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조약, 장사 - 청 제국주의와 조선, 1850-1910 역사 모노그래프 5
커크 W. 라슨 지음, 양휘웅 옮김 / 모노그래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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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의 일방적 희생자로 여겨졌던 청은 사실 비공식 제국으로서 조선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당시 일본의 종주권 위협에 대응하여 청은 다자적 제국주의를 도입하여 청일전쟁 이후까지 일본의 도전을 견뎌냈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해 일방적 제국주의로 대체되었다.


19세기 청은 태평천국과 같은 민란, 경제 불황, 환경변화 등의 문제와 열강의 진출로 도전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기존에 널리 주장되었듯이 청이 단번에 제국주의의 희생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되는 열강의 침입으로 인한 중국의 과분(瓜分)’이라는 내러티브와 조공 체제에 기반한 중화적 세계 질서라는 이미지는 19세기에도 여전히 청이 동아시아적 의미에서 제국주의 국가였다는 사실을 가려 왔다. 청의 조선 정책을 전통적인 관점을 제쳐두고 바라볼 때, ‘다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에 취했던 조치들과 여러모로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청은 영토의 직접적인 합병 없이상대국에게 온전한 주권국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용인될 수 없을 정도로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강압을 행사하는 비영토적(non-territorial), 비공식 제국으로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이 청의 종주권에 도전해왔을 때청은 모든 외부 세력에게 동등한 접근을 제공하는 다자적 제국주의질서를 조선에 도입하였다. 이 질서는 조약과 국제법, 그리고 상업을 중심으로 지탱되었다. 조선 정책을 주도한 이홍장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시작으로 조선이 열강과 조약을 맺도록 유도하였다. 이렇게 하여 도입된 다자적 제국주의는 조약에 근거하여 여러 열강을 동등하게 대하는 조선해관을 통하여 뒷받침되었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전근대적인 조선 정책이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았다고 여겼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컨대, 이홍장이 주도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서구 열강들의 여타 불평등 조약보다 더 나은 조건이었고, 원세개가 조선의 차관 도입을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더 심한 침탈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조선이 해외에 공사관을 설립하려는 시도는 청이 아닌 알렌과 데니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고, 공사관 설립과는 별개로 고종은 여전히 전통적인 의례를 준수하였다.


비공식 제국청의 정책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측면은 상업이다. 청 상인들은 제국주의 정책의 협력자로서 조선에 들어와, 청이 구축해 놓은 제도적 틀 안에서 점차 일본 상인들을 제압해 나갔다. 청일전쟁 이후 다자적 제국주의 질서가 계속 유지되었던 것은 이들이 조선 내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을 때, 삼국간섭 같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다자적 제국주의는 시효가 다 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청을 비롯한 외국 상인들을 내보내는 한편, 철도 건설, 화폐 개혁 등을 통해서 조선을 잠식해나갔다.


청은 비공식 제국으로서 조약, 국제법, 상업에 의해서 지탱되는 다자적 제국주의를 조선에 도입하여 기존의 종주권을 유지하였고, 이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일방적 제국주의로 대체되었다. 상업을 중심으로 유지된 청의 다자적 제국주의와 그 질서 속에서 조선(한국)의 모순적인 움직임은 기존의 청-조선 관계를 다시 보게 한다. 이는 더 나아가 제국주의의 시기, 제국과 식민국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제국주의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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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완 윌리엄스는 그리스도교가 지닌 낯선 면모를 오롯이 드러내보이며 독자들을 그리스도교라는 낯선 세계로 초대한다. 우리에게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교가 지닌 낯선 면모를 제거하는 것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는 것만큼이나 그리스도교와 멀어지게끔 한다. 오히려 그 자체로 낯설고 당황스러우며 기이해보이는, 그럼으로써 때로는 상처 입히는 그리스도교와 온전히 마주할 때 그리스도교는 우리의 판단을 뒤흔들고 세계를 새롭게 보게 한다.

