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의 건축 -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정기용 지음 / 현실문화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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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정기용 저 < 감응의 건축 :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을 읽고 / 2008. 10. 15., 382쪽, 현실문화연구


건축 일반에 대해 그리고 공공건축물과 공간계획에 대해 독자들이 자신의 '관점'을 갖출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책...


이 책은 1996년부터 2006년까지 만 10년간 돈벌이 보다 농촌과 마을 공동체를 고민하면서 면사무소부터 납골당까지 크고 작은 30여 개의 공공건축물 설계작업을 진행했던 '무주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다. 그 주인공은 건축가 정기용, 즉 정기용 선생의 건축 활동 내지 건축에 대한 철학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저자 정기용의 건축에 대한 철학은 말 그대로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농촌의 공동체 계획과 건축 계획을 준비할 때 그는 가장 먼저 '농촌'을 고민했다. "아직도 농촌을 '개량'의 대상이나 구제해야 할 문제로만 바라보는 한 아무 것도 제대로 해결될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제 농촌은 없다. 우리들의 소중한 국토가 있을 뿐이며, 농촌과 도시 사이만 있을 뿐이다."(p.7~8)


건축을 어떤 전문가들만의 유희나 시혜가 아니라 '공공서비스'로 바라보는 그의 관점 역시 신선하고 정확했다. "주민들에게는 면사무소보다 더 필요한 것이 면 단위의 공중목욕탕이라는 것을 소위 공간의 전문가들이란 사람들만 알지 못한다. 아주 사소한 이런 것들을 섬세하게 배려하는 일이 전문가들과 공공의 서비스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다."(p.9)

 

도시나 농촌 등 공동체의 공간과 건축을 대할 때 역사적인 식견과 관점을 가지고  거주 문제와 지역 문제, 도시 문제와 주택 문제들이 서로 연동되는 종합적인 사고와 대처가 필요함을 지적하는 지점에서는 감탄이 절로 난다.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 다른 질문을 던질 것이다. 도시냐 농촌이냐도 아니고, 전원주택이냐 아니냐 하는 상업적 용어에 매몰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디에서 나는 자연과 더불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하는 점으로 이행할 것이다. '인간답게'란 혼자 외롭게 자기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따로 또 같이'의 가치관을 다시 공유하는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유목민은 다시 인간이 될 것이다."(p.11)


그런 관점과 태도를 유지한 채 무주군청과 군민들이 요청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였으니 각각의 공간 계획이나 건축이 자연과 호흡하고 이야기를 지니게 되며 사람들과 소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환기의 공공시설을 고민했던 진도리 마을 회관과 안성면/적상면/주남면/무풍면 주민자치센타, 사람의 삶과 자연의 삶을 고민하여 시대가 원하는 건축을 시도했던 공설운동장과 무주군청 뒷마당 리노베이션, 그리고 무주시장 현대화 프로젝트, 건축을 총체적으로 접근했던 청소년 수련관과 청소년문화의집, 곤충박물관과 향토박물관, 그리고 천문과학관과 버스정류장에는 그의 철학과 고민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또한 농촌의 문제를 넘어서는 접근이 돋보였던 농민의 집과 된장공장, 그리고 전통문화공예촌, 지속 가능한 사회를 구현하려고 노력했던 보건의료원 리노베이션과 종합복지관, 노인전문요양원과 무주공설납골당 프로젝트는 소위 '농촌문제'를 넘어서는 대상 프로젝트를 주어진 한계와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미래의 세대에게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하려던 저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특히 나는 '면 단위의 공중목욕탕'과 '공설운동장'에서 나타나는 "주민이 원하는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공공건축과 공공서비스의 가장 근본적인 태도와 접근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도 몇 개 건축물 설계에 실무자로 참여한 경험이 있지만) 지난 수십 년간 세금을 쏟아 부으며 건축된 수많은 관공서와 공공건축물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왔다.

건축과를 졸업했다는 것이 그리고 그 건축물을 설계한 이들 중 상당수를 내가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자부심이 아니라 굴욕이고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언젠가부터 한국에서 지역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건축문화와 공간문화가 크게 개선되야 한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고 있다. 이런 시점에 이 책은 '공공건축을 통한 지역발전의 모색'이라는 특수하고, 유용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건축계에서는 두루 회자되고 있다고 들린다.


건축설계를 하는 이들에게 물어보면 상당수 전문가들이 이 책을 읽은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정기용의 깊은 고민과 노력, 성과와 한계를 이해하거나 공감한 사람은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다. 건축계 대부분이 '성공'과 '성장', 돈벌이와 기득권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현재 시점으로는 공공기관과 건축 전문가들이 몇 가지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와 문제제기를 받아들이는 데 만족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공감대의 확산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고질적인 한국 지식인층의 문제라 생각한다. 한국의 학벌주의와 엘리트주의의 최고봉인 서울대를 졸업했음에도 건축학과가 아닌 미술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건축학계 주류와 건축설계 업계를 장악한 서울대 건축과 출신들에게 '왕따'당한 정기용 씨...

나는 공간과 건축 문화의 답보상태가 한국사회만의 독특하면서도 강력한 문제,  즉 '실력' 보다 '학벌'이 기득권 체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생각한다.

물론 소수의 양심적인 건축가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 건축과 나 ---


나 역시 대학에서 건축을 배우고(?) 설계사무소에서 5년 가까이 실무를 했다. 건축 설계나 건설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대학 선후배, 동기들과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기도 했고 업무 진행을 위해 미팅도 자주하고 여러 자리에서 정보도 듣고 의견도 나누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내가 건축가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건축업계에 종사한다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물론 '범 건축계'에 종사한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작년에 영화 <건축학 개론>을 보면서 이십 몇년 전 대학 새내기 시절이 생각났는데, 특이했던 점은 내가 공부할 때 영화 속에서 교수가 '건축학 개론'을 강의하던 식으로 건축에 대해 접근하는 교수는 전혀 없었다. 영화 첫 장면을 보면서 "아! 건축을 저렇게 자신이 사는 동네와 지역과 연관지어서 접근시키면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겠다."라고 느꼈다.

내 기억으로는 6 ~ 7명 정도 되던 건축 전공 교수들은 세부전공이 건축계획이나 건축설계 또는 건축구조나 건축사이던 간에 그냥 국내외 교과서나 참고서, 또는 오래된 '강의 노트(?)'를 가지고 거창한(그렇지만 결국 단순한) 개념이나 이론을 가르치는 정도였다.


