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이 사랑한 정치인, 올로프 팔메
하수정 지음 / 폴리테이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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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하수정 저 < 올로프 팔메 Olof Palme, 스웨덴이 사랑한 정치인 >를 읽고 / 2012. 12., 386쪽, 폴리테이아


1986년 2월 28일,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 도심에 울려 퍼진 두 발의 총성. 그 총성은 스웨덴인이 사랑했던 한 정치인, 올로프 팔메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짧았지만 빛나는 삶을 살았던 그를 한국에 소개했다. 그는 현대 스웨덴의 보편적 복지의 틀을 매듭지은 사민당 총리로, 미소 열강 사이에서 약소국이 운신할 틈을 만들며 ‘중립 노선’을 새롭게 정의한 외교가로, 그리고 정치인의 신념과 정치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매력적인 정치가로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나는 내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그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부고에 뭐라 쓰일지를 신경 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사람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긴다. 용기가 사라진다. 생명력을 잃는다. 그 생각이 내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도록 당신도 나를 도와주길 바란다.” 1969년 올로프 팔메는 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했으면 좋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정치인의 신념에 대해 담담히 밝힌 이 발언은 그의 느닷없는 죽음을 한층 비극적으로 보이게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아직 한국에 온전하게 소개된 바 없는 그의 삶에 주목할 것을 권한다. 
1927년 태어나 198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개인이자 정치인으로서 그의 일생을 20세기 스웨덴의 근현대사와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은 격동기에 나라를 이끈 지도자를 다루며 정치와 정치가의 모델을 보여 주는 설명서이자, 스웨덴 정치와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길잡이다. ‘낯선 정치인’을 우리 관점에서 돌아보게 함으로써 좋은 정치인, 좋은 시민, 좋은 사회란 과연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한다는 점은,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올로프 팔메를 국내 저자가 직접 다룬 데서 이루어진 성과이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 직전에 읽었던 강준만 교수의 <강남 좌파>와 비교하면서 의미를 찾기도 했다. 그동안 한국의 '강남 좌파'가 위선과 엘리트주의의 상징이었다면, 앞으로 올로프 팔메처럼 강직하게 원칙과 철학을 가지고 올바른 사회를 위한 정치를 펼쳐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올로프 팔메를 한국식으로 부르자면 '강남 좌파'였다. 그는 스톡홀름 외곽의 외스테르말름의 출신이다. 스웨덴에서 그곳 출신은 '부유한 집안이며 보수 성향'이라는 의미로 통했다. 그는 한국식으로 보면 70~80년대 한남동이나 평창동의 부유한 가문의 대저택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그럼에도 팔메는 학창 시절 이미 노동자당인 사민당에 가입했고, 사민당 출신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총리로 곱힌다. 신자유주의에 맞서 그 폐해를 지적하며 세금을 올리고 규제를 강화했다.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한 제도도 잇달아 도입했다.

'강남 좌파'로 태어나 자랐지만, 사회민주주의자로 변화해간 팔메의 청춘시절도 서구적이면서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팔메는 자유에 대한 동경으로 찾아간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미 대륙을 히치하이크로 횡단하며 여행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노력에 따른 결과나 선택이 아니라 피부색이나 타고난 가난에 의해 삶이 결정되는 미국의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을 확인한 젊은 시절의 경험, 그리고 스웨덴 총합생연합에서 펼친 국제적 활동은 2~4장에서 소개된다. 이를 통해 보수당의 대표적인 정치인이 되었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부유한 가문 출신인 팔메가 사민당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총리로 자리매김하고, 약소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외교가로 활동하게 된 출발점을 확인할 수 있다. 1953년 타게 에를란데르(23년간 총리로 재임)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래, 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이후 행적까지 소개한 부분에서는 정치가 팔메의 삶을 따라가는 한편, 그가 총리로 있을 때 도입한 제도들을 비롯해 그 바탕에 놓인 이론적인 고민과 당시 사회상, 사민당을 중심으로 펼쳐진 정치 활동 등을 엿볼 수 있다(5~8장). 
한국과 스웨덴을 비교하기에 너무 많은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격차가 크긴 하지만, 그가 학창시절과 청춘을 보내면서 경험하고 고민했던 지점과 방식은 열정이 넘치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충분히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팔메가 총리가 되어 집권한 시기(1969~76, 1982~86)는, 스웨덴 사민당과 전국노동조합연맹(LO)의 강력한 연합에 힘입어 안정적으로 이어지던 복지국가의 전선에 균열이 생겨남과 동시에, 스웨덴 복지 제도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된 기점으로 평가받는다. 스웨덴 사민당에 사회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비그포르스의 오랜 염원인 '기업 민주화'의 정책 중 하나가 '임금노동자 기금'이었다. 오랜 산고 끝에 도입된 임금노동자 기금이 이에 반대하는 기업인과 보수당의 거센 저항 끝에 결국 유명무실한 제도가 되면서, 사민당과 LO의 관계는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한편, 이 시기 스웨덴의 지니계수는 눈에 띄게 낮아졌고, 부모 육아휴직 제도가 개혁되어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늘었으며, 보육 시설과 교육 기회가 확충되는 등 양성평등 지표는 높아졌다. ‘국민의 집’으로 일컬어지는 기존의 스웨덴 복지 제도가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까지 포괄하며 사회 안전망을 한층 더 촘촘하게 한 결과, 현재의 보편적 복지의 기틀이 완성된 시기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44년간 이어져 온 사민당의 장기 집권이 팔메의 첫 번째 총리 임기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그 뒤 1982년 팔메가 다시 총리가 되었다가 1986년 암살당하는 것으로 마감된 두 번째 임기를 포함해, 지금까지도 스웨덴에서는 보수 연합과 사민당이 번갈아 집권하고 있다. 이 시기에 복지국가 스웨덴의 전망이 어두워졌다는 이들도 있었으나, 복지 제도 및 실태가 후퇴했다는 명백한 지표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집권당의 부침 및 교체와 무관하게 스웨덴의 복지 제도가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는 징표로 해석되고 있음에 주목한다면, 오늘날의 스웨덴 복지 제도와 정치 지형을 이해하고 싶은 이들은 팔메가 총리로 있던 10년, 즉 스웨덴의 복지에 근대성이 가미된 그 시기를 살펴볼 필요도 있다.

