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 - 제주 강정마을을 지키는 평화유배자들
이주빈 글, 노순택 사진 / 오마이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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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금) 한국경찰의 대표적인 문제점이 노출된 상반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제주 강정마을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신부님 한 분이 추락사고를 당한 것이고 또 하나는 수원에서 경기도 경찰청이 112 신고가 접수되어 6분 넘게 강간,살인 피해자가 살려달라고 했는데도 늑장 대응하여 결국 살해된 사건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역은 파출소에서 얼마 되지 않은 거리였고 심지어 경찰은 자신들의 태만과 실수를 고의로 감추려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강정마을에서의 경찰 과잉진압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경찰이 본연의 업무인 치안과 민생 보호에는 뒷전이고 정권과 재벌들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인 것이다.

 

 

 

 
강정마을 사건의 경우, 6일 오후 문정현 신부가 강정마을 방파제에서 성 수난 주간을 맞아 천주교의 '십자가의 길' 예식을 펼치며 이동하는 중 경찰에 떠밀려 7m 아래로 떨어져 심한 부상을 당했다.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국민에게 사업의 취지와 정보를 공개하고 국민과 대화하면서 협조를 구하려 하지 않고 국민의 의사와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힘으로 정책을 밀어붙이는 몹쓸 태도와 무식한 방식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현 이명박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끝까지 용산참사와 매년 예산안 날치기, 4대강 죽이기, 한미FTA 날치기, 외환은행 불법 매각, 언론사 장악, 국민들의 알권리 침해 등 여론을 무시한 수 많은 '강행'으로 점철되었다.
강정마을의 경우,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주권을 지켜야 할 정부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스스로 망가뜨리고 제주도 서귀포 지역에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면서 1948년 4월 이후 64년 만에 또 다시 제주도민들에게 악몽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제주 강정마을이 해군기지로 결정,강행되는 과정에서 정부가 얼마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어겼고 거짓말을 일삼았는지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강정마을 주민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삶과 구럼비바위 등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고자 애쓰는지에 대한 것이다.(이 책은 지난 주 공부모임 교재였다.)
 

 

 

 

 
구럼비는 제주 강정마을 해안가에 넓게 펼쳐진, 길이가 1.2킬로미터나 되는 너럭바위의 이름이다. 연산호 군락과 붉은발말똥게를 포함해 여러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이 서식하며, 제주 올레 7코스에 속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사람들은 이 너른 바위에 기대어 책을 읽거나 바다를 감상하고 피곤할 땐 누워 잠을 잤다. 아름다운 강정바다의 물결처럼 잔잔하고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그러나 2011년 9월, 해군과 공사 시행업체(삼성과 대림)는 구럼비바위로 가는 길목에 높이 3미터짜리 철제 펜스를 치고, 다음날부터 굴착기로 구럼비바위를 부수기 시작했다. 강정마을 주민들과 평화운동가들이 4년 넘게 반대하고 있는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끝내 강압적인 방법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평화롭던 제주 강정마을이 격랑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은 2007년 4월, 당시 마을회장이 불과 주민 87명의 동의를 얻어 해군기지 유치를 결의하면서부터다. 분노한 주민들은 2007년 8월 해군기지 유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했고, 전체 주민 1.970명 중 725명이 참여해 94%가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강정마을은 애당초 해군기지 후보에조차 없던 마을이었다. 해군은 2002년 해군기지의 최적지로 '화순항'을 선정했다. 그런데 워낙 주민들이 강하게 반대하니까 슬그머니 후보지를 바꾸어 2005년 9월 느닷없이 남원읍 위미리를 사업 대상지역으로 정했다. 물론 또다시 위미리 주민들의 강한 반대로 난항을 겪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해군기지 선정을 위한 여론조사를 불과 사흘 앞두고 강정마을이 후보지로 선정된 것이다. 계속 주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해군과 정부는 기지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후보지 지역주민과 참을성 있게 협의하는 방식이 아니라 음모가들처럼 몰래 마을회장을 구워 삶고 일부 주민들을 회유하여 부당하고 부적절한 날치기 주민투표를 졸속처리한 것이다.
그리고나서 절대보전지역 지정이 해제된 때가 2009년 9월이었으니 만 2년 동안 해군은 불법 공사를 진행했다. 이런 야만스러운 정부가 어떻게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인지...ㅠ
강정마을 주민들과 민주당·민주노동당 등 정치권에서는 세계자연유산 3관왕(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 생물권보존지역) 지역인 강정마을 일대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한국 정부는 남방해상무역 보호 등의 이유로 해군기지 건설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군사전문가들은 제주해군기지가 중국을 압박하는 미군의 기항지로 활용되면서 ‘관광의 섬 제주’가 ‘동북아의 화약고’로 바뀔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미군은 한·미안보동맹과 한·미행정협정 등에 근거해 언제든지 한국의 기지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강정마을은 매향리와 대추리에 이어 반전과 평화의 상징이 되고 있다.

 

 

 

 
매향리, 대추리, 용산에서 주민들과 함께 싸웠던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는 2011년 7월부터 강정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강정 바다의 아름다움에 반한 김민수 씨는 아예 ‘강정 김씨’로 본을 바꾸고, 3년째 해군기지 반대 싸움을 벌이고 있다. 프랑스에서 온 ‘마음치료사’ 뱅자맹 모네는 평화를 위해 작은 힘을 보태는 강정의 생활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느끼고 있다. 대만에서 온 평화운동가 왕에밀리는 강정마을에서 ‘양심의 소리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발 들어달라고 호소한다. 즉 이 책은 제주 강정마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유배’를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투쟁을 지속적으로 취재해온 <오마이뉴스> 이주빈 기자는 강정마을 ‘평화유배자들’을 인터뷰해 그들이 생각하는 평화와 자유가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한국전쟁’과 ‘분단권력’을 주요한 테마로 삼아 사진 작업을 해온 노순택 작가는 강정 사람, 강정 바다, 구럼비바위의 소박하지만 강인한 모습을 포착해냈다

 

 

 