분명 그 당시에도 새내기들 중 건축이라는 학문에 대해 뭔가 잘 알거나 어려서부터 적성으로 생각하거나 무언가를 탐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학력고사 점수에 맞추어 입학한 경우가 다수였음에도 교수들과 대학은 그런 새내기들의 조건과 처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강의를 할 뿐이었다. 물론 몇몇 교수는 몇 년이나 된 너덜너덜한 강의노트를 강의(수업)시간에 들고 왔고.(덕분에 '족보'라는 말도 배우고...ㅋㅋ)


건축이라는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고 서로의 관심사를 가지고 이야기하기보다 주어진 강의시간에 출석하려 일방적인 설명을 듣고 때 되면 시험치르고 설계숙제(테크닉을 가르치는)을 제출하면서 한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면 졸업을 하는 구조...

건축이라는 학문에 대한 교수들의 지식과 시각 속에는 도시도, 농촌도, 근대화도, 지본도, 산업도, 문화도, 사회도, 그 어떤 사람사는 것과도 관계없는 '순수학문(?)'이었습니다. 철학의 고사하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최소한 양심도 책임도 지혜도 상실하였지만 기득권은 쥐고 있는 '지식 소매상'들이었다.


고등학교에서도 교사들의 수업에서 배우기보다 스스로 원리를 깨닫고 공부방식을 터득하고 암기하는 데 익숙한 새내기들은 고등학교보다 난이도가 조금 높은 것 말고는 차이가 없는 대학 강의와 수업에 대해 탁월하게 적응해 갔다. 다행인 것은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간의 공부모임이나 의견교환을 '커닝' 비슷한 분위기로 몰고 갔지만 대학은 학생들의 어떠한 공부방식에 대해서도 '자유방임'했다는 것...^^


지금 대다수의 40~50대 건축사, 건축과 교수, 건축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분들은 아마도 나와 비슷하게 대학을 보내면서 스스로 공부하고 인맥을 쌓고 진로를 개척했을 것이다. 대학은 그냥 간판만 필요했던 셈이다. 물론 대학을 졸업한 후에 명문대학 중심의 학벌체제의 위력과 공고함에 놀라기는 했겠지만...


그럼에도 정기용 씨의 무주 프로젝트 이야기를 읽으면서 9학기 동안 다녔던 대학 생활에 대해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컸다. 대학과 학과, 교수들 탓만 하면서 중,고등학교 때부터 '꿈'이었던 '건축'을 내 스스로 깊이 고민하고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잘 몰랐던 건축의 '진가'를 대학을 떠난 후 20여년 만에 이 책에서 발견한 셈이다. 


* 인상 깊은 문장 : 


"경작지는 있으나 농민이 드물고, 사람의 기척은 있으나 동질적 농촌 공동체는 사라지고 있으며, 농업은 있는 듯하나 몰락하는 산업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농촌과 농업은 국가의 '골치 아픈 영역'이다. 그러나 의외로 앞으로 쓸 예산은 많다. 바로 이런 것이 문제다. 이런 상황 속애서 아직도 농촌을 '개량'의 대상이나 구제해야 할 문제로만 바라보는 한 아무것도 제대로 해결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잘못된 질문을 바로잡아야 한다. 농촌을 타자화하는 버릇을 버려야 하고, 세계시장 속에서만 바라보는 농업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농촌은 없다. 우리들의 소중한 국토가 있을 뿐이며, 농촌과 도시 사이만 있을 뿐이다. 농촌을 늘 변방으로 보고 자신의 일부를 식민지 경영하듯 하는 자가당착을 벗어던져야 한다.

지금 농촌은 최후의 보루처럼 남아 있다. 살기는 모두 도시에 살면서 늙은 부모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 그 후손은 전 국노를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농촌 식당에서도 미국산 수입쇠고기 태우는 냄새가 진동한다. 모든 농촌은 '도시화'의 후유증에 앓로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화의 여파에 시달리는 중이다. 따라서 이제는 형식과 구호에만 머무는 '마을 만들기'식의 사고에서 탈피해 농업과 농촌의 문제를 전 국토의 공간 재편 문제와 함께 생각할 때가 온 것이다."(p.7)


"사실 농촌에서 개발의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농촌 주민들도 개발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 이 어려운 농촌에서 해방될 것인가가 그들의 당면 문제였으며, 여기에는 또한 그들의 미래가 달린 것이다.

한국에서 농촌의 개발이란 무엇보다도 땅값을 올리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개발론자들은 개발을 위해 땅이 필요하고, 오랫동안 땅을 섬기고 살았던 농민들은 그 땅을 지키려 한다. 그 팽팽한 긴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종종 충돌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결국 한국의 많은 농촌 거주민들은 '높은 가격으로 땅을 파고 농촌을 탈출하는 것'에 기대를 걸고 자본에 굴복하게 된다. 그래서 이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지속적으로 잉태한다. 모든 농촌을 자본의 논리로 개발한다면 누가 남아서 오래된 땅을 지키고 살아갈 것인가?"(p.29)


"오늘날에도 여전히 붕괴되고 있는 농촌사회를 지키며 살아가는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자부심과 정체성을 이어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농촌에서 살아가는 것에 조금이라도 자부심을 느낄 때, 농촌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 이런 모든 것을 탐색하고, 또 사람들을 세살과 사회와 소통할 수 있게 하느 것고 건축가의 몫임을 필자는 무주에서 배웠다."(p.43)


[ 2013년 5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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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슬픔 - 군국주의, 비밀주의, 그리고 공화국의 종말
찰머스 존슨 지음, 안병진 옮김 / 삼우반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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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 [서평]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 저, 안병진 역 < 제국의 슬픔 The Sorrows of Empire 군국주의, 비밀주의 그리고 공화국의 종말>를 읽고 / 2004. 03., 470쪽, 삼우반


일방주의와 선민의식에 가득찬 미국 내에서 그나마 양심적인 지식인에 속하는 찰머스 존슨(전 샌디에이고 대학 교수)은 이 책에서 미국이 군국주의와 비밀주의로 가득찬 '제국'이며 지구상 주요 분쟁지역의 원인 제공자이고 그로 인해 스스로 멸망을 재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제국주의로서의 미국의 영향권 내에 존재하는 국가 중에서 당연히 한국이 포함되며, 한반도 정세에 미치는 미국의 영향이 워낙 막대하기 때문에 미국의 대외정책을 알지 못한채 한반도의 정세, 남북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한 셈이다.


