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노동 - 꼭꼭 숨겨진 나와 당신의 권리
은수미 지음 / 부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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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천 [서평] 은수미 저 <날아라 노동 : 꼭꼭 숨겨진 나와 당신의 권리>를 읽고 / 2012. 10., 240쪽, 부키

현직 국회의원 은수미 씨의 저서. 내가 이 책을 기존 정치인들처럼 정치자금의 수금용으로 생각했다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SNS와 언론에서 1년 가까이 지켜본 은 의원은 그 정도 사기꾼은 아니었다. 책을 사서 몇 쪽을 들추면서 내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고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는...^^

개인적으로는 이미 잠시 인연이 있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소위 '듣보잡'이었던 저자 은수미. 처음 비례대표 명단에서 이름을 발견한 후 그가 그동안 어떻게 실이왔는지 궁금하여 인터넷을 찾아 보았다. 대표적인 경력이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원이었다. 단독 또는 공저의 논문 몇 개를 훑어보면서 변절(?) 내지 기득권에 푹 빠져 있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은 의원은 초선 국회의원으로서 쌍용차 해고자 문제와 현대중공업 비정규직 문제, SJM 용역폭력 문제의 현장으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런 그를 SNS에서 지켜보면서 내심 기대도 하고 응원도 많이 보냈다.(하지만 2013년 새해 예산안 찬성자 명단에서 은수미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터무니 없이 정치적인 이유로 여야 원내대표가 국회윤리위원회에 진보당 이석기, 김재연 의원의 자격심사를 시도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그를 보면서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4.11 총선 이후 민주당 내 정파의 선택이나 대선 기간 중 문재인 후보나 민주당 주류세력의 못난 행보에 끌려다니는 그를 보면서 한숨도 났고 비판도 했지만, 초선이기에 그리고 섣불리 그를 판단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지켜보았다. 아직 어떻다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이 책은 국회의원으로서 은수미가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지, 자신이 담당하는 환경노동위원회의 주된 업무인 '노동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정책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애기하는 것이다.

저자 은수미는 헌법 제32조 1항(근로의 권리와 적정임금)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 경재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을 소개하면서 "국가가 지금처럼 허접한 일자리 양산을 방치한다면 모든 국민이 근로의 권리, 일자리다운 일자리에서 일할 권리를 보장할 의무를 방기하는 것입니다. '국가'라 함은 행정부뿐 아니라 입법부와 사법부를 포함하는 것이다."(p.26)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헌법을 준수하고 주권자인 국민의 권리와 행복을 신장시키겠다고 맹세하고 공직자에 취임한 현 정부의 대통령, 청와대, 장차관, 공공기관장, 고위 관료뿐 아니라 대다수의 국회의원, 지자체장, 시군구의원, 대법원, 헌법재판관, 고등법원, 지방법원, 판검사 모두가 헌법을 위배한 셈이고 국헌을 문란케 한 범법자들인 셈이다.
이러한 헌법의 내용과 헌법의 취지에 대해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알리고 배워야 한다. 헌법에 위배된 여러 법률의 문제점과 정부와 정치권의 불법행위를 주권자로서 준엄하게 지적해야 하며, 판검사들이 헌법을 준수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격심사를 요구해야 하고, 헌법을 준수하지 못하는 공직자에게는 엄중하게 책임을 묻고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고 탄핵을 추진해야 한다.
주권자의 권리, 시민의 권리, 행복한 노동의 권리는 스스로 찾는 것이지 다른 누가 가져다 주는 게 아니다.

한반도가 일제 식민지에서 해발되기 전인 1944년 5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선진국의 노,사,정 대표가 모여 '필라델피아 선언'을 채택했다. 국제노동기구(ILO)의 목적에 관한 선언으로, 다음 네 가지 기본 원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2.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는 부단한 진보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3.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번거롭게 한다. 4. 결핍과의 전쟁은 각국에서 불굴의 의지로, 그리고 노동자 대표와 사용자 대표가 정부 대표와 동등한 지위에서 공동선의 증진을 위한 자유로운 토의와 민주적 결정에 함께 참여하는 지속적이고도 협조적인 국제적 노력에 의하여 수행되어야 한다."
노동이 상품이 아니라는 선언은 시장과 기업간의 경쟁이 국가간 경쟁으로, 그리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경쟁과 시장이 국가와 사회를 지배하여 사회적 정의를 짓밟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노동능력을 시장에 맡기면 인격마저 상품으로 거래된다는 사실을 우려했을 것이다.
이후 미국, 유럽 등 소위 선진국은 1970년대 말까지 30년 넘게 필라델피아 선언을 준수했기에 일정한 수준의 소득과 부의 상승과 평등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라델피아 선언과 같은 정부와 정치권의 노력이 있고 없음이 현재 노동자의 처지를 가져온 셈이다.
지금부터 한 사람부터라도 헌법에 구정된 '노동권'과 '적정 임금', '행복추구권'과 경제민주화 등에 대한 공감과 소통이 조금씩 퍼져야 한다. 한 사람에서 시작하더라도...

한국 노동자 약 1,720만명 중 노동조합 조직율이 2011년 기준으로 약 10% 정도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율은 1.7% 정도고요.("노동자 절반 비정규직 1.7%만 가입"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505778.html)
노동조합 조직율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급상승하여 1989년 약20%로 최고 높은 수준을 달성했다가 그 이후 꾸준히 줄어들어 24년 만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민주노총 노동조합원 수는 이명박 정부 들어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여기에 비정규직 조직율을 감안하면 정규직 노동조합이 주로 사라지거나 탈퇴한 셈이며, 사업장 규모에 따라 노동조합 가입율도 격차가 크게 나타납니다.
민주노총이 2013년 자체 집계한 장기투쟁사업장 현황(https://www.google.co.kr/url?sa=t&rct=j&q=&esrc=s&source=web&cd=8&ved=0CGcQqQIwBw&url=http%3A%2F%2Fnodong.org%2F%3Fmodule%3Dfile%26act%3DprocFileDownload%26file_srl%3D101310%26sid%3D98d358aa3e431193cb19c05ab0edd8b5&ei=-NmYUfu4E4ajigfvxoHADQ&usg=AFQjCNE9Tfe6jUA6gPROanExdlV8G9bOyA&sig2=1rcZODAVqwBcBIYSHCiMrA&bvm=bv.46751780,d.aGc&cad=rjt)을 보면 전국 60개 사업장 대부분이 정규직 노동조합이다. 그리고 장기투쟁사업장의 공통점은 정리/부당해고, 해고자 복직, 노조 탄압/파괴, 부당노동해위, 손배, 고용승계, 직장폐쇄 철회 등 정부와 사용자의 노동조합 탄압에 맞서 고용 안정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대표적인 사업장이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유성기업, 콜트콜텍, 기륭전자, 코오롱, 이랜드 등이며, 재능교육처럼 '사용자성'이나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지회처럼 '정규직화'가 일부 포함되어 있다. 즉, 장기투쟁사업장은 민주노총과 전경련 등 사용자 사이에서 '고용 안정'과 '민주노조 사수'의 상징적이고 분기점이 되는 사례인 것이다.