 
"사람들은 너른 내 몸에 기대 책을 읽거나 피곤할 땐 누워 잠을 잤죠. 그 흔한 일상의 풍경이었던 모습들이 이젠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고 있군요. 내게로 오는 길을 다 막아버렸기 때문이에요. 해군과 시공업자들은 육지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내게로 올 수 있는 모든 길목에 높이 3미터짜리 철제 펜스를 쳤어요. 그리고 다음날부터 굴착기에 정을 꽂아 내 몸을 부수기 시작했어요. 하얀 살이 터져 포말처럼 강정바다에 흩뿌려졌어요. 너무 아팠지만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어요. 너무 슬펐지만 울 수가 없었어요.  그리웠기 때문이에요. 내 등을 주방 삼아 요리하던 종환 삼촌, 감옥에 갇혀 있는 문주란 꽃처럼 순한 사람 동원 씨, 그리고 우리들의 공주님이었던 일곱 살 태나……. 그리움이 깊으면 다시 만날 것이란 믿음에 그들에게 고통을 핑계로 구걸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 온몸이 바스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들에겐 신음소리 한 점 내주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끝내 저 3미터 펜스를 넘어 다시 만날 테니까요.
아이들 웃는 소리가 들려요. 다시 아이들을 안고 싶어요. 내 너른 등에 무등을 태우고, 강정바다 수평선 너머를 함께 꿈꾸고 싶어요. 나를 가두고, 나를 죽이는 건 참을 수 있어요. 그러나 섬마을 아이들의 꿈을 죽이는 건 참을 수 없어요. 섬마을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지우는 건 참을 수 없어요."(p.238)
 
 
헌법 제1조는 학생들 시험문제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주권'은 민주국가의 가장 중요한 원리임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향후 인류에게는 인간들의 자유의사 보다 수 백만, 수 억년 동안 먼저 지구상에 존재해온 자연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국민의 자유의사 보다 '국가'를 빙자한 정권의 의사는 2순위일 수 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정부와 해군은 기지공사를 중단하고 원점에서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 정부가 솔직하게 국민들에게 정보를 공개하고 설명하고 다수의 후보예정지를 대상으로 공정하게 협의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 당시 방사성물질폐기처리장 유치 과정이 절반 정도의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역주민들의 삶의 터전에 관계된 국가정책에 대한 기본적인 처리 방식은 방폐장건을 토대로 수정하여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리 훌륭하고 필요한 국가정책이라도 국회와 국민들을 무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여서 진행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할 뿐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정책이라고? 그렇다면 우리사회 내부에서부터 평화적인 방식으로, 부드러운 대화와 협의를 통해 진행해야 한다.
 
며칠 남지 않은 4월 11일 총선에서 야권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것만이 해군기지 건설공사 강행을 막는 방법인 것 같다.
 
[ 2012년 4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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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파울루 프레이리 혁명의 교육학
피터 맥라렌 지음, 강주헌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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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수 세기에 걸쳐 '진보'해 왔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현실을 돌아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만민평등'이라는 개념이 각국의 헌법과 교과서에 담겨 있음에도 실제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인종적, 성적인 불평등과 양극화는 심해지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체가 그러한 불평등과 양극화를 가져오는 시스템이지만 최근 몇 십년 동안 전세계에 위세를 떨친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경향을 훨씬 강화시키고 있다.
국가 내의 양극화, 국가 간 양극화, 대륙 간 양극화, 인종별 성별 양극화가 지나친 상황이다. 결국 제도와 시스템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의식과 집단적 사회문화까지 고려하지 않는 현실, 무한경쟁으로 인하여 그러한 '더불어 삶'과 공동체 문화를 파괴하고 해체시키는 작용이 훨씬 강하게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요즘 정치경제나 사회문화와 별도로 배움과 학습, 교육과 학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은 20세기 남미의 두 인물, 체 게바라와 파울루 프레이리의 삶과 철학을 되돌아보며 그들이 지향한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란 무엇이며 이를 위한 교육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모색한 책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동기는 “프레이리와 게바라에게서 느껴지는 공통점”이었다고 말한다. 일찍이 <페다고지>로 널리 알려진 프레이리는 비폭력 저항과 투쟁을 주장했지만, 브라질에서는 그의 반(反) 패권적 사상 때문에 위험한 반체제주의자로 찍혀 투옥되었고 오랜 정치적 망명생활을 했으며, 게바라는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제국주의자들에게 토지반환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방위이며, 폭력적 저항은 파시즘과 양키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신처럼 군림하는 식민주의를 꺾을 수 있다는 것을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 게릴라였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가슴을 나눈 형제였다. “그들은 감옥, 전쟁터, 교육 투쟁의 현장 등 어디에서도 얼굴을 맞댄 적이 없었지만, 머리와 가슴으로 비슷한 세계관을 지녔으며, 지적 정치적 동료로써 인간 정신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p.09)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인간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공부를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 공통점을 지녔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해 순교자처럼 거칠고 엄격한 게바라, 부드러우면서도 대담한 파울루에게서 그들이 공유한 세계관을 풀어내고 그들의 삶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책은 1967년 10월 9일 체 게바라의 처형 당시의 모습부터 시작하여 게바라의 일생과 그의 철학이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글로벌 자본주의의 횡포, 사파티스타 민족해방전선 등의 혁명투쟁과 교차되어 서술된다. 처형 직전에도 현지의 교사와 교육에 관해 토론하는 모습과 전투 현장에서도 게릴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일기에 대한 비평을 해주는 등 끊임없이 교사 역할을 수행했던 게바라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피터 맥라렌은 두 사람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자본주의의 파우스트적 욕망이 세계를 생태적 위기에 몰아넣고, 북아메리카인이 향유하는 경제적 안락이 남아메리카의 형제자매의 빈곤과 직접적 관계가 있기 때문”이며 게바라와 프레이리가 “지역적, 범세계적으로 권력의 비대칭적 관계를 청산할 수 있는 교육부문에서의 행동방향을 남겨주었기 때문”(p.279)이라고 말한다.
피터 맥라렌의 정의에 따르면, 혁명적 교육학은 비판적 교육학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해서,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내적인 모순에 따른 충돌상태에 놓는 교육학이다. 혁명적 교육학의 핵심은 ‘지식’과 ‘존재’ 및 그 둘의 관계에 대한 우리 사고방식을 인식론과 존재론 모두에서 혁명적 변화를 모색하는 데 있다. 프레이리와 게바라의 교육학은 이 특징을 고스란히 담아내서 비판적 문해능력을 강조하며 정치 프로젝트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게바라는 보다 직관적이고 프레이리는 보다 체계적이나 상호배려를 말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두 사람의 견해에 따르면 민중을 억압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해방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수준까지 키워내야 진정한 성공이다. 그것은 미완적 존재로서 ‘다양성 안에서의 통일성’을 바탕으로 자신과 사회를 끊임없이 변증법적으로 변화시켜가는 ‘새로운 인간’들로 구성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혁명의 과정이다.

