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맨]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 네스뵈, 노르웨이의 스릴러 작가인 그를 미국의 언론들은 스티그 라르손이 없는 지금 이제 노르딕 느와르의 왕이라 부른다.

사실 노르딕 느와르라는 명칭 자체도 스티그 라르손과 요 네스뵈 때문에 생겨난 것이기도 했다. 그만큼 영미 미스터리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해닝 만켈로 인해 전 세계에 관심을 불러 일으킨 노르딕 느와르에 있어서 진화의 한 극점으로 인정되었다. 깊이에 비해 속도감과 긴장이 떨어졌던(스티그 라르손 조차도!) 노르딕 느와르를 영미의 스릴러 못지 않게 늦출 수 없는 몰입도와 속도를 가져다 준 작가가 바로 요 네스뵈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긴 밤을 보내기 위한 소일거리론 괜찮지만 분주한 일상으로 짧은 밤을 보낼 수 밖에 없는 도시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닌가'란 평가 조차 들었던 노르딕 느와르에게 '스릴러의 새로운 바람'이라며 영미 언론의 높은 관심마저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단지 그것 뿐이었다면 '왕'이라는 칭호는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그 재미 만큼 깊이 역시 있기 때문이다. 요 네스뵈가 특히 그의 주력 무기라 할만한 해리 홀레 시리즈를 통해 그려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노르웨이라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허위'다. 그는 자신의 국가에 대해 단적으로 '조용한 사회'라고 부른 적이 있다. 그 '조용함'이란 말 그대로 차분하다거나 안정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말은 일종의 반어법이다. 조용할 수 없는 사회인데 조용하다는 그런 의미로 쓴 말이라는 것이다. 요 네스뵈는 우리가 노르웨이에 대해서 가지는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행복지수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라는 이미지를 여지 없이 파괴시킨다. 그가 그려내는 노르웨이는 특별하지 않다. 그야말로 자본주의 국가라면 다 가지고 있는 모든 부조리와 그로인한  첨예한 갈등들로 뒤범벅된 진흙탕인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그 모든 더러운 진창들을 순백의 눈으로 뒤덮듯,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 처럼 '조용한 사회'라고 스스로 치장하고 있으니 네스뵈는 그것을 비판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는 요 네스뵈의 최고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이 작품 '스노우 맨'에 있어서도 그대로 관통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겉으로 보이는 것 처럼 일부일처제가 아닙니다. 최근 스웨덴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들의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 정도가 자신이 아버지라고 믿거나 짐작하는 사람이 친부가 아니라고 합니다. 무려 20퍼센트나요! 다섯 명중 한 명 꼴이죠! 거짓된 삶을 사는 겁니다.(p.23)"

 

  주인공 해리 홀레는 라디오를 통해 이것을 듣는다. 그리고 바로 곰팡이를 제거하는 사람의 방문을 받는다. 그는 곰팡이 제거가 왜 필요한지 말한 뒤 이렇게 덧붙인다.

 "곰팡이와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바람에 병에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몇 년씩 시름시름 앓는데도 딱히 원인도 없고 다른 식구들은 멀쩡하니까 건강염려증 환자라는 핀잔만 듣죠. 그러다가 병균이 벽지와 플라스틱을 먹어치웁니다.(p.26)"

 

  이처럼 요 네스뵈가 그리고 있는 노르웨이의 모습은 여기서 확실히 드러난다. 노르웨이는 다섯 명 중의 하나가 보이는 것 처럼 진실하지 않은 거짓과 속임수의 삶을 살고 있는 나라이며 보이지 않는 곰팡이가 알게 모르게 집을 망치고 삶을 망치고 있는 나라라는 것을.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진실을 아예 몰랐을 수도 있고 그저 삶과 타협하기 위해 짐짓 모른척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선과 기만이 가져오는 것은 파멸 뿐이다. 내버려 둔 곰팡이가 집 전체를 망치고 삶을 끝장내 버리듯이... 해서 네스뵈는 곰팡이 제거자가 되기로 한다. 진실을 더이상 모르쇠하지 않고 만천하에 밝히기로 작정한 것이다. 해리 홀레는 바로 그것을 위해 태어났다. 노르웨이를 뒤덮은 위선과 기만의 곰팡이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네스뵈는 해리 홀레가 장차 곰팡이 제거자의 운명을 걸을 것이라는 걸 바로 다음의 곰팡이 제거자의 말로 분명히 선언한다.

 

  "저 혼자 일할 겁니다.(p.26)"

 

 

 

  노르딕 느와르에 있어서 탐정들은 모두 고독하다. 이것은 하나의 일반론이다. 해닝 만켈의 발란더도 스티그 라르손의 리스베트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경찰이라는 조직에 몸을 담고 있든 아예 해커라는 범법자이든 상관없다. 그들은 무조건 혼자다. 이건 물론 고독이라는 우수를 독자들에게 전해주기 위함이 아니다. 사실 그들에게 고독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고독은 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필연의 운명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싸워야 하는 것은 단순히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범죄란 사회가 은폐한 진실이 드러나는 계기일 뿐이다. 범죄란 사회가 이제 더이상 감출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다는 증표이며 때문에 결국 그들 고독한 탐정들에게 있어 사회가 깊숙이 숨겨둔 진실의 모습인 미노타우르스에게로 안내하는 아리아드네의 실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그들이 결국 싸우는 것은 범죄자로 인격화된 사회 전체이다. 오랜 시간 위선과 기만속에 축적시켜 왔던 부조리와 갈등 그리고 그로 인한 아픔. 그들은 결국 그것을 밝혀내어 사회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홀로일 수 밖에 없다. 사회가 개인에게 새겨 놓은 모든 사회로 부터 주입된 가치관으로 부터 자유로워야 하니까. 사회가 덧 씌운 색안경이 아닌 오로지 자신만의 눈으로 그 모든 진실들을 목격해야 하니까. 그래서 홀로고 홀로이어야만 한다. 그들이 슈퍼히어로라서가 아니라 사회의 가장 진실한 기록자가 되기 위하여...

 

 

   또한 그 이유로 네스뵈는 '가족'에 집중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혈연에 기반한 가장 강한 유대로 결속된 집단이다. 그 가족을 생각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상은 우리가 우리가 속한 사회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감상과 비슷하다. 가정의 혈연이 '모국'이라는 국적으로 이어지고 여기에 같은 언어, 같은 지역이라는 공감대는 그것을 강화한다. 흔히 가족이란 걸 떠올릴 때 느껴지는 감상은 타국에서 자신의 나라를 떠 올릴 때 느껴지는 감상과 유사하다고 한다. 우리는 왜 가족을 떠올릴 때 먼저 감상주의에 빠지는 것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같은 핏줄'이라는 것에서 오는 유대이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이 한 사회의 성원 또한 그 비슷한 유대감을 사회에 대하여 가진다. 사실 가족은 사회화의 1차적 기관으로 사회가 한 육체와 의식에 새기고 싶은 이념들은 모두 가족을 통해 유포되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은 그대로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한 가족의 거짓을 다루는 것은 바로 사회의 거짓을 다루는 것이 된다. 가족 내부에 깊숙하게 감춰진 진실이란 그대로 사회가 은폐한 진실의 은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네스뵈는 가족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미국의 하드보일드 작가 로스 맥도널드와 비슷하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계승자라고도 불리는 로스 맥도널드는 이전의 하드보일드 작가들과는 달리 자신의 작품의 중심에 '가족'을 가져온 첫번째 작가다. 1960년 그의 전성기 때 나온 작품들의 대부분은 모두 한 가족의 오랫동안 은폐된 진실들을 드러내는 데 맞춰져 있다. 문제는 그렇게 드러난 가족의 진실들이 모두 1950년대 미국이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을 때는 주목하지 않았던 그렇게 수면 아래로 감춰진 진실들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실 로스 맥도널드가 드러내는 진실들은 오로지 경제적 풍요 또는 사회적 성공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버리거나 감추었던 그런 갈등이요 상처였고 아픔이었다. 그렇게 그는 1950년대의 미국인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아메리카'가 그다지 이상적이지도 모범적이지도 않은 사회였음을 폭로한다.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다만 우리가 그것이 겉으로 꾸민 휘황찬란한 외관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그 이면에 있는 그늘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란 걸 맥도널드는 알린다. 요 네스뵈가 해리 홀레를 통해서, 특히 이 작품 '스노우 맨'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도 바로 이것이다. 1950년대의 미국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노르웨이. 바로 그 위선과 기만의 포장지를 뜯어내기 위하여 그는 사실은 사회적 갈등이 깊숙히 침윤되어 있는 곳이나 혈연이라는 이유로 마치 없는 것 처럼 위장되어 있는 곳의 대표적인 상징으로써 '가족'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스노우 맨'에 새겨진 의미이기도 하다.

