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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시간 빠르게 가는군요. 어느새 또 이렇게 신간 추천의 시간이 닥쳐오다니...

벌써 7월이란 말입니까? 날짜보고 그새 그렇게 시간이 흐른거야 문득 깨닫게 되네요.

요즘은 그냥 영화 모던타임즈에서 콘베이어 벨트 위에 쉴새없이 들어오는 물건의 나사를 죄던 찰리 채플린 같습니다.

이것 처리하면 저게 들어오고 또 저걸 처리하면 이제는 이게 '메롱~'하듯이 들어오는...

더위 먹은 강아지마냥 헥헥 거리는 게 할 수 있는 전부 같은 날들이에요.


무, 어쨌든 푸념은 이 정도에서 각설하고 인문 신간 추천이라는 본 게임에 출장하도록 하겠습니다.

집에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6월에 나온 인문 시간을 휘리릭 둘러보는데 반가운 신간이 좀 보이네요.


그 중에서도 가장 반가운 책은 단연 이것!


 네, 프랑코 모레티의 '공포의 변증법' 입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학자입니다. 저는 이 학자를 오래전에 주은우의 글을 통해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교수 되기 전에 문화과학인가 아무튼 어떤 계간지에 발표한 글이었는데 거기서 프랑코 모레티의 드라큘라와 자본론에 대한 것을 쓴 적이 있죠. 처음 그 글을 읽는데 굉장하더군요. 자본의 속성을 흡혈로 파악하고 그것을 드라큘라로 풀어내다니. 세상에 이렇게 참신하게 분석하는 작가도 있구나 진심 감탄했었습니다. 그 때부터 프량코 모레티를 찾아 읽었죠. 그런 점에서 대학 도서관이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원서도 얼마든지 찾아 읽어볼 수 있었으니.

아무튼 그 때 소개된 책이 바로 이 '공포의 변증법'이었죠. 정말 오랜 시간이 흘러 드디어 번역본으로 나왔네요. 참 반갑고 개인적으로 추억이 돋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로서는 단연, 첫 추천을 할 수 밖에 없구요.

프랑코 모레티는 제게 피그말리온을 연상시킵니다. 새로울 것이 없는 고전들을 그만의 독특한 분석으로 피와 살이 도는 생생한 존재로 되살려 주거든요. 그런 경험을 가득 안겨주는 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이 '공포의 변증법'은 원제가 Signs Taken for Wonders 로 프랑코 모레티의 진가를 알린 대표작이기도 하거든요. 추억의 책이라 주저리 주저리 말이 많네요.^ ^;  


 검색해보니, 지금까지 나와있는 프랑코 모레티의 책은 이것밖에 없군요. 이중 '세상의 이치'는 소설이고 '근대의 서사시'는 절판되었습니다.












 솔 크립키의 '이름과 필연'도 새로이 번역되어 나왔네요.

 역시나 반가운 추억 속의 책입니다.

 크립키의 이 책도 빼놓지 말아야 할 책 중의 하나죠.












 얼마전에 윤여일이 쓴 '사상의 번역'을 읽었습니다. 거기서 일본의 학자 다케우치 요시미가 바로 루쉰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에 대해 새로이 눈을 뜨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 다케우치 요시미 같은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왕후이일 것입니다. 그 역시 루쉰을 통해 진정한 학문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던 존재이니까요. 그런 왕후이의 루쉰에 대한 책이기에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역사와 민족 그리고 상황이 다른 개인들이 루쉰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소화하고 있는지 비교해 읽어보는 것도 참으로 흥미로울 것 같군요. 그러면서 저의 루쉰은 또 어떠한가 되새겨보고 싶습니다.







 연달아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빠뜨릴 수 없는 책이 또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토머스 메츠거의 '곤경의 탈피'

 막스 베버 이후로 굳어진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정면에서 반박하여 유명해진 책.

 그동안 중국의 성장을 외재적 요인으로 설명하던 것에 비해 토머스 메츠거는 거꾸로 성장의 요인은 어디까지나 내부에 있었음을 밝혀 중국 성장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려 했습니다. 그것도 중국 사상의 핵을 이루는 유학을 가지고 말이죠. 현대에 들어와 특히 경제성장과 관련하여서는 유학은 득보다 실을 많이 가져온 학문으로 많이 인식되었는데 이 책은 그 정반대의 인식을 가져다 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건 사실 우리나라와도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전 한 총리 후보가 일본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했었죠. 뉴라이트가 내내 내세우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동일한 발언이었습니다. 조선이 문제가 많았는데 일본 덕분에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하는. 그 대표적인 게 바로 성리학이었습니다. 잦은 당쟁이 조선의 성장을 가로막은 대표적인 것으로 흔히 꼽기도 했었죠. 과연 저들의 주장대로 외재적 요인이 그렇게 강력한 것인지, 성리학이 그렇게나 큰 문제였는지 비록 중국의 케이스지만 제대로 검증해 볼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발전은 어디까지나 내재된 힘, 그렇게 자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오면 닥치고 읽는 피에르 바야르의 새책입니다.

