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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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미하엘 엔데(Michael Andreas Helmuth Ende) 저, 한미희 역 < 모모 MOMO >를 읽고 / 1999. 02., 368쪽, 비룡소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Michael Ende)가 1973년 집필한 흥미진진한 동화로 한국에서도 이미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소설이다.
 
독일 어느 마을 원형극장 유적지에 말라깽이 소녀 모모가 살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에게는 타인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외롭거나 우울할 때, 혹은 삶에 지쳐 피곤할 때, 그녀에게 달려와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는다. 모모에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앞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얻곤 했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과 모모 앞에 아주 강력한 적들이 등장한다. 바로 시간도둑들이다. 그들은 효율적인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설교하러 다니는 자본주의적 삶의 가치의 전도사들이다.
 
잠시 모모가 마을을 비운 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시간도둑들에게 설득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적'으로 성공(?)했다. 유명한 인물이 되고 바쁘게 돈을 벌고 있으며 또는 고립되어 노예처럼 하루하루 살아간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모모를 찾아오지 않는다. 더 이상 그들에게는 모모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시간관념을 주입시키면서 시간도둑들이 그들에게서 모모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마저 훔쳐간 것이다. 시간을 합리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시간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살아가면서 향유하는 시간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소비되는 시간 관념이 그들 마음에 똬리를 틀었기 때문이다.
 
비록 동화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 작품이 우리 가슴 한 부분을 서늘하게 만드는 이유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우리는 자신이야말로 시간도둑에게서 시간을 빼앗긴 마을 사람들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니까 말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며 사랑하는가에 따라 시간의길이와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누구나 느끼듯이...
 
이렇게 작가는 도둑맞은 시간, 혹은 강탈당한 시간을 성찰해볼 수 있는 자리로 우리를 안내한다. 사실 시간의 비밀을 알려면 원시시대로 돌아가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원시인들에게는 동물을 사냥하거나 과실을 채집하는 시간과 사냥한 것을 가족이나 부족과 나누며 향유하는 시간이 있다. 전자가 ‘노동하는 시간’이라면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사랑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동굴에 벽화를 그리고 축제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원시적이고 고단한 삶을 영위했지만 그들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이다. 행복이란 가급적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 인생 전체 시간에서 사랑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물론 사랑하는 시간을 위해 완전히 노동하는 시간을 제거할 수는 없다. 어떻게 배가 고픈 사람이 어떻게 타인과 사랑을 나누며, 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행복에 대한 원시인의 ‘오래된 미래’에서 우리는 진보의 잣대 한 가지를 얻게 된다. 노동하는 시간이 줄어 상대적으로 사랑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면, 그 사회는 과거보다 진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랑하는 자본주의 사회, 선진사회는 과거 사회보다 더 진보한 사회인가?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서 사회 성원들에게 사랑하는 시간을 더 많이 허용하는 좋은 사회인가라는 물음에 다름 아니다.

과거 농경사회를 떠올려보자. 남루해 보이는 이 시절에도 사람들은 노동하는 시간만큼 사랑하는 시간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동하는 시간, 즉 농번기만큼이나 노동에서 면제되는 사랑하는 시간이 넘치도록 충만했다. 바로 농한기이다. 겨울 동안 아이들이나 친구들과 토끼 사냥이나 꿩 사냥을 떠나는 농부의 행복한 얼굴을 떠올려보라.
물론 우리 시대 시간도둑들은 당시 농경시대의 낮은 GDP를 내걸며 그때가 불행한 사회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농경시대 경제난을 상징하는 보릿고개가 사라졌다고, 그래서 지금 자본주의 사회가 더 진보한 사회라고 설레발을 칠 것이다. 항상 시간도둑들은 이런 식이다. 인간의 행복이 질적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우리의 행복은 자본의 양에 의존한다는 궤변을 펼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지금 그렇게 GDP가 높은데도 우리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이웃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반증 아닌가? 그리고 덤으로 알아두자.
과거 농경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보릿고개라는 현상의 이면에는 정부나 지주의 창고에서 곡식이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쨌든 최소한의 공동체가 이루어진 다음에 정의로운 삶의 규칙이 존재한다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시간도둑들로 가득하다. 안정적 직장을 허용하지 않는 자본가들, 저임금을 유지하면서 맞벌이를 강요하는 자본가들, 농한기에 비해 너무나 작은 휴가 기간을 생색이라도 내듯이 허락하는 자본가들, 살인적인 경쟁 교육으로 아이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시간마저 빼앗고 있는 교육 당국자들,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시간을 늘려주는 것이 아니라 분배를 더 늘리겠다는 미사여구만을 읊조리는 정치가들. 자본주의 체제가 과거보다 진보적이라고 역설하는 지식인들.
거짓말도 반복되면 진실이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시간도둑들의 거짓말은 반복되면서, 우리는 지금 자신의 삶이 처한 불행에 눈을 감고 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우리는 시간도둑들의 말에 순진하게 속고만 있을 것인가. 이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의 삶은 원시인들보다 더 불행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사랑하는 시간을 위해 우리는 노동하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소와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까지 밭을 갈다가, 소는 축사에 들어오면 잠에 곯아떨어진다. 옆에 있는 소와 하루 있었던 일을 도란도란 이야기하거나 몸을 비빌 시간도 없다. 소의 일과와 우리의 그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일주일 내내 노동하다가 주말이 되면 쉬기에 바쁜 우리가 어떻게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예술을 만끽하는 사랑의 시간을 향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GDP가 그만큼 올랐으면, 사회체제는 주5일 근무가 아니라 주4일, 혹은 주3일로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야 하는 것 아닌가.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함께 살자'.