올로프 팔메는 약소국의 외교와 평화에 대한 전략과 태도라는 측면에서 한국 정치인에게도 귀감이 된다. “평화가 위협당하고, 정의가 거부되고, 자유가 위기에 처하는 곳마다. 그곳이 중동이든, 중앙아메리카든, 남아프리카든, 핵무기 사용이 논의되는 곳이든, 팔메는 그곳을 찾아 중재를 이끌었다.” 미국의 국무 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1986년 3월 팔메의 장례식에 참석해, 국제 외교 무대에서 선보인 팔메의 역할을 이와 같이 기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중립 노선을 견지하며 국가 안보를 지켰던 스웨덴이 국제 무대에서 가장 돋보인 시기는 팔메 집권기였다. 이는 학문적으로 팔메를 다룬 연구들이 대부분 그의 외교정책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립은 침묵을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팔메의 말은, 당시 미소 열강 사이에서 약소국이 운신할 틈을 만들어 낸 그의 외교적 역량과 의지를 잘 드러낸다. 1970년 영국의 "더 타임스"는 “스웨덴은 오히려 국제 정세에 깊게 관여하기 위한 시발점으로 중립을 활용하고 있다.”라고 논평하기도 했다.
1968년 2월 21일,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시위대 앞에서 팔메는 미국을 맹렬히 비판했다(270-273쪽). 이후 스웨덴과 미국의 관계가 1년 넘게 단절되기도 했는데,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연설이 있고 나서 몇 달 뒤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을 때였다. 그날 저녁 침공에 반대하고자 모여든 10만여 명의 스웨덴 시민 앞에서 연단에 오른 팔메는 의도적으로 베트남전 반대 연설을 그대로 차용해 국가 이름만 ‘미국’에서 ‘소련’으로 바꿔,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잔인한 공격을 비난했다. 이후 이란과 이라크 사이의 분쟁을 적극적으로 중재하거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는 데 목소리를 내는 등 스웨덴식 중립이 “어떤 세력을 향해서든 자유롭게 자신의 신념을 드러낼 수 있는 적극적 중립”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팔메가 기여한 바는 컸다. 팔메의 죽음을 다룬 이 책 1장에서,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암살의 배후를 손꼽을 때 극우 세력, 쿠르드노동자당, 군수산업, 남아공 인종 분리주의자 등이 포함되었다는 점도 팔메의 적극적인 외교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의 부록에는 스웨덴의 정치와 사회를 좀 더 상세히 들여다본 항목들과, 한국과 스웨덴 사회를 한눈에 비교할 수 있는 지표를 실어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스웨덴은 전세계인이 부러워할 정도로 복지체계와 높은 일인당 국민소득, 낮은 소득불평등, 높은 민주주의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도 많은 학자들과 전문가들, 정치인들이 스웨덴의 사례를 제시하곤 한다. 그런데 정치 분야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작년 대선 선거운동 초반 안철수 후보가 '정치개혁'을 화두로 던졌을 때, 한국 정치권과 유권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다. 당시 나 역시 안 후보의 제안 중 일부는 반대하고 일부는 찬성하는 의견이었는데, 대선이 끝난 후 여야 정치권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치개혁'은 실종되었고, 오히려 새누리당은 이동흡 헌재소장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통랍진보당 이석기, 김재연 의원에 대한 자격 심사'라는 정치 공세를 펼친 바 있다. 두 의원에 대한 검찰의 '먼지털이 수사'가 이미 작년에 강력(?)하게 진행되어 김재연 의원에게는 아무런 '먼지'도 발견하지 못한 채 끝났고, 이석기 의원에게도 고작 '먼지 수준'의 혐의를 가지고 무리하게 기소한 바 있다. 그럼에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데올로기 공세를 하는 정치권의 후진성은 여전하다.

'정치개혁' 또는 '정치쇄신'이라는 말이 나오고 보니, 이 책의 부록에 저자가 한국과 스웨덴의 정치 분야중에서 여러 특징을 정리, 비교해 놓은 부분이 있어 소개한다.

1. 스웨덴 의회 (스웨덴은 인구 950만명입니다. 기타 비교 통계는 아래 사진에...) : 스웨덴은 1866년 입헌군주제 헌법을 만들고 양원제 의회를 구성했습니다. 의원내각제죠. 상원의원 155명과 하원의원 233명(총 388명)이었습니다. 1970년에 헌법을 수정하여 한국과 같은 단원제 총 349명으로 변경
=> 스웨덴과 한국의 산술적인 인구 대비로 생각하면 한국 국회의원은 5배인 1,750명이 되어야합니다. 즉 의원의 숫자는 국가마다 의무와 역할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2. 민주주의 수준 : 2011년 영국의 잡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167개국의 민주주의 지수에서 스웨덴은 10점 만점에 9.5점으로 4위, 한국은 22위입니다.(평가 항목은 선거 절차 및 다원주의, 시민의 권리, 정부의 기능, 정치 참여, 정치 문화 등 5가지) '제도가 보장하는 절차'에서는 한국도 9점대라 하네요.

3. 정당 지원 제도 : - 원내 정당의 경우, 기본 지원금과 의석당 지원금 외에 여당에는 의석당 270만원, 야당에게는 의석당 400만원을 배정한다네요. 이것은 한 정당의 독주를 막고 다양성을 장려하기 위한 스웨덴 정치계와 사회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봅니다. 원내 교섭단체에게도 여당보다 야당의 지원금이 두 배입니다.
=> 한국의 경우, 18대 국회 의석을 기준으로 새누리당이 전체 국고보조금의 46.4%를, 민주통합당이 36.7%를, 자유선진당이 6.9%를, 통합진보당이 6.4%를, 창조한국당이 2.1%를 배정받았죠. 새누리당은 249억이나 됩니다.
=> 스웨덴은 경제사회 뿐 아니라 정치분야에서도 독식과 독점을 방지하고 다양성을 키우려는 취지이고, 한국은 부익부 빈익빈 식으로 순환되어 정당 구성을 고착화시키고 다양성의 싹을 잘라 버립니다.

