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 생존과 저항에 관한 긴급 보고서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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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존 버거(John Berger) 저, 김우룡 역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Hold Everything Dear : 생존과 저항에 관한 긴급 보고서 >를 읽고 / 2008. 04., 159쪽, 열화당


저자 존 버거는 지구를 지배하는 독재와 전체주의는 물론 그에 저항하는 집단 속에서 자칫 무시될 수 있는 개개인의 슬픔, 희생, 욕망, 기억을 이야기하며, 그 제목처럼, 세상 구석진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심지어 나귀 한 마리, 풀 한 포기까지에도 세심하게 눈길을 돌린다. 육성급 호텔 안에 갇혀 세계평화를 이야기하는 엘리트들과는 달리, 작가는 스스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인간적인 삶에 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 

9·11 테러,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독재 행위들을 통해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는 부정의(不正義), 거짓 희망, 새로운 형태의 독재를 고발하고, 나아가 이러한 전제주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꿈꾸고 있다. 


미국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해보지 않았던 사람들,  미국과 한국의 언론 권력이 제공하는 정보만을 접한 사람들, 한국에서 한미동맹과 자유민주주의와 진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진정으로 진보와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은 존 버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념과 정치세력화와 정치에만 매몰된 사람들도 그의 말에 귀기울여야 한다.


9 ·11 테러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세계는 더욱 극심한 물질적 탐욕과 정신적 구속의 양극단을 달리고 있다. 미래를 약속하던 정치적인 슬로건들은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있으며, 한편에서는 경제적인 독재가, 다른 한편에서는 군사적인 독재가 오늘의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이는, 오직 이윤만을 추구하고 탐욕만을 부추기는 '지구적 전제주의'에 다름 아니다. 세계는 이러한 전제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적 경제적 시스템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9.11 이후 서구에서 오늘날의 가장 시급한 질문은 "테러리스트는 과연 왜 생겨나며 그 극단적 형태인 자살 순교자는 도대체 왜 만들어지는 것일까."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테러리스트는 '절망 때문에'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테러는 어떤 초월의 길이자,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절망을 온전히 이해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순교자는 그런 초월을 통해 커다란 승리감을 맛본다. 그러므로, 자살이라는 단어는 어느 면에서는 적절치 않다. 

"무엇에 대한 승리일까. ... 절망의 어떤 켜에서 비롯된 수동성과 비통함, 그리고 어리석음에 대한 승리를 말한다. 제일세계의 사람들이 그런 절망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 여기서 내가 언급하는 절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외곬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고통의 조건들과 닿아 있다. 이를테면 수십 년간 난민캠프에 수용되어 있는 것과 같은 상태를 말한다. 이런 절망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 자신의 삶과, 또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삶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느낌. 여러 다양한 켜들에서 이런 것이 느껴지다가, 이윽고 그 느낌은 삶 전체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전체주의에서처럼 의문을 용납지 않는다."


저자는 강자와 약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조작된 희망과 화려함에 눈먼 현 세대의 맹목을 비판한다.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는 고통을 흔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일례로 그는 9 ·11 테러와 2차대전 당시 일본 원폭 투하 사건을 비교하면서 강자(가해자)의 승리 속에 감춰진 약자(피해자)의 고통을 이야기하는데, 강자의 이데올로기와 거짓 희망으로 사람들이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척 가장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치지도자들, 특히 오늘의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극소수의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일례로, 2005년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태풍 카트리나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것은 부시를 비롯한 지도자들의 무관심, 오직 물질적인 이익에만 가치를 두는 권력자들의 방치 때문이었다. 이는 '이익의 추구'가 인류의 교조(敎條)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광신주의이며, 권력자들이 미화하는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은 실상 두 광신 집단 간의 전쟁과 다르지 않다고 작가는 말한다.


폭력으로 가득 찬 세계와 현대사회의 냉혹함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과 영화감독 파솔리니에게 찬사를 보내거나, 약자의 삶, 투쟁과 저항을 노래한 여러 시인들을 추억하며 그들의 시를 인용하기도 한다. 이는 바로 작가가 꿈꾸는 '연대'의 한 형태로, 새로운 형태의 독재에 저항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희망이 아닌 절망이 저항의 힘이 되기도 한다. 감옥에 다녀오는 것을 통과의례처럼 여기고, 자식들의 안위를 불안해 하면서도 그들의 결단에 동의를 표하고, 하루에 고작 이 달러도 안 되는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 가는 그들, 그런 그들로 하여금 죽지 않고 살아가도록 만드는 힘은 바로 '지독한 절망'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모든 불의와 독재 권력들은 이러한 저항을 가장 두려워한다.


강자가 약자를,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두려움이다. 돌멩이, 모래주머니, 구식권총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토마호크 미사일, F16 전투기 등 최신식 무기로 상대하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이러한 극심한 차이를 작가는 장벽에 비유한다. 이 '장벽'(특히 팔레스타인의 장벽)은 모든 것을 양극단으로만 구분하는 흑백논리와 자신과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획일화한 전체주의의 상징물이다.


