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상 28 - 이류 청산 이류 개혁
강준만.고종석.김진석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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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인물과 사상> 시리즈가 변신한 뒤 두번째로 나온 책이다. 강준만 교수가 대부분의 원고를 쓰던 시절에는 가끔씩 지겨운 느낌이 있긴 했지만 글의 수준이 어느정도 이상이 된 반면, 집필자가 다양해진 이번 책은 지루한 맛은 덜해도 가끔씩 맥이 빠지는 글이 있다는 게 아쉽긴 하다. 전반부를 읽을 때는 그래서 시큰둥했지만, 홍윤기.정혜신.강준만.고종석 등이 집필한 후반부는 어찌나 재미있던지, 새벽이 오는지도 모르게 책장을 넘겼다.

테러에 대해 고찰한 홍윤기님의 글은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파범 맥베이가 내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한순간 돌아서' 테러를 저지른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줬다. 모든 테러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우리가 납득하든 납득하지 못하든간에 말이다. <남자 vs 남자>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던 정신과 의사 정혜신님은 한가지 주제로 거기 걸맞는 짝을 찾아내는 혜안을 갖고 있는데, 이번 글에서는 '소통'을 가지고 정몽준과 이창동의 삶을 조명한다.

고종석님은 복거일이 최근 책으로 낸 친일파 변명문-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의 비논리성과 허구성을 날카롭게 분석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모순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설파한다. 한 나라의 존립에 있어서 자긍심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믿는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다면, 허접한 논리로 친일파와 일제시대를 비호해놓은 복거일의 책에 '복거일을 다시 보게 한 명저'라느니' 한국인이면 놓쳐서는 안될 책'이라는 따위의 감상문을 올리는 사람이 줄어들 테니까 말이다.

언제나 나에게 깨우침을 주는 <인물과 사상> 시리즈, 내년 1월께 나올 29권을 기다느라 올 연말은 지루하게 보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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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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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소설들이 주는 느낌은 '쿨'하다는 거다. '쿨'하다 하면 <동물원xx>를 쓴 배모 작가와 <하치의..>를 쓴 요시모토 바나나가 먼저 떠오르지만, 그들의 작품이 '쿨'하기만 할 뿐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데 비해, 정이현이 쓴 이 책의 소설들은 재미 면에서도 아주 탁월하다. 내면으로 침잠하기만 하는, 그래서 우울한 분위기만 드리우는 90년대 여성작가들에게 식상해서 그런지, 이 책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성들은 하나같이 살아 숨쉬는 듯 신선한 느낌이다. 멋진 이야기꾼이 한명 탄생했다고 생각해도 될 듯 싶다.

대부분 재미가 있었지만, [이십세기 모던 걸]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을사조약 시절, 화류계 여인의 딸로 태어난 김연실은 동경 유학 도중 자기에게 일방적으로 구애를 하던 맹호덕이란 놈에게 몸을 빼앗길 뻔한다. 사타구니를 발로 차고 겨우 빠져나온 연실은 우연히 만난 친구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듣는다. 소문의 진원지가 된 건 유학생끼리 돌려가며 보는 동인지였는데, 거기에 적힌 내용은 이랬다.

[...청년유학생들을 유혹하여 음행을 저지른다는 소문이 자자한 바, 이를 확인한 결과... 느닷없이 모 군의 품에 안기어 애정을 구걸할 제...모 군이 굳은 의지로 이를 거절하고 타이르려 하였으나 김연실 양이 막무가내로 몸을 던져 ....정조를 허용당하고야 말았다...]

후후, 이게 어디 옛날 일인가? 여군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장군이 막상 고발을 당하자 상대를 정신이상으로 몰거나, 개그우먼을 야구방망이로 때린 용감한 남편이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소문을 내는, 그리고 그게 정당화되는 우리 사회, 성폭행을 당한 여인은 죄인이 되고 저지른 놈은 오히려 활개를 치는 이 사회는 수많은 김연실을 잉태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남자들은 여성들이 '성형수술(17%), 제왕절개(39.6%), 여성흡연량(24.8) 각각 세계 1위, 전업주부율(58%), 낙태율도 세계1위'이므로 '대한민국은 여자가 살기 좋은 나라'라는 글을 인터넷에 유포시키며 '역차별'을 소리높여 외친다.

아니, 제왕절개와 낙태가 많은 게 여자 탓인가? 성형수술이 많은 건 여성을 외모로만 따지는 남자들의 가치관 때문이 아니고? 여성이 일자리가 없는 게, 그래서 전업주부율이 높은 게 '여자가 살기좋은' 증거라고? 언제나 느끼지만, 무식에는 끝이 없다. 그 무식한 남성들이 사회의 권력을 쥐고 있는 한, 김연실은 계속 생기기 마련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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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
노혜경 지음 / 아웃사이더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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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님은 이미 두권의 시집을 낸,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지만, 난 그분을 시인으로서가 아닌, 사회 참여적 문학인으로 좋아한다. 그런 나에게 그의 첫 저서가 나온 건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여성을 핍박하는 남근주의 사회에 저항하고, 친일시인에게 월계관을 씌우려는 문학권력의 음모를 폭로하며, 이 땅의 정치를 왜곡시키는 지역감정에 맞서 싸운다. 지식인들 대부분이 언론의 시녀로 전락한 작금의 현실에서 노혜경님의 존재는 더더욱 소중하다.

이 책의 제목인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는 안티조선을 표방하는 '우리모두' 사이트에 걸려 있는 구호다. 난 몰랐는데, 그게 내가 존경하는 김정란 시인이 만든 말이라고 한다. '우리모두'에서 그 구호를 볼 때마다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책 제목으로도 썩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를 왜곡시키는 거대권력에 맞서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져야 할 원칙이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담?

