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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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어준, 지승호의 < 닥치고 정치 >를 읽고 / 2011. 10., 336쪽, 푸른숲

 

안철수/박원순 현상, 김진숙과 희망버스, 무상급식 등과 더불어 2011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키워드 중 하나가 '나꼼수'이고 나꼼수의 기획자가 바로 김어준이다. 나꼼수는 "이명박 대통령 헌정방송"을 내세우며 팟캐스트를 시작했고 지난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곽노현 교육감 구속, 서울시장 보궐선거 등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 '팟 캐스트 세계 1위를 기록한, 최대 회당 600만명이 다운로드 받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MB 정권과 집권당이 방송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장악하고 조중동 등 주류언론이 정권과 야합하면서 '알권리'와 '말할 권리'를 빼앗긴 대중들은 나꼼수의 등장에 환호하였고 첨단 미디어의 발전은 SNS와 스마트폰을 보급을 가져와 소비자들이 손쉽게 나꼼수에 접하고 주변에 전파하면서 자기 의견을 추가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1인 미디어'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김어준은 대중의 목마름과 기술발달에 자신의 콘텐츠를 담아냄으로써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셈이다.


지금까지 기존 정치권은 물론이고 진보적인 정치권과 시민사회운동 세력도 대중들의 몸과 마음에 다가가지 못해왔다. 자신들만의 언어와 자신들만의 조직으로 대중과 소통이 단절된 채 기득권 언론과 비주류 언론에 의지해 온 것이다. 정치권이든, 노동운동이든, 시민운동이든, 진짜 일단 대중들과 머리가 아닌 몸으로 만나는데 처음 성공한 집단이 바로 ‘나꼼수'라 할 수 있다.


최근 경향신문에 실은 우석훈씨의 말대로 "나꼼수가 없었다면, 어눌하면서도 TV 토론에서 ‘따박따박’ 나경원을 ‘발라주지’ 못하는 별로 매력적이지 못한 중년의 남성이 시장이 될 수 없었을 건 분명"하다. 명실상부, 현재 "공중파와 언론을 통틀어서 지금 김어준은 최고의 기획자"이다. 그는 "지금 한국에 김어준의 감각을 따라갈 사람은 없고, 그만큼 종합적이며 기민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한편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세상은 ‘시민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김어준의 시대’이기도 하다."고 단언한다.

 

김어준.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의 철학과 정치관은 무엇일까? 

이 책은 김어준이라는 기획자에 대해, 그의 세계관과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번 책 [닥치고 정치]에서 무학(無學)의 통찰을 약속하는 김어준은 폼 잡는 이론이나 용어, 모두 버리고 일상의 언어로 정치를 이야기한다.(그의 말투는 기성 언론인, 학자, 정치인 뿐 아니라 점잔을 빼는 '어른'들도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땅에 점장을 빼는 지식인이 너무 많고 그런 사람  '일색'이디기 때문에 김어준처럼 내뱉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사방이 꽉 막힌 세상에서는...)

그는 이 책이 "'평소 정치에 관심 없는 게 쿨한 건 줄 아는 사람들에게, 이번 대선이 아주 막막한 사람들에게, 그래서 정치를 멀리하는 모두에게' 외치는 정치 교본"이라고 큰 소리친다. '이명박의 여집합', '신정아와 문재인', '비자금, 도둑질', '박근혜, 과거다', '유시민과 국민참여당' 등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쏟아내고 있다.


김어준 수다의 시작과 끝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왜 정치에 관심을 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다. 그는 정치와 우리 개개인의 일상이 따로 가고 있지 않음을 환기시키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원하는 바를 위해 스스로 행동하길 바란다. 높은 물가와 등록금, 과도한 경쟁 체제 등 일상 속 스트레스의 근원을 해결할 수 있는 시대, 우리 모두 정치의 '주체'임을 인식하고, 닥치고 정치한다면 그의 말대로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독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 깨닫기, 이명박 정권과 삼성을 통해 보는 우리나라 보수 권력과 그들이 만든 시스템의 실체, 유명 정치인들의 적나라한 정체, 이들을 견제해야 할 민주당과 진보정당이 대중들에게 외면당하는 이유, 무엇보다도 선거가 당신의 인생에 끼치는 영향을 무학(無學)의 통찰로 시원하게 깨우쳐준다.


안철수도, 박원순도, 곽노현도, 오세훈도 뉴스에서 볼 수 없었고, '나꼼수'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전인 바로 그때, 이 인터뷰는 진행되었다. 당시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현 정권은 여전히 민심과 거리가 멀었고, 주류 언론이 선택한 뉴스는 빠진 것이 많았다. 작년 6·2 지방선거와 분당 보궐선거 결과의 의미는 자명했지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처럼 정치 이슈가 생활화되고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국이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분명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뭔가 불편하고 찝찝한, 그리고 보이지 않는 분노가 쌓여가고 있었다.


이에 내년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그는 분연히 일어나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한 <진보집권플랜>처럼 옳은 소리로, 점잖게 소명의식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왜 선거에 참여해야 하며 그것도 '알고' 찍어야 하는지, 왜 사람들이 머리 아픈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같이 잘살기 위한 길은 무엇인지, 일상 언어로 풀어헤쳐 보고자 했다. 이 엄중한 시국에 벌어진 우연을 가장한 필연. 정치 지형에 대한, 공학적 접근이 아니라 실제로 각 개인의 입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꼼꼼하고 구체적인 정치 해설 가이드북 <닥치고 정치>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 책의 모토는 '알고 찍자'다. 내년 대선과 총선에 앞서 어떤 정당과 정치인이 우리의 욕망과 희망에 부합하는지 김어준은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박근혜를 비롯해 이렇게 많은 현직 정치인들을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신랄하게 평가한 책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김어준은 정치가 인격화된 우리의 현실에 맞추어 날카로우면서도 실감나는 일상의 언어를 구사한다. 그 익살스런 입담으로 쏟아내는 적나라한 인물평 속에는 우리가 그 정치인들을 보면서 어렴풋이 느꼈던 감정을 집어내는 통찰이 있다. 단 몇 마디로 그 정치인이 어떤 사람인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판가름해준다.

(김어준은 다음 대통령 후보감으로 문재인씨를 꼽았다. 그가 문재인씨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MB 정권의 탄생이 민주정부 10년의 반동이고 자신이 공과를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문재인씨가 이 시대의 패러다임인 '공감, 소통, 참여'를 상징할 수 없기 때문에 선뜻 18대 대통령으로 동의하기가 어렵다. 물론 아직 1년간의 시간이 남았다. 문재인씨 역시 현재 유력한 후보이고 적극적인 유권자의 참여를 통해 그가 선택되고 스스로 시대의 패러다임을 익히고 더불어 안철수씨와 공감한다면 다음 대통령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그동안 기득권을 누려온 보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그 반대편에 있으면서도 대다수 국민들을 대변하지 못한 진보 정당의 한계 또한 여과 없이 보여주는 식이다. 비꼬고 낄낄거리기보다 사뭇 진지한 태도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진보집권을 위한 김어준의 로드맵을 제시한다. 책 속에 현직 정치인들을 그렇게 많이 등장시키고 날카롭게 파헤치는 이유가 로드맵을 가능토록 하는 엔진이 바로 사람,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좋은 컨텐츠와 정책을 갖고도 엘리트 의식이 빚어낸 대중 언어의 부재로 대중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진보 정당의 폐부를 후벼 파고, 스스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임을 자처하면서 국민참여당에게 괴물의 탄생이라 칭하는 것은, 결국 문재인, 심상정, 이정희, 노회찬, 유시민 등과 같은 인물들이 다 함께 나서서 대중적 지지를 끌어냈으면 하는 바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꼼수' 현상과 김어준 시대의 효과는 대선까지라 할 수 있다. MB로 상징되는 막가파 기득권은 현재의 '선수'들이 합심하여 다음 대선에서 교체할 수 있지만, '엘리트에 의한 정치&경제 독점'과 대의정치의 한계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정치,경제,사회,문화,언론,노동,NGO까지 포진해있는 인물들의 면면은 대부분 엘리트이고 우리나라의 교육시스템과 문화는 이를 확대,심화시키면서 재생산하고 있다.)


그래서 어쩔 것이냐? 이 책은 '할 수 있다!'라는 구호에서 멈추거나, 맥 빠지는 선동으로 끝나지 않는다. 김어준은 기존 정치권에서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정치'가 나타나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 사례가 바로 현재 진행 중인 '나꼼수' 광풍이다. 이 책의 인터뷰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나꼼수'의 인기몰이는 김어준이 말하고 있는 변화 가능성이 현실화된 사례다. 시대정신과 기술의 진보가 마련한 플랫폼이 합쳐지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구태의연한 정치 공학이나 보수 언론의 프레임을 가뿐히 뛰어넘어 새롭게 판을 짜는 혁명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 책에서 제시된 주장이 '나꼼수'의 열광적인 반응으로 증명되고 있다. 즉, 새로운 유통 플랫폼이 등장한 이 시대에는, 철저한 자발성, 대중을 지향하는 언어, 쫄지 않는 자세만 있다면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온 프레임 밖으로 나가서 생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꾸 기득권의 프레임 밖으로 나가 세상을 보려는 노력이 바로 혁명의 시작이고, 그가 말하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자 진보집권플랜이다.



김어준의 생각과 주장에도 부족한 부분이 있고 나와 다른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가 책에서 말하는 요지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동안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사회가 존재하는 것이고 앞으로 참여하는 만큼 한국사회가 바뀌리라는 것을...

모두가 닥치고 정치에 관심을 둔다면 그것이 김어준의 희망이고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될 것이리니 관심이 참여로, 참여가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해본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김어준은 김어준의 길을 갈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역할, 자신이 잘 하는 분야에 최선을 다하리라 믿는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신이 할 수 있는 분야에 최선을 다하고 목표와 목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함께 하고 놀고 웃고 즐기면서 조금씩 더 나은 사회와 인간관계를 만들어내는 사회를 보고 싶다.

