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루비콘 강을 건넌 후,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고 말했다고들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는 당시 그가 분명 건강했다는 이야기다. 체력이 빌빌해가지고서야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니 말이다. 결단력 있게도 루비콘 강을 건너던 그 나이는 대략 50세 정도였다.

 

 

그러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 강을 건너던 나이도 되지 않아 나는 엉뚱한 ‘아케론’을 건너고 있었다. 사공 카론에게는 금화 한 닢을 주어야 노를 저어준다고 한다. 나는 ‘레테’에 다다를 즈음에 엽전을 주겠노라 구라를 치고는 배에 올랐던 것이다(내게 금화가 있을 리가 있나..). 그런 줄 알고 노를 젓던 카론은 내게 금화가 없는 줄을 눈치 챘던지 뱃머리를 돌려 나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금화 없이는 어림도 없다면서 말이다 (죽더라도 최소 엽전 한 푼은 있어야 한다니...). 이 이야기는 수년 전, ‘레테’를 목전에 두고 있던 나 스스로의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요즘 온 나라에 퍼져있는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이 소개하고 있는, 직접 큰 효험을 본 냥반들이 주장하는 고지방 식단에 대한 찬사는 실로 대단했다. 마음껏 동물성 지방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고기를 맘껏 먹고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니 오죽이나 좋겠는가. 그럴 수밖에, 그 정도로 효과가 좋다면 나라도 그러겠다 진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매체는 고지방 식단에 대한 우려를 전문가 집단을 통해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대번에 체험자들로부터 즉각적인 반응이 되돌아온다. 요즘 쌀값이 현저히 떨어지니 쌀 소비가 줄어드는 현실을 우려하여 탄수화물의 섭취를 권장하느라 고지방식단을 헐뜯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어느 쪽 이야기가 진실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자도 전문가도 아니다. 고지방 식단으로 효험을 본 낭반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팩트를 전하는 것이고, 전문가들은 또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견해를 피력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다만, “안 해봤으면 말을 말어~!”, 혹은 “니들이 게 맛을 알어?” 라고 외치던 어느 아제들이 잠시 떠올랐다 사라진다.

 

 

레테를 건너기 직전에 뱃머리를 돌렸던 나로서는 건강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카론을 기쁘게 해줄 금화도 한 닢도 마련해야하고 말이다. 하여 이런 저런 서적들을 뒤지고 뒤지느라 그렇게 몇 년이 흘러 버렸다. 건강 관련 지식을 몇 년 뒤져 읽는다고 깨달을 바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렴풋이 건강한 신체를 위해 해야 할 기본적인 사항들을 약간 알 수 있었다.

 

 

요즘 트렌드인 고지방 식단이 그 중 하나이다. 참고 서적들을 활용한 나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강에 관심이 있는 대다수 사람들도 알고 있듯이, 동물성 지방을 소화시키는 핵심은 담즙이라고 한다. 「간담」이 기타 장기보다 더 크고 튼튼한 분들은 이 동물성 단백질 식단이 상당히 유리하다. 쉽게 말해 고기를 잡숫자마자, 충분한 량의 담즙 산을 바로바로, 팍팍 쏴드리기 때문이다. 배불리 잡숴도 고지방을 분해하고 소화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더우기 간담이 좋으신 분들에게는 동물성 단백질이 기운도 훨씬 더 나게 해준다. 이게 죄다 가장 많은 량의 담즙을 아낌없이 쏘아줄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 간담이 탁월한 분들의 홍복이 아닐 수 없다. 간담이 크니 흔한 말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오는 것은 일도 아니고, 담대하기로는 말로 다할 수가 없는 분들이다. 이런 분들은 얼마든지 고기를 즐기셔도 좋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렇게 간담이 좋으신 분들은 고기를 잡술 때, 채소를 많이 곁들이는 것은 되려 도움이 되지 않다. 「내경內徑」과「동의보감」에 ‘산수신산酸收辛散’ 이라는 말이 있다. ‘신 맛은 거두어들이고 매운 맛은 발산시킨다’(흩어지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무엇을 거두어들이고 무엇을 발산시키느냐 하면, 바로 살이다. 채소가 신 맛을 가진 것은 아니나 채소는 간기능을 향상시킨다. 간은 산(酸) 기운을 장(藏)하고 있는 장기(臟器)이다. 그러므로 채소를 많이 잡술수록 간 기능이 더욱 강해지게 된다. 간 기능이 가뜩이나 좋은 냥반들 몸 안에서 채소는 간 자체에 산기운을 더욱 증강시킨다. 몸 내부를 순환하도록 되어있는 기(氣) 흐름, 즉 오행 불균형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체중이 당연히 늘어날 수밖에 없다. 강해진 간이 그야말로 원치 않는 살을 하염없이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흔히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는 분들이 계시다. 요즘은 공기만 마셔도 살이 찐다고들 할 정도로 체중 증가가 염려되시는 분들도 계시다. 이런 분들은 결코 채식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분들로서, 간기능이 가장 강한 상태로 태어나신 분들이거나 평소 간을 강하게 하는 음식을 많이 잡숫는 분들일 가능성이 높다하겠다.