이는 [두 여성 사진가 자세히 보기]라는 글에서 소개되는 아흘람 시블리의 '추적자' 연작을 통해서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추적자'란, 적군인 이스라엘군에 자원 입대하여 동족을 추적하고 죽이는 팔레스타인 병사들을 이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들은 명백히 배신자지만 그저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이유를 시블리의 사진을 통해 말하고 있다.


책 속에서 저자는 '절망의 일곱켜'라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절망'을 노래한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문장 하나, 구절 하나에서 가슴 깊이 파고드는 아픔과 절망이 느껴진다. 그런데 한국사회 주류에서 배제된 소수 집단과 단체, 해고자, 비정규직, 실업자, 극빈층, 저소득 장애인, 다문화가정에서도 똑 같은 '절망'을 느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찌할까...


< 절망의 일곱 켜 >


"또 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부스러기를 찾아 헤매야 하는

매일의 아침.


눈을 뜨면

이 합법의 황야 어디에서도

생존의 권리를 찾을 수 없다는 깨달음.


해가 가고 달이 가도

나아지는 것 없이

더욱 나빠지기만 하는 삶의 경험.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아무리 진력해도

또 다른 궁지에 닿기만 하는, 굴욕.


지켜지지 않은 채 끊임없이

피해 가기만 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약속에의 경청.


조각조각 산산이 깨지면서 보여주던

저항자들의 본보기.


드러나려 애쓰는 순수를

영원히 눌러 두기에 충분한

우리 스스로의

그 숱한 몸들, 무게들."


저자 존 버거는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밝힌다. 그는 평소 세상에 팽배한 불평등과 억압받는 자들의 삶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2006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폭격으로 죄 없는 민간인들이 죽어 가자, 그 무도한 폭력과 서구세계의 외면을 강력히 비난하는 글을 기고하고 레바논을 위한 '게르니카'를 그리기도 했다. 피카소의 명작 [게르니카]를 모사한 이 그림이 책 앞머리에 실려 있다.

팔순을 넘긴 작가의 눈은 때로는 날카롭게, 또 때로는 따뜻하게 지금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열여섯 편의 글은 세상의 독재와 부정의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뜻을 지켜내기 위한 하나의 저항이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리려는 것이다.


<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


"오후의 벽돌이 여행의 장밋빛 열기를 품을 때


장미는 숨 쉴 푸른 공간을 싹 틔우고

바람처럼 꽃 피울 때


듬성한 자작나무들이 트럭 안의 급한 마음들에게

바람의 은빛 애기를 속삭일 때


울타리 나뭇잎들이 한순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던

빛을 간직할 때


그녀의 손목 맥박이 공중을 맴도는 굴뚝새의 가슴처럼 고동칠 때


대지의 합창단이 하늘에서 자신들의 눈을 발견하고

밀밀한 어둠 속에 서로의 눈을 뜨게 할 때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개리스 애번스)


[ 2013년 3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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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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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존 버거(John Berger) 저, 최 민 역 <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 >를 읽고 / 2012. 08., 192쪽, 열화당


'상식' 또는 '평론가식 태도'에서 벗어나 미술품, 사진 그리고 광고의 이미지를 보고 해석하는 기존 관점에 대해 생각해 보기...  

전통적인 미술사나 미술평론에서는 보통 미술작품을 볼 때 작품을 감상하는 이상적인 방식이나 태도가 있다고 가정한다. 마치 어떤 정답과도 같은 감상법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존 버거는 이러한 감상법이 어딘가 잘못된 또는 편협한 방식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복제 기술로 인해 이미지가 어떤 식으로 변용되었는지, 누드화에서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시선의 정체가 무엇인지, 실제처럼 보이는 유럽의 유화에 담긴 소유관계와 무의식적으로 노출되어 온 광고 이미지의 본질 등을 톺아보며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들을 던지고 있다.

"미술이란 그것이 지닌 유일무이한 변함없는 권위를 통해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미술은 불평등을 고상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위계질서를 짜릿한 긴장감을 주는 것으로 만든다. 소위 국가의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은 현대의 사회 시스템과 그것이 우선적으로 중요시하는 것을 찬양하기 위해서 미술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다."(p.36)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결정된다. 여자 자신 속의 감시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감시당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p.56)

"유럽의 누드 예술 형식에서 화가와 관객(소유자)은 보통 남자이며 대상으로 취급받는 인물은 보통 여자다. 이런 불평등한 관계는 우리 문화(서구 문화)에 아주 깊이 각인되어 있어 지금까지도 많은 여자들의 의식을 형성한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여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남자들이 여자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신들의 여성성을 살펴본다.(손거울, 화장대, 화장실의 거울, 쇼윈도우 앞의 여성처럼...)"(p.75)

이 책은 세미나 교재였다. 세미나에 참여하다 보면 이렇게 새로운 도전 과제를 접하기도 한다. 그것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세미나의 장점이다. 40년전 존 버거와 스벤 블롬버그, 크리스 폭스, 마이클 딥 그리고 리처드 홀리스가 참여한 영국 BBC TV 시리즈를 엮은 것이다.