이 책은 정치외교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관련된 시람이라면 진보나 보수를 떠나 모두가 한 번쯤 읽어야할 필독서다.(품절이라 도서관에서 빌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ㅎㅎ)


존슨 교수가 이 책에서 내린 결론은 미국이 군국주의이고 제국주의라는 것이다, 제국이되 영토적 식민지배를 통해 유지하는 전통적 제국이 아니라 광범한 군사기지를 통해 지배하는 새로운 형태의 ‘군사기지 제국’이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 세계 737개에 이르는 미국 군사기지(실은 1천개쯤 된다, 존슨은 그 추산의 근거로 영국과 보스니아 지역 등에 설치된 중요한 미국 군사정보기지들,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모든 이메일과 전화와 팩스를 감청하고 분석하는 시설과 인력을 갖춘 거대한 미군기지들은 미군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해외 미군기지 737곳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사실 등을 들었다.) 설치지역 또는 국가는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라고 존슨은 얘기한다. 즉 현지 미군기지들을 지휘 통솔하는 미 주둔군 사령관은 로마 공화정 몰락기와 그 이후 제정기의 지방총독과 같은 존재라는 게 찰머스 존슨의 생각이다.

그의 설명에 따른다면 워싱턴이 임명하는 대한민국이란 '지방' 담당 '총독'은 누구인가?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영구히 내어주자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번 한미 정상회담 전후 과정을 보면 저자의 주장이 결코 헛소리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 나만일까?


존슨 교수는 미국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가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동아시아와 한반도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교묘하게 작동하는지 구체적인 사례와 정보를 통해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북한과 미국의 갈등과정에서 미국 백악관과 군국주의자들의 무모하고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폭로하고 있으며, 미국의 대외정책이 기초적인 상식과 합리성을 얼마나 쉽게 무너뜨리면서 진행되는지에 대해서도 고발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의 블로그에 정리되어 있다. < 미국 군국주의의 역사 > http://blog.daum.net/hy2oxy/8691500, < 21세기 미국 군국주의(제국주의)와 중국 > http://blog.daum.net/hy2oxy/8691506, < 군국주의 & 제국주의 미국과 한반도 > http://blog.daum.net/hy2oxy/8691509


저자는 미국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수반되는 타락을 “제국의 슬픔”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다음과 같은 4가지 슬픔이 미국에 도래한다고 그는 지적한다. 첫째로, 항구적인 전쟁 상태가 지속될 것이고, 이로 인해 미국에 대한 테러가 더 많이 발생할 것이다. 둘째로, 의회는 완전히 무력화되고 사실상 펜타곤이 행정부를 장악함으로써 민주주의는 실종될 것이다. 셋째로, 진실성의 원칙 대신 선전 체계와 허위 정보, 그리고 대규모 군대에 대한 찬양이 들어설 것이다. 끝으로, 거대 군사 프로젝트에 자원이 집중됨에 따라 경제는 파산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안은 없는가? 미국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방대한 분석과는 달리 저자 찰머스 존슨이 미국인들에게 제시하는 대안은 극히 간단하다. 다음과 같이 의회 개혁을 촉구하는 구절이 그 전부이다. “국민들이 의회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고, 의회를 특수한 이익을 가진 자들의 포럼으로 전락시킨 부패한 선거법을 의회와 함께 개혁하여, 그래서 진정으로 민주적인 대의 기구로 거듭 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펜타곤과 비밀 정보 기관들에 대해 돈줄을 끊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이러한 “혁명”과도 같은 의회 개혁이 실제로 가능하게 될지 “상상하기 어렵다.”고 덧붙인다. 저자의 불길한 전망은 세계의 암울한 미래로 연결된다. 100년 전에 시작되어 2차 대전 후 50년 동안 강화되다가 9.11을 계기로 완전히 고착화 된 미국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추세는 설령 차기 선거에서 부시 행정부가 물러나게 된다고 해도 그리 달라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존슨 교수의 예언대로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2009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의 군국주의, 제국주의 행보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의회와 언론, 대기업 등 주류세력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미국은 앞으로 로마제국의 전철을 밝을 것인가?


존슨 교수가 원래 사회주의자나 반미항전의 전사였을까? 절대 아니다. 그는 원래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본, 미 중앙정보국 국제정세 분석 자문관을 오래 지낸 자칭 '냉전의 전사'였다. 그런 그가 말년에 미국을 제국주의국가로 규정하면서 '제국의 기수'였던 자신을 반제반전 평화의 기수로 탈바꿈시킨다. 이 극적인 노선수정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캘리포니아 대학에 오래 교수로 있으면서 주로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정세분석을 해주던 중앙정보국 분석관 노릇도 한 그가 이름을 알린 것은 ‘개발국가(developmental state)’라는 개념으로 일본의 정치경제적 특성을 분석하면서 일본을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모델로 본 기존 미국학계를 비판한 수정주의 일본연구의 금자탑 <통상산업성(통산성)과 일본의 기적>(1982), 그리고 중국 마오주의를 분석한 <농민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권력>(1962) 덕이었다.

하지만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말년의 저작들인 <오키나와-냉전의 섬>(1999), <블로우백(Blow-back 역풍)- 미 제국이 치른 비용과 그 귀결>(2000), <제국의 슬픔-군국주의, 비밀주의, 공화국의 종말>(2004), <네메시스 Nemisis- 공화국 미국 최후의 날들>(2006) 등인데, 특히 ‘역풍 3부작’이라 불린 뒤의 3권이다.

존슨을 반제반전 쪽으로 돌아버리게 만든 것은, 냉전붕괴 뒤 군비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군비를 더욱 강화하면서 자신의 경제적·정치적 욕구를 군국주의·비밀주의를 통해 달성하려 한 미국 지배세력의 제국주의적 야심과 그로 인한 비극,그리고 1995년 오키나와 주둔 미 해병대원들의 12살 소녀 집단성폭행사건 현지조사를 통해 깨달은 미 군사기지의 무참한 본질이었다.