 

그리스도교인은 성서를 읽으며 낯선 면모와 마주하여 하느님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새롭게 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인은 역사를 읽을 때에도 낯선 측면을 봄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과거를 "성급하게 특정한 신학적 관심사와 영성의 옷을 입"히지 않고 정직하게 돌아볼 때, '영지주의'와는 달리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을 일으키는 것 같은 과거의 요소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려 한 노력을 보게 되고 그 낯선 '과거의 요소들'이 지금 우리를 형성하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렇듯 로완 윌리엄스가 그려 보이는 그리스도교는 낯선 세계이기에 독자들은 그의 글을 마치 새로운 언어를 익히듯이 읽게 된다. 예를 들어 평화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양육하며, 내어 주면에 동시에 받는 활동이 일어나고 있는 상태이고, 죽음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버티고 서 있던 무엇인가가 치워지는 것이다. 이 외에도 창조, 예수, 교회, 영원 등의 요소들과 그 전부를 아우르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설명은 우리의 감각을 새롭게 한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그리스도교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마주했을 때 주어지는 '낯설음'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천사를 그저 크리스마스 카드감으로 여기지 않고, '닿지 못하는 저편'에 대한 묘사로 받아들이듯이 지금 우리에게 낯설고 불편한 요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리스도교라는 낯선 세계에 발을 내딛을 때, 경탄과 경이에 차 신앙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낯설고 불편한 그리스도교라는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 로완 윌리엄스는 먼저 그 세계에 들어간 이들을 신뢰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하느님이 본질적으로 어떠한 분인지를 비추어주는" 그들처럼 살고 싶어 하고, 그들 안에 우리의 믿음을 두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여정은 그렇게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아도 신뢰함으로 길을 나설 수 있다.

 

로완 윌리엄스는 낯설음을 간직한 채로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것의 배후와 표면 아래에" 하느님이 활동하는 이 낯선 세계에 들어오라고, ‘(생명)을 선택하라고 초대한다. 믿는다는 것은 나도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 '결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밖에 있는 사람들은 로완 윌리엄스의 초대를 통해 그리스도교라는 낯선 세계를 풍성히 보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교인들은 마치 외부인이 된 듯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듯이 그리스도교를 다시 배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로완 윌리엄스의 글을 읽으며 진리의 "엄격하면서도 장엄하며 사랑스러운" 면모를 배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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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1
구범진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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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의 청이 만··몽의 세계제국으로 성장하고 안정된 체제를 유지한 것은 팔기제도 덕분이었다. 청은 팔기제도를 근간으로 본속주의와 격리주의에 따라 제국을 통치하였는데 이 특성은 외국과 맺은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한화하여 ·한 연합 정권으로 변모한 청은 곧 신해혁명으로 무너졌으나 그 영향은 오늘날 중국에까지 미치고 있다.


청은 누르하치가 요동에서 아이신 구룬을 선포한 1616년에 시작하여 홍타이지의 다이칭 구룬선포, 입관 이후 강건성세를 거치며 만··몽의 세계제국을 이루었다. 다양한 민족이 혼합한 키메라의 제국청은 팔기제도를 통하여 체제를 유지하였다. 누르하치가 조직한 팔기는 민정과 군정을 아우르는 여진족의 사회집단인 8개의 구사를 의미하였다. 팔기제도는 본래의 팔기만주에 청이 팽창해나가며 팔기몽고와 팔기한군이 더해졌고 이 세 팔기에 소속된 이들은 기인이라고 불리며 한인과 분리되어 황제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동시에 청은 본속주의에 의거하여 각 민족의 풍습에 따라 중국에서는 수명천자를, 몽골에서는 대칸을, 티베트에서는 전륜성왕을, 위구르에서는 이슬람의 보호자를, 기인에게는 누르하치의 계승자인 한을 자임하며 통치하였다.


청이 외국과 맺은 관계에서도 팔기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체제의 특성이 돋보인다. 청은 러시아와 네르친스크-캬흐타 조약 체제라고 하는 호혜 평등의 관계를 맺었는데 두 조약 모두 라틴어로 정식 조약문을 기록하고 만주어와 러시아어로 쓰인 조약문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체결되었다. 그러나 ‘만한일가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한인은 이 과정에서 배제되었고 조약문도 한문으로는 작성되지 않았다. 조선과의 책봉·조공체제에서도 한인·한문의 배제현상이 돋보이는데 베트남·유구에는 한인 칙사가 파견되었던 것과 달리 조선에는 기인 출신 관료만 칙사로서 파견되었다. 이는 입관 전 책봉·조공체제를 맺은 조선은 베트남·유구와 달리 대청의 질서에 속했다고 의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청은 한인의 대명과 구분되는 대청’, 다이칭 구룬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유지시켜준 것이 팔기제도였다.