 그의 전작들을 읽으면서 도대체 얘는 어떻게 자라왔길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했었는데 드디어 알 수 있는 기회가 왔군요. 다른 이의 텍스트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과거를 텍스트로 삼는다니! 읽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발터 벤야민 선집을 읽다보면 가장 궁금해지는 것이 바로 그것을 기획하고 지속적으로 번역하고 있는 최성만 교수가 바라보는 발터 벤야민입니다. 과연 그가 그리고 있는 발터 벤야민의 초상은 어떠할까 한번쯤 제대로 육성으로 들어보고 싶었는데 정말 좋은 기회가 찾아왔네요.

목차를 보니 발터 벤야민이 거의 전 저작을 다루고 있는 듯 한데 발터 벤야민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아주 좋은 기회가 될 듯 합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걸신들린 듯 달려들어 먹어치우고 싶네요^ ^








 아, 참! 하나를 빠뜨렸네요.

 '축구의 세계사' 서점에서 봤는데 재밌더군요. 아주 두텁긴 했지만...

 축구에 대한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아 사족처럼 추천해 봅니다.












 이번엔 이렇게 신간 추천을 합니다. 와, 그런데 너무 무덥네요. 모두들 이 더위에 몸 상하지 마시고 보다 더 시원하고 쾌적하게 잘 보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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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06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프랑코 모레티를 읽긴 읽었는데 어디서 읽었는지 모르겠던데, 주은우 하니깐 저도 아마 주은우가 번역한 글을 통해 접한 것 같군요. 하여튼... 이분 분석이 매우 독특합니다.그나저나 비야르 책도 이번에 나왔네요?! 허어,, 이거 참....

ICE-9 2014-07-08 20:08   좋아요 0 | URL
와, 저와 프랑코 모레티를 알게 된 경로가 비슷하셨군요. 저도 정말 독특하다고 느꼈고 다른 작품들을 읽을 때 꽤나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거기 있어서는 바야르도 비슷한데 함께 나왔더군요.^ ^ 읽을 책이 마구 늘어나는데 읽는 시간은 왜 이리 줄어드는 것인지 ㅠ ㅠ
 

'물대포' 헌법소원.

 제기했다기에 관심 있었다. 어제 헌재 판결이 나왔는데,

 엥, '각하' ?

 각하는 소의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내리는 결정이다. 뭔가 충족되지 않았기에 이런 결정이 나왔나 보았더니

 이럴수가! 소의 이익이 없기 때문이란다.

 물대포 쏘는 행위가 이미 끝나 청구권자들의 기본권이 더이상 침해 당할 여지가 없으므로 소의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소의 이익을 다른 말로는 권리보호의 이익이라고 한다. 즉, 공권력의 행사로 기본권을 침해당한 당사자가 그 공권력의 취소를 통해 침해당한 권리를 구제받을 가능성이 있을 때 이 이익은 인정된다.  이러한 권리보호의 이익은 종국 결정시까지 있어야 하는데 판단 대로 물대포 쏘는 행위는 이미 끝났으므로 구제받을 이익은 더이상 없는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예외가 있다.


 즉 권리보호 이익이 소멸했다고 하더라도 예외적으로 심판의 이익을 인정하여 본안 판단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헌재는 개인의 기본권 구제도 해야하지만(주관적 기능) 위법한 침해로 부터 헌법 질서를 수호할 사명(객관적 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즉 이미 개인의 권리 보호 이익이 소멸했다 하더라도 이 침해 행위가 차후 반복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 그건 곧 헌법 질서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므로 그 방지를 위해 본안 판단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대포 행위가 앞으로도 반복될 '위험' 곧 가능성이 있다면 예외로 본안 판단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 각하 판단한 6인은 물대포가 근거리에서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걸 들었다.


 헐~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판단을 한 것일까?  심히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앞으로 안 쏠까? 이대로 역사의 유물이 된다면야 대환영이다. 아니면 근거리에서만 쏘지 않으면 된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근거리일까? 정말 나의 상식으로는 어떻게 따라잡을 수 없는 논리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엔 하도 그동안의 상식과 통념을 뛰어넘는 저들의 생각들을 많이 봐와서 조금은 내성이 생겼다.


 어쩌면 이리 무리하게 각하 판단을 내린 게 물대포가 기본권 침해가 최소일 것을 요구하는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되어(청구권자들이 근거리 물대포 사용으로 뇌진탕 등의 상해를 입어 헌법 소원을 청구한 것이기에) 위헌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크기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소설 한 번 써 본다.(재판관 중 3인은 예외로 인정하고 본안 판단하여 이것을 이유로 위헌 판단을 했다.) 