대규모 사업장의 인원 축소와 사업장 해외 이전, 꾸준한 노조 조직율 감소와 민주노총 사업장과 가입자수의 감소, 87년 이후 승리보다 패배가 많은 현실, 정치권과 정부의 비협조... 그동안의 과정은 대기업 사업장이나 정규직 사업장의 노동자들 역시 정리해고와 노조 파괴에 따른 '고용 불안정'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사실상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사실 정규직 일자리가 정리해고로 공격을 받다 보니 정규직 노동조합원의 고용 안정에만 집중하고, 조합원이 아닌 비정규직에 대한 지원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따라서 노동조합이 조합원만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일자리 안정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할 수는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의 확산 원인을 노동조합이나 정규직의 고용 경직성에서 찾는 것은 명백한 마녀사냥이다."라는 은수미 의원의 주장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1천명 이상 대기업의 종사자 비중이 1993년 13%에서 2009년 6%로 반토막이 났고, 10년 이상 장기근속자 비중이 16% 가량이다. 정규직조차 고용 불안정에 시달리는데 일방적으로 정규직 탓을 할 수 없다"라는 항변에도 동의한다.
물론, 그들도 사람이고 사람들이 모인 조직이기 때문에 관료적일 수 있고, 정파적일 수 있으며, 패권적일 수 있습니다. 일부 인사들이나 특정 노동조합이 비도덕적일 수 있고, 정규직의 이익에 좀더 편중될 수도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보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일 수도 있고, 내부에서 입장이나 노선이 첨예하게 대립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노동자는 하나"이고 "노동조합으로 뭉쳐야 산다"는 구호가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언행, 분열을 조장하는 언론과 정치권의 선동에 대한 동조,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려는 태도를 삼가해야 한다.

근로기준법은 헌법에서 정한 노동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정하는 법률이다. 이 법의 제9조(중간착취의 배제)는 "누구든지 법률에 따르지 아니하고는 영리을 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취업에 개입하거나 중간인으로서 이익을 취득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p.105) 한마디로 노동에 대한 '중간 착취'를 금지한 것이다. 따라서 법률 전문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근로기준법과 충돌하는 다른 법률은 헌법과 근로기준법의 추지와 위계상 효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파견 노동이나 용역 노동, 사내하청 등의 불법적인 여지가 있는 각종 고용형태는 이런 저런 이유로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따질게 아니라 원칙적으로 불법으로 규정하여 금지한 후 선별적으로 허용하는 방향으로 정부가 노동정책을 펴야 한다. 부득이하게 회사가 파견이나 하청을 줄 경우에는 노동조합의 동의를 구하도록 법을 개정해야 하는 것이 공정하고 공평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경제민주화다.

근로기준법 제55조에 따르면 일주일에 15시간 이상 근로계약을 맺은 근로자가 일주일을 만근했을 때 유급휴일에 따른 주휴수당을 받도록 되어 있다.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의 유급휴일을 주어야 한다." 1인 이상 노동자가 있는 사업장은 하루 3시간씩 5일 만근하면 3시간치 임금을, 8시간에 5일이면 8시간치 임금을 지급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규정은 중소기업, 개인사업자 등 사용자도 노동자도 알지 못한다. 세무서에 사업자를 신청해도 알려주지 않고 노동자에게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사용자도 노동자도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부모도 선생도 선배도 상사도 모르고 알려주지 못한다.
나 역시 6년 동안 주식회사의 대표, 2년 반 동안 주식회사의 재무이사를 해봤지만 주휴수당은 지난 번 청년유니온의 소송과 이 책을 통해 자세하게 알게 되었을 정도다. 내 주변에 노동자를 1인이나 10인을 고용하는 사업자든, 대기업 중소기업에 다니는 노동자든, 알바나 비정규직이든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권은 기본권이기에 당연히 1~3년 뒤에는 경제활동인구에 포함되는 고등학생에게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 사업자를 신청하는 이들에게는 세무서에서 직접 또는 의무교육 방식으로 외부 교육기관에서 노동관련 법률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정부의 의무이고 공공서비스인 것이다.
은수미 의원은 이런 주휴수당을 포함하여 최저임금, 퇴직금, 통상 임금, 노동조합, 단체교섭, 파업권 등 노동3권에 대해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제도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은수미 의원의 책 속에 언론의 '강성 노조' 주장에 대한 인상 깊은 대목이 있다. "한국의 노동조합이 약하기 때문에 강성 투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노동조합 조직율이 50%까지 늘어 노동운동이 강해지면 굳이 '강성 투쟁'을 할 필요가 없다. 약하기 때문에 저항의 강도가 쎄지는 것이다"(p.205)

은수미는 책 9개의 장 중에서 한 장을 자신이 정의한 '노동의 수수께끼'의 해답으로서 '일자리 지도 바꾸기 로드맵'을 제시한다. 이 로드맵은 노동조합 가입 자격 등 노동3권 확립을 위한 노동법 개정, 피고용보험 대상 확대 등 사회안전망 확대, 정리해고 엄격 제한 등 좋은 일자리 확대와 '일자리 최소 기준' 확립, 공공부문 비정규직으 정규직 전환 등 일자리 차별 철폐와 비정규직 제한이다.
은 의원이 제시한 로드맵은 충분히 포괄적이고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민주당 부설 연구소나 정책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가 따로 정책을 수립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이 로드맵이 국회를 통과하고 정부가 강력히 시행한다면 한국의 노동문제의 절반 이상이 해결될 것이다. 일부 부족한 점이 있다면 은 의원이 제시한 로드맵이 실행될 경우 그 효과가 노동자뿐 아니라 경영자나 자산가들, 그리고 한국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중장기적으로 해롭지 않으며 오히려 이로울 것이라는 분석 결과가 빠져있다는 점이다.

