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벌써 11월의 신간 추천 시간이 도래했군요.

 

 

 

 

   먼저 오랜 기다림이 실현된 신간들입니다.

 

 

    

 

    먼저 빅토르 위고의 '93년'입니다.

    이 책은 몇 년전에 영문판으로 읽었

    었는데 그 때 '레미제라블' 보다

    '93년'이 위고의 대표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었을 정도로

    정말 감명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도 한 번 벗해보고

    싶었는데 오래도록 번역판이 나오지

    않더군요. 그런데 예고도 없이 문득

    건네진 선물 처럼 우리말로 된

    '93'년이 나왔습니다. 살만 루슈디의

    '수치' 파비치의 '하자르 사전'에

     이은 열린 책들의 '써드 임펙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말로 읽는 '93'년은  어떤 느낌을 가지게 해 줄 지 기대됩니다.

 

 

 

 

 

  역시나 오래 기다렸던 후속작...

 

  댄 시몬즈의 히페리온을 읽었다면

  그 후속편을 보고 싶은 욕구가 마치 미드 '24시'의 다음 에피소드

  를 보고 싶듯 클 수 밖에 없는데 오래도록 나오지 않아

  애를 태우더니 드디어 나왔습니다.

  댄 시몬즈의 '히페리온'을 아직 벗하시지 않으셨다면

  이번에 후속편이 나온 김에 꼭 벗해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군요.

  긴 겨울밤을 여지 없이 짧게 만들어 드릴 겁니다.

 

 

 

 

 

 

 

  그리고 뜻밗의 신간들....

 

 

 

 

   아마도 여성의 몸으로 가장 역사적 현장을 많이 누볐던

   저널리스트가 아닐까 싶은 아그네스 스메들리...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이기도

   한 스메들리의 일생을 그녀 자신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는 자전적 소설인 '대지의 딸'이

   새로운 번역으로 나왔습니다.

 

   진정한 언론의 중요성이 날로 더해지고 있는 지금

   그 참모습이 어떠한가 발견하는 것은 소중한 기회가

   아닐 수 없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더욱 시의적절하게

   찾아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포스트 모던적 작가로 그 중요성이 더해진 도널드 바셀미의

 최고 걸작이라 평가받는 '죽은 아버지'도 이번에 나왔습니다.

 모든 상징의 근원이자, 언어를 만드는 자 그리고 그렇게

 질서지우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접근해

 그 아버지를 해체하고 전복시키는, 프로이드가 서양 문명의

 근원이라고도 했었던 '살부(殺父)의식'이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으로 단순히 내용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가 언어 마저도 만들고 규정하는 존재이기에

 쓰는 언어들까지 중간에 끊거나 해체하는 등

 파격적인 실험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 역시 오래도록 기다렸는데

 드디어 나와주었군요.

 

 

 

 

 

 

 

 

 

 

 

 

 

 

 

 

 

 

 

  거기다 오래전부터 번역되길 간절히 바래왔었던 솔 벨로우의 대표적인 작품 셋이

  한꺼번에 나란히 번역되었습니다. 솔 벨로우 역시 전작이 다 좋은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허조그'를 강력 추천하고 싶습니다.

 

 

 

 

 

  솔 벨로우의 작품을 소개한 김에

  미국 문학의 이해에 도움을 줄 만한 신간 역시

  같이 소개해 두고 싶군요.

  일본인들이 유명한 거의 모든 미국 작가들에

  대해 쓴 책인데 빔 벤더스가 미국 대중 문화들을

  자신의 영화들에 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이식된 자'의 시선으로 보는 미국 문학이

  어떨지 흥미롭습니다.

  이미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선으로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등등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더욱 그렇군요

 

 

 

 

 그리고 가장 놀라웠던 신간

 

 

 

   오르한 웰리 카늑의 시를 읽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놀랍게도 나왔습니다.

   이름만 들었고 작품은 거의 본 적이 없어서

   늘 한 번 벗해보기를 소원했었는데 드디어

   그 갈증을 해갈하게 되었군요.

   더구나 한국분과 터키분의 공역이라고 하니

   더 흥미롭습니다. 번역을 통한 아이텐티티의 공유는

   어떤 결과를 나타낼까 궁금하기도 하구요.

   가장 빨리 읽고 싶은 신간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역시 기다렸던...

 

 

 

  

  

 

 

 

 

 

 

 

 

 

 

 

  미국 SF 작가협회에서 선정한 작품들로 이루어진 네 권중

  후반의 3권과 4권이 역시나 나란히 발간되었습니다.

  장르물은 여름이 전성기인 줄 알았는데 11월의 신간들을 검색하다보니

  정말 전성기는 11월 혹은 겨울이로군요.

  1권과 2권이 주로 단편 위주로 선정되었다면

  3권과 4권은 중편 위주로 선정된 것 같습니다.

  SF 팬들에겐 잘 차려진 만찬의 식탁입니다.

  얼른 달려가 자리 잡고 앉아야죠...

 

 

  거기다 또 하나...

 

 

  

 

  더러 실망을 하면서도

  역시나 기대감을 갖고 늘 잡게 되는 작가

  우타노 쇼고도 이번에 새로운 작품이

  나왔더군요.

  '밀실 살인 게임 2.0'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믿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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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12-09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혁명과 반혁명이 부딪히는 작품으로 <93년>만큼 재밌는 것도 없죠.저는 헌책방에서 정음사판을 구해 읽었습니다.프랑스혁명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토론재료로 써도 좋을 듯해요.

솔 벨로의 저 책들은 번역본이 꽤 오랜동안 절판되어 있었죠.우리나라에선 그만큼 주목을 받지 못한 작가라서 그런 것 같아요.

ICE-9 2011-12-11 23:34   좋아요 0 | URL
저도 `93년`읽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거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의 글을 읽을 때와 같은 심정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93년`도 솔 벨로우의 작품들도 이미 번역판이 나와 있었군요. `허조그`는 정말 개인적으로 굉장했는데 왜 이리도 주목을 받지 못한 걸까요?

노이에자이트 2011-12-14 16:01   좋아요 0 | URL
뭐랄까...솔 벨로 작품이 지식인들의 권태를 그리는데, 그런 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저는 `허조그`보다는 `희생자`가 더 잘 읽혔습니다.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유태계 작가 중에선 오히려 버나드 맬러무드가 우리에겐 더 알려진 듯합니다.물론 맬러무드 역시 많이 읽히는 작가는 아닙니다만...
 
나, 참치여자 NFF (New Face of Fiction)
사비나 베르만 지음, 엄지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멕시코는 FTA 때문에 특히나 우리 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나라가 되었다. 오랜 미국과의 NAFTA로 인해 소득 불균등화는 심해져 전체 멕시코 국민 중 51.3%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소득으로 겨우 연명해 나가고 있는 멕시코. 바로 이런 멕시코가 현재 FTA를 비준한 우리 나라에도 역시 닥쳐 올 미래가 될 우려가 높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럴 때 마침 멕시코의 여류 작가의 소설 한 편이 우리 앞에 도착했다. 카를로스 푸옌테스 이후로 오랜만인데 바로 사비노 베르만의 '나, 참치 여자'라는 작품이다. 

 

 

 

     제목이 참 특이하다. 