 

* 인상 깊은 문단


- 노무현의 애티튜드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상황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을 때...(p.17)


- 자유주의자들의 낭만을 비판하는 21세기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휴머니스트였던 마르크스의 낭만을 생각해봤을까 몰라.(p.46)


- 어?e든 당시(마르크스 시대)의 주석은 지나치게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한 한계가 있다고 봐. 경제적 계급은 공포가 만든 결과일 뿐이거든. 원인이 아니라. 그 공포를 통제하지 않고서는 계급 문제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공포는 본능의 영역이라고. 이걸 과학이나 신념으로 해결할 순 없다고. 다만 관리할 수 있을 뿐이지. 그래서 계급의 문제를 풀려면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공포를 줄이고 관리할 수 있는 정서적 안전정치가 사회적으로 더 절실하다고 봐. 그게 사회구조적 장치여야 하는 건 맞지만, 혁명으로도 공포 자체를 삭제할 순 없다는 거지.(p.46)


- 사람들이 대통령을 선택할 때 논리를 동원하는 건, 그 사람에게 꽂힌 마음을 정당화할 도구로 쓰는 거지, 논리의 귀결로 누군가를 선택하는게 아니라고. 그런데 진보 진영에선 언제나 논리르 먼저 내세우지. 뇌 구조가 그럴 수 밖에 없긴 한데, 지금 사람들이 찾고 있는 건 그게 아니야. 자기 마음을 줄 사람. 그리고 그 마음이 배신당하지 않을 사람을 찾는 거지.(p.73)


-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저조한 득표는 종북주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투표하게 된 시대성, 노무현 정부로 인한 피로감, 민주당의 탁월한 등신 인증에 따른 콜래트럴 데미지였다고. 진보정당은 선거에서 그렇게 민주당의 종속변수라고. 탄핵 정국처럼, 한나라당이 완전히 지그려져서, 진보를 폭 넓게 받아들일 여력이 생기고 그래서 두 번째 선택까지 고려할 수 있는 특수한 상황에서야 별도로, 추가 배려를 받는...(p.185)


- 그런데 진보정당의 방식은 이런 식이야. 처음 만난 상대 앞에 재무계획서와 신혼방 설계도를 딱 꺼내놔. 그리고 입주할 주택의 입지 조건과 구입할 차량의 대출조건 및 주변 교육환경의 우수성에 대해 부동산과 금융, 교육 전문용어를 섞어 진지하게 프리젠테이션하지. 그런 다음 건조한 표정으로 바로 결혼하재. 만약 나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속물이라 더 큰 집과 더 큰 자동차에 넘어간 방증이라며. 그걸 당한 상대는, 당신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당신 패션부터 좀 후줄근한 것이 촌스러운 데다, 자료는 열심히 준비는 한 것 같지만 뭔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겠고, 결정적으로 내가 당신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게 왜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일이냐며 일어나 떠나버려. 남겨진 진보군은 자기 프로포즈가 실패한 요인을 열심히 분석하다가 입지 조건과 대출조건의 우수성을 다른 결쟁자들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혼자 결론 내리지. 그렇게 연애 한 번 못해봤으면서 꼭 결혼할 거라고 혼자 다짐을 하지. 

욕심 많고 잇속 빠른 보수군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진보군이 책상 위에 남기고 간 계획서와 설계도를 집어와서는 표지만 엄청 화려하게 바꾸고 총천연색 칼라로 인쇄해서 자리를 박차고 떠난 국민양을 찾아가 계획서를 다시 내놓는다는 거지. 하지만, 그 내용은 읽어주지 않아. 휘리릭 페이지만 넘기면서 대신 장미 한 송이 안겨주고 레스토랑에 데려가서 엄청 맛있어 보이는 스테이크를 시키지. 그들은 그렇게 연애를 시작해버리네.(p.223)


- 하지만 대중정당이 왜 자꾸 학술원처럼 구냐고. 진보진영이 대중의 모호한 인식체계를 계몽해서 어떻게든 민주당을 포함한 보수와 자기들을 분리해내겠다는 나홀로 전략, 바로 거기서부터가 거대한 실패의 시작이라는 걸 알아야 해. 내가 한 번 이야기했잖아. 마음은 한정된 자산이라 비슷한 곳에 여러 번 나눠줄 만큼의 여력이 없다고. 게다가 우리 마음을 그렇게 나눠 쓸 만큼 한가로운 정치 지형 속에 있지 않아. 

아주 쉬운 예로, 어떤 분야든 업계 1,2위 정도가 머리에 입력되고 나면 3위부턴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해서 나머지 모두 군수 업체로 처리된다고. 기억이 잘 안나. 정치는 훨씬 더 그렇다고. 내 일상에 매일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내가 매일 쓰고 있는 상품도 아니기 때문에 큰 덩어리의 이미지로 1차 분리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마음을 쓰는 일 자체가 대단한 정신노동이야. 그래서 진보진영이 자신들을 구분시키려는 노력은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보편적 방식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라고. 자기들이 뭔데 그게 가능해. 

그게 쉽게 되는 소수의 진보정당 열성 지지자들은 그런게 대단한 정신노동이라는 것부터 이해하지 못하지. 그리고 억울해하지. 우리 가치를 모른다고. 바로 거기서부터 본격적으로 굴러먹기 시작한다.(p.299)

 

[ 2012년 1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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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이 병을 만든다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미토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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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22일 국회에서 집권당이 한미FTA 조약을 기습으로 날치기 처리한 이후 한 달 넘게 전국이 항의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한미FTA 조약은 5년 전 참여정부에서 추진할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문제제기를 했고 당시에는 이번 날치기 이후 상황보다 더 큰 국민적 저항이 있었다. 
한미FTA는 2007년 체결 전후의 상황버섯 시작하여 그 처리과정에서도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무시했고 내용도 '불평등 조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또한 명칭인 '자유무역협정'이라는 표현도 그렇고 정부나 집권당에서 '통상협정'이라고 우기지만, 자세히 공부해보면 볼수록 실제는 통상협정 이상의 법적,제도적,문화적 변화를 가져올, 가히 '혁명적'인 조약이라는 본질이 드러난다.(통상관료나 총리가 여러번 그런 취지의 발언을 언론에 내비치 경우도 있지만...) 
 
2007년 참여정부에서 추진한 미국과 조약 체결 당시보다 현 이명박정부의 FTA 내용이 상당히 후퇴한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 전정권처럼 참여 인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2007년 FTA 내용은 괜찮고 2011년 FTA는 나쁜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FTA 관련 책을 한 권 만 읽어보아 알 수 있다. 실제 누구라도 한미FTA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공부한 시간 만큼, 알아본 내용만큼 더욱 맹렬하게 한미FTA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밖에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미FTA는 우석훈씨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50~100년 이상의 한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조약이고 그 내용과 국내 처리과정, 미국과 협상과정, 비준 후 처리과정 등이 모두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느냐, 전진시키느냐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앞으로더 크게 그 영향을 줄 것이다. 또한 한국사회가 1%의 기득권 사회로 더 심하게 고착되고 공동체가 붕괴되느냐, 아니면 양극화와 빈부격차가 줄어들어 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가면서 공동체가 재건되느냐의 갈림길이 될 수 있다.
 
한미FTA가 가져올 여파 중 하나가 바로 '의료민영화'에 대한 것이다.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료민영화'란 개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한국의 의료기관은 대부분 '민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이들이 '의료민영화'라고 하면서 문제를 삼는 핵심부분은 사실 '영리병원'이다. '영리병원'이라 함은 현재 한국민 전체에 적용되는 국민건강보험 공공시스템에서 벗어나 영리만을 목적으로 영업하는 민간병원을 말한다. 정부는 송도지역 등 이미 전국 수십 곳에 지정되어 있는 경제자유구역에 이러한 민간병원을 허용하는 것을 계획 중이다(최근 정부관계자가 그 사실을 인정). 영리병원은 의료비의 폭등을 불러오고 기득권만의 전유물로만 이용되면서 사회의 의료양극화를 초래하고 그렇지 않아도 폭발적으로 성장 중인 민감보험이 건강보험을 좀 먹을 가능성을 증대시키고 된다. 그렇게 되면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병원들도 경쟁이나 형평성을 이유로 점차 의료비를 증가시키고 건강보험 재정을 붕괴시키는대 기여하기 된다. 