 

 

간담이 가장 강한 분들이 가진 또 다른 특징은 폐기능이 가장 약하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운동회 때 달리기 꼴찌를 도맡는 분들로 폐기능을 강화시키는 음식을 드시면서 반드시 운동을 겸해야 하는 분들이다. 특히 간이 좋은 분들은 땀을 많이 흘려주어야 몸이 가볍고 상쾌한 기분으로 일을 할 수가 있다. 비위가 가장 약한 분들은 땀을 많이 흘리는 것이 되려 좋은 기운을 상하게 하는 이치와 반대인 경우이다. 운동은 만인 건강 필수조건이지만 말이다.

 

반대로 비위가 약한 분들은 동물성 고지방을 소화시킬 수 있는 담즙이 적다. 다른 장기에 비해 비위가 가장 약한 분들은 간담의 기능도 상대적으로 약한 편에 속한다. 지방이 풍부한 삼겹살을 다량 섭취할 경우 소화가 잘 안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런 분들은 건강 상태가 약할 때에 고기를 굽는 냄새만 맡아도 속이 미식거리거나 식욕이 저하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비위가 가장 약한 분들이 많은 량의 고지방 식단을 지속할 경우 병을 불러 오는 수가 있다는 점도 아울러 밝혀두고 싶다.  

 

사실, 우리는 계절에 나는 음식을 골고루 먹어주면서 운동을 적당량 해주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랄 수 있다. 음식 불균형은 분명 신체 기운 불균형을 초래하게 마련이다. 소신을 가지고 골고루 잡숫고 운동하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더라고 강력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이지 싶다. 아, 음식은 가능하면 따듯하게 잡숫기를 또 강력 권해드리고 싶다. 몸이 차가워지면 병기가 침범하기 좋은 조건이니 말이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주절대려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레테를 목전에 두고 되돌아왔던 이의 관심사라 여겨주시고 양해해주시기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첨언 1:

조사 「-의」자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어느 분께서 부단히 주장하시는 덕분에 일리가 있다 여겨 시도해 본 것이다. 그러나 쓰다보면 「-의」자가 나도 모르게 자동으로 들어가곤 했다. 다시 글을 고치곤 했다. 더불어 어쩔 수 없이「-의」자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음을 알겠다. 또한 그분은 한자어를 순수한 우리말로 사용하는 것의 아름다움도 꾸준히 주장하신다. 이 점은 「-의」자를 사용하지 않는 것 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언어는 수용성이 있으며 늘 가변적이다. 친숙함이란 정말로 판단을 매우 흐리게 함도 알겠다.

