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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게 벌써 새해가 5일이나 지났고 신간추천의 시간이 도래했네요.

  늘 그렇듯이 신간들을 훑어보는 건 언제나 즐겁습니다. 바깥 일이 어떻든지간에 상관없이 이 시간만큼은 제가 다른 것도 아니고 책을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다 하는 것을 담뿍 느낄 수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번에도 정말 읽고 싶은 작품 5가지를 골라보았습니다.

 

    이름하여, 신간 스트레이트 플러쉬! 

 

     그냥 ' 5 '를 떠올리니 갑자기 영화 러브레터의 남자주인공 이츠키가 여자 주인공 이츠키에게 보여주었던 도서카드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생각났어요. 새해의 첫 신간 추천이니만큼 이렇게 은연중 마음을 고백하는 것 비슷하게 해보고 싶습니다. 하하하^ ^;

 

 

 

 1. 알렉산더 클루게, '이력서들' (을유출판사)

 

 

 

 

 

 

 라이너 베르네 파스빈더와 더불어 뉴저먼 시네마를 이끌었던 알렉산더 클루게. 하지만 클루게는 영화뿐만 아니라 많은 역사와 정치에 대한 책 그리고 문학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독일에서는 2009년 아도르노상을 수상할만큼 꽤나 명망있는 작가이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이름이 있지는 않습니다. 아직까지 제대로 그의 영화와 책들이 소개된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특히나 이번에 나온 단편집 '이력서들'이 더욱 반가운 것 같습니다. 저는 클루게를 그가 파스빈더와 더불어 만든 페이크 다큐멘터리 '독일의 가을'을 통해 처음 알았는데 붉은 여단에 납치되어 결국 살해되었던 사업가의 두 달을 쫓는 이 영화는 70년대 독일의 있어서의 계급적 상황을 참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어서 강한 인상에 남았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 작품을 페이크 다큐멘터리라고 한 것은 내용은 실제 사건 그대로이지만 재현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 인물들이 아니라 배우들이 연기했고 묘사되는 장면 역시 실제 그대로가 아니라 연출된 것이거든요. 이런 면에서 '독일의 가을'은 아무리 실제 사건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해도 그것이 영화라는 매체를 매개로 삼는 이상 누군가의 필터에 의해 여과될 수 밖에 없는, 다시 말해 아무리 날 것 그대로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여도 누군가의 의식을 관통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인식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의 재현에 불과하면서도 마치 진정한 사실인양 보이게 하여 그 자체로 보는 이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계하려는 것이죠. 분명 클루게에겐 이런 시선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실제 사건을 다룬다고 하여도 이것이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 재현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영화뿐만이 아니고 문학에 있어서도 이런 태도를 견지한다는 걸 우리는 바로 이번에 소개된 단편집 '이력서들'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에는 다양한 서사기법들이나 아이러니하고 부조리한 설정들이 곳곳에 있다고 하니까 말이죠. 클루게가 이렇게 다양한 비틀기로써 굳이 지금 자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은 인위적으로 재현된 것임을 드러내는 건 어디까지나 작가나 감독에 기대지 말고 독자 스스로 펼쳐지는 사건에 대해 사유하게 함입니다. 정보의 홍수와 언론 장악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자기 머리로 사유하는 것이 점점 힘겨워지고 있는데  그래서 더욱 읽을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2. 고마스 사쿄,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 (폴리북스)

 

      

SF를 좋아하신다면 옛날에 고려원에서 나온 세계 SF 걸작선을 한번쯤 보셨을 것입니다. 여기에 가장 먼저 나오는 작품이 바로 고마츠 사쿄의 것으로 제목은 '지구가 된 사나이'였습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 어느날 갑자기 자기가 원하는 대로 변신할 수 있게 되고 차츰 그것을 유희로 즐기다가 나중에 가서는 어느 우주에서 지구가 되어버린다는 이야기로 이야기적인 재미도 재미이지만 무엇보다 펼쳐지는 상상력이 아주 매력적인 소설입니다. 엄청난 크기의 거대한 똥 덩어리가 되어서 일본을 괴멸적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을 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고마즈 사쿄 밖에는 없을 것도 같은데 그래서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알았던 작가이지만 그대로 팬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읽었던 것이 아마도 '일본 침몰'이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이야말로 고마츠 사쿄란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작품이지만 사실 제가 아는 사쿄의 매력은 별로 느껴볼 수 없었던 작품이라서 개인적으로 아쉬웠습니다. 일본 침몰이 상상의 산물이 아닌 어디까지나 과학적인 예측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정말 혼신의 노력으로 여러가지 자료를 조사하고 그것을 하나의 작품에 무리없이 우려낸 것은 역시나 사쿄라고 생각했지만 펑키하게 막 나가는 특유의 상상력적 유희는 별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제가 볼 수 있었던 사쿄의 책은 이게 다였고 그래서 더 많은 작품을 볼 수없어 아쉬웠는데(이럴 때마다 일본어를 배워야지 하는 마음이 정말 마구 솟구치는데 아, 저는 천성이 너무 게으릅니다ㅠ ㅠ) 오오! 이번에 또 하나의 사쿄의 작품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일본 SF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는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가!

 내용을 살펴보니 중생대 지층에서 발견된 어느 방향으로 뒤집든지간에 모래가 끊임없이 떨어지는 4차원 구조의 모래시계가 주된 소재라니 이번엔 사쿄의 상상력이 더 많이 발휘된 작품인 것 같아서 정말 기대가 됩니다.

 

 

 3. 콜린 멜로위, '와일드 우드' (황소자리)

 

 

 

 와! '와일드 우드'가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이 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일러스트 때문에 꼭 소장하고 싶었던 작품이었습니다. 60년대와 70년대의 영국 포크 스타일을 보여주는 밴드 디셈버리츠의 리더답게 '와일드 우드' 역시도 나니아 연대기와 느낌이 비슷한 클래식한 판타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외국 블로거들의 글에서 이야기 자체가 압도적으로 재미있다는 말을 많이 보았는데 그래서 정말 궁금해집니다.

 

 

 

 

 

 

 

 4.  히가시노 게이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현대문학)

 

 

 

 

 

  아베 히로시가 가가형사로 나오는 '신참자'라는 일본드라마를 참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구로자와 기요시가 미나코 가나에의 속죄를 원작으로 만든 5부작 드라마와 비슷하게 이 드라마 역시도 덮어놓고 단죄하기 보다는 그들이 왜 그래야 했는지 그 마음을 이해하려고 먼저 다가가는 그런 것이 느껴지던 드라마였는데 아무래도 그래서 오랜 세월을 두고 한결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는 닌교초를 무대로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오랜 세월 오로지 하나만을 보고 살아 온 그네들의 묵직한 삶의 속살에 한 올 한 올 아로새겨진 나이테를 헤아리는 듯한 내용이라서 말이죠. 그래서 그 중 신참자 스페셜로 방영된 '붉은 손가락'이야말로 그러한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난 에피소드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보며 문득 들었던 생각이 히가시노 게이고는 감춰진 트릭을 밝혀내는 것을 어쩌면 사람의 속내를 밝혀내는데 대한 하나의 은유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그에게 범죄란 평소에 드러나지 않는 사람의 속마음이 표출되는 계기이고 결국 범죄를 해결하는 것 역시도 서로가 단락되었던 마음들을 접붙이는 일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서 사람들의 애틋한 사연들이 주가 되어 전개되는 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보고 싶은 것입니다. 여기의 히가시노 게이고를 통해 과연 그 문득 들었던 생각이 맞는지 아닌지 알아보고 싶군요.

