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 타이베이 가족연습여행
김혜영 지음, 조대용 사진 / 서행성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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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럼]'아픔도 삶이다' 김혜영 작가님의 첫 작품이다예비 며느리까지 5명이 여행을 하다니 부럽다. 아이가 결혼을 하면 같이 여행하기는 쉽지 않은데 가족 여행을 하였다. 책은 엄마가 쓰고, 사진과 그림은 아들이 담당했다고 한다. 저자는 1인 기업 서행성 출판사 사장님이기도 하다. 아들을 유학 보내던 엄마의 마음이 잔잔하게 다가온다.

 

 

저자 소개: 김혜영

30대에는 분만실 간호사, 광명문화원에서 어린이 독서교육, 광명여성의 전화에서 여성운동과 지역운동을 하고 살아감. 40대에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어 공부와 자녀교육, 교회 청소년 교육을 하는 전업 주부이자 여행자로 지냄, 50대에 귀국하여 요양보호사 교육원 전임강사 생활을 시작함. 60대를 앞두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가 <앙코르 앙코르>라는 나만의 책 만들기에 도전함. 길은 또 하나의 길로 이어진다는 생각으로 숭례문학당 100일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시럼, 아들의 결혼을 앞두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시어머니가 되어보겠다고 <오늘처럼>을 기획하고 타이베이 여행을 떠남. 내친김에 1인 출판사 '행성'을 시작함. 구불구불한 샛길에는 더욱 작고 소소한 이정표가 필요하다는 것을 널리 알리며 후반부 인생을 살고자 한다

 

조대용: 중국에서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10년을 살아온 중국통, 국제관계를 전공했으나, 사진에 매력을 느껴 카메라를 메고 자전거 타고 중국을 누비고 다님. 졸업 후 케냐 '뭉게' 초원에서 2년 동안, 카메라 하나로 충만한 시간을 보냄. 현재 '기아대책'에 근무하면서 틈틈이 일러스트 공부를 하여 이 책의 사진과 내지 편집을 담당함. '여행의 습작'이라는 작은 사진집을 출간함. 앞으로 서행성의 사진과 편집 디자인을 담당할 계획이다.

 

프롤로그

타이베이 여행은 아영을 가족으로 맞이하는 낯설지만 행복한 기회였어요. 이제까지 남자들(두 아들과 남편)가운데서 여자 혼자였기에 내밀한 정서를 나누기엔 한계가 많았죠. 여성 가족이 생긴다는 것은 저에게도 즐거운 기대였어요. "우리 새 가족이 들어오기 전에 함께 여행 가서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게 어때?"라고 제가 먼저 제안을 했죠. 즐거운 경험으로 새로운 역할을 시작하고 싶었어요. 여행은 자기 담장을 허물고, 함께 가는 여정이니까요. 왜 하필 타이베이였냐고 묻는다면, 다섯 사람 모두 그곳을 마음에 들어 했고, 비교적 거리가 가까워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었기 때문이죠. 내성적인 큰 아들이 주인공이 되게 해주고 싶은 엄마로서의 전략도 숨어있었죠. 내 예상대로 중국통인 아들(중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중국에서 다녔다)은 대만에서 누구도 의심치 않는 현지인이었죠. 그가 가족을 리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죠. 아들은 능수능란하게 가족을 이끌었고 '아영'은 연인의 능력에 감탄했어요.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한 한자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나의 40대는 중국어를 익히고 사용하는 데 애쓴 세월이었다. 7년 만에 제3지대(중국 문화와 언어지만 다른)에서 고향을 만난 기분이랄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익숙하면서 다른 냄새였다. 중국에서 돌아온 지 7년째인 남편은 코를 킁킁대고 있었다. 그는 인생의 황금기 11년을 중국에서 보냈다. 번영도 쇠락도 그 세월에 다 녹아있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다가 돌아온 것처럼 강렬한 기억들이다.

 

아들이 출가외인(出家外人)

나도 장가보내는 엄마 수업이 필요하다. '시월드'라고 말하는 요즘 사람들의 부정적 인식은 이제 '그녀'가 행복한 세상이라는 긍정형으로 나부터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다. 부모들의 존재가 더 이상 억압이 아닌, 자식들에게 쉼터 되는 것. 이제는 만남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한 시대다. 이제까지 시댁은 얻어가고 여자는 자신을 버리고 남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나는 이러한 불평등한 가족구조를 깨고 싶었다.

 

여행은 가족으로서 첫발을 내딛기 위한 좋은 수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노동을 대가로 먹는 사람과 즐기는 사람이 차별되는 만남. 그런 만남이 시댁이라는 정체성이었다면, 맛있는 것, 낯선 경험을 함께 즐기기로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늘보기, 떠나보내는 마음

 

보냄1

처음 널 보낸 날,

하늘은 가슴 시리게 높고 푸르렀지. 네가 태어난지 백일이 지나자마자 널 보내야 했지. 아빠는 학생이었고, 나는 일을 해야만 했어. 적어도 아빠가 졸업해서 취직할 때까지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지. 그러나 내 생각 따윈 중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거대한 그물망에 들어선 삶이라는것을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어.

 

보냄2

음습한 황사로 뿌연 하늘,

넌 청도에서 북경으로 12시간이나 걸리는 잉쭈오(가장 저렴한 완행열차의 좌석)를 타고 집을 떠났지. 책을 많이 읽어서 '조박사'라는 별칭을 가진 너는 속내를 말한 적이 없었지. 그래도 친구들은 너의 가슴 속에 숨은 지식창고를 알고 있기에 그렇게 불렀던 거 같아. 가끔 성마른 엄마가 채근하면 억지로 한 두 마디 하는 게 전부였지. 정치외교학과만 가겠다고 제2, 3을 고려하지 않은 네가 결국 서울대 1차에 합격하고도 한국에서 다시 중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을 때, 그 뿌연 하늘만큼 나도 캄캄했지. 그러나 난 "괜찮아, 넌 무얼 해도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 쿨하게 말하고 쿨하게 북경으로 보냈지

 

보냄3

우린 모두 한국에서 재회했지.

