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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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다 리쿠가 돌아왔다. 얼마만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네크로폴리스가 마지막이었으니 그래도 몇 년이 된 셈이다. 그랬는데 이렇게 갑자기 온다 리쿠의 책이 두 권이나 동시에 발매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하나는 '달의 뒷면'인데 2001년도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불연속 세계'로 2008년도 작품이다. 두 작품간 시차가 무려 7년이나 존재하지만 이렇게 같이 발간되어야 했던 이유가 있다. 그것이 주인공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두 작품은 하나의 시리즈다. 바로 음악 아티스트 발굴이 직업인 '다몬'을 주인공으로 한!

 

 

 다몬은 '삼월은 붉은 구렁'에서의 고이치를 참 많이 연상시키는 캐릭터다. 물론 다몬은 책 보다는 음반을 많이 듣지만 그래도 달의 뒷면에서 문학작품 제목으로 끝말 잇기를 술술 하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음반 만큼 책 역시 많이 읽는 존재가 틀림없다. 다만 고이치가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존재라면 다몬은 끝도 없이 돌아다닌다는 차이점이 있다. 직업이 가능성있는 무명의 아티스트를 찾아내는 것이다 보니 어쩌면 방랑자로서의 삶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가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엿하게 프랑스인 아내까지 두고 있다. 잘 생기긴 했으나 성격은 쑥맥에 가까운데도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건 아무래도 여자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보니 이런 남자들이 오히려 여성들에게 어필한다는 얘기를 '삼월은 붉은 구렁'에서 본 적이 있다. 이것도 다몬이 사실은 고이치의 발전형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되는 부분이다.

 

 아무튼 '달의 뒷면'과 '불연속 세계'는 그 다몬을 중심으로 한 시리즈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들 대부분이 어디론가 가는 설정인 만큼 이 두 작품도 어디론가로 가서 벌어진다. 온다 리쿠 스스로는 특히나 이 시리즈를 독자들이 기행 소설로 봐주기를 바라고 있다. 낯선 땅 낯선 시간속에서 문득 느끼는 새로움. 여행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이런 느낌을 온다 리쿠는 '달의 뒷면'과 '불연속세계'가 독자들에게 전해졌으면 한다.  

 

  '달의 뒷면'은 2001년 작품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기행 소설 보다는 97년에 나온 '삼월은 붉은 구렁'에 보다 가까와 보인다. 분위기나 주제나 할 것 없이. 사실 어쩌면 정말로 '삼월은 붉은 구렁'에서 장편으로 버전 업 되지 않은 네 번째 소설 '새 피리'가 '달의 뒷면'으로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달의 뒷면'에서 주요한 소도구가 바로 비둘기 피리이기 때문이다. '삼월은 붉은 구렁'에서 나왔던 마치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의 유명한 초반부 카페 안의 잡담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 같은 대화 장면도 '달의 뒷면'에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뭐, 온다 리쿠의 정형화된 스타일일 수도 있겠지만 특히나 문학 작품 제목으로 끝말잇기 하는 것은 '삼월은 붉은 구렁'에서 첫번째 단편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나왔던 등장인물들의 책을 둘러싼 대화들을 참 많이 연상시킨다. 그러고 보니 구성원들까지 어쩐지 비슷한 것 같다.

 

 

 자꾸만 '달의 뒷면'과 '삼월은 붉은 구렁'의 유사성을 말하고 있는데(어쩌면 정말로 이 작품은 네번째 '새피리'의 버전 업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달의 뒷면'의 결말 때문이다. 내 생각에 이 결말 때문에 이 작품의 호불호가 꽤 갈리지 않을까 싶다. 하긴 온다 리쿠의 팬을 자처하는 나 조차도 그 결말에는 동의할 수 없으니 말 다했긴 하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결말을 포함하여 '달의 뒷면'에서 행해지는 얘기를 소설에 드러난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해야 하지 않나 싶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이 작품과 '삼월은 붉은 구렁'의 유사성을 자꾸만 끌어들이는 것이다.

 

 '달의 뒷면'은 한 마디로 잭 피니의 유명한 소설 '바디 스내처'의 온다 리쿠 버전이다. '바디 스내처'를 모른다면 50년대의 돈 시겔이나 70년대의 필립 카우프만의 영화 '신체 강탈자의 침입'을 떠올리면 된다.(돈 시겔은 우리들에게 '더티 해리'로 유명하고 필립 카우프만은 '참을 수 없는 존재들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이 쟁쟁한 감독들이 앞다두터 영화화 했을만큼 '바디 스내쳐'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영화화 리스트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헐리우드계의 이단아 '어딕션'으로 유명한 아벨 페라라도 90년대에 바디 스내쳐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최근에는 '인베이젼'이라는 바디 스내쳐 원작중 가장 실패작이라는 니콜 키드만 주연의 영화도 있다. 아무튼 바디 스내쳐는 그 독특하면서도 자극적인 설정,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른 똑같은 무엇으로 바꿔치기 당한다는 (아마 이것의 원본은 옛날 유럽에 전해지던 전설중의 하나인 '체인저링'이겠지만) 그것 때문에 바로 지금까지도 거듭 영화화 되어왔는데 유독 이 설정이 그럴 수 있었던 까닭에는 무엇보다도 그 '바꿔치기'에 담긴 상징성 때문이었다. 처음 잭 피니의 '바디 스내쳐'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사람의 의식이 한 순간 바뀌는 것을 문자 그대로 신체의 강탈로 은유화했다. 그렇게 몸은 그대로이지만 의식만 달라지는 것을 어떤 외계의 힘에 의해 외부에서 보기엔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탈당한 사람과 똑같지만 그 속은 전혀 다른 것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잭 피니는 바꿔치기한 신체에게 감정을 배제함으로써 자신이 이데올로기에 의한 변화를 다루고 있음 역시 강조했는데 무엇보다 사회주의는 개인의 감정(혹은 창의성)을 억누르는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필립 카우프만까지 이데올로기에 대한 은유로 형상화했다면 아벨 페라라는 90년대 들어 새로이 나타나 온 세계를 공포에 떨게한 에이즈에 대한 포비아의 은유로 신체 강탈을 가져왔다.(비단 미국뿐이 아니다. 일본에도 이 비슷한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만들어져왔다. 이와아키 히토시의 '기생수'가 아마 그 대표적인 작품이 될 것이다. 최근엔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의 극장판 하나도 바디 스내쳐를 다루었다.)

 

 

 

 

 

  그렇다면 온다 리쿠는?

  여기서 온다 리쿠를 만일 잭 피니와 헐리우드 감독들과 같다고 보면 뭐,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결말은 여지없이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결말까지과는 과정은 온다 리쿠 특유의 분위기와 내용답게 흠뻑 몰입하게 만들고 귀담아 둘만한 것 또한 많아서 어쩐지 그 결말 마저 그대로 버리기 아깝게 만든다. 그래서 난 다시금 살펴보았고 그러다 삼월은 붉은 구렁과의 유사성이 눈에 띄게 되었다. 또 같은 질문이 반복되지만 그렇다면 온다 리쿠는 신체 강탈을 무엇으로 은유하는 것일까? 물론 개인적인 견해를 전제하고 하는 말이지만 난 그걸 '책 읽기'라고 부르고 싶다.

 

  '삼월은 붉은 구렁'은 책 읽기에 관한 소설이다. 하지만 거기서 책 읽기란 그냥 보통의 취미는 아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듯 소수만의 취미이다. 아마도 누구보다 책을 좋아하는 온다 리쿠는 점점 책을 안 찾고 안 읽게 되는 이 사회에 대해 나름의 안타까움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아마도 책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삼월은 붉은 구렁'을 쓰지는 않았을까. 바로 그렇게 이제는 소주의 연대로까지 추락해 버린 '책'에 대한 연민이 개인적으로는 그대로 '달의 뒷면'으로 이어져 신체 강탈의 하나의 은유로 쓰여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바껴진 신체들은 이른바 '책'이란 쓰여진 글을 자신의 내부에 포함해버린 존재들을 뜻한다는 것이다.