 

 

 

 

  '스노우 맨'은 겨울이 그 어느 곳 보다 긴 노르웨이에게 있어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노르웨이에 존재하는 가정 만큼이나 흔할 것이다. 더구나 '스노우 맨'은 단란한 가정의 상징물 같은 것이기도 하다. 집 앞에 세워있는 눈사람에게서 그 가정이 문제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것을 느끼기가 더 쉽다. 왜냐하면 눈사람은 이제 우리들에게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 굳어진 인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사회적 약호(code)'라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바로 그 '눈사람'이 범인의 잔혹한 살인이 있을 것이라는, 그렇게 진실하지 못한 가정을 파괴할 것이라는 예고장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 표면이 주는 느낌과는 완전히 다른 이면의 의미로 말이다. 눈사람 자체는 굳어진 이미지로 인해 더 이상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우리 시각의 한계를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눈사람은 그대로 '노르웨이'라는 그 겉에 드러난 이미지 때문에 정작 그 진실된 면모는 보지 못하는 것의 상징도 된다. 앞서도 말했듯 노르딕 느와르에서 범죄란 결국 사회가 은폐한 진실이 드러나는 계기다. 이 소설의 눈사람 역시도 그와 똑같은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네스뵈는 눈사람을 노르웨이에 대한 하나의 총체적 상징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눈사람 자체에 집약되어 있는 것과도 같이 표면과 이면의 이율배반성은 이 '스노우 맨'에 있어 주제의 핵심이자 또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네스뵈는 소설에서 보여지는 이야기 전개의 표면에 그 주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 쪽에 이야기의 주제를 담는다는 것이다. 앞서 인용했던 라디오 멘트는 사실 이 소설에서 벌어진 범죄의 이유와 모습을 집약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혈연이 아닌 자들끼리의 집합, 거짓과 기만으로 이루어진 가정... 주로 그런 가족들이 범죄의 표적이 된다. 이렇게 보자면 사실 이 이야기의 주제가 마치 그러한 불륜들을 처벌함으로써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해 나가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여긴다면 그건 표면에 너무 집착한 까닭이다. 눈사람과도 같이 표면의 이야기가 주는 인상에 굳어진 나머지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보다 본질적인 주제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포일러를 피해 내용의 언급 없이 바로 핵심으로 뛰어들자면 사실 네스뵈가 이 소설에서 본래 말하고 싶은 것은 불륜의 죄악시, 간통으로 부터의 가족의 보호 따위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자체를 의심하며 부정한다. 사실은 거꾸로 그러한 범죄자를 통하여 그 범죄자가 가지고 있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신봉 만큼 우리 역시도 가족이라는 것에 그러한 맹목적인 믿음, 집착이 있지 않느냐고 꼬집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네스뵈가 정말 보여주려 하는 진심이다. 때문에 이 소설에서 이루어지는 해리 홀레의 로맨스(스포일러상 이 정도만 언급한다.)야 말로 네스뵈의 핵심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이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네스뵈의 전제를 먼저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는 왜 가족을 하나의 의심스러운 이데올로기로 바라보는 것인가? 그것은 혈연 자체로 비롯되는 배타성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더 상세히 설명하기 전에 '노르딕 느와르'가 왜 사회 전체와 겨루려는 것인가에 대한 보다 확실한 대답을 하고자 한다. 해닝 만켈, 스티그 라르손 그리고 네스뵈까지 그들이 스웨덴을 의심하고 노르웨이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바로 복지국가의 부작용이라고도 할만한 흔히 '외국인 혐오증'으로 말해지는 파시즘의 잔재 때문이다. 최근 통계에도 나왔지만 이 북구 유럽에 있어서 극우주의의 확산은 정말로 놀랄만한 기세이다. 그들의 성공한 복지국가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막대한 세금 부담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렇게 그 나라의 국민들은 성공한 복지국가를 이룰 때 까지 오래도록 희생해 온 것이다. 그 나라는 그렇게 그들의 피와 땀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뒤늦게 그 나라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전혀 거기에 대한 희생 없이 오직 그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자라난 복지국가란 나무로 부터 복지란 열매만 따 먹는다. 국민들에게 그 외국인들은 오로지 무임승차자로 보일 뿐이다. 때문에 '외국인 혐오증'이 성장하는 것이다. 헤닝 만켈은 1991년 그의 데뷔작 '얼굴없는 살인자' 때 부터 스웨덴 사회에 만연된 외국인 혐오증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었다. 사실 노르딕 느와르가 그와 같이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노르딕 느와르는 태어났을 때 부터 그렇게 점점 가시화되고 있는 파시즘과 싸워왔던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그대로 스티그 라르손이 계승했고 네스뵈의 작품 역시도 이 흐름을 따르고 있다. 즉 여기서 네스뵈가 의문시하는 혈연 하나로 존속되는 가족은 사실상 '외국인 혐오증'의 은유인 것이다. 네스뵈 그에게는 결혼으로 출발한 가정이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 나라란 오로지 그 나라에서 태어나고 함께 해온 국민들로만 채워져야 한다는 주장이나 똑같은 것이며 사람의 마음은 변할 수 있고 성격 차이로 도저히 같이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럴 때 가족이니까 억지로 잡아두고 포기하게 하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이 아니라고 해서 미워하고 배척하는 외국인 혐오증이나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바로 그 노르웨이에 확산되고 있는 파시즘을 에둘러 비판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이러한 거짓 위에서 존재하는 가족들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바로 그 거짓 위에서 존재하는 가족들이 사실상 애정이 끝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 만으로 '카드로 만든 집' 과 다를 바 없는 가족을 고수하고 지키고 있었듯이 이 '외국인 혐오증'것 역시도 단순히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고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외국인들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것이니 정작 바로 그 가정에서 범죄자라는 괴물이 태어나게 되었던 것 처럼 이 외국인 혐오증도 역시도 결국엔 그와 같은 괴물을 태어나게 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스노우 맨'이 정말 뛰어난 작품인 이유는 이 작품에 녹여낸 네스뵈의 우려가 정말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얼마전 우리들이 충격 속에 들었던 오슬로의 정부 청사에 폭탄 테러를 해서 8명을 숨지게 하고 바로 뒤이어 우토야 섬에서 캠프에 참가한 69명을 무차별 총기 난사로 사살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그 어마어마한 학살을 저질렀던 이유의 근본에 바로 이 외국인 혐오증이 자리잡고 있었다. 혈연의 순수성을 고집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파시즘이 가져오는 것은 결국 이와 같은 끔찍한 비극 뿐이다. 나치가 가져온 유태인 학살은 파시즘의 본성상 파시즘이 있다면 반복될 수 밖에 없는 비극인 것이다. 그래서 네스뵈는 이러한 비극을 미연에 막고자 가족도 얼마든지 사정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것이며 사실은 때가 되었을 때 그 변화를 먼저 긍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 소설 '스노우 맨'을 통해 역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읽는 '스노우 맨'의 이야기이다.  노르딕 느와르 전체에 결쳐 오래도록 이어져 온 싸움이기도 하다. 하지만 헤닝 만켈은 너무 어두웠고 스티그 라르손은 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떠나고 말았다. 네스뵈는 천착하는 주제의 깊이와 매서움은 변하지 않았으나 어둡지 않고 영미의 베스트셀러 스릴러 만큼이나 빠른 속도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로 독자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이 책은 밀레니엄 만큼이나 '블랙홀'이다. 그만큼 잡을 첫 순간을 주의해서 결정해야 한다. 마치 미드 '24시'를 보는 것 처럼 장장 619 페이지에 이르는 이야기를 도저히 중간에서 그만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재미 만큼이나 천착한 주제의 선명성 또한 빛을 발한다. 아마 이 소설을 읽고 네스뵈의 다음 해리 홀레 시리즈를 거부하기란 참으로 힘들 것이다.

