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색 연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7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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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PRELUDE -

 

 

왜?

무엇 때문에? 무엇에 의해서? 어디로? 어느곳에? 어떻게?

아직 살려고 하는 것인가, 그건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

아, 나의 친구여, 나에게 노을이 그리 묻고 있구나.

나의 슬픔을 용서하라!

노을이 되었다. 노을이 된 것을 용서하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

 

 

 

 

   1989년 데뷔해서 여전히 순수 미스터리만을 고집하고 있는 아리스가와 아리스. 이번에 나온 '주홍색 연구'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 중 여덟번째 소설이다. 아마도 당신이 미스터리의 팬이라면 이 제목이 참으로 낯익을 것이다. 바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가 데뷔했던 그 역사적 소설의 제목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그것에 대한 패러디이거나 혹은 오마쥬라고 섣불리 판단하거나 단정내려서는 안된다. 소설을 읽고나면 분명히 느끼게 된다. 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하필 명탐정의 대명사인 홈즈의 데뷔작 제목을 가져왔는지. 그 이유는 작품을 넘어서있다. 그러니까 그건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아리스가와 아리스 자체에까지 연결되는 문제라는 말이다. 그가 왜 미스터리를 썼고 꾸준하게 순수 미스터리 소설만을 집착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초심으로 돌아가 말하기. 그게 바로 '주홍색 연구'라는 제목을 붙인 진짜 이유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고 그 지향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자기반영적 작품이다. 

 

 

 

 

 

   -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 -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두 개의 시리즈를 번갈아가며 집필한다는 것은 이제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에겐 에가미가 명탐정으로 나오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히무라가 탐정의 역할을 맡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있다. 그 모든 시리즈에서 작가의 분신인 아리스는 탐정의 조력자이자 수사의 관찰자 와트슨의 역할을 맡으며 학생 아리스가 히무라 시리즈를 집필하며 작가 아리스가 에가미 시리즈를 집필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렇게 두 시리즈는 '뫼비우스의 띠' 처럼 연결되어 있다.

 

 

   '월광게임'으로 시작되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지금까지 네 작품이 나와있고 '46번째 밀실'로 부터 시작된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현재까지 18편이 나와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가 저렇게 적게 나온 것은 애초부터 총 5부작으로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학생 아리스는 이제 겨우 한 편만이 남은 셈이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같은 작가가 썼는데도 스타일이 참 다르다. 일단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첫 작품 부터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등장인물 역시 에가미 아리스 콤비 뿐만 아니라 재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그렇지 않다. 하나 하나가 단막극 처럼 그 자체로 완결된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 화산 분출로 인해 고립된 캠프라는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이었던 '월광게임' 때 부터 사람들이 참 많이 죽어 나갔다. 하지만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그렇게 많이 죽지 않는다. 기껏해야 한 두명 정도다. 그러니까 학생 아리스 시리즈가 주로 연쇄살인을 다룬다면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사건' 자체만 다룬다. 내 생각에 두 시리즈 간의 보다 본질적인 차이는 여기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연쇄살인을 묘사하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그 때문에 트릭 풀이에 더하여 서스펜스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하지만 순수하게 놓여진 사건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저 지금 사건을 수수께끼로 만들고 있는 트릭에만 집중하면 된다. 이 때문에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분위기 주조에도 힘이 쏠리면서 논리 추구적인 면이 약해지는 반면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트릭 하나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논리 추구가 아주 정밀하다. 아마도 이 때문에 작가 아리스 시리즈를 학생 아리스가 학생 아리스 시리즈를 작가 아리스가 쓰는 것으로 설정된 게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서스펜스를 계속 작동시키는 분위기 연출에 있어서는 문학적 공력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이건 현재 국내에 발간된 작품만 읽고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일본 원작에 의해 얼마든지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밝혀둔다.)

 

 

  아무튼 사족같은 이야기이지만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이런 차이들이 있다.

그런데 이 차이를 허무는 작품이 바로 지금 만난 '주홍색 연구'였다. 순수하게 논리로써 사건 해결에만 집착하던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주홍색 연구'에 와서 문득 '문학적 정조(혹은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학생 아리스 시리즈에서도 잘 보지 못했던 그런 문학적 분위기를 말이다. 바로 이 것이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로 하여금 '어, 지금까지의 아리스 작품과는 느낌이 다른 걸.' 하고 느끼게 만들었다. 낯설음은 언제나 그 정체를 보다 더 집요하게 밝히려는 동기가 되게 마련이다. 늘 익숙했던 설정이라도 혹시 가려진 무언가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의심하게도 한다. 그렇게 읽었다. 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어쩌면 아리스 자신의 어떤 결의 같은 작품인지도 모른다고. 그가 내내 추구해온 미스터리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 같은 것을 반영한 작품인지도 모른다고. 왜 이 소설엔 하필 중3 때 고아가 되어 오로지 책을 통해 그 외로움을 이겨나갔던 아케미라는 여학생이 나오는 것일까?  중 3이라는 시기는 아리스 자신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시기가 아니었던가? 그 때 그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미스터리의 장편을 처음으로 탈고하지 않았던가?

 

 

  아케미의 등장을 나는 중 3 시절 아리스 자신의 반영이라 여겼다. 생애 최초의 장편을 쓰던 그 시절의 반영이라고.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주홍색 연구'인 이유도 바로 그 시절의 자신을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더 나아가 오로지 미스터리만 추구하여 이제는 아야츠지 유키토와 더불어 본격 미스터리의 대표작가까지 된 그가 첫 장편을 쓰던 중 3 그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 자신이 평생 천착해온 '미스터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돌이켜본다는 의미에서가 아니겠느냐고.

 

 

 

    -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써의 노을  -

 

 

   '주홍색 연구'에서 주홍색이란 '노을'을 말한다. 그러니까 '노을'이 메인 테마인 셈이다.

하지만 사건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노을은 이 소설에서 추구하는 주제의 상징이며 그 분위기를 집약하는 단어이다. 한 마디로 문학적 은유이며 이 때문에 앞서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문학적 정조를 담고 있다'고 했던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이 소설은 그러한 노을의 의미 혹은 역할을 분명히 한다. 프롤로그와도 같은 부분에서 작가 아리스의 목소리를 빌어 이런 대사를 날리는 것이다.

 

   "오늘 오사카의 노을, 마치 세상의 종말 같아요." (P. 10)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뒤이어 아케미와 정체불명의 범인을 등장시켜 그들 각자에게 노을이 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보여주기까지 한다. 화재에 대한 고통스런 기억이 있는 아케미에게 노을은 '공포' 자체다.(소설엔 그녀에게, 정말 특이하지만, '노을 공포증'이 있다고까지 말한다.)  반면 범인에게는 그동안 망설였던 범행을 결의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소설의 가장 주요한 등장인물들(한쪽은 관찰자, 다른 한쪽은 모든 것의 원인, 그리고 또 다른 한쪽은 범죄자)이 '노을'의 삼각형을 이룬다(파멸을 보는 자, 파멸에의 예감 그리고 파멸을 가져오는 자). 한 마디로 이 프롤로그는 이 소설이 간직한 우주의 중심이 바로 '노을'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데, 왜 '노을의 시간'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노을의 시간'이 그야말로 '미스터리적 시간'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노을의 시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일 것이다. 해질녘 어슴푸레한 미명 아래에서는 사물의 분간이 어렵다. 모든 선명한 것들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그렇게 나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익명과 비밀의 존재가 되어간다. 그렇게 멀리서 내게로 다가오는 존재가 나를 따르는 개인지 아니면 나를 물어뜯을 늑대인지 분간하기 지극히 어려운 시간. 그래서 모든 것을 그저 불안과 의혹의 시선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시간. 그것이 바로 '노을의 시간'인 것이다. 또한 이 시간의 본질인 불안과 의혹은 그대로 미스터리의 본질이기도 하므로 '노을의 시간'은 미스터리적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이 '노을의 시간'을 작품의 주된 테마로 삼은 것은 무엇보다 적절하다 하겠으며 그가 유독 이 시간을 고집하는 것은 앞서 말했던 대로 초심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자신이 천착해온 '미스터리' 자체를 되짚으려 한다는 것 역시 여기에서 드러난다고 하겠다.

 

   왜 이렇게 생각하냐고? 그것은 중요한 등장인물이기도 한 아케미 때문이다.

 

 

 

   -  아케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분신  -

 

 

   아케미는 이 소설의 중심이다. 그녀는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2년전 해변에서 일어난 오노 유우코 사건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고 또 탐정의 역할을 하는 히무라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히무라 - 아리스 콤비와 가장 많은 말을 나누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는 어쩐지 아케미가 가지고 있는 아픔을 덜어주려는 일종의 상담과도 같다. 그래서 어쩐지 '주홍색 연구' 자체가 노을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아케미에게 그 공포증을 지워주는 과정으로도 느껴진다. 스포일러상 말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감안해 본다면 아케미는 노을과 함께 단연 이 '주홍색 연구'라는 우주의 중심이다.

