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아담 잭 런던 걸작선 1
잭 런던 지음, 이성은 옮김 / 궁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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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잭 런던을 처음 접한 계기는 사회주의의 색채가 짙은 『강철군화』였지만, 더 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이 대중작가가 심취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바로 '자연' 그 자체였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야성의 부름』이라거나 작년에 읽다 말았던 The Mutiny of the Elsinore나 올해 초에 접했던 The Scarlet Plague는 자연의 힘과 놀라움을 보여주는 데에 주목하고, 한편으로는 그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한 인간을 조명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쯤 되면, '물질은 영원하지 않고, 영혼은 불멸하다'며 유물론에 정면으로 맞서는 『별 방랑자』가 상당히 독특한 위치에 속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요컨대, 잭 런던은 자연주의 작가의 선봉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잭 런던 걸작선 첫 번째 작품으로 출간된 『비포 아담』은 자연주의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는 장편소설이다. 격세유전과 적자생존 등 진화론의 관점에서 원시사회를 해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특히나 전생이었던 '큰 이빨'의 이름은 드러나지만, 현재의 '나'의 이름은 공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잭 런던의 자전적인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나'의 시점을 빌려 자신이 상상한 원시사회의 풍경을 묘사함과 동시에 그가 생각하는 진화론을 설파한다. <인셉션>에서도 언급된던 '킥', 즉 떨어지는 꿈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본능은 단지 우리의 유전적 형질에 찍힌 습관에 불과하며, 그것이 전부이다. 말한 김에 당신들과 나,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이 떨어지는 꿈속에서 우리는 결코 바닥에 부딪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당신들과 나는 바닥에 부딪히지 않는 자들의 후손이다. 그래서 우리는 꿈속에서 결코 바닥에 충돌하지 않는다.


 초반부에 제시되는 진화 이론은 실로 흥미롭다. 묘하게 설득이 되는 듯 하다. 하지만 역자도 인정했듯이, 이 소설은 과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큰 이빨이 속한 동굴 부족과 인근에 위치한 나무 부족과 불부족은 신체의 능력과 지능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이렇게 짧은 시간에 특정 인류가 진화하는 것도 불가능할 뿐더러 더 우수한 종족이 무기를 이끌고 다른 부족을 학살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마치 아메리카 대륙에 살았던 원주민들을 유럽인들이 몰아내는 풍경을 연상케 하는데, 『비포 아담』이 제시하는 최초의 문명이 이러한 비극을 반복할 이유가 없다. 자칫하면 더 우수한 종족이 발전하지 않은 종족을 몰아내는 것이 자연의 원리라고 정당화될 수 있다. 아무리 당시 진화론이 완성되지 않은 형태라고 해도, 익숙한 방식으로 과거의 문제를 설명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최근에 읽은 『종의 기원』에 제시된 자연 선택이 인간이 아닌 동식물에게만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포 아담』은 흥미로운 서사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큰 이빨과 늘어진 귀의 모험에서 지혜와 협력을 엿볼 수 있고, 재빠른 것에 대한 끌림, 붉은 눈을 막기 위한 공동의 노력 등은 이 회상이 인간에 대한 이야기임을 상기시킨다. 겉모습은 유인원에 가깝고 언어도 발달되지 않았지만, 단지 생존을 향한 욕구 이상의 무엇인가가 담겨 있다. 불을 보고 기뻐하는 표지의 큰 이빨은 앞으로 일어나게 될 문명을 축하하는 최초의 축제이다. 비록 동굴부족은 역사의 흐름에 떠밀려 갔지만, 삶을 향한 강한 의지는 수천 세대를 통과하여 유전자에 새겨졌다. 잭 런던은 자신의 작품에 줄곧 등장한 강한 정신력의 인물들을 대표하여 이렇게 헌사를 바치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 생존을 강하게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애써야 한다고. 그것이 비극으로 끝난다 해도 갈망은 이후의 세대에게 전해진다고.