그러니까 여기에 깔린 본심은 앞으로 물대포 계속 쏘겠다는 얘기. 곧 마음에 들지 않는 집회 시위에 대해서는 추호의 여지도 없이 강경 대응하겠다는 의지 표명이려나~ 시위하려면 각오하고 나오라는... 

아무튼 전교죠 법외노조 통보 적법 판결도 그렇고 또 하나의 씁쓸한 케이스다.



 











 라고 썼는데 바로 다음날 전면 쌀 개방에 반대하는 시위대에게 물대포를 쏘았더라. 역시.

 정말 헌재의 낙관론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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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4-06-28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헐~, 거기다 한숨도 함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쉬게 되네요.

ICE-9 2014-06-30 00:43   좋아요 0 | URL
요즘은 정말 내뿜는 한숨이 많아서 어디 산소호흡기라도 따로 마련해두고 싶어요 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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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만큼 시간이 흐른다는 게 무정하게 느껴진 적은 또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참사 앞에서 책 읽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래도 인류는 책을 햇불삼아 어두운 시대를 관통해 온 것 같다.

그런 책의 힘을 믿으며 6월에 읽고 싶은 인문 신간을 꼽아본다.


 

 정약용 일대기에 대해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나 그래도 이 책을 지금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은 다음과 같은 책소개 때문이었다.

  "다산은 자신이 살아가던 세상을 온통 부패한 시대라고 규정했다. 어느 것 하나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으며 세상이 썩어 문드러졌다고 거듭 개탄했다. 그러면서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고 엄중한 경고까지 내렸다."


 지금 우리의 마음이 정약용의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정약용이 개탄한 시대를 지금 우리 역시 살고 있다. 그러한 'synchronicity' 때문에 정약용의 평전이 읽고싶어진다. 그러한 개탄과 한없는 분노 속에서 정약용은 '가난하고 천한 백성들의 권익과 자유 확보를 위해 생애를 바쳐야겠다는 굳은 신념을 다졌다.'고 한다. 이왕이면 그 마음까지 닮았으면 좋겠다.



 작년인가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라는 책을 읽으면서 다시 인간성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 책은 재난 상황 속에 인간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를 추적한 책이었는데 보통의 우리 생각대로라면 그 때 인간들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여지없이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 같지만 진실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남을 위해 자신의 것과 목숨을 희생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번 '세월호'에서도 남을 위해 희생한 이들이 많았던 것처럼. 솔닛에 따르면 모든 재난 상황에서 인간들은 그렇게 행동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릇된 편견이 남게 된 것은 재난 영화에서 흔히 그렇게 묘사했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은 사회 엘리트들이 대중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도록 바랐기 때문이라고.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은 인간 사고와 행동의 근원에 '도덕성'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다. 독일에선가 심리 실험을 했는데 자신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일수록 인간은 규범을 더욱 잘 따른다고 한다. 위기일 수록 인간은 윤리적이 되는데 그렇게 되는 이유를 이 책은 설명하고 있어 읽어보고 싶어진다.


 내가 알기로 산책은 근대의 발명품이다. 그건 어쩌면 중세의 순례라는 집단적 행위가 근대로 들어와 개인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중세에는 종교적 구원이 걸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지만 근대에선 철학과 걸음이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칸트는 언제나 같은 시간이면 산보를 하는 유명한 산책자였고 니체도, 루소도 다르지 않았다. 어쨌든 그 시대의 소설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듯이(이를테면 제인 오스틴의 소설 같은 것.) 산책은 근대에 들어와 교양의 필수적인 한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취급을 받았다. 프레데리코 그로의 이 책은 그렇게 근대 철학의 주요한 사유 통로가 되었던 '걷기'를 조망한다. 발터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보들레르'를 통해 지식인의 이상적인 태도로 삼았던 '산책자'와 어떤 접점을 가지는 책 같다. 지은이가 푸코 전문가이기에 더욱 흥미를 끄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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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5-17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시대든 병들어 있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것을 고치려고 해야 좋아질 텐데, 그대로 놔두고 흘러오는 듯합니다 조금 달라진 것도 있겠지만... 사람은 엄청난 일이 일어났을 때는 서로 돕는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아주 없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산책이 발명이군요 그냥 어딘가에 걸어다니는 것과는 다르기는 하겠습니다 산책하면서 이런저런 생각하기... 지금은 그런 것을 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죠 걸으려고 해도 걸을 만한 곳이 없기도 합니다 그때는 짧은 동안 걸은 게 아니고 아주 오래 걷기도 했다는군요


희선
 

 재활용 분리수거 날에...