 

 

                                                                                        "스노우 맨을 잡아랏!^ ^'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3-12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헤르메스님께서도 <스노우맨>을 읽으셨군요! 저는 이 책을 딱 받고는 깜짝 놀랐어요. 어쩐지 박스가 왔더라 생각했더니 무지하게 두꺼운 책이더군요. 값이 비싼데 이유가 있었어요. 일단은 너무 읽을 책이 많아 책상위에 고이 모셔두었는데 곧 꺼내읽어야 겠어요.
전부터 부러웠는데... 대체 헤르메스님께서는 어떤 바탕에 사진을 찍으시는 겝니까! 저는 찍고자 해도 집 바닥은 낡은 장판이라 안예쁘고, 책상은 좁아서 다른 물건들이 보이고... 영 찍을데가 없어서 그냥 알라딘 이미지로 대체하곤 합니다. 제게도 저런 무궁무진한 배경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ICE-9 2012-03-12 22:26   좋아요 0 | URL
정말 추천이에요. 두께가 제법 되지만 아마도 정작 읽게되면 그런 건 문제가 안될거에요. 그런데 잔인한 장면이 좀 나오는데 소이진님이라면 괜찮겠지요?^ ^
제 영업비밀을 말씀드리자면 전 LP 커버 위에 놓고 찍는답니다. 스노우맨 배경의 그림은 그룹 유라이어 힙의 앨범 커버에요. 로저 딘이 그렸죠. 그렇게 소장하고 있는 LP를 재활용하고 있어요^ ^ 이번엔 마침 소장한 레고가 스노우 맨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 같아서 특별히 더 연출시켜 본 거구요. 하다보니 이게 더 재밌더라구요 하하^ ^

김동준 2017-07-04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말로만 ˝읽어보겠다˝ 하지 말고, 주말에 무료한 시간을 보낼때 그리 나쁘지는 않을것 같아서 다행이네.
 
점령하라 - 세계를 뒤흔드는 용기의 외침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유영훈(류영훈) 옮김, 우석훈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2011년 9월, 미국의 좌파 잡지, 애드버스터는...

 

 

한 광고를 실었다.

 

 

 

바로, '9월 17일에 월가 금융자본의 부패와 탐욕에 항의하자는 평화 점거를 벌이자'라는 광고였다.

바로 이 광고가 뉴욕의 월가를 넘어 전세계적으로 부르조아 1%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불러일으킨 나머지 99%들의 성난 목소리, 월가 점령 운동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모두 패배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패배자는 뉴욕 도심의 월가에 있습니다. 우리 돈 수십억 달러가 금융권을 구제하는데 들어갔습니다. 혹자는 우리를 보고 사회주의라고 합니다. 언제나 있었던 것은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설령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한 달 내내 밤낮으로 사유재산을 파괴한다고 해도 그건 우리가 잃은 사유재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피땀 흘려 번 것 보다 더 많은 사유재산이 2008년 금융위기로 날아가렸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몽상가라고 합니다. 진정한 몽상가는 과거의 상황이 앞으로도 무한히 계속될 거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몽상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악몽으로 바뀌는 꿈에서 깨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파괴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이 사회 시스템의 자폭을 목격하고 있을 뿐입니다.

 

 

-2011년 10월 9일 슬라보예 지젝의 주코티 공원 연설 중에서 -

 

 

  월가 점령은 그랬다. 그토록 산재해 있던 모든 개인들의 아픔이 더 이상 그 개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바로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그 자체로 부터 야기된 것이라는 걸 깨닫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당신 자신 때문이다.'라며 자본주의가 주입한 환상과 꿈에서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 처럼 깨어나는 일이었고 이제 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주렁주렁 매달고 타이타닉호 처럼 가라앉아만 가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해 더 이상 이대로 수수방관만 할 수 없다며 떨치고 일어난 것이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코카콜라 캔을 재활용하고 불우이웃 돕기에 몇 달러를 내고 혹은 수익금의 1퍼센트를 제3세계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쓴다는 스타벅스 카푸치노를 구매하여 흐뭇해하는 세상에 이제 그만 지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각 종 일거리를 아웃소싱하다 못해 이제는 결혼정보업체가 우리의 사랑마저 아웃소싱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이런 모습을 보아왔죠. 우리의 정치 참여 또한 아웃소싱되고 있습니다. 이걸 되찾자는 겁니다.

 

 - 슬라보예 지젝의 같은 연설 중에서 -

 

 

 'n+1' 이라는 잡지가 있다.

 'n+1' 은 뉴욕에 기반을 둔 사회문화 비평 잡지다. 이 잡지의 편집인들은 뉴욕 월가 점령 운동에도 참여하였는데 그들은 월가 점령이 시작될 당시부터 '월가점령가제트'를 발간하여 베포하기도 하였다. 그 'n+1' 의 편집인들이 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점령운동'에 대해 중간결산한다는 취지로 발간한 책이 바로 이 책 '점령하라'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점령 운동 당시의 현장 상황을 생생히 전해 주는 '점령 풍경' 섹션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점령 풍경들 마다 제기 되었던 주된 문제들에 대한 당시의 발표문이나 연설문들이다. 그러니 전자는 실천 부분을 후자는 이론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이 두 개의 섹션은 별개로 묶이어지지 않고 하나하나가 서로 교차로 편집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 책의 편집자들이 운동이 전개되어나감에 따라 어떤 문제들이 일어났고 그 문제가 점령 운동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점령 운동'은 어떤 원칙과 이론적 바탕에 의해 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는지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점령 운동' 당시 거주하고 있던 '주코타 공원'에서 시위에는 참가하지 않는 뉴욕의 노숙인들이 무료로 지급되는 음식과 잠자리 때문에 자꾸만 노숙하게 되어 시위 참가자들 사이에서 불만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단순히 그들이 시위에 참가하지도 않으면서 무임승차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노숙자들로 인해 운동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노숙자들의 범람으로 언론들에 의해 '무법천지'로 왜곡 보도 됨으로써 장차 진압을 위한 구실을 주게 되리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풍경의 섹션이 이렇게 제기된 문제를 드러내면 바로 그 뒤 이론 섹션에서 이 문제를 바람직하게 풀어나갈 방향을 이렇게 제시한다.