 자연주의가 오늘날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진화론은 논쟁 속에서 발전과 동시에 비극을 불렀다. 생존의 원리를 인간에게 적용하여 생존본능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이들의 죽음을 합리화했다. 처음부터 그랬듯이, 진화론은 완벽하지 않은 이론이기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선택이 되었다. 남아 있는 것은 자연주의를 기꺼이 채택한 작가들의 정신이다. 나 역시 잭 런던의 인종차별적인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문명을 비판하는 태도나 자연관은 어느 정도 참고할 만하다. 자연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자연의 힘은 인간의 문명보다 우위에 있기에, 자연이 인간을 품도록 만들어야 한다. 문명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자연이 인간을 몰아내지 않도록 균형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다. 자연의 원리는 무정하므로 한 번 시작된 재해의 고리는 끊을 수 없다. 비포 아담이거나, 영원한 아담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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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드디어 다윈 1
찰스 로버트 다윈 지음, 장대익 옮김, 최재천 감수, 다윈 포럼 기획 / 사이언스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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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의 기원은 흥미롭다. 읽는 이마다 다른 인상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나는 자연과 인간이 얼마나 대비되는가에 대해 느꼈다. 저자인 찰스 다윈은 여러 장에서 인간의 능력과 자연의 영역을 구별한다. 사육과 재배를 통해 동식물을 인간의 필요성에 맞게 적응시킬 수는 있어도 그것들의 내부 기관에는 영향을 미치기란 매우 어렵다. 또한, 그것은 자연에 의한 변이가 일어난 후에야 가능하다. 결론 부분에서는 인간이 가변성을 만들어 낼 수 없고, 할 수 있는 일은 유기체를 새로운 환경 조건에 노출시키는 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자연은 모든 것을 서서히 바꾸지만, 인간은 어떻게든 자신의 기호에 맞추려고 한다. 그리고 그 조작은 보통 자신의 생애 안에서 이루어진다.


  지질학을 다룰 때, 인간과 자연의 차이는 극명해진다. 다윈은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지형과 화석 등을 직접 조사하면서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을 지구가 견뎌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지구의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는 고작 몇 줄로 존재할 뿐이라고 기록한다. 유기체의 변이가 아주 천천히 일어난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인간이 다른 생물들에게 미친 영향은 지극히 미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해석이 달라지는 지점은 자연 선택이 언급되는 순간이다. “각각의 사소한 변이가 유용한 경우에 보존되는 원리, 나는 이것을 인간의 선택 능력과 대비해 자연 선택이라 부르기로 했다.” 여기서 찰스 다윈은 자연의 원리를 인간의 것과 대립시킴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강화한다. , 생존의 원리는 자연과 인간에게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이다. 자연 선택은 오로지 유용함만을 따진다. 동종 간의 생존 투쟁에서는 성선택에 해당되는 종이 살아남으며, 본능은 습성을 앞선다. 어떤 한 종의 후손은 멸절한 종의 빈자리를 정확히 메우기 위해 적응하다가 그것을 완전히 대체한다. 그러나 그들은 각기 다른 특질을 물려받았으므로 똑같지 않다. 그리하여 한 번 멸절한 종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멜서스의 원리에 따라 생존할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개체들이 생겨날 때, 반드시 생존 투쟁은 발생한다. 이 투쟁의 결과는 다수의 죽음과 소수의 변화를 동반한 계승이다.

 

 언뜻 보면 냉혹하기 그지없는 생존의 원리가 인간과 전혀 무관할까? 물론 동식물을 위주로 분석한 다윈의 이론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변화하지 않는 것들은 멸절한다는 인용문은 긴 시간을 가정해야 성립한다. 다만 나는 자연 선택이 모든 유기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지질학을 다루는 11장과 12장에서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가장 미약한 유기체인 씨앗이 가장 다양한 지역에 분포하며, 생활 조건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한 종이 멸절할 수 있다. 또한, 현존하는 종에게도 유용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으며 오래전에 사라진 형질이 후손 세대에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자연의 불완전함은 그 안에 속한 어떤 종에게도 적용된다.

 

 자연과 인간은 동화될 수 없지만,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기는 언제나 조용히 닥쳐온다는 것이다. 멸절된 종과 현존하는 종 간의 투쟁보다도, 생활 조건의 변화보다도 치열한 것은 동종 사이에 일어나는 생존 투쟁이다. 외부의 위협은 종을 강하게 만들지만, 내부의 문제는 아주 천천히 종을 멸절시킨다. 멸절하는 종의 대표적인 특징은 세대 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멸종에는 여러 가변적인 요소가 존재하지만, 그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윈이 초판에서 창조론을 정면으로 반박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생각을 밝혀야겠다. 『종의 기원은 출간된 이후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외부의 압력에 의해 용어를 첨가하거나 수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논조가 창조론을 비관하는 입장임은 변함이 없다. 그가 주장한 이론들 중 일부는 틀렸음이 증명되었고, 일부는 판게아 이론이나 원시 미생물의 발견으로 보강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생물학과 지질학이 증명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남아 있다. 다윈은 그러한 부분에 대한 반박을 예상하고 이렇게 쓴다.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한 설명보다는 설명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에 비중을 더 많이 두는 기질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나의 이론을 거부할 것이다. 반면, 유연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미 종의 불변성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일부 박물학자들은 이 책에 의해 모종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비워 놓은 우연과 복잡성을 그랬을 것이다라는 추측보다 전지전능한 존재의 개입으로 설명하는 편이 나에게는 더 합리적으로 여겨진다.


