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심 - 상 - 파리의 조선 궁녀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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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처음 이 책을 고를 때 적지 않게 고민했다.
그 이유는 이 소설도 전에 읽었던 작가의 백탑파 시리즈-방각본 살인사건, 열하문의 비밀, 열하광인-처럼 상,하 2권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출판사의 욕심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가 프랑스로 ’팩션 기행’을 떠나면서 <중앙일보>에 연재했다는 인터넷 기사를 본 것도 원인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상술’의 주체가 출판사이지 작가는 아닐 것이라는 믿음으로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어떤 이유와 과정으로 <중앙일보>에 기행문을 연재했는지 구체적인 내막을 모르기 때문에 그 건은 보류하리라 마음먹었다.
’소설가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면 안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책을 구입한 후, 먼저 읽지 않고 여자후배에게 먼저 읽기를 권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친구는 소설의 다 읽지 않았고 상,중,하권 중 중권까지 읽다가 덮었다고 한다.
그 후배는 역사학과 출신이기에 역사의식에 대한 자신의 고민이 많았던 친구다.
글도 곧 잘쓰는 친구인데 무엇이 그 친구에게 독서를 중단시켰는지는 내가 모두 읽은 후에 물어봐야 하겠지...
 
작가의 소설은 ’치밀한 고증’이 특징이다.(물론, 다른 소설가들이 고증을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한반도 근현대사에서 큰 갈림길이 되었던 조선 후기 ~ 말기에 대한 작가의 글이 여전히 궁금했다.
이 소설 역시 작가가 고증을 위해 나름 노력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작가는 下권에 자신이 파리와 마르세이유, 탕헤르에서 리심의 흔적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과정을 설명한다.)
 
리심(梨心)은 19세기 말 개화기 조선의 실존 인물로 프랑스 외교관과 사랑에 빠졌던 궁중 무희다. 초대 그리고 3대 프랑스 공사를 지낸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가 그녀의 연인이다. 리심은 1893년 5월 빅토르 콜랭을 따라 조선 여성 최초로 프랑스에 발을 디뎠다. 1894년 10월 플랑시가 모로코 대사로 부임하면서 역시 최초로 아프리카 땅을 밟은 조선 여성이 되었다. 1896년 플랑시를 따라 귀국한 후 궁중 무희로 복직했으나 금조각을 삼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리심에 대한 기록은 2대 프랑스 공사였던 프랑뎅의 회고록 『한국에서(En Cor?e)』을 통해 전한다. 프랑뎅에 따르면 리심은 “유럽인의 눈으로 봐도 정말 아름다웠고”, “폭넓은 정신과 예술적 자질”을 지닌 재색을 겸비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저자 김탁환이 리심에 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소설을 쓰기 2년 전 우연히 프랑뎅의 회고록 <한국에서(En Cor?e)>를 읽다가 “리심은 자신이 관찰한 놀라운 서양 문물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기록해 두었는데, 나는 언젠가 그 기록들을 꼭 출판하려고 다짐하고 있다.”라는 대목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이 문장에서 착상을 얻은 저자는 리심이 기록해 두었으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가상의 여행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처음 예상한대로 이 소설이 단순한 ’애정소설’은 아니다. 궁중 무희와 외국 외교관과의 애절한 Love Story가 담겨있기는 하지만, 역시나 작가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고민도 담겨있다. 그리고 역사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은 120년이 지난 21세기 한반도에 여전히 비슷한 상태로 남아있지 않나 싶다.

 

-------[ 중권 ] -------

이 소설은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는 나아갈 진(진) : 궁녀로서의 삶, 과거의 아픈 기억, 고종과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과의 만남으로 인해 조선을 떠나는 운명이 나타난다.
두번째는 흐를 류(류) : 빅토르 콜랭을 따라 일본, 프랑스, 모로코 탕헤르, 사하라 사막, 마르세이유를 여행하며 다양한 서구 문화와 사람들과의 관계 겪는 과정을 보여준다.
세번째는 돌아올 회(회) : 조선의 외교관으로 돌아온 빅토르 콜랭을 따라 돌아오지만 고종과 빅토르 콜랭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혀 다시 궁중의 무희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녀는 고종 황제 즉위식 특별 공연에서 자신의 마지막 춤을 추고 이승에서 사라진다.

<상권> 주인공 리심의 어머니 월선은 "야소교(천주교)"에 빠져 신부와 함께 리심을 버리고 도망간다. 그 때문에 리심은 관가에 잡혀서 혹독한 관기 생활을 시작한다. 어머니를 닮아 노래도 잘 하고 춤도 잘 추던 리심은 어떤 관리의 추천을 받아 궁궐에 약방 기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궁에 들어가서도 의술을 익히고, 춤을 익힌다. 또한 밤에는 상궁(’큰아줌마’)의 도움으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을 읽으며 나름대로는 세상을 배워 간다. 그러다가 중간에 큰아줌마와 김옥균이 궁궐에 난입하는 사건(갑신정변)이 발생한다. 리심은 사건에 연루되어 죄인으로 조사받다가 중전(명성황후)가 살려준다. 중전의 발을 씻기고 중궁전 앞마당에 온종일 서있는 역할을 맡게 됨으로써 다시는 춤과 노래, 의술, 서책을 가까이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리심은 밤에 몰래 장악원에서 춤을 익혀서,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이 살고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중전은 리심이 춤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던 중, 왕실에서 외교관들을 모두 불러 놓고 베푼 축하연에서 리심은 선모(춤꾼의 중심) 역할을 맡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프랑스 공사인 빅토르 드 플랑시는 리심에게 첫눈에 반하게 된다. 원래 선모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발목을 삐어 리심에게 자리를 내어준 영은이나, 함께 춤을 추었던 지월, 빅토르, 그리고 고종 모두 그 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만, 정작 리심의 입장에서는 어떤 행동을 어떤 의도로 했는 지,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는 리심이 한 일이 진짜인지, 그들의 편견에서부터 온 것인지 아무것도 해명이 되지 않는다. 이것 뿐만이 아니다. 리심은 어린 소녀에서 아가씨가 되어가고 있다. 