 

  근거는 여러가지다. 일단 대부분의 사건 정황이 일단 텍스트를 통해 밝혀진다는 것. 시기를 감안하더라도 시각적 매체가 전혀 나오지 않은 것이 이 소설의 특색이라 할 만한데 아마도 그것은 봄이 아니라 읽음이라는 감각을 온다 리쿠가 더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더구나 이 소설의 한 부분의 어떤 인물은 아예 만나는 사람 역시도 책 처럼 읽게 된다는 고백까지 한다. 또한 신체 강탈을 일으키는 미지의 존재를 처음 대면한 곳이 도서관이라는 점도 여간 상서롭지 않다. 배경이 되는 야마쿠라가 작은 도시라 해도 그 많고 많은 곳들중 왜 하필이면 도서관일까? 그것도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대낮에. 그 역시 '책'이란 신체 강탈에 있어 본질이 되는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특별히 고른 곳이 아닐까 싶다. 또한 앞서도 말했듯 다몬을 비롯한 사건을 추적하는 네 사람이 모두 책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는 점 그리고 문학 작품의 제목을 가지고 끝말잇기를 하는 장면이 반복되는 점도 그 근거로 삼을 수 있다. 무엇보다 스포일러상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지만 삼월은 붉은 구렁의 기다리는 사람들의 소우주를 그대로 야마쿠라 전체로 확장한 듯한 네 사람만의 장면은 이 '달의 뒷면' 역시도 '삼월은 붉은 구렁'과 같이 책 읽기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음을 은연중 짐작하게 한다. 그것은 마치 도시 전체가 하나의 텍스트가 되고 네 사람이 그것을 탐독하는 장면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이지 않을까?

 

 단적으로 온다 리쿠가 왜 '달의 뒷면'에서 책 읽기를 신체 강탈의 은유로 삼고 있는지는 '기다리는 사람들'에 나왔던 한 대사에서 추정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니까 그 단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책을 읽히려면 책을 금지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바로 이 말이다.

 

 그러니까 바로 이러한 안타까움에서 온다 리쿠는 책 읽기를 통해 보다 확장된 타자를 내부에 포함한 이를 강탈당하고 바껴진 존재로 가져온다는 것이다. 왜? 세상 사람들은 더이상 책을 읽지 않으므로...

 

 그런데 왜 책을 읽어야 하지? 이런 의문이 당연히 들 수 있다. 온다 리쿠는 거기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이것 역시 '기다리는 사람들'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들이 이어서 써나가고 이어서 이야기해 나가는, 전설이 새로운 전설을 낳는 이야기" 책은 바로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데,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늘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부는 바람처럼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데 책을 읽지 않으면 그런 것이 단절되니까 그런 것이다. '달의 뒷면'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여기서 주인공 일행이 하는 것 역시도 인용한 저 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서로가 모여서 기록을 하고 자신의 기록을 남의 기록과 이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삼월은 붉은 구렁'과 '달의 뒷면'의 연속성을 떠올리게 되었기도 했지만 말이다. 여기서 보듯 온다 리쿠는 무엇보다 이어지는 것을 중시했다. 그래서 공간적 배경 역시 도시를 관통하는 수로들이 사방팔방 이어지는 '야나쿠라'(물론 이 도시는 일본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유명한 '야나가와(柳川)'가 모델이다.)를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

 

                                            실제 야나가와의 모습 (이렇게 사진을 보니 다시 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신체를 강탈해가는 미지의 존재 또한 물의 이미지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책을 읽음이란 외부와의 교감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쓰여진 글과 내가 이어지듯이 그 글을 기록한 타자와 나의 자아가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 그 타자의 자아를 내부에 간직하게 되며 그렇게 그의 생각에 내 생각을 이어가듯 쓰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는 거듭되고 발전해나간다. 또한 그 이야기로 인해 우리 역시도 예전의 작았던 자아에서 보다 확장된 자아로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의 내부에 타자를 이해할 공간들이 수로처럼 흐르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온다 리쿠는 '달의 뒷면'을 통해서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든 것들을 책이 줄 수 있다고 말이다.

 

 이렇게 처음엔 잭 피니의 바디 스내쳐를 좀 다른 식으로 고쳐 쓴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나 다시 음미해보니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얘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아마도 그토록 바디 스내쳐가 많이 리메이크 되었으나 이를 책 읽기와 연결시켜 풀어나갔던 것은 온다 리쿠만이 유일할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독특한 개성에 놀라고 그런 식으로 신체 강탈을 은유한 것에 감탄한다. 하지만 지극히 독창적이라 오해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도 처음엔 결말의 부분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온다 리쿠는 결말이 중요하지 않은 작가중 하나이다. 삼월의 붉은 구렁의 제 4부가 미완결로 끝났어도 많은 이들이 그 책의 매력을 느꼈듯이 그렇게 과정 자체가 주는 분위기와 이야기의 흐름의 매력이 진정한 온다 리쿠의 매력이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달의 뒷면' 역시도 커다란 만족감을 줄 것이다. 나 역시 독특하면서도 신비로운 야마쿠라의 매력에 취하고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 서둘러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서는 못 배기었듯이 말이다. 한 마디로 '달의 뒷면'은 진정 책이야 말로 벗할 가치가 있는 것임을 온다 리쿠 스스로가 증명해 낸 것이나 마찬가지인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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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05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다리쿠는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미스터리 작가라고는 하는데 저는 한 번도 읽어보질 않았어요. 얼마 전(얼마전이... 꽤 오래되었군요) 출간 된 <우리집에는... 어쩌고>를 집에 사두기만 했고 펴보지는 못했죠. 한 권은 읽어봐야 할텐데.
우리나아의 번역은 전부 마음에 드는데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게 바로바로 번역을 안한다는거에요. 아니, 2001년 작품을 지금 번역하면 어쩌잔 거예요! 저같이 차례대로 작품을 거슬러 올라가고픈 독자는 그저 웁니다...

ICE-9 2012-04-05 23:05   좋아요 0 | URL
하하하, 일단 저 역시 소이진님의 말씀에 공감하지만 국내 장르문학 시장이 가진 정말 협소한 여건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출간해준 것 만으로도 고마울 지경이에요. 일본처럼 미스터리 시장이 광범위하다면 우리가 바라는 만큼과 바라는 속도로 제깍제깍 나올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소이진님 아직 온다 리쿠를 접해보지 않았다면 먼저 '삼월은 붉은 구렁' 부터 접하시고 이 작품을 읽을 것을 권해드리고 싶네요. 개인적으로 온다 리쿠에게 있어서 그 작품은 하나의 원점이라 생각됩니다. '달의 뒷면'과 '불연속 세계'를 읽고나서는 더욱 확신하게 되더군요^ ^

마녀고양이 2012-04-1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다 리쿠의 왕팬이지만,
제가 어쩐 일로 서점에 들러서(사실 약속 시간이 남아서), 온다 리쿠 신간에 눈을 반짝이면서 달의 뒷면을 읽어보는데... 이게 좀 와닿지 않더라구요. 저는 삼월~ 시리즈의 열광자인데 말이죠. 최근의 온다 리쿠 작품으로 번역되어 온 책들이, 예전처럼 착 감기지 않아서 속상합니다.... ㅡㅡ;;;

ICE-9 2012-04-11 03:38   좋아요 0 | URL
오! 마녀고양이님도 온다 리쿠의 팬이셨군요. 르 귄 여사에 이어 같이 좋아하는 작가가 또 한 분 계시다니 많이 반가운데요^ ^ 아, 그런데 예전처럼 착 감가지 않으시다니... 저도 네크로폴리스에선 그랬는데 이번에 온다 리쿠의 매력을 새로이 발견하게 된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님도 얼른 다시금 온다 리쿠의 매력을 발견하게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 두 작품을 연달아 읽어보니 아직은 버리기 아까운 작가라는 생각이 마구 들더군요^ ^
 
쓰리 세컨즈 1 - 생과 사를 결정짓는 마지막 3초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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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영국의 미스터리 작가협회가 비 영어권 미스터리 소설중 최고의 작품에게 수여하는 '인터내셔널 대거'는 우리나라에도 스릴러 '비스트'로 소개된 바 있는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의 다섯번째 작품 '쓰리 세컨즈'에 돌아갔다. 이로써 그들은 이미 형사 발란더 시리즈의 헤닝 만켈과 '밀레니엄 시리즈로 지금은 스릴러의 대표적 이름이 되어버린 스티그 라르손을 배출하여 이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출간된 스릴러를 뜻하는 '노르딕 느와르'에 있어서 일종의 총본산으로 자리잡은 스웨덴 출신으로 바로 그들의 직계 계승자임을 입증하는 방점을 확실히 찍게 되었다.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르뽀타쥬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것은 두 가지 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그들의 작품은 한 마디로 고발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 그들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단순히 읽는 재미만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직접 바로 작품 속으로 가져오며 독자들에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여파를 항상 직시하도록 한다. 그래서 대단히 묘사가 현실적이며 르뽀타쥬가 그렇듯이 때로는 논쟁이 유발되도록 그것이 지닌 다양한 측면을 가감없이 펼쳐보인다. 이게 그들의 스타일이 르뽀타쥬라고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문학은 현재 제기되고 있는 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게다가 그것이 문학적 소재로만 그치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사유든 행동이든 직접적이며 현실적인 참여를 불러 일으키도록 만든다. 즉 그 문제를 바로 독자 자신의 문제로 인지하고 관심을 가지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또한 그들의 문학은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며 그렇게 사실성의 충실한 복원을 위해 작가의 관점을 독자들에게 강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묘사하는 사건을 되도록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객관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만일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의 소설들이 뭔가 지금까지 읽었던 같은 장르의 소설들과는 다르다고 느꼈다면 아마도 바로 그들이 가진 이러한 특징이 당신의 의식 어딘가에 존재하는 현을 건드린 게 틀림없다.

