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개조론 - 유명 학원 강사 출신 현직 교사의 명쾌한 교육 해법
이기정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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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나라의 학부모들은 사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사교육이 정말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아이들을 학원에라도 보내지 않으면 아이들이 뒤쳐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학원에 가지 않으면 아이들이 동네에서 함께 지낼 친구들이 없어서. 학교가 아이들을 잘 가르치지 못해서. 아이들이 집에서 놀고 오락만 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학원에 보내는 것으로 부모로서 아이들에 대한 의무감을 다했다고 생각해서. 부모 모두가 직장에 다니는 관계로 하교 후 아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어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사교육을 받기 때문애 자신의 아이가 뒤쳐질까봐 무서워서..

학원에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들은 여기에 적힌 이유 중에서 적어도 한 두가지 이상에 해당할 것이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아이들이 사교육에(사교육, 공교육을 포함해 절대적인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많은 시간을 투자할수록 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뿐 아니라 상식적으로, 경험적으로 생각해봐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사교육에 보내는 이유를 연결해보면 그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공교육에 대한, 학교에 대한 불신이다. 학교가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 안심하고 아이들을 학교에게, 선생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 끊임없이 바뀌는 입시제도에 대한 불신과 불안, 아이들의 권리와 이익보다 교육관료들과 교사들의 권리나 이익에 더 민감하다는 불만, 참교육이 아니라 시험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학교에 대한 불신, 아이들을 동등하고 평등하게 대하지 않고 무한경쟁과 불평등한 관리로 인해 아이들이 학교에서 상처받고 있다는 불신 등이 내재되어 있다. 이런 불안과 불신, 불만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닐 것이다.  부모들 스스로의 경험에 의해, 그리고 주변 지인들의 경험에 의해 생겨나고 증폭되고 굳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학교에서는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길래 이런 정도까지 학부모들에게 불신을 받고 있는지 참으로 답답하다. 보통 학부모들이 학교 내의 현실과 상황을 알기는 불가능하다. 아이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듣는 것으로, 그리고 간할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사들과의 만남이나 행사 또는 연구수업에 참여해서 학교의 본 모습을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아마도 학부모 운영위원을 맡는다고 하여 자세하게 알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부모들끼리 모여 추측하고 토론한다고 하여 학교실정을 제대로 알 수도 없다. 나 역시 여러번 학교 행사나 모임에 참석했지만 그런건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학교의 실상, 교사들의 모습, 교육체계와 시스템, 제도와 운영방식 등을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친구 하나가 있다. 오래 알고 지내는 친구 중 드물게 그 찬구는 지금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 그 친구는 지금껏 내가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 중 겸손, 성실, 정직, 헌신, 배려 등 다양한 부분에서 최고점을 줄 수 있는 드문 경우다. 그 친구는 진로에 대해 오랜 고민 끝에 교직을 선택한 친구였다. 내가 정신이 없고 정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친구와 자주 통화를 할 수는 없지만, 가끔 통화할 때마다 자주 듣는 이야기는 "학교의 사무행정 업무를 처리하느라 야근을 하고 있다."였다. 그래서 그친구는 저녁 모임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

교육과 교직에 대한 친구의 헌신과 노력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교육당국과 학교의 현실은 교사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서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이 땅의 미래에 크게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답답하고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인적자원부가 더 이상 교육현장과 아이들을 망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전달되지 않을테지만...

저자는 현재 우리나라 교육현장의 문제점을 '학교의 무능'이라는 한마디로 정의한다. 책의 마지막 단락에는 학교가 무능함을 넘어 정말이지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음을 속속들이 애기해준다. 나를 비롯한 대다수 학부모들이 겉치레와 형식이 지배하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보충수업, 머리카락 길이 단속, 수업지도안, 봉사활동, 수업진도표, 부장회의, 시범학교, 연구수업 등에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학교의 무능함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첫째, 교사들이 수업을 아무리 잘해도 보상이 없다. 둘째, 수업을 아무리 못해도 불이익이 없다. 셋째, 학교 제도가 극도로 비효율적이다. 이들 문제는 교육제도와 행정시스템에서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와 시스템은 학교 현장에서 '교육'이 아닌 사무행정이 중심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능력과 의지를 평가하지 않는 시스템, 사무행정으로 교사와 학교의 자질을 평가하는 시스템이 제도화되어 있는 이상 개인적인 의지나 한신성과 관계없이 교사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등한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무능한 학교를 개혁(개조)하기 위한 처방으로 교원평가제, 교육과 사무행정의 분리, 그리고 교장선출제를 제시한다. ‘교원평가제’는 수업을 중심으로, 학생이 교사를 직접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사무 행정 능력으로 교사들을 평가하는 기존의 교원 평가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자는 의미다. 교사는 수업 및 교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교육과 거리가 먼 사무 행정은 전담 인력을 따로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 ‘교육과 사무 행정의 분리’다. ‘교장선출제’는 선거나 교황 선출 방식, 추첨제 등을 활용하여 교사들이 능력 있고 훌륭한 사람을 교장으로 뽑는 방식이다. 

 

저자의 교육 개혁 방안 중 가장 철저하게 요구되는 것이 교원평가제다. 기존의 근무평정 방식과 달리 저자가 주장하는 교원평가제의 대상은 철저하게 수업 또는 직접적인 교육 활동이며, 평가의 중심 주체는 학생이다. 저자는 교원평가를 바탕으로 학생을 성추행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교사, 수업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교사는 교사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원 평가가 구조 조정을 초래한다는 전교조의 주장에 대해, 저자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일축한다. 