 

 

첨언 2 :

이 글을 읽는 지인의 지적이 있었고,

동물성 단백질과 동물성 고지방을 일괄처리하는 오류를 범했음을 인정하여 필요 부분을 수정하면서 더불어 약소한 첨가를 병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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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의 서재 글에 대한 독자의 반응 란에는 “좋아요”라는 항목이 있다. 흔히 찬(贊)이 있으면 반(反)이 있기 마련으로 ‘싫어요’가 있을 법도 한데, 알라딘의 항목에는 ‘찬’은 있으되 ‘반’은 없는 경우이다. ‘찬’이 있다고 꼭 ‘반’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찬’을 하지 않은 나머지는 저절로 ‘반’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니어서 침묵은 경우에 따라 ‘찬’으로도 ‘반’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고 중립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찬’과 ‘반’을 함께 묻는 경우와 ‘찬’만 있고 ‘반’이 없는 경우는 결코 같은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전자는 양 극단 중 어느 하나를 반드시 도출해내야 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방법일 것이다. 반면 후자는 ‘반’할 줄을 몰라서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요긴하다.

 

이는 알라딘이 잘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알라딘의 알라디너에 대한 배려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일상에서는 항상 상대에 대한 배려를 앞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직격(直擊)은 불가피한 전쟁에서나 사용하는 극단적인 방법이라고 여기는 이유이다. 직격하는 글은 흔히 상대방에게 직접적이고 깊은 심적 내상을 주거나 정도가 심하면 사람을 해치기 때문이다. 이는 언론을 통해 종종 접하는 비극적인 경우이다. 명분을 가진 내용의 글이 방법상의 문제로 그 누군가에게 불면의 밤을 선사한다면 이것은 정녕 글쓴이가 원하는 바는 아닐 것이라 여기는 바이다. 그러하기에 불가피한 전쟁에서나 사용하는 것이 직격인 것이다.

 

 

묵공은 어떻게 보면 전쟁의 달인이었다. 그의 전쟁 솜씨만 놓고 보면 얼마든지 병가(兵家)라 할만하다. 그러나 묵가(墨家)를 병가(兵家)라 하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묵공은 직격(直擊)을 우선으로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불기피한 상황에서 만이 직격을 이용했다. 그의 사유는 겸애(兼愛)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유가는 묵공의 겸애를 인의를 모르는 처사라고 비난했지만 나는 묵공의 가르침을 공경한다.

 

목적이 정당하다하여 모든 방법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녕 뜻을 이루려 하는 사람이라면 바르고 정당하며 가급적 다수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작 핵심은 직격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려는데 있는 것이니 말이다. 명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이 무기탄하다면 누군가의 말처럼 방법론에서 자신만의 쾌감을 느끼는 것에 그치고 마는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이런 경우를 두고 분노의 배설이라고도 했다. 좋은 명분을 가지고 시작했으나 마치 욕구를 배설하는 느낌을 주어서는 원하는 바를 얻기가 어렵기에 하는 말이다.제 아무리 명분이 있다고 하나 매사에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원합의체’란 공산당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니 말이다. 공산당이 아닌 이상 안건에 다수의 동의를 얻고자 힘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중국의 한 대(漢代)에 내가 좋아하라는 음양가의 학설로 경학을 이해하려는 경학자들에 불만을 품고, 다른 종류의 경학에 시동을 걸었던 학파가 있었다. 이를 ‘고학’ 즉 ‘고문학파의 경학’이라 한다. 이들은 음양가를 괴이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라 칭했고 유흠이라는 학자가 제창했다고 한다. 이 중 대표적인 인물이 양웅(楊雄)과 왕충(王充)이라는 냥반들이다.

 

(주역에 접근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양웅과 왕충의 접근법을 공부한다면 주역을 훨씬 더 풍성하게 접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 양웅이라는 냥반은 중국철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혁명가로 간주되는 인물이다.  또 내가 좋아하는 노자(老子)를 ‘인의를 배격하고 예절과 학문을 멸절한다’하여 노자를 멀리했다. 또한 장자와 양주를 평하기를 ‘제멋대로이고 법도가 없다’ 고 하였고, 또 내가 겁나 겁나 사모하고 있는 묵자와 안영(晏子)을 ‘예를 폐기했다’고 했다. 신불해와 한비는 ‘험악하고 교화를 무시했다’ 고 평했다. 신불해와 한비는 개인적으로 친근한 인물들이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으나, 위에서 언급한 노장과 양주 그리고 묵자와 안자등은 양웅의 견해에 사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웅이 남긴 말씀 중 옳거니 하는 금쪽같은 말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書不經非書 서불경비서

言不經 非言 언불경 비언

言書不經 多多贅矣 언서불경 다다췌의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글이 경에 부합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요

말이 경에 부합하지 않으면 말이 아니다

말과 글이 부합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아도 군더더기이다

 

 

이 말을 다시 의역해본다면,

 

글을 다스리지 않으면 글이 아니요

말을 다스리지 않으면 말이 아니다

말과 글을 다스리지 않으면 제 아무리 많다 하더라고 해로운 것이다.

