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한글역주 - 도올 선생의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용을 공부해보겠다고 덤벼든지 6개월이 지났지만 텍스트를 읽으면 읽을수록 중용에 대한 리뷰를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저 욕심에 중용의 텍스트를 싣고 있는 책만 여러 권 가진 꼴이 되고 말았다. 명심보감을 비롯 논어, 맹자, 대학등의 가르침을 깨달은 후에 중용의 가르침을 받으라 전하는 말이 있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중용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한다는 자체가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 듯 하다.


‘동양의 고전은 모든 텍스트를 암기하지 않고 논한다면 그 것이야말로 큰 글을 도둑질을 하는 것’이라고 말해준 학문이 깊은 지인의 말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는 중용을 대하는 마음을 더 무겁게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결코 중용을 가벼운 마음으로 대하지 말라는 뜻 이렸다. 하여 중용의 모든 텍스트를 암기하기 시작했지만 머리가 나쁜 탓에 그만 장구를 거듭해 갈수록 어리버리하고 만다.

 

이렇듯 감당하기 힘든 중용의 리뷰를 적을 자격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사람의 독자라도 더 중용의 큰 가르침을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는 심정으로 리뷰를 적는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중용의 리뷰는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중용의 가르침 중 학생들을 대하는 한 사람으로 매우 귀감이 되는 구절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할까한다. 중용의 첫 장구는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라는 글로 시작한다. 첫 구절의 강렬한 인상도 인상이겠지만 지금껏 해온 일과 관계가 있는 교(敎)라는 글이 그 얼마나 무게감이 있는 말인지 깨닫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중용은 위의 15글자를 통하여 性, 道, 敎를 설명하고 있다. 이 중에서 나는 교(敎)라는 말을 깊이 새기고자 한다. 하여 敎에 중점을 두다보니 장구의 시작을 거꾸로 이해할 수 밖에는 없다. 중용의 교(敎)라는 말은 첫 장구인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는 데서 처음 등장하는 말이다. 이는 ‘道를 닦으며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敎라 한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구절의 뜻으로 보건대 그 敎를 이해하기 위해서 道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가 그것 인데 이는 ‘性을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道라 한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또 性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 그것으로 이는 ‘天이 命하는 것 그 것을 일컬어 性이라 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天이란 우주의 이치 혹은 섭리로 이해하면 될 듯 싶다.


 

그렇다면 天이 命하는 性이란 무엇인가... 이는 모든 자연 속에 존재하는 실체들 각각의 성질을 뜻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 EBS에서 황제 펭귄에 대한 다큐를 방영한 적이 있다. 영하 5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그들은 꼼짝하지 않고 알을 품어 부화시키고 어린 새끼를 키우는 수고로움을 전혀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이 알을 품기 시작하여 새끼로 자라게 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은 너무나도 눈물겹고 고달픈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아마 방송을 보신 분들은 황제 펭귄에게 새끼를 키운다는 것이 그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알을 낳자마자 어미는 아빠 펭귄에게 알을 건네고 먼 바다로 나가 음식을 섭취하고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아빠 펭귄과 교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빠 펭귄은 엄마 펭귄이 돌아오는 그 날까지 무려 4개월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꼼짝도 하지 않고 알을 품는다. 음식물은 전혀 먹을 수가 없다. 아차 실수하여 알을 놓치기라도 하면 영하 50도의 강력한 추위속에서 알은 순식간에 얼어버리고 만다. 그러면 펭귄들은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알을 다시 품어보겠다고 기를 쓴다. 어디 이 뿐인가. 새끼를 또 아차 실수하여 놓치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순식간에 얼어버린다. 차가운 시신이 되어버린 새끼를 어미는 품겠다고 또 그렇게 애닯아 한다.

 

 어미가 먹이를 충분히 먹고 돌아오면 아빠 펭귄이 바다로 나가 음식을 섭취하고 돌아온다. 그 거리는 무려 100km가 넘는다. 일정 기간을 넘기면 아기 펭귄은 아사하고 만다. 엄마가 토해내는 음식물이 바닥이 나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펭귄들은 한계 시간대를 넘기지 않고 돌아온다. 그들에게 시계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황제 펭귄은 그토록 연속된 시련의 행위를 왜 마다하지 않는 것을까...바로 天이 命한 그 性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이치는 황제 펭귄에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성질을 부여한 것이다. 어쩌면 펭귄이 그런 삶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선택 마 저도 추호의 어김도 없는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性 이기 때문이다. 뜻이 그러하다면 주희가 그 性에 주석을 달기를, "性은 곧 理를 뜻하는 말이다"라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는 깊은 의문이 들 뿐이다. 


