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은 조선의 영웅이 되어 만고에 빛나는 그 이름을 죽백에 남길 수 있는 기회를 그렇게 스스로 저버렸다. 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끝을 맺었으나 고니시는 흥인지문으로, 가토는 숭례문으로 의기양양하게 입성했다는 사실은 수 백 년이 흐른 뒤에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추억으로 남게 된다. 대한 제국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영토나 다름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임나일본부가 우리 땅을 지배했고, 임진란을 통해 다시 한 번 더 점령했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임나일본부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은 서로 대척점에 있다. 최근 벌어졌던 학자들의 송사는 일제의 잔재가 그 얼마나 지대했던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랄 수 있다. 일본은 그렇게 수 백 년 동안 조선을 탐욕해왔다. 잠시도 그 탐욕을 중단해본 적이 없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탄시킨 후 온갖 나쁜 짓은 죄다 저질렀는데, 조선의 국보가 될 만한 문화재를 전국 조사하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조선 전국이 죄다 문화재이고 국보였다. 조선은 딱히 문화재에 번호를 붙여 관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전국에 산재하고 있는 것이 문화재 였기에 그럴 필요성을 아직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조선에서 국보급 문화재를 조사하는 것이 무슨 잘못일까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의도가 겁나 겁나 불순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하기야 일제가 당시 좋은 뜻으로 한 일이 어디 하나라도 있었겠는가. 지들 멋대로 문화재에 번호를 가져다 붙이고 관리했다. 이 관리하는 것이 또 의도가 불순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남대문이고 동대문인 것이다. 조선의 얼과 정신을 담고 있는 물건의 기운을 죽여주어야 조센징들의 기도 죽일 수 있다. 조선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노예처럼 부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결과였다. 왜는 조선을 탐욕했고 조선의 땅과 그 백성들을 그렇게 지배하고 싶어했다. 현재로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한 말이다. 조선 땅은 그들의 끝없는 욕망의 대상인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지들 멋대로 숭례문을 남대문으로, 흥인지문을 동대문으로 불렀다. 숭례문, 흥인지문하면 정신과 얼이 살아 있게 되지만 남대문, 동대문 하면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게 된다. 하여튼 일제는 조선을 수 만년 동안 그렇게 약탈하려는 장기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숭례문, 흥인지문이라는 이름은 조선인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지고 말 것이라는 지극히 장기적인 계획 말이다. 문(門)처럼 일본으로 가지고 갈 수 없는 귀한 것들에는 이름을 새로 지어 그 격을 떨어뜨렸고, 가져갈 수 있는 국보급 문화재들은 일본으로 들고 가벼렸다. 조선은 우리 문화재를 일본으로 들고가도 좋다고 말한 적이 없다. 일제의 관료들은 관료들대로, 일제의 개인들은 개인대로 밀반출했다. 귀하고 좋은 것은 알아가지고 그렇게 일본으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는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면 죄다 알고 있는 일이다.

 

일제가 조선 땅의 보물들을 탐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히데요시는 왜군들이 조선에서 빼앗아간 보물들을 쳐다보며 기뻐서 잠조차 이루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조선의 것이  다완(茶碗)이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다완에 미쳐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도공이란 도공들은 죄다 잡아갔다. 일본이 도자기를 수출하여 돈은 겁나게 벌어들인 것은 임란 때 잡아간 조선의 도공들 덕분이었다.

 

현재 일본의 국보 제 1호는 「광륭사목조미륵보살반가상」이다. 학자들은 이를 6세기 경의 신라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고있다. 반가상이 통나무로 제작한 것이고 적송이라는 점, 일본의 초기 불상들은 노송나무를 썼고 부위별로 따로 만들어져 붙였다는 점, 제작 기법이 신라와 같다는 점등을 근거로 들고있다.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 큰소리를 치지 못하는 입장인 것이다. 아, 진짜...

여허튼, 밥그릇은 고사하고 숟가락 젓가락까지 빼앗아 간 넘들이 아니던가...

 

광륭사목조미륵보살반가상 (인터넷 어디에선가 퍼옴)

 

여러가지 과학적 정황으로 보아, 광륭사목조미륵보살반가상, 은 우리의 것이 틀림이 없다. 남들 같으면 쪽팔려서라도 그런 짓을 대놓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확실히 다르다. 비록 자기네 것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떡하니 지네들 국보 제1호로 지정했다. 이 얼마나 낯 두꺼운 일이던가. 연구를 하면 할 수록 광륭사 반가사유상이 한반도에서 넘어간 것이라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던지 은근 슬쩍 어느 틈엔가 일본은 국보지정 제도를 없애버렸다. 임란때 도적질을 해간 것인지, 아니면 교류를 통해 정상적인 방식으로 넘어간 것인지 알 길은 없다. 어째거나 일본은 남의 것이라도 귀한 줄은 안다. 일본 처럼 남의 것을 뻬앗아다가 국보를 지정하지는 않더라도 우리 국민과 우리 국보들이 귀한 줄을 알아야한다.  

