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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천국 - 세상을 뒤집은 골로새서 다시 읽기
브라이언 왈쉬 & 실비아 키이즈마트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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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과 천국'은 골로새서 '리믹스'다. 저자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가 당시 로마제국에서 폭발성과 전복성을 담은 편지였으며, 그 편지가 오늘날의 제국주의적 현실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11p) 이 점에서 출발하여 저자는 골로새서가 쓰였던 로마제국의 상황을 깊게 포착하고 오늘날과 비교함으로써, 제국의 논리는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인다. 이를 통해서 저자는 오늘날의 상황-세계화와 포스트모더니티 -에 맞게 골로새서를 각색시키고 접목시킨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낸 1세기 로마 제국에서 예수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제국의 논리를 뒤집는 정치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었다. 예수가 '주인'이라는 고백은 가이사(카이사르, caesar)가 '주인'이라는 고백을 뒤엎는 것이며, 예수가 십자가에서 평화를 이루었다는 주장은 가이사가 이뤄낸 평화를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둘 이야기 모두 옳을 수는 없는 것이다. 가이사가 이룩한 위대한 승리를 통해 죄사함, 풍성한 삶, 평화를 가져다주었든지, 아니면 예수가 로마의 십자가에서 이룩한 역설적인 승리를 통해 죄사함, 풍성한 삶, 평화를 가져다주었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다.(91p)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의도적으로 제국을 공격한다.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 안에 살아 있습니다...그는 근원이시며...그것은 그가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상기시킴으로써 제국의 통치를 거부할 수 있는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바울은 예수를 통해 성취된 이스라엘 이야기를 상기시킴으로써 제국의 윤리-가부장적 구조, 경제적 착취, 군사적 평화-와는 다른 대안적 윤리-탈퇴의 윤리(9장), 공동체의 윤리(10장), 해방의 윤리(11장), 고난의 윤리(12장)-를 따르라고 말한다. 


  저자는 골로새서를  현대에 '리믹스'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포스트모터디티 사회에서 성경이라는 '절대 명제'가 불러일으키는 당혹스러움과 문제점을 걷어낸다.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현실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런 '진리'가 종종 폭력과 억압을 동반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164p)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성경이 반이데올로기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골로새서를 포함하여 성경전체는 하나의 이야기 즉 진리체제이지만 동시에 진리체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계속해서 주변부를 소환하고 약자와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고, 열방과 온 천하 그리고 만민에 관심이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진리를 형성하고 완성시키는 방식은 배제가 아닌 십자가의 희생으로 일궈낸 포용성이라는 데에 있다.


  책을 보며 두가지 점이 감명 깊었다. 첫째, 골로새서라는 짧은 편지가 엄청난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저자는 기독교의 전폭적 메시지를 되살렸고, 오늘날 기독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오늘날의 소비문화와 환경 문제에 대한 자각을 일깨웠다. 둘째,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기독교의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오래 전부터 다원화된 종교 지평, 절대 명제를 거부하는 사회에서 기독교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 고민해 왔다.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해 탁월하게 대답해 준다. 제국의 논리를 거부하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고, '저 너머'를 붙잡으려는 향수를 버리고 지금 여기에서 관계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논증은 복음의 진리성을 증명하지 못한다. 예수 이야기로 형성된 역동적인 기독교 공동체의 삶-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고, 타인을 포용하고, 용서하고, 샬롬에 충만한 삶-만이 복음의 진리됨을 증명해 주고 우상숭배적 대안들을 철저히 거부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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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가방 2020-01-24 2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이죠. 골로새서의 현대식 탈굼도 인상적이구요. 즐거운 명절 보내시길.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아벨라르.엘로이즈 지음, 정봉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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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는 800여 년 전 중세 수도사와 수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는 온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 이야기는 이후 루소의 누벨 엘로이즈라는 소설의 원천이 되는데, 이 소설은 19세기 이전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읽힌 연애소설이다.


  아벨라르는 중세 시대에 뛰어난 신학자이자 논리학자였다. 아벨라르는 20여 세에 스승들을 능가하는 이론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아벨라르는 12세기에 신앙을 이성적으로 설명하고자 노력한 인물이었다. 그가 한 유명한 말은 우리는 의심함으로써 탐구하고, 탐구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로써는 완전히 새로운 진리 탐구방식이었으며, 아벨라르는 이와 같은 논리학의 대가였다. 그러나 바로 이 탁월한 재능이 많은 논적들을 만들어냈고, 아벨라르를 불행으로 몰아넣었다.