19세기에 접어들며 내·외적으로 위기에 시달리게 된 청은 한화함으로써 체제를 유지시키고자 하였다. 태평천국 반란, 야쿱 벡의 이슬람 정권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미 약해진 팔기 군대를 대신하여 반란을 진압한 것은 상군과 회군으로 대표되는 한인 의용군이었다. 열강이 만국공법질서를 들이밀 때에도 청은 격리주의와 본속주의를 포기하고 직성의 통치 제도를 제국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방식으로 대처하였는데 그 결과 한인은 만주와 몽골로 진출하였고 한인 관료들이 기인을 대신하여 총독·순무에 오르는 일이 빈번해졌다. 외교에서도 한인·한문의 배제현상이 사라져 러시아와의 외교는 오히려 한인 관료가 주도하게 되었으며 교섭 언어도 만주어에서 한어로 대체되었다.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서도 이제는 한인 관료가 칙사로서 파견되었고 군대와 상인들까지 조선에 진입하게 되었다. ‘·한 연합 정권으로 바뀐 청은 한인 주도의 신해혁명으로 붕괴하였으나 청의 유산을 상속하는 작업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만주 땅의 작은 집단에서시작한 청은 팔기제도를 근간으로 하여 격리정책과 본속주의를 통해서 제국을 통치하였다. 저자가 목표로 한 청나라가 어떤 구조 속에서 어떤 원리에 입각하여 제국을 통치하였는지는 팔기제도로 해명되었으나, “청 제국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는 명확하게 해명되지 않았다. 이 점에 관하여는 커크W.라슨의전통, 조약, 장사을 통하여 쇠망기에도 조선을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제국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해명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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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파시즘 - 근대 일본의 군국주의 전쟁 철학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가타야마 모리히데 지음, 김석근 옮김 / 가람기획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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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문명국반열에 오른 일본이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은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총력전이었다. 일본 육군은 총력전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국가로 변모해야한다는 교훈을 얻었거니와, 오바타 도시로와 이사와라 간지 등이 주장하는 정신주의에 의해서 묵살되었다. 더군다나 정치의 분산화를 꾀하는 메이지 헌법 체제에서 일본은 총동원 체제로 변모하기에 적절하지 않았기에 미완의 파시즘일본의 정신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독일과 프랑스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보병의 정신력에 주목하였으나, 10여 년 뒤에 일어난 1차대전은 나카시바 스에즈미가 전쟁 싸움에서 평화로라는 저서에서 적절히 분석했듯이 모든 산업을 국가의 일관된 의지 하에 움직이게하여 바깥으로는 거대한 군수에 부응하고, 안으로는 국민의 생활을 보장하는 총력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얻은 것은 도쿠토미 소호가 개탄하듯이 경제 성장으로 인해 벼락부자가 된 것만이 아니었고, 오가와 미메이가 괴로워하듯이 강 건너 불구경만 한 것도 아니었다. 세계대전의 전술적 방침이라는 책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육군은 1차대전의 성격을 적절하게 파악하였고 이후 군의 목표를 과학력과 생산력을 추구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일본 육군의 냉정한 관찰’”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과학력과 생산력이 아닌 정신주의로 경도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1차대전 이후 등장한 여러 군인들의 전쟁관을 소개하며 대답해나가는데, 서로 다른 의견 속에서도 이들은 일본이 미국이나 영국과 같이 가진 나라가 아닌 갖지 못한 나라라는 인식을 공유한다. ‘황도파오바타 도시로가 보기에 갖지 못한 나라일본이 가진 나라를 따라잡겠다는 목표보다는 러일전쟁에서 효과적이었던 정신력에 기대는 것이 더 현실적이었다. ‘통제파이시와라 간지는 황도파와는 다른 해결책을 주장하였다. 다나카 지가쿠 사상의 영향을 받아 그는 부처의 가르침을 세계에 널리 펴는역할을 부여받은 일본이 언젠가 세계의 통일을 위해 미국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는 망상을 펼쳤다. 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갖지 못한 나라일본을 가진 나라로 만들어야 했기에 만주사변이라는 무모한 군사행동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오바타 도시로의 길이든 이시와라 간지의 길이든 총력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산업을 국가의 일관된 의지 하에 움직이게끔 하여야 했으나, 군대 내에서만 한정되지 않은 분파주의가 이를 가로막았다. 일본의 총력전체제를 가로막은 이 분파주의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전통적으로 일본에는 국가를 통치하는 개념으로 지도자가 인민을 찍어누르는 우시하쿠와 지도자가 인민의 마음을 잘 읽고 이를 실현시키는 시라스가 있다. 메이지 헌법에 반영된 방식은 시라스였다. 천황이 시라스의 방식으로 통치하고 그 아래 군, 내각, 의회로 각각 권력이 분산된 메이지 헌법 체제에서 총력전은 불가능하였다. 총리대신, 육군대신, 참모총장 등을 겸한 도조 독재도 분권화된 제도를 어찌하지 못한 미완의 독재’, ‘미완의 파시즘이었다. ‘미완의 파시즘일본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은 일억옥쇄’, ‘천황 폐하 만세정신주의였다.