     언뜻 영화 '타짜'에서 '나 이대나온 여자야'라는 김혜수의 대사가 떠 오른다. 원래 제목은 '세상의 중심으로 잠수해 들어간 여자'였다. 이 소설은 주인공 여성인 카렌의 자전적 기록의 형식을 하고 있는데 소설 말미에 가면 왜 카렌이 자신의 소설 제목을 그렇게 달았는지 이유가 나온다. (그녀는 자신의 기록에 어울릴 만한 제목을 모두 다섯가지 정도 생각했고 그 중 가장 마지막 것을 고른 것이다. 거기 나온 다섯 개의 후보 제목중 가장 첫번째 있는 것이 '나와 참치'인데 카렌은 그 옆에 '나와 참치'가 주인공이니까 가장 적절한 제목이다 라고 써 놓고 있다. 그러니까 한국판 제목은 바로 그것을 살짝 변형한 것이며 '참치 여자'가 된 것은 이 소설이 무엇보다 한 여성 개인의 정체성을 형상화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건 잠수 얘기가 아니라 참치 얘기인 것이다. 그것도 참치 산업 자체의 얘기인 것이다. 

 

    멕시코의 참치 산업은 실제로 유명하다

    멕시코는 현재 세계 제12위의 참치 생산국이다. 바로 그 멕시코의 마사틀린의 참치 공장이 이 작품의 주요 배경이다. 소설은 카렌의 이모가 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유산으로 이 참치 공장을 상속받아 경영을 위해 멕시코로 오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거기서 이모는 거의 야생 소녀와 같은 꼴을 하고 말은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주인공 카렌을 발견한다. 인도에서 발견되었다는 늑대 소녀와도 같은 카렌을. 더구나 그녀에게는 학대받은 흔적까지 있다. 이모는 언니가 밝힐 수 없었던 혈육이 아닐까 싶어 카렌을 거두고 자연의 세계에서 문명의 세계로 편입을 시킨다. 하지만 카렌은 남들과 달랐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가진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 하듯이 사교적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예 사고 자체가 달랐다. 무엇보다 카렌은 스스로의 생각을 전혀 꾸밀 줄 모르는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태양과 바다가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 처럼 자연의 정직성을 간직한 존재였다.  말하자면 카렌은 인간에 있어서 하나의 타자인 '자연' 그 자체의 상징이었다. 이모는 이 카렌을 하나의 인간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참치 공장도 경영해야 했는데 말썽이 생겼다. 바로 미국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미국의 생태주의자들이 참치를 잡을 때 돌고래까지 죽인다고 해서 멕시코에서 수입되는 참치 거부 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이모는 절대 그런 일이 없었고 또 그렇지 않다는 걸 알리기 위해 '돌고래 안전' 라벨까지 붙여 판매하지만 미국내 멕시코 참치 불매 운동은 사그러들지 않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 모든게 다 미국 참치 회사와 생태주의자들이 협력한 음모였다. 그들은 자국의 참치 시장을 멕시코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를 붙여 불매를 했던 것이다. 덕분에 이모의 참치 공장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되고 할 수 없이 구조조정에 들어가 대량 해고 사태가 일어난다. 그리고 참치 공장이 있던 마사틀란에는 그 해고로 인해 거지들이 속출한다. 그런데 이것은 소설 속 얘기가 아니라 정말로 있었던 현실 속 이야기이도 하다. 즉 사비나가 이 실제 이야기를 소설 속에다 담으려고 한 것은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불평등 보다 정확히는 '일방적 착취'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다소 상세하게 앞부분의 줄거리를 소개했다. 이 소설에는 정확히 세 가지 관계가 구조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가장 큰 범주별로 순서대로 나열해 본다면 자연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 마지막으로 나와 너의 관계. 이렇게 세 관계가 구조적으로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중첩'이란 단순히 포개어짐 뿐만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그 관계적 본질이 어떤지 모두 동일하게 드러난다는 의미로 쓴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 참치 여자'란 카렌 자신의 육성으로 진행되는 '나 홀로' 이야기이지만 결국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자연에게 어떠한지 미국이 멕시코에게 어떠한지 내가 너에게 어떠한지 그 본질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것이다. 사비나는 바로 그 세 관계의 본질을 드러냄에 있어서 무엇보다  형식과 내용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한다. 형식면에서는 '말'로써 그리고 내용면에서는 '카렌과 참치'와의 관계를 통해 접근한다. 그리고 그 둘을 통해 관계의 본질을 깨달음으로써 카렌이 궁극적으로 찾아내는 정체성이 바로 '참치-여자'라 할 수 있다. 

 

    먼저, 형식면에서 '말'을 살펴보자. 

    앞서도 카렌은 언어능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연적 정직성을 가진 그녀가 그냥 생각한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꾸미거나 돌려서 말해야 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즉 그녀는 '비유'라는 것을 싫어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예 : 동물들을 죽여서 그걸로, 아니면 그걸 조각내어 팔아서 돈을 버는 방법을 배우는 강좌의 제목은 '축산경제학'이었다.  

   예 : 호모사피엔스들이 동물들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설명하는 수업은 '인간 지능'이었다. 

                                                                                       (P.117) 

   즉 카렌이 싫어하는 것이 비유로 말했을 경우 그 진실된 측면이 축소되거나 혹은 다른 것으로 되어 완전히 배제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완곡어법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모두 그것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은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습득하는 자로 하여금 또는 그 자체를 운영하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일례로 가장 잔인한 도축 방법을 만들었던 카렌의 도축과 교수 헌팅턴은 '인도적인 도축 촉진 위원회'가 수여한 '훈장' 을 받은 자였다. 바로 여기의 '인도적'엔 도축시 벌어지는 폭력성이 도덕적 정당성으로 위장되어 은폐되어 있는데 이런 까닭으로 카렌은 '비유'를 혐오하는 것이며 결국 이러한 비유가 그래도 통용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일방적 관점에서 규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소설은 나아간다. 

 

    바로 데카르트의 사유의 공격을 통해서 말이다. 

  

    안 그래도 데카르트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와서 공격을 많이 받았던 철학자였는데 사비나 베르만은 아예 카렌의 입을 빌어 데카르트의 모든 책을 불질러 버리자라고 선동까지 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비나가 보기에 데카르트야 말로 나와 너의 관계를 철저하게 분리하여 오로지 나만 있고 너는 한낱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 무엇보다도 '서로' 사이에 착취적 관계를 낳게끔 근거를 제공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흘러가므로 사비나가 데카르트를 공격한 주 요인 역시 데카르트가 동물을 어떻게 바라보았느냐에 달려있는데 (또한 데카르트의 동물에 대한 사유는 물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기도 하다.) 그 데카르트가 동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동물은 기계 혹은 AUTOMATA(자동장치)이며 즐거움이나 아픔 뿐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했었다. 물론 칼로 베면 비명을 지르고 뜨거운 것을 가져다 대면 달아나려고 몸부림 치겠지만 그것은 시계가 태엽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원리의 반응일 뿐이다 

   라고...  

 

   바로 여기서 사비나는 데카르트적 사유의 위험성을 보는 것이며 결국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유가 말에 있어서 비유를 가지고 온다고 보는 것이다. 왜 자기중심적 사유가 비유를 불러올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사비나는 작중 인물 '야스코'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아마 스스로 뭔가에 의해 보호받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냥 내 생각일 뿐이야. 현실은 언제나 두려움을 주니까 (P.331) 