이미 치료시설 기준으로는 우리나라 역시 '민영화'되어 있다. 공공의료시설은 전국 병의원 중 10%도 안된다. 건강보험 보장이라도 아직 60% 선에 머물고 있다. 삼성의료원 등 재벌병원은 고급화, 대형화를 선도하면서 대학병원에서 국공립병원까지 경쟁 대열에 끌어들이고 과다한 진단과 의료시설을 투입하여 건강보험 재정을 좀 먹고 환자들의 자부담을 계속 늘려가고 있다. 건강복지 차원에서 앞으로 의료의 공공성을 늘려가고 함에도 불구하고 한미FTA는 오히려 공공성을 약화시킬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한미FTA와 의료만영화, 영리병원은, 의료공공성을 모두 인정하고 앞으로도 꾸준히 강화시켜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버릴 수가 없다. 
한 나라의 모든 정책과 복지가 공공성을 키우는 것으로 만사형통일까? 의료공공성에서 우리나라보다 백년 이상 앞섰던 서구에서도 궁극적으로 공공성을 달성하는데 실패했기 오히려 20세기 후반부터 의료복지가 축소되는 것은 왜일까? 스스로 건강을지키기 보다 조금만 기인하고 아픈 것 같으면 의사에게 가고 약국에서 약을 사는 상황에서 정말 의료가 필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도대체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고 근원적으로 해결방안이있을 것인가? 
한국의 경우 건강복지 뿐 아니라 생계복지, 아동복지, 교육, 주거복지 등 무수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 경제성장 역시 이제 저성장 구조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재정운영 여력도 한정되어 있다. 현재 구조에서 전체적인 복지수준을 늘려가면서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늘려간다면 아마도 보장을 90%를 달성하는데 것은 요원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태어나면서 지금까지는 크게 병을 앓은 적이 없다. 그래도 살면서 여러차례 식중독이나 급성 근육걸림, 몸살, 감기 등 누구나 한 번쯤 앓을 만한 불편은 겪었다. 다년 간의 경험으로 생각컨대 몸살, 감기는 의사가 처방전을 내리고 약을 사 먹은 것은 병을 치유하기 보다 시간을 단축시키는 정도였다. 즉 며칠 간 집에서 끙끙 앓으면서 내 몸 스스로 치유할 수 있음에도 그 자연치유 시간이 아깝고 고열과 무기력을 피하기 위해 약을 사 먹은 것이 아닐까 싶다. 식중독의 경우에도 결국은 구토, 설사를 여러번 반복하고 난 후 병원에 실려가면 포도당 주사를 맞고 쓰린 위와 장을 진정시키는 약을 처방할 뿐인 것 같다. 구토, 설사를 반복하여 기진맥진할 때까지 내 몸속의 식중독 균을 모두 배출하고 몸이 자연치유하는 과정이 기본적인 진행과정일 뿐이고 나머지는 보조수단이라는 것... 병원은 식중독에 걸린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피를 뽑아 혈액검사를 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소변검사를 하는 등 병원은 자신들의 진단시설의 유지비와 인건비를 뽑아내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 내 건강과 치유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 입원 소감이다. 급성 근육걸림의 경우에는 의사와 약사에게 의존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쓸데없는 진단비용만 낭비될 뿐 파스와 알약을 조제해 주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내가 움직임을 조심하고 스스로 치유하는 것이다. 근육통은 웬만한 한의사를 찾아가면 돌리지도 못하던 목이 하루 만에 움직일 수 있고 숨쉬기도 고통스러웠던 근육통이 단 한번의 침 치료로 절반 이상 낫게 된다. 내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아도 나와 비슷한 사례는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병원과 의사가 병을 치료한다는 것이 사실일까? 

이 책은 이러한 나의 문제의식에 대해 방향을 잡아주었다. 이 책은 1973년에 처음 발간되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의 서구와 아메리카 대륙의 건강과 현실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21세기 한국에서도 의료현실은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크게 '병원병'과 '건강의 정치학'을 다루고 있다. 먼저 1장 ~ 3장에서 의사와 의료제도가 만들어 내는 '병원병(病院病)'을 다룬다.
우선 1장 <임상적 병원병>에서는 의료 기술성과의 대차대조표를 제시하고 있다. 과거 3세대에 걸친 비교 검토를 통해 질병의 변화와 소위 의료의 진보라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병을 일리히는 임상적 병원병이라고 불었다. 
제 2장 <사회적 병원병>에서는 의료의 사회적 조직이 건강을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효과를 다룬다. 일리히는 이것을 사회적 병원병이라고 불렀다. 
제 3장 <문화적 병원병>에서는 의료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활력에 대해 초래하는 부정적 영향을 다룬다. 일리히는 이것을 문화적 병원병이라고 불렀다.
'건강의 정치학'과 관련하여 저자는 4장 <건강의 정치학>을 통해 의료제도의 불합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일리히는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병원에서 비롯되는 질병으로부터 사회를 회복시키는 것은 정치의 임무이지 전문가의 임무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최근 세대 동안 건강관리에 대한 의료(제도)의 독점은 한 번도 점검되지 않고 확대되어 왔으며 우리들의 몸에 관한 자유를 침해해 왔다. 이것이 일리히의 주장이다.

저자 일리히는 "의료기술의 진보와 질병간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고 단언한다.
14세기 전 유럽을 강타했던 페스트(흑사병)는 16, 17, 18세기에 걸쳐 정점에 이른다. 하지만 예르생(Alexandre Yersin)이 페스트 균을 발견한 건 19세기, 그것도 한참 후반인 1894년이다. 중세 사회사를 연구한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의 분석에 따르면 페스트가 잦아들게 된 것은 의사의 치료나 항생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유럽 전역에 걸쳐 일어났던 도시의 대화재들 때문이었다. 화재가 주택형식을 바꿔놓았다. 사람들은 목재 주택에서 석조 주택으로 주거형식을 변형시켰고 이에 따라 실내와 사람들이 청결해지기 시작했으며, 작은 가축들이 사람들의 주거 공간과 멀리 떨어지게 됐다. 이것이 사람들과 페스트를 멀어지게 했다.
이 책에서 일리히가 제시하고 있는 자료도 이 같은 내용을 뒷받침한다. 일리히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 뉴욕에서의 결핵 사망자수는 1812년에 1만 명당 7백 명 이상의 비율이었다. 코흐가 처음으로 결핵균을 분리 배양했던 1882년에는 1만 명당 3백7십 명까지로 저하되었다. 나아가 최초로 결핵 용양소가 설치된 1910년에는 1만 명당 1백80명까지로 저하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항생물질의 사용이 일반화되기 이전에 결핵에 의한 사망률은 1만 명당 48명이었다. 결핵은 그 병원(病原)이 이해되고 특수한 치료법이 발견되기 전에 그 독성의 대부분을 상실했고, 따라서 그 사회적 중요성도 대체로 잃고 말았다. 콜레라, 이질, 장티푸스 등도 이와 유사하게 의사나 병원의 통제와 무관하게 정점에 이르렀다가 차차 감소해왔다. 이런 질병을 잡아낸 것은 의사나 병원이 아니었다. 우선 주택의 개선과 미생물 유기체가 갖는 독성의 감퇴 등이 지적될 수도 있겠고, 역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영양의 개선으로 인간의 저항력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항상 이런 문제는 뒤로하고 의사의 숫자가 늘어나면, 의료 기계가 현대화 되면, 병원이 늘어나면 건강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오해에 젖어 있다. 사람들은 의료의 진보와 질병의 상관관계에 대해 일종의 환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의료비는 매년 치솟고 평균수명은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
의사의 숫자가 늘어나면, 의료 기계가 현대화되면, 병원이 늘어나면 건강 치료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철저한 오해다. 1970년을 기준으로 과거 20년 간 미국의 물가지수는 74% 상승되었으나, 의료 관리 경비는 330%나 급상승하였다. 1950년부터 1971년 사이 건강보험을 위한 공적 비용의 지출은 10배나 증가되었고, 사적 보험의 급여는 8배나 증가되었다. 그리고 직접 주머니에서 지불된 액수는 3배나 되었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다른 나라의 총 의료비도 미국에 병행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산업국가-대서양, 스칸디나비아, 동구-에 있어서 보건 부문의 성장률은 GNP 그 자체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한다고 하여도 건강에 대한 경비는 1969년부터 1974년 사이에 40%나 증가되었다. 이건 부유한 국가만의 특권이 아니다. 콜럼비아-부유한 자를 우대하는 곳으로 악명 높은 빈곤국이다-에서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10% 이상이 건강관리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의료비용의 급상승이 평균 수명을 눈에 띄게 연장시키거나 결정적 질병을 잡아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의사가 병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론적으로 의사는 첫 진단으로 그의 환자가 어떤 질병에 걸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안전 장치(fail-safe)의 원칙에 의해 환자에게 질병이 없다고 말하기보다는 언제나 어떤 질병이 있다고 말하는 쪽으로 행동한다. 의학적 결정의 규칙이 의사를 압박하여 건강하다기 보다는 질병이 있다고 진단하는 것으로 안전함을 추구하게 한다. 하지만 의사의 이런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 병을 양산해 내고 있다.
이와 같은 왜곡의 고전적 실례로 일리히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1934년에 행해진 뉴욕 공립학교에서의 실험을 들 수 있다. 뉴욕 시의 공립학교 1천 명의 11세 아동에 대한 조사에서는 61%가 편도선을 제거하도록 요구되었다. 61%의 아동 외에 39%가 다시 다른 의사 그룹의 진단을 받았는데, 그 중 45%가 편도선 절제를 받아야 하고 나머지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쳐 수술이 필요 없다고 했던 아동이 또 다른 의사 그룹에 의해 재진단을 받게 되자 남은 아동의 46%가 편도선 절제를 권고 받았다. 이 중에 또 다시 남은 학생을 대상으로 제 3회의 진단을 받았을 때, 거의 같은 비율의 아동이 편도선 절제를 필요로 한다고 보고가 나왔다. 그 결과 편도선 절제를 받지 않아도 되는 아동은 1천명 중 단지 65명에 불과했다. 기하급수적인 의료비 상승을 유발하는 고가의 장비에 의한 검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1966년 미국에서 실시한 한 검사에 의하면 83개의 골반 수술을 권유받은 증세 중 인간과 기계 모두가 옳았던 것이 22개, 그리고 37개의 예는 컴퓨터가 옳았고 의사의 진단은 틀렸으며, 11개의 예에서는 의사가 컴퓨터가 틀렸음을 입증했고, 10개의 예에서는 의사도, 기계도 모두 틀렸다. 단순히 진단만이 문제는 아니다. 1968년을 기준으로 1968년, 영국의 경우 캐나다에서 보다 남자가 1.8배 여자가 1.6배의 외과 수술을 받았는데 대부분 편도선 절제술, 치질 절제술, 사타구니 탈장 수술과 같은 임의의 수술이 2배 이상이었다. 이러한 차이를 결정하는 중요한 인자는 이용 가능한 침대 수, 지불 가능한 병원비, 외과의사의 수 등이었다. 현재 의료비 중 가장 급격한 상승을 보이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노인에 대한 치료비다. 그것도! 충분히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노인에 대한 치료비가 급상승하고 있다.

