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가해자가 1인이라고 하더라도 유포되고 소비되는 동안 가해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된다. 파생 범죄로 피해 촬영물이 있다고 협박하여 성매매를 강요하기도 하고, 다시 물리적 강간 등으로 연결될 수 있다. (...) 괴로움으로 고통받다가 여성 피해자가 자살한 후에 그 영상은 "유작"으로 명명되어 웹하드등 사이트에서 인기 있는 콘텐츠가 된다. P.323



최근 모 대학 축제기간 한 학과의 주점 메뉴판에 선정적인 동영상을 연상하게 하는 문구가 버젓이 담겨 논란이 되었다. 몇몇 문구는 성범죄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비단 이번에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대학축제에서 비슷한 일들이 잊을만하면 문제가 되어 뉴스에 올랐고 대학생들의 성인지감수성에 의문을 낳곤했다. 메뉴판을 작성한 학생은 자신의 재치가 뛰어나다고 생각했을까? 해당 주점을 찾은 학생들은 불법 음란 영상을 상징하는 메뉴를 주문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것이 희화화 되어 대학 축제에 사용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메뉴마다 붙은 영상파일을 가리키는 용어인avi와 해당 영상의 크기를 표기하는 GB는 일상화된 디지털 불법영상 다운로드와 소비를 전재한 희화화고 여성혐오다.



피해자가 있어서 해당 영상을 찾던 중에 어떤 대형 웹하드 사이트에서 게시물을 찾앗는데 저작권이 있는, 그게 제휴 컨텐츠라는 거예요. 저작권이 있을 수 없죠. 그게 불법 영상물인데 누군가가 저작권 등록을 해서 수익을 내고 있는거죠.(D)P.324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기억인 불법 영상물이 온라인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의 소유가 된 뒤 반복적으로 거래되며 이익을 창출하기도 한다. 오늘 지상파의 한 뉴스에서 보니 불법 영상물은 주로 코인으로 거래된다는데 때때로 영상 속 피해자의 신상정보도 거래대상이라고 하니 너무 잔인하다. 불법 영상물은  P2P나 웹하드 등에서 끊임없이 유통되고 있고 피해자들의 신고로 해당 영상을 찾아 지우는 등 조치가 취해지기도 하지만 이미 공유된 영상까지 모두 파악하기 힘들 뿐 아니라 지우는 속도가 퍼지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고한다. 전담반도 꾸려지고 여러가지 대책과 지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미비할 뿐더러 근절하기는 더 어려운 상황.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는 법. 때늦은 후속 조치보다는 불법영상을 소비하는것에 대한 인식개선이 절실하다.







신체에는 항상 공적인 차원이 있다.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현상으로 구성되는 나의 신체는 나의 것이며 또 나의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타자들의 세계에 배당된 신체는 타자들의 자국을 지니고 있고 사회적 삶의 도가니 안에서 형성된다.(P.121주디스 버틀러.위태로운 삶)




'디지털 미디어와 페미니즘'은 11명의 필자들이 트위터, 페이스북,인스타그램, 1인 방송, 유튜브, 메신저, 팟캐스트 등의 디지털 미디어에서 오랜 젠더 불평등이 어떤 식으로 재현되고있고 또 어떤 가능성을  드러내는지 살피고 새로운 담론의 가능성을 고민한다. ASMR을 통해 본 감각화된 친밀성과 섹슈얼리티, 웹툰의 재매개 과정에서 사회성을 반영한 서사변화와 여성재현, 맘스타그램을 통해 본 변화된 모성실천, 먹스타그램 현상과 음식 이미지, 사이버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셜 미디어 세계의 현상을 탐구해볼 수 있어서 의미있었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 공간에서도 소비 자본주의는 명맥을 굳건히 유지해 나가고 있다. 모성 이데올로기조차 자본에 의해 규정되며 새로운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 사생활의 상업화, 디지털시대 감정노동자의 증가도 주목할만한 부분이었다. 




디지털 미디어라는 새로운 커뮤니티공간, 사회에서 재구성되는 젠더 문제와 여러 가능성은 한계와 동시에 새로운 영감을 우리에게 건낸다. 여기 담긴 생생한 이론적 논의들이 더 많은 여성들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고 새로운 담론을 향한 디딤돌이 될 수 있을거라 믿는다.






과학기술은 인간을 만족시킬 수단이나 복합적 지배의 기반만 되는 것이 아니다. 사이보그 이미지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몸과 도구를 설명해왔던 이원론의 미로에서 탈출하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이 아니라, 불신앙을 통한 강력한 이종언어를 향한 꿈이다. 이것은 신우파의 초구세주 회로에 두려움을 심는, 페미니스트 방언의 상상력이다. 이것은 기계, 정체성, 범주,관계,우주 설화를 구축하는 동시에 파괴하는 언어이다. 나선의 춤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여싱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P.86. 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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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9-28 23: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명품 포스팅
국회에 배포하고
법무부에도 보내고 싶습니다 ☺

청아 2022-09-28 23:59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ㅋ스콧님 덕분에 활짝 웃었습니다.😆
국회와 법무부는 사회문제 전반에 대한 공부가 많이 필요해보입니다.

페넬로페 2022-09-28 23: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대학가의 주점 메뉴판, 뜨악했어요.
본인은 자신이 창의력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이런 것을 문제시하면 페미니즘을 공격하죠~~

이 책은 여러 저자가 있네요
그만큼 다양한 내용이 있을 것 같아요.
9월의 과제를 완수하신 미미님, 🌺🌺

청아 2022-09-29 00:04   좋아요 4 | URL
어쩜 그리 당당하게 써놓을 수 있었을까요?
여대생들 입장은 생각할필요 없었던건지...

