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보는 눈 - 왜 통일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이들을 위한 통일론 세상을 읽는 눈
이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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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종석 저 < 통일을 보는 눈 : 왜 통일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이들을 위한 통일론>을 읽고 / 2012. 06, 256쪽, 개마고원


2012년 봄 국회의원 총선거를 전후하여 국내 정치권, 특히 여당인 새누리당이 주도하는 '종북 논쟁'의 폐해를 절감한 유권자들이 많았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그런 한심한 국가적 에너지의 낭비를 지켜보고 있자니, 연말 대선에서는 다음 대통령의 자질 평가와 관련해 북한문제와 통일정책에 대한 비전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가늠자가 되어야 했음을 많은 이들이 느꼈을 것이다. 그 종북 논쟁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때마침 오랫동안 북한문제와 통일문제를 연구해온 학자이자 참여정부 시절 통일부장관을 역임한 저자가 그간의 연구 성과와 정책 현장 경험을 무르녹여 밀린 “숙제를 푸는 심정으로” 이 책을 내놓았다. 물론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저자는 한반도를 둘러싼 통일화경이 완전히 변했다고 지적하면서, 무엇보다 냉철히 봐야 할 것은 중국의 변화 발전에서 비롯된 통일환경의 격변을 말한다. 남한의 전통적인 한미관계를 중심으로 하더라도 한중관계와 북중관계 모두가 엄청나게 변화해 있는 현실을 제대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남한에서 '붕괴론'이나 '남침론' 등 대결 일변도로 북한을 바라봤던 과거의 도식적인 북한관과 통일관을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저자는 "통일비용이 너무 막대할 것이기에 차라리 통일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으나, "북한이 갑자기 붕괴해서 흡수통일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무려 수백 조의 비용이 들기 때문에 남한 역시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대신 "장기적인 화해협력 경로를 밟는다면 30년 동안 연간 1조 5,000억 원 정도만으로도 감당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이 비용은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투자적 성격을 지닌다고 말한다. 북한에 전기, 상하수도, 도로 등을 건설하는 데 사용될 것이므로. 게다가 이 사업은 한국 기업체가 맡을 것이기에 국내 기업들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그렇지만 저자는 기업들이 아닌 자영업자, 노동자, 농민, 학생, 주부에게는 어떤 이점이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는데, 이 부분은 저자의 한계 또는 실수라고 본다.)


저자는 어쩌면 거꾸로 "북한과의 대치와 분단 때문에 발생하는 손해를 따져 비교해보는 게 현실적일는지도 모른다"면서 남한이 치르고 있는 분단비용을 짚어 보인다.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되는 국방비의 과다한 지출, 안보불안으로 인한 한국 경제의 피해(한반도 리스크), 항시적인 사회적 불안심리, 한창 때 청년들의 군복무가 주는 사회적 손실, 종북 논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사상과 민주주의의 미발전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매년 수십 조원에 이를 것이다. 민족 동일성의 훼손이나 민주주의의 후퇴로 인한 비용 그리고 전체 국민의 스트레스로 인한 비용은 돈으로 환산할 수조 차 없다.

유형무형의 이 분단비용들은 남북이 완전한 평화를 이루기 전까지는 계속 지출될 것이다. 분단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과 통일을 이루는 데 드는 비용, 이 두 가지의 비교에는 사실 또 하나의 ‘계산’이 추가되어야 더 정확해진다.


그리고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통일에 드는 비용을 걱정하지만, "통일을 이룬 이후의 효과는 앞서의 그 비용을 넘고도 남는다"고 주장한다. 

먼저 중국을 중심으로 동북아가 세계 경제의 중심지가 되고 있는데 그 변화에 발맞추려면 남북의 화해와 협력은 꼭 필요하다. 그동안 남한은 북쪽이 가로막혀 사실상 섬나라나 다름없어도 미국·일본과 주로 교역했던 때는 그래도 별 문제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러시아와 더 많은 교역을 하고 있다. 통일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와 바로 국경이 닿는다면 교역은 더 활발해지고 한국은 드디어 반도 국가라는 장점을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동안 부산항은 10만㎢ 면적에 인국 4,900만이 사는 대한민국의 항구로서 세계 5위의 무역항이 됐는데, 통일을 한다면 5,500만㎢ 면적에 인국 40억이 사는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잇는 무역항이 될 수 있다.


남북이 경제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 효과도 대단하다. 경제학자들은 "내수와 무역이 조화를 이루는 규모의 경제를 이루려면 인구가 1억 명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남북의 인구를 합치면 7,300만 명이고 여기에 해외동포를 더하면 8,000만 명의 경제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어 이 규모의 경제에 가까워진다.

남북이 하나가 되는 경제공동체의 장점은 단순히 인구 증가에만 있지 않다. 북한은 남한과 달리 천연자원이 풍부해서 남북이 자원협력을 하면 연간 수백억 달러의 부를 창출할 수 있다. 값싸고 우수한 북한 노동력과 투자할 곳을 찾고 있는 남한 자본의 결합은 이미 개성공단에서 그 효용이 증명되었다. 2010년 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10년 9월까지 개성공단이 남한경제에 미친 생산 유발 효과가 5조 2,668억 원이며, 부가가치 유발효과도 1조 5,275억 원이었다고 한다. 국내에서 2만7547명의 취업자도 유발시켰다고 한다. 개성공단 하나로도 이런데 전면적인 경제 협력이 이루어지면 효과가 얼마나 될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저자는 바람직한 남북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인 "북한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잘못된 정보와 편견에 근거해서 북한을 바라본다면 어떤 정책이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남한 사회가 북한에 대해 흔히 갖는 모순적인 태도와 잘못된 인식을 짚고 있다. 

북한에게 그럴 역량이 없는데도 ‘통미봉남’을 한다고 걱정하는 태도, 천안함 침몰 사건에서 진상를 밝히려 하기보다도 이를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구태, 속출하는 북한의 국민소득을 1,000달러라고 과다하게 잘못 측정하는 것, 평화적인 대화를 바란다면서 대화의 당사자인 북한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이런 잘못된 태도와 인식이 왜 발생하고 뭐가 문제인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저자는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이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북한에 ‘퍼주기’만 했다는 주장도 조목조목 비판한다. 

우선 포용정책 이후에 북한의 대남도발은 꾸준히 감소했다. 금강산 관광사업이 시작되면서 북한군은 해군 함정을 금강산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육로관광이 시작되면서는 군부대도 후방에 배치되었다. 개성공단의 군사적 가치는 더 크다. 개성공단이 건설되면서 서부전선에 배치된 북한군의 전차와 자주포가 개성공단 이북으로 이동했다. 사실상 휴전선이 북쪽으로 올라간 셈이다. 전문가들은 개성공단의 안보적 가치는 국군 몇 개 사단과도 바꾸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고 한다. 

그런 여러 성과로 인해 노무현정부 5년간은 남북한 교전이 없었고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이명박정부 이후 대화가 단절되고 관계가 악화되면서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북한을 압박하여 개방으로 이끌겠다는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북한은 남한과의 관계가 단절돼도 중국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체제를 유지시켜 나갈 수 있다. 남북의 경제협력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북한은 중국과 경제특구를 공동개발하고 지하자원 개발권을 중국에 주는 등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모두에게 개방적으로 변하기는커녕 중국과 협력하면서 출구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다시 포용정책이 주목받고 있다. 새로 들어설 정부는 북한과의 대립 구도를 벗어나 화해와 협력의 길로 가야 한다. 이 책은 그 새로운 대북정책이 어떤 모습이 돼야 할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 시도되는 포용정책은 더 진화한 포용정책이 되어야 한다. 이제는 정부 차원의 교류를 넘어, 정당과 시민사회도 널리 참여하는 포괄적인 교류가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한반도 평화가 경제발전 및 복지증진과 직결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평화-경제-복지가 선순환을 이루도록 하는 폭넓은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기존의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도 협력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경제 파트너로 한국 경제에 갈수록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협조 없이는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힘들다. 변화하는 정세를 고려해 동북아에서 다자협력 체제를 구축해야 한반도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이 또한 차기 정부의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책을 모두 읽고 나서 평가해보면, 저자 스스로 '종북 논쟁'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남한 내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편견과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북한에 대해 실사구시를 하거나 긍정적인 측면을 제시하게 되면 국가보안법이나 반북이데올로기 등 저자의 지위와 안정을 위협할 요인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저자를 이해해줄 수 있는 측면이 존재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극우적인 선입견이나 반북 이데올로기에만 편중된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해줄 만 하다.

또한 저자는 한반도와 남북 관계는 그냥 남북 만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과 미국, 남한과 미국, 한-미-일의 복잡한 삼각관계, 중국, 그리고 남과 북간에 또다시 구조적으로 아주 오래된 갈등관계에 놓여있다는 점을 간과 또는 누락하고 있다. 한국현대사 100년을 이어오는 역사적 과정이 함축되어 있는 것임을 저자도 잘 알고 있음에도 누락시킨 것은 이 책의 커다란 흠이다. 특히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논의하면서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린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원칙적으로 이 책이 불합격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이 자국의 동아시아 군사패권 전략이나 태평양 전략에 따라 얼마든지 한국 정부와 기득권층의 정책을 방해하거나 북한과의 정치군사적 갈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 2013년 10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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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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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바버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 저, 전미영 역 < 긍정의 배신 bright-sided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나 >를 읽고 / 2011. 04., 304쪽, 부키

<노동이 배신>과 함께 공부모임 교재로 채택된 책이다. 처음 책 이야기를 듣고 인터넷에서 책 소개를 간략하게 훑어보았을 때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고, 숙제하는 기분으로 책을 구했다.
그런데 책을 받은 후에, 목차를 읽어보고 소개글과 저자의 머리말을 읽으면서 급관심이 생겼났다.

예전에 <시크릿>을 읽으면서 <오프라 윈프리 쇼>를 보면서 현실을 넘어 서는 '마음'과 '태도'를 강조하는 그들에게 적지 않게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과 비슷은 처세술이나 긍정적인 심리를 특별하게 강조하는 책을 읽으면서 책 내용과 저자에 대해 늘 비판적이고 불만스러웠는데, 이 책을 통해 '긍정적 사고' 또는 '긍정주의'의 기원과 구체적인 사례 그리고 논리적인 관점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 책은 '무분별한 긍정주의를 고발'하는 책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20세기 후반기부터 서구사회와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사회.문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가 '긍정'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유방암 진단을 받고난 이후부터다. 그녀의 생각과 달리, 암을 선고받고 비관의 나락으로 떨어져 마땅할 듯한 투병자들 사이에 의외로 낙관과 긍정의 에너지가 가득한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암이야말로 인생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게 해 준 선물이라는 투병자들의 수기, 불행하다고 느끼면 죄의식이라도 가져야 할 만큼 '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는 일상적 충고들, 한술 더 떠 단지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태도를 갖는 것만으로도 암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입증되지 않은 과학까지 결합해 핑크 리본과 곰 인형으로 상징되는 유방암 문화를 형성한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긍정주의'의 허구성과 폐해를 느낀 후, '긍정주의'가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으며 그 이론적, 역사적 흐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다양한 사례와 인물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는 '불안'이 놓여 있다. 긍정적 사고를 위한 훈련은 수많은 모순적인 증거에 직면한 상황에서 믿음을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훈련을 제공하는 이들은 '자기 최면'이나 '마인드 컨트롤' 또는 '생각 조절'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인다.
저자가 연구한 결과, 긍정적인 사고가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들어서였다. 그리고 20세기가 되자 긍정적 사고는 주류에 진입해 민족주의와 같은 강력한 신념체계들 속에서 자리를 마련했고, 자본주의의 필수요소로서 자기 가치를 설득해 나갔다. 긍정주의는 본격적인 산업의 일부로도 자리잡았다. 한국의 방송에서 인기 강사인 '김미경'씨는 한국판 지그 지글러(zig ziglar)라 할 수 있다.