존슨 교수는 미국 군국주의(제국주의)자들의 이라크 침공 이후 북한의 전략 변화와 북미 관계, 그리고 저자의 한국에 대한 놀라운 정보력과 우려를 보여준다. 그 중에는 미국 행정부와 미군 기지의 지배, 상징성에 대해 한국인들보다 더 우려하고 있다. 2013년 현재도 남아 있는 용산 미군 기지가 1894년 일제가 동학농민 혁명을 무력을 짓밟으면서 일본군이 점령한 땅이었고, 미군이 전리품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눌러 앉은 것이라는 것을 한국인들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전 세계 약소국들의 핵 보유를 부추기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만행을 고발하는 찰머스 존슨 교수. 그는 오히려 한국인들보다 한국인들을 더 믿고 염려한다. 그래서 2010년 작고한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다.


미국 행정부, 미국의 정치인,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군국주의자들이 전 세계에 저지르는 횡포와 전횡에 대해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알고 나서 생각하고, 알고 나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는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한반도와 남한에도 좋지 않은 결과를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 인상 깊은 문장

 

"미국의 해외 군사 기지는 구조적으로, 법적으로, 그리고 개념적으로도 식민지와는 다르지만, 완전히 피점령 국가의 사법권 밖에 있다는 점에서 초미니 식민지 같은 것이다. 물론 언제나 미국은 표면상으로 독립적인 '주인' 국가와 '주둔 미군 지위에 관한 협정(SOFA)'을 맺었다. 이는 19세기 제국주의자들이 중국에서 주장하고 실천했던 '치외법권'의 현대적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에서 군국주의적 풍조가 최초로 등장한 때는 19세기 말이었다. 1898년 미국-에스파니아(스페인) 전쟁을 전후하여 전쟁 전 언론 조작으로 대중들에게 전쟁 열기를 고취시켰던 반면, 필리핀에서 미군이 저지른 잔혹 행위와 전쟁 범죄는 은폐되었다.
전쟁의 결과 미국은 첫 식민지를 얻었고, 처음으로 군 참모진이 구성되었다. 당시 미국의 '주전론' - 의기양양하고 호전적인 쇼비니즘의 대중적 감성에 다름 아닌 - 은 대영제국의 비슷한 풍조를 본받은 것이었다."(p.63)

 

"제1차 세계대전이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낳았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군국주의의 성장을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고 직업 군인 계층이 등장하게 됨에 따라 2차 대전 당시의 특징적인 많은 규범들이 다시 살아나고, 군수 산업은 완전 가동되었다. 1950년에서 2003년까지 미국은 광범위한 군 동원의 시기를 4차례 경험했고, 이와 함께 무기 구매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무기 구매가 최초로 이루어지고 또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한국전(1950~1953) 때였지만, 이 시기 도입한 무기의 일부만이 한국전에 투입되었다. 대부분의 돈은 핵무기 개발과 영국, 독일, 일본 및 남한 등지에 당시 건설 중이던 거대한 냉전 요새에 투입되었다. 국방비는 1950년에 1,500억 달러(2002년 가치로 환산)에서 1953년 5,000억 달러로 증가했다. 두 번째 군비 증간 시기는 베트남 전쟁 때였다. 1968년 국방비 지출은 2002년 가치로 4,000억 달러 이상이었다."

 

"군국주의의 시작은 흔히 3가지 광범위한 지표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직업 군인 계층의 출현과 이들의 이상에 대해서 계속해서 미화하는 것이다. ... 두 번째 정치적 특징은 다수의 군 장교들이나 군수 산업 대표들이 정부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 세 번째 특징은 군비가 국가의 최우선 정책 과제로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미국)는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전 세계 어느 나라라도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제국주의적 야심은 아니지만, 우리 나라로 하여금 제국주의적 수단을 쓰도록 하고 있다. 즉 전 세계에 주둔하고, 대상국 정부와 정치가들에게 지원금을 주고, 말 안 듣는 국가에는 경제 제재나 무력을 행사하고 국무부나 국제개발국,CIA 같은 기구가 조종하는 식민지 관리들로 구성된 군대를 고용하는 것이다. 점차 우리의 재국에 익숙해지고 그에 따른 즐거움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지국의 제도와 이론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확신에 찬 제국주의 권력의 징표이다. 제국의 옹호자들은 제국이 관리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논쟁을 벌여도 제국 자체의 가치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시하는 법이 없다. 제국으로 통치자들이 가장 이익을 본다는 점에 대해서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BMD 지지자들은 시스템이 결코 중국을 향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중국이 정말로 미사일 방어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무기 통제 및 국제 안보 관계를 담당하는 존 볼튼 국무부 차관은 말한다. 그러나 방어용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대만의 정세가 바로 BMD 계획의 핵심에 있다."(p.122)

 

"중국이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미국의 위성국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공화당의 고집불통들이 작고 빈곤에 찌들어 있으면서도 완강히 저항하는 북한 정권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더 큰 애를 먹었다. 2002년 1월 29일 연두 교서에서 부시는 미국이 예방책으로 '제거'할 것을 고려하고 있는 몇몇 국가들 중에 북한을 포함시켰다. 2003년 4월 바그다드의 함락과 함께 미국의 이라크 '해방'의 과정에서 '충격과 공포' 및 유혈 학살 국면이 종식되었다. B-1, B-2, B-52 폭격기들과 페르시아 걸프 지역의 수송기들, 크루즈 미사일을 탑재한 수많은 함선과 잠수함들로 구성된 미국의 완벽한 무적함대와 카타르에서 에어컨 시설이 된 텐트에서 전쟁에 임했던 지휘 통제 본부가 재배치를 위해 해체되었다. 성공적인 전쟁 수행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이들은 다음 번 타깃으로 - 중동이 아니라면 - 북한을 택할 수도 있다.
북한도 같은 생각에서 조지 부시가 자신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릴 계획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은 새로운 로마로 위장한 미국이 스스로 만들어 낸 이 파괴적인 상황을 잘 보여 주고 있다."(p.125~126)

 

