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강 - 리처드 도킨스가 들려주는 유전자와 진화의 진실 사이언스 마스터스 7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용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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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과학은 의심에서 출발한다.
종교에서는 신의 존재와 신의 ’말씀’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그 문단에서 ’신’이라는 단어를 빼고 어떤 단어를 넣게되면 연상되는 것들이 많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신이었고 고대 로마에서는 ’황제’가 신이었다.
중국 고대의 ’주,진,한’나라의 ’왕’과 ’황제’도, 고려의 40명 가까운 왕과 조선의 국왕들도 신이었다.
100~200년 전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태리, 스페인의 왕과 황제들도 신이었다.
히틀러도, 뭇소리니도, 레닌과 스탈린도, 박정희와 전두환도 신이었다.
즉, 그들의 ’말씀’을 의심해서는 안되었다. 의심은 곧 배신이고 반란이고 역적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
’의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의심’하는 사람을 ’배신자’과 ’매국노’로 매도하고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심하지 않는 것은 ’신앙’이고 ’도그마’다.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야할 곳은 교회와 모스크다.
인간이 왜 과거를 돌아보고 역사를 말하는가?
그것은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고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 길이 어떠했는가?
중세의 카톨릭은 마녀사냥과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수 백만명의 인명을 살상하였다.
무슬림은 21세기에도 여성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신체의 자유마저 박탈시키고 있다.
’게르만’과 유대인 학살, ’유교’와 조선, ’반공’과 한국, ’돈’과 신자유주의.....
 
’의심’의 역사는 과학의 역사다.
(물론, 과도한 의심은 스스로를 관계 속에서 단절시키고 결국 스스로마저 붕괴시킬 수 있다.)
의심과 궁금증이, 자연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인류의 탄생을 ’신화’가 아닌 과학으로 규명하고 있다.
이 책은 < 섹스의 진화 >, <원소의 왕국>, < 마지막 3분 >, <인류의 기원>, <세포의 반란>, <휴먼 브레인>에 이어 - 사이언스 마스터스 시리즈 - 의 일곱 번째 책으로, ’진화론 전반’을 주제로 삼았다.
 
저자는 이미 <이기적 유전자>와 <눈먼 시계공>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과학자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최초의 ‘과학의 대중적 이해’ 교수인 저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이자 베스트셀러 과학 저술가로 인정받는다. 저자의 저서들은 모두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첫 저서인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1976)에서 생물 개체는 이기적인 유전자를 운반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지구를 들썩이게 만들었으며, 더 나아가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1982)에서는 생물 개체가 만들어 내는 모든 산물들 또한 유전자에 의해 표현된 것이라 주장하였다. ‘왕립학회 문학상’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문학상’을 받은 <눈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1986)에서는 물리학과 신경생물학, 분자유전학 등을 넘나들며 진화론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였다.
(저자의 최고 책 중 2권은 아직 읽지 못했음...)
한마디로, 찰스 다윈 이후 최고의 진화생물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은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1장은 진화의 계통수를 지류가 계속 새로이 발생하는 ’거꾸로 강’에 비유한다. 그리고 그 강의 DNA의 강이며, 이 강에서는 양편 강둑에 의해 가로막힌 하나의 흐름이 무조건 ’종’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 시대에 흐르는 DNA 강은 그 시대에 현존하는 종의 수만큼의 지류가 있다.
제2장은 오로지 모계로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이용하여 인류의 기원을 밝히려고 시도한다.
제3장은 생물체가 지닌 복잡한 기관이 점진적인 진화를 통해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제4장은 개체의 모든 기관, 체제, 행동 양식은 오로지 한 가지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 한 가지 목적은 다름 아닌 DNA를 보존해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다.
제5장은 우주의 어느 곳에서든 생명이 탄생해 진화한다면 거쳐야 할 여러 관문을 지구의 진화 역사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왜 역자가 <River out of Eden>을 <에덴의 강>으로 번역했는지 궁금하다. 

[ 2010년 8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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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패러다임
김창섭 지음 / 아카넷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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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 Paradigm’이란 1962년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머스 새뮤얼 쿤이 발표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기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과학 활동에서 새로운 개념이, 객관적 관찰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 집단이 모두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이 신뢰하는 과학 내용과 수단을 패러다임이라고 하며, 패러다임이 대체되는 과정을 과학 혁명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나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과학자 집단에서 모두 받아들여지면서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이 세워지는 과정이 ’패러다임의 전환’에 해당한다.
쿤은 그 책에서 과학혁명을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 이후 ’패러다임’이란 단어가 주는 폭발력으로 인하여 과학 뿐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 등 커다란 변화,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이 발생하는 경우에 대해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저자는 한국사회가 지난 60년간 ’성장 패러다임’을 통해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여 최빈국에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거듭났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수 많은 위기들이 닥쳤음에도 한국이 그러한 위기를 국민의 힘으로 극복하였고 그 때마다 도약했다고. 하지만 이제 한국에게 다시 ’기후변화’라는 엄청난 위기가 닥쳐오고 있으며, 자칫 잘못하면 한순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저자는 새로운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생산과 소비 구조의 전반적인 혁신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그 전략은 바로 ’저탄소 녹색 성장’이라고 말한다.
 
’저탄소 녹색 성장’....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현 대통령인 이명박이 2008년 8월 ’건국 60주년 기념식’에서 새로운 국가 경제 모델로 제시한 표어였다. 2007년 12월 대통령 선거공약에도 없던 경제 전략이었다. 왜 갑자기 ’저탄소 녹색 성장’이 이명박 정부의 주요 전략으로 등장했을까? 그리고 그 중요한 내용은 무엇일까? 녹색 성장의 핵심 내용 중 하나가 ’4대강 공사’였음을 보면 그 전략 제시가 결국 ’정치 구호’에 불과함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즉,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1년도 되지 않은 2008년 봄에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파동을 계기로 전국에서 벌어진 촛불시위에 충격을 받고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을 부르면서 반성한 후 정치국면을 전환시키고자 그럴싸한 단어를 조합한 것이다.
이번 정권의 특징 중 하나가 내용과 전혀 다른 단어를 제목으로 선택하여 ’정치 구호화’하는 것이다. 4대강을 죽이면서 ’4대강 살리기’라는 제목을 단 것이나 KBS, MBC, YTN을 정권의 홍보처로 전락시키면서 ’언론자유’니 ’언론개혁’이니 포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래서 이 책의 머리말을 읽던 중 ’저탄소 녹색 성장’을 "현 시대의 요청에 부합하는 가치있는 전략"이라는 표현을 읽고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책이 내일 세미나의 교재만 아니었다면 더 읽어볼 것도 없이 쓰레기 통에 집어던졌을 것이다. ’성장 패러다임’에서 ’그린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자고 하면서 ’저탄소 녹색 성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부터가 문제라 할 수 있다. 저자 스스로도 현 정권의 녹색 성장에 관한 제반 전략과 정책이 자신이 제기하는 ’그린 패러다임’이나 ’저탄소 녹색 성장’에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하면서 머리말에 ’가치 있는 전략’이라고 표현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책이 잘 팔리기 위한 마케팅인가? 아니면 이명박 정부에게 찍히고 싶지 않아서? (조금 심했나...^^)
 
아무리 앞에 그럴싸한 표현을 집어 넣더라도 나는 ’저탄소 녹색 성장’은 ’성장 패러다임’의 변종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생산과 소비 구조의 전반적인 혁신’은 인정할 수 있는 개념이다.
 