   비유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적 사유는 자기를 제외한 모든 대상을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의 획일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비나가 보는 데카르트적 주체는 그 앞에 놓인 대상은 그냥 단순한 사물로 보는 주체이며 내가 규정해야 하지 나를 규정할 수는 없다고 여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상호 이해와 배려에 바탕한 포용의 주체가 아니라 가지느냐 못가지느냐만 존재하는 획득의 주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기댈 곳이 오로지 자신 밖에 없으므로 그 주체는 당연히 불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데카르트적 주체가 작품 속에 과도하게 넘쳐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자국의 참치 시장을 방어하고자 말도 안되는 이유로 멕시코를 핍박하는 미국이요 도축당하는 동물들이 느끼는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효율성만 추구하는 헌팅턴이요 역시나 이윤만 있다면 타인의 삶이든 윤리든 상관않는 카렌의 동업자 굴드 또한 마찬가지고 마사틀란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준다는 공약으로 표를 얻어 요직에 올랐으나 오르자마자 나몰라라 하는 멕시코 장관들이 그렇고 또한 카렌 참치 공장의 페냐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다 이 모든 데카르트적 주체들은 다 남성들이다. 즉 '참치-여자'에서 여자는 바로 이러한 남성으로 상징되는 데카르트적 주체들을 벗어난 존재라는 의미 역시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말'에서 구조적으로 중첩된 세가지 관계의 본질이 드러난다. 바로 그것은 '일방적 착취'이다. 하지만 본질은 때로 상황에 따라 그 드러나는 모습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거기엔 데카르트적 주체들의 마치 타자를 배려한다는 듯한 위선적이며 교묘한 위장과 그로인해 자발적 협력을 이끌어내려는 전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나타날 수 있는 모습마저 살피는 것이 또한 필요한데 사비나는 그것을 바로 내용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리뷰라는 형식상 길이의 한계로 다 얘기할 수는 없고 중점적되는 것만 말하자면  바로 카렌과 참치와의 관계다. 카렌은 헌팅턴에게서 퇴학을 당한 뒤 이모를 도와 참치공장 경영에 뛰어드는데 거기서 자신이 도축학 수업을 받다가 느낀 문제점을 되도록 수정하기 위하여 참치를 인도적으로 포획하는 방법을 연구하게 된다. 그러다 교활하고 냉혹한 자본가 굴드와 동업하고 나서는 참치의 포획이 아닌 참치 양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카렌의 과정이 정확히 '카렌과 헌팅턴과의 관계'와 '카렌과 굴드와의 관계'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즉, 대학에서 도축학 수업을 받을 때 헌팅턴이 카렌에게 했던 일방적이며 폭력적인 관계는 그대로 포획으로 이어지는 카렌과 참치와의 관계와 대응되는데 그런 관계임에도 헌팅턴이 '인도적' 훈장을 받았듯이 카렌 역시 그런 칭호를 얻는다. 말하자면 모두 '위선적 관계'인 것이다. 두번째 굴드는 카렌에게 주도권도 주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참치 양식을 하도록 하지만 카렌이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넘으려 하자  공격적으로 나온다. 즉 굴드가 카렌에게 인정했던 자유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인정한 한계 내에서의 자유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카렌의 '참치양식'과 대응한다. '참치양식'은 가장 참치를 배려하고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잡아먹기 가능한 지점까지의 한계 내에서의 자유인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헌팅턴과 굴드에게 있어 카렌은 카렌에게 있어 참치와 마찬가지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게 결국 카렌과 참치는 동일한 존재였고 그렇게 '참치-여자'란 카렌의 정체성 자체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카렌은 서로 다른 과정을 거쳤지만 그 모든 과정에 있어 본질은 변한 게 없었다. 카렌은 그토록 동물을 위하고 배려한다고 했지만 그녀 역시 여전히 헌팅턴과 굴드로 대표되는 데카르트적 주체의 본질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비니는 결국 이러한 내용적인 면을 통해서 점진적인 변화는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하며 결국 근본적인 변화 혹은 탈주 만이 그 벗어남을 가능하게 함을 보이고 있다. 

 

   이 근본적인 변화 혹은 탈주는 무엇인가

 

   바로 여기서 정체성의 문제가 나오게 된다.  즉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 새롭게 하는 것만이 데카르트적 주체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카렌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건 이모로 인해 '인간'으로 편입되고 헌팅턴과 굴드에 의해 만들어진 그렇게 '인간 사회' 자체로 부터 규정된 '참치여자'로서의 정체성이었다. 즉 카렌이 이모에 의해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예절이라는 것을 학습할 떼 그녀는 이미 종국에는 벗어나야 할 데카르트적 주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정체성의 근본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선 그 모든 시초이자 '인간'에 편입시킴으로써 데카르트적 주체로 나아가게 했던 그렇게 인간 문명 자체의 상징이기도 한 '이모'의 죽음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바로 그 '이모의 죽음'으로 인한 단절을 통하여 카렌은 결국 사실 그 존재였으나 '인간'에 편입됨으로써 타자가 되어버린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 말 그대로 세상의 중심으로 잠수해 들어간 장면의 의미인 것이다. 

 

   근본적 변화 혹은 탈주가 소설에서 말하듯 이렇게 근본적 단절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면 구조적으로 중첩된 세 관계 역시도 먼저 근본적 단절이 있어야만 새로운 변화가 가능하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해석한다면 사비니는 멕시코가 새롭게 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미국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도 있다. 이러한 단절은 무엇보다 이전까지의 내 정체성 자체를 파국적으로 지워 일종의 TABULA RASA, 즉 백지상태로 만드려는 것이니 훗설의 '에포크'와도 같다. 그렇게 지금까지 스스로 규정해 온 나를 버리고, 획일적 진리의 집착 마저 버리고 오로지 열려진, 그렇게 포용하려는 나가 되는 것. 아마도 이것이 새롭게 변화된 '참치여자'(지배의 대상이었던 참치와 역시나 같은 지배의 대상이었던 여자를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삼는 것. 그렇게 타자를 자신에게로 받아들이는 것) 의 의미이지 않을까 싶다. 사비니가 주제로 나아가며 보여주는 논리의 전개는 써 온 바와 같이 꽤 정연한 편이다. 하지만 나는 작가가 멕시코인이라서 또한 그 나라가 우리의 미래가 될지도 모를 나라라서 다소 분석적으로만 접근했는데 내 글이 어쩌면 그런 인상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딱딱하거나 재미없거나 하지는 않다. 이야기가 참신하고 흥미롭게 때문에 그 자체로도 얼마든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행여 그 참신성이 너무 낯설어서 혹시 다가갈 수 없는 분들을 위해 또 그것으로 외면된다면 안타깝기도 해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주제넘게 분석해서 도움삼아 두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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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볼 - Money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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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흔히 야구를 인생에 비유하곤 한다. 아마도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샘 레이미가 감독했고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했던 영화 '사랑을 위하여(1999)'가 아닐까 생각된다. 거기서 프로야구의 투수이자 야구만이 인생의 전부였던 주인공은 이제 마지막 게임을 치르고 있다. 영화는 노히트 노런의 퍼펙트 게임을 향해 완투하는 현재의 모습과 그의 과거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준다. 그의 과오 실패 상처 등등으로 점철된 그의 과거의 모습을. 거기서 그는 마치 그러한 과거의 상흔을 지우려는 듯이 하나 하나 힘차게 볼을 던진다. 그러니까 지금 그가 던지는 하나의 볼은 그 모두가 몰려드는 아픔과 죄의식을 지우려는 욕망의 몸짓이다. 그래서 그의 퍼펙트 게임은 그대로 인생 전체를 성공적으로 봉합하는 것이 될 것이다. 샘 레이미가 이토록 인생과 야구를 조화롭게 연결시켰으면서도 결국 이 영화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은 케빈 코스트너가 연기를 못해서도 샘 레이미의 연출이 모자라서도 아니었다. 정작 더 큰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과거의 그 상처를 아픔을 포용하려 든다기 보다는 오히려 지우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극히 수비적인 인생에 대한 태도가 정작 주인공을 약하게 보이도록 만들었으며 때문에 관객의 공감을 얻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올해 다시 샘 레이미의 '사랑을 위하여'처럼 다시금 야구를 통하여 인생에 깊이 새겨진 과거의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영화가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브래드 피트가 주연하고  아론 소킨이 각본을 쓰고 베넷 밀러가 감독한 '머니볼'이다.  

