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서 신선 채소를 묵혔다가 흐물흐물해져서 내버릴 때의 찜찜함에 비견할 것이 바로 대출한 책 읽다말고고 반납할 때의 기분. [조지 오웰의 길]은 160여 쪽. 한 손에 쏙 잡히게 얇다. 게다가, 2023년을 조지 오웰 탐색에 쏟았던 내게는 딱히 어려운 내용도 아닌데, 1/2지점에서 반납 알림 메시지를 받았다. 찜찜함을 참느니 다른 우선 순위의 일을 제끼고, [조지 오웰의 길]을 끝까지 읽는다.


글쓴이 아드리앙 졸므 (Adrien Jaulmes)는 종군기자상(2007)을 받은 <르 피가로> 특파원인데, 독특한 작가를 소재로 연재 르포르타주 documentary literature 써달라는 요청을 받자, '조지 오웰(에릭 블레어)'을 떠올렸다. 아드리앙 졸므는 제목 그대로 "흔적 Traces" 을 따라, 즉 작가의 삶에서 주요 사건들이 전개된 장소를 직접 방문하며 소회를 엮었다. 이런 서술 방식은 독자가 '조지 오웰'을 마치 동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인물로 친근하게 느끼도록 실재감을 부여해 준다. 그래픽 노블 [조지 오웰]을 인상 깊게 읽었던 나로서는, [조지 오웰의 길]이 공간화한 자서전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나는 '외모가 뭣보다 중하지!' 했던 어린 시절에, (외모상 호감 느끼기 어려웠던) 조지 오웰의 사진을 보고 작가를 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 때의 무례함을 몹시 부끄러워한다. 지금 나는 충분히 그를 좋아하고, 더 알고 싶어 한다. 두 대표작 [동물 농장] [1984]과 조지 오웰을 분석한 책을 읽어갈수록 그는 내게 점점 더 매력적인 인간이 된다.



오웰을 추앙하는 분위기를 못마땅히 여겼던 Een Judah는 "나는 왜 조지 오웰이 지겨웠는가"에서 오웰을 "복잡성을 거부하는 사상가"로 깎아내렸렸다. 하지만 역으로 쿠엔틴 코프는 "오웰의 지속적인 영향력은 그가 취한 입장들보다는 언어의 명쾌함과 높은 정직성" 때문이라고 칭송했다. 내가 막연하게 느꼈던 조지 오웰의 매력을 명료하게 정리해준 쿠엔틴 코프가 고맙다.

* *

오웰은 현학적인 문장을 설사하듯 쏟다가 정작 용기를 내야 할 땐 펜을 입에 문 채 웅얼거리는 비겁한 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설사하듯 글만 쏟아내느니 차라리 절필이란 변비를 택했으리라. 조지 오웰은 타협이나 굴종 없는 직진형 인간이다. 무려 이튼 스쿨 출신의 이력에 접시닦이, 서점 판매원 등등 저임금 비정규직이 나열되고, 전장에 나섰을 때 병적 직업란을 "식료품상"이라고 기재했을 정도로 그는 어렵게 살았다. 영국 경찰이라는 번듯한 직업을 그만두고 밑바닥닥 삶을 살면서도 가족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난이나 소외된 사람들의 세계를 미화하지도 않았다. 조지 오웰은 꾸밈 없이 정직한 작가였다. 나는 수식어 걷어 내고 사는 이 작가가 인간을 보는 눈을 [조지 오웰의 길]을 읽으며 상상해 본다. 두 가지 단서를 찾았다.



1. 에릭 블레어의 단편 <수행인 A Hanging>에서 작품 속 화자는 사형수를 교수대로 데려가던 중, 사형수가 물웅덩이를 피하는 걸 보고 곧 사형당할 그 역시 경관인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46쪽)


2. 에릭 블레어는 스페인 내전 당시, 적군의 전령이 손으로 바지를 움켜쥐고 참호 밖으로 달려가는 걸 보았으나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내가 방아쇠를 당기기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바지 때문이었다. 나는 파시스트들을 사살하러 왔으나 자기 바지를 붙잡고 있는 남자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그는 인간이다. 우리와 같은 개인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방아쇠를 당길 마음이 들지 않는다." (120)