'왜 지금 게바라와 프레이리를 다시 되살려야 하는가?' 이 문제 제기는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하다. 맥라렌은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며 두 선각자가 남긴 세계관을 추적하며, 21세기를 맞아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데에 필요한 교육과 정치에서 핵심적 역할을 그들로부터 발견했다. 그것은 곧 프레이리와 게바라가 제시하는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이었고 그것은 사회경제적 측면이나 정치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었다.
맥라렌은 세계화된 세계를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용납할 수 없는 세계로 정의한다. “‘족쇄가 풀린’ 자본주의와 끝없는 자본축적에서 비롯된 ‘자유시장혁명’은 모두에게 혜택을 주지 않았다. 실제로 그 ‘혁명’은 미국사회의 하부구조를 만신창이로 만들었으며, 방위산업과 금융산업의 이익을 도모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고혈을 짜냈다.”(p.60)
“사기극에 능한 깡패 정치인들은 공익, 공공서비스, 공적 권리, 그리고 최근에는 캘리포니아 법안 187호, 209호, 227호에서 보듯이 시민권까지 무시하면서 민간산업을 위한 충견노릇을 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정의보다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게다가 케인스식 복지국가를 미친 듯이 와해시켜, 착취라는 개념은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개인과는 동떨어진 공허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되어 버렸다. 자본은 선의의 진보적인 교육자들에게도 뿌리치기 힘든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p.69~70)
그는 두 사람을 통해 족쇄 풀린 자본주의, 자유시장주의, 자본과 노동의 세계화가 안고 있는 사회경제적 병폐를 척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혁명의 교육학’이었으며 ‘저항의 교육’, ‘사랑의 교육’이었다.

체 게바라는 티셔츠, 핀, 포스터, 열쇠고리, 스티커 등의 형태로 상업화되고 소비문화에 코드화되어 자유분방한 혁명가로 전락되어 버렸다. 미국의 교사들과 교수들에게 체는 오늘날 세계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삶을 살고 메시지를 남긴 사람이 아니라, 먼 과거에 이상적인 꿈을 꾸었던 낭만적 아이콘이고 제3세계의 상징적 인물일 뿐이다. 심지어 교회까지 체의 상징적 이미지를 이용해 왔다. 혁명가 체의 이미지를 이용해서, 영국의 ‘교회홍보네트워크’는 체에게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남성적인 매력을 과시하는 포스터를 제작해 5만여 개 교회에 그것을 구입하라는 전국적인 포스터 캠페인을 벌이며 이상스런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교회신도들이 부활절에 교회를 찾도록 체의 포스터를 미끼로 쓰라는 것이었다.
체 게바라에 대한 많은 책이 출판되었지만, 맥라렌은 이 책에서 체 게바라가 팽배한 자본주의 상품사회와 교육, 정치 등에서 교육자, 정치인, 포스트모던 좌파들에 의해 어떻게 상품화되고 왜곡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내 보여준다.
또한 짜맞추기 교육, 은행예금식 주입교육을 비판하며 억업 받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꿈과 욕망을 채워주는 부속물로 살아가는 가혹한 현실을 극복하는 철학과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 파울루 프레이리로부터 비판적, 혁명적 교육을 이끌어내고 있다.

‘새로운 인간사회’를 모색하는 젊은이에게 프레이리와 게바라는 용기를 얻고 본받아야 할 표본을 남겨주었다. 일확천금이나 무소불위한 권력을 꿈꾸거나 자극적인 환상, 무자비한 폭력, 무절제한 섹스로 공허한 정체성을 채우는 반면에 게바라와 프레이리의 사상과 실천에 담긴 혁명적 자아는 정치와 교육에서 새로운 표본을 제시해줄 것이다. 맥라렌은 탈정치화된 프레이리나 게바라를 거부했다.
“우리 시대는 꿈의 시대이다. 그 길을 개척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은 혁명가의 교육학적 프락시스를 되살려내고, 자본의 착취에 신음하던 사람들의 세계사적 행동을 재연해내는 것이다. 오늘날 교육의 권위자들이 유행병에라도 걸린 듯이 변절을 밥 먹듯 하지만, 이런 흐름에 혁명의 교육학까지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p.311)

이제 체 게바라를 전체적으로 알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 2012년 4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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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에서 시민으로 -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4
최장집 지음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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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부를 총관리하고 시민들을 위해 정책을 집행해야 하는 총리실에서 몇 년 동안 수 천 수 만명의 민간인을 사찰했고 청와대는 이를 은폐하고 검찰은 이에 대한 수사를 축소했다. 측근비리, 성추행, 불법대출, 부정선거... 일주일에도 몇 번씩 집권 여당과 청와대, 행정부의 부정부패가 드러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집권 초기부터 언론과 사법권력을 장악하여 자신들에게 우리한 정보만 시민들에게 전달하려고 애쓴지 4년이 지나고나니 여기저기서 그동안 감추어왔던 추악한 치부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집권자와 집권여당은 설직하게 공개,사과하고 개선하기는 커녕 치부를 감추기에 급급하고 권력과 손잡은 언론은 물타기에 여념이 없다. 
정부는 2년 연속 일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는 넘어섰다고 선전하지만 주변사람들 어느 누구도 이를 실감하지 못한다. 심지어 SBS 방송 앵커도 그렇게 말한다. 정규직 노동자의 월급 대비 65%도 안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절반에 이르고 실업자가 넘쳐나고 빚지고 망하는 소상공인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5대 재벌기업은 이명박 정권들어 계열사가 50% 증가했고 집권여당이 4년 내내 부자감세에 재벌일감 몰우주기를 했으니 2만 달러의 대부분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는 쉽게 추축이 될 뿐이다.

나는 1987년부터 20여년간 정치경제적 민주주의 추진하고 확장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 그 생각이 철저하게 잘못된 생각임을 알게되었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우리에게 깨닫게해 준 것은 형식적이기만 한 정치적 민주주의는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없는 민주주의는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 참여와 연대가 없이는 민주주의가 신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지난 25년간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왜 한국의 시민들은 정기적으로 시청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 수 밖에 없는가? 왜 촛불을 들어도 그 때 뿐인가?

