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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9월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번 8월은 정말 개인적으로도 힘든 나날이었는데

  가을엔 좀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자아, 다시 돌아온 신간 추천 시간

  이번엔 또 어떤 작품들이 우리의 눈과 머리를 즐겁게 할까요?

 

 

 

 그동안 신간평가단에서

 단편집은 선정된 적이 한 번도 없었죠.

 그래서 한 번 선택해 봤습니다.

 

 거기다 마이클 클라이튼, 스티븐 킹, 닉 혼비,

 할란 엘리슨, 마이클 무어콕, 엘모어 레너드

 등등...

 

 이건 뭐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만신전과

 같은 단편집이로군요.

 

 언제나 좋아하는 작가들을 만나는 건 즐겁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작가지만  우리나라에서 알려지지 않아 조금은 아쉬운  할란 엘리슨의 단편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기쁩니다.

 

 혹시 예전에 KBS에서 방영했던 환상특급을 아시는지요?

 

  거기서 브루스 윌리스가 다이하드로 뜨기 전에 한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나왔었는데요.

 제목이 'SHATTERDAY'로 여피인 주인공이 너무도 사는 게 한심해서 그의 그림자가  이제 본체를 대신하여 살려고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브루스 윌리스는 거기서 1인  2역을 했구요. 감독은 공포영화의 거장인 웨스 크레이븐 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몇 번째  에피소드로 방영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바로 이 에피소드가 가장 첫번째 방영작이었죠. 여기엔 사실 웨스 크레이븐의 어떤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80년대 미국이 넘쳐나는 돈으로 흥청망청 거리고 여피들이 양산되기 시작할 때, 그러니까 신보수주의의 레이거노믹스의 과실로 영혼들이 욕망으로 비틀거릴 때 정말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거냐고, 그저 물질로만 충족되면 다 끝난거냐고 웨스 크레이븐은 두 영혼으로 쪼개어져 버린 브루스 윌리스를 통해 물었던 것이었죠. 물론 그 브루스 윌리스는 그림자에게 자신의 패배를 선언합니다. 바로 이것이 웨스 크레이븐이 물었던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이었고 그것이 환상특급을 만들게 된 계기였습니다. 미국 자체로는 찾을 수 없는 대안을 경계 저 너머 그러니까 이성의 영역을 넘어선 완전한 타자의 영역에서 찾아오는 것. 그것이 바로 환상특급이 추구하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장엄한 시작의 에피소드를 쓴 사람이 할란 엘리슨이었습니다. 

 

                                         할란 엘리슨의 'SHATTERDAY' 표지 

 

  할란 엘리슨이 'SHATTERDAY'가 잘 보여주듯이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자화상들을 SF적 설정으로 보여주는 작가입니다. 간단히 말해 SF의 카프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사실 환상특급중 할란 엘리슨이 쓴 것은 다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렇게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작가이지만 국내에는 정말 번역이 안되더군요. 그런데 비록 단편 하나지만 그의 작품을 이 단편집을 통해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는 주저없이 이 책을 선택합니다.

 

 

 다음 추천작도 지극히 개인적인 선호가 기준입니다.

 

 

 

  그 이유를 이 작품의 이름만 봐도

  아실 분은 다 아시지 않을까 싶네요.

  네.

  이 작품을 제가 추천하는 이유는

  제가 이 작품의 원작인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제대로 공포스럽고

  흥미진진한 설정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그런 게임인데 공포소설의 대가

  브라이언 에븐슨이 게임의 프리퀄을

  소설로 만들었다고 하니 어찌 아니

  볼 수가 있겠어요.

  이 책의 소문이야 진작에 들었는데

  드디어 번역판이 나왔네요.

 

 

 

 

                                                               원작인 게임의 표지

                                          소설은 이 전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음 작품도 정말 번역되기를 기다려 왔던 책 입니다.

 

 

 

  로맹 가리의 흰 개.

 

  아마도 이보다 십년 전에 나왔다면

  분명 '마견'으로 나왔을 겁니다.

  미국 인디 영화의 거장

  사무엘 풀러가 이 원작으로 만든 영화가

  마견이라는 어이없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비디오로 출시되었거든요.

 

  아무튼

  유하의 하울링이 나왔을 때 페이퍼로 쓰면서

  로맹 가리의 흰 개를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http://blog.aladin.co.kr/748481184/5369501)

 (자세한 얘기는 이걸로 대신합니다. 이른바 재활용^ ^)

 

 그 때만 해도 설마 번역되어 나올까 했었는데

 오! 그런 저의 예상을 깨고 나왔습니다.

 (마음산책에게 고마워요^ ^)

 

  드디어 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네요.

  책을 좋아하는 이에게 기다리고 있던 작품이 번역되는 일만큼 신나는 일은 또 없겠죠.

  당장 읽으러 갑니다~

 

 

 

                                   1970년 갈리마르에서 나온 초판본의 표지입니다.

 

 

 다음 작품도 기대작 입니다.

 키에르 케고어의 '죽음의 이르는 병'이란 제목을 차용해서 더 유명해진

 서술트릭의 대표적 작품 '살육에 이르는 병'으로 유명한 아비코 다케마루의

 신작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본격 미스터리 입니다.

  그것도 영화를 소재로 한...

 

  미스터리의 주된 무대가 되는 것이 바로

  탐정영화 입니다.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 작품이 그러하죠.

  한 감독이 몇몇 배우들과 스텝들로 하여금 투자하게

  하여 본격 미스터리 영화 한 편을 만듭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일어난 트릭과 범인을 알려주지

  않고 영화를 찍다가 홀연히 사라지고 맙니다.

  투자한 돈 때문에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영화를

  완성해야 하는 스텝과 배우들은 감독이 찍어 놓은

  미완성의 영화를 가지고 범인과 트릭을 이리저리 추리합니다.

 

 개인적으로 참으로 흥미로운 설정입니다.

 무엇보다 영화속의 미스터리 라는 허구가 스텝과 배우들에게 실제 사건으로 되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확히 본격 미스터리를 읽는 우리의 모습을 복제하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도 어디를 보아도 완연한 허구의 티가 역력한 본격 미스터리를 읽으면서 그 트릭을 풀기 위해 마치 실제 눈 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인 양 몰입하니까요. 아마도 아비코 다케마루는 그런 식으로 독자들의 모습을 반영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독자 스스로 자신과 닮은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을 보면서 미스터리를 읽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걸 생각하도록 하려고 말이죠...

 어쨌거나 이바코 다케마루의 진심은 작품을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겠죠.

 

  그리고

 

  츠지무라 미즈키의 작품이 두 편이나 나왔습니다.

 

 

 

    

 

 

 

 

 

 

 

 

 

 

 

 

 

 

 

 

 

  늘 폐쇄된 곳에서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10대들의 몸부림을 보여주는 츠지무라 미즈키...

  이번엔 또 어떤 어두운 십대들은 날카로운 통증을 보여줄런지 기대가 되네요.

 

 

 끝으로,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해버린 신간 추천...

 

 

 

 

 

 

 

 

 

 

 

 

 

 

 

 

 

  뭐, 너무 유명한 작품이라 달리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과연 어떻길래 이토록 유명한건지 그 내용이 궁금합니다.

 

 

 

 

 

 

 

 휴우~

 이번의 신간 추천은 여기까지입니다.

 개인적으로 기다렸던 작가, 작품을 만나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던 신간 추천이었습니다.

 다음엔 또 어떤 일들이 뒤로 선물을 감춘 채 다가올지 궁금해지네요.

 그럼, 다음에 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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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9-06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재밌겠어요.
살육에 이르는 병은 엄마한테 사달라고 졸랐다가 퇴짜맞았어요.
19금 딱지가 붙어도 이상한 내용은 없다고 계속 졸랐건만 엄마는 넘어올 듯 하면서 안 넘어 왔네요. 어떻게 구할 수도 없고 반 포기 상태입니다.
로맹 가리의 흰개는 읽어보고 싶어서 장바구니에는 담아 두었어요. 물론 안 그래도 쌓인 책더미로 인해 곧 퇴출될 예정이지요.
아~ 피곤하다 ㅠ

ICE-9 2012-09-08 00:22   좋아요 0 | URL

정말 저도 왜 그 소설이 19금인지 이해가 잘 안가더라구요. 아마도 묘사가 잔인해서 그런 것 같은데 그 정도가 19금까지 될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사실 요즘 왠만한 미국 드라마는 그 이상도 많이 보여주잖아요. 우리나라 케이블 드라마들도 그렇고. 아무튼 어떡해요. 살육에 이르는 병은 정말 서술트릭의 걸작인데... 뒤통수 제대로 맞는 작품인데요...
도서관에서 대출 안 해 줄까요?^ ^

이진 2012-09-09 15:24   좋아요 0 | URL
헤헤
서술트릭은 우타노 쇼고로 충분히 즐기고 있어요.
알라디너 한 분이 저에게 추천해줄만한 책이 아니라 하더군요.
하긴 요새 외국 번역책 절대 읽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번역체가 계속 튀어나와서 말이지요...

