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인권이다 - 이상한 나라의 집 이야기
주거권운동네트워크 엮음 / 이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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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주거권운동네트워크 저 < 집은 인권이다  이상한 나라의 집 이야기 >를 읽고 / 2010. 09., 346쪽, 이후


'집'은 개인적인 그리고 가족 수준의 경제능력을 통해 구입해야 하는 '재화(재산)'일까? 우리에게 '집' 또는 '주거'는 단순히 '잠자는 곳'인가?
저자로 명기되어 있는 '주거권운동네트워크'는 '집', 즉 주거권은 '재화'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으로 생각해야 한다며 사고의 전환을 주장하는 이들의 모임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주거권에는 공동체 생활과 문화도 포함된다.

헨리 조지의 명저 <진보와 빈곤>이 '토지 가격 상승을 통해 생산과 노동의 수탈'이라는 근대 경제학의 숨겨져 있는 뿌리를 주제를 다루었다면, 주거권운동네트워크는 '주거'라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상품화하여 인간을 짐승만도 못하게 대하는 현대 사회의 뿌리를 다루었다고 밀할 수 있다.

'추천하는 글'에서 애기하듯이 "하늘을 나는 새도 둥지가 있고, 달팽이도 집을 메고 사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뜨내기로 산다. 철새도 아닌데, 뜬구름도 아닌데 떠돌며 산다. 골목에 정들 새도 없이, 이웃을 익힐 틈도 없이 곧 떠나야 할 동네에 잠시 머물기를 되풀이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한국사회의 전월세 세입자 등은 OECD 10위권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21세기에도 전국민의 절반에 육박한다. 외형상 주택보급율은 103%를 넘어서는 이 시대에...

이 책의 장점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사실과 당사자들의 기록이란 점이다. 대다수 글은 자신이 겪은 일을 직접 쓴 것이다. 상당수는 말한 것을 풀어 쓴 것이다. 취재를 거쳐 기록한 것조차 거의 구술에 가깝다.
책에는 집과 주거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고 자세하게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 한 챕터 읽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대접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한 사람 한 가족의 애끓는 삶. 자신의 힘든 삶이 불합리하고 부도덕한 구조와 제도라는 생각보다 스스로의 잘못이나 무능으로 체념하는 세입자들. 그런 순수하고 성실한 그렇지만 제도와 문화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의 삶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화가 치미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자신이 기르는 애완용 개나 고양이만도 못한 집주인들의 세입자에 대한 대우.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상실한 사람들에 대한 관공서와 정치인들의 무관심과 무대책. 자신은 먹고 살만 하니 착취받는 사람들보다 권력을 지향하는 지식인들. 나만이라도 내 가족만이라도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부동산 투기와 증권 투기를 따라하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문제는 제도와 문화, 부정하고 부도덕한 사람들임에도 스스로의 잘못과 무능으로 주거권을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비닐하우스, 쪽방, 반지하, 옥탑, 심지어는 동굴에서까지 살아야 하는 주거 극빈층이 한국에 2008년 현재, 무려 162만 명에 이른다. 혼자 1,083채의 집을 소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1~2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이삿짐을 싸야 하는 이도 많다.

저자는 이럴 바에야, '내 집' 마련의 꿈을 버리는 것은 어떻겠는가 제안한다. 여성이라고, 장애가 있다고, 혼자 산다고 해서 집이 필요없지는 않다. 재산이 없다고, 소득이 적다고 집이 필요없는 것도 아니다. 필요한 만큼,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돈이 없다고 먹지 못해 굶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는 것처럼 집 또한, 주거 또한 공적으로 해결해야 할 '인권'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주거 문제를 개인이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틀렸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살 만한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팔릴 만한' 집을 짓는 건설 자본은 물론, 부동산 경기 부양책이 무슨 경제를 살리는 도깨비 방망이라도 되는 양 여기는 국가의 자세 또한 틀렸다고 말한다. 집을 소유하고도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하우스 푸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집' 자체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일의 집 때문에 자신의 오늘을 저당잡힌 우리 이웃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거권운동네트워크라는 주거권 운동 단체(모임, 네트워크 ?)에게 아쉬운 점은, 주거권을 생존권이나 행복추구권처럼 인권으로 설정하여 인권운동 차원에서 주거문제를 다룬다는 긍정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인권'이라는 개념이 한국에서 받아들여졌을 때 당사자들의 권리 찾기 내지 자발적 결사나 운동을 도모하기 보다 시민단체나 지식인들에 의한 '인권 운동'으로 전개될 우려에 대한 우려이다.