10년 만에 가족이 뭉치는 날, 조국의 하늘은 무거웠지. 금의환향할 줄 알았던 아빠가 사업체를 포기하고 무거운 걸음으로 들어왔으니까. 넌 졸업하고 들어오자마자 군에 입대를 했지. 군에 가있는 동안 우리가 함께 살아갈 거처를 준비해야 했어

 

보냄4

"엄마, 저 케냐로 떠날 거예요. 해외 봉사단 1년 계약 했어요." 제대하고 취업준비를 하던 어느 날 갑자기 부모 동의서를 내밀었지. "케냐?" 치안이 불안한 곳이라는 어설픈 편견이 있었지만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취업 준비 하느라 시간 낭비 하는 것보다 1년이 두고두고 너에게 값진 경험일 수 있겠다."라고 말했지.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고 너희들의 말을 듣기 때문에 결정하기가 어렵진 않았어.

 

 

작년에도 올해도 비수기에 여행을 한다. 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주류를 타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나의 인생이 비주류를 지나온 것처럼, 성수기 여행을 좋아하지않는다. 주렁주렁 매달린 고구마 줄기처럼 성수기에 매달린 여행객이 되고 싶진 않다. 누구나 하는 것은 나도 해야 한다는 강박에 매달린 채, 어디서나 줄을 서야 하는 여행은 정말 싫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비쥬류에 해당하는 삶을 살게 했지만 내 나름의 감각과 가치관으로 당당하게 살았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쓸 필요 없다.

애씀이 권태를 만들고, 회피를불러온다.

부모는'난 타인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아.

나 스스로에게 기대를 걸지.'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삶은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 설계해야 한다.

누구 아들은, 누구 며느리는,누구 딸은, 이런 말에서

자유로운 부모라면 좋겠다.

그들은 그들 일 뿐. 나는 나의 삶의 방식에 따라 살며,

세상의 기준으로부터 의연해지기.

없는 그대로 당당해지기로 하면 좋겠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의식에서도 자유로우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부모의 자격이다.

 

'먹기 위해 여행 온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융캉지에'로 왔다. 연남동, 홍대거리에서 흔하게 마주치던 음식 거리들 같다. 킹 망고, 우육면, 까오지, 딘 타이펑, 동먼 교자관 등은 인터넷에 교과서처럼 올라오는 '메뉴파탈'이다. 상가 뒷골목을가본다. 낮은 담장에 작은 간판의 파리야행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어린 시절 많이 보았던 양장점 모습이다. 유명한 상업지대임에도 일본식 건물들이 드문드문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작은 가게들. 높지 않은 상가들. 소리 높여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 조용한 상인들. 우리가 비수기에 평일. 비오는 날임을 감안하더라도 좀 고즈넉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때만 변화할 수 있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저자'벨 훅스'는 우린 여자들의 내부에 도사린, 타인을 억압하고 상처 입힐 능력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라고 말한다. 외부를 향해 화살을 돌리기 전에 우리의 내면의 적을 알아차리는 것이 먼저인 것이다.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라는 지위가 만들어진다. 남성(아들)을 중심으로 맺는 힘의 역학관계다. 나는 이 낡은 계급장 같은 시어머니라는 호칭이 싫다. 호칭 안에서 부자유스러운 성과 연령이라는 단어를 사랑의 연대로 새로 쓰고 싶다. 내가 여행을 제안하고 함께 한 이유다.

 

"어머니는 언제부터 글을 쓰고 싶었어요?" 아영이가 묻는다.

"글쓰기보다 먼저 책읽기였지. 책을 너무 좋아하다보면 나도 쓰고 싶어지는 거지. 딱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고, 엄마가 되어 내 삶이 제한된 그때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독서 모임과 글쓰기가 마지막 남은 탈출구 같았다. 그녀에게 내 삶의 원동력을 들려주자 맑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인다.

 

에필로그

흔히 가는 여행지, 흔한 여행기를 왜 쓰는 거냐고 할까봐 소심한 마음으로 책을 마무리했다. 흔하게 일어나는 일도 누군가에겐 특별하다는 생각으로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순간들을 기록하고 싶었다. 새 가족이 되는 아영과 우리의 인생 워밍업 같은 여행을 결혼식 기념 선물로 주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혹시 우리 결혼식 빙자해서 엄마 작가 데뷔 무대로 활용하려고 하는 흑심이 있는 것은 아니죠?" 하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묻는 아들에게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뜨끔하기도 했다.

내가 여행 작가가 되려는 것도 아닌데 뭘. 속으로 웅얼거리며 책 한권을 쓰긴 썼다. 쓰고 보니 선물로만 남기고 말기엔 아까운 욕심이 생겨났다. 출판사 이름을 등록하고 싶고, 더 나은 책을 쓰고 싶어졌다. 책을 쓰는 도중에 출판사 이름을 수도 없이 짓기 시작했다. 임신하고 나서 아이 이름 짓느라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던 경험과도 비슷했다.