[동물 농장]으로 조금씩 유명세를 치르고 있을 때, 에릭 블레어가 주라 섬(Jura)으로 요양을 떠난 이유로는 폐렴으로 인한 요양 목적뿐 아니라 작품 집필을 위한 시간 확보도 있었다. "언론이 난리를 쳐대서 말이야... 다른 책을 한 권 쓰고 싶은데, 그러자면 사람들이 나에게 전화를 할 수 없는 장소에서... 조용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적어도 6개월은 필요하다네."라고 친구에게 편지를 적었다고 한다. 그 외딴섬에서 조지 오웰은 [1984]를 썼고, 탈고하고 몇 년 안 되어 숨을 거두었다. 결혼한지 채 100일이 안 된 아름다운 신부, 소니아 브라우넬과도 안녕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기쁘다. 내가 어떤 작가를 신뢰하는지 뚜렷하게 알게 되어 더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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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5-22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가가 점점 더 좋아져요!
정직한 직진형 인간! 정말 멋진 말이네요~~

얄라알라 2023-05-22 00:31   좋아요 1 | URL
은하수님^^ 반가운 말씀이신데요 고맙습니다

조지 오웰이 몸도 좋지도 않은데, Jura섬에서 보트 뒤집혔을 때 아이들을 살려내고 신속하게 돌보았던 일화 역시, 이 분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마음에 없는 말씀을 안 하셨을 것 같은 작가님이라 더 좋은 거 있죠^^

새파랑 2023-05-22 07: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는건 너무 좋죠~!
그런데 조지 오웰 와모 정도면 호감형 아닌가요? ^^ 저 흑백사진 멋진데 ㅋ

은하수 2023-05-22 09:25   좋아요 2 | URL
멋진데다 얼굴에 장난기도 보이지 않나요?~~~ 그리고 정원가꾸기를 매우 사랑했단 것도 저와 같아서 더 좋아요^^

얄라알라 2023-05-23 09:59   좋아요 2 | URL
은하수님, 초록이들 돌보는 거 좋아하시는 군요?^^ 와, 저도 그래요.

조지 오웰은 조용히 강한 분 같아요 그래서 좋아요^^

자목련 2023-05-22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얄라알라 님 페이퍼 보며 책장에 읽어야 할 조지오웰의 책이 있다는 게 떠오르네요.

얄라알라 2023-05-23 10:01   좋아요 0 | URL
이웃님들 서재 마실다니다 보면
그래서 책욕심이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아요.
자목련님께서도 또 읽을 거리를 생각하셨네요^^ 즐독하실 기회가 찾아오기를 바라며

행복한 화요일 오전 보내시기를

은오 2023-05-22 2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에 ”외모가 뭣보다 중하지!“ 하시면서 오웰을 거르셨단 말씀을 읽으니까 갑자기 민음사판 이방인 표지가 떠오릅니다. ”작가 얼굴을 표지에 박으려면 민음사 이방인의 카뮈 정도는 되어야지!“라고 생각해요 저는 ㅋㅋㅋㅋㅋ 정말 손이 가게 만드는 표지 아닌가요?
좋아하는 작가가 생긴다는 거 정말 좋지요 ㅠㅠ 그 작가 작품 하나하나 섭렵하고 알아갈 생각 하면 정말 신나고 기쁩니다!!

얄라알라 2023-05-23 10:02   좋아요 0 | URL
네, 은오님.

좋아하는 작가가 생겨야 진정 본격 공부도 시작되는 듯 해요

제 친구는 좋아하는 프랑스 철학자의 원전을 읽기 위해 불어 자격증도 따고 프랑스어와 좌르좌르좌르....

좋아서 하다보니 힘들어하지도 않더라고요^^

기쁨을 공유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여기 이곳 책 좋아하시는 분들과
 


귀하고도 무거운 책을 보존서가에서 모셔왔으므로, 잠을 아껴서라도 합당한 예우를 갖추는 중입니다. 대여기간 12일 동안 내 집에 머무실 손님 이름은 [주석 달린 오즈의 마법사]!



청년기에도 꿈 속에서 노란 벽돌길 따라 자전거를 탔을 정도로 [오즈의 마법사]를 좋아했던 독자였지만, 막상 저자 L. 프랑크 바움에 대해 이름 빼고는 아는 바가 없네요. 평전을 찾았지만 절판이었습니다. 다행히 기억의님께서 매끈하게 정리된 리뷰를 남겨주셨어요(https://blog.aladin.co.kr/760031175/8307056). 그 글 덕분에 L. 프랑크 바움이 여성참정권 운동의 지지자였음을 알았습니다.