그런 점은 책 속에 등장하는 어떤 단체의 일꾼 역시 주거와 생활을 바라보는 생각이 불의와 부정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불행한 삶'이라는 식의 인권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는 오히려 역사적, 경제적, 사회적 관점에서 토지와 부동산에 접근한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 당사자들에게 더 분명하고 힘있는 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록으로 실은 [유엔 사회권위원회]에 제출한 민간 단체 보고서는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주거 현실을 숫자와 키워드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주거권 선언―집은 인권이다!] "모든 사람은 살 만한 집에 살 권리가 있다." 
1.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살던 땅이나 집에서 안정적으로, 살고 싶을 때까지 살 권리가 있다. 누구도 강제로 쫓아낼 수 없다. 
2. 모든 사람은 적정 수준의 주거비 부담으로 살 만한 집에 살 권리가 있다. 
3. 모든 사람은 자신의 경제적 조건에 상관 없이 적당한 수준의 집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건강을 해치지 않을 쾌적한 주거 환경이 보장되어야 한다. 
4. 모든 사람은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에서 사생활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5. 모든 사람은 각종 시설들을 이용하기에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집에 살 권리가 있다. 
6. 임대 아파트나 비닐하우스촌, 쪽방 등에 산다는 이유로, 혹은 집이 없어 거리에서 잔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또한 국적, 인종, 성별, 장애, 나이, 성 정체성 등을 이유로 집을 구하거나 집에서 살아가는 데 불합리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7. 살 만한 집에 살 권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의 권리이기도 하다. 집을 짓는다는 이유로 자 연을 파괴하는 마구잡이 개발을 해서는 안 된다. 
8.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부동산 및 주택 정책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 2013년 7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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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물학의 승리 - 다윈 에드워드 윌슨과
존 올콕 지음, 김산하.최재천 옮김 / 동아시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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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평] 자연선택이 동물의 사회 또는 사회적 행동의 진화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다윈 에드워드 윌슨과 사회생물학의 승리>


[서평] 존 올콕(john Alcock) 저, 김산하, 최재천 역 < 에드워드 윌슨과 사회생물학의 승리 The Triumph Of Sociobiolog >를 읽고 /  2013. 03., 383쪽, 동아시아

인간이 40억년이 넘는 지구의 역사 과정에서 탄생한 생명체 중의 하나이고, 역사적 진화의 소산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인간만을 따로 연구하는 '사회과학'은 절름발이일 수 있다. 인간이 구성하여 유지하고 있는 '사회'라는 집단 시스템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신이 던져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진화생물학과 더불어 사회생물학에 관심이 많다. 기존 사회과학은 너무 인간을 '별종'으로, 또는 동물과 상관 없이 분리된 '품종'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은 별도의 과학이라는 학문으로 분류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사회생물학을 "자연선택이 동물의 사회 또는 사회적 행동의 진화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어떤 동물의, 어떤 행동을 연구하는 것일까?

동물 중에서 일부다체제나 일처다부제는 흔한 편이다. 그리고 일부일처제로 진화한 동물 중에서 '혼외정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호기심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조류의 한 종인 붉은날개지빠귀는 왜 기회만 있으면 배우자 몰래 옆 동네 수컷과 교미하는 것일까?
파트너가 좋은 둥지나 충분한 정자를 제공하는데도 암컷은 은밀한 ‘혼외정사’를 찾아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다. 한때 새는 ‘일부일처제’의 전형으로 여겨졌지만, 일부일처제로 보이는 여러 종에서 암수 모두 번식기 동안 여러 개체와 교미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사회생물학자가 핵심적으로 의문을 갖는 점은 짝이 있는 암컷(그리고 수컷)이 둥지 짓기, 먹이 찾기 등 유용한 일을 할 시간에 굳이 혼외교미에 시간과 노력을 소비하는 이유이다.
예를 들어, 일부일처제를 하지 않는 붉은날개지빠귀 암컷의 혼외교미 파트너가 암컷의 새끼에게 여분의 음식을 주거나 포식자로부터 보호해줬다면, 파트너를 여러 명 거느리는 성향을 가진 암컷은 그렇지 않은 암컷보다 더 많은 자손과 유전자 사본을 남겼을 것이라는 설명을 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과거 암컷들의 성적 정절의 차이가 종의 진화를 결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붉은날개지빠귀나 다른 명금류 암컷이 여러 수컷과 관계를 맺는 그 밖의 이유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므로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완전하게 검증이 된 가설은 없다. 게다가 붉은날개지빠귀에서 혼외교미의 적응적 가치에 대한 중요한 예측 중의 하나는 매우 상반된 결과를 낳았다. 한 연구는 여러 수컷과 교미하는 암컷의 번식성공도가 일부일처제 암컷의 번식성공도보다 높았다고 보고했지만, 다른 연구는 정확히 정반대의 결과를 보고했다. 결국 이 다윈적 수수께끼는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다른 사례로 '개체 또는 개체군의 희생'이 있다. 동물이 자신의 유전적 성공을 기꺼이 희생하는 행동은 다윈에게는 수수께끼였다. 해밀턴은 유전자와 유전적 발달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다윈의 생각을 발전시켜 극단적 이타주의에 따른 유전적 결과에 집중했다. 극단적 자기희생, 예를 들어 불임 개체가 자살로 집단을 방어하는 행동 등은 거의 항상 가족 안에서 일어난다. 
가장 좋은 예는 척추동물 중에서 개미 집단과 가장 가까운 특징을 보이는 동물인 케냐, 에티오피아, 소말리아의 벌거숭이 두더지쥐이다. 털이 없고, 작고, 피부 본연의 색을 띤 이 요상하게 생긴 동물의 집단 대부분을 이루는 불임 일꾼들은 복잡한 굴들의 네트워크로 연결된 지하 벙커에서 생활한다. 통상 70~80마리로 이뤄진 집단에서 단 하나의 암컷만이 최대 세 마리의 수컷과 번식한다. 나머지는 이 극단적 소수를 위해 노동하며 때로는 굴을 침범한 뱀에 맞서 죽음을 감수하기도 한다. 
유전자 분석에 의하면 이 집단은 거의 전체가 가임 지배자들의 자손으로 이루어져 있어, 위험한 뱀을 퇴치하는 과정에서 죽는 일꾼 쥐는 자신과 매우 가까운 친척을 위해 희생을 치룬 셈이다. 집단 내의 유전적 연관도는 형제자매 또는 어미와 아들 간의 근친상간에 의해 더욱 높아질 수 있으며 그 결과로 자손이 부모의 특정 대립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런데 이렇게 동물을 연구하던 사회생물학자가 ‘인간의 행동’에 대해 진화적 가설을 제기하면 그 행동이 ‘자연스럽다’는 이유로 도덕적인 비판이 가해진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에 도덕적인 면죄부를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자연선택으로부터 도출되는 도덕적인 교훈이란 없다"고 주장한다. 사회생물학적 분석은 인간의 사회행동에 대한 중립적인 설명을 제공할 뿐이며, 정당화나 도덕적 진단, 무엇이 ‘마땅히’ 어떠해야 된다는 규범적 선언이 아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자가 강간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생물학자는 자신의 가설이 위험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불쾌하다는 반응을 반드시 듣게 되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강간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면서 사회적 또는 ‘도덕적’ 인자를 제거하는 행위는 강간을 정당화할 것임에 분명하며,” “강간을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동과 분리시켜 적응적 의미를 담아 격상시키는 것은 환원주의적이고 반동적이다”라는 얘기를 들을 것이다. 물론 ‘진화적인’과 ‘도덕적인’이라는 두 가지 수식어가 갖는 의미의 차이를 완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생물학적으로 적응적인 형질이 반드시 사회적으로 옳다는 결론에 이르게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강간은 성적 동인의 자연적인 현상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보통 강제적 성관계에 대한 페미니즘의 일반적인 시각은 증거보다는 이데올로기적 근거에 기초한다. 수전 브라운밀러(Susan Brownmiller)은 자신의 저서 <의지에 반하여 Against our will>에서 “모든 강간은 힘의 행사일 뿐이며,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 상태에 두기 위해 행하는 의식적인 위협의 과정에 더도 덜도 아니다.” 라고 말한다. 즉 강제적 성관계에 대한 페미니즘의 기본 입장은 강간이 성보다는 힘에 관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남성권력을 보존하는 것이 목적인 가부장적 사회의 영향으로 여성을 지배하고 위협하려는 욕구가 강간범의 행동 동인이다.