 

 

 

 5. 요이다 슈이치, '원숭이와 게의 전쟁' (은행나무)

 

 

 

    이 책을 보고 싶은 건

   물론 요이다 슈이치라는 이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더욱 내용 때문입니다.

 

   지금 '레미제라블'이 흥행몰이중이라지요.

   한국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흥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우시기도 하고 위로도 받고 그랬다더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와 똑같은 마음으로 사회의 약자들이 권력의 기득권층과 맞짱 뜨는 이 소설을 읽고 싶습니다. MB가 되었던 당시에는 그래도 이준기의 일지매가 있어 마음을 풀어주더니 이번에도 공교롭게도 비슷한 고전 영웅 '전우치'가 방영되고 있는데 서민을 위로하기는 커녕 오히려 '왕'을 위로하기 바쁘네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아무데서도 위로받지 못하는 마음 이렇게 영화나 책으로 달랠 수 밖에...

 

 

 

 그리고 하나 더,

 마음이 지독히도 허한 이번 겨울

 제가 가장 많이 듣는 노래 하나 첨부합니다.

 이어폰으로 듣고 있으니 정말 위로하는 듯 느껴지는 가사더군요.

 

 

 

 

 

 Jesus, don't cry
You can rely on me, honey
You can combine anything you want
I'll be around
You were right about the stars
Each one is a setting sun

Tall buildings shake
Voices escape singing sad sad songs
tuned to chords
Strung down your cheeks
Bitter melodies turning your orbit around

Don't cry
You can rely on me honey
You can come by any time you want
I'll be around
You were right about the stars
Each one is a setting sun

Tall buildings shake
Voices escape singing sad sad songs
tuned to chords
Strung down your cheeks
Bitter melodies turning your orbit around

Voices whine
Skyscrapers are scraping together
Your voice is smoking
Last cigarettes are all you can get
Turning your orbit around

 

Our love
Our love
Our love is all we have

Our love
Our love is all of God's money
Everyone is a burning sun

Tall buildings shake
Voices escape singing sad sad songs
Tuned to chords strung down your cheeks
Bitter melodies turning your orbit around

Voices whine
Skyscrapers are scraping together
Your voice is smoking
Last cigarettes are all you can get
Turning your orbit around

Last cigarettes are all you can get
Turning your orbit around
Last cigarettes are all you can get
Turning your orbit a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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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01-13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시린 일요일 아침,
저도 노래에서 위안을 받고 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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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소설 신간평가단 12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와! 12기라니!

  새삼 정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튼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신간 추천을

  이렇게 다시금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솔직히 이 신간 추천을 하면서 비로소 어떤 책이 세상에 그 얼굴을 드러냈는지

  알았던 저로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제 다시 달려야 할 6개월 동안의 여정을 앞두고

  그 출발선에 선 지금, 이전보다 더 열심히 달려보리라 스스로 각오하면서

  12기의 첫 신간 추천을 해보려 합니다.

 

 

  올해는 정말 사건이라고 할만한 출간이 특히 많았던 것 같은데 그건 지금 들어서도 멈추지 않네요. 우리나라에 이 작가의 팬이 얼마나 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 작가의 팬이라고 하면 너무나 놀라서 행여나 밥을 먹다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순간 그 밥이 목에 탁 걸려서 켁켁거렸을 것이고 급히 물을 달래서 벌컥 들이켜서는 간신히 그 밥을 위장으로 밀어보내고 난 다음에 "우와! 그 책이 나오다니!"하고 탄성을 지르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바로 그 작가가 개성으로 완전무장한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작가에 있어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그리고  알베르 카뮈 만큼이나 담배를 맛있게 피는 여류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요, 그 작품이 하이스미스 브랜드 중 최고 작품이라 해도 무방할 '리플리 시리즈' 입니다.

 

  이미 수십년에 걸쳐 영화화가 몇 번이나 되어 그 문학적 가치와 대중적 인기를 증명한 리플리 시리즈는 모두 다섯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있는데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그 전부가 다 발간된다고 합니다.

 

  더러는 알랑 드롱을 유명하게 만들었던 영화 '태양은 가득히'나 아니면 맷 데이먼의 연기를 더욱 눈여겨보게 만들었던(아니면 쥬드 로를..) 영화 '리플리' 때문에 그 첫 권을 읽으셨던 분들도 계실텐데 그때 그 뒷 이야기가 궁금했던 분들에게는 그야말로 호재가 찾아온 셈입니다.

 

  아무튼 이번 11월, 그 시리즈의 첫 세 권이 모두 출간되었습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1995년에 죽었으니 거의 평생에 걸쳐 리플리 시리즈를 써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첫 작품, 재능있는 리플리와 바로 두번째 작품, 지하실의 리플리만 해도 무려 15년이라는 차이가 있지요. 때문에 우리는 이 간접 사실로 하이스미스가 리플리를 자신의 작품 세계를 드러내는 매개물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데, 그렇게 리플리 시리즈의 각 작품들은 당시 하이스미스가 바라보던 인간관, 사회관을 집약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리플리를 보면서 사실은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데 있어 너무도 이채로운 시선을 가진 하이스미스의 영혼을 탐색해 들어가는 것이죠. 쓰다보니 저만의 경우를 성급히 '우리'라고 일반화시켜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이스미스의 작품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작품 보다 작가 자신에게 더 관심 것을 어쩔 수 없이 느꼈을 것이니다. .피아노를 치는 여자'를 읽었을 때 엘프리데 옐리네크에 더욱 관심이 가듯이 말이죠. 아무튼 저는 예전에 민음사에서 나온 네 권의 단편집을 읽고 정말 이 하이스미스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수십년에 걸친 내면의 여정을, 비록 지레짐작이지만, 엿보게 하여 줄 이 작품들이 꼭 읽고 싶고 그래서 더욱 추천하고 싶군요.