기어이 출판사 등록을 하고 사업자 등록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이 책은 내게 새로운 행성으로 데려다 준 셈이다. 그래서 '()행성'에서 출판한 최초의 내 책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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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브랜드화시키는 말
김현주 지음 / 지식과감성#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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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많은 곳에서 말을 하려고 하면 음성이 떨리고 다리도 후들거린다. 평소에 말을 잘 한다고 생각했다. 인터넷강의로 공부를 할 때이다. 오프라인 강의도 있었다. 공부를 마칠때 쯤 3분 스피치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두 번의 경험이 있는데 두 번 다 망쳤던 기억이 난다. 앞에 나가니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음성이 떨려서 내 자신도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난다. 이래서 스피치를 배워야 하나보다 생각은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 책으로 배워보려고 한다. 저자도 좋아한다는 셰익스피어의 "학생으로 남아 있어라. 배움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폭삭 늙기 시작한다" 이 말이 좋아진다.

 

저자 소개: 스피치 컨설턴트 김현주

금빛, 달빛을 품은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자란 아이는 노래 부르기와 그림 그리기, 조물조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중학교 시절 서울 에서 온 미술 교생선생님이 미술에 소질이 있구나하신 칭찬의 말 한마디에 미술을 전공하게 되었고. 대학 시절에는 졸업 전에 목소리 한 번 듣고 싶다는 정도로 말 없는 학생이었다. 짧은 교편 시절을 거쳐 미술학원과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자기계발의 목마름에 서울로 명강사의 강연을 10년 넘게 참여를 하던 중 다양한 경험이 축적되면 강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다.

 

 

목 차

1장 말의 기초공사

2장 나를 표현하는 말

3장 말의 재료

4장 말은 살아 있는 생명체

5장 말 한마디의 힘

6장 추억상자의 말

7장 말하기 교실 풍경 

 

말은 마음의 그림이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말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파급효과가 있는지. 이러한 물음 없이 말을 잘하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를 갖는 것은 지도 한 장 없이 신세계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숲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나침반과 지도가 필요하듯이. 말의 재주가 아닌 가슴으로 말하는 기준을 잡아보았다. 따뜻한 말의 그림을 그려보시길 바란다.

 

 

발음은 정확한 입 모양에 있다. 정확한 입 모양에서 정확한 발음이 나오게 된다. 발음이 정확하지 못한 이유는 움직이지 않는 턱과 입 때문이다. 신문 사설 읽기는 논리적인 사고와 발음 교정에 많은 도움이 된다.무엇보다 신문 사설은 프로들의 글이라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신문의 사설은 어느 신문이든지 거의 세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것을 표준 속도로 읽으면 거의 3분 정도 되니 세 단락을 모두 소리 내어 읽으면 9분 정도 걸린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의 말의 속도가 정확한 표준 속도다. 표준어 발음이 힘든 사람도 좋은 학습방법이 될 것이다. 사설에서 간추린 단어들이다. 생각보다 읽어 보면 매끄럽지 못한 발음으로 나올 것이다. 음을 자르듯이 탁탁 끊어서 스타카토로 연습하면 발음의 정확성을 배울 수 있다. 작은 소리로 하는 것보다 고성으로 매일 꾸준히 읽어야 효과가 있다.

 

떨림은 감정이다. 사람만이 유일하게 감정을 느낀다. 로봇이 아닌 이상 차이는 있으나 누구나 떨림을 경험한다. 아이들은 스피치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왜 그럴까? 아이들은 상대가 나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간혹 소심한 아이들도 있으나 부끄러움 정도만 느낄 뿐이다. 그러나 성인은 타인을 의식하고 완벽한 스피치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발표가 끝난 후에도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때론 발표 공포가 평생을 갈 때도 있다.긴장을 하면 먼저 호흡이 가빠진다. 호흡이 불규칙하니 말이 떨리게 되어 있다. 스피치의 공포감을 극복하려면 오직 연습이다.

 

유명 호텔의 우아한 만찬을 즐긴다는 들뜬 기분에 명품으로 차려있고 참석했다. 고급스러운 접시 위에 놓인 비프스테이크를 품위 있게 먹고 와인을 한잔하면서 분위기에 취하려는 찰나, 사회자가 "앞에 계신 분에게 한 말씀을 부탁하겠습니다"라며 자신을 부른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 말인가요? 라는 제스쳐를 취한다. 설마~ 뒤의 사람이겠지 하고 뒤를 돌아보니 사회자는 ", 뒤를 돌아보시는 분입니다" 하고 말한다. 상황을 재연해 보이면 자신이 똑같이 경험했다는 분이 꽤 있다. 체면상 앞으로 나오긴 나왔는데, 자신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고 머리가 하얘진다는 표현이 이런 것일 것이다.

 

"나오라고 해서 나왔는데 ...딱히 할 말은 없고요." 횡성수설하다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스테이크와 와인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하필 나를...'하면서 사회자를 속상한 눈초리로 흘려보며 책임을 전가할 것이다. 송년모임에서 이런 경험을 한 많은 분들이 강의에 참여한다. 몇 년간 강의에 참여한 어느 분은 한강 유람선에서 송년모임을 하였는데 '유람선에서 인사를 하니 흔들리네요'하면서 흔들리는 체스처를 보이며 스트레칭을 했더니 원고도 없이 인사말을 잘한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모임에 참여할 때는 의상과 미소도 챙겨야 하지만 반드시 스트레칭을 준비해서 가라.