  

  이 영화는 머니볼 이론을 이용하여 약체이자 가난하기 그지없는 구단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미국 야구 역사상 140년만에 처음이라는 '20 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이루게끔 만든 단장 빌리 빈의 실화를 다루고 있지만 영화가 정작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영화가 더 주의 깊게 다가가는 것은 빌리 빈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실패에 대한 기억이며 그것이 현재의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가 그 실패를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현재에도 여전히 홀로 타석에 들어서서 쳐낼 수 있을까 두려움에 떨며 날아올 공을 기다리고 있는 고독한 타자 빌리 빈의 모습인 것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이 태도를 강조한다. 그러니까 애슬래틱스가 플레이 오프전 우승 여부를 놓고 싸우는 그 순간,  단장인 빌리 빈은 그 시합장에 있지 않고 텅 빈 구단 운동장 관객석에 홀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승이 좌절되자 카메라는 분노에 차서 홀로 자동차를 타고 이리저리 누비는 그의 모습을 담더니 그나마 있는 스타급 플레이어들 마저 줄줄이 트레이드 되고 현재 가용한 비용으로서는 도저히 제대로 된 팀을 꾸릴 수 없음을 체감하는 그 순간에 영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각광받는 기대주였으나 시합에 참가하자마자 형편없이 몰락해 버린, 이제 빈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그 기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영화는 내내 애슬래틱스를 강한 팀으로 만드려는 그 모든 노력들이 모두 그 과거의 실패로 부터 달아나려는 노력에 다름아님을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각인시킨다. 그리고 드디어 이 영화가 정말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게 된다. 그 장면이 바로 빌리 빈의 딸이 기타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불러주는 노래를 빌리 빈이 듣는 장면이다. 그렇게 LENKA의 'THE SHOW'를 들으며 빌리 빈은 자신의 삶이 그 노래의 가사와 똑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I'm just a little bit caught in the middle 

 Life is a maze and love is a riddle 

 I don't know where to go, can't do it alone 

 I've tried and I don't know why 

  
 I'm just a little girl lost in the moment 

 I'm so scared but I don't show it 

 I can't figure it out, it's bringing me down 

 I know I've got to let it go 

  and just enjoy the show 

 

  어쩌면 이 가사를 토대로 빌리 빈의 삶을 형상화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노랫말은 정확히 현재 빌리 빈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그 노래를 듣는 가운데 뭔가 마음에 덜컥 와 닿아버린 듯한 표정을 빈이 짓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영화 '머니볼'은 빌리 빈의 노력과 성공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그것을 극복해 나갈 것인가를 담아낸다. 빌리 빈이 자신의 과거를 통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측불가능성'이다. 그것은 모든 스카우터로 부터 최고의 기대를 받았으나 정작 시합에 임해서는 형편없는 모습만 보여준 자신의 과거 경험 그 자체에서 절절히 느낀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빌리 빈은 '머니볼' 이론에 매달려 오랜 시간의 경험과 감을 무시한다고 항변하는 자기 팀의 스카우터 앞에 예측 가능하다는 얘기는 하지말라고 당당히 말할 수까지 있는 것이다. 이 '예측불가능함'은 그의 두려움 근저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가 브랜든의 머니볼 이론에 매달리는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다.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로지 '출루율'이라는 드러나는 기록에만 의지하는 머니볼 이론은 오로지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넘쳐나는 이 상황에 있어 그나마 '기록'이라는 예측 가능한 좌표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 문득 홀로 밝혀진 등대 불빛과도 같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자료들을 말이다. 바로 그랬기에, 그 자신 가장 두려워하는 예측불가능에 그나마 구원의 빛을 던져준 것이었기에 그는 그 누구의 반대와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매달렸던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빌리 빈이 얼마나 예측불가능성을 두려워하는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 예측불가능성을 벗어나려 머니볼 이론의 매달림이 과거 상처의 치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저 또 다른 것으로 도피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영화는 대표적으로 20연승이라는 140년만의 대기록이 막 이루어지려는 현장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시합에 지는 것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는(당연히 그것이 과거의 상처를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빌리 빈은 그 어떤 시합도 관전하지 않고 그 시간을 언제나 홀로 차 속에서 보낸다. 카메라는 운전하는 그를 화면에 꽉 차도록 담음으로써 그 '홀로'라는 고립감을 더욱 더 강조한다. 20연승이 이루어지는 그 시간에도 빈은 그러고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에게서 전화가 온다. 축하한다고. 라디오를 켜니 어마어마한 점수 차이로 자신의 팀이 이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절대로 지지 않겠구나 생각하고 처음으로 직접 시합을 관람할 생각을 하고 경기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경기장에 들어서자 마자 갑자기 하늘을 흐려지고 자신의 팀이 내리 점수를 내주기 시작한다. 결국 패배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빈은 경기장을 나오고 만다. 이러한 영화의 묘사는 빌리 빈의 성공기를 다루었다면 굉장히 이상한 묘사이다. 20연승이란 머니볼 이론의 최종적 승리나 마찬가지로 영화의 클라이막스라 할 만한데 영화는 그 어떤 흥분도 전해주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빌리 빈이 대단히 불운한 남자로구나 하는 인상만 심어줄 뿐이다. 

  즉 영화는 이렇게 또 한번의 (빌리 빈 개인으로서는) 좌절의 순간을 마련함으로써 빌리 빈이 머니볼 이론에 매어달리는 것이 그저 환자가 순간의 통증을 잊기 위해 모르핀을 맞듯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결국 영화 내내 빌리 빈에게 있어 그 과거의 상처를 영원히 극복할 그 순간은 도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로 내내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지울 수 없는 과거이자 때때로 환기되어 온 존재를 집어 삼키는 상처로서... 

 

   그렇다면 결국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처를 상처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억지로 상처를 지우려 했었던 샘 레이미의 '사랑을 위하여'와 정확히 갈라지는 지점이다. '머니볼'이 새삼 빌리 빈의 이야기에 주목했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아직까지도 그들에게 깊이 남아있는 9.11의 기억이다. 그것은 커다란 비극이었고 여전히 환기되는 상처였다. 거기다 2008년에 서브 프라임이라는 막대한 경제적 위기로 인한 아픔 또한 있다. 그렇게 만연된 아픔 널려진 상흔... 영화는 새삼 그것을 바라볼 것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 상처는 이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바로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영화는 '머니볼'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하나의 본질로 간직한 빌리 빈의 신체를 가져온 것이다. 영화는 그가 단 한 순간도 과거의 그 때 섰었던 타석으로 부터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바로 차속에 홀로 고립되어 운전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반복함으로써 말이다. 영화가 정말 묻고자 하는 것은 왜 그가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냐는 것이다. 거기에 영화는 바로 그가 그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지우려고만 애썼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샘 레이미의 케빈 코스트너가 그랬던 것 처럼... 지우면 치유가 될 줄 알았던 그의 착각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바로 지금 미국의 태도가 아닌가 묻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문제 앞에서 현재 미국은 그 고통들을 우리가 껴안으려 하지 않고 그저 다른 외부로 전가시킴으로써 애써 잊고 있지 않냐는 것이다. 그것을 영화는 말 한 마디로 단칼에 해고되고 마는 선수들을 통해 보여준다. 보다 좋은 팀을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내부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이너스가 되는 존재를 외부에 떠넘김으로서만 유지되는 시스템이 바로 미국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너무 멀리나아갔는지도 모르겠지만 영화가 상처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떡해야 하는가 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거기에 대해서 영화는 단적으로 LENKA의 노래를 끝에서 다시 들려줌으로써 정리한다. 삶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지금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그건 그냥 잠정적 과정에 불과하다. 상처 또한 마찬가지다. 상처가 상처로 있는 것은 그것을 상처로만 기억하는 우리들 때문이지 그 상처가 장차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제레미 브라운 2003년 5월의 야구 경기 장면의 의미이다. 신체적 여건상 절대 도루를 해서는 안되는 그였지만 그날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도루를 했다.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수비진에게 걸려 자신의 한계를 똑똑히 깨달았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홈런을 쳤었으니까... 제레미 브라운이 스스로 인정했었던 한계가 바로 빌리 빈이 가지고 있던 상처에 대한 의미였다면 그가 자기도 모르게 쳐 버린 홈런은 장차 그 상처의 의미가 어떻게 나아갈지 모른다는 것의 비유인 것이다. 또한 브라운이 정작 누군가 알려줘서 그 사실을 알았듯이 우리로서도 현재에 있어서는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모두를 볼 수 있는 관객의 자리에 앉아있지 않는 한은...