<중권> 리심이 외교관인 빅토르를 따라 세계를 물 흐르듯 돌아다니는 내용이 나온다. 본문에서도 외교관은 "흐를 류"자와 닮아있다고 빅토르가 말하는 구절이 있다. 두번째 권에서는 리심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일이 벌어진다. 빅토르 콜랭은 일본을 거쳐 파리로 돌아간다. 일본에서 리심은 김옥균을 만난다. 빅토르는 파리로 돌아가는 뱃길에서 지병이 악화되어 파리에 도착해서도 몇 개월간 병원에 입원한다. 리심은 파리에서 ’파리지엔’으로서 삶을 하나씩 배우고 적응한다. 그러던 중 동양인을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당하여 유산하면서 우울한 삶이 된다. 파리에 도착한지 1년 후 빅토르는 모로코 탕헤르에 파견가게 되고 리심을 빅토르를 따라 탕헤르에서 새로운 세계와 사람들을 만난다. 리심은 사하라사막을 구경하고 싶어 빅토르를 졸라 사하라사막을 건너기 시작하지만 서양인을 거부하는 베두인들에게 약탈당하고 사막폭풍을 맞아 외톨이가 된다. 리심이 착한 사막의 베두인들에게 구출되고 그들에게서 깨달음을 얻을 때 빅토르는 프랑스군과 함께 닥쳐와 리심을 도운 베두인들을 모두 살해한다.

<하권> 리심은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공화주의자가 되어 빅토르와 함께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다. 조선은 중전이 시해당하고(을미사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는 상황(아관파천)이었다. 그 와중에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고 있고, 각국 외교관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 리심은 조선에서도 프랑스에서 입던 복식으로 생활한다. 리심은 이제 조선여자도 아니고 프랑스여자도 아니다. 어디에서도 환영받거나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그냥 "리심"일 뿐이다. 사랑은 믿을 수 없고, 서로가 양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서로간의 교류일 뿐이었다. 리심은 빅토르에게 일순간 실망했지만 곧 이해할 수 있었다. 고종은 프랑스의 도움을 빌어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싶어한다. 거기에 과격한 홍종우까지 가세했다. 그러나 빅토르는 그들에게 쉽게 힘을 빌려주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한 나라의 외교관이라는 역할에 충실한 것이다. 프랑스에게 피해를 끼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철저하게 중립적인 입장에서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리심은 다시 궁중으로 잡혀가 춤을 익히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마련한 축하연에서 다시한 번 빅토르와 고종 앞에 선모로 선 자리에서 자살한다.

<프랑스 외교관 프랑댕 (Frandin)의 회고록에 남아있는 동료 외교관(플랑시를 칭함)과 궁중 무희의 사랑에 대한 기록>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890년대 초기의 일이다. 당시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관의 대리공사 (Charge d’affaires ? Collin de Placy)가 왕궁 소속의 어느 무희(danseuse)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것이 한국 여인과 서양인 사이의 최초의 사랑이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이들은 함께 프랑스로 와서 결혼한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 무희가 프랑스에 왔다 간 최초의 한국여성이 아닌가 생각된다. 

왕궁에 예속된 무희들 가운데 인물이 빼어나게 예쁜 무희가 있었다. 서양인의 눈으로 보아도 두말 할 여지가 없는 미인이었다.
어느 젊은 프랑스 대리공사(‘콜랭 드 플랑시’를 일컬음)가 ? 그 분이 아직도 살아 있으므로 이름을 밝힐 수 없다 ? 이 젊은 여인의 우아하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반하게 되었다. 대리공사가 고종 황제(이희)에게 이 여인을 요구하자 황제는 너그럽게도 그녀를 (선물로) 하사했다. 무희는 근본이 노비 출신이므로 저항없이 새 주인을 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럽으로 돌아가게 된 대리공사는 날이 가면 갈수록 이 젊은 한국 여인의 지적인 우수성에 끌리게 되었다. 그녀와 떨어질 수 없게 되자 그녀를 프랑스에 데려가기로 했다.
그들이 한국을 떠나기 전, 나(저자, 프랑댕)는 대리공사의 집에서 문제의 그 무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한국 고유의 옷을 입은 미녀를 보고 나도 감탄해 마지 않았다.

프랑스 공사가 한국을 떠나는 날, 작별 인사를 할 때 그녀가 우아한 빠리지엔느 같은 의상을 차려입은 것을 보고 놀라,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불안한 예감마저 들었다. 법썩 가운데서도 ‘Li Tsin ? Fleur d’ame’ 이라 (‘리화심, 李花心’ 또는 ‘리심, 李心’ 을 표기한 것) 이름한 이 무희의 깊고 맑은 눈 만은 반짝였고, 그녀의 개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동료이자 친구인 외교관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는 그녀와 결혼하겠습니다. 당신은 리심의 마음이 얼마나 고운지 모르실 겁니다. 한국에서는 여신이 될 만한 미인이며, 프랑스에서는 천사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유럽에 도착하자, 그는(플랑시 공사) 약속대로 ‘노비’와 결혼하였고, 그의 아내가 된 리심에게 각종 개인 교수를 대어 주었으며 지도교수들은 모두 이 한국 여인의 적응 능력과 예술적인 본능을 인정했다. 천재적인 이 여인은 프랑스의 관습, 카톨릭 교리에 감탄하였으며, 아름다운 서구 언어에도 곧 친숙해 졌다. 그녀는 보고 느낀 것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썩 잘 썼는데, 언젠가는 그녀가 쓴 것을 발표할 날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지나친 지적 감수성 때문인지, 오래지 않아 리심은 날마다 접촉하는 유럽 여인에 비해 신체적인 열등감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녀는 수심에 잠겼다. 남편의 부드러운 사랑에도 불구하고 날로 수척해 갔다. 아무리 떨쳐 버리려 해도 우수(brumes, 근심)가 동양의 뜨거운 태양에 거슬린 그녀의 이마를 덮고 떠나지 않았다.
가련한 작은 한국여인은 하도 야위어서 소파에 깊이 앉아있는 것을 보면, 우스개 말로, 원숭이에게 여자 옷을 입힌 것과 같이 보일 정도였다. 폐병으로 기침을 하기 전, 리심이 눈을 감고 이야기를 할 때, 리듬있는 그녀의 이야기에 우리는 귀를 기우려 황홀하게 듣곤했다. 리심은 멋진 말을 골라 장면을 묘사하면서 색채를 가미했다.

