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제2국면 - 코로나 롱테일, 충격은 오래간다
우석훈 지음 / 문예출판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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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7월 8일 0시 기준 신규 확진자수 1,275



1년 전, 2020년까지만 하더라도 전염병 관련한 책들을 탐독했다. "포스트 코로나"가 키워드라면 최소한 책제목과 목차 스캔이라도 했다. 대변환의 흐름에 넋놓고 쓸려가서는 안 되겠다는 조바심, 그리고 팬데믹으로부터 회복할 세계에 대한 기대감이 엉켜 있었다. 그러나 2021년 2분기가 시작되었어도 여전히 코로나 소식이 뉴스생방송 1번 꼭지로 등장한다. 심지어 "1,275명"이라는 믿기 어려운 숫자까지. 피로감이 몰려온다. 사명감도 떨어지고, "포스트 코로나" 진단을 내놓는 전문가들의 혜안도 별로 궁금하지 않다.   




'"전염병 X"가 그렇게 빨리 2019년에 올지 예측도 못했는데,  "포스트 코로나 시대" 10년 내다보기 한다고? 전망한다고 흐름을 틀지는 못할 테고, 휩쓸려가지 뭐!' 이런 게으른 협상으로 2021년엔 코로나 관련 책들을 일부러 더 멀리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집은 책이 경제학자 우석훈의 [펜데믹 제2국면]. 한 자리에서 다 읽고, 두번 째 읽을  때는 강의 받아적듯 정리했다. 적어도 내게는 굉장히 좋은 책이다. 많은 분께 알리고자, 무거워진 손가락의 지방을 이기고 자판을 두드린다.  


펜데믹 선언 초기에, 우석훈 교수에게 집필요청이 쇄도했다. 마침 '팬데믹경제학' 자료를 모으던 그였지만, 출간시기 조율에 신중했다. 그는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 이후'를 생각한다는 것이 내 양심에 맞지 않았다."(9)라고 썼다. 속공 대신 지공을 선택한 그는 팬데믹으로 인한 롱테일 long-tail현상을 추상적 논의 차원이 아닌, 현장성을 가미해 쓰고자 했다. 미래형 문장이 아닌 현재 진행형 시제로. 그래서 제목도 [펜데믹 제2국면]이다. "제 2국면"은 바로 2021년 이 시점, 선진국 우선으로 백신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국가간 불균형이 벌어지는 시점이다. 



우석훈은 코로나의 긴꼬리(Long-tail)가 길게 4년 이상 갈 것이고, 이후 '코로나 균형'이 이뤄질 것이라 전망한다.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터인데,  그렇다고 국민 모두가 고급 세단을 타게된다는 뜻이 아니다. 4부 소제목이 "부자 나라의 가난한 국민"인데, 우석훈은 이를 "험한 산길 달리는 만원 버스"(161)에 비유한다. 좌석에 편히 앉은 사람은 부자와 공직자이며, 서서 가는 자들은 청년과 가사노동자.  멀미 때문에 중도 하차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은 대학비정규직 강사나 문화경제 분야 종사자 등이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강화된 국가주의 및 "서울자본주의" 그리고 경제권력의 폭주를 방관해서는 소수의 착석자와 다수의 입석자 혹은 중도하차자로 인해 무늬만 선진국 꼴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우석훈은 경고한다. 


특히 2부에서 우석훈은 국민의 감시가 집중되어야 할 틈새를 명확히 타케팅해주는데 바로 재난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의 전형들로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스마트 의료'라는 용어로 새롭게 포장한 원격진료 tele-medicine, 또 다른 하나는 '수소경제'이다. 둘다 이미 진행형이다. 우석훈이 '수소계의 헤리티지 재단'이라고 비꼬는 '수소융합얼라이언스추진단'은 수소경제로 이익보는 세력들과 퇴직 공무원을 주축으로 한다. 

관련해 우석훈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해본다. 


  • "행정부는 비대면 진료 정책을 코로나 극복에 기여한 의료계에 주는 선물로 포장했다. 이전에 비대면 진료를 시급하게 추진하지 않기로 사회적 합의의 가닥이 잡힌 것은, 주치의 제도 지역거점 병원 체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안전 장치를 마련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있기 때문이었다 (103)."
  • "수소경제가 코로나 대응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 대책이라는 데는 찬성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재난자본주의다 (111)."