일리히는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건강한 세상의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한다.
"의료의 개입이 최저한으로 우연적으로 밖에 행해지지 않는 세계가, 건강이 가장 좋은 상태에서 너리 행해지는 세계이다. 건강한 사람들이란 출산, 성장, 노동, 치료, 죽음의 어느 것에 대해서도 적합한 환경 속에서 건강한 집에 살고 건강하게 식사하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인구의 제한, 노화, 불완전한 회복, 그리고 항상 절박한 죽음의 의식적인 수용을 높이는 문화에 의해 유지된다. 건강한 사람들은 결혼, 출산, 인간조건의 공유, 그리고 죽음에 대한 관료적 간섭을 최소한으로 요구한다. 인간에 의해 의식적으로 유지되는 위약함, 개성, 관련성은 고통, 질병, 죽음의 경험을 삶의 불가결한 것으로 만든다. 이 셋과 자율적으로 싸우는 능력은 그의 건강에 기본적인 것이다.(p.296)"


저자는 <학교 없는 사회>, <성장을 멈춰라(공생의 사회)>,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등 일련의 저작 속에서 일관되게 주장해 왔듯이 타율적 관리를 배제하고 자율적 통제가 지배하는 사회 패러다임을 꿈꾸고 있다. 의료부분의 있어서의 자율적 공생의 계획을 꿈꾸는 일리히는 보건 전문가에 의한 관리에 대해 제한을 목표로 삼는 정치적 계획 그리고 자신의 건강 관리를 위한 힘을 민중들이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계획은 산업적 생산양식에 대한 철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근대 이후 국가의 안전은 무력(군사력)의 균형이라고 선전되었다. 사회복지 사업은 사회생활의 개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못박아 놓았다. 경찰의 증가와 경찰의 보호는 안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호도되었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생산활동인 것처럼 인식케 했다. 심지어 아동이 학교에 가는 것과 학습은 동일시되고 있다. 또 의사한테서 치료를 받기만 하면 건강치료를 받은 것처럼 누구나 오해하게 만든다. 건강, 학습, 존엄성, 독립, 창조적 노력 등의 가치가 이들 가치에 봉사하고 있는 제도의 수행보다 못한 것으로 ‘신화화’된 것이다. 때문에 이런 분야의 예산이 늘어나거나 인력이 확충되는 것에 반대하는 자들은 시대착오적인 사람으로 오해되거나 반동으로 취급되기까지 한다.
일리히는 이런 오도된 가치관, 타율이 지배하는 사회에 메스를 들이댔다. 때로 그의 주장은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정치한 분석은 서구 학자들과 언론이 그에게 20세기 최고의 지성인 중 한명이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게 했다.
<학교 없는 사회>와 더불어 일리히의 최대 화제작으로 꼽히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일리히는 전문가의 의료 통제가 낳은 파괴적 경향에 대해 다룬다. 그는 진찰과 치료가 도리어 병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 주목하고, 질병의 치료에 의해 생기는 역설적인 피해에 대해 고발한다. 그는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병원에서 비롯되는 질병으로부터 사회를 회복시키는 것은 정치의 임무이지 전문가의 임무가 아니라고 단언한다.(우리는 이미 의사와 병원이라는 전문가에게 너무 많이 속아왔다)


저자가 이 책을 처음 발간한 1970년대 미국과 2012년 한국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크게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황금만능의 자본주의, 산업생산양식에 근거한 사회경제구조, 무한경쟁 시스템, 모든 가치의 상품화와 제도적/근원적 독점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21세기 한국이 20세기 미국보다 더 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새롭게 꿈꾸는 미래사회, 우리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희망이 무엇일까? 단순히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은 답이 아니다. 전문가와 단일한 제도에 의존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를 얽어매는 족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학교와 선생에게 아이들의 학습을 의존하고 에너지와 교통시스템에 이동의 자유를 의존하고 의사와 전문가에게 우리의 건강을 의존하고 정치가와 관료에게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의존하고 기업가와 시스템에 우리의 생활을 의존하는 근본적인 독점구조에서는 다양한 가치와 자유로운 삶은 불가능할 것이다. 

현실에 닥친 학교와 교육의 개선 문제, 에너지 문제, 정치와 경제, 사회복지 문제 등을 현재의 커다란 제도와 시스템 내에서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풀어내어 시급한 현안을 해결해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제도와 시스템에 가려 우리가 꿰뚫어보지 못하는 근원적, 근본적인 독점 문제가 숨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독점은 경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이루어진 사회 각 분야의 독점과 그 독점에 대한 사람들의 의존이야말로 근본적이고 장기적으로 우리가 풀어내야 할 숙제이지 않을까 싶다. 이 사회를 벗어나 무인도로 도망갈 계획이 아니라면...
 
[ 2012년 1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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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 이반 일리히 전집 3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미토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나에게 있어 '내가 얼마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가'하는 것은 자주 고민하는 사항이다. 이미 1년도 훨씬 전부터 기본적인 이동수단을 자동차에서 '도보 + 대중교통'으로 바꾸었고 집안에서 에어콘을 제거했으며, 난방도 '외출' 밖에 설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와 이동(교통)에 대한 고민을 계속된다. 무언가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내게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했고 내 삶에 있어서 '자유'와 '자율'을 추구하는데 있어 한 가닥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또한, KTX와 고속도로 등과 우리나라의 교통.수송 정책에 대한 문제의식도 많았다. 일차적인 문제의식은 물론 '토건발전' 패러다임과 토건시스템으로 인한 '부정부패'다. 교통 등 사회간접자본(인프라)는 현 정권 들어 또 다른 문제를 가져왔다. 그것은 '국가 정책과 예산의 사익화'다. 아직까지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래 그림에서 나타나듯이 무리한 토건사업을 추진하고 국가의 세금으로 외국계 회사(또는 재벌회사)에게 이익을 보장해주는 정책이 남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권, 정치권의 성격이나 구성원과 관계없이 이러한 사회간접시설 투자가 계속 이루어지는 상황의 이면에는 국민 전체적으로 이에 대한 무관심 또는 암묵적인 동의가 전제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늘 있었다. 저자는 그런 문제제기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Energy and Equity'를 한국어로 직역하면 '에너지와 공정(공평)'이다. 즉, 이 책은 에너지를 매개로 하여 '평등'을 고찰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에너지의 양적인 확대,발전이 생산을 향상시키고 생활을 산업화시키고 물질적인 풍요함을 이룩하여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은 산업사회의 '신화'이며 '오류'라고 주장한다. 곧 그것은 사회적 '공정(공평)'에 반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산업 중에서 교통을 예로 들어 '속도'를 패러다임으로 하여 에너지-소비의 한계 설정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저자는 18세기 경 서구에서 시작하여 21세기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근대화(또는 현대화)란 병의 가장 심각한 증세인 에너지 중독 내지 속도 중독이 이미 우리를 혼수상태에 빠뜨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도 기술 산업화를 향한 '발전'과 '개발'이 초래한 에너지의 찬미와 과잉소비는 자연파괴를 가속화시켰고 인간에게서 자유와 자율적 능력을 빼앗아 사회적 불공정을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도 자신의 일관된 논리로서 근현대 산업사회가 초래한 하나의 법칙을 주장했다. "산업생산물이 어떤 것이던 간에 1인당의 양이 일정한도를 넘기게 되면 욕구의 충족에 대한 근원적인 독점이 발휘된다."

그는 이 책에서 이동을 뜻하는 '교통', 신진대사 에너지의 소비에 의한 교통을 뜻하는 '통행', 기타의 에너지원에 의한 교통을 뜻하는 '수송'을 구별한다. 그리고 통행과 수송의 균형이 깨어진 산업적 교통을 참여민주주의의 정치에 의해 복구시키고자 한다. 대안의 방향은 참여를 통해 수송의 속도에 제한을 가하고 통행과 수송의 균형을 제도적으로 이루어내는 것이다. 
역자인 박홍규교수는 '역자 해설'에서 이에 더하여 도로 건설, 자동차 이용에 대한 명확하게 대가를 요구해야 함을 주장한다. 보행자와 주민의 피해 보상과 권리 획득, 환경훼손에 대하여 자동차 회사와 자동차 이용자에게 '사회적 비용'을 부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에너지의 소비와 수송산업의 발달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1970년대 기준으로만 보아도 미국에서는 총에너지 사용량의 45%가 수송수단에 의해 소비되고 있다. 곧 수송수단을 제조하고, 움직이게 하며, 그 주행, 비행, 주차 등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그만큼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이 에너지의 대부분은 장소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을 이동시키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2억 9천의 미국인을 수송하기 위한 하나의 목적에만 할당하고 있는 연료는 13억의 중국인과 인도인이 모든 목적에 사용하고 있는 연료를 양적으로 압도하는 것이다. 이 연료의 거의 대부분이 가속을 촉진하는 마술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 소비가 아무리 높아지고, 수송수단이 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해도 우리는 도리어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안달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수송수단에 의해 하루 평균 32km정도를 움직이고 있으나 이러한 수송수단은 사실상 반경 8km 이하의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수송수단에 의지하는 인간의 발은 결코 지면에 닿지 않는다. 땅에 발을 딛지 않은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는 세계로부터 자신은 자기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상실하고 있다. 자신이 급속도로 수송되어 갈 때에 창밖을 흘러가는, 직접 접촉할 수 없는 풍경을 자기의 활동범위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신의 영토를 확립하고 그것에 스스로의 발자취를 남기고 그것에 대하여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는 힘을 우리는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시간에 가치를 부여할 때 공정성과 수송수단의 속도는 반비례한다. 무제한의 속도는 엄청난 고가이고, 그에 비례하여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적어지고 있다. 고속은 극소수 인간의 시간을 거액의 값으로 자본화시키지만, 동시에 불합리하게도 이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시간을 희생시킨 결과이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노상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의 5분의 4는, 비행기를 타는 경우가 결코 없는 통근자와 물건을 사려는 손님들이 보내는 시간이다. 한편 회의나 휴양지에 가기 위하여 이용하는 항공기 비행거리의 5분의 4는, 매년 정해진 인구 중 동일한 1.5%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리히가 제시하고 있는, 우리가 속도에 의해 생활시간을 박탈당하고 있는 사례로 들어가 보자. 
전형적인 미국의 남성은 자기의 차와 관련해 1년에 1,600시간이상을 소비하고 있다. 차가 달리고 있을 때에도, 정지하고 있을 때에도 그는 차 속에 앉아 있다. 차를 주차장에 넣고, 주차한 차를 찾기도 한다. 또한 차를 사기 위한 계약금과 다달이 지불해야 할 월부금을 벌어야 하고, 연료비, 고속도로 통행료, 보험료, 세금, 교통위반시의 벌금 등을 지불하기 위해 노동한다. 그리하여 하루에 일어나 있는 16시간 중 4시간은 차를 운전하거나 그것을 위하여 필요한 재원을 모으기 위하여 소비하고 있다. 게다가 이 숫자는 수송에 의해 강제되어 다른 활동에 소비되는 시간을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즉 사고로 병원이나 검?경찰, 법원, 또는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보내는 시간, 다음에 더 좋은 차를 사기 위해 자동차 광고를 보거나 소비자 교육집회에 참가하여 소비하는 시간 등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결국 전형적인 미국인은 7,500마일을 달리는 데에 1,600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이는 시속으로 치면 5마일에도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수송산업이 없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시속 5마일 이상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에라도 걸아갈 수 있다. 이미 1천8백만대가 넘는 자동차를 보유한 우리나라도 미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본래 인간은 걷도록 만들어졌다. 모든 움직임의 기본은 걸음이다. 그리고 길은 인간의 걸음터였다. 인간의 걸음은 그 본래의 기능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걷는 기능, 걷는 권리가 쇠뭉텅이 기계에 의해 박탈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4,500만의 걸음을 단 몇 백만 대의 자동차가 정지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자동차화된) 가속도의 무익성을 주장하며 자전거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자전거는 보행자보다 3~4대 빠르고 현실에서 종합적인 계산으로 따지면 자동차보다 빠르다. 또한 공간 점유, 도로 구성, 제반 설치/운영비용, 사고와 환경 등 간접비용 등 모든 면에서 자동차, 전차보다 인간에게, 사회에게 유리함을 설명해 놓았다.