 다윈의 이론은 출간 직후 어떠한 이론보다 가장 많은 공격을 받았고, 동시에 가장 많은 옹호를 받았다. 그것은 이 학문의 물결이 종교의 심오한 진리를 공격하는 것 이상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지성의 싸움은 단순히 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지식은 곧 삶에 직접 타격을 준다. 어떤 깨달음이 머릿속에 각인되는 순간, 그 사람은 예전과 같이 사고할 수도, 행동할 수도 없다. 코끼리를 인지하는 사람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언어의 의미보다 언급되는 단어에 먼저 반응한다. 찰스 다윈의 연구를 통해 활성화된 진화론은 여전히 창조론과 대립 중이며 이 정신의 투쟁은 곧 생존의 원리와 직결될 것이다.


 나는 박물학자가 아니기에 그의 어떤 부분이 틀렸고, 어떤 부분이 맞는지 일일이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박할 수 있다. 『종의 기원의 초판은 결론에 이르러서 상당히 희망에 찬 전망을 내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생명이 미래에도 과거만큼이나 오래 존속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도 있다. 또한 자연 선택은 오로지 각 유기체에 의해, 그리고 각 유기체의 이득을 위해 작용하므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자질은 완벽해지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찰스 다윈은 순진하게도 인간을 자연에 속한 하나의 종으로 보았다. 그의 이론이 동종 간의 억압을 합리화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명분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만약 그가 현재의 세계를 본다면, 지구의 시계에서 인간이 움직인 영역이 지극히 미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식의 저주를 택했고,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엇갈린 생존 투쟁은 한계가 없는 형태로 굴절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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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술사 : 마크 트웨인 단편집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 3
마크 트웨인 지음, 신혜연 옮김 / 이소노미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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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음의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예상하지 못한 언행과 상황을 제시하거나, 예상한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거나. 신기하게도 이 방식은 웃음의 정반대에 놓인 공포의 전달 방법과 동일하다. 현재 내가 읽고 있는 세 명의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과 잭 런던, 그리고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는 각자의 장단점이 뚜렷하다. 그중 마크 트웨인은 웃음에 가장 능통하다. 그가 한 말과 쓴 글들은 언어와 시대의 장벽을 뚫고 독자인 나에게 큰 웃음을 준다. 가벼운 웃음, 비웃음이 아니라 정말 책을 읽고 낄낄거리는 웃음 말이다. 그것이 이야기의 본질 아닌가? 


 누군가 나에게 왜 그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영어를 공부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항상 주저없이 '좋아서' 혹은 '재미 있으니까'라고 대답한다. 다른 이유가 또 있을까? 있다고 해도 처음 대답을 능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수업 시간에 분석의 대상으로 접근하다 보니 나는 마크 트웨인이 미국 최고의 유머 작가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최면술사』는 편하게 볼 수 있는 책이다. 대부분 그의 자서전에서 추려낸 글로 이루어져 있으며 편집자의 의도가 담긴 두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감기 치료법>과 <우울증 치료제>, 두 단편소설을 제외하면 제목이 없는 글들에 편집자들이 제목을 붙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한 시도들에 대해 나는 만족한다. 대부분의 가제들이 핵심을 짚었다. 

 

 마크 트웨인이 주로 사용하는 웃음의 방식은 비틀기가 아닐까 싶다. 독자가 당연히 이것이라 예상하면, 그는 재치있게 거기서 도망친다. 허를 찔린 우리는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곧 복장을 갈아입은 동명의 신사가 정곡을 찌르는 말을 남기면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아 참, 지금까지는 소설이었답니다. 물론 사실도 들어있습니다."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일을 들려주는 듯이 생생하게 이야기를 전한 후, 그것이 허구였음을 밝히는 부분, 그러나 사실도 들어있다고 귀띔하며 마무리를 짓는 순간,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그가 들려준 일화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그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가 함정임을 알아채면 무릎을 탁 치는 것이다. 