   그런데, 그 아케미가 내게는 그저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실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분신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아케미가 들려주는 그 자신 삶의 모습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실제 삶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실제 삶을 들여다보면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3' 시절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열정적으로 미스터리 소설에 빠져들었으며 그 결과로 지금과 같은 작가로 있게 된 그 첫 발자국이라 할 수 있는 장편소설까지 썼었다. 그건 이 소설의 아케미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노을 공포증'이란 트라우마를 안기게 했던 화재 사건이 중3 때 일어난다. 그녀는 거기서 이모부가 화재에 의해 돌아가시는 것을 목격했고 그로 인해 노을 공포증을 가지고 말았다. 한 마디로 삶이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되는 결정적 시간의 도래가 작가 아리스와 아케미 모두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친숙했던 '개'의 세계가 이제는 전혀 낯설고 날 위협하는 '늑대'의 시간으로 변하는 '노을의 시간'이 둘 모두에게 도래한 것이다. 이 도래의 비슷한 시점이 아케미를 작가 아리스의 분신으로 여기게 된 첫번째 이유였다.

 

 

  뱀다리 (2). 아케미를 아리스의 여성화된 분신으로 보는 것은 그리 무리는 아니다. 이미 그 스스로 작품에서 이미 이름 때문에 종종 여자로 오해된다고 쓰기도 했고 또한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에서도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여성화시켜 묘사한 바가 있다.

                            명탐정 코난 6기 '절규의 수술실' 편에 깜짝 등장한 '아리스가와 아리스'

 

   이렇게 제작진은 작품 속에서 그의 이름이 늘 여자 이름으로 오인되곤 하는 것에 빗대어 아예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미녀로 만들어버리는 재치를 발휘했다.(전공 역시도 영문과^ ^) 아닌게 아니라 '아리스'란 이름 자체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그 '엘리스'를 따온 것이다.

 

 

 

  그런데 그 시기, 작가 아리스는 왜 그토록 미스터리 소설에 빠져들었던 것일까?  바로 이것이 아케미를 분신으로 여기게 하는 두번째 이유가 된다. 그리고 아케미가 가지는 노을의 공포증이 정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깨닫게 한다. 소설에서 아케미는 그 '노을의 시간' 중3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확고의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라 말하기 어렵지만, 에리피 프롬의 책에 끌린 게 동기였어요. 중학교 3학년 겨울에 '자유로부터의 도피'나 '악에 대하여'라는 책을 집어삼킬 듯이 읽었지요. 고압적으로만 느껴졌던 사회에 저도 이런 식으로 반격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P.206) (...) 고독과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도 책만은 저와 차분히 대화를 나누어 준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구원받았는지 몰라요(P. 207)

 

 

   여기서 우리가 밑줄 그어야 하는 부분은 '사회에 대한 반격' 부분이다. 상상해 본다. 작가 아리스의 중3 시절을. 한창 사춘기 때의 그를. 그 시기는 누구나 그렇듯이 사회에서 행해지는 정형화된 삶의 길들임에 멀미를 느끼고 저항으로 충만해 있을 시기다. 흔히들 따라붙는 '질풍과 노도의 시기' 그대로 부모라는 울타리 아래서 그 때까지의 안락한 삶이 이제 세상을 스스로 책임져나가야 하는 그 시기에 이르러 전혀 낯설고 불안한 것으로 변해버린 가운데 오는 스스로 그것을 해소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작가 아리스도 그 시기 그렇게 몸부림을 쳤을 것이며 아마 그 몸부림 속에서 사회에 대해 반격하고 싶다는 생각 역시 들지 않았을까? 바로 그대로 아케미의 저 고백은 그 당시 아리스 자신의 고백이지 않을까? 아케미가 읽었던 저 인문서적들은 그 시기 한창 빠졌던 작가 아리스의 미스터리 소설들을 그냥 살짝 바꿔놓은 것에 불과하고 그는 그렇게 보란듯이 작가로 성공하여 사회에 반격할 것을 꿈꾸며 늘 귀감으로 삼는 엘러리 퀸과 반 다인이 혹은 딕슨 카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첫 장편소설을 써내려 간 것은 아닐까? 바로 이러한 유사점으로 인해 나는 아케미가 그야말로 아리스 자신의 분신이라 여기며 그 아케미가 하필이면 가장 처음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고 할 수 있는 '중3' 시절인 것을 감안해 그가 '초심'으로 돌아가 미스터리 자체를 다시금 음미하려 한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  그래서 아리스, 미스터리라는 게 도대체 뭐야?  -

 

 

   아케미를 아리스의 '중3' 시절의 어린 아리스의 분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아케미가 '히무라 - 아리스 콤비'와 그토록 많은 말들을 나눈다는 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더구나 그 상담과도 같은 대화에서 작가 아리스가 그 자신 생각하는 '추리소설의 본질'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더욱 진중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추리소설이 뭐냐는 아케미의 물음(그것은 또한 과거의 이제 첫발을 딛는 그 자신이 현재의 작가에게 묻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에 작가 아리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꽤 길지만 음미할만한 대목이 많으므로 모두 다 인용해 본다.

 

 추리소설이야말로 최대의 중죄이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에 둠으로써 진상을 해명하고 싶다는 독자의 절실한 욕구를 환기할 수 있다고 소박하게 설명한 작가가 있지만 독자들이 소설 속에 나오는 살인의 진상이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제 생각에... 살인사건이 테마라면 시체가 등장하잖아요. 시체란 '당신을 살해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어도 그 질문에 대답할 능력을 잃은 존재입니다.(...) 시체, 죽은 자는 우리가 아무리 질문을 던져도 절대로 대답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 불가능성이 열쇠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추리소설의 불가능성이란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자에게 이야기를 끌어내는 게 아닐까 싶어요.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거라 확신하는 상대에게, 대답해주지 않을 줄 확신하면서도 거듭 묻는다는 건 안타까운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 이 보다 더 인간적인 행위가 있을까요?  예를 들면 신을 상대로 인간은 대답해주지 않을 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질문을 계속합니다. (...) 잃어버린 시간을 향해 묻습니다. (...) 죽은자에게도 묻습니다. 나를 정말 사랑했나요? 나를 용서해주겠어요. 울며불며 매달려도 대답은 없습니다. 상대는 결코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또다시 묻고 말아요. 추리소설은 그런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지도 모릅니다.(P.210 ~ 211)

 

   

    그는 말한다. '추리소설이란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존재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듣지 못할 해답을 그렇게 계속 추구하는 과정일 뿐이라고...' 말이다. 이 말은 또한 다음과 같은 말로도 표현된다.

 

 사람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기도를 바치는 것일까?

 기도, 그것은 탐정이 진상을 갈구하는 정열과 비슷하지 않은가? (P.245)

 

    

     이렇게 수십년간 미스터리 하나만을 천착해온 작가는 '노을의 시간'이 도래함과 더불어 거기에 대한 저항과 그 스스로 공포와 불안을 해소하려는 심정에서 미스터리에 빠져들고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딛게까지 되는 과거의 자신에게,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추리소설은 이런 것 같구나.'하고 넌지시 충고를 보내는 것이다.(이것은 또한 초심으로 돌아가 미스터리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충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도래한 '노을의 시간'. 모든 것이 의혹과 불안으로 가득찬 미지의 것으로 변해버린 그 시간 속에서 과거의 아리스 자신이 그토록 추리소설(미스터리)을 사랑했던 것은 혹시나 그 모든 것을 낱낱이 밝혀 줄 하나의 즉각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란 기대에서 그랬던 것은 아닌지 어쩌면 지금까지도 여전히 추리소설이라는 것을 그처럼 '정오의 시간'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추리소설이 그러한 '정오의 시간'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인정하는 담담한 고백인 것이다. 삶이라는 것 자체가 늘 '노을의 시간'이고 작가 역시 여전히 그 시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존재이기에 그렇다. 이것은 아리스가 왜 각각의 시리즈 모두에서 '콤비'를 등장시키는가와도 관련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탐정과 관찰자의 역할 관계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 아리스 자신의 일종의 자아 분리이다. 감성과 지성의 분리. 사회적 관계를 맺는 사교와 홀로 내면에 침잠하여 사유하는 추리의 분리. 그렇게 아리스는 불완전한 그들을 하나로 묶어 활동하게 함으로써 작가 자신 역시 진실을 온전하게 체득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또한 삶 자체가 '노을의 시간'의 연속이라는 것은 이번 소설에서의 살인 무대가 서로 반대되도록 설정되었다는데서 암시된다. 여기에는 두 개의 살인 무대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요헤이가 살해당한 11월의 동터오는 새벽의 유령맨션이고 다른 하나는 오노 유우코가 살해당한 2년전 6월의 5시, 노을이 지기 직전의 해변인 것이다. 그렇게 이 무대가 밤과 낮, 폐쇄된 곳과 열려진 곳, 남자와 여자 모든 면에서 반대를 이루도록 설정되어 있다. 세계 자체가 서로가 다른 역할을 맡는 '아리스 - 히무라' 콤비 처럼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과 콤비를 통해 아리스가 드려내려 하는 것은 역시나 단 하나다. 추리소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도하는 심정으로 애타게 진실을 찾아 했던 질문을 되묻고 하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

 

   비록 정오의 시간이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지라도 드러나지 않는 태양의 길을 찾는 무토베 처럼 진실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지 않는 것. 바로 그 과정만이 추리소설의 의미이며 이로써 수십년 넘게 오로지 추리소설가로 지내온 작가 아리스 자신 역시 결의하는 것이다.

