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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말 타고 찾아온 셰인, 나는 주근깨 소년이 되어 가슴 졸인다. 셰인은 악당들 마음까지 處置하고 갔지만 나는 畵面 밖에 남아 있어 問題. 혹시 셰인이 겨냥했던 건 未練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未解決로 서성이는 세상사. 총은 正確했지만 자신을 쏘았는지 모른다.

 

어느 새 나는 주근깨 노인이 되었다. 셰인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靑春이 말 타고 사라진 일요일 오후, 사살된 세월 彈皮 희망. 낡은 字幕 너머 기다릴 때 다가온 豫感. 열리자 헤이!”하며 등 뒤까지 관통하는 싸늘한 日沒.

 

 

 

*세인: 1953년도 제작된 정통 서부극 제목이다. 셰인이라는 나그네가 한 마을에 나타나 악당들을 결투로써 해치우고서 떠나간다는 스토리이다. 이 때 그를 따르는 죠이(주근깨 소년)가 숨어서, 술집에서의 마지막 결투 장면을 지켜보는 부분이 있다. 몇 년에 한 번씩 주말 명화로 방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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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생활을 하는 동안 도내 여러 지방의 학교에서 근무했다. 동해안의 작은 읍에 있는 학교부터 영서지방의 대도시에 있는 학교까지, 일곱 학교나 된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은 어느 지방의 학생들이든지 첫눈이 내리는 날 연인들이 만나는 그곳을 한결같이 얘기하더라는 거다. ‘그곳은 그 지방에 있는 바닷가이거나, 강가 제방 길이었다.

생각만 해도 얼마나 멋진가. 첫눈이 흰 꽃잎들처럼 날리는 바닷가나 강가 제방 길에서 만난 연인들의 모습. 둘이 눈길을 걸어가는 장면…….

그래서 첫눈 내리는 날은 수업하기 무척 힘들었다. 학생들이 오늘 같은 날은 그곳에서 연인들이 많이 만날 텐데하는 생각들로 뒤숭숭해 앉아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첫눈 내리는 날 연인들이 바닷가나 호숫가에서 데이트하고 있을까?”

한심해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궁금증을 품다. 그래서 첫눈만 내리면 눈을 맞아가며 그곳에 부리나케 가 보았다. 몇 번을 가 보았다. 이제 결론을 말한다.

첫눈 내리는 날, 그곳에는 연인들이 별로 없었다.”

심지어 그곳에는 나 혼자만 와 있기도 했다. 연인들은커녕 사람 비슷한 존재도 안 보이는데 나 혼자 쓰잘데없이 눈을 맞는 처량함 내지 머쓱함이란, 경험해 보지 않고는 절대 모를 것이다.

 

내가 퇴직한 뒤에도, 해마다 겨울이면 첫눈이 내린다. 물론 이제는 첫눈 할아비가 내린다 해도 그곳에 가 보지 않는다. 그런데 학교에 재직할 때 학생들은 왜, ‘첫눈 내리는 날 그곳에서 만나는 연인들의 환상을 가졌을까? 잠시 생각해 봤다. 답이 나왔다. 학생들은 학교와 집만 오가며 공부해야하는 숨 막힐 것 같은 생활에 그런 아름다운 환상이라도 갖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힘들여 써야 하는 손 편지 대신 쉽게 휴대폰으로 문자를 쳐 보낼 수 있는 요즈음 같은 시대에도 첫눈 내리는 날 그곳에 가면의 환상이 여전히 학생들에게 남아 있을까? 이제 나는 다른 궁금한 게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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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들이 좋아하는 노래가 따로 있다. 서양 가수들은‘FOR THE GOOD TIMES'를 좋아한다. 원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노래였지만 엘비스플레스리부터 시작해서 알그린, 페리코모, 앤디윌리암스, 케니로저스 등도 불렀다. 각자 대표곡이 있지만 'FOR THE GOOD TIMES'가 워낙 좋은 노래라 실례를 무릅쓰고 마치 ‘FOR THE GOOD TIMES' 잘 부르기 경연대회라도 연 듯 했다. 그 중 특히 알그린이 소울 창법으로 부른 'FOR THE GOOD TIMES'가 일품이다. 어느 한 시절, 서울의 나이트크럽에서 조명을 어둡게 한 뒤 알그린의 이 노래를 틀어주면 처음 만난 남녀라도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게 되곤 했다는 전설이 있다.

