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영미문학연구회 소속의 학술지, 『안과밖』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학술지의 제목이 알베르 카뮈의 초기 산문집인 『안과 겉』에서 유래되었는지 무척 궁금해졌다. 수록된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 같은 책을 읽는 것 이상으로, 같은 작가를 동경한다는 것은 큰 기쁨이다. 알베르 카뮈와 생텍쥐페리는 동경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그들의 문장을 읽고 나면, 글에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단순한 글자들의 나열을 넘어서서, 감동을 받고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가 달라진다. 아마 그 이유는, 다른 작가들도 그러하겠지만, 두 사람은 자신의 삶 자체를 꾹꾹 눌러담았기 때문이리라. 아이러니하게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공통점도 그렇고.


 여기에는 그가 최초로 발표한, 그래서 스스로도 애증을 느끼는 『안과 겉』을 읽으며 마음에 감돌았던 문장들에 대해 쓰려고 한다. 때로 카뮈의 작품은 비평의 대상이 아닌 감상의 대상이 된다. 이미 『이방인』과 『페스트』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가에게 처음에 쓴 글에 대해 아쉬운 점을 토로하는 일은 상당히 비효율적이다. 


  그렇다, 이런 것은 모두 진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태양과 함께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 극단의 의식의 극한점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되면서 나의 생은 송두리째 버리든가 받아들인가 해야 할 하나의 덩어리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어떤 위대함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p.81)

 

 카뮈에게 빛은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때부터 『이방인』의 서사는 예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역자의 해설대로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은 매우 타당한 해석이다. 작가에게는 이분법의 경계가 아주 중요했다. 빛과 어둠, 생과 죽음, 조리와 부조리 등이 그렇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다행히도 그는 자신의 생을 송두리째 받아들였다.


  삶에 대한 나의 모든 사랑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내 손에서 빠져 나가버리려고 하는 것에 대한 말없는 열정, 불길 밑에 감추어진 쓰디쓴 맛이다. 매일 나는, 짧은 한순간 동안 이 세상살이의 시간 속에 아로새겨진 채 마치 나 자신에게서 앗겨가듯이, 그 승원을 떠나곤 했던 것이다. (…) 내 입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의 행위들이 아니라 태양에 짓눌린 풍경 앞에서가 아니고는 탄생할 수 없는 그 '나다(허무)'였던 것이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p.90~91)

 

 아, 내가 알베르 카뮈와 생텍쥐페리를 사랑한 이유. 그것은 삶에 대한 지독한 사랑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름다운 삶을 향한 지독한 투쟁의 의지 때문이었다. 알베르 카뮈의 반항과 생텍쥐페리의 용기는 서로 맞닿아 있다. 반항과 용기는 특정한 행동양식이 아니라 살아가는 태도에 가깝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고, 절망 속에서도 기꺼이 희망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반항하는 인간과 어린 왕자는 시지프처럼 무시받을 수밖에 없거나, 외계에서 오지 않으면 안 된다. 절망을 맛보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역설을 언제쯤 완전히 이해하게 될까?


  중요한 것은 인간적이 되고 단순해지는 일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고 또 잠시 후에는 실제로 그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 즉 인간적인 것도 단순함도 거기에 다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곧 세계일 때보다도 더 진실해지는 때가 과연 언제이겠는가? 나는 갈망하기도 전에 만족되었다. 영원이 눈앞에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바랐던 것이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명철한 의식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p.100~101) 

 

 표제작인 「안과 겉」에 인용된 구절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해지는 것이다"라는 그의 단언이 와 닿는다. 그는 애둘러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골키퍼로서, 그는 공을 막거나 못 막거나의 기로에 놓여 있다. 솔직해지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 알베르 카뮈를 수식하는 표현은 참으로 많고 그를 대표하는 여러 단어들이 있지만, '행복'을 빼놓고서 그에 대해 논할 수 없다. 알베르 카뮈는 언제나 행복을 찾았다. 지금의 부조리에 맞서는 것, 그 투쟁과 반항이 고난의 여정처럼 보여도 결국엔 행복에 이르고 말 것임을 그는 확신했다. 삶이라는 연극 속에서 모든 무대 장치와 소품, 고된 연기들은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간다. 그렇기에 "갈망하기도 전에 만족"되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 책의 구성은 본문과 해설이 절반씩을 차지한다. 생각보다 짧은 분량에 놀랄 수 있지만, 읽다 보면 길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촌철살인이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다만, 글은 사람을 살린다. 더 나은 삶의 양식을 제안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인가? 그것을 아는 사람은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조금씩 익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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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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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선란 작가에 대해서는 입소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국내소설에, 아니 요즘은 문학 전체에 관심이 통 없던 나에게 한국형 SF 소설의 대가가 나타났다는 것이 신문 기사를 통해, 영상을 통해 전해졌다. 그 당시에는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얼마 전에 그녀의 신작 단편집이 출간되었다는 말을 듣고 불현듯 구매했다. 제목인 『노랜드』에 대한 첫 인상은 "방황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일까, 였다. 그리고 모든 작품을 읽고 난 뒤 든 느낌은 "no homeland"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스파이더맨 시리즈로 비유하자면 <노 웨이 홈(no way home)>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작품 중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묘사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기에 떠나야 했던 자들의 심정이니까. 