   이 진실에 대한 기도를 영원히 멈추지 않겠다고...

 

  왜?

  바로 거기에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노을의 시간 속에서 여전히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대답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비록 정오의 시간을 가져다 줄 환한 햇살은 되지 못하겠지만

  그저 작은 촛불이라도 되어서 그 미명 속에서 떨고 있는 작은 영혼에게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수만 있다면 추리소설을 통한 기도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그것은 사명과 같다고...

 

  때문에 아리스는 이 작품에서 이례적이라 할 만큼 아케미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본질이 단순히 해결이라는 빛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당한 사람의 곁에 서서 한 개의 촛불을 드는, 그 아픔을 생각하고 위로하는 기도이기에... 작가 아리스는 이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이 믿는 추리소설의 사명을 끝까지 다하려고 한다. 아케미와 같은 그들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 위해서...  

 

  있지요, 아케미 양. 화성으로 가는 로켓을 탈 수 있게 되면 다 함께 떠나지 않겠어요? 그곳에서는 노을이 파랗다고 해요.(P.374)

 

 

 

  이래서 나는 작가 아리스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의 상식은 추리소설(미스터리)이 순수하게 쾌감 위에서만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그것을 비웃는다. 그건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의심나면 '주홍색 연구'를 읽어보라. 추리소설도 문학의 어엿한 하나의 갈래이며 추리소설이든 문학이든 그 모든 것의 바탕에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이든 타인이든 그것을 향한 '위로'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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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16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스가와 아리스다 ㅠㅠㅠ
저는 항상 이작가의 책은 고민하다, 고민하다 안 산답니다.
정말 작가도 좋아보이고 책도 재밌어 보이는데!
헤르메스님의 리뷰를 계기로 한 번 시작해봐야겠어요!

ICE-9 2012-01-17 02:28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빌려서 보는 것도 한 방법이에요^ ^
폐쇠된 구역에서 한정된 용의자들 가운데 범인찾기를 좋아하신다면 '외딴섬 퍼즐'을 순수 논리적 추리면을 좋아하신다면 작가 아리스의 '46번째 밀실'을 추천드리고 싶네요. 아리스의 트릭들이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공정하게 정직하게 하나의 논리로 치밀하게 만들어 가는 걸 지켜보는 게 전 아리스의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답니다. 언젠가 소이진님의 아리스 얘기 기다리고 있을게요^ ^

이진 2012-01-17 02:42   좋아요 0 | URL
어머, 헤르메스님! 이 시간까지 주무시지 않고 뭐하시는 거여요 ㅎㅎ
제가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말이지만요.
어서 우리 자도록 해요 ㅋㅋ
 
살인은 없었다 - 형사 외르겐센의 지식 수사 소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게오르크 요나탄 프레히트 지음, 안성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1985년 5월...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의 형사보 외르겐센은 수도 경찰의 지방 파견 프로그램(SASOWA)의 일환으로 외딴섬 릴레외로 5개월 동안 파견된다. 작고 평화로운 외딴섬에서 강력계 형사인 그가 무슨 할일이 있나 싶었지만 명령이니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는 생물학자인 여자친구의 부탁대로 그 섬에 사는 동식물들이나 조사하면서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편하게 보내자는 생각으로 그 섬에 오게된다.

  그런데 그 섬에 오자마자 예상과는 달리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라르센 노인의 장례식장 부터 인도된다.

 

  모든 것엔 동전의 양면이 존재한다. 목가적인 작은 섬에 와서 가장 먼저 겪는 일이 낡아 빠진 자동차로 공동묘지에 실려가는 것이라니. 그것도 아침도 먹기 전에...(P.19)

 

  아무리 평화로운 섬에 와서도 그동안 강력계 형사로서의 경험을 무시할 수 없었던 그는 '말테'라는 평생 그 섬에서 경찰로 살아온 이에게 부검을 했는지 물어보고 '릴레외에선 200년간 살인 사건이 한 번도 없었다.'라는 말과 함께 부검을 하지 않았다고 하자 독살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부검도 없이 매장하냐며 반문한다. 여지껏 평화롭게 섬에서 잘 지내온 정착민인 그에게 일흔 세살 노인의 심장마비란 그 무엇보다 자연스런 죽음일 뿐인데 이제 갓 들어온 외지인이 이렇게 항의하니 그런 의문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그저 너무도 황망스러워서 그는 차마 뒷 말을 잊지 못한다.

 

  외르겐센 안스가르 형사는 온갖 성가신 것을 가져온다는 '북쪽의 사도'를 뜻하는 안스가르란 이름 그대로 200년 넘게 조용하고 평화롭기만한 섬 릴레외를 의혹과 조사를 가져오는 미스터리의 공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결국 외르겐센은 그 노인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릴레외 섬에 얽힌 나폴레옹 전쟁 당시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고 덴마크의 통합 과정에 있어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찾아낸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살인은 없었다'는 무려 692페이지에 이른다. 미스터리 소설 치고는 정말 압도적인 분량이 아닐 수 없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대부분 출판사들은 상, 하 양권으로 분권으로 내놓을 터인데 21세기북스는 고맙게도 단권으로 내놓았다. 덕분에 경제적 부담은 줄었지만 지하철에서나 혹은 가지고 다니며 읽을 때는 적잖이 불편했다. 이럴때는 좀 애매모호하다. 대부분의 독서 시간을 길바닥에서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서 편하게 휴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면 또 분권으로 인한 가중되는 경제적 부담이 신경쓰이고 고맙게도 단권을 해주면 이런 두께는 집에서 밖에는 읽을 수 없어 완독에 하염없이 시간이 걸리게 되고... 참 어느 것 하나 딱 이거다 하고 결정하기 어려운 사안이다. 외르겐센이 말했던 동전의 양면 그대로다.

 

  아무튼, '살인은 없었다'가 이렇게 많은 분량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다. 바로 프레히트가 외르겐센이 릴레외 섬에서 있어야 하는 5개월을 최대한 그대로 담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프레히트가 공을 들이는 건 이 소설을 미스터리로 알고 다가가려 했던 분들에겐 미안하지만 미스터리가 아니라 외르겐센이 섬에서 보내는 일상의 디테일한 복원이다. 그는 외르게센의 하루 일과중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필요한 것은 그 무엇이든 세세하게 담아내려 애쓴다. 그렇게 우리는 외르겐센의 수사과정에 관찰자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상에 동반자로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미스터리만을 기대했던 분들이라면 이 동반의 여정은 여지없이 지루해질 수 있다. 하지만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를 적당히 버리고 보면 어느새 외르겐센의 일상에 취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프레히트의 묘사가 좋다.

 

  그런데, 왜 그는 미스터리를 표방하면서도 이렇게 공들여 섬에서의 그의 일상을 복원하려는 것일까? 내 생각엔 이것이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포인트 같다. 여기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책의 각 장마다 그가 붙인 소제목이다.  프레히트는 각 장의 소제목에 독특하게도 온갖 동물이나 곤충의 이름을 갖다 부텼다. 쇠돌고래, 장수하늘소, 고양이, 갈매기 등등...

 

 

   옆의 커버는 독일 원서의 것인데 보면 알겠지만 소제목에 나오는 것들을 하나의 도감 처럼 표현하고 있다. 표지란 것이 작품의 핵심적인 분위기나 주제 같은 것을 응축해 표현하는 것임을 상기해 본다면 소제목이 이렇게 도감을 보듯 동물과 곤충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뭔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 이것과 외르겐센의 일상에 대한 충실한 복원은 어떻게 연결이 되는 것일까? 그건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는 릴레외 섬에 간직된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고 덴마트의 통합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나는 여기서 소설의 마지막에 밝혀질 비밀을 말하고 말았는데 개인적으로 이것을 스포일러라고 여기진 않는다. 여기에 대해 뭐라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당신 역시 이 책을 읽게된다면 분명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는 것은 확신한다.)