 

 

 

 

 

알고 보면 지명이나 학교의 이름에 방향을 나타내는 남서울, 서서울, 동서울 그리고 강서고, 강동고등등 또한 일제의 잔재들이다. 조선은 지명이나 공식 건물에 방위를 붙여 이름 짖는 일이 거의 없었다. 고려의 개성에 남산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하고, 신라에도 남산이라는 산이 있었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현재 서울의 남산도 잘은 모르겠지만 일제식 이름은 아닌가 상당히 의심스럽다. 과거 서울의 남산은 지금의 이름이 아니었기에 하는 말이다. 여하튼 그 유래는 알 수는 없지만 애국가에도 남산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우리의 지명을 지들 멋대로 바꾸어 놓은 곳이 전국에 한 둘이 아니다. 대표적인 곳이 지금의 대전(大田)이다. 지금의 대전을 우리 조상들은 한밭이라 했고 太田(태전), 드물게는 泰田(태전)이라도 불렀다. 한밭은 太田(태전)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태(太)는 콩(豆)을 뜻하기도 한다. 콩의 색깔에 따라 황태, 백태, 서리태(검은 콩)라고 불렀다. 태전은 콩이 많이 나는 지역이기도 했던 것이고 太田은 큰 밭과 콩밭이라는 중의를 아우르는 지명이었던 것이다.

 

 

충청도의 어느 지명은 안면도(安眠島)이다. 그 옛날 일제 강점기 전에는 안민도(安民島)라 부르던 곳이다. 백성(民)을 편안히(安) 한다는 뜻을 가진 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 지명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아니면 정신을 빼놔야겠다 생각했던지 백성 민(民)을 ‘졸린다, 존다, 잠 잔다’ 는 뜻을 가진 면(眠)으로 바꾸었다. 한마디로 지들이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잠자코, 아무생각하지 말고 저항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하는 의미로 바꾸어 놓았다는 개인적인 의심이 든다.

 

 

이렇게 일제는 조선이 가진 전국의 이름들을 가만 놔둔 것이 별로 없다 (조선 백성들의 이름마저도 개명시킨 넘 들이다 진짜). 그런데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 있다. 대한민국은 1962년 국보 제 1호로 남대문을 지정했고, 그 이듬해 보물 제 1호로 동대문을 지정했다. 이는 전 국민이 죄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왜 남대문을 국보 제1호 로, 동대문을 보물 제 1호로 지정했는가 이다.

 

 

1962과 1963년 당시 대한민국의 관료들이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숭례문과 흥인지문에게 원래 이름도 돌려주지 않았다. 일제는 강점기 당시 숭례문을 보물 제 1호로 지정했다. 그런데 1962년 당시 관계자들은 추호의 반추도 없이 일제가 정해놓은 그대로를 전승,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각각 국보 제 1호, 보물 제1호로 등재했다.

 

일제는 1592년 조선 침략 당시 제 2선봉장 가토와 1선봉장 고니시가 입성했던 그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추억하며 숭례문을 보물 제 1호로 지정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데도 말이다. 행여 역사를 잘 아는 일본인이 너네 국보 제 1호 남대문은 가토가 입성했던 그 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고, 너네 보물 제 1호는 고니시가 입성 했던 바로 그 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들에게 우리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토록 일제에게 당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관료들이 국사를 돌본다 하다가는 결국 나라가 이모냥 이 꼴이 되고 말았다. 위정자들이 오로지 권력만을 탐하고 이익만을 쫒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과거의 행적으로 보건데 진정한 국민을 위한 정치는 없었다.

 

 

고려 말 비극적이고 처참했던 백성들의 고단함은 제쳐두고라도, 조선 500년 동안 어느 하루라도 백성들에게 편할 날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조선의 백성들은 늘 하대 받았다. 냥반들은 냥반이 아닌 자 누구하나 결코 존중해준 적이 없었다. 온갖 설음을 죄다 겪었고, 국가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은 없었으나 국난이 있을 때면 늘 몸으로 총칼을 막아냈다. 그런 백성들이 고맙지 않은가?