 

췌(贅)라는 말은 ‘쓸모없다’ 거나 ‘불필요하다’ 또는 ‘군더더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풍우란은 한 발 더 나아가 췌(贅)라는 말을 ‘해롭다’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풍우란의 해석에 적극 동감하는 바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간혹 마주하는 직격하는 모습의 글을 보면서 뜻을 이루기에 더 가깝고, 거칠기 보다는 세련미와 더불어 배려를 갖춘 글을 기대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제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퇴근을 했을 것이다. 중추가 내일 모레이니 말이다. 즐거워야할 중추에 증후군이라는 접미어가 뒤따르는 요즘이다. 때로는 한 가정을 위태롭게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중추인 듯하다. 알라디너분들께서는 부디 즐거운 중추를 맞이하여 서로 반갑고 고마운 중추가 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부디, 몸은 힘이 드시더라도 마음은 즐거운 추석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토록 노래를 잘 부르는 오연준님,

아직 치아도 다 갈지 않은 나이 같은데, 어찌 이리도 노래를 잘 무른단 말이오??

그대의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가 찌든 내 마음의 때를 올올이 벗겨주는 듯 하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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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모,

그러니까  Jean philippe Rameau 라는 냥반은 프랑스 태생으로 베토벤의 선배님 되시는 냥반이다.

독학으로 화성의 기초를 연구, 확립했다고 한다. 하여튼 이 하나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일은 해낸 것인데,

정말 흥미로운 음악도 작곡을 했다.

 

수입] Philippe Herreweghe (Rameau : Les Indes Galantes)(Digipack)
Philippe Herreweghe / Harmonia Mundi / 2000년 6월

 

(다양한 버전으로 감상하는 것이 고전음악의 매력이지만

사적으로는 딱 이음반을 소장하고 있고 이것으로 끝이다)

 

대표적인 곡이 바로  Les Sauvages 라는 곡이다. 글자 그래도 옮기면 야만인 혹은 미개인이다.

곡의 이름을 이렇게 붙인 의도가 무엇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서구인의 시각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저토록 아름다운 춤을 추는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미개하다 생각한 모양이다.

 

나중에 라모는 이 미개인 혹은 야만인이라는 제목의 음악을 재활용하여

프랑스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Les Indes galantes 라는 예술을 만들에 낸다.

당대 고전 음악에서야 솔직히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밀리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 싶은데....

 

어째거나 라모는

음악의 제목인 '야만인' 혹은 '미개인'을 갑자기 '우아한'으로 탈바꿈하는 대 이변을 연출해낸다.

더더욱 놀리운 일은 '우아한'이라는 말 뒤에 붙은 '인도'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음악의 제목이 야만인에서 위대한 인도의 제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개다가 아메리카의 원주민을 의미하던 음악이 인.도.로 말이다.. ㅠ.ㅠ.

많이 헷갈린다 정말

 

이쯤하면 라모가 처음 붙인 제목인  Les Sauvages을 자연인 으로 번역하는 것은 어떨까..

인간이지만 정녕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모습에 감동한 작곡가 라모 말이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에 영감을 얻어 곡을 쓴 라모를 상상하게 된다. 

 

또 어째거나 프랑스 내 라모의 인지도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지만

한국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이지 싶다

불구하고 꾸준히 음반이 들어오고 있는 것을 보면 결코 음악사에서 홀대할 인물이 아님에 틀림이 없다.

  

다음의 영상에서 보듯이 원주민들이 춤을 추는 장면을 재연했다.

