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아데나 할펀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이야기에 대하여... 

   미국의 여류 작가 아데나 할펀의 경쾌함과 진지함이 알맞게 균형을 이룬 이 작품 '스물 아홉'은 일흔 다섯의 생일을 맞은 한 할머니가 생일 케익에 대고 빈 소원으로 인해 다시금 스물 아홉의 나이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돌아간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종의 '백투더 퓨쳐'식의 시간 여행이 아니라 신체의 나이가 스물 아홉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모든 건 그대로고 몸만 젊어지는 것이다. 

 

   일흔 다섯살이 된 것을 축복으로 여겨야 옳거늘. 젠장, 나도 말은 그렇게 한다. 나이 듦의 가장 큰 기쁨은 세월을 통해 얻은 지혜라고. 그래야만 그나마 기분이 나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다 헛소리다. 그러나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모두들 절망할텐데. 그들이 내 나이가 되어 진실을 깨닫도록 내버려 두는 수밖에. 일흔다섯살로 사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누군가 말해주었더라면 나는 오래전에 이 상황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자살을 했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건 안될 노릇이다. 아마도 무인도 같은 곳에 가서 냉혹한 진실을 강요하는 거울 없이 살았을 것이다 .(P. 9 ~ 10) 

 

    일흔 다섯의 생일 케잌을 앞에 둔 할머니 엘리가 이토록 자신의 나이에 대해 진저리를 치는 것은 그녀 자신 그 나이가 되도록 단 한번도 자신의 뜻에 따라 제대로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인생이 지금 엉망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순탄한 인생을 살아왔다. 무난하고 충직한 남편을 만나 속 한번 섞지 않고 비록 평범한 아내이긴 하나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을 잘 꾸리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나이먹음에 대해 속절없음의 한탄일까? 그건 또 아니다. 그녀가 저렇게 한탄을 하는 것은 그녀 자신 한번도 자신의 뜻에 따라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리거나 처녀시절엔 엄마의 뜻에 따라 움직였고 당시 사회적 통념에 따른 보통 여자의 삶만을 주려했던 엄마의 뜻대로 그녀는 원했던 공부 마저도 포기 하고 그저 평안한 생활을 보장해 줄 능력 하나만 보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그렇게 그녀는 연애는 커녕 사랑의 열정 조차 제대로 한 번 느껴보지 못한 ,채 그저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상품 마냥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위치를 켜는 누군가가 인도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가는 삶만을 살아왔을 뿐, 그 인생 자락 어디에도 자신의 의지는 없었다. 이것은 마치 에머슨 레이크 앤 팔머의 노래 'C' est la Vie'의 첫 소절과도 같다.     

      Have your leaves all turned to brown
      Will you scatter them around you
      C'est la vie 


      Do you love
      And then how am I to know
      If you don't let your love show for me
      C'est la vie

  

  그랬던 그녀였기에 남편이 결국 죽었을 때, 마치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 처럼 애오라지 남편만을 중심으로 살아온 그녀로서는 자신의 삶을 유일하게 지탱해주던 근거를 상실한 느낌을 받게되고  중심의 인력이 없어진 물건이 오로지 원심력만의 작용을 받아 바깥으로 튕겨 나가버리는 것 처럼 그렇게 그제서야 그 인생의 바깥에서 제대로 자기 인생을 찬찬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 모든 게 오로지 후회로 채색되어 있음을.      

      Oh,  c'est la vie
      Oh,  c'est la vie
      Who knows, who cares for me
      C'est la vie 

 

   그래서 엘리는 당연히 지금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20대의 손녀 루시를 질투가 나리만치 부러워한다. 그리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걸어보지 못한 길' 처럼 자신이 걸어보지 못했던 인생을 다시 한 번 새롭게 걸어보길 원한다.  '다시 한 번 루시 처럼 된다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절대로 지금 같은 인생은 살지 않을거야.' 라고...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 로버트 프로스트, '걸어보지 못한 길' 중에서 -  

 

   바로 그 바람을 그녀는 일흔 다섯번째의 생일 케익 앞에서 소원으로 빈다. 그리고 행운의 여신이 이마에 입이라도 맞추어 주었는지 딸 바바라가 실수로 가져오는 바람에 케잌에 꽂혔던 스물 아홉 개의 양초 갯수 그대로 엘리는 다음 날 아침 스물 아홉의 몸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스물 아홉 엘리의 하루 동안의 '인생 되찾기 좌충우돌 여정'이 시작된다. 

 

 

 

   작가 아데나 할펀은 우연히 꽂은  양초 개수라는 것으로 스물 아홉의 나이로 돌아간 것에 특별한 의도는 없다는 듯한 뉘앙스를 드리웠지만 사실 그 나이를 선택한 게 전적으로 우연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바로 한 해 뒤의 '서른'이란 나이는 종종 서양에서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의 상징 같은 것으로 쓰이곤 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현대 부조리극의 선구자라 불리는 극작가 외젠느 이오네스코는 '남자는 서른 부터 자기 얼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서른'은 진짜 어른이 되는 나이로 자기 인생을 스스로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건 비단 남자만의 경우는 아니다. 여성 역시도 서른을 중요한 하나의 전환점으로 여겼음을 우리는 바로 독일의 여류시인이자 역시나 극작가이기도 한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소설 '삼십세'에서 엿볼 수 있다. 거기서 바하만은 서른이 되어 비로소 진짜 인생에 눈뜨게 된 남자의 이야기를 빌어와 그녀 자신이 느끼는 서른이 주는 '무거움'을 간접적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 다시금 리와인드 되는 '스물 아홉'은 진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그 준비로서의 나이이자 제대로 된 진짜 삶을 선택하기 위한 열려진 가능성의 시간 자체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즉 이 제목과 돌아간 나이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 하루 동안의 엘리의 여정 자체가 진짜 자신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여정은 오로지 보다 더 잘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이 소설 역시 '부머랭으로서의 여정'인 것이다.

  

  소설에 대하여... 

   이 소설을 음악 형식으로 비유하자면 세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소나티네'라고 할 수 있다. 

    세 부분으로 만들어진 에머슨 레이크 앤 팔머의 노래 'C' est la Vie'를 굳이 인용한 것도 그래서이다.  그렇게 엘리가 왜 그런 소원을 빌게 되었는지 스스로 고백하는 첫 시작을 제시부인 1악장으로, 스물 아홉으로 돌아간 엘리의 하루 동안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부분을 전개부인 2악장으로, 하루 동안의 여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엘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지막 부분을 재현부인 3악장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말했듯이 소나타라는 음악 형식 자체가 인생 그 자체를 상징한다면 이렇게 소나티네 형식으로 보아도 별로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렇게 하나의 음악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다. 1악장인 엘리의 고백은 조금 느린 안단테 이지만 2악장인 전개부 뒤로는 알레그로 논 트로포(allegro non troppo)로 경쾌하게 진행되는...  한 할머니의 새로운 인생 찾기 프로젝트이긴 하지만 그렇게 부담없이 간간이 미소까지 머금어가면서 벗할 수 있는 소설이다. 