 

 

중국의 5경 중 서경의 하서(夏書) 3편에는 「五子之歌오자지가」라는 글이 있다. 「오자지가」 중 워낙 많은 분들이 인용을 하고 있는 구절이 하나가 있는데 “民可近 不可下 民惟邦本 本固邦寧民可近” (민가근 불가하 민유방본 본고방녕) 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 구절은 율곡이 성학집요에서도 사용한 글이고, 고문진보에도 등장하는 글이다. 맹자 역시 이 문구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듯하다. 일부의 학자들은 「오자지가」를 본디 「하서」에 있었던 글이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가히 본받을 만하기에 적어둔다. 오자지가에 관련한 전설을 지금 우리나라의 실정에 딱 맞는 경우가 아닌가 싶다.

 

그 내용인 즉 이러하다.

 

民可近 不可下 民惟邦本 本固邦寧”

(민가근 불가하 민유방본 본고방녕)

“백성들을 늘 가까이하되 절대로 낮추어 보면 아니 된다

백성이란 그야말로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한 법이다.“

 

 

입으로는 떠들면서도 수 백 년 동안 백성을 나라의 근본이라고 생각한 위정자들은 거의 없었다. 백성들은 그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지켜가는 수단일 뿐 이었다. 돌이켜보면 위정자들이 국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결과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숱한 왜구의 노략질을 겪어야 했다. 임란, 정유란, 병자ㆍ정묘호란 등으로 죽어난 것은 백성들 이었다. 그 불쌍한 백성들은 일제 강점기를 몸으로 겪어야 했다. 위정자들은 그러나 심지어는 나라까지 팔아먹기도 했다. 그들은 나라를 판 돈으로 잘 막고 잘 살았다. 힘없는 국민들 끝까지 지키려 노력했건만 말이다. 불구하고 국민들은 팔려버린 나라를 다시 되찾겠다며 나섰다. 상해 망명정부 이후, 100여년에 걸쳐 국민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죽어갔고 그것도 모자라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 전쟁을 또 치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새파란 젊은이들을 차가운 바다 한 가운데에서 잃어버렸다. 백성들은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치욕과 수모를 겪어 만들었다.

 

일제가 저질러 놓은 잘못들을 바로잡지 않았고 되레 동조하며 국정을 농단했으니 그 죄가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정치가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국민들이 나섰다. 수험을 앞둔 청춘들마저도 촛불을 들었다. 이제 그에 대한 답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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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은 김여물의 전략을 듣고는, 우리 병사는 기병이고 왜군은 보병이다, 왜군을 넓은 평야로 유인 한 후 날쌘 기병으로 치고 빠지는 전략을 사용한다면 이길 것이다, 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선조의 보검을 받은 주장(主將)인 신립의 명이니 어쩌겠는가... 신립이, 군기를 떨어트리는 자,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호통을 치며 강행하니 이러다 죄다 죽겠구나 하면서도 김여물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의 영화들은 대군을 일렬로 죽-늘어서게 한 다음 정면에서 서로 맞짱뜨는 장면들을 곧잘 보여준다. 제갈량식 전투를 서구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병법은 일찍이 동양의 것이었지 싶다. 전쟁의 달인인 제갈량도 게릴라 전을 곧잘 쓰던 인물이었다. 이런 기똥찬 전투 방법을 제안 받았으나, 역사에 길이 남을 김여물의 책략을 신립은 묵살해버린 것이다.

 

 