 

 ‘道를 道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道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기는 하다. 물론 이는 도가인 노자의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유가의 중용에서는 분명히 道를 설명하고 있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가 바로 그것이다. 즉 天이 命한 그 性을 따르는 것이 바로 道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황제 펭귄은 도를 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어진 性을 매우 잘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에게 도란 무엇인가를 말할 차례이다. 자연의 한 존재인 펭귄에게 性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그에 합당한 性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도 역시 자식을 낳고 교육시키며 기른다. 뿐만 아니라 가족 뿐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고 도우며 中과 和를 이루려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다. 공자가 말했다시피 인간은 仁을 행해야 한다. 자식을 사랑함에 애틋하고 타인을 사랑함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어야 한다. 세상의 和를 이루는 것이 인간이 갈 길인 것이다. 그 길에는 仁, 義, 禮, 知, 信이 있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비로소 敎라는 말이 나온다.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가 그것이다. 결국 인간이 따라야 할 그 本性에 맞는 길을 가는 것 道이고 그 道를 닦으며 따르는 것이 바로 敎인 것이다. 그렇다면 敎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敎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의 敎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용의 첫 장구를 공부한 사람에게 敎란 인간 본연의 性을 충실히 따르고 행하며 갈고 닦는 것이 바로 敎인 것이다.

 

중요은 道 다음에 敎를 놓고 있다. 이 얼마나 敎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던가... 참된 敎를 이토록 의미심장하게 가르치는 고전을 또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敎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할 것만 같다. 교라는 말 속에는 엄중하고도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심연의 지혜를 가진 뜻이 담겨있으니 그 말의 아득함을 어찌 감당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 학교 내의 교권이 추락했다는 말이 최근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다. 敎의 權이 추락했다는 말은 敎에 權이라는 껍질을 하나 입혔기 때문에 생긴 말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중용에서 말하는 敎는 결코 추락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엄중함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말은 아닐런지...중용에서 가르치는 敎를 깨닫는다면 교권은 반드시 바로 설 것이라 믿는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2-03-06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이렇게 읽으신다는 게 어딥니까?
전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근데 글씨가 커서 좋습니다.
글씨체가 뭔가요? 폰트는 10으로 키우신 건가요?
요즘엔 글씨 작으면 잘 안 읽게 되요.ㅋ

차트랑 2012-03-06 14:55   좋아요 0 | URL
요즘은 저의 독서기록장에서 오른쪽 마우스로 복사해서
리뷰나 페이퍼를 작성합니다.
글씨는 한컴바탕이고요 폰트는 10입니다.
그런데 선명도가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하는 듯 합니다.
테스트를 좀 해봐야 할 듯 합니다

그리고...
용기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스텔라님
또,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든 읽으실 수가 있습니다^

2012-03-06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6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6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6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2-03-06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용, 쉽고도 어려운 교훈 인 듯 합니다
 

드보르작은 체코의 작곡가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작품활동을 하면서 미국인들의 환대에 보답하는 의미와 더불어 '신세계로부터' 라는 교향곡 9번을 작곡하게 된다. 'From the New World'라는 교향곡을 완성한 해가 1893년 있으니  미국을 신세계라고 생각할만 했음직하다.