  엘로이즈도 아벨라르만큼이나 학문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클뤼니 수도원장 피에르 성인의 증언을 따르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두루 통하는 여성이었다. 아벨라르를 처음 만났을 때, 엘로이즈는 17세였으며, 아벨라르는 39세였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의 학문의 조예와 외모에 이끌려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사랑에 빠진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의 숙부 퓔베르의 집에 가정 교사로 들어간다. 둘은 공부를 위해 제공된 별실에서 공부보다 사랑에 몰두했으며, 결국 엘로이즈는 임신을 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퓔베르는 분노하였고,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와 비밀 결혼식을 올린다. 퓔베르는 자고 있는 아벨라르를 덮쳐 거세해 버렸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에게 수녀가 되기를 권하고, 본인도 파리의 생드니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가 된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아벨라르는 끊임없이 질투의 대상이 되고, 이단으로 몰리는 등 오랜 고통의 시간을 겪는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는 아벨라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우연히 엘로이즈에게 입수되며 시작된다. 아벨라르가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실례(實例)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정념을 자극시키기도 하고 또는 그것을 가라앉히기도 하는 데에 말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일세. 그러므로 나는 자네의 불행에 대하여 열띤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주었지만, 이번에는 멀리에서나마 나 자신의 불행 이야기를 자네에게 써 보내는 일로 다시 또 자네를 위로하고자 하는 것일세. 자네의 시련과 나의 고난을 비교함으로써, 자네는 자네가 겪은 시련들이 아무것도 아니고, 별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 고난들을 견뎌 나가는 일에 보다 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일세.”  -17p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 이야기는 종교적 규범이 낳은 위선과 비극이기도 하다. 엘로이즈가 사랑 때문에 성의를 입었다는 고백과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오히려 엘로이즈에게 가르침을 주는 아벨라르의 태도는 종교적 위선이자 비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편지가 위선적이고 비극적인 편지로 읽히지만은 않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이 편지가 사랑만을 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수도사와 수녀의 관계로 만난 이 둘의 편지에는 수도사와 수녀의 삶, 신앙, 죄의식, 내적 갈등과 고뇌가 오롯이 새겨 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휘둘리는 한편 종교적 규범혹은 도덕성이라는 자신들에게 더 귀한 것을 위해서 사랑을 절제하고 감내하며 갈등한다.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 혹은 ‘도덕성을 지켜내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인간의 숭고함에 감동을 느꼈던 것은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들은 바라노니 차라리 연구, 재능, 애정, 불행한 결혼 그리고 개전으로 맺어진 두 사람이 이제는 한결같은 축복 속에서 영원히 맺어지기를"

-파리의 페르 라셰즈에 있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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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이상과 현실
김민제 지음 / 역민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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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나에게 ‘도끼‘같은 책이다. 이전까지 나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신념과 인간에 대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지만 인간의 ‘전적 타락‘과 ‘연약함‘을 말하고 ‘인본주의‘를 비판하는 기독교의 논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며 역사의 진보라든지 인간이라든지 이념 같은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책은 1998년도에 출간된 《서양 근대 혁명사 삼부작》 시리즈 중 제 2부로서, “서양의 3대 혁명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혁명에 관하여 요즈음 서양에서 논의되고 있는 역사적인 해석들을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저자는 세 혁명에 관한 해석을 혁명의 ‘꿈’과 ‘현실’로 대비시켜서 ‘혁명에 대한 긍정적 해석’과 ‘혁명에 대한 부정적 해석’을 각각 소개한다. 프랑스혁명의 경우에는 ‘정통주의적 해석’과 ‘수정주의적’ 해석을 소개하였다. 

  정통주의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프랑스혁명을 설명한다. 계몽 사상에 입각하여 부르주아와 민중이 함께 귀족을 타도한 아래로부터의 계급혁명이라는것이다. 위대한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낳았고, 그 이념은 전 유럽에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까지도 혁명의 모델이 된다. 수정주의 해석은 마르크시즘의 퇴조와 함께 제기되었다. 수정주의 해석은 정통주의 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부르주아와 귀족은 이해관계가 일치된 하나의 엘리트계급이었고, 부르주아는 구체제의 특권장치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기 위해서 민중을 동원하여 혁명을 일으켰다. 혁명 동안에 이뤄진 학살과 공포정치는 혁명이 스스로의 이념을 짓밟는 것이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은 이후 나폴레옹의 독재로 이어졌고, 오히려 근대화에 역행한 ˝일으킬 만한 가치가 없었던 혁명˝이었다.