   그러므로 영화는 전혀 다르게 보기를 제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측불가능성은 보기에 따라 빌리 빈에게 두려움의 근원으로도 또한 희망의 근거로도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상처 또한 마찬가지라고... 우리는 관객의 자리에 앉지 않는 한 경기 전체의 흐름을 알 수 없는 선수일 뿐이라고... 이 모든 삶의 의미는 결국 관객의 자리에 서는 날, 그렇게 인생 전체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신의 자리에 서는 날 알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 예측불가능으로 인한 두려움이든 상처든 그대로 인정하고 그저 삶이란 쇼를 즐기라고...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내내 반복되는 'and just enjoy the show'는 그래서 영화가 들려주고 싶은 진심어린 전언이자 지금 아픔의 과정에 있는 모두에게 보내는 위로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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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2-01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헤르메스님. 아..리뷰가 정말 좋습니다. 이 영화에서 9.11을 읽어내셨군요. 저도 이 영화를 보았지만, 사실 그런것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말씀을 듣고나니 깊이 공감이 갑니다. 말씀하신대로 야구는 또 예측불가능하기에 희망적이겠지요.^^

ICE-9 2011-12-02 15:41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맥거핀님. 좋은 말씀도 너무 감사드려요.^ ^
사실 9.11까지 생각한 건 아무래도 빌리 빈에게 그 과거의 상처가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겨져 있으며 영화 역시 그 치유가 영원히 불가능할 것임을 암시하는 듯 해서 그렇게 여겨졌던 것 같아요. 거기다 빌리 빈이 머니볼 이론을 적용했지만 계속 실패하는 초반의 시합 장면 대부분이 TV화면으로 재현되는 것이 제겐 흥미로웠는데 생각해보니 9.11의 아픔이 많은 미국인들에게 다가갔던 방식도 그와 유사했던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측불가능성에 대해선 특히나 브랜든이 빈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이던 때 자기 방에 걸려있던 액자의 사진이 플라톤이라는 것에 착안하게 되었는데, 물론 머니볼 이론이 전형적인 플라톤적 국가 이론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겠습니다만 현실의 삶을 오로지 초극(혹은 부정을 통한 수정)해야할 가상의 것으로 바라보는 그의 관점 역시 거기에 담겨져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게 이 영화는 허무주의마저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니체(영화가 지향하는 철학적 입장)와 플라톤의 대립각이지 않을까도 생각했었는데 거기까지는 차마 리뷰로는 쓰지 못하겠더군요.^ ^

맥거핀 2011-12-02 17:33   좋아요 0 | URL
와우 플라톤과 니체까지. 이 영화에서 어떤 철학적인 관점도 읽어낼 수 있군요. 상세하게 덧글 달아주셔서 영화에 대한 이해가 한결 풍성해진 듯 합니다.

노다웃 2011-12-05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영화 보고 왔는데 리뷰 읽으니 영화가 더 와닿습니다.
예측할 수 없으니 인생인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ICE-9 2011-12-07 16:00   좋아요 0 | URL
노다웃님도 저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셨군요^ ^
크레딧에 나왔던 노래 원래 가사는 I want my money back.'인데 그처럼 종국에 가서 신에게 '내 인생 물려 줘'라고 떼를 쓰게 되더라도 조금은 강가에 서 있는 아이와도 같이 여유를 가지고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자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
 

 

  

 

 

 

 

 

  

 

   '엠마'는 제인 오스틴의 네번째 소설이다.

  초기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등, 주로 작품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정서(pathos)들을 제목으로 가져왔던 오스틴은 여기서는 주인공의 이름을 직접 제목으로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는 세번째 작품이자 바로 전 작품인 '맨스필드 파크'에서 시작되었는데 거기서 '맨스필드 파크'란 바로 소설의 주 무대가 되는 곳의 이름이었다.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에서 보듯이 오스틴은 제목을 신중히 고르는 작가다. 그녀에게 제목은 독자에 대한 일종의 안내(그러니까 '여기에 유념해서 보아주길 바란다'와 같은...)이자 그녀 스스로가 작품을 통해서 정말 드러내고 싶은 핵심이기도 하다(어쩌면 결국 같은 말일 수도 있겠다. 핵심이니 일부러라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거겠지...). 그렇다면 이런 짐작을 가능케 한다. '맨스필드 파크'에서 제인 오스틴이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은 '맨스필드 파크'로 대변되는 거기서 더부살이 중인 가련한 패니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 자체이며 '엠마'는 주인공인 '엠마'라는 존재 자체가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임을 말이다.

  

  

 

 



 

 

 

 이렇게 '엠마'가 여성이 쓴 여성 자체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맨스필드 파크' 이후로 여기엔 어떤 연속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맨스필드 파크'가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로 대표되는 여성이란 존재를 그녀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라는 바깥에서 관찰한 이야기라면 '엠마'는 그 모든 배경을 던져버리고 오로지 그 여성 내부에서만 여성을 관찰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오스틴은 여기서 신중하게 엠마라는 캐릭터를 형성한다. 엠마는 오스틴의 그 많은 여성 주인공들 중 유일하게 아무런 경제적 어려움이 없다.(전작의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와 비교하면 이건 하늘과 땅 차이이다.) 따라서 결혼만이 현재 겪고있는 모든 사회적 곤궁으로 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던 다른 주인공들과는 달리 엠마는 결혼에 대해서도 그리 강박적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당당히 혼자 살겠다고 선언까지 하여 그녀의 아버지 우드하우스씨를 안심시킨다. 오스틴은 그러한 엠마의 경제적 독립(그녀는 어머니의 사후, 저택 살림을 주도적으로 도맡아 꾸려왔다.)과 결혼으로 부터의  자유로움을 엠마의 가정교사로 더할나위 능력과 매력이 있는 그녀이지만 별다른 재산과 가문의 후광이 없는 관계로 양자로 보낸 아들까지 있는 홀아비와 결혼해야 했던 미스 테일러와 매력은 있지만 가난해서 늘 실연의 위험을 무릎써야만 하는 해리엇을 통해 강조한다.