불행히도 시간도둑들의 집요한 설교 탓인지 우리는 사랑하는 시간의 증가야말로 사회의 진보를 나타낸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래서 가수 김만준도 [모모]를 부르며 절규했던 것 아닐까? “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하엘 엔데는 이 책에서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날이 흐를수록 제대로 즐길 줄 모르고, 상상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아지는 이 때에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 2012년 12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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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 범우사상신서 35
E.F.슈마허 지음 / 범우사 / 198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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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E. F. 슈마허(Ernst Rriedrich Schmacher) 저, 김진욱 역 <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utiful :인간 중심의 경제학 >를 읽고 / 1999. 12., 338쪽, 범우사


1973년에 출간된 이 책은 발간 이후 현재까지 수 많은 다른 책과 보고서, 논문에 인용되고 있다. 책의 제목인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제 보통명사처럼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며, '녹색연합'이라는 한국의 환경단체가는 자신들이 발간하는 잡지의 제목을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고까지 정했다.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세계인의 관심을 꾸준히 받고 있을까? 나 역시 오래 전부터 궁금하여 읽고 싶었지만 법정스님의 추천도서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리스트 순서에 따라 지금에서야 읽게 되었다.

"빠르게, 높게, 멀리".... 이 구호는 올림픽 구호만이 아니다. 인류는 언젠가부터 빠르게, 높게, 멀리, 그리고 크게 만드는 것이 '발전'이고 '진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경향은 고대에도 존재했다. 기원전 2,500년 이집트인들의 피라미드가 그랬고, 그리스인의 파르테논 신전이 그랬다. 하지만 인류 전체가 본격적으로 그러한 경향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은 산업사회가 들어서부터였다. 특히 자본주의는 이러한 경향을 거의 신격화했다. 사회주의 주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류는 어느 순간부터 과학기술의 발달이 곧 인류의 행복과 발전의 첩경이라는 신앙에 빠졌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초음속 제트기와 바벨탑과 같은 마천루, 은하계를 벗어나는 우준선을 만들었고 거대한 도시, 거대한 항공모함, 거대한 운동장 등 물리적인 '거대함' 뿐 아니라 거대한 교통체계, 통신체계, 물류체계, 생산체계, 에너지체계 등 시스템에 적용되면서 거대한 관료조직까지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무한한 생산은 무한한 소비를 불러 온다.

슈마허는 근대의 사상, 과학, 기술에 의해 형성된 세계는 세 가지 위기에 빠져있다고 진단한다. 그것은 첫째, 인간의 본성은 비인간적인 기술과 조직 속에서 질시하고 쇠약해져 가고 있다. 둘째로,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생활환경이 파괴도이어 절반쯤 붕괴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셋째로, 인간 경제에 없어서는 안되는, 재생이 불가능한 자원, 특히 화석원료 자원의 고갈이 눈 앞에 보이고 있따. 슈마허는 이런 현상의 근원이 되는 것은 "물질 지상주의와 거대 기술 신앙, 그리고 탐욕과 질투심에 다름 아닌 풍요의 추구"라고 말한다.

저자는 인류가 지니고 있는 가장 중대한 오류 중 하나를 "인류에게 '생산의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라고 규정한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원인은 '생산'에서 인간이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닌 자연을 무가치한 것으로 다루었고 중세 이후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변했기(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대상으로 생각)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는 아담 스미스나 칼 마르크스도 마찬가지였다. 경제학자들은 생각하는 '자본'의 대부분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이러한 생산의 문제는 재생가능하지 않은 '화석연료'의 고갈과 거대한 생산에 따른 자연의 허용 한도, 그리고 인간성의 위기를 불러온다는 것이고 결국 인류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인류의 파국의 위기에 대해 저자는 '영속성'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새로운 생산 방법과 소비 생활에 의한 새로운 생활 양식을 만들어야 함을 역설한다. "환경을 오염시키거나 사회 구조와 인간 자체의 질을 떨어뜨리는 과학적 내지 기술적인 '해결'은, 그것이 아무리 능란해 보이고 매력적으로 보일지라도 쓸모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도출하는 과제가 바로 "값이 싸서 거의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고, 작은 규모로 응용할 수 있으며, 인간의 창조력을 발휘하게 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의 방법이나 도구"이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중간기술"이다.

저자는 또한 '규모'의 문제를 중요하게 제기한다. 그는 "거대주의와 기계화의 경제학은 19세기의 환경이나 사고의 '유물'로서, 오늘의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할 힘을 갖고 있지 않다. 전혀 새로운 사고의 체계가 필요해지고 있다. 물질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의를 돌리는 사고 체계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물질은 자연히 뒤따라 온다."고 말하면서 "대량 생산이 아니라 대중에 의한 생산"을 제시한다.
저자에게 '대중에 의한 생산'은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기도 하다. 대규모 산업사회는 대규모 조직을 만들어내고 대규모 조직은 관료주의와 비능률, 생산성 저하 등을 가져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이 영국의 석탄공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기존의 대규모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가지 대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이외에 저자는 책 속에서 불교경제학의 관점에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에너지 위기를 다루면서 원자력의 이용이 인류에게 저주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선진국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원조'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쟁점인 '사적 소유'와 '생산수단의 소유' 등 '소유권'에 대한 통찰력 있는 비판을 가하면서 새로운 소유의 형태를 제시한다.

