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노래'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이 시는 정호승 시인이 지은 이별가이다. 근래에 이동원이란 가수가 특유의 쓸쓸한 음색과 창법으로 불러서 대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면 나 자신도 이동원의 노래를 듣고서 이 시를 알았기 때문이다. 뒤늦게 가사로 쓰인 시를 확인해 보고서 그 뛰어난 감성에 나는 놀랐다. 근래에 보기 드문 역작이라 느낀다. 이제 이 시에 대한 나의 분석 및 감상을 적어 본다. 그저 느끼는 대로 번호를 매겨서 적는다.

 

1. 이 시의 제목부터 유의한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별의 노래라고 할 것을 ‘-라는 조사를 쓰지 않고 이별 노래라고 한 것에 유의한다. 얼마나 호흡이 간결하고 선명한가. ‘-라는 관형격 조사를 쓸 일 없이 이별이란 단어와 노래란 단어를 곧바로 연결함으로써 바로 이별가란 단어를 풀어 쓴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별가라고 쓸 수 있는데 왜 굳이 이별 노래라고 한 음절이 긴 제목으로 썼을까? 그것은 아마도 한자어를 최대한 피하고자 함이다. 놀랍게도 그의 시에서 한자어라곤 오직 이별이란 단어밖에 없다. 제목에 쓰인 이별이란 단어 이외에는 철저하게 순수한 우리말로만 표현한 그 언어구사력에 나는 경탄한다.

그렇게 이별이란 한 단어만 한자어를 썼기에 역설적으로 이별의 이미지는 더욱 선명하게 강조되는 효과를 낳았다.

 

2. 이 시가 전개되는 스토리의 시간적 배경을 본다. 이별이 노을지는 저녁부터 별 뜨는 밤으로 이어지고 있다. 곧 서서히 어두워지다가 깜깜해지는 하루의 늦은 시간대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밝은 오전의 스토리가 있다면 그에 비교되어 어둡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배경이다. 더구나 늦은 밤에서 스토리는 끝난다. 그렇기에 독자들에게 답답한 심사를 안겨줄 수 있음에도 그것을 벗어난 것은 을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결코 희망적인 별은 아니지만단지 떠나는 그대를 잊지 못한 마음의 설렘일 뿐이지만 이 별이 놓임으로써 심연에 떨어질 수 있는 어둠의 위험을 막았다.

 

3. 내가 이 시에서 가장 맘에 들어 하는 구절은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이란 부분이다. 왜 굳이 사람의이란 표현을 생략하지 않았을까. 생략해도 별 문제는 없는데 말이다. 이것은 시인의 세계관에 닿아 있는 표현이라 본다. 노을’‘’‘어둠등의 자연물과 어우러지는 하나의 자연물로서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냥 이라고 표현한다면 당연히 사람이 거주하는 주택을 의미한다고 우리는 간주하지만 시인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동물들도 집이 있으니까 (‘새집’‘호랑이 굴등등) 굳이 사람의 집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 생각 속에서 표현된 사람의 집이므로 그 집은 모든 자연물 속의 하나일 뿐이다. 곧 그대와의 이별조차 대자연 속의 한 사건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대와의 이별조차 자연 현상의 하나임을 암시하기 위해서 주변의 집조차 사람의 집이라고, 자연물의 하나라고 시인은 노래 부르고 있다.

 

4. 이 시가 노래로 불릴 때 안정적인 느낌으로 와 닿는 원인 중의 하나는, 4연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면서 각 연 또한 4행으로 이루어진 구조에 있다. 게다가 제 1연과 제 4연이 같은 수미상관적 구조이다. 곧 이별이란 슬픈 스토리를 앞뒤로 막아주면서 마치 별 하나 떠 있는 밤하늘이 담긴풍경화 한 편을 보는 느낌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수미상관에 의한 제 1연과 제 4연이 풍경화가 담긴 액자의 테두리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각 연마다 한 문장(sentence)으로 끝나면서 각운까지 사용하였다. '-‘’-‘’-‘-가 그것이다. ‘l'모음으로 일관해 끝나는 각운 구조가 이 시에서 안정감을 주는 역을 더한다.

 

5. 이 시에서의 시인의 유일한 동작이라면 제 3연의 옷깃을 여미'는 동작밖에 없다. 나머지는 생각뿐인 동작이다. ( ‘되리니) 시인은 떠나가는 그대에 대하여 조금만 더 늦게 떠나주기를 바랄 뿐이다. 떠나가는 님에 대하여 진달래꽃을 뿌려주며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김소월의 정서에 닿아 있다. 세상이 변했지만 이러한 정서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어서, 이 노래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옷깃을 여미'는 구절이 유일한 동작이면서 제 3연의 첫 구절에 쓰이니까 기승전결의 구조 속에서 전()의 역을 충분히 하였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이 시에서의 유일한 움직임은 전에서 조금 존재하더니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6. 이 시에서는, 같은 표현을 끊임없이 사용했으되 조금도 상투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체가 16행인데 무려 8행에 걸쳐서 떠난이란 표현이 나온다. 그러고도 조금도 식상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아마도 어둡게 변해가는 시간적 배경을 깔고 그저 조금만 남아 주기를 바라는 시인의 가슴 아픔이, 그런 반복적 표현을 깨닫지 못하도록 만든 게 아닐까. 말하자면 어둡게 장막을 치는 가운데 진행되는 일종의 최면 기법이다.