 

 

1) 약간 느린 버전

 

 

 

 

2) 음반과 거의 비슷한 속도의 영상물

 

 

또 어째거나 무더운 여름을 잠시 잊게 해줄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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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8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23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붕의 등뼈 푸른사상 시선 7
박승민 지음 / 푸른사상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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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시(詩)를 읽는 것은 고전을 제대로 읽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일인이다. 시에 대한 느낌을 적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동안 감히 시집에 대한 리뷰를 남겨본 적이 없는 이유다. 그러나 「지붕의 등뼈」는 왠지 특이한 느낌을 주는 시집이다. 시집에서 느끼는 시인의 스타일과 (산문형식의 시를 종종 쓰는 작가이다, 낮선 장면은 아니나 시어들의 아름다움 덕분에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읽었다) 시는 사적인 기록으로 남기고 싶도록 충동질 한다. 정말 묘한 시집이고 묘한 일이다. 해서 두서도 없고 일관성도 없는, 나아가 가소로운 느낌을 가소로운 리뷰로 남기고 싶을 뿐이다.

 

하여 몇 편의 인상적인 시를 중심으로 적고자 하는 이 리뷰는 시인에게 무척이나 무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시인의 독.자.라는 안.전.지.대.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외람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의 너그러운 관용을 바랄 뿐이다. 

 

시집은 120쪽, 결코 두터운 것은 아니나 제목은 마치 무언가 체중계에 올려놓기도 전에 묵직하게 전해오듯, 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한다. 누구의 무게감일까, 그 삶이 고단하고 앙상하며 성기고 마른 어느 삶을 연상시킨다. 등뼈의 주인이 누구든 간에,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 읽지는 못하겠구나 싶다. 더불어 그 고단한 등뼈를 독자의 가슴으로 바라보고 어루만지며 느끼고 공명하고자하는 마음이다.

 

첫 번 째의 시, 「십칠 나한상(羅漢像)」은 그러나 도리어 이런 나의 등을 위로하듯 가볍게 두드려준다. 마치 나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격려하고 있다. 경쾌하고 맑으며 사뿐하다. 그런데 이 냥반, 끝내 내 가슴을 한 대 퍽, 하고 날려버린다.

 

.

.

.

나도 그 옆에 종이 방석 하나 깔고

한 백년 쯤 앉아있고 싶은데요

.

.

 

 

                 「십칠 나한상(羅漢像)」 중

 

 

종이 방석에, 한 백년 쯤 앉아 있고 싶댄다... 시인 옆에 나도 그렇게 한 백년 앉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했다. 가슴이 먹먹하다. 이렇게 몇 방 얻어맞으면 결국 나도 피멍이 들겠구나..,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시인의 가슴과 비슷해 지겠지.

 

그리고 한 칸을 건너 뛴 시, 「메모」에서 시인은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 한다.

 

.

.

.

 

생(生)이 비루하고

때로 지하에 떨어지는 철렁함이

매 끼니마다 찾아온다 해도

꽃은 어느새 날아와 그 자리에 피었다

 

마누라가 버린 자식새끼를 바라보는 눈으로

나는 이 세상을 바라보겠다

.

.

.

나 없어도

나 앉았던 자리에 꽃이 피고 눈이 내리는 쓸쓸함에 대해서

아니, 그 아무렇지도 않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다.

 

                         「메모」의 일부

 

 

“꽃은 어느새 날아와 그 자리에 피었다”. 아, 이런 표현은 시인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아니 내가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해낼 수 없는 시인의 언어겠지... 감동이 밀려온다. 내가 결코 시인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시적 표현에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 시어들을 나는 몇 번이고 되풀이 읽었다.

 

“마누라가 버린 자식새끼를 바라보는 눈으로

나는 이 세상을 바라보겠다”

 

이 단호한 시인의 어조 속에서 나는 그레고리오의 현실과 시인의 시퍼런 슬픔을 보았다.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기저에는 시인이 처한 상황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인의 언어가 나의 심장을 같은 색으로 서서히 물들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행, ‘그 아무렇지도 않음’에 다다르자 나는 시인의 마음속에 들어 앉은 두 개의 공간을 마주하는 것일까, 생각했다. 시집의 초장부터 나는 딜레마에 빠져버렸다. 잠시 후, 시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인가, 독자인 나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인가...하는 의문으로 바뀌었다. 일단 시가 독자의 손으로 넘어 온 이상, 이 시는 나의 것이다. 나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 아무렇지도 않음’은 초월적인 그 무엇 이라기보다는, 시인이 가장 절실하게 보듬고 싶어하는 세상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이다.. 결코 시인에게 ‘그 아무렇지도 않음’은 ‘절대로 아무렇지도 않음이 아니다’라고 말이다.

