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 생명, 인간 - 그 통합적 이해의 가능성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6
장회익 지음 / 돌베개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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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저서로는 작년 4월 <공부의 즐거움>(2011, 생각의나무), <이분법을 넘어서>(2007, 한길사)를 읽은 후 세 번째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나는 '온생명'에 대한 개념을 앍고 있었다. 오래 전에 '온생명'에 대한 내용을 어떤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제목은 기억할 수가 없다. (오래전에 읽었기 때문에 남겨 놓은 서평도 없고...ㅠ)
아무튼 그 때 '온생명'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읽으면서 서구 중심의 현대물리학 이론이 명쾌하게 해명하지 못하는 생명, 생명현상, 생명체계에대해 크게 공감했었다. 내 생각에으로도 대기 중의 산소, 지구 상의 물 등 비생명체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생명체'가 독자적으로 '생존'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박테리아 같은 무수한 원시생명체가 인간의 몸 구석구석에 자리잡고서 인간의 소화작용을 돕는 등 생명활동에 영향을 끼치는데 어찌 인간이 '스스로' 또는 '혼자'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한국의 물리학계를 대표하는 중진 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학문의 통합과 소통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과학철학 연구에 주력했다. 그러면서 과학자의 시선으로 폭 넓은 인문학적 주제들을 연구했다. 그 결과 탄생한 '온생명' 이론은 생명과 자연의 본질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사회와 문명 문제에 대한 혜안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양립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나'와 물질이 과연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고 그 답을 얻기 위해 칸트의 철학을 출발점으로 삼아 물질, 생명, 인간에 관한 현대 과학의 논의를 거친 후 다시 칸트의 철학으로 되돌아 오는 선순환적 논의를 전개한다.

저자가 처음 칸트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약 40년 전의 일로, 그때는 물리학을 좀 더 깊이 이해하자는 의도에서 칸트의 철학을 학습했는데, 지금은 같은 이유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논의로 이 책을 출발하는 것이다.

1장 [칸트 철학과 현대 물리학]에서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여기에 몇몇 본질적인 수정을 가함으로써 이것이 현대 물리학의 메타적 구조를 이해할 이론적 토대로 활용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특히 현대 물리학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을 재해석해 칸트 철학이 지닌 현대적 의미를 찾아내고, 현대 물리학의 철학적 바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한다.

저자는 우리는 머릿속에 설혹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본인 스스로 완전한 것으로 여기는 내용들, 즉 ‘앎의 틀’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이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형성된 이러한 틀은 실제로 인간이 생각하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지적 과정을 생각할 때 기존의 ‘앎의 틀’과 ‘앎의 체계’, 곧 오감을 통해 새로 공급되는 내용(정보)들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물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앎의 틀’을 바탕으로 해서 물질세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담아내는 ‘앎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이와 함께 고전 물리학과 고전역학이 물질세계에 대해 일부는 설명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것을 모두 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과거의 ‘앎의 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며, ‘앎의 틀’ 즉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 한 명확한 설명은 불가능하기에, 결과적으로 패러다임을 바꾼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저자는 이 같은 오늘날의 과학 상황에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철학 안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혜안들이 번쩍이고 있다고 주장하며, 특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나타난 그의 인식론은 전통적 의미의 형이상학이라기보다는 과학에 대한 메타이론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며, 실제로 칸트는 뛰어난 과학자였다고 주장한다. 이때 칸트 철학의 중요한 특징은 지성과 감성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인데, 현대 과학으로 설명하면 지성은 ‘앎의 틀’, 감성은 ‘앎의 체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생명, 그리고 인간의 삶이라는 거대하고 복합적인 주제로 나아갈 때도 앎이라는 주제를 논의의 중심에 놓는다. 저자는 칸트 이후 우리가 얻은 중요한 교훈은 ‘앎의 틀’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물론 체계적인 학습 과정에 넣을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도 근본적으로 심화된 가설이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저자는 물리학에 관한 한 양자역학뿐 아니라 고전역학까지 아울러 적용하는 앎의 틀 설정이 가능함을 보였으며, 이를 더 넓은 학문 분야로 확장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 지금 가지고 있는 소신이라고 밝혔다. 

2장 [물질현상과 생명현상]에서는 물리학을 통해 밝혀진 물질의 존재 양상을 바탕으로 생명이라는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살핀다. 또한 우리의 일상적 생명 개념이 매우 불완전한 것임을 지적하고, 의미 있는 개념으로서의 생명은 낱생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생명을 통해서, 그리고 온생명과 낱생명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임을 밝힌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또 이 점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다.
우리는 대체로 지구상에 있는 여러 물리적 대상들 가운데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살아 있는 것’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성격,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을 특징짓는 성격을 ‘생명’이라 부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대상들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살아 있지 않은 상태’로 전이되는 현상을 보고, 이를 일러 ‘죽는다’ 또는 ‘생명을 잃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뜻 보아 별 탈이 없어 보이는 이러한 생명 개념이 실제로는 적지 않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살아 있는지의 여부를 통해 우리가 판단하는 ‘생명’의 존재 여부는 불확실하기 그지없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생명현상, 곧 ‘살아 있음’을 가능하게 해 주는 요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또 무엇까지 구비되면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이러한 것이 구비되어 이것들이 일으킬 현상이 ‘살아 있음’이라 불릴 그 무엇에 해당된다면, 우리는 비로소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진정한 모습은 서로 간에 긴밀한 연결망을 이루면서 그 안에 ‘생명현상’을 이루어 낼 이 전체 체계를 하나의 실체로 파악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생명현상이 자족적으로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기본 단위에 해당하는 것이며, 이를 저자는 우리가 기왕에 지녔던 생명 개념과 구분해 ‘온생명’(global life)이라 불러 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온생명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한가? 
저자는 ‘온생명’은 “더 이상 분할하면 생명현상으로의 존립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생명이 갖추어야 할 필수 단위임과 동시에, 더 이상 외부로부터의 결정적인 지원이 없이도 생존을 해 나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생명이 지니는 자족적 단위이기도 하다”고 역설한다. 이때 하나하나의 세포들은 ‘온생명’ 안에서 ‘온생명’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때에 한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생명의 조건부적 단위이며, 이를 ‘온생명’과 구분해 ‘낱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많은 생명 연구가 실패를 거두고 있는 것은 온생명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생명을 낱생명적인 관점으로 파악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렇듯 ‘온생명’은 개별적 생명체(낱생명)가 다른 생명체와 갖는 모든 관계를 포괄하는 총체로서의 생명이며, 온생명이 기존의 생명 개념과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지구상에 나타난 전체 생명을 하나하나의 개별적 생명체들로 구분하지 않고 그 자체를 하나의 전일적(全一的) 실체로 인정한다는 데 있다고 한다. 