'긍정주의'의 폐해는 무엇일까? 예를 들어 1994년 미국 최대의 통신회사 AT&T는 2년 동안 1만 5,000명을 정리 해고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당일, 직원들을 '성공 1994'라는 동기 유발 행사에 보냈다. 행사의 주연급 연사인 동기 유발 강사 지그 지글러가 전한 메시지는 이랬다. "(해고를 당하면) 그건 당신의 잘못입니다. 체제를 탓하지 마십시오. 상사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세요."
청년실업자들이나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직장인이 제도의 불합리성과 사회복지 제도의 미비함에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자신의 긍정성 부족을 탓하고 동기 유발에 더욱 매진하게 만든다면, 이러한 긍정주의는 경쟁과 구조조정이 일상화되고 시장에 모든 판단을 맡기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원하는 최적의 이데올로기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긍정적 사고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잔인함을 변호한다. 낙천성이 물질적 성공의 열쇠이고 긍정적 사고 훈련을 통해 누구나 갖출 수 있는 덕목이라면, 실패한 사람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는 정치행정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 제43대 대통령인 조지 w. 부시(george w. bush)는 고교 시절 치어리더였다. 미국의 발명품임에 분명한 치어리더는 긍정산업의 핵심인 코칭과 동기유발의 선조 격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이 거의 언제나 낙관론을 요구하고, 비관론과 절망과 의심을 싫어했기 때문에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부시 앞에서는 우려를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2001년 9.11 테러 이전, 여름부터 곳곳에서 테러를 의심할 만한 징후들이 감지되었음에도 연방수사국, 이민귀화국, 부시, 라이스 등 어느 누구도 그런 불편한 단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미국의 개신교는 신복음주의 '긍정주의 신학'으로 물든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들은 돈과 권력 이외에 전통적인 원죄, 은총, 회개 등이 중요하지 않다. 미국의 4대 종교 중 3대 종교는 확실한 '긍정주의 신학'이고 나머지 1개 교단마저도 그 범주에 들어간다. 한국의 개신교는 미국과 얼마나 다를지 궁금했다.

AT&T나 부시와 같은 사례와 흐름은 IMF 이후 한국사회에도 상륙한 것으로 보인다.  IMF 이후 경제적, 정서적 불안에 사로잡힌 한국인들에게 긍정주의와 황금만능주의는 짝이 되어 10년 넘게 한국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정치분야에서는 이명박 전대통령의 "내가 해봐서 알아"가 유사한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를 미국사회 전체에 수십 년 동안 긍정주의가 끼친 악영항의 결정판이라고 평가한다. 

그녀가 주장하는 인생에서의 진정한 가치는 긍정이냐 아니면 비관이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에서 출발하느냐 아니면 마음가짐에서 출발하느냐가 핵심임을 지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미소와 웃음, 포옹, 행복, 그리고 즐거움을 더 많이 보기 위해서는 '긍정적 사고'라는 대중적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류가 지금까지 해온 노력을 지속하는 것이다. 
"좋은 일자리와 의료 서비스처럼 사회적 안전망이 더 탄탄하고 파티와 축제, 길거리에서 춤을 출 기회가 더 많은 곳이 내가 그리는 유토피아다.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된다면(이는 내 유토피아의 전제다), 삶은 영원한 축하 무대가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이 무대 위에서 재능을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단지 희망하는 것만으로 그런 축복받은 상태에 이를 수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 초래했거나 자연 세계에 놓여 있는 무시무시한 장애물과 싸우기 위해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나 역시 '긍정주의'에 대한 저자의 대안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십분 공감이 된다.

○ 인상 깊은 문장 : 

- "심리학자들이 각 나라 사람들의 상대적 행복도를 측정한 결과 놀랍게도 미국인들은 긍정성을 자랑스레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한창 활황일 때조차 행복한 축에 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각국의 행복도에 관한 100건 이상의 자료를 종합 분석한 자료에서 미국인의 행복지수는 23위에 머물러 네덜란드인과 덴마크인, 말레이시아인, 바하마인, 오스트리아인은 물론 음울한 사람들로 알려진 핀란드인보다 순위가 낮았다. 한편 세계 우울증 치료제의 3분의 2가 미국에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도 미국인들이 느끼는 고통을 시사해 준다." (머리말/ p.22) 

- "긍정적 사고는 분노와 공포라는 실체적 감정을 부정하고 쾌활함의 분칠 아래 묻어 두도록 요구한다. 불평을 듣느니 가짜 쾌활함을 상대하는 것이 나은 만큼 의료 종사자나 환자의 친구들에게는 몹시 편리하다. 하지만 환자 자신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점 발견에 관한 한 연구는 "유방암 환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선의를 갖고 이점을 발견하려 노력하는 것조차 둔감하고 서투르다고 보고, 되풀이해서 반감을 표시했다. 환자들은 그런 노력을 자기에게 지워진 고유한 짐과 과제를 경시하는 불쾌한 시도로 해석했다."고 밝혔다. 2004년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긍정적 사고의 신조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결과가 나왔다. 암 선고를 받고 이점을 더 많이 자각한 여성들이 그렇지 않은 여성들에 비해 (정신 기능의 저하를 포함해) 삶의 질이 더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1장 암의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pp.68~69)

- "심리학자들은 억압된 감정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정말로 그런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긍정적 사고가 '실패'해 치료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암이 퍼지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럴 때 환자가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충분히 긍정적이지 못했다고, 애초에 암이 생긴 것도 부정적인 태도 탓이었다고 자책하게 된다. 이 지점에 이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충고는 "이미 피폐해진 환자에게 추가적인 부담이 된다."고 종양학 간호사 신시아 리텐버그는 썼다. 뉴욕 슬로안케터링 기념 암센터의 정신과 의사인 지미 홀런드는 암 환자들이 일종의 희생자 비난을 경험한다고 밝혔다. 
- "10년쯤 전부터, 정신과 육체는 연결되어 있다는 대중적 믿음을 토대로 우리 사회가 환자들에게 불필요하고 부적절한 부담을 지운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느끼게 되었다. 나를 찾아온 많은 환자가 선의를 가진 친구로부터 "암과 관련된 글을 모조리 읽어 보았는데, 네가 암에 걸린 건 네가 암을 원했기 때문이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여기에 더해 환자가 "항상 긍정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암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하지만 너무 힘듭니다. 내가 슬퍼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화를 내면 결국 암세포를 더 빨리 자라게 할 테니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라는 말을 할 때면 나는 더더욱 고통스럽다."
긍정적인 사고에 실패한 암 환자는 제2의 병과 같은 부담을 더 지게 될 수도 있다."(1장 암의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pp.70~71)

- "[시크릿]은 언론으로부터 비교적 따뜻한 응대를 받았지만, 식자층의 경악과 조롱을 받았다. 비판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대체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문젯거리가 풍부했다. dvd에는 쇼윈도에 진열된 목걸이를 보고 감탄하는 여성이 등장하는데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그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다. 그저 목걸이를 '끌어당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던 게 전부였다. 책 내용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 동안 체중을 줄이려고 애썼던 저자는 음식 때문에 살이 찌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음식이 살로 갈 것이라는 '생각' 탓에 실제로 체중이 는다는 것이다."(2장 주술적 사고의 시대: 끌어당김의 법칙/ p.95)

- "긍정적 사고는 고용주의 손에 의해 19세기의 주창자들이 짐작도 하지 못했을 용도로 바뀌었다. 떨치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라는 권고가 아니라 직장에서의 통제를 위한 수단, 더 높은 실적을 내라고 들들 볶는 자극제가 되었다. 노먼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낸 출판사는 1950년대에 일찌감치 기업 시장으로 눈을 돌려 "기업 임원 여러분, 이 책을 직원들에게 주십시오. 커다란 이익을 낼 것입니다."라는 광고를 냈다. 광고는 영업사원이 이 책을 읽으면 자신이 파는 상품과 자기가 속한 조직에 새로운 신뢰를 갖게 될 것이며, 내근 직원들의 효율성도 높아져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사람이 현저히 줄어들 것이라고 장담했다. 동기 유발이 채찍으로 사용되면서 긍정적 사고는 순응적인 직원의 품질 보증서가 되었고, 1980년대 이후 다운사이징 국면에서 고용 사정이 악화됨에 따라 채찍을 쥔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4장 기업에 파고든 동기 유발 산업/ p.146)

- "급격히 성장하는 분야인 경제 자기계발서들도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다운사이징에 적응하도록 일조한다. 다운사이징 선전의 고전인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는 1000만 부가 팔렸는데 기업에서 뭉텅이로 사서 직원들에게 나눠 준 것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는 책을 읽기 싫어하는 독자의 손에 들어갈 가능성을 염두에 둔 듯 94쪽밖에 안 되는 얇은 두께에 활자도 큼지막하고, 어린이용 책에 적합한 우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4장 기업에 파고든 동기 유발 산업/ p.167)

- "2001년부터 2006년 사이에 주간 예배 참석자 수가 2000명 이상인 초대형 교회의 수는 배로 증가해 1210개에 달했고, 총신도 수는 약 440만 명에 이르렀다. 초대형 교회의 (그리고 많은 작은 교회의) 새로운 긍정신학은 고난과 구원에 관한 참혹한 이야기나 가차 없는 심판을 접어 두고 현생에서의,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 안에 가능한 부와 성공과 건강을 약속한다. 당신은 새 차와 새 집, 탐내던 목걸이를 가질 수 있다. 하느님은 당신이 번창하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2006년 [타임] 조사에서는 종파나 교회 규모를 막론하고 미국 기독교인들의 17퍼센트는 자신이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 운동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며, 61퍼센트가 '하느님은 사람들이 번창하길 바라신다'는 서술에 동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5장 하느님은 당신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p.178)

