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빌스 스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5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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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가 때론 영화 감독 홍상수처럼 보일 때가 있다. 왜냐하면 요 네스뵈도 홍상수처럼 지속적으로 불륜을 그리기 때문이다. 둘 다 작품의 중심 세계에 불륜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데 홍상수야 그렇다 치고 요 네스뵈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늘 의문이 있었다. 아니, 정말 궁금했었다. 전에 요 네스뵈가 방한 했을 때 물어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필이면 그 때 이사하느라 바빠서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별 수 없이 홀로 그 이유를 추정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엔 물론 노르웨이의 높은 이혼률이라는 현실적 사정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지만 그간의 작품들을 가만 헤아려 보면 그 보다는 이를테면 미국의 하드보일드 작가 로스 맥도널드의 노선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경로가 유사하다는 것일 뿐, 둘 사이에 직접적인 영향 관계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일단 로스 맥도널드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겠다. 로스 맥도널드는 흔히 레이먼드 챈들러의 계승자로서 언급되는 작가인데 정작 그는 이전 세대와 스스로를 차별시키려 했다. 무엇보다 이전 세대 작가들과는 달리 이야기의 중심을 철저하게 가정에만 국한했다. 그의 페르소나인 탐정 루 아처(이 이름도 그가 차별화를 추구했다는 것의 한 증거이다. 아처는 하드보일드의 시조격인 작가 대쉴 해미트의 소설 '말타의 매'에 나오는 주인공 샘 스페이드와 같은 사무실을 썼던 동료 탐정 이름에서 따왔다. 그는 의뢰인의 부탁을 받아 미행 도중 살해당하는데 여러모로 냉혈한 샘 스페이드와 대조되는 인물이다. 로스 맥도널드는 이전 세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인 샘 스페이드와 정확히 반대되는 인물을 가져옴으로써 차별화를 시도한 것이다.)가 쫓는 것은 모두 문제적 가정이 낳은 피해자 뿐이다. 가정 속에서 오래도록 숨겨왔던 죄의 결과물들. 그렇다고 해서 로스 맥도널드가 그런 가정을 묘사하는 선에서만 그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가정 내의 문제는 언제나 교묘하게 사회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로스 맥도널드는 사회 문제와 가정 문제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면서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가 집약되어 발현되는 장소로 가정을 고른 것이다.

 요 네스뵈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불륜에 천착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홍상수의 불륜이 그냥 불륜이 아니듯, 요 네스뵈의 불륜도 그저 불륜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의도로 불륜을 가져오고 있는 것일까?




 단서는 오슬로 3부작의 시작이 되는 '레드 브레스트'에서 찾을 수 있다. 거기서 요 네스뵈는 처음으로 노르웨이의 역사에 다가갔는데 그 중에서 그가 담으려 했던 역사는 다름 아닌 세계 2차 대전 당시 노르웨이 국민들이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역사로서 지금의 노르웨이라면 감추고만 싶은 부끄럽기 그지 없는 역사였다. 사실 '레드 브레스트'는 그 과거의 역사가 지금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묻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요 네스뵈가 찾아낸 것은 여전히 친일파가 떵떵거리며 잘먹고 잘사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노르웨이 역시도 그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대한 그 어떤 반성과 참회도 없이 그저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은폐만 시켜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런 노르웨이는 샌드위치나 마찬가지였다. 현재의 노르웨이와 그 이면에 도사린 수치스런 과거가 한겹으로 포개어져 있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난 그것이 요 네스뵈에게 불륜을 가져다 주었다고 본다. 그런 노르웨이의 모습은 정확히 한 가정 안에서 남녀가 함께 사는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불륜은 그러한 동반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레드 브레스트'라는 새의 모습 그대로 그런 모순된 이중 관계는 파열을 일으키게 된다. 바로 그 파열이 불륜인 것이다.

 그것은 정면과 이면과의 불화이자, 은폐된 죄가 노출되는 상황이다. 공존이 기만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숨겨진 권력구조도 비에 씻겨 흙 안에 숨겨진 돌부리가 드러나듯 부상시킨다. 바로 그런 움직임, 시작의 동요가 불륜인 것이다.

 <레드 브레스트>, <네메시스> 그리고 <데빌스 스타>를 <오슬로 3부작>으로 묶는다. 이유는 일단 모두 이야기가 오슬로를 무대로 벌어지기 때문이고 세 작품에 걸쳐 해리 홀레가 맞서야 하는 숙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더 있는데 그것은 물론 불륜이다. 마지막인 <데빌스 스타>는 3부작 내내 지속된 불륜의 여정에 있어, 종착역답게 정점에 서 있다.


 도입부 부터 남다르다. 흥미롭게도 요 네스뵈는 한 집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술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1898년에 세워졌고 누수는 1968년에 일어났으며 여기에 사용된 벽돌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으며 그것은 또 어떤 괴담을 낳았나 하는 식으로 길게 설정한다. 이건 전작인 '네메시스'와는 전혀 다른 언급인데 그래서 뭔가 의도가 있을 것 같다.(<네메시스>는 은행 강도 장면이 녹화된 CCTV에서 시작되는데 실은 보여지는 것과 전혀 다른 일이 발생했음이 나중에 밝혀진다.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그렇게 노르웨이에게 현재 존재하는 이면을 형상화한 도입부다.) 그러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역사다. 그리고 역사라고 한다면 이것은 처음으로 역사를 다루었던 <레드 브레스트>를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요 네스뵈는 도입부를 이렇게 함으로써 <데빌스 스타>를 <레드 브레스트>와 묶으려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집에 간직된 역사를 하나의 물줄기가 지나가는 경로로 보여주는 것에서 나타난다. 앞서 요 네스뵈에게 있어 집은 노르웨이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물줄기가 보여주는 집의 역사란 그대로 노르웨이의 역사라 할 것이다. 실제로 여기 밝혀진 연도는 노르웨이 역사에 있어 의미있는 시점들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왜 시작부터 '레드 브래스트'를 환기시키는 지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데빌스 스타>가 시작이 되었던 <레드 브레스트>의 결과라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다. 결국 물줄기는 흐르다가 어떤 집에서 한창 물이 끓고 있는 냄비 속으로 방울져 떨어진다. 놀랍게도 물줄기는 그냥 물이 아니었다. 실은 피였다. 그것도 살해당한 여성에게서 흘러나온 피였다. 참회와 성찰 없는 은폐의 역사가 종국엔 무엇을 가져오는지를 이것만큼 잘 보여주는 도입부가 또 있을까 싶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데빌스 스타>다.

 길어진 은폐만큼 <데빌스 스타>엔 도처에 불안과 아픔이 만연되어 있다. 이어지는 <연쇄 살인>은 중의적으로는 그것의 고발과 같다. 그런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여성이다. 불륜의 파열은 <데빌스 스타>에서 여성 신체 파괴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성들은 죽었고 손가락 하나는 잘린데다 하나의 눈꺼풀 안쪽에는 별 모양의 다이아몬드 하나가 들어있다. 범인으로부터의 메시지다. 여성이 죽은 자리마다 이 별은 새겨져 있다. 제목이 '데빌스 스타'인 것은 바로 그래서다. '악마의 별'인 팬타그램.

 고통을 당하는 자가 주로 여성이라는 것과 '팬타그램'이 지닌 진짜 의미는 서로 이어져 있다. 그냥 흥미를 돋우기 위한 소재가 아니라 주제를 위해 신중하게 선택된 소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마의 별'이 아니라 원래 팬타그램이 가지고 있었던 상징적 의미다. 팬타그램은 중세 기독교 신앙에서 널리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랬던 이유는 팬타그램이 바로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시다시피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모두 다섯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바로 가시면류관을 쓴 머리,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손과 두 발. 별의 다섯 모서리는 각각 이 상처를 지시하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중세 기독교에서 팬타그램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팬타그램이 원래는 예수를 지칭했다는 것. 왜냐하면 예수야 말로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 가부장적 사상의 대표적 상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범인이 여자의 신체에 새겨 놓는 별은 사실 부권의 각인이다. 죽음은 죽인 자에게 절대적으로 소유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므로 죽은 여인에게 별을 새긴다는 것은 그 여인을 영구히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정적으로 해리 홀레는 한 신부에게서 이 판타그램이 '마레코쉬'라는 악마의 별이며 그건 사실 살인을 뜻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아시다시피 바로 여기에도 '이면'이 들어가 있다. 정위로 놓고 보면 '예수'지만 역위로 보면 살인인 것이다. 타로카드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이는 것과 전혀 다른 이면의 진실이 존재한다. 마치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복음이란 실은 영혼을 절대적으로 장악하려는 살인이라는 듯이. 누가? 바로 예수로 대표되는 남성 중심의 질서다. 여성의 고통과 팬타그램은 이렇게 연결된다. 이런, 너무나 정교한 설정이지 않은가? 내가 이래서 요 네스뵈의 해리에게 홀리는 것이다. 천년 묵은 구미호 같으니!

 이런 식으로 <데빌스 스타>에는 대치 중인 두 세력 사이의 전선이 선명하게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남성과 여성이다. 이러한 관계는 뮐레르가 사건 수사를 누구에게 맡기면 좋을까 생각할 때 얼른 떠오르는 두 사람의 대비에서마저 존재한다. 그 두 사람이 바로 경찰에서 가장 촉망받는 톰 볼레르와 언제 해고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해리 홀레다. 톰 볼레르는 남성적 특질이 강하고 해리 홀레는 여성적 특질이 강하다. 요 네스뵈 소설에서 경계선 밖으로 쉽게 떨어질 수 있는 존재는 모두 여성적 특질을 떠안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울증, 무기력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해리 홀레는 여성적 특질을 있는 대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작품 중에서 가장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사건 해결을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 그는 극도로 절망해 있다. <레드 브레스트>에서 살해당했던 동료 여형사 엘렌 옐텐의 범인을 못 잡았기 때문이다. <네메시스>에서 그는 유력한 용의자를 포착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전력을 다해 옭아맬 증거를 찾았으나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자신의 무능에 좌절해 있다. 덕분에 라켈과도 소원해졌다. 고독과 무한정한 음주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망쳐가고 그래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늘 같은 꿈을 꾼다. 악몽이다. 여동생 쇠스와 엘렌 옐텐 그리고 라켈이 엘리베이터에 갇혀 목만 내놓고 올라가는 꿈이다. 그는 아래서 지켜보고 있는데 아무리 해도 구할 수가 없다. 공교롭게도 세명의 여성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들이다. 그런데도 그는 구하지 못한다. 무기력하게 손만 허공에 내저을 뿐이다.