그러나 강간범의 절대다수가 발기된 상태에서 피해자에게 사정할 정도로 성적으로 흥분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강간에 성적인 동기가 전혀 없다는 생각은 상당히 반직관적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강간범의 행동과 성적 욕망은 관련이 없다고 확신한다.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많은 이들이 성적 욕망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여기므로 강간도 어떤 의미에서 ‘자연적’이라고 여김으로써 사회가 강간범을 용인하는 것을 페미니스트들이 우려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강간이 누군가를 수치스럽게 하려는 단순 명백한 범죄적 행위라고 하면 아무도 강간범을 용서하거나 이 행동을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강간에 ‘자연적인’ 원인이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싶은 것이다.

같은 목적을 위해 강간이 다른 생물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순전히 인간만의 현상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아예 순수하게 문화적인 현상으로 강간이 특정 사회의 남성들이 만들어낸 발명품이라고 주장할 법도 하다. 그렇다면 그 사회의 구성원을 교육해서 강간에 대한 남성 이데올로기를 바꾸어 문제를 제거해버리면 된다. 실제로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강간이 모든 사회에 보편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단지 남성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하는 특정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몇몇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암컷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교미하는 행동은 곤충에서부터 침팬지, 오랑우탄, 기타 영장류에서 많은 사례가 수집되었다. 예를 들어, 사막 풍뎅이(Tegrodera aloga) 수컷이 암컷을 옆으로 눕히려고 거칠게 몸싸움하는 것이 종종 목격된다. 이에 성공하면 수컷은 암컷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음경으로 암컷의 생식기를 더듬거리다가 때로는 삽입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수컷이 얼마든지 점잖은 방식으로 구애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럴 경우에 수컷은 작은 사막식물을 먹는 암컷의 앞으로 조심스레 와서 자신의 더듬이로 암컷의 더듬이를 쓰다듬어 자신의 머리 앞에 난 두 개의 홈으로 인도한다. 둘은 몇 분이 지나도록 서로 마주본 상태에서 암컷은 계속해서 먹이를 먹고 수컷은 계속해서 더듬이를 쓰다듬는다.
즉 인간이란 종만이 강간 또는 강제적 성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인간행동의 전문가로 여긴다. 사람들은 '인간행동'이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이 깊고, 다른 사람의 동인이나 의도를 분석하는 데 인생의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더 잘 조절하려고 노력한다. 사회생물학은 이 분석에 진화적 측면이라는 색다름을 제공한다. 
저자는 이런 인류의 가장 고유한 특징이자 자랑스러운 유산인 문화에 사회생물학자들이 현미경을 들이대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굴드가 사회생물학 분야와 학자들을 수년간 계속 비방해왔기 때문에 갈수록 더욱 심했다. 이 과정에서 굴드는 사회생물학이 사회적으로 유해하며 방향성을 상실했다고 치부하고자 하는 여러 페미니스트와 사회과학자들과 동맹을 형성했다. 그러나 비사회생물학자에 의해 가장 자주 제기되는 비판들은 대부분 불필요한 오해와 혼동에 기반하고 있다. 