바움의 장모님이 마틸다 조슬린 게이지, 유명한 여성 운동가였다는 점은[주석 달린 오즈의 마법사]를 통해 추가로 알았고요. 아들만 넷을 두었던 프랑크 바움이 도로시처럼 주체적인 소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이유를 알겠습니다.


 바움은 어렸을 때 그림 형제니 안데르센 동화의 잔혹한 소재들을 싫어했답니다. 그래서 [오즈의 마법사]에서는 아이들에게 겁 주는 교훈적 요소를 배제하려 했다네요. 이는 서문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구식 동화들은 이제 어린이 도서관에서 역사적 산물로 분류될지도 모른다. 옛날 작가들은 독자들에게 겁을 줘 교훈을 전달할 목적으로 이야기마다 무시무시하고도 잔인한 사건들을 고안해 왔는데, 이제 이런 무섭고 잔인한 사건들은 물론이요, 지니, 못된 난쟁이, 나쁜 요정 등 구식 동화의 전형적인 캐릭터들도 죄다 없애 버린 신식 동화가 나올 시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Ø  오늘날에는 교육이 이미 도덕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요즘 아이들은 동화에서 재미만을 추구할 뿐, 불쾌한 일은 접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Ø  이 책이 경이와 기쁨은 고스란히 두고 고통과 악몽만을 없애 버린 현대적 동화가 되기를 바란다


두툼한 [주석 달린 오즈의 마법사]를 109쪽까지는 착실하게 읽었지만, 깨알 폰트 크기가 어지럼증을 유발시킵니다. 일단, 소개글까지는 파악했으니 쉬면서 천천히 손님접대 하겠습니다. 다시 보존서가로 배웅드리기 전까지, 최대한 자세히 손님을 알아가야겠어요. 


혹시 Munchkin을 비룡소출판사에서는 "먼치킨"이라고 번역하였으나 [주석 달린 오즈의 마법사]에서는 뭉크킨]이라고 발음합니다. 혹시 이 단어의 정확한 발음을 아시는 분 계시면, 살짝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미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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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5-08 0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랑크 바움 작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지만, 기억 님의 리뷰 또한..👍
오즈의 마법사 다시 읽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도로시, 양철 인형, 허수아비, 사자...전 어렸을 때 겁 많은 사자를 좀 좋아했었던 것 같아요^^

얄라알라 2023-05-08 09:00   좋아요 1 | URL
좋은 월요일 시작하셨어요? 책읽는나무님. 간혹 필요한 자료가 있어 뒤지다가 찾아낸 귀한 글이 알라딘서재 친구님들 글일 때는, 뿌듯하고 으쓱한 기분. 마리 퀴리에 대한 문장은 기억이 희미하게 나는데, 프랑크 바움은 관심을 가지니까 새롭게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겁많은 사자를 좋아하셨어요?^^ 저는 예쁜 도로시를 좋아했었나...말할 수는 없지만, [오즈의 마법사]가 큰 기쁨을 준 동화임은 분명하네요^^

coolcat329 2023-05-08 0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얄라님 오즈의 마법사 전문가 되시겠어요~^^

얄라알라 2023-05-08 09:02   좋아요 1 | URL
알라딘 서재 박균호님도, 결국 [주석달린 오즈의 마법사]를 읽지 않으셨다고(글씨 완전 작고, 내용 완전 많아요 ㅎㅎ) 하셨는데, 저는 ‘서문‘읽고, 본격적인 본문 주석이 달리는 부분 시작하니, 와...이책 다 못 읽겠다 벌써 기권의 마음이 스물스물 올라오던 차였어요.

coolcat님 응원에 어쩌나요?^^ 끝까지 넘겨가며 전문가 되어봐야겠는걸요^^

cyrus 2023-05-08 2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가지고 있어요. 운 좋게 샀어요. <주석 달린 오즈> 때문에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도 사서 읽고 싶더라고요.. 책 한 권 사는 게 이렇게 무섭답니다. 책 욕심이 더 생기거든요.. ^^;;

얄라알라 2023-05-09 13:41   좋아요 0 | URL
이 책 한 권이면 보통 책 3권 꽂을 공간이 사라지는 듯 하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이라^^ 저는 빌렸어요

그런데 cyrus님 Munchkin을 먼치킨. 뭉크킨, 어떻게 읽는게 좋은지 혹시라도 아시는 바 있으신가요? 궁금한데 아직 해결을 못했네요^^;;;

Jeremy 2023-05-11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munch·kin
[ˈmənch-ˌkin] 먼취.킨 첫 음절에 강세.
noun
-a child or short person.
-a person who is notably small and often endearing.