임란 당시 조선군이 게릴라 전술을 써서 큰 성과를 거두었던 역시 자료들은 무수히 많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정기룡 장군이다. 정기룡장군은 기병을 지휘하며 왜군을 상대로 60전 60승을 올리는 전설을 써내려간 인물이다. 이 전설은 절대로 구라가 아니다. 실록이 전하고 있는 사실이다. 정기룡장군에 대한 책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나 학위 논문은 11편, 학술기사는 75편 정도가 있음을 확인한바 있다 (이 외에도 더 있을 것이나 모두 확인하지는 못했음). 정기룡 장군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왜란 당시의 눈부신 공로를 남겼고 후에 그 공로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의 자리를 제수 받는다. 그는 왜군에게는 최악의 패배를 남겨준 또 다른 인물이었다. 바다에 이순신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장군이 있었다. 그의 전술은 바로 조선의 날쌘 기병들을 게릴라식으로 운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정기룡장군이 조선군의 장점과 왜군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고, 지용을 겸비한 장군이라는 명징한 역사적 정거이다. 여하튼 정기룡장군은 기병을 운용하는 데는 단연 최고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기룡장군배 전국 승마대회」가 있을 정도이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정아무씨와는 전혀 무관한 내용이니 오해는 없으시길...)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정기룡장군의 리더쉽을 학술지를 참고하여 첨언하자면, 그는 자신이 벤 왜군의 머리를 부하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라고 쓰고 있다. 비록 신분이 노비일지라도 적의 머리를 베어오는 자에게는 면천하여 양인의 신분을 주고, 비록 양인의 신분이라도 공이 많은 자(적의 머리를 많이 베어오는 자)에게 벼슬을 주겠노라는 선조의 선언이 있었다. 그리하여 왜적의 머리는 값이 비쌌다. 그 비싼 것을 정기룡장군은 부하 병사들에게 일일이 나누어주어 공로를 그들에게 돌렸다. 이런 장군의 지휘를 따르지 않을 병사, 그 어디에 있을까... 나를 따르라! 그 공로는 모두 너희들의 것이다! 라고 외치며 모범을 보인 장군의 리더쉽!  그러니 연전 연승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물론 선조는 전쟁이 끝나자,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었지? 하면서 이 면천 제도를 철폐해버렸다. 아, 진짜.... [참고자료,「정기간행물 524호, 정기룡; 역사에 이름을 남긴 무인들/ 국방부역사편찬위원회」] 정기룡의 살아있는 전설을 참고한다면, 당시 종사관 김여물이 제안한 기병을 운용한 게릴라 전술이 그 얼마나 왜군을 상대하는데 필요한 것 이었는지는 잘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신립은 이를 묵살해 버린 것이다.

 

나름대로 병서를 읽었고, 또한 화려한 전투 경험을 가진 신립은 하필이면 또 배수진을 고집했다. 사실 조선 병사들의 활솜씨는 천하가 다 인정하는 명궁들이다. 우리 땅의 사람들이 쏘아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히는 것은 예로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엉덩짝에 몽고 반점을 가진 족속들의 강력한 장기이다. 말 등짝에 훌쩍 올라타고는 날렵하게 달리면서도 화살은 목표물을 놓치지 않는 그런 족속들 말이다. 그것이 화살이든 총포든 구별하지 않는다. 신립은 그런 기병의 기민함과 강력한 활 솜씨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힘을 이미 함경도에서 입증했지 않았던가.

 

 

그러나 문제는 여타 장수들의 조언에서 언급된 사항만이 아니었다. 우선, 적장은 왜국 본토에서 숱한 전투를 치루며 끝까지 살아남았고 전장터에서 잔뼈가 굵어온 고니시(소서행장)라는 점이었다. 더구나 왜군은 침략 당일 부터 조선군을 상대로 파죽의 연승을 거두어 그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조선 침략을 철저하게 준비해온 왜군은 조총수들을 잘 훈련시켰다. 조선군은 조총의 이해할 수 없는 능력에 너무나도 무기력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왜군 제1 선봉대를 무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육지의 조선군에게 유리한 점이라고는 날쌘 기병과 정확한 활솜씨가 유일했다. 더구나 당시 조선의 군사제도였던 제승방략의 문제점은 본진이 무너지면 후방은 속수무책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치명타는 바로 일기(日氣)였다. 하필이면 신립이 필승의 전투를 벌이기로 한 그 전날에 그만 탄금대에 비가 내렸다. 출전하지 않았으니 아직도 기회는 있었지만 신립은 전술을 바꾸지 않고 밀어 붙인다. 조선군이 필승을 해도 모자랄 판에 탄금대는 조선군에게 최악의 불리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었다.

 

 

사실 이 전투는 절대로 패해서는 안 되는 전투였다. 패해도 되는 전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립이 탄금대에서 패할 경우 임금은 한양을 버려야하며, 셀 수도 없는 백성들의 목숨도 풍전등화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립은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최고의 장수였다. 신립이 가지는 상징성을 생각해본다면 전 조선군의 사기와 직결되는 전투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패전의 패전을 거듭하던 조선군도 왜군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순간이고, 또한 장수는 천하의 명장 신립이 아니던가. 조선의 국운이 이 한 번의 전투에서 갈린다고 볼 수 있는, 대 전환점이 되는 그야말로 절대 절명의 전투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중요한 탄금대는 전 날 비가 내린 탓에 조선의 쾌도 기마병의 말발굽을 잡고 늘어졌다. 초장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나 싶었다. 초반 전투에 조선 기병들은 활을 쏴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마들이 급속도로 지쳐간다는 것이었다. 말의 발이 진창에 빠져서는 힘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틈을 노리던 왜의 조총수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들어 조선의 기마병들을 쏘아 넘어드렸다. 이런 상황이라면 조조군의 수십만 대군을 추풍낙엽처럼 베어내며 적진을 뚫고 내달리던 조운이라도 살아남지는 못했으리라. 기마병들이 혼비 백산하는 사이 왜의 창칼 잡이들이 진을 이탈한 조선 병사들을 모조리 베어 넘겼다.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으나 8,000∼ 16,000여 장졸들은 기량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무참하게 패했다. 계백은 죽기로 작정을 하고 결사대를 결성, 황산벌 전투에 임했다지만 신립은 결코 죽음으로 끝내서는 아니 되는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는 점이 계백과는 확연하게 다른 입장이었다,