1970년대 전반과 후반의 두 차례 석유위기는 한국의 경제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준 바 있다. 이 위기를 10여 년 전에 예견해 경고했던 인물이 슈마허였고 그러한 경고의 사상적 바탕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현대 공업문명을 그 근저에서부터 비판하고 있다. 슈마허가 제기한 산업사회의 문제점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잔존하고 있고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가 한쪽에서는 더욱 거대해지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더욱 파편화되고 있다.
유한한 자원을 무작정 써버리는 일, 인간의 노동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일, 대규모 조직을 무조건 선호하는 일 등이 비판의 대상이다. '성장' 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달려온 우리의 경제 개발도 그 비판의 표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중간기술'과 '새로운 조직'의 문제를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부제가 보여 주고 있듯, 그의 주장은 경제 체계에 속박되어 버린 인간을 다시 주인공의 위치로 끌어올리자는 것이며, 그것만이 인간을 파멸의 길로부터 구해내는 방법인 것이다.

슈마허의 문제의식은 이반 일리히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이반 일리히 역시 1970년대에 산업생산사회와 제도화, 그리고 거대 전문관료체계의 폐해를 지적했다. 일리히는 경제 뿐 아니라 교육, 의료, 운송, 노동 등 전반적인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분석하여 "성장을 멈춰라!"라고 선언했다. 슈마허가 '중간기술'과 '인간 중심의 경제'를 제창했다면, 일리히는 '자율적 공생사회'를 제창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명제는 일리히의 대안과 연결된다. 나는 일리히의 방향에 좀 더 공감이 된다.

[ 2012년 12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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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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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위화(余?) 저, 김태성 역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China in Ten Words>를 읽고 / 2012. 09., 358쪽, 문학동네


오늘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권이 바뀌면 십중팔구 이명박 정권이 망쳐버린 중국측과의 외교를 복원해야 할 것이다. 한국과 전혀 다른 현대사를 거쳐오고 있는 중국, 북한에 무시할 수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국은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현재 모습이 어떤지 알아야 새 정권의 중국 외교나 경제협력, 교류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 있을 터, 밖에서 들여다보는 중국이 아니라 중국인의 목소리로, 그것도 비판적 지식인의 목소리로 듣는 중국사회의 이야기는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열 개 단어 속의 중국(十個詞彙中的中國)’이다. 저자는 인민, 영수(領水),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山寨), 홀유(忽悠) 등 열 개의 단어 속에 중국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열 개의 단어를 열 쌍의 눈으로 삼아 열 개의 방향에서 중국을 응시하는 책’이다. 더불어 그는 이 책에서 “끊이지 않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당대 중국의 삶의 모습을 열 개의 단어 속에 축약하고자” 했다. 저자는 이 책을 일러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 굴지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중국 사회의 “뿌리와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말한다.

"지난 30여 년 동안 중국 사회가 경험한 대단히 빠른 변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역시 인관관계가 전도된 발전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벌떼처럼 모여드는 결과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낸 원인을 찾는 일에는 무척 소극적이다. 그래서 지난 30여 년 동안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란 각종 사회갈등과 사회문제가 초고속 경제발전이 가져다준 낙관적인 정서에 가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지금까지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다. 휘황찬란해 보이는 오늘의 결과에서 출발하여 어쩌면 오늘의 불안이 되고 있는지도 모를 원인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p.17)

첫번째 글 "인민"에서 저자는 문화대혁명이 종식되고 개혁개방 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 급작스레 중국 전역을 뒤흔든 민주화 운동인 1989년 6월 톈안문 사건을 회고하며, 그것이 중국 사회의 변화 과정에서 어떤 전환점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는 톈안문 사건을 통해 “문화대혁명 이래로 누적되어온 정치적 열정이 마침내 깨끗이 발산”되었으며 “그 뒤로는 부(富)에 대한 열정이 이러한 정치적 열정을 대신했고,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돈을 버는 데 집착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1990년대의 경제적 번영이 찾아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열정을 목격하며 ‘인민’이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톄안문 사건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국사회의 변화는, 나에게 1987년 6월 항쟁과 1997년 IMF 사태를 겪으면서 변화된 한국사회의 변화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사회 역시 알게 모르게 두 번의 계기를 거치면서 수 십년 동안 "부자되세요"라는 말에게 지배당해 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20년이란 세월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하지만 역사의 기억은 결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나는 1989년의 톈안문 시위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이 오늘 어떤 입장에 서 있건 간에, 어느 날 갑자기 지난 일들을 회고하게 될 때 자신의 가슴과 뼈에 깊이 새겨진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내 가슴과 뼈에도 깊이 새겨진 바로 그 느낌이 나로 하여금 ‘인민’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p.36)

"영수"에서 ‘영수’는 다름 아닌 현대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이다. 이 글에서 위화는 오늘날 중국 사회 한편에서 불고 있는 마오쩌둥 부활 움직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사회심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마오쩌둥 사상이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전 세계에 갈수록 그 영향력을 높이고 있다”며 “전 세계 수많은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마오쩌둥이 중국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아래와 같은 해석을 내린다.
이 단락은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한국(남한)의 경우 마오쩌뚱같은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씨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영도자'가 아니라 '독재자'를 상대해 왔다. 심지어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 후보에 등록해 당선이 유력한 상태이다. 

