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은 조선의 영웅이 되어 만고에 빛나는 그 이름을 죽백에 남길 수 있는 기회를 그렇게 스스로 저버렸다. 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끝을 맺었으나 고니시는 흥인지문으로, 가토는 숭례문으로 의기양양하게 입성했다는 사실은 수 백 년이 흐른 뒤에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추억으로 남게 된다. 대한 제국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영토나 다름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임나일본부가 우리 땅을 지배했고, 임진란을 통해 다시 한 번 더 점령했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임나일본부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은 서로 대척점에 있다. 최근 벌어졌던 학자들의 송사는 일제의 잔재가 그 얼마나 지대했던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랄 수 있다. 일본은 그렇게 수 백 년 동안 조선을 탐욕해왔다. 잠시도 그 탐욕을 중단해본 적이 없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탄시킨 후 온갖 나쁜 짓은 죄다 저질렀는데, 조선의 국보가 될 만한 문화재를 전국 조사하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조선 전국이 죄다 문화재이고 국보였다. 조선은 딱히 문화재에 번호를 붙여 관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전국에 산재하고 있는 것이 문화재 였기에 그럴 필요성을 아직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조선에서 국보급 문화재를 조사하는 것이 무슨 잘못일까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의도가 겁나 겁나 불순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하기야 일제가 당시 좋은 뜻으로 한 일이 어디 하나라도 있었겠는가. 지들 멋대로 문화재에 번호를 가져다 붙이고 관리했다. 이 관리하는 것이 또 의도가 불순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남대문이고 동대문인 것이다. 조선의 얼과 정신을 담고 있는 물건의 기운을 죽여주어야 조센징들의 기도 죽일 수 있다. 조선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노예처럼 부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결과였다. 왜는 조선을 탐욕했고 조선의 땅과 그 백성들을 그렇게 지배하고 싶어했다. 현재로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한 말이다. 조선 땅은 그들의 끝없는 욕망의 대상인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지들 멋대로 숭례문을 남대문으로, 흥인지문을 동대문으로 불렀다. 숭례문, 흥인지문하면 정신과 얼이 살아 있게 되지만 남대문, 동대문 하면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게 된다. 하여튼 일제는 조선을 수 만년 동안 그렇게 약탈하려는 장기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숭례문, 흥인지문이라는 이름은 조선인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지고 말 것이라는 지극히 장기적인 계획 말이다. 문(門)처럼 일본으로 가지고 갈 수 없는 귀한 것들에는 이름을 새로 지어 그 격을 떨어뜨렸고, 가져갈 수 있는 국보급 문화재들은 일본으로 들고 가벼렸다. 조선은 우리 문화재를 일본으로 들고가도 좋다고 말한 적이 없다. 일제의 관료들은 관료들대로, 일제의 개인들은 개인대로 밀반출했다. 귀하고 좋은 것은 알아가지고 그렇게 일본으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는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면 죄다 알고 있는 일이다.
일제가 조선 땅의 보물들을 탐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히데요시는 왜군들이 조선에서 빼앗아간 보물들을 쳐다보며 기뻐서 잠조차 이루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조선의 것이 다완(茶碗)이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다완에 미쳐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도공이란 도공들은 죄다 잡아갔다. 일본이 도자기를 수출하여 돈은 겁나게 벌어들인 것은 임란 때 잡아간 조선의 도공들 덕분이었다.
현재 일본의 국보 제 1호는 「광륭사목조미륵보살반가상」이다. 학자들은 이를 6세기 경의 신라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고있다. 반가상이 통나무로 제작한 것이고 적송이라는 점, 일본의 초기 불상들은 노송나무를 썼고 부위별로 따로 만들어져 붙였다는 점, 제작 기법이 신라와 같다는 점등을 근거로 들고있다.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 큰소리를 치지 못하는 입장인 것이다. 아, 진짜...
여허튼, 밥그릇은 고사하고 숟가락 젓가락까지 빼앗아 간 넘들이 아니던가...
광륭사목조미륵보살반가상 (인터넷 어디에선가 퍼옴)
여러가지 과학적 정황으로 보아, 광륭사목조미륵보살반가상, 은 우리의 것이 틀림이 없다. 남들 같으면 쪽팔려서라도 그런 짓을 대놓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확실히 다르다. 비록 자기네 것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떡하니 지네들 국보 제1호로 지정했다. 이 얼마나 낯 두꺼운 일이던가. 연구를 하면 할 수록 광륭사 반가사유상이 한반도에서 넘어간 것이라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던지 은근 슬쩍 어느 틈엔가 일본은 국보지정 제도를 없애버렸다. 임란때 도적질을 해간 것인지, 아니면 교류를 통해 정상적인 방식으로 넘어간 것인지 알 길은 없다. 어째거나 일본은 남의 것이라도 귀한 줄은 안다. 일본 처럼 남의 것을 뻬앗아다가 국보를 지정하지는 않더라도 우리 국민과 우리 국보들이 귀한 줄을 알아야한다.
알고 보면 지명이나 학교의 이름에 방향을 나타내는 남서울, 서서울, 동서울 그리고 강서고, 강동고등등 또한 일제의 잔재들이다. 조선은 지명이나 공식 건물에 방위를 붙여 이름 짖는 일이 거의 없었다. 고려의 개성에 남산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하고, 신라에도 남산이라는 산이 있었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현재 서울의 남산도 잘은 모르겠지만 일제식 이름은 아닌가 상당히 의심스럽다. 과거 서울의 남산은 지금의 이름이 아니었기에 하는 말이다. 여하튼 그 유래는 알 수는 없지만 애국가에도 남산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우리의 지명을 지들 멋대로 바꾸어 놓은 곳이 전국에 한 둘이 아니다. 대표적인 곳이 지금의 대전(大田)이다. 지금의 대전을 우리 조상들은 한밭이라 했고 太田(태전), 드물게는 泰田(태전)이라도 불렀다. 한밭은 太田(태전)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태(太)는 콩(豆)을 뜻하기도 한다. 콩의 색깔에 따라 황태, 백태, 서리태(검은 콩)라고 불렀다. 태전은 콩이 많이 나는 지역이기도 했던 것이고 太田은 큰 밭과 콩밭이라는 중의를 아우르는 지명이었던 것이다.