 늘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홀레는 오히려 그래서 이면의 진실을 볼 수 있는 자였다. <네메시스>에서도 오직 그만이 누구도 보지 못했던 진실을 본다. 

  그건 <데빌스 스타>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제는 보아도 어찌 할 수가 없다.(특히나 중반에 미리 피해자를 특정하고 오슬로 경찰들이 함정을 파놓고 범인을 기다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여기서 요 네스뵈는 우리에게 <네메시스>의 도입부를 환기시킨다. 경찰의 요청으로 도촬 장비를 대여해주는 '오토'란 남자로 시점을 옮겨 CCTV로 모든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네메시스>처럼 CCTV는 진실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장비가 아니라 애초부터 바탕이 되는 세계가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범인이 한 시체 처리도 주제와 상관이 있어 흥미롭다. 그는 시체의 악취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가황고무라는 것으로 밀봉한다. 이것은 그대로 노르웨이가 감추고 싶은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과 닮아있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은폐하고 밀봉시켜도 노출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이것은 물론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에게내는 경고라 하겠다. 그런데 이 이면의 은폐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범인의 직업도 그렇고 눈꺼풀 안에 놓여 있던 다이아몬드도 실은 '블러드 다이아몬드'라고 해서 시에라 시온에서의 끔직한 학살의 소산이다. 이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정교하게 계산되어 있는 것을 보노라면 문득 이런 말을 하고 싶어진다. 아악! 당신 혹시 셜록 홈즈의 재래 아냐? 그런데, 헉! 괄호 안을 너무 길게 썼다. 수고스럽겠지만 괄호 앞으로 돌아가서 먼저 나온 문장을 확인한 다음 뒷 문장을 읽어주시길) 그것은 이면의 세력이 가지고 있는 힘이 강대해졌기 때문은 아니다. 해리 홀레가 싸우는 것은 실체하는 적이 아니라 그 적을 근본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다시 말해 노르웨이의 이면을 은폐하고 그러면서 계속 존치시키는 사상인 것이다.

 이제 그는 보다 본질적인 대상을 상대해야 한다. <데빌스 스타>의 시간적 배경이 한창 더운 여름이라는 설정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오슬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휴가를 가 버려 도시는 현재 텅 비어있다. 경찰 조직도 마찬가지다. 요 네스뵈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려 보라 . 주인공 네오가 궁극의 적과 맞서 싸울 때 도시는 말끔히 비어 있었다. 남은 것은 오로지 싸워야 할 적 말고는 없었다. 그것과 같다. 해리 홀레가 이제 고통을 방치하고 과오를 누적시킨 궁극의 장본인인 사상 자체와 결전을 치른다는 의미에서 요 네스뵈는 오슬로를 텅 비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사상의 정체를 팬타그램으로 알린 것이다.

 해리 홀레는 오래도록 서양 문명을 지배해 온 가부장적인 사유와 싸워야 한다. 하이데거의 말에 따르면 자신과 같지 않은 타자는 용납지 않고 같게 만들지 못하면 무조건 배척해 버리는 고대 그리스 이후로 지속되어온 사상 자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에게 끝도 모를 무기력을 선사했다. 그만큼 해리 홀레는 여성적 특질로 충만해 있다. 더하여 우리는 두 명의 여성을 아울러 보게 된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은 희생하려는 정숙한 여인(이 여인에 대한 남자의 생각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 이 여성과 바로 다음에 얘기하는 어머니가 비슷한 특질을 가지고 있고 그 특질은 또한 해리 홀레의 특질과 연결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요 네스뵈가 이것을 의도했음은 말한 세 명 모두가 한 남자와 모두 묶인다는 점에서 입증된다. 해리 홀레는 소설에서 '5'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요 네스뵈는 독자에게 지속적으로 '3'을 떠올리게 만든다. '5'가 악마의 계략이었듯이 그렇다면 '3'도 계략인 것일까? 혹시 기독교 사상의 핵심인 삼위일체는 아닐까 생각도 해 보지만 너무 무리한 해석이라는 생각도 든다. 뭐, 아무튼.)과 과거의 잘못으로 사회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으나 여전히 인간적인 품격을 유지하고 있는 어머니다. 특히 해리는 이 여인의 눈에서 할머니를 떠올리는데 그만큼 둘이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해리 홀레는 이 작품에서만큼은 여성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결국 무기력은 소설에서 이중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고통의 현상이자 정체성의 확립이다. 요 네스뵈는 후자를 통해 해리 홀레가 어느 진영에 서 있는가를 밝힌다. 물론 그것은 범인의 존재에 투영되어 있듯이 보이는 것은 진실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위선의 가면을 쓰고 배척과 은폐 밖에는 할 줄 모르는 졸렬한 가부장적 사상에게 핍박받고 희생당한 여성의 편이다. 동시에 사회적 약자의 편이며 반성과 참회를 요구하는 진실된 역사의 편이다. 그런 이유로 여기서의 무기력은 사실 무기력이 아닌 것이다. 그건 차라리 모든 것이 허위와 기만일 뿐인, 하지만 현재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적 사상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몸짓이라 해야 한다. 말하자면 그 몸짓이란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의 그 것과 같다. 무기력은 가부장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다. 톰 볼레르의 활력이 그가 바라는 것이다. 오슬로 경찰의 평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에게 해리 홀레는 가장 약하고 쓸모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래서 해리 홀레는 누구보다 강한 자가 되어 맞서 싸울 수가 있는 것이다. 설득하고 세뇌하여 장악한 그 사상에서 가장 멀리 달아나 있기 때문이다. 해리 홀레가 쓰고 있는 무기력의 외피가 가진 의미란 그런 것이다.

 더없이 불안하고 약한 자가 되는 것이 오히려 강한 자가 되는 길이다. 상식의 견지에서 보자면 얼른 납득하기 어려운 이것이 요 네스뵈에겐 현실의 노르웨이를 구원할 대안의 무기가 된다. 해리 홀레가 알콜 중독에 빠지게 되는 본질적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주류에서 이탈하기 쉬운 모든 몸짓이 거꾸로 구원을 향한 도약이 되는 것이다.

 과연 3부작의 마지막다운 결전이 아닐 수 없다.(여기에 대해 보다 더 많은 설명이 있어야 하겠지만 지금도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지금 세기의 복싱 대결이라며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고 있는  매니 파퀴아오와 플로이드 메이웨더의 결전보다 더 흥미로운 싸움이 아닐 수 없다.

 결과가 궁금하신가? 그렇다면 '500원!'(이런 철지난 개그를! 안다. 나는 지금 당신의 실소를 보고 있다 아니, 경멸인가? 어쨌든 그것)이 아니라 직접 관전하시길.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읽는 편이 이 승부를 즐기기에 훨씬 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관람료가 아까우면 어쩌지 하고 염려할 필요는 더욱 없다. 끝까지 결말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롭게 전개되며 조금의 긴장감도 늦추지 못하게 만든다. 그건 라운드가 올라갈 수록 더욱 그렇다. 15R 쯤 가면 말 그대로 폭발이다.

 감히 말하지만 요 네스뵈가 얼마나 천부적인 이야기꾼인지 다시 한 번 실감했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분명 결코 놓쳐서는 안될 작품이다!X100.(다른 글보다 이 글에서 특히 괄호를 많이 썼는데 그건 이면의 진실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요 네스뵈에게 나름의 오마쥬를 바치려 한 것임을 알아 주시길. 절대 글을 제대로 정리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박박 우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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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5-05-01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헤르메스 님의 장르소설 리뷰를 읽을 때마다 ×100의 느낌표와 ×100의 공감을 날리고 싶어집니다. 왜 문장끝마다 좋아요 버튼은 없는걸까요?
덕분에 이 아침 기분 좋게 시작합니다, 꾸벅~(__)

ICE-9 2015-05-01 06:36   좋아요 0 | URL
아앗! 양철나무꾼님 이런 과분한 칭찬을 해주시다니! 저야말로 메이데이의 아침을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릴 수밖에 없네요.. 오늘은 양철나무꾼님의 이 말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연신 꾸벅~^ ^)

수이 2015-05-01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에서 헤르메스님의 유머와 어조가 그대로 느껴져서 흐뭇해요. 여전하시구나 싶어서. 잘 지내시죠? 그리고 곱하기 100_이라니! 헤르메스님이 이리 강추하시니 한번 슬쩍 관심을 가져볼까_ 하고 있어요.