- "1920년대 대공황을 앞둔 시기에는 양극화가 심해지자 부자들의 무절제와 빈자들의 비참함에 격분한 노동운동가와 급진적 활동가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아주 성격이 다른 다양한 종류의 이론가들이 정반대의 메시지를 퍼뜨리고 있다. 그들은 고도로 불평등한 이 사회에는 아무 문제가 없으며, 노력할 의사가 있는 사람의 삶은 조만간 훨씬, 훨씬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한다."(7장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경제를 무너뜨렸나/ p.249)

[ 2013년 9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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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만의 복권 - 조용수와 민족일보 재조명
고승우 지음 / 유니스토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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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고승우, 김민환, 김지영, 원희복 저 < 반세기만의 복권. 민족일보와 조용수의 재조명 : 민족일보 50주년 기념자료집 >을 읽고 / 2011. 11., 238쪽, 문예원

2012년 12월 4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 tv토론회에서 한국현대사 60년 만에 이정희 후보의 발언을 통해 처음으로 드러난 이름. "충성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누군지 알 거다. 한국이름 박정희. 군사쿠데타하고 굴욕적인 한일협정 밀어붙인 장본인"
이승만 정권이 1956년에 대선에 출마한 조봉암 씨를 사법살인하고 진보당을 해산시킨 것처럼, 박정희도 1961년 군사쿠테타 후에 조용수(趙鏞壽, 1930년생) 씨와 민족일보(民族日報)에게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민족일보 폐간 및 조용수 씨 사형 사건"은 한국언론사 가운데 가장 가혹한 언론 통제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우리 나라 언론사에서 많은 언론인이 필화를 겪었지만 신문이 폐간되고 그 신문의 발행인이 처형당한 예는 민족일보 사건뿐이다.

민족일보는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61년 2월에 창간됐으며,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애를 호소하는 신문" 등 네 가지를 사시로 내걸었다.
그러나 1961년 친일파 일본군 출신 군부였던 박정희 일당이 5.16 군사반란(쿠데타)를 저지른 후 92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됐고, 30대의 젊은 조용수 사장도 같은 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 이후 45년 만인 2006년 참여정부의 과거사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한 뒤 조용수 사장은 법원 재심 결과 무죄와 국가 배상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2008년 1월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가 재심에서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던 조용수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것이다.
고승우 씨 등 저자는 2011년 민족일보 발간 5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민족일보 발간의 언론사적, 사회적 의미와 짧지만 민족일보가 진행했던 활동을 평가하기 위하여 기념집을 발간한 것이다.


김민환 고려대 교수는 '민족일보 사건의 성격과 언론학적 함의'라는 글에서, 민족일보는 중립화 통일론과 남북교류론 등으로 반국가단체의 목적사항을 선전 선동했다고 검찰이 공소장을 제출했으나, 민족일보가 제기한 중립화 통일론 자체가 사회주의를 지향한 것이 아니었으며 친북노선이 아닌 반공 반북노선을 기저에 깔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또한 민족일보 사건은 언론학적으로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며, 민족일보는 1960년 4.19혁명을 통해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사회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 지 자유 토론이 전개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수정주의적인 통일론을 펼친 대안언론으로의 역할이 컸다고 말했다.

원희복 경향신문 선임기자는 민족일보 사건이 재심 무죄 판결으로 그 진실과 법리논쟁, 국가배상이 사실상 마무리 됐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향후 과제에 대해 제시했다.
원 기자는 조용수는 대표적인 언론민주화운동, 통일운동가이면서 권위주의 정권의 사법살인에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보상법의 적용대상이 되지 않아 추모공원 안장대상이 되지 않고 이명박 정부들어 과거사 관련 단체들이 줄줄이 해체되면서 조용수 사장의 묘소를 민주공원에 옮길 곳이 없다며 조용수의 민주화공원 안장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할 문제로 꼽았다.

김지형 한양대 동아시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재심 무죄판결 이전까지는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이영근에 대한 연구와 혁신계와 민족일보의 관계에 대해 조명했다.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이영근이 미국 cia의 첩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민족일보]의 성격을 민족지로 볼 것인지 혁신계 대변지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음을 민족주의자인 이종률 초대 편집국장의 영입과 퇴사과정을 통해 조명해 [민족일보]가 혁신계 대변지로 변화됐음을 밝혔다.

고승우 6.15언론본부 정책위원장은 [민족일보] 폐간 이후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는 제대로 된 [민족언론]이 탄생할 수 없었고, 결국 1987년 6월항쟁에 힘입어 [한겨레신문]이 등장했고, 6.15공동선언의 열린 공간에서 [통일뉴스]와 [민족21]이 나왔다고 봤다.
특히 이명박 정권 들어서 민족언론이 위축됐다며 미디어악법에 의해 탄생시킨 종합편성채널이 연말에 뜨게 된다는데 민족언론이 더욱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민족언론의 재정적 자립성을 강조했다.
물론 한겨레는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를 지나오면서 창간 정신과 제호의 취지를 잊어버렸고, 창간 26년이 지난 현재 상업안보주의와 재벌기득권에 포섭된 보수야당의 대변지로 전락한 상태라고 보여지지만...

 

 


헌정유린 범죄집단 국정원에 뿌려진 삐라. 그 출처도 불분명한 녹취록에 의해 여론몰이와 마녀사냥을 당하는 통합진보당과 이석기 의원을 보면서 책꽂이에서 이 책을 꺼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교훈이 화석화되어 버린 느낌이다. 민주적인 헌법과 법, 제도가 존재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정치인, 언론, 사법기관, 시민들이 그것을 무시하면 그만인 것을.
분단 트라우마를 악용하는 자들과 분단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하는 한 남북화해나 평화, 통일은 커녕 초보적인 민주주의도 지켜내기 어렵다는 것을 지금 한국인들의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것은 [민족일보]의 사시나 기사 또는 군사독재의 탄압과정이 아니었다. [민족일보]를 창간하고 운영했던 조용수 씨가 5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의 나이가 만 31세, [민족일보]를 창간했을 때가 만 32세였다는 사실이었다. 그 나이 때 나는 무엇을 했나 기억하면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전에 김영삼 씨처럼 26세에 국회의원이 나타나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위대했던 20~30대의 인사들도 많았다. 로마시대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로마군 장수 스키피오의 나이도 26세였고,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이탈리아 원정군 총사령관이 된 것도 27세,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36세에 연방 하원의원이 되었다. 모두들 젊은 나이에 대단하다고 칭송했다.
그런데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만 29세에 공화국 원수가 된 것에 대해서는 일부에서 "어린 게 뭘 안다고" 식으로 말하는 걸까?

[ 2013년 9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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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콘서트 무죄 - 이정희와 이시우의 국가보안법 대담
최진섭 지음, 이정희.이시우 대담 / 창해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강추!! [서평] 이시우, 이정희 대담, 최진섭 저 < 법정콘서트 무죄 : 이정희와 이시우의 국가보안법 대담 >를 읽고 / 2012. 10., 366쪽, 창해

최근 국정원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과 노동해방실천연대 사건이 법원에서 무죄로 판명되었고, 이석기 의원에 대한 내란예비음모 사건은 국정원에서 검찰로 송치되었다. 공무원 간첩사건은 핵심 증거물을 국정원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고, 내란예비음모 사건 역시 이렇다 할 핵심 물증이 없이 프락치의 진술에 의존하는 상황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두 사건 모두 사건 발표 즉시 사실 관계 확인 없이 받아쓰기에 충실한 언론에 의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간첩과 내란용의자로 '각인'되어 앞으로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을 해나가는 것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졌다.

대담자의 한 사람인 이시우 작가 역시 경찰과 검찰, 그리고 기무사에 의해 국가보안법 및 간첩 혐의자로 매도당했던 경우이다. 특히 2007년 발표된 이시우 사진작가 사건은 ‘국가보안법 사건의 백화점격’이라고 알려졌다.
무려 20가지가 넘는 죄목을 가졌는데, 군사상 기밀 및 국가기밀 탐지·수집·누설, 이적 표현물 작성·배포, 조총련 소속 인물과의 회합·통신, 븍한 출판물의 입수·탐독·보관 등이었다. 검찰은 당시 이 작가의 '예술작품'에 10년이라는 중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당시 변호사였던 이정희(2013년 현재 통합진보당 대표)는 예술가로서의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이시우 작가와 의기투합해 법정에서 헌법과 양심에 근거하여 국가보안법의 무모함과 불합리함을 논리적으로 설득했고, 그 결과 2008년 1월 31일 1심 재판부는 28개 공소조항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리고 2011년 10월 13일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법조계에서는 국가보안법 사건으로는 두고두고 입에 오르내릴 기념비적인 무죄판결로 불리운다고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무죄로 판결난 위 사건에 대해, 이정희와 이시우가 다시 만나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는 대담형식으로 구성되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이시우라는 사진작가를 알았고, 사진작가 또는 예술가 중에서 작품을 창조하는 시간보다 몇 십, 몇 백배의 시간을 들여 구체적인 현장 조사와 이론적인 연구에 매진하는 예술가(사진작가)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시우 작가는 추상적인 철학이나 개념을 다루는 대신 구체적인 현실을 작품세계로 선택한 예술가였다. 그는 2001년 <자본론>을 주제로 사진작업을 준비하다가 미국에서 발생한 9.11 테러로 인해 한반도 정세를 고민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사진 주제를 미군으로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9.11 이후 보수화된 미국이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을 몰고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 뒤로 90여 군데가 넘는 전국의 미군기지와 일본과 독일의 미군기지 거의 전부를 찾아다니며, 핵무기를 조사하고 촬영했다.
사진작품을 찍기 위해 미군기지와 유엔사를 연구하면서 이시우 작가는 국내 어느 전문가 못지 않은 '정전협정 그리고 주한미군과 유엔사 전문가'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검찰은 그이 방대한 연구와 현장답사를 이적표현물, 고무찬양, 군사기밀누설의 각도로 접근했다. 그가 연구한 자료는 모두가 주한미군이나 국방부의 공식 기자회견, 정보공개청구, 국회/중앙도서관, 인터넷, 현장방문을 통해 얼마든지 접근 가능하고 수집 가능한 자료였다.
그런데 국방부와 주한미군은 자신들이 공개한 그리고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자료가 어디까지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검찰은 냉전적 사고방식과 국가보안법에 한정된 법률지식으로 이시우 작가를 옥죄려고 한 것이다.