이처럼 저자가 제시한 온생명 사상의 강점은 기존의 자연과학의 성과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여기에 인문학적 사유를 겸해 생명에 대한 일관성 있는 구도를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근대 기술 문명이 낳은 환경 위기에 직면해 생명 존중과 지구 생태계 보전이라는 절박한 문제를 우리에게 일깨우는 데도 매우 적절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3장 [물질과 의식의 양면성]에서는 생명체가 중추신경계를 비롯한 일정한 하드웨어를 마련할 때, 이에 해당하는 소프트웨어가 형성되고 이것이 지적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드웨어의 내면성이라 이를 수 있는 ‘주체의식’이 출현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물질과 의식의 양면성에 대해 깊이 있게 검토한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물질이 가장 먼저 존재하고, 거기서 생명이 출현하고, 그 가운데 다시 인간이 태어난다. 그러나 인식론적으로 보면 인식의 주체인 ‘나’가 먼저 있고, 나의 의식을 통해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나’와 물질은 과연 양립할 수 있는가?
저자는 이에 대해 물질과 의식을 설명하는 데 있어 받아들이기 힘든, 대단히 문제가 많은 주장이라고 지적한 다음, 인간이 물질세계를 의지적으로 움직이는 아주 묘한 존재라고 말한다. 스스로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살아 나갈 수 있는 상황을 인간이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삶을 누리는데, 어떻게 물질이 이렇게 구성되어 자유의지대로 살 수 있게 뒷받침까지 해 주는지, 인간은 ‘굉장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여기서 “생명의 진정한 모습은 온생명과 낱생명 간의 긴밀한 연결망을 하나의 실체로 파악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연관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의식은 각각 세포나 조직 같은 낱생명적인 의식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전체가 서로 엮어지고 유통이 되면서 마치 온생명이라는 하나의 큰 그릇이 담긴 내용물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온생명 전체로 보면 하나의 큰 의식이 담겨 있다고 하겠지만, 각각의 낱생명 입장에서 보면 하나로 연결된 전체 의식의 한 복사본에 다시 자체 특성을 가미한 변이본을 지니게 되는 셈”이라고 한다.

또한 저자는 전체로서는 온생명 의식을 이루는 가운데, 그 안에 다시 서로 간에 많은 유사성을 지니면서도 또 독자적인 양상을 유지해 가는 낱생명 의식이 나타나며, 이러한 여러 층위의 의식들이 서로 간에 관계를 맺으면서 ‘의식세계’라고 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다시 말해, 생명의 진정한 모습은 온생명과 낱생명 간의 긴밀한 연결망을 하나의 실체로 파악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온생명 이론은 물질현상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 생명현상을 이해해 보자는 것이다. 우주가 시작된 이래 은하들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태양을 비롯한 항성들이 형성되었다. 항성들은 우주 안에 가장 흔한 물질인 수소 원자핵들이 모여 에너지 면에서 조금 더 안정적인 헬륨 원자핵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여분의 에너지를 내뿜는 거대 핵융합반응체다. 이는 천체물리학적으로 가능한 현상이며, 우리가 알다시피 우주 안의 수많은 별들이 모두 그렇게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지구, 성간 물질 등 별이 아닌 많은 다른 물질들이 또 있다. 이런 보편적 현상들을 모두 인정한다고 할 때, 생명이라는 것은 이것들이 어떻게 되었을 때 가능해지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우리의 관심사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얻은 것이 온생명이다.

4장 [나와 너 그리고 우리 - 삶과 앎]에서는 낱생명의 주체로서 우리에게 친근한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성격을 온생명의 주체인 ‘큰 나’와의 관계를 통해 고찰한다. 이 과정에서 어떻게 이성이 출현하는가를 살핌으로써 논의의 출발점이었던 칸트의 철학으로 되돌아와 선순환적 논의를 시도한다.

앎이 무엇이라고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삶의 세계를 정신의 차원에서 재구성해 현실 세계에서 부딪칠 여러 삶의 단편들을 예행 또는 반추할 수 있게 해 주는 기능이라 말할 수 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앎이라고 하는 것은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마련해야 할 가장 소중한 내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앎의 성격 또한 삶의 양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처럼 앎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눈으로 보아서 알고, 남에게 들어서 알고, 책을 읽어서 안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부지런히 보려 하고, 들으려 하고, 읽으려 한다. 그러나 저자는 최근 알려진 학습 이론을 인용해 인간의 정신 활동 중에서 가장 필수적인 ‘앎’의 과정에 대해 쉽게 설명한다. 인간이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보아서 알고, 남에게 들어서 알고, 책을 읽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사고의 상대성 원리'를 통하여 주체-객체의 관계에 대한 앎, 통합적 지식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 과정은 끊임없는 선순환적 과정을 거치겠지만...


