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소철나무
도다 준코 지음, 이정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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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십수 년이라는 세월을 그저 참회하고 사죄하며 보내는 남자 마사유키는 3대째 대를 이은 조경사이다.

그런 그의 묵묵한 참회는 누군가의 눈에는 강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집착이고 강요로 보일 뿐이다.

그가 십수 년이나 참회를 해야 할 만큼 무슨 큰 죄를 지었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드는 것이 마사유키의 성격이나 성품으로 봐서는 그가 그렇게 큰 죄를 지었을 거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괴리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중학생인 료헤이가 무슨 짓을 해도 마사유키는 그저 자신의 탓이고 자신의 잘못으로 말하는 걸 보면 그가 사죄해야 할 대상은 료헤이임을 짐작할 수 있다.

머리가 하얗게 센 30대의 남자가 중학생인 료헤이가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면서 피해자들에게 대신 사과하고 잘못을 비는 모습은 누가 봐도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그는 료헤이의 아버지도 가족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가 봐도 아이의 잘못이 분명한 일인데도 아이를 나무라기보다 오히려 자신 스스로에게서 잘못을 찾는 모습을 보면 이 남자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가 나중에는 그의 고집스러운 태도가 어리석고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료헤이의 문제에 있어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정도로 바보스럽다.

하지만 그런 그라도 정원의 조경 문제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성실하며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전문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그가 먹고 난 밥그릇에다 담배꽁초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게 잘못된 행동인 지도 모를 정도로 왜 이렇게 실생활에선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서툰지 답답할 정도인데 그가 살아온 집안의 내력과 배경을 보고서야 비로소 납득이 갔고 그런 그에게 연민을 느낀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마사유키가 몸담고 있는 소가 조원의 실질적인 주인이자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인 마사유키의 할아버지는 조경 실력은 누구보다 탁월하지만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지도 이해할 능력도 없는 사람이라는 게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는 오로지 순간의 쾌락만 추구할 뿐 자식도 여자에게도 아니 그 누구에게도 관심따윈 없다.

그런 할아버지의 밑에서 자란 마사유키의 아버지는 아비로부터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했지만 돌아온 건 차디찬 경멸과 무관심일 뿐이었고 자신의 아들인 마사유키가 태어난 후로는 조경에 있어서는 아들보다 못한 무능력자로 낙인찍히면서 자신이 가졌던 모든 희망을 놔버리고 자포자기해버린 결과가 바로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 사람과의 강제 동반자살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런 아비의 죄까지 마사유키는 짊어지고 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자신의 죄를 사죄하고 누가 봐도 그의 책임이 아닌 일에도 스스로 책임지고자 하는 마사유키의 태도는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희생자의 가족인 료헤이조차도 부담스러워하지만 그는 자신의 태도를 굽히려 하지 않는다.계속적인 사죄는 폭력일 수도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 할 정도로 그는 이런면에선 우직하다.

그런 그가 다가올 7월 7일을 손곱아 기다리고 있다. 그날이 가까워지자 떨려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데 그가 기다리는 게 뭘까 하는 궁금증은 후반부에 가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그리고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음을... 이 모든 게 그녀를 위한 일이기도 했음을...

그런 그의 모습은 누군가의 말처럼 개를 닮아있다.

자신을 바라봐 주고 인정해주는 주인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개

마사유키에게 그녀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자신도 몰랐던 외로움을 깨닫게 해 준 사람 자신을 돌아봐줌으로써 구원해준 사람...

이야기 전반에는 마사유키의 우직스러움이 답답하게 느껴졌다면 중반을 넘어서부터는 그의 바보스러울 정도의 우직함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고 할까

전체적으로 고즈넉하고 잘 가꿔진 일본의 정원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고 안타깝게 느껴진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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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너를 생각해 아르테 미스터리 2
후지마루 지음, 김수지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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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어느 날 문득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던 옛 친구가 찾아왔다.

마치 어제 헤어진 것 같은 얼굴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다는 친구는 그날부터 여자의 집에 눌러앉어 이제는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녀의 본모습 즉 그녀가 마녀임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여자는 지금 이대로 살고 싶어 한다.

주인공인 여대생 시즈쿠가 이 시대의 마지막 마녀라는 설정은 상당히 동화스럽다.

그리고 읽으면서 이런 다소 유치 하달 수 있는 소재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자기가 궁금한데 읽다 보면 일본 소설 특유의 느낌이 강하게 난다는 걸 알 수 있다.