 

 그들이 이런 특징을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 작가들 자신에게서 연유한다. 스웨덴의 노르딕 느와르를 이끌어갔던 대표주자들인 헤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은 모두 저널리스트 출신이었는데 바로 쓰리 세컨즈의 작가 안데슈 루술룬드 역시 저널리스트 출신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고발문학적 성격은 만켈과 라르손이 그랬듯이 바로 그러한 출신에서 기인되는 탓이 크다. 더구나 콤비인 버리에 헬스트럼은 실제 형무소에서 복역까지 한 범죄자 출신이다. '쓰리 세컨즈'가 보여주는 스웨덴 형무소의 압도적 리얼리티는 분명 이 헬스트럼의 공이다. 그런데 헬스트럼 자신이 소설에 뛰어들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불행에 빠지는 것을 막자는 동기도 있었다. 이런 면에서 그의 소설 쓰기는 어쩌면 사실상 참회와도 같은데 이러한 그들의 출신에서 비롯된 문제의식이 사람들에게 만연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기 위한 고발문학적 성격을 띠게 만드는 것이다.

 

  '쓰리 세컨즈'는 '경찰 정보원'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경찰 정보원이란 범죄조직에 잠입하여 그들을 일망타진할 정보를 알려주는 존재를 뜻한다. 뭐, 이런 경찰 정보원에 대한 얘기는 사실 그리 새롭지 않다. 비근한 예로 홍콩 느와르의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무간도'에서 이미 접해본 바 있다. 하지만 거기서 경찰 정보원 역할을 했던 양조위는 그래도 어엿한 경찰 출신이었다. '쓰리 세컨즈'의 정보원 호프만은 경찰 출신이 아니라 범죄자 출신이다. 그는 범죄자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처음엔 돈을 위해 다음엔 가족을 위해 경찰에 의해 고용되어 정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홍콩 느와르에서 경찰 정보원은 경찰과 범죄조직 사이의 그렇게 경계에 서 있는 자였다. 경찰이지만 범죄자 역할을 해야만 하는 양조위는 그 때문에 자신이 경찰인지 범죄자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정체성 혼란의 문제를 겪게 된다. 이것은 사실 그대로 곧 중국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홍콩인 자체를 은유한 것이기도 했다. 양조위가 겪는 정체성의 혼돈과 불안은 그대로 역사적, 체제적 경험이 전혀 다른 중국에 이제 자신의 정체성을 맞춰야 하는 홍콩인들이 겪는 혼돈과 불안이었다.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이 가지는 상징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사실 97년 중국에로의 강제반환을 앞에 두고 있었던 홍콩인들의 특성 때문에 이러한 경계 위의 존재들은 늘 홍콩 영화에서 즐겨 사용되던 소재이기도 했다. 그 대표작이 바로 홍콩 느와르의 대부격이라 할만한 오우삼 감독의 홍콩 시절 마지막 작품 '랄수신탐(국내 개봉 제목은 '첩혈속집'이고 영어 제목은 'HARDBOILED' 이다.)이다. 여기서도 양조위는 무간도와 똑같이 경찰 출신 정보원 역할을 하고 있는데 (때문에 이 영화는 사실 무간도의 원본 같은 영화라 할만하다.) 그 경계 위에서 양조위가 느끼는 혼돈과 불안은 홍콩인 자체만이 아니라 곧 이제 홍콩을 떠나 미국에서 감독 생활을 해야 하는 오우삼 본인의 혼돈과 불안마저 드러내고 있어 흥미롭다. 사실 영화 랄수신탐은 쓰리 세컨즈와 비슷한 부분이 좀 있는데 우선은 영화 초반에 이 소설 '쓰리 세컨즈'에서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그 사건 그대로 한 경찰 정보원이 현장에서 사살당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그 정보원을 죽인 것은 바로 주인공 형사인 주윤발이었지만 이러한 상황, 그러니까 같은 동료 경찰인데도 서로의 정체를 몰라 어이없게 죽이게 되는 일들은 호프만을 정보원을 만든 유일한 경찰쪽 연락책 '빌손'의 말에서 직접 언급되기도 한다. 또한 정보원이 죽으면 연락책이 비밀리에 관리하고 있던 그 신원 증명을 위한 비밀 서류를 가져와 없애는 장면도 유사했다.

 

 시대와 국적의 차이는 있으나 그렇게 이 소설 '쓰리 세컨즈'는 홍콩 느와르와 마치 어깨를 나란히 하기라도 하듯 '경계 위에 서 있는 존재'를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콤비 중 하나인 헬스트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즉 그는 범죄자였다가 갱생하고 다시 작가로 새로이 삶을 시작하는 자이다. 앞서 랄수신탐의 양조위의 심리 상태는 곧 홍콩을 떠나 미국에서 새로이 작가 생활을 해야 하는 감독 오우삼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 것이라 말했었는데 바로 그와 똑같이 그러한 헬스트롬의 심리가 그대로 '쓰리 세컨즈'에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작품이 지닌 색다른 재미 하나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작품 속 정보원 호프만과 연락책 빌손의 관계가 어쩐지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호프만을 정보원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삶을 가져다 주는 빌손은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갱생 프로그램을 취재하다 만난 헬스트럼에게 다시금 작가로 새로이 살게 해 준 안데슈 루술룬드와 비슷하고 호프만은 영락없이 헬스트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왠지 빌손과 호프만의 얘기를 그리면서 서로의 상황을 유추하면서 집필 중 낄낄거리고 있을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를 상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다른 쪽으로 잠깐 얘기가 샜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말하자면, 이 소설은 앞에서 말했던 대로 '경계 위에 서 있는 자'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경계 위에 서 있는 자란 무엇보다 강요되는 변화에 직면한 존재다. 게다가 그건 스스로 초래한 모순적 상황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삶을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스스로 경계 위에 서 있을 것을 선택했는데 그로 인해 오히려 확고했던 정체성마저 혼란스럽게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계 위에 서 있는 자들의 얘기는 일단 의도된 연기와 진짜 정체성의 경계가 사실은 상당히 가변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를테면 1971년 스탠포드 대학의 한 연구팀이 모의 감옥 실험을 했을 때 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그 실험에서 그냥 평범한 일반인들을 간수와 죄수로 나누어 그 각각의 역할을 연기하도록 시켰지만 어느새 사람들이 거기에 너무 몰입된 나머지 정말 스스로가 간수와 죄수인 것 처럼 행동하고 서로 반목에 반목을 거듭하더니 결국엔 폭력사태까지 일으키고 말았듯이 말이다. 그들은 그저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들의 연기가 그들의 진짜 정체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켄 키지의 소설 '뻐꾸기의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역시 이와 비슷한 것을 보여준다. 거기서도 일부러 정신병 환자인 것 처럼 연기하는 주인공은 나중에 가서 자신이 미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미친 연기를 하는 것인지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건 이 소설 '쓰리 세컨즈'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호프만은 정보원으로 일하는 동안 살아남기 위하여 내내 스스로 '범죄자 보다 더 완벽하게 범죄자 연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누누히 되뇌이는데 그와 같은 완벽한 연기 때문에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종종 잊어버린다.

 

 '쓰리 세컨즈'가 경계 위에 서 있는 자를 가져온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러니까 의도된 연기가 진짜 정체성마저 위태롭게 만드는 상황.

 그런데 왜 그들은 이것을 가져온 것일까? 바로 거기에 그들이 '쓰리 세컨즈'를 쓴 진짜 목적이 있는 것 같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결론 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호프만을 두고 전개되는 비밀스런 공모와 음흉한 획책의 주체가 되는 '국가' 자체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란 게 말이다.