저자는 서구 학문에 기초한 기존 자연과학이나 인문사회과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의 인식체계와 생명체계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사고방식을 제시한다. 언듯 저자의 이론을 접하면 소위 '허접'하고 단순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저자가 제시하는 대물지식, 대생지식, 대인지식의 개념이나 낱생명, 보생명, 온생명의 개념이야말로 인간이 자신과 외부의 존재에 대해 통합적으로 인식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낀다.

서구의 학자들과 생태운동가, 서구의 인식방법론과 인식체계 내에서 공부한 국내 학자, 지식인들들은 나와 너와 우리, 인간과 자연과 우주에 대해 종합적으로 사고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서구의 학문방법론 자체가 서로간의 연관성 자체를 무시하고 쪼개고 나누고 해석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서구의 사고체계, 프레임,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 것이 21세기에 새로운 방향을 찾고 창조하는 츨발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이 책을 읽으면서 "정보는 많으나 유익한 정보를 찾아보기 어려운 오늘날의 정보 홍수 속에서, 부적절한 외래어나 수사를 남발하지 않고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면서도 깊이 있게 자신의 정신세계와 학문 세계를 그려 낸 이 글의 가치가 더더욱 빛난다. 저자의 학문적 무게는 깊이 있는 통찰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라는 출판사의 추천사에 깊이 공감했다.

[ 2012년 2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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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삐딴 리 - 전광용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39
전광용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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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전광용은 1919년 한경남도애서 태어나 경성경제전문학교,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거쳐 1953년 서울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55년 조선일보에 단편 소설 <흑산도>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1962년 이 작품 <꺼삐딴 리>로 제7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1988년 작고할 때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 책은 저자의 단편소설 작픔을 모아놓은 것이다. 책 속에는 <꺼삐딴 리>를 포함하여 '흑산도', '진개권', '지층', '해도초', 'GMC', '사수', '크라운 장', '충매화', '초혼곡', '면허장', '곽 서방', '남궁 박사', '죽음의 자세', '세끼미' 등 15개 작품이 실려 있다.

저자의 작품에 대해 해설을 하는 평론가 김종욱은 "1960년대에 발표된 전광용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물질적인 환경이나 신체적인 외양 때문에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다. ...(중략)... 문제는 이러한 열등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삶 또한 왜곡된다는 사실이다. 지금과는 다른 우월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증오심에 사로잡혀 폭력을 쓰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내면에서 찾지 못한 채 사회의 규칙과 질서에 전면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인간적인 타락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작품 중에서 <꺼삐딴 리>는 왜곡된 인간 심리를 민족적,역사적 차원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경우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주인공 이인국 박사는 서울에서 개인 병원을 운영하면서 종합병원에 버금가는 명성과 수입을 올린다. 그는 일제 감정기 동안  '국어 상용의 가'라는 액자를 받기 위해 아이들을 일본인 소학교애 보내 일본어만 쓰게 강요하고, 마침내 잠꼬대까지 일본어로 할 정도로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밉보일 것이 두려워 형무소에서 풀려난 사상범을 외면한다.
이인국 박사의 이러한 행동은 식민지인이라는 열등감을 벗어던지기 위한 심리적 방어 기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서 일본어를 사용하고 일본인들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일본인과의 교제에서 열등감을 벗어던지고 "떳떳한 구실"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이인국 박사가 "내선일체의 혼인론"을 통해서 심리적인 우월감을 얻었다는 것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이인국 박사는 해방이 되고 소련군이 진주하자 다시 지배자의 언어인 러시아를 익히고 우연한 기회에 스탠코프 소좌의 수술에 성공함으로써 재기하게 된다. 이러한 면모는 월남한 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병원의 고객을 권력층이나 재벌과 같은 부유층으로 제한하고, 영어를 부지런히 배우는 것이다.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서 독자들이 일제 치하, 해방,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격동기를 겪으면서 민족사적 비극과 역경을 이겨낸 정신적 승리자가 아니라 자기 일신만을 위한 처세술로써 민족적 위기를 외면했던 정신적 패배자를 만나게 해준다. 속물근성에 젖은 지식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과 같은 일제 시대의 지식인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수 천명의 친일부역자들은 '친일,부일'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 속의 이인국 박사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속물적 지식인, 부도덕한 지식인, 권력지향적 지식인은 살아 남아 한국 현대사에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

이 작품은 저자의 실제 인생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평론가 이시형은 <인간 수호의 서신 - 전광용론>(현대한국문학전집 5, 신구문화사)에서 전광용을, 작품의 소재를 앉아서 구하는 작가가 아니라 직접 현장을 찾아다니는 "발로 쓰는 작가"라고 말한 바 있다. 작가가 작품을 창작할 때 직접 체험할 뿐 아니라 간접 경험에서도 소재를 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문단 데뷔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광용의 창작 방법론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저자 본인도 <전광용, 정한숙>(산구문화사, 1968)에서 "내가쓴 작품에는 현지의 답사에서 힌트를 얻거나 취재한 것이 적지 않다. '흑산도'는 흑산도의 학술답사에서, '진개권'은 휴전선 오지에 있는 찬구의 미군 쓰레기칸에서, '지층'은 태백산맥의 탄광에서..."라고 직접 애기한 바 있다.

한국은 민족의 위기를 외면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헌신한 친일 반역자들을 처단하지 못한 현대사를 이어 왔다. 그런 현대사가 해방 후 60년 동안 한국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끼쳐왔는지는 오늘의 현실이 뼈저리게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특히 민족과 다수의 국민, 약자와 정의를 외면하고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에 영합하는 자들이 지식인들의 상당수를 구성하고 있으며, 사회 전체에 공동체의 이해와 공존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물들이고 있는 중이다. 

