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4 - 그리스도의 승리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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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권의 부제는 ’그리스도의 승리’이다.

14권은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콘스탄티우스가 황제로 즉위한 서기 337년부터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사망한 서기 397년까지의 60년간을 다룬다.
이 기간 동안 안토니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에 기독교를 정착,확산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부분적으로 몇몇 황제들이 이를 막아보려 했으나 이미 로마제국의 시스템은 완벽하게 붕괴되었기 때문에 기독교 로마 전역에 말기 암처럼 자리잡았다.
 
결국 서기 388년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다.
하지만, 이미 그 시기에 로마제국은 사실상 더 이상 기원전 8세기부터 이어온 ’로마’가 아니었다.
’로마’가 ’로마’일 수 밖에 없었던 시스템, 원로원, 사업체계, 문화, 로마군, 시민권, 외교, 치안, 자치도시, 속주민, 인프라, 다신교 등은 사라졌으니까...


 
콘스탄티누스는 황제의 권력을 ’신격화’할 목적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렇게 권력을 장악한 후 죽으면서 아들 3명과 조카들에게 로마 제국을 5개로 나누어 ’몫’을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의 생각과 달리 역시 유일신 체계에서는 ’신격화할 황제’는 한 명이어야 했다.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는 숙부와 황제인 사촌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누스를 궁정에서 살해하였고 맏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는 3년 뒤 막내 콘스탄스와 내전에서 피살, 막내 콘스탄스는 13년 뒤 로마군 내부의 마그넨티우스 반란으로 피살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마그넨티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였으나 로마식 전쟁을 모르는 이들은 그나마 얼마 남지 않았던 휘하의 장병 수 만명을 그 내전으로 잃게되고 로마군대는 결정적으로 취약해졌다.

그리고 사촌이었던 갈루스는 17년 뒤 콘스탄티우스에게 처형당한다.


 
로마제국이 더 이상 ’로마’가 아니도록 마지막 쐐기를 박은 황제는 콘스탄티누스와 콘스탄티우스 부자(父子)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로마제국의 황제 명의의 재산을 기독교 교회에 기증했다.
기독교 사제들에게 공무를 면제시켜주고 인두세까지 면세시켜주었다.
콘스탄티우스는 면세받던 기독교 관계자의 범위를 사제에서 교회의 고용인이나 농장 등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확대하였다.
그리고 성직자가 되면 사유재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이로써 콘스탄티우스는 로마제국 내부의 귀족, 부자와 기사계급들에게 재산을 지키고 늘릴 수 있는 ’구원’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로 개종하고 성직자가 되어야 함을...
콘스탄티우스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로마의 전래 종교를 배척하기 시작한다.
우선 로마 전래의 신들에게 바치는 공식제의와 기타 산 제물을 바치는 것을 금지하였고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법률을 공포한다.
그리고 신전을 폐쇄한다. 이 신전은 로마의 신전 뿐 아니라 시리아의 태양신전과 이집트의 이시스 신전도 폐쇄한다.
신전을 건축 자재로 재활용하는 것을 허가한다. ’재활용’은 ’파괴’보다 치사한 잔머리...
 
기독교를 열심히 부흥했던 콘스탄티우스는 제국 통치는 엉망이었다.
황궁에서는 궁정관료들의 중상과 비방에 따른 희생이 일상적인 행사가 되어 적지 않은 수의 유능한 장교들이 황제 암살음모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후임 장교인사에도 실력보다 궁정관료나 환관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그렇지 않아도 부실한 로마군대와 실력있는 행정가들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든다.
페르시아와 치른 메소포타미아 전쟁에서 대패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페르시아에서 패한 콘스탄티우스는 부제 율리아누스가 오랜 기간 갈리아와 도나우강 전선의 야만족과의 전투에서 키워놓은 로마군을 빼앗으려 했으나 로마군대의 반발로 무산된다.
율리아누스의 갈리아 군단은 콘스탄티우스의 결정에 반발하면서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내전이 시작된다.
다행하게도 콘스탄티우스는 내전을 준비하다가 병으로 쓰러지고 서기 361년에 죽었다.
 
이렇게 콘스탄티누스와 콘스탄티우스 부자가 기독교를 우대하였으나 공식적으로 종교를 인정받고 로마제국의 상대한 재산을 기증받은 데다가 성직자의 면세와 사유재산을 통하여 엄청난 부를 취득,확보한 기독교도들은 ’삼위일체’이나 ’경전의 해석’으로 첨예한 내부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기독교에서는 ’이교’에 대한 우위를 확실히 해놓았으니 기독교 내부의 ’이단’을 처리할 차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단’은 ’이교’보다 더 잔인하고 철저했다.
 
서기 361년에 황제로 즉위한 율리아누스는 궁정을 구조조정하고 종교정책을 ’밀라노 칙령’ 수준으로 격하시킨다.
(그래서 후대의 기독교도들에게 율리아누스는 ’배교자’로 불리운다. 그런데 원래 기독교가 아니었다는데 웬 ’배교자’??)
로마군대를 부분적으로라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갈리아 지역에 감세법을 실시하여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했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가 실패한 페르시아 원정을 개시한다.
하지만, 원정에 실패하고 철수하는 도중에 경호대원에게 살해당한다.
작가는 율리아누스가 일찍 죽지않고 오랫동안 로마제국을 통치했다면 로마제국의 마지막 역사가 다르게 쓰여졌을 것이라 아쉬워한다.
하지만 율리아누스가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이미 로마 제국의 운명은 다하지 않았을까?


 
율리아누스의 후임인 요비아누스가 재임기간 7개월 동안 한 일은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고 율리아누스가 시행한 법률과 정책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그 뒤에 즉위한 황제는 발렌티아누스와 발렌스 형제...
야만족인 게르만족 출신의 발렌티아누스는 즉위 후 10년 동안을 새로운 야만족인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픽트족, 스코트족, 앵글로족, 색슨족, 고트족, 훈족, 사막민족과 전쟁으로 보낸다.
서기 375년 발렌티아누스가 병사하고 발렌스와 발렌스의 아들들인 발렌티아누스 2세와 그라티아누스가 맡는다.
하지만 3년 후 고트족과 치른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참패하고 발렌스는 살해된다.
그리고 그라티아누스에 의하여 테오도시우스가 동방 황제에 임명된다.
서기 380년 그라티아누스가 브리타니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령관 막시무스의 공격을 받고 살해된다.
이 때부터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실질적으로 제국 전역을 통치한다.
발렌티아누스 2세는 서기 392년 데살로니카에서 군대 폭동 중 살해된다.
’배교자’를 응징한 것일까?
 

테오도시우스는 ’반이교’와 ’반이단’ 노선으로 직행한다.
기독교 이외의 공식 제의 뿐 아니라 사적인 제의도 금지한다.
제단 앞에 등불을 켜 놓는 것, 향을 피우는 것, 벽면을 꽃장식으로 장식하는 것, 신이나 조상에게 술을 바치는 것도 금지한다.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사교’로 규정하여 탄압한다.
카톨릭 이외의 기독교 종파는 ’이단’으로 규정하여 탄압한다.
서기 388년 테오도시우스는 원로원을 협박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법률을 통과시킨다.
서기 393년에는 올림피아 경기대회를 완전히 폐지한다.
테오도시우스는 이 것 밖에는 한 일이 없다.


 
작가는 상당히 지면을 할애하여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서기 330년에 로마에서 명문 집안 출신으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수도장관까지 자리에 올랐다.
그는 43세에 이탈리아 북서부 리구리아주 아이밀리아의 장관을 맡았다.
그의 관할도시인 밀라노에서 기독교도간 파벌싸움 - 아리우스파와 삼위일체파 - 이 물리적인 실력 행사를 동반한 항쟁으로 발전했다.
장관인 그가 이 분쟁을 중재하는 가운데 삼위일체파가 암브로시우스가 마음에 들어 신도집회를 통해 그를 주교로 선출했다.
그는 주교 자리를 제공받자마자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는 주교관을 머리에 쓴 직후에 자신의 재산을 기독교회에 기부하겠다고 공표한다.
그는 운이 좋았다. 밀라노는 동방과 서방 황제들이 서로 협의하거나 이동할 때 반드시 거쳐가는 코스였던 것이다.
그는 주어진 운에 자신의 수완을 발휘하여 크라티아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가까운 관계를 만들었다.
야만족 족장과 교섭할 때, 동료 황제의 특사로, 반란을 일으킨 군단장을 설득할 때 황제들에게 도움을 준 것이다.
그러다가 테오도시우스의 실책을 빌미로 황제에게 교회에게 참회하도록 요구하여 성공한다.
이로써 콘스탄티누스가 생각한 ’신격화된 황제’는 ’유일신 아래의 황제’로 격하되기 시작한다.