 

 나는 이 작가의 소설들을 처음 읽어보았는데, 전체적인 감상평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필립 K. 딕의 스타일에 자신만의 주제를 덧붙여 한국의 정서에 성공적으로 접목시켰다"는 것이다. 종말 이후의 이야기 또는 종말론적 분위기에 지배되고 있는 세계관은 앞서 언급한 작가를 연상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21세기 SF 문학의 대표적인 추세이므로 딱히 흠 잡을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색채를 얼마나 고유하게 녹여내었느냐인데 나는 그녀가 그것을 잘 해냈다고 본다. 우선 갑자기 얻은 명성을 의식해서 작품에 힘을 준 흔적이 없는 것이 좋았다. 그냥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는 인상, "소설이 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조소 섞인 분석 등이 그렇다. 자신이 만든 세계에 갇히지 않고 차분하게 하지만 재치 있게 주제를 풀었다. 그리고 가볍게 한 말이 곱씹어 보면 작품들을 관통하는 단어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다. 이유 없이 살아가자. 문학, 그중에서도 SF 문학은 장르의 특성답게 부연 설명을 참 좋아한다. 사실이든 허구든 도구를 동원하여 인물의 동기를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정말 대담한 시도는 해야 할 말에 대해서 침묵하는 일이다.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는다는 구차한 변명 대신, 정말 거기서 이야기를 끝내는 도전 말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에게」다. 이름을 불리기 전까지 이승에 남아야 하는 존재라니,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은가? 유령으로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고 마침내 이름 세 글자가 불리는 순간의 감동을 충분히 재현할 수 있다. 천선란은 주인공의 이름에 대해 침묵했다. 대신 단서를 남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만한 이름을 가진 모두의 이야기로 말이다. 그 절제가 이야기의 보편성을 확보한다. 오히려 너무 흔한 소재가 되어버린 좀비를 기이한 마을의 분위기와 접목시켜 심리 스릴러처럼 그려낸 「이름 없는 몸」이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한 것은 아이러니이자 작가의 의도가 다분히 담긴 구성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제목과 가장 부합하지 않을까 싶었다. 공간은 있지만, 사람이 없기에 더 이상 고향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비극이 아닐까? 물리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등장인물들은 수없이 언급되었으나 정신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의 이야기는 소수이다. 고향에서 도망쳐왔다가 귀환한 자들에게 환영 인사는 없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순수한 상상력이 빛난 단편이었다. 바로 「두 세계」였다. 소재부터 전개까지 모두 매혹적이었다.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설 속의 세계에 풍덩 빠져들고 싶은 욕망을 품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실현시켜 주는 프로그램이 개발되다니! 심지어 온몸을 알집에 가두고 요란하게 흔들리는 기계 따위가 아니라, 마그네틱 버튼을 관자놀이에 붙이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획기적이고 기발한가! 게다가 작품 속 등장인물들과 상호작용할 수도 있으니, 이보다 신나는 게임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러한 애서광들에게 천선란은 예상 밖의 대답을 던진다. 그렇게 문학을 사랑하던 당신은, 당신이 그토록 아낀 등장인물에 의해 잡아먹혔다. 우리는 아락스와 신규영 사이에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아락스는 가상현실 밖의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습득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규영을 설득했을 것이다. 규영은 순수한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절대 해서는 안 될 거래를 했다. 현실에서든 프로그램에서든 몸을 죽이면 영혼도 소멸하는, 굉장히 단순하지만 소름끼치는 설정이 압권이다. "아락스가 죽었다"는 문장은 이 소설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대목이다. 인공지능과 함께 떠나는 신나는 모험은 씁쓸한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된다. 