 

  이 소설이 헤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의 것을 바로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 '쓰리 세컨즈' 역시도 스웨덴이 가지고 있는 다른 나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의심과 불안을 정확히 꼬집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호프만이 스웨덴 국가에게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스웨덴 사회에 마약을 만연시키려는 폴란드 마약 조직을 소탕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폴란드 마약 조직은 소설 초반에서는 사람들을 관광객으로 위장시켜 스웨덴 내부에 마약을 들여오고 급기야는 스웨덴 형무소를 모두 그들의 마약 시장으로 만들려 획책한다. 그 교도소에서는 사회 계층의 상하를 막론하고 모두 마약을 구입하는데 상류층은 높은 값을 지불해오는 수입원으로 하류층은 그들의 부하로 삼는다. 그렇게 폴란드 마약 조직은 교도소로 상징되는 사회 전체를 집어 삼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시 보면 정확히 몰려들어오는 외국인들이 자신들이 피땀 흘려 만들어놓은 나라를 깡그리 망칠지 모른다는 스웨덴 자국민의 공포가 반영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즉 폴란드 마약 조직이란 이 소설에서 일종의 은유인 셈이다. 그러니까 스웨덴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을 드러내기 위한 은유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다음 질문은 이것이 다. 이처럼 스웨덴이 가지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과 호프만으로 집약되는 경계에 서 있는 존재가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를 가지는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정체성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외국인 혐오증은 확고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생겨나는 혐오증이다. 그렇게 스웨덴 스스로는 자신의 정체성이 고정적이고 불변적이라 생각해서 외국인들을 규정하고 혐오하는데 과연 정체성이란 그런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는 바로 이 소설을 통해서 보여준다. 무엇보다 호프만을 통해서 말이다. 그가 경계 위에 서 있는 자로서 자신의 연기와 진짜 정체성을 구별하기가 혼란스러웠듯이 그렇게 정체성이란 것도 알고보면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의도와 의지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존재임을 보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두 콤비가 경계에 서 있는 자를 소설의 핵심으로 가져온 이유였다.

 

   한 마디로 정체성이란 우연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스웨덴은 그것을 마치 운명적인 것 처럼 받들고 그로 인해 외국인에게 불합리한 혐오를 드러내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는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 편, 이렇게 정체성을 가변적으로 보는 것은 무엇보다 헬스트럼 작가 자신과 관계된 것이기도 하다. 그 역시도 범죄자란 정체성에서 새로이 작가의 정체성으로 탈바꿈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지금처럼 작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주위의 사람들이 정체성을 하나로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상황에 따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변모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주었던 것도 분명 한 몫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만연된 전과자에 대한 편견이 거기에도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다면 아무래도 작가로 성장하기엔 꽤 부담으로 작용했을테니까 말이다. 즉 우리는 여기서 헬스트럼 자체가 증명하는 바, 그러한 정체성이란 게 확고하다는 관념이 또한 존재가 지닐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 마저 사전에 압살할 우려가 있음을 본다. 바로 여기서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가 왜 이토록 외국인 혐오증을 문제시 하는가 역시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새로이 돋아날 무수한 가능성들이 오로지 정체성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인해 속절없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임을 말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책의 후반, 국가가 호프만이 위협적인 존재가 되자 행하는 책략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가급적 내용 노출을 막기 위해 이쯤에서 결론으로 서둘러 가자면, '쓰리 세컨즈'는 말하자면 이런 소설이다. 스티그 라르손의 뒤를 따라서 여전히 점증되고 있는 스웨덴 사회에 만연된 외국인 혐오증에 대해 그 혐오증의 기반이 되는 '정체성'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볼 여지를 줌으로써 오히려 외국인의 유입으로 더 다양해지고 풍성해질 가능성들을 지켜주려고 하는...  그 타자와 타자가 일으킬 변화에 대한 포용이 바로 '쓰리 세컨즈'가 가진 핵심이다.

 

  그렇게, '쓰리 세컨즈'는 이를테면 'ONE COIN CLEAR' 하듯이 잡은 순간 내처 끝까지 읽게 될 정도로 재미있는 스릴러이지만 결국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 남게 되는 건 재미 보다 더 한 '나'를 돌아봄이다. 어쩌면 정말 호프만이 그랬듯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으로 알고 있는 것은 그저 하나의 연기에 불과할 지 모른다. 사실 우리에겐 '~답다'라는 말에서 바로 드러나듯, 역할에 따라 걸맞게 행동해야 하는 정형화된 행위 형식들이 참으로 즐비하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는 그저 우리의 본성과는 상관없이 그 정형화된 행위 형식들을 답습할 뿐인데도 그것을 '진짜 나'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는 바로 거기로 나를 데려간다. 타인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사실은 전제하고 있는 것... 내가 여기고 있는 '진짜 나'가 '정말 나'인지 알아보게 만드는 경계의 장소로 말이다.

  그 균열의 지점에서 문득 그 틈새로 지나가는 바람이 되는 것...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가 나에게 남긴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가변과 유동으로 넘쳐나는 존재인 바람...

 

  아마도 그래서 마지막이 그렇게 끝났을 것이다.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보자는 말로...

  그렇게 늘 다른 날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있는 존재는 바람 밖에는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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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03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콩 느와르가 한때 엄청났지요.. 그 허무함이라니.
그런데 그걸 홍콩의 상황과 연결시켜 생각해보지 못 했습니다. 제가 그런 방면은 워낙 잘 모르거든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요즘 자주 보이는 북유럽, 스웨덴의 소설의 배경에 대해서도 궁금해지네요. 워낙 그쪽 나라들의 역사는 몰라서, <밀레니엄>을 읽을 때도 재미있지만 묘한 괴리감을 느꼈었거든요. 그 이유가 헤르메스님의 페이퍼를 읽으니 명확해지네요.

진짜 나, 정체성, 괴리감... 아마 내 안의 나는 알고 있을겁니다.
그런데 벗어날 수 없다면,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보자고 해야겠네요. 좀 쓸쓸하네요.. ^^

ICE-9 2012-04-05 02:55   좋아요 0 | URL
묘하게도 이 벗어남의 얘기를 온다 리쿠의 '달의 뒷면'을 통해서 또 이어가게 되었어요. 2001년에 나온 이 작품은 '삼월은 붉은 구렁'과 이어지면서 또 책을 통해 기존의 나를 벗어나 타자를 품은 보다 확장된 자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더군요. 해서 반가웠고 흥미로웠습니다. 뤼시앙 골드만이라는 프랑스 학자가 창안했다고 해야할까요 '문학 사회학'이라고 있는데 그 견해가 주로 사회 정치적 관점으로 문학을 해석하는 대표적인 입장인데 저 역시 거기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서 그렇게 자주 해석을 하는 것 같아요. 영화도 그렇구요.^ ^

홍콩 느와르는 우리나라엔 잘 소개가 안되어서 그렇지 아직은 꽤 번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두기붕 감독이 있지요. 미션, 흑사회 2부작등은 두 말할 것도 없는 걸작이고 그 외에도 다른 좋은 감독들이 아직 좋은 느와르를 종종 만들어내고 있더군요^ ^

재는재로 2012-04-04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느와르 하면 주윤발의 영웅 본색이 대표적이 었죠 지금은 그때의 영광은 사라지고
어린시절 주윤발의 이수시개 묻모습이 멋있었는데 지금은 다 추억이죠 킬러면서도 따뜻한
감성을 가진 이중적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네요

ICE-9 2012-04-05 02:56   좋아요 0 | URL
아마도 남자라면 영웅본색이나 첩혈쌍웅의 매력을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물질이 아닌, 타산이 아닌 오로지 의리라는 인간적인 가치에 전적으로 모든 걸 거는 거... 그 협객스러움. 저는 그게 정말 확 다가오더군요.^ ^
재는재로님 이렇게 방문해주시고 답글까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테크놀로지의 세계 플러스 체험편 세트 - 전2권 테크놀로지의 세계
체험 활동을 통한 기술 교육 연구 모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2년 3월
품절


요즘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정말 빠른 것 같다.불과 얼마전만 하더라도 휴대폰은 그저 통화만 가능했었는데 지금은 온갖 것을 다 할수도 있고 말이다. 격세지감을 느끼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데 그렇게 발전하는 기술을 보노라니 정말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문이 생겼을 때 쉽고 빠르게 여러가지 테크놀로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 바로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이 기획한 '테크놀로지의 세계'다. 그런데 이러한 테크놀로지에 대한 지식들은 그냥 보는 것 보다는 실제 만들어보았을 때 더 머리에 쏙쏙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 진화하고 있는 테크놀로지들을 실제로 만들어보면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그게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의 세계 플러스, 체험편'이다.

이 책은 '체험활동을 위한 기술교육연구모임'이 지었는데 말 그래도 현재 일상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들을 선별하여 그 기술들이 어떤 원리에 의해서 작동되는지 그것을 직접 만들어 봄으로써 느끼게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책은 청소년용으로 만들어졌지만 무섭게 변하는 세상에서 조금이나마 시대를 따라잡으려 현재의 테크놀로지들을 살펴보고 싶은 어른들에게도 아주 유용하다. 더구나 직접 만들어보는 재미까지 있기 때문에 여가활동으로 즐길 수도 있다. 사실 나도 어릴 때 부터 공작하는 걸 좋아해서 그런 기술들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무엇보다 직접 그 테크놀로지들을 체험하도록 하는게 목적이므로 책의 내용은 거기에 맞추어져 있다.