ICE-9 2015-05-18 21:42   좋아요 0 | URL
오오! 야나님 너무 반가워요^ ^ 이렇게 반가운데 5월달은 정말 폭풍과 같았던지라 이제야 들어와 이렇게 댓글을 다는군요. 사는게 뭔지 ㅠ ㅠ 제가 아직 야나님 취향을 확실하게 몰라 선뜻 권하기엔 좀 망설여지지만 그래도 요 네스뵈는 믿고 권할만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슬쩍 관심가져 보세요. 냐하하^ ^
 
레드브레스트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3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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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면 가장 많이 생각나는 작가가 바로 요 네스뵈이다. 그의 이름을 우리나라에 알린 대표작 제목이 바로 겨울하면 곧잘 떠오르는 '스노우맨', 즉 눈사람인 까닭이다. 그러고보니 눈사람 말인데, 그것은 같은 사물이긴 하지만 그냥 길바닥에 구르는 돌멩이와는 달라 보인다. 돌멩이는 그저 무심히 돌멩이로만 볼 수 있지만 어쩐지 눈사람은 그것을 만들었을 아이들의 풋풋한 동심이나 그런 동심을 다치지 않고 잘 자라나도록 한 단란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가정 같은 것들이 얼른 연상되고는 한다. 눈사람이라는 단어가 왠지 푸근하게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사물이 그냥 사물로 있지 않고 이렇게 하나의 이미지와 바로 연결되어 떠오를 때가 있다. 마치 정해진 규칙처럼 다른 이미지로는 얼른 바뀌지 않는 것들이 말이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게 마련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를 '사회적 약호(code)'라 부른다. 롤랑 바르트가 이 말을 단순히 사물에서 비롯되는 선입견이라는 게 사회적으로 정해진 것이다 정도를 말하기 위해 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바로 이런 약호들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물이나 사람 혹은 사건을 보고 해석하는 데도 영향을 미쳐 그 약호대로 보고 판단하고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생각할 때는 한없이 투명해 보이지만 사실 그것을 바라보는 눈조차 우리는 어느틈에 이식당한 사회라는 타인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사회적 담합의 순전한 모방일 지 모른다. 혹은 나와 사회가 교섭한 결과일 수도 있다. 무릇 개성이란 것마저도 그러한 조합과 배열의 우연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회라는 경계 안에 머무르려 하는 한 우리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진정한 나가 되려면 그 경계 바깥으로 나가야한다. 나만의 눈, 나만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고 싶다면 '월담'은 필연적인 것이다.


 '월담'을 쓰고 읽는 것에다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그건 아마도 드러난 의미가 아니라 그 아래 그림자처럼 감추어진 이면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선 이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로 그 이면의 발굴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적 약호가 사실은 진리가 아니며 거짓과 기만 위에 성립된 작위적 담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면의 복권이란 사회적 약호의 전복이다. 아울러 사회적으로 약호화된 나의 전복이자 동시에 진정한 나의 재건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것이야 말로 실은 요 네스뵈가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요 네스뵈, 그는 이면의 의미를 발굴하는 작가다. 그의 대표작 '헤드헌터'에는 부자들이 남몰래 감춰두고 있는 그림들을 훔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사실은 요 네스뵈가 바로 그 주인공과 같다. 사회가 은밀하게 숨기고 있는 표상의 진짜 의미들을 몰래 가져와 온 천하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작가라는 건, 이제는 유명할 대로 유명해진 인터뷰에서 한 말에서도 드러난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조국 노르웨이를 '조용한 국가'라 부른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렇게 사회적으로 약호화된 '조용함'의 의미는 아니다. 사실 노르웨이는 네오 나치와 같은 신우익의 부활, 날로 높아지는 빈부의 격차 그리고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로 인한 갈등들로 들끓고 있다. 그런데도 노르웨이는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안정적인 복지국가의 모습만 보여지기를 고집한다. 송곳처럼 여기저기 솟아난 차별과 갈등들을 하얀 천으로 그저 살짝 덮어놓는 것과 같은 꼴을.


 요 네스뵈가 말하는 '조용함'이란 바로 이것이다. 모든 상처와 고통을 가져오는 것들을 모르쇠하는 그 기만, 혹은 그 비명 소리들을 모조리 억누르는 억압을 일컬음이다. 바로 그 덮은 하얀 천을 모조리 걷어내는 것. 그것이 요 네스뵈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스노우맨'도, '레오파드'도 마찬가지다. 내밀한 곳엔 언제나 '노르웨이'라는 사회에 대하여 발언이 있었다.

 

 해리 홀레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 '레드브레스트'는 그 경향의 출발점과도 같은 작품이다.

 

 'MY MOST PERSONAL NOVEL!'


 해리 홀레는 레드브레스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인터뷰를 들어보니 이 작품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이전 두 편과는 다르게 정말 많은 변화를 꾀하려했기 때문이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가 '다중화자'의 도입이다. 이전 작품들은 모두 해리 홀레를 중심에 놓고이야기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레드브레스트'에 와서는 해리 홀레 이외에도 화자의 입장에 서는 인물들이 많다. 지금은 보편적이 된 이 스타일은 '레드브레스트'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를 가장 힘들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2차대전 당시 독일에게 동조했다는 노르웨이의 부끄러운 역사를 소설의 중추로 삼은 것이었다. 이전의 그는 보다 국제적인 맥락에서 이야기를 다루었다. 하지만 점증하는 노르웨이 국내 문제에 대하여 더이상 발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노르웨이에 대해서 말하려 하지 무엇보다도 과거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의 문제는 모두 그 과거의 역사적 과오로부터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노르웨이의 진정한 치유를 원한다면 기필코 제대로 끼워야 할 첫 단추. 그래서 그는 노르웨이의 부끄러운 과거를 가져오려했고 진정한 성찰을 위해 조금의 가감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재현이 필요했다. 하여 그는 정말 많은 역사적 문헌들을 읽었고 참전 경험자들로부터 많은 증언을 들었다고 한다. 바로 그 과정이, 있는 그대로의 과거로부터 픽션을 구축하고자 하는 길고도 지난한 과정이 그를 힘들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었다. 거울에 비쳐보는 것과도 같이 투명한 대면만이 진정한 반성과 그를 통한 치유로 인도해 줄 터이니까. 덕분에 우리는 영화보다도 생생하게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전장의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회상으로 제시되는 이 전쟁 장면에서 우리는 요 네스뵈가 과연 이 소설을 위해 얼마만큼 노력했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그토록 열심히 전쟁의 기억들을 찾고 발굴한 것은 비록 그 역사가 현재 노르웨이에게 있어 부끄럽기 그지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대로 외면해서는 안되는 기억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는 그 역사적 과거를 서둘러 망각속으로 던져버리려 했다. 빨리 잊고 새출발에나 힘쓰자는 것이 노르웨이의 모토였던 것이다.


 '레드브레스트' 소설 초반, 해리 홀레는 미국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차출된다. 그리고 경호 도중, 원래 사람이 없어야 하는 곳에 정체불명의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는 테러리스트로 오인하고 그만 총을 쏘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미국 대통령의 경호원이었다. 해리 홀레는 자신의 총격으로 다친 그 사람에게 죄책감을 갖지만 고위 관료들은 그러지 않는다. 더우기 그 사건이 양국 외교에 좋지 않다고 판단, 서둘러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테러 위협에 제대로 대처했다는 이유로 징계는 커녕 영웅이라면서 승진시킨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이다. 그들 중 아무도 다친 미국의 경호원에게 신경쓰지 않는다. 해리 홀레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그 일을 아파하고 있는 지도 마찬가지다.


 요 네스뵈는 왜 소설 시작부터 이런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일까? 그게 바로 노르웨이가 그 전쟁의 기억들을 다루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과거는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데 방해물로 여기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서둘러 덮어버리기에 급급했던 노르웨이. 그러느라 전쟁에 참여한 자들의 영혼에 과연 어떤 상처의 나이테가 깊이 새겨져 있는 지는 보려고 하지도 않는 노르웨이의 모습인 것이다. 더우기 개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라에 의해 끌려가 입은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인 '레드브레스트'는 진홍가슴새를 뜻한다. 왜 하필이면 이 새일까? 그건 이 새야말로 노르웨이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표지를 넘기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리고 우리들에겐 '닐스의 모험'으로 유명한) 셀마 라게르뢰프의 '진홍가슴새의 비밀' 한 대목이 나온다. 아마도 이것이 네스뵈가 '레드브레스트'라는 표상을 가져온 원천일 것이다. 이것은 동화다. 세상 모든 만물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진홍가슴새를 만든 하나님은 '진홍가슴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창조될 당시 진홍가슴새에겐 원래 가슴의 붉은 반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왜 자기 이름을 하필이면 진홍가슴새라 지었는지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름을 지은 장본인인 하나님에게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네가 진정한 사랑을 베풀면 네 이름에 걸맞는 모습을 가지게 될거야."라고. 그리고 세월은 흘러 진홍가슴새는 처음으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었던 예수였다. 진홍가슴새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그 때문에 가슴이 아팠는데 뭔가 고통을 덜어줄만한 것이 없을까 하고 찾다가 머리에 쓴 가시관의 가시라도 뽑아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리로 가시를 뽑았는데 촘촘히 돋아난 가시들이 그런 진홍가슴새를 가만 내버려둘리 없었다. 몸 여기저기가 찔리고 가슴엔 빨간 핏물이 들었다. 그 때 예수가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천지가 창조된 이후로 그토록 너희가 갈구했으나 얻지못했던 것을 이제야 얻어냈구나!"라고.

 

  이건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뭔가 하려는 것이야말로 바로 참사랑임을 말해주는 동화이지만 물론 요 네스뵈가 그런 의미로 진홍가슴새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조용한 나라'처럼 그에게 의미란 늘 보여지는 그대로는 아닌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요 네스뵈가 이 새를 가져온 것은 과거의 역사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노르웨이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진홍가슴새와 똑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치에 협력한 전력'이라는 그야말로 그들의 역사에 있어서는 가시와도 같은 그것을 뽑아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무리 뽑아내고 지우려하더라도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가슴의 붉은 자국만 더욱 선명하게 만들 뿐이다. 요 네스뵈는 바로 그것을 말하기 위하여 진홍가슴새를 가져온 것이다. 아무리 망각을 위해 삼켜도 소화되지 않으며 오히려 내부의 상처가 되어 결국은 바깥에 자신을 드러내고야마는 기억임을 말하기 위하여. 때문에 노르웨이는 망각하려고 하기 보다 오히려 지워진 자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 

 

 즉, 과거와의 진정한 대면. 


 이것이야 말로 요 네스뵈가 '레드브레스트'를 통하여 하고자 하는 말이다. 이 책은 부득불 오명속에서 지워질 수 밖에 없었던 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물론 그들의 참전이 정당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거울에 제 모습을 온전히 비추듯 투명한 대면이 필요한 것이다. 역사의 청산이란 언제나 '오컴의 면도날'처럼 부끄럽다고, 실수라고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고 잘라내 버리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건 오로지 아무리 치욕스런 과거라 하더라도 진정으로 투명하게 대면할 때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즉 자신의 부끄러운 과오에 대한 통렬한 자기 성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레드브레스트'는 바로 그것을 하려는 소설이다 그 통렬한 자기 성찰을 위하여 지워진 자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소설, 그것이 바로 '레드브레스트'다. 것이다. 껴안고 뒹굴어야 하는 것이 설사 진창이라 할 지라도.