  저자는 “균형적이고 초연한 자세”를 유지하며 독자로 하여금 정통주의와 수정주의의 논리를 비교해보는 ‘지적인 연습’을 돕고자 한다. 그러나 과연 저자는 정통주의와 수정주의가 각자의 논리로 대립하는 격전지에서 객관적인 해설을 해냈을까?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 저자도 사료 선택의 문제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정통주의와 수정주의 해석의 인용이 대부분 영미 사가들인데, 이들은 정통주의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랑케는 “사실 그 자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는 말로써 역사 해석의 객관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는 더 이상 객관적인 학문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포스트모던론자들은 역사를 ‘문학’이라고 간주하며, 역사 의 ‘무제한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비록 저자가 “객관적이고 초연한 자세”를 취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가변적이며 잠정적인 역사학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준다. 저자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역사적 배경과 역사학 방법의 변천을 함께 소개하여 역사학 전반의 이해를 돕는다.

  한편 저자는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보여주었다. 정통주의자들은 프랑스혁명을 통하여서 변화된 사회의 모습을 드높인다. ‘인권선언’은 보편적 인간을 위해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천명하였다. 혁명 이래로 부르주아가 제시한 국민주권의 원리는 민중 동원의 도구였다고 할 수 있지만, 19세기 내내 계속 표방되는 중에 민주적인 원리가 축적되었다. 반면에 수정주의자들은 정통주의자들의 이상과 달리 프랑스혁명은 우연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혁명의 의미를 축소시킨다. 또한 프랑스혁명 중에 일어난 인권유린과 끔찍한 학살을 고발하며 오히려 일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사건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논리를 비교하며 독자들이 해야 할 일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메꾸는 일일 것이다. 오늘날 혁명을 희망하는 이들은 프랑스혁명의 과정에서 자유와 평등으로 저질러진 비극을 보아야 할 것이며, 혁명을 외면하는 이들은 혁명으로 일궈낸 성과를 다시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이상은 숭고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프랑스 혁명의 높은 이상은 상당 부분이 현실 세계를 초월한 고차원적인 이념의 세계에서만 존재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는 이념의 세계조차도 넘어서는 신화의 경지에 있기도 하였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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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학의 왕국 - 호락논쟁 이야기
이경구 지음 / 푸른역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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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한 사회의 사상을 알지 못하고 그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있어서 성리학은 학문을 넘어선 삶의 태도이자 지표였으며, 회복되어야 할 이상세계의 기준이기까지 했다. 조선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사상이었던 유학 특히 성리학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조선, 철학의 왕국-호락논쟁 이야기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3대 논쟁' 중에 가장 덜 알려진 호락논쟁을 다룬다. 호락논쟁은 25년간 연구한 저자조차도 이해하기에 힘들고 사상을 연구하면 할수록 혼란에 빠진다고 표현할 만큼 난해하다.그렇지만 책 제목에 호락논쟁 이야기라는 말을 붙인 것처럼, 저자는 유학과 성리학의 탄생부터 호락논쟁 이면의 이야기까지 역사적 흐름, 논쟁 주역들의 대화와 일상, 심성과 욕구도 함께 설명한다

 

1. 곧음이냐 유연함이냐


  명이 멸망하자 조선은 유일한 유교 국가가 되었다. 그러니 조선을 주자학의 나라로 세워 유교의 명맥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이 송시열 이후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강력한 생각이었다. 송시열로부터 이어지는 노론 학맥은 충청도의 권상하와 서울의 김창협으로 나뉘어 충청도의 호론과 서울의 낙론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나뉜 호론과 낙론 사이의 논쟁이 바로 호락논쟁이다. 호락논쟁은 18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까지 이어졌다. 호락논쟁이 일어난 18세기는 안팎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시기였다. 오랑캐라고 무시해온 청의 문화와 지배는 점차 융성하고 확고해졌다. 조선 내부에서는 도시의 성장과 세속화, 여러 계층이 떠오르며 기존 체제에 균열이 생겼다. 변화되는 환경에 호론과 낙론은 서로 다르게 반응했다. 호론은 송시열의 정신을 올곧게 계승하였다. 여전히 청은 오랑캐이자 타도할 적이었고, 남인과 소론은 배척의 대상이었다. 반면에 낙론은 새로운 국면에 유연하게 반응했다. 다른 학파와 정파의 주장에 귀를 열었고, 청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이들의 논쟁은 치열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말과 글이 오갔고, 분파가 형성되고 갈라졌으며 말과 글은 칼이 되어 많은 사람을 베기도 하였다.

