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여름날이다. 나와 함께 교지편집 하던 동급생 박○○ 양이 춘천교대 교지에서 이도행이란 이름을 보고 불쑥 말했다.

이도행이란 사람을 내가 아는데 우리보다 5년 위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런 말을 이었다.

우리 언니가 이도행 씨와 동급생이라서 잘 아는데 성질 고약하다!’고 그러더라고요.”

뭔가 재미난 사연이 있어 보여서 이어지는 얘기를 기대했는데 그녀는 다시 침묵하다가 불쑥 이런 말로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하기사, 소설 쓰는 사람들은 괴팍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 뒤, 나는 그 문제의 이도행 씨를 만나게 됐을 뿐더러 친분까지 쌓게 됐다. 그래서 농담처럼 박○○ 양이 한 말을 그대로 옮기고 성질 고약하다!’의 진위를 물었다. 그러자 이 선배가 금세 알아듣고서 정색하며 해명했다.

나는 해명을 다 듣고 나서 박○○ 양 언니의 오해였음을 알았다. 글쎄, 다른 사람들한테는 어떤지 모르지만 내게 이도행 선배는 성질이 고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긴 이런 말을 하는 내 자신도 스스로는 순한 성격이라고 여기는데 다른 사람은 그리 보지 않으니 문제다.

 

작년 한 해 내 생활을 옥죄었던 장편소설 박쥐나방동충하초(임시제목)’.

 1월에 퇴고하다가 중단했다. 200자 원고지로 1100매 분량이나 썼지만 퇴고하면서 다시 읽어보니까 충분하게 쓰지 못했다!’는 자체결론이었다. 제대로 쓰려면 1500매 이상은 써야 했다. 지쳤다. 일단 그냥 쉬면서 다시 집필할지 여부를 판단하기로 했다.

지난 5월에 외수 형 문병을 다녀왔다. 형은 뇌출혈로 병석에 누웠다. 아직은 거동이나 의식이나 충분치 못한 상태. 그런 형한테 형수가 이렇게 또박또박 말해줬다.

추운겨울에 함께연탄 리어카 끌었던 병욱 씨가 왔어!”

그러자 형이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이 연재수필을 마무리 지은 오늘(7 18), 나는 형이 재활치료에 들어갔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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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도행 선배님 연재수필을 5회 정도로 마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13회까지나 써나갔다. 미처 생각도 못한, 내 잠재의식 저변의 무엇을 건드린 탓이다. 이제 이 수필은 이만 멈춰야 한다.

 

오랜 인연의 결과로 만난 이도행 선배. 전업 작가이나 동기 작가 분들(한수산, 이외수 등)에 비해 빛을 보지 못한 안타까운 상황. 특히 중편소설 무채도가 빛을 보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추운 날 밤에는, 시신을 태워서 잔열이 남은 화덕에 들어가 자는 양 중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스토리의 기발성과 독자들에게 던지는 삶과 죽음의 물음에 나는 반했다. 그래서 연재수필 이도행 선배님을 계획해 써나갔다.

과연 이런 나의 작은 노력이 이 선배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나 자신이 무명작가이기 때문에.

 

노년임에도 지치지 않고 소설 집필에 전념하는 이 선배. 내게 선사한 두 권의 작품집 이후에도 대하장편을 써냈다. 춘천의 오지 삼막골에 들어가 썼다는 산 자()의 레퀴엠’.

나는 그 제목만으로도 충격 받았다. 레퀴엠은 진혼곡이란 뜻. 산 자의 영혼을 달래는 곡이라니, 얼마나 모순형용이며 그래서 그 시사(示唆)가 가슴 아픈 것일까. 나중에 이 선배가 내게 털어놓았다.

삼막골에서, 글도 글이지만 술이나 마시다가 죽을 결심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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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생전 때 얘기를 한 번 편히 나눠보자 해 놓고 반년 넘게 그러지 못하는 사태를 냉정하게 분석해 보았다. 깊은 내 잠재의식까지 살폈다. 그 결과 소스라칠 의문이 제기됐다.   