 

 

 

경청의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다

온몸으로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반드시 상대와 시선을 맞추어야 한다

맞장구로 반응하는 것도 경청한다는 뜻이다

공감을 할 때는 간혹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좋다

 

"나는 뒤끝은 없는 사람이다." 이런 말을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사람을 보면 자기기만에 빠진 어리석은 사람이라 측은한 생각까지 든다. 지인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는데 참으로 안타깝다. 자신은 뒤끝이 없을지 몰라도 상대는 평생을 갈 수도 있다. 말 한마디에 상대가 상처를 받는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말에 상처를 입으면 아직도 입원 중이다. 말이란 한 번 쏟아내면 담을 수 없는 것이다. 말은 적게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보다 말을 많이 해서 문제가 생긴다. 그리하여 불가에서는 말은 번뇌를 일으킨다고 하지 않는가. 三思一言. 세 번 생각하고, 한 번 말하라. 칼릴 지브란의 '말하기 전에 생각하라'는 시대를 초월한 격언이다.

 

말 잘하는 사람은 리더다.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리더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한 걸음씩 걸어보는 자세,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마지막에는 미소 짓게 된다. 피드백으로 성장하자.

 

퇴근 후 책 한 권 ~농경시대에는 논과 밭은 농작이었다면 지식근로자의 시대인 지금은 독서가 근로이며 누구나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전문가가 되려면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 이상을 읽어야 한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도 큰아들 학연에게 "머리속에 책이 5,000권 이상 들어 있어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사람은 무엇을 읽고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말이 달라진다. 독서의 중요성은 알고 있으나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지금은 책보다 재미있는 것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다. 버튼만 누르고 터치만 해도 볼거리가 쏟아져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말에 관한 명언을 알고 있나요

 

 

말한 대로 이루리라/ 저 하늘의 별을 보아라

1969년 미국 명문 여대 웰즐리칼리지에서 학생으로 최초의 졸업 연설을 맡았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48년 만에 모교에서 졸업축사를 하였다. 2017년 축사에는 "가장 높고 단단한 유리 천장에 수백만 개의 균열을 내십시오"라면 후배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도하였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밤하늘의 별을 보며 "클린턴, 저 하늘의 별을 보아라. 넌 저 별을 손안에 넣을 수 있단다. 그 별이 네 꿈이라면, 별이 네 것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 손을 열지 말거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별이 국무장관까지 다다르게 하였다. , 정말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 멋진 꿈이 실현되는 말만 하자.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 이루어지고 싶은 말을 해보라. 마법처럼 이루어질 것이다.

 

가슴이 떨리는 삶~ 딩동 하면서 문자가 왔다. C 씨는 추천해 주신 세 권의 책이 택배로 왔는데 가슴이 떨리고 두근거려 삶이 풍요로워질 것 같다는 감사의 문자다. 아드님이 인터넷으로 주문을 해 주셨다는데 책을 잡고 있는 할머니의 예쁜 손을 바라보는 손녀, 손자는 멋지고 우아한 할머니로 기억할 것이다. 분명 그들도 할머니처럼 책을 가까이 하면서 성장할 것이다. C 씨는 고전영화나 최신 영화도 추천하면 그날로 바로 극장행을 하거나 다운받아 감상하는 실행력을 가진 분이다. 독서하기에 나이가 많다는 것, 노안으로 눈이 피곤하다는 것, 시간이 없다는 것은 모두 핑계이지 않을까.

 

나를 브랜드화시키는 말

지나치게 타인을 향한 시선은 자신을 무력감으로 빠져 들게 할 때도 있지만, 자신을 향해 바라보는 시선은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지 않을까. 꽃은 남과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 향기를 낸다. 꽃의 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의 향기는 천 리를 가며,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는 말이 있다. 사람 냄새 나는 따사롭고 온화한 말의 향기가 만 리만큼 갈 수 있도록 하는 우아한 여인이 되기를 꿈꾼다. 영국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한 셰익스피어의 "학생으로 남아 있어라. 배움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폭삭 늙기 시작한다" 이 말을 나는 좋아한다. 말 공부는 사람 공부이고 인생 공부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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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여자의 사랑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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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여자의 사랑 티저북]

 

 

 

착한 여자의 사랑을 받아서 포장을 풀어보니 카드와 볼펜이 들어있다. 선물 받은 느낌 기분이 좋았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소설이다. 차례에 나와 있는 '자식들은 안 보내' 한 편이 실려있다. 부담없이 읽으리라 했는데 부담을 가지고 읽어보았다. 왜 그녀가 남편과 아이들의 곁을 떠났는지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지 모르고 말이죠.

 

 

삼십 년 전, 한 가족이 밴쿠버섬 동쪽 해안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젊은 아빠 엄마, 어린 두 딸, 그리고 연륜이 좀 있어 보이는 커플도 있었는데 바로 남편의 부모였다.

 

젊은 아빠 엄마 브라이언, 폴린

어린 두 딸 케이틀린(5), 마라(16개월)

연륜이 있는 부부 브라이언의 부모님

 

폴린은 배우가 아니다. 아마추어 연극이지만 그녀는 아마추어 배우도 아니다. 다만 그 희곡이 그녀가 이미 읽은 것이었다. 장 아누이가 쓴 외리디스였다. 그녀가 연극에 출연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은 건 6월 바비큐 파티에서 만난 어느 남자에게서였다. 바비큐 파티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사나 그들의 배우자였다. 파티는 브라이언이 교편을 잡고 있는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 집에서 열렸다.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여자는 과부였다 그녀가 장성한 아들을 데려왔는데, 그의 이름은 제프리 툼이었다.

 

제프리가 폴린을 보자마자 외리디스로 발탁한 건 외모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뻐서가 아니었다. "예쁜 여자한테는 절대 그 역을 맡기지 않을 거예요." 그가 말했다. "어떤 연극에서든 내가 예쁜 여자를 무대에 올린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그건 과해요. 주제를 흐려놓거든요."