 하지만 소설은 계몽이 아니다. 말하고 싶은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없다. 그러면 선동일 뿐이다. 문학은 독자의 귀가 아니라 머리에 그리고 마음에 더욱 의지해야 한다. 독자 스스로 지은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헤아리고 거기에 대해 또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기꺼이 지은이와의 대화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 그러므로 요 네스뵈도 그렇게 한다. 대놓고 말하기 보단 하나의 반면 교사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만일 그 과거를 진정으로 껴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통해 원래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거꾸로 부각시킨다. 그럼, 이제 우리의 의문은 여기에 이른다. '진정 껴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요 네스뵈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확하다. '다중인격자'가 되어버린다.  

 

 소설은 처음부터 '다중인격'이라는 말이 나온다. 경호해야하는 미국 대통령을 두고 말할 때부터 말이다. 사실 이 소설은 그아먈로 '다중인격적 상황'이 지배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해리 홀레의 용의선 상에 오른 노르웨이에서 부흥하고 있는 신나치주의자들도 그렇고 지금은 스포일러상 정체를 밝힐 수 없는, 나중에 다른 작품에서 해리 홀레의 호적수가 되는 인물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외무부의 고위 관료인 브란헤우그가 대표적이다.그는 말하는 입과 하는 행동이 정말 다른 인물이다. 입으로는 나라의 국익이 어쩌고 하고 있지만 사실 그가 가장 신경쓰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욕망뿐이다. 그는 나라를 위해 써야 할 권한을 오로지 자기 욕망의 관철을 위하여 쓴다. 그리하여 나랏일을 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은 그대로 사적 정사를 위한 공간이 되고 다윗이 밧세바에게 한 것처럼 해리 홀레가 자신의 연적이 될 가능성이 높자 임무를 핑계로 나라 변두리로 쫓아버리기까지 한다. 한 마디로 표리부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요 네스뵈는 소설의 소제목으로 우리아와 밧세바까지 달아서 이를 강조한다. 다윗의 표리부동함을 보여주었던 대표적인 사건의 인물들이 바로 우리아와 밧세바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해리 홀레가 활동하는 노르웨이는 도처에 겉 모습과 속 마음이 다른 '다중인격'적 존재가 넘쳐난다.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를 두고 '조용한 사회' 운운하며 사실은 비아냥거렸던 것도 바로 이런 사실의 확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이것이 바로 노르웨이가 과거와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고 무작정 지우거나 억압한 결과인 것이다. '레브브레스트'가 그리고 있는 현재 노르웨이의 모습은 바로 그 본질을 추출해서 보여주는 것과 같다. 이리하여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해리 홀레가 분투 끝에 헤쳐나가는 길이야 말로 요 네스뵈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노르웨이로 가기 위한 경로임을. '레드브레스트'는 숨겨진 '아리아드네의 실'과도 같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오로지 자신에게만 골몰하지 않고 언제든 타자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다. 미노타우루스의 미궁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늘 바깥의 동정을 살필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자기를 내려놓는 것, 칸트가 말했던 대로 늘 자신의 자아를 공백으로 만들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요 네스뵈가 쥐어주고 싶은 아리아드네의 실인 것이다. 그래서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를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한 곳에 있기 보다는 끊임없이 변방을, 경계 위를 헤매이게 만든다.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에게서 지도를 빼앗아 버린다. 정해진 통념과 규칙대로 바라보게 할 뿐인 지도없이 방랑하게 만들어 있는 그대로의 풍경과 시간을 솔직하고 투명하게 대면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랑에서 오는 그 많은 해리 홀레의 상처와 고통은 이른바 성장통이다. 데미안에서 말했던 그대로 아브락서스가 세계로 나오기 위해서는 껍질을 깨는 아픔을 감내할 수 밖에 없듯이. 하지만 해리 홀레의 길은 그 혼자만의 길이 아니다. 미국의 영문학자 노스럽 프라이는 소설의 인물이 인간 자체를 보여주지 않고 지은이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관념을 육화한 인물과도 같을 때, 단적으로 '아나토미'로 일컬었다. 그런 면에서 '레드브레스트'도 '아나토미'라 할 수 있다. 요 네스뵈가 현재 노르웨이에게 바라는 길을 해리 홀레의 여정에 짐지우고 있으니. 그렇게 해리 홀레는 십자가를 어깨에 매고 노르웨이의 사막을 횡단하고 있다. 바람에도 지워지지 않는 누군가를 위한 '아리아드네의 실' 자국을 길게 남기며...


'레드브레스트'는 이런 소설이다. 당신을 순례자로 만드는 소설. 아니 순례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소설. 하지만 겨울은 순례에 어울리는 계절이 아니다. 겨울의 체온은 육체를 고립시킨다. 그러나 생각은 그렇게 만들 수 없다. 오히려 생각이란 육체가 고립되면 고립 될 수록 더욱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개치기 마련이다. 한나 아렌트가 평생토록 하고자 했던 것. 그것은 육체의 몸짓만큼 사유의 몸짓 역시 의미 있고 우리에게 가치 있는 행위라는 걸 일깨우는 것이었다. 난 그걸 믿는다. 몸의 걸음만큼 마음의 걸음 역시 의미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런 계절에 보다 의미 있는 순례로 이끌어줄 이 책을 권한다. 정녕 뿌리치지 말아야 할 손길이라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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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파드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8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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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이 불로 끝날거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얼음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내가 맛본 욕망에 비추어 보면

 나는 불로 끝난다는 사람을 편을 들고 싶다.

 

 그러나 세상이 두 번 멸망한다면

 파괴하는데는 얼음도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해야 겠다.

 

 나는 내가 증오에 대해서도

 그만큼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 로버트 프로스트, 불과 얼음 -

 

 

  

 

  '레오파드'는 '스노우맨'에 뒤이은 해리 홀레 시리즈의 여덟번째 작품입니다.

 이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문득 떠올렸던 것이 바로 로버트 프루스트의 '불과 얼음'이라는 시였습니다.

 

 

  그림에서 보듯이, 차디찬 눈의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던 '스노우맨' 표지와 화산의 이글거리는 용암의 열기를 재현한 듯 보이는 '레오파드'의 표지는 뚜렷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데  어쩌면 바로 이 때문에 그 시가 생각났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나다를까 '스노우맨'과 '레오파드'는 정말 시 그대로였거든요. 그러니까 차디찬 증오가 연쇄살인을 낳았던 '스노우맨'이 뼛속까지 얼어버릴 정도의 냉기를 지닌 얼음이었다면 뜨거운 욕망에서 비롯된 연쇄살인을 보여주는 '레오파드'는 소설의 마지막 배경처럼 그야말로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불길이었으니까요. 물론 요 네스뵈가 이 시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만, 얼음처럼 차가운 증오의 '스노우맨'과 화염처럼 이글거리는 욕망의 '레오파드'는 그대로 로버트 프로스트의 세상의 종말에 대한 견해와 같아서 더욱 흥미로웠습니다. 여기서 '레오파드'가 어떤 작품인지 말씀드리는 게 좋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레오파드는 한 마디로, 제 몸까지 불살라버릴 정도로 뜨거운 욕망들을 지닌 수컷들이 맹렬하게 아귀다툼을 벌이는 작품입니다. 그 내뿜는 열기가 너무도 강해서 어느 순간 읽고 있는 마음마저 데어버리게 할 정도죠. 

 

 

 전작인 '스노우맨'처럼 한 단어로 된 간단한 제목이지만 사실 이 단어만큼 요 네스뵈가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것을 제대로 담아낸 말은 또 없을 것 같네요. 왜나하면 무엇보다 '레오파드', 즉 표범이란 동물의 습성 때문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붓다가 했다는 말이지요. 이 말처럼 사는 동물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레오파드'입니다. 혹시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에서 레오파드를 보게 되시면 한 번 눈여겨 봐 보십시요. 그러면 알게되실 겁니다. 레오파드는 철저하게 혼자 있다는 것을. 그는 고립의 동물입니다. 하지만 고독을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영역 내에 다른 이가 있는 걸 못견뎌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대 자신과 같은 종족이 함께 머무르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설마 새끼라 하더라도 그게 자신의 새끼가 아니면 그대로 죽여버립니다. 발정기가 되어 자신이 암컷과 교접을 해야 할 땐, 혹시 암컷이 다른 표범의 새끼를 기르고 있다면 일단 그 새끼부터 죽여놓고 암컷과 교접합니다. 그 정도로 철두철미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문자 그대로의 동물인 것이죠.

 

 한 마디로 레오파드는 공존을 모르는 동물입니다. 요 네스뵈는 분명 그 때문에 레오파드를 제목으로 가져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해리 홀레가 싸워야 하는 적들은 모두 레오파드와 똑같이 타자와의 공존을 모르는, 아니 오히려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죠.

 

 바로 그런 존재들이 홀로 존재할 영역 확보를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입니다. 홍콩에서도 노르웨이에서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도. 이 수컷들의 인정사정없는 맹렬한 아귀다툼은 '월드와이드'하게 펼쳐집니다. 해리 홀레는 그 한 가운데를 관통해 나가야 하는 것이죠. 요 네스뵈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저는 늘 해리 홀레가 미노타우루스의 미궁에 갇혔던 테세우스를 건져낸 아리아드네의 실이라 생각했습니다. 미노타우르스의 미궁이 요 네스뵈가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에 대한 단적인 비유라면 테세우스는 언제 미노타우르스에게 먹힐지 모르는 미궁에 갇힌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며 해리 홀레는 바로 그 미궁으로 부터 우리의 존재를 구원해줄 길이 어디인지 알려주는 대안의 빛과도 같은 아리아드네의 실인 것이죠.