 사실 이 둘, '경제적 여력의 요구'와 '그것을 위한 결혼으로의 강요'는 미스 테일러와 해리엇에게서 보듯이 당시 여성들을 억죄고 있었던 두가지 주요한 사회적 굴레였다. 오스틴은 작품에서 이 두 가지를 내내 강조해왔으며 바로 전작인 '맨스필드 파크'는 그 흐름이 최고조에 다다른 작품이었다. 이 두가지 굴레는 영국사회에서 오스틴 당시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주욱 이어져 2차대전 후나 50년대에 이르러서도  혼기가 찼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않는 여자들을 - 결국은그래서 아무런 경제적 여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 '잉여여성'이라 경멸을 담아 부르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 두 가지로부터 엠마가 자유롭다는 것은 오스틴이 '엠마'에 이르러 당시 사회가 여성들에게 가하던 가장 주요한 요구들을 없애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것이 그 바깥이 아니라 오로지 여성 내부에만 천착해서 여성을 관찰한다는 것의 의미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미 그 바깥에서 살펴봄은 '맨스필드 파크'에서 충분히 이루어졌기에 그 모든 사회적 굴레를 벗겨낸다면 과연 여성 스스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가 새로운 또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자리잡은 것일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 우리가 이 다음 작품 '노생거 사원'까지 고려한다면, 사실 '맨스필드 파크'에서 '엠마' 그리고 '노생거 사원'까지 죽 이어지는 일련의 연속성이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는데 단순히 말하자면 일종의 시점(바라보는 것)의 변화라 할 수 있지만 보다 흥미로운 점이 있으니 이 시점의 변화가 바로 전작의 결론들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곳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맨스필드 파크'에서 여성의 구원(진정한 자유를 쟁취했다는 의미에서)에 있어 '경제력'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면 뒤에 이은 '엠마'는 그것을 다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관찰함으로써 과연 경제력만 있다면 여성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를 살펴보고 '엠마'에게 있어 진정한 삶을 이루는데 있어서 나이틀리와의 관계에서 보듯이 남성의 역할 또한 중요한 것임을 말했다면 '노생거 사원'에서는 과연 그렇게 남성과 제대로 진정한 만남을 이룬다면 여성은 진정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묻는 것이다. 

 

   물론 오스틴은 전작의 결론들을 모두 부정한다. 맨스필드 파크에서 그토록 중시되었던 경제력은 엠마에게 와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엠마에게 있어 자신을 교정해주고 적절한 충고와 사랑으로서 보다 완전해질 수 있는 삶을 가져다 줄 수 있었던 남성은 '노생거 사원'에 와서는 전적으로 신뢰만은 할 수 없는, 보다 깊은 남성의 내면으로 들어갈 경우 배척당해 버리는 그래서 남성이 여성에게 정말 바라는 것은 필요할 때 어루만질 수 있는 정도의 애완동물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오스틴은 '맨스필드 파크'에서 '노생거 사원'에 이르기까지 찰라에도 변하는 시간을 온전히 담기위해 수많은 덧칠을 했었던 세잔 처럼 전작 위에다 새로운 작품을 수없이 가필하면서 여성 스스로 진정한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서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것이다. 때문에 오스틴은 전작의 주인공들 마저 새로운 작품에 다시 삽입하면서 까지 그 연속성을 강조한다. 즉 '맨스필드 파크'의 패니 프라이스는 '엠마'에 와서 '제인 페어펙스'로 다시금 등장하고 '엠마'의 해리엇은 '노생거 사원'에서 주인공 '캐서린'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이 두 인물이 모두 작품의 전형적인 피해자의 자리를 점유한다는 것 역시 흥미로운데, 여기에서 드러나듯이 오스틴의 작품들은 - 특히 이 세 작품에 있어서 -  전작의 전복적 위치에 있는 것이며 그렇게 그녀는 부정의 부정을 통하여 계속해서 여성 자신의 진정한 삶을 위한 근본적 조건들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스틴에게 여성 자신의 진정한 삶을 위한 근본 조건은 단순히 말하면 여성이 진정으로 자유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을 말한다. 이 점에서 그녀는 후대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도 '3기니'에서 여성의 자유에 있어 경제력은 필수 조건이라고 한 바 있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스틴도 여기에 동의한다. 하지만 경제력은 필수 조건이지만 여성의 자유를 위한 충분 조건은 아니다. 거기엔 뭔가 하나 더 필요하다. '엠마'는 그것에의 추구였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각도 그랬다. 그녀는 그래서 '자기만의 방'을 쓴다. 그것은 여성이 주체로서 여성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에세이였다. 그와 똑같은 것을 오스틴 역시 행한다. 말하자면 이 '엠마'는 - 후대의 작가 작품을 가지고 비유하는 것은 몹시 무례한 일이지만 - 오스틴의 '자기만의 방'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렇게 보자면 오스틴의 소설적 결말이 이상하다. 그녀의 작품들은 종국에는 사랑의 작대기가 서로 이어지는 해피엔딩이나지만 이러한 결말은 사실 그녀가 작품에서 천착해 온 것과 정반대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마치 오스틴의 결말들의 보여주는 모습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과정들을 부정하기까지 하는 느낌인데 오스틴은 왜 그러한 부정적이거나 혹은 한계지워진 결말들을 작품에다 허락했던 것일까? 이건 내게 아직도 더 깊이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논의의 전개상 무리를 해서라도 말한다면 어쩌면 오스틴 그녀 자신에게 처음부터 세 작품을 일련의 작품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고 그 의도대로 세 작품에 하나의 연속성을 주기 위하여 다음 작품의 주제가 전개 될 수 있도록 정작 나아가야 할 그 순간 발길을 멈추고 그 내부에 머무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여겨진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므로 다시 '엠마'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말해본다면, 엠마를 통해 오스틴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러니까 왜 엠마는 전작 맨스필드 파크의 여주인공 패니 프라이스가 그토록 절실했던 경제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실패를 경험하느냐에 대해서 오스틴은 엠마가 그녀 스스로를 늘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은 전혀 자유롭지 못하며 그것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항상 스스로를 규정하려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 타인에게서 발현되어 스스로를 자기 검열하게 만드는 시선의 대표적 상징이 그 시선의 총합이며 그 시선들을 만들어내는 사회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당시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존재가 남성임을 감안한다면 그 엠마를 구속하는 시선들은 모두 남성으로 부터 오는 규율적 권력의 효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엠마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그 자체가 남성으로 부터의 독립임과 동시에 스스로의 자유를 쟁취하겠다는 외침이므로 만일 오스틴이 '엠마'에서 천착했던 주제에 충실하자면 결말의 해피엔딩은 과감히 지우고 꿋꿋하게 독신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엠마를 그렸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엠마는 소설 내내 자신을 검열케하고 교정시키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시선의 권력 주체인 나이틀리에게로 가는 것을 택함으로써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팽개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결말은 오스틴이 작품 내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것에 완전히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작품이 가진 한계라기 보다는 작가 스스로 다음의 작품으로 자연스레 시점을 이동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잠정적 결론이 아닐까 하는 게 지금 내 생각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오스틴의 세 작품은 그대로 헤겔의 변증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어쩔 수 없이 '엠마'에서 오스틴이 여성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보다 더 궁극적인 것을 말했는데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타인의 시선이며 작품속에서는 흔히 '매너'로 표현되는 모든 것들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자크 르벨에 따르면 '매너' 이른바 예절이라는 것의 기원은 1530년에 간행된 우리에겐 '우신예찬'으로도 유명한 에라스무스가 쓴 '어린이를 위한 예절서'라는 책이라고 한다. 그 책은 세가지 점에서 혁신적이었다고 하는데 첫째는 무엇보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차별없이 그 어떤 계층이든 모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며 세번째는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규범'이라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이다. 즉 자크 르벨이 이 책을 예절(혹은 매너)의 기원으로 삼은 것은 이 예절이 특정 계층이나 어린이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 규범(예절에 대한 하나의 정형적 태도)을 정립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은 그대로 학교 교육에도 편입되어 이제 사회 성원들을 재사회화 시키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 된다. 에라스무스가 추구했던 보편적 규범의 추구는 오로지 개인들의 다양한 욕망들을 억누를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므로 그래서 그는 그 규범을 정착시키는데 있어 '훈육'을 가장 중요한 수단중의 하나로 보게 되고 그를 수용한 학교 교육은 그래서 강제적이고 채벌이 수반되는 것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른바 예절이라는 것은 태초부터 개인 본연의 욕망과 자유를 억압하고 획일화된 하나의 틀을  폭력적으로 강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예절이 하나의 보편적 사회관계 형성의 태도로 자리잡음으로서 이제 예절이란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있어 그 가치를 가늠하는 표준적인 잣대가 되어버렸다. 정확히 이러한 상황을 나타내듯 오스틴의 '엠마'는 얼마나 이 매너, 예절이라는 것이 나와 남을 판단하고 스스로 인정받는 것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 되었으며 그를 위해 모든 행위에 있어서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는지 조금은 섬뜩할 정도로 나타내고 있다. 매너라는 것이 사람들의 가치를 판단하는 데 있어 결정적이 것이  되었음은 엠마가 결정적으로 해리엇의 짝으로 마틴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의 매너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도 드러나며  엠마가 엘튼이나 나이틀리를 비롯한 모든 이들을 만날 때 그 모든 표정이나 몸짓을 눈여겨보고 있음에도 드러난다. 사실 오스틴이 이 소설에서 아마도 가장 많이 쓰는 동사는 '보이다' '드러나다'와 같은 시각에 관련한 동사이기도 하다. 그렇게 엠마는 끊임없이 '내가 어떻게 보여질까?' '남들이 나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생각한다. 한 장면에서는 엘튼이 더할 나위없이 무례하게 느껴졌어도 엠마는 '예절' 때문에 스스로의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히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오스틴이 드러내는 것은 명백하다. 아무리 경제력을 가진 여성이더라도 아무리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녀는 이미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형성되어 있던 타인의 시선의 매개물이라 할 만한 매너에 깊숙이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로 부터 헤어날 가능성은 있는가? 엠마가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궁극적인 것이 바로 그 시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녀는 그것을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오스틴은 거기에 대해 비관적이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은 지루하게 여겨질 정도로 당시 사회에 통용되고 있던 예절의 형태들을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흔히 '엠마'가 보여주는 '사실주의 문학의 모태가 되는 작품'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의 사실주의적 면모는 바로 여기, 이러한 개인 스스로의 힘으로는 달아날 수 없는 꽉 얽혀진 시선의 매트릭스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문제는 그 시선의 매트릭스가 오로지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여성은 오로지 그 대상일 뿐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여성은 그대로 그 시선에 의해 규정당하고 교정당하는 대상일 뿐 스스로 평가하고 교정해주는 주체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오스틴의 '엠마'는 이것을 이렇게 보여준다.  그 시선의 매트릭스가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작품 속의 여성들은 그 시선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하나도 없는데 남성은 그것으로 부터 자유로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주로 나이틀리의 형제에게서 나타난다. 특히나 엠마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 형 나이틀리가 더욱 그러한데 그는 때때로 의도적으로 타인과 사교해하는 의무를  무시하고 공공연히 혼자만의 일에 몰두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동생 나이틀리도 기본적으로 관대하고 배려해야 하는 장인이자 엠마의 아버지 우드하우스에게 그러한 의무를 종종 지키지 않는다.) 그런데도 엠마는 나이틀리를 이기지 못한다. 그녀는 늘 설득당하는 존재이며 그 앞에서 비평을 받는 존재이다. 바로 이러한 나이틀리와 엠마의 일방적 관계에서 여성은 오로지 그 시선의 매트릭스에서 규정과 교정의 대상일 뿐이라는 게 드러난다. 더구나 엠마 스스로 관찰하고 평가해서 이리저리 맺어주려 했던 관계들이 모조리 파국으로 끝나고 마는 것은 더욱 이것을 강조한다. 작품 내내 엠마는 그토록 열심히 보고 평가를 했는데도 자신은 잘못 보았으며 진실은 자신이 본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더구나 진짜 커다란 진실 프랭크와 제인의 관계는 아예 보지도 못한다. 제대로 보는 것은 오로지 그 시선의 매트릭스로 부터 자유로운 나이틀리 뿐이다. 