  

  호락논쟁은 사단칠정 논쟁을 계승하는 성격이 있다. 사단칠정 논쟁은 만물의 형성 원리인 이()와 만물의 근본 질료이자 형질인 기()가 인간의 사단과 칠정에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에 비해서 호락논쟁의 성격은 인간 정의에 대한 문제로서 상대적으로 구체적이었다. 호락논쟁은 크게 세 가지 주제를 놓고 논쟁했다. 먼저는 마음의 정체에 대한 논의이며, 두 번째는 인간과 물성, 인간과 외물의 관계 마지막은 성인과 범인, 인간의 변화와 평등에 관한 논의였다. 마음의 정체에 대한 논쟁은 수양의 문제였고, 인간과 물성은 타자에 대한 인정과 관련된 문제였으며, 성인과 범인은 다양한 계층에 대한 인식의 문제였다.


  각각의 입장에는 앞서 언급한 새로운 상황에 대해 올곧은 호론과 유연한 낙론의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호론은 이이의 철학을 계승하여 기()로 인해 움직이는 현실 세계를 중시했다. 이이의 철학은 기의 가변성을 긍정하자 현실에서의 변화에 주목했다. 그러나 기의 중시는 기로 인해 생겨난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강조로 흐를 수 있었다. 호론의 사상은 후자였다. 이이의 철학을 계승하며 기로 인한 차별과 분별을 강조하였고, 질서에 균열을 가하는 움직임을 경계했다. 반면에 낙론은 이()의 보편성을 강조하며, 성인과 범인 인성과 물성은 같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보편성은 유교 문명만의 보편성으로서 청나라와 신분질서에까지 보편성이 확장되지는 못하였다.

 

2. 탁류 속으로

 

  호락논쟁은 정치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노론은 숙종 후반부터 정계와 학계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고 영조 대에 거의 굳어졌다. 이 시기에 노론은 호론과 낙론으로 학파가 갈라지고 논쟁이 벌어졌다. 숙종 대에서 경종 대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발 딛고 있는 정치는 복잡했고 살얼음판이었다. 특히나 경종 때의 신축환국과 임인옥사는 노론, 특히 낙론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후 즉위한 영조는 탕평 정치를 선포하고 더 이상 붕당의 논쟁과 사문 시비를 허용하지 않았다. 탕평 정치에서 주도권은 군부이자 공을 대표하는 국왕에게 있었고, 어느 한 붕당이 정권을 잡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호론과 낙론은 영조의 탕평 정치에 서로 다르게 반응했다. 낙론은 탕평 가운데서도 노론의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탕평 정치의 주도권이 노론에게 있었지만, 호론은 노론이 완전한 주도권을 잡는 때까지 기다렸다. 영조 후반 왕권이 강해지자 그에 따라 외척의 권력도 강해졌다. 당시 외척은 홍봉한을 중심으로 하는 북당과 정순왕후 계열의 김한구·김구주 부자를 중심으로 하는 남당으로 대립하였다. 남당은 학맥과 인맥으로 호론과 연결되었고, 북당은 낙론과 연결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은 호론과 낙론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을 이었지만, 영조와는 달리 국왕이 주도하는 의리를 강조했다. 이에 따라 정계는 국왕을 따르는 시파와 붕당의 의리를 고수하는 벽파로 나뉘었다. 이들의 갈등은 정조 말년에 한원진의 시호 문제로 극단에 치닫고 정조가 죽은 후 파국에 이르렀다.


  정조가 죽은 후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한 정순왕후는 호론과 결탁하였다. 영조 후반 청류를 지원하여 척신과 대항했던 자신들의 사상을 저버리는 순간이었다. 호론은 스스로 척신이 되어 정순왕후와 함께 사학을 금지한다는 명목으로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정과 사의 이분법은 천주교를 신봉했던 많은 인물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정계에서는 남인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고 낙론의 김건순이란 인물과 혜경궁의 동생까지도 사사되었다. 이러한 조처는 사상의 자유와 새로운 탄생을 경직시켰다. 서울에서 자유로운 문학을 전개하던 자들과 낙론의 한 부류로 청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촉구한 북학파는 모두 활기를 잃었다. 사상의 전환을 불러온 홍대용과 박지원, 기발한 글을 썼던 이옥은 스스로를 검열하고 무기력함을 절감하였다.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자 정국은 급변하였다. 순조는 서울의 명문 안동 김씨 출신 순원왕후와 혼인하여 친정을 시작하였다. 안동 김씨 세력은 정국 변화를 주도하였고 이에 벽파는 일련의 사건으로 몰락했다. 결국 벽파와 호론의 학자들은 역적이 되어 제거되었다. 이렇게 정권을 장악한 순조의 외척 안동 김씨 세력이 순조·헌종·철종 때까지 정치를 주도한 것이 바로 세도정치다. 그리고 그 세도정치 기간 동안 호론이 벽파에 종속된 것 이상으로 낙론은 세도정치에 종속되었다.