ICE-9 2012-09-09 19:12   좋아요 0 | URL
하하.. 그런가요?^ ^
그런데 우타노 쇼고도 요즘은 작품 성향이 많이 바뀌어서 서술 트릭은 거의 내놓지 않고 있는 것 같던데... 저도 '벗꽃...' 밖에는 못 읽어본 것 같네요. 외국 번역책 읽지 않기로 다짐했다니 어떤 책이 그런 다짐을 하도록 충격을 주었을까요? 괜스레 궁금해지네요^ ^ 저는 번역책을 많이 봐서 그런지 번역체가 마구 튀어나와도 그러려니 해요. 익숙하다보니 무감해진것이겠죠.^ ^

이진 2012-09-10 00:1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요새 우타노 쇼고는 약간 추리 입문자를 위한 소설을 쓰고 있는 거 같아요. 번역되는 순서랑 쓰는 순서가 다르긴 해도 요새 번역 되어지는 순서로 치면 말이죠 ㅎㅎ 충격을 받았다기 보다 이제 문창과를 지망하는데 번역체 문장은 독이잖아요. . 헤헤... 번역체가 글에 많이 보인다는 평을 받은 뒤로 충격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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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올 여름은 정말 무덥군요.

  오늘 한낮에 거리를 걸었는데 마치 유령도시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바다에서도 그렇더군요. 정오의 태양이 작렬할 때는 해변마저 텅 비어버린 듯해

  보이더군요.

 

  '피서(避暑)'는 이제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방법이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피서 방법은 무엇인가요? 밤마저 무더운지라 책읽기도 힘겹습니다만

  그래도 역시 '피서(避暑)'엔 책만큼 또 좋은 벗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올 8월의 무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제가 고른 7월의 신간들은 이렇습니다.

 

  

  먼저, 미스터리 팬이라면 거의 '성경'과도 같은

  줄리언 시먼스의 '블러디 머더'

  올 여름 가장 벗하고 싶은 신간입니다.

  사실 오랫동안 번역되길 기다려왔던 책이기도 합니다.

 

  1972년에 출간되어 오래도록 미스터리 비평에 있어서

  하나의 준거점이 되었던 책인지라 미스터리 해설을 읽

  다보면 꼭 한번은 언급되곤 했던 책이기도 해서 그 진

  가를 두 눈으로 꼭 한 번 확인해두고 싶었습니다.

 

  저도 미스터리 비평을 어설프게 흉내내고 있는 형편

  입니다만 줄리언 시먼스의 이 책을 통해서 제대로

  한 수 배우고 싶군요. 한 며칠 두문불출한 채, 몰입해

  서 읽을 수 있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이. 럴. 수. 가 !!!!!!

 '알렉스'로 저를 열광시켰던

 피에르 르메트르의 작품이 벌써 나왔습니다.

 그것도 '알렉스'의 후속작이라고 하는군요.

 

 안그래도 '알렉스'를 읽으면서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의

 자취를 느꼈는데

 이번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이 한 번의 결혼으로 내 인생은 무너졌다'라는

 말을 보니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는 더욱

 그 세계로 들어간 듯 합니다. 

 

 '알렉스'에서 보여주었던 능수능란하게 플롯을

 짜는 기교와 '마담 보바리'에로의 귀환을 통해

 이 현대가 가진 문제점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았던 깊이가 이번 작품에선 또 얼마나

 진화했을지 궁금하군요.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서 또 다른 본격 미스터리의 매력을 듬뿍 보여주었던 노리즈키 린타로의 새로운 작품이 이번에 나왔습니다.

 

  '요리코를 위해'는 작가와 똑같은 이름의 명탐정 노리즈키 린타로가 나오는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입니다.

  더구나 이 작품은 '1의 비극', '또다시 붉은 악몽'으로 이어지는 린타로의 또 다른 시도라고 일컬어지는 '비극 삼부작'의 첫 작품이기도 해서 더욱 읽고 싶은 작품입니다.

 

  교묘한 술수도 없고 반칙도 없는 정정당당한 정면승부의 본격을 지향하는 린타로가 이 작품에선 또 어떤 본격의 새로운 풍미를 보여줄 지 기대가 되는군요. 

 

 

 

 

 

 

 

  

 

 

 

 

 

 

 

 

 

 

 

 

 

 

 

  사실 아직 텐도 아라타의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명성은 물론 많이 들었지만 그의 대표작 '영원의 아이'까지 포함해서

  이상하게도 저와 인연이 잘 닿지 않더군요.

  그래서 이번에 개정판이 새롭게 나온김에 그와 첫만남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과연 어떠한 모습을 보여줄지 정말 기대가 되는군요.

 

 

 

 드디어 '토탈 리콜'의 원작이

 번역이 되어 나왔군요.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를 꼭 한 번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거기다 콜린 파렐이 주연한

 '토탈 리콜' 영화 또한 새롭게 만들어져

 이번에 개봉된다고 하니 같이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영화 원작 소설이

 나왔습니다.

 바로 지금 개봉중인 린 램지 감독의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원작입니다.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임신을 할 무렵 컬럼바인 총격 사건을

 뉴스로 들으면서 자신의 아이가 만일

 그런 일을 저지르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서

 영감을 얻어 이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저도 영화를 봤는데

 린 램지 특유의 영상미학으로

 자신의 아이가 왜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그 이유를 추적하는 어머니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그 내면에 일어나는 과정을 그대로 가감없이 드러내듯

형상화했더군요.

정말 인상적인 영화였습니다. 더구나 틸다 스윈튼 특유의 무표정한 연기가

도무지 저 여자의 내면에 지금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궁금하게 만들기 때문에

원작에선 저 때 어떤 말들이 쓰여있을지 호기심이 일더군요.

그래서 꼭 한 번 읽고 싶은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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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8-06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덥다보니 언제나 유지되던 헤르메스님의 진지함을 약간 벗어버리고 편하게 글을 쓰셨군요.
요새는 살인적으로 덥잖아요. 밖에 나가 있다보면 뜨거운 햇볕이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 들어요. 살이 절로 익는 느낌에 도저히 나갈 수도 없고. 선풍기를 틀어 놓으면 더운 바람이 훅.
....... 소설을 써야하는데 ㅠㅠ

ICE-9 2012-08-13 23:29   좋아요 0 | URL
이런 이제야 댓글을 다네요 ㅠ ㅠ
죄송해요 소이진님^ ^;

저는 안 그래도 몸에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인지라 요즘처럼 무더우면 정말로 축 늘어진 강아지꼴이 된답니다. 그래서 책 읽기도 글쓰기도 너무 힘이 드는 것 같아요. 빨리 선선한 가을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 굴뚝 같네요
시체놀이도 지겨워요~ ㅠ ㅠ
 

 

 

 

 

 

 

 

 

 

 에식스 카운티는 할런 코벤의 고향이지만 정작 에식스 카운티의 주민들은 코벤을 별로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그가 쓰는 족족 베스트셀러가 되는 유명작가라고 해도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코벤의 소설들이 에식스 카운티의 부동산 가격을 떨어뜨리는데

 아주 커다란 일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뭐, 확실하게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아니면 적어도 많은 이들에게 에식스 카운티는 살기에 별로 좋지 않은 곳이란 인상을 심어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은 이 사실을 의심스러워하며 내게 증명을 요구할 것이다.

 그럼, 나는 그 근거를 이렇게 말하며 내세울 것이다.

 2005년에 나온 '결백' 부터 지금 나온 '용서할 수 없는'까지 에식스 카운티를 무대로 쓰여진 일련의 코벤 소설들을 한 번 떠올려 보라고... 너무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한 근거 같은가? 하지만 당신도 읽어보면 이 근거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할 것이다.