은수미의 로드맵에서 아쉬운 점은 "누가 그리고 어떻게"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사실 은 의원이 제시한 로드맵의 대부분은 이미 민주노총 등 노동계와 통합진보당 등 진보정당에서 오래 전부터 제기해온 '노동 해결 방안'에 포함되어 있다.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의 힘이 부족하고 전략전술이 미숙하여 아직까지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책이 학회지에 제출하는 논문이 아니라 '로드맵의 실제 실현'을 목표로 한다면, 은 의원이 집중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제도와 정책이 국회와 정부에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실행방안일 것이다.

또한 은수미는 국회의원이다. 국회의원의 임무는 유권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받아 정책과 제도를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은 의원의 가장 큰 임무 중 하나는 은 의원의 로드맵을 민주당 의원들에게 공감시키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민주당 의원 전체의 과반수가 동의해야 민주당의 당론이 되는 것이고 국회에서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 의원 몇 명부터 의기투합하기 시작하여 숫자를 늘리는 것이고 로드맵 중 동의하는 사람이 많은 것부터 상임위에 제출하면 된다. 민주노총 등 노동계와 진보정당 의원들은 당연히 도울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은수미 의원이 단신으로는 작은 힘이지만 전략적으로 로드맵을 실현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민심의 흐름을 잘 파악하여 주요 제도를 추진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고 또 본인이 주도적으로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은수미 의원이 열정적으로 노력하여 노조파괴 컨설팅 회사인 컨택터스 사례를 통해 여론을 환기시키고 관련법을 개정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물론 그 경우에도 적어도 민주당 내 의원들, 다른 야당 의원들과 소통하고 공감(압박?)을 끌어내야만 가능하겠지만...

제도적인 개선책을 국회에서 추진하는 것과 더불어 은 의원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은 제도적인 개선이 이루어지기 전이라 하더라도 대안으로 제시한 방안을 먼저 관계자들과 추진하려 성과와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보적인 시도 지자체장이나 교육감과 협의하여 노동3권에 대한 교육을 고교생이나 대학생,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에게 교육하는 것이다. 노조 설립이나 단체협상 같은 것도 민주노총 등과 협의하여 실습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제시하고 싶은 제도는 교통법규 위반 신고포상금 제도처럼 노동3권 위반 사업장에 대한 제3자 신고포상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고소, 고발권을 줄 수도 있죠. 일반적인 인권으로까지 확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종의 파파라치 제도다. 북유럽에서는 인권 침해에 대해 별도의 유급 감시원을 두고 사건 현장에서 적발, 제재, 고발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는 것을 어떤 책에서 본 기억이 난다.

대중서적으로서 책에 대해 아쉬운 점은 저자의 주장을 펼쳐나가는 데 있어 독자의 대상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한나 아렌트, 다니엘 벨, 제러미 리프킨, 알랭 쉬피오, 조지 리처 등 너무 많은 외국 전문가, 학자들의 이론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잗침하는 것은 일반 독자이 읽기 부담스러울 것이다.

[ 2013년 6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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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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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애란 저 <비행운>을 읽고 / 2012. 07., 350쪽, 문학과지성사

8개의 단편 소설을 묶어 고독한 현대인의 짓눌리는 삶을 보여주는 작품 <비행운>은 "날아가는 꿈을 飛行雲"꾸던 주인공들이 "행운이 없는 非幸運" 삶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외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동경하고('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비행기의 비행운(飛行雲)을 보면서 어디론가 훨훨 떠나고 싶고('하루의 축'), 실제 비행기를 타고 떠나기도 하지만('호텔 니약 따') 결국 더 나쁜 상황에 처하고 만다.

주인공들의 삶은 21헤기 한국 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이기도 하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변변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거나('너의 여름은 어떠니'와 '호텔 니약 따'), 취업을 했다 하더라도 불안정하고 불만족한 수준이다('큐티클'과 '서른'). 중년 하층민의 고단한 처지를 다룬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나 '하루의 축'에서는 그 곤궁함과 처절함이 더하다.
사정이 딱하고 처지가 어렵다보니 이야기 속의 인간관계는 특별한 악의나 고의가 없더라도 더욱 나빠지기 일쑤다. '호텔 니약 따'에서 두 친구 사이는 더욱 멀어졌고, '너의 여름은 어떠니'나 '서른'에서는 자신이 좋아했던 남자에게서 어이없이 배신당한다. 나아가 '서른'의 경우는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했던 여주인공이 자기 제자를 배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물속 골리앗'은 이야기 전개가 악화일로를 거듭하는 구조이고, '벌레'에서는 최소한의 가능성이 있을지마저 회의하도록 결말로 이어진다.

우리는 방송 뉴스와 신문을 통해 '청년실업'이나 '저임금 알바', '계약직'이나 '비정규직 노동자(청소 노동자)', '독거청년'과 '다단계 폐해' 등에 대해 중성적 또는 인간의 삶이 사라진 사회적 용어에 대해 이런저런 통계나 정책에 대해 듣는다. 이 작품은 결국 그런 중성적인 단어, 삶이 탈각된 계층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의 애환이 어떤 것인지 말해주는 셈이다. 그들의 희망과 좌절, 욕망과 절망에 대해...
자신의 주변에 작품 속 캐릭터와 비슷한 친구나 선후배가 있는 독자라면 이 작품이 실감나게 느껴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먼 나라의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삶을 사는 이들은 한국사회에 부지기수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주인공들이 고독, 고립, 막막함, 좌절, 공포에 처하게 됨을 보여준다. 그들이 그러한 처지에 몰리게 되는 데에 누군가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개입되거나 주인공 자신이 어떤 분명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욕망과 희망을 가지고 상식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결정과 판단의 과정에서 주인공들은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고 좌절하고 절망하게 된다.
주인공들이 겪는 좌절과 절망, 막막함과 공포는 독자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느끼기 힘든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간접 경험조차도 쉽지 않은...