펜데믹 제 2국면, 제 3국면 그리고 코로나19의 삼촌과 사촌 펜데믹들이 또 도래할지 모르는 미래를 대비하며, 사람을 먼저 살리고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꿈꾸는 경제학자 우석훈. 그의 책을 처음 읽어보는데, 앞으로도 그의 제언들에는 귀를 쫑긋 세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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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작품 해설과 함께 읽는 작가앨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고정순 그림, 배수아 옮김, 김지은 해설 / 길벗어린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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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이모 댁 방문이 즐거웠던 이유는 이모 댁 서가에는 안데르센과 그림 형제의 작품 중 미처 읽어보지 못한 책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른들 담소가 계속되길 바라며 사촌들과 놀지도 않고 탐욕스럽게 읽어댔는데, 정작 책 제목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중 한스 안데르센의 [그림자] 도 읽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나이테가 훨씬 두꺼워진 후 읽었어도 정서적 충격이 큰데, 유치원생 때 읽었다면 분명 또렷하게 기억했을 것이다. 


고 나니 씁쓸하고, 음울하고, 섬뜩한 느낌이 확 올라온다. 

마지막 문장이 압도적이다. "학자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학자를 죽인 것은, 학자의 그림자이다. 물질적 부, 명예, 생존에 필요한 교활한 셈법과 다중인격의 무기화라는 면에서 학자 본인을 능가하는 제 2의 자아다. 자기 자신에게 살해당하는 결말이라니! 


학자는 세계의 진실, 아름다움, 선함을 글로 써왔지만 아무도 읽어주지 않았다. 학자의 그림자는 시의 여신의 뜨락에 잠입해서 많은 것을 알았고 사람들의 이중성도 간파했고, 그 이중성을 어떻게 역활용할 수 있는지도 알아냈다. 그림자는 세속적 명성과 부를 얻었고 주인이었던 학자에게 일종의 침묵수행을 요구했다. 관계 역전. 그림자는 점점 세력이 커져갔고 학자는 그림자의 어둠이 세계를 덮칠까봐 진실을 밝히려했다. 그런데  "학자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아동청소년 문학 평론가 김지은의 해제를 읽어보니, [그림자]야 말로, 한스 안데르센의 내면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 있는 작품이라 한다. 김지은은 이렇게 말한다. "그림자의 힘이 커질수록 피폐해지는 학자의 모습은 작가로서 정점에 오른 1846년의 안데르센과 명망을 얻자 위축되어버린 진실한 예술가 안데르센의 자화상"이라고. 그림자와 학자의 지위역전에서 김지은 평론가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목숨을 건 인정투쟁을 이야기한다. 


안데르센의 작품이 화려하면서도 삶의 핵을 드러낸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림자]를 읽고나니 그동안 내가 안데르산 작품의 표면만 훑어왔나 자기검열 하게된다. 그림자의 힘이 초심을 압도해감을 감지할 수 있었던 안데르센의 순수함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작가 안의 도플갱어가 확산형 파워를 발산하며 명성을 먹는 나방이 된다는 두려움, 지켜야할 '순수(?)한 초심'이 그런 확산형 욕망과 싸우는 경험, 아무나 못해보는 것 아닌가!  안데르센급, 이름 자체가 주석이 되는 작가들의 고민 영역이지 않은가. 부럽다. 그리고 작가로서 안데르센을 더 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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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07-08 00: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구미가 화악 당깁니다. <목숨을 건 인정 투쟁> 이 표현 넘 멋지고 무서버요. <명성을 먹는 나방> 캬!! 나를 잡아먹는 그림자의 다른 버전. 북사랑님 어록 터짐요. 저 역시 안데르센은 작가로 인간으로 알고 싶은 분. 같이 알아나가 볼까요??^^

얄라알라 2021-07-08 11:11   좋아요 2 | URL
ㅎㅎ 별말씀을요. 5월 6월 읽은 책이 다섯 손가락 꼽을 지경이라 어록은 커녕 기초어휘도 잊었어요^^7월엔 분발각!!!