 

 

 

 

 2005년에 나온 '결백' 부터 시작해 지금의 '용서할 수 없는'까지 내내 공간적 배경이 에식스 카운티로 동일하므로 내 개인적으로는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이라고 부른다. 굳이 크로니클이라 붙이는 이유는 공간적 배경도 동일하지만 등장인물들까지 다른 작품에 겹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아들의 방(2008)'에 나왔던 가족을 만들어 정착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던 검사가 기억나시는지? 그의 이름은 '코프'인데 사실 그는 '아들의 방' 바로 전작인 2007년에 나온 'THE WOODS'의 주인공이었다. 그 작품을 읽으면 코프 검사가 왜 결혼을 두려워하는지 단적으로 알게 되는데 (그래서 사실은 '아들의 방'보다 먼저 번역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다면 '아들의 방'은 더욱 풍부하게 독해되었을테니까) 때문에 '아들의 방'에서 코프 검사가 보여주는 모습은 사실 그가 'THE WOODS'를 거치면서 성장했으며 '아들의 방'의 주제와 관련하여 어떤 치유의 단계에까지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아들의 방'에서 범인을 추적했던 형사 로렌 뮤즈 역시 이 작품에 코프의 협력자로 그대로 등장한다.(아니, 그녀는 이미 '결백'에서 부터 계속 나오고 있다.) 사실 그 때문에 ''THE WOODS'와 '아들의 방'은 강한 연작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건 이번에 나온 '용서할 수 없는'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 역시 바로 전작이 되는 '아들의 방'과 등장인물 몇 명을 공유한다. 물론 코프 검사와 뮤즈는 나오지 않는다.(뮤즈가 사라지고 그녀의 역할을 웬디 타인스가 이어받게 된 것에서 이 '용서할 수 없는'이 이전 작품들과는 다르게 코벤이 바라보고자 하는 작품임이 드러난다.) 이번에 겹치기 출연을 하는 등장인물은 '아들의 방'에서 여형사 뮤즈를 괴롭혔던 그러다 결국 된통 당했던 프랭크 트레몬트 형사와 변호사로서의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주인공 티아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충고했던 기계처럼 냉정하지만 그래서 능력이 뛰어난 변호사 해스터 크림스타인이다.

 

  "당신은 내가 이룩한 업적을 존경했다고 했죠? 헤스터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네"

  "난 가족을 갖지 않기로 선택한 거에요. 그 점도 존경하나요?"

  "그건 존경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건 당신의 선택도 마찬가지죠. 난 변호사로서의 경력을 선택했고 이 업계를 벗어나지 않았어요. 따라서 지금은 경력이 쌓인 만큼 윗자리에 올라선 거고요. 하지만 말년에 가서는 잘생긴 의사 남편과 토끼 같은 자식들이 기다리는 안락한 집으로 돌아갈 순 없겠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 아들의 방, P. 35)

 

 왜 하필 이 둘이 '용서할 수 없는'에 또 나오게 된 것일까? 그건 물로 코벤이 이 작품을 통해 다루려는 주제와 상관있다.

 

 이렇게 사실은 그의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은 같은 배경과 공유하는 등장인물들을 통하여 주제에 조금씩 변화를 줘가면서 이끌어가는 시리즈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트완 드와넬 연작'을 생각하면 더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400번의 구타'에서 시작해 '앙트완과 클라네' '도둑맞은 키스' '침대와 탁자' 그리고 '달아난 사랑'으로 이어지는 이 연작 시리즈는 '400번의 구타'에 출연하여 '앙트완 드와넬'을 연기했던 배우 장 피에르 레오의 실제 나이에 맞춰 진행된 성장 이야기다. 말하자면 앙트완 드와넬의 삶 자체를 실제 나이대로 담아낸 여정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드와넬의 위치를 에식스 카운티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 코벤의 이 시리즈인 것이다. 그래서 '크로니클'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트완 드와넬 연작'의 주연배우 장 피에르 레오 : 세월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그건 그렇고 아직 코벤이 왜 에식스 카운티의 주민들로 부터 환영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지 거기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는데 그건 이렇다. 이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에서 코벤이 보여주는 인물들의 모습 때문이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내내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라고 거듭 상기시켜주기에 그렇다.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했고 오래도록 알고 지내와 다 안다고 생각했던 아내나 남편들이 겉보기와는 다르게 사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나 남들에게 절대 들켜서는 안되는 오래전 과거에 범죄를 저지른 존재임이 드러나고 그들의 이웃 또한 평상시에는 더 없이 친근하고 완벽하게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고 사는 듯 보였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마치 이제까지의 모습이 깡그리 거짓이었다는 듯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공격적 악의와 상상을 뛰어넘는 범죄로 범벅이 된 모습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에식스 카운티는 곧이 곧대로 믿고 살다간 언제 어느 때 밤길을 걷다가 뒤통수를 맞게될 지 모를 그런 예측불가능으로 넘쳐나는 공간인 것이다. 그러니 누가 감히 이 에식스 카운티에 정착하려 들겠는가? 여기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연인, 혹은 한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아야 하는 이웃 모두를 '혹시나' 하는 의혹과 '어쩌면' 하는 불신의 눈으로 계속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러니 당연히 부동산 가격은 하루가 멀다하고 하락할 수 밖에!

 

  아마도 에식스 카운티의 주민들은 할런 코벤의 신작을 읽을 때마다 틀림없이 "이런, 또!" 하는 기분으로 책을 부르르 움켜쥐었을 것이다. 에식스 카운티에 베포된 '용서할 수 없는'은 또 얼마나 주민들의 악력 테스트용이 되었을까? 때로 운명은 아무리 책이라 하더라도 가혹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주민들이야 읽다가 분노로 쓰러지든 말든 코벤은 에식스 카운티를 한결같이 이렇게 그린다. 그 어떤 문마다 그 문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예측불가능한 비밀들이 무한히 움트고 있는 곳. 그래서 웃으며 인사하다가도 헤어지면 바로 내 등에다 칼을 맞을 수도 있는 곳. 한 마디로 만연된 예측 불가능으로 인해 생존을 위해서는 불신과 의혹이 자기 존재의 한 부분이 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거기서는 아무리 안정되어 보이는 현재라 하더라도 끝없이 의심과 불신을 가져야만 살아남는다. 유원지에 흔히 있는 거울의 미로에 들어간 것과도 같이 보여지는 모두를 순전히 믿다간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남과 세계를 의혹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한 일이다. 행동경제학을 창시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이제는 우리에게도 유명해진 '생각에 대한 생각'을 쓴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에 따르면 애초부터 우리의 정신은 여지없이 게으른 존재라고 한다. 즉 원래 우리 정신이란 자체가 따지고 드는 것을 귀찮게 여기도록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그러니 의심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아무리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하긴 직업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일이지만 늘 우리는 거기로 부터 해방되기를 꿈꾼다. 사유란 것도 마찬가지다. 그냥 관두고 싶어진다. 무턱대고 보이는 대로 믿고 싶어진다. 사람들에게 자주 혀를 치게 만드는 '냄비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도 결정적으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쉽게 끓어올랐다가 쉽게 식는다. 정치에 대한 분노도 마찬가지다. 관심도 분노도 지속적인 사유를 먹고 살아야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의 사유란 지속되기에 힘이 든다. 흔히 한국인들은 '무임승차 욕구'가 강하다는 핀잔을 듣는다. 그냥 누리려고만 할 뿐 그것을 가져오기 위해 정작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걸 한국인들만의 특유한 현상이라 치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차피 인간이란 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걸 인정해야 한다. 그걸 마치 없는 듯 부정하고 오로지 정신 승리로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어쩌면 내내 자기 꼬리를 무려고 달리는 강아지처럼 제자리만 맴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마치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본성을 극복해야 할 존재인 것 처럼 말했는데 아무래도 그것은 칸트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칸트가 진정한 인간다움을 '자유'에서 찾았을 때 그가 상정했던 자유는 이런 모습이었다. 동물적인 본능에서 자유로워 지는 것. 편하니까 그러고 싶은 것. 귀찮으니까 그만두고 싶은 것. 따지고 보면 동물적 본능에 다름아니다. 그래서 칸트는 거기에 인간다움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행해야 하니까 하는' 것에서 자유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편해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편함에도 불구하고 사유함을 멈추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본 것이다. 칸트는 하지만 거기에 쉽게 굴복하는 인간을 또한 인정했기에 본격적으로 윤리를 말하는 실천 이성을 얘기하기 전에 그 보다 훨씬 두터운 '순수 이성'을 썼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다. '정신 승리'만 외치는 것에는 쉬이 귀를 열지 않는다. 지금 현실적 모습을 충분히 인정한 상태에서 솟아난 대안에 더 귀를 기울인다. 코벤이 '용서할 수 없는'에서 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여기에 문이 또한 존재한다.