 

 그렇다면 이번에 해리 홀레가 우리보다 앞서서 싸워나가는 미노타우르스는 어떤 존재일까요? 저는 이번 '레오파드'가 바로 앞에 나왔던 '스노우맨' 보다 그 공간적 무대가 좀 더 '월드와이드' 즉 세계적으로 확장된 것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더구나 모든 공간적 무대는 앞서도 말했듯, 자신 이외엔 그 어떤 존재의 공존도 허락하지 않는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는데요.  그래서 이건 하나의 은유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똑같이 전세계에 뻗쳐있으며 타자의 공존을 허용하지 않는 하나의 이념에 대한 은유 말이죠. 네, 바로 신자유주의 입니다. '레오파드'란 다름아닌 신자유주의를 상징하는 동물인 것이죠.

 

 해리 홀레는 바로 그 신자유주의라는 미노타우르스와 이 소설에서 전면전을 치르는 것입니다. 피날레의 장면을 보자면 전면전이라 할 수 밖에 없어요.

 

 세세하게 설명하면 스포일러과 될지도 모르니 그러기 보단 앞서 해왔던 대로 주요한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을 들어 그걸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요 네스뵈가 정말 치밀한 작가라는 것은 바로 이 공간을 소설에 가져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어디냐구요? 바로 아프리카의 '콩고' 입니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고 있는 니라공고 활화산이 있는 나라, 콩고. 그 니라공고에서 '세상의 끝'이라는 이름 그대로 소설의 마지막이 펼쳐지지요. 그런데 네스뵈는 왜 하필이면 이 콩고를 소설의 무대로 가져온 것일까요? 물론 그건 니라공고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 큰 이유는 콩고가 가진 역사 때문입니다. 콩고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들여다 보면 우리는 곧 알게 됩니다. 콩고도 한 때 그야말로 레오파드의 영토였음을 말이죠.

 

 아시고 계시는지요? 콩고는 세계 역사에서 유래가 없는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온 나라가 오직 한 사람의 개인 사유지가 되었었던 과거를 말이죠. 그랬습니다. 콩고는 한 때 나라 전체가 한 사람의 소유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입니다.

 

  

  1855년, 그는 콩고를 자신의 사유지로 선언했습니다. 그 선언으로 콩고의 전 국토는 그의 사유지가 되고 콩고에 있는 자원은 물론 살고 있던 주민들까지 모두 그의 개인 소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로 레오파드의 영역이었던 것입니다. 소설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으나 레오파드를 가져온 이유가 그와 같은 습성 때문이라고 해석했던 것은 요 네스뵈가 이런 과거를 가진 콩고를 소설의 무대로 가져온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레오폴드 2세는 그야말로 의인화된 레오파드가 아닌가요? 어쩐지 레오폴드, 레오파드 그 이름 역시도 비슷하네요. '스노우맨'을 읽어보셨으면 느끼셨겠지만 요 네스뵈는 소설의 표면 보다는 얼른 드러나지 않는 비유와 상징의 영역인 이면에서 소설이 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는 작가이기 때문에 인물의 관계든, 공간의 설정이든 주제의 보다 선명한 부각을 위하여 치밀한 계산 하에 배치해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레오파드'는 그러한 배치가 보다 전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해리 홀레가 싸워서 대안을 쟁취해야 하는 대상이 거대해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 바로 그 대상이니까요. 여기서 요 네스뵈가 콩고를 가져온 보다 진정한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건 바로 레오폴드 2세 치하의 콩고가 타자와의 공존을 허락하지 않는 신자유주의를 이대로 계속 방치될경우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가장 극한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레오폴드 2세 치하의 콩고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식으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의 종언'의 모습인 것이죠. 소설 속에서 콩고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인 '세상의 끝'만 봐도 요 네스뵈가 바로 그것을 두고 콩고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죠.

 

 

 니라 공고 화산의 모습 - 그야말로 세상의 끝 모습이 아닌가요?

 

 해리 홀레는 지금 그러한 콩고의 도래를 막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지금 '월드와이드'한 상태입니다.  이 말은 노르웨이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죠. 전작 스노우맨이 그랬습니다. 해리 홀레는 스노우맨으로 상징되는 노르웨이를 침공한 신자유주의와 싸웠습니다. 단적으로 요 네스뵈는 지금의 노르웨이를 아주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이 노르웨이 역시도 레오폴드 2세 치하의 콩고가 되어버릴지 모른다.'하고 말이죠. 그런 근심은 소설 속 해리 홀레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간접적으로 암시되고 있습니다.

 

 '오슬로도 용암 위에 세워진 도시잖아.'

 

 아니나 다를까 해리 홀레는 다시 돌아온 노르웨이에서 타자와의 공존을 허락하지 않고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을 몰아내려는 레오파드적 존재를 만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소설 내내 해리 홀레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크리포스'입니다. '크리포스'가 보여주는 모습은 왜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를 걱정스럽게 여기는 것인지 그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더구나 그 크리포스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노르웨이에서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음에 대한 반향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요 네스뵈의 두 눈엔 더욱 노르웨이의 불안한 미래가 그려질 수 밖에 없지요. 레오폴드 2세만이 홀로 웃는 콩고가 되어버린 노르웨이...

 

 이건 그저 제 망상만은 아닙니다. 요 네스뵈가 소설 속에 분명히 그 사유의 흔적을 새겨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콩고엔 니라공고 화산말고 다른 하나가 더 등장합니다. 바로 주로 시체들을 던져넣는 키부 호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노르웨이에서도 이 키부 호수와 똑같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범인이 시체를 던져넣은 뤼세렌호 입니다. 이렇게 콩고의 키부호수와 노르웨이의 뤼세렌호는 이어집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니라공고화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의 피날레가 이루어지는 니라공고화산 같은 공간이 노르웨이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스타오셋산 입니다. 소설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의 원인은 바로 이 우스타오셋산에서 잉태되었습니다. 시작의 우스타오셋산과 끝의 니라공고화산. 어떻게 이걸 연속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요 네스뵈는 이정도로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노르웨이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분명 그 콩고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연쇄 살인은 노르웨이 사람들이 스키를 타러 자주 간다는 우스타오셋의 고립된 한 산장과 관계가 있습니다.  해리 홀레는 나중에 미카엘 벨만과 함께 스노모빌을 타고 우스타오셋에서 사라진 연쇄살인범을 추적합니다. 그 때 해리 홀레 눈에 비친 풍경을 상상해서 그려 봤습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것을 막기 위한 해리 홀레의 싸움입니다. 노르웨이의 미래를 건 사투인 것이죠.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소설에서 해리 홀레는 진짜 사투를 벌입니다. 그만큼 요 네스뵈가 지금의 노르웨이를 절박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앞서 해리 홀레를 아리아드네의 실이라 비유했는데 그 행보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실처럼 연약하기에 더욱 혼신을 다해 싸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요 네스뵈는 노르웨이를 그러한 '레오파드적 콩고'로 만들지 않기 위하여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리 홀레를 통해 보여줍니다. 이면 속에서 진심을 드러내는 그이니만큼 말로 분명히 설명하기 보다는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바로 해리 홀레의 삶 자체로 말이죠.

 

 '스노우맨'에서도 해리 홀레의 삶은 그리 밝지 못했습니다만 '레오파드'에서 그의 삶은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스노우맨'이 가져온 비극 때문에 단 하나의 사랑이었던 라켈과 올레그는 영영 떠나버렸고 이제 아버지마저 세상을 등지려 하고 있으니까요. '스노우맨'에서 해리 홀레는 '스노우맨'에 집약된, 그러니까 배타성으로 충만하여 결국은 비극을 불러일으키고 말 '노르웨이적 광기'로 부터 유일하게 탈출할 수 있는 길을 라켈과 올레그에 대한 사랑에서 찾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구원이었던 라켈과 올레그는 떠나버렸고 결국 해리 홀레는 사랑의 아픈 상처와 절망만을 간직한 채 아예 노르웨이마저 떠나 폐인이 되어버렸죠. 그 해리를 다시 노르웨이로 오게 만든 이가  바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위독했기 때문이었죠. 그렇다고 요 네스뵈가 아버지를 해리 홀레에게 남아있는 구원의 가능성 같은 것으로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에서 아버지란 이를테면 하나의 반영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해리 홀레가 겪고 있는 상처와 영혼의 방황 같은 것을 보다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해주기 위한 반영 같은 것이죠.

 

 비유하자면, 여기서 해리 홀레와 아버지와 관계란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신곡에서 단테는 유령인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따라 지옥을 여행합니다. 그런데 신곡이 쓰였을 당시 널리 퍼졌던 유령에 대한 생각 그대로 유령인 베르길리우스는 스스로 말을 하지 못하고 오직 단테가 말을 건네야만 할 수 있습니다. 하는 모습만 보자면 그는 마치 에코, 즉 메아리와 같습니다. 그렇게 반영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우리가 생각할 때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죠. 생각이란 무엇보다 우리 뇌리 속에 어떤 말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면 마치 그림자가 존재의 뒤를 따르듯이 자연히 다른 생각이 이어집니다. 그건 좀 전 생각에 대한 응답일수도 있고 의문일수도 있습니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의 대화란 이러한 모습을 모방한 것이고 그렇게 베르길리우스의 말이란 단테에 대한 반영이라는 것이죠. 한 마디로 사유의 메아리라고 할까요. 저는 해리 홀레의 아버지가 바로 그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해리가 겪고 있는 상처와 절망의 반향이자 동시에 그러는 가운데서도 버티면서 궁극적인 해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사유의 메아리라는 것이죠.

 

 그런 아버지가 마지막 유언과도 같이 자신을 온달스네스에 묻어달라고 합니다.

 

 "온달스네스... 어머니와 함께 묻히려고요?"

 해리는 침묵했다.

 "그것도 있고. 동네 주민들과도 묻히고 싶구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잖아요."

 "누군들 안다고 할 수 있니? 최소한 그들과 나는 같은 곳에서 태어났다.

어쩌면 결국에는 그게 제일 중요한지도 몰라.

 같은 종족이라는 거. 우린 같은 종족과 있고 싶어하지."