 

 

조선의 모든 장졸들은 지휘관의 판단 착오로 그렇게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는데, 불과 한 나절만의 처참한 궤멸이었고 왜란이 발발한지 딱 보름만의 일이었다. 신립의 나이 47, 장수로서는 지용을 겸비할 만한 나이였다. 그러나 신립은 지피(知彼)와 지기(知己)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조총의 위력도 잘 알지 못했다. 왜군이 조총수를 어떻게 운용하는지도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조종으로 무장한 왜군을 상대로 조선의 기병들을 어떻게 운용해야 승리를 할 수 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준비된 것이 없었다. 오직 한가지, 신립이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것은 자신감, 나 신립이야!, 하는 그 용맹함이었다. 탄금대 전투에서 전장에 나아가는 장수가 지장이어야 하는 이유를 명백하게 보여준 이가 바로 신립인 것이다.

 

 

장수가 전투에 패배한 후 자신의 목숨을 장렬히 강물에 던지는 것으로 할 일은 다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목숨을 던져 용서받을 수 있는 전투가 있고 그렇지 못한 전투가 있는 것이다. 탄금대의 전투는 목숨을 던졌다고 용서를 바랄 수 있는 성질의 전투가 아니었다. 장수 이일은 졸병들이 목숨으로 전쟁을 치루는 틈을 타 평안도로 내뺐다. 리더들이 이모냥이다. 오늘날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이 참극은 왜란이 발발한 지 보름만의 일이었던 것이다. 장수 한 사람의 실책이 가져온 결과도 국운을 좌우할 만한 것인데, 현재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 추운 날 수험생들까지 촛불 집회에 나가도록 하는 지도자의 실책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신립의 판단 미스로 인한 패배의 소식은 바람보다 먼저 선조의 귀에 당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탄금대의 소식을 보고받은 선조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에 화들짝 놀랐다. 신립이라면 승전 할 것이다, 한 치의 의심도 하지 못했던 선조는 그야말로 패닉이었다. 당시 수많은 백성들 또한 신립의 필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과적으로 피란도 가지 않은 상태였다. 신립에 대한 군왕과 백성들의 신뢰를 가히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신립의 판단 착오는 제승방략의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후방에 와르르 무너져버린 것이다. 군왕은 도망가야했고, 그 많은 백성들은 무참히 참살 당하거나 왜군의 포로 신세가 된다. 신립을 협의의 충신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그에 대한 평가를 냉정하게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크게 놀란 선조는 장대비가 하염없이 쏟아지는 날, 부디 도망가지 말아주세요, 라고 목 터지게 외치다가는 쉬어 터진 백성들의 곡소리를 뒤로하고 불야 불야 몽진에 오른다. 애비에게 애원하는 자식들을 버리고 도망치듯 선조는 온 백성들의 어버이가 되기를 그렇게 거부했다. 과거 이승만이 저 살자고 한강의 다리를 끊어 셀 수도 없는 국민들을 사지로 몰았던 것이나 진배가 없었다. 그렇게 임금의 버림을 받은 백성들은 순식간에 폭도로 변했다고 전한다. 도성으로 들어와서는 경복궁을 불살라버렸다, 라고 이 날의 일을 선조수정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촛불 시위는 너무나도 얌전하고 격이 높은 수준이다. 조선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조선의 냥반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패닉에 이르렀다. 그도 그럴 것이, 냥반들은 가진 것이 많았기에 지켜야 할 것도 많았던 것이다. 피란은 그 모든 것을 죄다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신립은 그렇게 냥반들의 자존심마저도 산산이 무너뜨렸다.

 

⋇ 당시 경복궁 방화 사건을 「선조실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대목이다. 「선조수정실록」에 새로이 추가된 내용인데, 일본의 자료를 살펴본 국내 학자들은 왜군의 실화로 판단하고 있다.