 

 

 여기의 문은 닫혀있다. 하지만 여기에 닫혀진 문은 그냥 닫혀진 문이 아니다. 그건 바로 내가 '닫아둔 문' 이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이 가지는 독특성이기 때문이다. 다소 무모하게 말하자면 이전까지의 작품들은 '닫혀진 문'에 관한 얘기였다고 할 수 있다. 문들이 모두 닫혀져 있었기에 예측 불가능성을 가져왔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의혹과 불신에 젖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얘기였다.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은 다른 질문을 시도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묻는다. 과연 그 문은 닫혀져 있던 것이냐고?

 

 그건 어쩌면 당신 스스로 일부러 닫아둔 문이지 아니었느냐고?

 

 그래서 코벤은 이 소설에서 문을 중요한 모티브로 가져온다.

 그건 소설의 첫문장에서 바로 드러난다.

 

 '그 빨간색 문을 열면 내 인생이 끝장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p.6)'

 

 그동안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에서 문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져왔다. 그 대부분은 그 뒷편에 뭐가 있는 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성을 상징이었다. 바로 그 예측 불가능성을 가져오는 주요한 원인이 또한 비밀이었는데 그것이 비밀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대부분 깊이 감추어야 할 비밀이란 게 남들에게 결코 보여서는 안되는 어두운 욕망이거나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경쟁이 되는 상대방의 경각심을 최대한 허물어 뜨려야 하기 때문에 숨겨야 하는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문은 바로 그것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코벤은 이 소설에서 문에게 새로운 세번째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사유하기의 귀찮음 때문에 닫아둔 문의 모습이다. 과연 그 문은 그저 닫혀져 있기만 했던가? 혹시 내가 거기에 참여함으로 귀찮게 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닫혀있는 것처럼 꾸미고 닫아둔 것은 아니었던가 묻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혹과 불신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한다. 외부로 부터 불러일으켜진 의혹과 불신이 아니라 나 자신이 포기해버린 의혹과 불신을 얘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동안의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의 소설들은 의혹과 불신을 없앤 진정한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천착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한다. 즉 의혹과 불신이야 말로 사실은 우리가 내내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원제 또한 사로잡히다라는 뜻의 'CAUGHT' 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코벤 스스로 그렇게 의혹과 불신에 사로잡힌 상태야 말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정보들이 날마다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이 현대 사회에서 그나마 제대로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이상적 형태가 아닐까 보고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생각이 할런 코벤으로 하여금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의 첫 테이프를 끊었던 2005년의 '결백'을 다시 쓰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사실 이 '용서할 수 없는'은 '결백'을 다시 쓴, 일종의 '리-라이팅(RE-WRIGHTING)' 작품이다. 거기에 대한 근거는 이렇게 저렇게 많이 말 할 수 있지만 그랬다간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그냥 이 정도로만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한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이 '에식스 카운티'를 무대로 한 소설들은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야 한다. (또! 강조하지만 그래서 'THE WOODS'가 빨리 나와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코벤의 이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은 그저 단순한 스릴러로만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프랑스의 발자크가 '인간 희극'을 쓰며 했던 것 또는 에밀 졸라가 '루공-마카르 총서'를 쓰면서 했던 것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정한 한 사회를 중심에 두고 그 한정된 시공간에서 인물들을 넘나들며 현대라는 보편이 무엇인지 모든 각도에서 담아내는 것. 그렇게 이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은 최근에 이르러 주목받고 있는 또 하나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인 '로컬리티(locality)'의 여정이다.


 그 여정 속에서 유독 그가 담아내려 하는 것은 바로 '불안'이다. 안 그래도 하이데거가 현대를 살아가는 존재들의 근본적이 정서라고도 말한 바 있지만 그렇게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스마트 폰 처럼 늘 지니고 사는 것이다. 할런 코벤은 그 불안과 의혹을 계속해서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 크로니클을 통해서 그것을 사유하고 극복 가능한 대안을 추적한다. 그래서 크로니클의 각 작품들은 그 때 그 때마다 코벤이 도달한 종착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때 '결백'은 단순히 말하자면 레비나스가 말했던 '환대'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불안을 끊는 방법은 '내게 다가 온 타자를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다만 포용하는 것 밖에는 없다'라고. 맷 헌터의 과거와 아내의 현재가 서로 겹쳐지며 코벤은 그것을 정말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여정이 계속된다는 건 그 종착지 역시 늘 수정되기 마련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밤에 쓴 글을 아침에 읽어도 남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사람이듯이 시간이 흐르면 보는 눈이 달라지고 때로는 그 그 사유가 깊어지고 폭이 넓어지면서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새로이 보게되기도 한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코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에게 문득 이런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 타자란 어떤 타자인가? 우리는 보여지는 그대로를 믿을 수 있는가?" 지금처럼 많은 이들이 정보의 생산과 유통에 접근이 용이하다는 건 그만큼 거짓과 왜곡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얻는 정보란 대개의 경우 많은 타인들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이 발달한 요즘의 현대인들은 그만큼 사이보그라고 해도 좋다. 이제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 기계들로 인해 우리의 신경망은 아주 멀리까지 뻗을 수 있게 되었고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은 많이 확장되었지만 그만큼 나의 눈이 아니라 무수한 타인들에 의해 필터까 끼워진 채 보게되었다. 원본은 파악불가능하고 그만큼 진실을 가늠하기도 어려워졌다. 이번에 나온 '용서할 수 없는'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결백'에서 말했던 '환대'가 제대로 이루어지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그 조건들을 탐색하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이 새로운 '결백'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주인공이 되는 '용서할 수 없는' 댄 머서와 '결백'의 맷 헌터가 동일한 과거(역시나 스포일러상 여기까지만 말한다.)를 가지고 있음에서 드러난다. 왜 그 과거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인가? 바로 여기에 '용서할 수 없는'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있다. 또한 바로 그 이유로 '아들의 방'에서 하필이면 프랭크 트레몬트와 해스터가 '용서할 수 없는'에 다시금 캐스팅 된다. 그 핵심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무엇보다 프랭크 트레몬트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들의 방'에서 어떤 형사였는가?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할런 코벤이 '아들의 방'과 '용서할 수 없는'에 쓰고 있는 동일한 모티브이다. 그건 역시 '보이는 대로 믿는다'이다. '아들의 방'에서 범죄자는 자신이 살해한 사람의 신분을 숨기려 시체를 위장한다. 그래서 사실은 평범한 주부지만 거리의 창녀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것으로 동기를 숨기고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프랭크 트레몬트가 걸려든다. 발견된 시체를 그저 창녀로만 여기고 별다른 수사없이 우연히 일어난 살인으로 단정지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깊이 생각하기 귀찮으니까 무턱대고 믿는 것. 흔히 일어나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 작용을 무엇보다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기에 또 그로 인해 엄청난 실수를 하기 때문에 코벤은 다시금 '용서할 수 없는'에 기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듯이 '용서할 수 없는' 역시 비슷한 모티브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서할 수 없는'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것은 위장된 시체를 위장된 모습만 보고 창녀라 믿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그렇게 여주인공 고발 전문 리포터 웬디 타인스는 댄 머서가 어떤 인간인지 자세히 알려하지 않은 채 자기가 본 그 모습만 믿고 소아성애자로 고발해 버리고 사람들은 그 보도된 모습만 보고 그의 삶을 가차없이 파괴해 버린다. 이것은 댄 머서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 웬디 타인스 역시도 댄 머서와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되는데 그 또한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나타난 것만 무턱대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아성애자로 부터 자기 딸을 희생당했기 때문에 소아성애자에게 증오를 품고 있는 에드 그레이슨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아들의 방'에서 보여준 프랭크 트레몬트의 모습 그대로이지 않은가? 이렇게 할런 코벤은 보여지는 현상이 주는 실체의 장악력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새김질 시킨다. 사실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사고적 버릇을 돌이켜 생각하도록 만들게 함이다.

 그런데 정작 이 모든 것의 원본이 되는 프랭크 트레몬트는 이 소설에서 조금 변화를 보인다. 마치 전작에서 어떤 교훈을 크게 얻기라도 한듯이. 그러고보면 그 깨우침을 가져다 준 형사의 이름이 '뮤즈'인 것도 참 교묘한 설정이다. 뮤즈란 그리스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가져다 주는 존재로 흔히 칭송받던 신의 이름이었으니까. 정말 그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되었는지 프랭크 트레몬트는 소설에서 한 창녀의 죽음과 실종되어 버린 아이를 비교한다. 여기서 코벤이 다시금 창녀의 시체를 언급하는 것은 '아들의 방'에서 프랭크 트레몬트가 보여주었던 모습을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그랬던 그가 그 5 페이지 뒤에 이르는 성찰에 이를 정도로 변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바로 그 트레몬트의 자각이 이 소설이 정말 말하고픈 핵심이다.