동화적인 소재로 사람들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교훈과 함께 모두가 행복하다는 결말이 아닌 어딘지 아쉬움이 남는 열린 결말로 여운을 남기는 것...

그런 가운데 에피소드들 하나하나에서 힐링 되는 요소를 넣어놓고 조금씩 읽는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있는 가끔 너를 생각해는 감성 미스터리의 완결판 같은 느낌을 준다.

일단 10년 만에 나타난 소꿉친구 소타라는 친구의 정체와 비밀이 이 책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다.

그는 왜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졌으며 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지...

그리고 이 시대의 마지막 마녀이자 평범한 대학생인 시즈쿠가 왜 그렇게 사랑에 냉소적이고 모든 것에 부정적이며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부정하고 있는지... 어릴 적의 그녀는 자신이 마녀임을 자랑스러워하고 할머니로부터 들은 마녀의 사명에 강한 의무감을 지녔었는데 그랬던 그녀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를 밝혀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 과정 중에 누군가를 돕는다는 마녀의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시즈쿠와 소타가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마녀의 도구 즉 마도구를 사용하면서 더불어 자신들의 과거도 떠올리게 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마녀의 도움이 필요했던 현재의 사람뿐만이 아니라 자신들 역시 조금씩 과거의 상처로부터 치유되어감을 깨닫게 된다.

소타와 마도구는 시즈쿠에게 있어 추억과 소통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한데 사실 사랑에 부정적이고 사람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시즈쿠는 어릴 적 큰 상처를 받은 후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자신도 모르는 새 주변 사람들에게 벽을 쌓아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마녀의 사명조차 거부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시즈쿠 옆에서 그녀의 상처를 같이 보듬어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소타로 인해 원래의 자신의 모습을 점차 찾아가는 시즈쿠

어느새 스스로 마녀의 후예임을 거부했던 시즈쿠가 사람들의 행복을 도와주는 존재가 마녀이며 자신이 그런 마녀의 후예라는 걸 자랑스러워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무겁지 않은... 가볍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한편의 이쁜 동화나 만화 같은 느낌을 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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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머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앞으로 328번 남았습니다
우와노 소라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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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에게만 이런 특정한 숫자와 함께 의미심장한 글이 보인다면 어떡해야 할까

단편으로 이뤄진 책에는 앞으로 자신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횟수, 거짓말을 들을 횟수, 불행이 찾아올 횟수, 놀 수 있는 횟수, 그리고 가장 무서운 앞으로 살 수 있는 날 수까지 사람이 생각할 수 있을만한 것들의 횟수가 정해진 사람의 이야기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이런 카운터가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단지 책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걸 볼 수 있고 미리 알 수 있다는 점만 다를 뿐... 이런 점을 알아차린 후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어느 날부터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는 엄마가 만든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가 보이기 시작한 남자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어느 날부터 의식을 하고 보니 카운터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고 그제서야 그 카운터의 숫자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챈다.

카운터가 끝나는 순간이 엄마와의 이별임을 알고부터 남자는 바보스럽지만 당연한 듯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엄마는 영문도 모른 채 어느 날부터 자신이 한 밥을 거부하는 아들에게 뭔가를 하나라도 더 먹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엄마의 얼굴을 보는 것도 꺼려 하면서 어느새 십수 년이 흐른다.

카운터 숫자가 주는 걸 보면서 엄마의 밥을 거부하는 아들의 심정도 그런 아들의 마음도 모른 채 그저 따뜻한 밥 한 끼 먹이기 위해 노력하는 엄마의 마음도 다 이해가 가는 부분이라 읽으면서 어느 쪽 손도 들어주지 못하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진정한 그 카운터의 의미를 알아챈 순간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엄마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통화하고 그런 아들을 반가이 맞아주는 대목에서 울컥하게 된다.

또 자신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횟수를 볼 수 있는 남자의 이야기 역시 마음 한구석을 건드려준다.

미래던 과거던 언제 어느 시기의 자신에게 전화를 5번 할 수 있다면 보통 사람은 언제의 자신에게 전화를 할까

아마도 살면서 가장 후회되거나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주인공 역시 처음엔 조금 전 자신이 가진 돈 거의 전부를 잃은 경마에서 자신이 선택한 말이 아닌 우승마에 투자하기를 원하지만 당연한 듯 이뤄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한 전화는 자신의 운명이 크게 바뀌게 된 부모님의 사고를 바꿔보고자 하지만 여의치 않는다.