책을 펴면 이 책에 나오는 각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 기본 구성을 밝혀주는 글 부터 만나게 된다


그 각각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는 내가 가장 궁금하게 여겼던 것이기도 한 터치스크린 편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그렇게 터치스크린으로 넘어가면,


먼저, 일상의 어떤 사소한 어려움들이 터치스크린을 만들게 하였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뒤이어지는 '어떻게 풀어갈까?' 란에서 이렇게 터치 스크린의 작동 원리가 나타난다


그렇게 동작 원리들을 이애하고 나면 드디어 직접 그것을 만들어 볼 수 있는 '만들어 보자'란이 나타나게 된다.
만드는 재료와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게 되어 있다.보다 손쉽게 체험으로 다가가게 하기 위한 배려가 엿보인다.




만들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런 과정만 보아도 두근두근한다. 아, 나도 빨리 만들어 봐야지!





뒤이어 이렇게 그것을 좀 더 다르게 응용할 수 있는 방법들이 나와서 자신만의 창의적 방식을 떠올릴 수 있도록 유도한다.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기술에 대한 특허 자료들.

실제 책에 실린 테크놀로지들이 어떻게 특허를 받았는지가 나와 있어서 흥미로웠다.




책만 보고 따라하기 힘든 이들을 위하여 직접 보고 따라할 수 있는 체험활동 동영상까지 부록으로 들어있었다.

얼마전 EBS로 유럽의 교육 현장을 보니 우리나라와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아직 국영수 중심의 여전히 고리타분한 커리큘럼이지만 지금 유럽은 언어나 수리 교육 보다 목공이나 패션, 전자기기 제작이나 시각디자인 같은 실제적인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커리큘럼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교육의 현장은 바뀌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제 다가올 세상은 오로지 개인의 창의성이 중시되는 사회이기에 거기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여전히 문제 풀기와 암기에 좌지우지되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 현장이 왠지 좀 한심하게 여겨졌다. 아이들의 각기 다른 개성을 모두 국영수로 획일적으로 만드는 것 역시 그랬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런 책들이 좀 반갑다. 더구나 직접 체험하게 함으로써 이러한 기술들이 먼 이야기가 아니라 얼마든지 자신의 이야기로 바뀔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니 더 그렇다. 보다 이런식으로 실제적 기술을 느끼고 익힐 수 있는 책들이 많아서 여전히 국영수에 창의적 뇌세포들이 탈색되어 가는 아이들을 구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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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01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리뷰 읽으며 감탄을 연거푸 내뱉었습니다.
제가 여지껏 본 포토리뷰 중에서 가장 정감가고, 이해도 잘되고, 정성도 듬뿍 담겨있고,
매력도 있고, 글발도 좋은 글이군요... ㅋㅋㅋ

ICE-9 2012-04-02 23:24   좋아요 0 | URL
와! 이렇게 좋은 말씀을!! 소이진님 정말 감사드려요^ ^
사실 주말에 좀 한가해서 저 나름대로 재미있게 한 번 즐겨보려고 이렇게 리뷰를 한번 써 봤습니다. 그냥 제 기분에 취해서 한 것이라 행여 잘못 비치지는 않을까 했는데 소이진님이 이리 말씀해주시니 정말 기분이 좋군요^ ^
 
[달리의 고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달리의 고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책을 읽는 이에게 있어 작가의 마음이 마치 손에 잡힐 듯 다가올 때 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싶다. 무모함을 약간 가미해서 말하자면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내겐 그런 작가다. 결정적 계기는 지난 번 '주홍색 연구'를 읽었을 때였다. 중간쯤 이르렀을 때 갑자기 눈이 열리는 듯 하면서 이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이 선명히 각인되는 경험을 했었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짜릿한 경험이었고(레이먼드 카버 때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은 있지만) 그래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들의 의미. 특히나 히무라 시리즈의 경우에 있어서는.

 

 단순하게 말해, 이것들은 하나의 대답과도 같다. 그러니까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그 때 그 때마다 자신이 천착하고 있는 본격 추리물에 대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주홍색 연구'는 자신이 지향하는 본격 추리물이 가졌으면 하는 가장 이상적 형태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 소설은 자신의 본격 추리물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탐구였고 그 탐구 끝에 나온 대답이 바로 '타인의 구원을 위한 기도로서의 본격 추리'였다. 이것은 히무라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 '달리의 고치' 역시도 마찬가지다. 이 역시 아리스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이다. '아리스 자신에게 있어 본격 추리란 과연 무엇인가?'가 바로 그 질문이며 그 탐색의 과정이 바로 '달리의 고치'인 것이다.

 

 

 

 말하자면 아리스의 작품이란 선종에서 종종 깨달음을 얻기 위해 던지는 화두와도 같다. 그의 작품은 이를테면 하나의 화두에서 시작하여 묵상을 하고 그 결론을 해결편처럼 내어놓는 형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화두처럼 던져진 질문.

 아리스에게 본격 추리란 과연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바로 '달리의 고치'인 것이다.

 

 달리의 고치는 사건이 일어난 장소다. 이 고치란 달리를 흠모하여 외모마저도 달리 처럼 꾸미고 사는 쥬얼리 기업체 사장이 명상을 위한 장소로 특별히 고안된 기계장치다. 즉 고치 처럼 은둔해서 조용히 개인의 내면 속으로 침잠할 수 있는 기계란 뜻이다. 여기서 바로 드러나듯이 즉 달리의 고치란 도피처의 또 다른 말이다. 이렇게 달리의 고치가 가지는 의미가 파악이 되면 소설 내내 바로 이와 같은 도피처를 뜻하는 것들이 참 많이 나옴을 우리는 보게 된다.

 

 먼저, 쥬얼리가 그렇다. 거품 경제의 호황을 타고 번성하게 된 쥬얼리 산업에 대해 탐정역의 히무라는 이렇게 말한다.

 

 "고도 성장기에 들어서 귀금속이 대중화되자 다른 상품들 처럼 체인점이 출현하게 되었지. 대량 매입 대량 판매에 의한 대중 판매지. (..) 매장 문턱이 낮아지면서 자기 취향의 물건을 예산에 맞춰 자유롭게 고를 수 있게 되었어. 79년 닛케이 신문에서 조사한 전문점 랭킹의 보석, 시계, 안경 전문점 부문에서는 귀금속 체인이 상위를 차지했어(p.85)"

 

 바로 이 체인점의 호황 덕분에 살해당한 사장은 막대한 부를 거머쥐게 된다. 그런데 히무라 말에서 드러나듯이 고도성장기에 있어서 귀금속은 일종의 도피처였다. 고도 성장에 따라 당시 일본인들은 조직 속의 한 개인으로 점점 왜소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럴 때 귀금속 체인점은 좋은 유혹이 되었다. 왜냐하면 체인점이 존재하기 전까지 귀금속이란 오로지 부유한 자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전문점에서만 판매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턱이 낮아진 체인점은 일반인들도 귀금속을 얼마든지 살 수 있게 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마치 부유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고양시켜줄 수 있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점점 왜소해지는 자신을 잊어버릴 수 있었고 때문에 귀금속 체인점은 하나의 도피처가 되었다. 그러므로 살해당한 사장이 자신의 개인적인 도피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설정이다. 그의 막대한 재산이 모두 사람들의 도피처에 대한 염원을 자양분으로 하여 무럭무럭 커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피처는 죽은 사장 뿐만 아니라 그 용의자가 되는 자들에게까지 존재한다. 스포일러상 자세히 말할 수는 없으니 뭉떵거리듯 말하자면 어떤 이는 사랑을 또 어떤 이는 점치는 것을 그리고 또 어떤 이는 다른 이성의 모습을 하는 것을 도피처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 속 등장인물 저마다는 모두 각자의 도피처를 가진다. 그런데 그렇게 도피처를 가지게 된 연유는 다 비슷하다. 일본인들이 귀금속 체인점을 도피처로 삼았던 이유가 사회 안에서 보다 궁극적으로는 타자들 앞에서 왜소해지는 자신 때문이었듯이 등장인물들 역시도 타자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도피처를 가지는 것이다. 즉, 그들의 도피처란 바로 불안하고 두려운 타자들을 피해 숨어들 수 있는 온전한 자신만의 세계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도피처의 총체적인 성격은 바로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분신인 소설 속 작가 아리스에게 집약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지금 작가 아리스가 이 작품에서 던지고 있는 화두. 자신에게 본격 추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나오게 된다.