 

  프레히트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있었던 세 나라의 통합 문제를 새삼 끌어들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유럽 통합의 문제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외르겐센의 집념으로 밝혀지는 역사적 진실은 이른바 '베르나도테 작전'으로 당시 베르나도테는 노르웨이와 통합하여 나폴레옹에 맞서려 했던 스웨덴을 치기 위해 프랑스, 네델란드, 스페인 덴마크 연합군을 이끌고 덴마크에 주둔해 있었다. 그런데 이 베르나도테는 그 후에 바로 적국인 스웨덴의 국왕이 되는데 과연 어떻게 해서 나폴레옹의 명령을 듣던 프랑스 군의 사령관이었던 그가 대적하고 있는 스웨덴 국왕이 될 수 있었을까? 외르겐센은 바로 그 까닭을 릴레외에서 알게되는 것이다.

 

 굉장히 드라마틱해 보이는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이다. 나폴레옹

처럼 일반 사병에서 시작했

던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

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사령

관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

전적인 인물이었다. 육군원

수가된 그는 출세과정이 여

러모로 나폴레옹와 유사하

여 자주 나폴레옹의 라이벌

로 여겨졌으나  덴마크에서

그를 배반하고 적국 스웨덴

의 황제가 됨으로써 공식적

으로 나폴레옹의 라이벌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그는 배신자가 되

었지만 스웨덴으로서는 구

세주가 되었다.

그는 스웨덴의 국왕이 되자

마자 덴마크에서  나폴레옹

의   군대들을 몰아  내었고

노르웨이를 통합, 스웨덴연

방을 만들어 러시아와 프랑

스의 협공으로  부터   보다

안전해질 수 있도록 만들었

다.  베르나도트에  의해 해

방된 덴마크는   그 때도 여

전히 독립국이긴 했지만 바

로 코앞에 스칸디나비아 반

도의 대제국이 세워지고 있

는 마당에  그 독립을  문자

그대로 유지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결국 독립국이란 명목상일 뿐이고 연방의 사실상 지배를 받는 국가로 전락한다.

  외르겐센과 함께 그 진실을 찾아가는 은둔의 노학자 크리스텐센이 이렇게 안타까움을 슬회할 정도로...

 

   사실 우리 통합 국가의 마지막의 시작이었지. 현재는 북해지역에서 스웨덴이 대장 노릇을 하지. 그리고 우리는 거의 함께 뛰는 경기의 주자가 되지 못해. 그 때부터 우리 덴마크는 놀이의 대상이 되어 버렸어. 처음에는 베르나도테에 의해서 그랬고 그 다음은 비스마르크, 그리고 히틀러. 내가 짐작하기로 그 다음은 유럽연합일 것만 같아(P. 664)

 

  한 때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체를 지배했던 대국이었으나 이제는 힘없는 작은 나라로 전락해 버린 덴마크... 크리스텐센의 저 안타까움의 술회는 사실 강대국 사이에 끼여든 모든 나라들이 겪는 아픔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당한 하나의 주체로서 협상이 아니라 거의 강요에 의해 그들과 한데 섞여야 하는 우리나라와의 닮은꼴 때문에 덴마크가 그리 멀리 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

 

  크리스텐센의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프레히트는 유럽연합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나라들이 독자성을 잃고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통합이라는 것이 덴마크의 어두웠던 과거 역사처럼 온전한 주체로서의 참여가 아니라 약하기에 마지못해 끌려들어간 억류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강제된 통합에 대한 반감이자 오히려 그 때문에 온전한 주체가 서로 대등한 가운데 조화롭게 참여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통합임을 말하기 위해 프레히트는 앞에서 말했던 692페이지에 걸쳐 5개월간의 외르겐센의 일상을 충실히 복원하는 것이며 소제목을 하나의 자연도감 처럼 동물과 곤충의 이름으로 단 것이다.

 

   이 소제목 때문에 나는 찰스 다윈의 '비글호의 항해기'가 생각났다. 이 책에서 다윈은 항해 도중 발견한 동물과 식물들을 상세한 스케치까지 더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갈라파고스 섬에 대한 생태에 대한 그의 묘사는 유명하다. 독일 원서의 표지도 그렇고 프레히트가 이렇게 소제목을 일부러 도감처럼

달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어떤 '유(類)적 존재'로 환원되지 않는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고유한 개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도감에서 그 동물 하나 곤충 하나를 온전히 그 존재 자체에 바탕해서 설명을 하듯 그렇게 프레히트 역시 '살인은 없었다'를 통해 독립성과 고유성이 지워진 통합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생생히 살아나는 개체성으로써 일곱빛깔의 무지개 처럼 조화로운 통합이 진정한 하나임을 읽는 이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 이러한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는 것이다.

 

  때문에 외르겐센의 5개월간의 일상을 그렇게 세세한 것 하나까지 복원하는 것도 도감에 나오는 동물들의 생태에 대한 설명과 같은 것이다. 어떤 기준에 의해 다듬어지고 주조되는 개체성이 아니라 그 자체 하나로 온전하고 전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가급적 가감없이 외르겐센의 일상을 복원한 것이다. 이렇게 도감 방식의 소제목의 차용과 '딮 포커스'식의 일상의 세밀한 복원은 강요된 통합에 대한 저항과 진정한 통합에로의 지향 때문에 비롯되어진 것이었다.

 

   얼마전에 날치기로 통과된 FTA 때문에 우리나라도 강요된 통합의 대상이 되었다. 더구나 FTA는 오로지 미국식 기준만 살아남는 한 나라의 고유한 개체성을 지우는 조약이다. 크리스텐센의 말마따나 우리 나라를 그들더러 마음대로 놀라고 놀이터로 내어주는 꼴이다. 과연 그렇게 무리하게 우리가 가진 독자성을 없애고 아메바처럼 들러붙는 것이 좋은 일일까? 프레히트가 692페이지에 걸쳐 거거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고 있는지는 더 이상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전에 아주 인기있었던 미국 드라마 '엑스 파일'의 한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거기서 한 유전적으로 돌연변이가 된 인간이 스컬리에게 다가와 멀더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생각해 봐요. 지구의 모든 사람이 저 멀더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당신이랑 멀더가 아무리 근사하게 생겼다고 해도 그렇게 다 같은 얼굴이 되면 과히 보기가 좋지만은 않을 거요. 이제 왜 우리 같은 존재가 있는지 알겠오? 자연이 그런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오. 자연은 정상성을 거부한다오!"

 

   저마다 가진 고유의 개체성이 말살된 획일화의 끔찍함이 비단 존재에만 그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그것은 똑같이 통용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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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15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이름도 거창한 지식 수사 소설이라,
너무나 멋져보이는데 제게는 벌써 리뷰부터 막히기 시작한다는 ㅋㅋㅋ

ICE-9 2012-01-15 23:57   좋아요 0 | URL
아, 이런 제가 너무 어렵게 써 버렸나요?
반성, 반성...
아무래도 생소한 덴마크의 역사인데다, 유럽통합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으니...
그렇게 되었나 봐요. 앞으로는 좀 더 쉽게 쓰도록 고민해봐야 겠네요.^ ^;
 
<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자, 드디어 2012년의 첫 신간 추천의 시간이 다가왔군요.

   이 첫 시작을 함께 할 작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계속 모으고 있는 대산세계문학총서...

   저번달엔 카늑의 '이스탄불을 듣는다'로 절 놀래키더니

   이번에는 정말 놀랍게도 맬컴 라우리의 초 걸작

   '화산 아래서'가 나왔습니다.

 

   커헉!

   신간 검색을 하다가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제게서 바로

   터져 나온 비명입니다. 세상에 이 책이 나올 줄이야...

   오매불망 기다렸던 작품 중의 하나를 드디어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새해 첫 신간 추천의 그 가장 처음 시작에

   마땅히 자리잡을만 합니다.

 

 

   맬컴 라우리는 이 작품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별 볼일 없는 작가였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져 있었다.'라는 바이런 처럼 맬컴 라우리 역시도 이 작품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단번에 얻게되었습니다. 멕시코에 있는 영국 영사이자 알코올 중독자인 주인공 제프리 피먼의 마지막 날, 단 하루만(하필 그 날을 '죽은자들의 날'로 설정함으로써 그 비극성을 더 강조하고 있죠.)을 소설은 그리고 있는데, 특히나 전쟁 중에 씌여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문체와 환상과 현실의 오가는 초현실주의적 분위기가 주목을 끄는 작품입니다. 거대한 문명의 파국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개인을 담아내는 이 작품은 그래서 전쟁 중에 겪었던 작가의 고통 그리고 전쟁을 바라보는 작가의 자의식이 그대로 투영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자전적입니다. 라우리 자신 또한 이 작품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에 해당한다고 말한 바 있죠.