당면한 디지털 미디어속 현안들을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저자들마다 개성이 돋보여 이런 방식의 협업도 괜찮은것 같아요.
네!!ㅋㅋㅋㅋ과제 완수해서 행복합니다 페넬로페님*^^*

새파랑 2022-09-29 0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디지털이 발달할수록 피해도 더 심각해지는거 같아요. 점점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자극적으로 되고~ 좀더 쎈 조치가 필요할거 같아요~!!

청아 2022-09-29 07:45   좋아요 3 | URL
네 새파랑님! 몇몇 필자들은 그럼에도 긍정적측면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불법 영상물은 정말 수사역량이 범죄를 따라가지 못해 문제예요. 지원이 대폭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책읽는나무 2022-09-29 08: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불법 영상물 저 꼭지도 읽으면서 참 답답했었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큰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는데, 속수무책!!ㅜㅜ
앞날이 걱정입니다. 책을 읽고 나면 매번 걱정이 앞섭니다.ㅜㅜ
암튼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책을 읽고 나면 저와 같은 고민이 생기지 않으셨을까? 짐작해 봅니다^^;;;;

청아 2022-09-29 08:34   좋아요 4 | URL
저작권에 글쎄 욕이 나오더라구요. 이 부분 읽고 저는 좀 우울했어요ㅜㅜ
무엇보다 불법 영상물이 돈이 된다는것, 다 찾아 지우기 힘들다는것이 참담하더군요. 나무님! 고민이 어떤걸 말씀하시는건지 알려주셔야죠ㅋㅋㅋㅋㅋ이렇게 낚시줄 던지듯 툭 던지기만 하심 저는 궁금해서 못견딘답니다>.<

책읽는나무 2022-09-29 10:09   좋아요 2 | URL
이걸 어쩐다? 하는 고민요??
무심코 썼는데 미미님을 궁금하게 만들었군요?ㅋㅋㅋ
늘 책을 읽고 나면 이걸 어쩌나? 고민 아닌 고민 좀 하다가 저도 늘 우울하다가 돌아서면 잊게 되고...또 책을 읽으면 고무되다가, 이런 부분들 읽으면 고민되고 우울하다가...계속 반복되는 것 같아요.
암튼 미미님처럼 늘 깨어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갑니다^^

청아 2022-09-29 10:14   좋아요 3 | URL
아!ㅋㅋㅋㅋ저도 나무님과 마찬가지예요. 이익을 바라지도 않고 알바로 생계를 겨우 이어가며 피해자들 돕는 활동가들보며 미안하고 별의별 생각 다 드는것같아요. 이런감정에 대해서도 이 책에 잘 설명되어있어 좋았어요^^*

다락방 2022-09-29 09: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불법 영상물 편에서 제가 정말 의문이었던 건, 그 범죄자들의 윤리 감각 그리고 양심 이었어요. 분명히 불법촬영된 피해자가 있고 그걸 유포함으로써 죽음까지 이르는 피해자가 있는데, 그런데 그걸 돌려보면서 돈을 번다고? 이거 정말 너무 이상하잖아요. 전국민이 윤리 교육 다시 받아야 하는건 아닌지 ..

읽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미미 님. 우리 다음달에도 힘차게 만나요!!

청아 2022-09-29 09:30   좋아요 2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서 피해 여성들의 ‘살아남기‘가 무엇보다 중요한것 같아요.
이렇게 잔인하고 악랄한데 판사들과 입법자들은 도대체 왜 심각성을 모르고 뒷북만치는지도 의문이예요. 필자들도 그렇고 뒷부분에 나온 다큐에서 활동가들이 피해자들 돕는걸 보며 결국엔 적극적인 행동만이 변화를 이끌 수 있겠구나 새삼 되새겼어요.

따끈따끈한 사유를 읽어볼 수 있게끔 이 책을 선정해주셔서 감사해요!!
다락방님 다음달도 잘 따라갈께요*^^*

거리의화가 2022-09-29 09: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완독 고생하셨어요~ 저는 영상물 부분에서 웹하드 업체들과 엮어 있는 지점이 눈에 들어왔어요. 인지는 하고 있었으나 과정을 설명해주니 이해가 잘 되었어요. 돈과 자본주의에 얽힌 탓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법 영상물로 돈을 벌겠다는 심산은 참... 답답합니다.

청아 2022-09-29 09:37   좋아요 3 | URL
감사해요 화가님*^^* 그렇죠! 그 부분도 너무 화가나더라구요. 꼭 그런식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기반삼아 돈을 벌어야하는지...겉으로는 방지하겠다고 하곤 나아지지않으니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익보다 손해가 크단걸 정책적으로 분명히 알려줘야겠죠.

그레이스 2022-09-29 09: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영상은 보고 지나가는 것이라 미리 생각하지 않으면 윤리적인 생각을 할 여유를 갖지 못할 때가 많은듯요.
도나 해러웨이의 선언문 참 명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번 읽어보게 되네요.

청아 2022-09-29 09:41   좋아요 3 | URL
네 그레이스님!! 그러니 언론에서도 학교에서도 평소 이런 주제로 고민해보게끔 질문을 많이 던져줘야할것 같아요.
이 책을 다 읽고나니 도나 해러웨이가 떠올랐어요. 처음 읽을땐 선언문의 이 부분이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다시보니 와닿고 날카롭다고 생각됩니다.*^^*

희망으로 2022-09-29 11: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불법 영상물에 저작권이 있다는게 놀랍네요. 그렇다면 법적으로도 보호를 받을수있다는건가요. 제가 몰라서요...교묘히 법망을 피하거나 헛점을 이용하는건지...이 책 읽어봐야겠네요. 돈이라면 뭐든 자행하는 사람들 싸그리 잡아갔으면 좋겠네요. 첫 댓글에 심한 욕은 못하겠고요.ㅠ

