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풍속사 2 - 조선 사람들, 풍속으로 남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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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풍족한 시대가 절대로 아니었다. 민초들의 삶은 언제나 고단했고 많은 전쟁으로 더욱 황폐했다. 조선 풍속사는 '취병'과 '산수유람'등 몇가지를 제외하고는 조선 백성들의 일상을 그려내는 소재들로 구성되어있다. 삶의 모습들을 고스란히 전해주고있는 생업편의 어부, 옹기장이, 짚신, 엿장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가슴이 저미어 온다. 젊은 현대인들에게는 더없이 요긴한 학습의 장이 마련되어 있다.  

불과 1980년대 만해도 버스안에서 어린 아이에게 젖을 물리던 아이 어머니들이 있었다. 당시만해도 그것이 흉이되지 않았고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젓병있었다면 대신 물리면되었겠지만 젖병이 없다. 있었다해도 분유를 사서먹이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분유가 있아해도 버스안에서 그걸 알맞은 온도의 물로 분유를 희석시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도 않았다. 버스안에서 여하튼 젖병을 물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젖을 물려야했고 어린 아이는 엄마의 젖을 마음껏 먹고는 젖꼭지를 문채 엄마의 품에서 그렇게 잠이든다. 

요즘 이런 말을 하면 이거 변태가 되는 거이 아닌가? '젖 먹이기, 아들 낳은 여인의 특권' 이라는 내용이 많이 와닿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여하튼 조선의 여인들은 젖가슴을 드러내고 외출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음이 고스란히 화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요즘 어디 상상이나 되는 소린가?? 미틴~ 짖이다. 시대의 변화는 사고의 변화를 낳고 사고의 변화는 한때 자연스럽던 일을 미틴짖으로 변모시킨다. 그러나 젖을 물리던 가슴이 삶의 현장에서 사라져가듯이 한국인들의 따듯한 정서도 덩달아 자취를 감추고 있는 현실이 매정하다.

한 때 매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한국인들의 식품 하나가 있었다. 바로 견공. 견공을 식용으로 사용하는 것에대해 외국에서는 물론 국내의 일부 인사들도 매우 마뜩해하지 않는다. 책에 의하면 견공을 식품으로 사용하던 역사는 중국의 진나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복날 개를 잡아 충재를 막는 행사의 하나로 견공을 식품으로 사용했다는 실록이 '사기'에 실려있다고 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조선의 정조대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올랐다고한다. 견공의 요리는 시시한 요리가 아니라 조선의 왕실에서도 중요한 행사에 사용하던 중요 식품이었다. 옛날에는 地羊湯(지양탕)이라하여 우리 고유의 요리법으로 전해온다. 옛날에는 dog를 땅의 양(地羊지양)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더더욱 흥미로운 기록은 지양탕은 성균관 유생들의 별미로도 제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유생들에게 특식으로 매달 1일과 6일이 드는 날에 아침 식사에 대별미로 지양탕이 제공되었던 것이다.  

외국의 어느 배우가 한국의 지양탕을 두고 너무 거친 표현을 사용하며 지탄하던 일이 생각난다. 음식은 그 나라의 문화이자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타국의 음식 문화를 평가절하시키는 일은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각한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일은 조선의 성풍속에 관한 내용이다. 조선의 성문화는 지극히 폐쇠적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것은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뿌리를 깊이 내리면서 변화하게되는 가족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이전까지만해도 조선의 혼인 제도는 처가살이혼이었다. 남편이 처가에가서 살고 아이들도 외가에서 탄생하고 양육되던 문화였다. 살질적인 가부장적 권력이 아직은 힘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조선 17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시집살이혼으로 변모한다. 자연스럽게 여성이 남성의 지배하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여성들이 집안에 폐쇠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자신의 표현에 절대적인 제약을 받게된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여성 주도적 성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오로지 남성의 전유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 조선의 여성과 춘화도의 관계는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특히 여성 주도적 성의 표현이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어보인다. 

신중치 못했거나 신중할 생각이 없거나.. 

이 책에서 한가지 못내 아쉬운 점이 있다. 저자는 한 점의 춘화도를 소개한다. 여성이, 그것도 상복을 입은 여성이 늦은 밤 촛불에 의지하며 은밀하게 춘화도를 감상하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이 그림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한국의 미술사학자 였던 오주석과의 일화도 함께 소개한다. 