"2009년 5월 1일,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빈에서 성대한 가두행진을 벌였다. 그들은 손에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를 높이 들고 있었다. 이와 유사한 광경이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도 끊임없이 벌어졌다. 어쩌면 ‘마오쩌둥 부활’이 중국 본토화의 사회심리일 뿐만 아니라 지구화의 사회심리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해답은 세계가 병들어 혁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인체에 병이 나면 염증이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다."(p.59)

"독서"는 문화대혁명 시절 성장기를 보낸 위화의 자전적 체험이 가장 진하게 드러나 있는 글이다. 마오쩌둥 어록 말고는 변변한 읽을거리가 없던 시절 저자의 책 읽기 경험이 잔잔히 재미를 준다. 특히 수많은 사람이 몰래 돌려가며 읽어 앞뒤 부분이 뜯겨나간 문학책들을 읽으며 자연스레 상상력 훈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작가 위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하나의 단초가 되어준다.
이 부분도 한국인들이 공감하기 쉽지 않다. 물론 6.25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저자와 차이가 있다면, 저자는 배고픔에 대한 걱정이 없는 상태에서 읽을 책이 없어 곤란을 겪었고 한국의 전쟁세대는 읽을 책은 커녕 하루 세 끼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글쓰기"는 작가 위화의 문학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글이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발치사(拔齒師) 생활을 하며 한편으로는 소설을 써서 끊임없이 잡지사에 투고하던 시절의 이야기, 작가로 데뷔하기까지의 에피소드 등이 당대 중국 사회의 풍경과 함께 소개된다. 이 글에서 위화는 자신의 초기 단편들이 폭력의 이미지로 가득한 이유를 직접 설명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이 현대 중국의 작가에게 끼친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루쉰"에는 현대 중국의 대문호 루쉰에 대한 위화의 복잡 미묘한 감정이 담겨 있다. 문화대혁명 시절 위대한 작가 루쉰의 ‘위대한 독자’는 다름 아닌 마오쩌둥이었다. 당시에는 마오쩌둥과 루쉰의 말이 인민들 사이에선 곧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청년 위화에게 루쉰의 작품은 교조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위화는 평생 루쉰을 좋아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작가 루쉰임에도 저자가 학생 시절의 경험 때문에 50살이 넘어서까지 싫어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볼 수 있다. 너무 강렬한 일방적 경험은 당사자가 장기간에 걸쳐 환멸을 느끼고 외면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차이’는 오늘날 중국 사회를 규정하는 중요한 단어다. "차이"에서 위화는 오늘날 중국이 “현실과 역사의 거대한 차이 속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커다란 꿈의 차이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빈부격차,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 발전 등 해결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구조적 문제들은 장밋빛 중국의 어두운 그림자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날이 발전하는 중국의 이미지에 푹 빠져 아직도 1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가난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 나는 중국인의 진정한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차이'는 중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한국사회의 주된 문제 역시 '차이'고 '차이'를 너머 '차별'이라 할 수 있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중소기업에 대한 차별, 영세상인에 대한 차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등 무수히 많은 차별이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이러한 '차이'와 '차별'을 구조적, 제도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한 대다수 민중들의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혁명"에서는 지난 30여 년 동안 중국의 기적적인 경제성장 과정에서 무수히 벌어진 문화대혁명식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양한 종류의 폭력이 혁명의 이름으로 미화되는 일은 오늘날의 중국 사회에도 만연해 있고, 그로 인한 민간의 불만 정서와 사회갈등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태다. 위화는 문화대혁명 당시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비극적으로 삶을 마친 한 홍위병의 이야기 끝에 아래와 같이 말한다.
한국전쟁 중 인민군과 국방군이 공방을 거듭하던 지역에서 고스란히 나타났을 모습이다. '혁명'이나 '해방', '노동'이나 '정의', '혁신'이나 '진보', '운동'이나 '이념'등의 단어와 주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단어와 주장의 내용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함을 느끼게 준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내 과거 기억 속의 해답은 온갖 주장들로 뒤죽박죽이었다. 혁명은 우리의 삶을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채웠다. 한 사람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어떤 사람은 순식간에 하늘을 날았고 어떤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 유대도 혁명을 따라 수시로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오늘까지 혁명의 전우였던 사람이 내일은 계급의 적이 될 수 있었다."(p.252)

"풀뿌리"는 중국의 경제기적을 이루어낸 장본인들, 상술과 처세로 일확천금을 벌어들인 하층민 출신의 중국 신흥 부호들에 대한 글이다. 어떠한 시대적 배경에서 그들이 오늘날 중국 경제의 주축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위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경제발전의 조류 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법률을 위반하거나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는 일도 전혀 서슴지 않고 과감하게 시도했다. (…) 이들 풀뿌리들은 어떤 유형의 기적이라도 창조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엄청난 담력을 갖고 있었고 뭔가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일도 없었다. (…) 중국의 속담으로 표현하자면 맨발인 사람은 신발 신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고,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프롤레타리아인 그들이 잃을 것은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였다."(p.271)