 소설에서도 이러한 재치는 빛난다. 너무나 유명한 「뜀뛰는 개구리」는 고사하고, 「이상하고 끔찍한 중세 모험담(원제를 번역해 보았다)」의 마무리는 이렇다. 아버지 때문에 평생 여자임을 숨기고 공작이 된 콘래드는 자신에게 구애하는 여인 콘스탄스를 거절했고, 콘스탄스는 자신이 콘래드의 아이를 배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인 콘래드와 그의 아버지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쓴다. "사실, 주인공을 이런 아슬아슬한 상황에 처하게 해놓기는 했는데 이 상황에서 빠져나오게 할 방법을 모르겠다. 그러니 나는 그만 여기서 손을 떼겠다." 세상에, 완결되지 않은, 아니 완결될 수 없는 이야기라니! 얼마나 애간장이 타는가? 그러나 이야기가 원래 그렇다. 끝나는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아니면 열린 결말이든 이야기는 끝내 도달하는 지점이 있다. 마크 트웨인은 그것을 살짝 비틀었을 뿐이다. 어차피 허구의 이야기인데, 그들이 어떻게 되든 무슨 소용이람? 


 마크 트웨인을 보며 내가 읽는 책과 글을 돌아본다. 그래, 원래 문학은 재미를 추구했지.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 계속된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문학은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면 그야말로 이상하고 끔찍해진다. 근래에 내가 쓴 글이 지나치게 의미에 중점을 두지 않았나 싶다. 의미는 아름답고 희망적이지만, 흥미롭지는 않다. 의미가 재미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원래 문학은 그러했으니, 유머가 담긴 소설이 필요한 순간이다. 세상에 이로운 주제, 고운 우리말로 된 표현이 담겼다 한들, 재치가 없다면 그 책에 생명력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기이한 일이죠. 최면술사의 공연이 모두 끝나고 나서 마을에 최면술을 믿지 않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는데, 그게 바로 나였습니다. - P35

내가 쓴 원고를 아내가 검토할 때면 아이들은 항상 옆에서 돕곤 했습니다. 아내가 농가 현관에 앉아 손에 연필을 쥐고 큰소리로 읽으면, 아이들은 그 오른쪽에 앉아서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지요. 왜냐하면 특별히 마음에 드는 구절을 우연히 발견할 때마다 엄마가 삭제해버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에요. - P76

그들이 직접 출판사 주주가 되어 저작권과 출판사업에 대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는 날이 오지 않느 한 그들이나 그 후임자들이나 계속 이 상태일 겁니다. 그런데 현 지질연대가 지나기 전에 그런 날이 과연 올까요?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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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복복서가 x 김영하 소설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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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 어땠어?

 O: 뭐가?

 V: 김영하가 쓴 살인자의 기억법』. 한 시간 만에 읽었다며.

 O: 모르겠어. 정리가 안 돼. 나는 당연히 박주태가 위험한 인물이고, 은희가 연쇄살인마의 딸이라고 생각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곳곳에 이상한 점들이 있었는데, 왜 그걸 우습게 여겼을까?

 V: 그럼 너는 박주태와 경찰들이 하는 말을 믿어?

 O: 적어도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이 하는 말보다는 믿을 만해. 게다가 이 사람은 자기가 쓴 것도 기억하지 못하잖아. 이 소설은 김병수가 쓴 기록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중간에 자기가 죽었을 때 은희가 보게 될 거라는 서술도 나오잖아. 독자를 가정하고 적은 거지.

 V: 아무 것도 모르는 노인한테 죄를 덮어 씌우는 거라면? 어쩌면 김병수는 시 강의 시간에 상상의 날개를 펼쳤는지도 몰라. 대나무숲에서 시체들이 발견되었지만, 살인의 명확한 증거도 없고 말이야.

 O: 그럼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게 뭔데? 작가가 말하고 싶은 건 뭐야?

 V: 적어도 무서운 건 악이 아니라 시간이다라거나 죄책감은 본질적으로 약한 감정이다따위의 따분한 말을 전달하려는 건 아닐 테지. 애초에 첫 문장에 사람을 죽였다는 문장도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동시에 감정이입을 막으려는 장치였으니까.

 O: 변함없이 경찰은 무능하다고 비웃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그를 주시하고 있었구나. 그럼 최근에 일어난 연쇄살인과 박주태의 차에 묻은 피, 그리고 은희의 아빠라는 호칭은 어떻게 설명하지? 은희는 어쩌다 살해당한 거야?

 V: 우습지. 가장 핵심적인 기록은 누락되었다는 게. 결국 김병수는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 아니, 이 사람한테는 기록이 곧 기억이니까, 자신한테 필요한 과거만 적어놓는 셈이지. 나머지는 모두 혼돈, 또는 공으로 흘러갈 뿐이고.