13권의 부제인 ’그리스도의 승리’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과연 기독교가 애기하는 그리스도가 이러한 과정과 결과를 원했을까?
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중세 1,000년을 가져온 기독교도들이 하늘나라에 갔을 때, 과연 유일신만을 믿었다고, 죽기 전에 참회했다고 천당으로 보냈을까?
내 생각에 기독교의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그들을 모두 지옥으로 보냈을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의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말짱 도루묵이니까...^^

 
 
[ 2010년 10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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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는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 - 한미FTA 국민보고서 2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외 엮음 / 강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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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현재 ’한미 FTA’ 문제가 한국 사회 전반에 아주 조용하면서도 불안하게 잠복해 있다. 한나라당은 "8월에 임시국회를 열어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을 처리하게다"고 엇그제(29일) 발표했다. 2010년 12월 한미 FTA에 대해 <한국소비자연대뉴스>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찬성이 43.7%, 반대가 26.9%, 모르겠다가 29.4%로 나타났다. 50대와 20대, 남자, 한나라당 지지자, 수도권에서 찬성이 50% 이상이었다. 한미 FTA의 내용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고 한미 FTA에 대한 정보는 주로 신문,방송에서 얻는다고 답했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한미 FTA’에 대해서는 주요 개요만, 정부측 설명개요만, 국민운동본부의 반대 구호만 알고 있었다. 심지어 우석훈씨의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를 읽고서도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협정문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나 뿐 아니라 2011년 7월 현재 ’한미 FTA’를 찬성하는 시민이나 반대하는 시민의 대다수도 그 내용을 알고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명박이나 청와대 참모, 정부 관료와 한나라당, 국회의원 대부분도 협정문을 모두 읽거나 검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미 FTA에 가장 나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수 많은 중소기업 사장들, 자영업자들, 노동자들 역시 잘 모를 것이고 한미 FTA에 의해 굴용적인 처지에 놓인 정부관료들, 검찰청, 법원 역시 구체적인 진실과 내용이 아니라 당파적이고 이념적으로 한미 FTA에 대한 입장을 개진할 것이다. 재벌과 대기업, 일부 기득권층 정도만이 한미 FTA의 수혜자일 뿐이니까...
사실 개인적으로는 앞에서는 죽는 척하면서 뒤로는 회사 수익을 빼돌리는 중소기업 사장들이나 노골적으로 카드보다 현금을 원하는 자영업자들, 미래나 주변은 돌아보지 않은 채 자신의 이익추구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한미 FTA가 미국 거대자본과 한국 기득권층의 요구대로 그대로 진행되어도 ’나몰라라’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으랴. 한미 FTA의 내용을 알면서도 찬성하거나 무관심하다면 몰라도 그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당장의 생업에 치이기 때문에 관심을 둘 수 없는 많은 이들이 있기에 ’한미 FTA’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한미 FTA가 한국을 선진국으로 진입시킨다."라고 주장하는 이명박 정권, 한나라당, 정부관료, 재벌, 조중동 등 찬성파와 "한미 FTA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궤멸, 사회 양극화 극심화, 공공요금 상승, 실업자 증가와 농촌/생태계 파괴"라고 주장하는 야당, 시민사회단체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렇지만,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과반수가 넘는 국회의원을 보유하고 있는 보수층과 여권이 유리한 상황임은 분명하다.
 
’한미 FTA’ 협정문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길래 야당과 수 백개의 시민사회단체가 "결사 반대!"를 외치고 있을까?
’한미 FTA’가 그렇게 무서운가?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지만, 설명은 꽤 길다.
일단, 1994년에 미국, 캐나다와 자유무역협정(NAFTA)를 체결한 멕시코의 사례를 참고해보자. 아래는 멕시코의 야당과 FTA 반대자들이 전하는 멕시코의 ’NAFTA 10년’의 2004년 현실이고 첨부자료는 국제인권센타에서 멕시코를 조사한 후 발간한 보고서다.
 
 
2004년 1월 1일은 멕시코, 캐나다, 미국이 체결한 자유무역협정 NAFTA가 시행된 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NAFTA의 파멸적인 결과를 고발하는 각종 보고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NAFTA가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 줄 것 이라는 약속은 NAFTA 선동가들의 거짓 선동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900페이지에 달하는 NAFTA의 규정은 획일적으로 모든 소속 국가들에 예외 없이 적용되면서 국내법과 동일한 지위와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 NAFTA 10년에 대한 결과는 아래와 같다.

- 육류 및 농산물에 대한 검역 및 안전조치 제한
- 저가의 미국산 옥수수 덤핑으로 인한 멕시코 옥수수가격70% 하락
- 멕시코 농민들에게 제공되는 연료비, 비료에 대한 정부보조, 가격하한제도 폐지
- 150만 멕시코 농가파산
- 멕시코인들의 죽음을 무릅쓴 월경과 1,600명 이주자의 죽음
- 멕시코 4000만 노동자들의 25%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20% 감소
- 수출증가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제조업노동자 평균임금이 하루 5달러에서 4달러로 감소
-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해 외국인 공유지 소유를 금지한 멕시코 혁명헌법 27조 수정
- 미국의 메탈클라드에 제소당한 멕시코 정부는 1,650만달러 보상
- 국경지대가 각종 유해 물질로 오염, 이로 인해 국경지대에서 유아사망 및 루프스, 암 등 치명적 질병증가
- NAFTA의 전제조건을 캐나다 헌법 수정
- 캐나다 비정규직 NAFTA 이전 5.0%였던데 비해 11.6%로 증가
- 캐나다의 실업자 고용보험 혜택비율 87%에서 36%로 축소
- 캐나다 정부는 유독물을 방출한 에틸에게 1,300만 달러 보상
- 미국 노동자 중 정리해고 보상제도로 혜택을 받은 노동자만 41만명(혜택을 보지 못한 노동자들까지 합친다면 그 수는 엄청나게 늘어날 것)
- 1995년에서 2000년 사이 미국 내 700만명이 정리해고나 도산으로 일자리를 잃음
- 미국 기업의 공장이전 협박을 사용해 노조탄압한 비율 68%(1999년통계)
- 미국 임금노동자의 노동조합 가입률 16%에서 13%로, 민간부문은 9%로
- 미국내 생산성 25% 증가(1990-2000년), 실질임금 8% 증가
- 미국에서 1990년대 새로생긴 일자리의 99%가 서비스 부문
- 미국내 최저임금 인상 시도가 미국의 임금경쟁력 하락을 이유로 무력화 

  
노무현 전대통령의 자서전을 읽다가 ’한미 FTA’의 실상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우석훈씨의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를 읽었고, 우석훈씨의 책은 협정문이 공개되기 전에 출간된 책이기 때문에 이번에 이 책 [한미 FTA는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를 읽었다. 이 책은 미국측이 내세운 이른바 ‘한미FTA 4대 선결조건’을 아무런 조건 없이 수용하였고, 200여 쪽에 달하는 통합협정문을 불과 1차 협상에서 작성하는 등 졸속으로 타결된 한미FTA 협상에 대해 공개된 한미FTA 최종협정문을 근거로 삼아 각 분야별로 전면적인 분석을 시도한 책이다.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가 2006년 출간한 [한미FTA 국민보고서 1]이 협상 타결 전의 상황에 대해 전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면, 협상 타결과 협상문 공개 후 출간되는 두번째 국민보고서인 이 책은 ’한미FTA 최종협정문’을 놓고 한미 FTA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지고 있다. 협상 직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토론과 연구를 진행한 결과물인 이 책은 한미 FTA 협정에 관한 종합적인 비판적 분석 보고서인 셈이다.

공개된 최종협정문을 제조업, 농업, 쇠고기, 의약품, 지적재산권 분야 서비스 부문 등 분야별로 조목 조목 살펴보면서, 그간 정부가 해왔던 장밋빛 미래의 선전과는 그 협상 내용이 다를 뿐 아니라, 우리 정부측이 많은 핵심 쟁점에서 협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물론 당시 협상 전략상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사안이 너무나 중요하고 또 양보한 것이 너무 많다. 정부측은 우리가 내준 부분을 ‘제도개선’ ‘제도선진화’라고 말했지만, 책은 그 항목과 영향들을 예견해봄으로써 좀 더 명확한 파급효과들을 예측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책이 미국의 재협상 요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한다는 점이다. 우리 경제를 비롯해 사회 전반에 위협으로 다가올 한미FTA 협상이지만 이미 타결된 이상 이제 받아들이는 것밖에 도리가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들은 가장 중요한 양국 의회의 비준동의 절차가 남아 있다고 주지시킨다. 어느 하나라도 통과되지 않을 경우 한미FTA는 발효되지 않고 폐기된다. 미국의 페루와의 FTA 전례를 통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협상 여지가 언제든지 있을 수 있기에, 그 어느때보다 지금의 협상안을 제대로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당시 정부는 "재협상은 없다."고 큰소리쳤지만 2010년 말에 다시 재협상이 진행되어 미국측의 요구가 또 다시 대거 수용되었다. 그 수정안이 지금 국회에 계류 중인 것이다.)