그의 주장을 최종적으로 요약하면, 대량의 에너지 소비는 필연적으로 자연 환경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 나아가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능력까지도 파괴한다는 것이다. 곧 높은 에너지 소비가 환경을 오염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설령 오염이 없는 에너지가 발견된다고 하여도 한계를 넘는 에너지의 사용은 인간을 정치적으로 불능으로 만들고 자율적 공생사회를 위한 조건들을 제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소위 정치적인 '좌파'나 '진보주의자'들도 받아들이는 '발전, 성장, 진보'라는 가치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반 일리히 저작은 모두 ‘타율적 관리’ 사회에 대한 ‘자율적 공생’ 사회의 대응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이 책 역시 타율화된 학교제도의 폐지를 주장한 <학교 없는 사회 De-schooling Society>, 관료화된(타율화된) 병원제도가 만들어낸 병원(病原)에 대해 다룬 <병원이 병을 만든다 Limits to Medicine, Medical Nemesis>처럼 자율화된 인간을 지향하는 그의 사상이 오롯이 녹아 있다. 이 책에서 이반 일리히는 최적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에 대해 논의하고 있으며 그 한도를 정치적으로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 책에서 일리히는 산업의 근본적 독점으로부터의 해방은 최적교통의 옹호를 기초로 한 정치과정에 사람들이 참가한 경우에 처음으로 가능하게 된다는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이 책을 비롯한 몇 개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저자의 일관된 주장, 특히 '근원적 독점'이 나에게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현대사회의 근본적 문제, 특히 사회적 양극화와 민주주의의 후퇴, 99% 일반대중의 자유와 자율성 상실, 중앙집중의 가속화와 분권화의 실패 등에 대한 대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가 주장하는 '산업사회의 근원적 독점'은 경제분야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근원적 독점'은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정치행정, 문화, 미디어(여론), 과학 분야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정치와 행정분야는 '엘리트 독점'이란 현상으로, 문화 역시 '산업화,상품화'와 '신자유주의'와 결합되어 '자본과 엘리트에 의한 독점'으로, 미디어와 여론 역시 마찬가지의 독점 현상이, 과학기술 분야 역시 '전문기술관료 독점'이 두드러지고 있다.
나는 현존하는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의 산업생산양식을 고려할 때 막연하게 '생산수단의 소유 문제'가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 대안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에너지 및 '이동의 자율'과 관련하여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음력 설 이전에 자전거를 구해 나의 '자율적인 이동' 거리를 더 늘리는 것이리라...^^

[ 2011년 12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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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이 희망이다 - 박노해 옥중에세이, 개정 복간본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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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7일 밤 대방동 '서울여성프라자' 1층에서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회단체 '나눔문화(www.nanaum.com)'의 11주년을 기념하는 '후원의 밤'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약150여명의 회원들과 '나눔문화 '연구원들이 함께하는 자리였고 나 역시 회원 자격(1년 밖에 안됐지만..)으로 초대받았다. 2000년 설립 후 11년 동안 정부나 대기업의 후원 없이, 언론이나 기타 매체를 통한 홍보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회원들의 회비로만 운영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박노해씨가 단체의 설립자고...

단체의 활동 중에서 내가 직접 참여한 것이라고는 1년에 두 차례 진행되는 '평화나눔아카데미'라는 강연에 참여하는 것.. 광화문 근처에 있는 '나눔문화'에 도착하면 마음은 푸근하다. 그 이유는 젊은 연구원들이 한결 같이 상냥하고 친절하고 즐겁게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눔문화는 연구원들이 대부분의 단체 활동을 주도하고 있고 사회문제에 대한 참여도 열심히 진행한다. '희망버스'에서 연구원들을 만나면 반가울 수 밖에 없다. 박노해씨는 단체 설립 이후부터 자금까지 주로 해외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 레바논, 팔레스타인, 아프카니스탄, 아체, 캄보디아 국경 등 주로 소외되고 탄압받는 소수민족과 소통하고 희망을 나누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다닌다. 그래서 나는 박노해씨의 진정성에 대한 갚은믿음이 있다.

사실 '후원의 밤' 행사에 참여했지만 행사 기간 내내 '회원'으로서 깊게 공감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단체의 설립 취지와 활동에는 기본적으로 공감하고 있지만 단체의 여러 활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연구원이나 다른 회원들과 공감,소통하는 자리가 부족하게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아무래도 나 스스로가 단체와 더 밀집하게 다가가지 않았던 태도가 가장 크겠지만...
 
이 책은 여름에 나눔문화는 놀러가는 연구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단체에서 선물로 받은 것이다. 1997년 출간된 박노해씨의 옥중에세이인『사람만이 희망이다』는 2002년 절판된 후, 10년 만에 재발간된 것이다. 처음에 1997년 ‘무기수’로 수감 중이었던 박노해 시인의 옥중 구술과 메모를 토대로 출간된 책이기에, 2011년 개정 복간본에서는 박노해씨가 직접 문체를 다듬고 편집과 디자인을 변화해 새롭게 펴냈다.
 
 이 시집은 1997년 출간 다음날 전국 서점의 베스트셀러를 기록, 30만부 가까이 읽히면서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수많은 독자들과 진보인사들은 물론 주요 보수 인사들과 대선주자까지 암송하며,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단 한 문장은 이념과 세대를 넘어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1990년대 사회주의 붕괴 이후, “이념에서 사람으로”라는 급진적이고 근원적인 화두를 던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처음 출간 당시 이 시집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면. 그렇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시'나 메사지는 거의 없었다.
돌아보면 박노해, 그는 언제나 “최초의 목소리”였다. 1980년대 군사독재와 노동탄압의 시대에 ‘노동해방’을 화두로 던졌고, 이 땅에서 금기였던 ‘사회주의’를 최초로 공개 천명했으며, 1990년대 낡은 이념과 시장 만능에 대항하며 다시 ‘사람’이 중심이라는 새로운 주체 선언을 한 것이다. 나아가 ‘삶의 일치’라는 새로운 진리의 거울을 제시함으로써 ‘불편한 진실’의 책이기도 했다.

물론,박노해라는 인물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극단적이기도 하다. 내 주변의 어떤 친구들은 1990년대 초 박노해씨가 체포될 당시 언론에 보도된 온갖 추문들이 사살이라고 주장하가도 한다. 당시 상황이 노태우 군사정권 시절이었고 여전히 정보와 사실이 통제된 시절이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기 어렵다. 다만 나는 소문과 전언을 전후하여 그 사람이 보러온 모습을 통해서, 내가 사실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들만 가지고 그를 평가하고 싶다. 내가 감히 그를 평가할 입장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사회 모순이 절정에 달했던 시대의 고통과 꿈과 투쟁을 기적처럼 한 몸에 구현했던' 투사였음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당시 그의 삶은 곧 시대 정신의 표상이었다. 이름 없는 현장 노동자에서 해고자, 수배자, ‘얼굴 없는 시인’, 사회주의 혁명가까지. 격동의 역사를 정면으로 뚫고 나온 그는, 1991년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건으로 안기부에 구속되어 사형을 구형 받고, 무기징역형에 처해졌다. 가슴에 777번을 새긴 푸른 수의를 입은 서른네 살 젊은 혁명가는, 그로부터 7년 동안 1평 남짓한 감옥 독방에서 침묵 절필 삭발 정진의 삶을 살아낸다.
자신이 ‘인간해방의 길’임을 믿고 온몸을 던져 밀고 온 사회주의 붕괴 앞에, “죽더라도 정직하자. 결과에 대한 책임을 다하자”며 “실패한 혁명가”로써의 삶을 살아낸 것이다. 불가능한 이상을 향해 한 시대의 끝 간 데까지 밀고 나간 젊은 혁명가의 투쟁과 묵상의 기록, 그것이 1997년 출간된 『사람만이 희망이다』이었다.
 