 O: 뭐야, 그럼 우리한테는 알 권리가 없는 거야?

 V: 김영하가 후기에 그렇게 썼잖아. 자기는 어떤 세계를 방문한 여행자에 불과하다고. 작가한테 허용된 기록의 영역에는 한계가 있어. 어차피 그 세계에도 우리 세계와 비슷한 원칙이 적용되니까 나머지는 독자의 몫이야.

 O: 어떤 원칙?

 V: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특히, 미지의 영역에 대해.

 O: 동의하기 어려운데. 사람은 모르는 것에 당혹감을 표현하거나 도망치잖아.

 V: 너는 논란이 되는 주제를 좋아하니?

 O: , 열린 결말이나 음모론 같은 것들?

 V: 그렇지. 의견이 갈려서 타협되지 않는 주제들.

 O: 딱히. 너는?

 V: 나는 기꺼이 한쪽 입장을 택해. 동시에 다른 입장도 존중하지. 사람은 미지의 영역에 공포를 느끼는 동시에 맹목적인 확신을 품거든. 그곳에서는 인간의 믿음이 곧 근거가 돼. 사람이 가진 가장 약한 믿음은, 자신의 믿음이 확실하지 않다는 거야. 진실을 말해줘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아. 김병수가 마침내 혼돈에게 주시당하는 순간이 이 소설의 결말을 장식하는 것처럼.

 O: 나는 연쇄살인마의 생각과 대부분 달랐어. 특히 시간에 대한 인식은 정반대였지.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상의 접점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했잖아. 나는 오히려 인간은 현재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 잠시 개입하지만, 결국 인간은 현재로 돌아오지.

 V: 어쩌면 치매 환자뿐만 아니라 사람은 언제나 적절하지 못한 곳을 떠다니는 존재라는 생각도 들어. 그래도 김병수의 통찰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는 순간도 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이거거든.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기 눈 안에 있는 대들보를 못 보고 남들을 평가하는 행동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 어떤 면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기도 하고.

 O: 어찌 됐든 김병수가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럴 듯한 가르침을 전해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자주 했던 일, 또는 몰입했던 일로 형성된다는 걸. 처음에 아버지를 죽였을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필요에 의해 정당화되지만, 그다음 살인부터는 순수한 몰입감이었잖아. 이제 김병수에게 삶의 고민이란 사람을 죽이거나 살리거나, 둘 중 하나뿐이었어.

 V: 초반부에 재미 있는 에피소드가 있었잖아. 「신부라는 시를 첫날밤에 신부를 살해하고 도주한 신랑 이야기로 읽었다면서 그걸 어떻게 달리 읽겠는가?”라고 따지듯이 쓴 장면. 누가 누구한테 이해를 바라는 거지? 연쇄살인마 주제에 독자한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어.

 O: 이해도 안 되고, 용서도 안 돼.

 V: 김병수의 시각을 떼어놓고 이 소설을 보면 조금 다른 점도 발견돼. 연쇄살인마 자리에 주어가 없으면 우리는 미지의 존재에 공포를 느끼지. 하지만 그 존재가 주변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치매 환자임을 아는 순간, 공포가 아닌 다른 감정이 그 자리를 채워. 사람에 대한 감정은 꽉 찬 그릇과도 같은 거야. 내용물이 대체될 수는 있어도, 비워질 수는 없어.

 O: 박주태의 시각으로는 치밀한 수사물이고, 은희 입장에서는 비극이겠지.

 V: 개의 입장에서는?

 O: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

 V: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데, 무시할 수는 없지.

 O: 혼란, 무수한 혼란.

 

 N: 그래서 김병수는 마음의 안식을 얻었나?

 V: 감옥에 갇혔다면, 그랬겠지.

 N: 내가 보기에 그한테는 공에 이르는 것이 진정한 휴식인 것 같은데.

 V: 죽음 말인가?

 N: 죽음이 또 다른 구속인지, 자유의 시작인지 어떻게 알고?

 V: 그한테는 남아 있는 삶이 죽음보다 가혹했으니.

 N: 연쇄살인마한테 삶을 선고하는 것이 더 잔인하다니, 이해가 안 가.

 V: “아버지가 대답했다. 우린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니.” 다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앎을 택할까, 무지를 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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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전하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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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색다른 시도들을 엿볼 수 있었다. 현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듯한 묘사들이 눈에 띈다. ‘0%를 향하여‘의 경우, 영화계를 비롯한 한국 문화시장의 단면을 잘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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