------------------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는 어떤 조직인가? ------------------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이하 범국본)는 대미경제종속 및 사회양극화를 심화시키고 한국경제를 파탄낼 한미FTA를 저지하기 위해 2006년 3월 28일 출범했다. 현 정부는 미국측의 ‘한미FTA 4대 전제조건’에 대해 현정부는 2005년 10월 30일 OECD 국가 수준으로 약값 인하하려는 ‘약값 재평가 제도’ 개정 중단, 11월 6일 배출가스 기준 강화 방침 수입차 적용 2년 유예를 발표한데 이어, 2006년 1월 13일에는 국민의 건강권을 위협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발표, 마지막으로 1월 26일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 발표로 적극 이행하였다.
2월 2일 졸속적이고 일방적인 한미 FTA 대국민 사기공청회가 국민들의 우려와 분노로 무산되었음에도, 정부는 2월 3일 한미FTA 협상 개시를 공식 선언하였다. 이에 2월 15일 한미 FTA에 반대하는 113개 단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스크린쿼터사수 한미FTA저지 범대위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발족 이후 2월 17일 <쌀과 영화> 문화제, 한미FTA저지 서명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인 범대위는 3월 28일 확대개편하여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라는 본조직으로 출범하였다.(http://www.nofta.or.kr)
현재 범국본에는 농축수산, 교수학술, 금융, 공공, 영화인, 문화예술, 교육, 시청각미디어, 보건의료, 여성, 지적재산권, 소비자대책위, 학생, 환경 등 14개 부문대책위와 민주노총 한국노총 민주노동당 참여연대 등 300여개 단체로 구성되어 있다. 경기, 인천, 충북, 대전충남, 전북, 광주전남, 제주, 강원, 대구경북, 부산, 울산, 경남 등 각 지역마다 지역대책위가 꾸려져 있다.
범국본은 출범 이후 각종 기자회견 및 토론회로 한미FTA가 가져올 처참한 현실에 대해 적극 알려나갔고, 4월 15일 <한미 FTA저지 1차 범국민대회> 등 평화적이고 대중적인 집회를 진행하며 국민들에게 한미 FTA의 허구성을 알려나가는 활동을 진행해왔다. ----------------

 
이 책은 무려 74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직원이 ’목침’이라고 표현할 정도..^^) 책 속에는 한미 FTA 협정문을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고 있다. 매 조항에 대해 분석하고 국내 법령과 상황을 비교,검토하고 해외 사례까지 검증한 후, 조목 조목 비판하면서 대안도 함께 제시한다. 각 장의 검토 보고서를 작성한 이들은 소위 활동가나 비전문가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오랜 기간동안 해당 분야에서 일한 전문가, 교수, 변호사다.
주말 이틀을 몽땅 투입하고도 4일만에 다 읽을 수 있었다.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본문 6부 2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 제목과 소제목만 보아도 한미 FTA가 무엇이 문제인지 금방 눈에 들어온다. 프롤로그만 읽어도 기본적으로 왜 한미 FTA가 체결되어서는 안되는지, 또는 전면적으로 재개정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전면적으로 한국측 입장에서 재개정하는 것을 미국 정부와 거대자본이 동의하지 않을테니 아마 폐기로 가는 것이 최종안이 될 듯 하다.)
 
프롤로그. [한미 FTA는 위르이 미래가 아닙니다]
1부. [한미 FTA, 어떻게 봐야 하나]
  - ’민주주의 문제’로서 한미 FTA
  - 한미 FTA 경제적 효과 분석에 대한 비판
  - 한미 FTA가 사회복지에 미치는 영향
  - 독도, 개성공단, 중국조항의 국제관계
2부. [쌀 지키기, 제조업 이득 ? 결국 실패한 협상]
  - 한미 FTA 제조업 평가와 전망 : 상품제조업의 어려운 미래
  - 한미 FTA 농업관련부문 협상 평가 및 대응 : 오히려 악화된 농업경쟁력
  - 한미 FTA 무역구제 분석 및 평가
3부. [국민건강과 환경을 위협하는 한미 FTA]
  - 한미 FTA가 보건의료부문에 미치는 영향
  - 국민건강과 식품안전 위협, 검역주권 무력화 초래
4부. [국가의 무력화와 폐기 그리고 시장의 실패]

  - 한미 FTA 투자협정 평가 : 국가의 무력화와 폐기 그리고 시장의 실패
  - 투자자와 국가간 분쟁해결제도(ISD) 평가
  - ISD가 부동산 정책에 미치는 영향5부. [공공서비스 붕괴와 소비자 부담 증가]
  - 한미 FTA 국경간 서비스 공급 일반
  - 한미 FTA와 공공부문 : 전기, 가스, 물, 철도 중심으로
  - 한미 FTA 금융서비스 평가
  - 한미 FTA 방송,영화부분 평가
  - 한미 FTA 정부조달분야 분석
6부. [지적재산권 및 일반 분야 평가]
  - 한미 FTA 지적재산권 분야 협상 평가(1) : 의약품과 저작권을 중심으로
  - 한미 FTA 지적재산권 분야 협상 평가(2) : 집행조항을 중심으로
  - 한미 FTA 노동부문 분석 및 평가
  - 한미 FTA와 환경 : 무너지는 삶의 조건
  - 한미 FTA 경쟁부문 분석 및 평가
  - 한미 FTA 전자상거래 분야 평가
  - 한미 FTA 협상결과 총칙분야 평가
에필로그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의 활동 경과와 향후 전망]
 
책을 모두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은 "한미 FTA 협정 폐기 or 전면 재개정"이다. 현실적으로는 ’폐기’가 유일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 아이와 내 가족과 주변사람들의 아이들이 미래에 나(우리)보다 더 행복하게 살게하기 위해 , 내 가족과 주변인들의 미래의 삶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 사회 빈부격차를 줄이고 지금도 붕괴되고 있는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해, 정부-국회-사법부 시스템의 올바른 작동을 위해, 환경과 생택계를 개선시키기 위해서다.
다시 말하면, 내 아이와 내 가족과 주변사람들의 아이들, 내 가족과 주변인들의 미래의 삶, 사회 빈부격차 확대와 공동체 붕괴의 위험, 정부-국회-사법부의 무력화 위험, 환경과 생택계 악화의 위험 때문이다.
 

2007년에 한-미 정부간에 체결되고 2010년 수정 체결된 ’한미 FTA 협정문’에는 한국이 얻어내고 유리한 측면은 10%도 되지 않고 90% 이상이 미국만 유리하게 구성되어 있다.(한국 재벌과 기득권층이 유리한 측면도 제법 있다.)
우석훈씨는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에서 가족 기준 연봉 6,000만원 이하의 국민들은 ’이민’을 가야한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오히려 연봉의 크기는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은행의 주식 과반을 소유한 미국계 펀드와 투자자들이 경영권을 장악한 후 지점을 줄이고 전산시스템을 늘리고 콜센터와 같은 업무를 중국이나 동남아로 옮기게 되면 우리은행 임직원들은 연봉의 크기에 상관없이 상당수가 직장을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100평 넘는 마트를 운영 중인 자영업자 아저씨는 아마 연수익이 6천만원이 넘을 것이지만, 지금보다 할인점과 SSM이 더 늘어나면 더 이상 마트를 운영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옆에서 영업 중인 김밥천국, 복덕방, 떡집도 마찬가지... 지금도 내 주변에는 적지않은 20대, 30대, 40대의 실업자, 비정규직 노동자, 알바생들이 있지만, 한미 FTA 실시 10년 후에는 적어도 2배, 많으면 5배까지 늘어날 것이 ’명약관화’하다.
지금보다 더 정부와 국회와 법원은 국민들을 도와줄 수 없다. 그 때가 되면 전국민적인 폭동수준의 시위가 일어나고 국민들의 압력에 못이겨 국회가 ’FTA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게 될 것이다. 그 뒤는? 나도 모르겠고... 그 때까지의 과정만 생각해도 끔직하다.
 