 

7. 이 시는 근래에 보기 드문 역작이다.

나는 이 시의 주인공을 서정적 자아라고 보지 않는다. ‘시인으로 본다. 언젠가부터 모든 시의 주인공을 한결같이 서정적 자아라고, 시인이 아닌 별도의 인간으로 보는 견해가 자리를 잡았는데 나는 이에 반발한다. 서정적 자아가 바로 시인일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봐야 한다. 나의 주장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시가 나올 수가 없다.

 

얼마나 아름다운 헤어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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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에는 이상한 일들이 많았다. 난데없는 새마음 운동이 그 중 하나다. 내가 근무하는 시골 학교 교무실에서 아니 새마음 운동은 또 뭐야? 새마을 하나면 됐지 나 참.” 탄식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얼마 후에는 그 새마음 운동 관련 일로, 윤리과장 선생이 12일로 출장 가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큰영애가 전국의 도청소재지를 돌며 새마음 ----’관련 행사를 여는데 그 장소인 실내체육관에 참석하는 것이라 했다. 이틀간이나 윤리 및 사회 수업을 비운다니, 펑크난 시간들을 다른 과목들의 시간으로 메우느라 교시 담당 선생이 고생 많을 수밖에.

 

12일 출장을 마치고 윤리과장 선생이 출근했다. 교시 담당 선생이 볼멘소리로 물었다.

아니, 무슨 행사를 이틀씩이나 한단 말이요?”

윤리과장 선생이 더 볼멘소리로 답했다.

첫 날은, 큰영애가 무대에 등장해서 시선을 줄 때마다 그에 맞춰 박수치는 연습으로 하루 종일 보냈고 둘째 날은 큰영애를 실제로 맞아 박수만 치다가 끝났다니까! 내가 다 늙어서, 실내체육관에서 박수 치는 것으로 이틀씩 보낼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그 즈음, 1979년경은 이상한 일들이 많았다. ‘노려보기 시작했다는 그 즈음의 어느 시골 학교 교무실이 배경이다. 길이가 짧은 단편소설이기 때문에 10261212 직후에만 초점을 맞췄고 새마음 운동건은 다루지 못했다.

1979년이라면 39년 전이다. 관에서 깨어난 드라큘라처럼 오랜 과거의 그 이상한 일들이 근래에 부활했던 것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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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나린 2016-11-03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의 이상한 일들은 애교로 보일만큼 기상천외한 사기극을 벌였죠!에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나는 짧은 이 시를 보는 순간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일에 지친 화자가 이제는 그만 편히 쉬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느꼈다. 삶이란 어차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것이기에 좋으나 싫으나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 그래서 아주 작은 공간이나마 내(화자)가 쉴 수 있는 곳을 그리는 마음이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다.

 

우리에게 이란 단어는 어떤 이미지인가? 고립이나 소외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지만마음 편히 쉬는 곳이란 긍정적인 이미지도 분명히 있다. 모든 게 복잡다단한 현시대에 이르러 이 휴양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제주도라든가 그리스의 섬들이라든가 발리 섬 등이 휴양지나 신혼 여행지로써 인기를 끄는 것만 봐도 충분히 납득될 것이다.

 

그렇기에 복잡다단할 일이 없는 예전에는 은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유배지로나 쓰였을 뿐이다.

   

 

한편, 이 시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이렇다.

“(상략) 시인이 꿈꾸는 섬은 먼 바다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공감의 세계, 혹은 그것을 향한 꿈이다. 정현종은 무척 외로울 때 이 시를 썼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그 섬에 가는 길은 우정이나 연대(連帶)에서 찾을 수 있다. 동시에 홀로 있더라도 시를 읽거나 춤과 음악·그림에 몰입하는 영혼의 항해를 통해 이르는 섬이기도 하다. 그 섬에서 사람은 삶의 진짜 알맹이를 실감할 수 있다.(하략)”-박해현/기자, 조선일보 '문학산책'-

 

 

내 감상이나 해석과 다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쪽이 옳다는 주장을 하지 않겠다. 현대시의 맛은 난해한 데에 있기 때문이다. 평이하게 해석되거나 정답 같은 감상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란 시에서의 을 절대자나 잃은 조국으로만 보다가, 근래 들어 실제 연인으로서의 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시작하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최순실 국정농단일로 온 국민이 패닉에 빠진 것 같은 요즈음, 이 시가 선하게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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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한테서 무심이 한결같이 받는 질문이 있다. “언제 티베트에 가서 조장(천장)을 봤습니까?”

