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배신자인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 하는 말들에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는 게 인지상정이다. 민주당 분당에 찬성하는 나로서는 민주당 분당을 그 옛날의 3당 합당과 비슷한 악으로 몰아붙이는 강준만 교수의 논리에 동의할 수 없기에, 전에 나온 <오버하는 사회>는 물론, 이번에 나온 <노무현은 배신자인가> 역시 마음이 불편하게 읽어야 했다.

강준만은 민주당 분당으로 인해 한나라당이 어부지리를 얻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며, 4월 총선에서 ‘여론조사를 통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후보 단일화’를 주장한다. 그는 열린우리당 사람들이 민주당을 ‘부패에 찌들고 지역주의에 기생하는 정당’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경계해 마지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총선 전, 혹은 총선 후에 합쳐야 할지도 모르는 당이니까. 그런데, 강준만은 이 책의 3분의 2를 할애해 분당에 앞장선 사람들을 비난한다. 노무현은 물론이고 안희정, 유시민, 김원기, 노혜경까지도. 민주당을 환골탈태가 불가능한 정당으로 보는 내가, 그런 말에 어찌 동의할 수가 있겠는가. 강금실 장관의 영입에 목을 매는 행위나, 한나라당 출신의 도지사를 영입하는 식의, 열린우리당이 최근 보이는 행태가 많은 실망을 안겨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역주의 정당이 활개를 치는 우리 정치판에서, 전국정당을 만들겠다는 그 포부 하나는 존중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노무현으로서도 후보 시절 자신을 줄곧 흔들기만 했던 민주당과 뭔가를 같이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강준만은 노무현의 당선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노무현이라는 훌륭한 후보가 있음을 세상에 알린 책이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이며, 그 후보를 왜 뽑지 않으려 하냐고 다그친 것이 <노무현과 자존심>이다. 내가 노사모에 가입한 것도, 그리고 노무현의 당선에 환호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강준만 덕분이다. 그런 사람이 민주당 분당을 이유로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노무현은 공사 구분 의식이 박약하다 (64쪽)”
“나는 노무현이 자기 억울한 건 죽어도 못견디면서 남이 억울한 건 대의를 앞세워 무시해버리는 잔인함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64쪽)”
“노정권은 계속 마이너스 정치를 고집하면서 그걸 개혁이라고 강변했다. 코드와 패거리주의마저도 개혁의 이름으로 포장되었다(180쪽)”

<노무현은 배신자인가>라는 책 제목대로, 강준만은 노무현을 시종 배신자, 기회주의의 화신, 마키아벨리즘의 수호자 쯤으로 비난해 마지않는다. 당연하게도 주위 사람들은 “노무현을 비판하려면 네가 쓴 책에 대해 사과부터 해야 한다”는 충고를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세간의 그런 시각을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를 지지했으면 여하한 경우를 막론하고 그 사람에게 올인을 해야 하는가.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야만 하는가 (10쪽)”

물론 난 그렇다고 보지 않지만, 그의 말을 이렇게 되돌려 주고 싶다.
“민주당 분당 한가지 사유로 자신이 그토록 칭찬했던 노무현의 모든 장점은 단점이 되고, 배신자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하는가?” 열린우리당의 실험은 이제 시작 단계다. 물론 어렵긴 하겠지만, 열린우리당이 구태에 찌든 우리 정치판을 개혁하는 촉매가 된다면, 민주당 분당을 그토록 저주하기만 할 게 아니지 않은가? 이왕 분당한 거, 강교수가 그 이슈에 그만 매몰되었으면 좋겠다. 강교수 특유의 유머스럽고 날카로운 글을 다시 보고 싶으니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또니 2004-03-22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전에 노무현 대통령 관련 서적이 엄청 많았었는데...저 사람도 싫든 좋든 그런 책을 냈었군요..정치를 너무도 관심없어하고 뉴스 보기를 소귀에 경읽듯 살아온 숫한 세월속에 제가 감히 어찌 누가 잘했고 못했고 할 수 있겠습니까만은..탄핵이 가결되고 왜 눈물이 났는지..그래도 조국의 일원이라고 그럴 모냥입니다..그냥 또랑으로 빠져 보자면 젊은이들이 서갑숙의 포르노 그라피를 읽고 수긍하고 읽지 않고 비판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알고..적어도 읽고 뭘 알고...그렇게..아..오늘도 이 무식함 반성합니다.참..그리고 저 역시 님의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을 보는 시각이 비슷함을 말하고 싶습니다.뭐..그렇습니다..
 
