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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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마이클 샌덜의 정의에 대한 고찰이다.  저자 스스로 정의를 내리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파장이 생각 이상으로 커서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가 그만큼 정의를 원하고 갈망한다는 뜻과도 같기 때문일까 생각을 하니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그리하여 한국의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지 읽어보게 된 것이다. 이미 읽어보신 독자들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정의를 정의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그러나 많은 독자들은 정의를 논하는 일는 정의로운 일에 속한다고 생각 할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샌덜이 말하는 정의는 무엇이고 마이클 샌덜의 정의에 대한 고찰이 이토록 대한민국의 서가에 높은 파동을 일으키며 독자들의 반향을 몰고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1. 정의란 공리와 행복의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것인가
2.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인가 (자유시장 지상주의 Vs 자유주의적 평등주의)
3. 정의란 미덕과 공동의 선을 고뇌하는 것인가   


370여 쪽에 달하는 저자의 책이 주는 정의에 대한 핵심적 접근은  위의 3가지로 요약 할 수가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실증적 사건이나 가설적인 사건을 모델로 설정하고 ‘정의’에 대한 각각의 접근 방식, 즉 서양 철학자들의 의견을 투영시키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같은 주제에 대한 상이한 주장에 대해 철학자들을 등장시켜 내용을 전개시키는 방식이다. 

우선, 공리주의적 접근에 대해 언급하자면 핵심 인물인 벤담이 주장하는 공리주의는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라 설정하여 이론을 전개시키기 보다는 인간행위의 가치를 수치화하여 설득하려' 하고 있다. 이는 각각의 가치들이 가지는, 그리고 각 개인이 부여하는 가치의 질적 차이를 무시한 결함이 있다. 결과적으로 모든 가치를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시켜 환산해내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자유주의자적 입장은 공리주의적인 결함을 어느정도 극복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이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적인 삶의 절대적인 덕목이냐하는 질문과 만날 때 문제가 될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모든 사람 각자가 가질 수 있는 이견을 수용하는 자세를 지지한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즉 도덕적, 법적, 윤리적, 종교적인 덕목들을 포괄하는 좋은 삶의 추구를 위해서 함께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거창한 제목에 비해서 결론은 지극히 평범하다 하겠다.

제목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하고 부담스러운 추를 달고 있지만 제목처럼 사실상 정의에 대한 정답을 던져주려고 시도한 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서구인들이 정의를 어떻게 고민하는가 하는 정도의 소개서라고 보는 것이 어쩌면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서구인들이 고민하는 방식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서구인들의 사고의 근간이 되는 철학을 알면 훨씬 더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려울 수 있는 부분을 쉽게쓰려고 노력한 흔적 덕분에 철학자들의 배경 사상을 충분히 알지 않아도 읽어나가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한국 독자들은 왜 이토록 열광하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평범한 결론에 도달하는 이 책이 올해 이토록 한국인들에게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사실은 이것이 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면으로 마이클 샌덜은 동양철학에 근거한 정의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동양의 철학을 논외로 하고 정의를 다룬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 성설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이 샌덜의 한계라면 애써 그의 노고를 깍아 내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첫 째로, 한국의 토론 문화의 부재이다 -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실제로 토론 문화에 온전히 적응한 한국인들은 드물다. 약한 기반을 가진 한국의 토론문화는 마이클 샌덜과 같은 강의에 단연 매료될 수 밖에 없다. 그의 저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에게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부담스러울 가능성이 높은 이 책의 형식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생각하게 하는 매력을가지고 있으므로 충분히 그 단점을 상쇄시키고 있다. 한국의 토론 문화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요즘의 100분 토론은 무척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초창기 100분 토론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정말 토론의 ‘토’자도 모르는 분들이 나와서 토론을 하는 모습이란...내내 쌈박질만 하다가 100분 다 보냈다. 그런데 지금의 100분 토론의 태도는 전혀 그 양상이 다르다...