21세기 이후에도 이 땅에서 살아갈 후손들을 위해... 한국사회 공동체를 되살릴 수 있는 철학적,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모범이 확산되어야 할텐데...

[ 2012년 2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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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역사 2 - 주체사상과 유일체제 1960~1994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6
이종석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 역사비평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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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근현대사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무척이나 왜곡되어 왔다. 물론, 자력이 부족하니 타력에 의해 좌지우지된 측면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조선 왕조 500년은 체제의 구성원이 모두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자멸하였다.
왕권은 정조 임금 이후로 외척에 의해 농간을 당했고 체제의 지배세력인 사대부와 관료들은 체제 내부의 역량을 키울 생각은 없이 '상호 괴멸적인 당파투쟁'에 몰입하여 외세의 침입을 자초하였고 중산층과 민중들 역시 무력하기만 하였다.
결국 조선을 둘러싼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이 격화되어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게 되었고 일본은 철저하게 조선을 약탈하고 체제 자체를 폭력으로 붕괴시켰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 역시 자력이 아닌 외세에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에 조선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한반도가 동서 냉전의 최전선이 되어버림에 따라 이념의 양극단이 남북에 고착화되었다.

반도 남단 한국의 현대사는 나름대로 대다수에게 알려져 있고 연구결과도 많지만, 정보가 차단되어 있는 북한에 대해 일반인들은 '베일에 싸인 장막'처럼 잘 알 수가 없었다. 동서 냉전이 무너지고 냉전 이념이 부분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에 이제 한국 내 학자들도 북한을 연구하여 결과물을 일반들에게 선보이기 시작한지 한 참 되었다. 
이제는 남북통일이 '민족적 소원'인지마저 희미해지고 있지만, 한국 내에 냉전수구세력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을 모르면 앞날을 예측할 수도, 대비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연평도 포격 사건이나 천안함 침몰 사건 등이 일어날 때마다 한국사회와 99%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통일이니 연방이니를 떠나 남북 화해와 교류, 남북 협력과 평화체제가 더 시급하고 절실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 책은 공부모임의 새해 첫 교재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연말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후 북한이 김정은으로 후계체제를 구성하는 계기가 있었기에 선택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약속이 겹쳐서 새해 첫 번째 공부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ㅠ (그래도 책은 꼭 구해서 읽지만...ㅋㅋ) 이 책과 더불어 정창현씨의 <인물로 본 북한현대사>(2011)도 같은 날 교재였다.
 
<북한의 역사>는 2권짜리 시리즈다. 해방부터 1950년대까지의 초기 북한사를 다룬 1권과 사회주의 건설이 본격화되는 1960년대부터 김일성 사망 시기까지를 다룬 2권으로 나뉘어 출간되었다. 
1권은 계간 [역사비평]의 전 편집주간이자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으로서 진보사학계의 한 축을 든든하게 지탱해왔던 김성보 교수(연세대학교)가 집필을 맡았고, 60년대 이후 현대 북한사의 서술은 참여정부 시절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과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며 학술과 정책 양면에서 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북한 전문가로 이름을 높인 세종연구소 이종석 수석연구위원이 맡았다. 이념과 정치의 잣대에 흔들리지 않고 북한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살펴보면서 그 안에서 통일과 상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진지하고 내실 있는 접근이 기대된다.

김성보, 이종석 두 필자는 공히 ‘자료의 부족’을 일찌감치 고백하며 ‘북한사 바로알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자의적인 판단으로 섣불리 단정 짓는 것이야말로 지금까지 남북관계를 꼬이게 만들었던 우리 내면의 함정이었다. 오늘날의 북한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은 바로 오늘날의 북한을 있게 한 과거의 역사를 편견 없이 실증적으로 되돌아보는 데 있다. 북한이 걸어온 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현재의 북한을 이해할 수 있고, 역사에 기반한 깊은 이해야말로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갈 전망을 밝히는 초석이 될 것이다.

시리즈 두 번째인 이 책에서는 대체로 10년 주기로 열린 조선노동당 4, 5, 6차 대회를 기준으로 주체사상이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어떻게 지배했고, 강력한 대중동원력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유일체제가 어떻게 체제위기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는지 객관적이고 균형 있는 시각으로 밝히고 있다.
시기구분에 입각한 체계적인 교과서 구성으로 북한의 역사 구비 구비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한편, 장마다 별도로 다뤄야 할 중요한 테마나 역사의 굵직한 흐름에서 간과하기 쉬운 사람 사는 모습의 면면을 ‘스페셜 테마’로 배치해 입체적인 이해를 도왔다. 정치?경제적인 ‘결정적 장면’들 외에 북한 사람들의 생생한 일상 스케치까지 다양하게 배치된 화보 역시 <북한의 역사 2>를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저자는 한때 북한 역사 전개의 기둥이자 근본가치였고 그들의 자랑이었던 주체사상과 유일체제가 어느 시점부터 체제위기를 심화시킨 근본원인이 되었다는 역사적 역설을 차분하게 파헤친다. 주체사상은 맨처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보완하는 특수한 실천전략으로 제기되었다. 
이 사상이 독재자 개인에 의해 전유되어 ‘김일성주의’라 불리고 개인숭배 시스템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자, 북한사회는 일체의 물적, 외적 조건을 주관주의적으로 무시하고 오로지 대중의 ‘혁명적 의지’와 수령에 대한 충성심에 기대어 속도전을 펼치는 방식으로만 사회 발전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정한 단계에 오른 사회가 그 이상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성 있는 개인들의 창의력에 기반한 혁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북한사회가 당도한 위기는 일시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선택한 실용주의 노선처럼 자기 사회의 발전단계를 객관적으로 직시하면서 사회구성원의 창의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개혁개방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북한의 공식 입장도 그렇고 한국사회 내부에서도 어떤 이들은 북한의 고립과 경제파탄이 북한 내부의 사정보다 미국 등 서구열강과 남한의 적대행위가 더 크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남한의 적대행위와 압박이 북한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북한에게 우호적인 중국이 오랫동안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현실은 북한이 미국에게 핑계를 댈 수 만은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수 많은 인민들이 굶주리고 죽어가는 국가 현실을 고려할 때, 주체사상이나 김일성주의, 수령론이나 후계자론, 속도전이나 3대혁명기수론 등 북한이 내부체제에 동원하고 있는 사상, 정책은 내 이성과 판단으로는 수긍하기 어렵다. 아프리카나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등과 같이 당장 북한 영토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 2012년 1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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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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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주인공이 완전 마초야!" 새해 들어 두 번째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페이스북에 올렸을 때 친구 하나가 꺼낸 말이다. 물론 그 친구는 그렇게 애기한 후에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카잔차키스의 다른 책 몇 권까지 더 소개해 주었고...