충청도의 어느 지명은 안면도(安眠島)이다. 그 옛날 일제 강점기 전에는 안민도(安民島)라 부르던 곳이다. 백성(民)을 편안히(安) 한다는 뜻을 가진 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 지명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아니면 정신을 빼놔야겠다 생각했던지 백성 민(民)을 ‘졸린다, 존다, 잠 잔다’ 는 뜻을 가진 면(眠)으로 바꾸었다. 한마디로 지들이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잠자코, 아무생각하지 말고 저항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하는 의미로 바꾸어 놓았다는 개인적인 의심이 든다.
이렇게 일제는 조선이 가진 전국의 이름들을 가만 놔둔 것이 별로 없다 (조선 백성들의 이름마저도 개명시킨 넘 들이다 진짜). 그런데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 있다. 대한민국은 1962년 국보 제 1호로 남대문을 지정했고, 그 이듬해 보물 제 1호로 동대문을 지정했다. 이는 전 국민이 죄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왜 남대문을 국보 제1호 로, 동대문을 보물 제 1호로 지정했는가 이다.
1962과 1963년 당시 대한민국의 관료들이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숭례문과 흥인지문에게 원래 이름도 돌려주지 않았다. 일제는 강점기 당시 숭례문을 보물 제 1호로 지정했다. 그런데 1962년 당시 관계자들은 추호의 반추도 없이 일제가 정해놓은 그대로를 전승,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각각 국보 제 1호, 보물 제1호로 등재했다.
일제는 1592년 조선 침략 당시 제 2선봉장 가토와 1선봉장 고니시가 입성했던 그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추억하며 숭례문을 보물 제 1호로 지정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데도 말이다. 행여 역사를 잘 아는 일본인이 너네 국보 제 1호 남대문은 가토가 입성했던 그 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고, 너네 보물 제 1호는 고니시가 입성 했던 바로 그 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들에게 우리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토록 일제에게 당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관료들이 국사를 돌본다 하다가는 결국 나라가 이모냥 이 꼴이 되고 말았다. 위정자들이 오로지 권력만을 탐하고 이익만을 쫒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과거의 행적으로 보건데 진정한 국민을 위한 정치는 없었다.
고려 말 비극적이고 처참했던 백성들의 고단함은 제쳐두고라도, 조선 500년 동안 어느 하루라도 백성들에게 편할 날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조선의 백성들은 늘 하대 받았다. 냥반들은 냥반이 아닌 자 누구하나 결코 존중해준 적이 없었다. 온갖 설음을 죄다 겪었고, 국가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은 없었으나 국난이 있을 때면 늘 몸으로 총칼을 막아냈다. 그런 백성들이 고맙지 않은가?
중국의 5경 중 서경의 하서(夏書) 3편에는 「五子之歌오자지가」라는 글이 있다. 「오자지가」 중 워낙 많은 분들이 인용을 하고 있는 구절이 하나가 있는데 “民可近 不可下 民惟邦本 本固邦寧民可近” (민가근 불가하 민유방본 본고방녕) 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 구절은 율곡이 성학집요에서도 사용한 글이고, 고문진보에도 등장하는 글이다. 맹자 역시 이 문구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듯하다. 일부의 학자들은 「오자지가」를 본디 「하서」에 있었던 글이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가히 본받을 만하기에 적어둔다. 오자지가에 관련한 전설을 지금 우리나라의 실정에 딱 맞는 경우가 아닌가 싶다.
그 내용인 즉 이러하다.
民可近 不可下 民惟邦本 本固邦寧”
(민가근 불가하 민유방본 본고방녕)
“백성들을 늘 가까이하되 절대로 낮추어 보면 아니 된다
백성이란 그야말로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한 법이다.“
입으로는 떠들면서도 수 백 년 동안 백성을 나라의 근본이라고 생각한 위정자들은 거의 없었다. 백성들은 그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지켜가는 수단일 뿐 이었다. 돌이켜보면 위정자들이 국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결과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숱한 왜구의 노략질을 겪어야 했다. 임란, 정유란, 병자ㆍ정묘호란 등으로 죽어난 것은 백성들 이었다. 그 불쌍한 백성들은 일제 강점기를 몸으로 겪어야 했다. 위정자들은 그러나 심지어는 나라까지 팔아먹기도 했다. 그들은 나라를 판 돈으로 잘 막고 잘 살았다. 힘없는 국민들 끝까지 지키려 노력했건만 말이다. 불구하고 국민들은 팔려버린 나라를 다시 되찾겠다며 나섰다. 상해 망명정부 이후, 100여년에 걸쳐 국민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죽어갔고 그것도 모자라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 전쟁을 또 치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새파란 젊은이들을 차가운 바다 한 가운데에서 잃어버렸다. 백성들은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치욕과 수모를 겪어 만들었다.
일제가 저질러 놓은 잘못들을 바로잡지 않았고 되레 동조하며 국정을 농단했으니 그 죄가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정치가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국민들이 나섰다. 수험을 앞둔 청춘들마저도 촛불을 들었다. 이제 그에 대한 답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