 

 그것은 물론 도피처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어쩌다 본격 추리를 쓰게 되었는지 그 내력을 알려준다. 이것이 바로 '주홍색 연구'에서 스쳐가듯 나왔던 그가 중3 때 열정적으로 한 편의 추리소설을 써내려간 내막이다. 또한 이것은 현실의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진짜 일어났던 일이기도 하므로 그가 어쩌다 본격 추리에 천착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본격 추리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드러나게 되는데 무엇보다 그가 본격 추리에 매달리게 된 원인엔 타인으로 부터의 실연이 있었다. 즉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역시도 '본격 추리'라는 고치를 가지게 된 연유가 다른 이들과 그리 다를바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 그가 가지고 있는 본격 추리의 의미란 더욱 명확해진다. 바로 자신의 도피처라는 사실이다. 그는 그것을 내내 강조하기 위하여 등장인물 모두에게 저마다의 도피처마저 가져다 준 것이다.

 

  하지만 화두란 늘 그렇듯이 현상의 확인이 아니라 탈출을 위한 출발이다. 즉 해답이란 언제나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에게 본격 추리가 도피처란 대답은 이제 그로 부터 벗어나겠다라는 의미와도 같다. 그가 그런 자세로 이 소설에 임하고 있음은 우리가 '주홍색 연구'에서 그가 찾아낸 결론으로도 확인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히무라의 사건 해결을 다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아리스는 본격 추리를 지향하고 있지만 그 해결에 거는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트릭 풀기가 아닌 것이다. 그건 차라리 그가 이 소설을 통해 내내 탐색한 과정의 최종 해답과도 같은 것이다.

 

  스포일러상 해결편을 말할 수 없으니 여기서 조금은 에둘러갈 필요가 있다. 해결을 통해 아리스가 가지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보다 왜 제목을 하필이면 달리의 고치로 했느냐 아니 보다 궁극적으로는 왜 달리를 끌여들었느냐를 통해 간접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래, 왜 달리인가? 아리스는 왜 피해자인 사장을 그토록 달리를 흠모하는 인물로  설정했을까? 그건 소설에서도 바로 나오지만 달리가 자신의 연인 갈라에게 행했던 그 사랑 때문이다.

 

  소설은 달리가 얼마나 갈라를 사랑했는가를 말해준다. 하지만 정작 갈라는 달리를 그저 이용했을 뿐이라는 소문도 있다고 히무라는 말한다.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그답게 참으로 냉정한 대답이다. 하지만 갈라가 그러거나 말거나 달리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갈라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갈라가 자신에게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그 사랑에만 충실했다. 전적인 내어줌. 그것이 바로 달리가 갈라에게 행한 사랑의 본질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아리스는 '달리'를 가져온 것이다. 이는 도피처가 오로지 타자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겼다는 걸 생각하면 더 분명해진다. 달리는 타자 때문에 불안을 느끼거나 타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였고 그래서 도피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달리 안에서 도피처에 대한 욕망으로 부를 쌓아올린 사장이 명상의 장소로 사용한다는 건 정말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건 그대로 본격 추리에 대해 바라는 아리스의 모습과 그대로 판박이다. 즉 그 사장이 바로 아리스인 것이다. 그 사장이 달리의 전적인 내어줌에서 힘을 얻고자 했듯이 아리스 역시 자신의 본격 추리가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타인에게 전적으로 내어줄 수 있어서 이제는 도피처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과 타인들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말이다. 에필로그 처럼 붙여진 마지막 장면은 정확히 바로 이것을 나타내고 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누누히 말하지만 그냥 단순한 본격 추리 작가가 아니다. 그는 정말 본격 추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작가다. 더구나 본격 추리 역시 작가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높은 문학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일종의 긍지까지 가지고서 생각하는 작가다. '달리의 고치'는 그러한 그의 열정 그리고 자부심이 짙게 투영된 작품이다. 한 마디로 미스터리라기 보다는 작가 아리스의 신념의 산물이다. ('달리의 고치'에서 이루어진 플롯이나 디테일의 치밀한 설정만 봐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 리뷰를 통해 그것을 많이 드러내려 했으나 스포일러의 한계상 그리고 능력 부족으로 원하는 만큼 드러내지 못했음을 참으로 아쉽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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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 - 彩虹 : 무지개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1. 달라도 너무 다른 그녀, 봉빈...

 

  솔직히 놀라웠습니다.

  인물의 재해석이야 문학이 늘 해오던 것입니다만 소설 '채홍'이 보여준 문학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새로운 해석은 그동안의 굳어졌던 역사적 인식을 단번에 무너뜨릴 만큼 압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문학이 이렇게도 현실을 능가할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아마도 이 소설 이전에 이미 '봉빈'을 알고 계시던 분들이라면 저와 비슷한 감회를 가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네, 물론 저도 이 소설의 주인공 '봉빈'을 예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대학 다닐 때, 역사를 좋아했던 저는 전공도 아니면서 '조선왕조실록강해'를 수강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조선 역사에 처음 공식적으로 기록된 레즈비언이라면서 교수님이 바로 이 '봉빈'을 소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봉빈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그야말로 참담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인물은 뛰어났지만 성격이 직선적이고 다혈질인지라 조용한 장차 문종이 되는 세자와는 살가운 관계가 될 수 없었고 그런 문종이 후실들을 더 찾고 그 중 하나가 결국 임신을 하게 되자 질투심에 거짓 임신을 꾸며대질 않나 틈날 때 마다 몰래 외간 남자를 엿보거나 대낮부터 술에 취해 주정을 일삼지 않나 정말 장차 조선의 국모가 될 세자빈이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생각마저 들더군요. 봉빈이 결국 폐출되어버린 계기가 된 동성애를 뜻하는 '대식(對食)'도 정말 그런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두 번이나 폐출시키려다 보니 마땅한 구실이 없어 혹시 조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소설 '채홍'에서도 직접 나오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당시 궁내에서 궁녀들끼리의 '대식'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고 하니까요. 저의 뇌리 속에 그렇게 박혀있던 봉빈이었기에 사실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 폐출되어 사가로 돌아온 이가 설마 그 '봉빈'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소설 '채홍'에 처음 등장하는 봉빈은 그야말로 그 때 그녀가 직접 만져보기도 했던 가을 국화 처럼 차분하고 단아해 보이기만 했으니까요. 그렇게 늘 저의 기억 속에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같은 인상으로만 남아있던 봉빈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실록에서 보여준 성군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는 세종과 조용하고 어질어서 준비된 임금이라는 칭송까지 받았던 세자에게 그야말로 가해자였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만 소설에서 보여지는 것은 자신을 단죄하려 드는 오라버니들 앞에서 절규처럼 쏟아내었던 그녀의 말 그대로 본심을 몰라주는 무정한 세상으로부터 온갖 멸시와 박해를 받은 피해자로서의 모습뿐이었으니까요.

 

  저는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듯 했습니다. 그 다름이 참으로 인상 깊었고 그 다름의 연유가 정말로 궁금했기에 저는 얼른 뒷 페이지를 넘겨 봉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깨달았습니다. 김별아 작가가 그렇게 해야 했던 이유를... 그리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을... 그 모든 게 사실 우리 내부에 간직된 우리의 선입관을 깨뜨리려는 그녀 자신의 호소라는 사실을 말이죠.

 

 

  2. '채홍'의 '봉빈'이 달라야 했던 이유...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선입관이 있습니다.

  선입관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데 때로는 역사적 사실로 인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할 때에만 정당성을 갖습니다만 그것에 대해 그리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는듯 합니다. 근대 독일의 역사학자 딜타이 이후로 역사란 진짜 있는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입맛대로 거짓을 지어내거나 사실을 바꿔서 기록할 수도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죠. 네, 지금에서는 역사가 순수한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입니다. 시쳇말로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듯이 말이죠. 그렇게 승자의 입장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게 바로 역사이고 오늘 날 그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패자들은 때로는 삭제로 지워지는 것이고 때로는 왜곡으로 본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이죠.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알릴 목소리를 잃게 됩니다. 자고로 이것이 역사 속에서 여성이나 동성애자 등 모든 '약자'이며 '소수자'들이 겪어야 했던 운명이었습니다. 때문에 지금 역사학계에서는 지금까지 기술된 역사가 아닌 공식 문헌이나 문학, 혹은 민담 그 뿐만 아니라 세금 계산서나 가게 장부를 비롯한 온갖 잡다한 자료들을 통하여 공식적 역사가 지워버리거나 왜곡한 목소리들을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금 발굴해 내는 데 오히려 더 치중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바로 이 소설, 김별아 작가의 '채홍'도 문학이지만 바로 그러한 흐름 가운데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김별아 작가가 실록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봉빈을 빚은 이유기도 합니다.