4. 의원 급여 등 : 스웨덴 의원의 월급은 약 924만원이고 한국은 1,031만원입니다. 의원 연금은 12년 이상 의원직을 유지해야 받을 수 있다네요. 스웨덴 의회는 공무상 해외 출장비를 임기 내에 825만원을 한도로 규정하고 사용내역도 공무상으로 제한하여 한국 국회의원보다 까다롭습니다. 스웨덴은 의원당 보좌관 고용지원액이 연간 1억3백만원으로 연간 3억2천만원을 받는 한국보다 적습니다. 스웨덴 의원의 일주일에 평균 66간 일하고 일 평균 6.5시간 수면을 취한다네요. 스웨덴 노동자의 일주일 평균 노동시간이 30시간이니 엄청나게 일하는 것이죠. 한국의 경우 진보정당 의원들과 민주당 일부 의원 정도가 그 정도로 일하겠죠? ^^
=> 의원들에 대한 급여,복지도 역시 단순 비교는 어렵습니다. 인구 기준 국회의원 수는 스웨덴이 5배 이상이 되고, 의원의 급여는 한국이 조금 많을 뿐이며 보좌관은 3배 정도이니까요. 다만 통계치는 제시되지 않았지만 의원들의 부정부패와 무능, 게으름 등을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발생하겠죠? 즉,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제도와 자질, 능력,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5. 선거제도 : 스웨덴은 대선거구제이고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입니다. 그래서 2012년 현재 원내에 진출한 정당이 무려 8개라고...ㅋㅋ 투요용지가 3장이라네요. 정당별 후보 명단에 표기할 수도 있고, 직접 이름을 쓸 수도 있고, 특정인을 뽑지 않고 정당에만 투표할 수 있다고...
=> 자세하게는 모르겠지만, 선거관리위원회나 정당의 편리함이라 유리함이 아니라 유권자의 선택을 최대한 보장하려는 노력이라고 느껴집니다. 정당이 정한 후보 중에서 무조건 선택하는 게 아니라 낙선시킬 수 있는 장식이라 매력적으로 느껴지고요..^^
- 그럼에도 스웨덴의 투표율은 보통 80% 중반이고 가끔은 90%를 넘는다고 합니다. 물론, 투표는 일요일에 실시합니다. 투표 시간이 밤 몇 시까지인지는 모르겠고요...

6. 정치박람회 : 굉장히 독특하고 신선하다고 느낀 것 중의 하나가 '알메달렌'이라는 이름의 정치박람회였습니다. "정치가 일상의 담론이 될 때 정치라 좋아진다"는 독일 사회학자 하버 마스의 말을 실천하고 있다는 저자의 평가... 매년 의회가 회기를 종료하는 마지막 주 8일(일요일~일요일, 원내 정당이 8개라서)에 스웨덴 알마달렌이라는 공원에서 매일 정당 하나가 정책설명회와 연설, 세미나, 청문회, 파티, 문화행사 등 각종 행사를 통해 정당을 홍보하고 유권자와 소통을 넓히는 것입니다. 요일을 추첨으로 정하고, 정당 뿐 아니라 각종 연구소, 단체, 학회 등 전국의 정치와 관련한 주체들과 유권자들이 자발적으로 '정치에 대한 소통'을 집중적으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2011년에는 8백개 조직이 참여했고 공식 등록 행사만 1,476였다네요. 하루 평균 행사가 300개인 셈이죠. 유권자나 관중을 제외한 참가자(주최 또는 주체)만 1만 4천명이었다는... 950만명 인구 중에서... 정치박람회는 1970년 들어 시작, 정착되어 1991년부터 공식적인 행사가 되었습니다. 이러니 정치 참여가 생활화되고 정치 담론이 일상이겠죠.
=> 무지무지하게 부러운 방식이고 한국 정당도 선관위의 지원과 협력으로 몇 년 안에 진행했으면 합니다.
=> 물론, 스웨덴 유권자의 정치박람회 참여에는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 소득격차 축소, 적은 노동시간, 노조 조직율 71%, 합의에 기반한 정치문화 등이 없으면 불가능했겠죠...ㅠㅠ 그렇다고 애써 무시하기에는 정치박람회의 가능성과 장점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 2013년 02월 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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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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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강준만 저 < 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를 읽고 / 2011. 07., 432쪽, 인물과사상사

'이념은 좌파적이나, 생활은 강남 사람 같다'는 모순적인 뜻을 지닌 '강남 좌파'. 이 표현은 2006년 3월 동아일보 칼럼에서 처음 등장한다. 우리 사회에서 '강남 좌파'에 대한 시선은 사회갈등 완충과 상류층의 위선이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강남 좌파'의 실체가 있을까? '강남 좌파'는 그저 정치 경쟁을 위한 맥거핀(트릭, 꼼수)에 불과한 것인가?
강준만 교수의 이 책을 읽고나면 정답을 알 수 있다. 굳이 정답이 아니라 하더라도 각자가 자신의 정답을 찾거나 저자의 주장을 토대로 자신만의 정답 노트를 마련할 수 있다. '강남 좌파' 논쟁의 배경과 내막, 그리고 한국정치의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강 교수는 '강남 좌파' 현상의 실체와 논란을 새롭게 진단한다. '강남 좌파'라는 용어는 참여정부 집권 후 보수진영이 운동권 출신 486세대 진보인사들을 꼬집어 쓰던 용어다. 정치적 이념적으로는 좌파지만 행동은 '강남 주민스럽다'라는,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다. 당시 분명 보수진영이 노무현 정권을 공격하려는 혐의가 읽히지만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아무튼 처음 강남 좌파 논쟁이 불거진 이후 지금까지 '강남 좌파론'은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2003년 이후 '강남 좌파' 현상의 논쟁과 과정을 분석하면서 주요 정치인들에 대해 비평한다. 2007년 오마이뉴스의 문국현이라는 강남 좌파 띄우기, 2010년 조국-오연호의 <진보 집권 플랜>을 통한 2차 강남 좌파 띄우기, 강남 좌파 현상에 대한 반동의 관점에서 박근혜 인기의 비결, 분당 우파에 대한 반동으로서 분당 보궐선거와 손학규의 재기라는 관점으로 자신의 주장을 끌어간다. 이어서 노무현 정신에서 일탈한 국민참여당의 유시민과 성찰 없는 반이명박 전선으로 끌려나온 '분노하는' 문재인, 강남 우파 오세훈의 강남 좌파적 언어에 대해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사회에서 가장 치열한 계급투쟁은 입시전쟁이라는 자신의 지론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강남 좌파' 논쟁을 둘러싼 정치 엘리트들의 밥그릇 싸움과 정치권의 진영논리 및 증오 마케팅을 비판하고 진정한 소통과 화합을 주문한다.