청아 2022-09-29 11:54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희망으로님!! 저작권위원회같은곳에 정식으로 등록한걸 말하는것같진 않고 사이트내에서의 소유권을 표현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예를들면 여기 알라딘에서도 기본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고 알고있어요. 그래서 문제시 법적책임도 질 수도 있고 누군가 타인의 게시글을 표절해선 안되는거죠. 이곳은 그게 당연한거지만 엄연히 불법인 그런 영상이 누군가의 소유가되어 영상으로부터 발생한 이익을 고스란히 가져간다는게 기가막힐노릇입니다. 저도 저절로 욕이나오더군요. 이 책 읽어보시면 여러모로 디지털 미디어에 문제점들,긍정적측면들을 확인하실 수 있으실거예요.*^^*

mini74 2022-09-29 11: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현대에는 하나의 범죄가 복제되어 수백번의 밤죄가 되는 거 같아요. 피해자를 수백번 찌르는 고통 ㅠㅠ 사생활의 상업화란 말 와닿습니다. 미미님 넘 잘 읽었습니다. ~

청아 2022-09-29 12:00   좋아요 1 | URL
어제 뉴스에도 불법 영상물 피해에 대해 나왔는데요. 다람쥐 챗바퀴돌듯 반복적이라고 비유했어요. 지우고 또 지워도 다시 다른곳에 사이트 개설해 공개한다고요. 제가 너무 황당했던건 전에 어떤 사건이었는데 전남친이었는지 그랬는데 자살하면서 전여친에 보복하려고 영상올리고 죽었대요.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이미 죽은사람인데도 참 미웠어요

mini74 2022-09-29 12:02   좋아요 1 | URL
너도 죽어봐라 인걸까요. 살면서 지옥을 맞보라는걸까요. 자신을 죽이면서도 갖고가는 미움이라니. ㅠㅠㅠ 넘 슬픕니다. 진짜 ㅠㅠ

청아 2022-09-29 12:05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뭘 얼마나 어쨌다고 그렇게까지. 너무 충격적이었어요ㅠㅠ

얄라알라 2022-10-02 0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립니다
저도 언급하신 그 대학축제 주점 포스팅 기사 보았어요.....
2022년 한국 맞아? 이 생각을 하며 기사 읽었지만
어쩌면 그런 물음표 던지는 저야말로 현실을 모른다는 생각이...
그럼 더 안타까운거네요...

우울하게 댓글 끝내면 안되는데...다시금 완독 축하드립니다 미미님

청아 2022-10-02 08:53   좋아요 1 | URL
얄라님 감사합니다.
네 저도 처음에는 믿기지않더라구요. 이게 처음에는 문제가 안되다가 누군가가 이건 아니다싶어 신고한걸텐데...누가 저런걸 하려고하면 옆에서 그건좀 아닌것 같다고 시작단계에서 말해주는..인식전환이 시급한것같아요.

중고등학교 필수과목은
국영수가 아니라 이런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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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 똑똑히 들어요. 순수함에 대해서 경계하십시오. 그건 영혼의 황산염 같은 것입니다."



바다 위. 버지니아호 선장이 로빈슨에게 타로점을 봐주고 이런 경고를 한다. 타로카드에 나타난 결과는 불길하면서도 어딘지 전복적이었다. 죽음을 의미하면서도 부활을 예고했던 것. 타로점의 기이한 힘 때문이었을까? 마치 발설해선 안되는 비밀을 내뱉어 심판받듯 배는 이 말이 끝나자마자 풍랑에 휩싸이고 선장은 고꾸라진다. 난파된 배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로빈슨은 작은 무인도에서 눈을 뜬다. 슬픔수용단계에는 보통 4단계로 나뉘는데 부정,분노,타협,우울및 수용이 그것이다. 로빈슨의 여정은 마치 이 절차를 밟아가는 것만 같다. 처음에는 머지 않아 자신이 구조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섬 한곳에 난파된 배의 일부. 그 안에 식량이 있었지만 그래서 탐내지 않았다. 그것들을 섭취하면 이 섬에 영영 발이 묶일것만 같다는 미신적인 불안감도 있었다. 하루하루 되는대로 버틴다. 열매를 따먹고 조개를 줍고 염소를 잡아 배를 채웠다. 날짜도 새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한달이, 몇년,수십년이 흘러간다. 



그 바다는 그를 더럽히고 나서 광기의 심연 속에 밀어 던지는 것이었다. 죽지 않으려면 그것에서 헤어날 수 있는 힘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섬은 그의 등 뒤에 제한된 약속들과 준엄한 교훈들로 가득 찬 채 광대하고 순수하게 펼쳐져 있었다. P.53


누구도 만날 수 없는 곳 무인도에서 고립된 채 시간의 개념마저 아득해지자 로빈슨은 비인간화되어가기 시작한다. 자신의 이전 삶이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었기에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임을 비로소 실감한다. 철학적인 깨달음이 무서운 고요 속에서 유일하게 그의 의식속에 타오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육신은 점점 더 진창속에 빠져든다. 나오려고 발버둥칠 의미조차 상실한 그에게는 오히려 진창이 위안이 되어준다. 그러던 어느 날 섬의 중심에 있는 동굴안에서 운명처럼 각성에 이르게 된다. 희미한 과거의 기억속에 남은 로빈슨의 어머니, 다정하지 않았지만 그가 말하지 않는 것까지 이해했던 어머니. 그녀의 자궁을 상징하는 동굴안에서 그는 다시한번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다시 태어난 그는 이 섬에서 자신의 왕국을 실현하려 한다. 농사를 짖고 새롭게 시작된 자신의 새 날들을 기록한다. 글이 지워져버린 책들에 잉크를 만들어 독수리 날개로 문서도 작성하고 헌장과 법전도 만들고 급기야 자신이 만들어낸 그 문서들에 주석도 단다. 곡식이 채워지고 나중을 위해 절재하는 삶이 이어지고 관습과 규제가 늘어난다. 