그렇다면 그는 그녀의 외모를 어떻게 생각했다는 말인가? 다소 부스스한 짙은 색깔의 긴머리(그당시 유행은 아니었다)파리한 피부("이번 여름에는 햇볕을 피해요")그리고 무엇보다 눈썹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폴린이 두 주 동안 휴가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말하자 제프리는 그녀의 인생에 휴가 같은 게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듯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한 방이 또 있을 줄 알았다는 듯 이내 암울하고 약간 냉소적인 표정으로 바뀌었다.

 

제프리에 대한 생각이 그녀를 찾아왔지만 사실 그것은 생각과 거리가 멀었다 - 그건 오히려 몸의 변화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해변에 앉아 있을 때나(제프리가 시킨 대로 하얀 피부를 태우지 않으려고 햇볕을 좀 피할 수 있는 관목 그늘에 앉았다) 기저귀를 빨아 짤 때나, 브라이언과 함께 그의 부모를 찾아갔을 때 이런 증상이 나타났다.

 

"나는 그저," 제프리가 말했다. "당신을 내 침대에 눕히고 싶었어요." 그녀가 다시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요." 그의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맴돌았다.

 

그녀가 하고 있는 행동은 어디서 들었거나 읽었던것이었다. 안나카레니나가 했던 것이었고, 마담 보바리가 하고 싶어했던 것이었다. 브라이언이 근무하는 학교의 어느 교사가 학교 비서와 한 것도 그것이었다. 그는 그 여자와 눈이 맞아 달아났다. 그걸 일컫는 말이 그거였다. 눈이 맞아 달아나다. 눈이 맞아 도망치다.53

 

간밤에 브라이언은 차분하고 통제되고 거의 유쾌한 목소리로 통화를 했지만 -충격을 받지 않은 자신, 반대하거나 매달리지 않는 자신을 대견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 기어코 감정을 터뜨리고 말았다. 누가 들을지 모른다는 사실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경멸과 분노를 담아 말했다. "그래 그럼······애들은?"

폴린의 귀에 댄 수화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 이야기는 ·····"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식들은." 그가 여전히 복수심에 불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단어가 '애들'에서 '자식들'로 바뀌자 그녀는 판자로 한 대 세개 얻어맞은 것 같았다 무겁고 공식적이고 정당한 협박.

"자식들은 안 보내." 브라이언이 말했다. "폴린. 내 말 들었어?"

"안 돼." 폴린이 말했다. "당신 말은 들었어. 하지만·····"

"됐어. 내 말을 들었다니까. 기억해, 자식들은 안 보내."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녀가 끝내려는 게 어떤 건지를 보여주고, 정말 그렇게 한다면 그녀를 벌하는 것. 그를 비난할 사람은 없다.

    

  *출판사로부터 도서(티저북)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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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fkstk 2021-12-09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5,000원 이상 도서도 몇 번을 사 봤지만 사은품 한번 없었네유~~🦴
 
직업으로서의 음악가 - 어느 싱어송라이터의 일 년
김목인 지음 / 열린책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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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음악가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음악을 듣는 것은 좋아한다. 해운대, 광안리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면 기타로 연주하며 홀로 노래하는 가수도 있고, 밴드를 포함하여 공연을 하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직업으로서의 음악가'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예술하는 사람들은 화려하고 멋있을 거 같은데 그들만의 고충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읽어 보았다. 이 책은 싱어송라이터 김목인씨의 일 년 과정을 적은 내용이다. 특이한 것은 음악가들은 1월에 행사가 없다는 거다. 책 표지도 예쁘다. 음악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음표가 그려져 있다.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은 소설가든 음악가든 메모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열린책들 블로그에 김목인씨 강연 소식이 있긴 하지만 서울, 경기도여서 가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다.

 

 

 

 

프롤로그

나는 음악을 한 지 15년쯤 되어 가는 싱어송라이터다. 초반에 밴드로 시작해 5~6년쯤 활동한 뒤부터는 솔로로 활동해 오고 있다. 햇수로 정확히 모르는 것은 대부분의 일들이 페이드인으로 시작해 페이드아웃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취미와 일의 경계 어느 지점에서부터였고, 혼자 활동하게 된 것도 <어느 날 보니 혼자 공연을 하고 있었다>.말하자면 공식적으로 활동을 쉰 기간이 없는 셈인데. 그래도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여전히 <공연은 언제 하나요?>라고 묻곤 한다.

목 차

1.싱어송라이터, 나의 직업

2.공연의 계절

3.작은 가게와 음악가

4.작업, 또 작업

5.앨범 녹음 일지

음악가들에게 1월은 일이 없는 달이다. 서로 비집고 들어가려는 파티처럼 북적이던 연말도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약속이나 한 듯 조용해진다. 중순쯤 연주자들과 통화해보면 <보릿고개지요, >하며 겸연쩍게 웃는데, 이런 사정은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나는 이 1월이 좋다. 하얀 눈밭 같은 1, 아무도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해에는 내가 그 위에 먼저 발자국을 찍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연 제안이나 외부에서 오는 연락은 보통 2월부터온다. 그건 우리의 일이 사회의 다른 분야와<시소>처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한쪽이 심각해지면 한쪽은 느슨해진다. 만일 회사들마다 시무식을 공연 관람으로 대신한다거나 모임마다 작심삼일을 이겨 내려고 파티를 여는 게 유행이라면 음악가들도 1월이 분주할 것이다. 하지만 연초는 사람들이 한창 일에 집중하는 시기이고, 우리는 연말에 쉬지 못한 한숨을 이때야 비로소 쉰다. 그러면서 우리의 일이 다른 이들의 <휴식>과 연관되어 있다는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나 역시 남들 놀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 쉬는 셈 치고 1월을 여유롭게 보낸다.