내가 아버지 생전 때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렇다. 코로나 역병도 역병이지만 실상은 어두운 70년대 가정사를 다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불편한 마음 한편이 무겁게 꽈리를 틀고 있었다.

그 춥던 1973년 겨울이 떠오른다.

외수 형이 인제(麟蹄) 집에서 가출(?)해 춘천의 우리 집에 얹혔다. 정확히는, 남의 집에 전세 사는 우리 집에 외수 형이 얹혔다. 그 집 주인은 집이 하도 낡아 남한테 전세 놓고서 다른 동네에 가 사는 부자(富者)’였다. 우리 식구가 전세 들어 사는 건물과, 도로 변에 접한 작은 건물(10평 남짓한 건물로, 가게로 세를 놓다가 잘 안 돼 포기했는지 텅 비어 있었다.)이 그의 소유였다. 건물들이 하도 낡아 2년 전세 기한이 끝나는 내로 부숴버리고서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지으려는 것 같았다.

김유정 문인비 건립 일로 거두리 야산을 헐값에 팔아버리고, 예총 일도 그만두고, 전화기 한 대로 버티던 아버지는 시내의 다방에 앉아 같은 실업자들과 무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필생의 사업에 나섰다. 도로 변의 그 비어 있는 작은 건물을 활용한 연탄 직매소 차리기였다. 대단한 용기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연탄을 만지지 않는, 판매담당을 따로 둔 사장이었다. 10평 되는 낡은 공간의 사장이라니, 그 처절한 자존심. ( 나는 이때를 회상하면 작가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가 떠오른다. 아홉 켤레의 구두를 가지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 그의 반짝이는 구두들은 지식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 나가려는 상징물이다. 하지만 궁핍한 현실 속에서 무력하게 몰락해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채 두 달이 못돼 연탄직매소는 망해버렸다. 판매를 담당한 분이 밀린 임금 한 달 치 문제로 사나흘 항의하다가 포기했는지 사라져버리고아버지 또한 사업자금이랍시고 빌린 돈 때문에 어디론가 피신해 버렸다. 결국 애먼 연탄들만 백여 장 직매소에 남았다.

나는 외수 형과 함께 그 연탄들을 팔아치우기에 나섰다. 집 주인한테 그 건물을 어서 되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괜한 월세마저 누적될 판이었다. 형과 나는 연탄 수레를 끌고서 추운 거리와 골목을 누볐다.

연탄 직매소마저 망한 사업가(?)가 아버지였다.

그 후에 이어지는 아버지에 얽힌 뒷얘기는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이 선배와 아버지 생전 이야기를 하기로 언약하고는 늘 마음 한편이 편치 않았다. 결국 나는 아버지 생전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으면서 꺼내려는 자기 갈등 속에 있었다. 내가 를 제대로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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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데없는 코로나 광풍 속에서 이 선배와 나는 굳이 목숨까지 걸고서 만날 수는 없었다. 그저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가운데 28일 날이다. 이 선배가 중국 우한의 더럽기 짝이 없는 가축시장 풍경 동영상을 카톡으로 보냈다.

 

: 동영상을 보니, 전염병이 안 생기면 기이한 일이겠습니다.

이도행 선배 : 그러게나 말이오.

 

간단히 오간 그 대화는, 코로나19 광풍 속에서는 만남을 계속 연기할 수밖에 없다는 공감의 확인이었다. ‘한 번 편하게 만나 아버지 생전의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바람은몇 달째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 이럴 수가.

     

******

    

반년은 지난 611일에야 이 선배와 나는 만났다. 서울에서 만난 게 아니다. 이 선배가 전철로 춘천에 내려온 것이다. 페북으로 알게 된 춘천 후배들(서현종 화백, 지은수 화백, 화양연화 최대식 사장)8호 광장 부근 설렁탕집 감미옥에서 만나는 것으로 이 선배는 춘천 일정을 시작했다. 감미옥에서 인사 나누며 식사한 뒤, 2차로 석사동의 음악카페 화양연화로 함께 이동했다. 그 자리에서 이 선배는 수원에서부터 갖고 온 책(‘봄내춘천 그리움’. ‘봄내춘천 옛사랑’)들을 후배들한테 선사하고는 유쾌한 담소의 시간을 가졌다. (문단 야사라 할까, 유명 문인들의 놀라운 일화를 많이 공개해줬다.)