    

   작가가 여성이고 등장인물들도 모두 여성들이기 때문에 확실히 남성들 보다는 여성들에게 더욱 어필하는 바가 많을 것 같다. 하지만 더욱 어필할 수 있는 쪽은 아마도 지금 스스로 인생 황혼기에 있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들, 특히 우리네 부모님들이 아닐까 싶다. 아데나 할펀 역시 책 앞머리에 자신의 어머니에게 이 작품을 헌정하고 있다. 정말로 소설을 읽다보면 할펀이 자신의 어머니 심정을 헤아려가며 써내려 갔구나 하는 게 느껴진다. 어느덧 숙제를 다 마쳐가는 아이와도 같이 등 뒤에 놓인 세월을 뒤돌아보게 되는 시기에 놓인 어머니에게 딸이 진심을 담아 보내는 당신의 인생은 그 자체로 넉넉했고 아름다웠으며 당신다웠다고 속삭이며 깊이 안아주는듯한 그런 위로와도 같은 느낌이... 그래서일까 읽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내 어머니였다. 새삼 당신에게도 '걸어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무심하게도 늘 잊고 지낸다. 어머니에게도 '여자'로서의 그녀의 바람이 욕망이 삶이 있었을 것임을... 이 책에 대하여 내가 감사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것일 것이다. 새삼 어머니도 '여자'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는 것. 공기가 주변에 늘 가까이 있기에 소중함을 모르는 것 처럼 어머니라는 존재 역시도 그런 것 같다. 아데나 할펀 처럼 소설은 못 써 드리지만 자주 연락드리고 할수 있는 한 많이 얘기를 들어드리자 다짐해 본다. 이걸 잊지 않기 위해 '다모클레스의 칼' 처럼 한동안 머리 맡에 두고 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비니아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마인들의 어머니라고도 불리는 '라비니아'. 

  그녀를 처음 만났던 곳은 아마도 단테의 신곡이 아니었나 싶다. 거기 흔히 '림보'라 부르는 제1지옥. 그러니까 선하게 살았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 받기 전에 죽은 영혼들이라 천국에 가지 못하는 혼들의 거주지에서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로 만났던 인물 중의 하나가 로마 건국의 뿌리가 되는 아이네이스의 아내이기도 한 '라비니아'였다.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통해 트로이 파멸과 로마 건국을 처음으로 연결 시켰던 그 베르길리우스도 아이네이스에 대한 얘기는 그토록 구구절절 읊어 놓으면서도 정작 그의 아내이자 로마의 근원이 되는 '라티움(이름에서 '라틴'의 기원이었음이 바로 드러난다.)의 왕비였던 라비이나에 대해서는 이름 한 번 언급하는 것으로 넘어가버리고 말았는데 그건 단테 역시도 마찬가지여서 마치 자신을 인도하고 있는 베르길리우스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언급했다는 걸 암시하기라도 하듯 그저 이름 한 번 나오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서양 문명의 모태를 건설했다고 해도 지나치니 않을 로마. 바로 그 로마의 사실상의 가이아(대지의 모신(母神) - 굳이 이 같은 표현을 쓴 것은 아이네이스와 라비니아가 결혼할 때 라비이아를 '가이아'라고 부르기 때문이다.)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라바니아'의 존재 치고는 이같은 베르길리우스와 단테의 처사는 거의 무시에 가깝다고 할 수 밖에 없는데 행여 그렇게 된 연유가 혹시 당시를 지배했던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고 때문은 아니었을까 의심해보게 된다. 바로 그 의심에서 출발하여 그렇게 역사에서 빼앗기고 지워졌던 '라비니아'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아주려 한 작가가 라비이나, 그녀를 중심으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다시 썼으니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 SF의 거장이기도 한 여류 작가 어슐러 르 귄의 '라비니아'이다.  

  

 

 

   말 그대로 지금 우리들에게 도착한 르 귄의 '라바니아'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그 자신 무시하거나 지워버렸던 주체를 다시금 복원하여 오히려 그 주체의 시각으로 다시 써 내려간 작품이다. 슐라이허마허 이후로 역사 기술이 랑케가 말했던 식으로  역사가가 그 기술에 있어서 오로지 사실 그 자체에만 근거하여 온전히 가치중립적으로 쓰기란 불가능한 것이며 오히려 역사란 역사가가 가진 시각과 역사적 사실이 상호작용 하면서 일종의 인위적인 구성물이 되는 것임이 드러났는데 이로써 지금 역사를 쓰고 혹은 보고 있는자가 '누구'인가가 중요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바로 그 '누가' 바라보는가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GENDER)  역시도 중요한 차이를 가져올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역사이래로 남성은 지배자의 위치를 여성은 거기에 종속적인 위치를 점유했기에 그렇게 서로의 계급적 위치가 현격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성의 시각으로서의 역사 새롭게 쓰기는 이렇게 여성으로서의 시각과 남성으로서의 시각을 대조해 보게 하며 역사 기술이 사실의 기술이 아닌 관점의 해석임을 깨달아 지금까지 남성에 편향된 역사를 바로 잡고 보다 균형된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미라벨로 카바로니의 '제단의 라비니아' 


   따라서 베르길리우스의 남성적 시각이 아닌 이러한 르귄의 여성적 시각으로 로마의 뿌리가 형성되는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다. 사실 르귄의 이러한 여성의 시각에서 다시 쓰기는 르귄이 처음인 것도 아니요 그녀 자신의 비브리오 그래피에 있어서도 처음이 아니다. 그녀의 비브리오 그래피에선 이미 그녀의 대표작 판타지이기도 한 '어스시 이야기'에서 여성인 테나의 관점에서 마법사의 섬 '로크'를 새롭게 써내려 갔으며 르귄 이전에 독일의 여류작가 크리스타 볼프는 그동안 그리스 신화에서 희대의 악녀로만 묘사되던 '메데이아'를 여성 주체의 관점에서 새롭게 써내려간 적이 있다. 
  

                       

 

 

 

 

 

 

  

  크리스타 볼프와 르귄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동안 남성적 시각에 의해서 왜곡되고 무시되었던 목소리들(크리스타 볼프의 원래 제목은 '메데이아, 목소리들'이다.)을 되찾아 여성성을 다시금 진실되고 온전하게 복원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크리스타 볼프는 메데이아를 공포와 악행의 존재가 아니라 지배자 남성이 가진 권력을 적극적으로 되찾아 남성 중심의 질서를 전복하고 여성을 지배자로  위치시키는 주체로 새롭게 묘사하며 르귄은 베르길리우스에 의해서는 무시되었던 여성의 관점에서 멸망한 트로이의 유민으로 부터 로마의 기원이 되는 라티움의 통치자가 되고 그 치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새롭게 기술한다. 하지만 르귄의 '라바니아'는 볼프의 '메데이아'와는 전혀 상반된 입장을 보여주는 데 그 독특성이 있다. 자신의 욕망 성취와 권력 획득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던 메데이아와는 달리 '라바니아'는 기묘하게도 단 한 번도 스스로의 욕망을 관철시키려 하거나 자신의 의지나 권리를 적극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그녀는 기꺼이 신탁을 통해 조우하게 된 베르길리우스의 예언에 따라 자신을 적극적 주체로 내세울 수 있는 모든 욕망을 포기한다. 그녀는 그저 '남자에게 인도되기 위해 잘 여문' 여성으로서의 지위에 스스로 머무르며 베르길리우스가 예언한 상대를 자신의 운명으로 알고 순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이상하다. 이왕에 무시되었던 여성으로서의 시각을 적극적으로 복원하려 했다면 남성성(베르길리우스로 대표되는)에 한계지워진 운명의 굴레로 부터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보다 더 합당하지 않나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비니아는 아이네이스의 충실한 내조자로서 그의 라티움 통치를 그 그늘에서 도와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는 라비니아의 친어머니와 비교하면 그 수동성이 더 현격해진다. 라비니아의 어머니는 오히려 메데이아적 인물에 가깝다. 그녀는 라비니아를 자신이 원하는 남자와 결혼시키기 위해서(그리고 그것 자체로서 그녀는 베르길리우스의 반대편에 선다. 그리고 이 의미는 남성성의 규정을 오히려 거스르는 여성의 메데이아적 적극성을 상징한다.) 왕의 명령마저 무시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더구나 라비니아를 투르누스와 결혼시키기 위해 숲에서 보여주는 여왕이 중심이 된 여성들만의 축제는 크리스타 볼프가 메데이아를 야성의 여성성으로 규정한 것과도 통한다. 