 

 

싱어송라이터란 <싱어singer><송라이터songwriter>를 나란히 붙인 말이다. 즉 노래하는 이와 노래를 만드는 이가 합쳐진 단어이다.

 

싱어송라이터는 <작곡하는 가수>이지만 거꾸로 보면 <무대 위에 노출된 작곡가>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음악을 그 자체로도 즐기지만 음악가 개인의 인간적 면모와 연결지어 즐긴다. 겉보기에 슬픈 노래이지만 작곡가의 우스운 사연을 알고 미소 짓는 관객들도 있고, 한 음악가가 어두운 시기를 딛고 쓴 곡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곡을 더 사랑하는 경우도 있다. 즉 싱어송라이터 음악은 개개의 작곡가가 펼치는 모노드라마 같은 음악이다. 음악뿐 아니라 싱어송라이터의 행보, 그 사람의 캐릭터(셔츠나 말실수 등)가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글을 쓴다기보다 말을 하듯 하는 것이다. 메모가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이라면 우리는 비록 머뭇거릴지라도 몇 마디 정도는 충분히 이어갈 수 있다. 게다가 말하는 것은 노래 만드는 것보다 평상시에도 더 많이 하는 일이라 이야기를 이어가야 할 때 좋은 기준이 된다.

 

 

 가령, 노랫말을 너무 글처럼 생각하면 기승전결을 맞춰야 할 것 같은 작위적인   상항에 빠진다. 대신 말하듯이 생각해보면 <>,<그렇단 말이지>,<글쎄>같은 문구가 막혔던 부분을 절묘하게 해소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한참 노래를 쓸 때는 공간을 울리는 우렁찬 피아노 소리 같은 것은 없다. 열심히 초고를 출력하고 있으면 아내가 다가와 당신은 프린터로곡을 쓰느냐며 놀린다. < , 기타 줄 갈기 전에 A4용지부터 사와야겠어>라고 말하며 출력물을 들여다본다.

 

 

공연 안 할 때는 뭘 하시나요?공연이 확정되면 당일까지 이것저것 세부 사항들을 정한다. 작은 공연은 보통 기획자가 한꺼번에 정리해 알려 주지만, 큰 공연은 서로 여러 번 연락을 거치며 정하기도 한다. 가장 먼저 정하는것은 외부에 공개되는 정보들이다. 반면 비공개로 느슨하게 정하는 것들도 있는데, 리허설 시간이나 출연 순서, 팀당 공연 길이 등이다. 공연자 쪽에서 미리 준비할 것은 셋리스트이다. 연주할 곡과 순서가 적힌 이 목록으로 기획자는 현장에서 공유할 큐시트를 만든다. 스태프가 조명가 등퇴장까지 섬세히 체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공연은 곡의 음원이나, 곡별 연주 길이, 연주 영상까지 보내기도 한다.

 

앙코르는 외형상 하나 더 베푸는 보너스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관객이 <한 곡 더!>를 외치면 연주자는 잠시 뜸을 들이거나 퇴장했다 다시 나와 한 곡 더 연주하는 아량을 베푼다. 공연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묻는 자리에서 종종 이 앙코르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 마지못한 표정으로 앙코르 하는 거, 진짜인가요? 연기인가요? 앙코르를 예상하신 건가요. 아니면 정말 당황하신 건가요?]사실 많은 공연자들이 앙코르까지 연출에 넣는다. 하지만 자신이 인기가 좋을 걸 예상해서 그런다기보다는 공연에서는 끝마무리가 중요하고, 실제로는 앙코르까지 그 끝마무리에 포함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해진 곡을 다 했다 해도 끝을 잘 마감해 주지 않으면 공연에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남긴다. 앙코르는 그저 덤일 때도 있지만 나름 섬세한 감정 조절의 기술인 셈이다.

 

내가 일하며 깨닫게 된 생각이 하나 있다면 음악가와 제작사는 어디까지나 <신뢰를 쌓아 가는 좋은 협업 관계>여야 하고, 일을 중심으로 쿨하게 만나고 헤어졌다. 또 만날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음악가는 제작사와 일할 생각이 있다면 <영원히 안식을 취할 곳>을 고르듯 기대하는 것보다는 서로 인생의 한 시점에서 필요한 것들을 얘기하고 조그만 성과 한 가지를 내본다는 생각으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흥행이 좌우하는 이 일의 특성상 결과가 어떨지는 보장할 수 없다. 하지만 협업의 과정이 어느정도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면 이후에 다시 좋은 프로젝트로 만날 수가 있다

 

<작은 가게로서의 음악가>는 몇 년 전까지 내 머릿속에 자주 맴돌던 개념이다. 이 비유가 음악가라는 내 직업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음악가는 개인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가게에 가깝고, 다만 그 가게가 투명해 보이지 않을 뿐이라는 논리.

 

동료 블루스 음악가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아주 공감한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당연하죠. 그것도 아주 쪼끄마한 구멍가게죠.] 이것을 소재로 공연도 한 번 했다. [소극장 콘서트-작은 가게와 음악가] 공연의 기획자는 극장 대표님도 자주 그런 말씀([우리 극장이야 뭐 구멍가게죠])을 하셨다며 반가워했다. 나는 음악가란 직업을, 신곡을 하나씩 개발해 손님(싱어송라이터 이랑이 맡았다)에게 메뉴로 내는 식당 정도의느낌으로 연출했다. 많은 음악가들이 자신을 한 명의 개인으로만 생각한다. 음반사를<회사>라고 즐겨 부르며 종종 자신을 직원으로 착각하는 것, 그리고 <문화 노동자>라는 말에도 기본적으로 개인이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 하지만 가만 보면 우리는사업장이 투명한 나머지 종종 스스로를<개인>이라고 착각하는 가게들이다. 나 자신만 해도<김목인>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하는 가게라고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좀 더 명확해진다.