주석달린 책에서 어째서 뭉크킨으로 썼는지 모르겠지만
바움이 그의 책 <오즈의 마법사> 에서 영어로 만든 어휘

the Munchkins, depicted as a race of small childlike creatures,
in L. Frank Baum‘s book <The Wonderful Wizard of Oz> (1900).

얄라알라 2023-05-11 11:36   좋아요 1 | URL
Jeremy님,
사실 저 오전에도 이 ‘먼치킨인지 뭉크킨‘인지 신경이 계속 쓰여서(해결이 안되어), 어쩌지 하던 참이었어요.
다 먼치킨으로 쓰는데 주석달린 책에서만 뭉크킨 하는 것 같아서요.

새로 만든 어휘군요.
queerest people이라고 묘사했던 것 같아요^^(문장마다 모두 ‘~~같아요...‘네요. 기억이 가물거려서^^;)

정말 고맙습니다. 서재까지 직접 찾아주셔서 답글 달아주셔서,
덕분에 후련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5-11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즈의 마법사>를 안 읽어본 1인으로 부끄럽습니다. 요즘 주석달린 시리즈가 눈에 많이 띄네요. 즐독하시길^^

얄라알라 2023-05-22 00:34   좋아요 1 | URL
부끄러우시긴요.

저야말로 고양이라디오님께서 찬찬히 올려주시는 책들 중 다수가 안 읽은 책.

주석달린 시리즈는....넘 무거워요. 외출할 때 책 들고 다니는 저로서는 밤에만 만나게 되는 책이네요^^

페크pek0501 2023-05-12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윌라 오디오북 1년 구독권 있는데 오즈의 마법사, 가 세 권짜리로 있네요.
여기서 정보를 얻어갑니다.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3-05-22 00:33   좋아요 1 | URL
페크님 안녕하세요?

나름 책을 많이 읽지만
페크님 댓글 보고 생각하니, 저는 오디오북을 여태 단 한권도 들어본 적이 없네요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시도해봐야겠어요^^
오즈의 마법사, 미국적이라고 느끼시며 듣고 계신지?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고요. 주석을 보면서 배우고는 있지만.
 

"던바의 수Dunbar's Number"로 유명한 인류학자(+ 진화 심리학자) 로빈 던바는 카페에서 엿듣기에 진심이었다. 그는 참여자들이 어떤 대화의 맥락이나 이해관계에 놓였든 간에 어려운 심화 주제보다는 "가쉽 gossip"거리에 쏠리게 마련이란 걸, 즉 인간 의사소통에서 가쉽의 효용성을 간파했다. 어설프게 던바 흉내내기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카페 테이블 저편의 대화는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자 해도 차단되지 않는다(는 변명을......).


최대한 늦게 낳아야 한다구!_늦게 낳는 남

IT 계열 전문직 젊은 남성들의 화두는 일에서 시작하더니 '출산과 양육'으로 흘러갔다. 대화는 일 잘하는 **, **, **를 칭찬(시기질투?)하며 시작되었다.

*

(우리 IT 업계에서) **, **, **가 뛰어나다. 잠은 자나 싶을 정도로 짧은 기간 내에 끊임없이 뭔가 만들어낼뿐더러 성과마다 놀라웠다. 촉망받는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생산력이 어느새인가 시들시들, 멈춘듯했다. 잘 보니, (공통적으로) 시들시들한 그 시점에 바로 이들이 아빠가 되었더라.


대화는 이렇게 귀결된다.

한때 잘나가다가 육아에 발목 잡힌 아빠들! **, **, **을 보니 알겠다. 여기(회사)에서 살아남으려면 애는 최대한 늦게 낳는 게 답이다!.