  거기서 여왕은 라비니아를 밤의 숲으로 데리고 가면서 거기서 축제가 열릴텐데 그 축제는 오로지 여자들만을 위한 축제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파수꾼을 세울거다. 남자가 근처에 오면 멀리 쫓아내야 한다. 만일 그가 가지않겠다고 하거나 우리를 엿보려고 한다면, 그는 죽음을, 죽음보다 더한 일을 당할 것이다! 그는 거세당한 사내가 되어 산을 내려가게 될 것이다! 발레나가 네 자루의 날카로운 검을 가져왔고, 네 명의 강인한 여자들이 밤낮으로 길을 지킬 거다.(.P.176) 

 

  파수꾼, 죽음, 거세라는 말들로 인해 우리는 그 축제가 오로지 여성성만으로 충만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런데 그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여성들이 자신의 사회적 신분(물론 그 신분은 전적으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결정된 것이다.)과는 전혀 반대되는 의복을 입는다는 것이 또한 흥미롭다. 그러니까 노예는 여왕과 공주의 의복을 입고 여왕과 공주는 노예의 의복을 입는데 바로 이 의복의 전복은 실상 남성이 규정한 사회적 질서의 전복이며 그렇게 새로운 여성 중심의 질서를 다시금 정초시키는 상징이다. 바로 이처럼 라비니아의 어머니 여왕은 그야말로 볼프가 말했던 '메데이아적 주체'를 강하게 암시하는데 하지만 이 여성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그녀는 자결하고 만다. 그러니까 여기서 르귄은 그러한 메데이아적 주체가 가지는 전복적, 투쟁적 여성성의 길로는 나아가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렇다면 왜 르귄은 아버지가 신탁으로 이끌었고 거기서 만난 베르길리우스의 예언에 순응하는, 그렇게 온전히 남성이 규정한 틀 안에서만 움직이는 라비니아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인가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무시되고 잃어버렸던 목소리를 되찾아주려는 것과는 왠지 상반되는 결과가 아닌가? 

  문제는 이것이 '라비니아'가 처음이 아니라는 데 있다. 르귄은 이미 어스시 이야기에서도 여성 테나를 통해 이렇게 말하게 한 바가 있다. 

 

  남자들이란 어찌나 여자들을 겁내는지! 테나는 늦게 핀 장미꽃 사이를 걸으면서 생각했다. 여자들 한 명 한 명은 겁내지 않지만, 여자들이 함께 얘기하고 함께 일하고 서로를 위해 목소리를 내기만 하면... 그러면 남자들은 거기서 책략과 음모와 강제를 보고, 덫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이 옳다. 여자들은 여자로서 이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편들려는 경향이 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구속으로 보는 유대와 남자들이 속박으로 보는 결속을 짰다.

                                                                     ( 어스시 전집 6권, '또다른 바람' P. 271 )

 

  테나의 이 이야기 - 그러니까 여자는 이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편들고 남자들은 구속으로 여기는 유대와 남자들은 속박으로만 생각할지 몰라도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에 적극적이고 좋아한다는 사실-는 왜 르귄이 라비니아를 그렇게 형상화 했는지 그 이유를 짐작케 한다. 

  우리는 여기서 볼프의 '메데이아적 여성성'이 페미니즘의 한 입장에서는 오히려 남성성에 오염된 여성성으로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획득적, 투쟁적은 그야말로 남성성의 특징인데 어떻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여성성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비판이다. 여성성은 남성성에 오염된 것이 아닌 고유의 여성성 자체로서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유의 여성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당연히 제기될 수 밖에 없고 오로지 반대 정립만으로 정의가 가능할 뿐인 우리들은 그렇게 남성성에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밖에는 고유의 여성성을 정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형상화하게 된 고유의 여성성과 가장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것(고유의 여성성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매개자)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 '모성'이라고 한다. 

 

 

 

  모성 역시도 헤르더의 민족관념이 형성되면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관념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거기다 '어머니'라는 것도 일종의 '신화'로 남성 중심 사회의 지속을 위해서 여성을 더욱 종속적으로 만들기 위해 심어진 관념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모성으로서의 여성성이 남성성과 가장 차이가 나는 것 역시 사실이니 만큼 전적으로 폐기되어야만 할 것은 아니다. '라비니아'를 보면 르귄 역시도 여기에 '비판적 지지'의 관점에 서 있는 것 같다. 

   앞서도 말했지만 라비니아는 수많은 구혼자들이 지배자가 되기위해 획득해야 하는 '여문 열매'라는 위치에서 아이네이스와 혼인 할 때는 '가이아'의 칭호를 얻는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들 중 제우스의 아버지적 세대인 티탄족으로 하늘을 의미하는 우라노스와 함께 모든 신들의 근원이다. 가이아는 대지의 여신이고 모든 존재가 다 대지에서 비롯되므로 그렇게 라비니아는 '근원적 어머니'의 상징이 된다. 

  가이아는 그리스 어로 '삶'을 뜻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바로 여기에 왜 르귄이 라비니아를 그렇게 순응적 존재로 그렸는지, 그렇게 그리면서도 '모성'마저 가져오는 것인지(라티움에서 라비니아는 여왕이 된다. 이것은 그대로 그녀의 어머니인 여왕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기존의 어머니를 지우고 새로운 어머니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르귄은 모성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통해서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이아적 주체'와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라비니아적 주체'를 정립하는 것인데 거기서 르귄이 생각하는 모성의 궁극적인 의미는 바로 '삶의 유지'이다. 

 

  즉, 르귄은 삶을 지켜내고 이어가게 하는 것이 모성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테나의 여성들은 다음 세대를 편들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의 의미이여 왜 그녀가 라비니아로 하여금 베르길리우스의 예언을 그토록 충실히 따르게 했는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즉 라비니아는 스스로 자신의 욕망까지 죽여가면서까지 자신을 비롯한 라티움 전체 삶이 유지되고 지속될 수 있도록 선택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베르길리우스의 예언에 의해 규정된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희생함으로서 미처 베르길리우스마저 끝맺지 못했던(베르길리우스는 내내 '아이네이스'가 미완성임을 말한다. 이는 그것이 온전히 남성의 시각으로서만 쓰여져서 불완전한 편협성에 머물고 말았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삶 자체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또한 바로 그 희생과 유지하고 지속으로의 헌신에서  르귄은 어머니야 말로 남성성에 오염되지 않은 고유의 여성성의 모습이란 것을 보는 것이다. 