당연하지만 과거의 자신이든 미래의 자신이든 누군가 전화해서 본인이라 말하며 어떤 일을 하라고 요구하면 들어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래서 이 자신에게 전화를 할 수 있는 기회는 기회임에도 웬만해선 쓸 수 없는 기회이고 주인공 역시 이를 깨닫으면서 마지막으로 한 전화가 가슴에 와닿는다.

이렇게 감동적인 내용도 있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는 기회도 있다.

불행이 찾아올 횟수나 놀 수 있는 횟수가 그런데 여러 단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거짓말을 들을 횟수였다.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혹은 알면서도 하는 거짓말이 얼마나 많을까마는 누군가가 그런 거짓말을 알아챌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곁에 있는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거짓말까지 알아챌 수 있다면 피곤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믿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주인공의 곁에서 사소한 거짓말을 하지만 본성은 착하고 성실한 남자가 하는 거짓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얀 거짓말이 대부분이었기에 주인공 역시 남자친구의 사소한 거짓말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지만 그런 그가 하는 결정적인 거짓말은 그래서 더 아프게 느껴진다.

이렇듯 책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에게 보이는 여러 가지 의미의 카운터는 그 사람의 많은 것을 좌지우지하는 힘이 있지만 아쉽게도 그걸 바꿀 수는 없다.

눈에 뻔히 보이지만 그걸 바꿀 수도 없고 그저 지켜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답답할까만은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다 유한하다.

책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이걸 깨치기 전까지 뭔가 바꿔보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해보지만 결국 깨닫는 건 자신의 힘으로 그 카운터를 멈출 수도 없앨 수도 없다는 사실뿐

그걸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현실을 충실히 살고 열심히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일뿐이란 걸 알게 된다.

따듯하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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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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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본인 스스로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스스로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여기에는 아프고 충격적인 진실이 있다.

눈앞에서 자신의 아이가 아비라는 작자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 여자라면 이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을 겪은 후 끊임없이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는 여자가 어느 날 어린 소녀의 구원을 요청하는 소릴 들었다면... 그것도 같이 있었던 사람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면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지

이렇게 살면서 어쩌면 일어날 법한 일이지만 괴이하거나 기이한 일을 소재로 하고 있는 야마시로 아사코의 단편집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은 그 바탕에는 상처의 치유와 사랑이 깔려있다.

그래서 무서울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들여다보면 슬픔과 애잔함을 느끼게 해서 무서움을 상쇄하고 있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집안에서 보이기 시작하는 남자의 유령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상생활이 흐트러지고 있는 남자

아내 역시 그가 보이지만 남편만큼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분석하기 시작한다.

그 사람의 출현 빈도 출현 시점 등을 구체화해서 어느 시점에 유령이 자신들에게 붙게 되었는지를 유추하고 그 남자의 신원을 찾기 시작하는 부부

마침내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과정은 여느 추리소설 같지만 그 이후는 조금 다르다.

이 부부의 상처가 드러나고 그 유령을 통해 죽음이 끝이 아닌 삶의 흔적이 어딘가에 남아있다는 걸 납득하고서야 비로소 아내는 마음의 짐을 조금 벗어나게 된다.

무전기 역시 사후세계와 연결된 기이한 이야기인데 그 기저에는 마음의 상처가 있다.

쓰나미로 아이와 아내를 한순간에 잃어버린 남자가 자신이 선물로 준 무전기를 통해 어린 아들과 소통하게 되는 데 그렇게 무전기를 통한 소통이 무너질 수도 있는 남자를 일으켜 세우고 새롭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의지가 된다는 이야기는 안타깝고 슬프지만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머리 없는 닭, 밤을 헤매다 와 곤드레만드레 SF 그리고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역시 머리가 잘렸지만 살아있는 닭을 몰래 숨어 키우는 아이들과 술에 취하면 시간이 뒤섞이고 혼탁해지는 능력을 이용하는 남녀 등 소재가 특이하지만 그 뒤에는 잔인한 사건이 숨어있다.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죽이는 범죄

기이하거나 괴이한 이야기만 주가 된다면 현실과 동떨어져 다소 황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작가는 잘 알고 있어서인지 현실에 일어날 법한 일에 심령현상이나 초자연적인 존재 혹은 괴이한 현상을 섞어 어쩌면 있을 수도 있을 법한 그럴듯한 판타지를 엮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괴이함 뒤에는 애잔한 슬픔이 깔려있고...

그래서인지 사건성만 본다면 무서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무서움보다 안쓰러움과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도 작가의 재량이 아닐까 싶다.

