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물이라도 먼데 있으면 작게, 가까이 있으면 크게 그려야 한다는 원근법.

이 원근법을, 우리는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배운다. 그런데 원근법을 확인할 수 있는 실제 풍경이 별로 없다. 줄맞춰 가는 군 트럭들이라든가, 똑같은 높이의 수십 여 동 아파트 풍경이라면 모를까.

 

나는 서현종의 어느 겨울그림을 보는 순간 먼데 있는 산일수록 커다란 산인데 비해 가까이 있는 산은 자그마한 산인, 원근법이 무시되는 실제 풍경을 확인했다. 그렇다. 산들은 그런 모습이 정답이다. 사람들이 기대며 사는 산은 부근의 나지막한 산일 터. 그런 산기슭이라야 집을 짓고 밭을 꾸미고 우물을 팔 수 있었다. 먼데의 높고 큰 산은 산신령(호랑이)이 사는 곳이라 범접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어느 겨울그림에서 도시(都市)는 나지막한 산들의 기슭에 기대어 있다. 하지만 그 뒤편으로 엄청나게 높은 산들이 거대한 파도처럼 첩첩이다. 시민들이 평소에 잊고 있는 나지막한 산들 뒤편으로 엄청나게 높은 산들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걸까?

문명의 총화인 도시조차 대자연의 한 구석에 불과함을 에둘러 말해주는 걸까.

 

서현종이 자기 그림의 브랜드처럼 한편에 올리는 그믐달 대신에, 이번에는 작지만 둥근 보름달이 떠 있다. 시민들이 잊고 있는, 높은 산들의 존재만큼이나 의외다.

어쨌든 첩첩 산들을 검푸른 색조로 묵직하게 그려낸 그의 심중(心中). 무슨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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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람들은 숲이 푸른 것을 ‘GREEN', 바다가 푸른 것을 ’BLUE'라고 분명히 구별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같은 푸른색으로 표현하는데 말이다.

나는 오늘 춘심산촌에 왔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같은 푸른색으로 표현하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주위의 짙푸른 녹음이 바닷물처럼 넘실거리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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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 춘천에 미미(美美) 다방이 있었다.

시내 한복판에 있던 거북당빵집 건물의 맞은편 건물 2층에 있었다. 이름이 얼마나 예쁘나. 한자로도 예쁘지만 그냥 우리말로도 예쁜 미미’.

2층에 있으므로 지상의 입구에서부터 층계를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야 했다. 다 올라가서 문을 열면 연한 꽃무늬 장식의 30여 평 공간에 팝송이 흐르고 있었다. 폴모리아 악단의 ‘LOVE IS BLUE'라든가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가 자주 나왔다. 한편에 뮤직박스가 있어서 전문 DJ가 희망음악을 신청 받았다. 딴 음악다방과 다른 점이라면 신청 받은 음악을 항상 나지막하게틀어주었다는 사실이다. 톰존스가 우렁차게 불러 세계적인 팝송이 된 딜라일러조차 폴모리아 악단의 경음악으로 나지막하게잔잔하게 틀어주었다.

나는 1971년에 한동안 미미 다방 가기를 좋아했다. 커다란 엠프스피커가 설치된 구석이 내 자리였다. 강의가 없는 날이면 그 자리에서 점심도 거르면서 음악을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사랑문제도 쉬 풀리지 않고 학교 다니기도 따분했다. 따분한 것은 둘째고 어려운 집안 형편상 다음 학기부터 휴학할지 몰랐다. 서툰 줄담배를 피우면서 고뇌에 잠겨 보내던 미미 다방의 날들.

어느 날이다. 빈속에 줄담배를 태우며 음악을 듣다가 오줌이 마려워졌다. 뮤직박스 앞을 지나 화장실에 들어갔다. 소변기 앞에 섰는데 눈높이에 작은 창이 나 있었다. 소변을 보면서 바깥 풍경도 즐기라고 창을 그리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창밖으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요즘 같으면 다른 건물들에 가려 하늘이 보이지 않았을 텐데 당시는 그럴 만한 건물들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번쩍하며 창밖 하늘을 번개가 지나갔다. 나는 오줌 누다 말고 얼떨떨해서 계속 하늘을 지켜보았다. 비는 내리지 않았다. 마른번개였다.

집에 돌아와서 일기장에 한 줄 적었다. 의미 없는 듯, 있는 듯한 한 줄.

창밖으로 번개 한 마리가 지나갔다.’

 

내 젊은 날 춘천에 미미 다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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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 슬픈 인연의 노랫말에 대해 글을 써 올린 적 있다. (수필: ‘슬픈 인연’)노랫말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면서도 정작 작사가와 작곡가에 대한 언급을 생략했는데 까닭이 있다. 마음 불편하게도 작곡가가 일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우자키류도우란 분이다.