 

 

  점령 운동이 성장해가는 가운데 우리는 점령 운동에서 노숙인의 자리라는 문제를 단기적으로 또 장기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우리를 하나로 묶는 체제적 연결과 역사적 연결을 기억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한편으로 체제적 배제와 사화적 배제, 경제적 배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상대적 잉여 인구의 일부가 될 위험에 처해있는 것이다.

 

  현대 역사에서 추방과 경제적 몰락의 순간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 전반에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아주 통렬하게 다가온다. 따라서 "당신은 왜 여기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우리는 반드시 이 배제와 경제 위기의 논리를 살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노숙인 문제와 점령 운동 전반을 실제로 아우르는 대답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은 모두 경제적 주변화와 경제 위기 그리고 추방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 지난 40년 동안 노숙자 인구는 꾸준히 늘어났다.  이러한 문제는 이제 인종 집단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우리는 이러한 사태의 밑바닥에 깔린 공통의 논리를 이해해야만 한다. 1970년대 초반에도 최상위 1퍼센트가 빠르게 득세하자 미국의 거리에 노숙자가 늘어났다. 역사적으로 똑같은 상황이 지금 다시 벌어지고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히 아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의 공통된 곤경을 심각하게 따져보아야만 한다. (...) 마침내 우리는 이 불확실함과 불안과 배제가 함께 합류하는 지점에 함께 도착했다. 이 공통적 곤경은 반드시 배제가 아닌 '포함'의 새로운 정치를 세우는 작업을 위한 연대의 원천이 되어야만 한다.

 

 

 - '홈리스의 문제 -당신은 왜 여기 있는가?' 크리스토퍼 헤링과 졸탄 클루크의 글 중에서 - 

 

 

 

  이렇게 '점령하라'는 운동의 과정에 생겨났던 문제를 가감없이 드러내어 그 문제들이 운동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바람직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고려하고 원칙을 삼아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글들을 함께 붙여둔다. 그 이유는 여기에 있는 문제들이 사실 '점령 운동'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모든 운동들이 그 규모가 커지고 영향력이 증대되면 반드시 가지게 될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가장 비근한 예는 얼마전 '나꼼수'로 일어났던 비키니 논쟁이 될 것이다. 이 책 '점령하라'가 이런 식의 편제를 취한 것은 이러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해 '누가 옳은가 그른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저마다의 사유를 촉발하는 계기들이며 모두가 열린 마음으로서 그 계기가 촉발한 저마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더 나은 진화를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그것이 정말로 더 중요한 문제임을 알리기 위함이다.

 

 

  월가 점령 운동에도 앞서 얘기한 노숙자 문제를 비롯 숱한 차별과 배제의 문제가 있었다. 타악기라는 것으로 운동의 정체성을 삼았던 드림 써클은 그 소리 때문에 사람들의 회의 순간을 방해하여 원성을 샀다가 지역적으로 분리되기도 했다. 점령 운동의 규모가 커지자 더이상 공개 총회로는 사안의 처리가 힘들어지자 '비대위'를 추진하려 했을 때는 한 이슬람 여성으로 부터 비대위가 모두 백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냐고 비난을 듣기도 했다. 사실 모든 운동은 그렇게 결국 근본적으로는 차별과 배제의 문제를 배태하게 된다.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수면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운동의 영향력이 커지자 서로 그 선봉을 잡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겠다며 공격을 위한 선가르기가 횡행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나꼼수'의 비키니 논쟁 때 경향신문이 3일 연속 1면에 실었던 것이 이것에 대한 하나의 방증이기도 하다. 결국 이럴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운동의 성패를 좌우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점령하라'는 이러한 때 '점령 운동'은 어떻게 풀어나갔는지를 그 때 그 때 그 뒤 '이론 섹션'에서 보여주는 것인데 그럴 때 그들이 언제나 기억했던 것은 '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가?'하는 운동을 일으켰던 본연의 동기들이었다.

 

  지배체제는 동일한 하나를 둘로 나눈다. 데카르트의 정신과 육체의 분리가 대표적인 예다. 똑같은 분열이 공개 총회와 드럼 서클 사이에서도 재생산되고 있었다. 드럼 서클은 '소수 민족'이고 공개 총회는 '백인'이었다. 드럼 서클은 '남성'이고 공개 총회는 '여성'이었다. 지금에 와서 여러 인종과 남성과 여성의 구체적 현실이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내 말은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개 총회와 드럼 서클도 이 본질을 충실히 반영했다. 이러한 양극 분리야 말로 점령 운동이 깨부수려던 것인데 말이다.

 

 - 드럼 서클에 관한 고찰, 마크 그리프 -

 

 

  아마도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우선 순위를 정확히 전달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높은 생활 수준을 원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생활 수준을 바라는 겁니다. 우리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 단 하나의 맥락이 있다면 우리가 모두의 것(the commons)을 생각한다는 겁니다. 자연의 공유, 지식의 공유. 아, 물론 지적재산권은 있어야죠. 유전공학의 공유 이것을 위해서 그리고 오직 이것만을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 슬라보예 지젝 - 

 

 

  만약에 희망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불경기에 수익을 얻은 자들에게 부를 재분배하고 탐욕을 멈추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한 요구라며 그렇습니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에게 중재할 어떤 주장도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경제적 정의와 사회적 평등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공의 장소에 함께 모여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 거리와 광장에서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 연합하여 하나로 뭉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만들며 하나로 여기 서 있습니다. '우리가 국민'임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 2011년 10월 23일 주코타 공원 발언, 주디스 버틀러 -

 

 

 

  그렇게 이 책 '점령하라'는 단순한 운동의 현장이나 과정이 어땠는지 알려주는 정보 차원만의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차라리 하나의 '교본'이다. 어쩌면 월가 점령 운동에서 촉발되어 장차 일어날지 모르는 반자본주의 운동(그 뿐만 아니라 모든 현 체제 저항 운동까지)들이 월가 점령 운동에서 직면했던 문제들로 좌초되지 않고 성공적으로 해결하여 꾸준한 지속과 성장을 위해 참조가능한 사유의 계기들을 던져주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해설을 썼던 우석훈이 이 책에 대해서 했던 말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 2012년 대한민국이 열독해야 할 단 한권의 책"이라는 말에 무조건적 지지를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진핑 시대의 중국 - 중국은 과연 세계의 지배자가 될까
사토 마사루 지음, 이혁재 옮김, 권성용 해제 / 청림출판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달 시진핑의 미국 방문은 모든 해외 언론의 초유의 관심사였다. 아마도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때서야 시진핑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언론의 압도적인 관심을 받은 까닭은 무얼까? 그건 그가 장차 중국의 최고 통치자인 주석이 되어 정해진 임기 10년 동안 중국을 다스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2012년 그러니까 올 해 가을 현 주석인 후진타오에 의해 부주석이 될 예정이고, 다음 해 2013년에는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주석이 될 것이 가장 유력시 되는 인물이다.(이렇게 확률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후진타오 때 까지 이어졌던 전임자의 지명으로 주석으로 뽑는 제도가 시진핑 때에 이르러서는 투표로 선출되는 것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중국은 여전히 일당 체제 이므로 그 수반이 되는 주석의 권력은 실로 막강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중국은 학자들이 장차 언제 미국을 넘어설 것인가 그 시기를 점치고 있을 만큼 가장 강력한 국가의 하나다. 그러니 시진핑의 미국 방문은 언론의 관심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우리나라의 무역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거기다 지정학적 위치 상 아무래도 중국의 정세 변화는 한국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정치와 경제 모두에 있어 시진핑 시대의 중국에 도래할 변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데 지금 말하려는 이 책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바로 정확히 그것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이 책의 저자 사토 마사루로 그는 일본경제신문의 정치부 기자다. 정치부 기자로서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특유의 정치 감각과 4년간 베이징 특파원으로 일했던 경험이 더해진 탓에 이 책은 중국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현실적이면서도 상세한 모습을 그리고 풍부한 취재를 통한 가장 직접적인 목소리들을 담을 수 있었다.) 그것을 총 6장에 걸쳐 설명한다.