정부와 여론조사 결과는 작품 속 주인공들, 즉 1~2인 가구가 전국 가구수의 50%에 달한다는 것을, 저임금 노동자와 실업자를 합하면 1천 만명이 넘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결국 <비행운>은 1~2인 가구라는 이름으로 감추어져 있는 '버려진' '잊혀진' '고립된' 이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 관련 기사 ] - "4가구 중 한곳이 `1인가구'…10년새 1.9배 급증" 2011년 (http://www.yonhapnews.co.kr/economy/2012/12/11/0301000000AKR20121211091300002.HTML)
- "국민 6명 중 1명 빈곤층 연 1000만원도 못 번다" 2012년 12월 (http://m.hankooki.com/t_view.php?WM=hk&FILE_NO=aDIwMTIxMjIxMjExNTE1MjE1MDAuaHRt&ref=www.google.co.kr)
- "비정규직 노동자 831만명, 최저임금 미만 임금근로자 204만명" 2011년 5월 (http://www.saesayon.org/agenda/bogoserView.do?paper=20110615175143094&pcd=EA01)

최근에 읽은 <종이배를 접는 시간>이 희망과 행운을 안고 시작했다가 자본가와 경영자에게 무차함하게 짓밟히는 노동자들의 삶의 실체를 한진중공업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라면, <비행운>은 희망도 없이, 행운도 기대할 수 없는 '배제된 사람들'의 끝없는 좌절에 대한 '감추어진' 이야기다.
이 작품 속의 주인공들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보다 더욱 열악한 처지다. 언론이나 시민사회단체, 종교단체, 정당의 손길도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질식해가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시민단체, 종교닺체, 정당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편 소설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화가 나고 답답한 그 무엇이 가슴에 맺혔다. 왜 작가는 주인공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지 않고 행운을 선사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지금 이 땅의 현실이기 현실이기 때문일까? 
작가는 작품 속에서 사회구조적 모순이나 그 안에서 인간 군상들의 이전투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주인공들에게 '피해자'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하지도 않았고 독자들이 측은해하기를 원하지도 면죄부를 위한 알리바이도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공감'을 위해서일까? 책의 말미에 작품을 '해설"한 우찬제의 글 "본래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지만, 함께 아파하기를 통해서라면 새로운 날개를 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김애란(작가)은 생각한 것 같다"(p.347)에 일부 공감이 되었지만 독자로서 나는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았다.

소설을 읽다가 나이 '서른 즈음에' 이런 작품을 낸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문득 궁금하다.

[ 2013년 6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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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를 접는 시간 - 한진중공업 3년의 기록
허소희 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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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허소희, 김은민, 박지선, 오도엽 저 <종이배를 접는 시간 : 한진중공업 3년의 기록>을 읽고 / 2013. 5., 304쪽, 삶창


2011년 그 해 뜨거웠던 여름, 부산시 영도구에 자리잡은 한진중공업 조선공장은 삼복 더위의 열기도 눌러버린 '희망버스'의 열기로 뒤덮였다. '희망버스' 참가자들 대다수의 참여 동기는 아주 단순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우리가 게을러서인지 85호 크레인에 또 한 분의 여성 노동자가 올라가 있어요. 그대로 뒀다가는 옛날처럼 또 죽음을 맞이할 지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여기 오게 됐어요(차용택)"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고,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요.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고 빨리 내려와 좀 쉬셨으면 좋겠어요. 해고자들도 가족들도 쉬면서 일하면서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조서윤숙)"

즉, 또 다시 한진중공업에서 그리고 크레인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참가자들의 공감과 연민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결국 그들의 염원대로 김진숙 씨와 이용대 씨 등은 1년이 채 되지 않아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희망버스'는 2008년 촛불시위와 비슷한 면이 많았다. 온라인에서 몇 명에 의해 촉발되었고, 온라인 상으로 분위기가 고조되었으며 나중에 야당과 시민사회단체가 합세한 점이 그렇다.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이 참가자의 대다수를 구성했고, 특정한 정치적 목적이나 목표 없이 한진중공업 노동조합과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절박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6번이나 뭉쳤다. 
그리고 '희망버스'의 열기는 한진중공업 경영자의 부도덕성과 불법성을 여론화시켰고, 주요 정당과 국회 그리고 정부를 움직였으며 크레인에서 사람들이 무사히 내려오도록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김진숙 씨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크레인에 오르도록 만들었던 법적, 제도적, 정치적, 구조적, 문화적 근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최강서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책은 한진중공업 경영자들과 정부기관의 잔혹한 역사를 기록한 르뽀다. 특히 그 중에서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 간의 기록을 담았다. 사측이 정리해고 계획을 발표한 2010년부터 최강서 열사가 노조 사무실에서 목 매 숨진 후 66일 뒤에야 솔밭산에 안치된 2013년까지, 크레인 위의 김진숙과 사수대, 그리고 크레인 아래의 정투위와 가대위가 정리해고 철회를 위해 어떻게 싸워왔는지를 보여주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철회 투쟁 3년의 기록이다.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세 가지다. "왜 김진숙과 한진 노동자들이 크레인에 올라가야 했는가?"와 "3년 동안 어떤 과정이 있었는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교훈을 남겨 주었는가?"라 할 수 있다.
한진중공업의 사례는 국내 기업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처지와 조건을 대표적으로 말해준다. 부산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이라고 평가받던 한진 노동조합이 경영자와 정부기관, 언론으로부터 탄압받아온 것을 고려한다면 대다수 국내 노동자들의 처지가 어떠할지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이 땅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들 말하지만 한진중공업 3년의 기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정부와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이 규정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고, 보호받지 못했으며 경영자,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법을 위반하며 부도덕과 불법을 일삼았으면서도 제대로 통제되지도 처벌받지도 않았다.