한미 FTA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자들은 대한민국의 주인인 국민들을 속이고 헌법과 국회를 유린하고 국가적, 국민적 주권과 이익을 미국 자본에 팔아먹은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1905년 일본 제국주의에게 조선을 팔아먹은 이완용 등 매국노와 동급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차라리 그들은 일본군들의 총칼의 강요 앞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조선을 팔아먹었지만, 그동안 한미 FTA를 추진한 자들은 먼저 나서서 모든 것을 미국에게 양보하고 거저 가져다주고 헌법을 유린했다. 그런 면에서 더 죄질이 나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한미 FTA 협정문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문제점만 추려도 아래와 같다.
1. 한미 FTA는 한국이라는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고 약화시킨다. 아무리 세계화가 진전되고 대외무역이 활발하다 하더라도 개별 국가의 국민을 보호하고 책임지는 단위는 국가이다. 어느 다른 국가도 자본도 기업도 국민들을 책임지고 보호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미 FTA는 ’투자자 대 국가 분쟁해결 절차’에 의하여 그러한 국가의 기본적인 행위를 통제하게 된다.
협정문은 ’투자’와 ’투자자’의 개념을 모호하게 만들어 미국에서 돈을 가진 사람이나 기업이(또는 한국의 기득권층이 미국 투자자로 위장하여) 돈만 있으면 무차별적으로 한국 정부에게 소송을 걸게 할 수 있다. 또한, 지금은 한국 및 한국정부와 관련한 소송의 경우 대법원에서 최종 결정을 하게 되지만, 협정문은 1차로 일개 정부 장관이 개입할 수 있도록 해놓았고 최종 결정을 한국의 대법원이 아닌 제3국의 모르는 사람이 결정하도록 만들어 놓았다.(4부. 국가의 무력화와 폐기 그리고 시장의 실패)
2. 한미 FTA는 대한민국 헌법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5년 임기 밖에 되지 않는 대통령과 정권이, 고작 과반수 국회의원 동의로 헌법을 무력화시켜서는 안된다.
우리나라 헌법 120조에는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 자연력에 대한 이용,허가권이 국가에 있다고 규정되어 있지만, 협정문에는 ’경제적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모든 것’이 미국의 투자대상이 되도록 하여 헌법과 충돌한다. 헌법 60조에는 ’주권의 제약에 관한 조약,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 등의 체결,비분에 대해 국회가 동의권을 갖는다’라고 규정되어 있으나 정부는 일방적으로 협정을 체결하고 국회에 비준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조약 체결은 대통령 권한’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 사전에 국회에 공개하고 국회로부터 통제받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금처럼 정보도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과저에 대해 사전에 국회와 조율하지 않는 것은 ’3권 분립’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위헌이다. 미국의 경우 이런 조약은 상원,하원에서 사전,사후에 통제하고 있고 중요한 조약은 상원의 2/3가 동의해야 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저자들은 이러한 정부의 행태를 ’통상독재’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 책의 저자들과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의 저자인 우석훈씨, 그리고 야당과 범국민운동본부의 주장과 같이 한미 FTA를 비준하기 전에 먼저 ’통상절차법’을 제정하여 한미 FTA와 같은 중대한 조약의 경우 국회의 통제권을 규정하고 60%~2/3의 국회의원 동의를 필요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3. 협정문은 ISD 조항으로 인해 내국인 투자자를 차별하여 헌법의 ’평등권’을 침해한다. 그렇게 되면 국내 투자자도 형평성을 요구하게 되고 앞으로 국가는 그러한 규제를 유지할 정당성의 근거를 유지하기 어렵고 국가규제가 무의미하게 된다.
또한, 협정문은 한미 FTA 적용범위에서도 미국-한국 간에 불평등하다. 한미 FTA는 국내법의 효력을 갖게 되어 지방자치단체에도 규정되지만, 미국의 경우 자체 헌법에 의해 주정부에는 효력을 미칠 수 없다.
4. 협정문은 ISD나 역진방지장치, 이행의무 부과금지 등을 통하여 사실상 국가와 국민의 경제적 자기결정권을 부정하게 된다. 이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보장의 선언으로 나타난 우리 헌법의 책심적 가치를 침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한미 FTA에 의하여 헌법 제34조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9조 문화생활 향유권, 35조 환경권 및 건강권, 32조 근로의 권리, 33조 노동3권, 31조 교육을 받을 권리 등 생존권적 기본권의 침해를 낳게 될 것이다.
5. 협정문은 실질적으로 헌법개정의 효력을 지님으로써 사실상 일정한 주권의 양도를 전제로 하는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이다. 한미 FTA는 헌법 119조2항의 경제민주화 원리와 충돌하고 120조와 120조2항, 123조를 수정하도록 강요한다. 이는 헌법의 개정에 필요한 절차와 요건을 무시한채 행정부가 임의로 헌법을 개정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헌법의 개정을 위해서는 제안 -> 공고 -> 협의 -> 국회 재적의원 2/3 찬성 -> 국민투표(과반수 투표와 투표자의 과반수 찬성)를 거쳐야 한다.
6. 기본적인 정부 행태로서의 문제점이자 분노, 통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정부의 처리과정과 태도다. 국가와 국민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뻔한 한미 FTA 협상을 정부의 일부 관계자만이 일부 재벌과 논의하여 ’밀실’에서 협상했다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이명박 정권은 ’당연한’ 것이고 심지어 노무현 정권 때부터 시작되었다.
한국과 다르게 미국정부는 한미 FTA 협정과 관련한 모든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듣고 사전에 협의해 왔다. 그 이해관계자란 미국의 의회는 가장 기본이고 노동조합, 시민단체, 언론, 학계, 전문가를 포함하는 것이었고 협상 과정 전후 언제든지 그들의 의견을 대대적으로 수렴하였고 대부분의 요구사하을 관철시켰다.
한국정부는 공개는 커녕 공개를 요구하는 야당과 시민단체, 국민들의 요구를 묵살하였고 공개와 사전논의, 반대를 요구하는 모든 움직임들을 공권력을 동원하여 억눌렀다.
7. 아주 사소하면서도 치명적인 사항도 있다. 2011년 초부터 불거진 ’한미 FTA 협정문 번역 오류’ 문제다. 어찌보면 사소하면서도 국가의 아주 기초적, 기본적인 책임과 역할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통상교섭본부와 관련자들에게는 도저히 외국과의 협상을 맡길 수 없게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범국민운동본부의 지적과 논리, 타당성과 검토결과, 예상 시나리오가 일부 적절하지 않거나 틀릴 수 도 있다.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100% 완벽하게 예상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정부의 처리과정, 협정문안, 국내외 사정, 법적 경제적 타당성, 예상되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할 때, (폐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처럼 급박하고 정신없이 ’비준안’이 처리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처리된 것을 무효로 되돌려야 한다. 그리고 나서 필요하다면 처음부터 다시 한미 FTA에 대해 진지하게 전국민적으로 재검토하고 정부와 야당, 시민단체와 전문가가 함께 모여 치밀하게 모든 사항을 재분석, 재협의해야 한다. 이해관계자들이 모든 정보와 내용을 알도록 하고 그 뒤에 전반적으로 재검토한 후 새롭게 한미 FTA 요구사항과 거부사항을 국가적, 국민적 차원에서 마련해야 한다.
 
한미 FTA 협상은 경제적인 성과도 거의 없다. 오히려 미국 자본에게만 엄청난 기회만 제공하고 있다. 정부는 한미 FTA의 전과정에서 국회와 국민들을 속여왔다. 처음 한미 FTA를 추진하는 목적에서도, 한미 FTA의 효과와 피해에 대해서도, 피해에 따른 대책에 대해서도, 개별 부문에 대한 목표에 대해서도, 협상 과정에 대해서도, 협정문에 대해서도, 재협상에 대해서도 끝없이 거짓말을 계속해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각 부문별 협상 결과도 어처구니 없다. 협정문을 살펴 보면, 자동차 협상에 따른 한국의 이득은 얼마 되지 않으며 제조업이 미국 시장에서 추가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보잘것 없고 한국의 상품제조업의 미래를 암울하다. 농업은 아예 죽이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이고 보건의료산업의 전망도 최악이다. 국민의 건강권과 국민건강보험, 식품에 대한 안전과 검역주권은 훼손되었다. 투자협정문은 미국이 원하는대로 받아쓴 것 같고 공공서비스를 미국 자본에게 넘겨주기 위해 무척이나 애쓴 흔적도 보인다. 지적재산권과 전자상거래 부문은 미국측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전례없는 성과’라고 칭찬받고 있고 한국의 정부조달 부문도 미국 자본에게 내에주게 만들었다.(한국 기업이 미국의 핵심산업분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고...)
한국이 NAFTA를 체결한 멕시코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현재 ’한미 FTA’를 둘러싼 전선에는 찬성하는 쪽에 대통령-정부관료-재벌-기득권세력과 한나라당/자유선진당이 반대하는 쪽에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을 비롯한 야당과 대부분의 시민사회단체를 망라한 범국민운동본부가 있다. 한나라당은 ’3권 분립’의 한 축인 국회의 과반수 의석을 점하고서도 ’한미 FTA’가 앞으로 자신들의 지지층인 영남지역과 노인층의 삶을 파괴할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은채 정부의 일방독주를 비호하고 있다. 급기야 그들은 2011년 5월 4일 야당과 범국민운동본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폭거’를 저질렀다. 스스로 국회의 존재이유를 부정한 것이나 다름 없다. 이런 개념없는 사람들을 국회의원으로 선출한 유권자들의 수준이 안타까울 뿐이다.민주당 역시 국가적인 필요성과 목적을 위해 한미 FTA를 반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참여정부 시절 참여정부의 횡포와 폭주를 막아내지 못했고 정부의 한미 FTA 추진을 방관하거나 사실상 지원하기도 했다. 정동영, 유시민, 김근태 등 일부 정치인들은 참여정부 시절 장관직에 재직하면서 한미 FTA에 대한 정부 입장을 옹호하고 나서기도 했다.(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지금 민주당(그 당의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이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은 지지층과 시민사회단체, 국민들의 무서운 시선이 두렵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은 참여정부의 ’업보’를 안고 온몸으로 한미 FTA를 저지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오로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미 FTA를 반대하고 그 무지막지함과 참혹한 결과를 예상하여 온몸으로 막아낸, 진정으로 국민들을 위한 정치세력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밖에 없었다. 그리고 현재 범국민운동본부에 집결해있는 시민사회세력이었다.
 