최장집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 나에게 수긍할만 한 대답을 해주는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감정적이거나 편협된 사고가 아니라 이성적인 생각하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정치에 대해, 운동에 대해서, 정당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고 기준을 잡는데 도움을 주었다.
지난 번에 읽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노무현 정권 집권 때 처음 발간한 것이다. 이 책에서 에서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성공을 평가할 때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적 징후를 말했고, 지역주의·지역 갈등의 폐해를 개탄하는 사람들에게는 사회경제적 갈등의 의미와 효과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으며, 민주주의 위기에 “다시 운동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응수했다. 그는 한국 정치에 대해 독자들에게 한국 민주주의와 그 문제를 이해하는 일관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도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해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자주 운위되는 지배적인 견해와는 매우 상반된 주장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지난 민주화운동 시기의 ‘민중’과 ‘민중운동(론)’, 나아가 ‘촛불 민주주의’가 운위되는 상황에서도 ‘사회적 시민권’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보기를 요청한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그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초점은 지난 개혁 정부들의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맞춰져 있으며, 이 문제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기도 하다.
다만 저자가 소통과 갈등을 대립개념으로 비교하는 것은 조금 부정적이다. 저자는 책에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위기에 대해 ‘소통’을 강조하는 시점에서 오히려 민주주의에서는 갈등이 보다 중요한 의미와 효과를 갖는다 말하며, 신자유주의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에게는 왜 그것만으로는 어떤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오기 어려운지를 설명한다. 하지만 '갈등'은 한 사회 내 집단들 간의 이해관계가 대립한다는 개념이고 '소통'은 이러한 갈등의 존재를 인정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서로 대화하는 의미라고 할 때 '소통'은 '갈등'과 동전의 양면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주제는 여섯 가지다. 첫째 민주주의에서 갈등이 갖는 역할, 둘째 민주화 이후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변화, 셋째 신자유주의와 그것이 수반하는 경제 문제를 사회적 시민권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문제, 넷째 민주주의를 운동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방식이 갖는 한계, 다섯째 오늘의 시점에서 바라본 광주항쟁의 의미, 마지막으로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17대 대선 결과를 해석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들 주제를 통해 저자는 민주주의의 가치, 제도, 실천을 민주주의의 의미와 다이내믹스를 만들어 내는 주요 구성 요소로 상정하고, 이러한 측면 및 이들 간의 연관 관계를 통해 민주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민주주의를 이론이나 다른 나라의 경험 그 자체로 이해하기보다 민주화 이후 20여 년의 한국 정치, 특히 노무현 정부의 경험과 이명박 정부의 등장이 갖는 의미와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우리가 대면해야 할 문제들을 밝혀 보고자 한다.

'민중'과 '시민'이라는 개념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과 사회적 '시민권'이라는 개념도 인상적이다. 민중이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랫동안 권위주의 정권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정치사회적인 소외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중 개념은 갈등의 혁명적인 해결을 상정하면서 그 혁명의 잠재적인 주체로 설정된 개념이었다. 이와 달리 민주화 이후에 주목받기 시작한 시민 개념은 정치사회적 갈등의 민주적인 해결 주체로 상정된 개념이다. 민중이 정치적 갈등의 혁명화를 위해 설정된 개념이라면, 시민은 정치사회적 갈등의 시민화(문명화), 곧 민주적 해결을 위해 상정된 개념이다. 여기서 저자는 민중 담론의 내용에 주목하면서,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 동안 정치적 민주주의는 상당한 진전을 이룬 데 비해 민중에게는 형식적인 인권이나 기본권만 강조되었을 뿐 사회경제적 삶의 질을 보장받을 권리로서의 사회적 시민권에 대한 이해는 지체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민주화의 추동력인 민중이 성숙한 민주주의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제 시민으로서 사회적 시민권의 보장을 요구하고, 그에 바탕을 두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한국 민주주의는 ‘주체 없는 민주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사회적 시민권과 시민의 부재에 따른 결과라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민중운동 담론은 그 자체 안에 ‘멀지 않은 장래에 빠르게 해체될 수밖에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했다. 민중운동 담론은 이념이나 가치 정향에 있어 역사와 정치에 대한 총체적 비전, 도덕주의, 낭만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성장주의 등을 그 내용으로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실현 가능한 대안을 찾기가 힘들고,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런 이유에서도 저자는 민중 대신 시민과 시민권의 개념을 제대로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시민과 시민권의 핵심 원리는 ‘보편성의 원리’라고 했다. 시민권이라고 말하는 자유와 권리는 공동체의 성원인 개인들에게 보편적이며 평등하게 부여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시민의 출현은 민중운동이 주도했던 민주화의 결과물이지만, 아직 제대로 된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영국 사회이론가 T. H. 마셜의 논의를 옮겨 시민권은 시민적 권리(18세기)와 정치적 권리(19세기), 사회경제적 권리(20세기)로 누적적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또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적 시민권의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점이라면서, 이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제약하는 핵심 요인’이라고 밝혔다. 저자가 사회적 갈등 균열에 대응하는 정당체제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시민권의 진전을 위해서는 시민-유권자의 삶의 현실에서 나오는 요구가 정당 정책 대안의 근본 소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신자유주의와 관련하여 저자는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부의 양극화나 빈곤의 심화 현상 등이 단순히 신자유주의로 인해 초래된 것이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정책 대안을 채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모든 잘못된 결과들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돌리는 ‘반신자유주의’론이 환원주의적이며 민중주의적 민주주의관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또한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이미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하나의 현실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며, 따라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단순한 찬성과 반대 내지 긍정 또는 부정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 놓은 현실의 시장구조, 생산체제, 노동시장, 산업·고용 구조의 부정적 효과를 ‘정치의 방법’으로 얼마나 완화·개선시킬 것인가에 있다고 설명한다. 
덧붙여 신자유주의 때문에 민주주의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부재 때문에 급격한 신자유주의로 나아갔으며, 신자유주의를 수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여부는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니며,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어떻게 대처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것인가가 한국 정치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앞서 강조했던 보편적 권리로서 사회적 시민권의 확보가 필요하며,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정당체제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운동'과 '정당'을 구분하는 계기는 제도화라고 할 수 있다. 운동은 그동안 억압되거나 표출되지 못했던 것을 드러내는 집단적인 행위로, 사회적 갈등을 표출하고 이익과 열정, 가치와 비전을 제시하면서 이를 구현코자 한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표출된 이익과 요구가 운동이 끝난 뒤에도 일상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고 일정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일상적인 틀을 만드는 것이 제도다. 물론 그것은 없던 제도를 새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있는 제도를 확대하고 개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운동은 이 제도화의 계기가 완료될 때까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제도를 일상적으로 운영하는 자율적이고 집단적인 행위자가 정당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모든 정당, 특히 소외 계층이 참여하고 이를 동원하고 대표하는 대중 정당은 운동에 그 기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당이 제도화의 틀 안에서 사회의 모든 갈등, 이익, 이슈들을 표출하고 대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제도가 정착된 이후에도 운동이 역할을 갖는 공간은 존재한다.
저자는 이런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보다 필요한 것은 운동이라기보다는 정당이라고 주장한다. 정당은 운동이 표출하고 제기하는 문제를 정치의 제도를 통해 다루고 해결하는 정치의 중심적인 메커니즘 내지 수단이라는 것이다. 운동이 아무리 사회 문제를 광범하게 제기하고 이를 정부/국가에 압박한다 하더라도, 결국 정치의 제도적 틀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해 특정의 결과를 만드는 것은 정당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운동의 경험이 많고 그 전통이 강하지만, 정당은 미약하고 그 전통 역시 약하다. 저자는 운동 자체가 갖는 효과를 부정하지 않으며, 운동과 정당을 대립적 관계로 이해할 때 나타나는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여전히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제도화된 정치 과정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힘을 조직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는 점을 강조한다. 또 이를 위해서는 뚜렷한 가치 지향과 정책 목표를 갖되 그것을 실현 가능한 정책과 프로그램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 정당의 존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한다. "개혁파 내지 진보파가 싸워야 할 것은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에 있지 모든 책임과 잘못을 외부화하면서 자신들이 남긴 ‘과거의 실패’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망각하는 데 있지 않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진정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원하고 이루고 싶을 때, 그리고 그 과정이 일부 선각자나 활동가들로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정치와 정당에 참여하지 못하는 시민들,유권자들을 탓할게 아니라 정치와 정당활동을 하는 주체들이 스스로 그들을 참여시키지 못하는 현실을 반성하고 깨우쳐야 한다. 그리고 마치 스스로 심판자처럼 자임하면서 감 내놓아라 콩 내놓아라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여 개선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조그마한 것들이라도 참여하면서 정치사회적으로 각성되는 것이고 단련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의 결론이 운동이냐 아니면 정당이냐의 이분법을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운동과 정당이 서로 배척하거나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정당으로 수렴되고 정당이 운동의 지형을 넓히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지 않을까 싶다. 사회발전 수준을 고려할 때 정당이 운동보다 미약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운동이 정당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운동의 성과와 결과물이 정당으로 수렴되어 제도화되지 않으면 운동도 정체되어 경직화되거나 약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2012년 3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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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교실 혁명 핀란드 교육 시리즈 1
후쿠타 세이지 지음, 박재원.윤지은 옮김 / 비아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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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 계속된 '무한경쟁' 시장근본주의, 신자유주의로 인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 국가간 격차와 자국 내 계급,계층간의 사회적 양극화를 확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무한경쟁'의 입시교육이 교육 자체와 학교와 아이들을 미쳐버리게 만들고 있다. 그 뿐 아니라 교사와 학부모들까지 이 미친 교육에 희생양이 되어 사회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마음 속의 '병'을 카워가고 있다. 꿈과 희망을 키우고 즐겁게 뛰어 놀아야할 어린 나이에 아이들은 학원에, 영어에, 특기교육에, 시험에 골병이 들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부모가, 학교가, 학원이 제공하는 틀과 방식, 일정과 제도 속에서 자율성과 창조성을 갉아먹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현실이 무슨 대량생산 공장의 부속품처럼 '양육'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아이들의 교육문제는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님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입시교육이 점점 빈부격차와 사회적 양극화의 유력한 이유로 정착하고 있고 사회와 세대의 활력과 창의성,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원인으로 작동한지 오래라 할 수 있다.