 그 5 페이지 뒤에 이루어지는 성찰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그게 죽은 창녀와 헤일리 맥웨이드의 차이일지도 몰랐다. 피부색이나 제정상태나 어떤 집에 사느냐가 아니라 항상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는지, 슬픔에 젖은 남겨진 가족이 있는지, 예전 상태로는 도저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지의 여부가 그 차이를 결정하는 법이다.('용서할 수 없는'  P. 163)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트레몬트와 같이 동반 겹치기 출연을 하고 있는 변호사 헤스터 크림스타인이다. 코벤은 작은 조연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첫 등장을 아주 주의깊게 설정했는데 이러한 용의주도함이 바로 이 인물이 사실은 코벤이 이 책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주제를 집약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성공한 변호사이자 많은 이들로 부터 이기기 위해서라면 도덕 관념 따위 집어던져 버리는 평가까지 받는 크림스타인은 텔레비젼 법정 리얼리티 쇼의 진행자로 소설에서 첫 등장한다. 이는 이 소설의 여 주인공 웬디 타인스가 TV 리포터라는 점에서 비슷하고 그래서 의미심장해 보이는 설정인데 거기서 재판장으로 연기하는 크림스타인은 의뢰된 사건을 실제 재판처럼 다룬다. 그런데 거기서 보여주는 모습은 웬디 타인스와 전혀 반대이다. 웬디 타인스는 댄 머서에 관련된 인터넷 제보, 그리고 그와 관련해 자신이 본 모습 그대로를 믿었지만 헤터스 크림스타인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그 맥락을 이해하려 하고 누구로 부터 보여진 사실이 아니라 그녀가 알아낸 객관적 사실에 맞추어 판단을 내린다. 마치 크로키 하듯이 쓱 지나간 이 장면은 나중에 에드 그레이슨을 변호할 때 더욱 확장되어 드러난다. 그녀는 경찰이 제시한 증거가 아무리 정황상 타당해 보여도 오히려 그 '정황상'을 의심의 근거로 여기며 끝까지 제대로 된 객관적 진실이 드러날 때 까지 파헤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코벤은 정말 감탄할만한 전개로 이 내용을 상세히 보여준다. 그러는 이유는 물론 단 하나다. 이것이 바로 핵심이기 때문이다.  바로 형사 트레몬트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던 '결정적인 차이는 항상 관심을 가져주는 존재의 있고 없고에 있다' 이것 말이다. 크림스타인이 보여주는 모습은 바로 이 말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코벤은 왜 이러한 자세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것은 물론 대니얼 카너먼의 말대로 우리는 사유하기를 귀찮아하며 그래서 쉽게 보여지는 현실에 타협해 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냥 귀찮으니까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댄 머서와 웬디 타인스가 겪는 비극에서 보여지듯이 그 귀찮음이 불러오는 타협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남의 인생 또한 너무도 쉽게 파괴해 버린다. 이것은 그대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의 동영상이 유포되면 사람들이 사실 관계를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단죄하고 결국은 그것이 보여지는 것과 아주 많이 달랐다는 것을 또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듣게 되는가. 남는 건 그저 막말을 들을대로 들은 사건의 당사자의 치유할 길 없는 마음의 상처뿐이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건 모두 우리가 보여지는 것에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객관적 거리란 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에 다름아니고 그건 또한 그 맥락을 살펴 타자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기에 나 자신의 사유의 적극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우리의 본능은 그것을 피하려 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멀리 있는 아프리카인들은 도우면서도 막상 우리 눈 앞에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아프리카인은 피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그의 현존 자체가, 보여지는 얼굴 자체가 우리에게 참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존재에 대한 사유의 참여를. 하지만 그건 단순한 사유의 참여만은 아니다. 사유란 어디까지나 타자의 존재를 고려하고 그에 맞춰 배려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그의 처지에 대한 책임도 어느정도 나눠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유란 책임을 나눠받는 일이다. 환경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현 환경에 대해 사유를 하게되면 자연히 그 보호의 당위를 생각하게 되고 거기에서 내가 할 것을 떠올려 보게 된다. 사유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책임을 떠 안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귀찮은 것이다. 그런데 사유란 바로 그 이유로 해서 타인을 구원하는 행위가 된다. 책임이란 나의 중심이 아니라 바로 그 타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관심 가지기'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테마가 되고 그러한 관심을 가지기 위해 코벤은 의혹과 불신을 내내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바로 그러한 태도 때문에 웬디 타인스와 헤터스 크림스타인은 결정적으로 사람들은 구원한다.

 

  여기서 다시금 저 앞에서 인용한 이 소설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보면 이제야 그 문장이 왜 하필이면 그렇게 쓰였어야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 첫 문장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파멸될 것을 알면서도 연다.' 물론 댄 머서는 자기 예상 그대로 그 문을 여는 바람에 파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걸려 온 전화 때문이다.  이 상황이 중요하다. 그는 문에 대해 의혹과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열었다. 열었던 이유는 누군가로 부터 걸려온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 때문이었다. 이 연결이 코벤의 핵심이다. 왜 의혹과 불신을 가져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타자에게로 연결되는 관심이기에 그렇다. 때문에 이 의혹과 불신의 문은 중요한 등장인물 모두에게 존재한다. 여주인공 웬디 타인스에게는 음주운전으로 자기 남편을 치여 죽여버린 아리아나 나스브로란 의혹과 불신의 문이 있다. 소아성애자에게 자신의 딸을 희생당한 에드에겐 댄 머서라는 의혹과 불신의 문이 있다. 웬디는 그 문 앞에서 나스브로가 계속 보내오는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읽으며 '이 여자가 정말로 내게 용서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정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는 것일까? 줄곧 의심하고, 에드는 '댄 머서가 정말 무죄일까? 혹시 교묘한 협잡으로 혐의를 벗은 것은 아닐까?' 줄곧 의심한다. '용서할 수 없는'은 이러한 의혹과 불신이 마치 씨줄날줄처럼 엮이어진 태피스트리와도 같다. 결정적으로 실종된 헤엘리 멕웨이드가 그 모든 것을 대변한다. 오래전에 이유없이 실종되어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차 모르는 존재인 헤일리 맥웨이드는 마치 9.11을 껴안아버린 미국과도 같이 에식스 카운티를 내내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그들이 무관심했기에 잃어버린 존재를 내내 환기시킨다. 즉 타자에 대한 관심이 없이는 사회조차 안정될 수 없음을 지속적으로 상기키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들의 방'에선 죽음이란 영원한 상실로 사회에 죄의식을 통해 타자의 관심을 촉발시켰던 것이 '용서할 수 없는'에 이르러서는 '실종'으로 바뀐 까닭이다. 죽음은 종국적 결말이지만 실종은 영원한 의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관심이 타자에게로 뻗어나갈 수 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웬디 타인스도 문득 느낀 댄 머서에 대한 의혹 때문에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에드 역시 똑같은 이유로 댄의 진실을 찾기위해 추적한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노력이다. 의혹과 불신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 노력한다는 것은 참으로 수고스럽다. 때문에 코벤은 댄 머서에게 다시금 '결백'의 맷 헌터와 같은 과거를 심어준다. 의혹과 불신 속에서 타인에 대한 진실을 찾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삶과 똑같기 때문이다. 사회가 가지고 있는 헤일리 맥웨이드에 대한 부채는 그렇게 댄 머서에게 보여지듯 개인화 된다. 웬디 타인스는 댄 머서에 대해 그러한 부채를 지고 에드 역시 그렇다. 모두 보여지는 것을 쉽게 타협한 대가로 짊어지게 된 부채(Debt)였다. 결정적으로 코벤은 타자에 대한 이러한 부채감을 느끼는 게 옳다고 본다. 댄 머서처럼 타자에 대해 그러한 부채감을 느낄 때 우리는 보여지는 것에 쉽게 사유의 타협을 하지 않으며 그 진실을 알기 위해 의혹과 불신을 도구로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헤일리 맥웨이드에 관한 진실도 그 노력을 그냥 쉽게 포기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지 않았는가?