이 책은 실제 연구 사례와 구체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이 핵심 오해사항들을 다룸으로써 사회생물학적 접근법이 인간은 물론, 개미에서 영양에 이르는 기타 사회적인 동물을 이해하는 하나의 좋은 자료로서 관심과 존경, 찬사를 받을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특히 성적 질투심, 여성의 아름다움, 남녀 성의 차이, 부모 자식 간의 관계, 강간, 간통, 집단학살 등 인간을 주제로 한 여러 사례들을 설득력 있게 분석하며, 과학과 이데올로기적인 반론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리고 사회생물학을 둘러싼 논쟁에서 마침내 사회생물학자들의 승리를 외친다. 
하지만 최재천 교수가 역자 후기에서 조언하듯 책에서 제기하는 기존의 인문사회학적 문화 연구에 대한 비판과 사회생물학적 인간문화 연구의 실효성에 대한 비교와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에 대해 좀 더 많이 공부하고 고민해야만이 기존 서구식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에 대한 비판적 의견이 가능할 것 같다.

[ 2013년 7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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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과 수설 - 400년을 이어온 성리 논쟁에 대한 언어분석적 해명
이승환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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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승환 저 < 횡설과 수설 : 400년을 이어온 성리 논쟁에 대한 언어분석적 해명 >을 읽고, 2012. 10., 456쪽, 휴머니스트

사실 개인적으로 조선 성리학에 대해 잘 모른다. 예전에는 그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가르친 대로 '망국적인 당쟁'이라는 선입견만 가지고 있었고, 나이가 든 이후 여러 책과 정보를 접한 후에는 '당쟁'이라는 이미지가 일제의 식민지 사관인 것을 알고 기존 편견을 지우려고 애쓰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작년 초 이덕일의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석필, 1997)을 읽고서 '당쟁' 또는 '붕당'으로 이야기되는 조선시대의 사상논쟁과 그 논쟁의 뿌리, 과정 등을 일부 알게되었다. 조선 성리학의 뿌리로 일컬어지는 "동인의 뿌리는 퇴계 이황으로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시작"되었고. "서인의 뿌리는 율곡 이이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으로 시작"되었다는 것과 "동인과 서인의 정책의 차이는 토지를 둘러싼 싸움"이 컸다는 정도로 정리한 상태였다.

"퇴계학파와 율곡학파 간의 성리 논쟁은 왜 400년 동안이나 평행선을 달려왔는가?"

<당쟁으로 조는 조선 역사>는 '이기론(理氣論)'의 내용이나 쟁점이 아니라 당쟁의 과정과 주요 인물들과 사건, 당쟁의 배경 등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사상이론이나 쟁점을 자세히 알기는 어려웠다. 저자는 이덕일과 달리 '이기론(理氣論)' 자체를 다룬다.
특히 저자는 조선 이후 400년 넘게 이어져온 '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이 왜 끝까지 평행선을 달리기 되었는지에 대해 오래도록 연구했다. 그의 연구결과는 서로가 '프레임'이 달랐다는 것이다.

저자는 학계를 뒤흔들 만큼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동양철학을 비롯하여 기호학, 언어학, 논리학, 심리철학 등을 넘나들며 조선 유학 연구에 새로운 방법론과 뜨거운 쟁점을 제시한다. ‘횡설(橫說)’과 ‘수설(竪說)’이라는 기호학적 프레임을 통해 퇴계-고봉, 우계-율곡, 외암-남당 등 조선 유학사 속 성리 논쟁에 대한 독자적인 시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정복심(程復心)의 [사서장도(四書章圖)] 초간본을 공개하며 [학기유편]에 얽힌 비밀을 명쾌하게 풀어낸다. 
퇴계와 퇴계학파는 ‘리(理)’와 ‘기(氣)’를 사람의 마음에 깃든 대비적인 관계로 파악했고, 율곡과 율곡학파는 양자를 각기 형이상의 원리와 형이하의 재료로 파악했다. 개념에 대한 시각차로 인해 발생한 두 학파의 갈등은 단순한 철학 논쟁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를 관통하는 쟁점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바로, ‘리’와 ‘기’ 두 가지 기호를 수평적으로 배치한 ‘횡설(橫說)’, 수직적으로 배치한 ‘수설(竪說)’이라는 기호학적 프레임을 통해 그 의미층위를 밝혀내고자 했다. 퇴계학파가 견지했던 ‘횡설’의 프레임과 율곡학파가 견지했던 ‘수설’이 논리적으로 부딪히게 되었던 원인을 차근차근 논증해가면서, 결론적으로 성리 논쟁을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는 통합적 프레임을 제시한다. 
출판사는 저자의 연구결과가 조선 유학 역사 속 해결되지 않았던 오랜 질문에 대한 해명일 뿐만 아니라 성리 논쟁 연구를 새로 쓰는 단초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사단과 칠정(四端 七情), 도심과 인심(道心 人心), 도와 기(道 氣), 성과 형(性 形) 등의 성리학 개념들을 종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세 가지 프레임 가운데서 상하의 프레임과 좌우의 프레임을 두고서 격돌했다. 횡설과 수설이 바로 그것이다. '횡설'은 '리'와 '기'를 좌우로 배치하여 서로 갈등하며 승부를 다투는 가치론적 대비 관계로 파악하는 기호 배치 방식이고, '수설'은 이 두 기호를 상하로 배치하여 '리'가 '기'에 타고 있는 존재론적 관계로 파악하는 기호 배치 방식이다. 좌우로 된 프레임(횡설)은 좌파와 우파처럼 서로 갈등관계에 놓인 '가치론적 속성들(도덕과 욕망처럼)'을 이분법적으로 표시하기에 시지각으로 효과적이고, 상하로 된 프레임(수설)은 형이상의 '원리'와 형이하의 '재료'라는 '존재론적 속성들(육체와 의식처럼)'을 승반 관계로 표시하기에 시지각적으로 적합하다."(p.15)