"1994년으로 되돌아가서 미국은 평양 정권이 러시아 산 낡은 원자로에서 나온 부산물로 플루토늄을 추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북한이 원자탄 몇 개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촉발된 위기는 그 해 '협정 안(Agreed Framework)'이라고 기묘한 제목이 붙은 것으로 해소되었다.
평양이 구 원자로를 쓰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국제원자력위원회(IAEA)의 조사를 허락한 대가로, 미국과 동맹국들은 무기 제조에 사용될 수 있는 핵 분열 물질을 산출하지 않는 두 개의 원자로를 제공해 주고, 고립된 북한과 외교,경제적 관계를 열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은 또한 북한에 원유를 공급해서 원자로 폐쇄로 부족한 에너지를 대체하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북한에 자체 에너지원이라고는 없다.) 그러나 3년 동안 클린턴 행정부는 협정의 이행을 중단했다. 주민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가운데 고도로 군사화 된 북한 정권이 단지 붕괴되기만을 기대했던 것이다
1990년대 말까지 이러한 팽팽한 긴장 관계는 교착 상태에 있었다. 2000년 6월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과 한 마디 의논도 하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다. 평양으로 역사적인 화해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마지막 냉전의 흔적을 씻어 버리고자 노력한 그의 평양 방문으로 돌파구가 뚫렸고,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김대중 대통령의 시도가 한국 국민들의 기대를 한껏 고취시켰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1971년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며서, 수백만 미국인들의 기대를 받았던 것과 같았다."(p.126)

 

"2002년 9월 부시 행정부가 국가 안보 전략에서 '예방 전쟁'을 일으킬 권리를 주장했을 때, 북한의 김정일은 이 수사법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미국이 이라크 국경 지대에 이라크 침공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하고 나서 실제로 침입하자, 북한은 미국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유일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핵 확산 금지 조약에서 탈퇴하고, 국제 사찰관들을 추방했으며, 이전의 원자로를 재개했다."(p.127)

 

"여기서 결코 잊혀지지 않고 있는 한반도의 과거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 1945년 미국이 한반도 남반부를 점령하고 '대한민국'을 세운 이래로, 남한에서는 강력한 군대가 유지되었다. 2002년에 미국 국방부는 남한 내에 있는 국방부의 자산과 인력으로 101개의 군 시설과 37,605명의 미군, 2,875명의 미국 민간인들이 근무하고 있으며, 7,027명의 미군 가족이 거주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미군 시설에는 한국 전쟁 당시 K-55로 알려졌던 오산 공군 기지 - 현재 제7 공군 사령부이다 - 와 한국 서해안에 있는 군산 공군 기지 - 주요 기지이다 - 가 있다.
그렇지만 남한에서 가장 놀랄 만한 시설은 용산 육군 주둔지이다. 미국의 문화적, 역사적 무신경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 곳은 1894년 들어선 구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자리로서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증오를 상징하는 곳이다. 원래 구 서울의 변두리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인구 밀도가 높은 수도 한복판에 630평방 에이커의 노른자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용산 기지는 1945년 이래로 미 군사 작전 사령부가 위치했다."(p.129~130)

 

"의심할 여지없이 (2003년) 미국의 계획은 한국 정부와 한국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불어넣고자 의도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우려는 미군 병력의 갑작스런 재배치는 북한에 대해 선제공격을 준비하는 것의 일환으로 보여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불길하게도 부시 행정부는 '한국에서 필요한 경우를 대비해서' B-1, B-52 전략 폭격기를 괌에 배치했다. 그리고 이후 몇 대인지 숫자는 발표되지 않았지만, 최근 완료된 군사 작전을 위해 배치한 F-117 스텔스 전투기와 F-15E 이글 편대를 계속 한국에 남아 있게 한다고 발표했다. 레이더망을 피할 수 있는 F-117기는 영변 핵 시설을 포함해서 북한 내 여러 목표물을 공격하는 데 적합한 기종으로 알려져 있다.
F-117기가 마지막으로 한국에 배치되었던 때는 1994년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에 '국부 공격(surgical strike)'을 기도했던 때였다. 당시에 고조되었던 위기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김정일과 직접 협상을 벌여 평화롭게 넘길 수 있었다."(p.132)

"부시 행정부는 미국의 '정밀 유도 미사일'로 한국인들의 '예방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하고자 하고 있다. 정밀 유도 미사일로 양국의 고도로 훈련된 전투 병력과 민간인 사상자의 발생을 피할 것이며, 미국의 폭격에 살아 남은 북한 주민들이 미국과 한국을 해방군으로 맞아 들일 것을 확신한다는 식으로 설득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예방 전쟁이 필요하다는 미국의 생각에 동조할 것 같지는 않다. 이라크 전쟁이 남긴 한 가지 확실한 유산은 미국의 정치, 군사 지도자들은 더 이상 믿을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p.133)


[ 2013년 5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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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산업혁명 - 수평적 권력은 에너지, 경제,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제러미 리프킨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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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저, 안진환 역 < 3차 산업혁명 The Third Industral Revolution : 수평적 권력은 에너지, 경제,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를 읽고 / 2012. 05., 424쪽, 민음사

<육식의 종말>, <엔트로피>, <수소 혁명>, <유로피언 드림>, <공감의 시대> 등으로 저에게 많은 공부를 시키고 영감을 주었던 리프킨 리프킨이 예고하는 '3차 산업혁명'이 무엇일까? 당연히 궁금한 책이었다.

리프킨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제혁명의 본질은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에너지 체계'다. 19세기에 인류는 증기기관과 석탄을 동력 삼아 대량 인쇄와 공장 생산 경제 시대를 열었다.(1차 산업혁명) 20세기 들어서는 전기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석유 자원이 만나면서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고 자동차, 석유, 전자 등 대기업이 세계 경제를 부양하게 되었다.(2차 산업혁명) 
하지만 그가 판단하기에는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 1차, 2차 산업혁명의 수명은 이제 끝났다. 2008년 부동산 거품이 터져 최악의 경제 위기에 빠졌고, 엄청난 이산화탄소 배출로 인한 환경 파괴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새로운 유전을 파고 유가를 낮추기 위한 소극적인 대책을 내놓고 국지적?근시안적 정책을 내놓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에너지 체제와 경제 모델로 옮겨 가기 위해 3차 산업혁명을 준비해야만 지속 가능한 미래를 불러올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출발점에 서 있다. 인터넷 기술과 재생에너지의 결합이 3차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이를 통한 수평적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새로운 비즈니스들이 부상할 것이며, 수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어 위기에 빠진 인류를 구원해 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인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해답, 즉 21세기 3차 산업혁명의 단서는 인터넷 IT 기술과 재생에너지다.
그는 3차 산업혁명을 통해 수천 개의 비즈니스와 수백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되고, 수평적 관계가 정립되고, 경제,사회,문화,교육 전반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주장하는 3차 산업혁명의 핵심 요소는 다섯 가지다. ⑴ 재생 가능 에너지로 전환한다. ⑵ 모든 대륙의 건물을 현장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미니 발전소로 변형한다. ⑶ 모든 건물과 인프라 전체에 수소 저장 기술 및 여타의 저장 기술을 보급하여 불규칙적으로 생성되는 에너지를 보존한다. ⑷ 인터넷 기술을 활용하여 모든 대륙의 동력 그리드를 인터넷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하는 에너지 공유 인터그리드로 전환한다. ⑸ 교통수단을 전원 연결 및 연료전지 차량으로 교체하고 대륙별 양방향 스마트 동력 그리드상에서 전기를 사고팔 수 있게 한다.
3차 산업혁명은 산업 시대의 마지막 편이자 앞으로 다가올 협업 시대의 첫 편이다. 산업 시대에는 엄격한 규율, 근면한 노동, 상명하달식 권위적 체제, 금융 자본과 소유권이 중시된 반면, 협업 시대에는 창의적인 놀이, 피어투피어(Peer to Peer) 상호작용, 사회적 자본, 개방형 공유체, 글로벌 네트워크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그 과도기에 서 있는 현재, 겉으로는 친환경 에너지와 디지털 그리드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화석연료 시대의 내러티브를 고수하는 정부와 기업이 수없이 많으며(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결국 이 흐름에서 도태될 가능성이 크다. 향후 수십 년에 걸쳐 빠르게 진행될 3차 산업혁명의 한가운데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려면 근본적으로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