일본은 1차대전 이후 총력전체제로 나아가려 했으나 메이지 헌법에 새겨진 정치의 분산화를 극복하지 못한 채 미완의 파시즘이란 체제에서 정신주의로 나아갔다. 한 가지, 메이지 헌법에 새겨진 권력의 다원화, 분산화는 시라스의 통치 원리에서 비롯된 아름다운 결과이기만 했을까? 메이지 유신 전후 각 번 세력 간의 갈등과 분파주의, 천황 권력의 한계 등 역사적 과정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일본의 분파주의에 대해 좀 더 균형있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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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의 세기 - 연쇄시점으로 보는 일본과 세계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95
야마무로 신이치 지음, 정재정 옮김 / 소화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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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부르짖은 문명화가 무엇이었는지 드러내보이는 동시에 이후 일본의 행로를 규정지은 역사적 사건이다. 러일전쟁은 전쟁 당사국 이외에도 영국, 독일, 미국, 유대민족 등 여러 행위자들이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관련된 전쟁이었던 점, 선전전과 인종론이 전쟁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던 점 등에서 ‘20세기 최초의 세계전쟁이기도 하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아시아 국가들의 환호와 서구의 주목을 받은 일본은 이를 뒤로 한 채 총후체제로 나아갔다.


저자는 일본의 근대를 국제관계 속에서 파악하기 위해 두 문명 세계의 틈바구니에 놓여있던 러일전쟁 전의 반세기와 일본이 세계와 본격적으로 얽혀 들어가는 계기가 된 러일전쟁 이후의 1세기를 연쇄시점으로 설정한다. 러일전쟁 이전의 반세기 동안 일본의 국가적 과제는 문명국이 되는 것, 즉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를 목표로 하여 일본은 비문명국인 아시아의 조공·책봉 체제를 대등한 문명국간의 국제법 체제로 바꾸어나갔는데, 이 과정은 서구가 만국공법을 침략의 도구로 활용하였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이 문명국을 향하여 달려가던 시기 동아시아에서는 열강의 각축이 벌어지고 있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건설은 동아시아에서의 영국의 이권과 이익선으로서의 조선과 만주를 노리던 일본에게 위협이 되었기에 영국과 일본은 동맹으로 대응하였다. 동아시아를 둘러싼 이 대립 구도가 러일전쟁을 초래하였고 영일동맹에 힘입어 전쟁을 치른 일본은 조선과 만주를 차지하게 된다.


러일전쟁에서는 선전전이 전쟁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였는데, 일본과 러시아 모두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동원하고 이후 전후 처리 과정에서 우세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였다. 이 전쟁을 기독교와 이교도의 전쟁’, ‘백인종에 대한 황인종의 도전이라고 규정한 러시아의 선전은 전쟁에 인종전의 성격을 더하였다. 전쟁 동안 일본은 백인종에 대한 황인종의 도전이라는 이미지를 지우고자 애썼으나 전쟁 이후 일본의 승리는 곧 황인종의 승리이자 전제정에 대한 입헌정의 승리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에 유학생이 모여들고 일본의 책이 번역되고, 일본인 교사가 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의 결절 고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러일전쟁 이후 등장한 사회주의 혁명의 조류는 일본에도 흘러들어와 일본의 사회주의는 세계와의 사상연쇄속에서 비전론을 주장하였다.


사회주의의 비전론과 아시아 국가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일본이 나아간 길은 총후체제였다. ‘총후체제는 러일전쟁 이후 국가주의적 관념을 되살리고자 고안된 체제로서 전토를 병영화하고, 군대 내의 질서를 사회에 가지고 들어와 국민을 양병양민으로서 생애에 걸쳐 관리하는 체제였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의무교육을 연장시키고 군인에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서 돌격할 정도의 정신력을 강조하고 재향군인회는 국민을 동원하고 여성은 공장에서 근로하는 총후체제’, 즉 전쟁 수행을 위한 국가로 나아간 것이다.


두 문명 세계의 틈바구니에 놓여있던 일본이 문명화를 부르짖으며 달려나가 러일전쟁을 통해 달성한 문명국은 국가주의적 관념으로 얼기설기 얽혀진 총후체제였다. 러일전쟁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과 세계를 연쇄시점으로 살펴보는 이 책은 당시의 동아시아사, 넓게는 역사를 어떻게 살펴보아야 하는지 보여준다. 일본이 문명화끝에 도달한 총후체제는 이후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 가타야마 모리히데의 <미완의 파시즘>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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