한국은 1945년 타의에 의해 민족해방이 되고 분단이 되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른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봉건제도에서 일제 식민지라는 암울한 억압을 거친 후 이 땅의 대다수 민중들은 1948년 헌법 1조에서 규정된 '민주공화국'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채 타의에 의해, 일부 기득권자들에 의해 그냥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 1조가 사람들애게 소중하게 다가온 것이 2008년 첫불시위 때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 피땀을 흘려 쟁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헌법의 가치, 인권, 민주주의의 가치, 정치의 역할, 교육의 역할, 국가의 존재이유, 만민평등의 원리, 유권자의 권리 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아이들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와 이에 반하는 교육제도가 아직도 이 땅에 군림하는 이유 역시 지난 과정과 따로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 문제이기에 각각의 사안에 대해 그 때 그 때마다 깊게 생각해보고 주변을 둘러보고 서로 이야기해보고 가장 나은 방향과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차선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교육(교육)'이라는 단어가 주는 타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느낌 때문에 단어 사용에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우리사회의 교육을 놓고 교육 철학, 목표, 정책, 시스템, 운영방식 등에 대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의견을 교환할 때만이 그나마 시행착오를 줄이고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나는 작년 6월 지자체 선거와 동시에 진행되었던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8월에 전임 시장인 오세훈이 저지른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11월에 벌어진 '곽교육감 사건'에서도 교육적인 관점보다 일반적인 상식과 사회복지, 민주주의, 선거제도 등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행동했을 뿐이다. 나 역시 교육문제에 대해서는 보통의 학부모들이 생각하는 정도와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동안 큰 탈 없이 잘 자라주던 내 아이도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고 1년만 지나면 입시재도와 현실에 빠져든다고 생각하니 이제는 더 이상 남일이 아닌 문제가 되었다. 마침 공부모임에서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가 제시해야할 교육정책에 대해 세미나를 하기로 했기에 이 기회에 교육과 관련한 책을 집중적으로 읽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교육이나 학교와 관련해서는 작년에 <학교 없는 사회 Deschooling Society>를 비롯해 '학교화'와 '제도화'에 관한 몇 권의 이반 일리히의 저작을 읽었고 이번에 약 20년 만에 <페다고지> 등 파울로 프레이리의 저작을 읽어보았다. 국내에서 발간된 교육개혁이나 교육문제에 대한 책 몇 권과 더불어 한꺼번에 읽어보고 내 생각을 정립해보려는 것이다. OECD 국가 중에서 교육에 있어 가장 훌륭한 철학과 시스템과 결과를 낳고 있는 핀란드 역시 이번에 공부해봐야할 과제일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일본의 핀란드 교육전문가인 후쿠타 세이지(츠루문과대학 문학부 비교문학과) 교수의 핀란드 교육 리포트다. 그는 수십여 차례 핀란드를 방문하고, 핀란드 교육 성공의 비결을 연구한 일본의 핀란드 교육전문가다. 후쿠타 교수는 이번 책에서 핀란드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 현장인 교실을 200여 컷의 생생한 사진과 함께 독자들에게 생중계하고 있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하나하나의 사례에서 출발해 핀란드 교육의 성공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게 전달된다. 여기에 학습법 전문가, 교육평론가인 박재원 비상교육 공부연구소장의 해설이 곁들어져 있어서 남의 얘기가 아닌 지금 이곳, 대한민국 교육 현장과 생생하게 대비된다. 박재원 소장은 이 책의 번역과 해설을 통해 현장의 분위기는 사실적으로 전달하되, 각 꼭지 말미에 해설을 달아 한국적 상황에 맞는 핀란드 교육을 독자에게 제안하고 있다. 이는 기존 번역서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도로 책 한 권에서 담아낼 수 있는 것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마지막 5장에서는 우리에게 핀란드는 어떤 존재이고, 왜 핀란드 교육 모델이 우리 교육의 희망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국제학생평가(PISA:Program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감독하에 실시하는 15세 이상 학생의 읽기·수학·과학 평가다. 지난 2000년부터 3년마다 실시하며 국가별 학업성취도 비교지표를 도출하는 게 목적이다. 2003년도 평가결과 우리나라는 수학 542점, 과학 538점으로 핀란드(수학 544점, 과학 548점)에 이어 2위에 올랐다.,"
"2003년 OECD의 국제학업성취도조사(PISA)를 비교한 결과 핀란드는 청소년들의 일주일간 수학 학습 시간이 4시간22분으로 한국(8시간55분)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점수는 544점(한국 542점)으로 한국보다 높았다. 한국 청소년의 주당 공부 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33.92 시간)에 비해 15시간 많으며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길다."
"2008년 우리 국민이 쓴 사교육비 규모는 약 21조원,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23만 3,000원으로 집계됐다(교육과학기술부 통계)."

