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지성사, 니콜라이 베르자예프, 이경식 옮김, 종로서적1981, pp130-132


6장 러시아 공산주의와 혁명 중 일부 발췌.

  

 혁명의 의미는 역사 철학 중에서도 종교적인 기초를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이 때에 혁명의 의미는 역사에 깊숙이 내재된 묵시록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묵시록이란 역사 그 자체의 내부에서 내려지는 심판의 계시역사의 실패의 폭로이기도 한 것이다아무런 방해가 없는 진보란 불가능하다어떠한 창조적 힘도 없을 때 그 사회 위에 내려지는 심판을 피할 길은 없다이 때 불가피한 혁명은 하늘이 명하는 바일 것이며거기서 시간의 단절이 생긴다하나의 중절(中絶)이 생기게 되며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모든 힘이 개가를 울리게 된다이들 모든 힘은만일 우리가 아래에서부터가 아니라 위에서 바라보게 된다면 무의미한 것에 내려진 의미의 심판암흑 속에서의 섭리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혁명은 역사의 작은 묵시록이며 역사에 있어서의 심판이다. 혁명은 죽음과도 흡사한 것이다. 그것은 죄의 불가피한 결과인 죽음을 통과하고 있다. 전체로서의 역사의 종말은 마치 세계가 죽음을 통과해서 신생(新生)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 안에서 인간의 개인 생활 가운데서, 하나의 종말은 주기적으로 나타날 것이며 또한 신생에의 부활을 위해 죽음은 찾아오게 될 것이다. 혁명에다 공포와 음산함, 죽음과 유혈의 빛깔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혁명이 죄가 되고 죄의 확인이 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전쟁이 죄가 되고 죄의 확인이 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혁명은 역사의 운명이 되고 있으며 역사적 존재의 불가피한 숙명이기도 하다. 혁명에 있어서 심판은 부정을 가져왔던 악의 힘 위에 내려지겠으나, 심판을 내리는 모든 힘이 또한 스스로 악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혁명에 있어서 선 그 자체가 악의 힘에 의해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선의 힘은 역사 속에서 선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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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신앙 - “내 상처를 보고 만져라.”
토마시 할리크 지음, 오민환 옮김 / 분도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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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지니고 있었던 상처를 통한 묵상. 그분의 상처와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이 많은 위로가 된다.

나의 신앙과 나에게 신앙으로 제시된 것은 ‘마르티노 성인의 시험‘을 치르게 될 것이다. 나는 피흘린 적도, 상처 자국도, 흉터도 없는, 상처 입지 않은신, 이 세상에서 내내 춤만 추는 신들관 종교들을 믿지 않는다. 그것들은 시장에서 그들의 휘황찬란한 매력만 보여 주고 싶어 한다.
나의 신앙은 가파른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 상처 입은 그리스도의 좁은 문을 지나 하느님께 나아갈 때, 가난한 자들의 문, 상처 입은자들의 문을 지날 때 의심의 짐을 내려놓고 내적 확신과 고향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부자, 배부른 자,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자, 아는 자보는 자‘, ‘건강한 자‘, ‘경건한 자‘, 지혜롭고 신중한 자‘는 그 문을 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5 참조).
- P16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이 외침에서 토마스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어떤 형이상학적 정의도 제공하지 않는다. 어쩌면 요한복음서에서 묘사된 이 기쁨의 외침은, 그리스 고전 희곡이 ‘신‘이라는 단어를 다루는 방식과 비슷하다. "사랑하는 이를 안다면, 그것은 신을 아는 것이다!" 친구를 만날 때, 거기에 신이 있다! 신은 발생한다!

그렇다. 성경에서, 바로 그에게서 하느님이 발생한다. 하느님은 그렇게 발생하는 하느님이다. 토마스 사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분과의 만남에서 하느님이 발생하는 것을 경험한다. 하느님은 여기 있고, 그분을 만질 수 있다. 유일한 중개자(1 티모 2,5)와 하느님의 관계는 직접적이며 둘 사이에는 간극이 없다.
- P32

온 세상이 ‘신의 죽음‘이라는 그림자 아래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살아 있는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가 하나 있다. 그리스도 안, 나자렛 예수 안이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알았고 그분에 대해 말했던 모든 것은 죽을 수 있고, 죽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외에는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안다. 예수가 오래전 이 세상에서 거니셨기 때문에 이 세상은 의미가있다. 본회퍼는 바오로와 루터를 떠올린다. 바오로는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 나에게는 쓰레기, 오물처럼 보인다‘라고 했으며, 십자가에 처형된 그 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기로 작정했다(참조: 필리 3,8; 1 코린 2,2).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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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 사랑과 배신이 빚어낸 드라마 비아 문고 9
새라 코클리 지음, 정다운.김진혁 옮김 / 비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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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신비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것은 마치 잔잔한 파도처럼 일렁인다. 쉬이 잡히지 않기에 ˝죽고 돌아서고 바라보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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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깊은 샘 (반양장) - 고대 교회에서 현대까지 영성으로 읽는 기독교 역사
제럴드 L. 싯처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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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에는 풍성한 유산이 있다. 오늘날 ‘근시안적 시야에 포로‘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눈을 밝혀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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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역사와 만나다 - 유대교의 한 분파에서 세계 종교가 되기까지 2,000년의 이야기 비아 만나다 시리즈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지음, 양세규.윤혜림 옮김 / 비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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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오스와 카피도키아 학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유한한 피조물이 초월적인 하느님과 연합할 수 있는가의 물음이었다. 만약 (그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받아들인 정식을 인용하자면)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 인간이 하느님이 되기 위한 것이라면‘ 성자나 성령이 하위의 하느님이나 최악의 경우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을때, 이는 설득력이 있는가? 오직 하느님만 피조물이 하느님과 연합하게 할 수 있다. 그보다 열등한 중재자는 하느님 자신에게서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이다. 에우노미오 스파‘에 대한 카파도키아 학자들의 논변은 대개 복잡하고 미묘하지만, 궁극적인 문제는 단순했다. 성자가 우리를 성부에게 연합하게 한다면, 그리고 하느님만 우리와 하느님을 연합하게 할 수 있다면, 성자는 하느님이다. 그리고교회의 성사와 신앙인의 생활 가운데 우리를 성자에게로 연합하게하는 것이 성령이라면, 그리고 하느님만이 우리와 하느님을 연합하게 할 수 있다면, 성령 또한 하느님이어야 한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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