인간은 저마다 내부에 ㅡ그리고 그의 외부에ㅡ습관 반응, 반사 작용, 메커니즘, 골몰한 생각, 꿈 등으로 이루어진 복잡하고 깨어지기 쉬운 장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그의 동류들과 항구적인 접촉을 통하여 형성되고 계속 변모한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알겠다 수액이 없어지면 이 섬세한 화초는 잎이 떨어지고 시들어버린다. 내 세계의 중요한 부품인 타인....(...)인물들은 척도를 제공한다. 그 인물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감상자의 실제적인 관점에다가 필수 불가결한 잠재성을 추가하는 가능적인 관점들을 형성한다.P.66


'스페란차'라 스스로 명명한 이 섬에 로빈슨이 자신의 의지를 불어넣던 어느날. 섬에 들어온 원시부족이 인간 재물을 바치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들은 그렇게 정기적으로 스페란차에 들어와 의식을 행했던 것이다. 한번은 뜻밖에도 두 명의 재물을 바치려했고 갑작스러웠기 때문인지 두 번째로 지목된 자가 놀라 도망친다. 어찌하다보니 그 인간재물을 로빈슨이 총을 쏴 돕게된다. 부족들은 도망치고 재물로 타버릴 뻔한 어린 소년은 로빈슨의 노예가 된다. 이 노예의 이름이 방드르디(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 나오는 '프라이데이'처럼 방드르디도 금요일이란 의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날도 금요일이다.)다. 방드르디는 자기 목숨을 구해준 로빈슨의 발밑에 무릎꿇고 주인으로 받들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로빈슨의 규율을 깨트리기 시작한다. 이 후 두 사람에게는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인 미셸 투르니에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소설 방드르디 에서 로빈슨의 모습은 인류의 문명과 참 많이 닮았다. 스스로 신이 되어 문명을 건설하고 나와 다른 타자를 착취하고 규율속에 가둔다. 강압과 주입은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하는 방식이고 노예는 자신을 지우고 주인을 따라야한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문명이 보여주듯 모든 주체는 자신만의 방식을 추구하길 본능적으로 갈구하며 이로인해 갈등은 피할 수 없다. 장기간의 고독을 통해 로빈슨은 자신안에 전복을 갈구하는 그 무엇을 축적했던 것일까? 스스로 질서를 세우려 했지만 그것을 무너뜨리고자하는 욕망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던 그는 결국 인류의 그것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된다. 그렇다면 에초에 난파된 배에서 홀로 살아남아 무인도에 안착한것은 로빈슨에게 행운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이야기 속 극단의 상황은 삶의 근원적 물음으로 우리를 이끌어주기에 더욱 매력적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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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9-23 13: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이 이런 내용이었어요? 스스로 만든 질서를 어떤 식으로 처리할지 궁금해집니다. 방드르니의 용어 정의, 인류의 문명과 겹쳐지는 점이 보이는걸요. 흥미로워서 찜해놔야겠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어느 곳에서든 상하관계가 생기는 이유를 요즘 들어 새삼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청아 2022-09-23 13:51   좋아요 4 | URL
이웃이신 청년님이 추천해주셔서 읽었는데 철학책을 읽은 느낌이예요. 저자인 미셸 투르니에가
<로빈슨 크루소>를 재해석한건데 그 책을 읽지 않았기에 나중에 그것도 읽어보고싶어졌어요.
방드르디가 혼혈흑인남자아이로 나오는데 여성이었으면 또 어땠을까 생각했습니다.ㅎㅎ
페미니즘을 공부하니 저도 계급을 늘 고려하게 되는것 같아요.^^*

scott 2022-09-23 14: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미셸 투르드니에가 수도사였지만 철학박사로 젊은 시절 프랑스 중고등 철학교사였습니다
이분 책 대부분 인생의 고난의시기에 인간이 어떻게 헤쳐나갈수 있는 지 지혜와 해답을 찾는 여정 인간 내면속 자아를 찾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프랑스 고등 교과서에도 수록되어있고
한때 바칼로레아 출제 된적도😊

청아 2022-09-23 14:51   좋아요 3 | URL
최근에 읽은<뒷모습>의 글도 좋았는데 이 소설은 심오한 주제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놓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건 알았는데
중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군요?!!
바칼로레아라면 혹시 영화 ‘유콜잇러브‘에서의 그
구술시험이 포함된 시험 말씀이신가요?🤔

scott 2022-09-23 15:45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프랑스 고딩들(한국에서 2학년 쯤) 철학 과목이 필수 여서 이분의 책을 필독 ㅎㅎㅎ
영화 ‘유콜잇러브‘에서 여주가 본 시험도 구술
바칼로레아 인데
아마도 고등연구학위과정 평가 시험(이거 통과 하면 철학 교수 자격증 따고 자신이 원하는 어떤 교육기관에서 학생을 가르칠 수 있음/학자의 길로 가려면 기나긴 논문의 터널을 통과 해야 함 ) 인데

미미님 역쉬!
프랑스에 진심 ^^💖


미셸 투르드니에의 <예찬>과 <외면일기>
추천 합니다
가을에 읽기 좋아여 ^^


청아 2022-09-23 15:53   좋아요 2 | URL
오 스콧님 추천!!
꼭 읽어보겠습니다🥰

바람돌이 2022-09-23 14: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로빈슨 크루소보다 훨씬 좋을거 같은데요.
로빈슨이 세운 질서와 무너뜨리고자 하는 욕망이 뭔지 알고 싶어서 이 책 담아갑니다. ^^