먼저 '강남 좌파' 논쟁에서 흔히 놓치거나 순진하게 혼동하는 생각이 있다. 첫째, 이 논쟁에서 '강남'의 의미는 강남 지역에 거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강남스럽다'라는 비유나 상징이다. 어디에 살건 소득수준과 생활방식에 따라 강남 좌파일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이나 의견은 진보적인데 소득수준, 특히 생활방식이 '강남'스러운 것을 '위선'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정치인이나 유명인과 일반인까지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는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둘째, '좌파'에 대한 개념도 마찬가지다. '좌파'를 학문적, 이념적으로 세분하여 규정짓거나 구분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언론이나 유권자들이 통상 말할 때 사용하는 '한국 정치의 이념 지형도'일 뿐이다. 실제 많은 여론조사의 경우 조사 항목에 '당신은 진보적인가, 보수적인가'는 상대적 개념일 뿐이다. 이에 대해 발끈하는 '진짜 좌파'나 '순수 진보'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좌파'든, '진보'든 어느 누가 그런 단어를 처음부터 '소유'하거나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유감일 뿐이다. 저자 말대로 "생각하기에 따라서 좌파라는 단어의 일상적 생활화가 오히려 그런 낙인찍기를 무력화하는 방법"일 수 있다. 조국 교수는 "우리 사회가 좋아지려면 강남 좌파가 많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저자는 '강남 좌파'의 등장 배경을 설명하고 전 세계적인 동시대적 현상으로서 모든 정치인이 '강남 좌파'일 수밖에 없는 논리와 근거를 제시한다. 그의 논리는 "좌우를 막론하고 리더쉽을 행사하는 정치 엘리트가 되기 위해선 학력, 학벌에서부터 생활수준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사회적 성공을 거두어야 하므로, 정치 영역에서 활동하는 모든 좌파는 강남 좌파일 수 밖에 없다. 또한 우파라도 유권자의 대다수인 서민을 상대로 포퓰리즘 자세를 취하는 '정치의 문법'을 사용하는 바, 우파 정치인에게도 강남 좌파 요소가 농후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한국의) 정치인은 강남 좌파'라는" 것이다.
실제로 정치인들의 경력과 직업은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전현직 국회의원과 청와대 및 정부 고위 관료 등을 조사한 통계들을 보면 정치인이나 관료 이전의 직업의 거의 대부분이 변호사나 언론인, 교수, 기업인, 공무원 출신이고 학력 및 학벌 역시 SKY 출신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노동자, 농민, 중소 상공인, 직장 여성, 주부, 중하위 공무원 등은 몇 명에 불과하고, 저학력 출신이나 지방대 출신은 찾아보기 어렵다.

'강남 좌파'에 대한 강 교수의 분석에서 인상 깊은 점 몇 가지가 있다. '강남 좌파'가 왜 노무현 정권에서부터 부각되어 몇 년 전부터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가와 '강남 좌파' 논쟁의 이면에 숨어 있는 엘리트주의. 그리고 노무현 전대통령이 자살 이후 나타난 대규모 추모 물결을 '우리 안의 노무현의 총궐기'로 분석한 것과 박근혜의 인기 비결을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공통적인 강남 좌파 현상에 대한 반감과 반동으로 파악하는 과점이다. 보통 사람들이 '강남 좌파' 논쟁에서 놓치는 부분이다.
그는 '강남 좌파' 논쟁이 노무현 정권 때부터 부각된 이유를 '민주화'라고 이야기한다. 김대중 정권을 거치면서 형식적인 민주화가 완료되었고, 연이은 민주정권의 집권으로 절박한 이슈가 사라지면서 정치 엘리트에 대한 시각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촌놈'과 '상고 출신 변호사', 그리고 '돼지 저금통'으로로 당선되었던 노무현 정권은 '골프 치는 노무현'과 '이해찬 총리의 3.1절 골프 파동'으로 이미지가 구겨지기 시작했다. '강남 좌파' 비난의 직접적인 계기는 이해찬의 골프 파동이었지만 그 이후에도 남상국 사장 자살 사건, 노건평씨의 세종증권 인수 알선수재 구속,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거부,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 결과, 인사청문회 대상자들의 치부, 낙하산 인사, 청맥회 논란, 삼성과의 밀월 등 구조적인 문제는 정권 내내 이어졌다.
 
'맺는 말'에서 저자는 강남 좌파 논쟁의 성격을 '밥그릇 싸움'으로 비판한다. "강남 좌파로 불리게끔 만든 좌파 담론 또는 제스처가 정치 엘리트들의 '밥그릇 싸움'을 무슨 심각한 이념 투쟁인 양 포장하는 효과를 내고 있지 않느냐. ... 정치가 출세, 입신양명, 인정 욕구 충족의 도구로 기능하는 사회에서 엘리트는 모두 '강남파'일 수 밖에 없다. 강남 좌파에서 '좌파'는 부차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이 아닏. 제한된 정치적 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승자 독식 상황에서 이념과 노선은 국리민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경쟁 세력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한 정략적 도구의 성격이 강해진다."
그리고 한국 정치 문제의 핵심은 '이념의 틀'이라기보다는 진영 논리와 증오 마케팅, 그리고 '인물 중심주의'임을 지적한다. "'이념의 틀'은 인물 중심주의에 따라붙는 부수적인 것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강남 좌파와 막걸리 우파들이 더 많이 늘어나게 하는 것이 나리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세를 규합하고 상대편을 대하는지 집단적으로 성찰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강 교수의 결론은 못내 아쉽다. 그는 소통과 화합을 위해서 승자 독식이 가능한 구조를 바꾸어 '정치 과잉'을 줄이는 것과 인물 중심의 참여에서 목적 중심으로 참여로 바꾸자는 것, 그리고 권력 중심적인 '인정 투쟁' 문화, 입신양명 문화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더욱이 아쉬운 점은 그가 '강남 좌파' 논쟁의 핵심을 '엘리트주의'로 분석하면서 '강남 좌파'로 지칭되는 개인이나 세력에 대한 비판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평소 지론대로 학력, 학벌주의에 대한 대안은 긍정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정치가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조적, 제도적인 방향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런 측면에서 '공익제보자와 함께하는 모임'의 대표 이지문씨의 서평이 공감이 된다. 이지문씨는 강준만 교수의 분석이나 비판에 일면 공감하면서도 한국정치의 엘리트주의를 유도하는 선거제도, 즉 '강남 좌파'만이 가능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추첨제 민주주의' 등 '평등한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의 도입을 주장했다.(http://blog.daum.net/allgreenkorea/17135163)