리프킨이 세계 정치경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으로 권력집중 체계를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재생 에너지와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분산 자본주의'와 권력 분산의 수단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그런데 권력집중에 대한 근본적 원인과 대안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는 인류사회의 독특한 특징인 정치와 제도, 권력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고 느낀다. 재생 에너지와 인터넷 기술이 곧바로 '수평적 권력'을 가져온다는 것은 단순 논리이자 비약이 될 가능성이 크다.

먼저, 화석연료와 전기통신을 기반으로 한 산업 인프라와 커뮤니케이션 체계가 권력집중을 가져오고 실업율, 부채, 생활수준을 떨어뜨렸을 것이라는 원인분석에 부정적이다. 오히려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자본증식의 자본주의 메커니즘이나 승자독식 신자유주의가 대량 산업생산 체제와 권력집중의 구조적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이 적절한 원인분석일 것이다.
둘째, 재생에너지나 인터넷 통신 기술이 '분산'의 가능성을 높이는 수단일 수는 있지만 기존 경제체제와 마찬가지로 인류는 '중앙집중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미국 텍사스와 동부를 연결하려는 사막의 태양광 발전설비 체계처럼 재생에너지 역시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이 중앙집중적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인터넷 통신 체계도 얼마든지 기술적으로 '독점적 소유'가 가능하다.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 경제활동에서 자신의 필요성을 깨닫고 느끼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수평적 권력'은 정착될 것이다.
프란츠 파농이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썼던 문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의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만일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그다리는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다리는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오른 것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오히려 현대 경제체제는 '권력(정치력, 경제력) 집중'과 '독과점'이란 관점에서 분석해야 한다고 본다. 
21세기 전 인류의 생산력으로 이미 충분히 전체 인류가 기본적인 식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에도 아직도 제3세계에서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사는 30억명(2008년 기준)이 존재하는 이유는 화석연료나 전기통신 체제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특정 계층과 집단에게 독과점되어 있고, 언론을 비롯한 사회문화 권력마저도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사회의 정치경제 체제가 '사람 중심'이 아니라 '자본 중심', '성장 중심', '무한 경쟁'으로 구성되어 있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분야가 이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전 지구적 차원에서 그리고 일국 내에서도 빈부격차와 양극화가 발생하는 것이고, 한 쪽에서는 성인병과 우울증으로 사람이 죽어가고 다른 쪽에서는 헐 벗고 굶주려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3차 산업혁명의 인프라 5가지 요소에서 결정적으로 간과하는 것이 있다. 사회적 자본, 다르게 표현하면 분산 및 협업 체제를 구성하는 가정 단위, 소기업 및 소집단 단위, 소지역 단위의 자발성과 자립, 다양성과 소통이나 공감에 대한 고려(p.342에 일부 거론)가 없다는 것이다.
경제 구조와 시스템도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직접적인 사용자, 생산자, 제공자의 기본 단위에서 3차 산업혁명에 대한 문제의식과 지식과 태도가 준비되지 않으면 통화기능만 사용하는 스마트폰, 게임이나 불법다운로드만 찾는 인터넷이 될 수 있다. 

리프킨에 대한 또 다른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그가 3차 산업혁명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에 있어서도 지적할 수 있다. 
그는 화석연료가 중앙집중식 경제체제와 부의 독점을 가져오고 3차 산업혁명이 분산과 협업 체제로 기능하여 부의 분산 또는 분배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3차 산업혁명을 논의하는 상대는 기존 체제의 수혜자이자 결정권자들이다. 그가 3차 산업혁명을 논의하는 대상은 늘 유명 정치인, 기업인, 고위 관료이다. 기존의 정치경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이들에게 향후 산업 변화의 패러다임을 주도하기를 컨설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는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는 주체들과의 거버넌스나 개인들의 자발성, 자율성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발성과 참여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리프킨이 주창하는 3차 산업혁명의 요소들이 앞으로의 세계 경제 체제의 주도권이나 경쟁 요소에서 중요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유럽은 이미 미국이나 일본, 한국보다 수십 년 앞서고 있다. 더군다나 한국은 무능한 정치권과 관료, 부정부패한 경제주체들에 의해 산업시대 방식을 고수하고 있고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오히려 회귀하는 모습마저 보인다. 
한국사회는 외형적으로라도 꾸준히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중산층, 하층민들이 권력과 소득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바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급변하는 세계경제 체제에서 그들은 더욱 배제될 것이고 심지어 먹고 사는 문제에서도 극한에 내몰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 2013년 5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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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
고규홍 글.사진 / 휴머니스트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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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고규홍 저 < 한국의 나무 특강 >를 읽고 / 2012. 11., 412쪽, 휴머니스트