아무튼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 * 김창섭은 누구인가? ------------------
현재 경원대학교 전기공학과 교수로 있으며,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국가주도분과 간사위원, 행정안전부 녹색 성장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대통령 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회 등에 실무위원으로 참여하였고 한국품질재단 녹색경영연구소 소장, (사)지속가능소비생산연구원 대표, 에너지시민연대 감사로 있으면서, 소비자 시민 모임에도 참여하는 등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활발하게 일하고 있다. 서울대 전기공확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미국 전기위원회(EPRI)에서 포스닥을 거쳤다. 우리나라 에너지 기술개발 정책을 주도하였고 에너지 및 전력 IT 사업에 관한 전략과 정책을 맡아 왔다. 주요 논문으로 <전력선 통신을 이용한 HSA 사업의 경제적 타당성 분석>, <시장 전환을 통한 심야전력제도개선방안에 대한 연구>, <심야전력제도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등이 있다. ---------------------------
 
 
이 책은 머리말, 서론(들어가며), 3개의 장, 마치며(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 [들어가며]에서 저자는 한국이 지난 60년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유일한 나라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외형적인 엄청난 물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최저 출산율과 최고 자살율, 최고 노동시간이라는 질적 수준이 낮은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울한 지표를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익숙한 모습’이라고 과감하게 간주하면서 그런 산업화와 민주화의 혜택을 우리가 지속적으로 향유할 수 있을지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저자는 대량 살상 무기, 범죄, 전쟁, 질병, 기아 등 세계의 수 많은 위기들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위기가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한국의 경우에도 무수히 많은 위기 요인이 있다. 분단에서 오는 전쟁의 위기, 경제 위기, 실업 위기, 지역 갈등, 보수와 진보 간의 노선 갈등, 사교육 부담 등... 하지만, 저자는 우리의 성취를 무너뜨릴 세계적 차원의 위기 중 가장 심각한 위기를 신용의 위기, 에너지의 위기, 기후변화의 위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이 신용위기(경제위기)를 극복했으나 에너지 위기와 기후변화의 위기에 대한 해법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제1부. [에너지가 미래를 말한다]에서 저자는 지구 문명의 근원이 에너지이며, 세계적으로 에너지 고갈에 대한 낙관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지구사회의 생존방식으로는 에너지는 계속 소비할 수 밖에 없으며 결국 고갈될 것임으로 주장한다. 에너지 소비의 근원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것을 자본주의와 세계화라 규정한다. 에너지의 대량소비가 기후변화를 초래했음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데 아직 다양한 에너지 및 환경에 대처할 기술은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화석 연료의 사용을 극단적으로 자제하게 되면 해고와 실업, 빈곤과 생존, 갈등과 전쟁이 야기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저자는 한국은 자원이 없고 에너지 고소비형 경제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지정학적 조건이 에너지 융통이 불가능한 고립된 섬이기 때문에 ’에너지와 기후변화의 위기에 가장 취약한 나라’라고 주장한다.
중화확 공업 위주의 수출 주도형 경제구조를 지향하는 발전 모델은 에너지와 기후변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경제전략이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의 에너지 및 환경 기술은 선진국에 비해 턱 없이 낮은 수준이다.
 
제2부. [성장 패러다임에서 그린 패러다임으로]에서 저자는 1972년 로마클럽 보고서 [성장의 한계 The Limits to Growth], 1992년 리우 환경개발회의와 국제연합기본협약(UNFCCC), 1997년 교토 의정서, 2006년 스턴 보고서, 2007년 IPCC 4차 보고서와 발리 로드맵 등 서구에서 그동안 진행된 ’지속 가능한 발전’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서 ’지속 가능성’을 제기한다.
저자는 지속 가능성의 3대 요소를 경제 성장과 형평성의 진작, 그리고 환경으로 해석한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지속되고 있고 성장의 부작용에 따른 형평성을 바로잡기 위해 민주화의 과정을 밟았으며, 이제 또 다른 성장의 부작용인 환경 문제를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환경 문제의 핵심은 한정된 자원의 지속 가능한 이용,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의 적정화, 그리고 기존 문명의 물적 기반 뿐 아니라 소비자의 도덕적인 변화까지 포괄적이고 혁명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저자는 토머스 프리드먼의 [코드 그린]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21세기는 에너지와 기후변화 문제가 경제 성장을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로 전화되는 시점이며 민주화까지도 에너지로 인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인식과 행태가 바뀌어야 하고 저자는 그 과정을 ’그린 패러다임’으로 정의한다.
 
저자는 이명박 정부가 보수정권임에도 진화의 핵심 가치인 녹색을 국정의 최일선에 배치하여 일단 성공하였다고 말한다. 집권당이 국정을 주도하는 주요한 화두를 잡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4대강과 자전거를 예로 들면서 문제는 현 정부의 정책 수단과 운용 방식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저자는 박정희 정권의 ’수출 100억불’이라는 목표와 구호가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의 동력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사회 전체를 통합시키는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면서 그린 패러다임에서도 그러한 목표와 구호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회적 합의를 통한 국가 배출 감축 목표’라고 제안한다. 이명박 정부는 사회적 합의가 아닌 정부 내 일부 구성원 주도로 임의로 목표를 설정했다.
 
제3부. [그린 패러다임의 적은 내부에 있다]에서 저자는 산림녹화와 그린벨트, 그리고 220V 승압과 전력시스템 개편 등 산업자원부의 전신인 동력자원부의 과거 에너지 정책추진의 사례를 들어 우리나라도 녹색 성장의 씨앗이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린 패러다임의 적은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음을 주장하면서 과소비와 전기요금 등 에너지 가격 제도, 에너지 비용의 외부화, 보조금 제도를 예로 든다. 그는 에너지의 세제와 가격의 문제는 에너지 믹스의 조정, 기술 개발과 신재생 에너지의 보급, 에너지 수요의 합리화 등 에너지 시스템 전반의 녹색화에 가장 핵심적인 사안으로 이러한 기존의 세제와 가격 체계를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또한 기술 혁신에 의한 소비의 녹색화, 스마트 그리드 등 자원의 배분과 이용의 최적화, 소비자의 녹색 모럴과 기업의 녹색 기술 혁신 등을 통해 생산소비 구조를 혁신해야 함을 주장한다. 
 
저자는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시작된 관 주도의 의사결정방식은 지금까지 인프라를 개발하고 구축하는데 효과적이었고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그러한 관 주도의 의사결정 방식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상징적인 사건은 김영삼 정부에서 동력자원부가 소멸하여 산업자원부의 일개 부서로 전락한 것, IMF 체제 아래에서 김대중 정부에 의한 에너지 산업 구조 개편으로 정부와 에너지 공급자 간의 긴밀한 관계가 사라진 것, 노무현 정부 들어서 방폐장 건설 과정에서 부안 사태가 발생하여 정부정책이 좌초한 것(저자는 이 사건을 민란으로 해석함), 그리고 2004년 전력산업 구조개편으로 추진된 배전 분할이 노조의 힘으로 중단된 것을 예로 든다.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에너지 행정의 민주화와 개방화라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법적 책임성에 기반한 에너지 행정 주체의 약화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앞으로는 에너지와 기후변화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현 정부에서 가장 취약한 거버넌스가 중요함을 제기한다. 저자는 에너지 부문에서의 정책 목표 설정의 문제와 에너지 산업의 규제와 시장 기능에 관한 문제에 대한 처리과정에서 사회적 참여와 책임성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정부체계에서는 정책부서와 규제부서를 분리하면서 양쪽 모두 역량강화가 필요함을 제기한다.  
 