커리어에서 손실예상 때문에 임신과 출산 미루기는 보통 '여성' 주어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남자들만의 커피 타임에서 '아이를 최대한 늦춰 낳을 이유'가 대화 소재로 등장하다니 귀가 커졌다. '출산을 최대한 미뤄, 일에서 성취를 이루자'는 생각의 이면에는, 정자는 나이를 덜 타지만(?), 즉 남자는 상당한 나이가 들어도 자식을 기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전제된 것일까? 이는, 여성의 난자는 나이를 탄다는(이왕이면 젊은 가임 여성의 난자가 선호되는) 문화적 신념과 연결되기 때문에, 유쾌한 전제만은 아니다.



15년 일하며 첨 봤대!_조리원에서 책 읽는 여자


노골적으로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는 못했기에 음성으로만 추정하기로 4~50대 여성분들의 대화를 차단하기 어려웠다. "여자 공부하면 뭐 하나, 박사 따건, 전문직이건 결혼하면 소용 없다." "아니다, 그거 우리 세대까지 그렇다. 요즘 애들은 똑똑해서 그렇지 않다(차라리 애를 안 낳는다).' 요약하자면 이런 대화였다. 책 덕후의 귀가 번쩍 뜨였던 건, 누군가가 책 덕후 친언니 예를 들었기 때문이다.




"언니가 워낙 책을 워낙 좋아했어. 석사 따고, 부모님께서 박사까지 밀어준다고 하셨는데도 그냥 좋아하는 걸로 남기겠다, 업 삼지 않겠다더라고. 언니는 산후조리 하면서도 책을 읽었어.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기가 이 일(도우미) 한지 15년차에, 책 읽는 산모는 처음 봤다고 그렇게 신기해했대"


*

그 뒤 이어진 대화는 가물가물 기억하지만, '산후조리원에서 책 읽는 산모'가 화제의 중심이었음은 분명하다. 그 범주의 여성, 즉 산후조리 기간에 책 읽는 엄마는 일탈, 범상치 않음, 과장하자면 '이상해 보이는' 듯 했다.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었겠지만, 내 귀를 불편케 하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이렇게 기록한다. 

15년 산후조리 도우미를 하면서 '책 읽는 산모'를 처음 봤다 하시는 분, 마찬가지로 산후조리 기간 지적인 양분을 채우는 산모가 특이한 소수자로 여겨지는 대화. 왜 엄마라는 존재는 새 생명에게 양분(모유)를 주지만, 책으로 자신을 위한 즐거움을 채우면 평범해 보이기 어려운 걸까? 아이들 놀이터에서 그네 태우는 옆 벤치에서 책 읽던 그 어머니는 아무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왜 동네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던 걸까?


우연히 들은 조각난 대화에 과잉 의미 부여하는 걸까? 그렇다면, 어설프게 로빈 던바를 흉내내기 때문일 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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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5-07 2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에, 저희 동네 왕송호수
뷰를 가려 버린 신축 아파트에
대한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과 일치해서 같이 수다
에 동참하고 싶은 욕망이 잠깐
일었답니다. 그렇게 가는 거죠.

2023-05-07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3-05-07 23:28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 말씀 듣다보니
김훈 작가님 에세이 중에, 작가님 사시는 일산 호수 근처 산책하시다가 할머님들 대화(주로 며느님들 ~~~, ~~~ 뒷이야기) 들으셨던 일화 어렴풋이 생각나요. 작가님께서도 그 대화에 마음은 이미 끼어 계셨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갑자기 제 흐린 기억력을 탓하고 싶어지네요

아! 이 늦은 밤, ˝그렇게 가는 거죠˝라는 말이 마음의 파고를 낮춰주는 것 같습니다. 제게 필요했던 말씀입니다. 감사드려요^^

persona 2023-05-07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질문이 많이 남는 얇은 책 한 권 읽으셨군요. ^^ 전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들 이야기 듣다보면 오디오북 듣는 거 같더라고요. 가끔요. ㅎㅎㅎ
공공장소에 주로 혼자 있다보니 안 그러고 싶어도 동네 이야기는 다 듣고 다니는 거 같아요. 저도 그냥 지나가려고 하고 안 들으려고 하지만 듣게 되면 저도 관련 생각도 하게 되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ㅎㅎ

얄라알라 2023-05-07 23:30   좋아요 2 | URL
까페 순례자로서, 예의를 지키고 싶어도 귀쫑긋 되는 상황이 잦은 듯 합니다.
persona님 표현에 격 공감, 끄덕끄덕하게 됩니다.