둘 째로, 이 책은 이런 점에서 고뇌 권유서이다 - 우리에게 정의론 논하기 위해서 이런 고민을 해보시라는 권고의 책인 것이다. 특히, 우리가 자주 고민하지 않던 방식으로 말이다. 문제의 핵심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주장과 공리주의의 벤담, 존 스튜어트 밀의 이론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이마뉴엘 칸트의 철학과 존 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존 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비판적 입장의 ‘로버트 노직’도 알면 훨씬 더 유익한 독서가 될 수 있다. 또한 미국의 경제 구제 금융에 대한 미국인의 반응도 알고 있으면 더 좋다. 

  여기에도 우리에게 한 가지 문제점은 있다. 등장 인물들의 철학적인 사고를 잘 알지 못할 때 오는 문제점이 바로 그것으로, 책을 무작정 읽는 것은 어느 화가의 작품을 보고 그 화가의 사상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유사한 행위이다. 몇 장의 그림으로 화가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며 오히려 반대로 화가의 철학적 배경을 충분히 이해한 후에 비로소 그의 작품을 온전하게 이해 하는 것이 순서로서 올바른 경우이다. 이 역시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셋 째로, 우리가 가진 교육 문화적 배경이 한 이유일 수 있다 - 우리 나라는 불교가 먼저 토착화했고 이어서 유교가 한 시대를 이끌어 온다. 고려의 광종 때 부터 실시한 과거제는 유교의 경전에 대한 이해와 경전의 암기테스트를 시행하면서 관료들을 뽑았다. 불교의 전파는 불교의 경전에 대한 암기 중심의 교육이나 마찬가지였고 유교 중심의 과거제 역시 암기 위주의 교육을 양산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주입식 암기교육은 이미 만들어진 교과서의 내용을 파악하는데 주력하는 교육 시스템이다. (물론 사고가 발전하려면 기초적인 지식에 대한 암기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은 자신의 주장을 피력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윤리적인 모든 측면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이미 잘 깍아진 틀 안에서 행동하고 사고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규범이란 이럴 때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화적 환경은 우리가 정의에 대해 스스로 고뇌하고 의견을 주고 받으며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원동력에 장애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론 수업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우리 문화적 이유들은 마이클 샌덜이 정의에 대해 고뇌해보라고 암암리에 부추기는 이 책을 통하여 신선한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넷 째로, 한국 학생들의 사유에 대한 '공적 힘'의 개입이 있었다 - 사실상 이 책에서 고뇌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각각의 예와 가설들을 우리 스스로 해본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공개적으로 모두가 뛰어들 수 있는 장을 만나기란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정치적인 이유로 학생들의 사유와 그 행위를 공적인 힘을 빌려 규제한 탓도 큰 이유가 될 것이다. 자유롭지 못한 집회와 시위의 제재가 좋은 예이다.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행동과 사고는 위험한 것이 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은 사회의 현상을 감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샌덜의 이 책은 ‘정의’에 대해서 다함께 고뇌해보자는 뜻을 담고 있다. 함께 고뇌해보자는 뜻의 이 책이 이토록 한국의 서점가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키는 것은 현대의 사회적 현상을 독자들이 감지한 탓일 수도 있다. 그만큼 우리의 현대 사회를 정의롭지 못한 사회라 보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정치적인, 경제적, 그리고 모든 사회적인 정의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장 큰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늘 그렇듯이 사상가들의 철학은 시대가 혼란스럽고 불안할 때 등장했다. 하룻밤 사이에 땅의 주인이 수시로 바뀌며 혼란의 혼란을 거듭되고 도덕적인 타락이 극을 이루던 시절 공맹사상과 노장사상, 그리고 제자백가의 사상과 철학이 등장했다. 예수의 등장 배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이클 샌덜의 저서가 새로운 정의론을 주창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위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이상은 샌덜의 정의론이 왜 우리사회에 이토록 큰 파장을 일으키는가에 대한 이유들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마이클 샌덜의 정의에 대한 고찰이 이토록 대한민국의 서가에 높은 파동을 일으키는 이유는 보면 정의란 한 사회의 도덕적, 관습적, 종교적, 철학적,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보다 정의로움에 대한 고뇌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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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2, 남들은 그렇게 말했다 -1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그날은

그렇게 비가 억수로 쏟아진 것은 아닙니다.