교장선출제와 관련하여 교장이 되기 위해서는 두 번의 타락을 거쳐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수업과 교육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한 번, 비열한 경쟁 과정에서 또 한 번. 교장이 되는 데 필요한 승진 점수 중 가장 비중이 큰 근무평정 점수는 교사의 교육 능력보다 사무 행정 능력이나 교감·교장의 평가에 따라 매겨지기 때문에, 교장이 되려는 사람은 일찌감치 수업이나 교육과는 담을 쌓고 근무평정 점수 올리기에만 골몰한다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교사들이 교장을 직접 뽑는 선거, 교황을 선출하는 식으로 후보자 없이 교사들이 덕망 있고 능력 있는 교사에게 표를 던지는 방식, 선거+추첨, 교황 선출 방식+추천 등을 제안한다. 이 방법들은 로비와 청탁이 동원되는 기존의 교장 임용 방식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다. 

전교조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약간 충격적이었다. 교육문제의 심각함에 비해 전교조의 활동 성과가 부진한 것에 내심 걱정하는 상태였다. 개인적으로 나 역시 전교조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지만 전교조에 대한 저자의 분석과 평가에 대부분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그동안의 전교조 투쟁을 풍차와 싸우는 돈키호테에 비유한다. 7차 교육과정 반대, 중등교사자격증 소지자의 초등학교 교사 임용 반대, NEIS 반대, 교원평가제 반대 등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구조 조정이 교사들의 목을 자를 것이라는 헛된 위기감에서 나온 ‘7차 교육과정 반대 투쟁’의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전교조의 지난 투쟁은 학생보다 교사의 입장을 고려한 측면이 더 많지 않냐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전교조에 대한 비판은 역설적으로 전교조에 거는 저자의 기대 수준을 말해주기도 한다. 학교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주체는 정부도, 교육부도, 교총도 아닌 전교조라는 생각이 여기에 깔려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교원평가제, 사무행정업무의 분리, 교장선출제를 중심으로 개혁하면 학교가 정말 개조될 수 있는지 내가 장담할 수는 없다. 내가 교육과 학교 문제에 대한 정보와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주변에 교사로 재직 중인 지인과 이 문제에 대해 한 번도 깊은 이야기를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직 교사로서 저자가 제기한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세 가지 개혁방법이 핵심에 가까운 정답이라 할지라도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누가, 어떻게'라 할 수 있다. 세 가지 방법은 모두 법과 제도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정권과 교육당국, 그리고 국회가 모두 동의하고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내에 기존 교육제도와 시스템에서 이득을 얻는 기득권 집단이 상당히 존재하고 수구언론과 정치집단이 '문제해결'의 관점이 아니라 '진영논리'의 관점에서 대응하는 이상 쉽지 않은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점의 결국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학생(학부모)와 교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현재 우리의 아이들을 얽매고 있는 교육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누구의 잘잘못만을 따지며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른들의 역심과 무책임, 무관심 속에서 하루하루 아이들은 고통받고 있다. 우리 아이들의 문제는 교사 뿐 만 아니라 정치권, 정부, 언론, 시민단체, 그리고 직접 당사자인 학보무들까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학부모들의 불안감과 불신, 교사들의 어려움과 한계에 대해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공감에서 시작하여 관심, 대화, 소통이 이루어지고 사회 각 분야에서 연대와 지원,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시민단체와 정치권으로 의견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 2012년 4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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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사교육에 속고 있다 - 대치동 입시전문가, 대한민국 사교육 신화를 뒤집다
박재원.정수현 지음 / 스쿨라움(김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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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은 정말 아이들의 성적을 올려줄까?

이 책을 통해 대치동 입시전문가인 저자는 우리나라 사교육의 신화를 뒤집는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언론과 잡지, 인터넷 등을 통해 부모의 경제력과 학력, 사교육이 아이의 성적을 좌우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한국 사교육의 최고 수혜지역인 대치동 한복판에서 아이들과 부딪치며 목격한 수많은 실패 사례를 통해 '대치동 신화'의 베일을 벗겨내고 있다.
실제로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면 저자의 결론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도 있다. 내 주변의 경우에도 부모가 서울대 등 유수의 대학을 나왔다 하더라도, 부모의 재산이 상위 클래스에 속하더라도, 오랜 기간 사교육을 받는다 하더라도 성적이 크게 나아지지 않는 경우가 많고 서울지역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

왜 그럴까? 저자는 그 이유가 사교육 기관들의 과잉 홍보와 이에 편승하는 언론집단, 개별 사례에 대한 과도한 소문, 학부모들의 집단 무의식이 합쳐저 만들어진 '집단 착시'라고 지적한다. 사교육에서 성적 상승의 효과를 보는 학생들은 사교육 기관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공부하는 학생들이고 그런 학생들은 장기간이 아니라 단기간만 자신이 필요한 학습내용을 얻은 후 사교육을 떠나 다시 자신의 독자적인 공부방식으로 돌아간다.
저자는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내용을 체화하려면 자신만의 공부시간이 반드시 필요함을 지적한다. 다시 말하면 방과후 학교나 학원, 숙제로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학생들은 스스로 복습하고 공부를 심화시키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공부시간 대비 성적 향상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두뇌과학과 사례분석을 통해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외부인의 간섭이나 공부시간에 따른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안정감과 정서적인 충족감이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실제 핀란드의 학습방법, 미국의 '슈퍼캠프', 영국의 가속학습법, 기적의 두뇌학습법 등의 사례는 저자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이는 가족의 유대감, 부모의 무한한 신뢰, 진솔한 대화야말로 학생들이 혼자 공부하는 힘을 길러줄 수 있고 공부의 효율을 높여줄 수 있으며 성적을 높일 수 있는 지름길임을 알 수 있다.