 

 

 

  먼저 저자는 중국이 가진 모델로써의 독특성에 주목한다. 그는 중국이 지금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는 세계정치경제로서는 상당히 독특한 모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권력이 집중된 일당독재가 모든 걸 지배하고 경제적으로 관 주도의 국가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권력이 국가에서 시장으로 넘어가고 있는 요즘 중국은 오히려 국가가 여전히 시장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독특한 모델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그로인해 아직 중국의 민주화가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을 때와 비교해서 별로 진척되지 않았기에 우려스럽다. 사토 마사루는 2010년 중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류샤오보에 대해 중국 당국이 어떻게 행했는지를 밝혀 중국의 민주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밝혀준다. 그러니까 현재 감옥에 수감 중인 류샤오보가 노벨상 시상식장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 류사오보에게 상을 준 것은 중국을 공격하기 위한 서방의 술수라며 공격 했고 아예 다른 나라 인사들 역시 그 시상직장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많은 나라에 압력을 넣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는 중국의 민주화가 얼마나 중국에게 있어 예민한 사안인지 드러내는데 이로써 거꾸로 중국의 민주화가 스스로도 밖으로 감히 드러내지 못할 만큼 낮다는 걸 반증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경제만큼은 여전히 평균 7%대의 성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또한 일당체제의 효과적인 정책 결정과 수행과정(통칭 이것을 거버넌스라고 부르나 중국에서는 '집정기능'이라고 부른다고 한다.)에 의한 것이기도 해서 악영향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중국 모델에 대한 평가를 어렵게 만든다.

 

 

 

  때문에 시진핑 이후에 중국 모델이 어떻게 변할지 더욱 관심이 높게 되는 것이다. 중국은 지금 안으로는 13억 인구 56개 민족의 분화와 민주화의 압력에 경제적으로는 극심한 빈부 격차에 대한 감소의 압력에 직면하고 있다. 후진타오 총리는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체제의 큰 틀거리는 변화시키지 않는 차원에서 당 내부의 민주화를 점진적으로 감행했고 경제에 있어서는 더더욱 '서민 정치'를 표방하여 보다 많은 이들에게 그 열매가 돌아가도록 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공공연히 그러한 후진타오의 정책에 반대 입장을 천명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이것은 후진타오와 시진핑이 서로 다른 중국 정치 내부의 파벌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인데 후진타오는 공청단파, 즉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을 시진핑은 중국 고위 간부 자제들로 구성된 태자당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청단파는 대부분 정치계 인사들로 구성된 반면 태자당은 재계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후진타오가 적극적으로 취하고 있는 서민 중심의 경제 정책은 그들에게 있어 환영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토 마사루 역시 예측하는 바이지만 시진핑 시대에 이르면 후진타오의 경제 정책 만큼은 이제 부자 위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정치체제에 있어서는 대부분 기업주나 고위 간부의 2세들이 그러하듯 조금 유동적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시진핑의 입지상 일당체제 자체 만큼은 여전히 유지될 것이라 마사루는 예측한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되면 현재 오로지 하나에 권력이 집중됨으로써 생겨나는 부작용들을 해결하기가 곤란할 것이라 한다. 현재 중국의 부정적인 모습(사토 마사루는 이것을 '부채'라 표현한다. 책에서 그는 대차대조표에 근거하여 중국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은 점점 심화되는 빈부의 격차, , 민주화의 억제, 언론 통제, 높은 부패지수 그리고 지방 정부가 토호들과 결탁해 개발을 빌미삼은 땅 투기로 서민들을 몰아내는 것(이건 지아장커의 영화 '스틸 라이프'에서도 나온 바 있다.)등 인데 이러한 문제들은 일당체제가 있는 한 해결하기가 참으로 곤란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저자 사토 마사루는 이렇게 다양한 각도에서 장차 시진핑의 중국이 어떻게 될 것인지 풍부한 자료와 통계 그리고 인터뷰를 통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그 모은 자료와 취재를 토대로 지극히 현실적인 시각으로 예측한다. 예측이란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 중국은 한 일본 대사의 말을 빌면 6개월만 공백이 생겨도 중국의 오늘을 전혀 알 수가 없다라고 말할만큼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시진핑 시대의 중국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그 정확한 답을 내어놓기는 어렵다. 해서 사토 마사루는 자신이 이러이러 할 것이다 하고 확실한 예측을 내어놓는 대신 가급적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체계적으로 선별해서 독자 스스로 그 답을 찾아가도록 만든다.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일본에서 보통 이런 책들은 대부분 주 소비층이 샐러리맨들인지라 그들이 가장 많이 책을 읽는 장소인 지하철에서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므로 그렇게 복잡하고 흔들리는 상태에서도 충분히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쉽게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그대로 이 책 역시도 이해에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더구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책의 내용을 정리한 도표들까지 나와 있다. 해서 얼마든지 자기만의 예측도를 그려볼 수 있다.

 

 

 

  굳이 이렇게 사토 마사루의 예측에 구애받지 말고 자기만의 예측도를 그리라고 말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저자 사토 마사루가 가지고 있는 분배 형평과 복지에 비판적인 시장주의적 입장과 그보다 더 문제인 일본 중심주의적 입장 때문이다. 이 책은 장차 일본이 시진핑 시대의 중국에 어떠한 전략적 입장을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일본 입장에서 중국의 문제를 바라본다. 일례로 2010년 9월 일본 오키나와 앞 바다에서 일어난 일본 경비정과 중국 어선 충돌 사건의 경우 사토 마사루는 지극히 일본의 입장에서 중국의 고압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여기에 대한 글을 읽다보면 혹시 우익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그렇게 사토 마사루는 장차 동아시아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게 될 중국과 일본을 염두에 두고 어떻게 하면 거기서 일본이 좀 더 나은 위치를 점유할 수 있을까를 위해 썼기 때문에 정작 우리 한국에 대한 것은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작 한국에 장차 어떤 파급이 닥칠까를 알기 위해 이 책을 잡았다면 그러한 사토 마사루의 시각에 물들지 않아야 하고 그를 위해 스스로가 책의 논지에 객관적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자기만의 예측도를 그릴 필요가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사토 마사루 자체에서 근거하는 위험성을 논외로 한다며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가장 현실적인 시각으로 모든 방향에서 상세히 그것을 검토하게 함으로 정보적인 측면에서 효과가 상당하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앞으로 더욱 긴밀해질 중국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한 번 읽어 둘 가치는 있지 않나 싶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3-1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이야기만 나오면 머릿속이 핑핑 돕니다... 특히 중국은 싫어요. 그냥 싫기도 하고, 역사를 따져보면 더 싫구. 후후... 그리고 시진핑이 누군지 일단은 모르겠답니다.