 

 

 

   여기에서 보듯 그는 애초에 이 작품을 신곡 처럼 3부작중 1부로 구상했었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그만 사망하는 바람에 뒷 편은 나오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라우리의 백조의 노래 입니다. 백조는 죽을 때 단 한 번 우는데 그 노래소리가 더없이 아름답다고 하죠. 정말 그대로입니다. 더구나 이제는 말도 안되는 재판으로 양심수라는 지위까지 가지게 된 정봉주님이나 SNS 사용자들에 대한 검찰의 무자비한 고소 남발에서 보듯이 거대 시스템 아래에서 억압받고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개인들이 점점 확산되고 있는 지금 이러한 피먼의 거대 문명에 맞선 개인의 (비록 초현실주의적이지만) 투쟁은 분명 동시대성 또한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긴 겨울밤을 숙독의 뿌듯함으로 채워줄 이 소설을 정말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이 소설은 1984년 존 휴스턴에 의해 영화화 된 바도 있습니다. 영화도 원작의 주제를 잘 살린 훌륭한 작품인데 우리나라에도 비디오로는 들어왔지만 DVD로는 발매되지 않았습니다. 오른쪽 표지는

크라이테리온 컬렉션으로 나온 DVD의 표지입니다. (영화를 혹시 보실 분들에게는 가장 추천드리는 판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라움은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더군요.

   또 하나의 놀라운 책의 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스터리의 진정한 대명사, 엘러리 퀸이 돌아온 것이죠.

   그것도 빈티지 스타일에 제대로 된 번역으로 말이죠.

 

 

 

 

 

 

 

 

 

 

 

 

 

 

 

 

 

   이제 더이상 그 옛날 시그마 북스를 찾으러 다닐 필요는 없어진 것 같습니다. 저는 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를 읽어보지 못해서 일단 거기부터 시작했는데 다시 읽어보는 엘러리 퀸 정말 좋더군요. 벌써 세 권까지 나왔습니다. 발간에 정말 속도를 내고 있는 듯 해요. 이 상태로라면 개인적으로 퀸의 최고 걸작으로 꼽는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도 금방 나올 수 있을 것 같군요. 아무튼 아직 퀸을 접해보지 못한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해드립니다. 무엇보다 퀸의 시작은 그의 '국명 시리즈로 부터'라는 말도 있으니, 읽어보시면 왜 퀸, 퀸 하는가 이해할 수 있으실 듯 해요.

 

 

 

    거기에 제가 또 좋아하는 작가인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과 '산마처럼 비웃는 것'의 미쓰다 신조의 정말 읽어보고 싶었던 '도조 겐야' 이전의 데뷔작 역시 나왔습니다. 저는 몰랐는데 미쓰다 신조도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있듯이 '도조 겐야' 시리즈와 '작가' 시리즈가 있는 모양입니다.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은 바로 그 작가 시리즈의 첫 작품이고 그의 가장 처음 데뷔작이라고 합니다. 그는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작가 아리스 시리즈에서 실명으로 등장했듯 그 역시 여기에서 미쓰다 신조로 등장하며 그것도 도조 겐야를 집필중인 모습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이런 소개글을 보니 도조 겐야 시리즈의 매력에 푹 빠진 저로서는 정말 읽고 싶지 않을 수가 없는데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으니 정말 걱정이로군요. 아무튼 조만간 꼭 벗해볼 생각입니다. 아예 신간평가단 작품으로 선정되면 더 좋겠구요. 

 

 

 

 

 

 

   발간만 되면 늘 추천하는 해리 보슈 시리즈. 이번에 그 일곱번째 작품이 나왔습니다. 특히나 이 작품이 주목을 끄는 것은 여기엔 해리 보슈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왜 예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블러드 워크'란 영화에서 연기하기도 했었던 테리 매케일럽도 나오고 또 '시인'의 주인공 잭 매커보이까지 다 나온다는 점입니다. 한 마디로 마이클 코넬리의 올스타전 같은 작품이라 하겠네요. 좋아하는 캐릭터를 한 작품에서 모두 만난다는 것은 팬으로썬 지극히 반가운 일이죠. 이들이 어떤 앙상블을 보여줄 지 기대가 됩니다. 하지만 마이클 코넬리의 책은 한 번도 신간평가단 도서로 선정된 적이 없으니... 결국은 또 시간이 허락할 때 벗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늘 레이먼드 챈들러와 로스 맥도널드 사이에서 부유하는 저로서는 하드보일드 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팬인데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 같습니다. 연구서인데 어째서 소설 파트에 들어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검색이 되길래 과감하게 추천 신간으로 꼽아 보았습니다.

 

  저 역시 예전에 로버트 크레이스의 '데몰리션 엔젤' 리뷰할때 미국의 하드보일드 역사를 얘기할 때 그 중심에 '가족'이 있고 그것이 어떻게 각 대표작가마다 다르게 나타나는가 썼습니다만 그에 대해 아주 전문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책을 이제 만나게 된 것 같습니다. 하드보일드에 대한 제 개인적인 느낌을 이 책을 통해 제대로 정리해보는 것도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것 같군요.

 

 

 

 

 

  그리고 또 한명의 새로운 하드보일드 탐정을 만납니다.

 스스키노 탐정이라고 처음 들어보는데 벌써 12편이나 되는

 작품이 나왔다고 하는군요. '탐정은 바에 있다'는 그 중

 두번째 작품이라고 합니다. 배경이 삿포로인데다

 그것도 함박눈이 펄펄 내리고 있는 밤의 '바'라니...

 분위기만으로도 정말 매혹적입니다.

 

  뜨근한 전골 국물에 정종을 기울여 가며

 호젓하게 벗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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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08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라, 헤르메스님소설 신간평가단이셨군요.
역시 그 정도 리뷰로 당선되지 않았다면 저는 알라딘을 미워했을 거에요 ㅋㅋ
미쓰다신조의 신작은 정말 구미가 당겨요.
아, 요즘 돈도 없는데 살 수도 없고 이렇다 저렇다 하고있죠..
이번달에는 추리와, 하드보일드로 구성된 페이퍼인걸요.
그건 그렇고, 첫번째 책을 그렇게나 추천하시니 어찌 안 읽어볼 수 있겠습니까!

ICE-9 2012-01-10 00:53   좋아요 0 | URL
추천 페이퍼가 하드보일드와 추리로 집중되는 것은
제가 일부러 이 서재의 특성을 그 쪽으로 하려는 의도도 있어서 그래요.
장르 소설들은 그저 재미만 추구하는 통속소설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많아서 개인적으로는 그것만이 아니라 순문학 처럼 작가의 주제와 깊이
역시 담겨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거든요. 아무튼 그런 생각으로 서재를
꾸려나가고 있는 중이랍니다. 하하^ ^
'화산 아래서'는 지금 소이진님이라면 정말 잘 맞을 것 같네요.
남들이 정해놓은 길이 아닌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려는 그런...
난해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벗하면 남는 것이 많은 작품이에요^ ^

마녀고양이 2012-01-10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마쓰다 신조와 해리 보슈는 패스랍니다... ㅋㅋ
아아, 전 <잘린 머리~> 맘에 안 들었어요. 그리고 해리 보슈의 고독한 (개)폼이 맘에 안 들어요.... (이 댓글을 양철나무꾼님이 보지 말아야할텐데... 호호.)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는 거의 미친듯이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X,Y,Z 시리즈도요(주인공은 다르지만요..). 라이츠빌 시리즈를 못 읽어서 거기 도전해볼까 하는데, 국명 시리즈가 저렇게 제대로 나온다면, 다시 혹할 밖에요.

그리고...... 헤르메스님께서 극찬하신 맬컴 라우리의 작품은 당근
장바구니행입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려요!

ICE-9 2012-01-13 02:08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진정한 미스터리 팬으로서의 시작은 엘러리 퀸이었습니다. 지금도 해문의 팬더추리걸작 시리즈중의 하나로 보았던 '이집트 십자가 살인사건'의 기억이 선명하네요. 그게 엘러리 퀸과의 처음 만남이었죠. 그리고 그 때 제 주위의 홈즈 운운하는 아이들을 무시하기 시작했었죠. 진정한 추리를 엘러리 퀸이야 라고 하면서^ ^... '화산 아래서'는 예전에 번역을 기다리다 지쳐서 영문으로 접했는데 그 때도 감동이었습니다. 마고님 마음에도 드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
 

 

  미야베가 뭔가 달라지고 있다...

  그것을 느꼈던 것은 작년에 나온 '영웅의 서'를 읽었을 때였다.