필명을 바꾸는 만큼 이야기의 무게도 분위기도 제대로 변화시켜 마치 다른 작가인 것처럼 쓸수 있는 작가의 능력이 새삼 놀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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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손을 보다
구보 미스미 지음, 김현희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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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이지만 읽으면서 한없이 쓸쓸해지고 마음이 침잠하는 걸 느낀다.

어쩌면 사랑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그려서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은 변하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져 자신을 잃고 변해가는 사랑을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너무 덤덤하게 그리고 있는 데 읽으면서 그 마음이 느껴지고 공감이 가서 더 우울해졌다.

이 책에는 4명의 남녀가 나와 각자의 시선에서 사랑을 그리고 변해가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래도 좀 더 주축이 되는 사람은 아마도 히나와 가이토가 아닐까 싶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란 히나는 그런 할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노인 요양사의 길을 걷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한창나이에 특별한 취미도 관심도 없이 살아가는 그녀가 그저 답답하게 보일뿐이다.

갑작스러운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흔들릴 때 그런 히나의 옆에서 오랫동안 그녀를 돌봐주고 사랑해주는 남자가 가이토지만 그런 가이토의 친절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히나는 그에게 별 마음이 없다. 그저 익숙할 뿐...

오롯이 가이토만 절절 애타게 끓는 마음을 가지고 일방적인 사랑을 하는 위태로운 이 연인에게 한 남자가 다가오면서 모든 것이 변해버린다.

노인 요양사의 모습을 취재하러 도쿄에서 내려온 미야자와

직업의 특성 때문이지 어딘가 자유롭게 메인 것이 없는 것 같은 미야자와와 섹스를 하면서 자신도 몰랐던 성에 눈뜨고 점차 미야자와에게 빠져드는 히나지만 미야자와는 현재 아내가 있는 몸이다.

게다가 자유로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미야자와 역시 하는 일이 위태롭고 아이를 원하는 아내를 피하기 위한 도피처로 선택한 것이 히나였고 히나가 있는 이곳이었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돈에 구애받은 적이 없는 풍족한 삶을 살아왔지만 어릴 적부터 각자의 생활에 바쁜 부모에게 제대로 된 애정을 받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 탓인지 자신의 곁에 그 누구도 가까이하지도 않고 또 상대가 너무 가깝게 근접하면 참을 수 없는 갑갑함을 느끼는... 천성이 누구도 곁에 두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차가운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에게 히나는 잠시 머무를 안식처일 뿐... 언제든 떠날 수 있다.

자신만 바라보고 모든 걸 버리고 떠나온 그녀 히나의 마음은 알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다.

누가 봐도 미야자와는 잠시 가지고 놀 상대로 히나를 대할 뿐 이란 걸 알지만 그녀가 그를 그토록 사랑한다면 아파도 내가 놔줄 수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이혼녀 하타나카와 몸을 섞는 가이토...이렇게해서라도 히나를 향한 마음을 끊고싶다.

그녀를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몇 해를 같이 살았고 하타나카의 아픈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 책임감으로 결혼하고자 하는 가이토

하지만 히나를 잊은건 아니다.히나가 떠나버린지 오래지만 지금도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뻐근해진다.

이렇게 서로 다른 방향을 보는 네 사람은 누군가는 사랑해서 함께 살지만 어느샌가 그게 일상이 되면서 반짝거림이 사라지고 또 다른 부채와 무게로 살아가거나 누군가는 사랑이 아니라 그저 책임감 때문에 묵묵히 살아간다.

사랑 때문에 죽을 것 같이 괴롭고 힘들고 사랑 때문에 행복했던 그들도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새 일상처럼 익숙해지면서 더 이상 사랑 때문에 울고 웃지 않는다.

반짝거리던 사랑이 일상에 함몰되어 가는 과정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그려져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고 읽으면서 가슴이 헛헛해짐을 느꼈다.

이렇게 변해버릴 것 알면서 왜 그렇게 사랑에 목을 매는 건지...

게다가 히나와 가이토 그리고 무책임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하타나카까지 미야자와를 제외한 세 사람의 직업이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돌보는 노인 요양사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곧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들 역시 한때는 사랑 때문에 울고 웃고 사랑 때문에 잠 못 이룬 적이 있었지만 어느샌가 혼자서 인생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노인들을 보면서 사랑의 그 부질없음이 더 뚜렷하게 대비되는 느낌이다.

쓸쓸한 이 가을에 읽으면 더 좋을만한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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