청아 2022-09-23 14:39   좋아요 4 | URL
그런가요? ^^* 무인도 서사는 워낙 영화로도 종종 접해서 그런지 방드르디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조금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아요. 그래도 철학적 내용들이 흥미로워서
한번에 쭉 읽긴 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를 전에 사두었는데 은근 두껍더라구요(466쪽)
미리 그 책을 읽었다면 비교가 되었을테고 차이점을 분명히
소개했을거란 아쉬움이 조금 있어요

다락방 2022-09-23 14: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십년도 더 훨씬 전에 친구로부터 이 책을 선물 받았었어요. 아주 좋은 책이라고 선물 받아 당장 읽기 시작했는데 오십페이지도 못가 포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뒤로 책장에 내내 꽂아두기만 했거든요. 당시에는 너무 지루하고 못읽겠더라고요. 그런데 오늘 미미님의 리뷰를 읽어보니 세상 철학적일 것 같고 좋은데요? 이제 드디어 이 책과 제가 만날 때가 됐는가 봅니다.

청아 2022-09-23 14:47   좋아요 4 | URL
다락방님 이 책 갖고 계시군요! 더구나 선물받으셨다니 그분이 어떤 분일지
아마도 철학에 대해 나름의 관점을 가진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에게는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4부작이 그랬는데요. 요즘 오디오북과
드라마로 한창 빠져있어요!!

막 재밌지는 않지만 철학책이다 생각하시면 잘 읽어지실것도 같아요ㅋㅋㅋ
다락방님 다시한번 미셸 투르니에의 세계로!^^*

얄라알라 2022-10-02 01:00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께서 읽다가 중단하셨다니, ^^ 선물해주신 분 쎈스가 엄청나시군요^^ 다락방님을 많이 사랑하는 분일 거라는 느낌.

저도 사실, 이 책 최초엔 선물받아 읽었는데^^ 꼭 만나보세요. 강추합니다!

새파랑 2022-09-23 15: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디서 많이 읽어본 느낌이 들었었는데 <로빈슨 크루소> 였군요 ㅋ 뭔가 미미님처럼 심오함이 느껴집니다~!!

청아 2022-09-23 15:49   좋아요 4 | URL
그쵸!!ㅋㅋㅋ저 처음에 갖고있는 정보가 전혀 없어서 연결못짖다가 이름에서 혹시?했는데 나중에 성까지 나와서 그 스토리구나 했어요ㅋ 미셸 투르니에라는 작가가 원작을 바탕으로 새롭게 쓴거예요^^*

독서괭 2022-09-23 18:3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예전에 읽고 미셸 투르니에 <생각의 거울>이랑 <예찬>도 읽었던 것 같아요. 기억에 방드르디는 어려웠지만^^; 로빈슨크루소보다는 훨 문학적이고 진실한(?) 느낌.. 특히 프라이데이와의 관계에서 차이가 크지요! 미미님 리뷰 잘 읽고 갑니당~^^

청아 2022-09-23 19:00   좋아요 6 | URL
괭님은 두 소설을 모두 읽어보셨군요?!! 다 읽어보신 괭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원작보다 확실히 깊이가 있나봅니다.^^*
저도 미셸 투르니에의 다른 책들 꼭 읽어봐야겠어요~♡

mini74 2022-09-23 20: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예전에 이 책을 읽었는데 어렵다란 기억, 크루소가 감춰둔 더러운 진실같단 느낌 ㅎㅎ 미미님 이렇게 정리해주시니 뭔가 눈 뜬 거 같아요 ㅎㅎ

2022-09-23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Yeagene 2022-09-23 23:2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 미미님이 리뷰를 쓰시니 확실히 다르게 느껴지네요!
전 이 책 한20년전쯤 한번 읽어보려고 시도했는데 초반 읽다가 포기했어요.영 지루하고 진도가 나가질 않아서 못 읽겠더라구요ㅎㅎ
그래도 미미님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해주시니 무슨 내용인지는 알겠네요.읽다만 책,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청아 2022-09-24 08:42   좋아요 5 | URL
예진님 다르게 느껴지셨다니 감사해요^^*
20년전쯤이면 꽤 오래되었네요? 저도 20년전에는 못읽었을것 같아요ㅋㅋㅋ 이곳은
서로 책의 재발견을 도울 수 있으니 너무너무 좋지요~^^♡

그레이스 2022-09-24 10:0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로빈슨 크루소 변주한 책들 중 탁월하죠?
저도 인상깊었던 책입니다.
이 책이 문화적, 인종적 타자 이야기라면, 쿳시의 포(Foe)는 여성의 입장에서 썼어요, 읽어봤는데 번역을 장담 못하겠네요.
암튼 투르니에의 시선은 제게 너무 좋았습니다.
나아가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를 읽게 되었죠^

청아 2022-09-24 10:31   좋아요 4 | URL
아 저는 아직 <로빈슨 크루소>를 읽지않은 상태라서요.^^* 어떤 차이가 있는건지 디포의 책을 꼭 읽어보고 싶어요. 여성의 입장이라니 넘 반가워서 찾아봤는데 존 쿳시의 포가 아쉽게도 절판이네요.🥲

페넬로페 2022-09-24 22: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계속해서 읽은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과도 어느 정도 통하고 있어요. 문명의 우위로 인간을 착취하는 과정은 어느 시대에나 똑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오래전에 이 책 구매했었는데 안 읽어 중간에 처분했는데 후회가 됩니다^^

청아 2022-09-24 17:17   좋아요 4 | URL
<바닷가에서>지난번 페넬로페님 리뷰읽고 최근에 준비해뒀습니다^^*
물질문명과 자본의 힘이 워낙 강력해서 이런 책들이 주는 메시지가 더 의미있고 소중하게 느껴지는것 같아요.