그렇다. ‘슬픈 인연은 일본 사람이 작곡하고 노랫말은 우리나라의 박건호 씨가 한 특이한 경우다.

박건호.

그는 우리나라 대중가요 작사가로서 한 획을 그은 분이다. 그 예로써 가수 박인희가 부른 모닥불의 노랫말을 들 수 있다. 사실 6,70년대 학원가를 풍미한 지난 시절의 노래라 요즈음 젊은이들은 금시초문일 수 있다. 안타깝다. 이제 한 번 그 노랫말을 보기로 한다.

 

<모닥불>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어찌 이를 대중가요 노랫말이라며 경시할 수 있을까.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 모닥불 같은 것이라고 삶의 유한(有限)을 안타까워하면서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하면서 결코 허무나 좌절에 빠지지 않고 삶을 누리자고 마무리 짓는다.

숱한 철학자들이 인생의 바른 길을 목소리 높여 제시해 주었는데 작사가 박건호는 모닥불노랫말 하나로 간단명료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제시해 주었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모닥불 가에서 건네는 얘기처럼 넌지시 했으니 말이다.

 

 

덧붙임: ‘박건호는 대중가요 작사가이자 시인이다. 작사한 대중가요로는 모닥불’ ‘잊혀진 계절’ ‘! 대한민국’ ‘그대는 나의 인생’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단발머리등이 있다. 시집으로는 타다가 남은 것들’ ‘고독은 하나의 사치였다’ ‘추억의 아랫목이 그립다. 강원도 원주시 무실동에 박건호 공원이 조성됐으며, 이 때 그의 노랫말비도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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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말이 되지 않았다. 살생을 금하는 낙산사 가까운 곳의 횟집이라니.

하지만 40년 전만 해도 그런 횟집이나 식당이 여럿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오래 전 낙산사 주지스님이 먹고 살아야 하는 가여운 중생을 위해 사찰 가까이에서 식당 차리는 일을 한 번 묵인했더니 벌어진 일이라 했고 그 때문에 언젠가는 한꺼번에 멀리로 집단 이주시킬 계획이라고 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횟집이나 식당들이 다 정비돼 낙산사 경내는 청정해졌다.

어쨌든.

40년 전 5월 어느 날 밤, 나는 그런 횟집 중 한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모처럼 퇴근 후 시간을 혼자 낭만적으로 보내고 싶었던 거다. 낙산사에서 범종을 친 듯싶은데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은, 바로 눈앞의 밤바다가 내는 파도 소리 탓이었다. 파도 소리 들으며, 횟집 방바닥에 놓인 그 날 신문을 보며 술잔을 기울이는데 이런 제목의 기사가 눈에 뜨였다.

광주(光州)에 소요사태(騷擾事態)’

소요사태란 여럿이 떠들썩하게 들고일어나 술렁거리고 소란을 피워 공공질서를 어지럽히거나 위협하는 상황이다. 전년도 10월 하순의 박 대통령 시해 사건 후 정국이 안정을 쉬 찾은 것으로 아는데 소요사태라고?

 

그 때만 해도 나는 모든 언론 보도가 철저히 통제받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하긴 서울에서 먼, 태백산맥 너머 동해안의 한 작은 읍의 선생(모 고등학교 국어교사)이 뭘 알겠는가. 시국(時局)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영서지방의 일 같았다.

 

횟집 주인이 서비스로 멍게 한 접시를 술상에 올리며 말했다.

설악산 산불까지 난리야!”

“?”

어리둥절해서 쳐다보는 내게 그는 이어서 말했다.

어제 난 산불이 여태 살아있다는 게 아니요.”

그제서 나는 방을 나와 마당에 서서 설악산 쪽을 바라보았다. 설악산은 낙산사에서 북쪽으로 40리쯤에 있었다. 과연, 멀리 어둠 속 설악산의 중턱을 휘감고 있는 빨간 실뱀같은 게 보였다.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는 흉측한 산불. 뭔 일인지 불길이 확 치솟기도 했다. 주인이 말을 덧붙였다.

“625 동란 때 불발탄들이 곳곳에 남아 있으니 어디 쉽게 불을 끄겠소?”

불길이 확 치솟기도 하는 건 그 불발탄이 불에 터지는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련하게 폭발음도 들리는 것 같았다.

순간 나는 이틀째 진화되지 않는다는 설악산 산불의 의미를 깨달았다. 19805월에서 30년 전의 625동란이 여태 끝나지 않은 것이다.

저 남쪽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광주 소요사태 또한 저 산불처럼 쉬 진화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뒤를 이었다. 취기가 사라졌다. 그런데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딱히 아무 것도 할 게 없었다.

 

시대의 아픔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어느 소시민의 이야기 ‘K의 고개는 그 순간 배태(胚胎)된 게 아니었을까?

사진출처= 국립공원관리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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