저자를 통해 광고에 대해 그동안 내가 지니고 있던 의혹과 용도와 배경과 광고주의 목적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함께 탄생하고 성장한 광고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상품 선택의 자유'라는 광고의 이면에 숨어 있는 본질을 폭로한다. 

"광고의 내용을 보면 이 화장품과 저 화장품, 저 자동차와 이 자동차 중에서 고를 수는 있으나 한 시스템으로서의 광고 자체는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은 채 오직 한 가지 제안 밖에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무엇인가를 더 사들임으로써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생활이 변하게 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또한 광고는 우리가 비록 돈을 써 버려서 가난하게 되더라도 우리가 조금 더 사들인 바로 그것들이 다른 면에서 우리를 부유하게 해줄 것이라고 애기한다."

저자는 광고가 사람들의 어떤 욕망을 자극하고 어떤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과 이미지를 조작, 조절하는지 말해준다. 

"광고는 겉보기에 전과 딴판으로 변화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고, 그러한 변화의 결과로 그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남을 사로잡는 매력이란 곧 선망의 대상이 되는 데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광고는 이러한 매력을 제조해나가는 과정이다. 광고는 쾌락을 찾으려는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일깨워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광고는 쾌락의 실체적인 대상을 제공할 수 없다. 어떤 쾌락을 얻는 본래의 방식을 떠나서 정말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광고가 약속하는 쾌락이 아니란 행복이다. 즉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외부적으로 판단되는 행복이다. 선망받는 행복이 곧 매력인 것이다. 광고는 한 여인으로 하여금 그녀가 그 상품을 구입하면 자신이 선망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상상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광고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 자신에 대한 애정을 슬쩍 훔쳐내어선 광고 상품의 구입 대가로 그 애정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다."

미술품, 명작과 광고의 관계는 소비자들의 소유욕과 비위를 자극하는 것이다.

"광고에 미술작품을 '인용'하는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이다. 즉 미술은 풍요의 상징이며 훌륭한 생활의 테두리에 속하는 것이다. 미술은 세상 사람들의 부와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마련한 장식의 일부다. 따라서 광고에 인용된 미술작품은 거의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애기할 수 있다. 즉 그것은 물질적인 부와 정신적인 것을 한꺼번에 의미한다."

"사실상 광고는 대부분의 미술사가들보다 더 철저하게 유화의 전통을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광고는 미술작품과 그 관객(소유자) 간의 관계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아차렸고, 그 점을 이용하여 광고를 보는 관객(구매자)을 잘 설득하고 비위를 맞추어 물건을 사게 만드는 것이다.
"광고는 소비사회의 문화다. 광고는 이미지를 통해 바로 이 소비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념을 선전한다. 이 이미지들이 유화라는 언어를 사영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형식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소비사회와 광고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자신의 현재 생활방식이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데 있다. 사회의 일반적 생활방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 안에서의 자신의 개인적 생활방식에 대해 불만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광고에서는, 만일 그가 광고하는 물품을 구입한다면 그의 생활이 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애기한다. 광고는 그의 현재 상태가 아닌, 그보다 더 나은 상태를 제시한다."

"광고는 '만일 당신이 아무 것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될 수 없다'라는 두려움을 유발시키고 이를 이용한다. 광고의 선전에 따르면, 돈을 쓰는 능력을 잃으면 문자 그대로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능력이 있어야 사랑받알 수 있게 된다.
광고는 원칙적으로, 그 광고가 팔려고 하는 특별한 상품의 기능을 통해 딴 사람으로 변신하려는 기대를 갖고 있는 노동자 계층에게 호소한다.(신데델라) 중류층에게 광고는, 그러한 상품들을 구입하면 전체적으로 조화가 잘 된 분위기를 통한 상호관계의 개선을 약속한다.(요술 궁전)"

"광고의 진실성이란 광고가 내건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는가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광고가 주는 환상이 그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품는 환상에 얼마나 적절하게 들어맞느냐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광고는 본질적으로 현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백일몽에 적용된다."

광고가 현대사회에서 노동자, 소비자들의 자각과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부정적이다.

"(산업사회에서)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는 만인의 권리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사회적 환경은 개인으로 하여금 무력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그는 그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상태와 현재 그 자신의 상태와의 모순 속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그 모순과 원인을 충분히 깨닫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에 참가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무력감과 함께 뒤섞여서 백일몽으로 용해되어 버린 선망에 사로잡힌 차 살아가야 한다.
의미없는 노동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끝없는 현재는 꿈속의 미래에 의해서 '상쇄돼 버린다.' 이 미래의 꿈 속에서 노동하는 순간의 피동성은 상상적인 항동에 의해 대체된다. 백일몽 속에서 피동적인 남녀 노동자는 능동적인 소비자로 바뀐다. 노동하는 자아는 소비하는 자아를 선망하는 것이다."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들어냈다. 무엇을 먹을까, 무슨 옷을 입을까, 무슨 차를 탈까 하는 선택은 의미있는 정치적 선택을 대치하고 있다. 광고는 사회 내부의 비민주적인 모든 것들을 은폐하거나 보상해 주는 일을 돕는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또 다른 지역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은폐해 준다."