천.천.히 그림 읽기
조이한.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베르메르가 그린 [금의 무게를 다는 여인]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보석의 무게를 달고 있는 걸로 보아 보석상인 모양이군. 그렇게 돈을 벌어 애들을 먹여살리겠지. 직접 생업에 뛰어든 걸 보면 남편이 없는 게 아닐까? 아냐, 여인의 배를 봐. 임신했잖아? 그렇담 최근 열달 이내에 남편과 잠자리를 했을거야'

하지만 그게 아니란다. '여인이 들고 있는 저울이 비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단다. 내가 신경도 쓰지 않았던, 여인 뒤 벽에 걸린 그림은 알고보니 [최후의 심판]을 그린 거란다. 그러니 여인이 들고 있는 저울은 성 미카엘이 '부활한 인간들의 영혼을 달아 선인과 악인을 가르던' 저울이 된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볼 때,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너 지금 이 그림을 바라보는 인간이여. 속세의 물질적 욕심에 눈을 돌리지 말고 네 영혼이 신의 저울에 올려질 날, 신의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올 것을 기억하라 (68쪽)]
생활전선에 뛰어든 한 여인을 그린 것이라는 내 생각은 틀렸다. 그림을 보는 일은 이렇듯 어렵다.

'그 시대 미술의 전통과 당시의 문화, 중세 사상의 흐름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하니, 그 모든 분야에 문외한인 내가 그림의 메시지를 이해한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그림에 대해 잘 알고 싶기는 해도, 그걸 위해 내가 '중세 사상의 흐름과 당시의 문화'에 대해 공부할 마음은 아직은 없다. 십년만 더 젊었으면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남들의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에 대해 알았다고 혼자 좋아하고 싶다.

이런 의문은 남는다. 화가가 그림을 그린 의도야 분명 있었겠지만, 우리가 그림을 보는 목적이 그린 이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일까? 화가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 그림을 통해 만족과 평안을 얻었다면 그걸로 좋은 게 아닐까?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한다면 그럴듯한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무식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잘 모르는 자의 변명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림을 통해 화가와 관람객이 소통하던 시대가 지나고, 바야흐로 현대 미술의 시대가 개막되었으니까. 그래도 뭘 그렸는지는 알아볼 수 있었던 과거 미술에 비해, 현대 미술은 난해함 그 자체다.
진중권에 의하면 '현대 미술은 더 이상 그 자체로써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단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나는 단지 작가의 의도를 가만히 서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관람자가 아니다. 나의 해석은 작가의 그것보다 더 창조적일 수 있다. 창조적 해석을 통하여 나 또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 근사하지 않는가(274쪽)]

다시 말해서, 과거의 미술을 보는 데는 도상학에 대한 각종 해박한 지식이 동원되었지만, 난해함으로 무장한 현대 미술 앞에서는 대가가 따로 없다는 얘기다. '고정관념을 버릴 때 잃어버린 감각이 살아난다(280쪽)'는 말처럼, 무식하면 더 용감할 수 있다. 그림을 모른다고 방구석에만 숨어 있을 게 아니라, 미술관에 가자. 가서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자.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데 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랍스터를 먹는 시간
방현석 지음 / 창비 / 200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벌써 오래 전, 박완서님이 <휘청거리는 오후>를 쓸 때인가, 문단 선배들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진정한 작가라면 창작과 비평사에서 책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얼마 안있어 창작과 비평사에서 책을 내자고 제의가 왔고, 박완서님은 어찌나 기뻤는지 다른 곳보다 조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덜컥 계약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창비에는 단순한 출판사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어두웠던 그 시절, 방황하는 청년들의 정신적 디딤돌이 되어 준 창비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 시대를 견딜 수 있었으리라. 요즘 들어 창비에 대해 여러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진보상업주의', 즉 적당히 진보적인 냄새만 풍기며 책을 팔아먹기 바쁘다는 것이다. 은희경이 <마이너리그>를 창비에서 낸 것처럼, 창비가 이념적 지향에 맞는 작가를 키우는 게 아니라 엉뚱한 작가를 단지 잘나간다는 이유만으로 스카우트한다는 게 그 비판의 근거다.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 않겠느냐'는 창비 측의 변명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고, 창비의 찬란한 과거는 그것대로 존경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이런저런 비판이 터져나오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창비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창비가 일부의 지적처럼 상업주의에 매몰된 것만은 결코 아니다. 최근 창비에서 책을 낸 작가를 보면 황석영, 공지영처럼 창비스러운 작가들이 몇명 있으니까. <랍스터를 먹는 시간>을 쓴 방현석 역시 창비의 이념에 들어맞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당신의 왼편>에서도 그랬지만 방현석은 남들이 다 한물간 것으로 취급하는 투쟁의 역사를 되살리고자 하고, 베트남 돕기 운동을 펼치며 한국에도 양심이 살아 있음을 말해준다.