같이하자는 말씀은 언제나 정겹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우주로 출근합니다 - 놀랍도록 유쾌한 우주비행사의 하루
마리옹 몽테뉴 지음, 하정희 옮김 / BH(balance harmony)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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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우주국(ESA) 선발 우주비행사의 24시, 365일만 그려낸 것이 아니라 이면에 작용하는 국제사회 힘의 정치, 복잡한 셈법까지 포착해낸 멋진 작품. 알고보니 <부자 사회학>의 바로 그 저자구나! Marion Montaigne, 이름 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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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07-06 1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두 접수. 찜!!!^^
 


한 달 째 서가에 모셔만 둔 책들 뽀개는 날. 6월 22일. 각 잡고 읽기.




 "나는 통증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면 이러한 시도와 접근 방식이 전제하는 사유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 나는 통증의 개념보다는 통증을 왜 연구해야 하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문제인데도 왜 금기시되어 왔으며, 왜 덜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정희진 32)"



정희진 선생님이 "통증 연구, 연구"라는 단어를 썼기에 여기서 생각을 이어가 본다. 경험 나눔의 차원이 아닐 때, 즉 논문의 형식미를 갖춘 "연구"일 때도 정의를 포기해야 하는가? 조작적 정의 시도라도 해야 다음의 절차가 풀리지 않는가? 일단, "연구"의 장에서는 용어에 대한 정교한 구분을 하지 않고서는 논의의 신뢰성과 권위를 확보하기 어렵지 않던가?  고백하자면, 나는 "고통, 통증, 아픔," "질병, 질환, 병" 이 용어들을 구분해서 적재적소에 쓰고 있는지 자기검열하다가 잘 몰라서, 그냥 '아몰랑' 하기도 한다. 


▶정희진 선생님 말씀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선생님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문제인데도 왜 금기시되어 왔"는지 궁금하다 하셨는데, 통증이 화제어로 금시시 되어 온 것이 시대나 사회를 떠나 보편적 경향인가? 통증이 너무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굳이 '언어화' '문제시화' 하지 않는 사회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통증을 수반한 통과의례를 일종의 문화적 '주민등록증' 삼는 사회에 대해, 외부자적 시선들은 호들갑을 떨고 새디스트니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느니 하는 주석을 남기지만, 정작 그런 통증을 살고 있는 이들은, 그 통증을 대상으로 '논문'을 생산해내지 않는다. 



"고통과 몸은 내 인생과 공부의 평생 동지인데 '동지'들은.... (정희진33)"

- 올리버 색스

- 엘라지베스 퀴블러 로스

- 오오누키 에미코 

 


정희진 선생님도, '동지' 리스트에 올리버 색스 선생님을 맨 앞에 올리셨습니다. 2021년 1분기를 올리버 색스 글들 탐닉하며 보냈던 저에게도 이 분은 경이로운 마인드 그 자체. [중독 인생] 읽고 난 지금에서 생각해보니, 이 분이 마약에서 벗어난 것도 기적이네요. 깊은 탐닉에서 어떻게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경이로움. 


▶ 오누키 에미코, 정희진 선생님 덕분에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봅니다. "쌀"의 상징적 의미 연구한 짧은 책만으로 끝낼 뻔했는데, 일본이 아니라 미국에서 활동하시는군요. 게다가 연구 영역이 굉장히 폭 넓으시네요. 제목만 봐도 당장 읽고 싶어집니다.


        





 "지금 이 글도 작은따옴표와 괄호투성이인데 일종의 협상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몸에 대한 소유격이나 대상화가 전제된 나'의' 몸, 몸에 '대한'.... 같은 표현을 최대한 피하려고자 노력하지만 가독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43)'


▶"문화" "신'  "종교".....소유격을 씀으로써, have동사 be동사를 씀으로써 산으로 바다로 가는 추상어들이 많죠. 그럴 때마다 작은따옴표를 친다면, 바다 너머 안드로메이다로.....저도 마찬가지의 고민 종종 해보았기에 격 공감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탈코르셋' 운동과 거리가 있다. '탈코르셋'은 기본적으로 젊은 (중산층) 여성의 몸을 전제로 한 것이다. 물론 대단히 중요한 여성주의 실천이지만 통념과 달리 모든 여성이 규범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44)"


오호! "탈코 탈코"하는 친구들 이야기에, 제가 심드렁한 태도를 감추기 어려웠던 이유를 이제 알겠네요?^^




"용서의 또 다른 어려움은 사건은 구조적이되(정치학), 용서는 개인의 몫(심리학)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56)."