"지금 중요한 것은 누가 ‘강남 좌파’인가, 이들이 좌파인지, 그렇지 않은지와 같은 지엽적 논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특히 하위계층들을 포괄할 수 있는 진정한 대표 체계를 우리 정치 현실에서 구축할 수 있을지에 대한 보다 건설적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과거 독재권력 하에서 배제된 속칭 ‘민주화 세력’이 ‘강남 좌파’로 탈바꿈하여 기존 보수 엘리트들과 경쟁하는 장에 우리 국민이 단지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가 제시한 것처럼 독재 하에서 억압받고 배제된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하위주체들이 제도정치의 장에 진입함으로써 정치의 성격과 경계 자체가 변화하고 민주주의가 갖는 내용과 경계가 변화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정치 현실이 갈수록 ‘강남 좌파’만이 좌파를 대표하는 괴리가 심화되고 있는 것에 대한 보다 진지한 대안에 대한 탐색이 요청되어야 한다. 그 대안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정치인이 강남 좌파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선거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거 자체가 ‘강남 좌파’로 상징되는 상위계층에 절대 유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출마하여 대표가 될 수 있는 이들은 선거에서 절대 유리한 재정적 여유를 바탕으로 지역 조직 활동에 열심이거나 전국적 인지도를 갖춘 유명 인사이거나, 또는 정당 관료나 활동가가 아니면 정당 보스와의 긴밀한 인연을 맺고 있을 때 가능할 뿐이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선거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기 때문에 보통 시민들이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공천을 받아 출마하여 공식 선거운동기간 동안 지출하는 금액보다는 최근 당내 경선을 통해 후보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돈’의 영향력이 더 커지고 있는 현실이다. 정치 신인일수록 현역의원에게 맞서 사조직 가동비가 엄청나게 들어가며, 이름 알리기 차원에서 여론조사 명목으로도 막대한 돈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당내 경선 여론조사와 경선대회 개최 등에 들어가는 비용 역시 참여하는 예비후보자들이 일정금액을 기탁금 형식으로 정당에 납입해야 하기 때문에 본 선거 이전에 돈이 없는 ‘좌파’들은, 아니 ‘우파’ 역시 마찬가지로 출마를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결국 대표는 일반 시민들과 다른 재력 있거나 전국적 인지도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는 보다 높은 사회계층의 구성원으로 국한되고 있다. 이러한 선거 현실에서는 결국 좌파 중에서도 ‘강남 좌파’ 위주로 대표가 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강남 좌파’에 대한 논쟁이 보다 생산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강남 좌파 위주로 정치적 대표자로 충원되는 선거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정치 민주화에 대한 보다 진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법 민주화 차원에서 국민참여재판제도를 시행하고 기소배심을 논의하는 정치권이라면 정치 민주화 차원에서도 일반 국민들이,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실제 정치의 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실질적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 추첨을 통한 시민의회 창출이나 양원제 도입시 한 원을 선거가 아닌 추첨으로 충원하는 것과 같은 보다 ‘평등한 참여’를 보장하는 다양한 방안에 대한 논의가 요청된다."

[ 2013년 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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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 밀레니엄 북스 25
생 텍쥐페리 지음, 안응렬 옮김 / 신원문화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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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생땍쥐베리(Antoine De Saint-Exupery) 저, 안응렬 역 < 인간의 대지 >를 읽고 / 2004. 04., 367쪽, 신원문화사


<어린 왕자>와 함께 법정스님의 추천 도서... 1939년에 출판된 이 작품은 생택쥐베리가 1926년 라테코에르 사의 새내기 정기 항공로 조종사로 막 입사한 시점부터 기술된다. 이 책은 항공로 개척기의 조종사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으며, 생택쥐베리가 조종사로 근무하면서 땅과 하늘에서 직접 체험하고 느낀 것들을 적은 일종의 수필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에는 항공로, 동료들, 비행기, 비행기와 지구, 오아시스, 사막에서, 사막 한복판에서, 인간들이라는 제목으로 총 8개의 단락이 있다. 그는 인간에 대한 가능성과 기적에 대해 그리고 당시 근무 환경, 자연으로부터의 통찰을 몹시 서정적이면서도 아이와 같은 눈빛으로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다. 2차 대전과 나치즘의 득세 등 비극적이고 끔찍한 상황을 겪으면서 그는 인간적인 연대감이야말로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단 하나의 진실이고, 상호적인 책임감이야말로 유일한 윤리라고 확신했다고 전해진다.

작품의 주축을 이루는 사건은 크게 두 가지다. 안데스 산맥에서 조난당하였다가 불굴의 의지로 극한의 상황을 이겨내고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생텍쥐페리의 동료 비행사 기요메. 그리고 리비아 사막에서 조난당했다가 기요메처럼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생텍쥐페리 본인의 경험담이다.
기요메는 한겨울에 안데스산맥을 횡단 비행하다가 추락하여 실종하게 된다. 50시간 이상이 지난 상태였고 겨울의 안데스산맥에서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다며 모두들 기요메는 죽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이 판단은 틀린 것이었다. 기요메는 살아 돌아왔던 것이었다. 기요메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해 노력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스스로 평온해지기로 결정하고 눈밭에 드러누웠다. 그 순간 기요메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것은 자신(기요메)이 없는 상황에서 남겨질 아내 생각이었다. 아내는 자신의 보험증서가 있으니 가난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안도하던 찰나 그의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실종되면 법률상 공식적인 사망이 4년 후로 연기된다는 점(당시의 제도가 그랬다는...)이었다. 그는 전방 50미터에 솟아있는 바위까지만 걸어가기로 (사람들이 발견하기 쉬운 위치에서, 죽기로) 마음먹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는 살아 돌아왔다.
기요메의 일화를 통해 생택쥐페리는 인간의 위대함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데 있으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의 범위 내에서,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맹세컨대 내가 한 일은 어떤 짐승도 할 수 없었을 일이라네”라는 기요메의 말처럼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인간이기에 엄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사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한 어떤 해법을 제시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 조종사들의 일화 등을 통해 인간이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끝까지 책임을 지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생땍쥐베리 역시 동료와 함께 리비아 사막에 추락하여 실종된 후 사막의 신기루와 싸우면서 5일 동안 비슷한 과정을 통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책임'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둔 자살'과 관련하여...

생땍쥐베리는 이처럼 작품 속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 직업상의 사명감, 타인에 대한 배려와 책임 등에 대해 명상하며 전쟁의 무의미함과 상호 연대를 이야기한다. 우편 비행 업무를 수행하던 중 사막에 추락했다가 살아남았던 작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기에 배경 묘사는 물론이거니와 갈증으로 죽어가는 인간의 심리 묘사가 치밀하고도 생생하다. 특히 '바람과 모래와 별'에 대한 묘사는 아름답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단순한 보고서나 작업 일지가 아닌 한 편의 장엄한 상징시가 될 수 있는 것은 인간, 비행기의 각종 기계장치, 사물, 풍경 등이 갖는 초월적인 의미가 간결한 은유 안에서 강렬하고 풍성하게 살아 숨 쉬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고양된 인식으로 가득 찬 이 작품은 삶에 대한 찬양이자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축전이다.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과 나치즘이라는 악몽을 직접 겪었으면서도 인류의 죄와 악마적인 측면에 좌절하기 보다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애, 희망을 찾으려 했다는 점이 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작가가 작품 속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는 얼핏 감을 잡을 수 있었는데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같은 단락을 여러번 읽어야 했고, 책의 앞 쪽을 다시 되돌아봐야 했다는 점이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글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단락이 제법 많았다. 그 이유는 아직도 내 독해력이나 이해력이 부족하거나 작가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기 보다 비판적으로 또는 평가하려는 자세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번역자와 출판사가 한글에 맞게 번역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참고로... 사랑에 관한 유명한 문장,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는 이 작품 속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인상적인 문장을 하나 더 소개하면, "물, 너는 생명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다. 너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우리 가슴 속 깊이 사무치게 한다. 너와 더불어 우리 안에는 우리가 단념했던 모든 권리가 다시 돌아온다. 네 은혜로 우리 안에는 말라붙었던 마음의 샘들이 다시 솟아난다."