이시우 작가는 검거 직후부터 묵비권 및 진술거부권의 행사, 48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 국가보안법 명상을 위한 3보 1배 및 걷기, 슬라이드 재판, 피고의 법정 미학강의 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 과정을 통해 국가보안법 재판의 신기원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국가보안법,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명하게 되었다.
또한 국가보안법 극복을 위한 예술의 한 방법으로, 주체사상전을 비롯한 ‘국가보안법 약 올리기 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이정희 대표는 이시우 작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시우 작가를 처음 만난 그해에 저는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지뢰피해자 문제, 미군기지 문제, 금지된 열화우라늄탄을 비롯한 무기와 핵잠수함 정박 문제, 한미연합사 문제 등 수많은 한미관계의 쟁점들과 미세한 법적 논점에 대해 어떤 정치학자도 밝혀내지 못한 문제를 파헤치고, 어떤 법률가도 하지 못한 분석을 해내고 있는 예술가를 보며, 법률가로서 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책임을 느꼈습니다. 이시우 작가의 변호인이 되고서야, 저는 정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극을 받았습니다."(p.23)

나는 이 책에서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관성"이라는 것을 배웠다. 이는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의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정현 신부와 한상렬 목사가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때까지 수염을 기르겠다고 결심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나는 이 책에서 변호사로서, 정치인으로서 이정희의 진정성과 세계관을 알 수 있었다.
이석태 변호사를 멘토로 삼고 있다는 이정희 변호사는 이시우 작가를 만나 함께 재판을 치르면서 정치에 뛰어들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시우 작가는 이정희 대표에게는 "변호사를 하면서 만난 의로인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을 딱 한 명 꼽으라고 할 때" 해당하는 의뢰인이었다.

그녀는 "피고인만큼은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법률적 쟁점뿐 아니라 정전협정과 한미연합사, 한미관계, DMZ, 지뢰, 핵무기, 유엔사 등 관련한 공부를 많이 했다. 사진작가가 피고인이기 때문에 작품을 통해 변호하겠다는 생각으로 법정에서 진행한 '슬라이드 재판'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녀의 말을 통해 처음 러시아 말기 사실주의 작가 레핀의 작품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1884년)는 작품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이정희 대표가 2012년 5월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논란이 발생했을 때, 편안한 선택을 포기하고 마녀사냥을 당할 각오를 하면서 당원들과 부정혐의자를 방어했던 이유, 2012년 12월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로서 보였던 모습, 그리고 2013년 9월 이석기 의원에 대한 마녀사냥을 앞장 서서 막아내는 자세와 결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국가보안법.
대한민국 헌법에는 '평화통일'을 지향하지만, 국가보안법은 근본적으로 북한을 평화통일 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적으로 규정한다. 유엔에 가입되어 있고 상당수의 국가와 외교관계를 체결한 그 적은 국가보안법 상 '국가'도 아니고 '반국가단체'다.
그러면서 동시에 정부는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에서부터 시작하여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선언과 2007년 10.4선언을 통해 명백히 북한을 통일의 파트너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은 한국사회 내 모든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자기검열하도록, 서로 의심하도록, 서로 고발하도록, 서로 왕따시키도록, 서로 손가락질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전근대적인 마녀사냥을 통해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라는 그림을 현실화시켜버린다.

만일 우리가 평화와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통일을 지향한다면 아니 평화통일을 이루려면 국가보안법을 반드시 폐지시켜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평화통일의 염원은 요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국정원 등 극우보수세력이 저지른 불법 대선개입과 정치공작, '종북공세'와 'NLL 대화록' 사기 그리고 2013년 이석기 의원 내란예비음모 사건 조작을 통한 전국적인 '종북 마녀사냥'을 위한 치졸한 정치 공세와 불법행위를 방지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국가보안법은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지는 것 같다. 이시우 작가가 말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포장한 무관심'이라는 표현이 인상에 깊게 남는다. 나 역시 어떤 관성과 두려움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작가로서 예술혼을 작품에 불어넣기 위해 학자보다 더 공부하고 운동가보다 더 평화운동을 실천하고 철학자보다 더 철학적인 예술가와 그 예술가를 완벽하게 호흡한 변호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 인상 깊은 문장 :

- "피고인의 생각과 마음을 통역해주는 것이 변호사의 역할인 거죠."(p.73)

- "검사는 피고인의 진술 거부와 단식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진술 거부는 피고인에게 헌법상 보장된 권리를 행사한 것이고, 단식은 양심의 결정에 따른 행동일 뿐입니다. 이것이 이 사건에서 피고인에게 불리한 요소로 고려될 수 없고, 검사는 이에 대해 논평할 권한이 없습니다."(p.90)

- "국가보안법에 따르면 법적으로 북한의 노동당 당원 그리고 북한 주민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사실 자체 때문에 모두 처벌받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의 누구도 그걸 상정하지 않는다. 북한 주민 전체를 중대 범죄인으로 만드는 건 어불성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이 법으로서 유지되어야 할 기본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법은 오로지 적과 대치한 우리 편 진영을 지키기 위한 처단 도구에 불과하다. 이게 적나라한 국가보안법의 기능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p.110)

- "오늘날 포유류가 거대한 몸집을 갖게 된 것은 공기 중의 산소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먹이가 많아진 것이 아니라 공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질서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유의 공기가 우리를 거대하게 할 것이다."

- "무관심이란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의 위장된 표현입니다. 연이어 터지는 국가보안법 사건들에 무심한 사이 얼마 지나지 않아 뜻밖에도 그 다음 순서는 저였습니다."(p.266)

- "국가보안법을 코웃음치며 아직도 그런 법이 남아 있었는가 하고 화답하던 이들에게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공포였습니다. 출소 후 재판을 위해 증인과 증거자료를 부탁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가 무관심이 아니라 사실은 두려움임을 알았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부탁한 것조차 부담스러워 할 때 저는 더 이상 부탁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증거 자료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 "표현의 자유에 앞서 선행하는 것이 소통의 자유입니다. 개인은 소외와 고립을 넘어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서 자신을 재구성해나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소통과 소통을 위한 표현은 개인을 긍정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전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통의 주관적 의지만으로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건 과정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시장이란 엄혹한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권력이 이 과정에 개입하면 겉보기엔 통제가 이루어질 수 있으나 사상과 표현은 지하로 숨어 들고 시장 외적 질서에 의해 주도됩니다. 사상은 상품보다 훨씬 비제도적이기에 지하화하는 것도 훨씬 쉽습니다. 인위적 조정인 폭력과 제도로 소통과 표현이 통제될 수 있을가요? 국가를 독점한 권력이 사상의 시장에 개입한 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입니다."(p.275)


[ 자유와 관성, 그리고 고통 : 이시우 1심 최후 진술문 중에서... ]

"중생이라도 오늘 깨달았다면 그는 부처요, 부처라도 오늘 닫혀 있다면 그는 중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소통을 포기한 상태가 관성입니다. 구속이나 통제가 아니라 소통이 필요 없다고 합리화하고 스스로 최면을 건 상태가 관성입니다. 그리하여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관성'이란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이전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일 수 있는 법은 이미 아닙니다. 저처럼 한 번씩 잡아들입니다. 이것은 어떤 효과를 발생시킬까요?

독일은 70년대 기차표 개찰구를 없앴습니다. 그러나 불시에 검표원이 표검사를 해서 표가 없으면 몇배의 돈을 몰립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불시검열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 표를 사서 승차합니다. 조삼모사입니다.
정부로서는 인력을 줄이고도 질서와 통제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 것이지만 복지가 향상된 것은 아닙니다. 타율 대신 자기검열이란 형식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국가보안법도 이젠 막무가내로 사람을 잡아들이진 않지만 불시검열처럼 한둘을 잡아들임으로서 사람들을 자기검열하게 하고 효과적으로 국가보안법의 통제를 유지합니다. 사람들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귀찮아서라고 합리화해둡니다. 국가보안법은 건재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애써 모른체 하고 살고 있습니다. 조삼모사 정책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국가보안법은 자기기만을 초래합니다. 국가보안법이 무서워서 피한 것이 아니라 귀찮아서 피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 피해자입니다. 그들은 구속된 자보다 더 큰 통제 하에 순응하고 있으며 아픔이 있는데도 아픔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도 관성의 체계는 남아 테러방지법 같은, 이름을 달리한 국가보안법의 출현을 허용할지도 모릅니다. 관성에 대한 자각과 소통이 절실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관성은 숨어 있으며 드러나지 않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드러난 고통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고통까지 성찰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p.277)

[ 2013년 9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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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 돌베개인문.사회과학신서 50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198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강추!! [서평] 박세길 저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 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를 읽고 / 2012. 2., 303쪽, 돌베개)

외세에 대한 의존, 민주주의와 상식의 실종, 헌법 유린, 기득권끼리 장난치는 정치, 공직자들의 파렴치, 95% 가까운 국민의 민생파탄, 분단체제의 고착화, 남북화해와 평화와 통일에 대한 혐오...
이 모든 것들이 일제 강점 후 100년이 지나서도, 해방 후 68년이 지나서도, 한국전쟁 종료 후 65년이 지나서도, 1987년 6월 항쟁 후 26년이 지나서도 계속되고 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외형적인 민주적 절차와 경제규모는 OECD 10위권으로 인정받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내실과 국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근혜 정권의 안하무인을 목격하면서 드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한국현대사에서 찾아보기 위해 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1945년 해방에서 1950년 6월 한국전쟁 직전까지 다룬 한국현대사 1편은 2013년 한국사회의 뿌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기존의 편견과 상식과 제도권 정보에 의존했던 기억과는 달리 해방 후 5년간 한반도에서는 아주 잠깐의 희망과 열정, 그리고 그 뒤를 이은 5년간의 끔찍한 학살과 탄압과 파괴가 이어졌던 것이다.

저자는 방대한 기초자료와 언론기사, 증언과 인터뷰 등을 취합하여 한국현대사를 새롭게 재조명하였다. 일제의 식민사관이나 친일파 출신의 국사편찬위원회, 제국주의자 미국의 관점이 아닌 오로지 한민족과 민중의 관점에서 기존의 사건과 사실을 재발견하고 재해석했다.

저자의 결론은 한민족과 민중 스스로의 일제로부터 해방과 통일된 자주독립, 평등평화 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음에도, 미군정의 군화발과 친일파들의 부역 아래 아래 한민족과 민중의 염원은 처절하게 꺽여나갔던 것이다. 한민족과 민중은 해방 후 5년 동안 자주독립과 평화통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미군정과 친일/친미파 앞잡이들과 끝없는 항쟁을 이어나갔다는 것이다.
나 역시 책을 덮은 후 저자의 결론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친일과 사대주의, 부정과 부패의 뿌리는 오래 전부터 자라나고 있었고, 도려내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현대사 1편을 읽고 나면 아래와 같이 정리하게 된다. 좀 더 자세한 정리내용은 개인 블로그(http://blog.daum.net/hy2oxy/8691548)를 참조하면 유익할 것이다.

1. [일제의 강제 공출과 징용]
100년~70년 전의 일이지만 다시금 일제의 만행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일제는 식민지 침략 후반부터 100만명 이상의 조선인을 강제로 징용하여 일본 내륙과 동남아, 태평양 지역의 식민지에 보내 노동력을 갈취하고 학살하였다.