 

 

 

 

 

 

이 책을 통해 공맹사상, 주자학, 그리고 성리학에서 사용했던 단어들의 개념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리(理), 기(氣), 심(心), 성(性), 정(情), 발(發) 등 성리논쟁에 사용된 핵심 개념들이 보통 수십 가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 다의어라는 점이다. 저자는 이런 점을 통해 바로 이 개념의 다의성이 당대의 성리 논쟁이 서로 간에 합치될 수 없었던 구조적인 문제였음을 예증해낸다. 
퇴계사상의 독창성이 리발(理發)·리동(理動)·리도(理到)로 대변되는 ‘리의 능동성’에 있다고 본 학계의 주장과 달리, ‘리의 능동성’ 테제가 송대 고백화(古白話)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율곡계열의 학자들이 견지했던 승반론(乘伴論)이 현대 심리철학, 윤리학, 미학에서 사용하는 수반이론(supervenience theory)과 필적할 만큼 뛰어난 분석 도구라는 저자의 주장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저자는 또한 '횡설 : 수설'의 프레임이 단지 성리논쟁에 국한된 이해의 틀이 아니라 이 프레임을 근대 전야의 다양한 문명담론에 적용함으로써, 위정척사, 동도서기, 중체서용, 화혼양재 등의 구호에 내포된 ‘허’와 ‘실’을 기호학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그런데 21세기에 사는 한국인들도 조선시대 유학자들처럼 '횡설 : 수설' 프레임에 빠져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치열한 이론이나 노선 경쟁을 벌이고 있는 진보진영 학자들, 진보정당 이론가들, 정치인들, 일꾼들 사이에서...
논쟁과 경쟁이 치열하다가 엇나가거나 애초에 경쟁이 선의가 아니라 무언가 자리와 권력을 탐하기 위함이라면 조선의 유학자들처럼 '서로 죽이기'라는 나락으로 빠지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 2013년 7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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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텐진 갸초(달라이 라마).빅터 챈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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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달라이 라마(Dalai Lama), 빅터 챈(Victor Chan) 저, 류시화 역 <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 >를 읽고 / 2004. 09., 292쪽, 오래된미래

"만일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미움이니 나쁜 감정을 키워 나간다면, 내 자신의 마음의 평화만 깨어질 뿐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용서한다면, 내 마음은 그 즉시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용서해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달라이 라마)

이 문장만 보면 많은 지구인들의 영적인 스승이라는 달라이 라마의 뜻을 제대로 알기는 어렵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인가? 부정과 폭력으로 점철된 인류 역사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으로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 책은 법정스님 추천 도서 중 33번째다. 티베트의 영적인 지도자 달라이 라마와 그의 절친한 중국인 친구가 나눈 '용서'를 주제로 한 대화를 담은 것이다.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강제 점령한 이래 티베트 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 왔으며, 그 고통은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정신 개혁’과 ‘문명화’라는 명분 하에 중국 정부는 수많은 티벳 사람들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었으며, 동양의 심원한 사상을 간직한 티베트의 사원과 경전들을 불태웠다. 티벳인들은 승려들 중심으로 비폭력 평화적인 방식으로 중국정부의 폭력에 저항해 왔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승려들이 생명을 바쳤다.

티벳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침략과 탄압은 천안문 사태와 문화대혁명와 더불어 중국식 사회주의를 회의하도록 만든 초기의 여러가지 사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지금도 티베트의 수도 라싸는 물론 외딴 지역까지 중국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여전히 티베트 인들은 중국인들의 경멸과 감시 속에 힘든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터 챈의 말에 따르면 티벳인들의 얼굴엔 늘 웃음이 가득하다고 한다. 그는 순박하면서도 상대방을 따뜻하게 포용하려는 티벳인들의 미소엔 폭압보다 강한 힘과 평화에의 의지가 어려 있다고 말한다.
달라이 라마에 따르면, 승려들과 티벳인들의 그 '웃음'은 오랜 세월 동안 티베트 인들의 평화로운 정신세계를 한결같이 지켜온 ‘용서’의 철학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가 대화에서 강조하는 것은 "모든 생명 가진 존재는 행복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으며 "세속적인 행복뿐 아니라 궁극의 행복에 이르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이상"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전생애에 걸쳐 상처와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가며, 그것은 또 다른 생의 비극을 가져오는 인과관계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미움과 질투와 원한의 감정'이다. 이 부정적인 감정들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며, 그 장애물을 뛰어넘는 유일한 길이 용서'라고 달라이 라마는 말한다.
하지만 용서는 말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의 차원에서나 큰 공동체의 차원에서나 상처는 깊고 오래 간다. 여러 종교를 통해 늘 용서의 의미와 가치를 설득당하지만, 현실에서 우리에게 부당하게 상처를 안겨주는 이들에 대한 감정의 골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반대편에 서서 우리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쳐준다. 전쟁터와 같은 무시무시한 폭력의 현장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매 순간 우리를 미워하고 의심하며 상처 입히려는 수많은 적들과 맞닥뜨린다. 그것은 단지 사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삶을 힘들게 만드는 모든 고통의 요인들까지도 포함된다. 용서 역시 사람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요소와 비극적인 상황까지도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용서는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큰 수행'이라고 달라이 라마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자비로운 심성과 더불어 오랜 성찰과 명상, 그리고 인과관계의 문제와 사물의 실상에까지 이르는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용서의 실천은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을 치료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다. "상처의 진정한 치유는 용서에서 온다."