 

 

  2 - 1.  도입부에서 드러나는 다름의 의도...

 

 그녀의 이러한 동기는 소설 도입부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소설의 도입부는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기에 흥미를 자아냅니다. 보통 구성상의 특이함은 그대로 작가의 의도인 경우가 많지요. 때문에 '채홍' 소설의 도입부에는 그 자체로서 드러내고 싶은 작가의 말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특이한 것이란 정작 주인공인 봉빈이 등장할 때 까지 우리는 총 세 단계를 지나가야 되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사가로 돌아왔을 때 봉빈을 바라보는 오라버니의 마음에서 봉빈의 주변 인물이라 할 만한 박나인과 결국 그녀를 왕에게 고발하는 임무를 맡는 김태감을 거쳐서야 비로소 봉빈에게 이르게 되는데요. 왜 작가는 이렇게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만들었을까요? 바로 거기에 김별아 작가가 실록에 구애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만의 시각으로 봉빈을 빚은 이유가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 세 단계의 이야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여기에 공통점이 있음이 분명 보게 됩니다. 바로 그 공통점이 김별아 작가가 그리했던 이유를 거꾸로 밝혀줄 터인데 그 공통점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먼저 봉빈이 폐출되어 사가로 돌아왔을 때 오라버니들이 보인 한결같은 반응에서나 그 뒤 '숨어있는 꽃'에 나오는 '열녀' 혹은 '정절'이라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여성의 욕망을 자신의 뜻대로 길들이기 위해 만든 관념을 의식 깊숙이 내재화시키고 사는 박나인( 또한 이 박나인은 흉금을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봉빈과는 얼마나 정반대의 인물입니까? 이러한 극단적인 대조의 모습에서 우리는 왜 김별아 작가가 박나인을 두 번째로 등장하게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의 모습에서나 마지막으로 다음 '불의 멀미'에서 내시라서 몸으로는 아내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아내가 행여 그 때문에 바람나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 때문에 결국 지속적인 폭력으로 자기 아내의 욕망을 길들이려 드는(이것은 그대로 '몸'은 없고 오로지 '말'로써 여성들에게 강압과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가부장적 유교적 관념을 그대로 은유한 것이기도 합니다.) 김태감의 모습에서 우리가 공히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역사의 지배자라 할 수 있는 남성들은 여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기 보단 먼저 지배부터 하려들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끔 길들이려 하는데 그것은 모두 여성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공통점에서 김별아 작가가 왜 에둘러 갔는가에 대한 그 이유가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실록이 쓰여 진 당시에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분명히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관계란 게 다름 아니라 바로 두려움에서 비롯된 일방적 강압과 폭력으로 점철된 관계였다는 것을 말이죠. 바로 이러한 관계 위에서 공식 기록이라며 등장한 '실록'이었기 때문에 김별아 작가는 실록의 봉빈을 그대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김태감에서 잘 보여지듯, 남성들은 여성들이 두려우면 두려울 수록 오히려 자기가 아니라 여성 탓을 하며 그렇게 더 '괴물적'인 것으로 만들어 자꾸만 더 가학적이 되는 폭력 행사를 스스로 정당화시키기 일쑤이니까요. 그러니 김별아 작가는 실록 역시도 똑같은 색안경을 쓰고 봉빈을 바라보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해서 실록에서는 '준비된 임금'이라며 칭송해 마지않는 문종 또한 이제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김별아 작가에게는 한낱 가부장적인 유교적 관념에 완전히 세뇌되어버려 여성과는 제대로 진솔한 관계조차 맺을 수 없는 '반편'이며 뼛속까지 '법도'에 물든 나머지 융통성이라든가 인간미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정해진 매뉴얼 대로만 움직이는 '법도 기계' 이상의 존재는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동안 문종을 능력으로나 인품으로나 그만큼 준비된 임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명 하는 바람에 자신의 아들 단종을 비극적으로 죽게 만든 애석한 임금으로만 여기고 있었는데요 소설'채홍'을 읽으면서는 '과연 이 소설이 그려내는 만큼의 강박증과 소심증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단종의 비극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만큼 김별아 작가가 그려내는 문종 또한 아주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3. 다르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연유...

 

 그래서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 점철된 일방적 강압과 폭력으로 지워지고 왜곡된 봉빈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려 한다면 실록에 기록된 것에 좌우되지 않고 단순한 사실만을 취하여 그것을 지금까지의 남성만의 관점이 아닌 온전히 여성만의 관점으로 밑바닥부터 다시 다져 새롭게 형상화해야 했을 터이니까요.

 

 결국 역사란 기억의 문제입니다.

 역사란 따지고 보면 훗날 전해주고 싶은 기억만 기록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선별의 주체가 오로지 남성뿐이었다는 것이죠. 그것도 여성을 대등한 존재로 여기고 이해하려는 남성이 아니라 '열녀'나 '칠거지악' 같은 것으로 여성이란 무조건 남성들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만 생각하는 남성들로 말이죠. 그래서 마땅히 이 김별아 작가가 소설 '채홍'에서 했던 대로 여성 자신의 목소리로 여성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편협한 남성들의 손에 의해 지워지고 왜곡된 여성들에 대한 기억들을 다시금 되살리고 온전한 형태로 복원하기 위해서 는 말이죠. 때문에 '채홍' 후반부에 이루어지는 문종과 봉빈으로 대표되는 '법도'라는 이념과 '사랑'이라는 개인의 욕망간의 대립은 차라리 그 목소리들을 되찾기 위한 투쟁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도가 그대로 체화된 인물인 세자 ' 문종'은 그대로 이념이 가진 특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일단 봉빈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무심함에서 오는 서운한 감정의 표출도 법도로 마땅히 교정해야 할 시기 많은 아낙네의 잔소리로 여길 뿐입니다. 그래서 들으려 하지 않고 오로지 강요만 합니다. 끝내 듣지 않으면 그냥 피하고 무시해 버립니다. 이건 그대로 법도로 대표되어지는 이념의 행태이기도 합니다. 이념도 들으려는 귀가 없습니다. 오로지 타인을 그 뜻대로 맞추는 말을 하는 '입'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오로지 자기만 진리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잘못을 책하면 정작 잘못을 범하고 모자라는 것은 당신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고 역정부터 냅니다. 그리고 이념은 자신이 아는 만큼이 세계의 전부이기 때문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두려워하고 피하려듭니다. 문종 역시도 그러했습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토로하는 봉빈은 문종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여성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기에 봉빈 앞에 서면 왠지 스스로 왜소해짐을 느꼈고 그래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렇게 이념은 자신의 통제를 거부하는 개인의 욕망 앞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이념은 더욱 더 개인의 욕망을 통제하려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태감이 아내에게 지속적으로 가했던 폭행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게 한계에 이르면 이제는 그냥 무시해 버리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문종은 봉빈에게로 가는 발길을 끊어버리죠.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민족이다'라는 이념에 빠져 유태인의 생명을 깡그리 무시했던 나치와도 같이 말입니다. 문종의 모르쇠와 나치의 학살. 이것을 같이 보는 것은 그리 지나친 비유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이념의 본성엔 다른 것에 대한 포용이나 이해의 노력이 없습니다. 그렇게 다른 자란 얼마든지 쉽게 제거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문종이 봉빈이 폐출될 때 쉽게 인정하는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결국은 이런 면에서 문종이 봉빈을 바라보는 것이나 나치가 유태인을 바라보는 것은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약자나 소수의 목소리들을 그리도 쉽게 지울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개인의 욕망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게 이념을 향해 나를 인정해 달라는 욕망인 것은 아닙니다. 그건 전체에로의 합일을 꿈꾸지 않습니다. 이념 자체가 전체성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념을 거부하는 개인의 욕망이란 전체성에 매몰되지 않는 그 개인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것은 그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냥 날 그 무엇도 아닌 고유한 나 자신으로 보아달라는 그런 욕망입니다. 봉빈이 문종에게 드러낸 것도 그러하지 않았던가요? 법도에서 움직이는 세자빈이 아닌 문종을 향한 애틋한 감정으로 괴로워하는 원래 이름인 '란'이라는 자기 자체를 보아달라는 것이 아니었던가요? 그래서 김별아 작가는 점점 '사랑'을 강조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엔 조선의 유교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여성과의 동성애 마저 가져온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역사적 사실이었다 해도 분명 김별아 작가는 남성 중심의 당시의 가치관을 가장 전복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서라도 그 사랑을 가져와야만 했을 것입니다. 이념으로는 도저히 포획될 수 없는 개인 욕망의 고유성과 거기에 그대로 빗대어질 남성들 가치에 종속되지 않는 온전히 여성들만의 고유한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죠. 대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표적인 여성들이란 어떤 존재들입니까? 흔히 우리들은 가장 여성다운 인물로 신사임당을 꼽곤 하지요. 하지만 그 신사임당은 알고 보면 남성 중심의 유교적 관념이 원하는 바를 그대로 그려낸 듯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온전한 여성성의 대표일지도 몰라도 여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남성들이 뒤집어씌운 굴레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포기해야만 했던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김별아 작가가 따지고 보면 실록에서 자신의 욕망에 가장 충실했던 '봉빈'을, 거기다 조선의 문화로서는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여성들만의 동성애를 가져오는 것은 지금까지의 남성 중심의 시각이 아닌 이제 여성중심의 시각으로 다시금 새롭게 여성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하나의 선언'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것은 지금 역사학자들이 거세게 하고 있는 '공식적'이란 미명 하에 지워지고 왜곡되어진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들을 되찾아주는 것과 보조를 맞추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만 '채홍'이란 이 소설은 사랑을 강조하는 단순한 로맨스 소설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그토록 강조되는 사랑이란 실은 전혀 다르게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남성들에 의해 왜곡된 여성성이 아니라 여성 고유의 시선과 존재로서 충만한 여성성에 대한 상징과 같은 것으로 말이죠. 때문에 소설 '채홍'의 마지막에 유언처럼 남겨진 봉빈의 이 마지막 말,