저자의 결론은 사교육은 아이들의 공부를 위한 중요도에서 가장 후순위가 되어야 하며 공부는 '양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고 정서적인 유대감과 신뢰야말로 자율적인 공부를 통해 학생들의 성적향상과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이들의 학교 성적이 그 아이의 미래와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아이의 미래와 행복'이 어떤 것이냐에 대한 개념 규정에 따라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개념이 비슷하더라도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사'자 직업을 갖는 것 자체가 미래와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딸 아이가 서너살일 때, 아이 엄마의 친구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학교가기 싫다고 떼를 쓰면 어떻게 할거냐?"라고 물어보았을 때 당연하다는 듯이 "안보낼거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무조건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부모의 잘못이고 학교의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행복할 권리가 있고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 그 자체로 인격체이고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와 사회, 국가는 아이가 자연스럽고 행복하게 자라나도록 옆에서 도와주고 지켜주는 존재이어야 한다. 아이들은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따라서 아이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최소한의 의식주를 부모와 사회, 국가가 책임져 주어야 하고 안정되고 사랑스러운 환경 속에서 스스로의 선택과 호기심 속에서 자연과 사회에서 깨닫고 배우고 놀고 즐겨야 한다.
그러한 아이들의 권리를 방해하고 침해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그것이 부모든, 사회든, 학교든, 국가든...

현대사회의 국가제도에서 아이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장하면 국가제도에 따라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반드시 아이들을 초등학교에 보내야 하는 강제적인 의무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적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그러한 국가제도를 거부한 이후 아이에게 힘든 과정을 겪게하고서 더 나은 기간을 보내게해줄 자신이 없기 때문에 제도에 순순히 응하는 것일 뿐이다.
아무튼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시작되는 '공부'와 '학교생활' 역시 역시 아이가 스스로의 호기심과 재미와 즐거움 속에서 보내게 하고 싶다.

내가 아이의 학창시절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알아본 적은 없다. 그냥 평소의 내 주관과 생각과 판단으로 대처했을 뿐이다. 그것은 아이가 안정되고 사랑스러운 가정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학교에 다니고 성적과 공부에 스트레스 받지 않고 즐겁게 하루하루 보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해가 거듭할수록 걱정이 앞서기는 하다. 하교 시간이 끝난 후 아이들이 학원과 과외로 동네에서 함께 놀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것, 경쟁적인 면학 분위기에 휩쓸려 엄마들이 긴장하는 모습, 공교육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모습이 실제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 엄마는 3학년 때부터 또래 아이들의 평균 이상으로 딸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개인적으로 아이의 공부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그 나이 때에 누구나 하는 공부에서 성적을 올리는 것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나는 그 공부와 성적이 오로지 아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그리고 재미를 가지면서 나타나기를 원한다. 공부와 성적 만큼이나 친구들과 놀이를 즐기고 호기심이 동하는 자연과 문화생활을 만끽하고 건강하게 지내기를 원한다.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지 않거나 대기업이나 공사, '사'자 직업이 없어도 상관없다.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고 자신감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자연과 사회와 역사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자비심과 자립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닥치거나 주어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교육에 대한 서적을 찾는 중에 '사교육'에 대해 이야기한 책으로 고른 것이다. 저자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알려진 대치동에서 학원강사 경험을 했고 교육 전반과 사교육에 대해 오랜 기간 연구한 흔적이 엿보였기 때문에 골랐다. <핀란드 교실혁명>과 <핀란드 부모혁명>을 번역, 발간한 저자인 것도 이유였다.