 어쨌든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다. 만약 천선란의 작품에 매력을 느낀 독자라면, 다른 작품을 구매해서 읽고 싶은 욕망이 생길 것이다. 특히 이렇게 인상적인 한국형 SF소설은 존재만으로 반갑다. 하지만 잦은 모험을 떠난 이들이라면 느낄 것이다. 나를 완벽하게 기쁘게 하는 소설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소설가가 된 이들은 어쩌면 더 큰 목적을 찾아 끊임없이 방랑하는 '노랜드' 속 등장인물들과 같을지도 모른다. 설명할 수 없는 맹목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한다. 그들은 돌아갈 곳을 파괴하면서까지 기꺼이 먼 길을 떠난다. 누군가는 고작 글자들의 나열일 뿐이라고 말리지만, 그 안에서 엿보는 새로운 세계에 한 번 감동한 자는 이전과 같은 생활을 누릴 수 없다. 그 환희를 위해 아락스는 살아간다. 별다른 이유 없이도 말이다.

유라는 원래부터 책 관련 일을 하고 싶었다. 책을 많이 읽거나 글을 직접 쓰는 건 아니었지만, 그저 책이라는 물질 자체가 좋았다. 그래서 학생 시절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서점에 찾아가 아무 책이나 샀다. 구매한 책을 전부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글자와 글자가, 단어와 문장이 서로 얽혀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게 늘 신기했다. 유라에게 책은 소비재라기보다 소장품에 가까웠다. 그래서 되도록 어떤 형태든 책이 주가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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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08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thkang1001 2022-09-08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tarover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starover 2022-09-10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잭 런던의 삶을 조사하던 중, 호보(Hobo, 떠돌이 노동자)로서의 생활을 담은 자전적 전기인 『더 로드(The Road)』가 최근에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런던의 이스트엔드에서의 생활을 담은 기록인 『밑바닥 사람들』도 함께 구매하여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알아보고자 했다. 

 두 작품은 시기와 배경이 서로 다르지만, 어조는 동일하다. 『더 로드』가 조금 더 생존에 치중한 모습이라면, 후자는 문명을 비판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문명의 보호에서 벗어나 힘겹게 생활하는 이들의 삶을 담담하게 그리다가 격앙되는 방식은 동일하다. 다만, 『더 로드』는 자신의 생존이 걸린 문제를 그리다 보니 더욱 차분하다. 그래서 다소 서투르더라도 더 어린 시절에 남긴 글이 애착이 간다. 



 『밑바닥 사람들』에서 느낀 점은, 잭 런던이 이후의 작품에서 보이는 강한 문명 비판적인 태도가 이스트엔드에서의 생활을 통해 확고해지지 않았나 싶은 것이었다. 특히나 보여주기 식 자선을 행하는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는 부분은 생활 전선에 뛰어들지 않은 사람이라면 감히 제기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기계문명과 밑바닥의 인간이 되는 것보다, 황야와 사막의 인간, 동굴과 움막의 인간이 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구절에서 그가 왜 그토록 원시세계의 원형을 작품 속에서 제시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원시세계는 잭 런던이 보여주고 싶었던 이상향이 아니었을까? 그는 토머스 모어나 사회주의가 설명하는 "모두가 똑같이 행복한"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차라리 적자생존과 격세유전의 원리로 작동하는 원시세계가 차등의 행복일지라도 모두가 행복에 가까워지는 세상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나머지 작품을 모두 분석한 뒤에야 알 수 있겠지.


 어쨌든 잭 런던이 런던 생활을 통해 내린 결론들은 상당히 극단적이다. 

 문명이 보통 인간의 생산력을 향상시켰는데 왜 인간의 운명을 개선하지 못하는가?

 답은 딱 하나다. 잘못된 관리. 문명은 온갖 육체적 정신적 안락과 기쁨을 제공해줄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의 영국인들은 그러한 것들을 누릴 수가 없다. 만약 영원히 누릴 수 없다면 그 문명은 몰락할 것이다. 그렇게 실패가 빤히 보이는 문명이 계속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인간이 놀라운 문명을 헛되이 일으켰다고는 믿을 수 없다. 이성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렇게 완전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노력과 진보에 치명타다. (p.309) 


 한편, 『더 로드』는 방랑자이자 청년인 잭 런던의 모험을 다룬다. 꽤 박진감 있고 흥미롭다. 게다가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왠지 모르게 따뜻하다. 그들이 겪어야 할 삶은 고통과 생존의 처절한 노력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동시에 소소한 즐거움과 현재의 행복을 찾으려는 기대가 공존한다. 물론 호보 생활을 자발적으로 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 세상에 나그네로 지내는 것 역시 또 다른 삶의 양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1장부터 3장까지 그려진 자전적 일대기는 근래에 본 어떤 모험소설보다 흥미진진했다. 살아남기 위해 구걸하고, 친절한 이들에 의해 식사를 대접받고, 그에 응당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는 그의 모습은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 기차에 뛰어드는 호핑(hopping)에 대한 노하우를 핏줄 속에 새기고 있는 잭의 움직임은 야생동물을 보는 듯 했다. 