세미나 교재로 채택되어 읽게 된 이 책은 '나무 이야기'라기 보다 '나무에 얽힌 한국인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나무 인문학자'인 저자 고규홍은 지난 십여 년 동안 만난 우리 강산의 크고 오래된 나무들을 정리한 현장감 넘치는 기록이자, 나무에 스며든 우리 민족과 민중의 삶과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칼럼, 강연, 방송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나무는 늘 사람들 곁을 지켜왔지만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으면 의식하지 못하는 존재다. 하지만 나무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도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키며 시간의 흔적을, 그들의 희로애락을 자신의 몸에 새긴다. 
저자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단순히 식물이라는 연구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곳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해온 존재, 즉 사람들의 조상이자 이웃, 친구처럼 대하며 나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그리고 이 땅의 크고 오래된 나무를 통해 인간들의 삶을 펼쳐 보인다.
조금 아쉬운 것은 저자의 이야기 전개와 해설에서 '한민족'이라는 역사적인 관점과 '민중'이라는 사회경제적인 관점이 부족한 점이다. 한반도에서 5백 년, 1천 년을 살아온 나무라면 결국 고려시대부터 조선,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쳐온 이 땅의 한민족과 민중들의 삶과 애환이 나무 속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저자는 단순히 전설이나 기록에만 의지하지 않고, 해마다 오랜 친구를 방문하는 양 나무를 찾아간다. 또, 나무뿐만 아니라 나무와 고락을 같이하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다. 
나무를 열정적으로 찾아다니며 마을사람들에게조차 잊혀가던 나무를 찾아내 천연기념물로 등재시키기도 하고, 60년 만에 꽃을 피운 나무의 소식에 반가워한다. 심지어는 더 크고 오래된 물푸레나무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존의 최고령 물푸레나무보다 나이가 2배 많은 수령 300살의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를 발견하기도 했다.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 없었던 노인이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지켜온 소나무에게 자신의 전 재산인 땅 2,000평을 물려준 이야기가 있다. ‘석송령’이라는 이 나무는 토지를 소유하고 토지대장에 이름이 올라가 재산세를 납부하고 마을 아이들에게 장학금까지 지급한다. 또 식민지 시대에 마을의 공동재산을 지키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나무에 사람처럼 이름을 지어주고 호적을 갖게 해서 공동재산을 지켜낸 예천의 ‘황목근’이라는 나무도 있다. 
댐 건설로 수몰위기에 처한 700살 된 은행나무를 살리기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옮겨 심은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부터 기묘사화로 좌절한 선비들의 한이 서린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 천주교도들을 탄압하고 처형하는 교수대로 쓰여 수백 명의 죽음을 직접 겪어야 했던 서산 해미 읍성마을 회화나무 등 각 나무에 깃든 이야기는 기구하면서도 흥미진진하다. 
'백곡리 감나무'의 경우는 저자와 함께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한 감독이 아는 친구라서 저자의 이야기가 더 정겨웠다. 

나무에 깃들어 있는 민중들의 염원과 원한, 피맺힌 절규와 간절한 소망, 나무와 자연을 사랑했던 선조들의 마음. 그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무들을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저자의 나무 사랑은 시골마을의 오래된 나무에만 머물지 않는다. 도시에서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나무의 가치를 알려 지켜낸 인천 신현동 회화나무 이야기, 대규모 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독극물이 주입되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전주 삼천동 곰솔 이야기도 함께 들려준다. 
또한 살아 있는 나무만이 아니라 사라졌지만 마을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한, 죽어도 죽지 않은 나무들까지 빠짐없이 불러내 기록했다. 이런 나무 이야기에는 직접 발로 뛴 사람의 속내가 은은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지금 곁에는 어떤 나무가 있는지, 그와 함께한 사람들은 잘 지내는지를 궁금하게 한다.

책 속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나무를 찾고 또 찾은 저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 140여 컷이 함께 수록되었다. 사진 속 나무들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온 자신을 자랑하듯 다채로운 표정을 뽐낸다. 
본모습을 온전히 보여줄 때까지 8년을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나무가 자신의 모습을 오롯이 보여주었다는 용계리 은행나무 사진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감흥을 준다. 굶어 죽은 아이들의 무덤에서 자랐다는 전설을 지닌 이팝나무의 쌀밥처럼 피어난 꽃 사진은 보는 이를 울컥하게 만들고, 800년 된 제주도 비자림 숲 ‘조상목’의 모습은 그 시간의 흔적을 가늠케 한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은 그가 전해 주는 나무 이야기와 더불어 나무의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적인 이야기를 그려낸다.

앞으로 여행을 떠날 때는 꼭 이 책을 배낭 안에 포함시켜야겠다...^^

* 인상 깊은 문장 :

"사람보다 먼저 이 땅에 자리 잡고 사람보다 오래 사는 나무에는 사람살이가 새겨져 있습니다. 수백 년을 살아낸 노거수의 줄기에 새겨진 나뭇결에서 사람살이의 자취를 발견하는 건, 사람과 더불어 말없이 살아온 나무의 소중함에 대한 깨우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왜 이 자리에 심었을까? 나뭇결을 한창 바라보면, 나무는 서서히 나무껍질 깊숙이 감추어두었던 이야기를 하나둘 풀어냅니다."(프롤로그 중에서 p.8)

"저는 처음에 멀리서 나무가 보이면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거기서부터 천천히 나선형으로 돕니다. 물론 그게 여의치 않은 곳도 많긴 합니다. 한쪽이 낭떠러지라든가, 언덕으로 막혔다든가 하면 쉽지 않지요. 그저 가능한 한 그렇게 한다는 말씀인데요, 이 나무는 너른 논밭 한가운데 있어 제 방식대로 나선형으로 돌면서 관찰하기 아주 좋은 형편입니다. 차츰차츰 나무에 가까이 가면서 빙글빙글 돌면서 바라보면 나무가 얼마나 다양한 표정을 가졌는지 알 수 있게 돼요. 그러다가 나무 중심까지 다가서서는 나무의 오래된 연륜을 확인할 수 있는 줄기 표면, 수피를 오래 관찰하고 이번에는 직선으로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면서 바라보는 거지요. 그러니까 나무를 중심으로 해서 마치 거미가 집을 짓듯 옮겨 다니며 나무를 바라보는 겁니다."(';선한 사람살이의 표지로 살아온 800년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중에서 p.21~22)