베트남 전쟁, 사실 말하기 껄끄러운 소재다. 그당시 우리가 참전을 하지 않을 처지가 못됐던 것도 사실이고, 전후방이 따로 구분되지 않은 베트남에서 양민학살 같은 비극은 부득이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우리 사정일 뿐, 베트남 인민들에게 그런 사정을 이해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에게는 민주주의를 위한 성전이었을지 몰라도, 다수의 인민들이 사회주의를 원했던 그 당시 베트남에게 우리는 그저 침략군이었을 뿐이지 않을까. 소설에서 베트남 TV로 한국의 이라크 참전 소식이 나오자 베트남 인민 하나가 이런 말을 한다. '한국은 미국이 부르기만 하면 어디나 달려가는 강아지야?(78쪽)'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라크 파병이 우리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걸 빌미로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을 너무나 쉽게 내팽게치는 것이 아닐까? 국가로서의 위신을 포기한 채 얻는 국익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본에게 과거사에 대한 사죄를 요구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베트남에서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서도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양민학살 문제를 제기하자 베트남 참전용사들은 한겨레신문사에 난입해 자신들의 기백이 살아 있음을 입증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자신을 두번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다. 이라크전 파병을 너무도 쉽게 결정하는 우리 정부를 보면서,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그 비극을 되풀이한다던 어떤 유명한 사람의 말이 생각났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난 랍스터를 한번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소설의 주인공은 베트남에 머물면서 랍스터를 수시로 먹는다. 그러니까 베트남은 랍스터가 흔한가본데, 베트남의 랍스터를 먹기 위해서라도 우리와 베트남이 우호선린 관계가 되야 되지 않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썸데이 서울
김형민 지음 / 아웃사이더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아웃사이더라는 출판사가 있다. 거기서 펴내는 잡지는 물론 출간되는 단행본들도 많은 가르침을 주는 좋은 책들인데, 내가 '김형민'이라는, 생전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의 책을 망설임 없이 주문한 까닭은 출판사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아웃사이더에서 낸 책을 사는 게 사회의 진보에 소극적이나마 기여한다는 생각도 없진 않았다.

목차를 보다보니, [굿모닝 광해군]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어? 이거 전에 읽었던 글인데? 그 글을 읽고 소름이 끼쳤느니, 가슴이 후련했느니 하는 감상문을 어딘가에 적었던 기억도 난다. '산하'라는 분이 그 글을 썼었고, 글에 반한 분들이 여기저기 퍼날라 나에게까지 전달되었었지. 그런데 책날개의 설명을 보니 작가는 '산하'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게시판을 돌아다니기도 합니다'라고 씌어 있다. 아, 그렇구나. 날 감동시켰던 그분이 SBS 피디인 김형민님이구나. 무명 작가에 대해 가졌던 한줄기 불안감은 이미 사라졌고, 난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혹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PD는 원래 글을 잘써야 하는지, 아니면 이 분만 유독 잘쓰는지 모르겠지만, 김형민이라는 사람, 너무나도 글을 잘썼다. 사실 글 잘쓰는 사람은 제법 많다. 중요한 것은 그 글재주를 이용해서 무엇을 하느냐일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어느 소설가처럼 수려한 문장력을 발휘해 가부장의식에 충만한 조선조 여인을 무덤에서 불러내고, [술단지..]처럼 소설을 사적 복수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가 지닌 글재주는 사회를 후퇴시키고, 그의 글이 주는 미덕보다 몇배의 해악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형민님은 뛰어난 글재주를 능가하는 아름다운 정신을 글에 실어보내, 읽는 사람에게 감동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준다. 70년생,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는 내게 많은 깨달음을 준 스승이다. <아웃사이더>에 대한 믿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우리 사회에 대해 발언하는데, 그가 겨누는 비판의 화살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다 감동적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구절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