 2011년 올 한 해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앞으로의 세계가, 한국이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할 때가 많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희망이 없다, 대안이 없다’는 2011년 오늘, 오직 돈과 권력만이 희망이라는 듯한 이 시대에, 왜 다시 사람만이 희망인가?
그래도 "이 시집을 통해서 실낱같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시집을 읽는 동안 내내 머리 속에 맴돌던 생각이었다.

박노해시인은, 희망의 주체가 사라진 시대 사회를 향해서는 누구나 옳은 말을 하지만, 자신이 믿는 진리를 직접 살아내는 ‘희망의 주체’가 보이지 않는 지금, ‘세상을 혁명할 것인가 나를 먼저 혁명할 것인가’ 그 처절한 떨림 위에 피어난 뜨거운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아니, 오늘 더욱 절실하다고...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지금 내가 딛고 선 자리, 내 삶의 모습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것으로부터 희망은 시작될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 비록 앞이 안 보인다고 / 그저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 //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 작은 일 작은 옳음 작은 차이 /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길 잃은 날의 지혜」),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사는 것 / 이 지구 위 60억 인류 모두가 / 나처럼 먹고 쓰고 생활한다면 / 이 세상이 당장 좋아질 거라고 / 떳떳이 말하며 살아가는 사람 // (…)그것이 진리의 모든 것이다 / 그것이 희망의 모든 것이다 / 그것이 혁명의 시작과 끝이다 //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사는 것”(「나 하나의 혁명이」).
지극히 단순하나 큰 깨달음이다. 이것이 바로 박노해씨가 제시하고 있는 ‘21세기 새로운 해방 주체’의 시작 지점이다. 물론,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남아 있다.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어선 순간부터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던 또 다른 질문... 좋은 삶이 사라진 시대 지금 우리 사회에는 좋거나 나쁜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를 말하고 '나쁜 삶과 행위'를 말하지만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내용이 빠져 있다. 그 결과 생각은 진보일지라도 생활은 보수로 분열되어 괴롭게 헤매고 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불의한 사회 체제에 저항하는 ‘사회 혁명’과 동시에, 그 적들이 나의 욕망으로 실핏줄처럼 이어진 ‘생활 속의 진보’를 이뤄가는, “안과 밖의 동시 혁명”을 제시하고 있다. “이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의 가혹한 일상의 광기는 / 우리 몸과 생활과 관계와 내면의 구석구석까지 / 쉴새없이 파고들어 치밀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사는 데 도움이 안 된다면」).

우리 삶의 억압의 실체들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면서도, 그 적을 닮아가는 나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에 죽비를 치고 있다. 나아가 신세대 문화에서 농사마을까지, 몸철학에서 마음살핌까지, 적은 소유로 기품 있는 삶에서 나눔의 삶까지를 생생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 박노해가 말하는 ‘지구 시대의 새로운 삶’의 모습에서 우리는 지금 바로 좋은 삶을 희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이념이 사라진 시대 ‘이익’과 ‘실용’이라는 가장 타락하고 가장 강력한 이념만이 남은 지금, 『사람만이 희망이다』에서 제시하고 있는 사상, 과거 ‘유일주의’를 넘어 삶 전체를 품어 안는 온전성의 사상은, 10여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짙은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아직도’ 이렇게 묻습니다 / “아직 사회주의자입니까?” / 나는 정직하게 대답합니다 / “예!” “아니오!” / 사회주의는 삶의 당연當然이 아닌가요 / 삶의 본연을 긍정하지 않는 사회주의가 진보할 리 있겠습니까 / 삶의 당연을 품에 안지 못한 자본주의가 진보할 수 있겠습니까 / 이상을 갖지 못한 현실이 허망하듯 / 현실을 떠난 이상도 공허한 거지요 / (…)나는 ‘아무 주의자’도 아니고 동시에 ‘모든 주의자’입니다 // (…)나는 흑이면서 백이고, 흑과 백의 양극단의 떨림 사이에서 / 온몸으로 밀고 나오는 까마귀의 세 번째 발입니다 / 중간 잡기가 아닙니다 흑백 섞은 회색이 아닙니다 // (…)세 발 까마귀 / 다시 시작하는 발, 또 하나의 발, 우리 희망의 발이여!”(「세 발 까마귀」).
여기서 자본주의는 19~20세기의 자본주의가 아니고, 사회주의는 20세기에 멸망한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돈과 권력이 삶의 전부인 듯해도, 이 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강제할지라도, 한사람 한사람 저마다의 깊은 곳에 선함과 사랑과 정의가 숨쉬고 있다. 그것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믿음을 끝내 놓지 않는 이유이다. “길 찾는 사람은 / 그 자신이 새 길이다 // 참 좋은 사람은 /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 사람 속에 들어 있다 / 사람에서 시작된다 // 다시 / 사람만이 희망이다”(「다시」), “저마다 지닌 / 상처 깊은 곳에 / 맑은 빛이 숨어있다 // 첫마음을 잃지 말자 // 그리고 성공하자 /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 첫마음으로”(「첫마음」)라며 “길 잃은 날의 길 찾는 그대”를 다시, 간절히 부르고 있다.
새로운 억압과 불안 속에서도, 늘 새로워진 사람과 사람들의 물결은 존재했고, 우리에게 남은 희망이 있다면 그 빛나는 사람의 등불을 믿는 것이다. 희망은 결코 그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대가 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우리는 오직 나 자신에게만 속삭이듯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년초에 박노해씨의 최근 시집인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감명 깊게 읽었다. 그 시집에는 그의 어린 시절의 향수와 배움, 2000년대에 그가 보고 느꼈던 한반도 밖의 또 다른 진실과 희망을 담고 있다. 그리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작은 풀잎 하나에서부터 희망의 씨앗을 찾는다. '나눔문화'를 시작하고 10년이 지난 후에 담담하게 그려낸 시에는 그가 희망을 싹틔우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보다 이 시집 <사람만이 희망이다>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박노해씨가 1997년에 부딪혔던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타락하지만 강력한 이념과 이데올로기 속에 놓여진 나, 담론과 거대흐름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목소리만 높이는 나,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나, 희망보다 무력감을 쉽게 느끼고 믿음 보다는 불신이 뿌리깊은 나...
이런 나에게 이 시집이 무언가 자그마한 깨달음을 던져주고 있다.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어야, 시 속에 파묻혀 느껴야만이 그 속에서 나의 믿음과 희망과 시작을 더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겠지...
 
사람에 상처받고 사람에 눈물짓고 사람에 절망하면서도, 그가 그래도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꿈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10년을 훌쩍 거슬러 오늘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길 잃은 날의 길 찾는 그대”를 다시, 간절히 부르고 있다.
 
<< 기억에 남는 시 >>

'아직'에 절망할 때 / '이미'를 보아 /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 먼저 허리 숙여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아직과 이미 사이 」 p.23)

희망찬 사람은 / 그 자신이 희망이다 // 길 찾는 사람은 / 그 자신이 새 길이다 // 참 좋은 사람은 /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 사람 속에 들어 있다 / 사람에서 시작된다 // 다시 / 사람만이 희망이다 (「 다시 」 p.63)

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 작은 진실부터 살려가십시오 // (...)오늘 비록 앞이 안 보인다고 / 그저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 //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 작은 일 작은 옳음 작은 차이 /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 작은 것 속에 이미 큰 길로 나가는 빛이 있고 / 큰 것은 작은 것들을 비추는 방편일 뿐입니다 (「 길 잃은 날의 지혜 」 p.67)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사는 것 / 이 지구 위 60억 인류 모두가 / 나처럼 먹고 쓰고 생활한다면 / 이 세상이 당장 좋아질 거라고 / 떳떳이 말하며 살아가는 사람 // 내가 먼저 적게 벌고 나눠 쓰면서 / 덜 해치고 덜 죄짓는 맑아진 얼굴로 / 모두 나처럼만 살면 좋은 세상이 되고 / 푸른 지구 푸른 미래가 살아난다고 / 내가 먼저 변화된 삶을 살아내는 것 // 그것이 진리의 모든 것이다 / 그것이 희망의 모든 것이다 / 그것이 혁명의 시작과 끝이다 //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사는 것 (「 나 하나의 혁명이 」 p.69)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 주저앉지 마십시오 / 돌아서지 마십시오 / 삶은 가는 것입니다 /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 굽이 돌아가는 길 」 p.106)

(...)사람들은 '아직도' 이렇게 묻습니다 / "아직 사회주의자입니까?" / 나는 정직하게 대답합니다 / "예!" "아니오!" / 당신은 쉽게 물을지 몰라도 / 나는 지금 온 목숨으로 대답하는 겁니다 // 자본주의가 삶의 본연本然이라면 / 사회주의는 삶의 당연當然이 아닌가요 / 삶의 본연을 긍정하지 않는 사회주의가 진보할 리 있겠습니까 / 삶의 당연을 품에 안지 못한 자본주의가 진보할 수 있겠습니까 / 이상을 갖지 못한 현실이 허망하듯 / 현실을 떠난 이상도 공허한 거지요 / 삶과 인간과 현실 변화를 있는 그대로 / 볼 수 있는 밝은 눈을 얻기까지 / 나는 '아무 주의자'도 아니고 동시에 '모든 주의자'입니다 // (...)나는 흑이면서 백이고, 흑과 백의 양극단의 떨림 사이에서 / 온몸으로 밀고 나오는 까마귀의 세 번째 발입니다 / 중간 잡기가 아닙니다 흑백 섞은 회색이 아닙니다 // (...)세 발 까마귀 / 다시 시작하는 발, 또 하나의 발, 우리 희망의 발이여! (「 세 발 까마귀 」 p.111)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변하는 게 숙명이어서 / 변치 않는 유일한 진리는 오직 /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어서 / 나는 진실로 경계하는 거야 // 자신을 변화시켜 미래 희망을 키우지 못하는 / 변하지 않는 그 노래 그 몸짓 그 목소리를 / 불변하는 것들 안에 든 치명적인 독소를 / 눈 맑게 뜨고 경계하자는 거야 // 이렇게 빠른 시대 변화 속에서 / 결코 변해서는 안 될 것을 지키기 위해 / 우리가 앞서 적극 변화하지 않는다면 / 스스로 변질되고 마는 거야 저렇게 // 우리가 먼저 날로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 스스로 무너지고 마는 거야 그렇게
(「 불변의 진리 」 p.117)

