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번체제를 확립한 도쿠가와 막부는 체제 유지를 위해 쇄국정책을 지속하였다. 서구의 위협에 직면한 막부는 동아시아 끝에 고립된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네덜란드를 통해 얻고 있던 정보를 활용하여 ‘신속히’ 개항으로 선회하였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이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사화(士化)한 사무라이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정치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1603년 성립한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체제는 ‘복합국가’라고도 하는 막번체제였다. 막번체제는 일종의 봉건제인데, “각 번이 막부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막부는 번의 행정권, 경찰권, 징세권을 인정해”주었다. 막부는 ‘무가제법도’라고 하는 일련의 제도를 통하여 번을 견제하였다. 그렇지만 막부의 권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막말 막부와 조정, 막부와 번의 갈등은 이러한 느슨한 정치체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막말의 갈등은 사무라이 신분의 변동과도 관계가 있었다. 본래 지주였던 사무라이들은 도시(조카마치)에 모여 살게 되면서 봉록을 받아 생활하였는데, 화폐경제가 발전하자 사무라이의 실질임금은 하락하였다. 막부 권력의 한계,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 이렇게 체제 내 갈등이 잠재한 상황에서 막부는 체제를 위협하는 기독교를 탄압한 후 쇄국정책을 단행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미일화친조약을 통하여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개항하였다. 막부는 당시 청과 조선보다도 서구의 위협을 더 크게 받아들였다. 1780년대 러시아가 에조치로 접근했을 때, 지식인들은 ‘과장된 위기의식’을 드러내 보였고 아편전쟁에서 청이 패하였다는 소식은 막부 내의 쇄국론이 힘을 잃는 계기가 되었다. 이같이 당시 막부가 느낀 위기의식이 막부로 하여금 신속한 개항을 가능하게 하였는데 이 위기의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저자가 내놓은 가설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동아시아 끝에 위치한 데에서 오는 고립감이다. 제국의 그늘 아래서 안보상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었던 조선과 비교해볼 때 일본의 고립은 두드러진다. 두 번째로 네덜란드로부터 매년 받는 ‘풍설서’를 통해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점이 막부로 하여금 서구의 위협에 직면하여 신속히 개항을 결정하게 하였다.
개항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서구의 제도를 받아들이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체제에 내재한 권력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제 일본은 본격적으로 근대 국가 건설에 들어서게 된다. 이 단계, 즉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화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유학의 영향이다. 본래 막부는 엄격한 서열을 중시하여 정치참여를 제한하였는데, 유학의 부산물로서 ‘사대부적 정치 문화’가 학당과 번교를 통해서 확산되자 사무라이들은 집단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며 ‘병영국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렸다. 유학은 이렇게 막부를 무너뜨리고, 일본이 서구 문화를 수용하게끔 하는 ‘가교’ 역할을 한 뒤 서구화의 물결에서 ‘자살’하였다.
느슨한 정치체제였던 도쿠가와 막부는 개항 이후 사화(士化)한 사무라이들의 집단 상소로 무너졌고 이후 일본은 “19세기 동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를 이룬 나라”가 되었다. 그렇지만 메이지 유신이 가능했던 이유가 사상으로서의 ‘유학’보다도 ‘사대부적 정치문화’였다면 유학이 중요하긴 했던 것이었을까, 그 ‘정치문화’는 막번체제에 잠재한 체제 내 특징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질문은 유학, 당시 조선과 청, 일본의 체제를 비교하는 공부로 나아가게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