 "아, 싫다. 우리 아파트 단지는 왜 재활용 분리수거 일이 평일인건지? 매일 밤늦게 들어오는 직장인은 어쩌라는 거야?"

 2주일 동안 가득 쌓인 재활용 쓰레기를 양 팔로 힘겹게 받쳐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내려가는 도중에 타는 사람도 없었다.

 '오늘따라 사람 정말 없네.'

 몇 년 동안 여기 살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자정이라지만 늘 몇 사람은 타곤 했는데. 우연히 서로 마주보게 되면 같이 재활용 쓰레기를 들고 있다는 동병상련 때문인지 어색한 미소도 짓곤 했는데.

 상황이 낯설어서 그런 걸까? 왜 이리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러고 보니 좀 전에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사방이 기분 나쁘게 조용했었다. 너무나 고요하여 타면서 마치 커다란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얼핏 들었던 것도 생각났다.

 '나-원, 참.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바보 같기는.'

 나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꾸만 스멀스멀 몰려드는 불쾌한 기분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괜한 생각이다. 괜한 생각.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일 뿐이야.'


 그 때였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워낙 그런 기분에 절어있었기 때문인지 어쩐지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누군가 타면 이런 불쾌한 기분도 더 이상 생기지 않겠지. 고맙다는 생각까지 드는 걸.'

그런 생각을 하며 문득 지금이 몇 층인가 올려다보았다.

전광판의 숫자는 '4'를 가리키고 있었다.

 '뭐야, 왜 하필이면 4층인 건데? 기분 나쁘게'

기분 탓일까? '4'의 빨간 숫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새빨갛게 보였다. 마치 피처럼. 잔뜩 불길하게...

 '하하, 잘 한다. 네가 무슨 공포 영화 주인공이냐? 이 따위 생각이나 하고?'

 사는 게 심심했었나? 그래서 내가 오늘은 바보짓을 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일까?

자꾸만 그런 생각에 빠지는 내가 한심했다.

 어쨌든, 누가 타면 다 끝날 일이다.

나는 어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누군가 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기대도 잠시.

그 고마운 사람은 섬뜩한 느낌만 더욱 안겨줄 뿐이었다.

문이 열리고 그를 보자마자 나는 절로 뒷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커다란 그림자가 서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검은 색 모자에 검은 색 군용 외투. 검은 색 바지에 검은 색 군화. 더구나 모자챙마저 깊숙이 내려와 얼굴을 거의 다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바깥의 어둠이 뭉청 떨어져 나와 엘리베이터 안으로 성큼 들어온 듯했다.

 들어온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양 쪽으로 웬만한 성인 남자 하나는 홀랑 들어갈 커다란 비닐 부대도 질질 끌고 왔다. 모두 가득 들어 있는 듯 터질 듯이 팽팽했다.

 '뭐야, 이거? 꼭 시체가 들어있을 것 같은 분위긴데?'

 벽에 달라붙듯 뒷걸음질 친 나를 그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들어와서는 무심히 몸을 돌렸다. 나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는 투였다. 기껏 들어온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니.

 바로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검은색 등에서 어쩐지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난 그저 엘리베이터가 빨리 1층에 도착하기만 바랐다.


 '띵!'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도착했다. 그런데 전광판엔 지하 1층으로 나와 있었다.

수년 간 살았지만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까지 내려간 적은 없었다. 여기까지 갈 수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 생긴 건가?'

 탈 때, 나는 무심히 맨 아래의 층 버튼을 눌렀을 뿐, 그것이 1층인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이 생긴 것이라면 여기까지 내려온 것도 납득 못할 바는 아니었다. 더구나 앞에 서 있는 불길한 남자는 자연스럽게 커다란 비닐 부대를 양 쪽으로 질질 끌며 내리고 있었다.

 분명,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지하 1층이 생기고 재활용 수거 장소도 그 쪽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내려오는 동안 너무 이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장소야 어찌되었든 그저 얼른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남자는 태연하게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사방에 들리는 소리라곤 그의 군홧발 소리와 질질 끌리는 비닐 부대의 소리뿐이었다. 괴이하고 불길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모퉁이를 돌자 바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는가? 오늘도 가득하군."

 남자가 모퉁이를 돈 위치보다 좀 더 멀리서 들려왔기에 아무래도 딴 사람 같았다. 그리고 인사를 거두절미하고 냅다 말하는 것을 보면 둘은 잘 아는 사이인 게 분명했다.

 "늘 그렇지 뭐. 일정 조정 좀 안 돼? 늘 이렇게 가득 나오는데 하루에 한 번이라니. 적어도 네 다섯 번은 되어야지. 이쪽은 정말 곤란하단 말이야."

