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때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좋아했었다. 그의 소설은 늘 기발했고, 내게 많은 것을 알려줬으며, 날 감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작년에 나온 <뇌>나, 올해 나온 <나무>를 보니 그가 보여줄 건 이미 다 보여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와중에, 아멜리 노통을 발견했다. 벨기에 태생인 노통의 소설은 하나같이 기발한 소재로 날 놀라게 하는데, 이번 책도 그 기대를 충족시켜준다.

소설의 배경은 공항 청사, 나중에 달려온 경찰을 제외하면 등장인물은 단 두명이다. 어찌보면 지루해지기 쉬운 설정이지만, 노통은 시종 흥미있게, 대화로만 소설을 전개하는 특유의 기법을 이용해 또하나의 멋진 소설을 만들어 냈다. 주인공을 괴롭히는 남자의 정체가 하나씩 밝혀지면서 소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책 중간중간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해박함도 이 책을 읽는 묘미다.

책 맨 뒤에 실린 그녀의 사진을 보니까 영화 '아멜리아'의 주인공을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고보니까 이름도 '아멜리'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아멜리 노통 역시 발랄하기 짝이 없고, 착한 마음씨를 깜찍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릴 적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나라에서 살았던 게 노통의 소설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도 많은 외교관들이 있을텐데, 그분들의 자제들은 어디서 무얼 할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마이서재'라는 게 생겼다. 책에 관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획기적인 아이템인데, 나만의 favorite들을 소장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점이지만, 다른 분들의 서재를 방문할 수 있다는 게 난 더 좋다. 다른 분이 쓴 마이리뷰는 나로 하여금 책을 읽으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걸 깨닫게 해주는데, 영화를 고를 때 평론가의 현학적인 글보다 미리 영화를 본 관객들의 영화평이 훨씬 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다른 분들의 서평이 읽을 책을 고를 때 도움이 된 적이 꽤 여러 번이다. 어느 분이 써놓은 마이리뷰가 아니었던들, 내가 요즘 명성을 드날린다는 아멜리 노통을 만나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다.

<오후 네시>는 정말 특별한 소설이다.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대신 주인공 부부를 포함해 단 네 명만이 나오며, 수억달러의 금괴를 놓고 스릴 넘치는 음모가 펼쳐지는 대신 타인으로 인해 방해받는 두시간을 놓고 밀고 밀리는 신경전이 벌어진다. 어찌보면 별거 아닌 걸 가지고 싸운다 싶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 이웃의 뻔뻔함에 화가 치미는데, 마지막엔 또다시 내 예상을 뛰어넘으며 소설을 끝낸다. 남녀간의 사랑이나 음모를 다룬 소설에만 익숙해 있던 내게 <오후 네시>는 무척이나 신선했는데, 이런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걸 보면 과연 25세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천재답다는 생각이 든다.

아멜리 노통이 나와 동갑이라 친근감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뭔가' 하는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천재는 아무나 될 수 없는 것, 아멜리와 동시대에 사는 덕에 그녀의 작품들을 읽을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그녀가 했던 인터뷰를 보니 발표하지 않은 작품이 아직 수십편 더 있다는데, 그 작품들은 내게 어떤 즐거움을 줄까 벌써부터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숙명의 트라이앵글 1 - 미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노암 촘스키 지음, 유달승 옮김 / 이후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나라인가에 대한 이 시대 대표적인 사회참여적 지식인 노엄 촘스키의 고발서다. 그는 방대한 자료를 동원하면서 이스라엘이 자행한, 그리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는 만행을 매우 시니컬하게 기술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다음과 같은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된다.

1단계(분노):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런 짓을?
2단계(반성):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좋은 나라라고 속아오다니!
3단계(허탈): 이들은 인간이 아니구나...
4단계(무감각)