"일제는 군량미 조달 목적으로 조선 전역에서 강제적인 공출을 실시하였다. 이 공출제도에 의하여 쌀 생산고의 43.1%(1941년), 45.2%(1942년), 55.7%(1943년)가 강탈되었으며 1944년에는 63.8%에까지 이르렀다."(p.17)

2. [일제 강점기 국내외 항일 투쟁]
8.15 해방이 '외세에 의한 일방적인 해방'만은 아님을 이제 조금씩 깨닫게 된다. 억지 논리와 자기세뇌가 아니라 드러난 수치와 기록과 흐름으로... 저자가 전해주는 식민지 시대의 각종 수치와 통계는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이 땅의 민중들과 독립투사들이 국내외에서 항일 투쟁과 생존권 투쟁을 끊임없이 진행했음을 알려준다. 한민족은 일제와 싸운 전세계 민주진영의 한 축이었다.

"1945년을 맞이하여 중국의 중경에서는 김구가 지도하는 임시정부의 하부 조직으로서 '한국광복군'이 조지괴어 한반도 진공을 위한 맹훈련에 돌입하고 있었고, 만주 일대에서는 소부대 항일 무장단체가 계속적으로 국경 주위에 출몰하여 일제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또한 중국 연안에서는 1942년 '조선독립동맹'이 조직되어 화북 일대에서 일본군과 항전을 전개함과 동시에 역시 국내 진공을 꾀하고 있었으며, 국내에서도 1944녀누8월 여운형의 지도로 서울에서 비밀리에 '건국동맹'이 결성되어 국외에서 독립을 꾀하는 조직과 연락을 계속 취하면서 해방을 맞을 날을 적극 준비하였다.[한국의역사, 조선사연구회 엮음]"(31~32)

3. [8.15 해방을 준비한 한민족의 활동]
해방 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활약은 한민족과 민중에 대해 굉장히 놀랍고 존경스러운 모습이었다. 21세기가 도래한 현재에도 제대로 조직하지 못하고 있던 수준을 해방 후에 한 달 만에 달성했다는 것은 저자의 주장대로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한민족과 민중은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면서(굳이 예건하지 않더라도) 비밀리에 엄청난 의식화와 조직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하여 총독부로부터 사실상 항복을 받아낸 가운데에서 극히 신속하면서도 광범위하게 건국준비위원회가 도처에서 결성되어 갔다. 그리하여 8월 말 경에는 전국적으로 145개의 건국준비위원회 지부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지방 수준에서부터 인민위원회로 신속히 전환하여 갔고, 북측의 상당 부분과 남측의 일부 지역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해당 지역의 민중의 손에 의해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인민위원회는 남쪽은 말할 것도 없고 북쪽에서도 대부분 소련군이 진주하기 이전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민중들의 자발적인 건국사업을 바탕으로 하여 드디어 1945년 9월 6일 전국에서 모인 1,000여명의 민중 대표들이 서울에서 회합, 역사적인 '조선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하였다."(p.34~37)

4. [해방 후 미군은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그간 한국의 제도교육과 주류 학계, 언론에서 일방적으로 던져주던 정보와 달리 해방 후 미군과 소련군, 특히 미군은 일제의 총독부를 대체하겠다는 입장이 명확했다. 즉 미군은 해방자가 아니라 일제를 대신한 점령자, 군사통치였던 셈이다.
1910년 일제의 한반도 합병은 강박에 의한 '강점'이었다. 일제의 패망 이후 선택은 한민족, 민중 스스로 하는 것이지, 일제의 식민지를 미국이 양도받겠다는 것 그리고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는 조치는 우리 민족에게 치욕이자 분노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일본의 8.15 항복 선언 이후) 일본과의 전쟁에서 얻어낸 정치적 소득을 규정지은 '일반명령 1호'를 공표하였다. 이 명령은 모든 작전지역에서의 일본군은 연합국의 항복 접수에 협력할 것과 무엇보다도 (조선, 필리핀 등)해당 지역의 승인받지 못한 무장 저항단체에 항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즉 맥아더가 선정하는 정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력에게 이양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한국현대사의재조명, 조이스 콜코/서대숙]
8월 14일 청진과 나남에 소련군이 상륙하였으며 16일에는 원산에서 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이러한 소련군의 진공 추세에 비추어 볼 때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에 의해 장악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당시 미군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부대가 한반도에서 600마일 이상 떨어진 오키나와 주둔 미군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미국은 한반도 내에서 향후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것을 소련에 제의하였고, 소련은 미국의 제안을 별다른 반대 없이 받아들였다. 서울에 진출한 소련군은 그 즉시 38선 이북으로 되돌아갔다.
훗날 미국 의회에서 국무성 딘 러스크 대령은 미국이 38선을 제안한 것은 '서울을 미군의 점령 하에 두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증언했다."(p.42~43)

5. [해방 후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행보]
미 군정은 애초부터 한반도 민족을 일제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괌이나 필리핀을 스페인 전쟁의 '전리품'으로 취득한 것처럼 일제와의 전쟁의 전리품으로 한반도 남단을 자신들의 식민지 확충의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다만, 괌이나 필리핀과 한반도 남단이 다른 것은 한반도 북단에 존재하는 소련 때문에 국제사회의 눈치를 봐야하는 것과 한반도의 민족과 민중들이었다.
미국 내 군국주의, 제국주의 세력들의 식민지에 대한 탐욕과 삐뚤어진 태도와 불합리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그들의 매카시즘이 한반도에도 확장된 셈이다. '반공주의'에 눈이 어두워 진실이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 바라보지 못하는 태도는 21세기 한국에서도 똑같은 '반공주의'와 조금 다른 '종북'이란 이름으로 여전하다.

"9월 9일 서울에 진주한 24군단의 하지 중장과 아베 총독이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항복 조인식을 가졌다. 때맞추어 총독부 건물에 게양되어 있던 일장기는 내려지고 그 대신 성조기가 높이 솟아올랐다.
미군정은 과거 일본 총독부의 지위와 체계를 그대로 인수하였다. 총독부 일본인 관리들도 상당 기간 그대로 유임되었고 이후에는 자문역할로서 미군정을 보좌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항복 조인식은 일본 식민 통치의 근본적 해체가 아니라 통치권을 일본에서 미국의 손으로 이양하기 위한 절차라고 해도 조금도 틀린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절차를 거친 미군정은 그 즉시 자신만이 한반도 남단의 유일한 정부(?)임을 선언하였고 그에 따라 (한민족과 민중이 스스로 구성한) '인민공화국'은 간단히 부정되었으며 궁극적으로 미군정의 무력에 의해 분쇄되었다."(p.47~48)

6. [한반도 점령 후 미 군정의 통치방식]
미 군정이 한반도의 해방군, 해방자가 아니라 일제 강점 지배를 이은 미제 강점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두 가지다. 제도와 사람.
미 군정은 일제가 공포, 시행하던 식민지 법과 제도를 그대로 시행하여 한반도 남단이 자국의 군사적, 경제적 식민지임을 만방에 과시하였고, 미 군정청과 경찰에 이어 국방경비대의 수뇌부에 일본군 말단 장교와 친일파들을 기용함으로써 한반도 남단의 민족과 민중들의 염원인 식민지 청산과 매국노, 친일파 청산을 가로막았다. 가로막기는 커녕 그들을 부활시켰고, 더 강력한 지원자와 배후로 버틴 셈이다.
일제의 동양척식회사보다 더 거대한 자산을 신한공사 명의로 탈취한 미 군정은 일제보다 더 거대한 식민지 통치자인 셈이었던 것이다. 일제든 미군정이든 한민족과 민중이 한반도를 점령해 달라고 식민지로 통치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몇십, 몇백 명의 매국노, 친일/친미파, 사대주의자들 말고는...

"미 군정은 스스로를 일본의 총독부와 동일시했고 일본이 이 땅 위에 설치해 놓은 모든 기구를 고스란히 인수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친일 경력이 분명한 자들이 미 군정의 주위에 포진하였고 반봉건적인 지주 소작관계는 근본적 개혁 없이 계속 온존되었으며 억압적 식민 통치 체계 역시 그 완교한 생명력을 유지해 나갔다. 미 군정에 협력했던 대표적인 세력 중의 하나는 친일지주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민당이었다. 또한 미 군정은 영어를 사용할 줄 아는 한국인들을 우선적으로 고용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부유한 지주계급 출신이었다.
우선, 미 군정은 치안유지의 문제를 과거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경찰 기구를 그대로 인수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이러한 미 군정 정책의 결과 경찰 간부의 8할은 과거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던 자들로 채워졌으며 특히 그 중에는 북의 친일파 처벌을 피하거나 ?i겨 내려온 친일파 중 상당수가 포함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경찰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극심하였다. 경찰의 창설과 더불어 더불어 그 활동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온갖 파쇼적 법령체계가 난폭스럽게 등장하였다. 1945년 11월 2일의 군정법령 21호는 다음과 같다. '앞으로 새로운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혹은 앞서 폐기된 것이 아닌 모든 현행 법과 과거의 총독부가 공포한 규정, 명령, 지시 및 각종 문서들 중에서 1945년 8월 9일까지 유효했던 것은 합법적 당국(미 군정)에 의하여 폐기될 때까지 계속 발효한다.'
이리하여 1908년의 군사법령, 1910년의 정치집회금지법, 1936년의 선동문서통제령, 심지어는 1907년의 치안유지법 등 악명 높은 일제 시대 법률들이 그대로 효력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경찰 총수 조병옥은 이러한 맥락에서 1912년에 제정된 일본 법률을 근거로 1946년 가을 무렵에 독립군과 애국자들에 대한 대량 예비검속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태는 적어도 1948년 4월 8일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물론 그 이후에는 더욱 가혹해졌다."(p.61~62)

7.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진실과 거짓]
한국인들은 해방 후 신탁통치 관련 내용에 있어서도 친일파 관료와 정치인, 교육자, 지식인들에게 철저하게 속았다. 미국과 친일수구세력의 언론 조작과 허위선동은 이미 미국이 한반도를 점령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뿌리는 속일 수 없다"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당시 조건에서 한민족의 통일독입국가 수립에게 가장 최선의 방안이었고, 교과서와는 달리 대부분의 독립세력과 민주세력, 민중들은 환영했다. 모스크바 결정 과정과 내용을 왜곡,조작하고 이를 이용해 독립,민주세력을 공격한 자들은 미 군정과 한 줌 친일파였다.