헌법과 법률에 시민들의 표현, 집회, 시위, 결사 등의 자유가 보장되는 이유는 과거에 그런 자유가 국가권력이나 기타 폭력으로부터 침해받아 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결사와 시위, 집회와 파업 등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은 자본가와 경영자로부터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역으로 노동자들의 집회와 파업이 헌법과 법률의 권리를 넘어선다면, 근거가 없고 피해자가 발생한다면 공권력에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그런데 자본가나 경영자들은 '경비 용역'이라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폭력배를 동원했다. 노동자외 노조가 집회, 시위, 파업을 통해 회사 시설물에 피해를 끼치면 법에 호소하면 된다. 하지만 '시설 보호'와 '피해 염려'라는 명분으로 회사 내 관리자나 경비용역을 동원하여 노동자와 노조의 권리를 방해하는 것은 엄연히 불법행위이기에 공권력이 이를 저지하고 처벌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부와 경찰, 검찰, 부산시는 공공기관으로서 어떠한 의무도 행하지 않았고, 선거를 통해 무능과 부패, 부정과 부패를 용인받았다.

국내 노동운동이 얼핏 '과격'하고 '폭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경찰과 검찰, 그리고 국회와 사법부가 이런 자본가, 경영자의 불법과 폭력을 용인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스스로 권리를 지키고 대응하기 위해 폭력충돌이 빈발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그 하수인들에 대해 김구, 안중근, 이봉창, 김좌진이 폭력을 가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고 강정마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의자놀이>를 읽고 쌍용차 사태의 본질과 성격을 더 깊이 알게 되었듯이 이 책을 통해 수박 겉 핥기식으로 알았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을 둘러싼 이 땅의 자본과 노동자 현실을 좀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최재천 교수는 자신의 저서 <통섭적 인생의 권유>에서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표현(행동)한다."고 했다.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땅의 현실에 대해 좌절이나 절망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얻고 싶었다. 그리고 책을 덮은 후 나는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진실의 힘을 믿고 노동자들의 순수함과 열정을 알고 시민들의 내면에 자리잡은 공감과 연민의 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 명의 신진작가와 르포작가 오도엽이 공동으로 출간 작업을 했다. 문장의 유혹과 작가의 상상을 과감히 버리고 사실의 힘이 주는 감동에 집중해 한 문장 한 문장을 써내려간 네 명의 저자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배를 짓듯 서로의 손을 포개어 한진중공업 3년의 역사를 함께 빚어냈다. 
끊임없이 약속을 깨려는 이들이 있을 때, 누군가는 약속을 위해 곡기를 끊어야 했고, 땅을 버리고 허공에 올라야 했고, 피 터지게 싸워야 했고,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 르포르타주는 약속과 배신 사이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며 진행되어온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역사이고, 오늘날 모든 노동자들의 역사이다. 
85호 크레인과 희망버스는 과거가 아닌 오늘이기에 이 르포르타주가 던지는 메시지는 감출 수 없는 대한민국의 불편한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 책의 집필 과정과 결과물은 이 시대 르포문학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좀 더 자세한 책의 내용은 내 개인 블로그에 5부로 나누어 따로 정리해 놓았다. http://blog.daum.net/hy2oxy/8691518

[ 관련 기사 ]

- 2013. 5. 한진중공업 3년의 기록, 종이배를 접는 시간 http://www.vop.co.kr/A00000635096.html

- (6차 희망버스) 2013. 1. 한진중공업에 모인 3000명 “죽음의 길, 멈추게 만들자” http://www.vop.co.kr/A00000584222.html

- (5차 희망버스) 2011. 10. 1박 2일의 가을소풍 끝나다.. "희망버스가 국회와 한진자본을 움직였다 "http://www.vop.co.kr/A00000438417.html  

- (4차 희망버스) 2011. 8. 4차 희망버스 5천여명 시민 참가속에 청계광장에서 개최 http://www.vop.co.kr/A00000427406.html

- (3차 희망버스) 2011. 7. '평화'로 꽃피운 3차 희망버스, 1박2일의 아름다운 '휴가' http://www.vop.co.kr/A00000420027.html

- (2차 희망버스) 2011. 7. 85호 크레인 1km 남기고 멈춘 희망버스.. 1만여 시민 “끝까지 우리는 달린다” http://www.vop.co.kr/A00000414625.html

- (1차 희망버스) 2011. 6. ‘트위터’가 한진중공업 '절망의 벽'을 무너뜨리다 http://www.vop.co.kr/A00000405892.html

 [ 2013년 6월 0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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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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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에릭 호퍼(Eric Hoffer) 저, 이민아 역 < 맹신자들 The True Believer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을 읽고 / 2011. 09., 255쪽, 궁리출판사

공부모임 교재로 채택되어 읽게 된 에릭 호퍼의 대표 저서. 이 책은 '거리 위의 철학자'로 유명했던 에릭 호퍼를 위대한 사상가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책을 읽은 소감은 서구의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이 20세기 초중반 대중(민중)의 광범위한 저항운동을 폄하하고 비난하기 위해 반갑게 맞이하였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호퍼가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운영방식을 바꾸고자 나섰던 이들을 줄곧 개인적으로 무능하고 이기적이며 자기부정과 권태에서 출발한 광신도라 규정하기 때문이다.

1951년에 첫 출간된 이 책을 1990년 대한교육공사가 한국에 처음 번역 출간했던 제목은 <대중운동의 실상>이었다. ‘실상’이라는 단어에서 뭔가 ‘불온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 책은 “민주화와 노동운동 등 사회 운동'을 억누르려는 정부와 저항적 대중운동을 삐딱하게 보고자 하는 권위주의적 관변학계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복음이 되었던 책”(장정일의 독서일기, 한겨레 2011. 10. 14.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00866.html)이기도 했다.

물론 장정일은 이 책의 순기능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적 통찰로 충만한 이 책은, 딱 소리와 함께 야구장을 가로지르는 ‘빨랫줄 타구’처럼, 대중운동을 좌우·선악 양단으로 구획하지 않는다. 호퍼는 수구나 진보 공히 대중 동원이나 선동에 취약하다고 보며, 대중운동을 무조건 악으로 타매하기보다 “정체된 사회를 각성시키고 혁신하는 요인”으로 긍정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맹신자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개성과 주체성을 돌보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오늘의 주체가 일망감시와 통치성에 속속들이 식민화된 지금, 지은이의 채근은 성공한 예외자의 순진한 해결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번에 출간된 제목은 'The True Believer'에 맞는 번역인 '독실한 신자'가 아니라 '맹신자'다. 이 제목 또한 출판사와 역자의 의도와 편견이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신념이나 사상 따위를 다른 것으로 바꿈"이라는 뜻을 가진 '전향'이라는 단어를, 좌절하거나 현실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대중운동에 뛰어드는 것을 지칭하는 데서도 출판사와 번역자의 수준 또는 악의가 느껴진다.