 

우리들에게도 낮설지 않은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이 가장 각광받고 있는 곳은 사실 호주이다. 호주땅에는 본디 '아보리진'이라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세계의 땅이란 땅은 모두 개척 혹은 탐험 혹은 발견이라는 이름으로 서구인들의 발아래 무릅을 끓어야 했다. 그러한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여년 전 호주는 영국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1770년 영국의 쿡 선장의 배가 호주로 떠밀려가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대략 200여년 전 이 호주에 영국인 죄수 700명을 포함한 영국인 1300여명이 시드니에 도착하게되면서 호주의 역사는 급변하게된다. 애초에 호주는 영국의 악질 범죄자들의 수용소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영국의 역사가 워낙 혼잡하고 자신들 스스로의 조상들은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족들의 집합체이다. 특히 색슨족들은 매우 거친 민족으로 유명하다. 영국은 자신들의 기질이 매우 거칠다는 것을 자각하고 스스로 정화 작업에 나선다. 그리하여 죄질이 나쁘다고 판단되는 죄수들을 호주라는 먼 섬에 강제 압송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사회 정화의 의지가 얼마나 컷던지 강제 압송된 죄수 중에는 어린이와 여성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어린이가 그 어떤 강력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아일랜드 정치범, 살인자, 강도, 사기꾼등 범죄자들을 이렇게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는 목적은  사회를 정화하는 차원이었다. 하여 간혹 영국 영화의 한 장면에서는 '호주로 갈래 아니면 죽을래?' 하는 식의 질문을 주고 받는 장면들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덕분에 영국은 사회 질서의 안정을 찾았고 엄격한 교육(도둑질하는 어린이의 손을 자르는 등의)을 병행한 결과 현재 우리들은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이라고 알려지기 까지는 영국의 엄청난 자정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 이후 80여년 동안 영국은 16만명에 해당하는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쓰레기'들인 범죄자들을 호주에다 내다 버리는 일을 추진한다.

 

 

 

 

그러던 1851년 어느 날...호주에서 금광맥이 발견되는 엄청난 사건이 터지고 만다. 금맥의 발견은 호주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바꾸어 놓은 대형 사건이었다. 단순한 유배지가 아니라 골드러쉬가 시작된 것이다. 급기야 호주에는 600만명에 달하는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황금 전쟁이 시작된다.

 

호주는 이제 영국인들의 차지가 된것이다. 호주의 아보리진은 당시 약 500여 부족의 대략 50만명 (어떤 이는 100만명에 달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한 원주민의 인구가 무려 4만명이라는 수치로 격감하게된다. 만약 100만이라는 수치가 사살이라면 도대체....영국인들은 호주 원주민들에게 무슨 짖을 한 것이란 말인가...거의 90%이상, 아니 95%이상의 호주 원주민들이 영국인들에 의하여 희생되었다는 뜻이다. 순식간에 날벼력을 맞은 원주민들은 그 얼마나 억울했을까...

 호주에서 열린 시드니 올림픽 때에는 원주민들과의 '화의'라는 기치하에 아보리진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기도 했다. 봉화 봉송주자들을 대거 원주민들로 구성해 넣었다. 그러나 밑바탕에 깔려있는 인종 차별은 여전히 개선될 기미가 없다고들 한다. 원주민들은 여전히 소외계층으로 남아있고 들러리 비주류이다. 200여년 전 땅의 주인이 바뀐 후 원주민들의 고통은 여전하다

 

억울했던 원주민들의 역사는 차치하고, 이 곳 호주로 이주해온 영국인들의 가슴에는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배일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아프리카의 고향을 강제로 떠나 아메리카로 잡혀간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음악으로 달래듯이 호주로 이주한 영국인들은 이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으로 마음을 달래는 듯 싶다. 원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웬수와 같은 영국인들이겠지만 그들도 고단한 나날을들 보냈노라고 말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들의 조상들은 고향인 영국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으니 그 향수는 대를 이었을 것이고 현대에 와서는 가장 애호하는 교향곡을 드보르작 9번 신세계로부터를 꼽고있다. 노래는 고향곡의 2악장에 노랫말을 붙야 세계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Go'in home, go'in home/  I'll be go'in home

Quiet light, some still day/  I'm just go'in home

 

It's not far, just close by/  Through an open door

Work all done, care laid by/ Go'in to fear no more


Mother's there xpect'in me/ Father's wait'in, too

Lots of folk gathered there/ All the friends I know

all the friends I knew


Nothing's lost, all's gain/ No more fret nor pain

No more stumbl'in on the way/ No more long'in for the day

Go'in to roam no more

 

 

Morning star lights the way / Restless dreams all done

Shadows gone break of day / Real life just begun


There's no break, there's no end/ just'a liv'in on

Wide awake with a smile / go'in on and on

Go'in home, go'in home / I'll be go'in home

It's not far, just close by/ Through an open door

 

I'm just go'in home / Go'in home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2-03-0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음악이 아침부터 멋지게 울리네요...
소년 합창단의 목소리는 종소리같아요.