 내가 잭 런던의 삶과 작품을 본격적으로 탐구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된 소설은 그의 마지막 저서인 『별 방랑자』였다. 그리고 『더 로드』를 통해 작가 자신이 다름 아닌 별 방랑자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육신은 언제나 실패를 거듭했으나, 영혼은 자유로웠다.

 내가 떠돌이가 된 것은, 글쎄 쉬게 두지 않는 내 안의 생명력과 내 핏속을 흐르는 방랑벽 때문이었다. 물에 빠지면 피부가 젖는 것처럼 사회학은 단지 부차적이었다. 추후에 따라온 것일 뿐이다. 벗어날 수 없기에 나는 '길'에 나섰다. 주머니에 기차표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평생 한 가지 일만 반복하며 살 수 없게 태어났기 때문에, 글쎄 아마도 내게는 길이 더 쉬웠기 때문이리라. (p.165)

 여운을 남기는 것은 작품의 말미에 수록된 '호보 코드'와 '호보 윤리 강령'이었다. 이는 그들이 각자의 생존을 위해 움직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뜻 모를 연대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15가지 항목의 윤리 강령을 모두 옮길 수는 없지만, 그 중 인상 깊은 것 세 가지를 꼽자면, "1. 자신의 삶은 자신이 결정할 것. 다른 사람이 휘두르게 두지 말 것. 4. 일시적인 일이라도 찾기 위해 노력하고 항상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일을 찾을 것. 그렇게 해야 산업에 도움이 되고 다시 그 지역에 오더라도 일을 얻을 수 있다. 15.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서나 동료 호보들을 도울 것. 언젠가 당신도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이다. 곰곰이 읽고 있자면, 어쩌면 우리 모두 호보가 아닐까, 라는 인상을 받았다. 21세기의 우리 역시 한 곳과 한 직장에 머물지 않고 노동하며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었다가 헤어지는 일을 반복하지 않는가?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호보 윤리 강령을 마음속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더 로드』 가장 뒤에 쓰인 문구가 공감이 간다. "잭 런던이 쓴 가장 위대한 이야기는 바로 그의 삶 자체이다." 이는 그의 대표작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의 생애만큼 모순으로 가득 찬, 역설적인 문학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잭 런던을 단순히 사회주의자 내지는 자연주의 작가라고 정의하기에는 수식어가 너무나 다양하다. 자연의 냉혹한 섭리를 꿈꾸면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백인우월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다른 문화를 담아내려고 한다. 자본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다가도 자신의 부를 마음껏 과시하며 어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육체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요컨대, 그가 걸었던 길은 '항상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일'과 같다. 변화하는 정신은 그에 따르는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삶에 넘치는 모순은 운명과도 같고 그가 살아낸 사회의 초상이기도 하다. 『더 로드』와 『밑바닥 사람들』의 이면에는 글에 담기지 않는, 수많은 죽어가는 이들이 있다. 언젠가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을 대비해서라도, 언제 어디서나 동료를 도와야 한다는 정신을 간직해야 한다.


 각자에게는 언제나 불가능한 길이 있다. 차마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 여기고 언제나 마음 한켠에 담아두고 있는 길이다. 대부분은 그 종착지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두렵기 때문에 가지 않는다. 일부는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무모한 도전을 한다. 그리고 소수는 불가능한 길 끝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잭 런던은 7년 전, 수많은 고민 속에서 방랑하던 나에게 작은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그가 나에게 그랬듯, 나 역시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인생에 단서를 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게 어떠한 방식으로 결말을 맺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지금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이것이다. 잭 런던의 삶에 대해 써 보자. 만약 전기를 번역할 수 없다면 직접 써 보자. 나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실패한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실패를 무릅쓸 최소한의 용기는 남아 있기에 한 번 가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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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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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이미지에 비례하는 현실에 대한 고발은 강렬하다. 오스카의 정체성과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시점 등은 20세기의 독일에서 살아가던 이들의 필연적인 부패를 드러낸다. 귀에 거슬리는 양철북 소리가 역사 속에서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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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 2017 신판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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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설거지는 재밌고 유익한 일이다. 그래서 "설거지는 가사노동 중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로, 그것은 소비와 부패에 관련되는 일입니다. 설거지에는 아주 작은 비전이나 상상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명예 따위는 관심도 없다. 설거지를 하는 과정 속에는 널브러진 그릇과 식기를 씻는 자신만의 체계가 있고 미리 세운 계획대로 진행될 때, 더러운 것들이 씻겨나갈 때의 기쁨이 서려 있다. 나는 매사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집안일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매번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설거지에 대해 고통의 상징 내지는 절망의 노동이라고 이름 붙일 필요는 없다. 일상은 문학의 소재가 될 뿐, 실현되는 공간이 아니다.