 

 

 요즘 가장 활발하게 간행되고 있는 것은 세계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단순한 재미 보다는 깊이를 보여주는 것을 더욱 선호하는 쪽으로 사람들의 취향이 변한 것일수도 있고 또 어쩌면 가뜩이나 경기가 불황이니 아무래도 쪼들리는 우리는 돈을 쓰는데 신경쓰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보다 가치 있는 쪽으로만 비용을 들이다보니 이미 역사적으로 제대로 검증을 받은 세계문학을 선호하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고전의 시대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그 분위기는 세계문학에만 그치지 않고 미스터리 문학에까지  그 여파를 미쳤습니다. 그러니까 미스터리 문학에서도 고전의 붐이 슬슬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죠. 엘릭시르는 본격적으로 가치가 검증된 고전 미스터리들을 선별해 발간하고 있고 '검은숲'에서는 마쓰모토 세이초와 더불어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2대 거장으로도 불리던 모리무라 세이치의 가장 대표작 '증명 3부작'을 발간했습니다. 이 역시 미스터리 팬 역시도 쪼들리기는 마찬가지인지라 소장할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을 낸다는 취지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저 풍문으로만 들었던, 혹은 질낮은 번역으로 그 우수성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었던 작품들을 보다 좋은 상태로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오래 이 상황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절대 경기가 장기 불황에 빠지길 바란다는 의미는 아니구요~^ ^;) 이번에 나온 고전 미스터리들을 모두 추천해 봅니다.

 

 

 

 

 

 

 

 

 

 

 

 

 

 

 

 

 마지막 '빅 클락'은 케네스 피어링이 2차 대전 직후의 1946년에 발표한 소설인데 주인공 자신이 탐정이자 추적하는 대상이기도 한 당시로서는 꽤나 흥미로운 설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추적한다'라는 설정에서 보듯 이 소설은 그대로 전후, 전쟁이 가져온 혼란으로 인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그리는 작품입니다. 또한 그 독특하면서도 흥미로운 설정과 그것이 자아내는 서스펜스 효과가 뛰어나 이미 두 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더구나 첫 영화는 프랑스 영화 감독 프랑수와 트뤼포에 의해서 영화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며 칭찬받은 바가 있고 두번째 영화는 80년대에 만들어져 신보수주의 아래서 어느새 잃어버린 개인의 정체성 문제에 대해 뛰어나게 접근한 바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 '빅 클락'은 조지 오웰 식으로 말하자면 빅 브라더가 설치면 설칠수록 그 이야기의 생명력이 더욱 살아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출판사를 배경으로 하기에 책을 좋아하는 이로서는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고전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이제는 전설이 된 존 맥도널드의 탐정, 트래비스 맥기.

  그 역시 우리들에겐 그저 '풍문으로 들었소' 하는 탐정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처음 등장하는 작품인, 1964년에 나온 '푸른작별'도

  마찬가지죠.

 

  그랬는데, 이렇게 나왔네요.

 하드보일드를 사랑하시는 분들에겐 조금 더 입이 벌어질만한

 출간이 아닌가 합니다. 트래비스 맥기가 주로 살고 있는 보트를

 아래서부터 찍은 표지도 인상적이네요.

 

 아무튼, 풍문으로만 들었던 60년대의 대표적인

 반영웅, 트래비스 맥기가 어떤 투박한 매력을 보여줄 지

                                        기대됩니다.

 

 

 

 원래 의도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번에 추천한 신간들이 죄다 풍문으로만 들었던 작품들이네요. 그래서 아예 제목도 이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아무튼 기나긴 겨울밤, 그들의 유명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제대로 한 번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의미있겠다 싶습니다.

 

 

 

 

 아, 이런 신간 추천 집계를 하다가 이 작품을 빠뜨려버린

 것을 발견했네요. 지금 제가 심한 목감기에 걸려서 상태가

 좋지 않은데 그 효과가 바로 여기서 드러나는군요.

 26세에 독학으로 갈고 닦은 내공이 어느정도인지

 시전했던 문학 비평서인 '아웃사이더'로 일약 유명해진

 이런저런 잡학에 있어서는 거의 지존급이라 할만한 콜린

 윌슨의 무려 SF 소설입니다. '아웃사이더'에서 추구했던

 것을 러브 크래프트에게서 받은 영감으로 써내려간 소설

 이라고 하는데 그의 방대한 지식이 어떻게 녹여나 있을지

 기대됩니다.

 

 하지만 정작 이 작품을 추천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어요.

 이 소설은 이번에 새로이 런칭되는 '미래의 문학' 시리즈

                                          첫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미래의 문학' 시리즈는 우리나라에서는

                                          참으로 협소한 SF물을 집중적으로 발간하는 시리즈입니다.

                                          이미 그 출판 블로그에 시리즈에 수록될 작품 리스트가 공개되었는

                                          데, 아, 정말 꼭 보고 싶은 주옥같은 작품들이 많이 있더군요.

                                          그래서 제발 목록 그대로 다 완간되고 더욱 길게 이어지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응원의 의미로 추천합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작품 역시 풍문으로 유명세를 꽤나 떨쳤던 작품입니다.

                                          그러니 이 역시 뜻밗의 진가를 확인할 기회가 왔다고 해야겠지요.

                                          아무튼 그런 이유로 제목을 바꿀 필요는 없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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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파묵에게 소설이라는 것은... 시작은 '소설과 소설가'로 부터...

 

 

 

 

 

 

  오르한 파묵이 자신이 바라보는 소설의 의미와 자신은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에 대해 말하는 책, '소설과 소설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소설은 두번째 인생이다"


 미국의 작가 레이먼드 카버는 소설의 완성도는 그 첫 문장에서 결정된다고 말한 바 있지요. 그만큼 작가에게 있어 첫 문장이란 첫 소설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있을 듯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르한 파묵이 자신의 문학관에 대해 말하는 자리에서 저렇게 시작했다는 것은 스스로 소설이라는 것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독자들에게 역시도 한 권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 순수한 내면적 진실의 발로로써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니까 오르한 파묵에게 있어 소설이란 그야말로 '새로운 인생'으로 나아가는 통로라는 사실을 말이죠. 


 오르한 파묵이 그동안 쓴 작품들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물은 역시 '책'입니다. 스물 여덟 살 때 발표한 데뷔작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에서 부터 책에 대한 이야기는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나옵니다. 더구나 그 책은 그저 단순한 하나의 사물로 그친 적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책'들은 막혔던 인생의 활로를 열어주거나 아니면 아예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야말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바로 '책'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그는 세번째 작품 '하얀 성'에서 보듯이 아예 '새로운 인생'이란 말 자체까지 넣어가며 이를 강조해 왔습니다. 오르한 파묵에게 있어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소설가이니 소설을 좀 더 팔아보려고 독자들에게 소설의 위대성을 심어주기 위해 불어넣는 거짓 환영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건 진실입니다. 그것도 자기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입니다. 오르한 파묵의 개인적인 삶을 살펴보면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을 겪었습니다. 그것도 감성과 지성에 있어 한창 예민하던 시절에 말이죠. 그는 사랑이 필요했으나 그 어디서도 그것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기의 그림자만 벗하고 살아가는 고독한 나날이 펼쳐졌습니다. 그 때 파묵을 위로하고 보듬어 안아 주었던 것은 오로지 '책'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는 보르헤스가 말했던 책으로 가득한 '바벨의 도서관'에 틀어박힘으로 불우한 시기를 건너온 것입니다. 그리고 책은 그렇게 파묵이 익사하지 않고 건너올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파묵이 책의 힘을 긍정하지 못할 이유란 없습니다. 이혼이 초래한 고독의 나날들 속에서 어둠과 절망만이 가득했던 자신의 삶에다 책이 '새로운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파묵은 존재하지 않았을테니까요. 그러한 개인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된 깨달음이기에 저렇게 첫문장으로 소설이 두번째 인생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지만  소설 '새로운 인생'에서는 반전되는 믿음...