나는, 우리나라 가수들이 좋아하는 노래 중 첫 번째를 문밖에 있는 그대라고 생각한다. 원래 박강성 가수가 발표했는데 워낙 괜찮은 노래다보니 이런저런 가수들도 불렀다. 유명가수들보다 무명가수들이 더 많이 불렀다는 특이점이 있다.

노랫말은 이렇다.

 

그대 사랑 했던 건 오래전의 얘기지/ 노을처럼 피어나 가슴 태우던 사랑

그대 떠나가던 밤 모두 잊으라시며/ 마지막 눈길마저 외면하던 사람이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오늘은 거기서 울지만

그렇게 버려둔 내 마음 속에/ 어떻게 사랑이 남아요

한번 떠난 사랑은 내 마음엔 없어요/ 추억도 내겐 없어요

문밖에 있는 그대 눈물을 거둬요/ 가슴 아픈 사랑은 이제는 잊어요

이제 분석해 본다.

'그대 사랑했던 건 오래 전의 얘기지'라는 첫 부분부터 흡인력이 대단하다. 한 때 사랑했지만 이제는 결별한 사이라는 것을 이처럼 간단명료하게 잘 나타낼 수가 없다. ​

노을처럼 피어나 가슴 태우던 사랑이란 부분은 '얘기'로 남은 그 사랑의 시작과 절정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수줍던 사랑이 마침내는 뜨겁게 바뀌던 것을 회상케 한다.

그런데 이 뜨거운 사랑의 불길이 사그라든다. '그대 떠나가던 밤이란 구절이 그것이다. 황홀한 노을빛깔의 저녁에서 어두운 밤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변화에 맞추어, 사랑의 시작과 종말을 시각적으로 잘 그렸다.

'문밖에 있는 그대'라는 구절은 ‘결별한 두 연인의 현재 만남’장면을 상징화했다. 상징은 고도의 수사법이지만 실제를 바탕으로 한다. 태극기를 대한민국의 상징이라고 할 때는 바람에 펄럭일 수 있는 실제 태극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문밖에 있는 그대'라는 장면은 대문이 집채와 일정 거리를 둔 단독주택에서나 벌어질 실제 상황이다. 그래야 '문밖에 있는 그대에게 화자(話者)가 거리를 두고 제대로 말할 수 있다. 만일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제대로 대화 나누기도 어렵다. 아파트란 주택구조는 실내와 바깥이 얇은 문을 사이로 접하기 때문이다.한 번 떠난 사랑이 십여 센티 너비의 현관문 앞에 와서 울고 있다면 화자는 얼마나 부담스럽고, 무서울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 주민들이 그 상황을 목격했다면 불안에 떤다. 결국불청객을 처리해 달라고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연락하거나, 그도 여의치 않다면 경찰에 연락해무단으로 남의 아파트에 쳐들어가려는 괴한을 체포해 달라고 요청한다.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대가 그런 부담스런 상황을 야기하지 않도록, 일정한거리를 둔 단독주택에서의 대문 밖이어야 한다.

이런거리'닫힌 대문 밖에 서 있는 그대의 모습을 화자가 슬그머니 창문 틈으로 내다볼 수 있는 거리.

최소한 5미터는 돼야 한다. 물론 창문 틈으로 내다보아야 하는데 만일 창문을 활짝 열고 내다보거나, 대문까지 걸어가 열고서 마주본다면 그건 가슴 아픈 사랑이 아니라 법률적 고소를 각오한 사건의 시작이다.