 

   때문에 최종적으로 엠마가 나이틀리와 이어짐은 그 시선의 권력 주체에게 완전히 포섭되어짐을 의미한다. 작품 내내 그토록 독립적이고 가장 자유로운 여성이었던 엠마는 그렇게 해서 그 독립과 자유를 스스로 남성에게 상납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오스틴 소설의 기묘한 측면, 즉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와 표현되어지는 내용의 상반성을 보게 된다. 오스틴 스스로 여성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궁극적 원인이 여성 스스로 자신을 보는 시선 그리고 남들이 자신을 보는 그 상상의 시선 자체에 있음을 말하면서도 정작 작품에 드러나는 내용 자체는 그러한 시선의 주체가 되려고 할 때마다 내내 실패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표면의 드러남과 이면의 진실의 반전된 모습은 어찌된 까닭일까? 

 

   다시 여기서 '엠마'라는 작품을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그 무엇보다 '시각적 작품'이라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보다', '드러나다' 등등의 시각적 동사들이 가장 많이 쓰였다는 사실에서도 이러한 특성은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성과 그 표면과 이면의 반전성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할수는 없을까? 엠마는 늘 보여지는 모습에 신경을 쓴다. 그래서 그녀는 싫지만 내색을 할 수 없고 정작 중요한 자기만의 진실된 감정들은 내부의 비밀의 영역에다 감추어야 한다. 이는 엠마만이 아니다. 엘튼도 나이틀리도 마찬가지다. 프랭크와 제인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렇다. 프랭크와 제인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결코 엠마에게는 드러나지 않았던 미스터리였지만 궁극적으로 엠마의 세계 자체를 전복시킬수 있을만큼 핵심적인 것이었다. 가장 커다란 진실이자 가장 본질적 진실이었지만 엠마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프랭크와 제인의 표면은 그것의 기미조차 하나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작품에서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차이가 중요해지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을 통해 오스틴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이제 우리는 그것을 물어야 한다. 이것은 시각의 한계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늘 타인을 보는 시선과 타인에게서 비롯되는 상상의 시선을 신경쓰게 되면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며 진정한 관계조차 이루지 못할 것임을 의미한다. 엠마가 정확히 이랬다. 즉 오스틴은 작품 속 엠마의 상황 그래도 독자를 이끌고 가기 위해 '표면과 이면의 반전성'이라는 방법을 취했으며 또한 그것을 통해 자신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주제를 더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품 표면에 오스틴이 보여주는 상황 자체를 늘 의심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엠마가 그랬듯 그 표면에만 집착하다 보면 정작 감춰진 진실을 영영 보지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표면적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나이틀리와 엠마의 결합 또한 의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제대로 된 작품 속 진실을 찾고자 하면 본류 보다는 지류를 줄기 보다는 세부에 돋보기를 가져다 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왜 작품 '엠마'에게 쏟아지는 비판 중의 하나이기도 한 '별로 명확한 줄거리도 없이 지리하게 그 세부를 모조리 복원했다.' 처럼 오스틴이 써내려 갔는지 그 이유가 명확해진다. 앞서 말했던 그대로 이면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문장 하나 손짓 하나 그 모조리 복원된 현실의 가장 작은 단면 조차 과연 그 안에 깃든 진실이 무엇일지 세세하게 헤아려야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명확한 줄거리 따위는 소용없으며(그것은 오히려 말하고자 하던 진실을 오도하므로) 그 재현되는 과정 전체를 즐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오스틴이 엠마를 통해 정작 하고자 했던 것 '여성이 진정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시선으로 부터 해방되어야 한다'와 연결되는 것일까 의문이 들 것이다. 시선으로 부터 해방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그건 내가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대상이 되는 것 뿐이다. 엠마가 초기에 했던 그대로 내가 스스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시선을 통해 타인을 규정하려는 나이틀리의 권력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거꾸로 나이틀리를 규정하는 시선적 권력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오스틴 역시 초반에 그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작품 초반 나이틀리에게 엠마가 당당하게 대처할 때 나이틀리가 무기력해지고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따라서 이 '엠마'가 재현되는 과정 전체를 즐기는 소설이 되어야 함은 마땅한 것이다. 왜냐하면 작품 전부가 내내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보고 판단하는 시선의 주체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엠마'가 가진 구성적 모호성은 오스틴의 명백한 의도이며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독립적 시선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훈련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엠마'는 오스틴의 새로운 전략적 글쓰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남성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는 이면과 세부에 진정한 진실들을 새겨넣어 볼 수 있는 자에겐 지금의 현실이 그 편파적인 욕망이 아로새겨진 인위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음을 더욱 드러내는... 