 

 

왜장 선봉 1군의 고니시는 탄금대의 기세를 몰아 단숨에 한양에 당도, 바로 입성했다. 탄금대의 패배는 왜군의 입성을 의미했던 것이다. 왜군 선봉대 2군인 가토 부대는 고니시보다 하루 먼저 성으로 들어왔다. 왜군의 선봉들은 말 그대로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조선의 궐에 들어선 것이다. 탄금대의 전투가 그 얼마나 뼈아픈 것이었는지는 말할 나위가 없다. 더불어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왜군들이 입성 할 때, 고니시는 흥인지문으로 들어왔고, 가토는 숭례문으로 들어왔다는 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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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은 유난히도 뜨거웠다. 오죽했으면 나무에 매달린 사과가 벌겋게 익어갔을까. 사과가 그럼 벌겋게 익지 파랗게 익어가야겠냐고 반문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이 여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씀. 그렇게 작열하던 지난 여름, 나는 모처럼의 친구와 그 뜨거운 땡볕아래에서 얼굴을 마주하기로 했다. 그리고 모처럼의 재회를 기념하며 각자가 준비한 책을 교환하고 날짜와 더불어 그 표시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장소는 한 낮의 탄금대!

 

 

탄금대에서 장렬히 최후를 맞이한 8,000의 조선군을 추모하는 탑이 그들의 높은 충성심 만큼이나 우뚝하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어느 새 탄금대가 눈에 들어온다. 먼저 도착한 나는 탄금대 주차장 변에 있는 찻집으로 들어가 이열치열, 따끈한 차를 마시며 기다린다. 곧 친구가 도착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탄금대로 향한다. 기왕 온 곳이니 탄금대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나무 그늘이 있어 그나마 가능한 그런 날이다.

 

 

만감이 교차한다. 우륵과 임경업의 혼을 담고 있는 탄금대의 전설. 그러나 내게는 우륵도 임경업도 아닌 또 다른 이의 전설에 그만 안타까움이 더할 뿐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신립과 8,000〜16.000 조선군의 전설이 그것이다. 「연려실 기술」과 「선조수정실록」은 신립과 그의 종사관 김여물이 왜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몸을 던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예천의 민간인들 사이에서는 신립이 왜군에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다고도 한다. 일본의 역사는 신립을 자신들이 붙잡아 참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역사서는 워낙 뻥이 심하고, 일본의 사학자들은 역사 왜곡 득도의 경지에 다다른 냥반들이라 기연미연한 것이 사실이다. 신립과 그 부하 장졸들의 충혼을 기리는 탑은 우뚝 솟아 있지만 이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한없이 애달프고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신립에 대한 평가는 바라보는 이 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혹자는 충신이라고 하고 또 다른 혹자는 장군으로서 마땅치 못하다는 것이다. 탄금대의 기록에 관한한 「선조수정실록」 보다는「연려실 기술」을 더 신뢰하는 입정이고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자신의 몸을 장렬히 던진 신립을 가히 충신으로 보고 싶다. 우주와도 바꿀 수 없다는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는 것이 나와 같은 범인으로서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한마디로 신립은, “터럭 하나라도 적에게 넘길 수 없다”며 장렬히 강물에 몸을 맡기었으니 또 다른 주장이 있기는 하나 그 곳이 바로 열두대이다.

 

 

이 장면에서는 삼국지의 관운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신립은 함경도에서 거칠고도 거칠었던 이탕개의 무리를 파죽지세로 격파하여 그 이름이 드높았다. 당대 조선 최고의 장수였던 것이다. 물론 관장군과 신립은 인품이나 성정에서 큰 차이가 있는 인물들이다. 관장군은 기품이 있었고 고매했으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하나로 자신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신립은 성정이 많이 거칠었다고 한다. 신립에 관한 논문을 살펴보니, 인간의 생명을 경시했고 독선적이며 과격한 성격을 지닌 인물, 이라고 평하고 있다. 불구하고 관운장을 떠 올리는 것은 관운장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남긴 말이 있기 때문이다.

 

 

솔까말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를 원치 않았던 손권은 제갈자유를 보내 관장군을 설득하려 한다. 제갈자유는 관장군에게 형주와 양주를 다시 돌려주고 가솔도 만나게 해주겠으니 손권에게 귀순하라고 종용한다. 그러나 관장군이 누구던가. 당시의 입장이 제 아무리 코너에 몰려 매우 불리한 상황이라고는 하나 순순히 회유에 넘어갈 인물이 아니잖은가. 그랬더라면 애초에 홀홀단신으로 오관참육장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의(義)를 위해서라면 결코 목숨을 아낄 위인이 아닌 것이다. (공명의 형님만 아니었어도 제갈자유는 분명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갈자유의 회유를 묵묵히 듣던 관장군이 한마디로 답을 한다,