 

박시인의 관조는 맑은 관조이다. 시인이 남다른 이유이겠지만 말이다. 시인은 우리 삶의 사소한 부분을 간과하지 않는다. 「명자 씨」,「빨래」, 「미선이」등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쯤에서 나는 시인이 무척 궁금해졌다. 시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관조하지 않는 시인이 어디에 있을까. 이 시인은 작고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는 관조를 보여준다. 결코 호방하지 않다는 말이다. 시인의 침잠은 알고 보면 스스로의 낮춤이다. 대상을 자신의 높이로 끌어올려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을 숙여 대상과 함께한다. 때로는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기도하며 말이다. 

 

가장 좋은 느낌은 독자를 휘두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자를 휘두르려는 시는 처음에는 달달하지만 지나친 단 맛에 그만 독자가 물려버리고 만다. 박시인은 음식의 당분을 적정량 첨가한 느낌이다. 아니, 다른 시에 비해 약간의 당분을 되려 뺀 느낌? 아, 이것도 아니다. 달지 않은 당분을 안에 깊숙하게 숨겨 놓은 그런 느낌이 맞다. 이 느낌이 맞다. 씹을수록 고유의 단 맛을 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서 나는 새로운 시인의 탄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의 시가 가슴으로 들어온다. 왠지 또 만나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처럼 돌아서면 왠지 또 읽고 싶어진다. 애써 리뷰를 적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알고 보면 어느새 이미 깊이 깊이 내 가슴은 시인이 풀어준 물감에 배어 있음을...     

 

 

드디어, 「지붕의 등뼈」와 마주했다. 이 시집의 제목이 된 바로 그 시이다.

 

 

  지붕의 등뼈

 

노인성 척추 측만증을 앓는

지붕의 등뼈는 난감하다

 

너무 오래 비를 맞아

가벼운 새의 발놀림에도

얇은 비스킷처럼 부서진다

어떤 기와는 살갗이 벗겨져

갈비뼈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수많은 모래와 모래가 만나

물이끼 같은 한 세월 이루었으나

밤새도록 내리는 장대비를 맞고 있는

한사코 제 등으로 비를 막는

어머니의 등뼈,

 

낡은 빨랫줄처럼 위태롭다

 

                      지붕의 등뼈, 전문

 

 

시인이 바라본 어머니가 어떤 상태에 계신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시인의 어머니께서는 아직 생존에 계신 모양이다. 그러나 그간 한 세월 고생하신 덕분에 척추가 휘고, 몸도 휘었다. 위태로운 시인의 어머니... 곧 무너져 내릴 것 만 같은 집, 낡은 집을 떠 받들고 있는 아슬아슬, 위태로운 지붕의 등뼈, 앙상하고 고단하며 성기다. 시인의 안타까운 마음이 깊이 전해온다.

 

이 모습이 시인의 어머니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기에 더 깊다. 우리들의 어머니는 대부분 이런 모습을 하시고 계시다. 이토록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시기라도 하는 날에는.... 우리들이 우리의 어머니를 잃는 그 순간, 우리의 집도 와르르 무너지는 참담함을 경험할 것이다. 마음이 정녕 헛헛하다.

 

「지붕의 등뼈」에서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물론 나의 지독한 편견에서 비롯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위의 작품에 등장하는 직유법은 모두 세 번이다. ‘비스킷처럼’ ‘물이끼 같은’  ‘빨랫줄처럼’ 이 그것이다. 시에서는 직유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느끼는 일인이다. 소설이라면 얼마든지 허용하지만 시에서는 직유를,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 환원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지극히 사적인 생각이다. 크게 길지 않은 한편의 작품에서 세 번의 직유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느낌을 적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나는 박시인의 첫 번째 시집을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나는 시인의 딜레마라고 생각했던 부분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다시 시집의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누라가 버린 자식새끼를 바라보는 눈으로

나는 이 세상을 바라보겠다

.