여러 달이 흘렀다. 휴가가 끝나 대리공사는 부인을 혼자 집에 두게 되었으며, 부인을 위해 한국식 안방을 꾸몄다. 그 후, 어느 날, 대리 공사는 다시 서울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 사실이 궁녀출신의 그의 부인에게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지 못하고, 짐을 꾸려 그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갔다.

서울에는 리심의 적이 있었는데, 어느 고관이었다. 아무리 숨어있다 해도 그녀가 서울에 돌아왔다는 사실은 곧 알려지게 되었다.
외국인과 결혼했다 하여 노비의 신분을 면하는 것이 아니었다. 왕 자신이 한 여인의 신분을 해방시켜 주고 싶어도 못하는 사회였다. 전 주인이 리심을 데려간 것이다. 그녀는 저항해 보지도 않고 되는대로 자신을 내맡겼다. 왕립 무희단(college)에도 강제 편입되어 다시 궁중무희로 옛 직업을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인권에 대한 자각’을 경험하고 서양문화를 접했던 리심은 사슬에 매인 육신에 다시 멍이 들기 전에 금 조각(feuille d’or)을 삼키고 자살하고 말았다.
나(저자, 프랑댕)는 ‘야만인들’ 가운데 방황한 이 여인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욕망을 이길 수가 없었다. 먼 후세의 개화한 한국 사회에 살아야 될 이 여인이, 신의 의지로, 너무 일찍 조선에 태어났던 것이다.
 

-----[ 하권 ] --------

저자의 역사소설, 팩션은 기본적으로 역사적인 사실을 기초로 이루어진다.
이 소설 역시 기록으로만 보아서는 아마도 리심이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에 가본 여성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초로 하여 전개한다.
갑신정변-갑오개혁-을미사변-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역동적인 근대사 와중에 살았던 리심이었기에 저자는 절묘하게 그 시대적인 격변 속에 리심이 자리잡게 하여 소설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궁녀 -> 파리 공사관의 아내(?) -> 궁녀로 이어지는 그녀의 인생은 천당과 지옥을 오고갔다.
조선시대 궁녀는 ’관비’, 말 그대로 관의 노비일 뿐이며 왕의 소유물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종은 프랑스 공사에게 궁녀를 선물로 ’하사’했고 다시 필요할 때가 되어 선물을 돌려받았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궁중 무희로 돌아간 리심은 자살로서 생을 마감한다.
저자는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그 사실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일본, 청나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열강과 외교적인 협상을 위해 리심을 이용한 것으로 줄거리를 전개한다.
 
물론 조선왕조시대, 전근대적인 사회체제에서 서구 문화를 받아들였을 때 그녀는 수많은 가치관의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사대부 집안의 여인들마저 유교문화 속에서 인간으로서 대접받지 못하던 시대...
여성으로, 그것도 궁중의 노비라는 처지를 벗어나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의 문화에서 받았을 충격...
각종 행사와 무도회, 거리의 모습, 에펠탑과 대극장, 상점과 식당 등...
1년 이상 프랑스에 머물르고 나름대로 프랑스의 언어와 문화를 익힌 상태에서 리심은 자의식과 자존감을 키웠을 것이고 다시 지옥같던 궁중무희로 돌아갔을 때에는 이미 과거의 리심이 아닌 상태...
그런 상황에서 리심에게는 그다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리심을 통해 19세기 말 조선 말 근대여성들의 희망과 절망을 엿볼 수 있었다.
그나마 당시 수 많은 조선의 여성들에 비해 리심은 잠시나마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조금 소설적 요소로 인정하기에 어려운 부분은 몇 가지...
먼저, 리심이 갑신정변에 연루된다는 설정...
상궁이었던 ’큰아줌마’가 리심을 어머니처럼 돌봐주었다 하여 갑신정변과 같은 큰 거사에 리심을 끌여들였다는 설정도 그렇고 갑신정변에 연루된 리심을 중전이 살려둔다는 설정도 약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둘째는 김옥균과 관련된 일화들..
일본에서 김옥균과 마주치던 상황을 왜 설정했는지 조금 의아하다.
셋째는 고종이 리심과 잠자리했다는 설정...
당시 고종은 조선의 왕이었기에 굳이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리심은 궁녀이기 때문에 리심이 파리에서 돌아왔을 때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공화주의자로서의 리심의 설정...
20년 가까이 조선에서 궁녀로 살았던 리심이 1년 넘게 서구의 책을 읽고 토론한다 하여 공화주의를 이해하고 공화주의자로 자신을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까...?
 

[ 2010년 6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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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예찬 -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예찬 시리즈
다비드 르브르통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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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버스, 배, 비행기, 기차, 전철에서부터 마차, 인력거, 자전거와 같이 인류가 만들어낸 '이동 수단'은 종류가 많다. 마차나 인력거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동수단도 있고 고속철도와 같이 새로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 물론,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과 같이 수 억년 전부터 자신의 몸으로 이동해 왔다.
인간에게 '발' 이외의 이동수단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가 자동차를 주차장에 버려두고 일상생활에서 '걷기' 시작한 지 이제 1년이 다 되어 간다. 처음 운전면허를 따고 중고 '악센트'를 운전하기 시작한 것이 1999년 11월이니 약 10년 간 자동차가 주요 이동수단이었 던 셈이다.
돌이켜보면 10년 간 자동차를 이용한 일상생활과 업무진행은 장점보다 단점이 많았던 것 같다. 경제적으로는 기름값, 자동차세, 보험료, 주차료, 과태료 등 '걷기' 및 대중교통과 비교도 되지 않을 뿐더러 출퇴근 시간에 그다지 빠르지 않았고 교통사고 위험성에 늘 긴장해야 했으며, 운동부족과 스스로 나태함이 늘어만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나마 2000년에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이동할 때 조금 '편했던 것'과 1년에 몇 차례 긴급하게 이동하거나 무거운 짐을 나를 때에는 도움을 받았다.
 