 

  라비니아는 바로 이러한 르귄의 이상화된 여성성의 상징이다. 어쩌면 이 르귄의 이 모든 이야기가 그냥 자기 합리화가 아니냐고 할 수 있다.희생과 외부에 규정당한 삶일지라도 그 유지와 지속에 힘쓰는 것 자체가 남성성의 지배를 영속화시키는 자세가 아니겠냐고 말이다. 정당한 비판일 수도 있는데 여기에 우리는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여전히 '여인의 초상'의 결말은 논란중이다. 왜 여주인공 이사벨은자신의 결혼이 사랑이 아니라 오로지 남편의 자기 재산을 노린 지극히 타산적 욕망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면서도 그 혼인 생활을 스스로 계속 이어가려 하느냐 한느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눈에 그러한 이사벨의 선택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고 작가 헨리 제임스 역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고로 점철된 인물이었구나 여겨진다. 하지만 정작 헨리 제임스의 의도는 달랐다. 그건 결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고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는 보다 고귀한 인간다움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협잡과 타산임을 알면서도 오히려 스스로 그 내부에 머무름을 선택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인간이 그렇게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존재가 아님을,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오지 않더라도 내내 스스로 희생할 수 있는 고귀한 존재임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우리들 눈에 이 생각은 어쩌면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헨리 제임스는 그걸 또 다른 작품 '비둘기의 날개'에서 또 반복한다. 한 가난한 연인들이 그 돈을 노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미국인 여자를 유혹하려 한다. 결국 연인의 남자 애인은 계획했던 대로 상속녀와 결혼하는데 성공한다. 나중에 상속녀는 모든 진실을 알게되지만 오히려 그 연인들에게 자기 재산을 상속한다. 그럼으로써 사람이 자기 욕망대로 움직이는 것만은 아님을 보여 이해타산으로 밖에는 타인을 보지 못했던 연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헨리 제임스의 이러한 여성성의 창조는 사실 칸트의 '의무윤리'와도 그 맥락이 상통한다. 칸트는 인간이 의무를 따를 때 진정 자유롭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공리주의가 바라보듯이 인간이 오로지 자기 욕망, 이해만을 따라 스스로 선택한다 해도 그것은 그 자신 내부의 동물적 본능에 결국은 지배받아 그런 것으로 노예의 행동이지 자유의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그 어떤 본능적 호소에도 굴하지 않는 오로지 내 욕망이나 이익과 전적으로 무관한 의무만을 따를 때 가능한 것이라고. 헨리 제임스의 고귀하고 이상적 여성들도 모두 이러한 칸트의 진정한 자유를 상징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상들은 모든 것으로 부터의 전적인 자유로움으로 인간을 기초지웠던 계몽주의의 이념상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헨리 제임스의 인물들이 혹은 르귄의 라비니아가 어리석어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 자본주의적 관념에 찌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칸트와 헨리 제임스가 있었던 자본주의의 위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했던 시대에서는 그런 인간이 오히려 더 자유롭고 고귀한 존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르귄의 '라비니아'는 전(pre)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새로이 여성성을 바라보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녀가 라비니아를 쓰면서 떠올렸던 것은 저 원시시대의 모성중심사회에서 통용되던 여성성이었을 것이다. 대지의 모든 것을 받들고 그것과 유기적으로 하나되어 살아가던 사람들이 여겼던 어머니의 모습 그것이었을 것이다. 

 

  르귄의 라비니아는 단순히 베르길리우스에게 무시되었던 존재에게 다시금 목소리를 찾아준다는 의미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인류학적 시선으로(지금의 시각이 아닌 그 전 시대의 시각으로 바라보려 한다는 점에서) 새로이 여성성을 형상화 해보려는 야심찬(베르길리우스와 대적한다는 의미에서) 시도이기도 하다. 메데이아적 주체가 아닌 라비니아적 주체로서의 여성성이 과연 다른 이들에게도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성성 혹은 여성적 주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의 여지들을 마구 촉발시킨다는 점에서 한번쯤 벗해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나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11-22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비니아 라는 제목이 익은데,, 하고 보니 르귄의 소설이었군요.

흑흑, 헤르메스님, 여기서부터 제가 갑자기 감동이 밀려오는거예요.
사실 알라딘 서재 활동하면서 이렇게 왕래하는 분 중에, 저랑 취향이 동일하게
리뷰를 올리시는 분은 헤르메스님 밖에 못 봤거든요.
(아니다, 지금 안 오시는 히어나우님도 계시네요.) 여하간 이 무한 감동이라니!

저는 르귄 여사를 정말 좋아합니다. 사실 여자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어스시 시리즈를 읽으면 흐름이 좀 부드럽네 라고만 생각했는데, 기프트 시리즈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저자에 대해서 찬찬히 찾아본거죠... (제가 저자 약력을 대충 보는 경향이..)
르귄 여사는 정말, 그분만의 분위기가 있어서 너무 좋아요.

ICE-9 2011-11-22 23:04   좋아요 0 | URL
와! 마고님도 르귄 여사님을 좋아하시는군요.
저는 르귄 여사를 오래전에 '어둠의 왼손' 부터 만났고 지금까지 국내에 나온 모든 작품을 소장할 만큼 무척 좋아하지만 주위에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가 전혀 없어 거기에 대해 한 번도 얘기를 나눠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늘 혼자 애정을 간직할 뿐이었는데 이렇게 같은 작가를 좋아하는 분을 만나니 정말 반갑고 기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서재활동 을 할 걸 하는 후회도 마구 드네요. 마고님과 더불어 르귄 여사의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흥미진진한 시간들의 기대가 마구 몰려오네요^ ^
 
[새벽 거리에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새벽 거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히가시노 게이고는 분명 부러운 재능을 가졌다. 별로 특별한 기교도 그렇다고 뛰어난 문장도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첫 페이지를 시작하면 끝까지 몰입해서 읽게 만든다. 도대체 그 흡인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을 때 마다 내가 먼저 집착하는 건 작품에 드리워진 그의 테크닉이다. 

 

  이번에 나온 '새벽 거리에서'. 

  벌써 일본에서는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올해 키시타니 고로와 후카다 쿄쿄(이런 '부호형사'에 이어 또 만나는군요. 뭔가 인연이 있는 것일까나~^ ^;) 주연으로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감독은 한국에서도 개봉된 '화이트 아웃'을 감독했던 와카마츠 세츠로... 

새벽거리에서 영화 포스터 

  그러니까 이번에도 게이고는 확실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실 이것이 다소 의외일 수도 있는 것이 이 작품, '새벽거리에서'는 분명한 미스터리 소설도 아니고 더구나 소재 역시 그리 대중적 호감을 얻을 수 없는 한 중년 가장의 불륜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게이고의 주 무기인 미스터리도 강하지 않고 소재 역시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아마도그건 역시 게이고 특유의 너무도 자연스레 녹아들었기에 얼른 드러나지는 않는 '플롯짜기'의 기교가 잘 발휘되었기 때문에 그러지 않나 싶다. 

  소설은 주인공 와타나베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거기서 그는 불륜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불장난과도 같은 불륜으로 인해 공들여 쌓아왔던 모든 인생이 단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게이고는 첫 페이지에 불륜이 가져오는 파국적 결말을 독자에게 충분히 공감되도록 설명한 뒤, 마치 뒤통수를 치듯이 주인공이 그런 불륜에 빠져들었음을 알린다. 바로 여기서 서스펜스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불륜에 빠져버린 주인공이 과연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지켜낼 수 있을까 하는... 

 

   하지만 불륜에 빠져드는 주인공을 대부분의 독자들이 받아들일 리 없다. 그래서 게이고는 현명하게도 불륜에 빠져드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라 결혼을 하면서 가정을 지키느라 잃어버렸던 혹은 포기했었던 '젊은 수컷으로서의 야성' 혹은 '남성성'을 되찾아오는 것으로 그린다. 

   "모두 다 남자가 아니야. 마누라가 여자가 아니듯 우리도 남자가 아니라고. 남편, 아버지, 아저씨, 그런 걸로 변해 버린 거지. 그러니까 여자 이야기 같은 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P.16)

  옛날 대학 산악부원들과의 대화는 기혼인 중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했을만한 회한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불륜에 빠져드는 주인공을 비난하기 보다는 응원하게 되고 그래서 작동되는 서스펜스의 강도는 더욱 고조된다. 그렇게 만든 다음 게이고는 와타나베 불륜의 대상 아키하를 등장시킨다. 