 앞서 간 남자의 목소리였다. 풍기는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일상적인 남자의 목소리였다. 너무나 평범했기에 '괜히 쫄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튼 걸음이 다소 가벼워졌다. 둘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나 같은 말단에게 말하면 뭐해? 윗대가리들에게 말해야지."

 "내가 몰라서 이러겠어? 그냥 푸념하는 거지 뭐. 하여간 책상물림들은 문제야. 현장의 어려움을 조금도 모르거든. 그러고는 맨 날 예산 타령, 효율 타령이지. 젠장!"

 그러고는 뭔가 가득 쏟아내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분명 앞서 걸었던 남자가 비닐 부대에 든 것을 버리는 것이리라.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가 들려와서 난 더욱 안심하고 모퉁이를 돌았다. 멀리서 둘의 모습이 보였다. 다 버린 비닐 부대를 툭툭 털고 있는 남자 뒤에 또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예의 검은색으로 통일되어 있었지만 복장은 달랐다. 뒤늦게 나타난 남자는 꼭 아파트 경비원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닐 부대를 든 남자 앞에 재활용 수거를 위한 자루들이 주루룩 나열되어 있었다. 평소보다 열 배 이상은 될 것 같은 아주 크고 넓은 자루들이었다. 요즘 재활용 쓰레기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나? 어쨌든 분위기가 좀 음산한 것을 빼면 늘 가던 재활용 수거장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에이, 괜히. 그냥 바뀐 거였네.'

 그동안의 내 모습을 잔뜩 한심스러워 하면서 난 태연하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 인기척이 났는지 두 남자가 날 돌아보았다. 비닐 부대를 든 남자와는 달리 경비원 복장의 남자는 얼굴이 보였는데 분명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뭐야! 당신. 어떻게 여길 왔지?"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소리쳤다.

상황의 갑작스런 돌변에 난 좀 당황했다. 그러다 내가 이 아파트 거주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러는 거구나 짐작했다. 하긴 나 역시 그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이제 막 일을 맡은 경비원인 듯했다. 이참에 인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난 몇 호에 사는 누구라고 대답했다.

 '아, 그러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라는 대답이 들려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역시. 그랬군."

 하고 말한 것은 비닐 부대를 든 남자였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까만 얼굴 뿐. 하지만 목소리는 분명 이 상황을 즐기는 목소리였다.

 "그런 건가? 드디어 받아들여진 건가?"

 뒤이어 들려온 경비원의 목소리도 그랬다. 뭔가 납득하고, 또 반가워하는 목소리였다.

 "축하해. 이제 못 보게 되겠군." 비닐 부대를 든 남자가 경비원 복장의 남자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내가 없더라도 잘 지내라고."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거지? 너무나 뜻밖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지라 난 그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 실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텐데. 우리끼리 축하해서 미안하군. 여기가 어딘지, 우리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겠지?"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날 돌아다보며 말했다.

 "재활용 수거하는 곳 아닌가요?"

 "그건 맞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재활용 쓰레기는 아닐 거야. 직접 보겠어?"

 "이 봐, 그거 너무 잔인하지 않아? 사전 예고 없이 보여주면 미쳐버릴 수도 있어."

 이렇게 말한 것은 비닐 부대를 든 남자였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말투엔 날 걱정하는 기미는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걸 즐기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건 내가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성큼 옆으로 물러난 태도에 있어서도 한껏 드러나고 있었다.

 난 재활용 수거 봉투에 눈길을 돌려 안에 수북이 쌓여진 것을 들여다보았다.


 "우욱!"

 손으로 입을 막고 구토할 수밖에 없었다.

 내 눈에 들어 온 것은 가득 쌓인 사람 머리였다. 머리만이 레고 조각처럼 자루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욕지기가 한없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내 눈은 본능적으로 다른 자루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오른쪽 자루엔 사람 팔이 가득 들어 있었다. 왼쪽 자루에는 다리가 들어 있었다.

 두... 두려웠다.

 이놈들 혹시 전대미문의 연쇄 살인마들 아냐?


 "거 봐, 엄청 충격 먹었잖아?"

 비닐 부대를 든 남자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꽤나 담이 세군. 실신하지 않은 걸 보니."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감탄하듯 거들었다.

 "그래, 자네는 그대로 졸도 했지. 정말 간만에 좋은 구경이었어."

 "보통의 심장이라면 당연한 거야. 이 사람이 특이한 거지."

 "하긴, 이런 데서 편히 살려면 심장이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킥킥."

 "아무튼, 당신. 첫 관문은 잘 통과했군."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내게 말했다.

 "도... 도대체 다... 당신들 뭐야? 나... 날 어... 어쩌려는 거야?"

 "안심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

 "거짓말! 여... 여기 이렇게 시체가..."