이 책은 법정스님이 <내가 사랑한 책들>에서 소개한 열 입곱번째 것이다. 법정스님이 추천도서 50권은 '닥치고' 읽기로 마음 억었기 때문에 친구의 말을 뇌 한 구석에 담아두고 계속 읽었다.
스님은 <내가 사랑한 책들>에서 이 책을 소개하면서 조르바의 말을 인용한다. "요 몇 해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쯤 씹어 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 낸 게 도대체 무엇이오?" 조르바의 이 질문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묻는 준엄한 질문으로 들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읽고쓰고 하는 뜻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지금껏 그토록 많은 종이를 씹어 삼키면서 얻어 낸 게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삶의 본질과 이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한낱 종이벌레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그리스의 역사와 저자의 삶에 대해 먼저 알아야했다. 작품 자체가 저자 자신의 경험담을 토대로 하여 구성된 것이고 작 중 주인공인 '조르바' 역시 실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르바'에 대하는 저자의 태도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영혼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 삶을 풍부하게 해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카잔차키스는 1883년 그리스의 크레타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크레타는 터키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크레타 사람들이 터키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치르는 중에 그가 성장한 것이다. 크레타의 신들을 길로 낸 그리스 신화의 보금자리가. 욕심 많고 거짓말 잘하고 난폭하고 거칠기로 소문 난 크래타안들의 섬인 것이다. '평화시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광란의 불길에 ?기게 한다'는 섬... 카잔차키스의 크레타섬은 "한 번 부르면 가슴이 뛰고 두 번 부르면 코끝이 뜨거워지는 이름... 기적이나. 내가 크레타 사람이라는 것은..."인 것이다. 그는 조국 그리스를 축으로 74년의 생애를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일본, 팔레스타인, 이집트 땅을 눕고 다녔다고 한다.
역자인 이윤기는 카잔차키스의 삶을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색과 행동 등등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만을 읽어 본 나로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카잔차키스는 1917년 그의 나이 34세 때 조르바를 만났다. 전쟁으로 석탄 연료가 부족해지자 조르바라는 일꾼을 고용하여 펠로폰네소스에서 갈탄을 캐려고 시도했다, 이 경험은 1915년 벌목 계획과 결합되어 뒷날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로 발전된 것이라 한다.

소설은 광산사업을 하러 크레섬으로 떠나는 배를 그리스 본토의 어떤 항구애서 기다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공부하고 글쓰며 영혼의 구원을 찾는 사람이다. 절찬한 친구가 카프카스에서 위험에 처한 그리스 동포들을 구하러 가자고 했을 때 그는 주저했다. 친구는 그에게 "안녕! 책벌레야!"하며 떠났다. 그는 원고를 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래서 갈탄광으로 향한 것이다. 책벌레 족속과 거리를 두고 노동자, 농부 같은 단순한 사람들과 새 생활을 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선착장 근처 술집에서 주인공은 조르바를 처음 만난다. 술집 안에서 조르바와 대화를 나누던 중 주인공은 산투르(그리스의 전통 악기)애 대한 조르바의 말을 듣고 조르바를 일꾼으로 고용하려고 마음먹는다.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을 보고 철자법 배우겠다는 생각은 당신도 안 하시겠지? 물래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 인간의 이성이란 그거지 뭐.." "산투르를 다룰 줄 알개 되면서 나는 전혀 딴 사람이 되었어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나 빈털터리가 될 때는 산투르를 칩니다. 그러면 기운이 생기지요. 내가 산투르를 칠 때는 당신이 말을 걸어도 좋습니다만, 내게 들리지는 않아요. 들린다고 해도 대답을 못해요, 해봐야 소용없어요. 안 되니까..." "산투르를 치려면 환경이 좋아야 해요. 마음이 깨끗해야 하는 거에요. 마누라가 한 마디로 될 것을 열마디 잔소리로 늘어놓는다면 무슨 기분으로 산투르를 치겠소? 새끼들이 배고프다고 끽끽거리는데 산투르를 어떻게 치겠소? 산투르를 치려면 온갖 정성을 산투르에만 쏟아야 해요. 알아듣겠어요?"
주인공은 조르바의 애기를 듣고 그를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라고 느꼈다. (이 부분도 공감하기 어렵다. 내가 좀체로 주인공의 입장과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소설은 주인공과 조르바가 크레타 섬에 들어가 여관에 자리를 잡고 인부들을 불러 갈탄광애서 석탄을 캐는 과정을 기본 구조로 서술된다. 주인공이 조르바와 함께 지내면서 크고 작은 사건을 겪으면서 조르바의 말과 행동에서 조금씩 영향을 받는 과정을 보여준다. 조르바는 낮에는 일꾼들을 데리고 탄광에서 죽으라고 일하면서 주인공은 여관에 머물게 한다. 조르바는 여관 도착 첫날부터 여관의 주인 여자와 눈이 맞아 사귀게(?) 되고 주인공은 과부를 두고 마음 속으로 갈등을 거듭한다. 과부를 짝사랑 하던 마을 지주의 아들이 자살하고 마을 사람들은 아성을 잃고 과부를 때려죽인다. 조르바는 석탄을 캐고 이동시키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철탑과 캐이블을 구사,설치하였으나 처음 시범운영하는 날 실패하고 만다. 두 사람은 탄광사업 실패를 받아들이고 그날 밤 함깨 해방의 춤을 춘다. 실제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와 헤어진 후 그리스의 장관을 역임하고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을 진행했다.