에릭 호퍼는 서문에서 여러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책을 발간했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유형의 헌신과 신념, 권력 의지, 단결과 자기희생에는 어떤 획일적인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광신적 기독교 신자, 광신적 이슬람교 신자, 광신적 민족주의자, 광신적 공산주의자, 광신적 나치가 서로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광신'이라는 점에서 한 부류로 취급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대중운동'은 반체제 저항운동뿐만 아니라 인간이 집단을 만들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운동을 아우른다. 초기 기독교 운동, 종교개혁 운동,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나치즘, 일본의 근대화, 시오니즘 운동 등을 포괄하는 의미다.

호퍼는 태동기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이들은 자신의 삶이 순식간에 극적으로 변한다는 전망에 이끌리기 쉽다고 주장한다. 대중운동의 지도자도 이러한 대중의 열망을 꿰뚫어보고 보잘것없는 현재를 극복하면 영광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대중을 선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밋빛 미래에 이끌리는 이는 주로 좌절한 사람이며, 현재의 자신을 경멸하는 좌절한 사람은 자기의 삶이 통째로 바뀌는 급진적인 변화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변화를 갈망하는 이러한 좌절한 이들의 심리 상태 때문에 모든 초기의(태동기) 대중운동은 좌절한 사람들한테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고 호퍼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쓸모없다는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자신에게서 벗어나 좀 더 완전하고 숭고해 보이는 무언가를 추종하기가 쉽다. 숭고한 대의에 에너지를 쏟음으로써 자신의 하찮은 삶, 망가진 인생으로부터 도피한다는 것이다. 실로 좌절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열정적으로 매달릴 어떤 대상이 필요한 것이므로 그것이 종교든 사회혁명운동이든 민족운동이든 가리지 않는다. 따라서 호퍼에 따르면 광신적 공산주의자가 광신적 애국주의자나 광신적 가톨릭 신도로 바뀌는 일은 이치에 맞다. 맹신자에게는 대의명분이나 이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느냐 여부에 있다.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을 거부하고 하나의 조직에 완전하게 하나된다는 호퍼의 주장은, 조직이나 대의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일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고 조직이 그리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 폭력을 동원해야 한다면 더 없이 무자비해질 수 있다는 논리로 비약된다. 
따라서 호퍼의 책은 시공을 초월하여 극단적 테러리스트, 자살폭탄자의 심리를 '광신도'로 해석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호퍼는 결론을 대신하여 좋은 지도자의 예로 링컨, 간디, F.D. 루스벨트, 처칠 같은 지도자를 꼽는다. 이들은 히틀러, 스탈린, 루터, 칼뱅과는 달리, 좌절한 영혼을 대중운동의 재료로 삼지 않았다. 이들 "지도자의 자신감은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며, 자신이 인류를 명예롭게 대하지 않는 한, 아무도 명예로울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에릭 호퍼가 대중운동의 본질에 대한 단상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다분히 선험적이고 단정적이다. 특히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개인들이 "자신이 쓸모없다는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자신에게서 벗어나 좀 더 완전하고 숭고해 보이는 무언가를 추종하기" 쉽고 "숭고한 대의에 에너지를 쏟음으로써 자신의 하찮은 삶, 망가진 인생으로부터 도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압과 세뇌에 의해 노예같은 삶을 살던 개인들, 민중들이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나서기 위해 각성하고 자립하는 운동을 심하게 폄하하고 왜곡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호퍼가 대중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속성을 규정하는 방식에는 대부분 합리성이나 논리적인 연관은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좌절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불만과 증오가 생겨난다거나 쉽게 남을 믿는 사람이 남에게 사기치는 경향이 강하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이는 상식적으로도 이론적으로 적절하지 않다. 사람이 좌절하게 되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그를 좌절하게 하는 요인이 내부나 외부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고립적인 환경인지 집단적인 환경인지에 따라, 교육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에 따라 당사자나 집단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자는 외부에서 맹종할 대상을 찾을 수도 있지만, 역으로 삶을 포기하면서 움직임 자체를 거부할 가능성이 있기도 하다. 호퍼는 사람들의 특정한 처지와 심리상태에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신의 의도에만 한정시키는 오류를 범한 셈이다.

독일의 경우에도,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해 심각한 좌절에 빠진 독일 민중들이 히틀러를 선택한 것은 히틀러의 대중 선동이 크게 작용하였으나 그 이전에 민중들이 지지하고 참여했던 독일 사회민주당 등 진보좌파 진영이 노선과 정책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이탈리아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호퍼의 주장에 타당성과 시사점이 있는 부분도 있다. 대중운동의 대오 속에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뛰어 들었거나 광신적, 맹신적 속성을 가진 개인이 일부 존재할 수 있으며,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 모두에게 맹신적 속성이 내재해 있을 수 있다. 그런 불완전한 개인이나 개인의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그리고 그런 맹신적 개인이 대중운동 내에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대중운동이 애초 목적에서 변질될 수 있음을 잊지 않도록 호퍼가 경고해주는 셈이다.
특정 최근 논란이 된 '일베(일간베스트)'의 일부의 경우 극단적인 자기 혐오에서 비롯된 가능성이 있으며, 정치인 지지자 중에서 명백히 '빠' 성향을 보이거나 극단적인 이념성향, 공격성향을 보이는 경우도 경계할 일이다.