생명농사 지으시는 농부 김영원님은 / 콩을 심을 때 / 한 알은 하늘의 새를 위해 / 또 한 알은 땅속의 벌레들을 위해 / 나머지 한 알을 사람이 먹기 위해 / 심는다고 말씀하십니다 // 지금도 만주 들판에는 삼전 三田이 전해오는데 / 일제 때 쫓겨 들어간 우리 조상님들이 / 눈보라 속에서 맨손으로 일궈낸 논을 3등분해 / 하나는 독립운동하는 데 바치는 군전 軍田으로 / 또 하나는 아이들 학교 세우는 학전 學田으로 / 나머지 하나는 굶주림을 이겨내는 생전 生田으로 / 단호히 살아내신 터전이 바로 삼전인데 //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오늘 / 내가 번 돈 / 나의 시간 / 나의 관심 / 나의 능력 / 어디에 나눠 쓰며 살고 있나요 // 지금 나는 콩 세 알의 삶인가요 / 삼전의 뜨거움 삼전의 푸르름 / 셋 나눔의 희망을 살고 있나요 (「 셋 나눔의 희망 」 p.197)

한 번은 다 바치고 다시 / 겨울나무로 서 있는 벗들에게 // 저마다 지닌 / 상처 깊은 곳에 / 맑은 빛이 숨어 있다 // 첫마음을 잃지 말자 // 그리고 성
공하자 /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 첫마음으로 (「 첫마음 」 p.245)

- 그 여자 앞에 무너져 내리다 - (p.8)
 
그 해 첫눈이 펑펑 내리던 밤
엉금엉금 기어가는 마지막 호송차는 만원이었지요
그 바람에 규정을 어기고 나는 그 여자 옆에 앉혀지게 되었습니다
눈송이 날리는 창 밖만을 하염없이 내다보던 그 여자는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검은 눈이 어느덧 젖어 있었습니다
자기는 아이 둘 가진 노동자인데 교통사고로 들어와서
합의를 못 보다가 오늘에야 나가게 되었다고
내 시를 노래로도 부르고 이야기 많이 들었다고
항상 죄송하고 마음 아팠다고...
 
눈이 내리니 어두운 세상도 참 고와 보이네요
아까 내내 창 밖을 내다보며 저 이런 생각 했어요
죄수복에 포승줄 묶인 내 모습이
차장에 비치는 게 그렇게도 싫었는데,
아니야 아니야 나야말로 이 모습 이대로 죄인이구나
난 지금까지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노조에도 참여하고 가진 자들 욕도 하고
잘못된 세상을 확 바꿔야 한다고 원망도 많았는데
이제 생각하니 그게 다 도둑놈 마음이었어요
죄가 어디 홀로 지어지는 건가요
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죄짓고 사는 건데
저들의 큰 죄 속에는 제 자신의 죄가 스며들어 있고,
제 욕심과 비겁함과 힘없음이 저들을 더 크게
더 거칠 것 없이 죄짓도록 부추겨온 건데요
제 자신이 먼저 참되고 선하고 정의롭지 않고서
어떻게 세상 평화와 정의를 바랄 수 있겠어요, 도둑 마음이지요
가진 자들의 탐욕과 부정부패는 사납게 비판하면서도
왜 제 자신의 이기심과 작은 부정들은 함께 보지 않았을까요
왜 네 탓이오 네 탓이오만 외치고 제 탓이오가 없었을까요
'제 탓이오 제 탓이오 그리고 네 큰 탓이오!'
라고 해야 옳은 게 아닐까요
왜 저는 못 갖는 한이 아니라 안 갖는 긍지를 지닌
떳떳한 인간으로, 진실로 당당한 노동자로
사회 정의와 평등을 요구하지 못했을까요
첫눈 내리는 오늘 밤에야 제가 자유의 몸이 된다니까
지난 삶이 부끄럽게 돌아봐지네요
좋은 세상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전 솔직히 공짜로 바란 거에요
좋은 세상, 좋은 세상, 하면서도 사실은
가진 자들의 부귀와 능력을 시샘하면서
좋은 세상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 몫의 행복을 훔치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훔치며 살아온 겁니다
선생님을 뵈니 더욱 죄송하고 자꾸만 눈물이 나네요
어디 좋은 세상이 저절로 오나요, 단번에 오나요,
우리 빼앗긴 게 한꺼번에 되찾아지나요
설사 빼앗긴 돈과 권리는 되찾을 수 있을지라도
빼앗긴 삶과 인간성과 제 상한 영혼은 어디에서 찾을까요
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변하려는 노력 없이
가난한 제 돈과 시간과 관심을 쪼개서
참여하고 보태려는 구체적인 실천 없이
좋은 미래를 어디에서 누구에게 바랄 수 있겠어요
좋은 세상은 어찌 보면 우리 안에 이미 와 자라고 있는 건데,
지금 나부터 그렇게 살면 되는 건데, 좋은 사람으로 살면서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어깨를 맞대고 착실히 힘 모아나가면
사실 저들은 껍떼기에 지나지 않는데
선생님, 저 이제 나가서는 잘 살겠습니다
좋은 세상 함께 이루어가는 좋은 사람이 되도록
제 자신과도 싸우면서 그 힘을 보태겠습니다
 
마치 고해성사하듯 떨리는 목소리로 다짐하던 그 여자
서울 구치소로 가는 어두운 밤길에
함박눈이 가슴 미어지도록 흐득흐득 내리고
느리게 기어가는 만원 호송버스 안에서
오누이처럼 스스럼없이 어깨를 기댄 채
젖은 목소리로 속삭이던 순결한 연꽃송이 같은 말씀들.....
무기징역 선고받고 돌아오던 내 마음은
환하디 환한 슬픔이었습니다
 
운명의 그날 밤, 산처럼 무너져내린 그날 밤!
 
선생님, 제 마음 속에 품어온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사회주의가 정말 우리가 바라는 그런 좋은 세상인가요?
그렇게 평등하고 경쟁 없이 편한 사회에서
누가 열심히 일하려 하겠습니까?
그렇게 정의롭고 도덕적인 사회에서
사람이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그렇게 좋은 사회가 누구 힘으로,
어느 세월에 이루어지겠습니까?
언제쯤 이기적인 우리 노동자와 서민들이
그런 성인으로 변화하겠습니까?
 
그 여자의 소박한 물음 앞에서
나는 산산이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성실하게 땀 흘리며 살아온 한 여자가
온 삶으로 던져오는 화두 앞에,
태산처럼 육박해오는 준엄한 심문 앞에,
아아 나는 꼼짝없이 무너지고 깨어졌습니다
 
선생님 저는요, 선생님처럼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며 살지는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한 남자의 아내입니다
맞벌이로 잔업까지 뛰지 않으면
매달 카드 결제와 시동생 학비 지불,
친정 어머님 병수발을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제가 머리에 이고 살아가야 할 제 인생의 의무입니다
제 생활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삶을 살고 싶어요
제가 어떻게 살아야 제 인생이 참되고 보람찰 수 있을까요
일 년에 한두 번 임금인상 때 반짝하고 마는
노조활동 같은 거 말구요 회비 잘 내고 서명하고
집회나 시위 있을 때 참여하는 그런 거 말구요
제 일상생활 속에서 제가 주인이 되어서
제가 살아있다는 느낌과 즐거움을 누리면서
나이 들수록 우리가 바라는 좋은 세상을 닮아가면서
생활 속의 작은 걸음들이 곧바로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큰 싸움으로 이어지는 그런 실천이 무엇인지요
정말 저는 인간답게 살고 싶어요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고 싶어요 선생님
 
눈은 내리고 눈은 내리고, 가슴 미어지게 눈은 내리고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아무 변명도 비껴섬도 없이
그저 정직하게 산처럼 무너질 뿐이었습니다
무너지고 깨어지는 게 내가 할 일이고 남은 희망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나에게 희망이 있다면
산덩이만한 패배와 무너짐, 마지막 한 껍떼기까지
철저하게 깨어지고 쪼개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지난 7년 동안 나는 이 벽 속에서 죽음을 살았습니다
실패한 혁명가로서 '내가 왜 살아 있어야 하는가'를 찾는 것이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참혹했습니다
그날 밤 그 여자가 내게 내린 화두가 나를
죽더라도 정직하라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다하라고,
이렇게 아픈 침묵 절필 삭발
정진의 삶을 살게 한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제야
내 안에서 싹이 트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제야 고요한 희망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
그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그날 밤 하늘이 내게 보내신 그 여자 앞에
자신 있게 다시 서는 날까지
나의 기다림과 정진은 계속될 것입니다
 