* [마치며]에서 저자는 "그린 패러다임의 전환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아젠다이다. 모든 이해 당사자가 동의하여야 가능하고 이에 걸맞은 비용을 지불할 각오가 있어야만 달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용을 투자로 연동시킬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하다. 그린 패러다임은 그러한 고통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우리가 반드시 지향해야 하는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라고 최종 결론을 내린다.
 
 
저자는 "숭늉 대신에 스타벅스에서 페어 트레이드에 의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아주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있다."라고 글을 마무리했다. 나는 저자의 마무리 글에 동의할 수 없다. 숭늉을 마시면 실패한 것이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면 성공한 것일까? 웃기는 소리다. 내가 브랜드 커피숍에 가는 이유는 다방이나 기존 커피숍이 사라졌기 때문이고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그곳에 숭늉이 없기 때문이고 생과일쥬스나 다른 상품보다 더 싸기 때문일 뿐이다.
스타벅스는 프랜차이즈 업체이고 개별 사업장은 개인서비스업이다. 스타벅스는 프랜차이즈 로열티와 커피 제조 기계값과 브랜드를 씌운 커피값으로 엄청난 수익을 미국으로 가져간다. 개인서비스 업체의 사장은 최소한의 수익만 남길 뿐이며 커피숍의 직원은 모두 최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이거나 그보다도 못한 아르바이트 대학생일 것이다. 그 모습이 대한민국의 성공인가?
 
에너지 문제와 기후변화의 위험성이 모든 국민들에게 지금보다 더 알려져야 한다. 아무런 생각없이 ’더 크게,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가 동의되는 문화에서 벗어나야 하고 무조건 대학에 가고 ’사’자를 달아야 하고 아이폰을 사야하고 자동차를 사야하고 아파트를 사야만이 서로 인정하고 인정받는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담배값 올리는 것, 기름값 올리는 것, 전기료와 가스료, 상하수도 요금을 올리는 것을 동의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물론, 그와 동시에 정부가 세금을 공정하게 걷어야 하고 부자감세를 철회하고 누진세를 강화해야 한다. 탈세와 기업의 불법, 경제사범, 기득권자의 부정에 대해 강력하게 제재해야 한다. 정부예산을 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되고 소득불평등을 완화시키는데 주력해야 한다. 정부와 기득권자, 소득이 높은자와 많이 배운 자, 많이 가진 자와 상류층이 중산층과 빈곤층에게 모범을 보이고 사회에 환원하고 먼저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중산층과 빈곤층이 뒤따르게 된다.
 
저자가 말한 ’성장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문제제기에 공감한다. 또 중장기적으로 ’그린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에도 공감한다. 마찬가지로 거버넌스가 가장 취약하고 중요한 문제라는 인식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형평성이,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간주’하는 관점, 평가, 판단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 3년 만에 1987년 이후 20여년 동안 피와 땀을 흘려가면서 이룩한 정치민주화가 크게 후퇴했다. 경제 민주화와 사회 민주화는 더욱 후퇴했다. 저자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잘 될 것이라고 넘겨버리는 저출산, 고령화, 자살율, 빈부격차, 최장 노동시간, 실업, 빈부격차, 그리고 민주화와 거버넌스가 먼저 해결되지 않고는 한국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미 한국이라는 국가와 한국의 사회 공동체는 붕괴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10년 민주정부 시절 민주화와 형평성을 제고시킬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씩이난 살리지 못했다. 저자의 ’그린 패러다임’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린 패러다임의 제반 요소가 민주화와 형평성을 담보하지 않고서는, 함께 추동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의견이 다르고 노선이 다르고 반대한다고 경찰과 검찰 권력으로 통제하고 탄압하는 세상에서 건전한 거버넌스가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순진한 발상이다. 집권여당의 대표가 신문사 기자에게 ’맞을래!’라고 애기했다. 그런 정치 수준에서 홍준표 대표의 눈에 일개 개인과 국민은 유권자도도, 시민으로도, 주권을 가진 국민으로도, 사람으로도 취급받을 수 없다.
 
’그린 패러다임’은 더 진화할 필요가 있다. 환경과 더불어 형평성을 위한 강력한 내용으로...!!! 
 
[ 2011년 7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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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Art & Ideas 3
새러 시먼스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아트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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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야, 영혼의 거울]과 함께 지난 화요일 공부모임 세미나 교재였다. [고야, 영혼의 거울]에서 흐릿하게 보였던 고야의 생애와 화풍, 시대의식과 근대 미술계에 대한 영향을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고야, 영혼의 거울]은 고야의 그림과 동판화를 중심으로 고야의 미술가로서의 삶과 작품활동을 설명하였고 평생의 절친한 친구인 ’마르틴 사파테르’와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고야가 매 시기마다 어떤 생각을 하고 고민을 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이 책은 고야의 작품과 증거 자료를 토대로 추론할 수 있는 ’고야의 인간성’에 대해 탐구한 결과물이다. 저자는 고야의 드로잉, 유화, 프레스코, 태피스트리, 판화 등을 에스파냐의 미술 전통이라는 맥락 속에서 파악하며 고야가 유럽 전역에 미친 엄청난 영향과 20세기 미술에서 고야가 갖는 의미를 추적하면서 가장 최근의 연구성과와 새로 발견된 이 복잡미묘한 예술가의 다양한 초상화들도 소개한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실로 다양한 삶을 살았다. 그런 만큼 그에게는 다양한 수식과 평가가 주어졌다.
‘근대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젖힌’ 위대한 예술가, 이것은 앙드레 말로가 [토성, 운명, 예술, 그리고 고야]에서 한 말이다. 고전주의를 주류로 삼았던 예술이 고야라는 커다란 걸림돌을 만나면서 그 흐름이 바뀌었음을 뜻한다. 저자는 "고야를 거치면서 고전주의적 조화가 파탄에 이르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고야가 17~18세기의 현실 속에서 통찰한 ‘근대’는 차라리 지옥과 천국이 공존하는 카오스였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어둠. 그곳, 이성과 합리성의 이면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인간의 광기와 야수성이었다. 민중은 세계 질서를 앞세운 나폴레옹의 야욕 아래서 신음하고 있었고, 이를 바라보는 귀머거리 고야에게 세상은 온통 소리 없는 절규였다. 유럽의 중심부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을 때, 변방의 깨어 있는 예술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질서 속의 혼돈이었던 것이다. 궁정화가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고야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창작 활동이 결국은 가장 사적이고 음울하고 불가사의한 ‘검은 그림’ 연작으로 마무리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래 그림은 ’검은 그림’ 연작 시리즈)
 



 
 
-------------- * 새러 시먼스는 누구인가? --------------
영국 애식스 대학 미술학과의 전임강사이며, 에스파냐 낭만주의 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권위자이다. 저서로는 [고야: 후원자를 찾아서]와 [플랙스먼과 유럽, 윤곽 일러스트레이션과 그 영향]등이 있다.  