"해방된 조선을 분열시키기 시작한 신탁통치는 최초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구상되었다. 루즈벨트는 테헤란과 얄타회담 등 연합국 수뇌가 회동한 자리에서 한국(조선)에 대해, 최고 30년에 이르는 신탁통치의 실시를 제안하였다.[한국분단사, 조순승]
미국은 자신을 포함하여 소련, 영국, 중국 등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실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한반도를 자신의 수중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영국과 중국(당시 장개석 정부)은 미국의 동맹국이면서 영국은 동아시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중국은 미국에게 예속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소련이 반대하더라도 숫적으로 고립됨으로써 신탁통치의 주도권은 미국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러한 맥락에서 신탁통치는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는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미국이 차지할 수도 있는 방안으로 등장했다.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소,영 삼상회의에서 미국은 이러한 기대를 그대로 드러냈다. 회담에서 미국은 본격적인 신탁통치 체제가 수립될 때까지 조선을 미,소 양군 사령관을 우두머리로 하는 단일정부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조선인은 단지 행정관, 고문관, 조언자의 역할이었고 그 기간에 단일 민족정부를 수립한다는 조항은 전혀 없었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조선 민중의 공통된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임시 조선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긴급함을 밝히고 가능한 한 속히 장구한 일제 식민통치가 가져온 참담한 결과를 청산할 것을 요구하는 귀절을 협정의 최종안에 삽입하도록 압력을 가했다.[한국분단사, 조순승]
다음으로 미국은 미,소,영,중 대표들로 구성된 행정부가 신탁통치 기간에 입법, 사법, 행정에서 전권을 행사하도록 짜여져야 하며 그 기간을 5년으로 하되 10년으로 연장할 수 있고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이 기간에도 임시 조선정부가 주권을 행사하도록 하고 4개국은 단지 조선의 독립과 민주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제반 원조를 하는 후견적 위치에 머물러야 하며 기간은 5년 이내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후견제 실시 여부도 임시정부와 미소 공동위원회의 협의를 거쳐 최종 결정할 것을 요구했다.[한국분단사, 조순승]"(p.53~55)

8. [해방 후 미 군정 독재에 대한 민중항쟁]
해방 후 항일 투쟁세력과 민중들의 대중조직의 즉각적, 전국적 조직화를 살펴보거나 처음에는 미 군정의 활동을 지켜보다가 1946년 초부터 미 군정의 본질을 깨닫고 항거와 항쟁을 이어나간 남한 민중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달리 잘 조직되었고 민중들의 자유와 평등, 통일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다.
미 군정은 일제 총독부의 관리를 군정청에 고용하고, 총독부 경찰을 미 군정의 보호 하에 경찰로 변신시키고, 일본군과 만주군 전력자를 군대로 변모시키고, 친일 부역자들에게 일제 자산을 불하함으로써 민족반역자들을 미 군정의 통치기구에 이용함으로써 민족반역자를 처단해야 하는 한반도의 과제를 가로막은 것이다. 이승만이나 한민당은 미 군정의 앞잡이이자 괴뢰일 뿐이었다.

"1945년 11월 초 전국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이 결성되었다. 전평은 1946년 2월에 이르러 조합원 수가 57만명에 달하는 규모에 이름으로써 사실상 전국의 노동자 대부분을 조직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곧이어 1945년 12월 8일, 당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을 조직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서울에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의 결성대회가 개최되었다. 전농이 발표한 조직체계와 가입원 수는 전국 13개 도 연맹, 군 단위에 188개 지부, 면 단위에 1,745개 지부가 있으며 조합원 수는 약 330만 명인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도 전국청년단체총동맹, 전국부녀총동맹, 조선문화단체총동맹, 학병동맹 등 다양한 대중단채들이 광범위하게 건설되었다.
청년단체는 1945년 12월 초 전국 13도의 2,397개 단체 72만 3,305명 회원의 대표 639명 중 602명이 참가, 결성했다. 부녀동맹도 1945년 12월 80만 명의 회원을 대리하여 대표자회의를 통해 결성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성된 각종 민주적 대중단체들은 일부 정당과 손잡고 상설적인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1946년 2월 15일에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대회를 가졌다. 주 구호는 '주장하자 인민의 권리, 건설하자 민중의 국가' 기본 노선은 1. 조선의 모든 애국적 민주세력의 공동전선 2. 제국주의 침략세력과  그 하수인 격인 일체의 매국 도당에 대한 공동의 투쟁기관 3.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위한 공동의 준비기관[연표한국현대사, 김천영]
이상과 같이 단기간 내에 광범위한 대중단체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날 숱한 고난 속에서도 꺽이지 않고 지속되어온 항일 투쟁의 뚜렷한 성과물이었. 또한 각 단체의 강령을 통해 표현되고 있듯이 당시의 한국 민중은 자신들이 쟁취해야 할 목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렇듯 한국 민중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기 위하여 조직적, 의식적 준비를 해 나가는 가운데, 미 군정에 의해서 강요되어지던 온갖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파탄은 필연적으로 대규모 민중항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P.72~74)

9. [미소 공동위원회의 파탄과 민중들의 염원]
미 군정이 모스크바 협정과 미.소 공동위원회를 파탄으로 몰고가는 상황은 한반도만의 상황으로 전후관계를 분석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1947년 봄 '트루만 독트린' 등 미국의 대외 군사외교정책이 '소련과 중국 봉쇄'로 구체화되면서 미국 정책을 극우보수세력이 지배하는 과정과 관련이 있으니까.
처음 한반도에 상륙한 미국은 한반도를 일제의 '식민지 전쟁 전리품'으로 그냥 낼름 먹으려고 시도한 것이다. 하와이나 필리핀처럼. 그럼에도 미국측이 식민지 통치 -> 30년간 신탁통치 -> 10년간 신탁통치 -> 임시정부 선 수립 -> 일제 잔재 청산 등으로 계속 탐욕을 줄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반도 민중들의 가열하고 단결된 투쟁과 소련의 견제 때문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모스크바 삼상 협정에 의해 개최된 미.소 공동위원회는 1946년 3월부터 3개월간, 1947년 5월부터 3개월간 진행되었으나, 모스크바 협정을 극렬 반대하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단체를 한반도 사회단체에서 제외하자는 소련의 주장을 미국이 거부함으로써 결렬되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평가는 당시 남한 민중의 요구가 무엇이었으며, 미.소 양국이 이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가능해질 것이다. 여론조사는 이란 평가에 큰 시사점을 준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진행되고 있던 1947년 7월 3일 '조선신문기자회'에서는 서울 시내 주요 지점 10개소에서 일제히 통행인 2,495명에 대해 임시정부의 형태와 방법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발표한 결과, 시민들의 압도적 다수가 한민당과 한독당을 배척(72%)해야 하고 국호는 조선인민공화국(70%)으로, 정권형태는 인민위원회(71%)로,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68.3%)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민중은 모스크바 협정 실현을 촉구하는 투쟁을 광범위하게 벌여나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7년 7월 27일 남한 전역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 주최로 개최된 '임시정부 수립촉진 인민대회'였다. 전국적으로 수백 만명이 미소 공위의 성사와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했다."(p.95~97)

10. [미국의 남한 단독선거 강행과 2.7 구국투쟁]
한민족과 민중의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엔에 한반도의 운명을 떠넘긴 미군정과 친일파들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은 거셌다. 전국적으로 무려 200만 명이 2.7 구국투쟁에 참여하였다.

"북측과 소련이 반대할 것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결정을 강행하는 것은, 결국 미국의 의도는 한반도 남북에서 점증하는 민족해방세력의 위세로 인해 한반도 전체를 속국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고 남쪽에서만 자신들의 군사력과 친일파를 동원하여 친미 식민지 또는 위성국가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를 위해 모든 정당성과 규약을 무시하고 유엔이라는 명의를 도용하여 강제로 한반도 남단에 자신의 뜻에 맞는 허울뿐인 정부를 구성하려는 것이었다.
국토 양단의 위기로부터 벗어나고 민족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한국 민중의 의지는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2.7 구국투쟁의 불길로 치솟았다. 전평 산하 30만 명의 남한 노동자들은 일제히 전국적인 총파업에 돌입함으로써 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신, 철도 등 노동자의 파업은 미 군정의 손발을 마지시켰다. 노동자들의 총파업에 고무되어 전국의 각급 학교도 일제히 동맹휴학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에 발맞추어 일부 미 군정 관리들까지 포함하는 각계 각층의 민중들이 미국의 단독선거 방침에 반대하며 투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농촌에서의 투쟁은 미 군정의 야수적인 탄압에 대항하려 무장투쟁으로의 전환이라는 새로운 양상을 띠어가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무려 200만 명이 2.7 구국투쟁에 참여하였다.
이에 대해 미 군정과 친일 군경은 야수적인 탄압을 자행하여 100여명이 무참하게 학살되고 8,500여 명이 투옥되었다."(p.104~107)

11. [망국적 단독선거의 강행 : 민족통일전선의 형성]
1945년에서 1948년까지를 살펴보면, 1948년 8월 제정된 헌법과 이승만 정부(?)는 한국인이 선출하거나 승인한 정부가 아니라 미군정과 친일파가 선출하고 승인한 정부일 뿐임을 알 수 있다. 박근혜 정권이 한국 유권자가 아니라 국정원과 경찰, 선관위가 선출한 것처럼... 물론 1948년 8월까지 미군정이 식민지를 군사,정치적으로 점령통치하기 위해 직접 또는 친일파 군경을 동원해 학살한 민중들의 숫자는 수천~수만 명에 이른다.
5.10 단독선거 실시의 결정 주체와 과정, 5.10 선거를 위한 투표등록 과정, 선거 전후 자유의 박탈과 폭력의 난무, 강압적인 투표 강요, 투표율, 투표 및 개표 관리 등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5.10 선거 자체가 무효이고 따라서 현재 기득권자들이 애지중지하는 제헌국회와 이승만 초대 정부 자체가 원천무효임을 말해준다. 그들은 역사적으로도, 보편적 민주주의 관점으로도 정당성이 없는 집단인 것이다.