 

'한 가지만은 분명해요. 행여 그 때도 사랑이 죄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사랑으로 죽으리라는 것을.(p.319)'

 이 또한 그 궁극적 의미에 있어서는 고유하고도 진정한 여성성을 간직하리라는 선언이라 할 것입니다.

 

 

  4. 이제 전혀 새롭게 쓰여지는 여성 중심의 역사를 향하여...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로서의 봉빈

 

  김별아 작가의 소설 '채홍'이 정말 놀라운 것은(이 글이 '놀라웠습니다.'로 시작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러 이제 다시 소설이 빚어낸 봉빈의 모습을 살펴보면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는 폐출될 수밖에 없었던 봉빈의 모든 행위들이 이렇게 다시금 되찾으려 하는 여성 중심의 시각에서 보면 그 모든 게, 그 잃어버린 목소리들을 '문학만이 기억할 수 있다.'고 김별아 작가가 스스로 말했듯이, 온전히 기억하기 위한 행위로 해석된다는 점입니다. 원래 여성은 기억의 상징이었습니다. 기억을 뜻하는 영어 Memory의 연원이 되는 기억의 신인 '므네모시네(Mnemosyne)도 여신이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으로 끌어들인 대표적 작가이기도 합니다. '햄릿'에서의 햄릿 어머니처럼 세익스피의 연극 대부분에서 여성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숨겨진 진실들을 기억하는 존재들로 나오죠. 다시금 새롭게 소설 속에서 묘사되어진 봉빈의 행태들을 살펴보면 봉빈은 마치 이 므네모시네의 화신과도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봉빈이 술을 벗하게 되는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김별아 작가는 주의 깊게도 봉빈이 남성 사회에 자신을 편입시키려는 모든 노력들이 좌절되었을 때 비로소 술을 마시게 합니다. 바로 거짓 임신이 그것이죠. 문종의 관심을 가지려면 오로지 임신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와 같은 징후가 있자 무턱대고 믿어버린 것이 화근이었습니다만(그러니 절대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과실에 의한 착오였을 뿐이죠.) 그건 그녀가 문종으로 대표되는 남성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자 여성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나마 남아있던 미련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것은 상상임신으로 판명 나고 봉빈은 교활한 사기꾼이라는 오명 속에 고립됩니다만 사실 그 고유의 여성성에서 보자면 이것으로 마지막 남은 미련마저 없앨 수 있는 계기가 된 셈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봉빈은 그 때 가서야 술을 마셨습니다. '진실할수록 추하고 솔직할수록 퇴폐적인'이라는 참으로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장의 첫머리에 봉빈이 술에 대한 느낌을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 물로 만들어진 물건인데 요상키도 하다. (...) 너절하고 귀접스런 기억들이 씻긴 듯 지워지며 초라한 나는 내가 아닌 무엇으로 사라진다.(p.184)'

 

  여기서 너절하고 귀접스런 기억들이란 남성 사회에 억지로 스스로를 편입시키려던 기억들이며 '초라한 나'는 그러했던 봉빈 자신을 뜻한다는 걸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 물들었던 기억과 자신이 이제 술로 인해 사라지고 다시금 되찾은 여성성의 자아로 그녀는 다시금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녀는 술이 목을 넘어갈 때 '홧홧한 자극만이 남았다'고 합니다. 그게 처음 술을 마실 때 그녀 기억의 전부였습니다. 여기서 감각이 등장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감각이란 오로지 자기 혼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감각만이 남았다는 것은 이제 그녀 자신을 지배하던 모든 이념이 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때부터 그녀가 조선의 모범적인 여성상으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파격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한 행보입니다. 그렇게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 있어서는 전복적으로만 보여 질 수밖에 없는 파격으로 고유한 여성성에로 탈주를 감행하는 것이며 그 기억을 다시금 써 가는 것입니다. 그녀의 술은 계속됩니다. 그런데 므네모시네 역시도 그렇습니다. 그 여신은 기억의 연못을 주관하고 있는데 그 물을 마시면 기억이 되살아난다고 하죠. 그렇게 봉빈의 술은 므네모시네의 물인 것입니다. 그렇게 술을 계속적으로 마신다는 것은 되찾은 고유의 여성성을 계속해서 되새긴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5. 당신을 향하여 부르짖는 초혼(招魂)

 

 소설의 제목인 '채홍(彩虹)'은 무지개를 뜻한다고 합니다. 김별아 작가는 왜 그걸 제목으로 택했는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무지개가 태양의 반대편에 뜨는 이치에서 비롯되었다. 왕이라는 태양이 빛나는 반대편에는 권력과 욕망과 사랑과 질투 등의 인간적인 감정들로 채색된 여인들의 무지개가 떴다. (p.322)'

 

 이제는 아셨겠지만 지금 저의 리뷰는 이 말을 조금 상세하고 길게 써 나간 것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김별아 작가의 말에서도 바로 드러나듯이 이 소설은 그저 한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아닙니다. 보다 근원적 의미에서 남성 중심의 역사에서 지워지거나 왜곡되어진 여성들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문학적으로 복원하려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페미니즘 소설입니다. 저는 이렇게 공식적인 역사 기록에 좌우되지 않고 온전히 그만의 시각으로 그것도 보다 확고한 주제 의식에 기반 해서 과감히 써 내려간 이 소설을 참으로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앞에서 저는 이 소설을 우리 내부에 던지는 하나의 호소라고 했습니다만 과거에 지워지고 왜곡되어진 존재들을 다시금 불러내 새롭고도 온전한 생명을 주려 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사실 '초혼(招魂)'에 더 가깝습니다. 당신이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그 '초혼'의 현장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왠지 절박하면서도 애타는 듯한 김별아 작가의 이 초혼을 듣게 된다면 당신은 아마도 이 세 가지를 깨달을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모두를 편견 없이 대해야 하고 그 모든 목소리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것을 위해서라는 세상 모두가 반대하는 편이라 해도 기꺼이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소설 '채홍'은 바로 이 세 가지를 위한 당신을 향한 부르짖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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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01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헤르메스님... 전에 제게 부끄러워서 리뷰를 못 올리겠노라 말씀하셨지요. 저는 그런 부끄러운 리뷰를 미친듯이 읽어내렸습니다. 그야말로 제가 부끄럽군요.
제가 <채홍>과 김별아 작가의 의도를 겉멋만 핥아낸것이라면 헤르메스님께서는 그녀의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소설을 이해하셨습니다. 저는 아무리 읽어내고자 해도 외면밖에는 읽어내리지 못하겠던데, 헤르메스님꼐서는 대단하신걸요.

이거이거... <채홍>으로 신간평가단 신청하려고 했더니 안되겠습니다. 쩝

ICE-9 2012-04-02 23:27   좋아요 0 | URL
사실 별 기대없이 읽었던 책이었는데 완전 '채홍'에게 반해버렸습니다. 저번에 라비니아 때도 그랬지만 이런 식의 여성성의 독창적 접근 저 완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인지 제가 느낀 것을 그대로 다 쏟아내보고자 했던거죠. 그래서 글은 대책없이 길어지고 또 장황하게 되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그동안 2기에 걸쳐 신간평가단을 했는데 그 짬밥으로 짐작하자면 소이진님은 소설 신간평가단 꼭 되실겁니다. 문제는 저죠 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