ICE-9 2012-03-11 18:18   좋아요 0 | URL
사실 미국 방문까지는 전혀 일반인이 모르는 이름이었죠^ ^
일 때문에 정보를 좀 얻을까 해서 읽었던 책이랍니다. 중국에 대해선 저 역시도 딱히 좋은 감정은 없지만 어쩌겠어요, 동아시아에서 중국에 대해 완전히 모르쇠하기는 쉽지 않은 나라인 걸...^ ^

맥거핀 2012-03-11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 주위의 강대국들, 특히 남북문제와도 밀접하게 얽혀있는 중국의 향후 행보에 대해 어느 정도의 우려섞인 관측을 할 수 밖에 없어 보이는데, 현재 MB 정부의 대중 외교력은 거의 낙제점 수준이니 걱정이 됩니다. 또 (어느 정부가 되었던) 새로 정권을 잡게될 사람들에게도 이 대중문제는 중요한 이슈가 될텐데, 현재 국민정서도 중국에 대해 상당히 나빠져 있는 상태이고 보면, 어떤 묘한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좋은 내용 전달과 더불어, 책을 읽을 때의 주의해야할 점까지 말씀해주셔서 향후의 독서에 큰 도움이 될 듯 합니다.^^

ICE-9 2012-03-11 18:24   좋아요 0 | URL
말씀 감사합니다. 맥거핀님. 제 생각엔 MB 자체가 별로 외교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아마도 그저 미국에 기대어 해결할 생각 뿐이 아닐까 싶네요. 강정 해군기지 문제도 사실 그와 같은 MB의 사고가 깔려 있는 것이겠구요. 로버트 길핀은 패권국가가 바뀔 때 그 계기는 전쟁 뿐이다라고 했는데 정말 그 길핀 말대로 중국과 미국이 전쟁이라도 치른다면 MB는 지금 해군기지라는 빌미를 참으로 잘 제공한 셈이 아닌가 싶어요. 그 짧은 견식 때문에 구렁비가 저리도 참혹하게 파괴될 것을 생각하니 더 안타깝네요. 시진핑은 이전 주석들과 그 출신과 선정에 있어 많이 차이나기도 하고 지금 후진차오와는 전혀 반대의 성향을 가진 인물이기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북한에 대한 중국의 입김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구요. 시진핑의 중국이 지금보다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더 나을 것 같지는 않기에 더욱 답답한 심정이네요.
 
무엇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가 - 현혹시키는 세상, 착각하는 대중
엘든 테일러 지음, 이문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아마도 인간에 대한 가장 유명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일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이 과연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오늘날 사회생물학으로 부터 참 많은 공격을 받고 있지만 이 리뷰에서 정작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생각을 하는 능력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말에 심어져 있는 또 다른 뉘앙스, 그러니까 마치 우리 인간은 그 무엇에도 좌우되지 않고 자유로이 생각을 할 줄 안다는, 달리 말해, 특히 기독교적 용어로는 바로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을 문제삼고자 한다.

 

  우리의 흔한 상식으로는 우리는 온전히 우리의 자유의지로 생각하며 그 생각에 있어서는 그 무엇의 간섭도 지배도 받지 않는다고 여긴다. 남의 생각을 자기 뜻대로 지배하는 걸 특히 세뇌라고 하는데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이 이미 세뇌되었다고 여기는 이는 없을 줄로 안다. 그렇게 우리는 자유의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도 모르게 그 누군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주입된 생각에 따라,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다만 우리의 착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 책' 무엇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가'의 저자 엘든 테일러이다. 그는 최면과 잠재소통 분야의 전문가이다. 외부의 주입으로 생각에 간섭하고 지배하는 것이라 말 할 수 있는 최면의 전문가라는 그의 이력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이 그는 얼마든지 타인에 의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생각이 주입되거나 통제될 수 있으며 사실 우리가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하는 자체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는 말한다.

 

  닭장의 닭 처럼 우리는 모두 복사되는 것이다. 행동과학자들은 동물이 집단에서 수용되기 위해 동물을 모방하는 과정을 '복사'라고 명명했다. 닭장에서 자란 독수리나 오리 새끼는 닭처럼 행동한다.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 처럼 백조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여기서 요지는 간단하다. 인간은 제한된 사고, 더 나아가 훈련된 사고를 하도록 사회화 된다. 실로, 이 과정은 매우 효과적으로 진행돼 우리 안에는 어떤 맹목성이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무지는 때때로 인지 이론가들이 말하는 '맥락에 갇힌 사고'로 쉽게 설명된다.(p.113)

 

  이 말은 인간이 언어를 습득하면서 부터 더 이상 고유의 자신은 없어지고 사회라는 맥락에서 형성된 존재만이 남는다라고 했던 라깡의 말을 연상시킨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순간 더 이상 내 순수 자의로 생각하는 건 불가능하고 누군가를 모방하기 위해 혹은 이미 외부로 부터 조건지어진 그 위에서 그 외부가 이미 내 안에 설정한 매커니즘에 따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그런 의미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임의로 항로를 설정하여 생각을 비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 말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생각의 항로가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내가 비행기를 몰고간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안에 미리 탑재되어 있던 운항 컴퓨터가 몰고 간 것이며 그것을 다만 내가 몰았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거다. 바로 이것이 '맥락에 갇힌 사고'의 의미이기도 한데 그 말을 쉽게 하자면 '편견' 정도가 될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그 생각의 폭을 가장 많이 제한하는 것이 바로 편견일 것이다. 가난한 자에 대한 편견, 더러운 자에 대한 편견 그리고 인종에 대한 편견 등 그 수많은 편견들은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자의에 의한 생산물은 아니다. 사실 그 모든 대부분의 편견들은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외부로 부터 주입된 것들이다. 특히나 인종에 대한 편견이 그렇다. 예전에 EBS에서 해 줬던 다큐 하나가 생각난다. 우리가 백인을 대할 때와 동남아시아인들을 대할 때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는 다큐였다. 대표적으로 백인이 영어로 길을 물으면 영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는데 동남아시아인들이 물으면 아예 상대를 하지 않거나 한국말도 못하면서 왜 여기를 왔냐 하고 면박주기 일쑤였다. 특별히 동남아시아인들이 그런 대접을 받을 까닭이 없는데 한국인들이 한결같이 그런 반응을 보인 걸 보면 분명 거기에는 편견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개인들이 모두 동남아시아인들에 대해 안좋은 경험을 가진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자기의 경험 때문이 아니라 어느새 사회가 가진 동남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이 개인이 내재화되어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임을 또한 알 수 있다. 그렇게 어느새 사고가 무엇에 의해 닫혀버리는 것. 그것이 편견이고 그것이 바로 맥락에 갇힌 사고다.

 

  저자 앨런 테일러가 이러한 복사, 편견을 강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알게 모르게 사회로 부터 세뇌당하고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는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 초대형 쓰레기통과 같아서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집어 넣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집어넣는 주체는 대부분 우리가 아닌 남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특히 개인의 욕망을 창출시키고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통제하는 미디어들이 맡고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이 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광고'라고 말한다. 그는 아예 미국의 한 광고인 양성소(이 양성소는 전문 광고인을 육성하는 곳으로 그 모든 테크닉들은 모두 비밀리에 이루어지므로 사실 거기서 사용되는 교재를 외부에서 보기란 어렵다고 한다.)에서 실제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자료를 입수하여 보여주는데 거기서 우리는 광고라는 것이 보이는 것과 다르게 얼마나 교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뜻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지 똑똑히 보게 된다. 그 뒤 그는 단적으로이렇게 말한다. '광고란 잠재의식 조종 기술이다'라고.