"나는 용서 지향적 사회보다 '평등한 복수'가 가능한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 이것이 먼저다. (57)"










 "모두가 작가인 이 시대에 고통이라는 주제는 '사연팔이'라는 최근 출판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60). 이 책의 문체에는 당사자, 연구자, 운동가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무너져 있다. 여성주의 글쓰기의 모델이 아닐 수 없다... '연구'가 아니더라도 취약한 처지에 있는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63)." 


"돌봄 윤리를 제안하는 여성주의 연구와 여성주의자의 일상 사이에 생기는 불가피한 괴리 (61). 보살핌 노동의 가치와 보살핌 노동자의 처지는 다른 우주이다. 논문을 쓰고 있는데, 공부를 해야하는데, 생계 활동을 해야 하는데, 어머니, 아버지, 자녀를 간병해야 하는 여성들이 있다 (66)." 




▶ 언어의 맛이라는 것이 참 신묘합니다! 최근 "질병서사 illness narrative"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많이 쓰이더라고요.  정희진 선생님 글에서 갑자기 "사연팔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니  흥미롭습니다. 텍스트의 홍수라는 현상은 동일한데, 한 편에서는 "서사narrative"로 장르화해주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사연팔이"라고 편히 불러주기도 하네요.


 "고통의 문제는 페미니스트들이 그토록 강조해 온 상황적 지식 situated knowledge여야만 한다. 맥락 없는 언어는 폭력이다 (84)." 

"글쓴이의 위치성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면 남의 고통을 팔거나 나의 고통만 중요한 글이 된다. 고통의 공감 불가능성 때문이다. (86)"


"나는 당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는 다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90퍼센트의 사람들은 자신감이 없고 우울하다. 10퍼센트의 사람들은 근자감과 조증 기운이 넘친다. 자신감이 물리력, 폭력, 권력인 시대다 (93)"






"주체는 개별성으로 인식되지만 타자는 집단으로 지칭된다... 페미니즘을 '하나'로 사고하는 자체가 성차별이다." (150)

















"학문과 사회 공동체의 관계는 늘 논란거리지만, 논문의 내용과 주장을 사회적 의미, 역할, 기여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논문과 '잡문'의 차이는 글의 형식이 아니라 '품질'로 구별되어야 하지 않을까? (191)"




"각자의 '봉쇄 일기'를 기다리며: 팬데믹의 원인은 돌봄노동(살림)을 비하하고 자연파괴(죽임)을 추구해온 인간의 경제 활동이다 (209)."





"남성 중심의 근대 국가는 여성의 몸을 자기 실현의 그릇으로 삼았꼬, 이처럼 남성의 시선에 갇힌 여성의 재생산 능력은 '능력'이 아니라 여성을 기아와 죽음에 이르게 한 '저주' 였다 (230)."


"근대 국민 국가의 성립이 여성의 성과 재생산 통제를 가져온 것은 필연이었지만, 여성주의 연구자가 탐구해야 할 것은 젠더가 근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여성 억압 현실이 어떻게 근대와 자본주의를 만들었는가?"로 나아가야하지 않을까?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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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6-2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훗~ 각잡고 읽으셨습니까?ㅎㅎ

얄라알라 2021-06-23 07:30   좋아요 0 | URL
네^^ 어제 책 3권 읽었거든요. 눈동자가 잘 안 돌아가더라고요. 눈에 각을 잡았나봐요^^;;;;; 쉬엄쉬엄해야하는디, 20대때로 착각했어요 ㅋ툐툐님 굿 모닝 하시어요^^

청아 2021-06-2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장 깨기아닌 모셔둔 책 깨기 입니까? 멋져요!!!😆

얄라알라 2021-06-23 07:29   좋아요 1 | URL
50일 정도 책을 안 읽었더니, 모든 책들이 ˝모셔둔 책˝이 되버렸네요. 미미님 좋은 아침 시작하시길^^

단발머리 2021-06-22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딱 각잡고 준비하셨는데요!! 통증연대기는 반갑고요ㅋㅋㅋㅋㅋ 저도 다른 책 찾아봐야겠어요!