자동차는 내가 어떤 태도와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나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한 때 사업을 벌였을 때는 자동차의 '배기량'에 따라 회사의 이미지를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아무 생각없이 따라가기도 했고 심지어 몇 개월간 기사를 두기도 했다. 미팅을 하거나 식사약속을 할 때 주차가 가능하거나 발레파킹이 되는 곳을 찾게 되면서 그 대가로 비싼 음식점과 호텔 커피숍에서 돈을 낭비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야근으로 피곤한 상태에서 막히는 도로가 싫어서 일부러 자정을 넘겨서 퇴근하여 스스로 교통사고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다.
 
작년부터 '걷기'를 이동의 주요 수단으로 결심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 이 사회에 대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우선, 생각보다 걸어다니는 것이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다. 서울시의 대중교통은 무척 편리했고 밤 늦은 시간까지 운영되어 있었다. 대중교통은 여름엔 냉방, 겨울에는 난방이 잘 이루어졌고 환승시스템도 좋았다.
걷게 되면서 기초적인 운동량이 받춰주었다. 평일 하루에 짧게는 30분, 길면 1시간이 넘게 걷게 되었고 주말에는 2~3시간씩 걷기도 한다. 걸어 다니니까 좋은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이 책은 제목대로 '걷기'를 찬양하기 위해 쓴 것이다. 즉, 몸을 이용한 운동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걷기'를 다각도에서 예찬한 산문집이다. 저자는 '걷기의 즐거움'을 조금이라도 이야기한 책이라면 그게 여행서든 인문서든, 소설이든 죄다 인용하고 끌어다 댄다. '걷기'를 통해 본 독서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불행해진 것은 속도전의 광풍에 휘말려 이 '걷기의 즐거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첫 걸음, 시간의 왕국, 몸, 짐, 혼자서 아니면 여럿이?, 상처, 잠, 침묵, 노래부르기... 이런 소제목만 보아도 걷는 즐거움이 얼마나 다양한 지 알 수 있다. 저자는 혼자서 걷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노래를 부르거나, 가만히 서서 쇼윈도를 바라보아도 '왜?'라고 묻는 사람도 없고, 사색에 빠지기에도 너무 좋다는 것...
그리고 저자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과 숲 속에서 걷는 것 뿐 아니라 '도시에서 걷기'에 대한 즐거움과 의미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저자는 자기처럼 걷기를 즐긴 사람들을 소개한다. 그 중에는 헨리 데이빗 소로, 키에르 케고르, 장 자크 루소, 빅토르 세갈렌, 피에르 쌍소, 랭보, 니체, 스티븐슨, 그리고 일본 하이쿠 시인 바쇼 등이 있다. 이들은 여행을 즐겼으며, 걷는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사랑했다.
키에르 케고르는 "나는 걸으면서 내 가장 풍요로운 생각들을 얻게 되었다. 걸으면서 좆아 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이란 하나도 없다."라고 어느 편지에서 썼다.
니체는 "나는 손만 가지고 쓰는 것이 아니다. 내 발도 항상 한 몫을 하고 싶어 한다."라고 말했다.
루소에게 있어 걷기는 고독한 것이며, 자유의 경험, 관찰과 몽상의 무한한 원천, 뜻하지 않는 만남과 예기치 않은 놀라움이 가득찬 길을 행복하게 즐기는 행위였다.
그들은 운동 차원에서의 '걷기'를 말한 게 아니다. 이들에게 '걷기'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는 방편으로서의 걷기, 현대의 속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걷기, 몸이 베푸는 혜택으로서의 걷기를 의미한다. 그래서 '걷기 예찬'은 삶의 예찬이고 생명의 예찬이며 동시에 인식의 예찬이라 할 수 있다.

현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몸'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기존에 펴낸 저서만 보더라도 [몸과 사회], [몸과 현대성의 인류학], [위험의 열정], [살아있는 몸], [고통의 인류학], [몸의 사회학], [몸이여 안녕] 등 '몸'과 관련한 것들이 많다.
 
 
이 책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소개받은 셈이다. 스님의 저서 [내가 사랑한 책들]에서 추천한 50권 중에서 15번 째로 읽은 것이다. 법정스님은 스님의 저서 [홀로 사는 즐거움]에서 이 책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즘에 와서 사람들은 자동차에 너무 의존하면서 직립보행 기능을 잃어 가고 있다. ... 자동차로 인해 행동반경은 넓어졌지만 내 다리로 땅을 딛고 걸을 때의 그 든든함과 중심 집합이 소멸되어 가는 듯 싶다. ...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당하는 것이다. 걷는 사람은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상 밖으로 외출하는 것이다. 걷는 사람은 끊임없이 근원적인 물음에 직면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 자연 속에는 미묘한 자력이 있어 우리가 무심히 거기에 몸을 맡기면 그 자력이 올바른 길을 인도해 준다고 옛 수행자들은 믿었다. 자동차에 의존하지 않고 두 발로 뚜벅뚜벅 걷는 사람만이 그 오묘한 자연의 정기를 받을 수 있다."
 