 

 

   표면적으로 '영웅의 서'는 그녀의 전작 '브레이브 스토리'를 다시금 더한층 업그레이드 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에서도 분명히 연속성이 느껴지지만('영웅의 서'라는 제목은 '브레이브 스토리'에서 '브레이브'가 '영웅'으로 '스토리'가 '서(書)'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인물의 설정이나 왜 환상의 세계로 뛰어드느냐 하는 것 등등 여러가지 면에서 많은 유사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일 뿐이고 더 깊이 들어가 살펴보면 '영웅의 서'가 결정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은 '브레이브 스토리'에서는 그 환상의 세계가 현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로 단순히 묘사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영웅의 서'에선 왜 환상의 세계(보다 정확한 용어로 말하자면 '환상성')이 그러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 그 원인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웅의 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환상성'을 담는 중요한 틀이 되는 '이야기' 자체를 끌고 들어온다. 그리하여 미야베 미유키는 '이야기'라는 것 자체를 매개로 '환상성'이 현실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지는 것이며 오히려 현실 세계마저도 '환상성'을 바탕으로 구축되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현실이라는 것이 그대로 닫혀진 폐쇄적 절대 세계가 아니라 '환상성'에 의해 열려진 하나의 잠재적 과정의 세계라는 것을 밝혀 자신이 속한 세상을 유일하게 존재하는 절대적 세계로만 인식했을 때 찾아올 수 있는 세계로 인한 상실과 아픔을 그렇게 그 세계 역시 단순히 하나의 가능적 세계임을 밝혀 그 담장 너머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치유하는 것이다.

 

 

 

 

 

 

 

 

 

 

 

 

 

   미유키의 새로운 판타지 '영웅의 서'는 바로 그러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렇게 '영웅의 서'가 '브레이브 스토리'와 갈라지게 된 것은 미유키가 그 소설에서 하나의 상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브레이브 스토리'에서 '환상성'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개인의 아픔 때문이었지만 '영웅의 서'에선 실종되어 버린 자신의 오빠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그렇게 타인을 위해 들어간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개인의 아픔'에서 '상실된 타인의 구원'으로의 테마 자체의 진화로 인해 '영웅의 서'는 결정적으로 '브레이브 스토리'와 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미야베 미유키가 뭔가 달라지고 있다고 느꼈던 것도 바로 여기서였다. 그 때까지 작품에서 내가 느꼈던 미유키는 자신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영웅의 서'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아픔이 아닌 타인의 아픔을 어떻게 보듬어 안고 치유할 것인가에 대해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 그 다음 작품 '고구레 사진관'이 나왔다.

 

   고구레 사진관을 읽고나서 '영웅의 서'에서 받았던 느낌은 이제 확신으로 바뀌었다. 왜냐하면 '고구레 사진관'은 '영웅의 서'에서는 일종의 대략적 스케치 정도로 남아있었던 타인의 아픔에 대한 치유라는 테마가 정면에서 다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구레 사진관'은 '영웅의 서'와 더불어 새로운 곳으로 발걸음을 떼려 하는 미유키를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이 '고구레 사진관'은 그 걸음에 대한 미유키 자신의 하나의 선언으로 보였다.

 

   내게 그것은 특히나 '고구레 사진관'이라는 제목 자체에서 느껴졌다.

 

   '고구레 사진관'이라는 제목은 나에게 다른 어떤 작품을 연상시켰다. 그 작품은 바로 마츠모토 세이초의 초기작이자 1952년 아쿠타카와 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한 '어느 '고쿠라 일기'전' 이었다. '고구레', '고쿠라' 어떻게 좀 비슷하지 않은가? 미유키가 일부러 '고쿠라'와 비슷한 제목을 쓴 건 아닐까 의혹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 이 '어느 '고쿠라 일기'전'이 그녀 자신 직접 만들다시피한 '마츠모토 세이초의 걸작 단편 컬렉션'에서 그 첫 작품으로 그녀 스스로 선택했던 작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미유키의 별명중 하나가 '세이초의 장녀'라는 것은 이제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만큼 미유키는 세이초를 존경한다. 그녀 스스로 그의 작품을 본받아 작품을 써왔다고 밝힌바도 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새로운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구레 사진관'이 마츠모토 세이초의 거의 첫 시작이라고 해도 무방한 '어느 '고쿠라 일기'전'과 제목 뿐만이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고구레 사진관은 아주 낡은 사진관이다. 현대적으로 변해버린 시가지에 그 사진관은 시대를 잘못 만난 것처럼 과거의 낡은 유물과도 같이 존재한다. 사람들마저 그것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할 정도다. 바로 거기에 주인공 에이이치의 가족이 이사온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사진사인 것도 아니다. 평범한 회사원인데도 그 낡디 낡은 건물의 매력에 빠져 '사진관'을 살림집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고구레 사진관'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하나의 상징 같은 것으로 제시된다. 그것은 거기에 나온다는 유령 처럼 사라진 것의 재림이자 상실했던 것의 귀환 같은 것이다. 이것은 세이초의 '어느 '고쿠라 일기'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소설에서 '고구레 사진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사라져 버린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전편(傳便 : 간단히 개인적인 편지 같은 걸 전하는 사람으로 우체부는 아니다.)'이다. 소설의 주인공 고사쿠가 결정적으로 작가 오가이의 잃어버린 '고쿠라 일기'를 찾으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그가 어릴때 자기집 셋방에 살았던 할아버지의 직업이 '전편'이었기 때문이다. 고사쿠는 그 '전편'인 할아버지가 일하러 갈 때 마다 딸랑딸랑 울리는 방울 소리에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있으며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렇게 존재하지 않게 된 '전편'이라는 직업에 대해 그리워한다. 그러다가 선배의 소개로 우연히 오가이의 '전편'에 대한 추억담을 읽게 되고 그 역시 자신처럼 그 사라져 버린 '전편'을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있음에 동병상련을 느껴 오가이의 잃어버린 '고쿠라 일기'를 찾아나서는데 전 생애를 걸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구레 사진관'과 '전편'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듯이 두 작품은 모두 상실된 것을 다시 되찾고자 하는 것에 공통점이 있다. '고구레 사진관'은 역시 사진이 주 소재다. 그것도 평범한 사진이 아니라 심령 사진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미스터리를 지향한다. 주인공 에이이치는 우연히 이상하게 찍혀진(가족이 한데 모여 웃고 있는 뒤로 그와 똑같은 사람들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그런) 사진의 비밀을 풀었다가 소문이 나서 본격적으로 의뢰가 밀려드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심령사진 명탐정이 된다. 그렇게 그는 모두 네 개의 에피소드에서 그 각각의 심령 사진에 얽힌 사연을 찾아 그 묶여진 '한의 매듭'을 푸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에이이치의 일은 세이초의 고사쿠가 하는 일과 아주 비슷하다. 사연을 알 수 있을만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에 담겨진 타인의 아픔을 알게되고 그것을 들어줌으로써 타인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다. 미유키의 고구레가 세이초의 작품과 다르다면 여기가 다르다. 그러니까 탐문하고 상실된 것을 회복하는 과정은 비슷하지만 세이초의 그것이 미유키의 전작 '브레이브 스토리' 처럼 오로지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던 개인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에 그쳤다면 미유키의 '고구레'는 어디까지나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이다.

 

  같은 시작이나 지향점은 이렇게 차별을 둠으로써 오히려 미유키는 자신의 새로운 시작을 더욱 공고히 한다. 아마도 이 때문에 탐정역을 맡은 에이이치를 '영웅의 서'의 주인공 '유리코'와 똑같이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아 순수한 '청소년'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코도 에이이치도 그들이 청소년이라서 타인의 상처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니다. 유리코가 그렇게 된 것은 오빠의 실종 때문이었다. 즉 본래적으로 상실을 간직한 그녀였기 때문에 같은 상처를 가진 이들을 제 아픔 처럼 품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에이이치도 마찬가지다. 그 또한 메울 수 없는 상실을 간직하고 있다. 네 살때 인플루엔쟈로 죽어버린 여동생 '후코'가 그것이다. '고구레 사진관'도 어떻게 보면 '영웅의 서'와 비슷하게 후코로 인해 새겨져버린 상실을 치유해가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구레'는 '영웅의 서' 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유리코의 오빠는 돌아올 수 있는 존재지만 후코는 절대 돌아오지 못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근본적으로 치유가 불가능한 상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구나 그 상실은 언젠가는 그 누구에게라도 도래할 상실이 아니던가? 그렇게 시간문제일 뿐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가 간직한 상실에만 골몰하여 스스로를 고립시킬 것인가? 아니면 도래할 상실의 예감으로 그저 불안에만 떨고 있을 것인가?

 

   바로 이 질문에서 미유키는 대담하게 한 발을 더 뻗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래했거나 도래할 상실 앞에서 어쩌면 무모하고 지나치게 낙관적일지도 모르지만 타인에게로 손을 뻗어 그들의 상실을 치유해 줌으로써 그 새겨진 상실과 도래에 대한 불안을 극복해가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이이치의 동생 '피카'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인 것이다.

 

  사실 이 '후코'란 이름 때문에 생각난 것이지만 이러한 에이이치의 모습은 이 소설이 처음이 아니다. 바로 미유키의 전작 가운데 이미 한 번 나온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최고 걸작 '화차'와 '이유' 사이에 나왔던 일본 SF대상까지 받았던 1997년작 '가모우 저택사건'에서 말이다.