참고로 참여정부를 이끈 고 노무현 전대통령은 수 많은 중산층, 약자층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많은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음에도 몇 가지 결정적인 정책 오류를 범했다. ’한미 FTA’는 대표적인 정책 오류이고 지지층들이 대규모로 이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통령 퇴임 후 노대통령은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한미 FTA를 인준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했지만, 이는 그 때는 ’버스가 떠난 뒤’였다. 노 전대통령은 재임시 지지층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을 계속하면서 한미 FTA 협상을 밀어붙였고 민주노동당 등 군소 야당과 대규모  시민단체와 수 많은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화하지도 않은 채 협정을 체결하였다.
2012년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여 우리는 참여정부의 경험을 토대로 대통령 개인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돌아볼 때, 국가를 운영하는데 있어 개인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지는 로마 제국의 카이사르나 진나라의 시황제, 조선왕조의 국왕이나 군사정권의 박정희/전두환이 말해주고 있다. 지난 정부 10년은 우리가 김대중이나 노무현 개인에게 우리의 희망이나 기대를 투영시키고 ’알아서 잘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가장 큰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미 지나가 버린 말들이지만, 이 책을 읽고 비교,대조하기 위하여 노 전대통령의 발언록을 정리했다. 

- “대통령의 결정으로 이른바 ‘4대 선결 조건’이라는 해석을 수용한다.” (2006. 7. 21)
- "지금까지 우리가 많은 개방을 했지만 모든 것을 한국 사람들은 다 이겨냈다", "실패한 적이 없다", "협상과정에서 정부가 방심하지 않고 빠트리지 않도록 국회에서 잘 챙겨 달라", "좀 진지하게 대화를 했으면 좋겠다", "대개 (FTA를) 하는 나라들이 잘 살고, 하지 않는 나라들이 그렇지 못하다" (2006. 8. 25)
- "FTA는 미국화 아닌 국제화입니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도 외국 나가면 시장 개방을 요구합니다. 한미FTA는 한국경제 자신감 보여주고 역량 평가 받는 것입니다. 일본·중국보다 앞서 한미FTA 카드 쥔 것은 좋은 기회입니다." (2007. 2. 27) 

- "이번 기회를 놓치면 10년을 기다려야 하는 만큼 국내 이해단체의 저항으로 못 가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한다" (2007. 3. 7)- "우리가 농업을 과연 방어하고 보호할 수 있는가", “식량안보라는 가정이 정말 맞느냐", "상품으로 경쟁력이 없으면 농사를 더 못 짓는다.", "FTA하면 광우병 소고기 들어온다며 단식농성하는 이들은 정직하지 않은 투쟁을 하는 것" (2007. 3. 21)”   
사실 ’한미 FTA’를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범국민운동본부(야당을 포함한..)나 가장 큰 피해를 입게되는 국민들 입장에서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권, 관료와 재벌, 보수언론이나 사이비 학자들을 욕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촛불집회할 때 부르는 노래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헌법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조항이 있다. 그렇지만 모두 알다시피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인간의 권리는 누가 그냥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통령제와 대의민주주의는 대통령 개인에게, 국회의원에게, 관료들에게 임시로 국민의 권력을 위임한 것이지만, 그 권력이 얼마나 정당하고 올바르게, 그들의 주인인 국민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행사되지는지 감시하고 통제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은 바로 ’권력의 주인인 국민들의 몫’이다. 권력을 위임한 채 개별적으로 먹고 사는데 정신을 잃게되면, 국가권력을 호시탐탐 노리는 재벌과 탐관오리, 재벌과 기득권층은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앞에서 2010년 12월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하기도 했지만, 아직 많은 국민들이 ’한미 FTA’의 최초 제안 - 논의 과정 - 협상 과정 - 정부관료들의 거짓말 - 협정문 내용 - 협정문이 가져올 끔찍한 파괴력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다른 이들은 지금도 당장의 ’밥벌이’ 밖에 관심이 없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결과는 1차적으로 국민들과 진정으로 국민들을 대변한다는 이들의 책임이다.물론, 나 역시 그동안 그런 국민들 중 한 사람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미 FTA 논란과 저지싸움이 한창이던 2006~2007년 나는 개인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면서 모든 시간과 노력을 회사운영에 올인하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책의 에필로그에는 향후 전망과 FTA 비준 저지방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책이 2007년에 발간된 것을 고려하면 2011년 현재로서는 적절하지 않다. 2011년 5월 한나라당의 ’비준안 날치기’ 처리 이후 범국민운동본부는 공황상태로 보인다. 홈페이지도 지난 봄 이후에도 활동이 멈췄다. 범국민운동본부 전반이 패배주의에 휩쓸려 있다. 그나마 최근 반값등록금 집회나 무상급식 관련집회, 노동자관련 집회에서 ’한미 FTA 저지’를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안타깝고 무척이나 죄스러운 심정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포기하고 주저않을 것인가? 미국의 의회가 ’한미 FTA 협정안’과 ’수정안’을 비준하던 하지 않던 상관없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비준안을 무효처리하는 것이다. 목표는 단계적으로 아주 단순하다.
 
먼저, 2011년 8월 한나라당이 국회에 상정할 ’수정안’ 통과를 저지하는 것이다.
두번째 방법은 2012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미 FTA 비준에 찬성했거나 ’무효를 반대할’ 국회의원 후보를 낙선시키고 반대하는 후보를 당선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선거 뒤에 다시 압력을 가하여 국회 차원에서 60~70% 이상의 압도적인 결의로 기존 비준안을 무효, 폐기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금 이 시간부터 전면적으로 해야 할 일이 국민 모두가 ’한미 FTA의 실체’를 아는 것이고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주변사람에게, 지인들에게, 인터넷 카페에서, 이메일로 사람들에게 ’한미 FTA의 실체’를 알리고 저지해야 함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여론과 권력의 기반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라를 미국에 팔아먹은 자들의 행위를 국회를 통해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다. 청문회가 되었든, 특별감사가 되었든, 특별검사가 되었든 한미 FTA 추진 전과정에 대한 상세한 자료와 정보를 공개하여 불법과 탈법, 비리와 속임수, 월권과 고의 등을 막론하고 법과 제도로 처벌할 수 있는 자들은 모조리 처벌해야 한다.(특히 통상교섭본부 등 전담자들) 2012년 내에 이 과정을 할 수 없으면,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이 모두 나서 ’한미 FTA’를 반대하는 대통령을 당선시키고 새로운 정권에서 시작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 짓’을 한 인간들이 다시는 이 땅에서 제대로 살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미래에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국민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는 조선왕조의 역사와 대한민국 현대사, 그리고 이명박 정권이 적나라하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과 후손들의 미래를 우리가 임의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 2011년 7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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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3 - 최후의 노력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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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권의 부제는 ’최후의 노력’이다.

13권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로 취임한 서기 284년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한 서기 337년까지의 53년간을 다룬다.
이 기간 동안 로마제국에는 시작과 끝에 해당하는 단 2명의 황제만 취임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내에서도 후세의 역사가들에게서도 잘 알려져있지 않았다.
출생지도, 출생년도도 불명확한 상태라고 한다.
다만, 오늘날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바닥’에서 태어나 로마군대에서 한 단계씩 진급하여 경호대장까지 하다가 황제가 된 인물이었음에도 권력에는 욕심이 없었다.
자신이 즉위한 해에 친한 친구였던 막시미아누스를 처음 ’카이사르’에서 몇 개월 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 격상시켜 공동 황제로 함께 취임한다.
디오클레레티아누스는 당시 야만족의 침입과 방위선에 대한 대처가 혼자서는 역부족이었음을 인정하고 막시미아누스에게는 서방을, 자신은 동방의 방위선을 담당한다.
황제로 즉위한 이후 약9년 동안 두 황제는 서방과 동방에서 야만족을 격퇴하고 페르시아국을 위협하고 도적떼를 소탕했다.
 
그리고 그들은 293년 역사적인 ’사두정치’를 선보인다.
두 명의 ’아우구스투스’가 각자 ’카이사르’를 한 명씩 임명한다.
서방의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쿠스를, 동방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를... 둘 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골랐고 모두 군단에서 경력을 쌓았다.
군장교 출신의 4명의 황제(정제와 부제)는 각자의 담당지역에서, 그리고 일부 협동작전으로 방위선의 야만족을 격퇴하고 페르시아와 전쟁에서까지 승리를 거두어 150년 전의 로마제국 영토와 방위선을 유지했다.