 

나는 걷기 시작하면서 나의 '걷기'에 대해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다만, 저자가 '걷기'라는 수단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 가져야 하는 것들을 설득력있게 들려주는 바를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다.사실 어제 밤에는 모처럼 친구와 함께 15km 이상을 함께 걸었다. 추석 연휴 내내 '이유없이 구속되어 보이지 않던 보름달'이 어제 밤에는 구름 사이로 석방되어 나왔다. 안양천 뚝방길을 걸으니 강아지풀과 코스모스가 한창이었고 은은하게 달빛을 세례받은 듯한 풀과 꽃과 작은 길이 가을 정취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달 빛 속에 친구와 나란히 걸으면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니 그 사이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이런 것이 '걷기'의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걷고 싶다...^^
 
[ 2011년 9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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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 자폐인의 내면 세계에 관한 모든 것
템플 그랜딘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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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100년 전 과거로 돌아간다면 1911년 조선에서 대다수와 조선사람과 나(21세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중에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일까... 유대인 중에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현재의 중국에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정상일까, 비정상일까.. 2011년 현재 '가카'를 조롱하는 사람이 정상일까 아니면 비정상일까... 정상고 비정상의 기준이 뭘까...

1988년배리 레벤슨 감독의 영화 [레인맨](더스틴 호프만 주연)을 볼 때는 자폐증보다 형제간의 우애에 대해 더 생각했었다. 그 뒤 Cable TV에서 론 하워드 감독의 영화 [뷰티풀 마인드](2002년작, 러셀 크로우 주연) 보면서 처음 정상인과 비정상인, 정신이상의 기준과 경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20대 초반에 '제2의 아인슈타인'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천재였던 수학자 '존 내쉬'의 생애를 다룬 영화였다.

사람들이 자신이 소속된 사회에서 '평균' 또는 '중간'이 되고 싶은 것은 사회심리학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도전과 더불어 '안정'적인 느낌을 갖고 싶은 것은 모두의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평균'에서 벗어나고 '중간' 아래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평균에 속한' '중간' 사람들의 태도다. 평균에서 벗어나거나 중간보다 못한 사람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것이냐의 문제인데, 사실 한국사회 뿐 아니라 대부분의 외국사회에서도 사회적,문화적으로 차별하고 배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실 차별과 배척은 역사적으로 오래된 현상이고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심리적,문화적 잔재이기도 하고 '동등한 인권'의 과점에서는 '폭력'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차별의 대상에 따라 유형도 천차만별이다.
가장 근대적이면서도 불법적인 차별은 수십억 횡령을 해도 구속하지 않지만 2억에 대한 의혹만 있어도 구속하는 검찰과 법원의 차별, 재벌과 대기업의 민원은 일사천리로 해결하면서 중소기업의 민원은 '세월아 네월아' 질질 끄는 관료들의 차별,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니면 말고'식으로 기사를 써대지만 사주와 친하거나 재벌/대기업의 부당행위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조중동' 등 정치적,법적인 차별도 있다. 
사회 저변에는 공공임대주택에 거주하는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면 자신의 아이들의 성적이 떨어질 수 있다고 불만을 터트리는 '중산층 아줌마'의 차별도 있고 자신들의 일거리를 빼앗는다고 외국인 근로자를 바라보면서 눈에 쌍심지를 차별도 있고 명절 때만 되면 뒷짐지고 도망다니는 이 땅의 '남편'들의 차별도 있다.
 
이 책은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자폐증'이라는 신체적 장애는 그동안 사회에서 신체적 장애라기 보다 '정신병'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즉, 이 책은 사람들이 누구나 적어도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신체적 결함' 중 하나인 '자폐증'을 다루고 있다. 그것도 어려서부터 자폐증을 앓았던 사람이 생각하고 바라보는 자폐증과 이 사회에 대한 이야기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빈센트 반 고흐 등은 어린 시절에 발달 장애를 보였다고 한다. 자폐증은 의학적으로 ‘성장 초기에 시작되는 이상’으로 정의되어 있어, 전문가들은 자폐 성향이 있다는 판정을 받으려면 더딘 언어 발달이나 이상한 행동 등의 문제가 어릴 때에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다. 
어릴 때 아인슈타인은 이런 성향을 많이 보였다. 그는 세 살이 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전세계에 유명인사로 등장한 이후 한 자폐아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자기가 말을 너무 더디게 배워 부모님께 걱정을 끼쳤었다고 썼다. 아인슈타인이 일곱 살까지도 속으로 단어를 반복해서 말해야 했고,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고 되어 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천재성이 발달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인슈타인은 어릴 때 아무런 천재성도 보이지 않았다. 그를 바보라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철자법 실력도 엉망이었고, 외국어도 형편없었다. 자폐 성향이 있는 아이들이 대개 그러하듯 아인슈타인도 조각 그림 퍼즐을 아주 잘했고 몇 시간씩이고 카드로 집을 지으며 놀았다. 목적한 것에 대해서는 외곬이었고, 사생활에 관련된 것 등 흥미 없는 것은 거의 기억을 하지 못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자폐증은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다른 장애와 구분되는 '뇌 이상'이 나타나는 '신경계 장애'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소뇌와 변연계(limbic system)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이상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과학적 합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은 연구자들이 자폐증, 우울증, 불안증, 실독증, 주의력 결핍 장애 등을 포함한 여러 장애를 일으킬 위험성이 높은유전자 뭉치가 존재한다는 가설에 주목한다고 한다.(p.59)
자폐증이 유전되는 경향이 강하기는 하지만 자폐증 유전자라는 것의 존재는 밝혀지지 않았다. 자폐인은 자폐아를 낳은 가능성이 일반인보다 높다. 또 자폐아의 형제자매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학습 장애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뇌의 발달이 유전만으로 결정되지는 않기 때문에 확정적인 결론은 없는 상태다. 최근의 연구 사례들은 유아기의 신체 내적, 외적 영향이 뇌와 신경계를 구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하고 있다.
 