세계의 역사에는 이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0세가 넘어서입니다.
정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유시민씨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아직도
고히 간직하고 있는 이유가 그렇기도 하구요... 사람 사는 사회란, 참으로 복잡하고
그리고 한 덩어리로 치부해버리기엔, 개인의 역사 또한 참 길다는 생각이 들어요.

즐거운 한주되시기 바랍니다.

차트랑 2012-03-05 11:58   좋아요 0 | URL
말씀해주신대로 역사란...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바른 역사를 알리려는 사람들보다는 이를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하려는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도 재고할 필요성이 ㅠ.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즐거운 한 주 되세요
 
신화와 인생 - 조지프 캠벨 선집
조지프 캠벨 지음, 다이앤 K. 오스본 엮음,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대들이 꼭 읽어야 하는 작가, 조셉 캠벨


필독서라는 말도 있지만 이제는 필독가라는 말도 때론 성립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은 바로 조셉 캠벨과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신화와 인생을 번역한 이윤기선생이 이 책을 번역하지 않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만 조셉 캠벨은 참으로 멋진 생각을 가진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 어떤 현상도 조셉 캠벨의 사고 영역에 장애가 되는 일은 없다. 그것이 종교이든 철학이든 간에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모든 것들은 잘 버무려지고 융화라는 새로운 변화를 격게 된다. 그야말로 ‘化’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양성이 무시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양성을 고스란히 보존시켜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전혀 새로운 맛을 주는 사고의 소유자인 것이다. 조셉 캠벨을 우리들의 20대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열린 사고


 젊은 독자들에게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저자의 열린 사고이다. 저자는 큰 줄기의 종교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신화들을 연구해온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기독교, 불교, 유학, 도학등은 물론 일반인들로는 접하기 쉽지 않은 아메리카 부족을 비롯 아프리카의 원주민에 이르는 그들의 신화를 연구해왔다. 어쩌면 전 세계의 신화란 신화는 죄다 섭렵했는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자신 스스로 기독교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이원론적인 기독교적 이론들에 공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때로 조셉 캠벨을 지극히 동양적 사상에 물든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게 한다. 절대자와 인간의 간극인 넘볼 수 없는 종교적 금기사항을 저자는 무참히도 무너뜨린다. 이원론적 사고 혹은 사상은 기필코 대척점을 만들 수 밖에 없고, 언젠가는 반드시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구도로 이해하는 그에게 이윈론이 자리 잡을 여지는 결단코 없다. 캠벨에게는 정신적 작용력의 한계는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정말 멋진 독서법


이토록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저자가 젊은 독자들에게 주는 또 다른 유익함은 독서의 좋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캠벨이 조이스와 토마스 만 그리고 슈펭글러를 읽다보니 니체를 언급한 장면이 나오고 그렇게 니체를 읽는다. 니체를 읽으려면 쇼페펜하우어를 읽어야하고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킨트를 읽어야 한다. 칸트를 출발점으로 삼자니 매우 힘들다. 그리하여 괴테로 돌아간다. 조이스가 쇼펜하우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조이스의 시스템에서 쇼펜하우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슈펭글러의 사고 시스템과 조이스의 것이 매우 밀접하다는 점을 칼 융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이 모든 것들을 한데 버무리는 작업을 해내는 것이 캠벨의 독서방법인 것이다.


사실 동양의 고전을 읽을 때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중용을 읽다보면 대학, 논어, 주역 혹은 맹자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독서의 역량이 늘어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방식이 아니던가... 젊은 20대들에게 캠벨은 결혼 혹은 인생의 의미 뿐 아니라 진정한 독서의 방식과 그 가치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왕성한 독서력을 발휘할 수 있는 20대들에게 이 책은 매우 귀중한 깨달음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는다.

  


캠벨, 중용과 만나다...