사교육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공부와 성적향상을 위해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일지는 모르지만, 역으로 사교육은 아이들에게 큰 스트레스를 줄 수 있고 아이들이 공부에 질리게 만드는 가장 위험한 '방법'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진정 생각하는 부모라면,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과 행복에 대한 부모들 스스로가 이에 대해 관심을 갖고 먼저 공부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의 공부와 성적만을 생각하는 부모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학부모가 쉽게 선택한 사교육과 학원이 오히려 아이들의 공부에 대한 관심과 자신감을 빼앗는 것이라면, 자율적인 공부방식과 자신감을 빼앗는 것이라면, 공부시간와 쉬면서 심화하는 시간을 빼앗는 것이라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 2012년 4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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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6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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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때론 자주 나는 서구사회, 그 중에서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을 부러워한다. 물론 나는 그들 국가의 역사와 사회,정치,경제체제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누가 뭐라해도 그들 국가는 시민과 민중의 힘으로 봉건 왕조를 무너뜨리고 기본적인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웠다. 자본주의 초창기 지옥같은 양극화와 빈곤을 사회민주주의적인 정당으로 집결한 유권자의 힘으로 돌려놓았다. 그들 국가에서는 한국인들이 부러워할 만한 수준으로 기초적인 민주적 정치체제와 복지국가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런 바탕에는 서구사회에 퍼져있는 르네상스 정신과 철학적, 문화적인 요인이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서구사회, 특히 서유럽 국가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과 파괴, 학살, 착취를 저질러온 나라들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중세암흑시대에 수많은 이들을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으로 학살했고 제1,2차 세계대전으로 천만명 이상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신대륙을 개척한다는 허울아래 또 수 백만명의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 민중을 학살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서유럽의 잔혹함은 미국이라는 사생아에게 전이되어 이제는 미국을 증심으로 지구상의 '악의 축'을 구성하고 있다.
작년에 일어난 아랍의 민주혁명과 그 진행과정을 곰곰히 바라보면, 그들은 21세기인 지금에도 여전히 또 다른 이념과 명분으로 약소국들을 착취하고 학살하고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서구사회의 도덕과 철학, 합리주의와 이성이 어떻게 제3세계 민중을 살해하고 착취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역으로 제3세계 민중이 어떻게 스스로의 생존과 권리를 찾을 수 있는지 말해준다. 파농이 처음 이 책을 발간한 때는 1961년 프랑스에서 였다. 프랑스다. 초판 출간 당시 사르트르가 서문을 썼음에도 이 책이 '판매금지' 도서였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이 책은 상당히 많은 곳에서 재인용되고 있다. 프란츠 파농이라는 저자의 이름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라는 책에 대해서는 일찍 알고 있었지만, 내가 처음 이 책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서경식씨의 에세이 <소년의 눈물>(2004. 돌베개)에서 아래 문장을 발견하였을 때였다.

"하나의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만일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 양이면, 차라리 그 다리는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p.226) 

이 문장은 작년부터(지금도) 내내 내 머리와 가슴 속을 맴도는 화두였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를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보편적 복지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또는 총선과 대선을 치루는 과정에서 그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얻지 못하면 그 과정에 차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식민지인'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라는 문제의식이다.

50년도 더 지나 저 멀리 아프리카 북부의 알제리 이야기를 다룬 이 책을 내가 왜 읽고 싶었을까? 사르트르는 “제3세계가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자신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도 파농을 통해서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또 한국을 비롯해 독립과 자립에 목말라했던 많은 제3세계 국가의 지식인들이 파농의 이 책 속에서 그들 투쟁의 정당성을 찾았다지만, 지금 더이상 식민지는 존재하지 않고, 제3세계란 말이 낡은 냄새를 피우고,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말도 식상해진 21세기에, 새삼 이 책을 새로운 서문과 후기까지 붙여 다시 출간한 의도는 무엇일까?

알리스 셰르키는 2002년판 이 책의 서문에서 그 대답을 들려준다. “인간이란 존재가 민족의식 및 정체성의 위축과 폭력이 지배하는 상실의 시대에서 살아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을 읽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파농의 책은 제국주의 국가에 강제 병합된 ‘식민지 국가의 민중’뿐 아니라 노예화된 삶을 사는 개인의 해방 즉 ‘존재의 탈식민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파농은 국가와 민족과 개인의 ‘탈식민화’를 누구보다 먼저 분석해낸 인물이며,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후반 ‘기지촌 지식인’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던 ‘탈식민주의’ 비평 혹은 논쟁의 원점이 되는 인물이다. 
파농이 살았던 20세기 초중반의 식민화는 경찰과 군대 등 무력을 앞세운 제국주의 국가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다른 민족이나 국가를 ‘근대화하고 문명화한다’는 명목 아래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형태로 나타났지만, 오늘날 이른바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식민화는 거대 다국적 기업과 금융자본, 미국의 문화산업이 생산하는 정보의 주도하에 전세계 민중들의 물질적 재생산과 정신의 영역이 지구적 자본주의 논리에 완전히 흡수되어 자신의 문화와 전통,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그에 맞추지 않을 수 없게 된 경제적·문화적 지배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전지구적 경제·문화의 지배자는, 파농이 말했듯 “2세기 전 유럽의 식민지는 유럽을 따라잡기로 마음먹었다. 그 시도가 성공을 거두어 나타난 유럽의 오점, 병, 비인간성을 엄청나게 증폭시킨 괴물”, 미국이다.
유럽의 오점과 비인간성이 증폭된 괴물은 전지구의 민중을 사물로 전락시켰다. 그들은 더이상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오늘 FDA(미국식품의약국)의 마크는 우리 건강의 보증이며, 영어―파농의 표현에 따르면 [식민지]모국(母國) 언어―구사 능력은 한국어 구사 능력보다 중요하고, 무디스의 평가가 우리 경제 상황을 대표한다.

이렇게 “정체성이 위축되고 폭력이 지배하는 상실의 시대” 즉 ‘식민화의 시대’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식민지 원주민은 사물로 전락하거나 동물적인 상태에 떨어지고, ‘악의 화신’으로 간주된다. 원주민, 즉 피억압자는 늘 이주민(억압자)에 의해 열등하게 취급되지만, 그 자신의 열등함을 진심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주민이 경계를 풀 때까지 기다리느라 그의 근육은 늘 긴장 상태이며, 이런 긴장은 이따금 유혈적인 폭발로 배출된다. 부족 전쟁, 씨족 갈등, 개인들 간의 다툼이 그런 예이다. “이주민이나 경찰은 언제나 원주민에게 매질을 하고 모욕을 가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원주민이 품 속의 칼을 빼는 것은 다른 원주민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적대적인 행동을 하거나 공격적인 눈길을 보냈을 경우다. 원주민에게 최후의 수단은 형제를 상대로 자신의 인격을 방어하는 것이다.”(p.75)