 

  사람은 자신이 눈으로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사실은 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걸 못 느끼는 이유는 보기는 하지만 의식에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재의식은 그 모든 걸 다 보고 있다. 그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다. 실제로 코카콜라 회사가 한 극장에서 실험까지 했었다. 그러니까 영화 필름에다가 코카콜라를 찍은 필름을 사이사이 끼워 넣는다. 하지만 눈으로는 인지하지 못하도록 아주 찰라에 지나가게끔 끼워넣는다. 그래서 관객은 영화 도중 코카콜라를 전혀 보지 못한다. 그 어떤 방해도 없이 편안하게 관람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영화가 끝난 뒤 대부분의 관객이 코카콜라가 마시고 싶었다고 하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즉 그들의 눈은 코카콜라를 보지 못했지만 그들의 잠재의식은 영화 도중 내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코카콜라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그렇게 세뇌란 우리의 의식이 아니라 잠재의식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나왔지만 전혀 코카콜라를 보지 못한 관객들 처럼 우리 역시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별 대중적 저항을 일으키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마저 집단 의식 통제를 위하여 광범위한 세뇌 프로젝트를 더러 시작하기도 하는데 엘든 테일러는 그동안 미국 정부나 세계 곳곳에서 정부 주도로 행해져 온 각종 세뇌 프로그램들 역시 소개한다. 바로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광범위한 세뇌의 매트릭스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하여 엘든 테일러가 하고 싶은 말은 나의 생각이란게 나만이 생성하고 판단하고 평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의 생각이란 많은 편견으로 얼룩져 있으며 그 대부분은 내가 아닌 남이 생성하고 판단하고 평가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총 1부와 2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로 이것이 1부의 결론이다. 그렇게 무엇이 자신의 생각이고 남의 생각인지 알 수가 없으니 되도록 모든 가치 판단에 있어 나만의 생각이란 걸 고집하지 말고 마음을 비워두고 근본부터 따져 차분히 생각하라는 것이 2부의 메세지다. 사실 나도 읽고나서야 알았지만 이 책은 1부와 2부가 이처럼 기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1부가 생각이란 게 많은 부분 외부로 부터 주입된 것이다에 대한 상세한 논의의 과정이라면 2부는 그러한 마음의 현실을 인정하고 되도록 마음을 다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방법론 같은 것들이 나와 있는 자기개발서 같은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해서 1부에선 흥미를 돋구며 신나게 읽었지만 2부에선 어쩐지 좀 맥이 풀려버린 느낌이었다.(사실 개인적으로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 같은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에 정직한 모습을 대면할 계기를 준다는 것에서 이 책은 1부만으로도 읽을 가치는 있다. 나와는 달리 그런 장르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2부 역시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미디어의 범람, 광고의 범람, SNS의 범람 등등 내가 영향 받을 수 있고 혹은 나도 모르게 주입 받을 수 있는 정보들이 매일 쓰나미 처럼 우리 머리 위로 덮쳐 오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나만의 생각, 나만의 취향, 나만의 성격을 고집하기 보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외부에 의해 결정되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좀 더 나 아닌 것에 스스로를 열여가면서 그 부단한 '나'의 변화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의 조합으로서의 '나'를 만들어가는 게 오늘을 사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3-09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헤르메스님께서는 이런류의 책도 읽으시는 군요. 저는 도저히 이런 책에는 손을 못대겠습니다. 중학교 시절 잠깐 지적수준을 높여보고자 꺼내들긴 했는데... 한숨만 내쉬고는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ㅎㅎ
그건그렇고 헤르메스님 물만두 추리소설 1등타셨던걸요! 알고보니 제가 댓글을 달았던 리뷰였습니다. 제게도 의미가 깊군요. 헤헤, 축하드려요!

ICE-9 2012-03-10 03:00   좋아요 0 | URL
존 버거의 '이미지'와 스티븐 핑커의 '빈서판'을 읽은 뒤로 이런 책을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이 두 책은 소이진님께도 정말 추천드리고 싶은 책이기도 합니다. 뭐랄까 공룡을 멸종시켰던 유카탄 반도에 떨어진 혜성의 충돌 만큼 인식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킨 충격적인 책이었어요. 리뷰한 책은 별로 어렵지 않으니 혹시가 관심이 있으시면 읽으셔도 별 무리는 없을 듯 싶어요. 그리고 축하 감사합니다. 저도 제세공과금 메일이 와서 알았어요. 1회에 이어 2회도 타게 될줄은 정말 몰랐는데 그래서 그런지 물만두님과 장르소설에 대해 생전에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굴뚝 같네요. 그래서 소이진님과 이렇게 댓글을 나누는 것도 소중히 여길 생각입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
 
<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회자정리라고 하더니 결국 10기도 마지막 신간 추천 시간이 도래하고야 말았습니다.

 요번엔 이사도 있고 해서 몇 작품은 채 소화도 못 한 채 서둘러 리뷰를 해야 했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 아쉬움도 곧 추억이 되겠군요.

 10기 여러분 다들 수고 많으셨구요.

 여러분들이 추천한 신간과 리뷰를 보면서 느낌을 나누고 생각을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 신간 추천 제가 선택한 작품들입니다.

 

 

 

 

 

 

  파스칼 키냐르는 제가 가장 닮고 싶은 문장을 쓰는 작가입니다. 카나르의 문장들은 마치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같습니다. 그 짧은 문장 하나가 얼마나 많은 사유의 되먹임을 거친 끝에 나왔는지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응축. 그 절대 영도의 문장들을 정말 배우고 싶은데 천성이 수다꾼인지라 여간해선 잘 안되는군요.

 

 이번에 나온 빌라 아말리아는 장편소설 입니다. 명성은 2008년에 영화도 나왔고 해서 익히 듣고 있었는데 키냐르의 작품 치고는 좀 시간이 걸려 이제야 나오게 되었네요. 소설의 내용은 제가 '옛날에 관하여'에서 읽었는지 '심연들'에서 읽었는지 지금은 얼른 모호합니다만 아무튼 분명 그 둘 중 하나에 나왔던 김포공항에서 키냐르 자신이 한 외교관 아내에게 느꼈던 사랑의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 식당에서 마주앉아 키냐르는 그녀의 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다리를 보며 솔직한 욕망에 따라 무모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냐 아니면 이대로 포기하고 비겁한 일상을 지속할 것이냐 고민합니다. 그 변화에 대한 갈급함과 그 못지 않은 현실의 중력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 저는 빌라 아말리아가 그것을 장편으로 버전 업 한것으로만 느껴지는군요. 아무튼 키냐르 입니다. 이외에 다른 말이 뭐가 필요할까요? ...

 

 

 

 

 

 SF의 팬으로서 문학수첩은 지금 가장 응원하고 싶은 출판사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발라드의 하이라이즈, 저번 신간서평단 선정작이었던 로보포칼립스 그리고 이렇게 폴 앤더슨의 브레인 웨이브 까지 꾸준하게 SF를 발간하여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고 있으니까요.

 

 걸작 시간여행 시리즈인 '타임패트롤'로 유명한 폴 앤더슨은 시간 여행외에도 압도적일만큼 어마어마한 시간을 우주여행하는 자들의 존재론적 불안과 진화를 다룬 '타우제로' 같은 작품도 썼는데요 이 '브레인 웨이브' 또한 다른 식의 테마를 추구한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제목에서 짐작되듯이 갑자기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의 지능이 수직 상승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을 다룬 작품입니다. 다니엘 키스의 소설 '앨저넌에게 꽃을'에도 나오는 것입니다만 우리는 흔히 지능이 갑자기 확 올라가면 그 존재의 생활마저도 얼마든지 상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IQ에 대한 집착도 아마 그 믿음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만 과연 그렇게 지능의 진화가 삶에다 순기능만 가져오는 것일까요? 행여 역기능도 분명 가져다 주지 않을까요? '브레인 웨이브'는 그렇게 지능의 갑작스런 증가가 가져올 다면적인 변화를 흥미롭게 풀어간 작품입니다.