이 자리를 빌려 무심이 답한다. “한 번도 티베트에 가 본 적이 없고 상상으로 썼습니다.”

 

무심이 이 작품을 쓴 계기는 우연히 인터넷으로 티베트의 조장 현장 동영상을 목격한 일이다. 물론 시신이긴 하지만 독수리들의 먹이로 제공되는 그 끔찍한 장면에 무심은 경악했다. 그 동영상을 본 시간이 하필 자정 지나, 주위가 적막한 때였다. 얼마나 괴기스럽고 소름끼치는지 얼른 동영상 보기를 그만 두었는데 문제는 하룻밤을 자고 난 뒤에도 그 끔찍한 장면들이 무심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결국 무심은 그렇다면 조장 동영상의 기억을 잊으려 할 게 아니라 소설의 소재로 삼아 보자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보름 만에 완성된 작품이 라싸로 가는 길이다.

200자 원고지로 70매를 조금 넘는 소설을 완성하려면 보통 열흘 정도 걸리는데(체력이 떨어진 요즈음은 더 걸릴 것이다.) 보름이나 걸린 것은 무심이조장을 포함한 티베트 문화 전반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공부하느라 며칠을 고생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시신을 독수리들의 먹이로 주는 것은 티베트 사람들이 비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목재 관 하나 짜기 힘든 척박한 자연환경 탓임을 알게 된 것부터 시작해서, 현재 조장은 티베트의 일부 지방에서나 행해지고 있으며 대부분 화장을 택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았다.

무심은 사실 이 작품을 창작했다기보다 제작한 것 같은 것이다. 티베트 땅에 발 한 번 디디지도 않고 그저 티베트 자료들을 토대로 조장 현장을 상상해 작품을 썼기 때문이다. 소설 숨죽이는 갈대밭100% 상상력으로 하룻밤 새에 미친 듯이 써서 완성한 것과 매우 대조적인 경우다. 그래서, 솔직히 라싸로 가는 길을 보름 걸려 완성해 놓은 뒤 무심 자신은 별로 감흥도 없었다. 그저 작품 쓰느라 고생깨나 했으니 이제부터는 생맥주라도 한 잔 마시며 푹 쉬자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활자화된 후에 생각지도 못한 반응들이 있어서 무심은 놀랐다. 티베트에 언제 가 봤느냐는 물음들은 차치하고, ‘이 작품은 아주 잘 쓴 작품이라는 과찬들이 그것이다. 특히 춘천의 여류작가 박계순씨가 이 작품을 숨죽이는 갈대밭작품집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손꼽는 데 무심은 정말 놀랐다.

무심이 이렇게 실토했다.

박 선배. 솔직히 이 작품은 창작이라기보다는 제작한 경우 같아서 작가로서는 그다지 감흥도 없거든요. 그런데 박 선배가 가장 마음에 드는, 잘 쓴 작품이라니 저로서는 어리둥절합니다.”

박 작가가 말했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읽어본 사람들이 하는 거지, 만들어진 과정과는 상관없지 않나요? ”

그 말에 무심은 뒤늦게 활자화된 자신의라싸로 가는 길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랬더니 마음에 드는 괜찮게 쓴 작품이었다. 무심하기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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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은 어느 날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업하던 남편이 암에 걸려 병석에 눕자 아내 되는 여자가 어떻게 해서든지 남편을 살려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결국 남편은 세상을 떴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들 형제와 작은 아파트 한 채. 그나마 아파트는 많은 빚에 저당 잡혀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고민 끝에 상식을 넘는 선택을 하였다. 아들 형제를 내팽개치고 다른 남자랑 따로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문제는 그 남자와 옆 동네에서 살림을 차렸다는 사실이다. 모자간에 길에서 맞닥뜨릴 상황이 되면 그녀는 먼저 다른 길로 피해 감으로써 자신이 원치 않는 만남을 용케 면하며 산다고 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모성애만은 천고불변의 진리인 듯 영원할 거라 믿어온 무심으로는 정말 믿기지 않는 실화였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형제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다니는 어린애들이 아니라 하나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고, 다른 하나는 군대에 갔다가 막 제대한 청년이라는 사실이다. 하긴, 형제가 열 살 미만의 어린이들인데 그녀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법의 심판을 받았을 테다.

그렇다 해도 무심으로서는 가난 앞에 무너진 모성애라는 차원에서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생각 끝에 지인들에게 과연 그런 비극이 가능할 수 있는지그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경제난이 심화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의견들이 다수였다. 뜻밖이었다.

결국 무심은 그 이야기를 작품화하여 허구로나마 못된 어미를 응징하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를 응징했다고 해도 비극은 여전히 남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은 허구이긴 하지만 개연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비극의 재생산에 무심의 가슴은 다시 아팠다.

박쥐가 된 아이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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