광고에 대한 저자의 결론 역시 아주 부정적이고 시니컬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태동한 이래 몇 십년 동안 광고를 정점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보여준 모습은 저자의 결론을 전적으로 긍정하도록 한다.

"광고는 획득할 수 있는 능력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인간의 기능이나 필요성은 이 능력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자본주의 문화 안에서 그와는 다른 종류의 희망이나 만족감 또는 쾌락은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광고는 이 문화의 생명이고 - 광고 없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 동시에 광고는 이 문화의 꿈이다.
"자본주의는 다수의 관심을 가능한 한 좁은 범위 안에 가두어 놓음으로써 그 생명을 이어 나간다. 이것은 한때, 일단은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수탈로 달성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발전된 국가들'에서 무엇이 바람직한 것이고 무엇이 바람직하지 않은가에 잘못된 기준을 부여함으로써 이를 달성하고 있다."

 

한국은 적어도 광고의 목적과 효과라는 측면에서 이 '발전된 국가'의 범주 안에 속할 것이다.


[ 2013년 3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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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비밀 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 - KISON REPORT 2
이흥환 엮고 지음 / 삼인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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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흥환 편저 < 광주에서 한국전쟁까지, 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 장면 >를 읽고 / 2002. 12., 289쪽, 삼인

1. "한국군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점은 인력이나 장비가 아니라 지휘력 부재와 훈련 미흡이 있음.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 한국군 내에는 지휘력 부재가 만연되어 있음. 지휘력 부재와 훈련 미흡의 상태가 개선되지 않는 한, 추가 조직을 허가하고 추가 장비를 조직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낭비가 될 뿐임. 한국전 개전 후 지금까지 한국군이 유실한 장비는 10개 사단이 필요한 장비의 양을 초과했음. 더구나 장비를 유실해 가며 그만큼 적에게 타격을 입힌 것도 아니며, 어떤 경우에는 전투와 아무 상관없이 유실된 경우도 있었음"(1951. 5)

2. 대화록 (1971. 12)
- 하비브 : "이전에 (당신이) 내게 말하길, 가까운 장래에 북한이 침략해 올 것이라는 조짐은 없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가?"
- 이후락 : "변한 것은 없다. 침략 조짐은 없다."

3. "박정희 시해 사건이나 12.12 사태가 한국에서의 우리의 기본적인 이해관계를 변화시키지는 않았음. 안정이 유지되고 대다수 한국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치발전이 진행된다면 안보,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최상의 상태가 유지될 것임. 한국인들이 국제사회에서 미국 없이는 안보 정치 경제적 발전을 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국내의 간극을 잇는데 (최소한 당분간만이라도) 그렇게 결정적이진 않지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은 종전보다 커졌음."(1979.12)

4. "박 대통령이 또 북한 위협론을 과장하고 있음. 우리 측 정보 판단으로는 현재 그런 조짐은 없으며, 이 문제에 관한 한 한국에 아무런 대꾸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됨. 그럼에도 박 쪽에서 반복해 이 문제를 거론할 경우, 미국 언론 등을 통해 직접 북한 위협론에 대한 우리 측의 판단을 대중에게 알리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음"(p.166)

'1'은 맥아더에 이어 미국 극동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쟁을 총 지휘한 리지웨이 장군이 육군참조총장에게 보낸 1급 비밀전문 중 일부이고, '2'는 주한 미국 대사인 하비브가 미국 국무부에 보낸 1급 비밀문서로서 1971년 12월 2일 박정희 군사정권이 비상사태 선포를 며칠 앞둔 상태에서 자신에게 이를 알리려고 온 한국 중앙정보부 부장인 이후락씨와의 대화록 중 일부다. '3'은 1979년 전두환의 12.12 쿠데타 이후 긴박했던 3주 정도의 막후 활동을 끝낸 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가 본국 국무부에 보낸 2급 비밀문서 '상황 평가서' 중 일부. '4'는 1972년 2월 미국 닉슨의 중국 방문 전에 자신을 만나달라는 박정희의 친서에 대한 1971년 12월 미국 국무부의 평가 보고서 비밀전문 중에 들어 있다.
이 비밀기록들은, 대한민국의 체제가 어떻게 이루어지던 미국의 입장이고 태도는 오로지 '미국의 국익'이 우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인의 생명도, 한국민중의 삶과 행복도, 자유니 민주주의니 하는 하찮은 것들도 모두 후순위일 뿐이다. 결국 '한미동맹'이나 '상호수호조약'은 '미국의 국익'이라는 범위 내에서 가능할 뿐임을 보여준다.