 

                                                     

 

 

 

  다섯번째 작품, '새로운 인생'은 그러한 파묵의 깨달음이 전면적으로 펼쳐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오스만이라는 한 젊은이가 '새로운 인생'이란 책을 통해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져 버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책을 통해 새로운 삶과 사랑에 눈 뜨지만 결국에는 그 어느 것 하나도 가질 수 없었던 좌절과 안타까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네? 이런 말이 이상한가요? 오르한 파묵의 개인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책이 가져다 준 인생을 새롭게 여는 힘에 대하여 말하는 책이라면서 어떻게 기쁨과 희망이 아니고 좌절과 안타까움으로 끝나냐구요? 그런 결말이라면 차라리 그 힘을 불신하는 것이라고 해야되지 않느냐구요? 그 말씀이 맞습니다. 사실 앞에서 한 이야기에 따르자면 분명 이 작품 자체는 그에 대한 반론이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먼저 그걸 단적으로 보여드리죠. 처음 오스만이 '새로운 인생'이란 책을 읽었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P. 9)


 놀랍게도 소설의 첫 문장입니다. 오르한 파묵은 첫 문장에서 부터 단적으로 이렇게 선언해 버립니다. 그리고 주욱 나중에 그 책을 지은 것으로 밝혀지는 철도원 르프크 아저씨의 죽음을 말할 때까지 책이 가져다 준 새로운 힘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감격은 꾸준히 계속됩니다. 한 장에 걸쳐서 그러한 감격을 말하고 있는 1장은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장, 그리하여 책이 가진 힘의 최종적 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나는 빛의 나라에서 떠돌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P. 27)


 빛이 상징하는 모든 것이 책이 오스만에게 가져다 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이 상징하는 진실, 빛이 상징하는 긍정 그리고 빛이 상징하는 구원. 책은 오스만에게 이 모든 것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집약된 결정체라고도 할 만한 책과 함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또 하나의 경험이라 할 수 있을 사랑 또한 가져다 줍니다.


 이렇게 소설 초반은 책에 대한 긍정, 보다 자세히는 소설에 대한 긍정으로 시작됩니다. 오스만은 그 힘을 충실히 믿으며 오르한 파묵이 '소설과 소설가'에서 되도록 가까이 하지 않으면 좋을 두 유형의 독자중 하나의 유형이기도 한, 소설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다 믿는 '소박한 신자'가 되어 소설에 나오는 세계를 진짜 세계라 믿고 찾아 나서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의 단적인 상징과도 같은 여인, 자난의 사랑을 획득하려 애를 씁니다. 오르한 파묵이 피해야 할 유형의 독자로 분류했던 것을 오스만의 외양으로 선택한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러한 오스만의 소망은 우려대로 역시 쉬이 충족되지 않습니다. 나아가면 나아갈 수록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조차 모르는 '크레타의 미궁' 속을 거니는 것과도 같은 상황만 이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후반에 이르러 오스만은 이렇게 고백하지요.


 그러니 독자여, 그다지 섬세하지도 못한 나 같은 인물을 믿지도 말고, 나의 고뇌나 내가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의 폭력성도 믿지 말라. 오직 이 세계가 잔인한 곳이라는 사실만을 믿어라. 그리고 서양 문명이 만들어 낸 최고의 발명품, 소설이라는 이 새로운 장난감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 이 페이지들에서 독자들이 듣는 나의 목소리가 이토록 격한 이유는 내가 책으로 오염되고 거대한 사고들로 인해 저속해진 수준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외국에서 들여온 장난감 속에서 내가 어떻게 배회해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P. 322)


 그야말로 책의 힘을 순전히 믿었던 자신을 부정하는 말이지 않나요? 300여 페이지가 넘는, 시간적으로 는 수년에 걸친 여정을 끝낸 뒤에 그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게 된 것은 지독한 혼란 밖에는 없다고.


 그는 이제 소설을 포함한 텍스트를 불신합니다. 순진한 신도에서 회의와 의심으로 가득찬  불신자가 된 것이죠. 또한 오르한 파묵이 경계하라고 했던 두 유형 중의 하나이기도 한 '전적으로 성찰적인 독자'가 된 것이기도 합니다. 책에 나온 내용을 전혀 곧이 곧대로 믿지 않으며 언제나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것만을 파악하려 애쓰는 독자 말이죠. 결국 오스만 신뢰 가득한 빛의 제국에서 불신의 창살로 가로막혀져 있는 자기만의 어두운 골방으로 추락해버린 것입니다. 오스만은 오로지 '책'을 쫓다가('책'이 가진 진실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애쓰다가) 이렇게 되었으므로 이것은 정말로 텍스트 자체를 아주 회의적으로 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작가인 오르한 파묵이 스스로 자신의 신념이여 밥줄이기도 한 '문학'을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고 걷어차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러한 반전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일까요? 도대체 오르한 파묵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오르한 파묵은 어떻게 역사를 끌어들이게 되었는가?

    '제브데트씨와 아들들' 그리고 '고요한 집'에서 파묵이 느낀 한계

 

 

                                  

 



  자, 잠깐 진정하세요. 우리는 그 이유를 곧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르한 파묵이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불현듯 벼락이라도 맞았던 것 처럼 획기적인 사건이나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전환이 아니라 그의 작품 여정이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나가는 가운데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당연한 '변화'였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첫 작품,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에서 부터 다섯번째 작품 '새로운 인생'까지는 단적으로 책을 포함한 텍스트(푸코 식으로 하자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담론'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에 대한 신뢰가 붕괴되어가는 여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두번째 작품인 '고요한 집'까지 이어지던 텍스트가 진실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세번째, '하얀 성'에 이르러서는 터키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외부의 타자라 할 수 있는 서양에 의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네번째, '검은 책'에 이르러서는 붕괴되고 급기야 다섯번 째, '새로운 인생'에서는 저렇게 격노에 차서 지금까지의 모든 신뢰를 철회하기에 이르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이 아무 이유없이 이루어졌을 리는 없습니다. 그럼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역사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번째 작품인 '고요한 집'에서 부터 역사가 서서히 들어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소설에서 중요한 화자 중 한 명은 역사가였죠. 거기다 그 역사가는 세번째 작품, '하얀 성'을 폐허와 같은 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현대 터키어로 번역 해 출간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전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기점이 되는 '하얀 성'이 중세의 터키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이라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이것 자체가 초기의 책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붕괴시킨 장본인이 바로 역사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역사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왜 오르한 파묵은 역사를 끌여들어야 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터키의 현대사가 가지고 있는 혼란했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보게 됩니다. 터키의 현대사도 우리나라만큼이나 굴곡이 많았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오래도록 군부 독재도 겪었죠. 그 당시의 우리나라 작가들이 문학을 했던 것은 그 어둔 시대를 걷히게 해 줄 빛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건 오로지 그 시대가 어떤지 그 진실된 모습을 확인해야만 가능하므로 작가들은 리얼리즘적 기법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채록하려 했었죠.