“玉可碎 而不可改其白(옥가쇄 이불가개기백), 竹可焚 而不可毁其節(죽가분 이불가훼기절)옥은 비록 부서져도 그 흰 빛을 잃지 않으며, 대나무는 불에 탈지언정 그 마디를 잃지 않소이다". 몸은 비록 죽을지라도 나의 이름은 죽백에 남아있을 것이오. 나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  라며 단호히 거절한 것이다. 어째거나 신립도 자신의 최후를 선택하여 자신의 이름을 죽백에 남겼으니 이 순간만큼은 나로 하여금 미염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마땅치 않은 부분도 있는 것이다. 사안은 솔직히 마땅치 않은 정도로 끝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립은 자신의 명(命)으로 마무리를 했고, 결국 조선은 나라를 구했으니 완곡하게 표현하고 싶은 것 뿐이다. 기왕에 삼국지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를 덧붙이고 싶어진다. 한비나 제갈공명 그리고 손자등은 장수를 여러 유형으로 분류했다. 

 

 

흔히 용장(맹장), 지장, 덕장, 현장등이 그것이다. (아, 조선의 서유대 장군은 특이하게도 복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대단히 존경스러운 인물이다.) 가끔 듣는 말로는 “용장불여지장, 지장불여덕장”이라는 말이 있다. 장수가 전투에 임해서는 반드시 지용(智勇)을 겸해야 한다. 전장에 나가는 장수가 지혜롭지 못할 때, 장수는 일을 크게 그르치고 만다. 그러므로 용장의 기상은 가상하나 일을 맡기기가 어렵다. 백전 불태가 아닌 백전 필패의 수를 둔다. 전장의 장수가 지용을 겸비해야 하는 이유이다.

 

 

 용장은 부하 장졸들을 사지로 몰아넣기 십상이다.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처사이다. 신립은 조선 최고의 용장이었던 것이다. 고니시의 부대가 한양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신립으로 하여금 이를 격파하라는 구국의 명을 내린다. 날랜 기병을 포함하여 8,000혹은 16,000천의 조선 병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일은 직전에 이미 왜군과 붙어 패전한 경험이 있었다. 이일은 신립에게, 조령(문경새재)은 이미 늦었으니 한강으로 후퇴하여 방어진을 구축하자, 고 했다.

 

 

종사관 김여물은 말하기를, 왜군은 대군이며 조총에 능합니다. 조령은 산이 험하여 지형지물을 이용한다면 승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라고 조언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일과 이종장 역시 김여물의 전략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김여물 등은 전면전이 아닌 산악지역에서 일종의 게릴라 전을 구상했던 것이다. 사실 왜군이 한양 땅을 밟으려면 소백산 줄기의 령을 세 개나 넘어야 했다. 바로 당시에 조령이라 불렀던 문경 새재, 죽령, 그리고 추풍령이 바로 그곳이다. 이 세 곳은 방어를 구축하는 편에서는 자연이 준 요새나 다름이 없었다. 통과하는 적군의 목줄을 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는 지형지물로 매우 험준하니 말이다. 게릴라 전술로 왜군의 진로를 막고 교란시키며 타격을 주기에 최 적합한 지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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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만권당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아래의 글들을 보니 이덕일 선생의 책을 기다리는 분들이 계신 모양입니다.
김현구 선생께서 제소하면서 위 책에 가처분 신청을 했더랬습니다. 최근 2심에서 승소했다고 하니 좀더 기다려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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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양측의 의견 대립이 극에 다다르다 못해 송사에 이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바로 국내의 사학자들인 원고 김현구선생과 피고 이덕일 선생의 이야기다.

 

 

피고 이덕일 선생은 김현구 선생이 저술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를 읽고 일본 극우파의 역사관과 다르지 않다고 판단,「우리 안의 식민사관」이라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김현구 선생을 일제식민사학자라며 날카롭게 비판했다고 한다.

 

김현구 선생은 법에 의지했다. 1심 담당 판사는 이덕일 선생이 김현구 선생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고 그 죄질이 나쁘다하여 이덕일 선생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고 한다. 이는 지난 2월에 있었던 일이다. 피고 측은, 이는 학문을 죽이는 처사라 하여 항소했고 바로 오늘 2심의 결과가 나왔다. 무죄였다.