.

.

나 없어도

나 앉았던 자리에 꽃이 피고 눈이 내리는 쓸쓸함에 대해서

아니, 그 아무렇지도 않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다.

 

 

위는 초반에 언급한 「메모」의 일부이다. 처음에는 뭔가가 상통하지 않는 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부분이다. 그러나 시인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던 딜레마는 딜레마가 아니었다. 이것은 시 전체를 관통하는 박시인의 시적 태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비로소 의아했던 대목이 풀리는 순간이다. 대표적인 예로 시인은 「화기―능소화」에서 “저 환한/ 주홍빛 일주문 열고 들어가면/ 미련도 미련 없이 해탈할까?/” 라고 자문한다. 어쩌면 현실의 도피일 수고 있는 시인의 태도로 보인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다는 아니다. 「당신과 나 사이」, “그럴수록 당신의 몸에 내 몸 섞으려는” 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늘 상대성을 인정한다. 세상과의 간극을 관조하고 인정하며 나아간다. 시인의 태도는 결코 침잠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늘 관계하고 있다.   

 

한편, 시인의 그레고리오에 대한 절절한 언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내 가슴도 덩달아 멍들어가는 느낌이다.

 

「역류성 식도염」, “아무리 흘러가도/시간은 거꾸로 온다/ 내 목구멍을 화롯불 같은 입맞춤으로 지져놓고/” 「사라지는 시어들」, “갑자기 방안에 입 다물고 있던 안개들/ 일제히 일어나 키득거린다/” 「가홍동 마애불」, “밤새워 벼린 조선낫 같은 손으로/ 바위를 쪼개고 또 쪼갰을 것이다/”

 

어쩌면 그레고리오는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 일 수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자신의 그레고리오를 세상으로 환원시킨다. 시집 전체에서 보여주는 시적 태도는 그리하여 흐름의 일관성을 가진다. 이쯤에서 어느 알라디너가 자신의 서재에 썼던 말이 떠오른다. “시는 시집으로 읽어야 제 맛이다”, 라는 표현 말이다.  

 

 

시인의 시는 결코 넘치지 않는다. 박시인의 태도는 독자를 후리려 하지 않는다. 독자의 가슴을 후리는 시인은 욕망이라는 덫에 걸린 시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런 시인은 흔히 머리로 시를 쓴다. 박시인은 결단코 그러한 짖은 하지 않는다. 박시인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시를 잉태하고 출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부족하고 모자란 모든 것에 대하여, 세상의 약한 모든 것에 대하여 마음으로 다가가 조용히 자신의 가슴을 내밀고 손을 내민다. 소란스럽지 않다. 호방하지 않다고 생각한 이유이다. 시인은 슬픔을 꼭 이기려하지 않는다. 작은 슬픔일지라도 말이다. 시인에게 주어진 상황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품어 않고 가는 것이 시인의 세상을 향한 태도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시적 태도와 전혀 닮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럴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니던가...

 

안타까이 여기는 심정을, 에미가 버린 자식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심정을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시가 반드시 승화작용을 해야 한다거나, 초월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새로운 나의 깨달음을 박시인을 통해 얻었다. 때로는 초월이나 승화는 우리의 실제 가슴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기에 말이다.

 

시의 전반적인 느낌은 지극히 사적으로 독자와 마주하여 만나는 느낌이다. 청빈한 초대의 장 말이다. 결코 화려하지 않다. 노골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세련된 절제미를 느끼게 해준다. 가식 없는 시어가 나를 사로잡는다. 독자인 나를 후리려 하지 않는다고 느낀 이유이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의 시어들을 속.박.하거나 강.요.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하여 시인의 시어들은 그야말로 자.유.를 얻는다.