 우리의 80년 '서울의 봄'과 같이 터키에서도 그러한 유화적 시기였던 82년에 나온 오르한 파묵의 첫 작품, '제브데트와 아들들'도 그러했었습니다. 군부의 독재가 가장 치열했던 5년 동안 파묵이 오로지 그 작품의 집필에만 매달리면서 하고자 했던 것은 오직 그 시대의 진실을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의 우리 작가들처럼 그 역시도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을 담기 위하여 리얼리즘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충분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제브데트씨 가족을 중심으로 65년에 걸친 세월을 리얼리즘적으로 담았지만 터키가 가진 진실의 빛을 드러내기엔 뭔가 미진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다음 작품, '고요한 집'에서는 서술 스타일을 달리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는 다중화자를 도입하는 등 프랑스의 작가 로브 그리예를 비롯하며 현대소설적 기법을 적극 끌어들여 '고요한 집'으로 터키가 가지고 있는 진실을 담아내려 했었지만 역시나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그건 고운 모래와도 같이 움켜쥐면 쥘수록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생각해야했고 거기서 얻은 한 가지 답이 바로 역사였습니다. 흔히들 터키를 유럽과 동양의 접점이라고 부르듯, 역사적 과정 속에서 어느새 뒤섞어버린 터키의 혼합된 정체성 자체가 진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음을 역사를 도입함으로써 알게 된 것입니다.


 대상의 진실을 담기 위해서는 훗설적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 역시도 순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대상의 순수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바라보는 주체 역시도 순수하고도 단일한 정체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터키의 경우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미 바라보는 주체가 여러가지 다른 것들로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그래도 카펫으로 유명한 터키, 그렇게 정체성 역시도 이런 저런 것들이 교차된 직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성찰이 '고요한 집'의 다중화자로 나타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오르한 파묵 스스로 어떤 모순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터키만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진실을 드러내려 했으면서도 그 기법은 터키의 것이 아닌 서양에서 유래한 리얼리즘이나 현대 소설 기법들을 차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부터 말이죠. 아마 그러면서 분명히 느꼈을 것입니다. '도대체 터키만의 정체성이 있기는 한가? 이 서양이란 외부로 부터 유래된 기법들로 부터 벗어나 온전한 터키만의 것으로 담을 수 있는가?' 하고 말이죠.



 4. 드러나게 된 메워질 수 없는 간극... '하얀 성'...


 

                           

   

아마도 그것이 세번째 작품, '하얀 성'에서 터키인 호자와 이탈리아인 '나'를 구분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명확한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건 '하얀 성'에서 단적으로 드러나지요. 주인공과 호자가 서로의 문명적 지식과 서로의 마음을 나누면서 서로가 대체가능할만큼 분리불가능한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얀 성'으로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말이죠. 네, 제목에서 말하는 '하얀 성'은 파묵이 다가가고자 하는 터키가 가진 고유의 진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볼 수는 있어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보는 눈 자체가 그 순수한 진실을 획득할만큼 순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건 영원히 메워질 수 없는 간격을 두고 저만치에 있습니다. '하얀 성'은 바로 그 간격의 긍정입니다.



 5. 그 메울 수 없는 간격의 끝에서... '새로운 인생'

 


 문제는 그 긍정 후의 삶입니다. 진실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터키의 역사는 파묵의 소설이 간행되는 동안 변해왔습니다. 보다 안 좋은 쪽으로요. 터키와 쿠르드간의 대립이 격화되었기 때문입니다. 84년 쿠르드족 만의 노동당이 출범하면서 터키와 쿠르드간의 갈등은 심해져 갔습니다. '하얀 성'은 그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습니다. 그 대립이 파묵에게 '하얀 성'과의 간격을 각인시킨 것이죠. 결국 터키는 92년 본격적으로 무력으로 쿠르드족 지역을 점령해 나갑니다. 이제 서양에서 침략 받는 대상이 아닌 침략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죠. 그렇게 터키는 고유의 것을 잃고 차츰 밀쳐내려 했었던 서양을 닮아나갔습니다. 그건 그대로 적극적으로 타인이 되려는 것과 같았죠.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되어 태어난 것이 바로 네번째 작품, '검은 책'입니다. 이건 당시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절망의 기록입니다. '하얀 성'에서의 간격은 이제 더욱 넓혀지게 되는데 그건 그들 고유의 것을 이제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죠. 진실인 것도, 신뢰할만한 것도 없습니다. 파묵은 이제 그 부재 속에서 문학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적어도 문학이 진실을 주고자 한다면 그건 어떤 진실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새로운 인생'입니다. 글이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걸 철회하는 일. 글이 진실을 가지고 있음을 반박하는 작품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정말로 '새로운 인생'은 없습니다. 그가 이토록 책이 가진 힘에 대하여 공박하는 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믿음을 깨뜨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보든, 무언가를 읽든 그 이면에 진실이 있다고 상정하는 믿음 말입니다. 파묵이 깨달은 바 대로 우리의 눈 자체가 근대 이래로 형성된 서양의 인식론에 길들여진 탓인지 우리는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을 날 것 그대로로 보지 못합니다. 무언가 그 뒤에 어떤 것, 배후의 진실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보여지는 사물을 넘어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무언가를 상상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념' 같은 것을 말이죠. 민족도 포함됩니다. 터키와 쿠르드족의 갈등의 주요 요인은 민족 때문이니까요. '새로운 인생'에서 파묵이 공격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날 것 그대로의 우리를 보면 터키인이나 쿠르드족이나 다 같은 것을 왜 그 배후의 것을 가지고 이리도 반목하는 것인가? 사실 그 배후란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보다 나중의 작품 '눈'에서 더욱 명확하게 제시되지요. 바로 이 때문에 파목은 '새로운 인생'에서 초기의 믿음을 완전히 폐기했습니다.



 6. 고유의 사물에게로...