저자가 쓴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를 보고 오주석이 전화를 햇다고한다. 오주석은 저나가 책에서 소개한 신윤복의 그림은 신윤복이 직접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위작이라는 뜻이었던 게다. 오주석이 신윤복의 기법과 어긋나는데가 있다고 주장하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오주석을 만나 위작설을 직접 듣고싶었으나 오주석이 작고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쓰면서 신윤복이나 김홍도 같은 조선의 위대한 화가들이 춘화도를 그렸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고 적고있다.  

그러나 미술사학자 오주석이 정녕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하는 의문이든다. 오주석이 누구던가. 오주석은 특히 김홍도의 미술연구에 관한한 한국의 지존급이다. 당연히 신윤복의 그림에 대해서도 상당한 연구 성과를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지금껏 학계가 그림의 주인을 오인하고 있었던 작품의 정확한 주인을 찾아냈는가 하면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예술을 완벽하게 학문적으로 연구해낸 유일한 미술사학자였다. 조선의 미술사에 과연 오주석을 능가할 수 있는 학자가 과연 누구던가... 

그런 학자가 마뜩지않다고해서 혜원의 그림을 혜원이 그린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을리가 없다. 철저한 필법과 자료를 바탕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연구 성과를 거둔 인물이 오주석이다. 자신의 노력과 명성에 먹칠 할 수도 있는 주장을 할 인사가 아닌 것이다. 그의 자존심은 오직 하나. 한국의 미술사를 완벽하게 연구하여 세상에 내놓는 것이 그의 염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런 오주석이 직접 전화를하여 위작여부를 언급했다면 같은 학자로서 바로 달려가 오주석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토론을 거쳤어야한다. 이것이 학자로서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던가. 학자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에 앞서 한점의 의구심을 남겨서는 안된다. 그러나 학자가 단서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했다는 것은 학자로서의 정신이 결여된 태도이다.  

젆화를 받은 시점이 2001년이라고 했다. 오주석님이 타계한 것은 2005년이다. 그렇다면 뜻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찾아가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시간적 여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를 무시한 것이다. 오주석이 어느 글에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했을 것으로 본다. 저자는 그 글을 찾아볼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오주석은 말로만 미술사학자가 아니다. 전녕 미술사학자가 바로 오주석인 것이다. 저자는 그것이 누구였든 간에 그 내용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없없었다는 질타를 들어도 싸다.           

이점을 제외하면 전문가도 아닌 한문학자께서 글을 쓰느라고 애 많이썼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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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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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형 골수분자, 고미숙, 나는 그 몰입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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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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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에서 애초에 느낀 것이지만  고미숙은 골수분자라는 느낌이다. '열하일기---' 에서도 고미숙은 온전한 연암이 되어있었다. '네가 나이고 내가 너이다'라는 우정론과 맞아떨어지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이러한 고미숙의 열정과 몰입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에서 그녀는 온전한 연암이되어 있었고, 그러므로 열하일기를 마치 연암과 마주하는 느낌으로 접할 수가 있었다. 연암과 독자간의 간격을 최대한으로 좁혀준 매체, 아니 독자를 다이렉트로 연암을 만나고 있다는 착각을 일이킬 정도로 그 역할은 대단히 컸다. 이 점은 고작가가 아니었더라면 느낄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부분일 것이라 느낀다. 고작가는 정말 몰입형이며, 완벽한 골수분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골수분자가 마음에 든다. 비록 몰입한 나머지 그 옆을 바라보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해도 나는 그 몰입이 좋다. 그리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 골수분자가...

 골수분자의 원심적 시각이 남기는 한계...그러나...그 가능성...  

고작가는 임꺽정에서도 몰아일체의 형식을 보여준다. 이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미 출판 협회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책은 [임꺽정]의 안내서이니 말이다. 이처럼 몰입의 골수분자가 되다보니 안에서 원심력만을 발휘하게되는 측면이 없지 않아보인다. 그 예로는 고작가는 청석골을 추방된 아니 이탈한 마이너들, 결국 도망자들의 막다른 거점이자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이 말은 지극히 반박의 여지가 없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느끼는 막다른 골목에는 고작가가 말하는 거점이 없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현대인들은 대학을 가기위해 죽어라 공부하고, 대학에서는 학점에 목숨을 걸며, 그리고는 백수가된다. 이게 우리 시대 청춘의 자화상이다'  --13쪽--   