우리가 진정 식민화된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파농의 탈식민화 과정에 대한 분석도 참고해야겠지만,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파농의 외침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뭔가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오늘 우리는 미국을 모방하지 않는다면, 미국을 따라잡으려는 욕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미국은 지금 무모한 광기에 휩싸여 모든 지침과 이성을 팽개친 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최대한 빨리 멀어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모델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우리는 청사진과 본보기를 원한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미국이 가장 본받을 만한 모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런 모방이 가져다준 가슴 아픈 좌절을 살펴본 바 있다. 미국의 성과, 미국의 기술, 미국의 양식은 더이상 우리를 유혹하지 못한다. 미국의 기술과 양식에서 인간을 찾으려 하면, 오직 끊임없는 인간의 부정과 잔혹한 살인만을 보게 될 것이다. 인간의 조건, 인류를 위한 계획, 인간성을 증대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일은 진정한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문제들이다. 미국을 흉내내지 말자. 우리의 근육과 두뇌를 모아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자. 미국이 낳을 수 없는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자.”(p.354)

결국 진정한 탈식민화는 새로운 모델을 창조하는 것이며, 그 일은 지배적 현실에 대한 비판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 비판은 “식민지 지배질서에 대한 비판이자, 그것에 길들여진 정신적으로 노예화된 자신에 대한 비판의 동시적 진행”(김동춘, 앞의글)이다. 과거에 파농의 알제리와 같은 물리적 식민화의 세계에 살았고, 오늘은 정신적·경제적 식민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불행히도 두 개의 모국을 지닌 식민지의 원주민들이다. 한 모국(일본)에서는 물리적 강압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아직도 그 그림자는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으며, 또 한 모국(미국)에는 경제적·군사적·정신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 따라서 우리가 이제 진정한 탈식민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재는 물론 과거의 ‘식민지 지배질서에 대한 비판’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미완성된 과거의 탈식민화를 완성할 때 현재의 탈식민화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며, 그 탈식민화의 자리에서 파농의 말처럼 “미국이 낳을 수 없는 완전한 인간”이 되어 서 있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내가 아직 국어 독해력이 많이 모자라는 것인지, 아니면 번역이 잘못된 것인지 책을 읽는 내내 진도를 나가기가 어려웠다...ㅠ
 
[ 2012년 4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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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부모혁명 - 부모와 아이가 행복해지는 대한민국 가정 희망 프로젝트 핀란드 교육 시리즈 3
박재원.구해진 지음 / 비아북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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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주어진 것이 없어도 즐겁고 신나기만 했던 우리세대의 어린시절보다 더 많은 물질과 조건을 갖춘 지금의 우리 아이들의 현실은 참 고달프다. 부모가 아이의 숙제를 대신 해주고 학용품을 챙겨주고 학원과 학습지를 알아보고 친구들 관계까지 거들어주면 아이들이 스스로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학원에, 과외에, 학습지에, 방과 후 수업에, 온갖 박물관과 실습장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연극과 뮤지컬에, 엄마의 감시까지 이어지면 아이들이 스스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아이들의 경우 숙제도, 공부도, 실습도, 생활도 엄마들과 선생들의 지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심지어 놀이와 오락, 봉사활동의 경우에도 엄마들이 대신 해결해주는 경우가 많다. "너희들은 공부만 하면 된다"라는 생각도 제법 많은 학부모들이 하는 편인데 과연 아이들의 인생이 '공부'만 해서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지 이해하기 어렵다. 
 
가끔 저녁에 동기들, 후배들을 만나면 남자들의 경우 아이들의 성적 이외에 아이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여자들의 경우 아이들이 학원에 제대로 갔는지, 숙제는 했는지 감시하느라 바쁘다. 대체적인 관심은 아이들의 성적이고 상급학교 진학이다. 아빠들은 자신들 스스로의 직장생활, 사업으로 고단하고 정치,경제,사회 이야기에 관심을 쏟고 그나마 엄마들이 아이들의 성장과 교육에 관심이 많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치 아빠들이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마디로 아빠들은 무관심, 엄마들은 초관심이다. 무관심도 문제고 초관심도 문제일텐데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까 걱정이다.
 
공부 스트레스가 만연한 아이들의 현실. 자살을 한 번쯤 생각한 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은 우리의 현실. 실제로 무수한 아이들이 자살하는 한국의 현실. 왕따와 학교폭력이 사회문제로 공론화되는 현실. 사교육이 공교육보다 넘쳐남에도 전반적인 아이들의 성장은 지체되는 현실. 어린 아이들까지 성적순으로 줄세우는 현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교육당국과 학교가 문제일까? 당연히 1차적인 책임은 교육당국과 학교에 있다. 한 달 전에 읽었던 저자의 <핀란드 교실혁명>은 교육당국이 아이들을 위해 해야할 일과 교육당국과 관계없이 학교에서 교장과 교사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 대해 말해주었다. 교육당국 뿐 아니라 행정부와 정치권, 언론, 학계 모두가 공범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학부모 역시 그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0대의 아이들과 학부모들 사이에서 진실한 대화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것은 그 부모의 착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자살하거나 학교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의 부모는 "왜 우리 아이가 그렇게 되었나?"라고 의아해할 수 밖에 없다.
 