   새삼 엠마를 주목함은 이 작품으로 인해 오스틴을 나 스스로 전혀 새롭게 해석해 볼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오스틴은 늘 이야기의 매력으로 먼저 다가온 작가였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이야기의 아래에서 오스틴이 진정 새겨넣으려 했었던 손길들이 보이는 듯 하다. 단적으로 말해 엠마는 오스틴을 이해하는 데 있어 내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는 것이다. 고전이란 언제 어느 때 다시 보아도 늘 새로운 생각을 주기 때문에 고전이다 라고 하더니 그렇다면 엠마야 말로 거기에 적합할 듯 하다. 아무튼 엠마로 인해 이제 전혀 새롭게 만나볼 오스틴의 작품들이 벌써부터 마구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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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
구라치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즘처럼 세상 일이 답답할 때가 없다.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도 24시간 내내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추스릴 뭔가를 찾게 된다. 그래서인지 어떻게든 외부의 자극으로 틈틈이 비는 시간들을 메우려는 일이 잦아졌다. 뭔가 몰두할 수 있을 만한 일을 만들고 찾게 된다. 그럴 경우 나는 늘 두 가지의 탈출구를 찾게 된다. 하나는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정말 머리만 쓰는 미스터리를 읽는 것. 그렇게 지인들과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또 그렇게 몰두할 만한 미스터리를 찾았다. 그 때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이 구라치 준의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이었다. 

 

 

 

  구라치 준은 벌써 데뷔한 지가 20년이 넘는 중견작가인데도 그렇게 작품이 많지 않은 과작 작가이다. 일본에서는 냉장고가 비어야 비로소 작품을 쓴다는 말까지 농담 삼아 떠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그가 과작인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보다도 치밀한 논리 전개만을 주 무기로 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 하나 없이 오로지 치밀한 논리적 전개 만으로 하나의 미스터리 작품을 형상화하기란 참으로 힘든다. 더우기 그게 장편이라면 말이다. 그런데도 구라치 준은 해설과 옮긴이 글 빼고 총 464페이지에 이르는 작품을 오로지 하나의 논리적 매듭으로 묶어내고 있으니 그 하나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어찌 아니 도전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이 책 앞에 표기된 함랑표에 따르면 

  이렇게 다른 건 몰라도 논리정연이 만점을 상회하고 있다고 하니 더욱 더 도전의식이 불타오른다. 그래서 들었다. 사각의 링으로 들어가는 권투 선수 처럼 반드시 이겨주리라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구라치 준이 만들어 놓은 눈 덮인 겨울 산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작품이다. 

  새로이 구입한 산장을 색다른 레져 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해 한 부동산 업자가 광고 효과를 내기 위해 미디어들의 총아들을 불러 모은다. 늘 그렇듯이 저녁 만찬을 즐거운 가운데 만끽하고 수순에 의해 당연히 폭풍이 갑자기 몰아쳐 다음 날 산장은 고립된다. 그리고 그 고립된 날 아침. 타살된 시체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발견된다. 

  너무도 전형적인 구성... 그래서 뭐라 별달리 붙일 말도 없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뻔한 구성이라 왠지 더더욱 구라치 준의 자신만만한 호연지기가 느껴진다. 

  그는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봤어? 자, 별다를 거 없지? 너무도 뻔하지?  하지만, 난 이 정도로도 충분히 너와 승부할 수 있어. 이렇게 아주 뻔한 구성으로도 널 멋지게 넉다운 시킬 수 있단 말이다아~!" 그리고 후렴 처럼 달라붙는 그의 우렁찬 웃음소리...  

  이 상상이 그저 공연한 공상은 아닌 것이 구라치 준은 그것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거기에 더해서 아예 새로이 시작되는 장마다 간단한 안내까지 붙여 놓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1장이 시작되는 7 페이지 맨 위에는 

일단 이 작품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화자이자 이른바 왓슨 역이다. 즉 모든 정보를 독자와 공유하는 입장이며 사건의 범인이 아니다. 

  더하여 시체가 발견되는 장이 시작되는 163 페이지에는 

  하룻밤이 지나 시체가 발견된다. 살해 방법은 눈으로 확인한 그대로이고 부자연스러운 트릭 따위는 사용되지 않았다. 

 

  예컨대, 이렇게 모든 새로운 장이 시작될 때마다 안내문이 미리 나오는 것이다. (해설을 쓴 decca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일흔 다섯마리의 까마귀'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쓰츠키 미치오의 전매 특허 스타일이라고 한다. 구라치 준 자신도 작품의 말미에 그에 자극을 받아 썼다고 솔직히 밝히고 있다.) 이거 정말 패를 모조리 보여줘도 이길 수 있다는 작가의 호연지기가 아닐 수 없는데 요즘 우리나라 호연지기의 갑으로 불리는 그 분보다 더 한 호연지기가 아닌가! 그야말로 정말 한 아마존 독자의 서평 처럼 순수한 직구로만 승부하는 작품이다. 

   "젠장! 난 직구밖에 못 던져! 쳐 볼테면 쳐 보란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말하는 투수를 앞에 두고 타석에 들어선 타자인 것이다. 

   방망이를 굳게 잡고 투수를 노려보며 난 이렇게 말한다. 

   "좋다. 싸워볼 만 하군. 이 승부 받아주마."  

   그러자 구라치 준이 씨익 웃으며 몸을 크게 뻗는 듯 하더니 순간적으로 공을 날린다. 

   과연 그 결과는...? 

   젠장, 졌다. 완패했다. 설정 같은 거 무시하고 오로지 논리로만 겨뤘는데 보기좋게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일본 작가들은 정말 대단하다. 그 어느 나라보다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나라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떻게 이렇게 독자들 뒤통수를 때리는 트릭들을 잘도 개발해 내는 것인지 놀랍다. 트릭이라 말했지만 진짜 논리의 직구다. 여기엔 아무 변칙이 없다. 하지만 그 직구를 읽어내야 하는 내 눈이 이미 무엇에 의해 잘못 보도록 씌여져 있었다면...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투수와의 본격 대결 전에 내가 우연히 투수와 포수가 타자를 속이기 위해 서로 약속한 신호가 적혀 있는 쪽지를 주웠다고 해보자. 나는 물론 기뻐할 것이며 이제 투수가 그 어떤 속임수를 쓴다고 해도 내가 다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니 시합에 임하는 마음 역시 느긋할 것이다. 아마 아이의 재롱을 보는 부모의 느긋함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쪽지는 투수가 일부러 내 앞에 떨어드린 것이었고 나는 이미 거기서부터 투수에게 속고 있었다면... 

  말하자면 이 소설은 이런 작품이다. 거짓없는 하나의 커다란 직구와 그 직구를 전혀 다르게 읽게 만드는 유발된 사소한 착각. 하지만 그 착각이 어디서 비롯될 지 가늠하기 힘들다는 것이 또 이 작품의 매력이다. 

   당신은 구라치 준의 그물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내 대신 멋진 홈런 한 방을 날려줄 수 있을까?... 

   미스터리 해결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편이라면 당장 도전해 보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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