˝질문이 많이 남는 얇은 책 한 권˝이라...아! 시적이라는 말, 이럴 때 쓰는 거겠죠?
누군지 모를 이들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귀 쫑긋 엿듣게 된 상황에서, persona님 표현 멋있습니다!

yamoo 2023-05-10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산후조리원에서도 책을!!!
진짜 책덕후네요..^^

고양이라디오 2023-05-11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던바의 수‘ 찾아보니 재밌네요ㅎ 15년 일하면서 조리원에서 책 읽는 여자를 처음 봤다니 신가하네요.
 
미국인 사용빈도 다반사 영어회화 구동사 미국인 사용빈도 다반사 영어회화 구동사 1
김아영.Jennifer Grill 지음 / 사람in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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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생활영어 도와주는 자료들이야 쓰나미 수준으로 많이 나오지만, "사람in출판사‘ 그 중에서도 Florida 김아영 선생님 책은 질적으로, 가르치는 자의 정성 면에서 확연히 변별됩니다! 감사히 활용하겠습니다! 계속 좋은 책으로 안내해 주시어요. 김아영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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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듯한 제목, [산에 오르는 마음Mountains of the Mind]보다도 부제, "매혹됨의 역사"에 끌려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다. 첫 몇 페이지만에, '아! 문장 어쩜 이렇게 아름답고 치밀하니?'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뛰어난 문장가, 사색가들의 뒤에는 멋진 가풍이 있(는 경우가 많)더라. 저자 로버트 맥팔레인(Robert Macfarlane) 외할아버지는 서가뿐 아니라 집안 여기저기 책을 뒹굴릴 정도로 장서가였다. 어린(아마 그때도 잘생겼으리라😏) 손주는 "닥치는 대로 벽에서 벽돌을 꺼내듯이 책 더미 중간쯤에서 녹색의 커다란 책을 꺼내...," "유년 시절이 오롯이 허락하는 자기만의 시간에, 마치 폭음이라도 하듯 외할아버지의 장서를 탐독했다. (15)"


꼬마 로버트 맥팔레인은 "희박한 공기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 두 개의 작은 점(등반가 맬러리와 어빈) 중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는 존재에 불과"(15)했다. 하지만, 소년기부터 산에 오르던 그는 훗날 산악인이자 명망 있는 작가가 된다. 스물여덟 살에 [Mountains of mind]를 출간했고 '심원의 시간 Deep time'을 연구하며 대학에서 후학도 양성한다. '아, 이렇게 조화롭고 강인한 영혼이라니!' 460여 쪽의 1/10지점을 지날 즈음, 로버트 맥팔레인에게 팬심을 느꼈다! 아울러 질투심과 부끄러움도... 작정하고 성실하게 산다 한들, 맥팔레인을 비롯한 숱한 등반가들이 보아왔을 '알펜글로 apenglow'를 내 인생에서 직접 볼 날, 있을까? 생명을 걸고 반중력의 신비, 산의 부름에 화답했던 그들만큼 대범할 수 있을까?


BrettA343, CC BY-SA 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via Wikimedia Commons


질문을 바꿔본다. 두 발 디딜 땅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있는데 굳이 아찔한 고도에 이르고 싶은 이유는 무얼까? (왜 목숨 걸고 산에 오를까?) '마음의 산(Mountains of Mind)'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인간을 매혹시켜 왔는가? 나는 차가운 형광등 빛에 안락함을 느끼면서 왜 예측불가한 색조합의 알펜글로우를 동경하는가?


바로 이런 질문에 로버트 맥팔레인은 자신만의 창의적인 방식으로 답을 찾아간다. 옮긴이도 언급했듯, [산에 오르는 마음]은 장르를 특정하기 어렵도록 독창적인 지성의 산물이다. 저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류가 산을 상상하는 방식(또는 산에 오르는 마음)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43)," 즉 '마음의 산을 향한 인간의 매혹됨 계보사'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지리학, 지질학, 생태학, 스포츠학, 철학, 역사학, 인류학, 미학...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읽어도 혹할만큼 풍성한 정보를 유기적으로 배치해 놓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그가 이처럼 방대한 지적 작업을 단독 수행하며, 심원의 시간(Deep time)에 매혹당한 등반가로서의 자신의 경험도 곁들였다는 점이다. 꼬마 맥팔레인이 할아버지의 장서 중에서도 특히 실존 탐사가의 일기를 많이 읽었던 영향일까?