     '내 이름은 빨강' 그리고 '순수 박물관'

 

 

                                    


 

 

 그러자 새로운 차원이 열렸습니다. 그 배후의 것을 보려고 하지 않자 사물 그 자체가 중요해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존재하는 나와 사물간의 직접적 관계 밖에는 남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 사물들과의 직접적이고도 순수한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 박물관'을 파묵 스스로 만들었을만큼 사물 자체를 중요시 하는 것이 다음 작품 '내 이름은 빨강'을 기점으로 보다 전면적으로 작품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여섯번째 작품 '내 이름은 빨강'은 사물 자체가 육성을 가질 정도로 그것이 전면화된 작품이었죠. 물론 이러한 사물 중시의 모습은 '새로운 인생'에서도 드러납니다. 글로는 잡아낼 수 없는 인물의 핵심을 포착하기 위하여 그 주위를 둘러싼, 그 존재의 흔적이면서 그 기억이 새겨진 잔여물이기도 한 사물들이 나열되는 장면이 곳곳에서 개진되는 것이죠. 그렇게 그는 사물로 나아갔습니다. 사물들을 뒤에서 규정하고 그로 인해 더욱 사물들의 진실을 가려버리는 배후로 부터 사물들을 건져내고 그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사물만이 가진 고유의 연대기를 헤아리는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각자의 진실들이 그 자체만으로 무엇보다 중요하며 우선시 되는 파묵의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의 파묵이 다다른 곳은 그렇게 '순수 박물관'입니다. 파묵의 작품 여정 처음에서 회고해 보자면 그가 필연적으로 다다르게 될 곳이기도 했습니다.

 


 7. 타자와의 순수한 응시와 교감을 위하여...

 


 여기까지 숨가쁘게 오르한 파묵이 거쳐왔던 여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책을 읽고 난 뒤 제 나름의 생각이니 별로 구애받으실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통해서나마 부디 오르한 파묵을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리는 것은 지금 쿠르드족 문제는 다행히도 유화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합니다만 아직도 우리에겐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가벼이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갈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세계적인 경기 불황으로 인해 가장 선진적인 문명 국가라는 유럽조차 외국인 혐오가 거세게 확장되고 있음도 보게 됩니다. 그렇게 세계는 점점 타자에 대한 배척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어제도 이스라엘이 가자를 공습하여 무려 천 명이나 사상자를 내었었죠. 이는 존재하지도 않는 배후가 있다는 상상으로 오히려 실재하는 개체를 죽여나가고 있다는 파묵의 우려가 공연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더구나 사실 그들이 배후를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자기들 스스로 온전히 순수한 정체성의 소유자여야 합니다만 파묵이 '하얀 성'이나 '검은 책'에서 잘 보여준 것 처럼 사실 그러지도 못합니다. 이미 우리 모두는 그 고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을만큼 이리저리 혼합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집단으로서의 '나'가 아닌 순수한 개체로서의 '나'인 것입니다. 타인을 바라볼 때도 그 '집단' 속의 '너'가 아닌 보여지는 그대로의 순수한 개체로서의 '너'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르한 파묵이 '순수 박물관'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 고유의 연대기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시대를 통해 개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통해 시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대가 있고 개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있고 시대가 있는 것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현존하는 것과의 순수한 응시와 교감. 그것이야말로 타자를 대할 때 우리가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 개인적으로는 오르한 파묵의 여덟 권의 책이 놓여진 '순수 박물관'을 거닐면서 가지게 된 최종 결론 입니다. 차후에 오르한 파묵이 또 어떤 사유의 지점을 보여줄 지 궁금하고 당신이 그 책들의 박물관을 거닐면서 가지게 될 느낌도 궁금하군요. 그 순수한 응시와 교감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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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1-30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헤르메스님 정말 멋진 페이퍼예요.
저도 한강의 소설들로 이런 구성의 페이퍼를 써보려고 일단 계획은 중인데 잘 될 지는 모르겠어요. 헤르메스님보다 잘 쓰지 못할 것으로 생각은 드네요. 헤헤.

ICE-9 2012-12-01 00:41   좋아요 0 | URL
옷! 한강은 저도 참 궁금한 작가인데 소이진님이 쓰실 페이퍼가 그래서 저에게 참 유용할 것 같은데요. 얼른 써 주시길. 그리고 필력은 저보다 월등한 소이진님께서 엄살은 요~ 얼른 보게되기만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

프레이야 2012-11-30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이 페이퍼 별찜 해두고 읽어야겠어요.
일단, 소설과 소설가,부터 사야겠어요. 담아만 두고 여태.^^
좋은하루 보내세요^^

ICE-9 2012-12-01 00:43   좋아요 0 | URL
와! 프레이야님 감사합니다.^ ^
너무 개인적인 생각으로 파묵을 본 것은 아닌가 사실은 올리면서도 잔뜩 걱정했었는데 찜해서까지 읽으신다니 쓴 보람이 절로 나네요^ ^ 이렇게 기쁨을 주신 프레이야님도 좋은 주말 되세요^ ^

마녀고양이 2012-11-30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터키는 정말 한번 가보고 싶은 나라라고, 아주 예전부터 손꼽았지만
너무나 혼란스러운 점이 많은 나라인지라 과연 제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헤르메스님의 페이퍼를 읽으면서 문득
현실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소설보다 더한 이야기 라는 생각을 합니다.
소설이란 우리가 너무나 엉켜붙고 혼란스러우며 모순적인 현실에 대한 답답함과 이해를 하고자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이 현실의 어떤 면과 닮아 있을수록 더욱 가슴을 치게 하는게 아닐까 싶어집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사물 자체가 중요해졌다는 말을 공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헤르메스님께서 쓰신 페이퍼를 보면 이 책들이 도전할만 하구나 싶은데
제가 실제로 해보니, 별로 쉽지 않더란 말이죠.. 아하하.

ICE-9 2012-12-01 00:47   좋아요 0 | URL
앗! 달여우님 들려주셨군요. 와락 환영합니다.^ ^
저도 꼭 가고 싶은 곳이 터키입니다. 가서 오르한 파묵을 만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겠구요. 하지만 현실은 느긋한 해외 여행은 꿈도 못 꾸는 형편이니 손가락만 쪽쪽 빨 수 밖에 없네요^ ^; 우와! 현실과 소설을 대비한 말씀 정말 공감합니다. 저도 오르판 파묵 덕분에 소설의 한계 같은 것을 더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이것은 아직 정리가 안 되서 어떻게 말씀은 드릴 수 없고 아무튼 좀 더 많이 배우게 되면 그 때 달여우님과 여기에 대해 꼭 나눠보고 싶네요. 그 때 가서 행여 징징거리더라도 내치지 말아주세요.^ ^


oren 2012-11-30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르한 파묵의 소설을 전혀 읽어보지 못했는데, 헤르메스님의 긴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그의 작품세계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 저같은 문외한에게는 많은 도움이 됩니다. 헤르메스님의 긴 글을 읽고나서 제게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은 (꽤나 주제넘은 예단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순수한 개체로서의 너'가 결국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순수한 응시와 교감'으로부터 결국 나중에는 '타자와의 구분이 흐릿해지는 공감의 단계'로 나아가면서 오르한 파묵의 작품세계가 궁극적으로는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까지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ICE-9 2012-12-01 00:53   좋아요 0 | URL
oren님 정말 반갑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나 모자라는 글을 과분하게 좋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 역시 oren님의 말씀에 공감하며 파묵이 사물 자체로 순수하게 접근하려 함은 무엇보다 공감의 터전을 닦기 위한 것임을 첨언하고 싶네요. 결국 파묵에게서 중요해지는 것은 말씀대로 윤리가 아닐까 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새로운 인생'때 부터 결국은 윤리에 대해 말해오고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좀 더 생각해 볼 여지를 주셨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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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1시를 갓 지나가는 지금...