 "조용히 하고 내 말 잘 들어. 이제 설명해 줄 테니까. 당신은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어디긴 어디야? 재활용..."


 "아냐! 여긴 지옥이야."

 "뭐?"

 "정확히는 지옥 제7구역 블록 B지. 잘 외워두라고. 네가 일할 곳이니까. 킥킥."

 이렇게 말한 것은 비닐 부대를 든 남자였다.

 "대... 대체 이... 이게 무슨?"

 "그래, 믿기지 않겠지? 나도 처음엔 그랬어. 하지만 사실이야. 당신은 지금 지옥에 있는 거야. 정확히는 지옥의 재활용 분리수거장에."

 "지... 지옥의 재활용 분리수거장?"

 "절단된 시체들 봤지? 우리는 여기서 저걸 분리수거 하지. 흐흐."

 대답한 건 부대를 든 남자였다.

 "맞아. 여기서 우리가 하는 일은 그거야. 좀 더 자세히 말해주지. 당신도 들어봤겠지? 지옥엔 여러 가지 처형 장소들이 있다는 거. 열 지옥, 물 지옥. 기타 등등. 그거 다 사실이야. 생전에 저지른 죗값 있지? 여기서 다 치르게 되어 있어. 산사람들이야 없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그... 그래서?"

 "그런데 그 처형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단 말이지. 반복적으로 받아야 해. 그러면 타 버린 몸뚱아리, 잘려나간 몸뚱아리는 어떡하겠어? 다시 처형하려면 다시 붙여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이렇게 재활용이 필요한 거야. 이해하겠어?

 뭐, 어쨌든 그 중에서 우리가 맡은 구역은 말이야. 건물이나 배, 비행기나 자동차 같은 것들을 부실하게 만들거나 고의 혹은 중과실로 사고를 일으켜 대량 살상한 놈들을 다루고 있지. 걔네들이 어떤 벌을 받는지 알아? 사지절단 형이야. 머리와 팔다리 몸통들이 톱날로 아주 천천히 해체되는 거지. 조선 시대의 가장 끔찍한 형벌이라던 거열형도 여기에 비하면 양반이야. 이제 알겠지? 저 자루에 든 것들이 바로 그거야. 우린 그걸 분리수거하는 거고. 다시 잘 붙이기 위해서 말이야."


 이해고 뭐고 난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지옥이 존재하고, 처형도 들었던 대로 틀림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니. 한꺼번에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충격적이고 어마어마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까 그 남자가 내가 여기서 일하게 된다고 그러지 않았나? 뭐! 내가 여기서 일한단 말이야. 이런 끔찍한 것들과!


 "자... 잠깐! 아까 당신이 내가 여기서 일하게 되었다고 그랬지?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내가 여기서 일하는데?"

 난 비닐 부대를 든 남자에게 물었다.

"그야, 저 녀석이 전근을 요청했으니까. 우리끼리 말이지만 여기 사실 가장 힘든 곳이거든. 사지를 절단하니 분리수거해야 할 것들이 오죽 많아? 거기다 일일이 바코드까지 찍어야 한다고. DNA 식별 코드를 찍어놓지 않으면 공장에서 조립할 때 문제가 생기니까. 완전 3D 중의 3D지. 그래서 저 녀석이 좀 더 쉬운 곳으로 보내 달라 요청한 거야.

 이를테면 블록 C-138 같은 곳. 거기는 세치 혀로 거짓과 망언을 일삼아 재물을 탐하거나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준 자들을 처벌하고 있는데 주로 목사나 장관 같은 고위 공무원들이 많지. 혀를 집게로 잡아 뽑거나 자르는 게 그들의 처형 방식인데 고통은 여기와 다를 바 없지만 분리수거 일은 쉽지. 혀 하나만 수거하고 찍으면 되니까. 너, 거기 신청 한 거지?"

 "1순위로 지망하긴 했는데. 모르지 뭐."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옆으로 양 손을 위로 올려 보이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사정은 대강 알겠지? 그럼 열심히 잘해 봐."

 "이참에 나도 인사하지.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지만 앞으로 계속 보게 될 사이니까 잘 부탁해."


 시... 싫다. 이런 곳에서 왜 내가?

 나는 그제서야 내가 진짜 물어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 생각났다.

 "왜... 왜 나야? 어째서 내가 여기에 온 거냐고? 난 단지 재활용 분리를 하러 왔을 뿐인데. 도대체 왜 내가?"

 "나도 그랬어."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도 처음엔 당신처럼 이렇게 왔다고. 있잖아, 당신과 나 사이엔 공통점이 있어. 그게 바로 우리가 여기에 와서 이런 일을 하게 된 이유야. 이곳의 규칙이지."

 "그... 그게 대체 무슨...."