[ 2013년 0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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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해야 건강하다 - 불평등은 어떻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
리처드 윌킨슨 지음, 김홍수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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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리처드 윌킨슨(Richard G. Wilkinson) 저, 김홍수영 역 < 평등해야 건강하다 The Impact of Inequality : 불평등은 어떻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 >를 읽고 / 2008. 03., 392쪽, 후마니타스

저자의 논지는 책의 부제처럼 '불평등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출판사가 책의 제목을 잘못 정한 듯하다. '평등해야 건강하다'라는 제목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책이 '육체적인 건강'을 다루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고, 문제해결의 방향을 '불평등 축소'가 아니라 '평등 지향'으로 왜곡(?)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얻을(배울) 수 있는 점은 네 가지다. 첫째는 사회적 집단(예 : 국가) 내에서 빈곤의 구조나 수준보다 (상대적인) 소득 불평등이 더 치명적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스트레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며, 셋째는 불평등이 빈자나 약자 뿐 아니라 모두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고, 넷째는 불평등을 축소하기가 쉽지 않지만 불평등 수준의 개선은 생각보다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 일본, 유럽 등 일인당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소위 선진국들에서 외형적, 물질적인 부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질병과 범죄 등 사회적 실패를 해결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여기에서 사회적 실패의 지표는 범죄율과 강력범죄, 우울증, 불안, 스트레스,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사망율, 자살율, 사회적 관계 또는 사회적 자본지수, 건강지수, 행복지수 등의 악화를 말한다. 사회적 실패의 주요 사례는 주요 국가들, 특히 미국, 영국, 이태리, 구공산권 국가에서 나타나며 국가 내에서도 주별, 도시별로 큰 편차가 있다.
한국의 경우 OECD에 진입한 만큼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음에도 소득 불평등과 빈부 격차가 OECD 평균보다 심한 데다가 점점 더 그 격차가 커지고 있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연구 초기에 저자가 고민한 지점은 "사회적 실패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요인이 빈곤인가, 불평등인가"였다. 저자는 주요 국가들간 그리고 국가 내의 주와 도시들간 통계수치를 조사한 후 결정적인 요인이 '불평등'이라 결론을 내렸다. '불평등'의 출발점과 토대는 소득 불평등이다. 국민소득이 아주 작은 국가라 하더라도 소득 불평등이 작을 경우에는 미국 각 도시들보다 사회적 실패가 적다.
그는 책 속에서 20세기 초의 통계와 연구결과 뿐 아니라 1960년대 이후의 장기적인 통계와 연구조사 결과랄 토대로 자신의 분석과 주장의 근거를 보여준다. 한국의 경우 그가 70~80년내 소득 불평등 격차가 줄어드는 통계수치를 반영한 덕분에 소득 불평등이 양호한 국가로 분류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속하게 심각해진 불평등 통계가 반영되지 않은 셈이다.

저자는 소득불평등이 어떻게 사회적 실패로 이어지는지 메커니즘을 연구했다. 소득 불평등이 클수록 사회적 관계의 질과 사회적 자본이 악화됨을 보여준다. 물리적인 소득 불평등이 사람들에게 사회적 관계를 악화시키면서 생물학적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켜 궁극적으로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는 보건 연구성과를 적용하여 만성 스트레스의 뿌리가 되는 심리사회적 위험 요소는 '낮은 사회적 지위'와 '빈약한 사회적 관계', 그리고 '초기 아동기의 경험'임을 밝힌다.
'낮은 사회적 지위'는 물질적 생활수준 뿐 아니라 멸시당하는 느낌, 사회적 위계서열에서 열등한 위치에 놓여있다는 느낌, 종속감과 낮은 통제력처럼 사회적 지위가 낮아서 생기는 모든 사회적 감정을 포함한다. 이는 한국의 경우 봉건적인 문화와 군사독재 문화의 잔재로 인하여 일반적인 직장과 사회조직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며 물질적 지위가 비정규직, 일용직, 단순노무직, 재하청구조, 교육 및 자산 수준에 따라 더욱 심한 것이 현실이다.
'빈약한 사회적 관계'는 친구가 없고, 독신생활을 하며, 사회적 연결망이 허술하고, 참여하는 공동체가 없는 상황을 말한다. 가족 붕괴 현상이 심해지고, 1인 가구가 급속하게 늘어나며, 개인주의적 문화가 확신되는 한국의 상황에도 시사점이 큰 부분이다.
'초기 아동기의 경험'은 전체 생애에 걸쳐서 스트레스와 건강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출생 전후의 스트레스 경험을 말한다. 이런 초기 아동기의 경험이 어떠했는지에 따라서 각 인간이 비슷한 사회적 환경에 대처하는 방법이 달라진다. 이는 소득 불평등에 따른 스트레스가 부모와 아이를 통해 장기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소득 불평등'과 '사회적 전략'에 대한 저자의 주장도 크게 유익하다. 그는 서열이 확실한 관계에서 사람들 사이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전략과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전략이 크게 다르다고 설명한다. 전자는 당연히 권위적, 위계적이고 남성중심적, 가부장적이며 억압적, 폭력적일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은 상위계층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동시에 상위계층에게서 당한 피해나 상처를 자신보다 아래계층에게 전가하는 것이다.('자전거 타기 반응'이라는 사회학의 용어가 있음) 문제는 소득 불평등이 심한 사회와 서열사회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강하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학교 폭력이나 가정 폭력, 어린이나 여성에 대한 성폭력 증가, 묻지마 폭력 등은 이런 관점에서도 파고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처럼 무한경쟁을 유도하는 사회구조와 방식, 문화라면 하층, 약자층 뿐 아니라 이들에게 억압을 가하는 중간계층, 중간계층을 억압하는 상위계층까지도 온갖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물론 최상위 계층으로 올라갈수록 스트레스나 억압은 줄어들테지만... 따라서 한국 내에서 최상위 1%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99%는 억압이나 스트레스의 강도나 수준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스트레스와 사회적 관계, 사회적 지위 등으로 인하여 악영향을 받는 취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여러가지 통계와 실험 결과들을 통해 소득 불평등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개선시키는 것이 당사자들의 스트레스 완화에 크게 기여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회경제 구조를 바라보고 분석하는 데 있어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시각이 실질적인 문제해결보다 탁상공론에 그치고 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내에서 논의되는 경제 민주화나 복지국가 담론의 근거는 헌법 상의 기본권이나 지속가능한 경제발전, 공정함이나 공평함이다. 하지만 저자의 설명처럼 구체적인 사회적 병폐와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소득 불평등 완화'라는 관점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사람들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자신의 문제와 소득 불평등의 문제를 직접 연관시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소득 불평등 문제를 여론화시키고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 과정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연방공화국인 미국이나 유럽 등과 제도나 문화, 역사가 크게 다르기 때문에 광역 시도별 소득불평등과 건강이나 사회적 자본, 범죄율 등의 데이터를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 내 관련 통계들이 객관적으로 조사된다면 저자의 연구성과를 한국의 사정에 맞게 적용하여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이상적인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 '평등한 세상'만을 꿈꾸며 힘들게 끝없이 추구하는 것보다 현재의 소득 불평등 격차를 더 이상 늘리지 않도록 하고 조금씩이라도 개선시키는 것이 한국사회 전체를 위해 단기적, 실질적으로 필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분석 결과는 정치적인 분야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소득 불평등과 위계적인 사회문화는 스트레스와 불안은 사람들에게 개인 또는 가족 이외의 사람에 대한 관심과 협력을 멀리하고 상위계층의 가치관에 복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작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 결과를 분석함에 있어서도 일정 부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저소득층의 보수정당 후보 투표 성향 관련하여...) 다시 말하자면, 일부 사람들이 빈부 격차가 더 커지고 빈곤층이 늘어나면 보수정당에게 불리하고 좌파 정당이나 진보세력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하는데, 저자의 분석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도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빈곤은 단지 재화의 양이 작다는 사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빈곤은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빈곤은 사회적 지위다" (마샬 샬린스)
"사회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치열한 서열체계 속에서 아주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동일시하며, 자신의 지위를 잃거나 거부당하는 위험을 최소화하기위해 복종이나 다른 퇴행적 회피행동을 보인다" (길버트 P)