그렇다.‘문밖에 있는 그대라는 상황은 떠난 연인이 어느 날 대문 앞까지 찾아왔다가, 화자가 끝내 대문을 열어주지 않자 흐느끼면서 발걸음을 돌리는평화로운 거리를 상정한다.

그런 거리는 사실 정서적 거리이다.

가수 김종찬이 부르는사랑이 저만치 가네라는 노래의 저만치’와 같은 거리다. 김소월이산유화란 시에서 노래한산에 산에 사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저만치보다는 아무래도 가깝다.

그런 거리를 두고 있을 때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려야 한다. 초라한 꼴로 찾아온 그대가 혹 눈물을 흘리더라도 빗물인 것처럼 보여, 자칫 궁상맞은 꼴로 보일 참상을 방지해줄 테니까.

지난날의 사랑을 되찾고자 자존심 다 버리고 찾아온 그대는 물론 가슴 아픈 존재다. 그럼 화자는 행복할까? 화자 역시 그대만큼이나 가슴 아프다. 이 노래의 절정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렇게 버려둔 내 마음 속에/ 어떻게 사랑이 남아요하는 절정 부분의 절규가 입증한다.

그대나 화자나 모두 울고 있는 것이다. 슬픈 사랑의 절정이다.

 

그렇게 함께 가슴 아프다면 화자가 문을 열고 나가 그대를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요?”

하는 우문(愚問)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문을 열고 나가기에는, 그대와의 사랑을 되찾기에는 모든 게 너무나 달라져버렸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낡은 바바리코트 차림으로 찾아와 대문 앞에 서 있는 초라한 사내. 그래도 대문은 끝내 열리지 않는다. 아니, 열리지 못한다. 왜냐면…… 그 대문은 닫힌 마음의 문이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pblWJ22JZ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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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수업이나 참관수업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기를 전제로 한다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교사 질문에 답변할 학생들을 미리 정해놓는 각본 구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국어교사인  나는 그런 관행에 저항감을 느꼈다. 학생들이 평소 수업 때  모습 그대로  하도록  당부하고 국어 연구수업을 한 것이다. 끝나고 평가회 때 학생들의 발표가 틀리기도 하는 등 매우 자연스런 수업이었다는 호평이 뒤따랐다.
  세월이 흘러 나는 그 호평 받은 연구수업을 다시 생각해 본다. 과연 그 수업이 자연스러웠을까?  글쎄, 회의적이다. 당시 학생들이 아무리 평소 수업 때 모습  그대로를  보이려 했어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예로써, 평소 수업 때 수시로 장난 치다가  야단 맞는 학생이 있었는데 당연히 연구수업 때에는 똑바른 자세로 성실히 수업에  임했던 것이다. 외부손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감히 장난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모든  학생들이 외부손님들의 눈길을 의식한 순간 평소의 실제  모습 그대로는  아니었다.

   타인의 눈길을  의식한 순간 평소의 모습이 아니다. 
   사진기 앞에 서는 순간 절대 평소의 모습이 아니다.
   사람뿐만도 아니다. 동물도 사람의 사진기가 자신을 향했음을 인식한 순간 실제 모습에서 벗어난다. 허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거나  획 달아나거나 아니면 놀란 모습이라도  보인다.
   주변에 cctv가 사방에 설치되었다. 속성상 몰래 카메라이기에  설치돼 있는지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어느 곳에  cctv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반쯤은 주눅들어 조심스레 행동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하긴, 숨 거두는  순간까지 남의 눈길을 벗어날 수 없는 게 우리 인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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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한 마리가 횡단보로를 이용해 찻길을 건너는 걸 나는 목격했다.