 "나는 말이야. 재개발을 이유로 멀쩡히 잘 살던 사람들을 쫓아버리고 지어진 아파트에 살았었어. 용역들이 동원되고 그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단란한 가정들이 마구 풍비박산 난 곳에 살면서도,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지. 그냥 내 능력, 내 권리라고 생각했어. 그러던 어느 날, 재활용 분리를 하려다 여기에 온 거야. 그게 이유였어.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이야기지. 당신도 그렇지 안 그래? 여기에 사는 당신이니까 바로 납득할 거야. 그렇지 않나?"

 "그... 그럴 수가..."

 난 다만 그렇게 말하며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이유라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살던 곳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곳에 세워진 아파트였으니까.

 그들의 비극을 그저 남의 일로 여기고 무심하게 나만 위하며 살아왔으니까.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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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5-17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일을 잘못한 사람들이 받는 벌 무섭군요
그리고 그런 잘못한 사람뿐 아니라 그 일을 잊은 사람도 같은 죄군요
우리나라에 일어난 일, 지금까지 잊지 않고 살았다고 할 수 없을 듯합니다
가깝게 느끼지 못할 때도 있었으니까요
이번에는 잊지 않아야 할 텐데요 우리 사회가 조금씩 바뀌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희선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알라딘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언제나 봄은 내게 신간평가단 첫 추천 페이퍼를 쓰는 것으로 시작되곤 했다. 그렇게 남들에겐 3월일지 몰라도 내게 봄은 4월이다. 오늘 그렇지 않아도 정독도서관에 다녀왔는데 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도서관은 바야흐로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연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는데 다들 얼마나 생기있어 보이던지 정말 봄이 오긴 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날 밤에 난 또 이렇게 신간 추천 페이퍼를 쓴다. 뭔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다. 아무튼 다섯 권의 인문 시간을 이렇게 추천해 본다.

 

 

 1. 정념의 기호학 - 알지르다시 쥘리엥 그레마스와 자크 퐁타뉴 공저/ 강

 

  알지르다스 쥘리엥 그레마스..

 얼마만에 다시 들어보는 이름인지. 한 때는 언어학이나 기호학 책만 펴들면 보게 되는 이름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것의 팔할은 반가움 때문이다. '정념의 기호학'은 그의 제자인 자크 퐁타뉴와 함께 쓴 책이다. 그레마스가 죽기 1년 전에 발표된 책으로 주로 '담화'에 대한 분석을 보여주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특히나 3장에서 전개될 '질투'가 흥미롭다.

 들뢰즈에 따르면 질투는 대표적인 타자에 대한 경험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질투란 어디까지나 그 대상에 대해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즉 절대적 무기력을 나타내는 감정인데 때문에 타자의 윤리학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것이 통사론적으로는 어떻게 분석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책의 마지막엔 질투를 상호주체적 관점에서도 분석하고 있는 것 같아서 더욱 관심이 간다.

 

 

 2. 살아있는 한국 신화 - 신동흔 /한겨례

 

 

 예전 우리나라의 무속 신화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거기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나라 무속인들이 주문 외우듯 하는 말들이 그냥 평범한 주문인 것이 아니라 알고보니 우리나라의 창세 신화를 말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원래 '오디세이아'나 '일리아드'도 호메로스가 말로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던 것들이다. 즉 호메로스 생전에는 문자로 쓰여지지 못하고 기억력에 의존하여 구전되다가 어느 시점에 문자로 정착되었다고 알고 있다. 무속인들이 말하는 창세 신화가 그와 같았다. 문자화되지 못했던 우리나라 고유의 창세 신화가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들의 기억 속에서 그렇게 대대로 구전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 나온 책은 개정판이다. 서점에서 실물을 보았는데 외관이 참으로 근사하다. 그동안 살면서 잊어버린 것도 많은데 다시금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읽어보고 싶다.

 

 

 3. 키치, 달콤한 독약 - 조중걸 / 지혜정원

 

 

  키치는 확실히 밀란 쿤데라의 말대로 순응주의의 산물이다. 이 책의 부제가 달콤한 독약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막장 드라마도 키치라고 할 수 있다. 멜로 드라마를 정착시킨 더글라스 서크의 영화들은 연인들이 끝내 계층적 차이로 맺어지지 못하게 하거나 설령 맺어지더라도 그것이 현실에서는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묘사하여 현실에서는 그러한 계급적 화해가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 관객들이 여길 수 있도록 했다. 영화는 그렇게 관객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사유하게 만들었고 현실에 분명하게 가로놓인 계급적 장벽들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멜로 드라마로부터 파생된 막장 드라마에겐 그런 것들이 없다. 있는 것은 다만 현실에서 느낀 좌절과 분노를 쏟아낼 수 있는 변기 뿐이다. 악인은 언제나 처벌받고 갈등은 성공적으로 봉합되어 보는 이들은 속편하게 자신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들은 남들도 다 저렇게 지지리 궁상으로 사는구나 여기면서 정작 모두의 삶을 그렇게 만드는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다. 키치는 그렇게 사유의 사각지대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 사각지대야말로 사실은 진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공간이다. 키치를 사유함은 분명 우리를 둘러싼 오늘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볼 수 있게 만드는 필터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키치의 모든 것을 분석하고 있다고 한다. 하여, 읽어보고 싶다.