  저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공황 상태 입니다.

  장문의 리뷰 하나를 썼다가 어이 없는 실수로 날려버렸기 때문이죠...

  놓쳐버린 글이라서 그런가...

  어쩐지 쓸 때 더 좋은 느낌이 들었던 것 같고...

  이제는 실루엣으로만 남아있는 그 글의 자취를 더듬어 보니...

  꽤나 잘 쓴 글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런 저런 미련이 참으로 오래가네요...

 

  눈 앞에서 사라져서 그렇겠죠...

  다시는 온전히 그 모습 그대로 오지 못할 글이라 더욱 그렇겠죠...

  글도 사람도 세월도 사라짐은 이리도 질긴 미련을 남기는 법인데

  왜 막상 있는 그 순간엔 이런 걸 깨닫지 못하고

  더 조심하고 더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

 

  이번이 11기 신간평가단 마지막 신간 추천 페이퍼로군요.

  그렇게 이것도 이걸로 추억이 된다고 생각하니...

  역시나 진한 미련이 남습니다.

 

 그런 미련을 담아 어쨌든 마지막 신간 추천 달려봅니다.

 처음은 팀 파워스의 디클레어 입니다.

 

  

  

 

 

 

 

 

 

 

 

 

 

 

 

 

 

 

 

 혹시 팀 파워스의 소설을 읽어보셨던가요?

 우리나라에도 필립 K 딕 상을 탔던 그의 데뷔작 '아누비스의 문'과 자신을 스팀펑크의 대가로 각인시켰던 두번째 작품 '라미아가 보고있다'가 소개되었었죠.(아, '캐러비안의 해적'도 있군요)

 

 

 

 

 

 

 

 

 

 

 

 

 

 

 '디클레어', 즉 '선언'은 2000년에 나온 그의 다섯번째 작품입니다. 사실 팀 파워스는 두 번째 작품 부터 자기의 문학 세계는 스팀펑크라고 규정해왔기 때문에 물론 이 작품 역시도 스팀펑크 계열 입니다.

 

 스팀펑크란, 혹시 오토모 카츠히로 감독의 애니메이션 '스팀보이'를 보셨는지요? 그 애니메이션을 보셨다면 스팀펑크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듯 한데요, 그러니까 단순하게 말하면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허구의 판타지를 절묘하게 조합한 세계를 말합니다. 즉 일종의 대체역사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팀펑크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가정법적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군요. '만일 세상에 석유가 발견되지 않고 모든 것이 증기기관으로 되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스팀펑크라고 합니다. 원래는 사이버펑크에 대한 반발로 나왔었죠. 조지 오웰의 1984 처럼 고도로 발달하는 과학기술은 그만큼 인간 통제 기술 또한 발달하는 것을 암시하는데 그 때문에 SF 작가들에겐 '전체주의'의 위협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에서 비롯된 전체주의 사회를 상상하고 그 안에서 '펑크'정신을 본받아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부르짓는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게 되는데요. 그것을 범주화해서 부른 것이 바로 사이버 펑크였습니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 필립 K 딕이 이 사이버 펑크의 대표적인 작가였죠. 사이버 펑크는 인간 소외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에서도 소외를 느끼며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대중들로 부터 많은 공감을 얻었고 그래서 인기 또한 굉장했습니다. SF의 주류가 그렇게 사이버 펑크로 흘러가자 과학 기술을 그렇게 위험시 하는 것에 반발하는 작가들이 오히려 과학 기술의 매력을 더욱 드러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주로 썼던 시대가 하필이면 과학 기술이 왕성하게 발달하던 무렵의 근대 초기였기 때문에 '스팀펑크'라는 말이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처음 한 것은 스팀펑크의 대표적인 작가 K. W 지터였는데요. 왜 그런 말을 했냐고 했더니 '우리 소설에는 컴퓨터 대신 증기 기관이 나오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야기가 본의 아니게 스팀펑크로 빠지는 바람에 길어져 버렸네요. 아무튼 스팀펑크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있음직한 일들로 실제 역사를 더욱 풍부한 텍스트로 만드는 장르물입니다. 그리고 팀 파워스는 거기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고 있지요. 팀 파워스는 스스로를 스팀펑크라 규정짓지만 그렇다고 과학기술의 매혹을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스팀펑크라 말하는 것은 SF적 의미는 탈색된 배경 시대가 근대 초기이고 거기에 허구의 역사를 섞는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일례로 그의 스팀펑크 대표작 '라미아가 보고 있다'가 다루는 세계는 19세기의 문학이죠. 그렇게 그는 과학이 아닌 문학과 역사의 스팀펑크를 다룹니다.(이런 식이라면 인디아나 존스 역시도 스팀펑크 계열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그는 고정적인 스팀펑크가 아닌 변화된 스팀펑크를 추구하는데요. 이번의 '디클레어'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이번엔 시대까지 19세기를 탈피했습니다. 다루고 있는 시대가 냉전시대이니까요. 냉전시대하면 가장 뭐가 떠오르시나요? 아무래도 역시 스파이겠죠. 007의 전성기이기도 하니까요. 스파이는 냉철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논리로 움직이는 존재들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팀 파워스는 아무래도 이러한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들이 환상의 세계와 접속하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가 궁금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디클레어'는 바로 그러한 이면의 접속을 다루고 있으니까요. 스파이들이 가진 현실 논리를 압도하는 환상의 존재들을 접했을 때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저 역시 궁금하군요. 그래서 기꺼이 이 달의 추천 신간으로 꼽으렵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니 뎁이 주연에 제작까지 맡아서 만든다길래 관심이 있었는데 번역까지 금방 나와 주었네요. 두번째 제가 추천하고픈 신간은 헌터 S 톰슨의 '럼 다이어리'입니다.

 

 안 그래도 조니 뎁의 헌터 S 톰슨에 대한 사랑은 각별한 걸로 유명합니다. 영화화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졌던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를 테리 길리엄으로 하여금 만들게 한 이도 바로 이 조니 뎁이었죠. 주연까지 자청해가면서 말이죠. 자신이 창립한 영화사의 첫 작품으로 오래도록 작가의 책상 서랍에 잠들어있다 작가가 죽은 후에 뒤늦게 발견된 이 작품을 선택한 것만 보아도 톰슨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는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톰슨의 작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중독자의 시선인데요.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는 마리화나에 중독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미국을 담고 있었죠. 이번의 럼 다이어리는 알콜 중독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푸에르토리코 입니다. 그렇게 미국이 아닌, 미국에서 밀려난 자들의 땅인 푸에르토리코에서 알콜 중독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여 선택해 봅니다.