빅터 챈은 달라이 라마의 수행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두 가지 기둥이 '공(空)과 자비' 그리고 '지혜와 방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혜만 있고 자비심이 없는 사람은 산속애서 풀이나 뜯어먹고 사는 외로운 은자나 다를 바 없고, 지혜가 없이 자비심만 있는 사람은 호감 가는 바보일 뿐이다."
이 문장을 통해 생각해보면 한국의 많은 종교인들이 달라이 라마의 수행과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깨닫고 대대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라이 라마의 이야기 속에서는 현실을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물론 그가 전세계적으로 정부나 정치권, 종교세력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와 빅터 챈의 대화 속에 종교의 수행과 현실에 대한 참여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 점이 무척 아쉽다.
내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아마도 사람의 삶이 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면 개인적으로는 증오나 미움이 아닌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는 개인적인 행복 추구를 중심으로 자신의 철학을 설파하는 것이며, 그런 마음가짐과 태도를 전제할 때만이 외적인 노력이나 조직적인 저항 역시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위한 노력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참고로, 달라이 라마는 한국인들이 얼핏 아는 것과는 달리 티벳이 중국으로부터 완전하게 독립하는 것을 목표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티벳인들은 중국이라는 전체 속에서 자치와 자립권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렇게 된다면 티벳과 중국이 서로 조화롭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솔직히 말해, 내가 달라이 라마의 정신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고 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 2013년 7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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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29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민통선 평화기행
이시우 글.사진 / 창비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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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 [서평] 이시우 저 <민통선 평화기행>을 읽고 / 2003. 06., 339쪽, 창비

오늘날 분단체제와 남북갈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민족과 민중을 위해 남북간의 화해협력과 평화통일을 진지하게 추진하지는 못할 망정,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그리고 일부 극우보수 집단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헌법을 유린하면서까지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그것을 덮기 위해 또 다시 불법적으로 정상회담 회의록을 임의로 공개해버린 반역자들이 오늘날 국내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바로 국정원과 새누리당의 대다수 의원, 재벌기업 소유주, 조중동 등 극우보수언론으로 상징된다. 국정원의 작년 대선 개입과 최근 정상회담 회의록 불법 공개 사태는 파렴치한 법죄집단에 불과한 극우보수세력의 망동을 제어하지 않는 이상 한국사회에 가장 초보적인 민주주의도, 공정한 선거도, 남북 화해와 평화도, 경제 민주화도 어림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력히 알려준다.

이 책은 분단체제와 남북갈등, 종속적 한미관계가 가장 크게 피해를 끼치고 있는 민통선(민간인 통제선) 지역 민중들의 생활과 고통을 잘 알 수 있도록 해준다.
사진가이자 평화운동가인 이시우 씨는 백령도에서 고성까지의 민통선 지역을, 10년 발품으로 진지하고 용기있는 기행서를 써 냈다.

민통선 지역은 대다수의 국민들과 시민단체, 종교단체 그리고 정당과 정부에서도 관심을 두지 않는 지역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전쟁과 분단의 현장이자 흔적이고, 남북 대결이라는 이유로 미군과 국가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인 폭력이 허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서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주인이기도 한 민통선 내 주민들에게는 최소한의 재산권이나 자유는 커녕 인권과 생존권 마저 허용되지 않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들이 처한 인권 유린과 생존권 박탈의 현장을 고발한다.

그와 동시에 책 안에는 통일운동단체와 YWCA 같은 민간단체의 분단통일기행을 여러해 동안 안내한 길잡이로서의 자상함은 물론 사진작가로서의 예리한 눈빛이 한데 담겨 있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냉전시기의 분단의식을 부추기는 ‘안보관광’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평화운동가로서의 역사인식과 열망이 가득 담겨 있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진지하고도 용기있는 기행서’라 할 것이다.

그는 민통선 곳곳에서 고달픈 한국현대사와 직면한다. 조기와 꽃게어장으로 유명한 백령도와 연평도에서는 임경업 장군에 얽힌 이야기와 심청의 미학, 서해교전, 그리고 NLL, 영해문제와 만난다. 강화도의 단군과 고인돌에서는 민족의 미학을 발견하고, 항몽전쟁에서 내려오는 강화의 저항정신과 강화도 북부의 민통선에 대해서 언급한다. 게다가 향토방위대라는 민간조직이 한국전쟁 당시 저지른 양민학살이란 끔찍하고도 서글픈 역사,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저지른 회학무기와 세균전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어떤 피해를 사람들에게 주는지 등에 대해 정면으로 마주한다. 