 

 할런 코벤은 우리가 부정적 태도라고 여겼던 의혹과 불신을 전혀 새롭게 보기를 제안한다. 그건 물론 지금의 현실이 한 개인이 그 진실 여부를 판독하는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진실과 거짓이 뒤범벅된 정보들로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보들은 타자에 대한 지식들을 전하고 있지만 우리의 사유하기를 기피하는 습성은 편하게 보이는 그대로를 믿으려 한다. 사실 그게 마음 편하게 쉽게 사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우리들에게 코벤은 타인을 부채(Debt)로 여길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진실을 추구하는 의혹과 불신은 필연적인 태도라고 설득한다. 이것은 사실 '결백'이 빠뜨린 부분이었다. 코벤은 그 공백을 다시금 새롭게 '결백'을 반복하면서 채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을 차례대로 보아야지만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다시한 번 반복하는 바이지만 지금 '용서할 수 없는'을 들었다면 그대로 내버려두고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을 것을 감히 제안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번째 ''THE WOODS'가 필수적인데 그것도 빨리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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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30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고 대단한 글이라... 일단 감탄부터 하고 찬찬히 읽을게요~ ㅎㅎ

ICE-9 2012-08-01 00:03   좋아요 0 | URL
할런 코벤이 하고 있는 이 작업이 개인적으로는 나름 중요한 것 같아서 오랜만에 마음먹고 써 봤어요^ ^
소이진님의 감상이 어떨지 정말 궁금해지는데요. 나중에 살짝 귀뜸해줘요^ ^

호빵 2012-07-30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식스 카운티의 주민들이 헤르메스님의 글을 읽은다면 코벤에 한층더한 호감을 느낄것도 같네요.

ICE-9 2012-08-01 00:04   좋아요 0 | URL
오옷! 호빵님 감사합니다.^ ^
코벤이 팬으로서 정말 기쁘기 그지없는 말씀이세요^ ^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다시금 새로이 한 발을 내딛는 미나토 가나에!

 

 

 

 

 

 

 이번에 나온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왕복서간'에서 받게 될 느낌은 아마도 낯설음일 것이다.

 

 그렇게 분명 이 작품엔 어떤 이질감, 뭔가 이전에 나온 가나에의 작품과 다른 것이 느껴진다. 물론 그 이질감의 직접적인 원인은 일단 이 소설이 모두 편지글의 형태로 되어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가나에의 소설은 1인칭 시점이었다. 한 마디로 독백의 소설이었다. 물론 편지도 독백이긴 하다. 하지만 편지엔 확실한 수신자가 있다. 편지의 모든 말은 그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아는 상태에서 쓰여진다. 그러므로 다소 시간적 지연은 있지만 응답을 기다리는 대화를 위한 발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가나에의 독백들은 사실 그런 응답을 기다리는 소설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독백을 말하는 자가 이미 해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모든 소설의 과정은 사실 독백을 하는 주체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해답이 과연 맞는지 아닌지 맞추어보는 검증의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왕복서간'은 그게 아닌 것이다. '왕복서간'에서 편지를 보내는, 그래서 상대의 응답을 기다리는 모든 독백의 주체들은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진정한 해답은 모두 듣는 상대에게 있다. 그러므로 독백의 주체들은 이제 그 타자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게 '왕복서간'과 그 이전의 작품들이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확실한 차이점이다. 즉 '고백'과 '속죄'가 오로지 말하는 '입'만 존재하는 소설들이라면 '왕복서간'은 들으려는 두 '귀'가 주가되는 소설이다.  나는 여기서 '왕복서간' 바로 전에 나온 '야행관람차'를 빠뜨리고 있는데 그것은 '야행관람차'가 정확히 그 중간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즉 '야행관람차'는 '왕복서간'이 결정적으로 달라지기 위해 지나야만 했었던 일종의 징검다리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가나에의 모든 작품들을 마치 실에 진주를 꿰듯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놓을 수 있다는 의미고 그렇게 보았을 때 '왕복서간'은 그 최종 종착점이라 할 만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 붙게 되는 라벨(lable)은 무엇인가? 그것은 '고백'과 '왕복서간'이 가지는 결정적인 차이점을 부각시키면 절로 드러날 것인데 일단 '고백'의 성격을 단적으로 정의하자면 그건 '트라우마'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가나에는 초기작에서 부터 내내 과거의 해묵은 상처를 바탕에 놓고 작품을 구축해왔다. 소설의 모든 독백들은 바로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 다름아닌데 그러므로 그 상처는 내내 현실을 불안하게 만들면서 간직한 자에게 치유를 강요하는 그렇게 트라우마인 것이다. 그런데 이 트라우마에 대해 프로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외상성 신경증에서 일어나는 꿈은 환자를 사건의 현장, 즉 또 다른 경악 속에서 그를 잠에서 깨우는 그 현장 속으로 반복적으로 데리고 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p. 277)

 

 말하자면 트라우마는 늘 상처의 현재를 반복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가진 독백의 주체들은 조금도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프로이드는 인용한 문장 아래에 이런 말도 덧붙인다. '그들은 트라우마에 고착되어 있다.'라고...

 

그들에겐 미래가 없다. 그래서 사실은 '말'하는 입 밖에 없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미래라는 시간이야 말로 '타자'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타자란 나와 동등하거나 유사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타자가 진정한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든 근본적으로 '나'라는 동일자로 동화되어서는 안되기에 동일자의 완전한 바깥, 그 절대적 바깥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란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을 뜻하는 '죽음'과도 같다고 할 수 있고 바로 그 죽음은 우리에게 있어 전혀 불가해한 것이면서 또한 우리의 유한성을 뛰어넘는 무한의 시간이 도래하는 존재이기에 레비나스는 타자의 동화불가능성이 타자의 무한성과 연결되는 것이며 정확히 바로 그 의미에서 타자는 바로 미래 자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미래가 가진 예측 불가능성이 그대로 타자의 동화불가능성과 연결되고 그것이 간직하고 있는 시간 또한 무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자와 시간의 연결성은 들뢰즈 역시도 같다. 들뢰즈는 그것을 오스 야스지로나 후 샤오시엔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뜬금없이 삽입되는 명상적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즉 영화의 맥락과 아무 상관없이 제시되는 그 장면들은 더구나 아무런 움직임 역시 없기에 마치 격리된 정물화와 같다. 모든 의미와 운동성이 상실된 그 장면에서 관객들이 바라보는 것은 오로지 화면에 지속되고 있는 '시간' 뿐이다. 들뢰즈는 그 순수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가장 잘 체험할 수 있는 매개물을 '영화'로 생각했고 바로 그 때문에 두터운 두 권의 시네마론까지 쓴 것이다. 한 편 그 순수 지속의 시간 앞에서 관객들은 헤메이게 된다. 왜 느닷없이 이 장면이 주어졌는지 그 해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이른바 '간극'의 창출이며 거기서의 '망설임'이 순수 시간이 관객에게 주는 주된 효과다. 망설임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 내부에 해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눈 앞에 제시된 화면, 자신의 이해가능성 너머의 영역에 위치한 '타자'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관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귀를 기울이는 것. 무엇인가 해답이 주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속에서의 애타는 귀기울임. 내 한계 너머에 있기 때문에 할 수 밖에 없는 전적인 '나의 맡김'. 그것 밖에는 없는 것이다. 즉 이렇게 들뢰즈는 '순수 시간(pure time)'이야말로 타자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간은 타자와 더불어 할 때 움직이는 것이란 걸...