그런 뒤 후배들과 헤어져 나와 단 둘이 공지천 부근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한 시간 가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는 오후 4시 직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선배가 춘고 100년사 편찬회의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모교인 춘고 정문 부근에서 나와 헤어진 이 선배는 편찬회의 참석 후 강촌에 있는 지인의 집(느티나무마을펜션)에서 숙박, 이튿날 수원으로 귀가했다.

뒤늦게 나는 깨달았다. 모처럼의 만남임에도 아버지 생전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일정이 바쁜 이 선배를 보고 내가 속으로 그 얘기는 다음에 해야지.’하고 미뤘던 걸까?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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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버지 생전 얘기를 카톡이나 전화로 주고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이 선배와 그런 얘기를 용무 해결하듯 나눌 수 있을까. 반드시 한 번은 편한 자리에서 마주보며 제대로 얘기 나눠야 했다.

그런 내 뜻과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일들.

얼마 안 돼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이 선배한테 전화를 걸었다. ‘평소에 서울 가면 한 번은 들르고 싶었던 피맛골이란 데에서 선배님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고 내 뜻을 전하자 쾌히 그러지!’하는 응답이 왔다. 마침내 ‘(2020) 1 8일 오전 11시에 종각역에서 만나기로 언약이 됐다. 종각역에서 내리면 바로 피맛골이란다.

서서히 그 날이 다가오는데 다시 변수가 생겼다. 한겨울 날씨가 푸근해지면서 눈 대신 비 내리는 날이 이어지던 것이다. 그러더니 하루 전인 1 7일 오후에 이 선배한테서 카톡이 왔다.

 

이도행 선배 : 내일도 비가 온다는데 약속을 후일로 미루면 어떨까 해서. 내일 아니면 안 된다는 일도 아닌데 싶어 슬몃 문자 던지는 걸세. 그대 생각은?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비 오거나 말거나 그냥 만나는 거죠.’ 하는 대답도 생각했지만 서울 사정을 잘 아는 이 선배가 오죽하면 이런 카톡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에 대답을 이리했다.

 

 

: 그러시죠. 다시 연기하는 걸로.

 

 

나중에 안 사실은, ‘피맛골에 공사판이 벌어지는 바람에 여기저기 파헤쳐져서 지나다니기도 편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판에 겨울비까지 계속 내렸으니. ‘좁다란 골목에 맛집들이 아기자기하게 줄지어 있는, 정겨운 피맛골이란 내 상상은 환상에 불과했다. 이 선배와 만나는 일이 연기되면서 나는 이제는 피맛골이 아닌 다른 좋은 명소를 찾아보고 연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느닷없이 코로나 역병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이번 코로나는 특히 기저질환이 있는 노약자한테 치명적이라 했다. 바로 이 선배와 나를 겨냥한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이 선배는 오랜 당뇨를 앓는 몸이며 나 또한 가족력인 고혈압 환자. ‘사람들이 많은 곳을 삼가는 게 좋다는 전문가의 조언도 보도됐다. 천생 이 선배와 나는 코로나 역병이 가라앉은 뒤에나 만나야 할 것 같은데 문제는 쉬 가라앉을 것 같지 않은 조짐이 연실 보도된다는 점이다.

나는 ()에 들어가려고 몇 번을 애썼으나 결국은 그 성에 못 들어가는 채로 끝나는 카프카의 이란 소설을 현실로 겪는 것 같았다. 공교로운 것은 의 주인공이 K라는 사실이다.

K.

내 두 번째 작품집 이름이 ‘K의 고개이며 작품집 속 동명의 작품에서 K는 실존적 위기에 직면한 채 결말을 맞이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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