최진섭 작가의 <법정 콘서트 무죄>를 읽다가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작년에 구해놓았다가 읽지 못한 미국 외교비사를 다룬 이 책을 책꽂이에서 찾았다. 이 책은 저자가 미국 워싱턴에서 운영되는 KISON(Korea Information Service on Net) 프로젝트의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가 KISON의 한국보안문서(KSA, Korea Security Archive)에 보관되어 있는 미 행정부의 비밀 해제 문서를 가려 모은 일차 자료집입니다. 미국은 정보공개법에 의해 그동안 기록하여 두었던 비밀문서를 단계적으로 해체한다.

며칠 전 이명박 정부에서 국가기록법에 의해 보관해두어야 할 정보 중 비밀기록을 모두 폐기했다는 언론기사를 접한 것은 이 책을 읽은 다음이었다. 역사적 사실을, 그것도 행정부의 최고 권력을 행사하면서 중대사를 담당했던 청와대와 행정부의 중요 비밀기록을 폐기해 버리면 당장은 차기 대통령이 행정부를 운영하는 데에서도 난관이 발생할 것이고, 장차 집권 5년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평가할 역사 자료도 없어지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왕도 자신의 재임기간 전부에 대한 사관의 기록을 폐기한 경우가 없었다. 짧은 기간은 있어도. 이런 반역사적인 관점과 저질스런 태도를 가진 자가 5년간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대통령실에 근무하였으니 무엇 하나 당당하고 타당한 일이 있었을 지 안타까움과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미국은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도 한반도와 연관이 있었지만, 특히 1945년 이후 한국의 정치, 외교, 군사, 경제, 사회, 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현대사를 이야기하고, 북핵 문제를 이야기하고, 한미FTA를 이야기하고, 국가보안법을 이야기하고, 개혁과 진보를 이야기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 자신이 갑자기 한심해지는 순간이었다. 책을 펴는 순간 출판사의 소개 글에 꽂혔다.

"미국은 단 한순간도 한국 현대사에서 눈을 땐 적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은 한국을 관찰하고, 토론하고, 기록하며, 보존한다. 한국사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미국의 국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 CIA, 국방부, 국무부 등 미 행정부 비밀문서함 속의 1차 기록들은 한반도에 얽힌 미 국익의 함수 계산이 어떻게 계산되고 어떤 답을 이끌어냈는지 그 전 과정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미 행정부의 비밀문서함이 열리는 순간, 1980년의 광주에서부터 신군부 탄생, 박정희 시대의 정치판, 6.25 비화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인 역사적 장면들이 생생한 현재형으로 되살아난다."(출판사 소개 글)

이 책에 속에 들어있는 비밀자료는 미국 국무부 자료가 대부분이지만, 국방부와 CIA 자료도 일부 있다. 미국 정부는 한미관계에서 극도로 민감하여 최대한 공개를 늦추어야 할 자료들, 예를 들어 한국전쟁시 미군의 작전과 CIA의 활동, 5.16 쿠데타시 주한미군과 군정보국과 CIA의 활동, 광주학살 당시 미군과 군정보국, 그리고 CIA의 활동은 공개하지 않았다. 
물론 저자가 직접 번역하고 정리한 자료 말고도 보안문서는 무진장 많다고 한다. 저자 이야기로는 저자가 사용한 자료는 전체의 백만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저자가 정리한 내용만으로도 대부분의 한국 내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용들이다. 어떤 내용은 평소에 반미 성향을 강하게 지닌 시람들도 싫어할 것들이다. 하지만 저 자료는 실제로 존재하고 저런 자료와 정보를 토대로 미국 정부는 한국을 분석, 판단한 후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다.
유신시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허위 정보와 대국민 협박, 주한미군 철수의 진실, 광주항쟁에서 전라도 출신 장교의 투입, 미국의 판단과 행동의 기준, 유신 계엄 선포의 막전막후, 818 도끼사건에 대한 주한미군과 백악관의 대처 과정 등 전혀 몰랐던 또는 소문으로만 듣던 애기들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실사구시'해야 한다. 추측과 정황판단, 부족한 정보를 토대로 언론에 마사지되어 발표되는 정보로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을 내리기에는 한미 관계는 너무 민감하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 2013년 3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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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 루쉰문고 3
루쉰 지음, 공상철 옮김 / 그린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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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루쉰 저, 공상철 역 < 외침 吶喊 >을 읽고 / 2011. 07., 216쪽, 그린비


왕스징이 출간한 <루쉰전>(2007 다섯수레)와 함께 읽었다. <광인일기> 등 작품 속에 들어있는 단편소설은 거의 대부분 작년에 읽은 <루쉰 소설 전집>(2008 을유문화사)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이번 작품 <외침>은 루쉰의 인생역정과 반제반봉건 활동과정, 그리고 잡문과 격문 등을 <루쉰전>을 통해 알게된 후에 읽었기에 지난 번 작품과 다르게 다가왔다.