 

 4. 세계문제와 자본주의 문화 - 리처드 로빈스 / 돌베개

 

 

  현대는 일찌기 장 보드리야르가 이야기했듯이 '소비의 시대'다. 무엇을 살 수 있는가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품을 욕망하고 되도록 남에게 과시할 수 있는 무언가를 구입하고 싶어한다. '브랜드'가 실제 상품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도 그래서다. 그 브랜드가 정말로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하는 식으로 디자인이나 실제 상품의 만듦새가 다른 것들보다 월등히 뛰어나서 사람들이 찾는 게 아니다. 단지 그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그 브랜드를 남들이 알아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로이트가 말했듯 소비의 시대란 '도착증의 시대'다. 나의 필요가 아닌 남이 욕망하는 게 무엇인가가 전부인 시대.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이렇게 어리석은 세상은 또 없을 것 같은 시대.

 

 리처드 로빈스의 이 책은 그러한 시대가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도래했는지 임마누엘 윌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을 가져와 분석한다. 거기에 가장 많은 역할을 바로 '국민국가'가 했다고 그는 보고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는데 그 점에서 국민국가를 '네이선'이라 부르며 로빈스와 비슷하게 바라보았던 가라타니 고진이 떠오르기도 한다. 812쪽의 방대한 분량이지만 바로 오늘을 낱낱이 훑어주는 책이므로 기꺼이 뛰어들고 싶다.

 

 5. 반란의 도시 - 데이비드 하비 / 에이도스

 

 

    데이비드 하비라는 이름은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으로 처음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졌지만 그의 주 종목은 어디까지나 공간의 정치경제학이다. 누구나 마르크스의 한계를 말하고 있을 때 그는 그래도 마르크스를 버리지 않았으며 다시금 새롭게 바라봄으로 그 한계를 돌파해 나갔다. 대표작 '자본의 한계'가 그랬다. 신자유주의가 창궐하던 당시에는 '맑스 자본 강의'를 펴내기도 했다. 늘 자신의 이론에 가장 충실한 밑바탕이 되어주었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다시금 읽고 해석한 책이었다. '반란의 도시'는 그 이후의 하비를 보여주는 책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닌 신자유주의에 지배되어버린 도시의 의미를 탐색하고 월가의 점령 운동을 통해 그 공간을 탈환하기 위한 방법들들을 사유한다는 게 이채롭게 느껴진다. 모더니티의 공간으로서 파리가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켰던 대중의 저항을 전략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듯이 신자유주의의 대표적 공간인 런던과 뉴욕은 또 어떤 기획을 통해 만들어졌을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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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4-0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다른 쪽 책을 보게 되셨군요 마음에 드는 책, 보고 싶은 책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에 대해 말하기 쉽지 않을 텐데 그런 것도 잘하시는군요 이것은 전부터 알고 있던 거군요 어떤 책을 보다가 그리스 로마 신화뿐 아니라 우리나라 신화도 알아야 할 텐데 했습니다 하지만 보고 싶은 것을 보다보면 그렇게 생각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맙니다 실제 경험하면서 알지 못해도 책을 보고라도 알면 좋을 텐데, '몰라도 사는 데 문제없잖아' 하는군요^^


희선

ICE-9 2014-04-07 00:26   좋아요 0 | URL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저 중에 그레마스와 하비는 좀 알고 있는 학자들이라서 주저리 늘어놓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사실 이 글은 원래 썼던 것에서 한참 줄인 것이라서 좀 문맥이 다소 맞지 않는 것도 있을 것 같네요(그래서 다시 읽어보지 못하겠어요ㅠ ㅠ)아무튼 이번 신간평가단은 좀 새롭게 해보려는 마음으로 과감히 파트도 바꿔봤습니다. 잘 될지 지켜봐주세요^ ^
만일 우리나라 신화가 선정된다면 희선님이 별도로 책을 읽지 않아도 되도록 아주 자세히 리뷰하겠습니다.^ ^
몰라도 사는 데 문제는 없지만 알아서 우리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차피 공수레공수거가 인생이라면 얼마나 진정으로 가치 있고 좋은 덤을 많이 가져가는가가 삶의 가치를 나타내는 척도가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