모처럼 

기억조차 나지 않는 몇 년 만인지

나는 먼 길을 떠나는 행인이 되어 

아직은 어린, 콩콩 뛰는 가슴을 짖 누르며

엄마의 손을 잡고

읍내에서 가장 높다하는 백화산아래

나즈막히 자리 잡은 이모댁에 나들이 갑니다.




몇날 며칠을 기다렸던가요.

이 날이 오기를..

딱히 어딜 가려한다기 보다는

다만 

집을 떠나

버스를 타고

먼 어느 곳으로 가게 된다는 기대감과

아무래도 전기가 들어오는

그 도회지는 왠지 마냥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또 가보고 싶던 곳..

그 곳이 늘 그리웠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고등학생인 형의

모자 한 가운데서 반짝이는

누런 색갈의 글씨를 잊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태워줄 버스가 딱히 언제 올거라는 것 보다는

버스 정거장 옆,

그 구멍가게의 한 입에 넣기가 힘든 누깔사탕과

멋진 야수 모습의 해태가 그려져 있는

흰 종이 껍질속의 하얀 껌가락 하나.

굳이 말하지 않아도

껌 한가락을 작은 내 손에 쥐어주실

나의 어머니.




왜냐면 

시장에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버스정류장 앞 구멍가게 앞에서

땅바닦에 데굴데굴 굴러가며 떼쓰고 울먹이며 따라가는 날은

꼭 껌 한가락을 얻어가지고 왔으니까요.


그러나 오늘 나는

땅바닥을 뒹굴며 따라온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태워줄 버스가 나에게 기약을 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나는 갈 곳을 찾아

여기에 와 있습니다.




이런 날은

평소보다 들에 핀 꽃들이

유난히도 이쁩니다.
 

가을 녘이니..

밥풀을 두어개 입에 물고 있는  꽃며느리 밥풀은

세상에서 가장 이쁜 분홍입니다. 

부드러운 달뿌리풀은 종아리를 간지럽히고

하얀 자신의 꽃잎 속에 푸르름을 머금은 해국은 그 빛이 참 예지만

마음을 시리게도 합니다.

갈대, 억새풀, 실새풀은 보기에도 아마도 영원한 기억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를 스치듯 지나치곤 하는

고추잠자리, 나 만큼이나 장난꾸러기입니다.

“너희는 어대 갈데가 없나, 왜 자꾸 나만 따라오는 건데?”

소리도 질러봅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바다도 보입니다.

저 먼 곳엔 누가 살고 있을까요.

고무신을 벗어

귓가에 대면

찡-- 하고 귀를 간지르는 그 소리는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아마도 세상이 돌아가는 소리겠지요.

드디어 버스가 오면

실실 실소를 머금으며

참을수 없는 기쁨이 나의 얼굴에서 터져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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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침묵    


                너...

                불빛 吐하며

                겨울이 온몸으로 일어서고

                삭풍 내달리는 저 끝없는 들판에서는

                다만 그렇게 침묵이 흐른다.




                남 모르게 너는

                긴 어둠 삼키는 장승이 되어

                말없이 눕고 말았지




                삭풍 소스라쳐 멀리 내달리는 싸늘한 들녘에 앉아

                꿈틀거리는 입술로

                왜 그래야  하는지 나는 너에게 차마 물을 수는 없었어




                내 풀섶 손가락 떨며

                너의 슬픈 목줄기를 더듬거릴 때도

                다만,

                절절이 끓는 몸짖으로

                다시는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네 이름을 애끓도록 불렀을 뿐.


                아...

               무리 짖는 겨울의 푸른 새벽 月光앞에 서성이다

                홀로 떠 가는 네가

                멀리 하늘로 날 때,

                끝내 너와 함께 묻어버렸을 言語가 있다.

                

                지난 날

                내 어깨를 덮어 주던 영혼의 목소리로

                한 웅큼 각혈하는 너의 금빛 언어들이 터진다.