위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는 핀란드에 이어 학력이 2번째로 높은 나라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한국 학생들이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워낙 길어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 2009년 8월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아동·청소년 생활패턴에 관한 국제 비교연구’에 따르면 학습시간 대비 성취도로 순위를 매기면, 한국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으로 떨어진다. 한마디로 학습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 뿐인가. 사교육비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아이들은 억지로, 부모에게 이끌려 '울면서' 공부하고 있다. 매년 성적과 시험 스트레스로 고통받고 자살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사회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시키기 위해 정말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지불하고 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을 억지로 공부시키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을 생각해보라. 자발적으로는 공부하지 않는 아이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우리는 지금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시간적 낭비, 비용의 낭비, 정신력의 낭비, 행복의 낭비, 마지막으로 국가 경쟁력의 낭비라 할 수 있다.(자세한 사항은 책 속에서 참조)

그렇지만 눈을 돌려보면 지구상에 우리와 전혀 다른 나라가 있다고 한다. '공부가 재미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을 위해 스스로 공부한다. 학교는 기꺼이 가고 싶은 놀이터 같은 곳이다. 철저하게 학생 개개인의 발달을 돕는다. 단 한 사람의 낙제생도 만들지 않는다. 서열화가 아니라 피드백을 위해 평가한다….'
바로 핀란드다. 핀란드 교육 관계자의 말을 옮긴다. “핀란드의 교육개혁은 무척 단순한 경제적 필요성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적은 인구에 척박한 자연환경, 단 한 명도 버릴 수 없는 절박한 처지에서 나온 생각들을 실천한 결과입니다.”
우리나라는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특목고, 자사고 등 수월성 교육을 실행한다고 한다. 핀란드에서는 같은 이유로 학교간, 학생간 격차를 없앴고, 세계 최고의 학력과 학습효율성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흔히 핀란드 교육을 얘기하면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는 식으로 냉담한 반응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교육이 이뤄지는 교실 현장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핀란드 교육이 아니라 소박한 핀란드 교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핀란드 교육이라는,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이상적인' 이야기보다는 당장 실천이 가능한 소박한 핀란드 교실의 비밀을 들여다본다.
핀란드 교육 경쟁력은 세계 최고다. 초·중·고교는 물론 대학교육 역시 다른 나라를 압도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15세 이상 학생의 학업성취도를 평가하는 PISA(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단골 1위 국가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고, 높은 신뢰도로 정평이 나 있는 스위스 IMD(국제경영개발원)의 대학교육 경쟁력 조사에서도 매년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핀란드 교육의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 
핀란드 국가교육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나라 교육현실과 너무도 정반대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가정, 성, 경제력, 모국어와 관계없이 교육 기회가 평등한 점. 어떤 지역에서도 교육에 대한 접근이 가능한 점. 성별에 따른 분리를 부정하는 점. 모든 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하는 점. 종합제로 선별을 하지 않는 기초교육. 전체는 중앙에서 조정하지만 실행은 지역에서 실시할 수 있도록 교육행정이 유연하게 지원을 한다는 점. 모든 교육 단계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협동하는 점. 동료의식. 학생의 학습과 복지에 대해 개인별로 맞춤 지원을 하는 점. 시험과 서열을 없애고 발달의 관점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점.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전문성이 높은 교사. 사회구성주의적인 학습 개념(socio-constructivist learning conception)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과연 어떤가? 기회균등이 하향평준화의 주범으로 거론되고 있다. 여전히 교육 관료들의 권한은 막강하다. 가르치는 교사들이 중심이 아니라 관리하는 관료들이 중심이다. 협동 학습은 교과 성적과는 무관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수업 모형이다. 학생 개인보다는 학교와 학급의 평균 성적과 명문대 진학 실적이 최우선이다. 모든 교육은 서열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지나치지 않는다. 교사들은 진급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연수교육에 소극적이다. 3번에 해당되는 성적(性的) 차별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서 큰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핀란드 교실의 모습을 살펴보면 선생님들이 재미있는 수업을 만들고, 학생들은 즐겁게, 스스로 공부를 한다. 역자는 핀란드의 교실 모습을 사례로 우리 교육도 인상적인 모델을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한때 화제가 된 전북 임실의 기적이 너무도 허무하게 성적 조작으로 판명나면서 ‘한국의 핀란드’라는 표현이 잠시 나오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최근 시도되고 있는 방과 후 학교의 성공 사례들을 보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설자는 우리 교육에도 희망의 성공 사례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교육의 대혼란에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희망의 성공사례 만들기를 핀란드 교실 현장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역자는 이에 따라 대한민국 교실 개혁의 키워드 몇 가지를 제시해본다. 첫째는 학생들의 내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사들의 강압적인 통제나 일방적인 주입식 수업이 과연 학생들의 내면에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교사들이 알아야 한다. 둘째, 학생 전체가 아니라, 학교나 학급의 평균이 아니라, 학생 개개인에게 관심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수많은 학생들 중 한 명일 수 있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정해진, 정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 한 명의 존재가 바로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셋째, 학생들이 과연 무엇에 관심과 흥미를 느끼는지 교사들이 좀 알아야 한다. 재미를 찾아주기 위해 분투하는 사교육 강사들과의 경쟁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최소한 지겹고 따분한 수업이라는 혹평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넷째, 학생들의 성적이 부진하면, 반 평균 성적이 떨어진다고 학생 개개인을 탓할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나는 잘 가르쳤는데 네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랬다는 식의 태도는 이제 버리자. 조금이라도 학생들의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모색하는 선생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책의 제목은 '교육 혁명'이 아니라 '교실 혁명'이다. 우리에게 교육이란 너무나 민감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야하는 거대 담론이다. 그래서 원작자나 해설자는 먼저 교육이 실시되고 있는 공교육의 현장, 교실에 렌즈를 들이대고 있다. 교실에서 이뤄지는 작은 변화를 모델로 사회적 합의를 거쳐 교육 개혁을 이뤄내자는 것이다. 이는 좌와 우, 보수와 진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으로, 교실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대다수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 보자는 얘기다. 앞서 얘기한 방과후학교가 그 작은 시작일 수도 있고, 핀란드 교실에서 행해지는 사소한 차이들이 우리 교육 개혁의 단초가 될 수 있다고 해설자는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이미 회자되고 있는 핀란드 교육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면서 실천적 대안을 찾기에 적합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자칫 핀란드 교육은 너무 좋지만 이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치부하는 냉소주의를 경계하면서 핀란드 교육 모델을 우리 현실로 끌어와 실현 가능한 과제로 녹여내고 있다.
 