"그들 앞에 우뚝 서 있는 회화나무에는 만일 배교하지 않으면 곧바로 매달리게 될 철사와 밧줄이 걸려 있었지요. 결국은 거기에 매달려 죽어야 한다는 위협이지요. 그러나 어수룩한 백성들은 선선히 배교를 허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도대체 신앙이란 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죽음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도 이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오랏줄에 매달려야 했지요. 머리채가 묶여 매달린 채, 신자들은 모진 매질을 당했으며 급기야 나무에 매달려 이승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중략)
나무가 이처럼 생사를 넘나드는 참혹한 아우성을 바라보아야 했던 건 순전히 처음 그가 자리 잡은 곳에 사람들이 감옥을 지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나무가 무슨 죄가 있어 그런 험한 일을 맡아야 했을까요? 오직 스스로 자리를 옮길 수 없는 나무가 처음 자리 잡은 그곳에 사람들이 감옥을 지었다는 것 외에 다른 요인은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나무는 말 한마디 못한 채 잔혹한 죽음의 현장을 지켜보고 그 아픔을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몸 안에 보듬고 고통의 모진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나무에게 여느 회화나무에서 볼 수 있는 기품이나 넉넉함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겠지요."(';교수대가 되었던 참혹한 기억이 스며든 나무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 익산 여산동헌 느티나무, 평택 팽성읍 향나무'; 중에서 p.232~233)

"나무 이야기라고 했지만, 사실 나무를 찾고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과정은 나무를 둘러싸고 살아온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와 어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무가 서 있는 아름다운 마을을 찾아가고, 그 마을에서 오래 살아온 노인들을 찾아뵙고 이런저런 나무 이야기, 혹은 마을 살림살이 이야기를 듣는 건 빠뜨릴 수 없습니다. 나무와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어느새 나무가 아무것도 모른 채 처음에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제 앞에 다가서 있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는 일이 항다반사입니다. 그렇게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나무는 기쁨의 빛깔을 띠기도 했고, 어떤 때는 바라보기 힘들 만큼 한 많은 슬픔의 빛깔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결국은 사람 이야기인 셈입니다."(에필로그 중에서 p.407)

[ 2013년 4월 01일 ]




- 용계리 은행나무




- 석송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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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적 인생의 권유 - 최재천 교수가 제안하는 희망 어젠다 최재천 스타일 2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서평] 최재천 저 <통섭적 인생의 권유 : 최재천 교수가 제안하는 희망 아젠다>를 읽고 / 2013. 03., 236쪽, 명진출판


저자인 최재천 교수는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통섭(統攝,Consilience)’의 개념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통섭의 대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통섭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만, 대체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학문적인 노력쯤으로 이해하며 우리 삶과는 별 상관없는 개념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최재천 교수는 이번 책을 통해 삶의 방식과 태도의 개념을 담은 ‘통섭적 인생’을 우리에게 권유한다. 그는 통섭적 인생을 "자연의 일부가 되어 더불어 사는 삶, 사물을 달리 볼 줄 아는 능력, 깨어 있는 마음으로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라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삶의 방식임을 주장한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오랜 관찰과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신의 '통섭적 사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그의 발언을 12개의 항목으로 분류해 제시한다. 
생물 다양성, 그린 비즈니스, 의생학(자연을 표절하는 학문), 미래형 인재, 기획 독서, 여성 시대, 경계를 허무는 삶 등 최재천만의 독특한 시각이 담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통섭적 인생’이란 과연 어떻게 사는 삶인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맛보게 될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통섭적으로 산다는 것"의 첫 번째 의미는 자연의 법칙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사람도 결국엔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삶이라고 그는 말한다. 
두 번째 의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피카소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피카소는 엄청난 다작을 통해 천재성을 발휘했다. 최재천 교수 또한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시도했던 피카소의 삶을 실천해 왔다. 한 우물만 파지 말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면서 다양한 분야에 몸을 담그다 보면 어느새 통섭적 인생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21세기는 융합형 인재, 즉 통섭형 인재를 원하며, 그러한 인재가 되길 원한다면 먼저 통섭적 인생을 살기 위한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사회적 발언은 자연과학의 내용과 과학적 방식을 적용하지 못하는 인문사회계열 전공자와 출신자들에게 많은 시사점과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실사구시 없는 학문이나 정치경제는 사상누각일 뿐이니까.
그리고 그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표현한다"이다.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사랑하게된다는 것이며, 특히 보통은 무신경하게 흘려보내는 자연과 동식물, 어떤 사람이나 집단, 직업이나 활동을 구체적으로 잘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 표현하고 행동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내가 본 최재천 교수의 '통섭적 인생'의 긍정적인 면은 여기까지다. 나는 그가 자연과학자로서 부족한 인문학적 소양이 아직 일정 수준에 오르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그런 평가를 내리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사용하는 몇 가지 단어와 논리 때문이다.

그는 지구 생태계 전체가 다양성과 상호의존성으로 개체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함을 역설하면서도 '21세기 성공학'을 내세운다. 그리고 생물 다양성을 감소시키는 궁극적인 원인으로 이미 이론적으로 폐기된 맬서스의 '인구론'을 제시한다. 
나는 남보다 앞서 나가거나 더 많이 소유하거나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것을 '성공'이라 부르는 논리가, 인간 사회에서 '근대적인 성공과 패배'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생각하는 근대적인 세계관이라 감히 말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생물학적 세계관, 통섭적 세계관은 다양성과 상호의존성이 적용되는 인간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즉 다양성과 상호의존성(공생)에 기여하는 삶이 인간다운 삶이자 성공하는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잘못된 전제와 논리적 허점이 가득하다. 인구가 많아서 제3세계 10억 인구가 굶어죽는 것이 아니고 생물 다양성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엄청난 식량생산이 잘못된 사회경제구조로 인하여 일부 계층에게 독점되기 때문이고 사람이 아닌 사육용 동물의 먹이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생물 다양성은 '값싸고 다량의 동식물'을 기르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다국적 금융자본 때문인 것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세대 갈등의 징후에 대해 저자가 내놓은 해법에도 무언가 미진하다. "눈앞에 놓인 모든 것을 일단 거머쥐었다가 슬며시 조금씩 내놓는 50~60세대와는 달리, 20~30세대는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따지지 않고 달려가는 공감의 세대다. 20~30세대여, 앞 세대가 아닌 세계와 상대하라." 
50~60 세대 중에서도 '모든 것을 거머쥔' 계층이 있고 단칸방에서, 지하에서, 실업자로, 국민연금도 없이 고통받는 계층이 있다. 세대간 갈등을 부추기는 듯한 그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20~30 세대는 앞 세대를 상대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앞 세대와 공감하고 상생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이해하고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계층간에 화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세계에 나가 다른 국가의 20~30 세대와 경쟁하라는 것이 과연 통섭적 인생관인지 잘 모르겠다.

[ 2013년 5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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