'고로 우리시대의 마이너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마이너라는 낡은 습속에서 벗어나 삶의 새로운 형식을 창안 할 수 있어야 한다.' --56쪽-- 

임꺽정의 시대적 배경은 사실상 요즘이나 크게 다를 바는 없다. 빈부의 격차가 매우 크며, 지배자(기득권)와 피지배자(농공상), 즉 요즘으로 말하면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역사적 판박이나 다름이 없던 시대였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막다른 골목이 문제가 된다. 임꺽정의 시대는 막다른 골목에서도 꼬뮌을 형성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다시말하면 고작가의 말대로 타자를 수용하는데 거부감이 없던 시대였다. 그들은 타자를 몸으로 부딪히며 서로를 이해한다. 그들의 방식은 생각과 행동의 급간차이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라는 점도 지적한다. 현대는 사고와 행동간의 시간차가 너무크며 그러므로 온갖 생각이 들어차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이질적 문화의 변화속에서 현대의 마이너들이 만나는 막다른 골목은 당시의 골목과는 거리가 너무나 요원하기만 하다. 

우선 꼬뮌을 형성할 수 없다. 우선 자본의 시대적 성질이다. 당시의 시대는 자본을 따로이 필요로하지 않았다. 꼬뮌을 형성하는데 웬만한 기술을 보유한 마이너의 인물들을 청석골로 데려오기만하면 된다. 시대적 조건으로는 전혀 무리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현대의 마이너들은 철저한 단독이다. 그러므로 꼬뮌을 형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현대의 마이너들은 88만원 세대이거나 아니면 백수들로 꼬뮌을 형성할 수 있는 여력도 없다. 가장 요긴한 자본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둘째로는 마이너들의 미래이다. 이 책의 등장 인물들은 본디 가진 것이 없었다. 게다가 희망도 없다. 어찌어찌해서 한밑천 확 잡아서 신분 상승도하고 권세가들 부럽지 않게 잘먹고 잘 살아보겠다는 야심을 가질 수 있는 시대적, 사회적 여건이 애초에 되어주질 못했다. 신분 자체의 제약이 그것이다. 그러니 사고와 행동 사이에 시간차가 없어도 되는 좋은 조건을 갖춘 것이다. 현대와의 차이점이라면 큰 차이점이 될 수 있다. 현대는 쿵푸를 하면 그것이 곧 부를, 지위를 약속하는 사회이다. 그에 대한 제약적 신분사회도 아니니, 그 가능성은 두령들과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이러한 신분의 변화에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것이 오히려 꼬뮌을 형성하는데 장애물이 되어주고 있는 사회가 현대이다. 현대의 마이너들은 조선의 마이너들과는 다르다. 조선의 마이너들에게는 미래가 없으며, 필요에따라 3일 잔치를 벌이고 먹어줘도 되는 마이너들이지만 현대의 마이너들은 이루기 힘든 희망의 불씨가 그나마 남아있기에 꼬뮌을 형성하기 어렵다. 온전한 포기, 즉 가장 밑바닦으로 내려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골수분자 고미숙의 희망을 찾으시라...

그렇다고 아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비록 외형적으로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고는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밀폐되어있는 막다른 골복이 아니냐고 말한다면 너무나 자괴적인 생각이다. 고작가가 이 책을 통하여 말하고 싶은 부분도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고 있다. 너무 골수분자라 잘 안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고작가의 핵심을 마음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한사람의 독자인 나는 고미숙이라는 골수분자의 한계속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 가능성을 말이다.  