[ '자전거 타기 반응' ]

 개코원숭이는 서열 따지기에 매우 민감하다. 위계질서와 자존심에 죽고 산다고 할까. 그렇다 보니 그 사회에선 폭력이 일상화할 수밖에 없다. 서열은 폭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다. 이놈들은 강자에게 얻어터지면 약자에게 반드시 화풀이를 한다. 특히 수컷 사이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우두머리에게 된통 당한 중간 서열의 수컷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이제 막 성장기가 끝나가는 수컷을 못살게 군다. 공격받은 이 젊은 수컷은 어른 암컷에게 소리를 내지르고, 이 암컷은 다시 어린원숭이를 물어뜯는다. 그리고 어린 원숭이는 새끼 원숭이를 찾아가 작신작신 두들겨 팬다.
이것이 어찌 원숭이 사회만의 일일까. 불평등이 심하고 서열의식이 강해지면 인간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한다. 크든 작든, 사회에서 가정까지 두루 나타나는 게 약자 학대와 화풀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전위된 공격 행동’이라고 부른다.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억압한 사람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다른 대상에게 분노를 전가해 표현하는 행동이다.

상위서열에게서 얻은 상처를 하위서열 학대로 치유하는 건 교도소에서도 일어난다. 이곳은 사회에서 가장 무시당했거나 업신여김 받았던 사람들의 집합소다. 이들 역시 상처 입은 우월감과 자존심을 회복시켜 줄 대상을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출구는 어디에나 있는 법. 격렬한 지배 경쟁과 폭력에 내몰린 이들은 만만한 상대로 성범죄자를 곧잘 선택한다. “적어도 나는 저 개자식보다 낫다”는 심리가 그들에게 열등감을 털고 우월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평등해야 건강하다>의 저자 리처드 윌킨슨은 이런 현상을 ‘자전거 타기 반응’이라는 말로 명쾌하게 정리한다. 물론 이 용어는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의 저서 ‘권위주의적 인성’에서 빌려왔다. 이 용어는 사회 위계적 관계를 경주용 자전거 타기에 빗댄 것이다. 아래(하급자)로는 마구 발길질을 해대면서도 위(상급자)로는 허리를 굽실거리고 머리를 조아리는 경주자의 모습을 연상하면 되겠다.
이는 개인과 집단 심리에 그대로 적용된다.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에게 무시당하면, 업신여길 개인이나 집단을 찾아 폭력을 휘두르거나 차별적 언행을 퍼붓는다. 자신의 우월성을 제삼자에게서 보상받아 잃어버린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남대문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이랄까.

최근 어린이와 여성을 상대로 한 강력범죄가 잇따라 발생해 충격을 던진다. 안양 초등생 납치·살해 사건, 군포 부녀자 실종 사건, 이호성의 네 모녀 피살 사건, 일산 초등생 납치미수 사건 등이 끊이지 않는다. 급기야 대통령까지 일선에 나섰고, 아동대상 성범죄자를 사회와 격리시키는 ‘혜진·예슬법(法)’도 만든다고 한다.
이들 사건의 공통점은 사회 하층부로 밀려 소외된 사람들이 자기보다 약한 어린이나 여성들을 희생양 삼아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희생자는 가해자와 직접 관계가 없거나 그에게 전혀 피해를 입히지 않았으면서도 비극의 주인공이 돼버렸다. 여론은 이들 사건에 대해 거의 한결같이 개인적 폭력과 그 잔인성에 초점을 맞춘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을 텐데, 결과만 주목할 뿐 그 원인은 외면하는 셈이다. 패자 또는 낙오자를 양산해내는 사회적 폭력과 그 구조에 눈을 감는다면 유사 사건은 재발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때그때 증상만 완화하는 대증요법으론 근본치유가 어렵다는 얘기다.
그럼 점에서 윌킨슨의 진단과 처방은 귀 기울일 만하다. 소득격차는 불평등을 가져오고 심화한 불평등은 반드시 극단적 서열 사회를 초래하며 이는 폭력의 일상화로 이어진다. 빈곤지역일수록 폭력이 만연하고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회적 관계는 형편없이 나빠져 각종 범죄가 빈발한다는 것이다.