자신이 기대를 걸었던 신해혁명이 실패하고 이후 일본에 건너가 유학시절 동안 열성적으로 노력한 반일반봉건 활동마저 실패한 후에 루쉰은 처절하게 무너지면서 스스로 중국 역사와 중국 인민, 그리고 다른 세상의 이론 등을 공부했다. 몇 년 동안 누가 자신을 부르기 전에 스스로를 갈고 닦은 셈이다. 그런 연휴에 처음 쓴 작품이 <광인일기>였다는 것은 1910년대 말의 루쉰은 중국 인민들을 '깨우쳐야' 한다는 생각이 강렬했음을 보여준다.

<외침>에는 1918~22년 사이의 소설 14편을 수록하고 있다. 이 단편소설들은 중화민국 시기에 중국인들이 체험한 고통과 혼란, 무지몽매한 민중의 모습을 보여 준다. 중국인의 삶을 해학적으로 푸는 루쉰의 소설을 통해 그의 생애에 걸쳐 나타나는 민중에 대한 애정과 번민, 자유를 향한 의지와 희망을 읽을 수 있다.

루쉰은 스스로 자신의 소설에 대해 “나는 병적인 사회에서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글의 제재를 많이 얻었다. 그 목적은 병의 원인을 드러내어 치료에 주의하도록 각성시키기 위해서였다”라고 밝힌 바 있다. 예컨대 <광인일기>는 식인(食人)의 공포 속에 사로잡힌 광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그 광인은 “30여 년 미몽(迷夢) 속을 헤매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고, 5000년 식인의 역사를 꿰뚫고 있다. 근대의 함정을 발견하고, 오랫동안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은유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식인의 고리를 깨기 위해 움직인다.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하며.

루쉰은 중국인을 각성시키기 위해 기본적으로 무지몽매한 민중을 형상화하고 있다. ‘식인’의 공포 속에 정신병을 앓고 있는 광인, 문자를 쓸 줄 알지만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는 쿵이지, 화(火)가 금(金)을 억누르고 있다 하여 결국 죽게 되는 아기의 엄마 단씨댁 <내일>, 변발을 자른 것으로 심리적 고초를 겪는 N과 칠근 <두발 이야기>와 <야단법석>, 애들은 줄줄인데 흉년과 기근, 가혹한 세금으로 신음하는 룬투(<고향>), 권세와 혁명에 일희일비하는 군중들 <아Q정전>. 이들은 모두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는 중국인, 치료를 받아야 할 병리적 모습의 중국인을 보여 준다. 루쉰은 이렇게 병적 현실을 드러내어 중국 민중의 ‘각성’을 희망하였던 것이다.

출판사는 루쉰이 '중국 현대문학의 기원'이라고 평한다. 나는 중국 근대문학도 현대문학도 잘 모르기에 출판사의 평가에 선뜻 공감할 수 없다. 그러나 <광인일기>, <쿵이지>, <아Q정전>, <고향> 등의 작품을 읽어보면 그 작품들이 중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을 정도의 작품은 될 것임을 느낀다. 
그리고 루쉰은 문학의 틀을 넘어 현실에 대한 과감한 비판, 권력에 대한 풍자, 약자를 향한 희망을 보임으로써 20세기 초반 식민지 봉건사회였던 중국의 어두운 시기에 중국 지식인들과 인민들에게 구원의 등불이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에 동의한다. 물론 중국 이외의 다른 국가들의 운동가들과 민중들에게 있어 '인류의 스승'이라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 2013년 3월 0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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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전 -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 개정판
왕스징 지음, 신영복.유세종 옮김 / 다섯수레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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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왕스징(王士菁) 저, 신영복/유세종 역 < 루쉰전,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 >를 읽고 / 2007. 09., 471쪽, 다섯수레