 

                                                                          영화에서 아키하 역을 맡은 후카다 쿄쿄
 

    서스펜스 차원에서 작동되는 불륜의 유혹이기 때문에 따라서 게이고는 당연히 아키하도 평범한 여성이 아닌 뭔가 색다른 매력(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라는 말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그런 식으로)의 어떤 비밀스런 구석을 가진 존재로 만든다. 따라서 독자는 당연히 알콩달콩한 로맨스를 기대하기 보다는 여자가 가진 기묘한 모습으로 인해 도대체 저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혹은 과연 그 감추고 있는 비밀은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더 기대하게 된다. 그런 독자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달리 말하면 자신이 장치한 서스펜스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거의 확신하고 있는 게이고는 와타나베가 그 자신의 장담과 그 모든 희생을 무릎 쓰고라도 아키하를 선택하게 되는지 거기까지 이르는 와타나베 자신의 감정의 흐름은 생략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고 실제 그렇게 한다. 그러한 게이고의 계산은 맞아 떨어져서 독자 역시 와타나베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빠져들게 되는 것인지 묻지 않는다. 이미 거기서 독자는 완전히 와타나베 편에 서서 어떻게 들키지 않고 그 아슬아슬한 연애를 이어가는가에만 관심이 있다. 왜냐하면 게이고가 독자를 이 게임에 더 깊이 끌어 들이도록 또 하나의 서스펜스 장치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아키하가 1년 뒤 3월 30일까지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집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다.  

 

  아키하로 인해 불륜의 서스펜스가 미스터리의 서스펜스로 절묘하게 전이된다. 

  '들킴'에의 불안이 '신뢰'의 불안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이쯤에서 이미 와타나베의 결심은 확고해진다. 그는 더이상 아내에게 들킬까 염려하지 않으며 다만 어떻게 이혼의 말을 꺼낼 것인지 그 방법과 타이밍만을 고민한다. 우리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게다가 귀여운 딸아이 까지 있는 가정이 거의 초단위의 파국적 위기 앞에 놓여졌는데도 그 무너짐의 부채를 느끼지 않는다. 또 달리 시작된 서스펜스가 그러한 감정이입을 막는 것이다. 그러니까 와타나베가 전 인생을 걸고 모험을 하려는 지금 그 대상인 아키하가 과연 도박을 걸어도 좋을만한 존재인지 그 불안으로 인한 서스펜스가 이미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반의 서스펜스 장치로 인해 이미 와타나베에 충분히 감정이입이 되어버린 우리는 두번째 불안 역시 동일하게 느끼면서 그저 그 불안을 조금이라도 빨리 해소하려고 페이지를 넘기는 것 밖에는 없다. 

 

 

  이 가정이 파국의 코 앞까지 왔지만  우리는 냉정한 관찰자일 뿐 근심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의 불안이 아키하에 대한 와타나베의 불안과 동일한 자리에 서 버렸기 때문이다.

  

  게이고가 원래 작품에다 무엇을 중심으로 두려 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와타나베의 불륜인지 아니면 아키하의 미스터리인지 아니면 그 둘 다 인지. 얼른 갈피를 잡기는 힘들다. 미스터리가 주가 된다고 하면 그것이 실로 강하지 않음이 실망스럽고 불륜이 주가 된다면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히 말은 못 하겠다.) 어느 것 하나로 시원스레 해결되지 않음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정교하게 계산된 서스펜스를 작동시키는 게이고이니 만큼 이렇게 이도저도 아닌 결말을 준비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과연 지금은 알 수 없는 근저에 깔린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회피하면서 한 가지를 말하자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연기'가 아닐까 한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아닌 배우의 '연기'를 말함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냐면 이 작품에서 주요하게 작동되는 두 개의 서스펜스인 불륜에서도 미스터리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연기'이기 때문이다. 와타나베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지만 늘 한결같은 모습의 남편을 연기하고 미스터리에서의 아키하의 역할 역시 그렇다. 문제는 이 둘의 연기가 완전히 정반대의 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와타나베의 연기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고 아키하의 연기는 일상을 파괴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상극의 힘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이 또 이 '새벽거리에서'의 매력이기도 하다. 사실 어떤 면에선 아키하의 존재 자체가 일상 파괴의 상징이다. 무엇보다도 와타나베로 하여금 불륜으로 이끌어 그 가정을 붕괴시키려 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게이고는 이 연기의 행위들을 섬세하게 새겨넣는데 어쩌면 여기에 그 진정한 의도가 있지는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이 작품을 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서스펜스 장치들이 야기시키고 있는 불안들은 그대로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게 되는 불안과도 흡사하다. 우리들의 근본적 불안은 언제나 타인의 내면을 내 내면 같이 들여다 볼 수 없는데서 온다. 믿을만한 존재인지 아닌지, 내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좋을 존재인지 아닌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차 그러한 우리의 염려와 불안은 계속된다. 오죽하면 하이데거 조차 세계 속에 던져진 우리들이 느끼는 가장 주된 감정이 바로 '불안'이라고 정의내렸을까. 그러니 항존하는 그 불안으로 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연기'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아키하의 미스터리 처럼 진실을 파악할 수 없는 그리고 와타나베 처럼 조금의 변화에도 파국적 결말을 각오해야 하는 그러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연기'란 필요불가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게이고가 정말 보여주려 했던 것은 이러한 한계로서의 현실이 아니었을까 싶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면에 받아들여야 하는 벽 같은 것. 테우리에 갇혀야만 존재가 가능한 지금의 우리들 서글픈 현실에 대해... 

 

   결혼이란 무엇보다도 서로에게 방파제가 되어주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좋게 말해서 지켜준다는 의미의 방파제이지 사실은 나아갈 수 있는 곳까지 금을 긋는 빗장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와타나베와 그 친구들이 기혼인 자신을 더 이상 남자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미 생래적 자유를 지닌 존재가 더 이상 아니다. 아빠, 엄마, 아저씨, 아줌마 등등 온갖 사회로 부터 부여되는 외피를 거듭 거듭 뒤집어 쓰고서 오히려 껍데기의 정체성을 자신의 본질로 알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테우리 안에 오래도록 갇힌 짐승은 그 테우리 속 세계를 진실로 여기게 마련이고 그렇게 다른 이들의 칼질로 정형화된 세계 속에서 만족하고 살았던 불륜 전 와타나베 역시도 감히 그 세계를 벗어나는 것을 그대로 멍청한 짓이라 여겼듯이 말이다. 