저자 역시 두 살 때 평생을 보호시설에서 살 것이라고 진단받은 자폐아였다. 하지만 저자는 자폐증을 하나의 병으로 인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고유한 특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극복했다. 그녀는 뒤에 애리조나 대학에서 동물학 석사와 일리노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가축 시설의 3분의 1을 설계했다. 2005년 현재 콜로라도 주립대학의 동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미국과 전 세계를 순회하며 자폐증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자폐’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떠올릴 것이다. 말은 못 하고, 온몸을 흔들어대며, 소리를 지르고, 대화를 나누는 게 불가능하고, 사람들과의 접촉으로부터 단절된 아이를 머릿속에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자폐아’라고 하지 ‘자폐인’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마치 이런 아이들은 영영 자라지 않거나, 이 세상, 이 사회에서 비밀스럽게 사라져 버리기라도 하는 듯이.
아니면 자폐인 ‘사방(savant)’을 떠올린다. 기묘한 버릇에다 반복적 행동을 보이고, 정상적인 삶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으나 영화 <레인 맨>에서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처럼 계산, 기억력, 그림 그리기 등에 있어 불가사의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폐에 대한 인식은 아주 협소하고 지엽적인 현상에 대한 묘사일 뿐, 자폐인의 여러 가지 사례를 보여주지도 못하는 것이고, 자폐인의 내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언급도 아니다.

자폐인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고 인식하고 반응한다.
모든 자폐인이 그러하지는 않지만, 저자 템플 그랜딘은 그림으로 사고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언어에 기초해 사고하지만 그녀는 모든 언어를 시각적인 연상으로 대체해서 사고하며, 특정 단어에 대한 회화적 연상이 연속적인 화면으로 이어져서 사고하는 것이다.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언어는 나한테는 외국어와도 같다. 말을 듣거나 글을 읽으면 나는 사운드까지 완벽하게 갖춰진 총천연색 영화로 번역을 해서 머릿속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돌리듯 돌린다. 언어에 기반해서 사고하는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이해하기 힘들어하지만, 누군가 나한테 이야기를 하면 그 말도 그 즉시 그림으로 번역된다."(p.17)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그녀는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영상에서 일반적 개념으로 사고가 이동한다.

이를테면 개라는 개념은 지금까지 그녀가 본 모든 개와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다. 지금까지 본 개 전부를 사진 목록으로 만들어 머리 속에 보관하는 것과 같다. 이 목록은 비디오 도서관에 사례를 추가하면서 계속 늘어난다. 그레이트데인 종(種)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고등학교 때 교장 선생님이 기르던 그레이트데인 종의 개 댄스크의 모습이다. 그리고 댄스크 다음에 선생님이 기른 헬가가 떠오른다. 그 다음은 애리조나에 사는 그녀의 이모네 개고, 마지막으로 그 종 개가 나온 핏웰 시트커버 광고를 떠올리는 것이다. 이런 기억은 대개 시간 순서에 따라 떠오르고, 항상 구체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따라서 그녀에게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그레이트데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폐인 모두가 시각적 사고를 하는 것은 아니고, 누구나 다 이런 식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각화 기술에 있어서 제로에 가까운 사람부터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그림을 보는 사람, 반쯤 구체적인 그림을 보는 사람, 그녀처럼 아주 구체적인 그림을 보는 사람까지 연속체를 이룬다. 하얀색과 검정색을 무차별로 섞어 놓았을 때 그 중간에 존재하는 회색은 수 백, 수 천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인식 체계의 다름으로 인해 자폐인은 그림으로 떠올릴 수 없는 것을 배우기가 제일 힘들다. 자폐아는 단어 중에서 명사를 가장 쉽게 익히는데, 이미지와 일 대 일로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처럼 높은 수준의 언어능력을 가진 자폐아는 음성으로 읽는 법을 익히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능력이 더 떨어지는 아이들은 더 구체적인 연상을 통해 익히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주변 사물에 이름표를 달아 놓는 식으로 단어를 익히는 것이다. 장애 정도가 심한 자폐아는 손으로 만져 보고 느낄 수 있는 입체적인 글자로 단어를 써 줄 때 더 쉽게 배우기도 한다. 자폐아의 경우 시각, 촉각, 청각, 맛, 냄새 등 감각에 대한 민감한 정도가 다르므로 각각의 경우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언어에 대한 연상을 도와 바깥 세계를 인식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들이 공동체 속에서 같은 인간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배려해야 한다.


저자는 자폐 아동을 가르치는 교사들도 '연상적 사고 패턴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자폐아는 단어를 부적절하게 사용할 때가 많다. 이런 부적절한 단어는 말하고자 하는 바와 논리적 · 연상적 연관이 있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자폐아는 밖에 나가고 싶을 때 "개."라고 말한다. 그 아이에게는 '개'라는 단어가 밖에 나가는 것과 연관이 되는 것이다.
결국, 저자의 경우나 다른 자폐인도 커다란 범주에서는 '인류'의 공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눈이 나빠 안경을 쓰고 생활하거나 목발을 집고 생활하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신체 장애인이 살아가는 방식이 일반인과 조금 다를 뿐인 것처럼 그들은 뇌와 신경계에 이상이 있을 뿐이다.

 
자폐인의 인식세계가 그러하기에 자폐인이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징이 필요하다.