OECD 57개국 중 한국 아이들의 학력은 최고 수준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수치를 노골적으로 자랑하며 부모들을 자극한다. 오바마 미국대통령이 '대한민국 학부모의 대단한 교육열'을 부러워했다는 보도로 아이들을 사교육 시장으로 내모는 부모들의 결정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공부 효율성, 아이들의 행복지수는 세계 최저 수준이다. 결과만 중요시하고 과정은 소홀히 하는 왜곡된 기준이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마주치는 우리 아이들의 창백한 얼굴과 축 늘어뜨린 어깨가 그 어떤 수치보다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잘 대변한다. 특목고, 명문대를 목표로 한 성적 중심의 교육 아래서는 부모나 아이 모두 불행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입시제도를 무조건 쫓아가다가는 부모나 아이 모두 방향성을 잃고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위험도 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자녀의 교육문제에 대한 거의 모든 결정권을 부모가 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핀란드에서는 세 살짜리 아이가 자기 나이에 해당하는 셋까지만 헤아릴 줄 알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부모들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한글 교육, 영어 교육 등 조기교육을 강행한다. 학교에 진학하면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학교 수업, 선행 학습 등에 쫓겨 다니느라 잠잘 시간조차 없는 안타까운 상황을 목격하며 안타까워하면서도 부모들은 "어쩔 수 없다"며 외면한다.
그러나 저자는 "핀란드를 알면 알수록 공부와 행복은 비례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우리 아이들도 즐겁게 공부할 수 없을까? 그가 핀란드 교육에 관심을 두게 된 문제의식이다. "배우는 일은 스스로의 몫이지 남과 경쟁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경쟁이라는 틀에 갇혀 아이들을 학교로 몰아넣고는 친구들을 다 뛰어넘어 선두로 나아가라고 채찍질한다. 이러니 공부가 재밌을 리 없고, 한창 꿈을 키우며 행복해야 할 시기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다. 예민해지고 무기력해진 아이들과 부딪쳐야 하는 부모들도 같이 불행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한다"며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를 밝혔다.
학교도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지 못하고, 사회는 아이들을 소비 주체로만 바라보며 사교육을 부추기는 가운데 아이들이 마음 편히 기대 쉴 데라고는 오직 부모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부모 역할이 중요해진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서부터 지친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정서적 안정까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모든 부모에게 내려진 과제다.
저자는 경쟁 없이 즐겁게 공부하면서도 세계 최고의 학력과 공부 효율성을 자랑하는 핀란드를 통해 우리의 교육문제가 처한 문제적 상황을 점검하고, 가정에서 적용 가능한 현실적인 방법을 정리하고자 했다.
  
왜 대한민국 부모와 아이들은 불행할까? 너나없이 '강요된' 성공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내재된 잠재력이 있고,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타고난 자질을 다 무시하고 하나 같이 명문대에 진학하여 의사, 변호사 같은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자녀들이 사회생활을 할 10년 뒤의 미래를 과연 부모가 제대로 예측할 수 있을까. 부모들의 정보력이라고 해봤자 고작 직간접적 경험과 소문,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 수준이다. 그럼에도 "넌 공부만 해. 다른 건 엄마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라며 '능력 있는 매니저'로 살기를 자처한다. 그것만이 자녀가 당장도 훗날도 성공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부모 역시 한 치 앞을 예상하지 못하는 미래와 직면해서는 무기력하고 불안할 뿐이다. 이런 부모에게 인생의 소중한 시기를 전적으로 위임하며 사는 아이들의 미래가 어떠할지를 짐작하면, 불안을 넘어 암담할 지경이다.
국제학업성취도 1위를 놓치지 않는 핀란드를 비롯하여 교육선진국들이 당면 과제로 고민하는 문제는 어떻게 아이들에게 문제해결능력을 가르칠 것인가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어떤 문제에 직면하더라도 현명하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문제해결능력만 갖춘다면 미래의 불안도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방법을 고민하여 실천에 옮길 수 있을 때 공부도 즐길 줄 알고, 나아가 자신의 삶을 책임질 줄 아는 성숙한 사람으로 성공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핀란드 부모들은 아이들의 문제해결능력 향상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경험을 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애쓴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직접 만드는 법을 가르치거나 숲에서 버섯, 베리 등을 채취하여 요리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문제해결능력 방법의 하나다. 가족 간에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면 가족회의를 통해 해결책을 찾고, 인생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라 할 책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독서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 쓴다. 이처럼 가정에서 실천할 수 있는 대안적 자녀교육법은 결코 거창하지 않다. 조금만 신경 쓰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다.