 

 

 

 

1심 재판부의 견해: "피고인은 피해자가 주장하지도 않은 허위사실을 전제로 피해자를 식민사학자로 규정했다. 피고인의 학력과 경력 등을 보면 피해자가 임나일본부설을 아무 비판 없이 수용하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았을 것", 고로 유죄,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2심 재판부의 견해: "책 머리말을 보면 피고인은 한국 사회가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못해 큰 해악을 초래하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려면 식민사관 카르텔을 비판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이 타당한지는 차치하고 주요 동기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고로 무죄

 

 

 

이를 개인적으로 초유의 사태라 칭하는 것은 소송의 본질이 우리 역사에 관한 것이며 학자들 간의 견해 차이가 소송에 이르렀기에 하는 말이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일개 독자에 불과하지만 나로서는 심각한 상황 전개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양 당사자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어~! 라고 할 수도 있겠다.

 

 

피고 학자가 원고 학자에게 어떤 식으로 무지막지한 욕을 어떻게 했는지는 쟁점이 된 책을 아직 읽어보지 않았으니 알 길은 없다 (이덕일 선생의 저술은 품절이라고 한다. 아마 소송중이라 일시 판매가 중지되지 않았을까 생각할 뿐). 딴에는 오죽했으면 학자가 학자를 상대로 법에 의존하기로 결정했을까 싶기도 하다. (두 책은 읽어볼 예정이다)

 

다른 한 편으로 매우 우려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 소송에서 피고를 실형에 처하며 사건을 종료시킬 경우, 필연적으로 국내 모든 학자들의 학문 활동을 심각하게 구속하는 새로운 법이 될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판례는 모든 학계를 줄 소송의 대열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원피고가 떠날 날이 없는 학계를 상상해보시라. 한 판사가 결정하는 판례의 위엄이 그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던가. '분묘기지권'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할 경우, 연구 결과물에 기인한 학문적 대립이라기 보다는 감정 대립으로 변질되어 어느 학자의 발언이든 여차하면 소송감이 될 여지가 다분하다. 각 분야에서 연구에 매진하여야 할 학자들이 피고가 되어 소송을 준비하거나 심리를 받으러 법원으로 출퇴근하는 사태는, 말 그대로 초유의 사태인 것이다.이러한 분위기는 학자들에게 학자 본연의 성질을 거세하는 형벌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소송 무서워서 어디 입이나 뻥끗할 수 있으랴... 인문 학계의 소송은 기타의 소송과 판이하게 다른 성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논쟁이 핵심 원료인 인문 학계에 찬물을 끼얹을 뻔 한 송사를 그간 심히 우려하는 마음으로 지켜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학계에서 의견 대립이라는 알맹이를 빠트린다면 과연 학문의 성장이 가능키나 한 일일까. 감옥에 가기로 작정하지 않은 다음 에야 그 어느 학자가 다른 학자의 논리에 반박을 해줄 것인가. 학문은 상호 반론을 자양분으로 더 크게 자라나는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독보적인 해석 혹은 독보적인 저술이란 자신이 아닌 타자들이 인정할 때 학자가 얻을 수 있는 지고한 업적이 된다. 사마천이 그러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어찌 보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상반된 해석과 주장은 사학의 본질 일 수가 있고 견해가 각기 다른 데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을 것이다. 해석의 차이가 꼭 사학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닐 것이지만 말이다. 다양한 사료와 고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해석 차이가 어찌 꼭 같아야 한단 말인가. 

 

사학자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다른 프리즘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기에 말 그대로 <사관>이라 하는 것이다. 학자의 펜 끝은 전장에 나아가는 전사의 검 만큼이나 날을 잘 세워야한다. 무딘 검으로는 전장에 나아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죽기로 작정하고 전장에 나아갔던  백제의 결사대도 자신들의 칼 날은 시퍼렇게 갈았을 것이다. 하여 학자는 자신의 검을 벼리고 또 벼려 날카롭게 하지 않을 수 없고, 상대의 그 것 또한 못지 않게 날이 잘 서 있을 것이라는 점도 각오를 해야한다. 날이 서지 않은 검은 검이 아니다. 그리하여 예리하게 날 선 두 검이 서로 마주할 때 불꽃이 튀어 오르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무사가 상대방의 검이 너무 날서있다고 비난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사학자에게 주어진 유일한 검은 바로 연구의 결과이며 그에 따른 사관이다.

 

또한 누군가가 자신의 학문에 이의를 제기할 때 그 이의를 압도할 수 있는 더 깊고도 탄탄한 학문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진정 빛나는 학자의 길이라 믿는 바이다. 상대가 있기에 나의 학문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던가.. 이는 학계가 건강하다는 방증이라 믿는 바이다.

 

건강을 잃으면 사람이나 학문이나 매한가지로 병이 드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치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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