자유로를 지나 만나는 파주에서 그는 놀랄 만한 주장 하나를 편다. 정전협정을 근거로 한강 하구가 중립지역도 비무장지대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는 버젓이 ‘중립지역’ ‘비무장지대’란 표지가 붙어 있다.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한강의 문명사적 의의와 통일 이후 한강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까지 그의 고민은 불을 뿜는다. 반구정(伴鷗亭)과 화석정(花石亭)에서는 방촌 황희와 율곡 이이에 대해 공과를 가린 후, 자유의 다리, 자유의 마을, 판문점과 공동경비구역(JSA)으로 향한다. 그곳의 미군기지와 대인지뢰 피해자들을 거쳐 그의 이야기는 최근 연결공사가 한창인 경의선으로 이어진다. 

주한미군 문제는 파주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다룬다. 특히 연천-동두천-의정부로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집요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꼼꼼하게 개별 미군기지의 역할과 주한미군의 전략에 대해 언급한다. 2003년경 주한 미군 2사단의 재배치와 관련해 주한미군이 한국사회에 얼마나 깊게 뿌리내렸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분단체제에 기생하여 군림하는 일부 극우보수 권력이 이와 관련하여 저자를 국가보안법으로 무리하게 구속, 기소하였지만 헌법과 상식, 인권과 평화통일에 충실한 사법부는 그들의 행위가 무모하고 부당하다고 판결한 바 있다.

비무장지대 남쪽으로만 1백만개, 후방지역에 7만개 이상이 매설되어 있는 대인지뢰 문제도 마찬가지로 여러 곳에 걸쳐 다루고 있다. 파주, 연천, 양구, 고성 등 그가 들른 민통선 곳곳에 피해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1997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조디 윌리엄즈(Jody Williams)와 국제대인지뢰금지캠페인(ICBL)과 함께 한국의 대인지뢰 사용을 금지하는 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이밖에도 화천에서 만난 가도가도 끝없는 듯한 강원도의 길에서 굽이쳐 온 우리 현대사를 떠올리며, 양구 평화의 댐에서는 정권의 ‘한판 쇼’에 놀아난 씁쓸한 기억을 곱씹는다. 또 고성의 동해 일출을 보며, 어둠과 빛의 미학을 다시금 되새긴다. 당시 연결공사가 한창인 동해북부선 현장과 강릉 앞바다에 좌초한 북의 잠수함 승무원들이 사망한 칠성산 억새밭에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절규하듯 갈망한다.

그는 분단이 '우리 안으로 파고든 전쟁'이라고 말한다. 그 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꿈꾼다. 철원, 강화도, 백령도와 연평도, 파주, 화천과 양구, 연천, 고성에 이르는 그의 여정은 곧 자기 안의 분단의식을 깨는 배움길이다. 그 배움의 길 곳곳에서 그는 사색하고 또 사색했다고 한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새삼 그 사려 깊은 생각에 놀란다. 민통선에 관한 본격적인 기행서로는 국내 최초이기도 하지만, 최초라는 딱지보다 글에 밴 진정성이 더욱 소중하다. 한편 사진작가로서도 활동하며 발로 찍은 사진 160여컷과 설명글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일관된 체계를 갖추고 있어 주의깊게 살펴볼 만하다.

남북화해와 평화를 말하면서도 극우보수세력의 '종북 공세'에 겁을 집어 먹고 입과 발이 얼어버린 대다수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 시민단체 운동가들에게 이 책을 강력하게 권한다. 그리고 늦지 않게 민통선 평화기행에 다녀오기를 추천한다. 그곳에 가서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외부의 '구속'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가두어버린 '관성'임을 깨닫기 바란다.
한국현대사의 가장 근본적이고 강력한 질곡은 자본도, 기득권도, 알량한 권력도 아니다. 그것은 분단체제와 증오, 정전체제와 국가보안법, 종속적 한미동맹(?)과 친일파이기 때문이다.

나는 저자의 열정적인 현장 취재와 기록, 작품 사진 그리고 그의 통찰력에 깊은 감명을 받아 개인 블로그에 [ 민통선과 한국현대사 ]라는 이름으로 책 속의 몇 가지 대목을 옮겨 놓았다. (http://blog.daum.net/hy2oxy/8691532 )
1. 철원군 대마리 정착촌의 서러움, 2. 세균전 의혹과 신종 전염병의 진원지, 3. 화학무기와 고엽제 피해, 4. 백령도 동키부대, 5. NLL(북방한계선)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조사와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관련 기사와 정보를 찾아보았다. 나처럼 궁금한 이들을 위해 관련 기사를 아래에 옮겨 놓았다.

- "지뢰와 땅 철원 대마리" http://www.leesiwoo.net/?attachment_id=1768
- "남한 지뢰 제거에 489년 걸려... 무섭습니다"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1869277
- "목숨을 걸고 개척하여 만든 백마고지역 인근의 대마리(오대미) 마을"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6brK&articleno=15862375

- "마루타 극비문서 발견, 中서 마루타 피해자만 2만6천명" http://pann.news.nate.com/info/252338780
- "알자지라, '한국전쟁 세균전 실험명령' 공개" http://blog.daum.net/getoutmb/513
- "美, 한국전쟁 중 세균전 현장실험 명령" http://www.chsc.or.kr/xe/?mid=reference&module_srl=206&category=1464&document_srl=23448
- '이젠 말할 수 있다' 015회 일급비밀 미국의 세균전(2000.07.02) https://www.youtube.com/watch?v=juXWudwrK4g&feature=youtube_gdata_player