"한국 민중이 성스러운 3.1 운동을 기념하고 있던 1948년 3월 1일 유엔 임시위원단은 5월 10일 이전에 남한 단독선거를 치르겠다는 모욕적인 발표를 단행했다. 이렇듯 미국의 강요에 의한 민족분열의 징후가 명확해져 감에 따라 조국을 수호하시 위한 한국 민중의 투쟁은 보다 끈질기고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미국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미 군정과 타협적인 자세를 취했던 남한의 애국적인 인사들과 정당, 사회단체들도 망국적 단독선거 강행에 반대하는 투쟁에 나섰다. 드디어 4월 19일 평양에서 남북 56개 정당 시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석한 가운데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연석회의는 26일까지 공식회의를, 30일까지는 남북요인회담을 개최하여 남한 단독선거 분쇄와 통일조국 건설의 방도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하였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미국은 단독선거를 강행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미 군정은 미군을 한반도에 증파하고 전 미군에게 특별경계령을 내려 철저히 무장하도록 하였다. 또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을 중심으로 선발한 국방경비대로 하여금 경찰업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경찰과 별도로 그들이게 한국 민중을 구속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당하게 부여하였다.
그리고 모든 경찰(총독부 경찰 출신이 대부분인)로 하여금 중무장한채 요소요소를 지키도록 조치하였고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민중들을 영장없이 구속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무차별 살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것도 모자라 미 군정청은 온갖 부랑 악질 청년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고는 경찰을 도와 민중 탄압에 나서도록 조치하였다. 미군정은 5.10 투표 당일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장총을 든 경관, 곤봉을 든 우익청년단원을 길목마다 배치하였고 부산과 인천 앞바다에는 미군 군함을, 하늘에는 공군기를 띄워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투쟁 전국위원회는 선거 보이코트를 위해 한국 민중이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선거기관 공격, 매국적 선거 입후보자에 대한 처단, 지서 등 미군정 행정기관에 대한 타격 등 단독선거를 분쇄히기 위한 민중들의 투쟁이 세차게 타올랐다. 남한 전역에서 파업과 동맹휴학, 철시가 진행되었고 군정관리들과 경비대원의 일부도 단독선거 반대에 동참하였다.[이상 연표한국현대사, 김천영]
5.10 선거는 대다수의 애국인사들이 불참을 선언한 가운데 오직 이승만과 한민당 일파만이 입후보한 채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온갖 회유와 협박을 통해 민중들을 투표장으로 내몰았건만 다분히 과장했을 것이 뻔한 미 군정의 공식집계조차 전체 남한 인구의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숫자만이 투표에 참여했을 뿐이다.
이렇게 대한민국이라는 정부의 최초 형태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유엔은 미국의 요청에 의해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p.118~124)

12. [이승만 정권의 정체]
 탄생 자체가 정당이 없고 폭력으로 점철된 이승만 정권이니 탄생 직후 온갖 폭력기구와 파쇼악법을 제정한 것은 필연일 것이다. 21세기인 현재 미국과 한국 사이에 체결된 대부분의 협정과 합의서,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법률과 제도는 이미 일제가 강요한 조약과 협정 그리고 미군정이 강제한 조약과 협정에서 시작된 셈이고... 
따라서 이승만 정권은 역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정당성,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라 할 수 있다. 정치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미국이라는 외세를 등에 엎고 친일파 매국노들을 편에 서서 애국자, 독립투사, 민중들을 끝없이 학살하고 고문하고 빼앗고 짓밟으며 거짓과 폭력으로 세운 헌법과 정권이 무슨 정당성이 있을까...

"미국의 남한에 대한 영속적 지배는 각종 조약과 협정에 의해 보다 확고해지고 합법화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미군의 철수 여부와 관계 없이)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예속 조약에 의해, 미국의 이해에 따라서 국정 전반을 풀어나갈 수밖에 없는 허약한 존재였다. 대표적인 예를 살펴본다면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정부수립이라는 형식을 갖춘 8월 15일 이후 9일만인) 1948년 8?r 24일 남한 땅에서의 미국의 계속적인 군사지배권을 보장하는 다음과 같은 '과도기간 잠정적 군사 및 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와 함께 1948년 9월 1일에는 '한미 재정 및 재산 이양에 관한 협정'을 제결하였다. 이 협정을 통해 미국인과 미국 회사들이 그때까지 누려오던 온갖 특권은 그대로 유지되도록 보장되었고 그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한국 내의 재산을 점유할 수 있도록 용인되었다. 또한 이 협정을 통해 미국은 미 군정 시절 자신들의 과도한 통치비용으로 인해 말생한 모든 부채를 이승만 저원에게 떠넘길 수 있게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기지를 위한 토지공여 및 시설유지 비옹을 전부 한국 정부가 부담하도록 할 수 있게 만들었다."(p.124~126)

13. [단독선거를 저지시키려는 남한 민중의 무장항쟁]
1948년 여순 봉기를 돌이켜보면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비교됩니다. 여순 봉기는 동포와 민중에 대한 학살을 거부하여 군인들이 일으킨 의거였고, 광주항쟁은 군인들이 전두환 살인마의 학살명령을 충실히 이행했기 때문이다. 비록 여순 봉기로부터 시간도 많이 경과되었고 미군과 박정희 군사독재자가 군인들을 집요하게 세뇌한 점, 작전권을 쥐고 있는 미국과 '하나회'를 주축으로 사설 군대조직을 가동했던 전두환의 책임이 분명하지만 수많은 광주시민의 목숨을 꺼리낌없이 앗아간 공수부대와 계엄군들은 역사와 민족 그리고 민중에게 큰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아직도 초급 장교와 하사관, 병사들 중에서 대다수가 학살의 범죄를 참회하거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은...ㅠ
저자는 4.3 제주 항쟁과 여순 봉기 그리고 기타 광범위했던 당시의 무장항쟁을 자연발생적이고 불가피한 측면으로 분석, 평가했지만 오히려 그 이후의 역사적 결과는 당시의 무장항쟁이 자연발생적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전면적으로 진행되었다면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역사에 가정은 없는 것이지만...)
1948년 8월 미군정이 한민족과 민중들의 염원과 요구에 반하여 이승만과 친일파 일부로 단독정권을 수립한 것은 역으로 미군정과 친일파가 야금야금 한반도 전체를 집어 삼키려다고 포기하고 남쪽에만 괴뢰정권을 세우려 한 것이기에 한민족과 민중 전체에게 선전포고를 단행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비록 낫과 망치, 죽창 밖에 없지만 남북한 민중들이 끊임없이 싸웠던 것이다. 이미 한반도는 1948년 8월부터 '미군정+친일파'에 의해 분단된 채 정당성 없는 집단의 학정을 감수하느냐 아니면 한민족과 민중 전체의 힘으로 스스로 친일파를 척결하고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느냐는 기로에서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1946~7년 미.소 공동위원회의 파탄과 미국과 이승만 일파의 단독선거에 의한 민족분단 음모를 알아챈 후, 1948년 들어 2.7 구국투쟁과 단선단정 반대투쟁을 경과하면서 남측 민중의 반미 반이승만 투쟁은 무장투쟁 단계로 발전하여갔다. 2.7 구국투쟁 이후 한반도 남단 각지에서는 농촌을 거점으로 한 야산대라는 초보적인 무장조직이 등장하였다. 야산대는 광폭한 탄압을 헤치고 효과적으로 투쟁을 벌여나가기 위한 민중의 자위조직으로서 정치활동을 위주로 낮은 단계의 무장항쟁을 수행하여 나갔다.
이러한 야산대의 활동은 4.3 제주 민중항쟁 등 지역적 봉기라는 계기를 맞이하면서 급속히 본격적인 유격전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볼 때 본격적인 무장항쟁의 불길을 당긴 4.3 제주 민중항쟁과 그것에 의해 촉발된 여순 봉기 그리고 계속되는 군대 내의 항쟁 등은 당시 해당 지역과 군 내부의 불가피한 사정에 따른 자연발생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친일파 군경은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한반도 남단의 민중들을 학살하다시피 탄압하였다. 미군정은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 탄압의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이승만의 친일파 군경을 직접 지휘하여 제주 민중과 여수, 순천 일대의 애국적인 군인들과 민중들을 엄청나게 학살하였다.
미 군정과 이승만 친일 군경은 제주의 경우만 해도 8만6천명 살상, 1만5천호 방화, 7만8천 두의 소와 2만2천 필의 말 그리고 2만9천 마리의 돼지 도살, 곡류 13만5천 석, 고구마 4백2십만 관, 면화 9만7천 관, 소채 9십만 관 소각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제주 민중들에게 안겨주었다.[연표한국현대사, 김천영]
또한 여수, 순천 봉기를 탄압, 학살한 결과는 이승만 정권이 축소 발표에 따르더라도 6천명의 사망에 달하였다. 2만3천 명의 민중을 체포 투옥되고 5천호의 가옥이 미군정과 친일 군경의 방화에 의해 소실되었다.[잠들지않는남도, 노민영] 여순 봉기 후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군대 내 저항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작업에 착수하여 1949년 7월까지 4,700명을 총살시키거나 투옥시켰다."(p.135~160)

"농촌에서 출발한 전국적인 야산대와 여순 봉기로 비롯된 군인들의 유격대 전환으로 한반도 남단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유격전 수행을 위한 준비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여순 봉기를 계기로 군장병들이 대거 입산함에 따라 야산대는 유격대로 전환되어 갔다. 이들 유격대는 대체로 1945년 5월까지는 생존 및 횔동에 필요한 지반을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이른바 유격전구를 창설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유격전구는 한반도 남쪽 지역 133개 군 중에서 118개 군에 달했다. 요컨대 남한 지역 내 대부분이 무장투쟁의 도가니로 변화된 것이다. 남한 내 유격대의 활동은 1949년 6개월 동안에만도 수십 만명의 인원이 친일 군경과 수천 번의 교전을 치렀다."(p.161~167)

14.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 그리고 전쟁전야]
한국전쟁은 베트남 전쟁처럼 어느날 하루아침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가깝게는 미군정이 1948년 한반도 남단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시점이 전쟁의 개시 시점이고, 조금 멀게는 1945년 9월 35년간 한반도를 점령한 일제를 대신하여 미군정이라는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 남단을 점령한 때가 전쟁의 개시 시점인 것이다. 아주 멀고 크게 본다면 19세기 말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탈하기 시작한 때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8월 이후 5년간 한반도, 특히 남단에서 전개된 상황만 보더라도 5넌 내내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위한 대다수 한민족과 민중 대 미군정과 친일파와의 전쟁으, 연속이었다.

