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 - 알렉산더 슈메만의 주의 기도 해설 비아 시선들
알렉산더 슈메만 지음, 정다운 옮김 / 비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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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최고의 주기도 해설. 주의 기도의 의미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설명한다. 이따금씩 무신론을 고려한 변증도 담겨있다. 구소련인들이 라디오에 귀기울여 들었을 모습을 생각하니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뒤에 있는 저자 소개도 상당히 자세하여 많은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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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에 대해서 생각함.

대학에서 여러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으며 알게 된 재밌는 사실은 하나같이 자신의 전공 이외의 분야에 대해서 얘기할 때에 그들이 조심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중국 송나라의 역사를 전공한 한 선생님께서는 항상 "제가 이 부분은 잘 모르지만..."이라는 말을 붙이기를 좋아하셨다. 그분은 송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개론적인 지식만을 얘기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전공만 해도 여러 의견이 있는데, 자신의 전공 이외 다른 부분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니 확신은 대개 게으름과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가설을 세워본다. 한 현상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성실히 여러 의견을 접하고 그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의견을 자신의 것으로 발전시킨다. 그는 이성과 감성을 최대한 동원하여 탐구한다. 그러나 게을러 한 현상의 단면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의 게으름은 스스로를 근시안적 시야에 가둬 무지와 배제를 낳는다. 그는 자신의 시야가 갇혀 있는지도 모른 채, 성급하게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확신하고 다른 의견을 틀린 것으로 손쉽게 판단한다. 한편 종교적 의제와 연관된 경우에 확신은 더욱 골치아픈데, 이 때의 확신은 신앙이라는 성스러운 덮개(sacred canopy)로 절대성을 획득하게 된다. 절대성을 획득한 확신은 곧이어 배제를 넘어 심판하고 공격하는 칼이 된다.

손쉬운 확신과 달리 진리 탐구의 여정은 지난한 자기성찰과 자기객관화의 과정이 아닐까. 새로운 것을 접하고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기존의 생각이 깨지거나 심화되어 사유의 지평은 넓혀나간다. 특히 신앙의 여정은 끊임없이 절대적인 신 앞에서 나의 위치를 확인하고 스스로의 모습을 반추하며 삶을 선택하는 것 아닌가.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확신으로 가득한 한 기독교인에게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 장로교, 침례교, 오순절파, 성공회, 콥트교회, 칼데아 그리스도교, 에티오피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를 비롯한 여러 종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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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2

제6편 러시아의 수도사

89-90p




사람들의 악행이 분노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비애로 그대 마음을 어지럽히고, 심지어 그 악한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더라도, 그런 감정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라. 그리고 즉시, 사람들의 이 악행이 그대 자신의 책임이나 다를 바 없다고 여기고 스스로 고통을 찾아 나서라. 그 고통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참아내면 그대의 마음도 가라앉고 그대 자신도 죄인임을 깨달을 것이니, 이는 유일하게 죄 없는 사람인 그대가 악인들에게 빛을 비춰줄 수도 있었건만 그대마저 그 빛을 비춰주지 않았기 때문이로다. 만약 비춰주었더라면, 그대는 자신의 빛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길을 밝혀주었을 것이요, 악행을 범한 그자도 그대의 빛으로 인해 아마도 그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니라. 또 빛을 비춰주었건만 사람들이 그대의 빛 속에서도 구원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더라도, 결코 꿋꿋함을 잃지 말고 천상의 빛의 힘을 의심하지 말지어다. 지금 구원받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구원받게 될 것임을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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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씻으라는 것으로 시작된 명령은 점차 내용이 구체화되면서 17절에 이르러 억압하는 자를 바로잡고 고아와 과부를 위해 재판하라는 명령으로 끝난다. 

16-17절이 말하는 손을 씻고 선행을 배우라는 것은 새로운 제의를 배우라는 요구가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에게 공의를 행하는 것, 곧 그들을 변호하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사야 1장은 이스라엘에게 예배나 제사의 개혁이 필요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더 정성스러운 예배, 더 간절한 예물이 아니라 성전 바깥에서 고통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올바른 행실이야말로 성전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예배답게 한다.

가난한 이웃에 대한 공의야말로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를 의미 있게, 하나님이 받을 만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삶을 수반하지 않는 제사는 가증하고 헛되다는 평가를 내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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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부류의 사람들 모두는 그 능력에 따라서 법률을 어기는 파괴자들이거나 그럴 경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범죄는 물론 상대적이고 다양합니다. 그들 대부분은 다양한 분야에서 더좋은 것의 이름으로 현재의 것을 파괴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사상을 위해 시체와 피를 건너뛰어야 한다면, 자기 양심에 따라서 피를 뛰어넘는 걸 스스로 허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사상과 그것의 중요도에 따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379p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괴로워하라고 하지요. 혹여 자신의 실수를 인식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그것이 그에게 강제 노역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벌이 될 겁니다.
3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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