이 책은 모두 9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불확실한 출발]에서는 스페인 아라곤과 마드리드, 이탈리아 로마에서의 그림 수업을 받던 시절의 고야를 다룬다. 젊은 시절 고야는 화가로서 출발했지만 스페인 미술계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고야는 아카데미에서 2회 연속 낙선한 후, 25세가 된 1770년 당시 여느 미술 지망생들처럼 미술과 예술의 본고향이자, 르네상스와 고전주의의 본고장인 로마로 홀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고야는 대가들의 예술작품과 고전주의의 현장을 직접 접하고 그림 수업을 받으면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고 연구하고 연습하였다.

2장. [궁정생활과 궁정예술]에서 고야는 부르봉 왕실의 후원을 받기 시작하고 궁정에서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그리는 업무에 종사하면서 미술가로서의 본격적인 공식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한다. 고야는 로마에서 돌아온 후 고향 사라고사로 돌아와서 ’엘 필라르 성당’의 프레스코화 ’코레토’를 그렸고(1771년) 스페인 왕가와 미술계에서 촉망받던 ’프란시스코 바예우’의 동생 ’호세파 바예우’와 결혼한다(1773년). 결혼 후 1775년 고향을 떠나 마드리드로 상경하였고 그 해에 ’산타 바르바라’의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에 취직하여 멩스와 바예우의 감독을 받았다. 그는 1780년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아래)>를 제출하여 왕립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다.

마드리드에 온 처음 몇년 동안 피나는 노력과 인상적인 초기 태피스트리 밑그림은 고야의 잠재적 예술성을 보여주었다. 1780년에는 이미 화려한 옷과 보석을 구입하고 사냥에 몰두하면서 유복한 화가로 성공적인 인생을 기대할 수 있었다. 고야는 귀족 후원자도 만나게 되면서 개인적인 그림을 그릴 여유도 일부 확보했다. 왕가와 후원자의 초상화를 그리면서도 고야는 또 한편으로는 신중하고 내성적이고 회의적인 사람이 되어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고귀한 계층과 비천한 계층을 양쪽 다 냉철하고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고야는 이후 몇 년간 굴욕과 실패, 고난과 질병에 직면하게 된다.

3장. [오만하고 까다로운 사내]에서는 에술적 영감에 사로잡힌 고야와 교회의 비난에 시달리는 고야를 다룬다. 고야는 1774년 첫 아이를 시작으로 모두 일곱 명의 아이를 가졌는데 여섯 아이가 일찍 죽었다. 자식들의 비극적인 죽음과 직업적 야망을 성취하려는 노력이 작품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고야의 그림은 계속 사실주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 때 고야는 <이탈리아 화첩>에서 옛 거장들이 폭력성과 추악함을 걸작으로 변형시킨 방법을 시험적으로 탐구했다. 그리고 공적 야심과는 별도로, <교수형 당한 남자(아래)> 등 고야의 작품은 대체로 범죄와 폭력에 대한 병적인 흥미를 드러낸다. 그리고 동판화에 대해 꾸준히 실험하고 작품을 만들었다.

1780년부터 시작한 사라고사 ’엘 필라르 대성당’의 예배당의 재장식을 맡은 프란시스코 바예우의 조수로 참여한 고야는 그 해에 바예우와 그림의 주제와 색채, 방식으로 갈등이 벌어진다. <순교자들의 여왕, 성모 마리아>



4장. [숭고한 초상화가]에서는 고야의 개인 후원자와 고야가 그들을 위해 그린 초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남긴 후원자의 초상화로는 <플로리다블랑카 백작의 초상>, <돈 안드레스 델 페랄>, <호베야노스 초상>, <후안 멜렌데스 발데스>, <마누엘 고도이의 초상>, <프란시스코 카바루스>, <돈 루이스 데 부르봉 왕자의 가족>, <오수나 공작 가족>, <베나벤테 공작부인의 초상>, <폰테스 후작부인>, <알바 공작부인>, <돈 세바스티안 마르티네스>, <마르틴 사파테르>, <마누엘 오소리오 만리케 데 수니가>, <카를로스 4세의 초상>, <마리아 루시아의 초상>, <주세페 바레티> 등이 있다.
고야는 그림 그리는 생애 동안 처음부터 꾸준히 자화상을 그려 남겨놓았는데, 후원자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자신의 자화상을 작품 속에 포함시켰다. 고야는 이런 대담한 실험 때문에 오늘날에도 아낌없는 찬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고야의 자화상과 초상화에는 그 시대 문화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요소들과 더불어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단서를 삽입했다. 
 
5장. [질병과 광기와 마녀]에서는 1790년대 고야의 생애와 작품을 다룬다. 유럽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 전파되고 이어진 독재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유럽 사회 전역은 혼란에 빠졌다. 이 시기에 이르자 고야에게는 사회 현실에 대한 지적 이해와 궁정화가로서의 공적 의무가 충돌했고(사라테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그런 혼돈과 욕망이 드러난다.) 그의 주제는 전보다 훨씬 뚜렷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여름>, <겨울>, <성 이시드로의 목장>, <작은 거인들>, <정신병자 수용소>
고야는 1793년 큰 병에 걸렸고 그 결과 청력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신체적인 조건에 따라 더욱 자신의 그림에 몰입했고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주제에 파고들었다. 
그는 1798년 ’마녀를 주제로 한 그림 여섯 점’을 완성했는데 여기서 그는 문학적, 사회적 풍자, 그리고 정치적인 풍자를 담아냈다. 그리고 연이어 1799년 80점의 판화로 이루어진 동판화집 [변덕 - 카프리초스 Los Caprichos]을 발간했다. [변덕]은 고야가 처음으로 내놓은 독립적이고 원숙한 걸작으로 평가된다. 그는 직업화가로 살아온 30년 동안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것들을 모두 재검토한다. 교회, 국가, 궁정, 법률, 의술, 예술, 과학, 거리, 시골생활, 철학, 빈민, 부자, 환자, 젊은이, 늙은이, 결혼 등은 악습과 부도덕과 허영심이 뒤죽박죽된 혼란 상태가 하나의 거대한 테두리 안에 통합된다. 작품의 대개 염세적이고 냉소적이고 고야가 사용한 기법은 복잡하고 최신식이었다. 

6장. [사면초가에 빠진 군주제]에서는 18세기 초의 정치적 불안과 그 속에서 예술적 성취를 위해 분투한 고야의 모습을 다룬다. 1799년부터 1808년까지 11년 동안 스페인의 정세는 폭발 직전이었고 결국 1808년 참혹한 전쟁과 경제 파탄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그는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교회’의 천장화를 그렸고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공식 초상화로 꼽히는 두 점(다비드의 <나폴레옹 황제 부부의 대관식>과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집단 초상화>) 중 하나를 그렸다. 그리고 고야는 1800년 미술 애호가들에게 고야를 기억하도록 각인시킨 ’마하’ 두 점을 그렸다.  
19세기 초에 고야의 미학적 관심을 지배한 것은 부정적 가치와 대조법이었다. 고야가 외부 주문을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그린 작품에서 원시적인 사람과 광기에 더욱 몰두했다. <희생자를 잡아먹고 있는 식인종>
 

7장. [전쟁의 참화]에서는 고야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화가’로 인정받은 그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1808년 5월 2일 프랑스 기병대가 민중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마드리드에 진입했고 스페인군은 교외로 빠져나가 이를 방관하였다. 다음 날인 5월 3일 프랑스군은 봉기를 진압한 후 봉기 참여자들을 공개 처형했고 고야는 후일 <5월 2일>과 <5월 3일>을 통해 민중들의 봉기와 프랑스군의 학살을 그림으로 남겼고 82점의 판화로 구성된 동판화집 <전쟁의 참화>를 통해 
전쟁기간 동안 시골의 참상과 민중들의 영웅적 행위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전쟁을 다큐멘터리식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고야는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점령하여 통치하기 시작한 후 식민지 통치자로부터 주문을 받아 많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전쟁 기간 동안 자유주의 헌법 제정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으나  결국 전쟁이 끝난 후 다시 권력을 장악한 왕족과 종교세력은 반동적인 숙청을 실시하였고 종교재판소는 고야의 ’마하’ 시리즈 두 점과 마누엘 고도이가 소장하고 있던 그림도 몰수되었다. 