  동양의 사상을 약간을 신비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점인 아쉬움으로 남지만 ‘인간은 신성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에게서 동양의 고전인 중용의 장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용에는 ‘지성여신’이라는 문구가 있다. ‘지극한 誠은 곧 神적인이다.’라는 말이다. ‘지성여신’이라는 문구 앞에는 ‘유천하지성, 위능진기성’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오직 천하의 지성이라야만이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誠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둘을 합치면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라야만 자신의 誠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고 그 지극한 誠은 곧 神적인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얼마나 조셉 캠벨의 이야기와 흡사한 말이던가...인간은 신성으로 가득한 것을 향해 나아간다는 조셉 캠벨의 말은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중 하나인 중용의 한 장구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아파치족의 이야기는 지극히 물권을 인정하고 있다. ‘모든 사물들은 살아있고, 그 사물들은 우리의 필요를 이해하고 있다’ 내용이 그것이다. 이는 사물을 인간이라는 방향에서 출발하여 사고한 것이 아니라 사물을 주체로하여 사고한 말이다. 중용에서도 물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 인권이 중요하듯이 물권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능진기성 위능물지성’이 그것이다. 천지인의 조화로움과 일원론을 주장하는 동양사상에서 물권의 중요성을 제기한다는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주장하는 서구의 사상으로는 설파하기 매우 어려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가지 면에서 캠벨은 우리의 젊은 독자들에게 많은 깨달음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지글러선생은 2007년에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한국의 서점가에 출간했도, 한 해 뒤 '탐욕의 시대'를 출간했다.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하 왜)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도 필독서로 추천을 할정도로 널리 알려진 책이다.

 

 반면 많이 읽히고는 있지만 '탐욕의 시대'는 '왜-'만큼은 아닌 듯 하다. 두 책을 모두 읽던 당시  '왜-'보다는 '탐욕의 시대'가 훨씬 더 의도를 전달하는데 성실하고 더 집중해서 쓴 책이 아닌가 생각했다. 같은 저자의 유사한 책으로 정보 전달력에서나 글쓴이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훨씬 더 효과적인 '탐욕의 시대'가 같은 목적을 달성하는데 상대적으로 약한 '왜-'보다 인지도면에서 뒤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8년                                2007년

 

 

두 책의 비교

 

                                           세일즈포인트   표시가      할인율    알라딘판매가     쪽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96,583         9,800원   30%      6,860원       201 쪽

탐욕의 시대                        :   11,138         15,000원  50%     7,500원       362 쪽

 

단순히 표면적인 비교로보아 '왜-'의 인지도가 '탐욕의 시대'보다 훨씬 압도적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수 있는 지표이다. 물론 알라딘 세일즈포인트로 본다면 출간 년도로도아 '왜'가 1년이라는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부인 할 수는 없다. 그러나 2007년에 출간된 책(왜-)의 할인율이 30%이고 2008년에 출간된 책(탐-)의 할인율은 50%라는 할인율로 볼때 현재 판매 지수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책은 즉, 인지도면에서 '왜-'가 앞세도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탐욕의 시대'가 그 목적을 전달하는데 훨씬 더 좋은 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 현실과 직면하게된다...왜 이런 기묘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고민거리가 없으니 별걸 다 고민한다 싶겠지만 사실은 '탐욕의 시대'가 '왜-'보다 훨씬 더 좋은 도서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나름대로 생각해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책의 이름이다. 세계의 절반이 굶주린다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하는데 매우 충실한 표지어는 누가뭐래도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다. '탐욕의 시대'는 '왜-'와 내용에서 거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이라는 용어가 매우 광의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진 용어라는 점이다. '탐욕의 시대'는 경제적으로 강력한 부를 일군 초강대국들이 아직 개발 중에 있거나 개발을 시작하고 싶어하는 국가들의 양털을 어떻게 깍아내는지 매우 잘 전달해주고 있고, 그 작용력의 원리를 훨씬 더 세부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이는 '왜-'와 그 내용면에서 큰 차이는 없다. 