얄라알라 2021-06-23 07:29   좋아요 1 | URL
저는 이 책에서 소개해주신 책 중 2권만 이전에 읽어보았더라고요 통증 연대기는 단발머리님께서도 추천하시는 거니, 오늘 목차라도 꼭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어요^^
 
누런 벽지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 내로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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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이면 읽을 책을 한 달이나 방치한 이 심보는 무엇이었나? 알라디너분들께 추천 많이 받다 보니, 읽은 듯 친숙했던 탓일까? 자전적 소설에 감정이입함으로써 에너지가 소모된 후의 폭풍을 미리 걱정했던 것일까? 




 [누런 벽지]를 읽고, 두 가지 점에서 안도했다. 


1. 먼저, 아름다운 한글에 "누렇다"라는 형용사가 있어 다행이다.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이 "아픈 역할 sick role"을 수행하며 미쳐가는 여성을 그려낼 때, 그 배경이 되는 방의 벽지색상은 "누런 색"이어야 했다. 상큼한 레몬색이나, 때 안 탄 병아리깃털 색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변색된, 들끓는 불결을 담은, 전반적으로 칙칙한, 군데군데 폭력적일만큼 선명한 오렌지 색이 섞여 있고 나머지 부분은 매케한 유황을 떠올리게 하는 (37)" 누런 색이어야 한다. 



"The color is repellant, almost revolting; a smouldering, unclean yellow, strangely faded by the slow-turning sunlight. It is dull yet lurid orange in some places, a sickly sulphur tint in others (36)"



2. "월간내노라"라는 작은 출판사의 기획이 성공예감이라 안도했다. '내노라" 팀(?)은 한달에 한 편, 영문 단편 소설을 번역해서 시리즈로 출간하고 있다.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를 선정해내고, 유려한 문체로 번역해내는 이들은 페미니즘, 영문학, 문화비평을 넘나드는 지적 모험가들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누런 벽지]를 읽고 분노했다. 


[누런벽지]가 자전적 소설임을 모르고 읽었다면 가스라이팅 실시간 중계 스릴러라고 착각했을까? 


아내는 "방 안에 갇힌 다 큰 아이"로 길러진다. 배려심 많은 남편이 돌보고 길러준다. 그 남편은 아내를 "꼬마 아가씨 little girl"이라 부르고, 아내에게 "바라는 만큼 한껏 아프라"고 축복을 내려주기도 한다. 심지어 의사이기까지 하다. 아내에게 신선한 공기와 양질의 먹을 것, 휴식을 선사해주며 아내의 건강 회복을 돕는 좋은 남편이라는 역할에 푹 빠져 있다. 이 연극이 잘 수행되려면, 아내는 아파야 한다. 남편의 돌봄을 더 격하게 필요하기 위해서는,  더 취약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노동(?)은 금물이다. 쉬어야 한다. 글을 써서도 안 된다. 아내는 남편의 시선과 기대, 자신에게 기대된 "환자역할"을 잘 안다. 역겹다. 누런 벽지만큼이나 닳아빠진 고정관념이 역겹다. 놀랍게도 이런 "방구석에 가두고 쉬게하기"가  19세기 특히 여성에게 많이 제안되었던 "휴식치료법 The Rest Cure"라 한다. 돌봄이 필요하지 않은 주체인데, 그 아내는 돌봄받아야만 온건해지는 환자, 객체로 좁혀진다. 존재는 확장이 아니라 오그라든다.



"사회적 단절", 2~3마디의 문장만으로 충분히 삶이 가능한 하루하루를 진공 속에 반복하던 때, 일하고 싶었다. 긴 문장을 뿜어내며 진공 밖 세계의 요철과 압박감을 느껴보고 싶었다.허나, 나를 방 안으로 끌여들였던 목소리는 노기를 띠었다. "네 그 욕심이, 애정결핍증후군 낳는다. 노란 바나나를 탐닉하는 걸 보니, 엄마됨의 부족함을 바나나의 달달함으로 채우려는 걸 보니, 너는 더더욱 집 안의 천사가 되어야 한다." 


나는 바나나를 최근까지도 먹지 않았다. 못 먹겠다. 누런 벽지를 다 뜯어낸 들, 세포 자체에 수분이 빠져나가는 이제 "집안의 천사"는 감지덕지의 역할인가? 바나나를 탐닉해야하는 건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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