scott 2022-09-24 22:55   좋아요 3 | URL
맞습니다 구르나!
인생이 이 작품 속 상황과 맞물리네요!^^

역쉬 페넬로페님 숨은 고수 이쉼 👍👍👍

얄라알라 2022-10-02 0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미님의 신들린 문장력이 돋보이는 리뷰,
소설 잘 모르는 저이지만 [방드르디, ~~]는 제 인생 소설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아끼는 꿀단지 같은 소설을 요렇게 상기시켜주시니~ 연휴의 야밤에 행복합니다

청아 2022-10-02 08:57   좋아요 3 | URL
얄라님의 인생소설이었군요!!!
저는 이번에야 추천받아 알게된 책인데 의외로 여러분들이 읽었다고 하셔서 놀랐거든요. 얄라님 인생소설이라 하시니 공감됩니다. 나중에 다시한번 읽고싶은 책이예요.ㅎㅎ
남은 연휴도 행복하게 보내세요~^^♡
 

버사는 예지력이라는 끔찍한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한 신비한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나는 내가 겪는 질병에 대해서다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딱 한 번만 제외하고는함부로 말이나 행동을 앞서 나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느 날인가, 앨프리드에게 살짝 화가 난 상태에서, 그가 머릿속으로고민한 끝에 젠체하며 논평하려던 말을 나도 모르게 먼저 입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앨프리드는 종종 말을 하기 전에 잠깐휴지를 두는 경향이 있었는데, 다음 말을 이어 나가기 전 잠시 할 말을 고르는 동안, 내가 조급함과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형이 하려던 말을 마치 기계적으로, 함께 연습이라도 한것처럼 말해 버렸다. 형은 깜짝 놀라 얼굴을 붉혔고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 P35

흔히 인간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계약을 할 때 자신의피로써 서명을 한다고 전해진다. 이는 그 계약의 효과가 나중에야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인간 곁에는 언제나 어두운그림자가 존재하므로 야만성을 이기지 못하고 영혼의 갈증을해소하기 위해서 충동적으로 악마의 잔을 들이켜고 만다. 현명함을 얻는 데에는 지름길도, 전용 선로도 없다. 그래서 그오랜 세월 내내같은실수를반복했음에도 결국 인간의 영혼은 가시로 가득한 황야를 피와 도움을 간청하는 눈물로 물들이며 걸어가야 한다 - P40

우리는 우리 안의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쉽사리 녹아 사라질 거라고, 그저 지식의 편협함만이 우리의 관대함과 경외심, 인간적인 경건함 사이에 숨어서 동료들의 감정과 기분에 대한 우리의 엄연한 무관심을 드러나게 하는 요소라고 믿고 싶어 한다. 인간의 자기중심주의가 최고조에 달할 때 우리의 안일함과 포기또한 강해지는 것 같다. 우리의 승리는 다름 아닌 타인의 상실이다. 따라서 승리가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왔을 때 우리는 그것이 죽음의 차가운 손으로 얻어낸 몫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몸서리치게 된다. - P41

우리 영혼은 인생의 호흡과도 같은 의구심과 희망, 노력을계속 유지하기 위해 무언가 감추어지고 불확실한 것을 반드시 요구하기 마련이다. 만약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래가 완전히 벌거벗겨져 드러나게 된다면 인류의 관심사는 오늘과 미래 사이에 펼쳐진 시간에 오롯이 집중될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아침과 오후의 불확실성에만 주의를 기울이게 될테고, 마지막으로 남은 투기, 성공, 실망의 가능성을 좇아 온갖 거래소로 죽어라 달려갈 것이다. 스물네 시간 이내에 위기가 닥칠지 닥치지 않을지를 두고 무수한 정치적 예언이 터져나오리라. 여름날이 저물 무렵에야 모든 것이 자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 하나만을 제외하고 그사이에 갖가지 주제나 가설, 논쟁들이 명백해진다고 가정해 보면 어떨까? 해가지면 그 즐거움 또한 끝나리라는 것을 알기에 벌들이 꿀로 가득한 꽃으로 모여들듯 예술과 철학, 문학과 과학으로 다들 몰려들게 될 터다. 이제 인간의 충동과 정신 활동은 허망한 미래와 심장 박동, 근육의 과민함에 더는 자신을 맞추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 P56

어느 순간부터 나를 대하는 버사의 태도가 예전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태도가 얼마나 차갑고 냉랭한지 결혼식 날 아침 따스한햇볕 사이로 내 몸을 차갑게 때리던 우박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 P59

사람들은 이렇게 요약된 한 문장만으로 타인의 인생을 판단한다. 본인은 온갖 유혹을 물리친 현명하고 덕을 갖춘 정복자라 느끼면서 간결한 한마디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상대방의 경험을 전형적인 몇 마디 말로 떠들어 댄다. 칠 년이라는 끔찍한 시간 동안 이어진차가운 실망, 머리와 가슴의 두근거림, 헛되고 덧없는 싸움,
후회와 절망의 순간들을 차마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런데도한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 너무나 쉽게 요약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단어를 의미가 아닌 기계적인 암기로 체득한다.
의미를 알기 위해선 우리의 생명인 피를 지불해야 하며, 우리신경의 미세한 조직에까지 아로새겨야 한다. - P64