저자의 경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인간관계’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문과 창문’이라는 시각적 상징을 만들어 내기 전에는 말이다. 그런 상징들을 만들어 내고 난 다음에야 그녀는 관계에서 서로 주고받는 법을 익히는 것 등의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폐인이 사용하는 이런 상징을 보고 보통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하지만 자폐인은 이런 상징을 통해서만 현실을 실제적으로 느끼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프렌치토스트를 먹으면서 행복했었다면 ‘프렌치토스트’는 행복을 의미할 수 있다. 이 아이는 프렌치토스트를 떠올리면 행복해지는 것이다. 시각적 이미지나 단어는 경험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나 자폐증이 심한 경우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만으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자폐증이 심한 테드 하트라는 아이는 일반화 능력이 거의 없고 행동에 융통성이 전혀 없다. 그의 아버지 찰스 이야기에 따르면 하루는 건조기가 고장 나자 테드가 젖은 빨래를 그냥 옷장에 넣었다고 한다. 익히 알고 있는 빨래 순서에 따라 그냥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테드한테는 상식이라는 게 없다. 이런 경직된 행동이나 일반화 능력 결여는 시각적 기억을 바꾸거나 수정할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따라서 저자는 '천재성도 비정상성'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천재적인 과학자들이 자폐증이나 조울증을 앓았고, 그러한 증상이 가지는 사방으로 인해 과학적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러한 연구에 기초해 볼 때, 만약 자폐증이나 조울증 등의 이상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발견한다고 하여 이를 제거한다면 이 세상에는 창의적인 생각을 할 줄 모르는 따분하고 틀에 박힌 사람들만 가득할 것이라는 템플 그랜딘의 주장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자폐증, 조울증, 정신분열증을 일으키는 유전자 뭉치는 적은 분량으로 존재할 때는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심한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유전적 성향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과 과학적 발견을 가져온 재능과 천재성을 가져다주기도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저자는 이러한 점에서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뚜렷한 경계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자폐증, 심한 조울증, 정신분열증 같은 장애가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주면서도 우리 유전자 안에 계속 남아 있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회계사의 사고 방식과 예술가의 사고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세상에서 공존해 살아가고 있고, 그 사이에는 경계의 선이 있기 보다는 사고방식의 경향에 따른 연속체가 있다는 것이다. 자폐인의 범주에서 저기능 자폐인과 고기능 자폐인이 연속체의 양쪽 끝에서 연결되어 있듯이 인간의 영역에서 자폐인과 비자폐인은 경계를 가지기보다는 연속체의 한 선상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정신 세계와 인식 방법을 이해하고 서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정하기가 어렵다. 100년 전에는 비정상인이라 치부되는 현상이나 모습이 현대에 와서 정상이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주관적인 판단 기준이나 '다수'라는 기준으로 정상/비정상을 나누게 되면 인류나 사회라는 공동체가 공존할 수 없다. 가장 극단에 위치한 사람에게는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비정상일 것이고 가운데에 위치한 사람은 양 쪽이 비정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이고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자폐증과 여러가지 뇌와 신경계 이상에 의한 장애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인식체계와 사고방식이 나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알았고 어떻게 대처해야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초보적인 것들도 배웠다.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고 상대방 처지에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일반론도 여기서 다시 깨닫게 되었다.
내 주변에는 자페인이나 자폐아는 없다. 오래 전에 조울증을 앓던 조카는 하나 있다. 사실, 조카가 조울증을 앓던 때에는 내가 자폐증이나 우울증, 학습장애 등에 대해 아무런 정보나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아 누나에게 전혀 도움을 줄 수 없었다. 물론, 이 책 한 권을 읽었다고 하여 내가 자폐증이나 각종 장애에 대해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그런 장애나 증상에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큰 그림을 얻은 셈일 뿐이다.
 
그리고 신체적인 장애를 둘러싼 '정상과 비정상'은 인간의 다른 활동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의 공통된 생각이나 의견이 모든 것을, 특히 다른 사람들을 얽매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다수'의 횡포를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심지어 51%나 67%를 '다수'라 하여 소수의 의견과 처지를 무시하고 다수의 의견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다수가 99%라 하더라도 나머지 1%의 생각과 처지를 존중해야 사회라는 공동체는 건강해지고 활력이 있게 된다. 
중세 기독교에서 '지동설'은 1%도 안되는 의견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1%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큰 교훈이다. '많다'는 것과 '옳다'는 것은 다른 개념이다.
 
P.S) 이 책은 몇 개월 전 공부모임에서 [고야, 영혼의 거울]을 교재로 하여 세미나하던 중 참석자 한 분으로부터 소개받았다. 이 책을 접하게 해준 그 분에게 감사드린다.
 
[ 2011년 9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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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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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주변의 여러사람들을 보면 ’밥벌이’에 대해 생각나게끔 하는 경우가 있다.
하루하루의 삶이 ’노동의 신성함’ 또는 ’전문성’과 더불어 ’밥벌이’란 느낌도 지울 수 없다.
노동은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진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를 넘어서 21세기 노동에 대한 인식은 ’인간다움’보다 ’지겨움’ 쪽이 더 강한 것 같다.
하지만 역으로 노동이 ’밥벌이’로서만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직접 논밭에서 농산물을 재배해야만이 ’인간다운 노동’이고 ’소외되지 않는 노동’일까?
처음 책 제목에 이끌려 인터파크에서 주문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 밥벌이의 지겨움 >이 나를 ’혹’했던 것보다는 다소 다른, 저자의 에세이가 주로 담겨있었다. 약간의 서운함...??
 
이 책은 저자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느꼈던 여러가지 것들에 대한 잔잔한 소회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에세이’다.
그리고 그 소회는 독자들에게 저자가 나이들어 감에 따라 과거에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것들이 다시금 보여지고 느껴지는 생각과 느낌을 담담하게 전해진다.
"하류의 강은 늙은 강이다. 큰 강의 하구 쪽은 흐려진 시간과 닿아있고 그 강은 느리게 흘러서 순하게 소멸한다. 흐르는 강물 옆에 살면서 여생의 시간이 저와 같기를 바란다."
"늙으니까 두 가지 운명이 확실히 보인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벼락치듯 눈에 들어오고 봄이 가고 또 밤이 오듯이 자연현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 보인다."
"노는 아이들의 몸놀림과 지껄임은 늘 나를 기쁘게 하는데, 혼자서 바라보는 자의 기쁨은 쓸쓸하였다."
"빛이 성긴 저녁, 사물의 안쪽은 드러나는데, 그때 대낮의 빛들은 모두 하늘로 불러 올라가 한강 어귀의 노을로 퍼진다. 그런데 나는 왜 그 빛과 노릉과 쥐와 새에게로 건너가지 못하고 마루에 주저앉아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세상의 더러움에 치가 떨렸고, 세상의 더러움을 말할 때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까워서 가슴 아팠다."
 
