
-> 제2차 다키아 전쟁시 제1군단장 근무 -> 법무관 당선 -> 먼 판노니아 속주 총독 부임 -> 집정관 당선 -> 실업자(장군들의 반감) -> 파르티아 원정 참전
전쟁 후 파르티아 전쟁 총사령관으로 임명 -> 트라야누스 황제 로마 귀환 중 사망. 사망시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 -> 동방 군단 장병들이 하드리아누스에게 충성 맹세
- 즉위 후 :
황제명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Trajanus Hadrianus Augustus)
파르티아 전쟁 종결
로마에서 황제 암살 음모 발각. 근위대장을 통하여 전직 집정관 출신 원로원 4명 숙청
1차 방위선 현장 시찰(호위병과 문관들만 동행하여 진행) :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 론강 -> 리옹(루그두눔) -> 트리어(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고지 게르마니아 방위선 -> 게르마니아 방벽 보강 -> 마인츠 -> 저지 게르마니아 방위선 -> 본, 쾰른 -> 브리타니아 반란 진압 및 하드리아누스 성벽 건설 ->
히스파니아 속주민 내부 갈등 해소 -> 시리아 안티오키아 -> 파르티아 국왕과 강화조약 체결 -> 소아시아 서부 -> 아테네 -> 로마 ->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랑베즈, 팀가드 -> 랩티스 마그나 -> 로마
’로마법 대전’ 집대성
베누스 신전 건립, 판테온 개축, 하드리아누스 별장 건축
2차 방위선 시찰 : 아테네 -> 소아시아 에페수스 -> 시노페 -> 카파도키아 사탈라, 말라티아 -> 시리아 라파네아이 -> 안티오키아 -> 팔미라, 다마스쿠스
-> 아라비아 속주 제3군단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 유대 반란 진압 -> 로마
유대 반란 진압 결과 : 예루살렘 함락, 50개 도시 / 985개 마을 파괴, 사망 유대인 50만명, 예루살렘에서 추방, 지명 변경(유대 -> 팔레스타인), 할례 금지
매부 세르비아누스 주도의 후계자 옹립 움직임을 파악하여 세르비아누스와 손자를 처형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후계자 지명 -> 판노니아 속주로 군단 경험 중 병사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삼고 후계자 지명. 안토니누스는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인 루키우스를 양자로 삼다.
 

< 안토니누스 피누스 황제 > 재위기간 : 서기 138년 ~ 161년
- 즉위 전 :
서기 86년 로마 인근 라누비오에서 출생. 집안은 보르넨시스 속주의 원로원 계급
아버지가 공무로 자주 집을 비워 친할아버지+외할아버지 댁에서 어린시절을 보냄
서기 111년 회계감사관 -> 116년 원로원, 법무관 -> 120년 집정관 -> 아시아 속주 총독
- 즉위 후 :
황제명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티투스 아엘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피우스(Imperator Caesar Aelius Hadrianus Antoninus Augustus Pius)
하드리아누스의 인력을 그대로 승계, 연임시킴
브리타니아에 안토니누스 성벽 추가 건설

안토니누스 피우스 재임 기간에는 외적 침입이나 반란이 없었고 자신의 업적을 쌓는 것을 원하지 않아 특별한 기록이 없음
선임 황제들이 결정한 정책과 법률을 성실하게 집행하기만 함.
하드리아누스의 유언을 받들어 루키우스와 안니우스(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양자로 받아들임.
 
네르바 황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까지의 시기가 로마의 ’황금시대’이자 ’오현제’의 시기였던 것은 외형적인 결과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네르바 이전 시대가 30년간 네로 황제 암살부터 시작하여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도미티아누스 황제까지 연이어 살해, 암살되었고
황제 암살은 동시에 로마 군대 내부의 내전에 따른 로마 시민의 사망, 원로원과 관련 인물들의 살해가 동반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로마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을 쉽게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시대를 지난 후 네르바부터 안토니누스 피우스까지의 황제들은 자신의 혈통에 대한 집착도 없었고 실제 혈통을 이어 황제가 될 자식들도 없었다.
혈통이나 군대 반란 등 내분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는 안정화될 수 있었고 28개 군단의 군사력은 외적,야만족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즉, ’오현제’ 시기는 로마로서는 외부적인 조건도 내부적인 조건도 따라준 셈이다.
물론 그 황제들 역시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로마 제국의 평화와 성장을 중심으로 정책을 편 것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이 시대 들어 특징적인 것은 연거푸 4명이나 속주 출신이 황제로 등장한 것이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히스파니야 속주 출신이고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보르넨시스 속주 출신이다.
그리고 이후 대부분의 로마 황제들은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 내보다 속주 출신이 훨씬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실제 2 곳 모두 카이사르 황제가 갈리아를 속주로 삼기 이전부터 로마의 속주였기 때문에 200년 이상 ’로마화’한 지역이고
따라서 이들의 조상 대부분과 자신들도 로마의 시스템(군단장, 법무관, 회계감사관, 집정관)을 거쳤다.
그 사실은 서기 100년 전후부터 속주 출신이 기존 로마 지도층보다 통치력이 더 양호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로마가 국가로 탄생한 시기부터 시작하여 일관되게 추진했던 ’로마화’ 정책과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제정 시스템과 속주 출신에게 원로원 등을 개방한 것이 성공적인 정책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로마는 서기 100년부터 인물난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로마 역사는 1,000년을 채우지 못하고 서서히 지워졌을 것이다.

 
 
[ 2010년 10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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