 

 한마디로 '탐욕의 시대'는 세계의 강대국들이 약소국의 아이들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고개를 왜면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이 경제적으로 나아질 수 없는 환경속으로 자꾸만 밀어넣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훨씬 잘 표현되어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그렇다 치더라도 '탐욕의 시대'는 고등학교의 학생들에게조차도 비교적 덜 알려진 느낌이다. 이는 가독성의 차이로 설명할 수도 있다. 가독성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추천 대상서적으로서 중요한 참고지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독성을 따진다면 단연 '왜-'보다는 '탐욕의 시대'를 권하고 싶을 정도이다. 저자는 자신의 목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데 있어 '왜-'를 압축한 형태로 저술했다. 반대로 탐'욕의 시대' 안에는 좀더 많은 정보를 담아두어 독자들이 읽어나가는데 훨씬 유리하도록 했다. 왜 초강국들이  상대적으로 약소한 국가들을 그토록 못살게 구는가에 대한 설명이 더 자세하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인터넷 주문이다. 인터넷으로 읽을 책을 구매하다보면, 받아보고나서... 이게 아닌데...라는 경험을 한 번 쯤 하게 마련이다. 독자들의 리뷰가 있기는  하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같은 책에대한 평가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신간이라면 리뷰를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읽는데는 시간이 소요되고 읽는 독자 중 리뷰를 쓰는 경우는 그 비율이 많지 않아보인다. 하여 때로는 땡스투를 누를 기회도 없이 책을 사야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책방에가서 직접 책을 골라 선택하는 경우라면 분명 '탐욕의 시대'와 '왜-'의 상대적 우위는 아마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생각하는 이유이다.  

 

모든 면에서 보아 단연 알라딘 세일즈포인트에서나 할인율에서 단연 우위를 점해야 하는 '탐욕의 시대'를 50% 할인한 가격으로 내놓는 모습을 보니 이름도 잘지어야 겠구나 싶다. 또한 좋은 책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 섭섭한 마음에 뜻하지 않은 페이퍼를 쓰게되었다...

 

물론 제대로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책이 어디 이 책 뿐이랴...흔히 말하는 베스트셀러들 중 그 자격이 없는 책이 베스트셀러 행세를 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책의 가치 평가는 개개인이 하는것이지 객관적인 잣대로 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책 혹은 고전이라는 대접을 받는 책들은 많이 팔린다고해서 그 자격을 얻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만한 가치를 객관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리 인정받는데 어려움이 있는 책들이 여전히 많다. 독자들이 득서를 하는 이유와 그 목적이 서로 다른 것이 이유일까...여하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더 좋은 책이 밀려나는 것을 보니 안타깝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2-03-01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까요. 베스트셀러라고 다 좋은 책은 아니라니까요.
서점의 논리는 시장의 논리와 같아 기본적으로 잘 나가는 책을 밀어주지
좋은 책을 밀어주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좋은 책은 일케 독자에 의해 입소문을 타야한다는 거죠.ㅋ

차트랑 2012-03-02 00:00   좋아요 0 | URL
시장의 논리가 서점가에도 적용이 되다니...
좀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시장의 논리가 세계의 절반을 굶주리게 하는 이유인데...말이지요ㅠ.ㅠ
 

 

대학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잘 아시다시피 근대까지 거의 필독 항목이었다. 과거 시험이라는 점은 제쳐두고라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학문과 지혜의 근간을 이루는 필독서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특히 대학에 있는 8조목은 대학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차도 널리 알려진 자기 발전의 단계로 유명한 문구이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치고 대학을 읽지 않는 선조들은 없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대학의 소중한 가르침은 그 어느 현대의 학문 못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늘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주자라는 인물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다. 대학과 중용에 대한 주자의 해설은 그 어떤 인물의 주석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했고 조선의 학문은 결국 공자의 학문이라기보다는 주자의 학문으로 통했다. 특히 조선 중 후기로 오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더욱 뚜렷해진다. 

 

 

 

 조선의 성리학을 읽으면서 빠트릴 수 없는 항목은 양명학이 아닌가 한다. 깉은 뿌리를 가진 학문이면서도 기존 유학에게 철저하게 배타당하고 짖밟힌 학문이기 때문이다. 왕양명은 학지행합일을 강조하면서 실천의 중요성을 설파한 명나라의 왕수인은 국가의 재정이 흔들리자 불안해진 정권에 국가와 백성이 모두 함께 공생하는 실천적 제도를 주창한다. 그의 주장은 매우 현실적이었으면서도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위정자들이라면 기꺼이 박수를 보냈어야 했다. 그러나 기득권의 유학자들이자 정부의 관료들에 의하여 그의 구제책들은 철저히 묵살되고 그를 반대하는 기득권세력에 의하여 작위와 세습봉록마저 박탈당했지만 사후 신원되어 공자의 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안았다.