루쉰의 작품은 나 머리 속 깊이 남아 있다. <광인일기>의 '식인'과 <아큐정전>의 '정신승리'는 차갑고 똑똑히 각인되었다. 다른 작품 역시 비록 작품의 배경은 중국 근현대사였지만, 나에게는 21세기에 접어든 한국사회에 적용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가 활동한 때로부터 100년이 지났지만 루쉰은 이미 시대를 달리하고 공간을 달리해서 후세대들에게 끊임없이 읽히고 재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루쉰은 중국 뿐 아니라 전세계 문학계에서 <아큐정전>과 <광인일기> 등 충격적인 작품으로 중국 근대문학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저자 왕스징은 그가 천재적 문학성과 민중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1920~30년대 중국의 암흑기를 정면에서 감당하며 자기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고 간 ‘실천적 지식인의 초상’이라 평가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루쉰의 유년기를 부드럽게 묘사하고, 루쉰의 생존 당시 중국 사회의 정치적 소용돌이를 생생한 뉴스처럼 전달하며, 개인적 좌절과 사상 변화 과정을 성실하게 분석한다. 왕스징을 통해 작품으로만 상상하던 루쉰의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함으로써 그런 작품이 어떤 과정에서 창작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옮긴이의 글'에 루쉰의 아들이 왕스징의 책을 여러 루쉰 평전 중에서 "가장 잘 된 것"이라한 말을 덧붙였다. 목차를 보면 5부 제목이 '한 사람이 조국과 민중을 위해 얼마나 일할 수 있는가'이다. 이 표현은 한 인간에 대한 그리고 한 혁명가에 대한 최고의 찬사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로서는 아무래도 루쉰의 장점만 다루었거나 일방적으로 호의적인 부분만 집중적으로 다룬 평전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여러가지로 신경쓰면서 읽어야하는 부담도 있었다.(작년에 읽었던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위화가 제시한 '열 개의 단어'에 루쉰이 포함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중국 근현대사에서,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루쉰이 '교조화' '우상화' 되어 오히려 당시 학생들이 루쉰에 대한 좋지않은 기억이 자리잡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게 다소 부풀려진 평가를 제외하더라도 루쉰의 삶은 전세계 위대한 혁명가나 사상가에 못지 않은 것 같다. 한국 현대사로 보면 함석헌 선생이나 리영희 선생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들 모두가 절망 같은 어둠 속에서도 늘 '희망'을 꿈꾸고 애기했다. '어둠 속을 밝히는 한 줄기 빛'처럼...

루쉰은 중국 인민들이 이뤄낸 최초의 혁명인 신해혁명(1911~2년)이 고스란히 위안스카이 군벌정부에 넘어갔을 때, 좌절감과 외로움을 느끼며 ‘무쇠로 지은 방’에 대해 말한다. ‘무쇠로 지은 방 안에서 잠을 자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굳이 깨워서 고통 속에 죽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는 혁명의 열매를 군벌의 손에 가볍게 넘겨준 민중들에 대한 절망이 담겨 있다. 하지만 루쉰은 결코 희망을 버릴 수 없다는 신념을 지켜나간다. 앞날의 희망을 위해 루쉰은 자신의 무기, 붓을 들기로 결심하고, 첫 단편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했다. 이 글을 통해 루쉰은 낡은 예법과 도덕에서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내어 ‘사람을 잡아먹는’ 봉건사회의 추악한 전통을 고발하면서, 민중들에게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반대하는 5·4운동의 대오에 적극 동참하기를 호소한다. 그 자신도 어둠 속에서 전투의 빛을 발하는 비수 같은 ‘잡문’들을 통해 조금도 주저함 없이 신문화운동에 참가한다.
당시에 소설 속에 담긴 그의 마음은 나에게도 깊이 기억된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원래부터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사실 길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

루쉰이 잡문에 발표한 글 중에서 또 인상적인 것은 혁명이나 대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분위기나 문화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 문장을 집단주의, 당위주의 문화가 강한 21세기 한국 사회의 진보정당이나 진보진영, 시민사회운동 단체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할 권리가 없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이 희생하지 못하도록 저지할 권리도 없다. (중략) 희생을 선택하는 이 문제는 개인에 관련된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도둑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을 다 도둑이라고 의심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루쉰을 "평생을 전선의 앞이 아닌 뒤에서 하지만 전선의 맨 앞에서 전진하는 전사처럼 살다갔다"라고 표현한다. 그런 루쉰에게 긴장을 풀어주는 벗은 ‘청년들’이었다. 루쉰이 수많은 잡문을 통해 연설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들 중에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와 닿는 한 단어는 ‘희망’이다. 루쉰은 그 희망을 청년들에게서 발견하고, 스스로 희망이자 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일생을 새겨놓았다. "아이가 밥을 헛되이 땅에 버렸다고 해서 농부가 그것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루쉰의 잡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는 쌀쌀하게 눈썹 치켜세워 응대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머리 숙여 소가 되리라(橫眉冷對千夫指, 俯首甘爲孺子牛)." (루쉰의 시 <자조(自嘲)>에서)
왕스징은 청년들에 대한 루쉰의 헌신적인 사랑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샤먼에서, 광저우에서 상하이에서, 베이징에서 루쉰이 청년들과 나눈 우애는 나이를 초월한 헌신적 만남이었다. 특히 1923년부터 1926년까지 루쉰이 살던 베이징 집은 당시 문학을 좋아하는 청년들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본래 가로등 하나 없이 적막하고 쓸쓸하던 골목이었는데, 루쉰이 이사 온 뒤로 날이 갈수록 많은 청년들이 찾아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 루쉰은 손수 남포등을 들고 나가서 그들을 맞았다. 루쉰은 ‘호랑이 꼬리’라고 부르는 서재에서 현대평론파를 향해 날카로운 잡문을 쓰거나 청년들을 접대했는데, 몇 시간씩 계속되는 대화에도 청년들은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청년들을 가르치고 기르는 것은 루쉰이 평생 동안 하고자 한 중요한 일이었다. 청년들이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으면 루쉰은 그들에게 무슨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긴 것 아닌가 하고 불안해했다고 한다.