 

 

  '가모우 저택사건'은 '타임슬립' 장르물이다. 주인공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한 사람에 이끌려 과거 일본의 가모우 저택으로 가게 되는데 마침 그 시기가 일본이 군국주의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1936년 2. 26 쿠데타 즈음이며 그 가모우 저택이란 그 쿠데타로 부터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막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일본이 끝내는 패망의 길을 걷고야 말 그 궁극의 분기점으로 인도된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 '가모우 저택사건'은 '고구레 사진관'에서 에피소드를 끌고 가는 심령사진에 담겨졌던 압축된 과거와도 같다. 그렇게 한 장의 사진이 그 사연이 일어난 시간을 가둬두고 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우리가 그 봉인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가모우 저택사건' 역시 그러한 과거 여행인것이다. 그리고 에이이치가 그 사진 속에 담겨진 아픔의 매듭을 풀어 헤쳤듯이 '가모우 저택사건'의 주인공 다카시 역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카시 또한 에이이치 처럼 결국 하나의 존재를 상실로 안게 된다. 바로 그 존재의 이름이 후키였다. 가모우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이자 먼 과거의 여자 후키. 다카시는 우여곡절 끝에 현재로 돌아왔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하는 후키와는 영원히 이별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게 에이이치에게 있어 후코 처럼 영원한 상실을 안게 되었다.

 

  주인공에게 똑같은 의미로 자리잡은 '후코'와 '후키'... 이렇게 비슷한 그녀들의 이름 처럼  고구레 사진관의 주제 의식도 어쩌면 '가모우 저택사건' 때 부터 내내 남아있었던 것은 아닐까도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메울 수 없는 상실을 안게 된 다카시였지만 미유키는 그것을 비극으로 끝내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다카시는 이렇게 독백한다.

 

   그렇지만 다카시의 머릿속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후키가 있다. 스무살의 후키, 하얀 앞치마의 후키, 걱정하는 후키, 화내는 후키...차가운 손의 감촉,눈에 뒤덮인 가모우 저택, 자기 생애에 지워질 리 없는, 다카시의 기억이 숨쉬는 장소.(P.307)

 

  그러니까 고구레 사진관은 다카시의 가모우 저택과 같은 곳이다. 상실이 그저 상실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추억이 되는 것은 함께한 시간들이 기억 속에서 '영원한 현재'로서 내내 도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유키는 머나먼 시간을 지나 이제 '고구레 사진관'에 와서 '가모우 저택사건'에서는 미처 끝맺지 못했던 말을 마저하는 것이다. 그녀가 '고구레 사진관'을 통해 다시 들려주는 남은 말들은 이렇다.

 

   우리가 상실을 가지는 것은 시간 관념을 너무 직선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겐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의 렌즈로 새겨놓은 변하지 않는 모습들이 있다. 함께했던 타인의 기억, 그를 사랑했던 기억, 그로부터 사랑받았던 기억들이.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또 하나의 참여자로서 함께했던 '내'가 아직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고 나의 기억이 있는 한 그 시간들은 그저 지나가버린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들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다시 돌아가 뛰어들 수 있는 '영원한 현재'이다. 그렇게 그것은 낡은 앨범속의 사진들과도 같다. 아주 오래전 일을 찍은 사진이더라도 우리는 그 사진을 보면서 마치 그 시간으로 그대로 걸어들어간 느낌을 가지게 되지 않은가? 사진이 그렇게 무한의 유통기한을 가진 통조림 처럼 변질되지 않는 현재를 건네주듯이 우리의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만 가지고는 만족을 하지 못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가 너무 물질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너무 물질 위주로만 생각하다보니 사람들의 정신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의 정신이, 거기에 간직된 기억이 현실 보다 더 생생한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존재보다 더 진짜의 존재를 창조해낼 수 있음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보라 '고구레 사진관'의 사진들은 한 인간의 정념이 물리법칙을 뛰어넘어 원하는 현실을 투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질에 현실에 깊숙히 매몰된 의식으론 오로지 상실 밖에는 안을 수 없지만 기꺼이 기억의 힘을 믿고 모든 세상의 상식과 물질로 부터 자유로운 자는 그 상실의 껍질 안에 움트고 있는 희망의 빛을 보게 된다. 그 빛이 열어보이는 현전되는 시간 속에서 그 타인이 여전히 자신의 손을 맞잡고 곁에 있음을...

 

 그렇게 미유키는 사진을 그것도 심령사진을 가져왔고 영원히 곁에서 머무르는 유령(그는 우리 기억의 부름에 대한 화답이다.)을 가져왔으며 우리가 누군가와 더불어 있는 한, 그렇게 내어주는 손이 있고 맞잡는 손이 있으며 서로를 안을 수 있는 두 팔이 있는 한, 영원의 상실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구레 사진관'은 정말 달라져버린 미유키를 느끼게 한다. 생각해보면 '크로스 파이어'의 아오키 준코와 '고구레 사진관'의 에이이치는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인지... 자신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는 무고한 개인마저도 무자비하게 불태워버렸던 아오키 준코의 그림자는 역시 같은, 지울 수 없는 상실을 가졌으나 늘 동생에게 자상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에이이치의 환한 미소에게선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아오키 준코는 현실과 물질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지나간 시간을 오로지 절대적 상실로만 바라보았던 인물의 대표적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미유키의 '고구레 사진관'까지의 여정은 그 아오키 준코를 극복하는 과정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녀가 이렇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에도 연작'들이 그 계기가 되었을 듯 하지만 그 얘기는 너무 길어지니 다음 기회로 돌리기로 하고 이쯤에서 지금 나온 '고구레 사진관'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전혀 새로운 미유키의 걸음이라고 여기게 되었는지 그녀가 선집했던 세이초의 작품과 그녀의 전작들을 통해 밝히는 글을 접을까 한다.

 

  오늘 슬픈 소식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한때 같은 지역구에 살았고 더러 만나서 말씀도 많이 들었던 분인지라 다가오는 아픔이 더 컸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내 개인을 위한 글이다. 우리에게 그 분의 기억이 있는 한 절대로 상실될 일이 없다는 것은, '고구레 사진관'으로 에둘러 말하고 있을 뿐, 나 자신에게 건네는 일종의 '믿음'이기도 하다. 그 믿음을 확신으로 만들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다. 그렇게 나는 미유키를 믿어보련다. 내 기억에서 언제까지고 생생히 살아있는 한 그 분 역시 늘 내 곁에서 머무르고 계시다고. 그 분과 악수를 나누던 감각 그리고 그 분과 헤어질 때 바라보았던 그 가을 하늘을 언제까지고 영원히 바래지 않는 사진으로 간직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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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31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미미 여사의 책을 말씀하시는 지독한 상실과 사회적 불평등의 직시로 인해
접하기 매번 주저주저하면서 집에 쌓여간 가는 중인데, 역시 헤르메스님은 저의 지름신.
브레이브 스트리는 얼마전 네권을 모두 구입하고도 아직 못 읽었네요. 그런데
이후 신간들에게 더 눈이 가는군요. 영웅의 서와 고구레 사진관. 이거 정말 읽고 싶은데요.

헤르메스님의 슬픈 소식이 제 슬픈 소식과 통하는거 같습니다.
좋은 관계란 믿음이고, 믿음을 바탕으로 행동화하는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어제 하두 울었더니.. ^^

헤르메스님, 올 한해 보여주신 좋은 리뷰들 진정으로 감사드리고
내년 건강하고 즐거운 일 가득하세요.

ICE-9 2012-01-02 22:12   좋아요 0 | URL
올해는 무엇보다 마녀고양이님과 만날 수 있어서 더욱 뜻 깊었던 것 같습니다.
마녀고양이님도 새해엔 하시는 일, 원하시는 일 모두 뜻대로 다 잘 되시고 항상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시길 바랄게요^ ^

이진 2011-12-3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글 너무 좋아서 뭐라 말을 못하겠어요.
추천을 몇백개를 찍고싶은데 ㅠㅠㅠ 어쩌지 이걸... ㅠㅠ

헤르메스님 그간 님의 리뷰를 읽어보며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ㅠㅠ
저도 닮고싶답니다 ^^

새해복 많이 받으셔요!
내년에도 멋진 글 써주세요~

ICE-9 2012-01-02 22:11   좋아요 0 | URL
하하.. 소이진님 반갑고 너무 감사드려요^ ^
과분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소이진님도 올해 많은 복을 받으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지길 바랄게요.
그리고 더 좋은 리뷰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

이진 2012-01-12 22:06   좋아요 0 | URL
크크, 대단하신걸요.
두 작품 이달의 당선작 선정이라니요 ㅠㅠ
저도 이번에는 한번 기대해봤습니다만 역시 알라딘은 어린제게는 행복을 주지 않는군요. 지금 책도 안보내주고있어요. 흑흑 나쁜 알라딘ㅠㅠ