 조선에서처럼 유학을 지배의 철저한 도구로 활용하지 않았던 중국에서조차 그런 홀대를 받았던 양명학은 조선에서는 여지없이 사문난적으로 간주된다. 정치세력과 지배세력은 물론  왕권마저도 위협하는 신권을 획득한 조선의 선비들은 왕수인을 철저히 배격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왕수인의 양명학이 전파된다면 조선의 지배 근본이념에 혼란을 가져올 곳것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것이 그토록 두려웠던 이유는 무엇 이었을까...


백성을 위한 정치란 백성의 굶주림을 해소시키는 등, 현대적인 용어로 풀이하자면 복지정책을 실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노비를 가지고 막대한 토지를 이용하여 권력과 부를 이루고 있던 조선의 선비들에게 백성의 복지정책이란 곧 자신들의 손해를 뜻했다. 백성들이 글자를 알고 지식을 획득한다면 자신들의 부조리를 파헤칠 것이고 이는 백성들의 반란, 즉 선비양반들의 몰락을 가져올 수 있다는 불안감을 뜻하기도 했다. 자신들은 막대한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담시키고 있다는 부조리에 대한 반발은 절대로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조선의 노비는 대략 30%였다고 한다. 보수를 줄 필요가 없는 노비들의 노동력이야말로 노동을 하지 않던 조선 선비들에게는 부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군역 또한 마찬가지였다. 양반들은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았다. 노비와 천민등도 물론 군역의 의무는 없었다. 국가가 노비와 천민등은 국가의 보호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노비에게 군역을 지울 경우 자신들의 노비를 군역으로 내보내야 했는데 이 또한 선비들의 입장에서는 막대한 재산의 손실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양민이라고 부르는 농민들만이 등골이 휘어지곤 했는데 이를 견디다 못해 도망을 가곤했던 것으로 보아 그들의 설움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이러한 정치적 부조리를 개선하고자 설파하는 학문이 바로 양명학이었으니... 과연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 양명학이 그들에게 어떻게 다루어주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을 수밖에... 까딱 잘못하다가는 조선의 신분 질서는 물론이고 사회의 대 혼란을 예고할 수도 있는 학문이 아니던가... 이는 조선에 사문난적이라는 용어가 왜 탄생하게 되었으며 조선의 선비들이 그 사문난적을 사사하여 죽음에 이르르게 하면서 까지 그들 유일한 가치로서의 골수유학을 고집했는지의 이유가 된다. 이러한 이유들은 百家의 학문에 능했던 조선의 학자 정제두선생이 교과서나 교양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정제두선생께서 지은 논어해, 맹자설, 대학설, 중용해들을 연구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제두선생에 관한 연구는 활발하지 않으며 알라딘에서 검색되는 도서는 두어 종 뿐이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주자는 마치 막시즘의 마르크스와 같은 존재였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주자는 마치 한 종교 일파의 교주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조선의 신비들 대부분은 주자에 죽고 주자에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조선 사회의 현상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문난적의 출현이다. 주자의 해석과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기타의 모든 이론들은 사문난적이 되어 처결해야하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퇴계 이황과 경대승의 관계 그리고 송시열과 윤휴의 학문적 대립각이다. 


송시열은 주자 맹신자라고 해도 과언아 아니었다. 윤휴는 이치를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라고 설파했다고 한다. 그러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치부했고 결국 서인들은 윤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단초가 되고 만다.

 주자이론의 교조적 현상이 왜 위험한 것이었는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생각이 다르다하여 생각이 다른 타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시대적 비극은 주자라는 인물에 대한 교조적 맹신에서 오는 편협함이다. 