 

 

 

 

 

 

 

 

 

 

 

 

 

 

 

 

  이런 의미에서 트라우마에 고착된 독백의 존재들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은 그대로 그들의 눈에 타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소설에 나오는 모든 독백의 주체들은 타인들이 자신의 말에 어떤 영향을 받을지(보통 그 영향은 상처, 고통등이 될 것이다. 쏟아내는 고백들이 다 원한에서 비롯된 어두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타자들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도구의 의미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독백의 주체들은 거침없이 타자를 문자그대로 파괴한다. 자신이 가진 해답이 너무도 확실하기에 타인이 가지는 해답은 고려하지도 않고 신화속에 나오는 프로크라스테스의 침대 처럼 자신의 해답에 철저하게 타인을 맞추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백'은 그런 소설이었다. 트라우마에 고착되어 귀는 없이 입만 존재하는 고백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었다. 트라우마를 안겼던 존재 자체를 스스로 스위치를 눌러 폭발시켜 버리는 와타나베는 그야말로 '고백'이 가진 진짜 의미의 상징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미나토 가나에는 그것의 한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치유해봤자 행복해지지 않을 것임을 말이다. 그래서 소설은 그냥 고백으로 끝난다. 문득 독자에게 무한의 허공을 열어보이며... 소설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주인공 여교사는 복수로 인해 치유되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더 괴로운지 알려주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여교사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사례를 가진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영화 '메멘토'가 그 좋은 예이다. '메멘토'의 주인공은 단기 기억 상실증에 시달린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그는 바로 전에 보았던 사람도 일어난 일도 곧잘 잊어버리는데 그래서 그의 몸은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새긴 문신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그는 아내를 죽인 살인범을 추적한다. 단기 기억 상실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살인범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를 제거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밝혀지는 사실은 진짜 범인이 놀랍게도 바로 그 자신이었으며 그는 자기가 아내를 죽였다는 진실을 잊기 위해(말하자면 그에게는 그가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 자체가 트라우마였던 것이다.) 다른 이들을 범죄자라 이름 붙이고 희생함으로써 그렇게 상상적이면서 일시적인 치유를 반복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트라우마에 고착된 이들의 치유가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을 띄게 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 식으론 영원히 치유할 수 없으며 그저 제2. 제3의 희생양을 만들어서 때때로 맞는 모르핀 처럼 잠시 잊게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고백'의 여교사도 분명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아마도 와타나베를 보내버린 그녀의 두 눈은 이미 다른 대상을 물색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가나에에게 머무를 수 없는 장소였다. 그 고착이 가져올 영겁의 저주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장소를 찾아야했다.

 

 바로 그래서 그녀는 '야행관람차'를 타게 된 것이다. 유원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행관람차는 가나에에게 있어 세상의 비유였고 타자에게로 눈을 돌리기 위한 매개물이었다. 소설은 정말 '야행관람차'처럼 전개된다. 야행관람차 각 칸에 올라탄 사람들이 바깥을 구경하듯 소설이 여러 등장인물들을 옮겨다니며 그들 각자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던 중 아주 이상적인 모습의 가정으로써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여겼던 가족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 진실을 알려고 한다. 하지만 모두 관람차에 갇힌 존재들. 그래서 그들이 가진 창으로 밖에는 볼 수 없기에 때로는 상처를 입히거나 입고 불안에 떨게 하거나 떨기도 한다. 그렇게 모두들 분명한 진실을 알 수 없기에 고통에 빠진다. 답은 바로 근처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 대답을 위해 미나토 가나에는 야행관람차를 가져 온 것이다. 빙글빙들 도는 야행관람차를. 그래서 위에도 있을 수 있고 왼쪽 오른쪽에서 있을 수 있으며 아래쪽에도 있을 수 있는 야행관람차를. 그렇게 고정된 위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때문에 고착이란 게 불가능한 야행관람차를 가져온 것이다. 즉 그 야행관람차는 타인이 바라보았던 시선을 나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소통의 매개물인 것이다. 말하자면 '서로-주체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존재. 그리고 가나에는 바로 그러한 야행관람차식 시점의 이동으로 인해 결국 살인으로 엄습한 고통들마저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가나에는 '고백'의 '나 홀로 독백의 주체'가 껴 안을 수 밖에 없는 영겁의 저주를 야행관람차식 시점의 옮김(지젝이 말한 '시차'가 이것일지도 모르겠다.)을 통하여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가나에는 타자를 슬며시 가져온다. 이것이 중간 단계인 이유는 그 타자의 대답을 요청하게 되는 계기가 바로 현재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트라우마가 아니고 트라우마로 진행되던 과정에 있었다.(그래서 형식 마저 느슨한 형태의 1인칭 시점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치유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고착되지 않은 트라우마였기 때문에. '고백'은 이미 과거에 완성된, 그렇게 고착된 트라우마였다. 과연 그것도 이러한 타자들에게 맡김으로 치유될 수 있을까?     

 

 '왕복서간'은 바로 그 의문을 풀기 위한 작품이다. 여기에는 모두 세 편의 독립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 모두는 과거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즉 '고백'과 같은 완성된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다. 편지들은 모두 그 트라우마를 언급하며 그것의 실체를 알기 위해 묻고 대답한다. 추궁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고백'과 유사할지 모른다. 하지만 목적은 아예 정반대다. '고백'의 추궁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해답을 남으로 하여금 실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여기에서의 추궁은 근본적으로 '치유'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스포일러상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도록 하겠다.) '왕복서간'에서 이렇게 치유가 가능해지는 것은 무엇보다 '야행관람차'에서 적극적으로 타인을 포용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타자를 끌어들임이 상처를 일으킨 현재의 영원한 반복이라는 정지의 사슬을 끊고 시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야행관람차가 돌아가듯이 말이다.(가나에는 어쩌면 시계의 비유로도 이것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그렇게 드디어 미래가 도래했다. 아마도 그래서 가나에는 '왕복서간'에서 편지라는 형식을 취했는지도 모른다. 편지란 다름아닌 미래로 향한 발화이기 때문이다. 즉 편지를 쓴 사람이 기다리는 대답은 언제나 미래에서 불현듯 찾아온다. 그렇게 타자가 도래한다. 타자를 미래로 보았던 레비나스의 말 그대로 말이다.

 

 '왕복서간'이 시퍼런 날 선 언어들로 가득했던 '고백'과는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밀어들로 가득하다고 느꼈다면 바로 이런 변화 때문이었다. 가나에가 트라우마의 치유를 더 이상 '말하는 입'이 아니라 '들으려는 귀'를 통해 함으로써 타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붙들려있었던 시간마저 미래로 진행시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나에의 작품들이 보여준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자기만의 상처에 골몰하기를 멈추고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궁극의 치유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여정이었다.

 

 '왕복서간'은 이러한 가나에의 현재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에가 다다른 종착역이 어디인가를 확인하고 싶다면 꼭 읽어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다음에 이어질 여정의 보다 분명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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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7-0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백>을 읽고나서 하도 충격과 뒤끝이 심해서
<야행관람차>를 구매하고도 차마 펼치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화 <메멘토>를 한번은 열심히 봤으나 두번 다시 볼 생각이 들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는거죠. 그런데,

<야행관람차>와 <왕복서간>을 통해서 포용이라는 개념으로 들어섰다고 하니
어쩐지 마음이 조금 놓이기도 합니다. 근시일내에, 야행관람차를 먼저 읽어야겠어요. ^^

ICE-9 2012-07-21 00:02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야행관람차'를 읽지 못하다가 '왕복서간'과 '고백'의 차이가 너무 두드려져서 도대체 이 변화가 어떻게 된 것인가 알고 싶어서 집어들게 되어는데요. 그래서 왕복서간으로 가는 어떤 흐름을 보게 된 것 같습니다. 마녀고양이님께서는 어떻게 읽으실 지 궁금하네요.^ ^ 그런데 너무 뒤늦은 답글이라서 정말 죄송합니다. 요즘은 정말 시간이 안 나네요 ㅠ ㅠ

이진 2012-07-19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어디로 사라지신거예요 ㅠㅠㅠ
무려 열흘이라니, 이러다가 2주 채우시는 거 아닙니까?ㅎㅎ
내일이 신간평가단 리뷰 마감일이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게다가 헤르메스님은 평가단장인데...(막 이래서라도 보고싶은 마음.ㅋㅋㅋ)

ICE-9 2012-07-21 00:03   좋아요 0 | URL
흑흑... 소이진님 ㅠ ㅠ
정말 너무 바빴어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오늘 리뷰 기한이라 어떻게든 다 읽고 쓰긴 했는데
때문에 몸은 이미 초주검 상태입니다. ㅠ ㅠ
소이진님은 이제 곧 방학이겠네요...
우왕~ 너무 배아파서 한달간 잠수타고 싶어요^ ^;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벌써 6월의 신간 추천이 도래했군요.

  신간평가단을 해서 그런가 요즘 저의 시간 감각은 추천과 리뷰 마감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7월에 벗하고 싶은 신간들을 골라봅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번의 강력 추천은 바로 이 작품입니다.

 헤르만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브로흐의 가장 대표작이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적이 없었던 작품이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 중 하나로 드디어 번역되어 나왔네요.