 
그리고 나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한다.
- 병력 증강 : 기존에 30만명에 달하던 로마군을 두 배로 증가시켰다.
  이는 군사력의 질을 떨어뜨리고 4두 정치를 담당한 황제들 사이의 유동성을 약화시켰고
  로마시민과 속주민들은 엄청난 방위비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 민군 분리 : 갈리에누스 황제가 원로원 의원이 로마군 장교에 취임할 수 없게 하였는데 그에 더하여 민간 경력과 군대 경력을 완전히 분리해 버린다.
- 황제에 대한 개념 변경 : 기존과 같이 대관식은 별도로 없었지만, 보석을 아로새긴 ’디아테마’라는 호화로운 관이 황제의 머리 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호화로운 옷차림과 함께...
- 관료조직 확대 : 4두정치에 이어 황제를 대리하여 각 지역을 다스리도록 행정구역을 개편한다. 그에 따라 관료조직이 늘어나고 인력도 늘어나고 비용도 늘어났다.
네 황제는 자신의 근거지에 모두 수도를 지정하고 황궁과 대규모 도시를 건설했다.
- 세제 개편 : 제국이 1년에 필요한 액수를 황제가 결정하고 시민들의 수입과 관계없이 납세자에게 부과. 세무는 모두 통합하여 중앙정부가 관리. 세금은 ’토지세’와 ’인두세’로 양분.
- 가격통제 정책 실시
- 기독교 탄압(303년) : 기독교 교회 파괴. 신도들의 모임 금지. 성서와 미사에 쓰이는 소품 소각. 기존 특전 박탈. 법정에서 보호받을 권리 박탈. 교회 재산 몰수. 공직 추방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이 위기임을 느끼고 자신의 생각대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황제는 검증되지 않은 정책을 일방적인 권력으로 밀어붙이면서 로마제국의 기반을 또 다시 무너뜨리게 된다.
원로원과 지식인층만 소외되었던 로마제국의 황제권력은 잘못된 군대 개혁과 세제개편으로 부유층 뿐 아니라 로마시민과 속주민들에게도 엄청난 부담을 안겨준다.
로마의 역사이자 기반이었던 제도와 시스템이 무너진 것이 다시 제도와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악순화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나서 욕심 없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너무 일찍 은퇴해버려(막시미누스를 강제도 동반 퇴임시킴) 또 다른 분란이 싹트도록 한다.
 
2차 사두정치는 305년에 콘스탄티우스 클로투스가 브리타니아/갈리아/히스파니아를, 세베루스가 이탈리아/북아프리카를, 갈레리우스가 발칸과 그리스를,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오리엔트 전역을 담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306년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여 사두정치가 붕괴되고 황제가 6명으로 난립한다.
310년 막시미아누스가 콘스탄티누스이 강요로 자결하고 311년 갈레리우스가 병사한다.
312년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와 손잡고 막센티우스를 공격하여 전사시키고 325년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와 항쟁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한다.
이리하여 기독교도가 추앙해 마지않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7년 단독으로 집권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집중적으로 추진한 일은 무엇일까...
그는 313년 리키니우스와 공동으로 기독교를 ’공인’한다.
황제의 재산을 기독교에 기증하도 기독교 성직자가 공무를 맡지 않도록 결정하다.
316~317년 도나우 강을 건너서 야만족을 격퇴하고 강화를 맺다.
비잔티움에 새로운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했다.
방위선의 로마군대에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여 ’파트타임’ 군인으로 바꾼다.
325년 니케아에서 기독교 공의회를 열어 ’삼위일체’파를 공식적인 해석으로 결정한다.
글자 그대로 로마제국과 로마시민, 속주민을 위해 별로 한 일이 없다.
대신, 로마제국을 약화시키는데 앞장 선 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왜 기독교를 공인하고 진흥하려고 애쓰고 수도를 옮겼을까...
콘스탄티누스는 재임 중 기독교로 개종한 것일까...
객관적인 자료와 사료로는 이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죽음 직전에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실제 313년 기독교를 ’공인’시킨 황제의 칙령의 문구는 그 이전까지 금지하고 박해하던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같이 로마제국에서 동등하게 인정한다는 내용이 중심이다.
하지만 ’기독교 공인’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진흥하기 위해 애쓴다.
실제 아주 편파적으로 기독교와 성직자들이 부와 권력을 잡도록 제도화시킨다.
 
작가는 콘스탄티누스가 ’지배의 도구’로서 기독교를 고려했다고 주장한다.
계속되는 군대의 반란, 황제 참칭, 원로원과 지도층의 무능, 정국 불안정 등을 해결할 근본적인 대책, 또는 중단기적인 대책의 하나로 기독교를 품에 안았다는 것...
콘스탄티누스가 그동안 황제를 추대하고 승인하고 인정하던 인간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유일한 ’신’이 권력을 황제에게 주게되면 주요 성직자 한 두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로부터 황제의 권력이 안정되리라고 예상 or 판단했다는 것...
기독교의 ’왕권신수설’에 기울었기 때문이라나...
콘스탄티누스 치세 하에서 진행된 과정만 보면 그렇게 분석할 수도 있다...
나쁘지 않게 해석하면 가능할 것 같다.
다만, 콘스탄티누스의 의도가 그랬다면 그는 아주 머리가 나쁜 황제였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주 교활하고 야비하고 사악한 기독교도인 것이고...
’콘스탄티누스 로마제국을 다시 융성시키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자 하다...’
하지만, 객관적인 팩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그렇지만, 콘스탄티누스는 후세의 역사가들이나 기독교들이 붙여주는 호칭인 ’대제’는 전혀 아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3개 과제’에 제대로 기여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3개 과제’를 무시하고 파탄시킨 측면이 컸다.
로마군에 대한 정책을 엉망으로 만들어 방위선을 지키기는 커녕 소아시아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야만족으로부터 침입, 약탈 당하도록 방치했으며,
끝없이 늘어나는 로마시민과 속주민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고 오히려 로마의 주요 재산인 ’황제 재산(황제 재산은 황제에 위임된 로마제국의 재산일 뿐 개인 재산은 아니다.)’을 자기 멋대로 기독교도에게 기증하는 횡포를 부렸다.
하드 인프라와 소프트 인프라를 유지,보수,관리하기는 커녕 그대로 방치해두었고 수도 로마를 그대로 둔채 임의로 비잔티움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면서 로마제국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제국의 자산을 탕진한 황제이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가 즉위한 해부터 로마사를 더 이상 쓰지 않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많다고 하는데 많은 부분 동감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콘스탄티누스 이후 1,000년을 뒤로 돌리면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하여 서구에서는 결국 모든 종교를 공인하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했다.
그런데 왜 그런 황제에게 ’대제’라는 표현을 쓸까나...?? 
 
작가는 여러번 책 속에 카이사르의 명언을 제시했었는데 나는 비로소 13권 서평에 그 말을 옮기고자 한다. 13권에 그 말이 제일 어울릴 것 같아서...
"비록 나쁜 결과를 낳은 사례라 해도 그것이 시작되었을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2010년 10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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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2 - 위기로 치닫는 제국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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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의 부제는 ’위기로 치닫는 제국’이다.

12권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죽고 그의 아들 카라칼라 황제가 즉위한 서기 211년부터 카리누스 황제가 암살되고 경호대장 출신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로 취임한 서기 284년까지의 73년간을 다룬다.
이 기간 동안 로마제국에는 22명의 황제가 취임했다가 사라진다.
그 사이 14명의 황제가 경호대, 근위대, 군단병, 측근들에게 암살되거나 살해된다.
이 시기, 즉 3세기 로마의 위기는 그 이전의 위기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로마 황제가 전쟁에서 산 채로 적에게 붙잡혔을 뿐 아니라 제국이 3등분으로 분리되기도 하면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연속적으로 또 다른 위기로 이어진데다가 제국 내부의 커뮤니케이션 없이 황제가 일방적으로 결정,집행하는 ’칙령’이 남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제국은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힘있는 권력자들만이 일방적으로 국가를 움직이는 ’독재정권’이나 ’왕정’과 다를 게 없게 된 것이다.