8장. [여파]에서는 전쟁 이후 고야의 작품활동과 공직생활에서 은퇴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1808년 전쟁 후 전쟁 이후에도 고야는 여전히 주요한 궁정화가로 남았고 동시에 과거로 회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그림으로 남겼다. <정어리 매장>, <종교재판소 광경 (아래)> 

그는 판화집을 연이어 제작했는데 1816년 석판화집 [어리석음]을, 1815년에는 동판화집 [투우집]을 발간했다. [투우집]은 작품의 시점이 극적이고 각도가 넓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리석음]은 [변덕]보다 난해하고 [전쟁의 참화]보다 추상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래는 ’어리석음’의 판화작품들)
 


고야는 1819년 공직에서 벗어나고 마드리드를 떠났고 시골 별장에서 지내던 중 두 번째 중병에 걸렸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고야는 1820년부터 시골 별장의 벽면에 ’검은 그림’ 연작 시리즈를 벽화로 그렸다. ’검은 그림’ 시리즈는 이해하기가 어렵고 고야가 병적인 몽상가였다는 느낌을 준다. 
1824년 고야는 복고된 왕정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건너가 세밀화, 석판화, 유화, 자화상 등 마지막 작품활동을 했다.  
 
9장. [후세의 찬사] 1828년에 고야는 죽었다. 하지만 그가 죽은 뒤 영향력은 계속 높아졌다. 고야의 유족이 소장한 컬렉션이 팔리고 판화가 복간되어 널리 유포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이유를 "고야의 예술은 세상의 온갖 가혹한 현실을 반영했다. 그가 사후에 얻은 국제적 명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그런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가 창안한 예술적 기교의 다른 측면들도 화가와 수집가들의 의식 속에 스며들었다. 대형 재난과 인간의 허약함을 물감과 초크와 잉크로 분석한 그의 작품은 존재의 혼란에 사로잡힌 인물을 보여주었고, 밑바닥 사회의 타락한 영혼들과 추방자들, 상궤를 벗어난 도착적인 행동에 지배되는 사람들을 묘사한 것도 후세의 작가와 화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p.318)고 설명한다.

고야의 작품은 후세의 대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 <감옥에 갇힌 여자>의 불안과 공포는 들라크루아의 <변덕>과 뭉크의 <사춘기>에 옮겨졌다. 프랑스 화가 오딜롱 르동은 석판화 연작에 [고야에게 바친다]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마네가 파리꼬뮨시 총살을 다룬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그릴 때, 피카소가 1951년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릴 때 고야의 <5월 3일>을 상기시켰다. 벨라스케스는 고야의 <교수형을 당한 남자>을 다시 그렸고 파블로 피카소는 <눈먼 남자>를 통해 고야를 재해석했다.폴 세잔은 고야이 초상을 모사하였고 살바도르 달리는 <삶은 강남콩이 있는 부드러운 구조>를 통해 스페인 내란을 환기시켰고 제이크 채프먼은 <시체에 이 무슨 만용인가>를 통해 고야의 판화집 [전쟁의 참화]를 재확인시켜 주었다.
이런 식으로 고야의 예술은 ’보편적 고통에 대한 영원한 깨달음’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아 있다. 앙드레 말로는 [토성, 운명, 예술, 그리고 고야]에서 고야를 ’근대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젖힌 위대한 예술가’로 칭한다. 고전주의를 주류로 삼았던 18세기 말 ~ 19세기 초의 예술이 고야라는 커다란 걸림돌을 만나면서 그 흐름을 바꾸었다는 뜻이고 고전주의가 미와 예술의 결합을 추구했으나, 고야는 오히려 그 둘의 결별을 꾀했다는 것이다.
고야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상징되는 ’근대’의 이면에 인간의 광기와 야수성을 간파하고 폭로했다. 유럽의 중심부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새로운 시대를 추구하고 있을 때, 변방의 깨어 있는 예술가의 눈에 포착된 것은 그 속에 감추어진 ’혼돈’이었다.
 
 
고야도 천재일까? 공부모임 세미나가 한창 진행 중에 참석자 한 사람이 발언하던 중 ’고야가 천재’였다고 표현할 때, 내 머리 속에는 반 고흐와 함께 ’고야가 천재였나?’라는 생각과 ’도대체 천재가 뭐지?’라는 의문점이 들었다. 반 고흐가 동생과 주고받은 편지를 책으로 발간한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어보면, 고흐가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작품 대상을 연구, 분석하고 자신이 원하는 물감과 색을 만들기 위해 실험을 거듭하고 스케치를 여러번, 기초 붓칠과 완성 붓칠을 계속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 고흐가 원하는 작품 하나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은 몇 개월, 어떤 것은 1년 가까운 시간이 훌쩍 지나가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흐도 그렇고 고야도 그렇고 그들이 그림을 배우고 나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여 스스로 만족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오랜 기간 훈련과 실수가 반복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즉, 고야와 고흐가 천재라면, 그 천재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천재적 자질이 태어나면서부터 또는 어느 날 갑자기 몸 속에서 나타나는 것도 아닌 것이다. 끝없는 자기 성찰과 대상에 대한 연구,분석 스케치와 물감과 구도와 색채와 색칠과 주제에 대한 수 백, 수 천번의 연습을 거쳐 완성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작품 수는 의외로 많다. 고야는 77세에 사망했고 첫 작품을 그린 1771년부터 1828년까지 57년 동안 판화집을 포함하여 164점의 작품을 남겼다. 1년에 3점 꼴로 작품을 완성한 셈이다. 역시 일반인들로부터 ’대가’ 또는 ’천재’라고 인정받는 빈센트 반 고흐는 48년을 살았고 고야보다 더 적은 기간 작품활동을 했지만 스케치 포함하여 무려 264점의 작품을 남겼다. 또한 파블로 피카소는 93을 살았고 그림 13,400점과 700여점의 조각을 남겼다. 이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아직은 모르겠다...^^
 
아무튼, 이 책을 통해 고야에 대해 많은 것을 새롭게 알았고 그가 후대의 화가들에게 끼친 영향도 느꼈다. 저자가 고야를 ’근대 미술의 창시자’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근대 미술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미술’은 나에게 어려운 분야다. 미술가들이 어려서든, 나이가 들어서든 미술에 뛰어드는 동기나 미술을 통해 실현 또는 창조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아직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래도 <5월 3일>이나 <한국에서의 학살>, [전쟁의 참화]와 같은 그림과 판화가 당시의 사람들에게, 동류 화가들에게, 후대의 사람들에게 예술에 있어서도, 삶에 있어서도, 세계관이나 사회의식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은 안다. 나 역시 강렬한 그림 하나로부터 내 생각과 생활, 태도에 영향을 받은 적이 여러번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화, 음악, 만화, 소설, 시 등 예술이나 문학과 관련된 인간의 창작물, 결과물들은 일상적으로, 또 가끔 폭발적으로 인간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 것이다. 콘텐츠 장사나 광고처럼 돈 벌이로도 전락하기도 하고...
  