 

   때문에 게이고가 여기서 연기를 강조하게 되는 것은, 그것도 불륜을 토대로 그것을 강조하게 되는 것은  부여되는 한계를 씁쓸해 하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정당화 하기까지 하면서 자포자기식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인위적 제스추어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넥타이 처럼 조여드는 껍질에 부과되는 현실에 갑갑해 하면서도 '어쩌겠어, 이것이 인생인 걸. 받아들여야지..' 하는 식의 타협적 태도와 '연기'가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아키하의 미스터리가 보여준 결말도 그렇지만 그래서 조금은 엉뚱하게도 보이는 그런 '산티니 이야기'가 에필로그 처럼 부러 붙었던 것은 아니었을가 싶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그래도 지금 니가 머무는 자리가 좋은거야.' 식의 테우리 속 모든 존재들에게 보내는 게이고의 위로인 것은 아니다. 뒤돌아 보는 눈이 보내는 미련 어린 청승도 아니다. 사실 '산티니 이야기'는 보다 깊이 들어가면 그 이전까지 게이고가 해 온 이야기 모두를 파괴하고 있다. 그는 연기의 종국에 무엇이 있는가를 거기서 보여준다. 그건 공허다. 주고 받는 '~ 하는 척'하는 연기들이 빚어내는 온갖 '~ 그런 척'하는 작위적 감정들만이 있을 뿐 이미 진실한 감정들은 쓸모없는 물건들이 벽장 속에 갇히듯 보이지 않게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산티니 이야기'의 게이고는 그러니까 차라리 '이게 뭐야!' 하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한 팝송의 가사와도 같이 한밤에 문득 일어나 썬글래스를 끼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더니 그동안 자신을 둘러싼 화려한 외양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진실, 더 이상 우리들의 관계엔 사랑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극이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듯 파국은 찾아올텐데 우리가 왜 허무의 몸짓을 계속해야 하느냐 이런 말이다. 그러니까 '산티니 이야기'는 일종의 반어법적 표현이다. 실상 이를 통해 게이고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면 연기를 그만두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위안이나 미련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은 경멸인 것이다. 

 

   제목인 '새벽'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불륜을 하고 있는 자의 내면을 그대로 시간으로 형상화 한다면 새벽 같은 것이 아닐까? 완전한 밤도 아니고 밝은 아침도 아닌, 탈색된 어둠과 희미한 여명이 뒤섞인 그대로 경계 위의 시간. 그건 그대로 정해진 자리에서 한 발을 빼고 아무것도 없는 빈 자리로 뻗는 '불륜'의 상태와도 같다.(여기서 게이고가 '불륜'을 끌어들이는 이유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자칫 내가 불륜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게이고가 불륜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한계지워진 우리의 존재 자체를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불륜은 그러한 한계를 초월하려는 우리의 모든 몸짓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지며 이러한 불륜의 형상화는 사실 홍상수가 영화에서 그토록 자주 '불륜'을 반복하는 이유와도 같다.) 

 

   '새벽 거리에서' 제목 자체는 정확히 불륜을 선택함으로 인해 그 불안정한 시간에 불안정한 공간을 헤매일 수 밖에 없는 처지를 단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제목은 '산티니 이야기'가 반어법적이었듯 그렇게 게이고가 보내는 반어법적 질문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무엇이 그 새벽 거리를 헤메이도록 만드는가 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 게이고의 대답은 명확하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이라고. 즉 게이고는 스스로 연기를 그만두지 않았기 때문에 새벽 거리를 헤메일 수 밖에 없는 모든 '우리들'에게 경멸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일종의 자학과도 같다. 

 

    아무튼, 

    거리를 두고 '새벽 거리에서'를 바라보면 분명 그리 정교하지도 않고 뭔가 특출날 것이 없는 그저 평범한 남자의 불륜 미스터리라는 흔한 작품이 되는 것 같은데 게이고가 은연중 깔아놓은 서스펜스 장치에 집중하자마자 놀랍게도 그가 꽤 계산적으로 작품 곳곳에 서스펜스 장치들을 정교하게 깔아놓았음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내게 게이고의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그가 어떤 식으로 독자들을 몰입하게 만드는지, 단 한 순간도 독자의 주의를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집중하도록 만드는지 그 기교를 살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거기다 단순히 서스펜스적 재미만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적 세계의 상태에 대한 본래적 태도 같은 것까지 다루고 있음이 또한 흥미롭게 다가왔다. 여전히 사회에 '실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게이고가 주는 재미로 그것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이 작품은 벗할 가치가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11-17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하두 많아서
제가 얼마나 읽어봤나 체크를 해본적이 있습니다. 농담 아니고 20권은 훌쩍 넘게 읽었는데 계속 나오는 그의 작품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더군요.... ^^

그런데도 작품마다 새로우니 참 대단한 작가입니다..

ICE-9 2011-11-19 18:44   좋아요 0 | URL
와! 정말 많이 읽으셨네요.^ ^
확실히 게이고가 작품 내는 속도는 혀를 내두를 정도인 것 같아요.
그런데도 인기가 늘 평균이상인 것은 자신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개념화해서 어떻게 전해야 할지 그 방법론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
 
로즈 가든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6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표제작이자 첫 단편이기도 한 '로즈가든'의 화자 히로시는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데뷔작인 '얼굴에 흩날리는 비'에서 자살했던 바로 그 미로의 남편이다.

  작품이 시작되면 그는 인도네시아의 마하캄 강을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서 롤링스톤즈의 'SATISFACTION'이나 'STREET FIGHTING MAN' 같은 노래들을 떠 올린다.  이 노래들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눈치채셨겠지만 히로시가 그 노래들을 떠올리는 이유는 어쩌면 간단하다. 그 노래들의 울림이 히로시가 딛고 있는 보트 바닥이 물결 따라 출렁일 때 마다 전해오는 '둥둥' 튀는 듯한 고동 소리를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울림이 여기서 그치지 않고 네 번째, 그러니까 가장 마지막 단편인 '사랑의 터널' 그 마지막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는 게 흥미롭다. 그 마지막 장면에서 미로는  아래로 차들이 지나가는 다리 위에 서 있는데 거기서 미로는 차들이 지나갈 때 다리 위로 전해져 오는 울림을 듣는 것이다. 소설은 이렇게 끝맺는다.  

나는 이번에야 말로 땅속의 어두운 울림을 똑똑히 듣고 싶어서 귀를 기울였다.(P.218)

  어찌보면, 일종의 수미쌍관 구조랄까... 

  그렇게, 네 개의 단편이 모인 '로즈가든'은 하나의 울림으로 묶인다. 

  수미쌍관은 그야말로 작위적 구성이므로 여기에 기리노 나쓰오의 의도가 들어갔다면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해 보인다. 그러니까, 그녀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 단편집 자체가 독자들에게 하나의 울림이 되기를..., 미로가 들으려 귀 기울였던 바로 그 '어둠의 울림'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나쓰오의 바람은 네 개의 작품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바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네 개의 작품 모두 들려오는 '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로즈가든'에서 히로시는 강물의 출렁거림과 함께 롤링스톤즈의 노래를 듣고 두 번째 '표류하는 영혼'에서 미로는 '퇴마사야.'라는 관리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다음의 '혼자두지 말아요'에서는 '원숭이다'라는 말을 듣고 마지막 '사랑의 터널'에서는 '여자라서 다행이네요'라는 말을 듣는다. 그렇게 나쓰오가 이 단편들에서 '청각'이란 감각을 특권화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진다. 사실 이러한 '들음'에의 강조는 무라노 미로 시리즈가 여타 다른 사립탐정물들과 차별되는 특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단편집 '로즈가든'에서는 그 특징을 더욱 더 강조한다. 시작도 그렇지만 무라노 미로가 결정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데 있어서도 '소리'가 많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니 어떤 단편에서는 오히려 무라노 미로가 가진 '시각'의 무용성을 강조하고 있기 까지 하다. 여기에서 보듯이 나쓰오가 이 '로즈가든' 자체를 들려주기 위한 하나의 울림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은 명백해 보인다. 하지만 왜 여기서 유독 그것을 강조하는 것일까? 언제나 그랬듯이 내게 나쓰오에 대한 리뷰는 이렇게 의문으로 시작된다. 