4단계가 되면 웬만한 폭력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게 되는데, 이성을 유지하면서 이 책을 읽으려면 그래서 쉬엄쉬엄 읽는 게 좋다. 내가 무려 1년에 걸쳐 이 책을 읽은 건, 책의 분량이 방대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리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는 나도 이 책을 읽다보니 '마징가 제트를 보내서 팔레스타인 애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스라엘의 폭력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테러리스트가 안되면 이상한 게 아닐까?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은 분명 비극이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스스로 피해자를 자처하지만, 그게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자비한 국가테러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스라엘이 마음껏 학살을 저지르는 배후에는 군사.경제적으로 엄청난 지원을 해대는 미국이 있다. 이스라엘처럼 야만스러운 나라를 우리가 '배워야 할 나라'라고 칭송해온 건, 우리 언론들이 얼마나 미국의 시각에 편향되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 없듯이, 아라파트 역시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해 애쓰는 운동가다. 싸우면 다 똑같다고 싸잡아 욕하기보다는, 그들이 왜 테러를 저지르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권이란 게 인류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 모두 PLO가 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톨스토이 단편선집 - 국내 미발표작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강주헌 옮김 / 오늘의책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세계문학사에 우뚝 솟은 거장의 미발표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관심을 불러일으킨 <톨스토이 단편선집>은 매우 교훈적인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스크루지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젊은 황제'를 비롯해, 젊을 때의 잘못으로 결국 파국을 맞는 '악마' 등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바르게 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어릴 적이라면 모르겠지만, 법과 원칙을 지킬수록 손해라는 가치관이 정립된 터라 이 책의 메시지들에 시큰둥하게 된다. 바르게 사는 건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수단 방법을 안가리고 이윤을 추구하는 게 '잘사는 것'이 어버린 정글 속에서 '바르게 살라'는 가르침은 공허하기만 하다. 예컨대, 순진하게 군대를 다녀왔더니 나보다 더 건강한 군면제자는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어릴 적, TV와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한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부조리로 가득찬 사회를 봤을 때 그가 느낄 배신감은 얼마나 클까? 그렇게 본다면 어린이들에게 현실과 동떨어진 공자님 말씀을 가르치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도 그다지 좋은 책이 아니지만, 내용도 별 재미가 없다. 어릴 적에 다들 한번씩 들어봤음직한 평이한 이야기들로 가득찬 이 책이 최근의 톨스토이 붐에 힘입어, '미발표작'이란 타이틀을 달고 우리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게 나로서는 유감이다.

한가지 더. '악마'라는 단편에서 톨스토이는 젊은이의 마음을 빼앗은 유부녀를 악마로 그리는데, 여기서 그의 반여성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엄연히 부인이 있으면서 다른 유부녀에게 눈독을 들이는 놈이 더 나쁜 거 아닌가? 남의 부인-밧세바-을 빼앗고 권력을 이용해 남편을 죽게만든 다윗에겐 면죄부를 주고, 할 수 없이 왕과 결혼한 밧세바를 당시 사람들이 '다윗을 유혹한 음탕한 여자'로 몰아간 것처럼,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 뒤집어 씌우는 수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가부장 사회인 우리나라도 그런 '피해자 탓하기'가 만연하고 있는데, 그런 전통은 이제 좀 그만둬야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사신문 1 - 문명의 여명에서 십자군전쟁까지 세계사 신문 1
세계사신문편찬위원회 엮음 / 사계절 / 199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움베르토 에꼬의 <바우돌리노>를 읽으면서,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 답답함을 느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이 뭔지, 동로마는 뭐고 게르만 민족은 왜 이동했는지 통 모르겠는 거다. 생각해 보니 내가 세계사를 공부한 건 중2때 1년에 불과한데, 그런 얄팍한 지식으로 평생을 우려먹자니 내가 너무 뻔뻔스러운 게 아닌가 싶었다. 맘 먹고 세계사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안그래도 지겨운 공부를 또 한다는 게 도무지 내키지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발견한 게 바로 <세계사신문>이었다. <역사신문>으로 선풍을 일으킨 '사계절' 출판사의 작품인데, 딱딱한 역사를 신문으로 만들어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는 건 정말이지 빛나는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읽는 내내 내가 그간 너무나 무식했구나, 하는 걸 자각하는 동시에,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내용이 워낙 풍부해 한 페이지를 넘기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세권을 다 읽고 난 지금 이순간, 굉장히 뿌듯한 느낌이다.

이 책을 통해 일전에 아무 생각없이 밥을 먹었던 중국집 '만강홍'이 실은 송의 명장 악비가 쓴 시의 제목이라는 것, 돈 주앙이 실제 인물이 아니라 시인 바이런이 쓴 자전적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것과, 통념과는 달리 이슬람은 타 종교에 너그러운 반면 기독교는 십자군 전쟁을 포함해서 이슬람에게 온갖 잔인한 짓거리를 했다는 것, 사하라 사막이 중동이 아닌, 아프리카에 있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제국이란 게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혁명가가 백성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전 왕조를 무너뜨리지만, 이내 부패와 향락에 빠져 민중을 외면하게 되고, 민중들, 혹은 다른 세력에 의해 타도되는 전철을 밟는다는 것. 천년을 버틴 로마는 예외로 치고 대충 평균을 내보니, 제국의 수명은 500년이 못된다. 그렇게 따져 본다면 영원히 세계의 패자로 남을 것같은 미국도 벌써 절반을 지난 셈이다. 200년만 더 참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