 
[ 2011년 7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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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 혁명 - 석유 시대의 종말과 세계 경제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진수 옮김 / 민음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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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 주말에도 자동차를 이용하여 약15km를 이동했다.
사무실과 집에서 에어콘, 전등, 컴퓨터, 프린터, 인터넷을 이용했고
집과 식당에서 도시가스로 만든 음식을 4번 먹었다.
다가오는 주 중에는 업무차 강남과 광주를 다녀와야 한다.
 
나는 일주일에 평균,
14회의 음식을 먹고 자동차로 100~150km를 이동하며,
내가 매일 사용하는 전기제품의 전기용량을 계산해보면,
대략 일주일에 100kw/h의 소비전력을 사용한다.(1년이면 5메가와트!!!)
 
내가 사용하는 에너지는 석유와 전기로 만들어진다.
한국 전력발전은 70% 정도가 화력발전으로 알고 있다.
내가 먹는 쌀과 반찬 역시 화학비료, 트랙터, 트럭, 철도 등으로 만들고 유통되어 밥상 위에 놓일 것이다.
 
석유는 영원한 자원인가???
 
<유러피안 드림>으로 유명한 저자는,
여러 전문가들의 주장을 인용하여 지구상의 석유자원은 2020년~2050년 사이에 최대 생산량에 도달할 것이며, 그 후로는 가파르게 생산량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한다.
석유 이외의 ’화석연료’는 그 뒤 10~20년에 걸쳐 또한 최대 생산량에 도달할 것이라고...
(물론, 석유 이외의 화석연료인 석탄, 중질유 등은 석유보다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것이므로 지구온난화는 더 극심해진다.)
문제는 세계적인 정유업체들과 산유국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석유 생산의 피크점 전후부터 석유가격은 폭등할 것이며,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기업간, 국가간 경쟁과 갈등이 심해질 것이라는 것...
이미 20세 후반기부터 중동지역은 석유를 둘러싼 갈등과 분쟁이 극으로 치닫고 있다.
석유 등 화석연료가 더 이상 쉽고 적절한 가격에 사용할 수 없다면,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물가 폭등과 경제활동이 억제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지구상의 에너지와 연료가 수소를 기반으로 전환될 수 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저자는 지구상의 문명을 에너지 관점에서 분석하여 인류의 과도한 에너지 사용이 해당 문명이 사라져가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음을 설명한다.
(열역학 제2법칙과 엔트로피 증가)
저자는 화석연료가 산업시대를 등장시켰지만, 동시에 에너지와 권력의 중앙집중과 전지구적 차원에서 부와 행복의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고착화시켰다고 비판한다.
또한,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하여 지구상 에너지의 정상적 순환이 막혔으며,
기상악화와 생태계 파괴가 점점 심해짐을 고발한다.
그리고 21세기 내에 석유가 고갈될 뿐 아니라 고갈되는 과정에서 석유매장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동,이슬람으로 인하여 에너지 문제가 분쟁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경고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수소가 우주상, 지구상에서 가장 많고 보편적인 연료이며,
수소 경제의 바탕이 이미 지구 곳곳에서 마련되고 있고
수소 경제는 단순하게 풍부한 연료, 환경친화적인 연료, 재생가능한 연료일 뿐 아니라
’분산전원’ 방식을 통하여 에너지의 민주화와 전세계적인 정치경제의 민주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한다.
 
- 1970, 1980년대 석유 파동은 정치적인 원인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앞으로 석유 파동이 다시 일어난다면 그 원인은 진짜 석유가 모자라서이다.
  1956년 발표된 ‘허버트의 종형(鐘形) 곡선’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석유 생산이 1965-1970년에 절정을 이룰 것이라고 내다봤다.
  당시 관계자들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놀랍게도 미국의 석유 생산량은 1970년에 절정에 이른 뒤 계속 떨어지고 있다.
- 지금까지 석유의 흐름을 성공적으로 제어해 온 국가, 기업, 국민들은 전에 없던 엄청난 부(富)를 향유해 온 반면, 석유 수출에 대부분의 돈을 들이고 있는 제3세계 국가들은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빈국들이 수입 석유 의존도를 줄일 수만 있다면 이러한 세계 경제 구조의 판도는 달라질 것이다.
  실제로 석유 시대의 종말은 머지않았다.
- 사실 현대 사회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석탄, 석유, 천연가스 덕이다. 본질상 상업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아니면 사회적인 것이든, 과거 두 세기 동안 이뤄진 모든 진보는 화석 연료 이용으로 촉발된 동력의 엄청난 급증과 어떤 식으로라도 연관돼 있다.
  한 사회의 상대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를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다.
  지난 200년 동안 서구 사회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역사에 기록된 다른 모든 사회를 합해 산출한 1인당 에너지 소비량보다 많았다.
- 현대인은 전례 없이 높은 생활 수준을 구가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운은 수백만 년 전 형성된 화석 연료 덕이다.
  석유 산출국들은 자국의 경제적,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석유 매장량을 부풀려 발표하고 있으며, 또 학자마다 ‘매장량’을 달리 해석하기 때문에 매장량 추정치가 매번 다르게 발표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석유 생산이 절정에 이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석유가 조만간 고갈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 수소는 우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원소 가운데 가장 흔하기 때문에 ‘영구 연료’가 될 수 있다.
- 또한 수소는 이산화탄소와 같은 공해 물질도 배출하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 및 일본의 유수 자동차업체들은 수소 에너지 차량의 상용화를 확신하고 있고, 각국의 정부들도 수소 에너지 개발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2002.10.16)는 EU의 에너지 프로젝트와 석유 에너지의 대안이 수소밖에 없다는 점을 보도했다.
- 현재 수소 에너지의 실용화를 확신하고 있는 로얄 더치/셸, 다임러-크라이슬러, 롤스로이스 사 등이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EU에 조언을 해 주고 있다.
  유럽 위원회는 향후 5년 동안 수소 에너지를 위한 기술 개발에 21억 유로를 투자할 계획이다.
  사실 미국과 일본은 이 분야에서 이미 앞서가고 있다.
 
- 세계 수소 에너지망(HEW)은 또 하나의 기술, 상업, 사회 혁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HEW는 인터넷 통신망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참여 문화를 낳을 것이다.
  하지만 수소가 ‘만인의 에너지’로 등장하느냐 못하느냐는 초기 개발 단계에서 수소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 인류를 HEW로 한데 묶기 위해서는 민간 부문의 적극적 참여도 필요하다.
  자연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수소이지만 화석 연료, 바이오매스, 물 등 자연으로부터 추출해 연료전지에 주입한 뒤 전기로 변환시켜야 한다.
  즉 수소의 추출, 저장, 이용에 시간, 노동, 자본이 들어간다.
  하지만 수소는 화석 연료와는 달리 세계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데다 공급량도 무한해서 생산 비용은 계속 감소하여 결국 ‘제로’에 가깝게 될 것이다.
- 분산전원과 HEW는 1980년대 후반 인터넷처럼 현재 걸음마 단계에 있다. 하지만 분산전원 운영자들이 한데 결집하여 수소 에너지의 흐름을 제어하는 데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분산전원 소비자라면 피크부하에서 일반 전기는 차단하고 대신 분산전원을 가동시킬 수 있다.
  그만큼 전기료가 절감되는 것이다.
- 이제 대체 에너지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이 시대에 분산전원을 이용한 수소 에너지 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정부의 강력한 지도 아래 민간 기업 및 단체가 참여하면 인류는 또 한번 거대한 진보를 달성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 책 속의 글... ]
’오늘날 500개도 안 되는 다국적 기업이 모든 경제 활동의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다.
세계화는 화석 연료 시대의 마지막 단계를 대변한다.’ - p. 14

’현재 엑슨/모빌, 로열 더치/셸, BP, 토탈 피나 엘프가 세계 판매량의 32퍼센트와 정유 용량의 19퍼센트를 손에 쥐고 있다.