 

하기는, 근래 들어서 개가 찻길을 무단 횡단하다가 치여 죽은 것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찻길에서, 차에 치여 죽은 개의 꼴’은 십여 년 전 일이다. 대낮의 햇빛 아래 그 개는 찻길 한복판에 쓰러진 채 검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반쯤 벌어진 주둥이에서 새나오던 고통의 신음. 마침 가까운 인도를 걷다가 목격한 나는 잠시 멈춰 섰으나 이내 빨리 지나쳐갈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그 개를 알아서 치울 거라, 마음 정리하고서 현장을 빨리 벗어난 것이다.

 '개 주검'에 불과하니까.

 

그런 개 주검을 보기는커녕, 엉뚱하게도 '횡단보도로 안전하게 찻길을 건너는 개들’을 목격한 것이다.

‘주인이 이끄는 대로 개줄에 딸려가는 개’가 아니다. 개 혼자서 자주적인 의사와 판단으로써 마치 인간처럼 횡단보도를 가고 있었다.

 

인간들이 이룬 문화 중 하나가‘교통질서’다. 그런 교통질서에 개가 동참하다니!

 분명하게, 횡단보도의 선이 페인트로 그어진 범주 내로 찻길을 건너는 개. 문제는 그 개뿐만 아니라 다른 개들도 그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자네 눈에만 그런 개들 광경이 자주 눈에 뜨인 모양이네.”

 하고, 누가 핀잔을 준다면 할 말은 없다.

 어쨌든 내 눈앞에서 개들이 자기 의사로써 당당하게 횡단보도를 이용해 찻길을 건너고 있었으니까. 십여 년 전, 찻길을 아무렇게나 건너다가 횡사한 개들의 말로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한데.

 

개들이 횡단보도를 이용하는 장면은 조지조웰의 '동물농장' 속 한 장면이 아니었다. 동물들이 인간처럼 사회 생활하는 허구 속 장면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로써 우리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슬그머니 사회 생활하는 모습이었다.

 아득한 옛날, 원시인들 주변을 맴도는 늑대였는데 먹이에 길들여진 끝에 애완의 자리를 차지한 '개'. 그 때 인간들 손에 길들여지기를 끝내 거부한 늑대는 갖가지 박해를 받다가, 이제는 동물원우리에 갇혀 '멸종 위기' 속에 하루하루 연명한다.

 

인간의 손에 길들여진 개가 오늘날 대단한 번성을 이룬 것의 핵심은 환경적응이었다. 그렇다, 찻길에서 치이던 개들이 어느 때부터 인간이 만든 교통질서 환경에 적응되어, 횡단보도를 사용하고 있다. 개들의 유전자 속에 이런 정보가 축적된 게 아닐까?

‘찻길을 아무 데로 건너다가는 무지막지한 차에 치여 죽으니까, 페인트로 칠해진 횡단보도로 건너야만 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는.

 아니면,

‘찻길 아무 데로 건너다가 무지막지한 차에 치여 죽은 개들은 저절로 단종되면서’ 그렇지 않은 개들만 살아남으면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결과? 이런 현상을 '적자생존'이라 했다.

 

인간들도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환경에 적응' 된 후손들만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게 아닌가. 

처음 철로가 놓였을 때 발생했다는 인간의 시행착오들.  

한밤중에 술에 취해 철로를 베개 삼아 베고 자다가 횡사한 경우, 멀리서 쏜 살같이 달려오는 기차를 별 생각 없이 바라보며 철길을 건너다가 치여서 죽은 경우 등등……. 이러한 사건들이 초기에 빈번하면서 적응 안 된 인간들은 배제되고 적응된 인간들만 살아 남아 오늘날 편하게 기차나 전철을 타며 현대사회를 사는 거다. 

 

 변화에 적응되는 자들이 이 세상에 살아남기 마련이다. 인간이건 ‘개’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도시 어느 곳에서 개들이 횡단보도를 이용해 찻길을 건너고 있다.

사진출처 : blog.choj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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