저자가 제시한 자료와 근거를 살펴보면, 저자의 논리는 미국의 '남침 유도설'을 제기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남치 유도설'의 가장 강력한 주창자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다. 그는 저자도 자주 인용하고 있는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다. 올해 커밍스 교수는 연합뉴스 등 한국 언론과 한국전쟁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그는 “1940년대 후반의 미군정 기록들을 열람했다”며 “이는 한국의 고위급 관료들도 볼 수 없는 자료로서 한국인들이 알지 못하는 한국전쟁에 관한 내용들이 많다”고 말했다. 또 “한국 전쟁동안 미국이 한국에서 한 일들은 매우 끔찍하고 중대한 전쟁범죄“라며 “한국 전쟁의 발발은 미국에게 막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해방 후) 한국이 둘로 나눠지고 2개의 다른 정부가 나타나면서부터 본격 전개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한국을 둘로 나누는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6·25 발발 20여년 전인 1930년대에 있었던 충돌도 얽혀 있다. 김일성 등 북한 게릴라와 게릴라를 쫓던 일본군 사이의 갈등이 대표적인 예", "남침을 감행한 것은 김일성이 남측 경찰과 군에 있는 과거 일본군 협력자를 제거하고 싶었기 때문" "한국전쟁은 20여 년에 걸친 오랜 기원을 가진다. 내전이 일방의 침략 감행으로 시작됐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다"

"1949년 상반기까지 남한 전역 133개 군 중에서 118개 군에 결성된 유격전구의 유격대는 하반기 동안 수십 만명의 병력으로 친일파 군경과 7천 여회의 전투를 치뤘다. 유격대는 한겨울에 친일 군경 토벌대의 보복공격을 버텨낸 후 1950년 3월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4월 한달 동안 전투회수 3천 여회에 참가인원은 6만5천 명에 달했다.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지지세력이 불과 30석 밖에 당선되지 못했고 대미 자주노선와 평화적 협상에 의한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진보적 인사들은 130여 명이 대거 당선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상태로 계속 갔으면 이승만 정권은 조만간 붕괴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찮게도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즉시 미군의 대규모 군사개입이 진행됨으로써 가까스로 위기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p.167~169)

"1949년 한 해 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지역에서는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일대 사건들이 계속 발생한다. 소련은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고 중국 대륙에서는 미국의 앞잡이 장개석이 ?i겨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다. 베트남에서도 프랑스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동맹국들에게 외교와 무역을 금지시키고 중국의 유엔가입도 막았다. 동시에 미국은 '패전국인 일본을 아시아의 후방 병참기지로 전환시키고 한반도, 대만, 베트남을 각자 군사적 진공을 위한 교두보로 삼으며 최종적으로 중국 대륙의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전략방침을 수립하였다.[1960년대, 김성환 역] 따라서 베트남 전쟁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1950년 6월 초 일본의 병참기지화를 반대하는 일본공산당을 불법화 조치했다. 뒤이어 동경 시내에서의 모든 공개집회와 시위를 금지하는 비상계엄령을 발동하고, 24명의 공산당 간부와 당 기관지 편집인을 추방했으며, 1만2천명의 노조원과 공무원을 정치적인 이유로 해직시켰다. 미군정은 한국전쟁 발발 9일 전인 1950년 6월 16일 전 일본 지역에 일체의 공개집회와 시위를 금지시키고 전시동원체제에 착수하였다.[1960년대, 김성환 역]"(p.176~183)

"대규모 전면전에 대한 북의 준비상태를 알려주는 사례로서, 미군 정보팀이 북의 문서를 입수하여 연구한 끝에 밝혀낸 사실은 '노동당 상임위원회의 일급 비밀 작업계획이나 북의 고위 장교들은 전쟁이나 공격에 대해 전쟁 전까지 아무런 구체적인 지시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한국현대사, 로버트시몬즈]
또한 1950년 7월 맥아더 사령부의 보고 과정 중 한 장교가 특파원에게 '전쟁이 시작된 6.25 당시 북은 동원계획을 수행하지 않았다. 오직 6개 부대가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전투준비가 되어 있었다. 전쟁 수행에는 13~15개 부대가 필요함에도...' [비사한국전쟁, 스토운]"(p.184~190)

15. [한국전쟁의 발발과 초기 상황의 중요한 진실]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 그리고 전개 양상은 '남침-북침'이 그다지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한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남침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저자의 문제제기나 인용된 책들에서 제기된 사항들은 '북침설' 또는 '남침유도설'에 대한 근거로 사용될 수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한국의 군 관료나 정치인, 기득권자들은 항상 '전쟁불사'를 외치지만 정작 위기가 닥치거나 전쟁이 나면 제 몸과 재산을 들고 36계 줄행랑을 치는 비겁하고 이기적인 자들임을 일제 시대와 미군정 시대에 이어 전쟁 중에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이승만과 친일파 도당의 남침설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한국전쟁의 진실이 보여주는 바는 대통령과 군대의 간부로서 경계와 전쟁에서 패배하고 민중의 생명과 재산을 파괴당한 이승만과 군 간부들은 처형되고 숙청되고 감옥으로 가야 마땅한 것이다. 이것은 경계에 실패한 '천안함, 연평도 사건'에서 주요 관련 지휘관들이 징계, 투옥되지 않고 승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별개 문제이기는 하지만, 당시 미국 내 극우보수세력과 군군주의자들은 유엔을 내세우면서도 유엔의 결의와 절차를 무시하고,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자국 내 헌법과 절차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범법자, 무법자라는 것이 분명하다.

"한국전쟁은 적어도 이미 4.3 제주항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순 봉기와 전면적인 유격전을 거치면서 최소한 10만 명 이상의 희생다를 양산하면서 치루어진 적대적인 두 세력(미국+친일파 분단세력 : 독립군+민중 통일세력) 간의 대규모 무력충돌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쟁이었다고 보아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또한 1950년 6월 본격적인 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전부터 38선에서는 남-북 군대간의 대소규모 충돌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었다. 미 국무성의 한 관리 역시 1950년 4월에 "38도선은 실질적인 전선이다. ... 전투가 계속 진행되고 있고 아마 1,2천 명의 전투원이 실제 교전하고 있다."고 말했다.[한국현대사, 로버트 시몬즈]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생 보고를 받은 워싱턴의 분위기는 예상과는 달리 비교적 차분한 편이었다. 대통령 트루만은 고향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고, 그래서 에치슨 미 국무장관이 백악관을 진두지휘하며 지체없이 한국전쟁에 대한 개입을 결정하고 지시했다. 사실상 오늘날까지도 에치슨이 무슨 권한으로 이렇듯이 난해한 문제를 그토록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미군의 한국전쟁에 대한 최초의 개입은 미국 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은 채 시도되었다. 미군의 개입에 대한 미국 의회와 동맹국들의 사후 승인은 남측 군대가 형편없이 패전만을 거듭하고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 적절히 이용됨으로써 이루어졌다.
미군은 군사 개입 직후부터 공군기와 군함을 동원하여 남한 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탄세례를 퍼부었다. 맥아더는 폭격함에 있어 한반도의 기후와 지형, 남-북 군대의 구별,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 등이 여의치 않게 되자 '정확성이 없더라도 38선과 서울 사이의 좁은 회랑지대를 폭격할 것'을 결정하여 실행에 옮겨졌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6월 30일 맥아더는 북측에 대한 폭격 명령을 내려 평양 비행장을 급습, 폭격하였다 
7월 1일 미 지상군의 선발대의 부산 도착을 시작으로 13일까지 대부분이 도착하자, 7월 14일 맥아더는 이승만으로부터 '한국군의 지휘권을 양도'받았다. 이른바 '대전협정'이라 불리는 이 통고는 조약이나 협정에 의한 문서화도 없이, 국회 비준도 없이 곧바로 7월 17일부터 실시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한국전쟁, 조지프 굴든] 작전권의 이양과 함께 주한 미군에 대한 치외법권을 보장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16. [한국전쟁에서 몇 가지 중요한 진실]
한국전쟁은 수많은 인명의 피해를 가져왔다. 특히 240만 명의 죽음에서 군인이 수십 만명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2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며, 대부분은 미군과 이승만 친일 군경의 행위였다고 본다. 미군의 경우 무차별 폭격, 미군 리지웨이 중장의 '몰살작전', 미군과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가장 큰 피해를 미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군의 전쟁 범죄는 이 책에 나오듯이 황해도 신천군의 민간인 학살, 원주/홍천지역 등의 네이팜탄 사례, 세균전, 민주정부 때 밝혀진 노근리와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저의 아버님이 직접 경험한 익산역 500여 명 폭탄 투하 몰살사건 등이 드러난 사례일 뿐이다.(북측이 주장하는 미군과 친일 군경의 황해도 민간인 학살 숫자만 18만 명에 달한다.)
이승만과 친일 군경의 학살은 무수히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국민보도연맹 학살과 거창양민학살 사건이다. 학살된 사람이 최소한 수십 만명에서 거의 백여 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참여정부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공식 사과할 정도였다.

"1950년 7월 미군은 한반도 남,북을 가리지 않고 소위 '융단폭탄'을 퍼부었다.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인하여 남쪽 주요 철도를비롯하여 길목, 터널, 집하장, 창고 등 일체의 보급 연관시설과 민중들의 생활과 직결된 61만채의 주택, 1만5천동의 학교, 1만7천개의 공장이 완전히 잿더미로 변했다.[민족과통일, 노중선]
1951년 1월 15일 '런던 타임즈'는 원주지역 미군이 초토화작전을 추구하면서 22개 마을을 불태웠고 300개의 건초더미에 방화했음을 보도했다. 2월 5일자 '뉴욕타임즈'는 미군이 F-80 공군기를 동원하여 철원, 금촌, 춘천, 춘천리 근처의 마을 공격에서 로케트, 네이팜탄뿐 아니라 폭탄으로 강타당했음을 보도했다. 또한 24대의 F-51 무스탕 비행편대는 홍천 지역에 5천 갤론의 네이팜탄읓 퍼부어댐으로써 일대의 모든 마을과 건물을 불태워버렸다.
3년간애 걸친 전쟁은 쌍방의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24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또한 이 기간에 한반도 전체에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각종 시설은 대부분 파괴되었다.[한국전쟁, 고지마노보루]"(p.295)

"중국은 한국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10월에 국가를 세웠고 아직 장개적 국민당 잔당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지 못했그며 수십 년간의 전쟁 참화를 딛고 경제를 전설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어한 시기에 터진 한국전쟁은 결과적으로 중국의 이같은 과제 해결을 극히 곤란하게 만들었고 시간적으로도 상당히 지연시키고 말았다. 한국전쟁은 중국으로서는 결코 원하지 않은 시기에 원하지 않은 형태로 발생함 셈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중국의 이런 기대는 결국 깨지고 말았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훨씬 이전에 미 공군기가 만주지역읓 폭파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 명단을 제시하면서 수십 차례에 걸쳐 항의하였다. 그러나 11월 16일에 워싱턴에서는 압록강 철교를 폭파해도 좋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현대조선사, 콩드] 이렇게 하여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전쟁개입은 최초의 38선 원상회복에서 시작하여 38선 돌파, 만주 폭격이라는 단계적 확대 과정을 거치기 되었고, 중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참전은 자국 영토가 직접적인 공격대상으로 되고 있는 상황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 점이 미국의 개입과 서로 다른 측면일 것이다."(p.220~222)

"한국전쟁은 붕괴 직전의 이승만 친일 정권이 되살아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지원 하에 60만 대군으로 급성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유격전의 형태를 띠고 있던 남한 민중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할 수 있었다.
또한 범람하는 군수물자는 이승만에게 풍부한 정권 유지 비용을 공급해주는 원천이 되었다. 전쟁 중 자금확보를 위한 수많은 불법행위 중 가장 빈번히 사용된 것은 석유, 자동차 부속품, 식품 원로 등과 간이 상품가치가 있는 전쟁물자를 공공연히 팔아먹는 일이었다. 보다 교묘하게 거금을 남기는 방식은 60만 대군의 부식비를 유용하는 일이었다. 또한 계약을 맺을 때뿐 아니라 불량품이 검사를 통과할 때 뇌물이 공공연히 요구되었다.[1960년대, 김성환 외]"(p.261~267)

[ 2013년 9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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