"산채"(山寨 가짜 혹은 모조품)에서는 오늘날 중국인들의 생활 곳곳에 침투하여 자리 잡은 산채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국의 인터넷에서는 산채 스타, 산채 TV 프로그램, 산채 유행가 등이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다. 위화는 이러한 산채 현상에 대해 “풀뿌리문화가 엘리트문화에 던지는 도전장이자 민간이 정부에 던지는 도전장, 그리고 약자집단이 강자집단에 던지는 도전장”의 의미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중국 사회의 혼란상을 드러내는 명확한 지표라고 말한다.
많은 한국 기업들과 개인들이 '산채'라는 단어의 뜻과 사회적 의미를 모르고 중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상당수 고전했을 것이다. 중국산 '짝퉁'이 엄청나게 존재하는 현상이 중국정부의 방치나 방임도 한 몫을 하겠지만, 실제 저자의 설명이 기본적인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채 현상은 중국 사회의 단편적 발전이 부른 필연적인 결과로서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다. (…) 오늘날 중국 사회의 도덕성 상실과 시비의 혼돈이 산채 현상을 통해 유감없이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회생태에 기초하여 ‘산채’라는 단어는 중국인들의 마음속 깊이 틀어박혔다. 표절과 모방, 악의적 조롱, 비방 등 원래는 불법적이고 저급한 것으로 간주된 행위에 존재 이유를 제공하고, 사회여론과 사회심리적인 측면에서 점차 합리적인 지위를 확보해나가고 있다. 이와 동시에 ‘산채’는 오늘날 중국인 사이에서 사용 빈도가 가장 높은 단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p.306)

이 책의 마지막 글인 "홀유"(수단을 가리지 않고 남을 속이거나 남에게 뭔가를 덮어씌우는 일)는 산채와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의 일상에서 하나의 처세 방식으로 자리 잡은 사회문화 현상에 대한 이야기다. 위화는 “산채가 모조품과 해적판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준 것처럼 홀유는 속임수나 헛소문 같은 단어에 합리성이라는 외피를 입혀주었다”고 말한다. 현재 중국에는 민간, 정부 할 것 없이 홀유를 활용하여 사회적, 경제적 이득을 노리는 현상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위화는 중국 사회에서 '홀유'가 의미하는 바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홀유(忽悠)"라는 단어는 빠른 속도로 전국을 풍미하면서 산채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중국 사회의 윤리 및 도덕성 결핍과 가치관의 혼란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중국 사회가 최근 30년 동안 지속해온 단편적 발전의 후유증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홀유 현상이 사회의 각 분야에 광범위하게 퍼진 정도는 산채 현상을 크게 능가한다. 이처럼 홀유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진지하지 못한 사회, 또는 원칙이 중시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p.344)


이처럼 이 책에는 불과 30여 년 만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화한 중국 사회의 이면에 감춰진 온갖 부조리를 보여준다. 저자는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분노하면서도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깊은 연민과 단단한 연대의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모국의 고통을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치환하여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우리는 위화 문학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위화의 휴머니즘은 어쩌면 이 책에서 그 정점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이미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 아시아, 남아메리카 10여 개 국가에서 번역 출간되었다고 한다. 중국어판은 2011년 1월 대만에서 출간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현재까지 출간이 불가능한 상태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중국 정부 당국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만의 한 기자가 저자에게 “<형제>와 이 책 두 권 모두 상당한 비판정신을 담고 있는 작품인데 어째서 전자는 중국에서 출판이 가능하고 후자는 불가능한 건가요?”라고 묻자, 저자는 허구와 비허구의 차이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주제가 둘 다 오늘날의 중국이긴 하지만 <형제>는 허구 작품이라 서술에서 우회적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쉽게 출판할 수 있었지만, 이 책은 비허구 작품이라 서술에서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출판이 불가능하다."('p.07)

저자 위화는 서구 사회에서 현재 중국어권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저자가 처음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장편소설 <형제>였고, 이 책은 <형제> 이후 4년 만에 쓴 것이다. 그는 <형제>에서 보여준 중국 사회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과 비판정신을 이 책에서는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서술했다고 하니, <형제>도 한 번 읽어 봐야겠다...^^

[ 2012년 12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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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노래하며 아파하다
이정희 지음 / 알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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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정희 저 < 사랑하고 노래하며 아파하다 >를 읽고 / 2010. 02., 300쪽, 도서출판알다