[ 2011년 12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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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 - 행복을 일구는 사람들 이야기 박원순의 희망 찾기 1
박원순 지음 / 검둥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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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시장으로서 바쁘게 지내고 있는 저자는 인권변호사에서 참여연대 사무처장,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 상임이사, 희망제작소를 설립,운영한 바 있다. 그는 시민사회운동 진영에서 아무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지금도 그가 설립하고 운영했던 각 단체와 조직들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한국사회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저자는 2006년 3월 희망제작소를 창립하면서 "진리는 현장에 있다"는 신념을 발표하고, 이 시대의 문제를 푸는 대안과 해결 방법을 추상적 이론보다는 현장에서 찾고자 했다. 전국 방방곡곡 현장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수첩을 들고 노트북과 카메라를 둘러메고 길을 나선 저자는, 개발 열풍으로 파괴되고 소외된 지역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21세기 신실학 운동을 구현하는 민간 싱크탱크'를 만들고자 희망제작소를 설립했고 설립 이후 3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길 위에서 살았다. 지역에서 새로운 대안을 만들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인터뷰하면서 '지역이 희망이다'라는 믿음을 거듭 확인했다. 자신의 삶을 던져 지역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사람들과 그 현장에서 충전한 아름다운 에너지를 우리 사회에 되돌리기 위해 부지런히 전국을 돌아다녔던 것이다. 이 책은 그 3년간의 결과물이다.
그런 그의 노력이야말로 서울시장으로서의 그의 역량이 기대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21세기 한국의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귀에 익은 사투리, 눈에 익은 농촌 풍경들이 여전히 친밀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읍내는 아파트로 뒤덮여가고 농촌을 폐가로 무너져 내린다. 우리들이 다니던 학교들은 폐교로 변한 지 오래고 동네에는 띄엄띄엄 노인들만 보인다. 시골에 남은 친구들도 거의 없다. 아무도 없는 있는 길 옆으로 또 다른 도로들이 건설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도로인가." 이러한 모습은 단지 고향만이 아니다. 전국 방방곡곡이 똑같은 문제들로 몸살을 앓는다.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농촌 사람들은 중소 도시로, 중소 도시 사람들은 대도시로, 대도시 사람들은 서울로 간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골에는 아이들이 없다. 한 면에 초등학교 하나라도 유치하고자 결의한 어느 시골 군에는 한 명이 다니는 학교가 남았다고 한다. 그렇게  떠나간 농촌 마을에는 돈 많은 도시 사람들이 와서 양계장을 짓고 골프장을 짓는다. 시골 군청이나 공공 기관의 직원들도 그 지역에 살지 않는다. 오히려 도시에서 농촌으로 출퇴근한다. 

우리의 농촌은 그렇게 버려졌고, 도시는 언제나 만원이다. 그러나 그 만원인 도시에서조차 지역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아니다. 아파트의 옆집 사람과 서로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과 도시 사람들조차 '부평초같은 삶'을 산다. 한국에는 일정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주성'이 희박한 것이다.

그런 농촌에서, 마을에서 저자는 희망을 찾고자 했다. 그는 3년 동안 지역 순례를 하면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지역사회 공동체를 복원하고 활성화하려는 집요하고도 다양하며 눈물겨울 만치 노력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 책 등장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살리는 희망의 제작자들이며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들이고, 이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어갈 리더들이라고 말한다. 절망과 불가능 속에서 희망이 있는 정화수를 길어낸 두레박 같은 존재들이며, 바로 이들이 증명한 사례들로 우리는 지역과 농촌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능성의 땅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교육 부흥에 앞장서는 교사들, 농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농민들, 갈등을 극복하고 화합으로 마을을 이끄는 이장들, 지역 환경.여성.복지.언론.정치 등 여러 영역에서 캠페인을 벌여온 활동가들, 지역 주민과 지역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지역 관리 등 다양한 층위에서 우리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어가고 있는 희망의 제작자들이 그들이다. 저자는 그들의 경험과 사례를 통해 삶의 공동체를 건강하게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과 환경, 제도와 정책을 연구하고 구체화해야 하는지를 살피고자 했다. 

희망제작소가 펼치고 있는 다양한 사업들, 즉 지역홍보센터, 주민참여클리닉, 농촌희망본부, 조례연구소, 자치재정연구소, 소기업발전소와 커뮤니티 비즈니스 연구소 등 다양한 지원 조직을 만들고, 전문가들을 네트워킹하고, 다양한 자료와 정보를 축적하는 동시에 이를 자료집과 보고서, 책으로 발간해내고, 이러한 주제들에 관한 다양한 세미나와 간담회, 강연회를 개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구와 실천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 노력의 일환이다. 
책 말미에 인터뷰에 응해 마을 또는 공동체 이야기를 들려주신 분들에 대한 정보를 실었다. 필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힌 대로 이 책에 실리지 않은, 필자가 만난 수천 명의 지역 리더들과 현장 이야기는 다양한 형태로 소개될 예정이며, 현재 희망제작소 홈페이지[www.makehope.org] '박원순의 희망탐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저자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발로 뛰는 사람들, 안전한 먹을거리를 고민하고 환경 친화적인 세상을 일구는 사람들, 마을만의 독특한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사람들, 지역 주민들의 교육, 건강, 복지를 위해 연대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선별하여 담았다.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발로 뛰는 사람들 이야기에는 마을 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만든 단양 한드미마을, 불모의 땅을 정감 넘치는 농촌 테마 마을로 이끈 남해 다랭이마을,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청주 육거리시장, 사회적 기업을 넘어 지역경제공동체를 꿈꾸는 태백 태백자활후견기관, 산으로 둘러싸여 농사지을 땅이 부족해 늘 가난하기만 했던 마을에서'한국 치즈의 원조 고장'이 된 임실 치즈마을 이야기를 담았다.

일곱 가구가 모여 친환경 다품종 소량의 농산품들을 생산하며 한국 농업의 '잔뿌리 강화론'을 펼치는 괴산 솔뫼농장, 유기농 사회를 꿈꾸며 유기농 정책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대안을 모색하는 부안 산들바다공동체, 농민운동에서 출발하여 지속 가능한 생명 농업, 환경 농업공동체를 꽃피운 의성 쌍호공동체, 여성농민회가 주도해서 만든 두부 공장을 시작으로 영농 조합 법인으로 이어진 횡성 지역순환영농조합법인 '텃밭', 유기농도 과학이라는 슬로건 아래 농민들에게 친환경 농자재를 공급해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하게 하는 괴산의 친환경 농자재 은행 '흙살림'이야기 들은 안전한 먹을거리를 고민하고 환경 친화적인 세상을 일구는 사람들 이야기로 묶었다. 

마을만의 독특한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지역 미술인들의 노력으로 재래시장에서 갤러리로 탈바꿈한 마산 부림시장, 양반들이 만든 전통 체험 마을 고령 개실마을, 최규하 전 대통령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한지가 원주의 전통임을 알게 되어 시민 축제인 한지문화제를 열고 파리까지 진출한, 원주한지문화제를 이끄는 사람들, 역사와 문화가 산적해 '인천의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인천 배다리마을에서 지역공동체 운동과 문화, 환경운동을 펼치고 있는 대안 미술 커뮤니티 '스페이스 빔', 지역 문화인들과 지역 주민들이 함께 만든 문화 공간 장흥'오래된 숲'이야기를 들려준다.

떠나고 싶은 마을을 살고 싶은 마을로 바꾼 부산 반송동 '희망세상',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장학금을 조성해 마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청주 금천동 마을장학회,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방에서 일반 시민들이 뜻을 모아 재단을 설립하고 사회복지법인 등록을 한 김해 생명나눔재단, 시 보호수인 느티나무 살리기 운동에서 시작하여 주민 리더, 주민 정치가를 탄생시킨 천안 한국청년연합회, 공공 보건을 지키기 위해 시민들의 참여로 의료 기관을 만든 원주 원주의료생협 사람들 이야기는 지역 주민들의 교육, 건강, 복지를 위해 연대하는 사람들 이야기로 분류했다.

이 책에 소개된 사람들은 아주 평범하고 소박한 옆집 아저씨, 앞집 아줌마이다. 그러나 '살기 좋은 마을 우리 손으로 만든다'는 일념으로 정성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그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리더라고 저자는 말한다.  
 
각각의 지역 사례에서 드러나는 현실은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또 얼마나 철학과 비전이 없는지 새삼 느끼게 해준다. 동시에 21세기 들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발전방향, 속도와 규모, 토건개발과 환경파괴, 마을과 농촌에 대한 방치와 무대책이 변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지자체는 지자체대로 국민에게 위임받은 업무에 책임을 다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대통령 뿐 아니라 행정부 책임자, 국회, 공공기관, 지자체장과 의회 모두가 개혁대상이고 재교육 대상인 셈이다.
 

현재 박원순 시장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 중인 정책 중에 하나가 '마을만들기'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그가 3년 넘게 전국의 농촌과 도시지역의 모범적인 '마을사업'에 착안하여 서울시 여러 곳에서 자율적인 지역공동체가 되살아나게 하기 위하여 주거,복지,환경,경제,생협,교육,문화에 이르기까지 네트워크가 살아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물론, '성미산 마을' 등 서울시내 모범적인 사례에서 보여지듯이 지역공동체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투여되어야 하고 적지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공동체가 붕괴된 시간이 오래된 만큼 그것이 복구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 헌신적인 주민들이 나서지 않은 채 서울시가 위에서 조건과 기회를 제공한다고 하여 이루어질 문제도 아니다. 그럼에도 지역주민들이 기존의 시장들과는 전혀 다르게 '자발성'과 '공동체'를 지향하는 박원순 시장의 정책취지를 이용하기만 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서울시를 이용하여 지역공동체를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모두 읽고 나서 저자에게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마을과 농촌의 지금 현실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왔는지,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는 어떤 것인지, 세계적인 흐름과 국가적인 관계 속에서 마을과 농촌이 어떤 상황인지, 저자가 이야기하는 '블루  오션'이 어떤 시대적 흐름이나 철학적 비전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다. 각각의 마을과 농촌이 새로운 활력을 위해, 공동체 재건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여 국가와 지자체의 정책과 제도, 경제현실과 사람들의 인생역정을 마을,농촌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각 지역에서의 노력과 결실이 어떻게 제도적이고 정책적으로 보완되어야 하는지 궁금하다. 
물론, 그것을 설명하고 풀어내는 것이 또 다른 전문가나 학자의 몫이 될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저자가 다른 책과 글에서 담아냈는지도... 내가 저자의 모든 글과 책을 읽은 것이 아니기에 더 알아봐야 하겠지...^^
  
[ 2011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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