현대의 마이너들이 사고를 좀 바꾸어주기만 하면된다. 자본도, 단독적 추진형태도 모두 바꾸어주면 가능한 일이 된다. 그리고 쿵푸를 하는 것이다. 현대의 마이너들이 쿵푸를 하기위해서는 반드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고작가처럼 말이다. 사실 고작가도 알고보면 마이너였다. 그런 마이너가 이제는 메이저가 된 것이다. 한 사람의 마이너로서 꼬뮌을 형성하고, 몸으로 부딪히면서 앞길을 헤쳐간 대표적인 마이너가 고작가이다. 사고의 전환이란 무형에서 유형의 본질속으로 탐구해가는 것이다. 무엇을 탐구하는가? 바로 자신이다. 자신의 쿵푸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것이다. 저기저...두령들이 그러했듯이...그리고 마이너들끼리 뭉치고 뭉치는 사회적 성향을 가꾸어가야 한다. 현대의 사상적 배경을 고려할 때 대단히 엄청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반드시 결실은 오고야 말것이다. 고작가가 마이너였지만 메이저가 된 것 처럼...마음먹고 이제 찾아 나서면 된다.  내가 뛰게될 마이너 리그의 거점을 행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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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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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의 웃음은 덤이다. 고미숙과 연암이 잘 버무린 지혜를 우리의 도가니에 담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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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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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는 열하일기와 박지원에 대해서 배우고 그의 작품인 '허생전, 양반전, 호질'등은 대수능에서도 문제로 출제하는 텍스트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 인지도는 어느 인물이나 작품에 뒤지지 않는다. 가히 국민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막상 "열하일기를 읽어보신 분?" 하면 딱히 손을 번쩍 들어올릴만한 독자가 몇이나 될까...그러는 당신은 읽어보았소라고 묻는다면 목소리가 기어들어갈 수 밖에 없는 한 사람임에랴... 

열하일기를 읽어보야에 겠다고 생각하게된 동기는 오직 작가 '고미숙' 덕분이다. 이 장을 빌어 고미숙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고미숙님의 TV강연을 시청하게 된 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이겠다. 어찌나 강연을 재미나게하던지...그녀가 써내린 책을 읽지 않을 수 없게하는 매력덩어리 고미숙님~. 우리의 고전이 이토록 멋지게 강연해주다니... 우리의 것을 늘 소중하게 생각해야한다는 신념을 가진 한 사람으로 고미숙은 내게 충분한 동기를 주었다. 정말 유익한 그녀의 강의였다.  

프롤로그에서 나타나는 현학적인 고미숙

드디어 고미숙의 책을 집어들었다. 책의 껍데기부터 웃기기 시작하는 양반이다. 연암을 닮아가고 있나? 이 책을 읽고나면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책은 부록부터 읽으면 더 재미있다나...고미숙은 '프롤로그'에서 지극히 현학적인 미사여구를 사용한다. 고미숙의 공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표현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나 이런사람이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 고미숙은 정말로 표현력이 풍부한 작가이다. 한마디로 고미숙은 '정말 글을 잘쓰는 작가' 중 한사람이다. 그러나 그토록 현학적인 표현들은 앞으로 이 책을 읽어가야하는 독자들에게 깊은 불안감을 조성한다. 고미숙의 현학적 표현들을 계속해서 만나게되면 어쩌나...하는 절망감 말이다. 마치 넘어야 할 산과 같은 압박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도 이점을 걱정하면서 읽어갔던 것이다. 푸코와 들뢰즈를 공부한 사람이라서 그런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미숙과 연암의 잘 버무려진 웃음과 진지함

그러나 결코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프롤로그가 끝나고 본격적인 연암과 동행하게되면서부터 고미숙의 흥미진진한 문체를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읽고도 열하일기를 읽지않는 사람이있다면 이상하다 생각하리만치 그녀의 필체는 독자를 사로잡는다. 책을 읽다가 할 일도 깜박 잊어버리는 수가 발생한다. 고미숙의 언어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언어는 본디 상상력을 제한하는 역할을 해오지 않았던가?? 언어의 본질에 의심을 품게하는 작가...고미숙이다. 무엇보다도 고미숙은 따듯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의 글 안에서는 그런 따스함이 배어있다. 이 책을 그토록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고미숙과 연암의 유쾌한 웃음의 미학 때문 만은 아니다. 고미숙의 따듯함과 연암의 웃음이 잘 버무려진 탓이다. 아니, 고미숙이 바로 연암 박지원인 것이다. 고미숙안에는 연암이 들어와 있던게 분명하다. 이런걸 두고 빙의라던가? 고미숙이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연암의 빙의에 걸린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누가뭐라고 한다해도 이런 나의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고미숙은 생철학을 인문학적으로 풀어낸다. 연암의 사상과 고미숙의 이해가 함께 잘 버무려지면 이토록 흥미로우면서도 뜻깊은 인문학을 탄생 시킬 수 있단 말인가...연암이라는 한 사람의 위대함을 고미숙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연암이 그 얼마나 재기넘치며 사물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사람인지...연암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꼼짝없이 연암에 의하여 포착되어 연암의 사상과 결합하면 바로 통찰력으로 변모한다.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그 어떤 자연이든...