 '듣는 것'은 '보는 것'과 다르다. '보는 것'은 능동적 행위이나 '듣는 것'은 지극히 수동적인 행위이다. 외부의 소리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엄습'이며 아무리 귀를 막아도 그 틈입을 막을 수 없는 '속절없음'이다. 소설의 시작을 여는 소리들은 늘 느닷없이 주인공들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언제나 매의 밭톱이 먹이를 채 가듯 무라노 미로를 정해진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 소리들이 발현된 그 곳으로 블랙홀 처럼 미로를 빨아들인다. 소리에 의해 미로는 그 세계에 갇히며 그렇게 한 번 포획되면 더 이상 그 세계에서 달아날 수 없다.  그건 미로의 죽은 남편 히로시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히로시를 무라노 미로의 세계에 가두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건 바로 미로의 '말'이었다. 그렇게 듣게되자 히로시는 무라노 미로의 '로즈가든'에서 더 이상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고 오로지 죽음 만이 그 유일한 탈출구가 되었다. 그렇게 '로즈가든'의 소리들은 한 존재 전부를 바꾼다. 그런데 거기엔 그 어떤 주체의 의지도 개입되지 못한다. 지극히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청각'의 특성상 당연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야말로 사이렌의 노래소리이다. 이미 들은 이상 그에게 남은 것은 그저 끌려감 밖에는 없는 것이다. 

  나쓰오가 이 단편집을 하나의 울림으로 만드려고 했을 때 그녀가 바랬던 것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로즈가든' 자체가 독자들에게 사이렌의 노래소리가 되는 것. 그렇게 저항할 수 없게 무라노 미로라는 존재의 무저갱과도 같은 심연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왜?  그건 아마도 무라노 미로를 이해시키고 싶은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건, 

  나쓰오가 이 단편집에서 유독 '들음'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보면 드러나는데, 그건 바로 우리들이 무라노 미로에게 있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미로는 왜 그렇게 자신과 대적하는 어둠에게 그토록 끌리는가 하는 것. 바로 그 어둠에로의 매혹이 온전히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들음'과 너무 유사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둘은 모두 주체의 역량을 가볍게 넘어서서 완전히 사로잡아 버리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 둘 앞에서 주체는 오로지 '속절없음'의 무기력한 포즈만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카메라 렌즈에 사로잡힌 모든 피사체가 그러듯이 그렇게 둘다 불가항력적이다. 

  이러한 매혹과 '들음'의 유사성에서 우리는 나쓰오가 이렇게 '울림'이 간직한 지극히 수동적인 경험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우리가 그토록 미로에 대해 궁금하게 여겼던 그 어둠의 '매혹'을 설명하려 함을 암시받게 되는데 바로 이것을 통해서 나쓰오가 '로즈가든'을 하나의 울림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바로 무라노 미로의 내면 속으로 인도하는 것임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로는 어쩌다 그렇게 불가항력적으로 어둠에 매혹될 수 밖에 없게 되었을까? 바로 거기에 대한 미로의 내면으로의 여행 혹은 그것을 통한 나쓰오의 대답 혹은 변호가 바로 이 '로즈가든'이라 할 수 있다. 

 

 

   

   '로즈가든'이 처음 말했던 대로 하나의 울림이라면 이 단편집 자체는 오히려 '진혼곡'에 가깝다고 해야 하리라. 왜냐하면 이번의 단편집을 끝으로 우리는 무라노 미로와 별 다른 이변이 없는 한 영영 이별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팬인 나로서는 '로즈가든'은 더없이 슬픈 작품이기도 하다. 때문에 난 그것을 아주 오래도록 음미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어떻게든 지연시키려고 드는 게 인간의 정리가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무라노 미로 시리즈 중 가장 마지막으로 나왔지만 사실 여기에 실린 네 작품은 모두 미로의 데뷔작 '얼굴에 흩날리는 비'와 두번째 작품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사이에 쓰여진 작품들이다. 그러니까 1993년과 1995년에 걸쳐서 발표된 작품들이다.  하지만 발표시기야 어쨌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 우리는 지금 미로와 마지막 이별을 앞두고 있고 그래서 그 멀어져 가는 등을 바라보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이 '로즈가든' 자체가 '가시는 걸음 걸음... 그 뒤편에 무성하게 뿌려주는 장미 꽃잎들과도 같이...' 수고한 그 넋을 위로하는 동시에 그 넋이 어떠한 존재였는지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진혼곡으로 여겨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울림인데... 

 

   어리석은 고집이라고 해도 좋지만 난 정말로 나쓰오가 이 단편집을 그러한 '진혼곡'의 형태로 만들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난 그것을 무엇보다도 단편들의 제목에서 확인한다. '로즈가든' '표류하는 영혼' '혼자두지 말아요' '사랑의 터널' 이 모두가 사실은 노래 제목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에서 직접 밝히지는 않으나 아마도 소설의 분위기를 이루는데 영감을 주었고 그렇게 하나의 바탕이 된 노래를 내 개인적으로 살펴본다면 바로 이 노래들이 아닐까 한다. 

 

 1. 로즈가든  

 

 2. 표류하는 영혼 

 

 3. 혼자 두지 말아요

 

                         

  4. 사랑의 터널
 

   

   말하자면 '로즈가든'은 무라노 미로를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컨셉트(concept)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컨셉트 앨범이란 하나의 주제를 위해 노래들이 유기적으로 짜여져 있는 앨범을 말한다. 그렇게 나쓰오가 선곡한 이 네 개의 단편들은 별개이지 않으며 왜 무라노 미로가 어둠에 매혹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차례로 조금씩 나아가면서 알려주고 있다. '로즈가든'은 히로시의 미로에 대한 매혹을 빌어 미로의 어둠의 매혹을 설명해주며 '표류하는 영혼'에서는 왜 미로가 어둠 - 보다 정확히는 경계 너머의 것 -에 매혹될 수 밖에 없는지 미로가 속해있는 세상의 속성 -  도처에 넘쳐나는 악의들-을 통해 말해준다. 그리고 '혼자 두지 말아요'에서는 그러한 악의로 가득찬 세상 그러면서도 피아를 식별하기 어려운 경계들의 혼란 속에서 그것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왜 괴물이 될 수 밖에 없는지 느끼게 만들고 마지막 '사랑의 터널'에서는 미로가 경계의 저 편, 어둠 혹은 괴물을 그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렇게 말했지만 '로즈가든'은 굳이 미로의 헤아리기 어려운 심연을  탐사하기 위한 지도 같은 것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사실 미로의 어둠에 대한 매혹은 그녀의 또 다른 작품 '그로테스크'나 '아웃'으로도 연결된다. 그렇게 이 '로즈가든'은 나쓰오가 그녀의 작품세계에 있어 또 다른 중추라 할 만한 왜 '괴물성(아임 소리 마마 같은)'에 집착하게 되는지도 보여준다. 그러니까 그녀의 작품 세계를 떠 받치고 있는 두 개의 헤르메스 기둥 중 하나인 '여성의 괴물화(욕망을 어떠한 사회적 제약에도 굴하지 않고 발현시킨다는 의미에서 -  그것은 최근에 나온 '도쿄섬'에서까지 이어지는데 -)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지 그 근원적 이유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소녀'에서 '괴물'까지! 