늘어가는 각종 강력범죄는 점점 뚜렷해지는 사회 양극화의 우려스러운 단면이기도 하다. 불평등이 심해지고 서열화가 강고해지면서 사회는 수평적 협력보다 수직적 경쟁으로 치닫게 마련이며 이런 환경에서 ‘위’에 짓눌리고 ‘아래’를 짓밟는 ‘자전거 타기’는 더 험해질 수밖에 없다. 서열사회는 높든 낮든 모두를 폭력의 피해자로 전락시킨다.
범죄 예방과 단속도 철저히 해야겠지만 좀 더 근원적인 발생 원인과 치유책을 찾는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 하굣길 책임은 아예 사설경비 업체가 맡고, 여성들이 어둡거나 한적한 길을 마음 놓고 걷기도 더 힘들어질지 모른다. 인간이 개코원숭이가 아님을 입증할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http://blog.daum.net/david872/15099394)

[ 2013년 01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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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기도
레이첼 나오미 리멘 지음, 류해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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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레이첼 니오미 레멘(Rachel Naomi Remen) 저, 류해욱 역 < 할아버지의 기도 My Grandfather's Blessings >를 읽고 / 2005. 12., 328쪽, 문예출판사


<내가 사랑한 책들>(법정스님, 2010, 문학의숲)에는 지난 2010년 입적하신 법정스님이 애정어린 마음으로 읽으신 책 50권이 소개되어 있다. 법정스님은 비록 불교 수행자였지만 <내가 사랑한 책들> 안에 소개되어 있는 50권의 책 중에서 불교 또는 불교 수행자에 관한 책은 와타나베 쇼코의 <불타 석가모니> 등 3~4권에 불과하다. 그리고 생각보다 기독교 수행자 또는 신자들의 저서가 제법 많다. 법정스님이 소개한 책을 따라 읽다보면 종교나 사상을 뛰어넘어 인류와 세상, 철학과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던 수도자로서의 법정스님의 마음과 뜻을 느끼게 된다. 이 책도 그 중의 한 권이다.

37년 동안 의사로 일해온 레이첼 박사는 사람들이 고도의 기술 시대에 살면서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선함을 잊고 기술이나 전문직에서 가치를 찾으려고 하지만 사람이나 세상을 회복시키는 것은 전문기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랜 경험을 통해 기쁨과 실패, 그리고 상실의 체험, 심지어는 병도 봉사하고 섬기는 데에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레이첼 박사는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데 이러한 상황들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의 삶에서 일어난 어떤 일도 의미 없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다.
레이첼 박사의 생각과 태도는 의사, 변호사 등 현대 사회의 전문직 종사자들의 비뚤어진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소위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이 책을 통해 '전문성'의 진정한 의미와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했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종교를 '인민의 아편' 정도로 생각하는 집안(그렇지만 저자의 부모는 중산층 전문직 종사자로 사회정의와 봉사에 최선의 가치를 두었다)에서 유일하게 그녀에게 축복의 말을 들려주고 감싸안아주었던 외할아버지는 삭막한 아파트에 사는 어린 레이첼에게 흙을 가득 답은 종이컵을 건네주며 매일 물을 주라고 당부한다. 할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물을 주지만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던 레이첼에게 어느 날 솟아오른 작은 싹은 큰 충격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생명은 이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한단다.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도 생명은 숨어 있는 법이란다. 생명을 자라게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성실함이란다"라며 레이첼 박사가 평생에 걸쳐 기억하는 첫 번째 가르침을 주셨다.
그녀는 "나는 성장해가면서 조금씩 외할아버지와 멀어졌다. 외할아버지는 마치 과학이라는 거대한 바다 안에 둥둥 떠다니는 신비의 작은 섬과 같았다. 성공을 향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많은 다른 것들과 함께 외할아버지 역시 아스라한 기억 저편에 밀어 넣었다"고 말하고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할아버지의 가르침과 말씀이 서로에 대한 섬김과 봉사를 통해서만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스스로가 중증의 지병을 앓으면서 암 환자들을 돌보는 레이첼 박사는 세상을 치유하는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되풀이해서 말한다. 누군가가 우리를 축복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善)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두려움과 무기력함, 불신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지식이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우리 존재로서 봉사하고 섬길 수 있으며 때로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봉사하고 섬기기도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섬기면서 축복을 보낼 때 세상과 우리 주변과 우리 안의 빛은 더욱 밝아진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한 통의 전화, 가벼운 포옹,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것, 따스한 미소나 눈인사 등이 활기를 찾아주기도 하며 떨어진 귀걸이를 찾아주거나 장갑을 집어주는 작은 행동으로 타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되찾아줄 수도 있다고 말하는 레이첼 박사는 할아버지와의 애틋한 추억과 죽음을 앞두었거나 죽음 같은 절망을 체험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삶의 노래를 기록한 이 책을 통해 세상이 살 만한 곳이며, 따뜻한 삶, 자유로운 삶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차분하게 들려준다. 

저자는 '자선'과 '봉사'에 대해 독자들이 다시금 생각토록 해준다.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사람들은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 헤맨다. 그러기 위해 공부를 하고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번다. 각종 보험을 들고 집에는 도난 방지 시스템을 설치하며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 자동차에도 다양한 안전 장치를 매단다. 그러나 결코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는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을 서로 분리시키고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레이첼 박사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은 서로의 선(善) 안에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부탁을 해서 마음 내키지는 않지만 선을 베풀며 증인을 세워 칭찬받기를 기다린다고 해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지낼 만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타종교나 비신도에 대한 '배타주의'나 '복음주의'가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 말씀' 그대로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저자의 자세에 큰 감동을 받게 된다. 기독교 목회자들과 열성 신도들의 '탐욕'과 '변절'에 크게 실망함에도 불구하고 저자와 같은 기독교 신자들이 있기에 아직은 희망이 보인다.
하지만 저자에게 아쉬운 점들도 많다. 저자는 하느님의 축복을 기본으로 하여 질병의 고통에 처한 개인들의 진정한 치유와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현대 사회의 질병이 결코 '개인적'이지 않다는 사회적, 구조적 인식은 부족해 보인다. 현대 보건의학과 심리사회학, 진화생물학 등의 최신 연구결과를 참조한다면, 현대적 질병의 상당 부분이 '사회적 인간이기에 발생하는 사회적 질병'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질병에 걸려 고통받는 사람들의 치유에 힘쓰지만, 그와 더불어 그런 질병의 사회적, 구조적 원인을 찾아 질병의 조건과 가능성을 줄이려는 사회적 노력이 동시에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 2013년 01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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