 

연암에 대하여... 

연암에 대해서 잘 알고싶다면 위키백과에서 연암 빅지원을 치거나, 박지원을 치면 바로 알 수 있다. 위키백과는 빅지원이라는 인물의 백과 사전을 보여준다. 이보다 더 좋은 정보가 또 있을까? 그러나 백과사전의 설명으로는 연암을 알아낼 길이 없다. 절대로 말이다... 그러나 고미숙의 이 책과 함께라면 연암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아주 잘 알 수 있다. '연암' 이라는 인물의 역사적 기치뿐만 아니라 진정한 하나의 인간 박지원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열하일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박지원의 우정론에서 출발하여, 사건과 사물로부터 확장해가는 사유의 무한함을 느낄 수 있다. 고미숙은 이런 박지원을 노마드라고 했다. 노마드는 구속을 원치 않는 존재이다. 한마리의 야생마와 같은 존재이다. 길들일 수도 없고 길 들으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 노마드는 육체만 노마드인 것이 아니다. 사유의 방식도 노마드이다. 그러나 사건과 사물을 통하여 그는 정확하게 시대 통찰하고 있다. 그의 빛나는 웃음의 미학과 함께 말이다..    

자...옆의 사진을 보시라. 연암 빅지원의 초상이다. 우선 연암의 체구를 먼저 감상해보시길... 떡벌어진 어깨와 육중한 몸통,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팔뚝도 무척 굵어 보인다...체중이 상당히 나감직하다. 그러면 이제 연암의 얼굴을 살펴보시라. 체구를 감안한다면 결코 살이 많이찐 사람의 얼굴은 아니다. 체구와 비교했을 때 얼굴이 무척 작아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연암이 비만은 아니었다는 방증이 아닐까? 그렇다. 연암은 무척 체력이 단단하고 강단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는 이제 연암의 눈매를 보시라. 첫 인상치고는 너무 매서운 눈초리이다. 옆으로 쭉-찢어진 눈이 더구나 위로 치켜뜨고 있다. 영락없는 장군깜이다. 당장에 불호령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연암의 눈매, 호걸 무인의 기질마지 엿보이는 연암의 초상화... 그리고 이제는 연암의 수염을 살펴볼 차례이다. 서릿발같은 연암의 수염들이 아주 힘차게 가슴까지 내리뻗어있다. 한 가닥 만져보기라도 할라치면 꿈틀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은 수염...강철로만든 가는 철사가 아래로 뻗어 내려온 느낌이다. 눈매와 수염은 연암의 강렬한 미이지를 전달하고도 남음이 있다. 김히 누구도 연암 앞에서는 머리를 꼿꼿히 들 수 없을 것만 같은 추상같은 기상이 엿보이는 초상화이다. 조선 시대의 초상화는 정밀하기로 유명하다. 흔히 빠르게 그린 단조로운 일반 초상화도 있지만, 연암의 그것은 확연히 구분되는 조선의 초상화적 특징을 잘 보여주며 극세사진을 보는 듯 하다. 연대가 오래되어 초기의 현장감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있겠으나 연암의 내외적 모습을 100% 보여주는 좋은 초상화라 생각한다. 연암의 초상화만 떠올려도 웃음이 실실 새어나오니 말이다... 더욱이 연암은 정말 배꼽 잡는 양반이다. 그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니...허참...

 고미숙은 이러한 연암의 초상화가 주는 이미지와 열하일기속에서 나타나는 연암의 웃음을 동시에 떠올리며 글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저 얼굴의 개그' 라니...언뜻 개그를 상상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얼굴인데 막상 저 얼굴로 개그를 하는 장면과 클로즈업을 시키면 그야말로 더없이 우스운 개그를 연출하게되는 것이다. 고미숙은 초상화에서 드러나는 연암의 이미지가 연암의 개그와 혼합되어 변화 무쌍한 표정들로 바뀌게되면 그야말로 개그의 극치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읽는 실제로 저 얼굴의 개그를 생각하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게된다.  