['노동자는 하나다' 과거 이 말이 진리임을 증명해준 것은..노동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노동자 스스로 노동자가 하나임을 증명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 증명이 멋지게 이루어져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186쪽)]

현재 노무현의 처지를 무신정권 때 집권했던 경대승에 처지에 빗대 말한 '내 이름은 경대승이다'는 노무현에게 쏟아졌던 그간의 비판글 중 가장 공감이 가는 수작이다. 노무현을 향해 경대승은 이렇게 말한다. '무릇 나라를 망치는 것은 악함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라고.

4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글이 주는 흡인력에 빠져들어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는 책인데, 유익한데다 재미마저 있으니 이런 책을 읽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책을 읽을 것인가? 12,000원의 책값보다, 요즘 잘나가는 <아첨형인간>보다, 내 단골 [벽돌집]의 안창살 2인분보다, 몇십배, 몇백배의 감동을 여러분께 선사할 것임을 확신하는 바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_ 2004-03-02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리뷰 믿고 샀습니다. ^^

마태우스 2004-03-08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믿으셔도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속으로는 무섭지만..)

야옹이 2005-04-10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리뷰를 이제서야 보고 넘넘 사고 싶어 찾아봤더니만, 품절이 돼버렸군요..
아쉬워요^^

인터라겐 2005-09-28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웃사이더 출판사가 믿음을 주는 곳이군요... 보고 싶은데.. 아쉬워요..

비로그인 2006-05-20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리뷰 믿고 삽니다... 품절이 풀렸군요.
 
독감 메디컬 사이언스 2
지나 콜라타 지음, 안정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1918년 수천만명의 인명을 희생시켰던 스페인독감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보통의 독감이 나이든 사람들을 괴롭히는 데 반해, 그해의 독감은 군인들에서 먼저 시작, 숱한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잠복기도 없어 직장에 출근했다가 오후에 죽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하니, 그건 우리가 알던 통상적인 독감은 아니었다. 그 후 출현한 어떤 독감도 그것만큼 심하지 않았는데, 우루과이 라운드가 우루과이의 잘못이 아니듯, 스페인독감의 책임이 스페인에 있는 것은 아니다. 책에 나온 설명이다.

[..전시 체제(1차대전)였던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여전히 어느 진영의 편도 들지 않았던 스페인에서는 질병에 대한 신문기사를 검열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이 고착화된 것일 수도 있었다(34쪽)]

공포가 지나치면 망각으로 그 당시를 잊으려 하는데, 1918년 독감이 그랬다.
['미국의 역사'에서 토마스 베일리는 단 한문장을 할애했는데, 그 문장에는 전체 사망자 수가 최소한 절반은 축소되어 있었다....1918년 독감은 신문과 잡지, 교과서, 그리고 사회의 집단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85쪽)]

하지만 아무리 불행한 과거라도 잊기만 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과거를 잊는 자는 그 역사를 되풀이한다고 했지 않는가? 다행히도 몇명의 의학자가 1918년 독감에 대해 흥미를 가졌고, 그 전모를 밝히는 데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일반인도 그렇고, 내과를 택하는 전공의들도 그렇지만, 암, 신장, 간 등에 비해 감염내과는 그 중요성에 비해 폄하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독감연구 역시 한물간 주제로 취급되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독감에 그다지 위험을 느끼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많은 의학자들이 독감 연구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호장비가 일상화되지 않던 수십년 전만 해도, 독감 연구는 목숨을 건 행위였다. 독감은 아니지만, 황열 바이러스를 연구하던 록펠러 연구소의 과학자 다섯명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망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이런 위험에 굴하지 않고 독감과의 전쟁을 벌이고자 하는 선각자들은 계속 있어왔고, 지금이라고 해서 그 중요성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커다란 비극으로 발전할 뻔했던 97년의 조류독감이 최소한의 희생으로 끝난 것도 독감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연구자들의 노력 덕분이다.

의학에 관한 책은 대개 재미가 없다고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이 책은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으며-4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난 눈깜짝할 사이에 읽었다-훌륭한 연구자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도 커다란 수확이라고 하겠다. 의학을 전공한 사람이 읽는다면 몇배의 재미를 추가로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도 장담하는 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