사회로부터 한결 고립되고, 나의 황폐한 영혼이 고뇌에 찬 열정의 폭력적인 발광에서 습관적 통증의 무감각함으로 바뀌어 차차 가라앉을수록기묘한 도시와 모래벌판, 거대한 폐허, 야릇한 빛을 발하는 한밤중의 성좌, 산길과 오후의 붉은 햇살이 비추는 아늑한 잔디로 가득했던 프라하의 환상보다도 더 선명한 환영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그런 장면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불확실하고 혹독한 형태 중에서도 유독 어떤 존재가 내게 엄청난 압박감을 안겨 주었다. 그렇게 연속되는 고통은 내 마음속의 종교적 믿음을 완전히 파멸시켜 버렸다.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비참한 이들에게는 종교적인 믿음도 숭배도 불가능하며, 오직 악마에 대한 추종만이 가능한 법이다. 그리고 이모든 것을 뛰어넘어 내 삶이 마지막에 이르러 통증과 질식, 최후의 몸부림을 경험하는 순간의 환영들이 거듭해서 눈앞에나타나기 시작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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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말에는 전제가 있다. ‘8시간 노동제‘는 가정에서 누군가가 가사 노동과 육아에 종사할 때만 가능한 사회 시스템이다. 한국이 ‘동아시아‘인 건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삼아 지명을 붙였던 근대의 역사적 산물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이처럼 정치적 과정에 관한 이해 없는 지식은 페이크뉴스(fake news)에 불과하다. - P39, 정희진


얼마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장님이 연설 도중 '자유'를 무려 33번 외친일이 뉴스에 오르내렸다. 왜 그는 33번이나 '자유'를 강조했을까? 언뜻 광복절과 '자유'는 잘 어울리는 한 쌍 같지만 1945년의 '자유'와 첫째도 경제 둘째도 경제 셋째도 경제라고 했던 이장님이 말하는 2022년의 '자유'는 같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지지율이 곤두박질 친 상황에서 그가 놓칠 수 없는 '자유'의 전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누구의 자유인가

 

젊은 여성이 젠더에서 자유로운 위치에 있다는 생각은, 개인이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생애사건에 총체적 책임을 진다는 현대 사회의 망상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포스트페미니즘적 감수성'은 신자유주의와 같이 간다.(중략) 여성은 어떤 선택의 금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선택을 통해 규제되며, 이 때문에 권력과 불평등이 작동하는 바는 잘 보이지 않고 분석되기 어렵다. 로절린드 길이 지적하듯 "힘을 행사하는 것은 외부 억압이 아니라 정신에 깃든 규율과 규제이며 이는 문자 그대로 새로운 주체성을 만들어낸다." p.35,에리카 밀러,임신중지



8월 다락방님과 함께하는 여성주의 책 함께읽기는 '임신중지'다. 이 책은 소제목에 드러난 것처럼 임신중지라는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를 다룬다. 임신중지를 둘러싼 경합의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는 감정적 규제가 어떤 식으로 작동되어 왔을까? 아직 서문을 읽었을 뿐이지만 사회구조적 억압의 메커니즘과 임신중지를 둘러싼 논란이 괘를 같이 한다고 느꼈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눈을 가리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럴듯한 말로 저의를 숨기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다. 더구나 감정은 누구나 자신의 것이라고 쉽게 단정짓기 때문에 침해 여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모든 지식은 특정상황과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융합에서위치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지식의 본질적 성격인 부분성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중립적인 것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지식은 인식자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이것이 이른바 ‘모순‘이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지식은 없다.  - P57. 정희진,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어느 한 여성이라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설사 그녀에게 채워진 족쇄가 내 것과는 아주 다르다 해도 말이다. 오드리 로드(Audre Lor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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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8-18 12: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미미님 인용해주신 부분들이 구매욕을 자극하네요~ 8월의 책 한권을 아직 못 정하고 방황중인데 ㅎㅎㅎ 감정의 정치사를 다룬다는 부분을 보니 더 궁금하네요. 희망도서 신청해놨는데 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ㅠㅠ

청아 2022-08-18 13:10   좋아요 5 | URL
괭님 <임신중지> 말씀이시죠? 어제까지 서문을 읽었는데 예상 했던것과 달라 더 기대된답니다. ^^* 정희진님 책은 4권보다 확실히 좀 어려워요. 그래도 역시 밑줄을 부르는 내용들입니다.ㅎㅎ

바람돌이 2022-08-18 12: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제 시작하려고요. 저기 정희진샘 책도 읽어야 하는데 만만치 않은 책들이 이번달에도 포진!
미미님 따라 힘내서 열심히 읽겠습니다. ^^

청아 2022-08-18 13:18   좋아요 4 | URL
바람돌이님<임신중지>서문부터 아주 인상적이예요! 이것도 제가 몰랐던 부분이라 공부가 될것같고 기대됩니다. 바람돌이님은 어떻게 느끼실지 궁금해요^^*

페넬로페 2022-08-18 13: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6에
˝권력을 지향하거나 권력의 달콤한 맛에 길들여진 지식인들이 부역자로 참여해 권력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권력의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는 것은 권력지향형 지식인의 부역탓이다˝
이렇게 씌여 있어요.
이장도 그 부역자들이 눈을 가려주어 자유를 외치고 있는것 같아요.
미미님, 여전히 열심히 책 읽으시네요^^
임신중지도 내용이 궁금해요**

청아 2022-08-18 13:21   좋아요 4 | URL
마침 한 지식인이 이장님 부인의 표절에 대해서 그런 일은 학계에서 흔하다고 했던 기사가 떠오르네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읽을 만한 글이 많지요? 페넬로페님 6월호 말씀이시겠죠? 저도 찾아봐야겠습니다. <임신중지>는 아직 서문만 읽었지만 서문만으로도 꽤 좋았습니다. 강추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08-18 14: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자유라는 단어가 저런 상황들 때문에 변질이 되어가는 듯합니다.
미미님 저도 이제 임신중지 시작하려고요. 눈깜짝할 사이에 8월의 2/3가 흘러가고 있네요ㅠㅠ 남은 분량도 화이팅!