더 중요한 것은 연암의 개그가 개그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개그는 언제나 동반하는 깊은 통찰이 등장한다. 그의 통찰은 바로 사상가로서의 연암을 느낄 수 있게한다. 자...웃음과 통찰력, 그리고 그의 사상의 조합...고미숙에 우리에게 전해주려고하는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육체적인 노마드가 소유하고 있는 사상적 노마드를 고미숙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였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과연 연암의 글과 통찰력, 그리고 그의 사상을 감지하게될 독자들이 느낄수 있는 충격...연암이라는 위대한 인물에대한 단순한 이해를 뒤어넘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이 반성하게하는 인간 연암을 그동안 너무나 몰랐다는 반성을 하게만든다.   

 

연암의 소중한 가르침

연암과 무딪히는 모든 것들은 살아서 움직인다. 고정된 표상의 말뚝에서 이탈하여 자유롭게 변이하면서 그 무엇의 경계에 서있는 연암, 그래서 고미숙은 그를 경계인이라 칭한다. 경계인이란 이방인 이라는 의미를 가지기도하지만 넘나드는 의미를 함축하고있다. 고미숙은 후자를 뜻하고자 경계인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열하일기를 읽다보면 연암의 생각이 들려온다. 연암은 우리에게 계속 묻고, 다층사고를 하라고 권하기 때문이다. 표상의 말뚝이란 우리의 고정관념이다. 그 말뚝에 매어있는 한 우리는 그 이면에 숨어있는 것들의 성질을 볼수없게된다. 인접한 것들과의 유기적 관계를 인식할 수가 없다. 옳고 그름의 가운데에 진리가 있고 도가 있다는 것이 연암의 생각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우리가 배워야 할 노마드 연암의 모습이다.  

노마드 연암은 매우 창의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억매이지 않기때문에 자유롭고 자유롭기에 창의적이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자유로운 탐구의 기회를 주어야 하는 자명한 이치를 고미숙은 연암을 통하여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고미숙이 의도했던 안했던 간에....연암은 사물이든 사건이든 이면에 숨겨있는 본질을 보라고 권한다. 본질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있는 상태에서는 구할 수 없는 가치이다. 미지의 수를 구하려면 올바른 태도를 필요로한다. 미리 정해진 고정값으로는 대입이 불가능하다. 유기적인 상황속의 X값을 어떻게 고정된 수치로만 대입을 할 것인가. 번번히 오답일 수 밖에....연암은 우리의 고정값을 벗어던지라고 말한다. 아니 고미숙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누가 말하고 있다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연암이 고미숙이고 고미숙이 연안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체성과 연암

 연암과 같은 인물이 과연 우리의 선조였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우리의 고전 속에 살아 숨쉬는 선조들의 정신과 얼을 우리는 그동안 너무 모르고있었나보다. 고미숙과 연암의 유쾌한 한마당은 독자인 나를 사로잡았다. 연암을 고미숙이라는 사람이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고미숙이 아닌 다른 사람이 연망을 만났더라면...어쩔뻔한건가...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게하는 것은 바로 연암과 고미숙이 서로 버무린 감동을 독자의 도가니 속에 담아두고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암에게서 배우고 우리의 귀중한 기치를 부여하는 순간 연암은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도 일조할 것이다. 우리의 선조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기르는데 일조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보다 더 자긍심을 갖게 해주는 것이 또 있을까... 우리의 것으로 스스로의 자긍심을 길러주는 것보다 우리를 강인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의 정신 자산으로 우리의 정신 가치를 높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대는 비록 다르지만 현대의 우리들은 연암에게서 수많은 지혜와 재치 그리고 통찰력을 배울 수 있다. 더불어 그의 웃음의 던지는 개그는 덤인 것이다. 비록 웃음이 이 책의 중요한 덕목이지만 결코 그 웃음 뒤의 역설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 웃음은 바로 허공으로 사라져 없어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숨은 연암의 통찰력이야말로 우리가 꼭 붙들어두어야할 소중한 자산이다.

 고미숙이 만난 연암은 바로 "나- 이런 사람이야~",  고미숙께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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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2-01-31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트랑공님은 어떻게 읽으셨나 궁금해서 찾아봤어요. ^
흠뻑 빠지신 것이 오롯이 느껴집니다.
이 책 읽고 저도 박지원에겐 흠뻑 빠졌으니
고미숙님이 저를 잘 안내해주신거죠?

요 책 보면서 알게된 [비슷한 것은 가짜다]가 전 더 좋았어요.
정민선생님처럼 단정한 글을 더 좋아하나봐요. 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