대통령 선거 후보의 2차례 TV토론으로 유권자들에게 한국현대사의 본질을 알려주고, 서민과 약자들의 아픈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 한 때 주류 언론에 의해 땅바닥 아래까지 실추되었던 그가 이제는 직접 TV를 통해 당당하게 유권자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SNS와 인터넷, 딸아이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정희 후보가 TV토론을 통해 보통의 유권자들에게 인정받은 것 이상으로 학생들과 아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항상 식상한 정치인과 언론인만을 TV에서 보았던 그들, 일방적 주입식 교육이 주류를 이루고 토론다운 토론의 모범적인 사례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초등,중등학교 학생들이 이정희 후보를 통해 토론과 정치의 참맛을 알았던 것이다. 아이들의 순수한 눈은 속일 수 없다. 비록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이정희 후보의 당선 가능성은 없지만, 그의 앞길에 희망이 보이는 이유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그런 소신과 마음과 정책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동안 소문으로 이정희 후보(의원)가 '토론을 잘한다'고만 들었다. TV토론을 지켜보고 나서 이제는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급궁금해졌다. 그래서 첫 번째 TV토론을 보자마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원래 이 책은 안철수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저서를 읽은 후, 세 번째 야권후보이자 진보정당 후보인 이정희 후보의 저서를 순서대로 읽기 위해 준비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이정희 후보의 토론 실력의 비결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1차 토론에서 보여준 그의 분노와 용기, 2차 토론에서 보여준 한국의 서민들, 약자들, 박해받는 자들을 향한 그의 비통한 표정과 절실한 목소리의 이유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이 책은 2010년 2월에 출간되었다. 이정희 후보가 2008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2년간 경험했던 국회활동과 2009년 촛불시위, 그가 국회의원으로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이정희 의원은 이 책을 통해 때로는 잔잔한 에세이로, 때로는 강렬한 정치 비평으로 세상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이 책은 보통의 정치인들이 출간한 책과 다르다. 책 속의 대부분의 내용이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난 사람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사회의 어두운 구석에 내몰려 있는 사람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부당하게 억압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만나 그들의 아픈 이야기와 그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일들이 자신의 느낌과 다짐 속에서 기록되어 있다.
기륭전자, 쌍용자동차 사태, 이주 결혼 여성의 죽음, 고리 사채로 망신창이가 된 주부, 특수고용노동자의 죽음, 대학 청소 노동자, 용산 참사, 재개발구역 할아버지의 죽음, 철도노조를 위한 변명, 동두천 성노동자의 아이들, 장자연 사건 등...

그리고 이정희 의원은 한국의 입법부, 비상식적이고 무책임한 국회 운영과 국회의원들의 자질을 숨김 없이 독자들에게 고발한다. 대화와 토론, 협의나 합의의 노력도 없는 여당, 국회 상임위와 본회의에 상정된 법률안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거수기로 전락한 국회의원들, 법안이 재벌을 위하는지 서민을 위하는지 구분하지 못하는 의원들, 행정부의 감시자 및 견제자 역할은 고사하고 보호하는 데 급급한 여당 의원들, 법과 대법원 판례도 무시하는 행정부 관료와 국회의원들, 유권자들과 약자들에 대해 눈꼽만큼의 애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의원들... 한심하기 그지 없는 입법부. 한마디로 '봉숭아 학당'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에는 그동안 이정희 의원의 활동에 영감을 주고 도움을 주셨던 분들에 대한 감사의 부분도 담겨 있다. ‘내가보는 이정희’라는 부록을 통해서 현장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진 것이다. ‘내가보는 이정희’에는 쌍용차노동자, 기륭전자 비정규직, 용산참사 유족, 촛불 네티즌이 참여했다.

나는 그동안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이거나 그런 지위를 향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저서를 여러 권 읽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활약과 성과, 자신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인생을 거쳐 왔는지 자랑(?)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정치인들의 책은 후원금을 주고서 받은 것이든, 선물로 받은 것이든 대부분 목차만 대충 본 후에 책꽂이에 던져 놓던지, 아니면 이사하면서 버렸다.

2009년 국회의원 첫 해부터 언론과 정치평론가들로부터 가장 돋보이는 의정활동을 펼친 의원이라는 평가와 조사 결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나 역시 그런 언론 기사를 기억한다. 그렇지만 이 책 안에는 자신의 의정활동의 백미를 장식하거나, 자신의 성과와 성공사례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 못한 사안들, 부족했던 활동, 실패했던 내용을 반성하고 다짐하는 것들이다.
이정희 의원은 “2년이 채 되지 않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시계바늘은 급작스럽게 거꾸로 돌았고 눈물겨운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 후회하고 성찰도 컸다”고 회고했다. 이정희 의원은 “2010년부터는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우리 아이들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한 메시지도 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 스스로의 가슴 속에서부터 만들어지는 희망“이며 그 희망은 촛불의 거리를 지나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 쌍용차 파업현장에 대한 분노, 용산 재개발지역 철거민의 죽음에 대한 애도로 이어지며 성찰과 반성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1부 ‘죄송합니다’는 이정희 의원의 정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수필들이 주로 실렸다.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돕기 위해 분주히 활동하면서도 늘 마음속에는 죄송함을 간직하고 있는 이정희 의원의 모습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국회의원의 모습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2부 ‘둥근 지붕아래의 진실’은 이정희 의원이 국회 안에서 경험한 일들이 주로 실렸다. 집권 여당의 횡포에 맞서 서민을 위한 정책과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이 기록되어 있으며, 지난 2년간 국회에서 전개되었던 부자 감세 정책, 금산 분리, 비정규직법 개악, MB 악법 등에 관한 이정희 의원의 정치철학을 엿볼 수 있다. 

3부 ‘광화문에서’는 촛불정국 이후 새롭게 등장한 ‘거리의 정치’를 보여준다. 포토에세이 형식으로 구성되었고, 다른 장들과 달리 시각적인 메시지를 중시했다. 이 장에서 독자들은 이정희 의원이 얼마나 국민의 목소리를 중시하는지, 글이 아닌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4부 ‘흔들리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는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는 꽃’의 일부 구절을 제목으로 인용했던 만큼, 이정희 의원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장이다. 이 장에서 이정희 의원은 가족과 동료, 한 시대를 열정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어느 평온한 휴식의 순간 등에 대해 사색하고 사색해 일상의 소중함과 가치를 추구하는 삶 등에 대해 서술했다. 