왕스징은 초기에 진화론에 입각해 청년들을 바라보던 루쉰의 의식이 1927년에 광저우에서 벌어진 ‘피의 유희’로 인해 서서히 변화해간다고 설명한다. "다 같은 청년들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투서로 밀고하고 관원을 도와 사람을 체포하는 사실을 목격"하면서, 치열한 계급투쟁이 루쉰의 머릿속에 있던 소박한 진화론적 세계관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그리하여 1927년 이후, 루쉰은 변화된 현실과 혁명 세력의 구국운동을 예리하게 관찰하면서 진화론자로부터 혁명적 계급론자로 완만하게 옮겨갔다고... 

전해진 기록에 따르면, 루쉰은 평생에 걸쳐 청년들 500여 명을 친히 접대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2,200여 명의 청년들이 보내온 편지를 손수 읽어보고 3,500여 통의 답장을 썼다. 소설 3권, 산문회고록 1권, 산문시 1권의 합계가 약 35만 글자에 이르고, 잡문 16권이 650편에 135만 자에 이른다고 한다. 그 이외에 중국 고전문학 작품 연구저작, 외국 작품 번역, 희곡 2권, 문예이론서 9권, 단편 논문 50편에 이른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이렇게 구체적인 작품의 권 수와 글자 수까지 따지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루쉰이 평생에 걸쳐 청년 5백 명을 만나 이야기하고 2천2백 명의 청년과 편지를 교류했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런 수치와 작품의 양이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과 중국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후 중국 현대 문학계에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실증적인 분석이 없다. 
따라서 나는 저자 왕스징이 중국 현대문학과 혁명운동에 대한 루쉰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부풀리기 위해 무리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 속에는 문학작품들과 더불어 논적의 심장부를 향하는 비수와도 같은 잡문들이 등장한다. 몇 가지를 예를 들어보면, 1925년에 베이징여자사범대학 사건이 계속 확대되고 전국 각지에서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자, 제국주의자들은 총칼로 시위에 나선 군중들을 쓰러뜨렸으며 제국주의와 봉건군벌 편에 선 부르주아 문인들은 그들을 옹호하기에 바빴다. 이때 루쉰은 몹시 격분해 그들을 규탄한다. 
"상하이의 영국 경찰이 시민들을 학살하는데도, 중국의 총을 가진 계급 중에 이를 항의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거의 없다. ……감히 말하건대 중국 사람 가운데 다른 나라 사람보다 더 음흉한 눈길로 성실한 청년들을 노려보는 자들이 있다. ……중국을 좋게 만들려면 다른 일도 해야 할 것이다!"

베이징여사대의 치열한 투쟁이 각계각층 사람들에게 폭넓은 지지와 성원을 받으며 마침내 학생들의 승리로 끝나자, ‘온화’하고 ‘공정’한 얼굴로 교육 당국이 이미 패배한 마당에 ‘물에 빠진 개를 때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문인들이 있었다. 루쉰은 이에 대해 ‘물에 빠진 개를 끝까지 때릴’ 것을 완강하게 주장했다. 
"혁명당에도 온통 새로운 풍조가 나타났는데, ……우리더러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말고 그것들이 제멋대로 기어 올라오도록 내버려두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놈들은 기어 올라왔고, 민국 2년 하반기까지 숨어 있다가 2차 혁명시기에 갑자기 뛰어나와 위안스카이를 도와 숱한 혁명가들을 물어 죽였다. 그리하여 중국은 날로 암흑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 때문에 그 뒤 각성한 청년들이 암흑에 반항하기 위해 더 많은 기력과 생명을 허비하게 되었다."

1924년 2차 내전 뒤에 우위를 차지한 돤치루이 군벌 정부는 일본 제국주의가 요구하는 대로 펑위샹의 국민군을 공격하면서 통치기반을 유지하고자 한다. 1926년 3월 18일 제국주의에 무력하게 대처하는 행정부에 맨손으로 청원하러 간 군중과 청년 학생들에게 돤치루이는 사격을 명령한다. 순식간에 국무원 문 앞에는 붉은 피가 낭자했고, 그 자리에서 40여 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민국 이래 가장 캄캄한’ 이 날에 루쉰은 더없는 분노를 느끼며 붓을 들었다. 
"범과 이리가 중국을 제멋대로 뜯어먹어도 누구 하나 상관하지 않는다. 상관하는 사람은 몇몇 나이 어린 학생들뿐이다. 만약 당국자들이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양심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끝내 그들을 학살하고 말았다. ……지금 벌어진 일은 한 사건의 결말이 아니라 한 사건의 시작이다. 먹으로 쓴 거짓말은 결코 피로 쓰인 사실을 덮어버리지 못한다. 피로 진 빚은 반드시 피로 갚아야 한다. 빚이란 오래 미룰수록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 2013년 3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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