그분의 글이 늘 그랬듯 이 책 역시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며, 안일하게 살아온 나를 반성적 성찰에 이르게 한다. 언제나 옳은 사람은 없지만, 노혜경님의 말은 대부분 옳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대선 당시에 쓴 글들이 여기 묶여 있다는 것. 노혜경님처럼 나도 노사모의 일원으로 대선을 맞았고, 그의 당선에 환호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열달이 지난 지금, 그때의 감격은 이미 사그라들었고, 재신임과 이라크 파병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이 책에 나온 말들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예컨대 다음 대목을 보자.

[그(노무현)가 선택을 그르친 적은 없습니다....그건 노무현은 정략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자기의 진심을 다해 사고하며, 더 중요한 건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모무현의 움직임은 그 어떤 비밀도 책략도 없는 투명하기 이를 데 없는 것(237쪽)]

우리가 노무현에게 바란 건 바로 이런 거였는데, 지금의 노무현이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고 있는 걸까?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에 관해 기술된 마지막 부분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라,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는 것도 나에게는 옥의 티였다. 그렇긴 해도 이 책이 '내 삶에 방향을 제시하는 책' 리스트에 등재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요즘 유행하는, 일회성의 감동을 주는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두고두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좋은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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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페포포 투게더
심승현 지음 / 홍익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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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이 찡- 해지는 흔치 않은 감성을 지닌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지나쳐버리기 쉬운 작은 것들.....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는 나를 한번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왠지 내 눈물이 책에 닿으면 흘러내릴 것만 같은 그림에 심장을 콕 찌르는 글'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는 책답게, 알라딘에 올라온 서평들도 거의 찬사 일색이다. 많이 팔리는 책을 읽는 것도 사회를 아는 한 방법이 되는지라,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1, 2권을 사서 읽었다. 두권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은 두시간 남짓, 전혀 감동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겨우 그정도의 감동을 위해 15000원을 투자할 가치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든다. <연탄길>을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이런 류의 책을 읽고 나면 허탈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감동이 메마른 사회라서 이렇게라도 감동을 받아야 하는 걸까? 그 감동은 어떤 긍정적 효과가 있으며,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다들 감동적이라는데 나 혼자 이렇게 투덜대는 걸 보면, 내가 너무 무디거나, 삐딱한 성격일 것이다. 나이답지 않게 보수적이라, '책은 모름지기 두꺼워야 한다'는 고루한 생각에 빠진 탓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이게 외환위기 당시 우리 사회에 유행했던 [101가지 이야기] 시리즈와 틀린 게 뭐람? 그 시리즈는 두껍기라도 했지... 책을 읽는 목적이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림이 많고 빨리 읽을 수 있는 얇은 책들이 점점 더 판매시장을 장악하는 현상은, 그나마 안팔리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저자는 2권이 1권의 성공으로 급조한 책이 아니며, 원래 기획되어 있던 책이라고 하지만, 2권을 먼저 읽은, 그래서 좀더 객관적일 수 있는 내가 보기에 2권은 1권이 주는 감동조차 주지 못하고 있다. 날더러 '신세대의 감수성을 모른다'고 비난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마지막 말에는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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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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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로 철학하기>란 책을 읽었다. 매트릭스 2가 개봉될 즈음에 나온 책인데, 그렇게 시류에 영합하는 책은 대개는 엉성하기 마련인지라 살 생각이 없었지만, 저자가 그 유명한 슬라보예 지젝 등인 것만 믿고 사서 읽기 시작했다. 내 우려와는 달리 그 책은 매트릭스 1편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었고, 내용도 꽤 흥미로웠다. 이름있는 저자는 대개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법이다.

내가 매트릭스 1편을 본 건 2001년 여름인데, 그걸 보고 나서 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가 왜 흥행에 실패했지?' 알고보니 그 영화는 서울에서만 90만이 넘는 관중을 동원한 흥행작이란다. 하여간 비디오를 본 지 2년이 지났는지라 영화의 세부적인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났는데, 책을 읽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매트릭스 1 비디오를 빌렸다. 속이 안좋아 소주를 마시면서 비디오를 봤는데, 처음 봤을 때보다 몇배나 더 재미있는 영화가 있을 수 있다는 건 경이로운 발견이었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는 말은 불변의 진리, 난 2시간 동안 넋을 잃고 화면을 응시했고, 책에서 풀이된 대사들을 음미했다. 어느 한장면, 대사 한마디도 버릴 게 없는 완벽한 영화, 그제서야 난 내가 너무나도 재미있게 본 2편에 대해 사람들이 '1편보다 못하다'고 했던 이유를 이해했다.

철학이란 단어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오는 나지만, 이렇게 생활 속에서 설명되어지는 철학은 그래도 재미있다. 최고의 엔터테이너인 김용옥이 평소 같으면 거들떠도 안볼 <논어>를 대중화시켰듯, 인문학도 얼마든지 재미있을 수 있다. 이정우 교수의 철학 강좌가 인기를 얻는 이유도 그의 철학이 형이상학적 세계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 속에 녹아있는 철학적 요소를 알려주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도 기득권을 쥔 사람들이 상아탑이라는 폐쇄적인 장소에서 대중들의 삶과는 무관한 지적 유희를 벌이기 문이 아닌지? 그들이야 펄쩍 뛸 일이지만, 내가 보기엔 영화 한편에 철학의 온갖 요소들을 담아낸 워쇼스키 형제가 그분들보다 훨씬 더 훌륭한 철학자다. 이땅의 수많은 철학자 분들도 지젝처럼 낮은 곳으로 내려와 대중과 소통하는 게 어떨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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