5부 ‘진보정치통합, 반MB연합에 대한 생각들’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직접적으로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치 이슈를 다루었다. 이정희 의원은 진보정치 통합을 위해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통합을 얘기하는 한편, 반MB연합에서 민주당의 역할, 민주노동당의 역할 등을 서술하며 그동안 안팎으로 주장해 온 통합과 연대의 방안을 제시했다. 5부의 내용은 비단 지방선거에만 국한되지 않고 향후 한국 정치의 발전을 위해 진보적 가치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 국민과 함께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어떤 것들이 필요한 지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 2012년 12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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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라! 협동조합 -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정직한 노력
김기섭 지음 / 들녘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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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기섭 저 < 깨어나라 협동조합 :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정직한 노력 >을 읽고 / 2012. 04., 306쪽, 들녘


대통령 선거로 인하여 대다수 사람들의 관심이 정치에 쏠려 있지만 대통령 선거 결과 하나가 개인의 삶을 벼락처럼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정치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다수의 노력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는 외부적인, 사회적인 조건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정치에 대한 관심 만큼이나 개인과 가족, 집단이 '더 좋은 삶"을 만드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정치적인 분위기와 관계없이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지고 있다. 지인으로부터 협동조합 관련 책 중에서 드물게 한국의 역사적 과정과 현실에 근거하여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을 소개받았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고사성어로 한국 협동조합의 상황에 대한 자신의 문제의식을 표현한다. '줄탁동기'는 "병아리가 달걀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어미가 새끼가 모두 안팎에서 껍질을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협동조합은 아름 크게 성장하였고 그동안 걸림돌로 지적되던 법과 제도 역시 시대에 맞게 제정되었음에도 협동조합 내부에서 위기를 맞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는 협동조합의 위기는 농협과 신협, 그리고 생협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1장 '협동조합을 넘어, 다시 협동조합을 향해'에서 한국에서 향후 30년 내에 도래할 세 가지 위기, 즉 에너지와 식량의 위기와 저출산 고령화의 위기, 그리고 남북 위기를 제시하고 시장이나 국가가 이에 대해 제대로 대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 속에 협동조합이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함을 제시한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협동, 세대 간의 협동, 부자와 가난한 사이의 협동이 협동조합을 통해 구체화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우선 협동에 대한 우리의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협동조합에 대한 잘못된 생각, 즉 '협동조합의 사람만 한다'와 '협동은 동시대 힘없고 가난한 사람만 한다'에 대해 비판하고 먼 과거의 한국식 협동조합이라 할 수 있는 두레와 계를 통해 협동조합의 원리를 환기시킨다. 두레는 "농사일을 함께 하는 공동노동 조직이면서, 동시에 마을신에게 함께 제사지냈던 집단적 제의 조직이고, 또 두레패를 통해 함께 놀았던 집단적 유희 조직"이며, 계의 진정한 목적은 "개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여) 개인 간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공정과 불균형을 자발적 참여와 약속에 따라 시정, 보완하려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향후 30년 내에 한국에 도래할 위기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하기 쉽지는 않다. 하지만 현재 사람들 사이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많고 협동조합 조직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점은 공감할 수 있다. 두레와 계에 대한 저자의 해석은 상당부분 공감할 수 있었다. 

제2장 '협동조합의 역사 : 로치데일에서 배운다'에서  저자는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설립 배경, 태동과 발전을 분석하여 로치데일에서 배워야 하는 것을 제시한다. 그것은 "상호자조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며 소비의 조직화로부터 출발해야 하고, 조직된 소비의 힘으로 생산을 변화시키고 조직된 소비와 변화된 생산으로부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제3장 '협동조합의 정의, 가치, 원칙'에서 저자는 1995 개정된  ICA 성명과 협동조합의 정의(본질, 주체, 목적, 수단), 가치, 원칙을 세밀하게 해석하고 있다. ICA(국제협동조합연맹)에서 1995년 정의한 바에 따르면, "협동조합은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사업체를 통하여, 그들 공통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필요와 염원를 충족시하고자 자발적으로 결합한 사람들의 자율적인 결사체(A Co-operative is an autonomous association of persons united voluntarily to meet their common economics, social and cultural needs and aspirations through a jointly-owned and democratically-controlled enterprise)"이다. 그는 ICA 성명을 설명하면서 한국의 협동조합의 위기에서 벗어나야 할 방향이 '조합원의 재발견'과 '사회 개혁'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저자는 특이하게 곽암(廓庵)의 '십우도(十牛圖)'를 통해 '조합원의 재발견'과 '사회 개혁'이라는 주제를 재확인한다. 
이 장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협동조합의 정의, 가치, 원칙 등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와 어떻게 실현하느냐에 따라 협동조합에 대한 생각과 자세, 기대와 운영이 달라질 것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합원의 재발견'이라는 문제제기는 협동조합 뿐 아니라 

"협동조합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로 구성된다. 하지만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못사는 사람이 아니라 절망과 패배의식에 휩싸인 사람이다" (p.105)