ICE-9 2012-01-13 02:10   좋아요 0 | URL
제가 소이진님의 페이퍼를 이미 봤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제 생각에 다음 달 당선은 거의 확실시되지 않을까 싶던데요.^ ^
조금만 기다리세요^ ^
 
한국음식문화박물지
황교익 지음 / 따비 / 2011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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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리하기를 좋아한다. 재료를 섞어 양념으로 조율하여 하나의 음식으로 완성하는 재미에 빠진 지는 제법 되는데 아직도 음식이라는 것에 대한 어떤 명확한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만드는 것이 즐거웠고 맛보는 것이 재밌었을 뿐. 그렇게 내게 음식이란 만들고 맛보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래서 황교익의 '한국음식박물지'를 손에 든 것도 별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우리나라 음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알고 싶었을 뿐. 하지만 읽고나서 그동안 너무나 단편적으로 음식을 바라보던 것에 반성하게 되었다. 사실 요네하라 마리의 '팬티 인문학'을 읽었을 때 부터 우리의 일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저마다 다양한 역사와 풍부한 이야기들을 간직한 존재들임을 인식했었지만 어느새 잊고 있어나 보다. '한국음식박물관'의 느낌은 정확히 '팬티인문학'과 같았다. 아무렇게나 주문하고 편하게 먹곤 하는 음식에도 마리가 말했던 팬티 이야기 그대로 그토록 깊은 역사와 저마다의 정치적 계산들이 뒤얽힌 다양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 특히나 주목해야 할 것은 '박물지'라는 점이다. 그렇게 이 책에는 음식만 나오지 않으며 그에 딸린 도구와 짓는 공간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는 재료와 양념까지 한 마디로 음식을 둘러싼 모든 것이 나온다. 우리가 편하게 드는 숟가락 그리고 젓가락에게 조차 두 페이지의 글이 할애될 만큼 그 깃들인 이야기가 단촐하지 않음을 일깨워준 책이 이 책 말고 또 있었는지 모르겠다. 밥그릇은 또한 어떠한가? '공기'란 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에서 부터 시작해 지금 식당에서 흔히 쓰는 스테인레스 밥그릇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고 쇳내가 나서 한국인들이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다가 주류가 되어 이제는 밥그릇의 상징으로까지 되었는지 다 단번에 토해내고 있다. 이렇게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도구에서 조차 그 모든 것에 역사가 있고 삶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가 있으며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행위들이 있음을 생각한다면 다음 부터는 식탁 위에 무심히 놓여진 숟가락, 젓가락들이 완전히 달라져 보일 것 같다. 어쩌면 손에 그것을 쥐고 몇 번이나 그 감촉을 되새겨볼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렇다. '한국음식박물지'는 날 둘러싼 모든 익숙한 것들을 전혀 새롭게 바라보도록 한다. 내가 늘 먹는 음식 늘 사용하는 도구 좋아하는 재료들이 그저 반복된 일상 속에서 있는 그대로 변함없는 존재들이 아니라 그들도 나이를 먹고 세월 속에 변해가며 스스로의 역사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그들도 늘 있는 그 자리에서 나와 같이 함께 이 시대를 호흡하고 있는 존재임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늘 대하곤 하는 것들에게 하나의 착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하나의 얇은 단면만을 가지는 존재라는 착각말이다. 물론 그러한 우리의 생각은 틀렸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은 평면이 아니라 켜켜이 역사가 쌓이고 이야기가 중첩된 비록 보이지는 않더라도 높다란 길이를 가진 '지층'인 것이다. '한국음식박물지'는 바로 그러한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그 지층을 바라보게 한다. 그 층층히 퇴적된 지층 어딘가에 깃들인 역사와 이야기들을 살펴보게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 우리의 일상이 놀랍도록 풍성한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한 것들로 둘러싸여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박물지'는 말하자면 그 깃들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깃들인 이야기가 그저 편한 것만은 아니다. 거기엔 원하지 않았는데도 이편 저편으로 갈라질 수 밖에 없었던 음식들의 서글픔이 있다. 음식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물론 사람들 탓이 크다. 음식을 두고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황교익은 책에서 정치를 이렇게 정의한다. 정치는 먹는 것을 나누는 행위라고. 그래서 음식에 깃들인 이야기 역시 더더욱 정치적이 될 수 밖에 없나보다. 사람이 모여 이루는 사회 자체가 윗 편과 아래 편으로 나뉘어지는 이상은. 사람이 계층을 나눠 편을 가르니 음식 역시 편을 나뉘게 되었다. 황교익은 상층의 음식이 있고 서민의 음식이 있다고 말한다. 상층의 음식은 서민이 감히 음식으로 신분상승 하지 못하도록 더없이 고급화되고 사치스러워지고 서민의 음식은 음식으로나마 대리적으로 신분 상승하려는 서민의 욕망으로 인해 그 이름을 상층의 음식으로 부터 차용하고 모양만이라도 닮도록 꾸민다고.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도 있지만 음식마저 이렇게 우리들의 욕망을 위해 나위어져야 한다니 어째 좀 서글프기도 하다. 하지만 황교익은 그 많은 음식에 깃들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오히려 '음식이 정치적이다'라는 사실을 직시하도록 한다. 일상의 풍성함에 경이로움을 느끼기 이전에 그것을 두고 벌어지는 계급 갈등을 먼저 보라는 것이다. 왜? 음식은 그저 먹기 위한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노동 또한 들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음식을 만들어내는 일이 바로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음식의 가격을 억지로 낮추면 거기 들어가는 사람의 노동력의 대가 또한 턱없이 낮아진다. 수입산을 쓰면 된다고 2차 산업의 호황을 위해 1차 산업을 포기하는 식으로 무역 협정을 타결하면 먹거리의 수급이야 문제 없을지 몰라도 우리의 음식을 가꾸고 만드는 농부들, 어부들은 아예 살 길을 잃는다. 그렇게 하나의 음식에는 사람의 피와 땀 그리고 목숨줄 마저 달려있음을 그는 보라고 한다. 아예 음식이 그렇게 정치적이었다면 이제 이 모든 것이 매어달린 음식을 더더욱 정치적으로 다루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자면 황교익은 음식에 깃들인 이야기를 통해 종적으로 길어진 음식의 지층들을 그에 매달린 정치적인 이야기들을 밝혀 이제는 개인이 아닌 집단의 차원으로 나아가 횡적으로 늘리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동안 음식을 너무 개인적으로만 대해왔다. '나만의 먹을 것' '우리 가족의 먹을 것'만을 위해 먹거리들을 대해왔다. 그리고 그랬기에 음식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애환이 그리고 삶 자체가 달려있는지 보지 못했다. 황교익의 너른 마당처럼 펼쳐보이는 횡적인 음식 이야기는 이제 우리의 시야가 넓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귀가 거기에 깃든 그들의 호흡과 한숨과 애끓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솔직히 실로 깨달음이 컸다. 그리고 그동안 음식을 오로지 개인적인 식견으로만 바라보던 나 자신을 반성했다. 아담 스미스의 역설이 음식에도 통하는 지 당장 없으면 굶어죽게 될 소중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동안 음식의 존재를 너무 무심히 대해온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FTA가 통과되어 음식의 주권마저 위태롭게 될 상황에 처했는데도 위기 의식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황교익이 거듭 다짐두었던 대로 음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산물이며 그 너머에 거기에 깃들고 매달린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렇게 우리는 그저 음식의 문제를 다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였다. 이제 더이상은 음식 위에 드리워진 그들의 잔영을 보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 하나 하나를 기르고 베고 찧고 옮기고 삶거너 쪄낸 배여든 손길 하나 하나를 느끼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음식 앞에 서게 되면 먼저 귀 기울일 것이다. 그들이 내게 들려주려고 담아둔 그 오래된 이야기들에... 그렇게 사람을 기억하고 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이 모든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입이 아니라 거기에 깃들인 사람들의 삶임을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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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2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은 제 지름신 맞네요... ^^

주위에서 항상 보는 물건에 대해서 `역사가 켜켜이 쌓였다`는 말씀이 와닿아요.
우리는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음식이 정치적이라는 말씀은 서글퍼요. 너무나 정녕 그렇구나 싶어서 더욱 그래요.
FTA 통과 이후, 제가 매주 받아먹는 농촌공동체 언니들이 더 생각난답니다.
선물이라도 보내드려야 하는데,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는... ㅠㅠ

헤르메스님, 즐거운 연말되셔요.

ICE-9 2011-12-25 20:48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도 화이트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나요?
저도 음식에 대해 정치적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거기에 눈을 뜨게 된 것 같아요. 앞으로는 어떤 것을 대하든 거기에 깃든 손들과 삶을 마음에 먼저 담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녀고양이님도 얼마 남지 않은 연말 잘 정리하시고 행복하게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