학문의 절정에 다다랐다고 해도 과언아 아닌 조선의 신비들이 생각이 다른 타자를 인정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아 넣어야만 자신들의 강건한 사상적 배경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은 그 사상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들어내는 역사적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마치 현대의 정치적 형태로 본다면 일당 독재의 공산당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주자의 사상이 지배계급이 하위계급을 통제하고 다스리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여 조선 중 후기로 접어들면서 중국에서는 이미 그 힘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여전히 주자학을 신봉하는 사회적 현상이 지속된다. 이는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자들이 백성을 통치하고 다스리며 기득권을 더욱 튼튼히 하기위한 결정적인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좋은 학문이라도 그 학문은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그 힘의 방향을 어떻게 지향하느냐는 사회적 비극이 될 수 도 있고 복지가 될 수도 있다. 대학을 읽으며 주의할 점은 바로 이러한 점들이라 생각한다. 대학의 문구인 친민(親民)을 신민(新民)으로 바꾸어가면서 사상적 바탕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정자와 주자의 학문은 동기 자체가 매우 불순하다하지 않을 수 없다. 제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 해도 편견과 오만에 사로잡히고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사상은 사상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며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왕부지의 대학이 주자의 주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많은 아쉬움을 많이 남긴다. 그러나 기타의 견해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양한 견해란 사회의 활력이다. 그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의식에 입각한 학문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주희가 전력을 기울여 경서들을 연구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할 수 있다. 

 특이 한 점은 기존의 유학적 관점과는 달리 그는 기(氣)를 구체적인 사물이라고 보고, 이(理)를 기(氣)에 종속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즉, 구체적인 사물인 氣를 벗어난 理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이는 김용옥선생의 기철학과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기와 이를 하나의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이유로 왕부지는 중국 유물론의 정점을 차지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중국의 ‘氣思想’은 1600여년에 걸쳐 중국의 유물주의 철학사를 완성하게 된다고 하는데 왕윤에서 출발하여 왕안석 그리고 왕부지를 거치면서 그 절정에 다다른다고 한다. 이는 중국의 氣論이 왕윤에서 싹이 터 왕부지에서 완성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의 사상은 모택동에게 커다란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러한 왕부지의 중화사상은 중국 공산당의 사상적 기반을 이룬다고 하는데, 이러한 왕부지의 중화사상을 이용, 중국은 주변 민족들을 중국의 속국 혹은 변방국으로 강제 편입시키거나 소수민족을 중국으로 강제 편입시키는 등 부작용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이 역시 타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불쾌한 일임에 분명하다. 과연 학문은 정치의 시녀노릇을 언제까지 계속해야하는 것인가 라는 회의감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운 이유이다. 

사정은 이러하지만 대학을 순수한 학문을 위해 일독하려하시는 독자들께는 왕부지의 해석이 주자의 큰 틀을 벗어나지는 않으나 독자들에게 대학의 또 다른 이해를 돕는데 일조하리라 믿는다. 공산당 선언도 그 순수한 의미에서 공부한다면 그 공산당 선언이 과연 어떻게 정치적로 이용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권력자들에게 부적절하게 이용당하는 사상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그 순수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사상의 순수성은 존재하지만 그 사상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자 한 엘리트들에게 그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2-02-27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야는 거의 지식이 없는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주되시기 바랍니다.

차트랑 2012-02-28 08:19   좋아요 0 | URL
저도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
기 철학분야는 이제 막 관심을 가진 정도에 불과하구요 ㅠ.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뇨고양이님

마립간 2012-02-27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철학 연구'가 마음에 드는데, 목차를 보니 내용이 방대하군요. (아니면 소개 정도로 끝나려나.)

2012-02-28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2-02-28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작하신대로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우 만족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의철학, 이의철학을 역사적으로 발생과정을 밝힌 책으로는
장입문의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철학이라는 것이...
한번 시작을 하면 대책이 없을 정도로 확산되는 성질을^^

낭만인생 2012-02-2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의 기철학을 잘은 모르지만 제가 알기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쟁이 아닌 듯 생각이 됩니다. 앞으로 좀더 많은 기철학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차트랑 2012-02-29 00:37   좋아요 0 | URL
어구 낭만인생님
저도 기철학에대해서 관심을 가진지 얼마되지 않아
아직 잘 아는 바가 없답니다.
그러나 좀더 공부하게되면 페이페를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낭만인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