다만 직접체험을 강조하는 진로 지도는 많이 낯설었고, 동시에 우리가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하기에 충분했다. 핀란드는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가 일하는 현장을 방문하고, 중학교 3학년이 되면 직접 자기가 일하고 싶은 직장을 찾아가 실무 경험을 쌓게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의 자신의 적성과 진로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가장 행복해할 일을 찾아 부모의 결정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미래를 디자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전 세계가 인정하는 핀란드의 가정교육의 전제는 우리 부모가 간과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짚어준다. 첫째, 모든 사람은 잠재력을 타고난다. 둘째, 아이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할 기술이 있을 뿐이다. 셋째, 아이의 잠재력을 믿고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넷째, 아이가 실천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줘야 한다. 국제학업성취도 1위, 세계 학습 효율성 1위 등 핀란드의 교육 경쟁력은 이처럼 아이의 타고난 학습 프로그램을 잘 살려 최대한 발휘하도록 지원한 결과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남의 집 아이와 비교하고, 성적과 입시 위주의 공부를 강요하는 것과는 참 다르다. 위스콘신 의과대학의 대럴드 트레퍼트 교수의 지적은 자녀의 장점보다 단점을 더 예민하게 바라보며 언어 폭력을 행사하는 우리 부모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일깨운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존감을 인정받는다고 느낄 때 타고난 잠재력을 발휘하며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 있다.
우리는 당장의 입시를 위해 아이들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교육 선진국은 미래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창의력, 통합적 사고, 열린 사고, 문제해결능력 등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또 실천한다. PISA 역시 미래사회에 꼭 필요한 핵심 역량으로 응용력, 사고력, 창조성, 실천력을 제시하며, 핀란드의 교육 시스템을 가장 인정하고 주목한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 벼락치기 효과를 경험한 우리 아이들이 장기적 안목으로 '느린' 단계를 견디고 미래형 인간으로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제 부모들의 혁명적 결단이 남았다. 호기심을 자극하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끈기 있게 격려하며, 독서습관을 통해 사고하는 힘을 길러주고, 폭넓고 깊이 있는 경험을 쌓도록 지원해야 한다. 아이가 자존감을 느낄 수 있도록 독립된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아이의 타고난 잠재력을 믿어주며, 크든 작든 아이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교육, 그 결과 부모와 아이가 모두 만족하고 행복한 가정, 이것이 책의 두 저자가 발견한 진정한 핀란드식 자녀교육 철학이었다.
 
한국사회는 미래 세대를 위해 사회 전분야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해야 한다. 교육 문제가 단순히 교육 문제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정치권과 행정부, 사법부, 사회 각 분야에서 오래 걸리더라도, 점진적이라 하더라도 개혁과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성장을 생각보다 무척 빠르다. 10년 정도면 아이들이 부쩍 커버리고 그 10년 동안 아이들이 겪어온 과정이 이후 아이들의 성장과 행복을 결정해 버린다. 수동적인 세계관, 스트레스로 점철된 무의식, 경쟁과 시험의 수렁에 빠져 지낸 10년이 아이들의 성장이나 행복에 평생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왜 부모들은 아이들의 잠재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믿지 못할까.. 그냥 아이들이 재미있게 놀면서 자신의 흥미와 자질을 개발하도록 도와줄 수는 없는 것일까.. 아이들의 생각과 고민을 부모들의 기준에 맞추는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그냥 아이들의 친구로, 대화 상대로, 신뢰와 사랑으로 가득한 행복한 공간으로 가정을 유지할 수는 없는가...
부모들 스스로 나이가 더 들어갈수록 공감과 대화, 사랑과 배려, 나눔과 도움이 행복의 열쇠임을 느끼지 않나?
다행하게도 우리 사회의 학부모들 역시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느낀다. 더 늦기 전에 아이들에게 행복한 교육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의지가 일어나고 있다. 성공 일방향의 교육이 아닌 아이들의 타고난 개성과 적성을 최대한 살려주는 가치 지향의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절박한 수준에 이르렀다. 지난 교육감선거의 결과는 이와 관련하여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 책은 위기 속에 돌파구를 찾는 부모들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부제에서 보듯, 이 책은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와 아이가 행복해지는 대한민국 가정 희망 프로젝트'다.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이 아닌 누구나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하여 인정받는 사회를 지향하며, 그 토대로서 건강한 자녀교육법을 제시한다. 아이들이 즐겁고 행복하게 공부하는 핀란드의 부모들은 어떤 자녀교육관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고 과학적인 근거와 핀란드의 성과를 통해 증명하는 한편, 우리 부모들이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해법과 비전까지 선사한다.
친구, 선후배들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
 
"아이에게 무엇이 결여되었는지를 보지 말고, 무엇이 있는지를 보라. 그러면 아이는 변할 것이다."(위스콘신 의과대학 대럴드 트레퍼트 교수)

 

"인간은 보이는 대로 대접하면 결국 그보다 못한 사람을 만들지만, 잠재력대로 대접하면 그보다 큰 사람이 된다."(괴테)

 
[ 2012년 4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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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 한 오라기의 혁명 - 자연농법 철학
후쿠오카 마사노부 지음, 최성현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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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결국 한미FTA가 발효되었다. 그리고 현 이명박 정권은 3월에 중국과의 FTA도 의욕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한-칠레 FTA나 한-EU FTA 체결 이후 간혹 중소기업 수출이 늘었다거나 칠레의 와인수입이 늘었다는 정부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FTA의 본질은 자본과 금융의 세계적인 거래를 자유화하는 것이고 그것도 거래 상대방 국가와의 '국력' 차이에 의해 불공평하게 체결되는 것이 현실이다. 한미 FTA가 얼마나 불공정, 불공평한지 새삼스럽게 애기할 필요도 없다. FTA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면 일반 시민들은 정부의 홍보논리에 세뇌되어 그냥 넘어갈 뿐이다. 어쩔 것인가... 한국에서 혜택받는 측은 수출하는 재벌기업이고 외국인 투자자일 뿐이다. 노동자, 농민, 서민, 중산층은 여기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을 뿐...

중국산 농산물이 이미 한국인의 식당과 상점을 잠식해있는 상태다. 여기에서 더 빗장을 풀어버리면 그마나 어렵게 생존해 있는 농촌과 농업, 농민은 더이상 갈 곳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먹거리'마저 외국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 소위 '선진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개념있는' 국가가 자국의 '먹거리' 산업과 산업 종사자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데 비해 역대 한국정부는 무심하다 못해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정치인, 관료들의 의식 상태가 무척이나 의심스럽다.
 