 

3. 다른 지평에서

 

  호락논쟁은 순수한 학문적 열정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이단으로 규정하며 정쟁과 연관되고 현실과는 동떨어지게 되었다. 한원진은 도교, 불교, 허형을 비판하는 삼무분설을 통해 낙론을 거세게 몰아붙인다. 만물의 원리로써 천하를 다스린다는 보편 사상을 말하지만, 그 안에는 배제와 차별의 논리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낙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말로는 성인과 범인이 같다고 말하고, 인간의 평등을 강조하면서도 실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호락논쟁은 점차 경직되었고 극단으로 치달았다.


  극단과 포화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배태되어 있는 법이다. 호락논쟁이 현실과 유리되어 이상만을 추구할 때 지역과 정파를 가리지 않는 소수의 학자들은 실()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의 폐해를 보며 진실, 현실, 실천, 무실 등을 외치며 자신을 수양하고 실천하는 실()로써 성리학의 이상세계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해석이 난무하고 어느새 본질로부터 멀어져 폐단을 드러내는 논쟁에서 소박했던 정신을 되찾고자 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성리학 세계관을 뛰어넘어 새로운 사상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홍대용은 호락논쟁과는 다른 지평에 서 있었다. 홍대용은 노론의 명문 출신으로 정파로 따지자면 낙론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정파에 얽매이지 않았고, 공평하게 보고 두루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닌 인물이었다. 홍대용은 청에 다녀온 이후 개방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 그의 저서 의산문답에서 그는 유학 중심, 인간 중심, 더 나아가 우주 중심의 모든 중심성을 해체하고 상대적인 관점을 취했다. 이것은 외물에 대한 평등과 연대의 정신으로 뻗어 나갔다. 홍대용은 경직되어 가는 사상논쟁과 정쟁 속에서 새로운 사상과 가능성을 열어젖힌 인물이었다.


4. 이해로서의 역사


  호락논쟁은 저자는 물론이거니와 당시의 학자들도 어려워했던 내용이었다나도 예전부터 몇 번씩 한국사상에 관해 공부해보고 싶었지만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렇지만 이 책은 적절한 설명과 비유를 들며 간결하게 서술하여서 편히 읽을 수 있었다또한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며 호락논쟁의 역사성을 재현해낸다그렇지만 조선 후기에 이뤄진 정치적 다툼을 호락논쟁과 연결시켜서 설명하는 부분은 그 연관성이 와닿지 않았다더불어 이것이 학문적 논쟁인지 정쟁인지 학문적 논쟁이 정쟁에 이용된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다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논쟁의 지속성이라든지 파급력의 차원은 약간 의문스러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곳곳에서 시대와 사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호락논쟁의 의미를 찾고 호락논쟁과 현대를 엮으려는 저자의 노력은 인상적이었다개인적으로는 그들이 학문에 임하는 자세와 열성은 많은 배움이 되었고유학과 세상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통해서 조선시대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사실 조선, 특히 성리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강력하다. 그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오늘날 역사는 대중들에게 꽤 인기 있는 상품이 되었다. 역사를 얘기하는 장도 다양해졌다. 누구든지 역사에 접근할 수 있게 되자 역사에 대한 다양한 평가도 이뤄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호사가로서 역사에 기웃거리며 심판자로서 역사를 판결하는 것 같다. 이들은 호락논쟁이나 성리학에 대해서 고리타분한 역사거나, 무익한 논쟁, 혹은 조선의 후진성을 상징하는 시대착오적인 역사로 단정 짓는다. 역사는 (옛날)인간에 대한 이해이지만 이들에게는 역사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결여되어 있다. 호락논쟁 이야기를 통해서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으며 그들의 사상과 삶을 통해 조선시대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면 호락논쟁은 충분히 가치 있는 역사다. 조선, 철학의 왕국-호락논쟁 이야기는 심판자와 호사가의 역사에게서 공격받은 조선의 역사, 성리학()과 호락논쟁을 훌륭히 변호해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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