주인공은 조르바와 함께한 몇 개월 동안 조르바를 통해 것들을 느끼고 배우고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조르바는 본능에 충실하고 말보다는 몸짓에 익숙한 사람이다. 질그릇을 만들려고 물레를 돌리는데, 새끼손가락이 거슬린다고 도끼로 잘라 버렸다. 주인공은 조르바에게서 열정과 자유를 발견하였다. 조르바가 내뱉는 말은 조르바의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주인공의 이제까지의 인생을 깡그리 씻어 내고 조르바에게서 배운 것들로 다시 채우기를 소망한다.

"기분 내키면 치겠지요. 내 말 듣고 있소? 마음 내키면 말이오. 당신이 바라는 만큼 일해 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 땐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산다는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요? 허리띠를 플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확대경으로 음료수를 들여다보면 물애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쬐그만 벌레가 우글거린답니다. 보고는 못마시지... 안 마시면 목이 마르지... 두목, 확대경을 부숴 버려요. 그럼 벌레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신이 번쩍 들고!"
"두목, 음식을 먹고 그 음식으로 무엇을 하는지 대답해 보시오. 두목의 안에서 그 음식이 무엇으로 변하는지 설명해 보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일러 드릴리다."
"....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씌여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읍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역자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과 작품의 핵심에 위치하는 노른자위 개념이자 그가 지향하던 궁극적인 가치의 하나인 '메토이소노(성화)'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매토이소노'는 '거룩하게 되기'이다. 이는 물리적, 화학적 변화 너머에 존재하는 변화라고 한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게 물리적 변화이고 포도즙애 포도주가 되는 게 화학적 변화라면,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성체)'가 되는 것, 그것이 '매토이소노'라고... 역자는 조르바가 사업채 하나를 '춤,으로 변롸시킨 것도 '매토이소노'라고 설명한다.

친구가 애기한 '마초'의 전형같은 조르바, 그리고 법정스님의 화두... 어쩌면 20세기 초의 그리스에서는 마초처럼 '책벌레'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조르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본질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책을 덮고 나니 나 역시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지금 종이벌레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다. 몇 년 전부터 하루하루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나에게 가장 친숙하고 가까운 것은 책... 나는 이들 책 속에서 무엇을 찾고자 하는 것인지... 혹시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결코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혹은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은 아닐지...

친구가 애기한 '마초'의 전형같은 조르바, 그리고 법정스님의 화두... 어쩌면 20세기 초의 그리스에서는 마초처럼 '책벌레'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조르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본질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 2012년 1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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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 - 진보.개혁의 위기를 말하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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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는 참으로 역동적이다. 특히 1948년 해방 이후의 한국사회는 1년 뒤를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예측불가능한 상황이 연속 되었고 지금까지 그런 분위기는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1950년 전쟁, 1960년 4.19 혁명, 1961년 박정희에 의한 군사쿠테타, 1965년 한일협정, 1972년 유신체제, 1979년 박정희 피격과 전두환의 군사쿠테타, 1980년 서울의 봄과 전두환의 광주학살, 1987년 6월항쟁과 직선제 등 개헌, 그리고 양김 분열에 의한 군사정권의 연장, 1990년 3당 야합과 1992년 김영삼의 당선, 1997년 구제금융 위기와 김대중의 당선, 2002년 노무현의 당선, 2007년 이명박의 당선, 그리고 이제 2012년...

1948년 이후 한국은 미국의 세계 지배체제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찌보면 대외적인 상황은 어느정도 예측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국내상황 특히 국민들의 모습은 가히 'Dynamic Korea'라고 불릴만큼 역동적인 모습이었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이 그러했다. 6월 항쟁은 이 책의 제목 그대로 '열망' 그 자체였다. 그러나 1987년 이후 20년의 역사는 '절망'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처음 10년은 1987년 6월 항쟁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김영삼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의 연장이었고 그 이후의 10년은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세력이 집권했지만 무력함과 개혁의 실패로 인해 소위 진보,개혁세력에 대한 신뢰의 하락으로 점철되었다. 더군다나 민주정부가 거듭될수록 더욱 심해지는 양극화는 서민들의 삶의 위기로 나타났다. 그 반대급부는 2007년 '단군 이래 최악의 정권'인 MB정권을 등장시켰고 민주주의는 더욱 후퇴하고 서민의 삶은 최악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최근의 MB 정권 4년은 유권자들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도록 만들었다. 국민들은 새롭게 깨달았으며 스스로 변화하고 있다. 그동안의 경험과 기억과 깨달음을 기초로 하여 2012년은 1%의 기득권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다시 바로 세우고 빈곤과 양극화를 되돌리기 위한 한바탕 승부의 해로 만드려고 벼르고 있는 것이다.