농업 경쟁력, 농민의 생산성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어 미래의 후손들에게 불안감과 위기를 가져올 가능성이 큰 정부의 정책들...  그럼에도 엇그제 411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FTA를 무자비하게 밀어붙이고 재벌과 기득권의 이익에 충실한 정당이 국회의 과반수를 차지했다. 54.3%의 낮은 투표율이었지만, 정책이나 공약은 후보 선택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 현 정부의 정책, 여당의 정책, FTA 등에 의해 가장 피해가 크게 발생하는 계층은 농촌과 중산층, 서민일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럼에도 정책이나 공약과 상관없이 농민, 중산층, 서민이 가장 많은 강원도, 충북, 경북, 경남은 여당을 선택했다. 선택의 대가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몇 년간 참혹할 것이다. 다만, 그 유권자들이 제대로 알지 못해서 선택한다는 현실이 암울할 뿐이다. 그래서 유권자를 탓하지 못한다. 잘못된 사실을 전달하지 않는 언론 종사자들이 나쁜 놈들인 것이고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효과적으로 진실과 정책을 유권자에게 알리지 못한 야권과 '깨어있는 시민'들이 부족하고 모자랐을 뿐인걸...
 
 
이 책은 '자연농법'이란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후쿠오카 마사노부씨의 2004년 저작이다. 단순히 어떤 특이한 농법에 관한 숱하게 많은 주장이나 학설들 중의 또 하나가 아니다. 이 책은 자연농, 자연식, 자연인이라는 철학을 역설하고 있는 사상서라 할 수 있다. 자연농법은 자연의 의지와 하나가 되어 이 삼자를 추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늘나라'를 꿈꾸는 혁명이기 때문이다.
법정스님이 사랑한 책, 그분이 추천한 책 목록 21번째다.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흔히 '현대의 노자'라고도 일컬어지는데, 그것은 평생을 외곬으로 무심(無心)과 무위(無爲)를 지향하는 삶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농학자로서 요코하마세관 식물검사과에서 근무하던 젊은 시절의 후쿠오카는, 어느 날 인간의 지식, 과학문명이 모두 허상임을 깨달았다. 그는 "인위의 일체는 무용하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농사법을 통해 검증코자 했다. 그리고 쌀·보리농사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되어있는 땅갈기, 퇴비, 제초제와 농약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훌륭한 수확을 내어 실증함으로써 세상에 자신의 사상을 증명해 보였다.

자연에 순응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보잘것없는 지식(지혜)에 기대 인위적인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후쿠오카는 '방임'과 '자연'을 구별한다. 가령 한번 가지치기를 한 나무는 다음해에도 계속해서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말라 죽어버린다. 이것은 방임이다. 이미 나무(자연)에 교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지혜로 뭔가 잘못된 일을 해놓고서, 그 결과로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열심히 고치는 것, 이것이 현대의 과학농법인 것이다. 게다가 더 나쁜 것은, 과학농법은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궁리해낸 기술도 부분적·한시적일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도리어 더 많은 문제를 배태하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자기파괴적 행위의 결과가 극한에 치닫고 있으므로 자연이란 무엇인가를, 그리고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책이 쓰여진 지 한세대가 지난 지금, 인류가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길'을 방기한 데 대한 우리의 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자연농법은 진실로 엄격한 농법이다. 농부는 자연의 힘을 완전하게 믿고, 그 흐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연은 시시각각 변화하며 서로 다른 조건(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서로서로 미묘하게 영향을 미치면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어제 저곳에서 최상의 조건이었던 것이 오늘 여기서는 최악의 조건일 수 있다.
따라서 농부의 일이란 자연을 섬기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지만, 그러나 충실하게 섬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농업은 신(神)의 시종으로서 신에 봉사하는 역이기 때문에 성스러운 직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본질을 망각한 사람들이 근대농업이라든가 기업농업이라면서 신의 측근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잊어버리고 이익을 앞세우는 현실을 슬퍼한다. 농부의 기쁨은 다만 오늘 하루의 일에 전념해서 씨를 뿌리고, 자연의 활동에 따라서 작물을 애호하면서 작물과 함께 생활해가는 그 자리에 있다. 그것을 음미하는 것이 농부의 생활방식이고, 그것이 진정한 농부의 모습이다.
실은 이것은 보편적 인간 삶에 대한 지침이다. 자연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신의 뜻, 자연의 의지에 따라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복종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완성, 자연인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자연은 인간의 지혜로 온전히 밝힐 수도, 만들어낼 수도 없다. 그에게 있어 자연농법은 영원한 미완성의 길, 구도(求道)의 길이다.
 
내가 직접 한 번도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저자의 '자연농법'에 대해 거의 판단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가 책에 기록한 것처럼 '자연농법'의 성과를 거두었다면 가히 혁명적인 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역시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농사를 짓는가?"라 할 수 있는 것 같다.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처럼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무한 성장을 위해, 무한 소유를 위하게 되면 그것이 농업이든, 제조업이든, 금융업이든, 무역업이든, 서비스업이든 비슷한 경제구조와 비슷한 사회문화구조, 그리고 자연과 환경의 파괴, 인간성과 공동체의 파괴를 야기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 2012년 4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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