21세기 첨단 산업시대에도 저자는 ’아나로그’적인 삶을 즐기고 추구한다. 아나로그만이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느끼므로...
아직도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고 지우개로 수정,편집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느낀다.
목수들의 손놀림에서 창조와 예술성을 발견하고 걷고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면서 땅(대지)와 직접 맞닿아 있음으로 해서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밥을 먹기 위하여 밥벌이를 하는 것인데, 밥벌이에 얽매여 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삶...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제네바 협정에 대한 비판적 인식, 현대사회에서 인의예지에 대한 새로운 입장, 히딩크 열풍의 교훈, 국수주의 유감, 수몰민 할머니의 남은 삶... 
저자의 삶과 문학에 대한 자세와 접근법은 독특하다.
저자는 [시사저널] 편집국장을 하다가 다시 사회부 경찰 출입기자를 자처하여 다시 한겨레에 입사한 경력이 있다. ’글을 쓰다 보니 관념과 추상의 세계에 너무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문학계에서 저자의 문체는 ’칼로 조각’하는 것 같다는 표현이 많다고 한다. 
’숨막힌다’라는 반론도 있고... 하지만, 나는 저자의 소설을 읽을 때 그다지 그런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다만, 간결하게 끊어지는 저자의 문체가 나름 다가오는 느낌도 있고 저자의 글은 ’그렇다’라고 인정하고 읽을 뿐이다.

’아나로그적인 삶’...  언젠가 한 번 해보고 싶은 나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에게 이 책에 대해 유감이 있다.
몇 번을 생각해보아도 이 책은 저자의 지겨운 '밥벌이'를 위해 그동안 신문 및 인터넷 등에 실린 글을 묶어서 출판한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요즘 이런 책들이 서점가에서 자주 보인다.
한국 문학계, 소설계를 이끌어온 몇몇 50~60대 대가들이 벌써 창의성이 메마르고 사람들의 삶과 사회변화의 모습에서 멀어진 것일까??
 

[ 2010년 6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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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 - 해학과 재치가 어루러진 생생한 과학이야기
최무영 지음 / 책갈피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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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저자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서울대학교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강의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2008년에는 인터넷 신문에 연재하여 뜨거운 호응을 얻기도 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꾸준히 읽기 시작했을 때, 처음 그런 독서습관에 동기부여를 해준 책이 브라이언 그린의 < 우주의 구조 >와 김탁환의 팩션소설 < 백탑파 시리즈 : 방각본 살인사건,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 >이었다. < 우주의 구조 > 이후 지금까지 220권이 넘게 읽은 책 중에서 수학, 물리학 등 자연과학 분야의 책은 61권 정도였다. 그 61권 중 해당 학문분야에 대해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가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한 책은 별로 없었다.
 
책 속의 글은 복잡하고 난해한 현대물리학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차원을 넘어서, 과학이 현대인들의 세계 인식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예를 들어 나는 그의 글을 통해 피카소 등 현대 미술가의 작품 세계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교육제도나 유전자 조작, 경부고속철도의 문제점 등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을 통해 참다운 과학은 결코 물질적 번영을 위한 도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학은 어떤 의미를 주는가?
첫째, 과학은 '과학적 사고방식'을 만들어 준다. 과학적 사고란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말한다. 특히, 과학의 중요성은 과학적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과학정신'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둘째, 과학을 통해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추구할 수 있다. 자연과학이란, 자연현상, 즉 우리 자신을 포함한 우주 전체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자연과학을 탐구하다 보면 인간과 우주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므로 세계관 자체가 바뀌게 된다.
셋째, 과학의 현실적 의미... 특히 과학 지식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용하면 과학은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제공하지만, 그 반대로 잘못 이용하게 되면 엉청난 재앙을 가져다 준다.
넷째, 과학은 문화의 중요한 근간이다. 장군총, 가야고분, 첨성대, 팔만대장경과 같은 문화유산과 마찬가지로 그런 유산을 만들어내는 인간과 과학활동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따라서 과학은 공학이 아니라 인문학에 더 가깝다.
 
더군다나 저자는 자연과학 내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과 인문학, 철학 등이 어떻게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인지, 인간과 지구를 위한 자연과학을 위하여 어떤 관점과 과정이 필요한 지, '과학적'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쾌한 해답과 방향을 제시한다. 늘 답답하고 막연하게 느꼈던 것들에 대해 한 줄기 서광이 비추는 느낌이다...
 
나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자랑스럽게 나의 주변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은 한국인임에도 외국의 학자나 교수보다 탁월한 감각으로 어려운 자연과학, 물리학의 정의와 개념, 방법론과 이론에 대해 설명한다. 지금까지 읽었던 적지않는 자연과학 분야의 서적, 대학시절 배웠던 교수들의 강의에서 어렴풋하게 이해하고 암기하고 말았던 자연과학이 피부 속으로, 머리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느낌이다.
비록 한국 자연과학 전문가들이 아직 자연과학분야의 노벨상을 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책을 통해 앞으로 한국의 자연과학이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했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저자가 이야기했듯이 앞으로 한국의 정치,행정,교육,사회,문화 등 전분야에서 발상의 전환과 끊임없는 도전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외래어나 일본식 표기가 아닌 순수한 '한국식' 표현을 일관되게 사용하면서 국내의 학자들과 교수들, 지식인들이 무분별하게 남용하는 '용어'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나 역시 서평이나 일상적인 대화에서 영어식, 일본식 표현을 습관적으로 사용했던 것에 대해 책을 읽는 내내 후회했다.
 

장회익교수가 쓴 추천사에는 저자가 얼마나 뛰어난 전문가이자 참된 학자인지 말해준다.
"물리학의 정수를 그 안에 담아내면서도 이것을 쉽게, 재미있게, 그리고 간결하게 전달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학을 안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물리학의 내용에 대한 완벽한 파악은 물론이고 이것을 마음대로 반죽하여 원하는 형태로 얼마든지 변형해 내는 마술가적 소양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물리학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이해가 필요하며, 여기에 다시 이를 말로 표현해 낼 언어적 구사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소양을 갖춘 사람을 찾아보기가 우선 쉽지 않다. 그리고 설혹 이러한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학문 세계에서 별로 큰 보상이 따르지 않는 이러한 작업에 선뜻 뛰어들어 이를 하나의 책으로 완결시켜 나가기까지의 노력과 인내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정상급 물리학자로 손꼽히는 최무영 교수가 이 일을 해 주었고 그것도 아주 잘 해내었다는 것은 우리 학계 그리고 문화계로서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2010년 6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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