  그렇게 '로즈가든'은 여성들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을 이 하나에다 집약하고 있다. '로즈가든'은 남성에게 포획된 존재에서 끝내 남성적 그 사회 바깥에서 머무르면서 오히려 공포의 존재로 되어가는 과정의 함축이자 바로 그 사회의 제약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자아의 욕망을 발산하는 것이야 말로 여성의 진정한 구원이라는 나쓰오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울려나오는 어둠의 선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야말로 무라노 미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응축된 절대 영도의 존재이며 그래서 왜 미로가 나쓰오의 페르소나이고 그녀의 모든 작품 가운데 단연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는지 다시금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단편집은 나쓰오의 어둠에 매혹된 이들이라면 반드시 거쳐가야 할 작품이며 출간 사정이야 어쨌든 무라노 미로 시리즈중 가장 마지막에 읽어야 그 맛이 더욱 잘 살아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내내 말하지만 이 단편집은 그야말로 미로를 위해 바쳐진 네 개의 트랙으로 구성된 진혼곡 앨범이니까 말이다. 때문에 나 역시도 이미 유령이 되어버린 히로시가 롤링스톤즈 노래를 떠올렸듯이 이 단편집을 모두 읽고 났을 때 어쩔 수 없이 롤링스톤즈의 노래를 떠올렸다. 물론 같은 노래는 아니고 그들의 68년 앨범 '거지들의 만찬'에 첫번째 트랙으로 실렸던 'SYMPATHY FOR THE DEVIL'이었다. 어쩌면 이 단편집을 위한 사운드 트랙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댓글(2) 먼댓글(1)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기리노 나쓰오의 '로즈가든' OST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1-11-15 22:25 
    -원래는 일종의 '로즈가든' OST같은 것으로 만들어 보려고 음악도 같이 올리려고 했습니다만, 리뷰 로는 올라가지 않기에 부득불 페이퍼로 작성하여 올리게 되었습니다. 선곡은 로즈가든의 각 단편 제목을 중심으로 해서 작품의 분위기와 노래 가사가 비슷한 것으로 선정했습니다. 그 중 '로즈가든'과 '터널 오브 러브'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 없지만 분명 작품에 영감을 주었던 노래들로 보입니다.편한 시간에 더 편하게 감상해 보셨으면 합니다.(문제가 있다면 연락해
 
 
마녀고양이 2011-11-15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미로와의 이별이라니,, 갑자기 슬퍼지는데요.
하지만 말이죠, 어둠으로 빠져드는 과정에 놓인 단편이란 정말 매력적이네요.
미로가 워낙 매력이 있어야 말이죠. 특히, 잘못된 남자만 골라서 만나는 그그... ^^

ICE-9 2011-11-15 23:05   좋아요 0 | URL
바로 그 왜 그렇게 미로가 잘못된 남자만 골라서 빠져드는가에 대해 나쓰오가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게 이 '로즈가든' 단편집인 것 같아요. '도쿄섬'을 읽고나서 더욱 더 나쓰오가 '괴물로서의 여성성'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단초를 '로즈가든'에서 엿볼 수 있더군요. 어쩌면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작품이 아닐까도 생각되요. 네번째 단편에 SM클럽 경영주 이름이 기요코인데 '도쿄섬'의 거의 '아임소리마마'와도 같은 욕망충실과 생존본능을 보여주는 여주인공 이름도 기요코 거든요. 아무튼 미로의 팬이라면 정말 추천드립니다.^ ^
 
<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어느새 또 신간 추천의 시간이 돌아왔다. 저번엔 너무 늦게 올려서 이번엔 연락을 받자마자 올리기로 결심했다. 재빨리 10월의 소설 신간을 흝고 관심이 가는 작품들을 여기에 올려본다. 

 

 

  

  제프리 디버의 신작이 드디어 나왔다. 링컨 라임 시리즈가 아닌 스탠드 얼론이다. '소녀의 무덤' 같이 하나로 집약된 사건을 두고 선과 악을 대변하는 두 캐릭터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캐릭터 중심의 스릴러다.  위험에 처한 형사 가족을 두고 그들을 죽이려는 자와 그로부터 그들을 구하려는 자가 맞부딛힌다는 내용인데 소녀의 무덤에서 더이상 늘어날 곳이 없을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을 계속 유지시켰던 그 디버이니 만큼 이번엔 또 어느정도로 우리의 신경을 마구잡이로 늘여줄지 정말 기대가 된다.

 

 

 

 

 

 4년만에 김훈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도 역사소설인데 조선 후기 천주교를 믿어 흑산도로 유배를 가서 거기서 '자산어보'를 썼었던 정약전과 그의 조카 사위 황사영이 주인공이다. 성리학이 국가 이념이었던 조선에 그와 전혀 다른 논리로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던 천주교를 배경으로 '너머를 보았지만 다시 세상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자'와 '그 너머에 머물고자 했었던 자'의 이야기를 보여준다고 한다. 4년만에 다시 돌아온 그가 어떤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지 기대가 된다. 

 

 

 

 

 

  

 얼마전인가 동경에서 한국 가수들 공연에 환호하는 일본 관객을 보고 조금 의아했었다. 쓰나미로 인해 엄청난 사람들이 바로 지척에서 죽었는데 그들의 웃음과 흥분에는 그런 비애감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쓰나미가 가져온 비극은 어떤 의미였을까? 궁금했었는데 마침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더구나 '사소설'로 개인의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내었다고 하니 더욱 접하고 싶어진다. 그 열차에 올라탄 내가 바라보게 될 풍경은 과연 어떤 상처를 간직하고 있을까? 

 

 

 

 

 유명한 이탈리아의 감독인 난니 모레띠가 주연했다고 해서 보았던 영화인데 너무도 오래도록 여운이 가시지 않았던 작품이다. 그 영화의 원작 소설이 이번에 나왔다. 상실을 치유하고 극복해가는 조용한 울림이 문장으로는 어떻게 표현될지 정말 기대가 된다. 

 

 

 

 

 

 

 

 

 

  이번엔 좀 가볍게 코믹한 작품을 골라봤다. 미치오 슈스케는 '달과 게'에선 좀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변호 측 증인'의 해설을 보고 다시금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슈스케의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니 만큼 나와 그도 이렇게 재도전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그와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고쿠도 2011-11-02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고역열차는 저도 추천페이퍼에 올린 작품이네요. ^^
미치오 슈스케의 <달과 게>는 저는 참 즐겁게 읽었는데...아무래도 미치오 슈스케다운 내용은 아니었지요? ^^

ICE-9 2011-11-04 01:19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교고쿠도님^ ^
'고역열차'는 가장 가까이에서 내밀하게 감겨드는 타인의 내면, 그것도 고통을 응시한 자의 내면을 접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달과 게'는 미치오 슈스케였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실망했던 것 같아요^ ^

마녀고양이 2011-11-02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당분간 미치오 슈스케는 안 읽으려구요,
제프리 디버 신작은 단편이군요, 아흑,, 저는 캐서린을 기다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캐서린이 맞나요? 잠자는 인형의 주인공이, 여하간, 그 후속작을 원츄! 엉뚱한데서 조르고 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ICE-9 2011-11-04 01:21   좋아요 0 | URL
저도 캐서린 댄스의 신작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아직 소식이 없어서 안타까워요(마녀고양이님께 저 역시 조르고 싶은 심정... 흑흑...)

알라딘신간평가단 2011-11-09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크완료했습니다 :) 감사합니다!

노다웃 2011-11-16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한 혼돈 읽어보고 싶네요. 달과 게는 저도 그닥..성장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역시나 그걸 깨주질 못하는구나 싶었달까.

ICE-9 2011-11-16 10:09   좋아요 0 | URL
'달과 게'는 문장은 잘 다듬어진 해변가 조약돌 처럼 매끄럽기만 한데 그 너머의 것이 느껴지지 않아서 저 역시 곤혹스럽더군요. 리뷰조차 쓰기 려울 정도로 말이죠 ㅠ ㅠ '조용한 혼돈' 저 역시 정말 읽고싶은데 과연 와줄지 모르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