한편 국유업체들은 탐사, 개발, 채유 등 상류 부문을 손에 쥐고 있다.
아람코, 페트롤레오스, NIOC, 페멕스는 세계 석유의 25퍼센트를 생산하며 매장량 42퍼센트를 보유 중이다.
10~12개에 불과한 슈퍼 메이저 정유업체와 국유업체들이 세계에너지를 지배하고 있다.’ - p.106

’세계 상거래와 무역을 장악하기 위한 기업 집중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해마다 국제경제에 군림하는 기업 수가 적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기업의 매출과 국가의 국내총생산(GDP) 비교치를 바탕으로 산출한 세계 100대 경제 집단 가운데 쉰한 개가 기업이고, 나머지 마흔아홉 개가 국가다.
세계 200대 기업의 총매출 규모는 상위 10대 국가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국가의 경제 규모보다 크다.
 1999년 세계 5대 기업의 매출은 182개국의 GDP 총규모를 각기 웃돌았다.’ - p.119 

’2메가바이트의 데이터를 제작, 저장, 전송하는 데만 석탄 1파운드가 필요하다’ - p.220
 

[ 2010년 8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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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영혼의 거울 - 개정판 다빈치 art 6
프란시스코 데 고야 지음, 이은희.최지영 옮김 / 다빈치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공부모임에서 세미나 교재로 이 책과 새러 시먼스의 [고야]를 선정했다는 연락을 받고 처음에는 의아했다. 일단 '프란시스코 데 고야'라는 미술가의 이름을 들었던 기억도 없었고  지난 세미나 교재였던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크키의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에 이어 두 번 연속 미술 관련 책으로 세미나를 한 것도 공부모임에서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100회 넘도록 인문, 사회, 정치, 경제 분야 세미나에 치중했기 때문에 최근에 그러한 경향에서 벗어나 예술분야를 연속해서 공부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다빈치 출판사의 기획에 따라 미술가들에 대해 연속으로 도서를 출판한 시리즈 도서 중 하나다. 2001년 처음 출간했다가 올해 개정판을 내놓은 것이다. 나는 미술분야에 문외한이라 잘 몰랐지만,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는 스페인(에스파니야)에서 가장 위대한 미술가로 칭송받는 3~4명 중의 한 사람이고 세계 미술가와 관련 학자들로부터 '근대미술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스페인이라는 국가는 '정열'을 쉽게 떠올린다. 이 책을 통해 그러한 스페인의 감성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지...
 
저자 최지영과 이은희는 정열적인 에스파냐인 고야의 삶과 예술을 들여다보기 위해 책 속에는 그의 유화, 드로잉, 판화 대표 작품들을 모으고 가장 친한 친구와 이십 년 넘게 주고받은 편지글이 들어 있다. 특히 60여 점에 이르는 유화 작품들은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화풍의 변화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리고 세련된 에칭과 에퀴틴트 판화 작품들로 인간 본성의 추악함과 인간 사회의 부조리를 꿰뚫어보는 판화집 [카프리초스(Los Caprichos)]의 전편 80개 작품을 고야가 직접 쓴 해설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 * 고야는 누구인가? ---------------------
18-19세기 초, 전통과 혁신, 발전과 퇴보, 전쟁의 참상 등으로 혼란스럽던 에스파냐에서 화가 고야는 인간의 본성, 특히 광기와 야수성에 집중하고 희비극과 부조리로 가득한 인간의 삶을 관찰하여 화폭에 옮겼다. 그가 궁정 화가로 활동하면서 그려낸 많은 초상화와 인물화, 종교화 등에서는 고루한 전통적 표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와 인물에 대한 탁월한 심리 묘사가 훌륭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능숙한 에칭 기법으로 제작한 판화 작품집에서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인간 사회라면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허위의식과 폭력성을 때로는 사실적으로, 때로는 우의적으로 비판하고 고발했다. 인생의 절정기에 찾아온 병으로 청력을 상실했지만, 이후 내면의 고통이 더해진 고야의 작품들은 원숙미와 심오함이 한층 강화되었다. 현대 미술에 한 걸음 다가간 화가로 평가받는 고야는 인상주의 화가들을 비롯한 후대 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자화상>                                                               <말년의 고야와 의사>

 
책은 1장. [고야, 영혼의 거울]과 2장. [카프리초스]로 나누어져 있다. 마지막 부분에는 [카프리초스]에 대해 20세기 영국 출신 작가인 올더스 헉슬리가 설명하고 평가한 글이 들어 있다. 
 
1장의 전반부에는 고야의 생애 기간 동안의 유럽과 스페인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을 묘사한다. 정치가와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술가들 역시 생존 당시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과 의식, 문화에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18~19세기 초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다. 15~16세기 강력한 함대와 식민지 개?으로 유럽의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은 17세기부터 몰락하기 시작했다. 18세기와 19세기는 그러한 스페인이 유럽 사회에서 제자리를 찾아가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처음 스페인 미술계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하던 고야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미술 교육과 훈련을 받은 후 돌아와 아카데미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30대 후반부터 궁정 화가가 된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는 왕과 귀족들의 초상화와 종교화를 그리면서 명성을 얻은 한편, 끊임없이 전통에 도전하고 혁신을 꿈꾸며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자 했다.
 

 

 

 
< 처음 인정받기 시작한 '성 요셉의 죽음'>         < 고야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18세기 후반, 후기 로코코 시대 스페인은 대내외적으로 불안정했다. 왕족과 귀족, 성직자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 지배 계층은 사치와 허영, 탐욕과 부정부패에 깊이 물들어 있었으며, 전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나폴레옹군은 코밑까지 진격하여 위협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오랜 정체기가 막을 내리고 변화와 발전을 향한 진통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 고야는 궁정 화가로서 지배 계급의 비위를 맞추는 한편 구태의연한 전통적 표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기를 들었다. 당시 그가 그린 초상화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주문자의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켜주면서 내면을 관찰하고 심리를 표현하는 데 있어 자신의 개성을 담뿍 담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카를로스 4세 가족 >

  

<프란시스코 바예우>                    <알바 공작부인>                       <마르틴 사파테르>

 

< '벌거벗은 마야' 와 '옷을 입은 마하' >

 
그러나 이들 근엄한 초상화와 더불어 에스파냐 민중의 삶을 밝고 화사한 색채로 표현하던 고야의 화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밤낮 없는 노력으로 비로소 인정받아 성공 가도를 내달리던 사십 대 중반에 청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내면세계로 점점 파고들던 고야의 눈앞에 프랑스군의 침략 아래 신음하는 민중의 고통과 두려움, 참혹한 현실이 펼쳐졌다. 그의 화폭은 인간의 광기와 야수성이 지배하는 악몽 같은 풍경으로 변해갔으며 음울한 색채와 휘두르는 듯한 붓 터치로 폭발할 지경이었다.
 