 

 여기서 아버지는 '같은 종족'이라는 말을 합니다만 요 네스뵈가 그저 노르웨이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 말을 하게 한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같이 묻히고 싶은 동네 사람들이 정작 아버지 자신은 그들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전혀 모르지만 같이 묻히고 싶어합니다. 이것을 그야말로 타자들에게 온전히 자신을 열어보이는 모습이지 않을까요? 타자와의 공존을 허용하지 않는 레오파드들과는 전혀 다르게 알지도 못하는 낯설기 그지 없는 타인들이지만 그래도 공존하고 싶다는 마음을 나타낸 것은 아닐까요? 이로써 요 네스뵈가 해리 홀레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주제 혹은 그가 비춰주는 대안의 빛이 나타나는 듯 합니다. 아버지가 해리 홀레 사유의 메아리라고 본다면 더욱 명확해질 수 밖에 없는 빛인 것이죠. 그건 물론 타자에게 자신을 열어 포용하는 것, 적극적으로 타자와의 공존을 도모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유언에서 요 네스뵈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레오파드들로 부터 노르웨이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시된 길은 물론 소설 속에서 해리 홀레의 추적과 여정을 통해 충분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네, '레오파드'는 이런 소설입니다.

 

 784페이지의 만만치 않은 두께를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한 페이지, 한 문장도 버릴 게 없는 속이 꽉 찬 깊이와 재미를 두루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깊이도 깊이지만 묘사되는 장면들이 그대로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만큼 선명해서 더욱 빠져서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제가 만일 헐리우드 영화 제작자라면 바로 요 네스뵈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 작품의 영화화 판권을 사겠습니다. 그만큼 재미를 담보하고 있다는 말로 들어주시면 좋겠네요.

 

 요 네스뵈가 '레오파드'의 이면에 심어놓은 의미를 추적하느라 정작 작품에 나오는 범인을 이야기하지 못했네요. 스노우맨의 범인도 정말 잔인했습니다만 이 소설의 범인도 역시 잔인하기가 이를데 없습니다. 그의 잔인성은 그가 살인에 사용하는 도구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데 그 도구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름은 '레오폴드의 사과'라고 하는데 레오폴드 황제가 사람들을 고문할 때 사용했다고 하는군요. 원래는 가시 없이 그냥 둥근 모습으로 사람 입 속에 넣는데 저게 딱 숨구멍을 막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걸 입에 넣은 사람은 자신의 손으로는 도저히 뺄 수가 없고 그러는 가운데서도 점점 숨이 막혀와 결국엔 도구 밖으로 삐어져 나온 철사를 손으로 잡아당기게 되는데 그러면 그림처럼 24개의 가시가 사방에서 뻗어나와 죽여버린다고 합니다. 애용한 사람이 레오폴드 2세이었듯이, 정말 타자에 대한 배려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야말로 레오파드들에게 어울리는 살인 도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진짜 잔인한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작가 요 네스뵈 자신이죠. 거듭되는 반전에 반전. 거기다 최후의 일각까지 급박하게 휘몰아쳐가는 위기 상황으로 마치 신경 세포 한 가닥, 한 가닥이 타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하노라면 정말 눈 앞에 네스뵈가 눈 앞에 있다면 '제발 이제 그만 애태우란 말이야!'하고 멱살이라도 잡고싶을만큼 잔인하게 느껴지거든요. 정말 그렇게 되는지 안 되는지, 직접 소설을 읽으면서 확인해 보는 것도 좋겠네요.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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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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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네스뵈, 노르웨이의 스릴러 작가인 그를 미국의 언론들은 스티그 라르손이 없는 지금 이제 노르딕 느와르의 왕이라 부른다.

사실 노르딕 느와르라는 명칭 자체도 스티그 라르손과 요 네스뵈 때문에 생겨난 것이기도 했다. 그만큼 영미 미스터리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해닝 만켈로 인해 전 세계에 관심을 불러 일으킨 노르딕 느와르에 있어서 진화의 한 극점으로 인정되었다. 깊이에 비해 속도감과 긴장이 떨어졌던(스티그 라르손 조차도!) 노르딕 느와르를 영미의 스릴러 못지 않게 늦출 수 없는 몰입도와 속도를 가져다 준 작가가 바로 요 네스뵈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긴 밤을 보내기 위한 소일거리론 괜찮지만 분주한 일상으로 짧은 밤을 보낼 수 밖에 없는 도시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닌가'란 평가 조차 들었던 노르딕 느와르에게 '스릴러의 새로운 바람'이라며 영미 언론의 높은 관심마저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단지 그것 뿐이었다면 '왕'이라는 칭호는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그 재미 만큼 깊이 역시 있기 때문이다. 요 네스뵈가 특히 그의 주력 무기라 할만한 해리 홀레 시리즈를 통해 그려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노르웨이라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허위'다. 그는 자신의 국가에 대해 단적으로 '조용한 사회'라고 부른 적이 있다. 그 '조용함'이란 말 그대로 차분하다거나 안정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말은 일종의 반어법이다. 조용할 수 없는 사회인데 조용하다는 그런 의미로 쓴 말이라는 것이다. 요 네스뵈는 우리가 노르웨이에 대해서 가지는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행복지수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라는 이미지를 여지 없이 파괴시킨다. 그가 그려내는 노르웨이는 특별하지 않다. 그야말로 자본주의 국가라면 다 가지고 있는 모든 부조리와 그로인한  첨예한 갈등들로 뒤범벅된 진흙탕인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그 모든 더러운 진창들을 순백의 눈으로 뒤덮듯,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 처럼 '조용한 사회'라고 스스로 치장하고 있으니 네스뵈는 그것을 비판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는 요 네스뵈의 최고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이 작품 '스노우 맨'에 있어서도 그대로 관통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겉으로 보이는 것 처럼 일부일처제가 아닙니다. 최근 스웨덴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들의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 정도가 자신이 아버지라고 믿거나 짐작하는 사람이 친부가 아니라고 합니다. 무려 20퍼센트나요! 다섯 명중 한 명 꼴이죠! 거짓된 삶을 사는 겁니다.(p.23)"

 

  주인공 해리 홀레는 라디오를 통해 이것을 듣는다. 그리고 바로 곰팡이를 제거하는 사람의 방문을 받는다. 그는 곰팡이 제거가 왜 필요한지 말한 뒤 이렇게 덧붙인다.

 "곰팡이와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바람에 병에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몇 년씩 시름시름 앓는데도 딱히 원인도 없고 다른 식구들은 멀쩡하니까 건강염려증 환자라는 핀잔만 듣죠. 그러다가 병균이 벽지와 플라스틱을 먹어치웁니다.(p.26)"

 

  이처럼 요 네스뵈가 그리고 있는 노르웨이의 모습은 여기서 확실히 드러난다. 노르웨이는 다섯 명 중의 하나가 보이는 것 처럼 진실하지 않은 거짓과 속임수의 삶을 살고 있는 나라이며 보이지 않는 곰팡이가 알게 모르게 집을 망치고 삶을 망치고 있는 나라라는 것을.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진실을 아예 몰랐을 수도 있고 그저 삶과 타협하기 위해 짐짓 모른척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선과 기만이 가져오는 것은 파멸 뿐이다. 내버려 둔 곰팡이가 집 전체를 망치고 삶을 끝장내 버리듯이... 해서 네스뵈는 곰팡이 제거자가 되기로 한다. 진실을 더이상 모르쇠하지 않고 만천하에 밝히기로 작정한 것이다. 해리 홀레는 바로 그것을 위해 태어났다. 노르웨이를 뒤덮은 위선과 기만의 곰팡이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네스뵈는 해리 홀레가 장차 곰팡이 제거자의 운명을 걸을 것이라는 걸 바로 다음의 곰팡이 제거자의 말로 분명히 선언한다.

 

  "저 혼자 일할 겁니다.(p.26)"

 

 

 

  노르딕 느와르에 있어서 탐정들은 모두 고독하다. 이것은 하나의 일반론이다. 해닝 만켈의 발란더도 스티그 라르손의 리스베트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경찰이라는 조직에 몸을 담고 있든 아예 해커라는 범법자이든 상관없다. 그들은 무조건 혼자다. 이건 물론 고독이라는 우수를 독자들에게 전해주기 위함이 아니다. 사실 그들에게 고독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고독은 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필연의 운명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싸워야 하는 것은 단순히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범죄란 사회가 은폐한 진실이 드러나는 계기일 뿐이다. 범죄란 사회가 이제 더이상 감출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다는 증표이며 때문에 결국 그들 고독한 탐정들에게 있어 사회가 깊숙이 숨겨둔 진실의 모습인 미노타우르스에게로 안내하는 아리아드네의 실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그들이 결국 싸우는 것은 범죄자로 인격화된 사회 전체이다. 오랜 시간 위선과 기만속에 축적시켜 왔던 부조리와 갈등 그리고 그로 인한 아픔. 그들은 결국 그것을 밝혀내어 사회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홀로일 수 밖에 없다. 사회가 개인에게 새겨 놓은 모든 사회로 부터 주입된 가치관으로 부터 자유로워야 하니까. 사회가 덧 씌운 색안경이 아닌 오로지 자신만의 눈으로 그 모든 진실들을 목격해야 하니까. 그래서 홀로고 홀로이어야만 한다. 그들이 슈퍼히어로라서가 아니라 사회의 가장 진실한 기록자가 되기 위하여...