Pablo Carlos Budassi, CC BY-SA 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via Wikimedia Commons



스크린이 호도하는 가상현실의 자극이, 손발가락을 잃어가며 하는 등반예술과 맨눈의 탐사를 대체해가는 21세기에 등반가들이 저 높은 산을 오르며 이르렀던 경외감은 인간이 왜 겸허한 존재여야 하는가를일깨워주는 고백이 된다. 


로버트 맥클라인의 날카로운 지성과 통찰력을 보여주는 문장 몇을 옮겨 본다.


솟구침, 사나움, 차가움, 이 모든 것을 이제 무의식적으로 숭배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이미지들은 더 거친 야생에 대한 간접 경험에 굶주린, 도시화가 진행된 서구 문화에 스며들었다. 산행은 지난 20년 동안 가장 빠르게 성장해온 여가 활동 중 하나다...이제 에베레스트산은 경험이 부족한 등산 회사 고객 수백 명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만년설로 뒤덮인 타지마할이 되었고, 당의 糖衣를 정교하게 입힌 웨딩케이크로 전락하고 말았다. 에베레스트산의 산비탈에는 현대인들의 시체가 흩어져 있다.


[산에 오르는 마음] 41쪽



'심원한 시간'의 광대무변함을 생각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강렬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일로, 당신의 현존을 완전히 부수고 과거의 압력으로 당신을 '無'로 압축하며 미래는 너무 광활하기에 당신이 직시할 수 없도록 한다. 이는 정신적인 공포일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공포다. 산의 단단한 바위가 시간의 마모에 얼마나 취약한지 깨닫는 일은 반드시 인류의 몸이 섬뜩할 정도로 덧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도록 하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는 마음]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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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5-07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에 오르는걸 ‘반중력의 신비‘ 라고 하는군요. 완전 멋진 표현인거 같아요~!!
산에 오르는 마음이 저런거였군요. 뭔가 웅장합니다~!!

얄라알라 2023-05-09 13:42   좋아요 1 | URL
1976년생 저자는 남들 80년 살아도 못해본 넘 많은 경험을 했더라고요
그러니 글이 좋을 수 밖에^^
이 역시 질투인가봅니다

새파랑님 좋은 오후 보내시기를

얄라알라 2023-05-09 13:42   좋아요 0 | URL
1976년생 저자는 남들 80년 살아도 못해본 넘 많은 경험을 했더라고요
그러니 글이 좋을 수 밖에^^
이 역시 질투인가봅니다

새파랑님 좋은 오후 보내시기를

고양이라디오 2023-05-11 1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알아갑니다.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책읽는나무 2023-06-08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을 좋아하시는 얄라 님과 잘 어울리는 책의 글로 당선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수준 높으면서 저는 처음 보는 책들 리뷰나 페이퍼에 많이 올리시는데 늘 친구 읽기 글로만 읽어 좀 아까웠었는데...흐뭇한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걸 대공개해 주세요.ㅋㅋㅋ

얄라알라 2023-06-08 14:18   좋아요 1 | URL
하하하 책읽는 나무님

저는 30000원 적립금에 일단 너무 좋아서 눈 희번덕^^;;; 도대체 내가 썼던 글 중 당선될만한 게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데 하면서 궁금했는데

알록달록 사진 세례를 퍼부은 이 글이었네요.
이 책이 너무 좋아서 후속작도 빌려 놨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어요.

응원해주셔서 많이 고맙습니다. 책읽는나무님도 축하드립니다. 러스트벨트의 고운 하늘 색이랑, 알펜글로 색이 묘하게 겹치네요^^ 맥락은 다르지만

겨울호랑이 2023-06-08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을 오르는 마음으로 마음의 산을 올라야 하는데, 자연에 있는 산과는 달리 오를 수록 점점 더 까막득하게 높아져 가는 것이 다른 점인 것 같아요... ㅜㅜ 얄라얄라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