현재 우리사회 교육, 교실이 바로 서려면 교사들의 역할과 노력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이 학부모이고 학교이고 시도 교육당국이라 할 수 있다.
 
[ 2012년 3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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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GPE 총서 2
장석준 지음 / 책세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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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공부모임 교재였는데 이제야 읽었다. 책을 읽고보니 저자가 소위 진보 진영에서 드물게 알려진 이론가이자 사회학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외국 사회학,경제학자의 책이나 익히 알려진 장하준,최장집 교수의 저작을 읽을 때보다 더 관심을 기울여 읽었다.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비판과 실망이 커지고 있고 서구국가에서도 신자유주의를 공격하는 흐름이 많아졌음에도 저자는 왜 책의 제목을 '신자유주의의 탄생'이라 정했을까라는 궁금증도 들었고 국내 진보진영 사회학자는 신자유주의 탄생과 극복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최근 캐나다에서 대학생들이 등록금 문제와 대학의 신자유주화에 대한 반발로 수 십만명이 시위를 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작년 여름,가을 세계 금융의 심장인 미국 뉴욕의 월가에서도 “Occupy : 1%의 탐욕, 99%가 막자”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당시 탐욕스러운 금용 자본에 대한 항의로 촉발된 월가의 시위는 한 달 넘게 계속되면서 전 세계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다. 2008년의 금융 위기와 더불어 월가 점령 시위는 지난 30여 년 동안 군림해온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몰락을 상징하는 징후로 보인다. 막강했던 시장 근본주의 교리는 치명적 금이 갔고 자본주의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의 요구가 제기되고 있다. 한 시대가 저무는 지금, 흔들리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극복할 새로운 질서는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저자의 결론을 먼저 들어보면, 그는 현재 지구 전체에 '구조개혁 좌파'라는 흐름과 세력이 존재하고 있으나 이들이 전략적인 실패로 신자유주의의 탄생을 막아내지 못했으며, 향후 생활경제 정치를 강화하고 '생산수단의 소유와 경영'이라는 구조개혁의 방향을 고수하면서 대중운동과 지구정치적 질서를 만들어내면 신자유주의도 막아내고 자본주의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경제가 돌아가는 현실이 세계적으로 적용되고 있으므로 한 나라의 구조개혁이나 경제개혁도 자국 내에서만 해결하기가 이미 어려워진 것이 사실인만큼 정치에 대한 저자의 지구적 관점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현재 수준을 생각하면 정당, 정치세력은 물론이고 노동조합이나 농민, 서민들의 지구적 네트워크가 구성되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차이와 이해관계를 극복한다는 전제로도)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저자의 분석과 해법은 지난 번에 읽은 대니 로드릭의 <자본주의 새판짜기>(2011, 21세기북스)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대니 로드릭은 좌파가 아닌 자본주의 주도세력의 하나라는 입장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원칙과 기준을 바르게 우지하지 않고 국민국가의 고유성과 필요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금융중심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빈부격차와 양극화, 자본주의의 약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국민국가와 민주주의, 세계화가 충돌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고려할 때 세계화보다 국민국가와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세계적인 발전과 평등에 기여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대니 로드릭은 전지구적 정치체제의 성립 가능성을 부정하는 편이고 장석준은 필요하고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도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좌파정치의 블럭화와 시스템에 방점이 찍혀있기는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1970~1980년대 그때, 자본 주도의 지구화 세력이 일방적으로 압승을 거둔 것이 아니라 그에 맞선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을 밝히고, 그럼에도 왜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추출함으로써 오늘에 필요한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에 걸쳐 신자유주의가 처음 등장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을 ‘지구정치경제’적 시각에서 탐색한 이 책은 당시 지구 곳곳에서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초기 흐름에 맞서 투쟁했던 흐름을 분석해 '구조개혁 좌파'라는 세력을 규정하고 이들 ‘구조개혁 좌파’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즉 1970년대 칠레,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등에서 대의민주주의 형식을 존중하며 자본주의 극복을 고민했던 ‘탈자본주의 구조 개혁 노선’의 ‘성공과 패배’의 기록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새롭게 분석한다. 신자유주의와 그 지구화 과정이 단순히 경제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생활 세계 - 국민 국가 - 지구 질서’라는 정치의 세 층위를 가로지르며 전개된 거대한 정치 변동이었음을 밝히려는 것이기도 하다. 1970년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전환 과정을 개별 국가가 아닌 지구 질서의 변동이라는 맥락에서 다루고 있는 이 책에 따르면, 결국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피할 수 없었던 필연적 현상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에 따라 충분히 ‘저지’할 수 있었던 사건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의 핵심 구조인 생산 수단의 소유, 경영 문제에 도전하고 대중 운동을 발전시켜 계급 세력 관계 자체를 바꾸”고자 했던 구조 개혁 좌파의 과제를 계승하되, 국민 국가의 정치에 갇혀 생활 세계의 권력 관계를 제대로 바꾸지 못했던 한계를 뛰어넘어 ‘생활 세계-국민 국가 -지구 질서’를 결합하는 새로운 정치 형태를 만들어낼 것을 제안한다.
신자유주의가 역사적 전환기에 선 지금, 이 책은 우리 시대의 문제를 분석 전망하는 데 필요한 지구정치경제적 시각과 함께 위기의 시대를 돌파할 새로운 ‘정치’에 대한 전망을 여는 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지구 곳곳에서는 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흐름과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이 과정은 전후 질서 붕괴 이후의 새로운 질서 수립을 놓고 구조 개혁 좌파와 신자유주의 우파가 벌인 대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1970∼1973년의 칠레 인민연합 정부의 분투, 1970년대 영국 노동당의 모색과 논쟁, 1981∼1983년의 프랑스 좌파연합정부의 시도와 스웨덴 등지의 흐름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이러한 역사의 다른 가능성들을 제압하고 세력을 확장해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신자유주의 태동기의 윤곽을 제시한다.