 

 

   또한 그 이유로 네스뵈는 '가족'에 집중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혈연에 기반한 가장 강한 유대로 결속된 집단이다. 그 가족을 생각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상은 우리가 우리가 속한 사회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감상과 비슷하다. 가정의 혈연이 '모국'이라는 국적으로 이어지고 여기에 같은 언어, 같은 지역이라는 공감대는 그것을 강화한다. 흔히 가족이란 걸 떠올릴 때 느껴지는 감상은 타국에서 자신의 나라를 떠 올릴 때 느껴지는 감상과 유사하다고 한다. 우리는 왜 가족을 떠올릴 때 먼저 감상주의에 빠지는 것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같은 핏줄'이라는 것에서 오는 유대이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이 한 사회의 성원 또한 그 비슷한 유대감을 사회에 대하여 가진다. 사실 가족은 사회화의 1차적 기관으로 사회가 한 육체와 의식에 새기고 싶은 이념들은 모두 가족을 통해 유포되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은 그대로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한 가족의 거짓을 다루는 것은 바로 사회의 거짓을 다루는 것이 된다. 가족 내부에 깊숙하게 감춰진 진실이란 그대로 사회가 은폐한 진실의 은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네스뵈는 가족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미국의 하드보일드 작가 로스 맥도널드와 비슷하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계승자라고도 불리는 로스 맥도널드는 이전의 하드보일드 작가들과는 달리 자신의 작품의 중심에 '가족'을 가져온 첫번째 작가다. 1960년 그의 전성기 때 나온 작품들의 대부분은 모두 한 가족의 오랫동안 은폐된 진실들을 드러내는 데 맞춰져 있다. 문제는 그렇게 드러난 가족의 진실들이 모두 1950년대 미국이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을 때는 주목하지 않았던 그렇게 수면 아래로 감춰진 진실들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실 로스 맥도널드가 드러내는 진실들은 오로지 경제적 풍요 또는 사회적 성공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버리거나 감추었던 그런 갈등이요 상처였고 아픔이었다. 그렇게 그는 1950년대의 미국인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아메리카'가 그다지 이상적이지도 모범적이지도 않은 사회였음을 폭로한다.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다만 우리가 그것이 겉으로 꾸민 휘황찬란한 외관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그 이면에 있는 그늘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란 걸 맥도널드는 알린다. 요 네스뵈가 해리 홀레를 통해서, 특히 이 작품 '스노우 맨'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도 바로 이것이다. 1950년대의 미국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노르웨이. 바로 그 위선과 기만의 포장지를 뜯어내기 위하여 그는 사실은 사회적 갈등이 깊숙히 침윤되어 있는 곳이나 혈연이라는 이유로 마치 없는 것 처럼 위장되어 있는 곳의 대표적인 상징으로써 '가족'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스노우 맨'에 새겨진 의미이기도 하다.

 

 

 

 

  '스노우 맨'은 겨울이 그 어느 곳 보다 긴 노르웨이에게 있어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노르웨이에 존재하는 가정 만큼이나 흔할 것이다. 더구나 '스노우 맨'은 단란한 가정의 상징물 같은 것이기도 하다. 집 앞에 세워있는 눈사람에게서 그 가정이 문제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것을 느끼기가 더 쉽다. 왜냐하면 눈사람은 이제 우리들에게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 굳어진 인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사회적 약호(code)'라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바로 그 '눈사람'이 범인의 잔혹한 살인이 있을 것이라는, 그렇게 진실하지 못한 가정을 파괴할 것이라는 예고장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 표면이 주는 느낌과는 완전히 다른 이면의 의미로 말이다. 눈사람 자체는 굳어진 이미지로 인해 더 이상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우리 시각의 한계를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눈사람은 그대로 '노르웨이'라는 그 겉에 드러난 이미지 때문에 정작 그 진실된 면모는 보지 못하는 것의 상징도 된다. 앞서도 말했듯 노르딕 느와르에서 범죄란 결국 사회가 은폐한 진실이 드러나는 계기다. 이 소설의 눈사람 역시도 그와 똑같은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네스뵈는 눈사람을 노르웨이에 대한 하나의 총체적 상징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눈사람 자체에 집약되어 있는 것과도 같이 표면과 이면의 이율배반성은 이 '스노우 맨'에 있어 주제의 핵심이자 또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네스뵈는 소설에서 보여지는 이야기 전개의 표면에 그 주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 쪽에 이야기의 주제를 담는다는 것이다. 앞서 인용했던 라디오 멘트는 사실 이 소설에서 벌어진 범죄의 이유와 모습을 집약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혈연이 아닌 자들끼리의 집합, 거짓과 기만으로 이루어진 가정... 주로 그런 가족들이 범죄의 표적이 된다. 이렇게 보자면 사실 이 이야기의 주제가 마치 그러한 불륜들을 처벌함으로써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해 나가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여긴다면 그건 표면에 너무 집착한 까닭이다. 눈사람과도 같이 표면의 이야기가 주는 인상에 굳어진 나머지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보다 본질적인 주제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포일러를 피해 내용의 언급 없이 바로 핵심으로 뛰어들자면 사실 네스뵈가 이 소설에서 본래 말하고 싶은 것은 불륜의 죄악시, 간통으로 부터의 가족의 보호 따위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자체를 의심하며 부정한다. 사실은 거꾸로 그러한 범죄자를 통하여 그 범죄자가 가지고 있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신봉 만큼 우리 역시도 가족이라는 것에 그러한 맹목적인 믿음, 집착이 있지 않느냐고 꼬집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네스뵈가 정말 보여주려 하는 진심이다. 때문에 이 소설에서 이루어지는 해리 홀레의 로맨스(스포일러상 이 정도만 언급한다.)야 말로 네스뵈의 핵심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이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네스뵈의 전제를 먼저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는 왜 가족을 하나의 의심스러운 이데올로기로 바라보는 것인가? 그것은 혈연 자체로 비롯되는 배타성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더 상세히 설명하기 전에 '노르딕 느와르'가 왜 사회 전체와 겨루려는 것인가에 대한 보다 확실한 대답을 하고자 한다. 해닝 만켈, 스티그 라르손 그리고 네스뵈까지 그들이 스웨덴을 의심하고 노르웨이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바로 복지국가의 부작용이라고도 할만한 흔히 '외국인 혐오증'으로 말해지는 파시즘의 잔재 때문이다. 최근 통계에도 나왔지만 이 북구 유럽에 있어서 극우주의의 확산은 정말로 놀랄만한 기세이다. 그들의 성공한 복지국가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막대한 세금 부담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렇게 그 나라의 국민들은 성공한 복지국가를 이룰 때 까지 오래도록 희생해 온 것이다. 그 나라는 그렇게 그들의 피와 땀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뒤늦게 그 나라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전혀 거기에 대한 희생 없이 오직 그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자라난 복지국가란 나무로 부터 복지란 열매만 따 먹는다. 국민들에게 그 외국인들은 오로지 무임승차자로 보일 뿐이다. 때문에 '외국인 혐오증'이 성장하는 것이다. 헤닝 만켈은 1991년 그의 데뷔작 '얼굴없는 살인자' 때 부터 스웨덴 사회에 만연된 외국인 혐오증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었다. 사실 노르딕 느와르가 그와 같이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노르딕 느와르는 태어났을 때 부터 그렇게 점점 가시화되고 있는 파시즘과 싸워왔던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그대로 스티그 라르손이 계승했고 네스뵈의 작품 역시도 이 흐름을 따르고 있다. 즉 여기서 네스뵈가 의문시하는 혈연 하나로 존속되는 가족은 사실상 '외국인 혐오증'의 은유인 것이다. 네스뵈 그에게는 결혼으로 출발한 가정이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 나라란 오로지 그 나라에서 태어나고 함께 해온 국민들로만 채워져야 한다는 주장이나 똑같은 것이며 사람의 마음은 변할 수 있고 성격 차이로 도저히 같이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럴 때 가족이니까 억지로 잡아두고 포기하게 하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이 아니라고 해서 미워하고 배척하는 외국인 혐오증이나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바로 그 노르웨이에 확산되고 있는 파시즘을 에둘러 비판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이러한 거짓 위에서 존재하는 가족들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바로 그 거짓 위에서 존재하는 가족들이 사실상 애정이 끝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 만으로 '카드로 만든 집' 과 다를 바 없는 가족을 고수하고 지키고 있었듯이 이 '외국인 혐오증'것 역시도 단순히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고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외국인들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것이니 정작 바로 그 가정에서 범죄자라는 괴물이 태어나게 되었던 것 처럼 이 외국인 혐오증도 역시도 결국엔 그와 같은 괴물을 태어나게 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스노우 맨'이 정말 뛰어난 작품인 이유는 이 작품에 녹여낸 네스뵈의 우려가 정말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얼마전 우리들이 충격 속에 들었던 오슬로의 정부 청사에 폭탄 테러를 해서 8명을 숨지게 하고 바로 뒤이어 우토야 섬에서 캠프에 참가한 69명을 무차별 총기 난사로 사살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그 어마어마한 학살을 저질렀던 이유의 근본에 바로 이 외국인 혐오증이 자리잡고 있었다. 혈연의 순수성을 고집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파시즘이 가져오는 것은 결국 이와 같은 끔찍한 비극 뿐이다. 나치가 가져온 유태인 학살은 파시즘의 본성상 파시즘이 있다면 반복될 수 밖에 없는 비극인 것이다. 그래서 네스뵈는 이러한 비극을 미연에 막고자 가족도 얼마든지 사정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것이며 사실은 때가 되었을 때 그 변화를 먼저 긍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 소설 '스노우 맨'을 통해 역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읽는 '스노우 맨'의 이야기이다.  노르딕 느와르 전체에 결쳐 오래도록 이어져 온 싸움이기도 하다. 하지만 헤닝 만켈은 너무 어두웠고 스티그 라르손은 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떠나고 말았다. 네스뵈는 천착하는 주제의 깊이와 매서움은 변하지 않았으나 어둡지 않고 영미의 베스트셀러 스릴러 만큼이나 빠른 속도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로 독자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이 책은 밀레니엄 만큼이나 '블랙홀'이다. 그만큼 잡을 첫 순간을 주의해서 결정해야 한다. 마치 미드 '24시'를 보는 것 처럼 장장 619 페이지에 이르는 이야기를 도저히 중간에서 그만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재미 만큼이나 천착한 주제의 선명성 또한 빛을 발한다. 아마 이 소설을 읽고 네스뵈의 다음 해리 홀레 시리즈를 거부하기란 참으로 힘들 것이다.