청아 2022-08-18 14:36   좋아요 6 | URL
네! 화가님. 오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본래 의미를 잃어버린 단어들이 꽤 있죠?! <임신중지>화가님도 서문 읽어보심 만족하실것 같아요. 화이팅!! ^^*

책읽는나무 2022-08-19 09:1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서문이 어떤 날엔 참 대단하게 읽히기도 하여 밑줄 봑봑 그으며 읽다가도 또 어떤 날엔 말이 너무 어렵고 난해하기도 하구요.
특히 다른 책 읽다가 임신중지 읽으면 더 난해하게 느껴져 내려 놓고...혼자서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중인데 시간은 자꾸 가네요???
이번 주 다 읽으려고 했는데 오늘 벌써 금요일이어서 전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ㅋㅋㅋ
여지없이 이번 달도 말일 전에 완독이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일 전에 완독하는 것도 어딥니까???ㅋㅋㅋ
암튼 자극받게 계속 임신중지 읽고 올려 주세요^^

청아 2022-08-19 10:52   좋아요 5 | URL
그쵸!! 저도 읽으면서 어렵다고 느꼈어요.^^ 번역때문인지 원래 그렇게 쓰여진건지 완전 집중해야하는 난해함? 보이는 두께에 비해서 260페이지 까지던데 진도 빼기가 쉽진 않을듯 합니다. 그래도 서문 읽고 어떻게 풀어냈을지 기대가 많이되는 책!!ㅋㅋㅋ이번달 너무 빨리 지나가죠. 날씨에 변화가 있어서 그런것도 있는것같아요. 나무님도 한번씩 자극 부탁드려요 화이팅입니다*^^*

그레이스 2022-08-19 19: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
이장이 누군가했어요 ㅋㅋ

청아 2022-08-19 19:34   좋아요 4 | URL
지난번에 이장님, 자꾸 집나가는 준석이 얘기 썼거든요ㅋㅋㅋㅋ

새파랑 2022-08-19 20: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지식은 없다~! 완전 공감합니다 ㅋ 전 서문은 잘 안읽는데 서문만 읽어도 좋다니 엄청 기대가 되실거 같아요~!!

청아 2022-08-19 21:26   좋아요 5 | URL
네!ㅋㅋ페미니즘의 흐름이 기존의 보편적 가치추구를 넘어 개별적이고 사적인 경험의 특별함에 초첨을 맞추는게 와닿아요. 이 책 공부가 많이 될것같아요*^^*

mini74 2022-08-20 10:55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용산개장수라던데요..주어 없습니다 ㅎㅎㅎ 미미님 열심히 책 읽고 계시는군요. 전 임신중지 일단 도서관에 있길레 갖고 왔는데 아무래도 사야 될 거 같아요 ㅎㅎㅎ전 정희진님 책 영화가~ 를 방금 다 읽었는데 참 좋네요~~

청아 2022-08-20 12:00   좋아요 5 | URL
개고기로도 언급되던데요 개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참ㅎㅎㅎ임신중지 읽을수록 좋네요! 첨예한 논쟁 이면의 감정정치가 공부도되고 흥미진진합니다. 미니님 영화가~읽으셨군요~♡^^♡

가필드 2022-08-21 22: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용히 두책을 장바구니에 추가해 봅니다 임신중지가 번역으로 아님 원문이 그렇게 되어진건지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미미님 말씀에 살짝 난감해지지만 책순이의 본분 호기심으로 기대가 되네요 🤗

청아 2022-08-22 12:35   좋아요 2 | URL
가필드님~♡ 이 책 그래서 느릿느릿 읽고 있지만 놀라운 성찰의 결과도 잔뜩있어서 밑줄치느라 힘들어요ㅎㅎㅎ분명 의미있는 읽기가 되실거라 믿습니다😍
 

모든 말에는 전제가 있다. ‘8시간 노동제‘는 가정에서 누군가가 가사 노동과 육아에 종사할 때만 가능한 사회 시스템이다.
한국이 ‘동아시아‘인 건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삼아 지명을 붙였던 근대의 역사적 산물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이처럼 정치적 과정에 관한 이해 없는 지식은 페이크뉴스(fake news)에 불과하다. - P39

저절로 생긴 말은 없다. 말은 권력관계의 산물이다. - P39

융합은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등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지식이 만나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내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 P46

이론은 거듭되는 장례식을 통해 진보한다 - P47

애초에 융합이 탄생한 데는 두 가지 배경이 있다. 학과별로전문화가 심화되면서 전인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된 한편, 서구남성 중심 지식으로는 해석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가시화할 새로운 사유 방법론이 필요했던 것이다즉 서로 다른 생각끼리 닿으면서 그 접촉면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과 충돌이 융합의 주요 요소다. - P51

문명으로 인한 환경 파괴와 전쟁은 지식을 양의 문제에서 가치관의 문제로 이동시켰다.  - P52

권력화된 무지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이 드러나지 못하게 한다. - P53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파악한다음에 가능하다. 사실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관심이 없다.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는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다. - P56

모든 지식은 특정상황과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융합에서위치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지식의 본질적 성격인 부분성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중립적인 것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지식은 인식자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이것이 이른바‘모순‘이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지식은 없다.  - P57

자기 인식이 부분적(partial)이라는 진리,즉 각자의 당파성(partiality)을 인정해야한다. 부분적 지식은 부족한 지식이 아니라 성찰적 지식이다. 지식의 구성은 경합의 과정이며 구성된 지식은 정치적 투쟁의 산물이다.자기 위치를 인식한 사람만이 당파성과 보편성이 반대말이라는 사실을 안다. 자기 포지션과 상대방의 포지션을 모두파악하는 길이 논쟁에서 ‘이기는 첩경이다. - P58

"나의 위치에서 생각한다." 이 말은 ‘네 주제(능력, 형편, 조건……)를 파악하라‘거나 ‘너 자신을 알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나의 위치에서 생각한다는 건 성별, 계급, 인종, 지역 등이 교차하며 발생하는 사회적 모순 속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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