- “베트남전 살포 미군 고엽제 30년 지난 뒤에도 인체위협”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7000000/2005/03/007000000200503131725015.html
- [1968년 DMZ에 고엽제 대량살포] "맨손으로 철모에 고엽제 받아 뿌려…"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105/h2011052502374121950.htm
- "나는 고엽제 피해자... 이렇게 될줄 몰랐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69911
- 평통사 "주한미군 방위비 한국 부담률 65%에 달해" http://m.yna.co.kr/mob2/kr/contents.jsp?cid=AKR20130601056800004&domain=2&ctype=A&site=0100000000&mobile&source=https://m.facebook.com

- 서울신문 "1·4후퇴에도 백령도 사수 ‘군번없는 유격대’"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206013010
- 한겨레 "백의사와 CIC, 염응택, 그리고 백범"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1/09/009000000200109041420749.html
- "625 때의 '켈로부대'를 아십니까" 박인규의 집중 인터뷰[01/13] http://m.pressian.com/article.asp?article_num=40060114093552

- "북방한계선(NLL)이란"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2/06/005000000200206291411388.html
- "‘NLL 포기’ 발언의 진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75
- "[전문]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http://www.vop.co.kr/A00000648820.html

[ 인상 깊은 문장 ]

"자유의 반대가 구속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유의 반대는 관성이었다. 저항하고 꿈꿀 자유까지 막는 것은, 놀랍게도 구속이 아니라 관성이었다. 관성은 자유와 구속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리고, 살아있음의 확인조차 막아버린다. 그 뒤로 '어둠'은 내 미학의 기준이 되어버렸다."(p.06)

"존 파월(John Powell)이란 사람이 있다. 중국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전쟁홍보국에서 일했다. 그런데 그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세균전을 수행했다고 폭로한 것이다. 그는 반란죄로 기소되었지만, 케네디 정부는 그에 대한 기소를 취하한다.
그는 그후 미군과 일본군 사이의 '세균전 커넥션'을 밝혀냈다. 더글라스 매카서(Deouglas MacAthur)와 그의 정보참모였던 찰스 윌로비(Charles Willoughby), 미 국무부와 육군, 해군 등이 정책조정을 위해 설치한 삼성조정위원회(SWNCC) 사이에 교환된 메모를 통해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빅딜'이 있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풀 밭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볼 가을의 동화는 전방지역에서 사라졌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환경천국처럼 알려진 비무장지대는 전염병의 근원지이다. 이미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던 광견병이 비무장지대 접경지역인 연천 등에서 지속적으로 발병하는 것이나 양구의 독수리가 군부대 운동장에 시름시름 떨어져 머리를 박고 죽은 사건, 파주군 파평면 금파리에서 처음 발생한 구제역 등 이상 전염병들의 출처가 비무장지대 접경지역이란 사실을 우연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직접 세균폭탄이 투하된 지역의 피해는 또 어떠할까. 일제강점기부터 미국이 벌인 생물학전의 역사에서 지금까지 가장 큰 피해국 중 하나가 바로 한반도이다."(p.49~50)

"1951년 5월 6일부터 B29 전투기들은 가스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헤이저만(Edward Hagerman)과 스티븐 앤디컷(Stephen Endicott)은 비밀 해제된 문서를 근거로 <미국과 생화학전>이라는 책을 펴 화학전을 폭로했다.
또한 1968년을 전후하여 베트남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비무장지대에 고엽제가 뿌려진 것을 확인하며 화학전의 악몽을 되살려냈다."

"지난 1968~69년 사이에 한국의 비무장지대 일대에는 주한미군의 주도하에 약8만 리터(315드럼)의 고엽제가 뿌려졌다. 그 당시 주한미군사령부가 작성한 '식물통제계획서'에는 주한미군이 미 국무부의 승인을 바아 한국정부와 논의한 후 고엽제를 살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p.62~64)

"1952년 1월 북한이 황해도와 서해지역에서의 철수를 요구하자 미국이 이에 반대하며 군사분계선 설정을 거부한다. 이는 동키부대의 전과 덕택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동키부대는 한국군의 정규부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 후에도 보훈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최근까지도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했다. 이들의 전과나 존재는 입소문을 통해서는 알려졌지만 미 국방성의 기밀문서가 해제되기 전까지는 이들은 없었던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동키부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군사의 자주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죽을 고생을 하고도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에 대한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p.119~121)

"그러나 한강 하구지역의 민통선은 불법이다. 군사시설보호법의 '민간인통제선'은 '고도의 군사활동 보장이 요구되는 군사분계선에 인접한 지역에서 군 작전상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국방부 장관이 군사분계선의 남방에 설치하는 선'이다.
그러나 한강 하구지역은 북한과 가까이 하고 있을 뿐 개풍군 사이의 바다에는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곳은 정전협정상 고도의 군사활동 보장이 요구되기 이전에 전쟁 이전부터 유지되어온 민간의 자유로운 어로활동을 보장해야 하는 곳이다.
때문에 군사분계선 인접지역에 설정하는 민통선이 강화도와 김포에 있는 것은 정전협정을 잘못 이해한 것이며 헌법상 국민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므로 위법(위헌)이다.
민통선의 해제와 한강 하구에서의 평화행동은 민족문명의 힘으로 전쟁을 예방하는 민간의 평화통일 전략이 될 것이다."(p.150~156)

[ 2013년 6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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