2008년의 금융 위기는, 신자유주의 지구 질서가 완전히 붕괴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전성기가 이미 끝났음을 공표했다.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세계사의 또 다른 전환기를 마주한 지금, 우리 시대의 정치 운동은 어떤 전망을 마련해야 할까? 이 책은 전후 사회민주주의의 복원 대신 탈자본주의 구조 개혁의 비전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새로운 지구 질서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복지 국가를 복원·확대하거나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신자유주의 지구 질서를 철저히 해체해야만 새로운 질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해체 작업은 기존 자본주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구조 개혁이다.
구조 개혁 좌파는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적 시장 위계 체계에 가장 능동적으로 맞서 현상 유지가 아니라 현상 타파를 주창함으로써 좌파 정치의 구조적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이들은 국민 국가의 정치에 권력 거점들을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경제 정책 수단들을 창출하려 했다. 공공 부문을 확대하고 경제 계획을 발전시키려 했으며,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노동조합 운동의 역량을 성장시키려 했다. 이렇게 스스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 했으며, 새로운 질서의 출발점은 곧 계급 세력 관계의 역전이었다.
물론 앞에서 보았듯이, 1970~1980년대에 구조 개혁 좌파는 자신들이 만든 기회를 성공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길을 내주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과거의 오류를 직시하고 당시에 보여주었던 가능성을 제대로 실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 좌파 정치의 역사가 놓쳤던 정치의 또 다른 층위들을 환기해야 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이는 곧 “국민 국가의 정치를 생활 세계의 정치 및 지구 질서의 정치와 (재)접속하는” 것이다.

좌파 정치 운동은 생활 세계의 정치에서 출발하지만, 국민 국가의 정치에 본격 참여하면 생활 세계의 실천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만다. 2차 세계대전 후의 국민-대중 경제에서 거대 노동조합들이 등장해 제도화된 단체 교섭에 참여한 후 노동자들의 관심이 임금 교섭에 집중되면서, 과거의 노동 계급 공동체들은 사라지고 ‘미국식’ 대중 사회가 들어섰다. 영국 노동조합 운동이 AES 좌파와 연대해 산업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데 게을렀던 것도, 국유화 이후 칠레의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인민연합 정부와 대립한 것도 생활 세계 속의 권력 관계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구조 개혁 좌파의 한계를 보여준다. 대중 운동을 개혁하고 활성화하는 일부터 했어야 했다는 당시의 한계는 곧 오늘의 과제이다. 지금 노동 대중의 생활 세계는 더 파편화되고 대중 운동은 침체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급진적 구조개혁론자들이 이야기하듯, 탈자본주의 구조 개혁의 궁극 목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민중 ‘자치’를 실현하는 데 있으며, 생활 세계 수준에서 이러한 능력들이 성숙해야만 국민 국가 수준에서 더 확대된 민중 자치를 실현할 수 있다. 저자는 대중 운동의 재구성이 필요하며, 그 방향은 노동조합, 협동조합, 문화 서클 등이 서로 결합된 노동 계급 공동체들의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시장’과 ‘국가’보다 우위에 서는 ‘사회’를 새로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 ‘사회’는 자본-임노동 관계나 국가 관료 기구의 거대 체계로부터 자율성부터 되찾아야 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자체를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저자는 구조 개혁 좌파가 일국 차원을 넘어서는 지구 질서 차원의 정치를 실현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가 혼돈의 출발점이며 초국적 자본과 대결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국민 국가 내부의 변혁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구 질서의 변화를 주창할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진보적 사회 변화를 추진하는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자본 진영의 전 지구적 정치만이 작동했다. 유럽 좌파 정부들은 신자유주의 지구 질서에 누가 더 잘 적응하는지 경쟁할 뿐이었다.
저자는 국민 국가의 틀을 넘어선 좌파 정치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것은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 정치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와 브라질 노동자당의 룰라 정부는 200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 붐’, 즉 우루과이·볼리비아·에콰도르·파라과이·엘살바도르 등에서 좌파 정권이 등장하는 유례없는 상황을 맞아 공동 이니셔티브로 지역(대륙) 차원의 좌파 정치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고, 라틴 아메리카 각국의 경제 사회 통합에 박차를 가해 2008년 남아메리카 국가연합(UNASUR)을 창설했다. 라틴 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은 현실 정치로 구현된 국제 연대를 갖추었으며, 이러한 좌파 주도의 지역 연합은 지구 질서 수준에서 북반구-남반구의 세력 관계를 바꿀 진지 역할을 할 것이다. 물론 라틴 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의 노력은 아직 현재 진행형의 실험 단계일 뿐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국민 국가의 정치를 폐기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국민 국가의 정치와 지구 질서의 정치는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 지구 질서 수준의 새로운 정치 무대를 구축하는 것은 오직 국민 국가들의 공동 이니셔티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역으로 좌파들이 이 새로운 초국적 무대에 진지들을 구축하게 되면 이것은 국민 국가 내의 세력 관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즉, 전 지구적인 구조 개혁이 시작되었는지 여부가 국민 국가 내에서의 구조 개혁의 승리를 상당 부분 결정할 것이다. 국민 국가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도 다시 한번 ‘지구 질서의 정치’가 실체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과 기득권 세력이 세계적인 정치체제와 경제운용 체제를 장악하여 자신들의 이윤창출에 이용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 대항세력이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네트워크와 정치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여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가 무엇이냐의 관점에 따라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가 사회구조 내에서 파생하는 이익집단간의 갈등을 수렴하여 조정하고 해결하는 구조라면 세계정치체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자본가들과 기득권 세력들은 이미 전세계적인 네트워크와 새스템을 구축한 만큼 이와 갈등관계를 일으킬 수 밖에 없는 노동자, 농민, 시민사회단체, 빈민과 서민, 각종 이해집단들 역시 세계적인 네트워크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며, 이를 위한 일국 내지 세계적인 차원의 정치적인 노력과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현재 수준으로 보면 이 과정이 오랜 노력과 시간이 투여될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내가 보기에 저자의 분석과 대안에 대해서 비판적인 부분은 두 세가지다. 하나는 저자가 자본주의 구조개혁의 전략으로 제시하는 '생산수단의 소유와 경영'의 개혁이 의미하는 바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지난 1970~80년대 유럽을 돌아보면 영국은 그렇다 하더라도 프랑스와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어느정도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성 문제나 정부부채, 실업과 양극화 문제가 다시 불거졌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들이 국유화나 사회화를 늘린다고 해결될 수 있을까? 두번째는 생활경제 정치를 통한 대중운동 활성화에 대한 저자의 관점에 대한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다분히 대중운동이나 민중자치를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경제규모의 규모나 사회의 복잡성, 대량생산과 무역체제, 다양한 이익간의 갈등을 고려하면 오히려 민중자치의 객관적인 조건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문제도 있다. 민중자치만을 생각하면 구모를 줄이고 정치경제을 분산시키는 것이 최적의 방법이 아닐까? 마지막은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국민국가 내의 갈등을 너무 '진영 논리'로 쉽게 가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신자유주의는 정치의 박해(?)를 받아 사라질 수도 있고 박해를 극복하고 다른 방식으로 부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의 특성상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적절한 대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다른 가면을 쓰고 반드시 부활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는 일국 내에서든 지구적 차원이든 투기자본에 대한 규제에서부터 화폐경제나 통화체제, 공정거래와 무역체제, 제3세계의 양극화 문제, 기술관료의 문제, 일국 내 민주주의의 문제 등이 함께 검토되고 대안이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2012년 3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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