 

도대체 작업이 무엇이기에

하루쯤 작업을 안 한다고 몸이 아프거나 입안에 가시가 돋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업을 못 한 날에는 작업이란 것이 내게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적잖은 시간을 워밍업만 하다 날려 보내거나, 차라리 하루쯤 머리를 비우고 쉴 걸 그랬나 싶게 작업 태세만 갖춘채<불완전 연소>했던 날들도 많았다. 불도 안 붙고 안 좋은 연기만 풀풀 나던 그런 날들. 게다가 힘든 건 그런 날들 마저 불규칙했다는 것이다.곡이라는 것이 몇 단위로 쪼개어지고, 진행표에 적을 수 있고, 착수할 때마다 진척이 있다면 조금씩 꾸준히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거의 완성된 곡은 나름의 구조가 생겨 오늘은 1, 내일은 2절 그런 식으로 나눌 수도 있지만, 스케치 단계의 곡은 뭐가 될지 모를 모호한 덩어리로 좀처럼 움직이지 않을 때가 많다.

 

보컬 녹음의 고독

노래의 윤곽을 잡아 주는 주요 악기 녹음이 끝나면 보컬 녹음에 들어간다. 보컬 녹음은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린다. 몸 상태에 영향을 많이 받는 데다가 듣는 사람에게도 가장 섬세히 들리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많이 불러 본 노래라도 여러 번 부르며 좋은 테이크들을 찾는다. 앨범을 위해 새로 쓴 곡들의 경우에는 아직 분위기를 정하지 못해 헤매기도 한다. 그래도 몇 번의 앨범 녹음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았다.첫 곡으로 가사가 짧은 곡을 골랐고 예상대로 금방 해냈다. 예감이 좋았다. 하지만 두 번째 곡 부터 슬슬 헤매기 시작하더니 결국 다음 날로 넘기고 말았다. 이틀째가 되자 만회는커녕 익숙해지기 위해 여러 번 연습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루에 몇 곡씩 녹음할 기세로 와서 연습만 하고 간다는 것은 상당히 맥 빠지는 일이다.

 

에필로그

앨범이 발매된 후 몇 달 동안 각종 인터뷰를 했고, 콘셉트와 제작 과정에 대해 길고 자세한 설명들을 했다. 라디오에서는 신곡을 연주했고, 엄청난 부담감 속에서 발매 공연도 치렀다. 무대에서는 어떻게 이리도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와주었을까 싶을 만큼 과분한 축하를 받았다.

201831일 상은 못 받았지만 감사합니다

어제 저녁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 다녀왔고, 결국 상은 받지 못했습니다.^^4개 부문이나 올랐었기에 기대가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고, 어쩌면 제작진과 연주자들에게 좋은 선물 하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습니다. 프로듀서와 A&R, 연주자들, 디자이너, 엔지니어, 피처링 해준 동료들과 뮤비팀까지....., 무대에서 했을지 모를 감사 인사를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전합니다. 또 힘들게 번 돈을 쪼개어 항상 공연장을 찾아 주시는 관객분들께도 여기에서 깊은 감사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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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가들 -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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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만 보내준다는 말에 얼른 신청을 하였다. 완성본이 아닌 가제본으로 왔는데 책을 펼쳐보고 한 번 놀랐다. 가제본에는 4부까지 실려있다. 신기하게도 읽다보니 재미도 있다. 불운했던 시대의 법조인들의 이야기지만, 한국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다가 떠오르는 생각, 읽다가 그만 두었던 태백산맥을 완독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저자 소개: 김두식》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군법무관, 서울지검 서부지청 검사, 변호사로 일했다. 코넬대 로스쿨에서 석사학위(LL.M.)를 취득한 후 한동대 법학부 교수를 거쳐 2006년부터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형법, 형사소송법, 형사정책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은 『헌법의 풍경』을 비롯해 『평화의 얼굴』 『불멸의 신성가족』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불편해도 괜찮아』 『욕망해도 괜찮아』 『공부 논쟁』(공저) 등 몇권의 책을 썼다.

 

프롤로그
한국 현대사에 정통한 독자들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나온 이름의 태반은 금시초문일 것이다. 이들은 해방을 전후한 시절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인재들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철저하게 망각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법조계만큼 종사자들의 자서전이 많은 직역도 드물다. 그러나 해방공간에 관한 기록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좌익과 중도에 속한 사람들이 거의 사라졌으니 그나마 남아 있는기록도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좌익경력을 가지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자기 과거에 대해 철처히 함구했다.(중략)이 책은 바로 그 껄끄러운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방후 우리나라 법조 직역의 형성과정을 복원하려는 시도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매우 간단하다. 김영재 강중인 조평재 윤학기 백석황 이정남 같은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나? 이들은 누구였고, 일제시대 무엇을 했으며, 해방공간에서 어떤 꿈을 꾸었고, 그 꿈은 왜 좌절되었나? 초창기 혼란 속에서 만들어진 법조계의 기본틀은 우리에게 어떤 유산을 남겼나?

1부는 1937년 합격자들을 중심으로 일본 고등시험 사법과 제도를 탐구했다. 바로 제1법률가군 이야기다. 안동지역 유수의 독립운동가 가문과 친일 가문이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당시 현실을 잘 보여준다. 다들 빈곤한 시절이었으므로 합격자라면 누구라도 자신을 역경의 승리자로 포장하고 싶었겠지만, 객관적인 자료들을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고등시험 합격자 중에는 유난히 면장집 아들이 많다. 당시 기준으로는 사회경제적으로 최상층부에 속했다. 부잣집 출신일수록 상급학교에 진학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시대다. 재력은 거의 그대로 학력에 반영되었다. 개천에서 난 용은 허상일 뿐 실체가 아니었다.