제4장 '협동조합의 다양한 주체와 역할, 그리고 관계'에서 저자는 협동조합의 주체, 즉 조합원과 직원 간의 역할과 관계에 주목한다. 특히 인류에게 있어 노동의 역사적 변천 과정과 협동조합 내 노동의 변천 과정을 비교, 분석하면서 협동조합 내 세 가지 노동(조합원 활동과 직원의 노동, 그리고 조합원 노동)의 성격과 역할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주장한다. 조합원 활동은 호혜의 관계이며, 직원의 노동은 교환의 관계이고, 조합원 노동은 "호혜를 기초로 하는 부분적인 교환의 관계"라는 것이다.
나는 '조합원의 재발견'과 '사회의 개혁'이라는 협동조합의 위기 탈출 방향이 협동조합 내에서 세 가지 노동의 관계를 고찰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제5장 '생활협동조합과 함께 해온 지난 시간들'에서 저자는 '생활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기 시작한 1980년대의 시대적 특징과 생협의 특징, 그리고 이후의 성장과정을 설명한다. 그는 일제시대나 해방 후 197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협동조합의 역사는 다루지 않았다. 무시한 것인지, 생협이 아니기 때문인지... 그리고 현재의 민간 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하는 생협이 지향하는 네 가지 순환, 즉 돈과 재화, 물질과 에너지의 순환에 대해 설명하고 생협과 공정무역의 관계와 특징을 말한다.
생협은 기존 남성 위주의 운동에서 벗어나 여성이 주체로 나선, 구체적 생활 영역에서 사용가치를 통해 생산을 변화시킨, 생산과 소비를 호혜로 관계 맺은 생활운동이자 경제운동이고 사회운동이었다. 생협의 이러한 선구적 비전은 그 속에 몸담은 사람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짧은 시간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요즘 위기를 맞고 있다. 날로 확대되어가는 글로벌 경제와 금융자본주의의 폐해에 따른 위축된 경제 활동, 유통 대자본의 유기농산물 시장 진출, 생협 간 경쟁의 격화 등의 징후가 드러나고 있지만 변변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 장은 뒷 장에서 새로운 생협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삽입한 것 같은데, 앞 장들과 별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제6장 '새로운 생협운동을 위하여'에서 저자는 생협운동의 의미와 당면 과제, 생협 내에서 여러가지로 균열되는 현상을 '분화'로 평가한 후 생협운동의 새로운 주체와 가치, 영역과 조직방식을 제안한다. 새로운 주체는 전업주부로서의 여성에서 노동, 육아, 교육, 돌봄으로서의 여성으로, 새로운 가치는 사용가치에서 생명가치, 새로운 영역은 먹을거리에서 노동, 육아, 교육, 돌봄으로, 새로운 조직방식은 소비의 조직화에서 '지역을 넘어 다양한 영역에서의 조직화'로 변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이 장에서 제4장의 내용과 연결하여 노동의 재정립과 조직화를 제시하는데, 노동의 재정립을 위해 이반 일리히의 '버내큘러(Vernacular : 자율적인 공동노동)'를 도입한다. 일리히는 그의 저서 <그림자 노동 >에서 '자율적인 공생사회(Conviviality)'와 '버내큘러'를 제시한 바 있다.
이반 일리히의 '자율적 공생사회'와 '버내큘러'는 산업적 생산양식의 구조와 특징에서 필연적으로 파생하는 임노동과 그림자 노동의 이분법적 대립구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일리히가 제안한 것이다. 저자가 협동조합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조합원 노동'의 개념을 '버내큘러'로 확장 또는 변용한 셈인데, 일리히의 개념이나 구성과 맞아 떨어진다고 동의하기는 어렵다.

마지막 제7장 '협동조합의 사회적 경제'에서 저자는 사회적 경제의 뜻과 특징, 국가와 시장 및 사회운동과의 관계 등에 대해 설명한다. 사회적 경제는 저자가 제6장에서 제시한 새로운 노동의 개념인 '버내큘러'로 인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결국 저자가 협동조합의 정의와 본질과 가치를 명확히 해석하고 협동조합의 위기를 규정하면서 협동조합이 새롭게 나가야할 방향으로 제시하는 결론은 '사회적 경제'와 '사획적 기업형 협동조합'인 셈이다.

생협이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발전해야 한다... 동의하기 어렵다. 생협은 소비자 협동조합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할 뿐이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본문에 문제의식으로 제기한 '조합원의 재발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현재 한국의 생협들의 위기가 대부분 ICA의 가치와 원칙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조합원의 재발견'은 그런 위기를 극복하는 방향에서 새롭게 도전하고 혁신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현재 두 개의 협동조합에 가입해 있다. 생협 한 곳과 의료생협 한 곳. 두 협동조합 모두 조합원의 역동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나는 현재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재발견'에 주력해야 한다고 본다.

저자가 서론과 본론을 내가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게 풀어 나가다가 결론 부분에서 방향을 잘못 잡았다. 생협의 조합원과의 분리 상황을 문제제기 하다가 이애 대한 면밀한 분석과 연관관계, 대안 및 전략 없이 새로운 영역의 생협 과제를 찾으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저자는 20년 동안 국내 협동조합의 현장을 누빈 사람이라는 데 많이 아쉽다.

[ 2012년 12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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