 2. 영어영문학과 전공 수업을 들으면, 반드시 접하게 되는 구절이 있다. "Carpe diem(Seize the day). Memento mori(Remember to die)." 호라티우스의 시구에서 가져온 이 라틴어 구절들은 르네상스 이후의 사조에 종종 등장하는 주제이다. 죽음은 언제나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르기에 모든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동일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은 또 천차만별이다. 저자는 신과 죽음에 대해 알지 못했던 여섯 살의 시절부터 이어진 '메멘토 모리'를 한민족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때는 왜 한국인의 특성을 그토록 강조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3. 한참 뒤에야 한국인의 특성을 강조한 이유를 이해했다. 가족주의의 온정과 효를 지선의 가치로 삼아온 한국인들은 가족이 중심이라는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곤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는 구약의 인물들이나 자신의 어머니께 "여자여"라고 하는 예수님의 언행에 반발한다. 하지만 그것은 중립적인 호칭이며, 마리아를 한 사람의 어머니가 아니라 모두의 어머니로 만드는 선언이었다.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은 물론 소중하지만, 기독교인은 그 이상의 도전이 필요하다. 문득 자기 가족이 아니면 무섭도록 무관심하다는 <인터스텔라>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요지는 "너의 가족만 사랑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나의 원수나 약한 사람들까지 품을 수 있느냐는 그 물음에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4. 보들레르의 짧은 시구를 보며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했다. 용서는 가장 강력한 형태의 사랑이라고 했는데,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기 어려운 상태일까? 사실은 그렇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도로 용서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수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존재로 기억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기에, 내가 그런 존재로 다른 이에게 인식되는 것이 여전히 두렵다. 그렇게 될 때 나 자신을 용서할 자신이 없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향해 다가오지만, 매번 우리는 돌이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돌아온다. 기적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기적으로, 가슴이 굳은 자들에게는 사랑으로, 마음만 앞서는 자들에게는 말씀으로. 


 5. 그래서 나는 though보다는 therefore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이어령 씨는 오랫동안 글을 써 왔지만, "작가가 글을 쓰는 심정도 대개는 다 그럴 것입니다"라는 말로 타인을 쉽게 오해했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절망을 기록하거나 저항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작업이 즐거워서, 그 안에 자유롭게 내 생각을 담아내고 싶어서였다. 나의 삶을 고백하기보다 더 큰 상상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다루는 내용이 꽤 달라졌지만, 글쓰는 과정 속에서 내 생각을 털어놓고 마음을 비우는 경험은 다른 어떤 활동보다 유익하고 소중하다. 현재의 목표는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이끌어주었던 소중한 사람들의 삶과 마음을 소설에 기록하는 것이다. 어렵지만, 차근차근 해보려고 한다.


 6. 신기하게도 나 역시 '문턱'이라는 소재에 오래 전부터 매료되었다. 이어령 씨는 문지방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하지만 두 개념은 비슷한 듯 다르다. 저자의 표현은 전환점의 또 다른 말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넘어가는 문지방에는 두 가지 선택지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문턱은, 이분법의 갈래가 아닌 또 다른 방안에 대한 은유다. 문턱에 서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거나, 왔던 길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다. 이때 문턱에 머무르는 것은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논리가 아닌 새로운 관점에서 답안을 모색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문턱 위에 서 있다. 이를 테면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분명한 이원론에 대한 솔직한 생각이다. 나는 내가 천국에 가든 지옥에 가든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두려워하기보다는 지금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고 싶다. 


 7. 지인의 선물로 받은 책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고 언젠가 읽어 보아야지, 라는 마음을 품었다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선물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있지만, 똑같은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어령 씨의 시 쓰는 방식이 나에게 거부감을 준 탓일까? 그의 진솔한 고백이 설거지에 대한 편협한 생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일까? 어쩔 수 없는 생각의 차이가 거리감을 줄이지 못한 이유일까? 뭐가 됐든 몇몇 생각이 맞닿은 것은 반갑다. 하지만 이 책을 다시 꺼내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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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0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arover 2022-05-11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