2부는 일제시대 '이류' 법률가로 취급 받았으나 해방이후 고등시험 사법과 출신과 함께 법조계의 가장 중요한 뼈대를 형성한 조선변호사시협 출신들의 삶을 다뤘다.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허헌 변호사의 인생을 살펴보았다. 판검사를 거치지 않은 순수변호사의 아버지 격이던 허헌은 해방후 좌익과 중도진영의 지도자로 변신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김일성종합대 총장 등을 지냈다. 그가 왼쪽으로 기울게 된 뿌리를 탐구하는 것은 해방공간 좌익진영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3부는 해방으로조선인 법률가들에게 벼락처럼 찾아온 새로운 기회를 이야기한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일본인 판검사를 재판에서 배제하고 조선인 법률가로 그 자리를 채웠다. 고등시험 사법과 출신들과 조선변호사시험 출신들은 이른바 자격자로서 가장 먼저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미래가 보장되었던 이들의 임용과정에서 친일경력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인맥과 운이었다. 삼팔선 이북지역에서 해방을 맞이한 판검사들은 월남시기에 따라서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했다.

4부는 해방공간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을 일거에 불법화시킨 1946년 5월의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이야기 한다. 조선정판사'위조지폐'사건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단일사건이 아니었다. 조선정판사 사건에 앞서 우리 법조계는 '김계조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김용무 대법원장, 이인 대법관 등 한민당 세력이 장악한 법원과 검찰은 첫 판검사 임용 때부터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받았다. 오승근 판사, 백석황 검사로 대표되는 좌익 또는 중도성향의 법률가들은 '김계조 사건'을 계기로 이 상황을 바로잡고자 했다.

5부는정부수립을전후해 법조계에서 벌어진 각종 좌익 관련 사건을 다룬다. 1947년 12월 '사법기관 내의 남로당 프락치'로 구속된 남상문 홍승기 서범석 등 이른바 '적색 사법관' 사건,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진압의 한복판에서 군경에 학살된 순천지청 박찬길 검사 사건, 1946년 7월의 서울지방검찰청 김영재 차장검사 사건, 그해 12월의 2차 '법조프락치'사건, 1950년 3월의 이홍규 검사 사건 등은 좌익을 박멸해야 한다는 극우세력의 편집증적 집착과 권력욕구가 만들어낸 '관제 빨갱이'의 대향연이었다. 이 책은 남쪽 출신과 북쪽 출신의 지역적 갈등도 이 사건들의 조작과 과장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추정한다.

6부는 한국전쟁이라는 쓰나미가 법조계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병로 대법원장, 김갑수 내무부차관 같은 극소수의 고위직 법조인들은 비교적 빨리 피란길에 올랐다. 유병진 판사, 오제도 선우종원 검사 같은 월남민 출신들도 본증적으로 위기를 감지하고 한강을 넘었다. 피란 중에 김갑수, 오제도는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과 그 '처리요령'을 만들어 부역자 처벌을 준비했다.

7부는 이른바 '이법회'또는 '의볍회' 문제를 발굴함으로써 초창기 법조계 5년의 역사가 오늘에 끼친 영향을 설명한다. 1945년 해방 당일에 시행 중이었던 조선변호사시험의 응시자들은 일본의 항복으로 시험을 끝마치지 못했다. 4일간 치러질 예정이었던 시험이 2일차 정오의 항복방송과 함께 중단되고 일본인 시험관들이 사라져버린 까닭이었다. 응시자들은 궁지에 몰린 일본인 시험위원회를 압박해 합격증을 받아냈다. 응시사실만 있으면 모두 합격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결성된 이법회 구성원들은 해방후 각종 시험에서 필기시험을 면제받아 초창기 법조계의 가장 중요한 인력풀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법회 구성원들이 그경력을 감췄기 때문에 전체적인 규모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누구나 그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조직이었다.

 

프롤로그만 간단하게 적어도 많은 분량이다.1932년도 월급에 대한 대목만 옮겨 보았다.

 

국내 독립운동이 혹한기를 맞아 지하로 들어간 대신, 경성을 중심으로 '모던'의 시대가 꽃피기 시작했다. 1932년 4월 경성제대를 졸업한 김영재는 일단 취업부터 해야 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재학시절에 이미 결혼한 김영재에게는 아내와 아들이 딸려 있었다. 화려한 학벌이었지만 대공황 직후의 조선에서는 그럴듯한 일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그해 5월 15일 김영재가 찾아 들어간 직장은 경기도청이었다. 월급 65원을 받는 '고원(雇員)' 자리였다. 관청에서 임금을 받고 사무를 돕는 고원으로 일하다보면 판임관에 해당하는 '속(屬)'이 될 수 있었고 오래 근무하면 고등관 승진도 가능했다.

 

실제로 경성 제대의 많은 졸업생들의 법원의 서기나 지방관청의 하급관료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1920년대에는 관립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하급관료인 판임관이 될 수 있었지만, 1930년대에는 학력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행정부로 갈 경우에는 고원부터 시작해야 했다. 똑같은 고원이라도 학력에 따라서 초임월급이 달랐기 때문에 경성제대 출신 김영재가 받은 65원은 동일직급에서 최고수준이었다. 중등학교를졸업한 조선인의 고원초봉은 30원, 전문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은 40원, 일본의 사립대를 졸업한 조선인은 45원에 불과했다. 월급 65원의 경기도청 고원은 당시 조선 상황에서 결코 나쁜 자리가 아니었다. p49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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