광신적 대중운동이나 이념운동에 빠진 사람은 '광신적'이라는 특성 때문에 또 다른 광신적 운동으로 변질된다는 지적은 크게 공감이 된다. 1980년대에 이념적으로 과격하고 광신적이었던 김영환 씨 등의 뉴라이트 세력이 친일을 찬양하고 사회운동에 적대적인 사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라는 말이 근거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선전 선동만으로 내키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움직이지는 못하며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주입시키지도 못하고 이미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설득하지도 못한다"(p.156)는 호퍼의 주장 역시 시사점이 크다. 희망이 없는 선전선동만으로는 대중운동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2008년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지금까지 시민의식을 가진 이들과 민주당 등 정치권이 정권과 기득권에 반대하는 선전선동만으로 대중과 유권자에게 지지를 구하다가 2012년 총선, 대선에서 연거푸 패배한 것이 호퍼의 그런 주장을 입증한 셈이다.
한국의 사회운동 진영과 진보정당 진영이 선전선동 이외에 '희망'과 '대안'을 꾸준히 모색해야 함을 경고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중운동에 대거 참여한 대중들이 "자기희생을 각오하는 열정"을 쏟아 붓는 반면 이런 주체가 만들어놓은 그 대중운동의 열매를 가져가는 이들은 "개인의 성공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는 호퍼의 주장은 선견지명이 있다. 1980년대 사회운동의 성과를 야당 정치인이 독식하고, 그 이후의 대중운동 역시 일부 출세주의적 운동가들이 보수 정치권에 몸담으면서 사회운동과 진보정당을 약화시켜온 것이 한국의 대중운동, 진보정당 운동사였기 때문이다.

[ 2013년 6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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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빈곤 경제학고전선집 15
헨리 죠지 지음, 김윤상 옮김 / 비봉출판사 / 199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 [서평] 헨리 조지(Henry George)저, 김윤상 역 < 진보와 빈곤 Progress and Poverty >을 읽고 / 1997. 01., 589쪽, 비봉출판사

 

헨리 조지가 이 책을 처음 출판한 것은 1879년이었다. 유럽에서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때가 1848년이고 '파리꼬뮌'이 일어난 것이 1871년이니 민중혁명과 사회주의의 격동기에 출간한 셈이다. 일제가 조선에 군사적 위협을 가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때가 1876년이니 한반도 민중들은 암흑 속에 갇혀 있었다.

 

헨리 조지는 "부는 계속 증가하는대 데 왜 빈곤은 증가하는가?"라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연구했다. 그의 이론을 간략히 요약하면 "물질적 진보가 자본의 이자나 노동의 임금이 아니라 토지의 지대(토지가치의 상승)으로 몰리면서 임금이 하락하고 빈곤이 창궐한다"와 "임금과 이자는 어디에서나 지대선 내지 경작의 한계에 의해 정해진다"고 정리할 수 있다.

 

헨리는 당시 서구에서 창궐하던 경제학에 대한 주류 이론 내지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이 책을 발간한 것이다. 아담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 버클, 프라이스 등의 임금 학설을 비판하면서 "임금이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대가로 지불되는 노동의 생산물에서 나온다"는 논리를 전개하였고, "노동자의 생계비도 자본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맬서스의 <인구론>, 즉 "인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생존물자는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주장 또는 이론의 허구성을 사례와 이론으로 통하 비판한다.

 

그는 지대와 지대법칙, 이자법칙, 임금과 임금법칙, 그리고 법칙 간의 연관성과 조화에 대한 정의와 이론을 먼저 수립한다.
"어느 토지의 지대는, 동일한 투입으로 사용 토지 중 생산성이 가장 낮은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도를 초과하는 생산물이 의해 결정된다."(지대법칙 p.161)
"임금과 이자 간의 관계는 자본이 재생산 형태로 사용될 때 그 자본이 가지는 평균적인 증가력에 의해 결정된다. 지대가 상승하면 이자는 임금의 하락과 더불어 하락한다. 즉 이자는 경작의 한계에 의해 결정된다.(이자법칙 p.194)
"임금은 생산의 한계 즉 지대를 지불할 필요 없이 개방된 자연의 최고생산점에서 노동이 얻을 수 있는 생산물에 의존한다."(임금법칙 p.203)

 

그런 후에 저자는 인구의 증가와 기술 개선이 실제 산업과 사회 현실에서 어떨게 부의 분배에 효과를 미치는지 그리고 물질적 진보에 의해 생기는 기대 효과에 대해 분석한 후, 물질적 진보가 대부분 지대에 의해 흡수되고 여기에 투기적 토지 거래에 의해 임금과 이자가 증가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토지 투기의 영향으로 지대가 상승하는 현상은 진보하는 지역에서의 부의 분배 이론을 완성하는 데 무시해서는 안된다. 물질적 진보와 연관된 이 힘 때문에, 진보가 생산을 증가시키는 정도보다 더 큰 비율로 지대를 계속 상승시킨다. 따라서 물질적 진보는 임금을, 상대적으로만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감소시키는 경향이 생긴다."(p.247)
또한 이러한 토지 투기현상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산업불황의 근본 원인"이며 "부의 증가 속에서 계속되는 빈곤의 증가의 근본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헨리 조지는 물질적 진보에 따른 지대 상승과 토지의 독점을 해결하는 방법은 "토지를 공동소유로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토지공개념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토지 공유제라는 해결책의 정당성을 다른 관점에서 제시한다. 토지사유제의 부정의성과 토지사유제의 궁극적 결과로서 노동자가 노예화됨을 설명한다.
그가 제세하는 결론, 즉 궁극적인 해결책은 "지대를 모두 조세로 징수"하는 것이며 대신 기존의 조세를 모두 폐지하는 것이다.