역사가들은 대부분 3세기 위기의 원인을 제국 지도자층의 질적 수준 저하, 야만족 침입의 격화, 경제력 쇠퇴, 지식인 계급의 지적 능력 감퇴, 기독교의 대두로 꼽는다.
하지만 작가는 기독교의 대두를 제외한 나머지 위기 요인은 그 이전 로마에도 자주 부딪혔다면서 가장 중요한 이유를 ’정국 불안정’에 두고 있다.
로마 황제가 73년간 22명, 약 3년 반만에 한 번씩 바뀌게 되면 아무리 로마가도가 제국 전체에 깔려있다고 해도 서기 3세기의 통신 수준으로는 정보의 전달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고 그에 따라 제국 통치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로마사를 돌아보면 서기 1세기에 이미 30년간 7명의 황제가 즉위(3년에 한 명꼴...)하고 그 중 4명이 암살 또는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도 로마는 위기에 처했지만 곧바로 극복하고 로마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풍요로웠던 네르바와 트라야누스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이어지는 ’오현제’ 시대를 열었다.
그렇다면 두 세기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기 1세기를 다시 분석해보면,
네로 황제는 원로원과 시민, 군대의 신임을 잃은 후 측근에게 암살되었다.
갈바는 속주 총독간 내전으로 다른 속주 총독 오토에게 암살당하고, 오토는 뒤이어 군단장 출신에게 살해된다.
비텔리우스는 내전에서 패배한 후 도망치다가 살해된다.
도미티아누스는 황후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노예에게 암살된다.
즉, 1세기에는 암살과 살해가 특정한 경향을 띠지 않았고 네로와 도미티아누스는 실정과 측근에게, 나머지 황제들은 내전의 패배에 따른 여파로 암살, 살해된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원로원의 정치력과 지도층이 살아있었고 황제들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을 무서워했다.
로마 군대 역시 특별한 사정이 아닌 이상은 원로원의 결정을 존중하였고 자신들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서기 3세기는 상황이 무척이나 다르게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황제들의 사망 원인은 전투 중의 전사(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나 병사(고티쿠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군단병들에게 황제로 추대되고 피살되었다.
원로원은 황제를 추인하는 ’거수기’에 불과하게 되었고 로마군대는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속주 총독이나 군단장을 황제로 추대한다.
내가 추측,평가해 볼 때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이후 국방/외교에 대한 안일한 인식과 정책, 속주민에 대한 부적절한 인식과 정책 변화가 로마제국의 기반을 무너뜨린 것으로 보인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 23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19년, 콤모두스 치세 12년, 내란기 20년... 모두 합하여 64년 등 약70년 동안 로마의 황제들은 로마군대의 군사력과 방위선 체계, 인프라를 유지,보수,관리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 이전 황제들이 쌓아놓은 업적에 안주할 뿐이었다.
이에 더하여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로마군대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결정한 정책들이 로마군을 안정지향형으로, 기득권층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황제 추대에 대한 로마군의 집착은 로마군단이 더 이상 평화수호와 방위선을 지키는 군대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기득권층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카라칼라는 로마군을 기존에 편성했던 로마시민병과 보조병 대신 젊은 병사만으로 기동부대를 편성했다.
가정을 가진 나이 든 병사들은 군단기지를 지키도록 하고 젊은 기동부대만으로 전선을 이동하여 전투를 치르게하여 상당수의 로마군을 노령화되도록 만들어 방위선이 취약화되는데 일조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갈리에누스 황제는 원로원 의원을 로마군 장교급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법률을 통과,시행시키면서 그나마 형식적으로라도 유지되던 민간 지도층과 로마군 간의 인적교류와 경험, 제국 상층부의 정치적이고 군사외교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막아버렸다.

다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방위선 정책으로 대표되는 ’로마화’ 동화정책은 역설적으로 ’오현제’ 시대에 그 의미가 퇴색하여 더 이상 진화,진보하지 못하였다.
서기 3세기이면 이미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로부터 약200년 이상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국방/외교정책이 수립되어야 했으나 어떤 황제도, 원로원이나 지도층도 이에 대한 입장이나 정책이 없었다.
 
그리고 카라칼라 황제가 서기 212년에 발표한 ’안토니누스 칙령’이 또 하나의 로마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카라칼라는 로마 제국 영토내의 속주민들에게도 로마시민권을 부여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 속주민들이 로마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는 로마군 보조부대에서 20년간 근무하거나 교육/의료 등 공공사업에 기여하는 등 어떤 방식으로든 로마제국에 기여하는 자에게만 부여되는 ’취득권’이었으나 212년부터 ’기득권’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 여파는 장기적이고 파괴적일 수 밖에 없다.
로마의 정기적인 직접세는 속주민에게 부과하는 10%의 세금이 가장 컸다.
그 이외의 상속세(5%)와 관세(5%)는 비정기적인 세금이고 매상세(1%)는 규모가 작았다.
한동안 계속 이어지던 영토 확장과 전쟁이 없었기에 그에 따른 전리품이나 노예판매금도 이미 사라진 상태였고...

  
원로원의 무능, 지도층의 질 저하, 새로운 야만족의 출현과 침입 등은 모두 외부적인 조건에 불과할 뿐이고 어찌보면 이 부분 역시 제국의 시스템이 오히려 그러한 경향을 확대시킨 것에 불과할 수 있다.

다른 시각으로 로마사를 보면 인류사회의 전개과정에서 늘 존재하던 결말이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동안 군대와 문화를 통해 지배공간을 넓혔으니 때가 되면 힘을 갖게된 원동력이 결국 그 힘을 빼앗아 다시 빈털털이로 만들어버리는...
작가 말대로 로마 역시 ’로마적인’ 이유로 쇠퇴한다고 볼 수 있다.


 

[ 2010년 10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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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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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한국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처음 프랑스에서 출판된 후 7개월 만에 200만 부를 돌파하여 프랑스 사회에 ’분노 신드롬’을 일으켰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맞섰던 레지스탕스 투사이자 외교관을 지낸 93세 노인이다. 그가 이 책에서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화두는 ’분노’이다. 저자는 전후 프랑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레지스탕스 정신이 반세기 만에 무너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프랑스가 처한 작금의 현실에 ’분노하라!’고 일갈한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사회 양극화, 외국 이민자에 대한 차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금권 등에 저항할 것을 주문한다.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이며, 인권을 위협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찾아가 기꺼이 힘을 보태라는 뜨거운 호소다.

[분노하라]의 원서는 표지 포함 34쪽의 소책자다. 이 책의 출발은 나치에 맞섰던 레지스탕스의 성지(聖地) 글리에르 고원이었다. 저자는 2009년 ’레지스탕스의 발언’ 연례 모임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젊은이들에게 ’분노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의 즉흥 연설을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앵디젠 출판사의 편집인들(실비 크로스만, 장 피에르 바루)은 깊은 감명을 받았고, 곧장 에셀에게 달려갔다. 이 책이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이 책이 프랑스 사회에 던진 충격은 대단했다. 2010년 10월 초판 8,000부를 찍어낸 책은, 불과 7개월 만에 200만 부가 팔려나갔다. 프랑스 남부의 작은 출판사로 저자 인터뷰와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프랑스 언론은 100년 전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의 인권 문제를 제기한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에 버금가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흥분했다.

2010년 프랑스의 현실은 한국에 비해 거의 ’천국’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법, 언론, 학계, 교육, 복지 등 모든 부분에서 한국의 수준을 뛰어넘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조금 위협하는 상황에서 93세의 노인은 쉬고있던 집에서 박차고 일어나 프랑스 국민들에게 ’분노하라’고 외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상황인가? 저자의 시각에서 한국을 바라보면, 한국의 사회 전반적인 상황은 ’분노’를 넘어 참여와 행동으로 나가도 한 참 나갔어야 할 상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프랑스에 ’레지스탕스’가 있다면, 한국에는 ’87년 6월 항쟁’이 있다. 비록 ’레지스탕스’에 조금 모자란다고 비웃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감히 주장할 수 있다. ’87년 6월 항쟁’이 침몰하는 ’대한민국호’를 살려냈고 한국의 사회 각 분야에 민주주의와 국민의 권리를 되찾기 시작한 계기라고... 
 
---------------------------  * 저자 스테판 에셀은 누구인가 ? -----------------------------------
1917년 독일 출생. 유대계 독일인 작가인 아버지, 화가이자 예술애호가인 어머니는 트뤼포의 영화 [쥘과 짐](Jule et Jim)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7세에 부모를 따라 프랑스로 이주하여 20세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 1939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 선배 사르트르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으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입대한다.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1944년 파리에 밀입국해 연합군의 상륙 작전을 돕던 중 체포된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으나 극적으로 탈출한다. 전쟁이 끝난 후 외교관의 길을 걷는다. 1948년 유엔 세계 인권 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하고, 유엔 주재 프랑스 대사,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 등을 역임한다. 퇴직 후에도 인권과 환경 문제 등에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사회운동가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세기와의 춤](1997), [국경 없는 시민 - 장 미셸 엘비그와의 대화](2008), [참여하라 - 질 반데르푸텐과의 대담](2011) 등이 있다. ----------------------------------- 
 
그렇다면 이 책의 무엇이 프랑스인들의 심장을 뛰게 만든 것일까? 프랑스 [르몽드] 지는 서평 1면에 ’전달의 몸짓으로서 더욱더 관심을 끄는 책’이라고 이 책을 소개했다. 레지스탕스의 노투사의 호소가 21세기의 젊은 세대에게로 70년 전 레지스탕스 정신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1943년 프랑스의 주요 레지스탕스 단체들은 반나치 투쟁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프랑스 레지스탕스 평의회’를 결성했다. 이 평의회에서는 1944년 3월 15일 프랑스 해방에 대비하여 새롭게 구성될 정부의 개혁안을 채택했다(본문 40쪽). 에셀은 이 개혁안이야말로 "자유 프랑스가 지켜나갈 원칙과 가치, 곧 프랑스 현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될 가치"였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이 시기에 구축된 것이 사회보장제, 퇴직연금제도, 공공재의 국영화, 대재벌의 견제, 언론의 독립, 교육권이었다. 그런데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레지스탕스가 얻은 성과가 토대부터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가 그의 눈에 비친 오늘날의 프랑스다. 저자는 선대 레지스탕스들이 나치에 저항하여 싸웠던 것처럼 젊은 세대가 "이런 모든 일들에 암묵적인 찬동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분노할 것을 주문한다.
그는 레지스탕스의 동기는 ’분노’였다고 규정했다.