 

 

                                                                                        "스노우 맨을 잡아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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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12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헤르메스님께서도 <스노우맨>을 읽으셨군요! 저는 이 책을 딱 받고는 깜짝 놀랐어요. 어쩐지 박스가 왔더라 생각했더니 무지하게 두꺼운 책이더군요. 값이 비싼데 이유가 있었어요. 일단은 너무 읽을 책이 많아 책상위에 고이 모셔두었는데 곧 꺼내읽어야 겠어요.
전부터 부러웠는데... 대체 헤르메스님께서는 어떤 바탕에 사진을 찍으시는 겝니까! 저는 찍고자 해도 집 바닥은 낡은 장판이라 안예쁘고, 책상은 좁아서 다른 물건들이 보이고... 영 찍을데가 없어서 그냥 알라딘 이미지로 대체하곤 합니다. 제게도 저런 무궁무진한 배경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ICE-9 2012-03-12 22:26   좋아요 0 | URL
정말 추천이에요. 두께가 제법 되지만 아마도 정작 읽게되면 그런 건 문제가 안될거에요. 그런데 잔인한 장면이 좀 나오는데 소이진님이라면 괜찮겠지요?^ ^
제 영업비밀을 말씀드리자면 전 LP 커버 위에 놓고 찍는답니다. 스노우맨 배경의 그림은 그룹 유라이어 힙의 앨범 커버에요. 로저 딘이 그렸죠. 그렇게 소장하고 있는 LP를 재활용하고 있어요^ ^ 이번엔 마침 소장한 레고가 스노우 맨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 같아서 특별히 더 연출시켜 본 거구요. 하다보니 이게 더 재밌더라구요 하하^ ^

김동준 2017-07-04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말로만 ˝읽어보겠다˝ 하지 말고, 주말에 무료한 시간을 보낼때 그리 나쁘지는 않을것 같아서 다행이네.
 
헤드헌터
요 네스뵈 지음, 구세희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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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부터 정말 읽고 싶었던 작가였다. 

                          요 네스뵈

 노르웨이의 작가 요 네스뵈. 최근 밀레니엄의 스티그 라르손 때문에 더욱 각광을 받게 된 노르딕 느와르에 있어서 영미 비평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 꼭 선정되는 작가이자 벌써 부터 워싱턴 포스트나 월 스트리트 저널등 미국의 주요 일간지에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기사나 인터뷰가 종종 실리는 등 많은 관심을 받고 있으며 비평가들 사이에선 스티그 라르손이 죽고 없는 지금 그 인기를 대신 차지할 가장 유력한 작가로 꼽히는 작가이건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정식으로 그의 소설이 소개된 적이 없어 아쉬웠는데 이번에 드디어 살림에서 그의 소설이 나오게 되었다. 물론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해리 홀레' 시리즈가 아니라서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무슨 상관인가? 지금 나온 스탠드 얼론 '헤드헌터'도 왜 영미 소설계에서 네스뵈가 그토록 각광을 받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작품이었는데 말이다.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링컨차를 탄 변호사와 해리 보슈 시리즈로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질 대로 알려진 마이클 코넬리는 THE REDEEMER를 읽고나서 정말 충격이었고 이제 네스뵈는 새로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며 해리 홀은 자신의 새로운 영웅이다라고 말했고 THE REDEEMER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자신의 심장 박동을 위험한 수준까지 고동치게 만들었던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 코넬리가 이렇게 까지 극찬하는 작품이라니 정말 읽고 싶어 마구 애가 탈 정도다. 

   네스뵈는 스티그 라르손과 더불어 이른바 노르딕 느와르의 진화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노르딕 느와르의 좋았던 점들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특유의 느린 진행을 과감히 개선하고 영미 스릴러 만큼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한없이 처지고 우울하기만 하던 분위기를 적당히 가감하여 유머스러운 분위기도 연출한다는 점에서 또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르딕 느와르 특유의 첨예한 비판 의식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예리한 냉소적 시선마저 더해졌으니 더욱 더 그렇다. 

  어쩐지 오랜 기다림 끝에 읽은 소설이고 거기다 이제 막 소개되는 작가라 어쩔 수 없이 칭찬만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또 그대로 허언만은 아님을 소설을 직접 읽어본다면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네스뵈는 언젠가 자신의 고국 노르웨이가 속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복지국가들을 두고 '조용한 사회'라 부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건 일종의 냉소가 섞인 반어법적 표현이었다. 즉, 겉으로는 조용하고 평온한 사회처럼 보이지만 그건 그냥 기만이고 치장에 불과할 뿐 내부적으로는 온갖 부조리와 모순이 들끓는 곳임을 에둘러 말하기 위한. 베르코르의 소설 제목 처럼 일종의 '바다의 침묵'이라고나 할까? 내부적으로는 수많은 물결이 움직이고 요동마저 치고 있지만 늘 잔잔히 너울거리는 수면만을 보여주는 그 바다처럼 네스뵈는 자신의 나라들이 사실은 그렇게 이중성을 띠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 이중성, 그 '조용한 사회'의 이면에 가리워진 본성을 파헤치는데 주력한다. 사회가 쓴 기만의 가면을 벗기고 사실은 약자의 희생으로 지탱되는 야수와도 같은 그 사회의 맨얼굴을 보여주려는 작가이다. 네스뵈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짐 톰슨의 내 안의 살인마(KILLER INSIDE ME)를 꼽았는데 그 작품 역시도 평범한 남자의 가면을 쓴 사이코패스의 연쇄살인마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이중성의 테마가 그에게 본질을 이루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그는 두 작가를 언급했는데 다른 한 사람은 블라디미르 나브코프 이다.)

  그 드러냄의 대표작이 바로 해리 홀 시리즈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소설 '헤드헌터'도 사실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이중성은 여기서도 여전히 테마이다. 그것은 주인공 자체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제목인 헤드헌터는 바로 주인공의 직업이기도 하다. 그는 그 업계에서 이름을 널리 떨치고 있는 유망주다. 하지만 168CM라는 작은 키의 그는(주인공이 이렇게 키가 작은 것은 네스뵈가 그 자신 해리 홀과는 완전 반대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새로운 작품을 쓰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해리 홀은 193CM의 거구다.) 아마도 그 키로 어떤 컴플렉스라도 가지고 있었던지, 그 작은 키가 주는 약점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아주 매력적인 여성과 결혼을 했고 그 여성이 원하는 최상의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하여 늘 아낌없이 돈을 쓰는 바람에 만성 재정 적자에 허덕인다. 그래서 그는 부업을 하나 갖는데 그것은 헤드헌터 대상자를 인터뷰할 때 얻게 된 정보를 바탕으로 그들이 가진 미술품을 훔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낮에는 평범한 직장인 밤에는 도둑으로 활동하며 늘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인공에 체화된 이중성의 모습은 사실 자본주의에게 보내는 네스뵈의 냉소라 할 수 있다.  좋은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고래로 부터 사회가 보다 더 질적으로 잘 살기 위한 필수적인 일이었고 그래서 인성을 중시했으나 자본주의에 들어와서는 단순히 돈만 잘 벌면 인성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기능적인 머리'로 그 의미가 축소되고 말았다. 철저하게 분업화된 자본주의는 그에 맞게 인재를 뽑는데 있어서도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분업화된 영역에 잘 맞는 사람인가만을 따지는 것이다. 즉 사람에다 옷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옷에다 사람을 맞추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본주의도 네스뵈가 보기에 그리 공정하게 운용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주인공 자신이 정작 생계를 유지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 일종의 약탈인 범죄이듯 그렇게 자본주의 역시도 사실은 누군가로 부터 약탈해야만 그렇게 범죄를 통해서만 유지되고 있는게 아니냐고 냉소를 보내는 것이다. 뭐, 어쩌면 보다 단순한 이유일수도 있다. 해리 홀이 형사이기 때문에 그 반대인 범죄자로 주인공을 설정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반문은 그가 결정적으로 모든 난관에서 헤어나게 해 줄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그 범죄에서 훔치게 되는 미술작품이 바로 루벤스의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이라는 점에서 여지없이 깨어진다. 

  루벤스의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은 그야말로 이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집약해놓은 것과 같은 작품인데 가급적 스포일러를 피하면서 네스뵈가 이 작품에 넌지시 찔러넣은 숨은 저의를 말하자면 칼리돈을 거의 폐허로 만들었던 그 멧돼지가 사실은 누군가가 보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멧돼지가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아르테미스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견된 일종의 징벌의 천사라는 점이다. 소설을 읽고나면 이 그림이 얼마나 탁월하게 소설의 내용을 함축해서 보여주고 있는가 놀라게 될 것이 분명하지만(멧돼지에게 상처를 입히는 유일한 여성 영웅 아틀란타의 존재 또한 너무도 절묘하다.) 아무튼 이 그림은 단순히 인물의 형상화를 너머 소설에 나오는 바대로 아르테미스는 미국으로 그녀가 보낸 멧돼지는 바로 미국이 퍼뜨리고 있고 노르웨이가 따라가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걸 암시하게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가장 전위적 위치라 할 수 있는 헤드헌터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아주 부유하게 됨으로써 자신을 그 모든 경제적 곤란에서 벗어나게 해 줄 구원이 신자유주의 자체의 상징인 멧돼지에게서 온다는 점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결국 멧돼지가 가져온 것은 칼리돈의 파멸이었다. 즉 이 그림 때문에 단순히 해리 홀의 반대되는 인물의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약탈을 그 자체의 본성으로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정확히는 신자유주의)를 고발하기 위해서였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최근에 '헤드헌터'는 노르웨이에서 영화화되었다

  깜짝놀랄 반전도 있고 한번 잡게 되면 그냥 내처 끝까지 읽게되는 진짜 '페이지터너'이지만 이렇게 깊이를 우려내는 솜씨 또한 만만치 않은 작가가 바로 네스뵈다. 이런 저력이 있는 작가이기에 영미 소설계에서 그토록 주목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한다. 아무튼 이 소설은 말로만 듣던 그의 명성이 그저 허명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지리한 장마비로 뭔가 기분전환이 필요하다면 아니면 지금 가장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노르딕 느와르의 그 진화된 현재형이 궁금하다면 꼭 접해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사실 많은 분들이 읽으셔서 제발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가 마구 나왔으면 좋겠다. 마이클 코넬리가 저토록 침을 튀기며 칭찬하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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