 

 유럽 모더니즘의 걸작이라 평가받는 이 작품은 '아이네이스'의 저자이자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를 인도하는 유령으로도 나왔었던 베르길리우스의 마지막 24시간을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리스 여행 도중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온 베르길리우스는 돌연 자신에게 삶이 정말 얼마남지 않았음을 예감하고 이제 막 완성한 자신의 대표작인 '아이네이스'를 불태우려 합니다. 그러자 그 작품의 위대함을 알고 있는 동료 시인들이 그것을 제지하려 하고 황제 또한 로마의 정체성 자체가 담긴 아이네이스를 불태워서는 안된다고 설득합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베르길리우스의 마지막 하루 동안에 있었던 이러한 논쟁들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논쟁의 주제 또한 다양해서 예술, 종교, 국가, 전체주의 등 거의 인간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사실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스를 태워버리려 했듯이 브로흐 자신도 창작의 고통이 너무 커서 이 작품을 태워버리려고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작품 속의 베르길리우스는 그대로 브로흐의 페르소나인 것이며 무대는 비록 과거의 로마이지만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논쟁들은 사실 현대 문명 자체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죠.

 

  독일 작가 브로흐는 나치에게 자유주의 작가로 찍혀 1938년, 그의 나이 52세 때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구체적 물증이 없었기에 풀려났는데 그 때문에 그는 바로 토마스 만과 아인슈타인의 도움을 얻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의지할 데 하나 없는 미국에서 친구의 집을 전전하면서 써내려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많은 논쟁들이 나오듯이 문체 또한 고정적이지 않고 마치 물이 흐르듯이 유동적인데 그것은 아마도 현실의 브로흐 역시 유랑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원래 브로흐의 작품들이 아주 독창적이지만 이것은 그 정수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경이로움인데 말로만 전해듣던 그 전설을 이 기회에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미국에 있는 동안 쓰여졌기 때문에 미국판이 독일어판 보다 먼저 나왔습니다. 옆에 있는 사진이 1944년에 미국에서 나온 초판본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나온 판본이 되겠군요. 그래서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것 같습니다. 현재는 1,700달러에 거래되고 있더군요.

 이런 ㅠ ㅠ...

 

 

 

 

 

 

 

 

  렌조 미키히코를 좋아하시나요?

  네, 회귀천 정사, 저녁싸리 정사의 그 렌조입니다.

  개인적으론 참 특이한 작가였습니다.

 

  회귀천 정사나 저녁싸리 정사를 읽으면

  마치 옛날 유행했다던 순애보를 읽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서로에 대한 순수하고도 자상한 마음에

  오이 피클 처럼 푹 절여있다보면

 렌조란 작가는 참 말랑말랑한 마시멜로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왠 걸 그 순간 그는 솜씨좋은 외과의 처럼 매스를

 들고 그 이면을 파헤쳐 보여 주죠.

 

 

  "헤~ 과연 네가 보고 있던 것이 진실일까?" 하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표면과 이면을 능수능란하게 바꿀 수 있는 작가. 그가 바로 렌조 미키히코 입니다.

  별로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도 그의 매스가 한 번 가해지면 기이한 일탈들로 가득한 공간이 되고 한없이 아름다운 순애보 역시도 증오와 복수라는 감정 위에 세워진 치밀한 계산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마술사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모자에서 토끼가 불쑥 튀어나오게 하는 마술사 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환영이고 정작 보이지 않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실체임을 놀라움 가운데 가져오는 작가인 것이죠.

 

  '조화의 꿀'은 유괴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유괴'란 실체를 탈취하는 전형적인 행위입니다. 바로 그 실체를 전유하는 테마 위에서 렌조는 또 어떻게 실체를 환영으로 만들고 그 이면에 배여있는 진실을 펼쳐보일까요? '조화(造花)'에서 꿀이 나오도록 만드는 그의 마술이 진정 보고싶군요.

 

 

 

 

 

 

  이미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자유'가 발간되었습니다만 사실 조너선 프랜즌의 대표작은 바로 이 '인생수정'이 아닐까 합니다.   조너선 프랜즌은 '로컬리티(locality)'의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보편 보다는 특수를 지향하는 작가죠. 이를테면 그는 일반이라는 틀에서 한 개인이나 가정을 내려다 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바로 그 특수하고도 구체적인 개인과 가정을 통해서 보편을 담는 작가입니다. 그렇게 그는 찰스 테일러의 서사적 주체(즉 주체란 다름아닌 특수한 집단, 지역의 소속감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의 입장과 유사합니다.

 

 

 생각해보면 사람이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처해 있는 특수한 장소, 상황에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의식이란 그렇게 보편 보다는 언제나 특수한 맥락을 따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로컬리티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중요한 것으로 다룹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센델도 사실 이런 입장에서 정의로움을 고려하지요. 이렇게 지금에 와서 로컬리티가 중요해진 이유는 한 마디로 리오타르가 말하듯 거대 서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보편이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에 그 보편이 장악하지 못했던 특수한 상황, 지역, 정체성들에 집중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다시금 '보편'을 사유하는 것이죠. 프랜즌은 바로 그러한 작가입니다. 그가 그려내는 가족의 이야기란 하나의 특수적 상황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그는 오히려 시대 전반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죠. '인생수정'은 그런 로컬리티적 소설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 그래서 저역시 꼭 벗해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우울과 몽상'의 번역에 실망해서 사실 포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번역을 기다려온 저이기에 이 책의 출간은 반갑기 그지 없군요. 포의 대표 단편 16개가 실려있는 이 작품은 새로운 번역이기 때문도 하지만 무엇보다 편집한 사람이 마이클 코넬리라는 점. 그리고 각 단편마다  유명 스릴러 작가들이 짤막한 감상평이 덤으로 실려있다는 점 때문에 골랐습니다. 서점에서 보니 실물의 외관도 상당히 근사하더군요. 이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

 

 

 

 

 

 

 

 

 가나에의 작품은 모두 저의 관심대상입니다.

 '왕복서간'에서 보여준 그녀의 변화가 흥미로웠는데

 'N을 위하여'는 과연 어디로 나아갔는지 궁금하군요.

 

 

 

 

 

 

 

 

 

 

 

 

 편혜영 작가를 저는 잘 모릅니다.

 제가 한국 문학쪽 경험은 별로 없어서

 많은 분들이 언급하시길래

 조금은 공부를 한다는 기분으로 읽어보려

 골라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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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07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___________^
이번 소설은 재밌어보이는 게 참 많던데 말이어요.
편혜영의 소설이 가장 눈에 들어오고, 미나토가나에의 소설도 재밌어 보이고.
엊그제 타 인터넷 서점에서 재미삼아 신청한 신간평가에 당첨되었어요.
호스피스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집인데 받고보니 놀랍기도 하고 벅차기도 했어요.
늘 하는 이야기지만 좀 더 성실해질걸ㅋㅋ 셤 끝나고 일단 리뷰 하나 써야겠어요.
셤 기간에 주말이 끼어서 그런지 시험 안 같아요.
낮에 한두시간 낮잠을 잤더니 잠도 안와서 티비보고 있네요. 문제집 훑어보는것도 못할 망정...

ICE-9 2012-07-08 23:45   좋아요 0 | URL
오! 축하해요^ ^
원래 바로 시험을 앞두고 있으면 딴짓 많이 하게 되잖아요^ ^ 저 같은 경우도 시험 공부 하다가도 괜히 방청소 하게 되고 책 정리하게 되고 마구 그러던걸요. 사람 심리라는게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벼락치기가 더 힘든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소이진님은 모두가 부러워마지 않는 방학이 이제 초읽기에 들어갔으니 그것으로 위안 삼아도 될 듯 싶어요. 방학이 없는 저로서는 정말 부럽기 그지 없는 일이에요 ㅠ ㅠ 좋은 한국 소설들 볼 때마다 소이진님도 같이 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 많이 하는데(전 이쪽은 정말 젬병이라서^ ^;) 언젠가는 같은 책을 읽고 느낌을 나눌 때가 오겠지요. 그럼 남은 시험도 잘 치르시길^ ^

이진 2012-07-09 14:41   좋아요 0 | URL
에에, 방학이 방학이 아닌 걸요. 올해부터 학교도 주 5일제 들어갔잖아요. 방학이 확 줄어버렸어요. 보충학습 일수는 더 늘어났구요. 방학이 한 달도 안되는 4주인데, 보충학습이 3주랍디다. 아아... 저는 보충 듣다가 서울로 도피해버릴겁니다. 그걸 위안 삼아서 지내야지요. 저도 한국 소설에 강한 사람은 아니랍니다. 한국 문학에 심취한지 일년도 채 되지 않은 새내기예요.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작가와, 그 대표작 몇개만 나열할 수 있을 뿐이지 좋아하는 작가도 적구요. 그래도... 신간평가단은 하고싶다. ㅋㅋㅋ 시험 잘 칠게요. 개인적으로 국어와 사회가 주종목인데 사회를 망쳐서 지금 기분이 영 안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