 

우연히 발견한 시집이 신선하고 매력있다. 돌아서면 왠지 또 다시 돌아보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다. 내가 박 시인의 시를 되돌아보고 또 돌아본 것 처럼 말이다.  앞으로 더더욱 대한민국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매우 크다. 그리고 그러리라 믿는다. 박형(朴兄). 인테넷 검색으로 바라본 그레고리오 아비의 미소가 맑더니, 시에서도 그 맑은 영혼을 느끼게 한다. 오염되지 않은 미소 속에 어찌 이런 시어들을 감추어 두었소? 박형(朴兄)! 이 독자, 박형을 사랑하오.

 

PS: 맨 마지막에 고봉준이라는 분의 해설이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기가 너무 어려웠다. 마치 정현종의 「시의 이해」를 읽는 바로 그 느낌이었다. 국문과 강의실에서나 있을 법한 해설. 출간된 시집의 해설은 독자와 소통을 위한 장(場)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소통을 위한 장이 아니라 마치 시를 통해 이어졌던 그 맥을 단절시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여러 번 읽고 나서야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찾아갈 수가 있었다. 한마디로 겁나 어려운 해설이라는 거다.  

 

행여나 하고 시인의 두 번 째 시집 「슬픔을 말리다」를 살펴봤다. 다행이다. 정우영씨의 해설은 소통을 위한 장이 틀림이 없었다. 독자가 알아듣기 쉽게 썼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레고리오의 아비에게 이 어줍잖은 리뷰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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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집을 구입했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한때 시집을 많이 읽던 적이 있다.

너무도 오래도록 시를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올해 가장 먼저 출간된 시집은 어느 시인의 것일까... 알라딘을 검색했다. 1월에 출간한 시집이 하나 보인다. 시인은 자신의 시집에「슬픔을 말리다」라는 특이한 제목을 붙였다. 같은 시인의 다른 작품이 있는지 찾아봤다. 「지붕의 등뼈」라는 시집이 눈에 들어온다. 이 시집 역시 제목이 범상치 않다. 박승민, 시인의 이름이다. 검색창에 ‘박승민 시인’을 넣고 엔터, 얼굴 사진이 바로 뜬다. 어이구, 젊은 냥반이고만~! (요즘은 마음만 먹는다면 이렇게 손쉽게 상대방을 알아낼 수가 있다).

 

인터넷이 알려준 정보는 “남성, 2007년 문예지 ‘내일을 여는 작가’ 등단” 이라고 알려준다. 아, 나이도 나온다. 1964년생이라고 한다. 나이에 비하면 사진으로는 더 어려보이는 인물이다. 물론 시인이 나보다는 나이가 많다^^. 미소가 선량하다. 그 선량한 기운이 마음에 드는 시인이다. 시인은 불혹을 지나 지천명(知天命)에 와있었다. 두 권을 모두 장바구니에 넣고 여타의 책들과 함께 클릭했다.

 

 

 

시집의 서문인 ‘시인의 말’부터 읽기 시작했다.

 

 

폐경기 앞둔 여자가 첫 애를 낳는 심정이다.

내가 사산(死産)한 세월이 주마등같다.

흑심(黑心)을 품은 연필 한 자루로 이 세상에 헤딩한다는 것이

무모함을 넘어

덧없음을 아는 나이

....

 

로 시작한다.

역시 시인은 다른가보다. 인트로부터 시적이다. 비유가 마음에 든다. 그러나 ‘주마등 같다’에서 ‘같다’라는 말은 시적이지 않다고 잠시 생각했다. 시인은 ‘〜같다’라는 표현을 ‘〜같다’라는 말을 쓰지 않고 해내야 한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나의 쩌는 편견에서 비롯한 생각이지 말입니다. 

 

 

마지막에는

 

내 아들 그레고리오에게

이 구석기적 문자를 바친다.

 

 라는 말로 마무리를 한다.

 

어느새 나는 그의 아들 그레고리오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순간, 나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레고리오...

그대가 아비의 가슴에 다시는 뽑아 낼 수 없는 비수를 깊이 깊이 꼽아두고 갔구려...

 

 

그러나 시인이여, 이제 그대의 나이도 지천명이 아니오...라고 나는 되뇌고 있었다.

 

그리고 한 장씩 시인의 시를 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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