 

 

 

 올 해는 소리 소문 없이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순식간에 엄청난 인기를 얻은 작품들이 많이 출간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나오더니 이번에는 같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헤인스의 '어두운 기억 속으로'가 나오는군요.

 

 이 소설은 한 남성으로 부터 집요한 학대를 받은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그러고보니 저번 신간평가단 선정작으로 읽은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와 비슷한 이야기로군요. 비슷한 시기에 여성의 억압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자주 나온다는게 저에게는 흥미롭습니다. 사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도 억압된 여성 욕망의 분출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여성의 억압에 대한 반복된 표출이 어떤 징후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더구나 모든 작품이 순식간에 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는 게 그 흥미를 더욱 부추깁니다. 아무튼 일단은 그 실체를 확인해보고나서 생각해야되겠지요. 그래서 선택해 봅니다.

 

 

 

 

 5월달 즈음에 어떤 작가분(알고보니 여기 알라딘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으시더군요)과 밤새워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거기서 우연히 이 백가흠 작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그의 작품을 봐야지 했었는데 마침 이렇게 신작이 나와 주었네요.

이 작품 부터 거꾸로 한 번 올라가봐야겠습니다.

 

 

 

 

 

 

 

 

 

 여행을 좋아하신다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작가

 세스 노터봄.

 그의 신작이 나왔군요.

 아직 '필립과 다른 사람들'의 여운이 남아 있는데

 2004년에 나온 이 작품은 또 어떤 색다른 여행의 매력으로

 인도할 지 정말 궁금해집니다. 브라질과 호주, 오스트리아와

 네델란드 무려 4개국을 돌아다니는 이야기라니...

 이거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읽으면 정말 안절부절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행에서 우연히 스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치 점을

 선으로 잇듯 펼쳐놓는 세스 노터봄인지라 그래서 왕가위식 스

 타일도 왠지 연상되는 이 작가가 잃어버린 낙원으로 여기는

 풍경이 궁금합니다.

 

 

 

 이런 시간이 벌써 새벽 2시 46분 이네요.

 언제 이렇게나 시간이 흐른 걸까요.

 11기 마지막 신간 추천이라 미련이 남지 않도록 잘해보려 했는데

 그렇게 몰입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던 것 같네요.

 그런데도 고작 이런 결과라... 하실 분도 계실 듯 하여 어쩐지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많은 미련이 남지만

 (하긴, 뭐든 미련이 안 남겠어요? 어차피 인생이란 미련을 쌓아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으로 마지막 신간 추천을 마치려 합니다.

 

 GOOD BYE AND GOOD LUCK, 11TH...

 

 

 

           왠지 11기를 떠나보내는 제 마음이 이 노래 가사 같네요. 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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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06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저도 지난 달에 그런 실수를 했는데요,
서재지기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복구가 되더라구요.^^
마지막 신간 추천, 저도 오늘 했습니다. 에세이^^

ICE-9 2012-10-07 23:5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이렇게 위로의 말씀을 해 주시다니^ ^
정말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오늘 어깨가 뭉쳤는지 키보드도 칠 수 없을만큼
통증을 느껴서 더욱 기분이 안 좋았는데 프레이야님의 댓글을 보니 한결 힘이 나는 듯 합니다. 그리고 해결 방법도 알려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프레이야님은 에세이 분야셨군요. 마지막이니 저처럼 아쉬움이 크셨겠어요^ ^

2012-10-08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2 0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솔직히 빔 벤더스의 영화들은 한 개인을 다룰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니콜라스 레이를 다루었던 '물 위의 번개'가 그랬고 오즈 야스지로에게 헌정되었던 '도쿄가'도 그랬다. 그의 영상은 아무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마치 전혀 모르는 낯선 인물을 처음 대하듯 하는 새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 새로움 속에서 마치 이제까지 그저 정사각형의 평면으로만 알아왔던 것이 정육면체의 입체라는 것을 알게 되듯 더 깊이 그리고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번에 나온 피나 바우쉬에 대한 영화도 그러하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나 '카페 뮐러'등 그녀의 작품들을 새롭게 재현하면서 또 그녀와 함께 했던 동료들의 회고담을 통하여 드러나는 피나 바우쉬는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피나 바우쉬가 아니라 재현된 그 순간, 절대로 똑같이 반복될 수 없는 동작의 한 순간이나 공중에 떠오른 물방울의 위치처럼, 전혀 새롭게 다가온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비록 빔 벤더스의 필터를 거친 피나 바우쉬의 삶이라 할지라도 그건 빔 벤더스의 피나 바우쉬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순간 우리들 자신의 피나 바우쉬라는 점이다. 당신이 피나 바우쉬를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이 영화를 통해 만나는 피나 바우쉬는 오로지 당신만의 피나 바우쉬라는 것이다. 흔히들 영화는 공감을 토대로 만들어진다고 하지만 빔 벤더스의 '피나'만큼은 여럿이 춤을 추더라도 개인들의 동작은 다 다른 피나 바우쉬의 무용처럼 피나 바우쉬와 당신만의 일대일 개인적인 대면이다.

 

 

 그것을 위해서 빔 벤더스 자신은 ;비록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지기는 하나 자신이 일종의 필터로 개입하는 것을 최소화 했다. 일단 영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로 전개되지 않는다. 무용과 삽입되는 회고 인터뷰는 최소한의 안내도 없이 무작위로 관객에게 던져진다. 그 앞에서 관객은 마치 무작위로 내던져진 퍼즐 조각을 대면하는 듯한 느낌마저 가지게 된다. 이러한 불친절하고 낯선 형식 때문에 이 영화는 그대로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가진다. 영화란 늘 누군가의 의식과 눈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에 아무래도 관객은 그의 눈과 의식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소외효과'란 관객에게 미칠 수 있는 감독의 시각과 의식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치다. 즉 관객이 오로지 자신의 눈과 의식으로 자기만의 이야기로 영화와 대화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빔 벤더스가 이 영화에서 불친절하고 낯선 형식을 가져온 것도 그 이유였다. 이 영화는 피나 바우쉬와 당신만의 대화이며 당신만의 이야기로 이 영화를 채우라는 것이다. 그것은 회고 인터뷰에서도 잘 드러난다. 거기서도 빔 벤더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터뷰 장면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늘 보아왔던 인터뷰 장면과는 달리 이 영화에선 그들의 말과 그들의 얼굴이 따로 논다. 말은 들리는데 보여지는 얼굴은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상과 음성의 불일치는 기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말은 어디서 들려오는 것일까? 진짜 저 사람의 말이기나 할까? 하는 생각으로 영화에서 한 발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빔 벤더스가 이렇게 하는 것은 인터뷰 역시도 지금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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