 

<정신병자 수용소>                                     <도자기 파는 여인>

 

 

 

<엘 마라가토의 무기를 빼앗는 살디비아 신부>   <거인>

 

 
 

1장의 후반부에는 고야가  자신의 가족보다 더 각별히 여긴 친구 마르틴 사파테르(Martin Zapater)와 이십 년 넘게 주고받은 편지글을 수록했다. 친구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을 전하는 편지에는 고야의 가족 관계와 그들을 부양해야 하는 생활, 경제적인 상황, 사냥과 초콜릿에 몰두하는 취미 생활, 왕족이나 귀족들과의 관계, 작품 제작에 대한 어려움,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 등이 함께 나타나 있다. 허물없는 친구에게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는 이 편지들은 후대에 작성된 그 어떤 해설보다도 고야 자신을 드러내준다.

2부에서는 세련된 에칭과 애쿼틴트 판화 작품들로 인간 본성의 추악함과 인간 사회의 부조리를 꿰뚫어보는 판화집 [카프리초스Los Caprichos]의 전편 80작품을 고야가 직접 쓴 해설과 함께 소개한다. 인간 정신의 어두운 측면과 삶의 다양한 양상을 관찰하여 제작한 이들 작품에서는 꿈과 환상적 요소에 사회와 인간에 대한 비판을 버무리고 헌신해야 하는 가혹한 현실에 도피적인 요소를 뒤섞어 놓았다. 날카로움과 부드러움, 빛과 어둠을 적절하게 대비시키는 능숙한 판화 기법으로 인간과 인간이 처한 현실에 대해 매섭고도 씁쓸하게 논평하는 이 판화집으로 고야는 에스파냐를 넘어 프랑스와 영국에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뒤러와 렘브란트의 계보를 잇는 위대한 화가이면서 판화가인 예술가의 계보에 자리하게 되었다.

 

 

  

<사형수>                             <이빨을 찾아서>    <여자들은 제일 먼저 청혼하는 남자에게 '예'라고 답한다>


고야의 작품들에 가득한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붓 터치, 솔직하며 때로는 고뇌의 찬 감정을 전달하는 그의 글보다 고야를 더 잘 말해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 여러 참고 문헌에서 발췌한 고야와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설을 첨가하여 좀 더 이해를 돕고자 했다. 이 한 권의 작품집으로 고야의 모든 것을 담아내기란 가당치 않다. 그러나 당대 낭만주의 미술가들이 열광하고 이후 인상주의 미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고야의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 그리고 그의 작품들에 감동하고, 그가 비판하고 풍자하며 혹독하게 그려낸 18세기 말~19세기 초의 세계가 지금의 우리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느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고야의 작품 중에서 몇 개는 앞으로도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특히, 1808년 프랑스군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붙잡혀 총살당하는 장면을 표현한 <1808년 5월 3일>과 동판화집 [카프리초스] 속의 <이성의 꿈은 괴물을 낳는다>와 <힘껏 불어라>의 경우가 그렇다.
작품 <1808년 5월 3일>는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1867)>과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게르니카(1937)>, <조선에서의 학살(1951)>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놀랍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피카소와 마네의 학살 그림 밖에 알고 있었다.

고야의 동판화집 [카프리초스]는 80여 점의 그림 모두 놀랍고 충격적이다. 특히 19세기 초에 미신과 우화, 인간의 악마성을 판화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놀라울 뿐이고 특히 <이성의 꿈은 괴물을 낳는다>와 <힘껏 불어라>는 강인한 인상으로 남았다.
 <이성의 꿈은 괴물을 낳는다>

 
사실 이 책 속에는 고야 생전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자세하고 폭 넓은 이야기가 들어 있지는 않다. 그리고 고야 이전의 유럽과 스페인의 문화나 미술계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도 별로 없다. 그래서 주로 저자들이 설명하는 대로 고야의 생애와 미술과의 만남, 작품 세계, 작품의 의미 등에 대한 저자의 주장과 의견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기본적인 고야의 작품활동과 미술계에서의 위치, 궁정화가로의 등극과 작품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취득할 수 있었다. 
 
저자들의 고야에 대한 평가는 너무 상식적이지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다.
1771년 고야가 스페인 아카데미아 디 발레 아르티의 입학심사에서 2등을 했는데, 저자들은 아카데미가 고야의 작품을 호평하는 기록('고야가 주제에 더 충실하고 색채 사용에 있어 자연색에 좀 더 유의했더라면 1등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을 "아직 무명의 청년 화가에 불과한 고야가 당시에 이미 전통에 맞서는 반항아였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p.14)라고 분석한다. 문제는 고야가 아직 스페인 미술계에 발을 들인지 얼마 되지 않아 아카데미의 주제에 충실하고자 했지만 주제 파악을 못하거나 실력 부족으로 색채 사용에 실수했을 수도 있음을 간과한 평가라 할 수 있다. 저자들은 고야의 18세기 말~19세기 초 작품세계를 수 십 년 전부터 맹아가 싹튼 것이라는 치우친 결론을 내린 것이지 않나 싶다.
저자들은 고야가 '유약한 성격으로 실패나 빈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대결에서 타협하는 자세를 취하곤 했다'라고 분석하면서도 아카데미와 왕실에 제출한 그림을 두고 "고야는 공식적인 견해와 늘 대립했는데 그 이유는 항상 똑같았다. 그는 작품이 구도, 주제, 전반적인 구상을 당시의 취향에 따라서 설정하려 했지만 터져 나오는 자신의 개성을 억누를 수 없었다."(p.16)라면서 약간 상반된 의견을 피력한다. 그렇지만, 평생에 걸쳐 성공과 안락한 생활과 높은 공식 지위를 원했던 고야의 생애를 고려해보면 그가 공개적으로 공식적인 견해와 대립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평생 절친한 친구였던 사파테르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더라도 고야는 궁정 화가로서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개인적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책 속에서는 친구 사파테르와의 편지글 속에 들어있는 애정강도가 높은 글의 표현을 통해 사파테르와 고야가 '동성애' 관계였다는 분위기를 내보이는데 실제 그 때 당시 스페인이나 유렵에서 절친한 친구들의 편지글 형식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쉽게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고야는 후대에게도 높이 평가받았고 '천재'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는 예술가로서는 몇 가지 점에서 특이하다.
그것은 궁정화가로서 왕실과 귀족 등 지배층, 기득권층에게서 평생동안 인정받으면서도(심지어 19세기에 스페인을 점령한 프랑스 지배자들로부터도 인정받았음) 개인적으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탐구하면서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점과 두 번에 걸쳐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병에 걸리고 나서도 회복하여 성공과 창조의 열정을 지속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천재들은 고흐나 모짜르트, 베토벤처럼 매우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고 또 열학한 조건에서 예술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보통의 예술가들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깊이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야는 평범한 환경에서 자랐고 아주 성공적인 직업과  삶의 조건을 영위했음에도 후대의 미술가들에게 인정받는 정도의 예술성을 창조했던 것이다. 물론, 40대 초와 말년에 고야에게 찾아온 청력 상실과 죽음에의 공포 이후 고야의 예술성이 높아지고 자신과 인간 내면의 세계를 탐구했다는 정황을 볼 때 고야 역시 '예술가의 창조성의 원천'이라는 큰 환경적 범주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지만...
 
[ 2011년 7월 15일 ]



<1808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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