에셀은 이 책에서 "분노하라!"고 외치고 있지만 그의 본의는 "참여하라!"다. 그는 자신에게 "분노의 이유들은 어떤 감정에서라기보다는 참여의 의지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한다. 그는 현대 사회로 오면서 분노의 대상을 찾기가 매우 힘들어졌다는 점은 인정한다. "분노의 이유가 오늘날에는 예전보다 덜 확실해 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세상이 너무 복잡해진 것일 수도 있다. 누가 명령하며, 누가 결정하는가." 자신이 나치와 싸울 때처럼 투쟁 대상이 명확하지 않음은 이해한다는 것. 그렇더라도 그는 "이런 세상에도 참아낼 수 없는 일들"이 있으며, 각자 분노할 대상을 찾고, 그 분노를 밑거름 삼아 행동할 것을 주문한다. 집시들을 추방하는 프랑스 정부의 야만, 자본에 종속된 언론, 가자 지구를 포격하는 이스라엘 정부가 그 예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나쁜 태도라고 나무란다.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란 우리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인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에셀이 ’분노’와 ’참여’를 말할 때, 그것은 폭력적 봉기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비폭력이라는 길을 통해 인류가 다음 단계로 건너가야" 하며, "비폭력의 희망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로 든 인물들은 넬슨 만델라와 마틴 루터 킹. 이렇게 보면 그는 평화주의자에 가깝다. 물론 그도 사르트르처럼 우리가 폭력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은 수긍한다.
"자신이 지닌 무기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우월한 무력적 방법에 의해 점령당한 쪽의 입장에서 보면, 민중의 반응이 꼭 비폭력적일 수만은 없다는 것"도 인정한다. 어떤 타격도 주기 힘든 로켓포를 끝내 이스라엘군에 발사한 하마스(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몸짓’을 이해 못할 행위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테러리즘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폭력으로는 어떤 희망적인 결과도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에셀이 여기서 말하는 비폭력이란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리는 자에게 뺨이나 내밀어주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정복하고, 타인들의 폭력성향마저 정복하는 적극적인 행위로서의 비폭력이다."(p 27~34) 폭력적인 희망이란 없다." 이것이 폭력으로 얼룩졌던 20세기의 8할을 살아낸 인물의 결론이다.    
 
한국 사회는 어떨까? 비정규직 비율 세계 최고, 청년실업, 갈수록 커져만 가는 빈부 격차,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급감하는 출산율, 치솟는 생활물가와 대학 등록금....... 이것이 프랑스보다 분노할 게 훨씬 더 많은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추천사를 쓴 조국 교수는 이 소책자가 한국 사회에도 큰 메시지를 던진다고 말한다. "1970~1980년대 (......) 민주화운동의 기본 동기는 실로 분노였다. (......) 당시 우리는 무엇을 꿈꾸었는가.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대통령,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등 대표자를 직선으로 뽑는 것, 시민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 야당과 자유로운 언론의 존재가 보장되는 것, 국가권력이 시민의 인권을 자의적으로 박탈하거나 제약하지 못하게 하는 것 등이 당시 우리들의 절박한 꿈이었다."(p.72~73)

우리에게도 4·19 민주항쟁, 5·18 광주민중항쟁, 그리고 6·10 민주항쟁처럼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분노의 역사가 있다. 긍정적인 ’분노’란 시대를 건강하게 지켜줄 수 있는 힘이다. 2000년대 들어서도, 그리고 지금도 우리 사회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 도저히 권력자의 오만을 두고만 볼 수 없을 때 시민들은 촛불시위의 형태로 분노를 표출했다. 분노 유전자는 우리 몸속에 흐른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 저자의 마지막 문장이다. 청년시절 나치에 분노했고, 그 분노의 힘으로 역사의 한 흐름에 참여하는 운동가가 된 에셀. 그는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이 분노와 변혁의 중심에 설 것을 주문한다.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輕視),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대량 소비’와 ’지나친 경쟁’을 경고하는 저자의 외침이 결국 지구 전체 구석구석을 침투하여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는 듯 하다.
 
 
’분노(憤怒)’라는 단어를 보면 학생시절의 나와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1980년대 당시 우리 세대들은 선배건, 동기건, 후배건 간에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일은 끝이 없었다. 일제 앞잡이들이 한국현대사를 주물렀던 역사에 대해, 군화발로 시민들을 학살하고 국가권력을 찬탈한 정치군인데 대해, 소련/중국과 대결하기 위해 한국을 자신들의 동북아 군사전진기지 겸 식민지처럼 삼아 광주학살에 동참한 미국에 대해, 노동자와 농민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재벌과 ’가진자’들의 배를 부르게 해주는 정부관료에 대해, 아무런 양심과 자책 없이 목숨을 연명하는 지식인들에 대해,...
 
소위 ’486세대’가 1980년대 군사정권과 목숨을 걸고 대학생이라는 기득권을 걸고 싸울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동력은 조국과 민중에 대한 애정과 아픔, 새세상에 대한 희망도 있었지만 가슴 밑바닥에는 모두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분노가 오랜 기간에 걸쳐 쌓이고 시민들도 함께 하면서 ’87년 체제’를 수립하는데 도움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분노’와 열정은 어설펐고 제도적이거나 장기적이지 못했다. 우리 세대들은 1987년 항쟁의 열기가 지나고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양김’이 분열하면서 급속하게 사그라졌다. 우리 세대의 대부분은 ’직선제’와 몇 가지 정치적, 절차적 민주주의만 이루어 놓은채 다시 ’자신의 기득권’을 향해 나아갔다.
유럽의 ’68세대’들처럼 80년대 세대들은 그 ’분노’와 적극적으로 실질적 민주주의로, 경제 민주화로, 사회문화 등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정치권을 비난하고 비하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자기 역할을 다한다고 생각해 버렸다. 우리는 해방 후 40년 동안 한국을 망쳐놓은 온갖 과거사를 바로잡고 부정,부패,불법,불의한 세력을 일소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미래를 기약하면서 조직적으로 그 구조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결과는 그 뒤 10년 동안 정치계, 경제계, 언론계, 관료계, 법조계, 학계 등 각 분야에 진보와 민주주의를 심지 못했고 소중하게 얻은 결과물을 함량미달의 정치인들이, 탐욕스러운 재벌들이, 저널리즘도 모르는 조중동이, 보신주의와 무책임성으로 일관하는 관료들이, 자신들이 잘난줄 만 아는 법조인들이, 본분도 모르는 학자들이 가져가도록 방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요구에는 아랑곳 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빴고 재벌과 경제인들은 탐욕을 주체하지 못했고 관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결국 그 10년의 결과는 정치에서는 ’보스정치’와 ’명사정당’의 확대재생산을, 경제에서는 IMF를, 언론에서는 조중동의 ’언론권력화’를, 관계에서는 ’극심한 관료주의’를, 법조계에서는 ’검찰권력’을, 학계에서는 부패하고 무능한 학자와 교수들을 양산했다.  
  
 
그나마 이룩한 절차적 민주주의는 1997년과 2002년에 극우, 보수, 기득권 세력의 대표가 아닌 김대중 전대통령과 노무현 전대통령을 당선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나마 그것도 아주 어렵게 만들어야 했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김종필이라는 보수반동 세력과 노무현 전대통령은 정몽준이라는 재벌, 기득권 세력과 손을 잡아야 했다.
그리고 80년대 세대와 그 전후 세대들, 노동계와 농민계, 빈민계와 여성계는 뿔뿔히 흩어져 각각 개별적인 단체와 정당을 조직하였고 자본과 기득권세력의 공세에 대응하는데 급급하기만 하였다. 기층 민중들과 시민들을 광범위하게 결집하지 못한 정당과 시민단체는 80년대에 만들어낸 소중한 권리를 20년 동안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국민들은 계속 양극화와 소득감소, 부동산 버블, 사교육 확대, 물가상승 등 수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고...
한국의 헌법 체계에서 국민들, 민중들의 일상사와 주요 이해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국가의 권력과 의사결정 구조다. 즉, 정치에서 멀어질수록, 무관심할수록 국민들, 민중들은 더욱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진보개혁세력의 대변자라고 생각한 것은 우리의 착오였고 자기기만이었다. 수 천년의 인류 역사는 "조직되어 상호작용하지 않는 사람은 대변자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는 정부와 정치권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두 분이 한국에서 1,2위를 다투는 정치지도자였다고 인정하더라도 그들 역시 부족한 부분이 있고 잘못한 것도 많다. 특히 정치조직, 시민조직과 호흡을 함께하지 않은 것은 매우 치명적이었다. 다시 말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국민들의, 민중들의, 486세대의, 노동자와 농민의 대변자가 되기 위해서는 같은 정치조직 안에 함께 묶여 있어야 했고 강력한 시민조직의 견제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유언이다시피 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는 절반은 맞고 절반을 부족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틀린 부분은 시민은 아무리 많이 조직되어도 스스로 국회에서 법령을 만들거나 바꿀 수 없고 정부정책을 만들고 집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조직과 시민조직을 함께 발전해야 하고 서로 긍정적인 작용을 하며서 필요할 때 견제해야 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 책 속의 문장 :
-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理想)들을 부디 되살려달라고, 전파하라고.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고. 정치계·경제계·지성계의 책임자들과 사회 구성원 전체는 맡은 바 사명을 나 몰라라 해서도 안 되며, 우리 사회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국제 금융시장의 독재에 휘둘려서도 안 된다.(p.15)
 
[ 2011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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