작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부터 시작하여 2012년 새해 벽두부터 '심판'과 '정권교체', '승리'와 '국회점령', '참여'와 '99%'라는 단어가 키워드가 되고 있다. '심판'과 '정권교체'는 해방 후 최악의 정권인 이명박 정권과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을 총선과 대선에서 꺽어야 함을 의미한다. '승리'와 '국회점령'은 정권교체의 의미를 포함하면서도 유권자의 참여를 조금 더 강조한 의미다. '참여'와 '99%'는 작년에 미국에서 시작된 'Occupy' 운동의 한국판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사회복지는 대의민주주의나 시혜가 아니라 유권자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가능하다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유권자가 변한 만큼 2010년 지자체 선거에서 주요 쟁점으로 부상한 '사회복지'는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도 여전히 주요 쟁점이 될 것이다. 문제는 막연하게 '사회복지'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이고 실질적으로 '사회복지'가 가능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판단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난 10년간의 민주정부는 무엇을, 어떻게, 왜 잘못했는지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규명하지 않은 채 또 다시 진보,개혁세력이 국회와 정권을 되찾아봐야 지난 민주정부 10년의 실패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클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난 민주정부의 10년 동안 진보,개혁세력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검토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1987년 이후 20년간 '열망과 절망'을 온몸으로 체험해 온 민주화 세력과 서민들의 목소리를 통해 2007년 시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모습과 진보,개혁 세력의 위기를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짧게는 참여정부 4년에 대한 평가이고 길게는 민주정부 9년에 대해 평가한 것이다. 

민주정부 9년(참여정부 4년)의 성적표를 도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집필진은 발간사에서 참여정부를, "중간평가 성격의 2006년 지방선거 결과는 외형상 열린우리당의 완패와 민주노동당의 동반 하락이었지만, 그 본질은 집권 세력에 대한 환멸, 나아가 우리 사회 진보,개혁 세력 전반에 대한 불신의 표출이었다는 것이 우리의 진단이다. 노무현 정권은 보수 세력이 보낸 트로이의 목마인가? 노 정권 자체가 주요 정책에서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며 보수화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보수 세력으로부터는 좌파 정권이라는 공격을 받아왔다. 보수 쪽의 선전은 먹혀들었다. 노 정권은 본의 아니게 좌파 정권 대접을 받는 모순적인 상황이 전개되어온 것이다. 한국정치의 희극이자 비극이다."라고 요약하여 평가했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은 2006년 5.31 지방선거 이후 진보,개혁세력의 위기를 신문에 기획기사로 실었다. 이는 2006년 9월~12월에 실은 28회 연재 "진보개혁의 위기 - 길 잃는 한국 시리즈"를 말한다. 특히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일반 서민들, 직장인들, 소상공인들의 인터뷰 기사는 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언론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에(더 심한 수준으로...) 마음이 아플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이 기획기사는 참여정부 인사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고 한다. 국정홍보처 김창호 처장은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의 기준이 왜 진보진영의 위기에 대한 심층적 성찰과 반성을 향해 가지는 않는지, 그 날선 칼날이 왜 보수세력들에게는 그렇게 무딘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반발했다. 청와대는 "성장율, 물가상승율, 수출 다 좋은데 왜 민생을 싸잡아 도탄이라고 하느냐, 대통령이 정치에만 올인하고 국정 마무리를 외면한다고 하지만, 이는 증거도 없는 감정적 비방이다"라고 비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월 17일 브리핑에서 "당신들이 왜 나를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하느냐. 진짜 민주주의, 진짜 진보는 나다"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성장율, 물가상승율의 안정, 삼성을 비롯한 재벌기업의 이윤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 노동자를 비롯한 서민들의 삶은 전혀 개선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참여정부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했다.(이런 인식은 지금 민주통합당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는 한명숙, 문성근, 박영선, 문재인, 이인영, 김부겸, 박지원 최고위원도 비슷하기에 걱정스럽다...ㅠ)

물론, 집필진은 참여정부만을 다룬 것이 아니었다. 제도권에 진입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파 문제와 민족 문제에 발목이 잡혀 제대로 된 정책 하나 추진하고 있지 못하고, 정작 자신들이 대변한다고 이야기하는 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조직된 대기업 노동자들의 조합주의적 이해만을 대변한 채 정책 없는 투쟁 단체로만 각인되어 있는 민주노통, 여전히 시민의 참여 없는 시민운동 등을 모두 다룬다. "밥 먹여 주는 민주주의를 못하면 진보,개혁 세력의 미래는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책의 1부. [진보,개혁 위기의 현상과 진단]에서는 진보,개혁의 위기가 단순히 담론이나 이념의 퇴조가 아니라,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위기로 나타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부동산 폭등, 사교육비는 치솟고 빈부격차는 심해져 가고만 있고 참여정부를 비롯한 시민단체 등 진보,개혁 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바닥을 치고 있음을 당사자들이 스스로 고백한다.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은 "개혁세력은 무능했고 진보진영의 현실적 대안은 부족했다. 민주화를 이끈 세력은 이제 기득권층이 되어 일상에 매몰되었다. 민주화 20년, 민주세력 집권 9년이 되었지만 민주화의 성과는 어디로 갔으며, 그 원인은 누구에게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라고 말했다.(스스로 평가하는 과정에서도 진보,개혁의 위기는 느껴진다. 위기 진단 대담에 참가한 이정우 경북대 교수, 노회찬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주장하는 위기의 내용과 원인, 진단과 대책, 전략이 서로 다르다. 당연히 2007년 이후 이들의 움직임과 행동반경도 서로 달랐고 지금도 전혀 다르다...ㅠ)