                그러나 그 금빛 언어들로

                大地에 부딪혀 내가 쓰러진다 해도

                나는 좋을 것이다




                白雪이 되리라

                白雪이 되리라

                이리저리 휘 날다가

                네가 있을 그 곳에서 한없이 녹아 내리는

                白雪이 되리라




                白雪이 되리라

                白雪이 되리라

                서리 서리 저 들판에 누운 이름,  

                영원한 나의 그 이름을 부르며

                겨울 침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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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아프리카사 - 우리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아프리카의 진짜 역사 외우지 않고 통으로 이해하는 역사
김시혁 지음 / 다산에듀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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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슬픈 아프리카의 역사...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진 분들께는 도움이 많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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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아프리카사 - 우리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아프리카의 진짜 역사 외우지 않고 통으로 이해하는 역사
김시혁 지음 / 다산에듀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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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개 국의 10억인구, 지구 최초의 대륙 아프리카...그들에게 지난 수백년 간 슬픔이 닥쳐왔다. 그리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 만 같다..과연 그들의 슬픔은 언제 끝이나려는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느낀 점이 바로 그들의 슬픔은 과연 언제 끝이 날까..하는 의문이었다. 

지구상의 최초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그리고 케냐가 있는 땅은 현재까지 인류 최초의 화석이 발견된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류는 유럽으로, 아시아로, 그리고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로 걸어걸어 대 장정길에 오른다. 거슬러 거슬러가면 인류의 조상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곳, 아프리카...그 아프리카는 1415년 폴투갈의 선박이 처음으로 아프리카에 도착한 이후로 진정한 비극이 시작된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서구의 아프리카 수탈이 자행되고 급기야는 노예사냥에 까지 이르러 저 멀리 아메리카에까지 끌려가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열강들은 아프리카를 자로 잰듯이 땅을 갈라 놓는다. 협력하는 부족들은 갈라놓고, 서로 갈등하는 부족들은 한 구역에 몰아넣으며 그렇게 아프리카를 식민지화 한다.  

그리고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아프리카는 독립을 하기에 이르른다. 그렇게 500여 년동안 아프리카는 열강들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심지어 셀수도 없는 목숨마저도 빼앗긴다. 그렇게 아프리카는 500 여년간 수탈당했으며 여전히 수탈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럽의 부국들은 아프리카에서는 물론 아메리카에서도 수많은 재물과 인력 그리고 목숨을 빼앗았다. 아...슬픈 일은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끌려간 원주민들의 수는 5천만명에 이르른다고 한다... 현재 남한의 인구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는 비극을 경험했다..  

현재 아프리카의 인구 절반은 1달러 미만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할 정도로 극빈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들이 이토록 문맹, 빈곤, 기아 그리고 질병에 허덕이고 있는 이유는 바로 열강들의 수탈의 결과이다. 겉으로는 문맹을 퇴치하자고, 굶주림을 물리치자고 식량기구도 만들었지만 실제적인 도움은 되지 못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지원한다면 명목으로 아프리카로 들어가는 돈의 열배가 넘는 돈을 이자로 내놓아야 하는 아프리카...자본금이 부족하여 기간 시설을 만들수도 없다. 이자 내기에도 급급하다. 외국인 자본의 투자는 미약하고 투자를 했다손 치더라도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없다. 

도움을 주기는 커녕, 관세를 철폐하라고 압력을 가하고, 농산물 가격을 덤핑으로 거래하여 아프리카의 농민들이 자립을 할 수 있는 근간을 빼앗아 버리고 있다.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아프리카가 저렴한 유사 의약품을 인도에서 수입하자 이를 국제법으로 제소하여 수많은 에이즈 환자들이 죽어가도록 했다.        

입으로는 아프리카를 위하지만 행동으로는 철저히 아프리카를 더 괴롭히고 있는 것이 열강들의 현실이다. 어쩌면 현재는 더욱 철저한 금융지배를 통하여 아프리카를 보이지 않는 식민지화 시켜버렸는지도 모른다. 현대의 식민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자본과 경제력으로 지배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이다. 세계의 구호단체들은 아프리카를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보여주기 위한 시위용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안으로는 더업는 수탈을 계속하고 있다. 앞으로는 좋아지겠지...소망해보지만 현재의 구조로는 절대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프리카는 없다. 

수백년간 고통을 주었고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고 아프리카가 스스로 일어 설 수 있도록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오늘 이시간에도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에 이르는 아프리카의 비극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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