 

 

 

 

 

 찰스 부코스키의 소설들이 열린책들에서 나란히 출간된다고 들었을 때 저는 저도 모르게 열린책들의 '서드 임펙트'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작년에도 '메그레'와 '하자르 사전'의 재발간으로 놀래키더니 올해는 또 이렇게 찰스 부코스키로 놀래키는 군요. 사실 가장 반가운 출간소식이기도 합니다. '팩토텀' 밖에는 볼 수 없었기에 이렇게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그것도 두 작품이나 연이어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군요. 그저 닥치고 추천입니다. 

 

 

 

 

 

 

 미미 여사가 가장 존경한다는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 마츠모토 세이초. 그의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작품들이 나온다는 사실은 세이초의 작품을 좋아했던 이들에게는 가슴 뛰는 소식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미미 여사가 화차에서 그려낸 혼고의 연민과 고뇌의 시선이 바로 세이초의 시선이 아닐까 하는데요, 아무튼 '모래그릇'이나 '점과 선'을 읽어보면 그 시선으로 그려내는 당시 일본 사회의 그늘이 지금 우리가 가진 그늘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도 바로 그 이유로 이렇게 세이초의 작품들이 오늘날 부활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역사비평사의 임프린트 모비딕과 북스피어가 함께 힘을 합쳐 의욕적으로 펴내는 시리즈입니다. 국내출판계에서는 획기적인 시도이기도 하니 부디 잘 되었으면 합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3-08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스칼 작가님의 책은 표지가 딱 제스타일인걸요~
그나저나 벌써 마지막이라니 얼마 한거 같지도 않은데 끝이군요.
제가 읽고싶은 책이 많이 걸리질 않아서 그런거 같아요.
애초에 에세이 부문을 신청한것이 저에대한 이해부족과 판단미스였습니다...
아직은 제가 에세이를 읽을만한 지적수준이...아니더군요.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소설파트에 지원을 해보고싶어요.
아주 기회가 된다면 헤르메스님과 같이 리뷰를 올리며 의견을 나누는... 후후

ICE-9 2012-03-08 22:25   좋아요 0 | URL
정말 이렇게 마지막 시간에 서 있고 보니 저 역시 소이진님과 똑같은 아쉬움이 들더라구요. 이사 준비로 바빠 리뷰에 공을 많이 못들였기도 하고 또 소이진님과 똑같이 이번 신간평가단에선 정말 읽고 싶었던 책이 거의 선택되지 않은 탓도 있고 해서^^; 저는 소이진님의 글을 읽을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데 지적 수준이 안되신다니 너무 겸손이 지나친 듯 합니다. 와! 저역시 정말 소이진님과 꼭 같이 리뷰단 되었으면 좋겠어요.^ ^ 그런데 1년이나 했는데 또 시켜주실지 자신이 없어요 흑흑 ㅠ ㅠ

이진 2012-03-08 22:29   좋아요 0 | URL
에이,헤르메스님이시라면 당연히 붙지요. 제가 신간평가단 단원이라면 일단 헤르메스님은 고정 멤버로 제치고 들어가겠습니다. 성실하신데다가 글도 잘쓰시지 않으십니까!
아니에요... 흑흑 성석제나 프랑스 작품은 손을 못대었단 말입니다. 성석제가 글을 어렵게 쓰는것도 아닐텐데도 저와는 맞지 않는 것인지 말이어요. 무라카미 하루키도 별로였고... 어쨋든 이제는 에세이에는 자신이 없어요. 적어도 소설에서는 에세이보단 잘할자신이 가득가득인데!! 소설이라면 그냥 모든 책이 다 읽고싶을거 같아요... 헤헤

ICE-9 2012-03-08 22:44   좋아요 0 | URL
지금 제가 소이진님 노다메 페이퍼 보고 왔는데요, 실력이 후덜덜 하시던데요 뭘^ ^ 그치만 정말 에세이는 리뷰쓰기가 어렵더라구요. 저도 리뷰를 썼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도 사실 처음엔 얼른 맥을 잡기가 어려웠어요. 제 생각에 문제는 소이진님이 아니라 에세이라는 것 자체에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특정한 형식도 없고 그렇다고 이야기가 죽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리뷰라는 글의 본질상 바탕이 되는 텍스트에 근거해야 할 텐데 그 텍스트 자체가 곳곳에 단절과 균열이 있어놔서 그런게 아닐까 싶어요. 게다가 자칫하면 신변잡기로 갈 수도 있는데 그건 또 소이진님이 만족하지 못하실 것 같고... 그러니 이참에 에세이는 관두시고 소설로 빨리 전향하세요. 소이진님의 글솜씨라면 소설의 리뷰가 더한층 빛날듯해요.^ ^

이진 2012-03-08 23:06   좋아요 0 | URL
히히...후덜덜까진 아닌데. 저는 처음 이런 식으로 리뷰를 쓰기 시작했을때는 제대로된 기준을 잡질 못해서 에세이리뷰를 쓰는것이 훨씬 편했어요. 소설 리뷰를 쓸때는 생각해야할 것도 많고, 써야할것도 많아서 복잡했는데 에세이는 편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에세이와 맞구나! 하고서는 옳다구나 하고 에세이부문 신청했는데 선정이 딱 되어버린거죠. 생각해보니 저는 글 에세이말고 포토에세이 리뷰를 괜찮게 썼던 것 같아요. 그냥 내 이야기만 주저리 주저리 하면 되니까 말이에요. 맞아요 얼른 소설로 전향해야겠어요. 에세이는 제게 너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헤헤... 11기에 잘해보아요 ^______^ (아 이거 신간평가단 직원분이 보시면 괘씸하다고 안뽑아주시는건 아니겠죠!)

ICE-9 2012-03-08 23:19   좋아요 0 | URL
저는 자기 이야기를 쏟아놓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부럽더군요. 제가 그걸 잘 못하거든요. 사실 제가 가장 힘들어하는 게 자기소개서 쓰는 것이었어요. 그 여백을 탁 마주하고 있으면 도대체 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해서 머리가 새하얗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어요. 학교 다닐때도 나에 대해서 말하는 걸 참으로 싫어했었죠. 그래서 선생님과 상담시간이 저에겐 가장 힘들었어요. 지금에서야 저도 이제 차츰 나를 객관화 시키려고 노력 많이 하는 편인데 소이진님은 오히려 그게 더 편하다고 하니 정말 부럽군요^ ^ 그렇게 같은 소설을 읽으며 소이진님은 작품을 객관화 시키고 저는 나를 객관화시키는 쪽으로 노력하면 정말 좋을 것 같네요. 그럼, 11기를 향하여 아자아자!!

교고쿠도 2012-03-09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찰스 부코우스키..<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를 몇 년 전에 헌책방을 뒤져 구한 후 참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퇴폐적인 냄새도 나지만, 뭔가 통쾌한 느낌도 동시에 들어요. ㅋ

ICE-9 2012-03-09 03:36   좋아요 0 | URL
저는 무엇보다 스스로 적극적으로 루저가 되는 그 모습이 좋더라구요. 너무도 당당하게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의지로 추락을 감행하니까 그것을 오로지 누추함과 비루함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사실은 얄팍한 편견에 불과했음을 드러내고는 부끄럽게 만들더군요. 그러한 피학 속의 깨달음이 제가 부코우스키를 좋아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어요.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정말 읽어보고 싶네요. 교고쿠도님 반갑고 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