2부 [진보,개혁세력의 실상]에서는 2000년 16대 총선 때부터 의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386 정치인들이 세대교체의 축이 되고 정치개혁의 희망봉이 될 것이라 각광받았지만 17대 국회에서는 '가장 실망스러운 집단 1위'로 꼽히고 있음을 지적한다. 2004년 4월 15일, 국회 안으로 화려한 발걸음을 내딛었던 민주노동당은 자신들이 대변하고자 하는 서민과 노동자의 지지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 전교조, 시민운동 단체, 대학의 현실과 무능력도 함께 비판하고 있다.(이 챕터에 대한 대담 참여자인 김혜정 한경운동연합 사무총장, 단병호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의 진단과 처방도 역시 크게 다르다...ㅠ)

3부. [보수의 부상과 혁신]에서는 진보,개혁세력의 퇴조와 맞물려 보수주의자들이 속속 집결하고 보수셩향의 학자들이 커밍아웃을 외치고 있음을 분석한다. 2004년 11월부터 자유주의 연대, 뉴라이트전국연합 등이 출범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보수가 부상하게 된 이유와 보수담론이 생산,유통되는 동학을 살펴본다.

 

 

4부. [진보의 10대 의제]에서 진보,개혁세력이 집중해야 할 10대 의제를 제시한다. 조세개혁, 부동산, 교육정상화, 재벌개혁, 고령화/저출산, 소외된 소수, 건강 불평등, 생태주의, 빈곤문제 해소, 비정규직 해소 등이다.


5부. [진보의 전략은 무엇인가]에서는 진보,개혁의 위기가 진보,개혁에 대한 환멸과 서민, 중산층의 삶의 위기를 초래했음을 지적하면서 반대와 투쟁만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과거 방식 대신 새로운 전략을 세우고 실천적 대안을 내놓아야 함을 말한다. 그러면서 진보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전제로, 진보를 확장하고 심화시킬 수 있는 방향과 2007년 당시 논의되고 있는 전략들을 소개한다. 그것은 첫째, 기존의 정규직 노동자,농민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진보의 주체를 확장해야 하는 것이고 둘째, 진보가 주장이나 선언을 넘어선 일상적인 삶에서 체화되고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 사회적 대타협을 주도적으로 추진해야 하고 넷째, 연대의 대상과 공간을 동아시아로 확대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집필진의 참여정부 4년(또는 5년)과 민주정부 10년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위기'라는 진단에 대해서는 동의히지만, '위기'의 원인과 대책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위기'의 원인이 다르니 '대책'도 다를 수 밖에 없지만...
나는 '위기'의 원인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개인적인 한계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선 과정 자체가 진보개혁 진영 전체가 하나의 '준비된 조직'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대톨령의 후보 선출 과정 자체가 역동적인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후보 선출 이후 '후보 흔들기'가 민주당 내에서 벌어졌고 야권단일후보로 나서지도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노무현 개인이든, 측근이든, 지지세력이든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었고 대톨령으로 당선된 이후에도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뿐 아니라 정권 준비주체들도 진보개혁 진영 전체라는 관점보다 '권력 획득'이라는 구태 관점에서 5년의 집권플랜을 짜고 인사정책 등을 펼쳤기 때문인 것이다. 즉, 진보개혁 진영이 서로 '전체로서 하나의 세력'이라는 관점이 없었고 뿔뿔이 흩어진 채 각개약진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위기의 원인은 '참여'의 문제다. 노무현 정부는 스스로 명칭을 '참여정부'로 표방했지만, 전혀 '참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보개혁 세력 전체를 참여의 대상이자 주체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노사모'마저 일부를 제외하고는 진보개혁 추진에서 참여동력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노무현 개인과 집권세력의 역사의식과 철학, 정책, 비전, 전략의 부재인 것이다.(그런 면에서 지금 읽고 있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기간을 너무도 180도 대비된다...ㅠ)
나는 민주주의든, 총선과 대선의 승리든, 정권교체 이후 광범위한 진보개혁의 추진에서 '참여'의 문제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99% 국민들이 스스로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정부와 정치권에서 국민들의 참여를 보장, 지원하지 않고서는 지난 60년 동안 한국사회를 그물처럼 장악하고 있는 1%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여 진보개혁을 이루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에 나타나 있는 정도의 참여정부의 평가는 어쩌면 국민들 사이에서 공통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참여정부에서 MB정권에게 넘어간 뒤로는 참여정부에 참여한 인사들을 한 때 '폐족'이라고까지 지칭되었다. 너무 심하게 대했던 시절도 있었다.(나도 당시 그런 보통사람의 하나였다.) 그런 인사들을 정치적으로 살려준 것은 노무현 대통령과 MB정권이었다. MB정권의 무지막지한 공격과 불편부당한 수사로 인해 고통받던 노 전대통령은 자신의 죽음으로 참여정부의 인사들과 성과를 보호하려 했다. 그리고 그 분의 죽음으로 많은 국민들과 진보개혁 진영의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 개인에 대한 '지못미'를 느끼면서 들고 일어났고 참여정부 인사들은 그런 분위기를 타고 2010년 지방선거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리고 참여정부 인사들에 평가에 있어서 나는 한명숙, 문재인, 이인영, 박영선, 박지원, 유시민, 천호선, 안희정, 이광재 등 참여정부의 공과에 일정 책임이 있는 인사들을 무조건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것이 한미FTA든, 빈부격차 심화든, 부정부패든, 집회시쉬의 자유 탄압이든... 
중요한 것은 참여정부에서 시행한 정책이 잘못된 것이면 지금이라도 솔직하고 겸허하게 인정하고 공개 반성하고 참회하고 어떻게 바로 잡을 것인지 국민들에게 약속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자신의 위치에서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아주 악질적으로 나쁜 것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은 없다고 발뺌하고 둘러대는 것이다. 국민들의 노무현 대통령 개인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 자는 정치인 자질은 커녕 기본적인 인격적인 자질도 없는 인간일 뿐이다. 

[ 2012년 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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