 

부동산으로 밥벌이를 하고 부동산과 주거 문제를 고민하면서 헨리 조지의 명저를 읽지 못한 것을 여러번 후회하다가 마침내 이 책을 읽었다. 마르크스 등에게서 느꼈지만, 19세기 후반에 출간한 저서임에도 주장을 전개하는 데 있어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것이 무척 인상적이다. 어렵지도 않았다.(번역이 훌륭해서인가? ^^)

약 140년 전에 임금과 이자와 지대에 대한 법칙과 연관성을 연구한 저서임에도 21세기인 현재 시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 해방 이후 국내 총생산과 토지 가격의 증대, 그리고 임금소득과 지대를 계산하여 통계를 낼 수 있다면 헨리 조지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소 의아한 것은, (내가 유럽의 사상사를 잘 몰라서 그렇겠지만) 헨리의 주장과 이론 속에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1848년)과 <자본론>(1867년) 자체에 대해 그리고 마르크스의 이론이나 주장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에 살았거나 미국인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헨리 조지의 논거와 이론에 크게 공감이 된다. 특히 토지 사유제를 부정하는 철학과 정당성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는 지구는 인류뿐 아니라 생물체 전체가 공유하는 재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 밖에 없는 지구, 그리고 동식물이 공존하는 대지를 어떻게 인간이, 그것도 인간의 일부가 사유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자연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처지에 있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자연은 노동의 결과 외에는 인정하지 않으며 노동의 결과라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인정한다. ... 자연의 법칙은 창조주의 뜻이다. 자연법은 노동의 권리 외에 어떠한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법에는 모든 인간이 자연을 사용하고 향유할 권리, 노력을 자연에 투입할 권리, 자연으로부터의 대가를 수취하여 소유할 권리의 평등헝이 폭넓게 그리고 명백히 규정되어 있다. 자연은 노동에게만 주므로 노동을 생산에 투입하는 것이 배타적 보유의 유일한 권원이다."(p.322)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의 논거와 이론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지,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몇 가지 때문이다.
첫째, "지대의 상승이 자본 이자와 노동 임금을 전부 가로챈다"를 논리적을 넘어서 구체적으로 연결하려면 계산과 통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저자는 아담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의 '임금 학설'이나 맬서스의 '인구론'을 비판하기 위해 동원했던 수 많은 통계와 수치를 지대 독점론과 지대 과세 정당성에서는 제시하지 못한다. 그리고 '지대 독점론'은 자본주의 태동 이래 자본의 기하급수적 증가와 노동의 산술급수적 증가 내지 정체(물가상승을 감안한) 및 제국주의적 착취를 설명하지 못한다. 한 가지 요소 또는 제도가 나머지 모든 제도와 상황을 규정짓는다는 것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만큼이나 단선적, 일면적이다. '지대 독점론'은 지본가가 힘과 권력을 장악하여 부정의한 제도를 통해 분배정의를 왜곡하는 책임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
둘째, 이론적으로 지대 취득자와 이자 취득자를 나눌 수 있지만, 실제 경제 현실에서는 복합적이고 이중적이다. 대부분의 대규모 토지 소유자는 동시에 이자 취득자이면서 자본가인 것이 현실이다. 물론 헨리 조지가 연구할 무렵 유럽에서는 봉건 지주와 부르조아 자본가가 어느 정도 분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봉건 지주 중에서 지대 이외에 이자 취득자 생활을 하거나 자본가를 겸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까?
셋째, 헨리 조지는 생전에 알지 못했지만, 사회주의를 표방하며서 혁명을 일으키고 건설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토지 공유제를 중심으로 토지 소유 구조를 운영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의 물질적 진보가 인민들의 삶의 개선에 직결되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헨리 조지의 '정의'와 '정당성'에 대하여 공감하면서도 서구인 특히 미국인으로서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제5장 미국의 토지사유제에서 "우리가 미국 국민성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모든 요소, 우리의 생활과 제도를 오래된 국가보다 더 낫게 하는 요소의 근원은, 새로운 토양이 이민자에게 개방되어 있고 미국의 토지가 저렴하였다는 사실에 있다."(p.376)고 자랑스러워했지만, 그 이전에, 즉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유럽 프로테스탄트부터 시직하여 미국인들이 향후 200여년 간 당초 토지공유제(토지 사유 개념이 야초에 없었던 인디언)였던 토지를 인디언들에게 구걸과 아첨, 사기와 농락, 힘과 폭력으로 강탈하여 토지를 집단적으로 갈취하였고 자신들끼리 사유했다는 점을 거론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헨리 조지가 주장한 물질적 진보와 인간의 품성, 그리고 사회 환경과의 연관성에 대해 주목한다. 아래 문장을 읽으면 저소득층일수록, 학력이 낮을수록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는 작년 대선 출구조사 분석 기사가 생각난다.
"사실 인간이 가진 동물 이상의 품성도 동물이 가지고 있는 품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인간이 지적, 도덕적 품성을 배양하려면 동물적 옥구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동물적 생존에 소요되는 필수품을 얻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해야 한다면, 사람들은 기술 개선의 자극제라고 할 수 있는 근면의 의욕을 잃고는, 의무적인 일만 하려 할 것이다. 인간이 더 이상 크게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상태를 개선할 희망이 없다고 한다면 앞날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여가를 주지 않는다면 - 이 때의 여가는 일자리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할 필요성이 없다는 뜻이다 - 어린이를 초등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키고 어른에게 신문을 공급해 주더라도 지적 능력을 갖추게 할 수 없다.
어느 국민 또는 어느 계층의 물질적 생활이 개선된다고 해서 지적, 도덕적 개선이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임금이 상승하면 처음에는 나태하고 낭비하는 버릇이 어느 기간 지속될 수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근면, 기술, 지적 능력, 절약이 나타난다. 서로 다른 국가, 국가의 다른 계층, 같은 민족의 다른 시대, 같은 민족의 이민 전후의 상태를 비고하 보아도 언제나 일관성 있는 결과를 보여 준다. 즉 물질적 생활이 개선되면 위와 같은 인간적 품성이 나타나고 물질적 생활이 약화되면 인간적 품성이 사라진다.
빈곤은 번연(John Bunyan, 1628~1688)이 꿈에서 본 '절망의 수렁'이었고, 이 수렁에는 아무리 좋은 책을 던져 주어도 소용이 없다. 인간의 근면, 절제, 기술, 지적 능력이 향상되려면 궁핍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예에게서 자유인의 덕목을 기대하려면 우선 노예를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한다."(P.295)

 

아무튼 이러한 문제의식과 더불어 국내 환경,생태운동에 대해서는 더 어려움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유권자들이 궁핍과 불안정으로 인간적 품성을 보유하기 힘든 조건에서, 자신들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해당하는 최저임금,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무상교육 등에 대해서도 올바른 의사표시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보다 더 간접적이고 한 차원 높은 생태나 환경 문제에 대해 이해하고 움직일 수 있을까 의문이다. 결국 상류층과 중산층만 공감하고 동조하는 캠페인이 되버리지 않을지...

 

[ 2013년 5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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